11월 1일 신미
유성(流星)이 하늘 복판에서 나와 곤방(坤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바리때[鉢]와 같고 꼬리의 길이는 너더댓 자 정도였으며, 빛깔은 붉었다.
11월 2일 임신
사헌부에서 【장령 신처수(申處洙)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아! 심유현(沈維賢)이 한없이 음흉하고 극도로 악한 짓을 한 죄는 위로 하늘에 사무쳤으니, 오늘날 신자(臣子)들이 그의 고기를 먹게 되지 못하고 그의 가죽을 깔고 자게 되지 못함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신명(神明)과 사람들의 분통을 풀게 될 길은 오직 파가 저택(破家瀦澤)하는 한 가지 일에 달려 있는데, 성상께서 생각에 자세하게 살피고 신중하게 하시려는 바가 있어 금오(金五)로 하여금 사문(査問)하여 품하도록 하시게 되었습니다마는, 지문(誌文)과 인본(印本)에 탄강(誕降)하신 곳을 이미 ‘우사(寓舍)’라고 했으니, 본가[本第]가 아닌 것이 명백하여 의심스러울 것이 없습니다만, 한두 비자(婢子)들이 간사하게 꾸며댄 말을 어찌 취신(取信)하여 응당 시행해야 할 법을 거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역적의 괴수 심유현에 대하여 시급히 파가 저택의 율(律)을 시행하여 왕법(王法)이 신장(伸長)되어지고 대중의 심정이 통쾌해지게 하시기 바랍니다. 소하(疏下)의 제적(諸賊)들이 마침내 거병(擧兵)하게 되었었기에, 박필몽(朴弼夢)은 이미 복법(伏法)하고 이명의(李明誼)도 또한 형장(刑杖)에 죽었으니, 남아 있는 사람은 단지 이진유(李眞儒) 등 3적(三賊)뿐입니다. 천지에 가득한 죄를 짓고도 오히려 귀양살이하고 있는 중이니, 왕법(王法)의 어긋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대개 그 상소에 부도(不道)한 말들은 진실로 김일경(金一鏡)이 지은 교문(敎文)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역적 김일경은 이미 요망한 박상검(朴尙儉)을 밖에서 원조하였고, 이진유는 또한 제적(諸賊)들의 와주(窩主)가 되었었습니다. 특히 관질(官秩)의 고하 때문에 비록 김일경이 두목이 되기는 했지만 만일 흉악한 논을 주장해 온 것으로 말한다면 진실로 이진유가 괴수이었으니, 삼척(三尺)의 법으로 율(律)한다면 어찌 유독 면하게 될 수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역적 박필현의 군사가 실패한 뒤에 박만정(朴萬鼎)을 잡아다가 바친 것은 함께 모의한 흔적을 감추려 한 짓이고, 이경지(李慶祉)가 잡혔을 적에 몰래 그의 말을 가져가버린 것은 진실로 친밀하게 지낸 심정에서 나온 것이니, 그가 평소에 흉악한 역적들과 결탁하여 난만(爛漫)하게 모의한 정상을 이에서 더욱 볼 수 있습니다. 그전의 죄와 새로운 죄안(罪案)이 결단코 섬에 귀양 보내고 말 수 없으니, 이진유 등 3적을 시급히 국법(國法)대로 정형(正刑)하시기 바랍니다.
이명언(李明彦)은 전하께 불신(不臣)의 마음이 있은 지가 대개 이미 오래입니다. 갑진년737) 겨울의 한 상소는 이미 극도로 흉악하고 참혹한 것이거니와, 역적 김일경과 거취(去就)를 같이한다고 한 말로 보면, 서로 얽히어 음모를 꾸미며 마음속으로 통해진 정상이 훤히 나타나 가리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 먼 변방에 귀양갔다가 풀려나면 곧바로 고토(故土)로 돌아오는 것이 인간의 상정(常情)인 것인데, 지체하고 돌아오지 않았으니 이미 의심스러운 단서가 많았고, 오래 폐치(廢置)되었다가 기용(起用)되면 자신을 책망하는 한 마디 말을 하게 됨은 사리에 당연한 일인 것인데, 상례인 상소를 진달하지 않았으니 현저하게 망측(罔測)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지난번 연신(筵臣)이 신하의 절조가 없는 사람이라고 논박하게 된 것입니다. 오직 이 두 가지 일에 있어서 그의 마음 자취를 따져 보건대, 비록 1만 토막이 되게 베더라도 옳을 것입니다. 하물며 그 부자의 이름이 제적(諸賊)들의 공초(供招)에 여러 차례 나왔고, 호복(胡服)차림으로 거사(擧事)한다는 말도 본시 창졸간에 만들어낸 말이 아니었으며, 옷 솔기에 서찰(書札)을 감추는 꾀도 진실로 다급할 때에 당하여 모면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의 부자가 과연 난만한 모의에 함께 참여한 일이 없었다면 역적들의 공초에 끌어대기를 어찌 그리 낭자(狼藉)하게 하였겠으며, 조세추(曹世樞)가 죽음에 이르러서도 말을 변경하지 않았던 것은 더욱 어찌 정절(情節)을 절대로 의심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초에 잡아다가 국문(鞫問)함이 법에 있어 당연한 일이었는데 미리 앞질러 참작하여 처결하였으니, 크게 옥사(獄事)의 체통을 잃었습니다. 이명언을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다시 잡아다가 준엄하게 국문하여 통쾌하게 왕법(王法)대로 정형(正刑)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정사효(鄭思孝)는 본시 흉당(凶黨)의 여얼(餘孼)로서 박사관(朴師寬)과는 숙질간의 친족이므로 데려다가 영(營) 밑에 두었고, 이경지도 심복을 삼아 막하(幕下)의 일을 위임했었으니, 평소에 난만하게 반역 모의를 한 정상은 나숭대(羅崇大)의 공초와 정도형(鄭道亨)이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그가 일찍이 동번(東藩)738) 을 안찰(按察)할 때에 3백 금(金)의 중화(重貨)를 까닭도 없이 박필현(朴弼顯)에게 내주었었고 보면, 피차(彼此)의 정적(情迹)이 서로 얽히었음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된 것입니다. 이여(李曥)의 이른바 ‘역적 박필현이 정사효와 함께 모의하여 거병(擧兵)했다.’고 한 것이 어찌 참으로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역적 박필현이 거느렸던 군사가 약간의 속오(束伍)에 지나지 않았었는데도 곧장 전주(全州)에 이르러 주장(主將)을 만나 보기를 청하였으니, 만일에 그전부터 호응하기로 한 약속이 없었다면, 어찌 감히 사소한 협종(脅從)들만으로 돌연히 성의 수비가 이미 엄중해진 후에 앞질러 나아가, 조용히 말을 주고받으며 곧장 성문을 열어 주기를 청할 수 있었겠습니까? 필마(匹馬) 차림으로 도망할 때에 당하여 마침내 뒤를 밟아가 잡지 못한 것은 현저하게 어두운 데에서 고의로 놓아준 저의가 있는 것이고, 그 모자(母子)를 구금하여 그대로 해읍(該邑)에 둔 것도 또한 제적(諸賊)들이 이미 실패한 다음에 있은 일이니, 바로 이진유가 박만정을 잡아 바치고 김몽좌(金夢佐)가 박필몽(朴弼夢)을 추포(追捕)한 것과 똑같은 심산(心算)인 것입니다. 지난해에 국옥(鞫獄)을 안문(按問)할 때에 앞질러 미리 참작하여 처결한 것은 이미 크게 실형(失刑)한 것이기에 사람들이 분개하고 답답하게 여기는 마음이 지금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충군(充軍)한 죄인 정사효를 잡아다가 엄형으로 국문하여 국법대로 치죄(治罪)하기 바랍니다.
아! 성고(聖考)의 《보감(寶鑑)》은 이것이 어떠한 문자(文字)이며 거대한 사책(史策)의 편수(編修)는 또 어떠한 책임이온데 이번에 윤순(尹淳)같은 사람에게 맡기셨으니, 신은 그윽이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아! 우리 성고께서 재위(在位)하신 지 50년 동안에 시조(施措)에 나타나고 조칙(詔勅)에 발로(發露)된 것이 어느 것이나 큰 공적과 훌륭한 사업 아닌 것이 없지만, 천지(天地)에 내세워 해나 별처럼 빛이 나는 것은 더욱 존주(尊周)의 대의(大義)와 사문(斯文)의 처분보다 큰 것이 없었으니, 만일에 거장(巨匠)이 아니라면 편차(編次)를 합당하게 할 수 없습니다. 저 윤순이 비록 자신을 헤아려 보지 않고서 망령되이 자기 자신이 담당했습니다마는, 그가 일찍이 오랑캐에게 글씨를 팔아먹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타기(唾棄)하며 욕하였습니다. 어찌 차마 비풍(匪風)·하천(下泉)739) 에 관한 글들을 도리어 만전(蠻牋)에다가 글씨나 쓰는 손에 더렵혀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팔을 이미 끊어서 내버릴 수 없고 보면 이런 편수(編修)를 결단코 그대로 맡길 수 없습니다. 비록 고사(故事)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삼전도(三田渡)의 비문(碑文)을 쓴 손으로는 감히 다시 사대부(士大夫) 가문(家門)의 묘문(墓文)을 쓰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당당하신 성고(聖考)의 유편(遺編)을 이러한 사람에게 맡긴다면, 국가의 체면을 손상하게 되고 듣기에 놀랍게 됨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사문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성고의 교훈이 찬란(燦爛)하게 빛나고 있어 진실로 백세(百世)토록 없어지지 않는 전장(典章)이 될 것인데, 이번에 《보감》속에 이 글을 넣지 않는다면 어떻게 후세에서 보게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이 일은 그 무리들이 일찍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만(汗漫)하다고 핑계하며 말을 교묘하게 꾸며 품지(稟旨)하여 마침내 삭제하게 되고야 말았으니, 그들의 참람하고 망령된 죄와 교묘하고도 치밀한 태도는 차마 바로 볼 수 없습니다. 우참찬 윤순을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도로 내어 주라고 명하고, 인견(引見)하여 분부를 내리기를,
"너는 ‘그전의 풍습을 세척(洗滌)해 버리라.’고 한 분부를 듣지 못했느냐?"
하매, 신처수가 아뢰기를,
"신이 논한 말은 곧 사문에 관한 것이고 당론(黨論)이 아닙니다."
하였다. 신처수를 갑산부(甲山府)에 귀양 보내도록 명하자, 이에 이현록(李顯祿)·조상경(趙尙絅) 등이 서로 이어 상소하여 신구(伸救)하였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장령 한사득(韓師得)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번날 구일제(九日製)의 시권(試券)을 과차(科次)740) 하여 입계(入啓)했을 적에 성상께서 몇 건의 풀로 봉한 시권을 친히 뜯고서 이미 어람(御覽)을 거치셨으니, 이는 곧 방방(放榜)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 도로 봉하여 작은 ‘계자(啓字)’를 찍고서 제학(提學)을 불러들여 ‘시권 중에 현재의 병폐에 잘 맞는 어구(語句)가 있었으니 차서를 바꾸어 장원으로 뽑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이는 진실로 성상께서 시절을 민망하게 여기고 풍속을 병폐로 여기시는 훌륭한 뜻이기는 합니다마는, 그윽이 생각하건대, 과시(科試)에 관한 법은 지극히 엄중해야 합니다. 만일에 어구 내용이 우연히도 성상의 뜻에 맞는 것 때문에 경솔하게 차서를 바꾸게 된다면, 과법(科法)을 엄중하게 하고 시선(試選)을 귀중하게 여겨야 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 같이 급제(及第)를 내리도록 윤허하시는 것은 특은(特恩)에 관한 것이므로 진실로 대각(臺閣)에서 앙청(仰請)할 수 있는 바가 아니지만, 다 같이 급제를 내리지 않아야 과거의 사체에 손상되지 않고 처분도 합당하게 될 것이니, 삼가 재처(裁處)하시기 바랍니다. 올해의 식년(式年)741) 복시(覆試)는 감시관(監試官)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 때문에 그 이튿날에야 개장(開場)을 했으니, 이는 진실로 그전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전 장령 이저(李著)와 전 지평 이희(李憙)는 오직 패초(牌招)를 어기는 것을 능사(能事)로 여기는데, 뒷날의 폐단에 관계가 있으니, 징계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삭파(削罷)하도록 명하시기 바랍니다. 제주(濟州)는 딴 고을에 비교할 수 없는데, 요사이 무변(武弁)들이 번번이 싫어하여 기피하고 있습니다. 원백규(元百揆)가 처음으로 못된 예를 만들어 놓자 홍원익(洪元益)이 그대로 본받게 되었고, 이수신(李守身)에 이르러서는 극도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원백규와 홍원익은 특별히 섬으로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고, 이수신에 있어서는 그 땅에 그대로 정배(定配)하는 것을 단정코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특별히 장원으로 뽑도록 명하였음은 우연한 뜻으로 한 것이 아니다. 다 같이 급제를 내리거나 다 같이 급제를 내리지 않는 일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방(榜)에다 다 같이 급제를 내리는 일도 또한 전례가 있었다. 이는 모두 위에서 특별히 처분하게 되는 것이고 아래 있는 사람들이 예를 삼아 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저와 이희는 모두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않을 것이고, 이수신에 있어서는 이미 처분을 내렸으니 다시 논할 것이 없으며, 원백규와 홍원익은 모두 삭직(削職)하라."
하였다.
11월 3일 계유
이현모(李顯謨)를 부교리(副校理)로, 윤심형(尹心衡)을 응교(應敎)로, 이광부(李光溥)를 장령(掌令)으로, 이기익(李箕翊)을 우윤(右尹)으로, 김계환(金啓煥)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11월 4일 갑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민진원(閔鎭遠)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듣건대, 마을 이름이 승모(勝母)742) 이자 증삼(曾參)743) 이 오히려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신자(臣子)가 된 사람으로서 남들이 임금을 무함했다는 죄를 일찍이 그 몸에 가했었는데도, 한갓 군부(君父)가 소석(昭釋)해 준 것만 믿고서 이에 감히 갓끈을 드리우고 인수(引綬)를 차고서 태연히 내정(內庭)과 외반(外班)에 드나드는 것은 진실로 마음에도 차마 할 수가 없고 의리에도 감히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신은 듣건대, ‘함께 일을 해 온 사람과는 사생(死生)과 영욕(榮辱)에 있어 의리에 혼자만 다르게 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초에 선왕(先王)의 성질(聖疾)을 밝혀낸 다음에야 선왕의 성덕(聖德)을 드러내게 할 수 있고, 뭇 간신들이 기만하고 은폐하는 것도 나타내게 된다는 것을 신이 수차(袖箚)로 먼저 발론했었고, 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신(臣) 정호(鄭澔)가 신의 뒤를 이어 또 차자를 올려 청했기에, 신이 또한 연석(筵席)에서 그의 말을 채용하자고 극력 청했었습니다. 그 뒤에 신과 정호가 이 때문에 함께 죄를 얻게 되었고 죄명(罪名)도 망극(罔極)하게 되었었는데, 선후(先後)로 말하더라도 신이 먼저이고 경중(輕重)으로 논하더라도 신이 진실로 주창했었는데도 정호는 멀리 찬적(竄謫)되고 신은 편근(便近)한 곳에 정배(定配)되었다가 신은 서용(敍用)되었지만 정호는 아직 견복(甄復)되지 않았으니, 조가(朝家)의 형정(刑政)이 마땅히 이처럼 전도(顚倒)되지 않아야 할 듯 싶습니다. 정호는 아주 늙은 잔약한 몸으로 헐떡이며 숨이 다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단단(斷斷)한 충성을 아직 통촉(洞燭)받지 못하고 있는데, 신은 수죄(首罪)의 사람으로서 의기 양양(意氣揚揚)하게 먼저 들어와 있고 그를 돌보지 않는다면, ‘염치(廉恥)’라는 두 글자가 장차 신의 몸으로부터 땅을 쓸어버린 듯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주자(朱子)의 말이 ‘사대부(士大夫)의 출처(出處)와 거취(去就)는 풍속의 성쇠(盛衰)에 관계가 있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무릇 사대부에 있어서도 오히려 이러한데 대신의 직책에 있는 사람이 먼저 염치를 잃어버린다면, 성조(聖朝)의 예양(禮讓)을 밝히는 교화(敎化)에 손상을 가져옴이 또한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니, 상소의 말단에 인혐(引嫌)한 말은 너무 지나치게 됨을 면하지 못하였음을 들어 비답하였다. 이에 앞서 갑진년744) 에 정호와 민진원이 함께 정승이 되었을 때에 임금에 대한 무함을 가리고 억울하게 무함받은 것을 신설(伸雪)하며 난적(亂賊)들을 토죄(討罪)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임무로 삼았다가 정미년745) 에 이르러 두 사람이 함께 죄를 얻었었는데, 그 뒤에 민진원은 먼저 서용되고 정호는 아직도 죄적(罪籍)에 있었기 때문에 민진원이 이를 들어 사직한 것이다.
박이문(朴履文)을 정언(正言)으로, 박필기(朴弼琦)를 사간(司諫)으로, 심태현(沈泰賢)을 부교리(副校理)로, 허옥(許沃)을 헌납(獻納)으로, 정익하(鄭益河)를 정언으로, 김상익(金尙翼)을 지평(持平)으로, 김진상(金鎭尙)을 응교(應敎)로 삼았다.
《감란록(勘亂錄)》 찬집청(撰集廳)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을 서계(書啓)하도록 명하여, 당상인 감사(監司) 송인명(宋寅明)과 목사(牧使) 박사수(朴師洙)에게는 각각 반숙마(半熟馬) 1필(匹)씩을 내리고, 어제 서문 서사관(御製序文書寫官)인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에게는 호피(虎皮) 1령(領)을 내렸으며, 낭청인 부사과(副司果) 유엄(柳儼)·교리 김상성(金尙星)·응교 이종성(李宗城)에게는 각각 아마(兒馬) 1필씩을 내리고, 대사성 서종옥(徐宗玉)·보덕 박필기(朴弼琦)·전 승지 신치운(申致雲)·부사과 심성진(沈星鎭)에게는 각각 현궁(弦弓) 1장(張)씩을 내리도록 하였다.
우의정 이집(李㙫)이 신처수(申處洙)가 논계(論啓)한 말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보감(寶鑑)》 내용에 예설(禮說) 및 사문(斯文)에 관한 일과 별편(別編)에 관한 일을 하문(下問)하시기 때문에 진백(陳白)한 바 있었는데, 신의 의견은 윤순(尹淳)이 품정(稟定)한 것과 진실로 이동(異同)이 없었습니다. 지금 사람들의 말이 준엄하게 나오는 때를 당하여 신이 어찌 감히 논열(論列)하는 속에 이름이 빠진 것 때문에 태연하게 상신(相臣)의 자리에 그대로 쪼그리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려 개석(開釋)해 주었다.
11월 5일 을해
이덕수(李德壽)를 대사성(大司成)으로, 이병상(李秉常)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정수기(鄭壽期)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조상명(趙尙命)을 정언(正言)으로, 이진망(李眞望)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신광하(申光夏)를 좌윤(左尹)으로, 김재로(金在魯)를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이진수(李眞洙)를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삼았다.
대신과 비국(備局)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북도(北道)의 안집 어사(安集御史) 이종성(李宗城)도 함께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이종성이 아뢰기를,
"북도(北道)의 재해를 입은 일곱 고을은 환곡(還穀)을 받지 못한 17만 3천 석(石)인데 신이 빨리 받도록 신칙(申飭)하자, 대중의 의논이 모두 받을 수 있는 것은 3,4만 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17만 석의 환곡을 받아 먹은 사람들이 3,4만 석의 곡식으로써 나누어 먹고 어찌 살아가게 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혹시라도 쌀 3만 석을 구득하게 된다면 간략하게나마 나누어 줄 수 있겠다고 여겨졌습니다. 지금 바야흐로 대신이 입시했으니, 하문하시어 처결하시면 좋겠습니다."
하니, 우의정(右議政) 이집(李㙫)이 아뢰기를,
"어사의 아뢴 바가 이와 같으니, 어떻게 그 말을 따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여러 재신(宰臣)에게 두루 순문하였는데 모두 이의(異議)가 없자, 영남(嶺南)에 있는 곡식 2만 석을 북도에 옮겨 보내도록 명하였다. 예조 판서 박사익(朴師益)이 아뢰기를,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입묘(入廟)하는 일을 본조(本曹)에서 사례를 상고하여 품처(稟處)하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전례를 상고해 보건대,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입묘 때에 예관(禮官)이 순회 세자(順懷世子)의 전례를 모방하여 따로 사우(祠宇)를 세우기를 청하자, 대신들과 의논하도록 명하여 드디어 순회 세자의 사당에 부묘(祔廟)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 뒤에 순회 세자는 조천(祧遷)하게 되었기 때문에, 인조(仁祖)께서 성의(聖意)가 이에 있으신 것이다."
하고, 제신(諸臣)들에게 각각 소견을 진달하라고 명하자, 이집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따로 사당을 세우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깁니다. 이귀휴(李龜休)가 상소한 말은 잘못된 예(禮)라 할 수 있습니다."
하고, 제신들은 다른 의논이 없자, 임금이 이르기를,
"창의궁(彰義宮)은 곧 사저(私邸)로서 동궁(東宮)에 속한 것이니, 만일 지금 그 궁에다 사우를 세운다면 어찌 사세가 둘 다 편리하지 않겠는가?"
하매, 이집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내리신 분부가 진실로 정례(情禮)에 합당합니다."
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차자를 올려 신처수(申處洙)를 신구(伸救)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11월 6일 병자
좌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차자를 올려 사직(辭職)을 원하니, 임금이 손수 비답을 써서 내려 주고 면부(勉副)746) 한다고 유시(諭示)하였다.
이세근(李世瑾)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만유(李萬維)를 집의(執義)로, 조명익(趙明翼)을 지평(持平)으로, 이병상(李秉常)을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삼았다.
11월 8일 무인
심택현(沈宅賢)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태좌(李台佐)를 판충추부사(判中樞府事)로 삼았다.
11월 9일 기묘
반궁(泮宮)에 황감(黃柑)을 나누어 주고 시사(試士)하도록 명하였다. 장의(掌議) 김경희(金敬熙) 등이 이르기를,
"장시관(掌試官) 제학(提學) 채팽윤(蔡彭胤)은 곧 선정신(先正臣)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출향(黜享)하게 될 때 그 상소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미 사문(斯文)에 죄를 얻었으니, 결코 태연히 명륜당(明倫堂)에 앉아서 시험을 주관할 수 없습니다. 내린 황감은 지영(祗迎)하지만 응제(應製)에 있어서는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므로, 승지가 이대로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곧 명제(命製)인데도 응제(應製)하지 않으니 합당한 짓인지 알지 못하겠고, 명을 맡은 신하를 면척(面斥)한 것도 또한 미안스러운 데에 관련된다."
하고, 제생(諸生)들을 효유(曉諭)하여 부거(赴擧)하도록 하였으나, 제생들이 고지하고 명에 따르지 않으니, 임금이 부득이하여 서명균(徐命均)으로 홍문관 제학(弘文官提學)을 삼았다. 시사(試士)가 끝나자, 임금이 이르기를,
"유생들이 이미 선정(先正)은 존숭할 줄 알면서도 군부(君父)를 공경하는 도리는 알지 못하니, 되겠느냐? 책벌(責罰)이 없을 수 없으니 수창(首唱)한 재임(齋任)을 1년 동안 정거(停擧)시키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이의현(李宜顯)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리석은 신이 자신을 헤아려 보지 않고 선조 실록(先朝實錄)을 편수(編修)하는 소임을 담당하였다가 마침내 몸이 망측(罔測)한 처지에 빠졌습니다. 연석(筵席)에서 아뢰는 말의 내용에 ‘여탈(與奪)이 공정하지 못한다.’고 배척한 말은 지금도 이를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서늘해지고 기가 떨리기만 합니다. 당시에 그 당국(當局)의 제신(諸臣)들은 대개 정례(定例)에 따라 편차해 간 것에 지나지 않았기에 본시 공사(公私)를 언급할 만한 것이 없었으나, 신(臣)은 문병(文柄)747) 의 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재단(裁斷)을 전장(專掌)하게 되었었으니, 그가 논하여 배척한 말은 단지 신(臣) 한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나라치고서 중히 여기는 바가 사책(史冊)보다 더한 것이 없는 법이니, 선조(先朝)의 실록(實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겠습니까? 감히 사사 의논을 용납하는 짓을 했다면 비록 베는 율(律)을 받게 되더라도 또한 만에 하나의 색책(塞責)하지도 못할 것인데, 시종(始終) 관대하게 용서해 주심을 받아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에 다시 죄를 무릅쓰고 은총(恩寵)만 생각하여 조정의 반열(班列)에 나아간다면, 이는 진실로 천성(天性)이 다 없어진 소인일 것이니, 신이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11월 10일 경진
김성발(金聖發)을 장령(掌令)으로, 홍일보(洪一輔)를 지평(持平)으로, 윤혜교(尹惠敎)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윤심형(尹心衡)을 부응교(副應敎)로, 윤광운(尹光運)을 부교리(副校理)로, 조명익(趙明翼)을 수찬(修撰)으로, 이종백(李宗白)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전 참의(參議) 오광운(吳光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고조(高祖) 고 판중추부사 신(臣) 오준(吳竣)이 참혹하게도 멀리 귀양간 죄인 신처수(申處洙)의 추악한 모욕을 받았기에 신이 진실로 간장이 무너지고 뼈가 아프므로 진폭(陳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 정축년748) 의 사태가 임금이 치욕을 받아 신하는 죽어야 할 판국인데, 죽음도 또한 피할 수 없거늘 어찌 치욕을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번에 신처수가 삼전도(三田渡)의 비문(碑文)을 쓴 것을 가지고 선신(先臣)을 후욕(詬辱)하였습니다. 진실로 그의 말대로 한다면 우리 나라의 신자(臣子)된 사람들이 오랑캐의 마당에 사신(使臣) 가라고 명해도 가려고 하지 않고, 북쪽의 자문(咨文)에 수응(酬應)하는 글을 짓도록 명해도 지으려고 하지 않은 다음에야 지조를 채우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처수의 상소 내용에 이른바 ‘정축년 이후에는 다시 사대부(士大夫) 가문의 묘문(墓文)을 쓰지 않았다.’는 말은 그의 의도(意圖)가 터무니없이 망령되고 말씨가 더없이 패리(悖理)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선신(先臣)이 80이 되도록 수(壽)하면서 진신(搢紳)들 가문의 비문(碑文)을 더러는 짓기도 하고 더러는 쓰기도 한 것이 만년(晩年)에 더욱 많았고, 국가의 애경(哀慶)의 예식 때에 있어서도 전후에 서사(書寫)하는 일은 선신의 손에서 나온 바가 많았습니다. 기축년749) 에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 예척(禮陟)750) 하셨을 때에는 유궁(幽宮)의 지문(誌文)을 쓰고, 기해년751) 에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예칙하셨을 때에는 우제 신주(虞祭神主)를 썼으며, 그 이듬해 4월에는 연제 신주(練祭神主)를 쓰고, 현종(顯宗) 경자년 4월에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을 존숭(尊崇)할 때에는 옥책문(玉冊文)을 썼으며 또 중궁전(中宮殿)의 옥책문도 썼고, 신축년752) 7월에 효종(孝宗)의 부묘례(祔廟禮) 때에는 옥책문을 썼으며, 현종조(顯宗朝) 병오년753) 에 숙종(肅宗)을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할 때에 죽책문(竹冊文)을 쓰고, 또 인조조(仁祖朝) 무인년754) 12월에 장렬 왕후(莊烈王后) 가례(嘉禮) 때에는 혼서(婚書)를 썼었습니다. 이번에 신처수가 신자(臣子)로서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조금도 고기(顧忌)하지 않고 입에 나오는 대로 마구 내뱉음이 이에 이르렀으니, 또한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삼가 듣건대, 정축년 이후에 비문(碑文)을 쓴 것을 물어보아 아뢰도록 하라는 명이 계셨으니, 신은 감히 성상께서 뜻이 계신 데를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그윽이 스스로 이번에 사문(査問)하여 아뢰는 일로 말미암아 선신에 대한 무함이 장차 분명히 밝혀지게 될 것을 다행으로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해조(該曹)에서 상고하여 입계(入啓)할 적에 당하여는 서사(書寫)한 제인(諸人)들을 열서(列書)하면서 유독 선신이 쓴 지문(誌文)과 옥책에 있어서는 삭제하고 기재하지 않았으니, 신이 진실로 놀라워 어리둥절해지며 그 까닭을 알 수 없었습니다. 기축년·기해년·경자년·신축년·병오년에 서사(書寫)한 제인(諸人)들이 《승정원일기》에 분명하게 기재되어 있으므로 안사(按査)하여 상고해 볼 수 있는데,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신처수의 해괴하고 패리(悖理)한 말은 이미 통촉(洞燭)했다. 너의 선조(先祖)에게 무슨 누가 될 것이 있겠느냐?"
하였다.
11월 11일 신사
황감제(黃柑製)에서 수석을 한 진사(進士) 이동환(李東煥)을 전시(殿試)755) 에 직부(直赴)하게 하도록 명하였다.
사간원에서 【정언 정익하(鄭益河)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다. 권익관(權益寬)에 관한 계사(啓辭)에 있어서는 고쳐 조어(措語)하기를,
"권익관은 본래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지친(至親)이고 역적 박필현(朴弼顯)의 매서(妹婿)입니다. 여기에다 박창제(朴昌梯)와 황부(黃簿)가 악을 도왔고 겸하여 남태징(南泰徵) 및 황진기(黃鎭紀)와 서로 친근했으니, 평소에 얼기설기한 정적(情跡)으로 난만(爛漫)하게 모의했을 것은 안험(按驗)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전후에 올린 상소가 단안(斷案)이 되기에 족한데, 이른바 ‘박창제가 점마(點馬)를 한 것도 신(臣)이 관여해서 알고 있는 바이고, 흉악한 황부가 배를 만든 것도 또한 신이 관여하여 들은 일이며, 역적 남태징에게 말[馬]을 돌려준 것도 신이 스스로 한 일이고, 황진기의 관문(關文)도 과연 신이 만들어 준 것이다.’ 한 것이 그가 자복(自服)한 말이었고 보면 이제는 의심스러울 것이 없으니, 결단코 섬에 귀양 보내고 말 수 없습니다. 권익관을 엄하게 국문(鞫問)하여 통쾌하게 왕법(王法)대로 정죄하시기 바랍니다. 지난해의 이진유(李眞儒)에 관한 계사(啓辭)는 진실로 대중(大衆)의 공론이었는데 헌신(獻臣)이 자기 멋대로 율(律)을 감하였고, 겨우 두어 달이 지나서는 그만 갑자기 정계(停啓)하였으니, 그때에 정계한 대관(臺官)의 관직을 삭탈(削奪)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말단의 일만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11월 12일 임오
《감란록(勘亂錄)》을 친공신(親功臣)756) 과 찬집청(撰集廳) 당상(堂上)들에게 반사(頒賜)하였다.
갑산부(甲山府)에 멀리 귀양 보낸 죄인 신처수(申處洙)를 천극(栫棘)하도록 명하였다. 오광운(吳光運)의 상소에 따라 예조로 하여금 대문자(大文字)를 서사(書寫)한 사람들을 상고해 내도록 한 다음에 이런 명이 있게 되었다.
성균관(成均館)에서 아뢰기를,
"거재(居齋)하는 유생(儒生)들이 재임(齋任)을 정거(停擧)하도록 명하신 것 때문에 권당(捲堂)757) 했습니다."
하니, 조사(措辭)하여 비답을 내리며 들어오게 권면하도록 명했는데, 여러 차례 명하여도 재생(諸生)들이 들어오지 않다가, 특별히 정거를 해제하도록 명한 다음에야 비로소 들어왔다.
사간원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1월 13일 계미
햇무리가 졌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오명신(吳命新)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박필주(朴弼周)를 집의(執義)로, 송필항(宋必恒)을 사간(司諫)으로, 남태경(南泰慶)을 장령(掌令)으로, 조상명(趙尙命)을 지평(持平)으로, 조명익(趙明翼)을 헌납(獻納)으로, 유언통(兪彦通)을 정언(正言)으로, 정우량(鄭羽良)을 부교리(副校理)로, 황재(黃梓)를 응교(應敎)로 삼았다.
11월 14일 갑신
어영청(御營廳)의 동(銅) 채굴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분부를 내리기를,
"우리 나라의 은전(銀錢)은 진실로 폐단이 되고 있으니, 내가 이에 있어 심상하게 개탄해 왔었다. 지금 어영청 낭청(郞廳)이 채집(採集)해 온 것을 보건대, 참으로 구리[銅]이기는 하다마는, 한번 이를 캐내기 시작하면 비록 군기(軍器)에는 편리하게 되어도 민생들에게는 폐단이 크게 될 것이다. 옛날 선조조(宣祖朝) 때에 은(銀)을 채굴하기를 청하게 되자 ‘오산 제일봉에 말을 세우겠다.[立馬吳山第一峰]’758) 란 구절을 들어 분부를 내리셨으니, 성조(聖朝)께서 생각이 심상한 사람들보다 만만배나 뛰어나셨던 것이다. 지난번에 《보감(寶鑑)》을 보고서 분부를 내리려고 하다가, 낭청이 이미 내려갔었기 때문에 올라 오기를 기다려 분부를 내리려고 했던 것이다. 이 뒤에는 특별히 정지하도록 명하여 내가 민폐를 고려하고 있는 뜻을 보여야 한다."
하였다. 【이때 어영청에서 바야흐로 안변(安邊)에서 동을 채굴했었다.】
【태백산사고본】 19책 24권 47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177면
【분류】광업-채광(採鑛)
[註 758] ‘오산 제일봉에 말을 세우겠다.[立馬吳山第一峰]’ : 금(金)나라의 군주 양(亮)이 송 고종(高宗) 때 임안(臨安)의 호산(湖山)에 ‘백만 대군을 몰아 서호 위로 옮겨서 오산(吳山)의 제일 높은 봉우리에 말을 세우겠다[移兵百萬西湖上立馬吳山第一峰]’는 시(詩)를 쓰고 중원(中原)을 병탄(倂呑)하려는 뜻을 표시한 고사(故事).
11월 15일 을유
춘방(春坊)759) 과 계방(桂坊)760) 의 관원을 감하(減下)하도록 명하였다. 분부하기를,
"어제 춘방 요속(僚屬)들의 별생기(別省記)761) 를 보았다. 일주년(一周年) 동안 생각을 너그럽게 하려고 억제해 오다가 단지 하루가 남아 있다. 내일이 지난 다음에는 품처(稟處)하지 말고 바로 감하하라."
하였다.
11월 16일 병술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소상(小祥) 제사를 행하였다. 임금이 혼궁(魂宮)에 임하여 최복(衰服)을 갖추고 곡림(哭臨)한 다음에 최복을 벗고서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곡림하였다. 대전(大殿)이 제복(除服)한 다음에 승정원·옥당(玉堂), 조정의 2품 이상과 육조(六曹)·대사간이 문안하였다.
11월 17일 정해
수묘관(守墓官) 장계군(長溪君) 병(棅)은 가자(加資)하고, 혼궁(魂宮)의 종실(宗室) 이하에게는 차등이 있게 시상(施賞)하도록 명하였다.
사간원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1월 17일 정해
시임(時任)·원임(原任)의 대신(大臣)들을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판중추부사 이의현(李宜顯)과 이관명(李觀命)이 소상(小祥) 제사에 맞추어 도성(都城)에 들어왔었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이관명에게 탑전(榻前)으로 다가오도록 명하여 이르기를,
"부형(父兄)이나 자제(子弟)가 국가에서 죄를 받게 되는 수가 옛적부터 어찌 한정이 있었겠는가마는, 이 때문에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음을 들어보지 못했었다. 이사명(李師命)을 폐하여 복관(復官)되지 않았을 때부터 이이명(李頤命)이 과연 벼슬하지 않았었는가? 선조(先朝)께서는 강의(剛毅)한 덕이 있으셨기 때문에 신하들이 감히 사심(私心)을 말하지 못했었는데, 경(卿)들은 나를 한(漢)나라나 당(唐)나라 때의 중등 임금으로 대접하고 있으니 야박하다 하겠다. 대순(大舜)이 곤(鯀)을 죄주고서 우(禹)에게 홍수를 다스리도록 명하였을 적에 우가 어찌 그의 아버지가 죄를 입은 것 때문에 순의 조정에 서지 않았었는가? 내가 당초에 임인년762) 의 일이 지나치게 참독(慘毒)하게 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을사년763) 의 처분이 있게 된 것인데, 그 속에는 또한 본시 잘못된 것이 있었기 때문에 또 정미년764) 의 처분이 있게 된 것이니, 연명하여 올린 차자를 반역한 것이라고 함은 잘못인 것이다. 만일 그때의 일을 정당한 도리대로 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듣건대, 고(故) 상신(相臣) 조태구(朝泰耉)가 〈선인문(宣仁門)으로〉 들어올 적에 어찌 그리 무서워서 동요되며 겁을 내게 되었던 것인가? 처사가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는 일이다. 본심에 딴마음이 없음을 알면서도 반역한 것으로 돌림은 진실로 그른 일이다."
하매, 이관명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곤(鯀)의 일을 들어 분부하셨습니다마는, 극(殛)이란 죽임을 이른 것이 아닙니다. 또 우(禹)는 천하(天下)를 자신이 담당하게 되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허물을 덮으려고 그런 공적을 이루게 된 것이지마는, 신(臣)과 같은 무리들이야 어찌 바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신은 타고난 성미가 고집스럽고 딱 막히어 있어 비록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 하더라도 국가일에 도움됨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앞으로 다가오도록 명하고 이어 손을 잡으며 이르기를,
"시험삼아 탁자 위에 먼지가 쌓인 것을 보라. 소대(召對)도 또한 오히려 하지 않고 있는데, 오늘은 무슨 마음으로 경(卿)들과 대화(對話)하게 되었겠는가? 조정의 꼴이 조금 안정되어야 내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으니, 오래 머물러 있으며 내 마음을 위로해 주겠다고 흔쾌하게 말을 하라."
하자, 이관명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분부하시므로 마땅히 아직 머물러 있으며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미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것을 허락했거니와, 또 경에게 한 가지 일을 번거롭게 할 것이 있는데, 영중추부사 이광좌를 흉악한 사람으로 알지 않으면 좋겠다."
하매, 이관명이 아뢰기를,
"마음은 알고 있으니, 숨겨 두고 말하지 않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의현이 사국(史局)의 일을 들어 인책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세실(世室)에 관한 한 가지 일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데, 위에서 해 가야 하는 것인가? 아래에서 건청(建請)해야 하는 것인가?"
하매, 이의현이 주대(奏對)하기를,
"세실은 조천(祧遷)하게 될 때에 진실로 마땅히 의논해서 정해야 하고, 만일 현저한 공덕(功德)이 있으면 혹은 아래에서 건백(建白)하거나 혹은 위에서 미리 정해 놓으시더라도 안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후세에는 자연히 공론이 있게 되는 것이지만 무릇 사람들은 모두 그 조상을 뒤좇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곧 지극한 인정인 것이다. 이 일을 비록 더러 앞질러 할 수도 있지마는, 전례가 없지 않았는지 자세하게 문적(文籍)을 상고하여 품달(稟達)하라."
하였다.
11월 18일 무자
사간원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1월 19일 기축
이종성(李宗城)을 부응교(副應敎)로, 유엄(柳儼)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문과(文科)와 무과(武科)의 전시(殿試)를 보여 정동혁(鄭東爀) 등 41인을 뽑았다.
사간원에서 【정언 정익하(鄭益河)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앞서 섬에 귀양 보낸 죄인 윤지(尹志)는 곧 역적 윤취상(尹就商)의 아들로서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당입니다. 서두창(徐斗昌)과 결탁하여 비밀한 데에서 음모(陰謀)를 해 온 죄상은 왕법(王法)으로 논한다면 베어 죽이는 것도 또한 가볍게 되는 것인데, 지난해에 성상께서 특별히 섬으로 귀양 보내도록 윤허하신 것은 대개 호생(好生)하는 덕으로 말감(末減)하자는 의논에 따르신 것입니다. 지난 정미년765) 가을 이성룡(李聖龍)의 옥사(獄事) 때에 여러 죄수들을 아울러 놓아 주던 날에 이 흉적들의 이름도 그 속에 섞이어 들어가, 본배(本配)까지 아울러 전석(全釋)되었으니, 온 나라 사람들의 놀람과 분개가 오래 갈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옥관(獄官)인 사람이 마땅히 즉각 구별해 내고 품지(稟旨)하여 재처(裁處)하시기를 기다렸어야 할 것인데 멍하니 살피지 않고서 한결같이 모두 놓아 줌으로써 버젓이 도성(都城) 아래에서 편안히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위태하고 의구(疑懼)하는 때를 당하여 결단코 그대로 놓아 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 도배 죄인 윤지를 도로 배소(配所)로 돌려보내고, 그때의 의금부 당상(堂上)도 또한 직책을 다 하지 못한 과실을 면할 수 없으니, 아울러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재신(宰臣)으로서 거듭 대관(臺官)의 논박을 받게 되면 사세가 그대로 있을 수 없는 법이고, 사람의 아들이 되어 어버이가 병환이 있음을 듣게 되면 사리가 마땅히 보호하러 돌아가야 하는 법입니다. 어제 성상께서 특별히 정석오(鄭錫五)를 추고(推考)하시면서 그가 멋대로 직차(職次)를 떠난 죄를 적용하지 않으신 것은 대개 그의 정리(情理)와 사세가 용서할 만한 데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심도(沁都)766) 는 본래부터 조석간의 변에 대비하는 자리인데, 한편으로는 상소를 올리고 한편으로는 길을 떠나는 짓을 했으니, 만일 그의 죄상대로 죄 주지 않는다면, 이 뒤로는 방백(方伯)이나 곤수(閫帥)로서 누구의 논박을 받게 되거나 어버이의 병환이 있는 사람은 임의로 곧장 돌아가 반드시 정석오로 전례를 삼게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뒷날의 폐단을 막는 도리에 있어 문비(問備)767) 에 그칠 수 없으니, 강화 유수(江華留守) 정석오를 우선 파직하고 그가 멋대로 임소(任所)를 이탈한 죄를 금부(禁府)로 하여금 잡아다가 추문하여 처벌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윤지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의금부 당상에 관한 일은 너무 지나치게 됨을 면하지 못한 것이다. 정석오를 파직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다만 잡아다가 추문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하였다. 【정석오가 정미년에 정계(停啓)한 일 때문에 논박을 받았었다.】
【태백산사고본】 19책 24권 48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177면
【분류】정론(政論) / 변란(變亂)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인사(人事)
[註 765] 정미년 : 1727 영조 3년.[註 766] 심도(沁都) : 강화도.[註 767] 문비(問備) : 죄가 있는 관원을 조사 신문하는 일.
11월 20일 경인
서명균(徐命均)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김시환(金始煥)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이철보(李喆輔)를 봉교(奉敎)로 삼았다.
사간원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1일 신묘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1월 22일 임진
신사철(申思喆)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박사익(朴師益)을 좌참찬(左參贊)으로, 김시형(金始炯)과 신무일(愼無逸)을 승지(承旨)로, 윤유(尹游)를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이진망(李眞望)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서종섭(徐宗燮)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지평 홍일보(洪一輔)가 상소하여, 탕평(蕩平)에 관한 도리를 진달하면서 오래오래 지속해서 할 것을 청하고, 또 서원(書院)의 양역(良役)에 관한 폐단을 논했으며, 말단에는 정석오(鄭錫五)를 잡아다가 추문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유의하겠다. 서원의 일에 있어서는 전후에 한 번만 신칙(申飭)한 것이 아닌데도 양역(良役) 일을 오히려 지금도 인순(因循)하고 있음은 또한 일이 중난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석오의 일에 있어서는 이미 과중함을 말했다."
하였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윤양래(尹陽來)를 입시(入侍)케 하고 부응교 이종성(李宗城)도 함께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이종성이 아뢰기를,
"포도청(捕盜廳) 죄인 징필(徵弼)을 무고(誣告)로써 승복(承服)을 받아 지금 장차 결안(結案)하여 정형(正刑)하게 되었습니다. 듣건대, 여산 부사(礪山府事)가 반문(盤問)할 때에 이전에 쓰지 않던 형벌을 시행했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겸낭(箝囊)·압낭(壓囊) 등의 혹독한 형벌을 가한다면, 이렇게 하는데 어떻게 승복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우선 결안을 하지 말고 본도(本道)로 하여금 엄하게 사핵(査覈)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양래가 아뢰기를,
"만일 안집 어사(安集御史)가 또 다시 내려가 진제(賑濟)를 감시한다면 대단히 도움이 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전대로 안집 어사의 이름을 띠고 있으면서 무릇 북도(北道)에서 장문(狀聞)하는 진제에 관한 일을 모두 접응(接應)하게 하더라도 효과가 진제를 감시하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고, 어제(御製)한 술회시(述懷詩)를 손수 써서 이종성에게 내렸으니, 이르기를,
"만사가 끝났으니 어느 것도 상심되어
지난날 추억하며 눈물 넘치네.
동룡문768) 의 닷새 전 옛 요속들을
오늘 편전에서 어찌 차마 볼 수 있으리?"
하였다.
11월 23일 계사
이중진(李重震)과 유건기(兪健基)를 지평(持平)으로, 최치중(崔致重)을 장령(掌令)으로, 정우량(鄭羽良)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시임(時任)과 원임(原任) 대신들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저번날 연석(筵席)에서 세실(世室)의 일로써 하문하셨습니다. 상례를 들어 말한다면, 친진(親盡)하여 조천(祧遷)하게 되는 날에 당하여 공덕(功德)이 있는 임금에게는 비로소 세실을 정하여 영구히 백세(百世)토록 조천하지 않는 자리를 삼았고, 혹은 친진하기를 기다리지 않고서 존숭하여 세실로 삼는 것도 또한 고금(古今)에 통행해 온 예법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효종(孝宗)의 세실에 있어서 이미 그렇게 시행한 전례(典禮)가 있었고, 성종 대왕(成宗大王)께서는 승하(昇遐)하신 이듬해에 사간원에서 소장(疏章)을 올려 진청(陳請)했으며, 한(漢)나라의 고제(高帝)와 문제(文帝)의 세실에 있어서는 경제(景帝) 원년(元年)에 정한 일이 옛 역사에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오직 우리 숙종 대왕(肅宗大王)께서는 임어(臨御)하신 50년 동안에 신공(神功)과 성덕(聖德)이 사책(史冊)에 쓰여 있어 사람들의 이목에 훤하므로, 온 나라 신민들이 모두 거룩한 업적을 존숭하여 백대토록 전하기 바라고 있는데, 오늘날 세실을 정하는 논에 있어 어찌 딴 의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판중추부사 이관명(李觀命)·이의현(李宜顯)과 우의정 이집(李㙫)도 모두 욕의(縟儀)를 시급히 거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옥당(玉堂)의 상하번(上下番)에게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부응교 이종성(李宗城)과 부수찬 신치근(申致謹)이 나아가 엎드리니, 각각 소견을 진달하도록 명하자,이종성이 아뢰기를,
"세실의 법제는 공로(功勞)가 있는 자를 조(祖)라 하고 덕의(德義)가 있는 자를 종(宗)이라 하므로 삼대(三代) 이하의 제왕(帝王)들 중에 종자(宗字)를 붙이게 된 임금에 있어서는 으레 세실을 삼았는데, 당(唐)나라 이후에는 이런 법제가 없었습니다. 인조(仁祖)와 효종(孝宗) 양조(兩朝)의 세실은 이미 조천(祧遷)할 때가 되기를 기다리지 않고서 먼저 거행했었으니, 이는 의거할 수 있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하고, 신치근이 아뢰기를,
"우리 성고(聖考)를 세실에 모시는 의논을 누가 감히 이의(異義)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성고(聖考)께서 펴신 깊은 인(仁)과 두터운 은덕을 무릇 우리 신민(臣民)들이 누가 입지 않았겠는가? 원임 대신들이 청한 바가 옳으니, 어찌 다시 의논하려는 뜻을 용납할 것이겠느냐?"
하고, 바로 날을 가리어 거행하도록 명하자, 이종성이 아뢰기를,
"오늘 여러 대신(大臣)들이 성상의 효성을 우러르며 찬미하여 이렇게 종묘(宗廟)의 큰 예절을 정하게 되었습니다마는, 오직 우리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거룩한 공로와 훌륭한 덕은 그 근본을 말한다면 곧 정일(精一)한 심법(心法)이셨으니, 우리 영고(寧考)의 정일한 심법을 잘 계술(繼述)하게 된 다음에야 바야흐로 달효(達孝)라고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유신(儒臣)이 진달한 말은 사체를 안 말이다."
하였다. 홍치중 등이 또 이이명(李頤命)과 김창집(金昌集)을 신설(伸雪)해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卿)들이 이처럼 서두르는 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푸르고도 푸른 시냇가 솔은[靑靑澗畔松] 울창하고도 울창하여 늦도록 푸른 빛을 띤다[鬱鬱含晩翠]’고 한 이 구절은 범질(范質)의 시가 아닌가? 오늘날 시급히 신설하는 것이 무슨 유익할 것이 있겠는가?"
하매, 신치근이 아뢰기를,
"두 신하를 신설해 주지 않으면, 신(臣)은 그 죄가 있어 신설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 듯 싶습니다."
하였다.
11월 24일 갑오
김한운(金翰運)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헌납 조명익(趙明翼)이 상소하여 소하(疏下)의 삼적(三賊)들을 죄대로 시급히 정형(正刑)하기를 청하고, 또 논하기를,
"채팽윤(蔡彭胤)이 비록 이미 명을 받고 반궁(泮宮)에 들어갔던 것이지만, 다사(多士)들이 일제히 공박하게 되었고보면 진실로 마땅히 인피(引避)하기에 겨를이 없었어야 할 것인데, 이에 감히 고함을 치며 화풀이를 하다가 다른 제학(提學)을 대신 보내도록 분부하신 다음에야 비로소 머뭇거리며 물러갔습니다. 또 소장을 올려 자신을 변명하면서 감히 ‘제생(諸生)들이 구박하고 저지하였다.’는 등의 말로써 마구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공론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상이 진실로 지극히 놀라우니, 우매한 신의 생각에는 마땅히 파직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소하(疏下)의 삼적에 있어서는 뜻이 있어서 윤허를 아끼고 있다. 채팽윤의 일에 대한 말은 과중함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초복(初覆)769) 을 행하여, 서울에 수금된 아들을 죽인 죄인 안성익(安成益)을 다시 사실(査實)하도록 명하였다. 정언 김한운(金翰運)이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전계(傳啓)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이 밤이 깊어졌음을 들어 내일 입시(入侍)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11월 25일 을미
초복하는 일 때문에 입시하니, 살인한 옥사(獄事)의 죄인 사노(私奴) 유을엽(留乙葉)을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엄중하게 사핵(査覈)하도록 하고, 세 추관(推官)을 잡아다가 추문(推問)하며, 전후의 도신을 엄중하게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였다. 정언 김한운(金翰運)이 앞서 아뢴 일을 전계(傳啓)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1월 26일 병신
송수형(宋秀衡)과 이현보(李玄輔)를 지평(持平)으로, 심택현(沈宅賢)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김재로(金在魯)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박사수(朴師洙)를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삼았다.
11월 27일 정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1월 28일 무술
이현록(李顯祿)를 대사헌(大司憲)으로, 한덕후(韓德厚)를 집의(執義)로, 이행민(李行敏)과 이광운(李光運)을 장령(掌令)으로, 조태언(趙泰彦)과 김권(金權)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사간원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1월 29일 기해
삼복(三覆)을 행하여 살인한 옥사(獄事)의 죄인 임금선(林金先)과 인신(印信)을 위조한 죄인 권광금(權廣金)을 모두 사형에서 감등하여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정언 김한운(金翰運)이 앞서 아뢴 일을 전계(傳啓)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인신을 위조한 죄인 권광금을 사형에서 감등하여 정배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바랍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1월 30일 경자
임금이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향을 친전(親傳)하였다.
문과(文科)와 무과(武科)의 방방(放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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