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무진
이세근(李世謹)을 대사헌(大司憲)으로, 박필기(朴弼琦)를 집의(執義)로, 박규문(朴奎文)·김담(金墰)을 장령(掌令)으로, 권일형(權一衡)·심성진(沈星鎭)을 지평(持平)으로, 김상성(金尙星)을 헌납(獻納)으로, 신방(申昉)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신치근(申致謹)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숭정문(崇政門)에 나가서 죄인 권첨(權詹)을 친히 신문(訊問)하기를,
"무신년103) 에 일어난 청주(淸州) 역적의 형세가 어떠하였기에 네가 머뭇거리며 출병(出兵)하지 않았느냐? 이것이 오늘날 박도창(朴道昌)과 더불어 모역(謀逆)한 장본이다. 그 때에 네가 비록 방백(方伯)의 직책에서 체임되었을지라도 어찌 신임 방백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출병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하자, 권첨이 공초(供招)하기를,
"영장(營將)에게 공문(公文)을 보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때가 어찌 공문만을 보낼 때이겠는가? 가령 이웃집에 도둑이 들어왔더라도 서로 구원할 생각은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제멋대로 도둑질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느냐? 병사(兵使)와 영장(營將)이 모두 살해(殺害)를 당했는데도 네가 감사(監司)가 되어 병부(兵符)를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 역적을 토벌(討伐)하지 않고 그저 공문 한 장만을 보낼 수 있단 말이냐? 박도창이 너를 위하여 흉계(凶計)를 꾸몄으니, 네가 어찌 모주(謀主)가 아니냐?"
하니, 권첨이 변명을 하여 승복(承服)하지 않았다. 임금이 영상(領相)과 우상(右相)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권첨은 지금까지 생존(生存)해 있을 사람이 아니다. 박도창이 이미 권 감사(權監司)를 위하여 모역(謀逆)했다고 말하였으니, 추대(推戴)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형문(刑問)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권첨에게 묻기를,
"박도창의 계획이 이미 드러났는데, 그 근본을 추궁(追窮)한다면 어찌 너에게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냐? 무신년의 일에 대하여 네가 자복(自服)하지 않았느냐? 너는 국은(國恩)을 받았으니 박도창이 너희들을 위하여 모역(謀逆)한 것을 논할 것도 없이 화(禍)가 세자(世子)에게까지 미쳤으니, 네가 비록 반역을 도모하지 않았더라도 네가 스스로 역적이 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니, 권첨이 공초(供招)하기를,
"박도창이 수하(手下)의 군관(軍官)으로서 나라에 모역(謀逆)했으니, 이 몸의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박도창의 무리들이 모역한 것은 옛날에 없던 일로서 항상 정 감사(鄭監司)와 권 감사(權監司)를 위한다고 말하였으니, 그 흉심(凶心)의 근원(根源)된 바가 하나는 정사효(鄭思孝)요 하나는 너이다. 네가 알거나 모르거나 간에 장차 죄를 면하겠는가, 면하지 못하겠는가? 이것이 너에게 단안(斷案)이 되었는데, 이에 형장(刑杖) 아래에서 쓰러지더라도 〈승복(承服)할 수 없다는〉 말로써 감히 진달하였으니, 더 더욱 흉악스러운 일이다."
하니, 권첨이 공초하기를,
"머뭇거리며 관망(觀望)한 죄는 이의(異議) 없이 자복하오며, 박도창을 막하(幕下)에 두었는데 오늘날 국가에 화를 끼친 것이 오로지 박도창이 이 몸을 위한 데에서 말미암았으니, 이것도 또한 이의 없이 자복합니다."
하였다. 이날 권첨이 1차(次)의 형문(刑問)을 받았다.
옥당(玉堂) 【교리(校理) 조명택(趙明澤)·조적명(趙迪命), 부교리(副校理) 김상성(金尙星), 수찬(修撰) 윤광익(尹光益)·조상경(趙尙絅)이다.】 에서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금번의 역적은 곧 옛날에도 없었던 것으로서 여러 역적들이 추대(推戴)한 사람은 해(垓)104) ·기(圻)105) 양적(兩賊)이니, 그들이 배포(排布)하고 체결(締結)한 정상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국법(國法)으로써 논죄한다면 하루도 천지(天地) 사이에 용납해 살 수 없으니, 빨리 엄한 형법을 내려 형률(刑律)에 의하여 처단(處斷)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3경(三更)에 창경궁(昌慶宮)에서 잘못하여 화재(火災)가 일어나 사옹원(司饔院) 및 궁방(弓房)과 소주방(小厨房) 도합 49칸이 소실(燒失)되었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심성진(沈星鎭)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빈 궁궐(宮闕)을 수위(守衛)하는 일이 근래에 그다지 엄중하지 아니하여 어제 창경궁에서 화재의 변고가 깊은 밤에 갑자기 일어났으니 무슨 곡절인지는 알 수가 없지마는, 궁궐을 잘 지키지 못한 것은 참으로 매우 놀랄 만한 일입니다. 위장(衞將)과 순장(巡將)을 잡아들여 추문(推問)한 것은 진실로 후일(後日)을 징계하는 뜻에서 나왔으니, 해당 내관(內官)도 또한 죄를 모면하기 어려우니 마땅히 똑같이 잡아다 추문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민진원(閔鎭遠)이 소장(疏章)을 올리고 곧 돌아갔는데, 거기에 대략 이르기를,
"신이 전후(前後) 입시(入侍)할 때에 감히 국문(鞫問)하는 데에 참섭(參涉)하지는 못했으나,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이 매우 흉악하고 참혹한 말이었으니 흉모(凶謀)와 역절(逆節)이 거의 다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추대(推戴)된 역적도 또한 이미 나타나게 되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지마는, 이미 추대된 사람이 있었다면 좌우에서 보필(輔弼)하여 부귀(富貴)를 도취(圖取)하려는 자는 다만 정사효(鄭思孝)와 권첨(權詹) 두 사람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역적들이 형문(刑問)을 당하면서도 참고 숨겨 끝내 지적하여 고하지 않으니, 이 무리들을 모두 섬멸(殲滅)하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근심은 더욱 차마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박도창이 중간에서 심부름을 하여 돈으로써 뇌물을 바친 것이 오로지 궁속(宮屬)에 있으니, 전하의 궁중(宮中)에 과연 다른 순정(順正)이 없을런지 또한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 기(氣)가 막히고 뼈가 서늘합니다. 근래 항간(巷間)의 소문에 외방(外方) 사람이 혹은 은밀한 곳에서 서로 결탁하여 정적(情跡)이 수상한 자가 있다고 하는데, 성명(聖明)의 세대(世代)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이러한 뜬 소문은 진실로 믿을 것도 못되지마는, 박도창의 일이 있고서부터 여러 사람의 심정(心情)이 모두 의구심(疑懼心)을 품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과연 궁중을 엄숙하게 다스려 간사한 자가 그 사이에 끼어 있지 못하게 한다면 이런 말이 무엇 때문에 이르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여러 죄인들이 죽을 곳에서 살길을 도모하기 위하는 계책으로 장차 못하는 짓이 없을 것이니, 더욱 두렵습니다. 전하께서 안팎을 시위(侍衛)하는 환관(宦官)과 궁첩(宮妾)들에게 비록 먼저 의심하는 기색(氣色)을 보여 사람마다 위태롭게 여기는 마음을 품게 할 필요는 없지마는, 또한 엄중히 신칙을 가하여 사사로이 친압(親狎)하는 풍습(風習)을 끊어버리게 함이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외방 사람과 사귀어 뇌물을 거래(去來)하는 자가 있으면, 그들끼리 서로 고발하게 하여 고발한 자에게는 중상(重賞)을 내리고 범금(犯禁)한 자는 배척하여 멀리 내치며 죄가 중한 자에게는 신문(訊問) 또는 국문(鞫問)을 가한다면 궁중(宮中)이 숙청(肅淸)되고 간사한 조짐이 미리 꺾일 것입니다. 또한 신이 듣건대, ‘금년 봄철 이전에는 나라의 형세가 비록 위태로웠으나 도성(都城)에 있어 금군(禁軍)을 거느린 사람이 모두 훈신(勳臣)과 척신(戚臣)으로서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을 보였고 또 사졸(士卒)들의 마음을 얻었으므로 중외(中外)가 의뢰하여 중시(重視)하고 있었는데, 지난번에 전하께서 아무런 단서(端緖)도 없이 장임(將任)을 바꿈으로써 또 변고가 자주 일어나게 되니, 인심이 더욱 의심과 위구심(危懼心)을 품어 조석(朝夕)으로 변고(變故)에 대비하지 않는 자가 없다.’고 하니, 신은 가만히 분개하고 애석하게 여깁니다. 전하께서 지금부터 깊이 경계하시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주자(朱子)의 말에 ‘허물을 고치는 데에는 용감(勇敢)한 것이 귀중하고 환난을 막는 데에는 겁내는 것이 귀중하다.’ 하였는데, 성현(聖賢)의 말씀이 깊고 간절하니 전하께서 어찌 소홀히 여길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장전(帳殿)에서 정녕히 하교한 뒤에 분부를 받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진달에 대한 대답이 이미 가만히 경(卿)의 개탄하는 바가 되었다. 이제 소장(疏章)을 올리고 곧 돌아갈 즈음에 앞뒤의 말에 과거의 의심하고 막혔던 의사(意思)가 드러나 있다. 비록 나이 젊은 사람이 이런 일을 하더라도 대신의 지위에 있는 이는 마땅히 이를 진정시켜야 할 것인데도 차마 먼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아!옛사람은 현위(弦韋)를 차고 그 성질을 반성했는데,106) 경은 이와 같이 깨닫지 못하고 갈수록 더욱 심하니, 다만 경을 위하여 깊이 개탄할 뿐만 아니라, 나라와 동체(同體)인 대신(大臣)의 분의(分義)가 아니다. 이는 경이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정성이 얕은 때문이니, 차라리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하였다.
삼사(三司) 【대사헌(大司憲) 이세근(李世瑾), 대사간(大司諫) 윤혜교(尹惠敎), 집의(執義) 박필기(朴弼琦), 사간(司諫) 정우량(鄭羽良), 지평(持平) 권일형(權一衡)·심성진(沈星鎭), 교리(校理) 조명택(趙明澤)·조적명(趙迪命), 헌납(獻納) 김상성(金尙星), 수찬(修撰) 윤광익(尹光益)·조상경(趙尙慶), 정언(正言) 윤지원(尹志遠)이다.】 등이 연명(聯名)하여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 등이 죽이기를 청한 것은 바로 추대(推戴)받은 괴수(魁首)입니다. 마땅히 엄중히 사핵(査覈)하여 정법(正法)107) 해야 할 것인데도 아직도 천지 사이에 목숨을 보존하고 있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아! 무신년108) 의 변란은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흉물(凶物)을 묻고 음식에 독약을 타며 담을 넘어 불을 지르는 흉모(凶謀)가 앞뒤로 연달아 일어나고 수미(首尾)가 연결되었으니, 그 흉계가 더욱 깊었습니다. 만약 그 괴수를 섬멸하여 화근(禍根)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또 어떠한 재앙의 기미(機微)가 어두운 가운데에 잠복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원하건대, 전하의 과단성(果斷性)을 발휘하여 해(垓)·기(圻) 두 역적을 빨리 엄국(嚴鞫)하여 정법(正法)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5월 3일 경오
임금이 대신(大臣) 및 삼사(三司)의 관원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집(李㙫)이 말하기를,
"근래 인심이 대단히 불안하여 염려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데, 또 빈 대궐에 잘못하여 화재가 일어난 변고가 있으므로 놀라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방화(放火)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마침내 실화(失火)의 일이 발생하였으니, 내가 가만히 이를 웃고 있었다. 민 판부사(閔判府事)109) 가 시골로 내려간 것이 실화한 다음날 아침이었는데도 그 차자(箚子)에는 이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다만 조석(朝夕)으로 변고(變故)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만 하여 거의 급서(急書)와 같았다. 만약 참으로 변고가 있다면 봉조하(奉朝賀)도 또한 급서를 올려야 할 것인데 어찌 이를 하지 않고 있는가? 민 판부사가 아무런 단서도 없이 이 말을 한 것은 오로지 의심과 막힘이 마음에 깊이 들어간 때문이다. 지난번에 타일러 화해시키고자 하여 〈이 영부사(李領府事)110) 와 서로〉 손을 마주 잡게 하였으나 끝내 감동하지 않고 지척(咫尺)의 연석에서 무신년의 변란은 이 영부사에게 책임이 있다 하였으며, 이 영부사도 또한 지나친 말이 있었다. 시상(時象)이 이와 같으니 나라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겠는가?"
하니, 영의정(領議政)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신이 민진원(閔鎭遠)과 사사로이 수작(酬酢)하였는데, 그의 말에는 ‘사적(私的)인 원수가 아니므로 〈성지(聖旨)를〉 받들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3경(三更)에 임금이 숭정문(崇政門)에 나아가 친히 국문(鞫問)하였다. 죄인 옥정(玉貞)의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이 몸은 서산(瑞山) 사람으로서 사방에 다니며 걸식하다가 서강(西江)에 있는 박도창(朴道昌)의 집에 당도하니, 박도창이 불쌍하다고 하며 이내 머물러 있게 하였습니다. 건천동(乾川洞)에 사는 정 선달(鄭先達)이 박도창의 집을 자주 왕래하면서 이 몸의 내력(來歷)을 물었습니다. 어느날 박도창이 송내성(宋來成)에게 이르기를, ‘내가 약용(藥用)에 필요한 곳이 있으니 인골(人骨)과 호골(狐骨)과 묘골(猫骨)을 얻어 오면 마땅히 후한 값을 주겠다.’고 운운한 말을 이 몸이 들었습니다. 그 후에 정 선달이 박도창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부친(父親)이 바야흐로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데, 부자간(父子間)에 어찌 원한을 갚을 마음이 없겠는가?’ 하니, 박도창이 말하기를, ‘나도 또한 원한을 갚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박도창이 정 선달과 함께 앉아서 이 몸에게 말하기를, ‘네가 좋은 곳을 구경하고자 하는가?’ 하기에 이 몸이 ‘좋은 곳이 어디 있는가?’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네가 시골 사람으로서 만약 대궐(大闕)을 구경한다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운운하였습니다. 박도창이 이내 말하기를, ‘내가 데리고 사는 첩(妾)이 있는데 나인(內人)과 더불어 친밀히 왕래하며 여종[女婢]도 또한 출입할 수 있으니 너도 함께 따라가고 싶은가?’ 하기에 이 몸이 ‘어찌 감히 바랄 수 있겠습니까?’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몸이 처음 왔을 때에 곧 박도창과 더불어 간음(姦淫)하였고 정 선달도 또한 이 몸과 함께 유숙(留宿)하고자 하므로 이 몸이 과연 들어주었습니다.
재작년 10월 어느날 저녁밥을 먹고 난 후에 박도창이 그 첩의 집에 들어왔기에 이 몸도 또한 따라갔는데, 송내성이 행담(行擔) 속에 있는 인두골(人頭骨)·호골(狐骨)·묘골(猫骨) 가루를 담은 종이 주머니를 박도창의 첩에게 전해주니 박도창이 돈 14냥을 건네 주었습니다. 박도창의 첩이 나인이라 핑계대고서 황혼(黃昏) 무렵에 이 몸과 함께 대궐에 들어가 한 곳에 당도하니, 한 나인이 있어 서로 귀를 맞대고 자세히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박도창의 첩은 품안에서 뼛가루를 내어 주었으며 이 몸은 바지 속에서 두골(頭骨)을 내어 주니, 나인과 박도창의 첩이 식도(食刀)로써 땅을 파고 정 선달이 써서 준 붉은 부적(符籍)과 아울러 주문(呪文)을 만들어 묻으면서 말하기를, ‘이 부적은 방위(方位)를 바꾸어 묻으면 안된다.’고 운운하였습니다. 이 몸이 박도창의 첩과 더불어 대궐 안에서 2일을 머물러 있다가 나왔으며, 앞뒤에 무릇 네 차례 대궐에 들어갔는데, 조용한 때에는 번번이 뼛가루를 가지고 대궐의 역내(域內)에 두루 묻었고 혹은 음식물에도 섞었으며, 매흉(埋凶)111) 할 때에 살펴본즉 나인은 나이 30여 세요 성(姓)은 박씨(朴氏)이며 상궁(尙宮)이라고 일컬었습니다. 박도창이 항상 말하기를, ‘이 일이 만약 이루어진다면 너도 또한 크게 귀(貴)하게 될 것이니 네 부모의 분묘(墳墓)도 또한 영화로울 것이다. 우리들의 미워하는 자가 모두 죽고 나랏일이 변혁(變革)되면 상놈[常漢]도 또한 양반(兩班)이 될 수 있다. 이 말을 누설하지 말라.’고 운운하였습니다. 이 몸이 정도륭(鄭道隆) 및 박도창과 부동(苻同)하여 흉물을 묻었으니, 모역(謀逆)한 것이 적실합니다."
하니,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5월 4일 신미
임금이 숭정문(崇政門)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였다. 표신(標信)112) 으로써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삼(李森)을 불러 하교하기를,
"을사년113) 에 내가 의금부(義禁府)에 친히 나가서 특별히 경(卿)을 석방한 것은 오로지 경의 심사(心事)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경이 배반했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니 다시 지나치게 혐의하지 말고 빨리 공무(公務)를 집행하라."
하였다. 이때 이삼이 대신(大臣)의 차자(箚子) 가운데에 무단히 장수를 바꾸어 인심이 위의(危疑)를 품는다는 등의 말이 있다는 이유로써 의리로 인책(引責)하여 나오지 않았으므로, 임금이 친히 불러 돈유(敦諭)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의현(李宜顯)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역적을 다스리는 방도는 먼저 괴수를 죽인 다음에 도당(徒黨)을 다스리는 것인데 지금은 모든 게 다 이와 상반(相反)되니, 이것이 무슨 거조(擧措)입니까? 대체 해(垓)와 기(圻)의 양적을 추대(推戴)했다는 설(說)이 낭자하게 모두 드러났는데도 삼사(三司)의 계청을 아직도 윤허하지 않으니, 여러 사람의 심정(心情)이 억울함은 다시 어떻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지금 고옥(蠱獄)이 끝나지 않았는데 급히 박도창을 독살(毒殺)시킨 일이 있고, 어제는 의금부의 두 나졸(羅卒)을 참살(斬殺)하였으며, 또 정사공(鄭思恭)과 장헌(長憲)에게 독약을 먹인 일도 있으니, 의지하고 믿는 세력이 없으면 감히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어찌 화근(禍根)을 제거하지 아니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원하건대 빨리 두 괴수의 죄를 바루어 신인(神人)의 분한 마음을 풀도록 하소서."
하니, 이미 처분하였다고 비답하였다.
죄인 송내성(宋來成)이 정도륭(鄭道隆)·옥정(玉貞)과 더불어 모역(謀逆)에 동참(同參)한 까닭에 결안(結案)하여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죄인 정사효(鄭思孝)가 물고(物故)되었다.
죄인 해(垓)는 본부(本府)에서 엄중한 형벌로 신문(訊問)하였고, 소하(疏下)114) 의 3적(三賊)인 이진유(李眞儒)·윤성시(尹聖時)·서종하(徐宗夏)는 요망(妖妄)한 박상검(朴尙儉)과 체결(締結)한 일로써 문목(問目)을 삼아 구핵(究覈)하였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심성진(沈星鎭)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해남 현감(海南縣監) 유득장(柳得章)은 원래 경신년115) 에 장폐(杖斃)된 유혁연(柳赫然)의 손자로서 이제 또 송내성(宋來成)의 초사(招辭)에 나왔으며 우리들 소인(小人)이 약을 얻어 보냈다고 하는 말은 더욱 흉악하고 참혹합니다. 청컨대 유득장을 잡아들여 엄중히 국문(鞫問)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른다고 비답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5일 임신
어유룡(魚有龍)을 승지(承旨)로, 서명균(徐命均)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서명형(徐命珩)을 정언(正言)으로, 윤혜교(尹惠敎)를 부제학(副提學)으로, 김상석(金相奭)을 부교리(副校理), 성덕윤(成德潤)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죄인 정사효(鄭思孝)는 처자를 종으로 삼고 재산을 몰수하고 집을 헐어 없애고 터를 파서 못을 만들었으며 읍호(邑號)를 강등(降等)하고 수령을 파직시켰다.
이날 본부(本府)에 국청(鞫廳)을 설치하였다. 죄인 이진유(李眞儒)를 신문(訊問)하니, 공초(供招)에 이르기를,
"이 몸이 세 조정에 은혜를 입었고 벼슬이 이경(貳卿)에 올랐으니, 매양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하나뿐이요 만약 두 마음을 갖는다면 순신(純臣)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우리 숙종(肅宗)을 섬기는 도리로써 경종(景宗)을 섬겼고 경종을 섬기는 도리로써 성상(聖上)을 섬겼으니, 평생에 힘쓴 바는 충의(忠義)와 명절(名節)이었습니다. 사군자(士君子)가 출세(出世)하여 조행(操行)을 닦는 대강령(大綱領)을 조금이나마 들었으며, 환관(宦官)·궁첩(宮妾)이 이름을 아는 것이 수치(羞恥)라는 것도 또한 일찍이 방책(方冊)에서 알고 있었으니, 감히 다른 길로 나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죽음이 임박한 백수(白首)의 모년(暮年)에 흉환(凶宦)과 체결(締結)했다는 누명(累名)을 들었으며, 또 6년 동안 없었던 새로운 죄안(罪案)을 첨가하였으니, 만약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사(士)로서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반드시 스스로 목을 찔러 마음의 결백함을 보일 것입니다. 머리에 쟁반을 이고 있는 원통함에 천일(天日)이 비추일 희망이 없으니, 성대(聖代)에 원통함을 품은 귀신이 되는 것을 자신의 분수에 족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요사이 국문(鞫問)의 명령이 갑자기 내려 우리 성상께서 이 몸의 죄가 애매함을 민망히 여겨 스스로 하소연하는 길을 열어 주셨으니, 몽두(蒙頭)116) 와 목삭(木索)은 이 몸의 불행이 아닙니다. 이 몸이 작년 겨울에 서도(西道)의 배소(配所)에 움츠리고 있었는데, 삼가 듣건대, 지난 8월 18일 연석(筵席)에서 하교하기를,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요환(妖宦) 박상검(朴尙儉)과 체결하였고 소하(疏下)에 있는 사람들은 역적 김일경과 체결하였다.’고 했다 하였으니, 성교(聖敎)의 지적하신 뜻이 분명히 한계(限界)가 있었습니다. 또 하교하시기를, ‘이진유는 그들 가운데에서 조금 나은 편이지마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는지를 또한 어찌 알겠는가?’고 했다 하였으니, 이는 역적 김일경의 음험하고 간교한 모의(謀議)에 참여했는지 반신 반의(半信反疑)하고 있음을 말한 것이요 바로 이 몸이 요환 박상검과 더불어 체결했음을 말한 것은 아니니, 성인(聖人)의 말씀이 지극히 공정함을 흠앙(欽仰)하는 바입니다. 그 후 아랫사람들의 말에 ‘소하의 3적(三賊)이 요환 박상검과 체결한 죄악이 있다.’ 하여 한 마디 말로써 단안(斷案)을 내려 곧장 죄안(罪案)을 만들었으니, 아! 심합니다.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지난해 심정옥(沈廷玉)과 언례(彦禮)를 국문할 때에 두 죄수(罪囚)의 초사에 거칠고 난잡한 말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심정옥은 심지어 이미 죽은 그 아비를 증거대었고 백지(白地)의 무함(誣陷)이 또한 오늘날 신임을 받는 장신(將臣)에게까지 미쳤습니다. 오늘날에 있어 이 일에 대한 요긴한 증거는 이 두 죄수보다 더 긴절한 자가 없는데, 이 몸이 과연 털끝만치라도 〈박상검과〉 체결한 자취가 있었다면 저 두 죄수가 어찌 이 몸을 아끼고 이 몸을 꺼려할 것이 있기에 이 몸의 성명(姓名)이 끝내 그들의 입에서 한번도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이는 이 몸이 원통함을 호소하는 가장 큰 관건(關鍵)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몸이 역적 박상검을 토죄(討罪)하던 날에 바야흐로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에 있었는데, 고(故) 상신(相臣) 조태구(趙泰耉)가 궁료(宮僚) 두 신하의 서찰(書札)을 보내 왔기에 비로소 변고가 있음을 알았고 또한 중관(中官)117) 가운데에 박상검과 문유도(文有道)란 자가 있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에 전도(前導)와 추종(騶從)도 없이 단기(單騎)로서 창황히 궐문(闕門)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의 뒤를 따라 입시(入侍)하여 두 적환(賊宦)을 토죄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이 몸의 좌차(坐次)가 약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차서를 넘어 대신의 뒤에 엎드려 흐느껴 눈물을 흘리면서 소리를 높여 진달하기를, ‘동궁(東宮)은 선왕(先王)의 소중한 아들이요, 전하의 사랑스러운 아우인데 한낱 요망한 내시(內侍)가 감히 제거할 계획을 세웠으니, 이는 참으로 종사(宗社)의 막대한 변고입니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서로 연달아 토죄하기를 청하니 마땅히 한 마디 말로써 윤허해야 할 것인데도, 이제 아침에 들어와 한나절이 되도록 결말이 나지 않았으니, 이 일에 만약 차질(蹉跌)이 생긴다면 전하께서 무슨 면목으로 다시 효령전(孝寧殿)에 들어가겠습니까?’ 하고, 고(故) 상신(相臣) 조태구(趙泰耉)가 일어나 말하기를, ‘사간(司諫) 이진유가 진달한 말이 매우 절실(切實)하니 곧 윤종(允從)함이 마땅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선왕(先王)의 지극하신 우애(友愛)로서 한낱 역환(逆宦)을 징토(懲討)함에 있어 어찌 이 몸의 한 마디 말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마는, 조정에 함께 있는 요원(僚員)들은 임금의 마음을 돌리는 데에 힘이 되었다고 말하는 자도 간혹 있었습니다. 그 때에 재신(宰臣) 이태좌(李台佐)·조태억(趙泰億) 등이 함께 연석(筵席)에 들어갔다가 겨우 합문(閤門)을 나오게 되자, 이태좌가 신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임금에게 아뢴 말은 너무 박절하지 않은가?’ 하기에, 이 몸이 대답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안위(安危)에 관계되는데 말이 간절하지 않으면 마음을 돌릴 수 없으므로 임금의 안색(顔色)을 거스리는 경계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니, 이태좌가 숙연(肅然)히 낯빛을 고쳤으며, 조태억은 이 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석문(石門)이 훌륭한 손자를 두었다. 이 무릎은 남에게 꿇지 않은 지가 오래인데 이제 공(公)에게 꿇어 절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석문(石門)은 곧 이 몸의 증조부(曾祖父) 효민공(孝敏公) 이경직(李景稷)의 호(號)이니, 선조(宣祖)와 인조(仁祖) 두 조정을 섬겨 충효(忠孝)와 절행(節行)으로써 세상에 이름이 드러난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일찍이 이태좌·박문수(朴文秀)의 연주(筵奏)와 이 몸의 장전(帳前)의 공초(供招)에 그 개략(槪略)을 간략히 진달하였습니다. 이 몸이 과연 요환(妖宦) 박상검과 체결한 일이 있었다면, 여러 사람을 따라 예(例)에 의하여 토죄하기를 청하더라도 무슨 죄가 되겠기에 앞장서서 담당하여 박절한 말을 올려 청을 들어주기를 기필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에서 이 몸의 나라를 위한 순수(純粹)하고 한결같은 정성을 볼 수 있는 것이니 요망한 환관 박상검과 체결한 자의 일이 과연 이러하겠습니까?
신축년118) 에 〈세제(世弟)의〉 봉전(封典)에 관한 주청사(奏請使)가 돌아올 때에 가져온 저들의 자문(咨文)에 이르기를, ‘국왕(國王)의 사속(嗣續)이 생기기를 기다려 다시 주달(奏達)하라.’고 운운하였습니다. 이 몸이 마침 금중(禁中)에 있다가 이 글을 보고 불현듯이 놀라 송인명(宋寅明)에게 말하기를, ‘나라의 저위(儲位)가 한 번 정해진 후에 어찌 다시 주달할 이치가 있겠는가? 이 일은 그대로 그칠 수가 없으니 마땅히 시급하게 사리(事理)에 의거하여 회자(回咨)를 보내어 후일의 폐단을 막아야 한다.’ 하니, 송인명도 그렇게 여겼습니다. 이 몸이 대궐에서 나와 당시의 중신(重臣)인 이조(李肇)와 이광좌(李光佐)의 집으로 곧장 찾아가 송인명에게 말했던 대로 말하니, 이광좌는 이 몸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이미 요량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조는 이 몸의 말을 듣고서 그렇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사리(事理)에 어두워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대의 말이 아니었다면 착각(錯覺)할 뻔 했다.’고 하면서 드디어 묘당(廟堂)에 품의하여 회자(回咨)의 거조(擧措)가 있었으니, 이 몸도 또한 그 문자(文字)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몸이 과연 역적 박상검과 체결한 일이 있었다면 이 일은 이 몸의 맡은 바가 아닌데, 어찌 여러 재신(宰臣)의 집을 분주히 찾아다니면서 회자(回咨)의 논의를 힘써 주장하겠습니까? 이 몸의 나라를 위한 순수(純粹)한 정성은 이에서도 또한 알 수 있는 것이니, 요망한 박상검과 체결한 자의 일이 과연 이와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박문수의 연주(筵奏)에 일찍이 그 개략을 간략히 진달하였으며, 송인명도 또한 실지의 정상으로써 답변한 일이 있었습니다.
신축년 겨울에 이 몸이 박태항(朴泰恒)의 소하(疏下)에 처음 참여하였는데, 그 때에 역적 김일경의 이름이 세 번째에 기재되었고, 두세번 소장(疏章)을 올리다 보니 심수현(沈壽賢)의 소하(疏下)에도 연달아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 때에는 역적 김일경의 이름이 두 번째에 있었으며, 박태항과 심수현이 연달아 탄핵을 입었습니다. 선왕께서 마침 구언(求言)의 하교를 내리매, 역적 김일경이 직접 소(疏)를 초(草)하여 전일 함께 일하던 사람들에게 연명(聯名)하여 성지(聖旨)에 응하기를 요구하였는데, 이 몸이 다만 그 외면(外面)을 보니 사절할 의의(意義)가 없기에 서명(署名)하고 따라 참여하였으나, 그 이면(裏面)에 어떠한 기관(機關)119) 이 있는지는 막연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음험한 일은 비록 부자 형제의 사이라도 숨기기에 겨를이 없는 것인데, 역적 김일경이 아무리 무상(無狀)하더라도 함께 일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어찌 누설하기를 즐겨하겠습니까? 이는 일조일석(一朝一夕)에 경영한 일이 아니니 점차로 양성(養成)되기는 아마도 오래 되었을 것입니다. 박태항과 심수현이 역적 김일경과 더불어 일을 함께 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한 소장에 같이 참여한 것은 두 신하도 이 몸과 마찬가지입니다. 저 두 신하는 모두 노성(老成)하고 충절(忠節)이 있는 신하인데, 어찌 역적 김일경의 음험한 일을 알면서 함께 일을 했겠습니까? 다만 외면만 보고 이면(裏面)을 알지 못한 것은 박태항과 심수현도 이 몸과 마찬가지이며, 이 몸도 또한 박태항·심수현과 마찬가지입니다. 어찌 한때에 일을 함께 하였다는 이유로써 마음까지 아울러 의심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선배(先輩)들이 다른 사람과 일을 함께 한 자가 얼마나 많겠습니까마는, 함께 일한 사람의 마음을 다 알지 못하고 뒤에 뉘우친 자가 많이 있었으니, 사람을 알아보기 어려운 것은 옛날에도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하류(下流)가 되기를 부끄러워한다는 말로써 승정원(承政院)의 직려(直慮)120) 에서 수작(酬酢)하기에 대감(大監)의 얼굴에 침을 뱉고자 했다는 말이 절책(切責)한 서찰에 나오기까지 했으니, 이는 고(故) 상신(相臣) 오명항(吳命恒)이 이 몸과 더불어 함께 숙직(宿直)하여 직접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을 전석(前席)에서 진달했던 바입니다. 지금의 영의정(領議政) 홍치중(洪致中)도 또한 일찍이 이 몸이 역적 김일경과 더불어 끝내 친분(親分)을 보존하지 못했다는 뜻으로써 연석(筵席)에서 진달했으니, 이는 모두 이 몸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요 온 조정의 공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몸이 크게 한(恨)스러운 것은 안목(眼目)이 없어 일찍이 절교(絶交)하지 못한 것뿐이니, 이는 의리를 분명히 살펴보지 못한 소치이므로, 마침내 왕이보(王夷甫)121) 과 장곡강(張曲江)122) 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대하여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전일의 원통함을 씻지 못하고 새로운 죄안(罪案)이 또 첨가되었으니, 그저 빨리 죽기만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죄인 권첨(權詹)이 물고(物故)되었다.
정언(正言) 서명형(徐命珩)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흉역(凶逆)의 조카는 병조 참의(兵曹參議)의 직책에 염치를 무릅쓰고 있으며, 국옥(鞫獄) 죄수의 고모부(姑母夫)는 의금부(義禁府)의 죄안(罪案)을 의논하는 자리에 버티고 있습니다. 그리고 홍중성(洪重聖)의 여동생은 곧 조상경(趙尙慶)의 아내인데, 그 남편은 구박하고 그 오라비는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우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 때에 대계(臺啓)가 준엄하게 나왔으나 그 남편과 그 오라비는 마침 내 죄벌을 받지 아니하고서, 한 사람은 홍문관(弘文館)의 사이에 방황하고, 한 사람은 군현(郡縣)의 수령에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조상경은 홍문록(弘文錄)123) 에서 제거하고 조적(朝籍)에서 삭제하며, 홍중성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율(律)로써 시행함이 마땅합니다.
영남(嶺南)의 1도(道)는 사람과 산물(産物)이 많고 땅이 넓어 원래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컫습니다. 새로 임명된 감사(監司) 오명신(吳命新)은 잔약(孱弱)하고 까다로우며 또 질병이 많으니, 영남 감영(監營)의 번거로운 사무를 이 사람에게 위임할 수가 없습니다. 비안 현감(比安縣監) 박서한(朴舒漢)은 이유익(李有翼)의 인척(姻戚)이요 한세홍(韓世弘)과는 사생(死生)을 같이하는 친구로서 흉역(凶逆)의 무리들과 좌우에 연결되었으니, 그 권세를 빌어 부유(富裕)한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하였으며, 상서원 직장(尙瑞院直長) 이사열(李師說)은 곧 이사상(李師尙)의 종제(從弟)요 이사로(李師魯)의 지친(至親)인데 조금도 어려움 없이 얼굴을 들고 벼슬에 종사(從事)하였으니, 신의 생각에는 이 두 사람은 진신(搢紳)의 반열에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정언 서명형의 상소 가운데에 흉역의 조카와 국옥 죄수의 고모부란 자는 과연 누구를 지적한 것인지 물어서 아뢰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서명형에게 물으니, ‘흉역의 조카는 곧 역적 이세우(李世遇)의 조카인 병조 참의(兵曹參議) 이성조(李聖肇)이며, 국옥(鞫獄) 죄수의 고모부는 곧 국청(鞫廳) 죄인 홍정좌(洪廷佐)의 3촌(寸) 고모부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남취명(南就明)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영남 감영(嶺南監營)에 관한 일은 적합한 자가 몇 사람이 있는가? 그 밖의 일은 모두 중도(中道)에 지나치다. 조상경에 관한 일은 말이 사리(事理)에 맞지 않으니, 적당함을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그 후에 하교하기를,
"서명형의 상소에는 한만(閑漫)한 말을 끌어들여 토역(討逆)을 싫어하는 뜻이 드러나 있으니, 아주 근거가 없다. 파직시키고 서용(敍用)하지 말라."
하였다.
5월 6일 계유
안중필(安重弼)과 조석명(趙錫命)을 승지(承旨)로, 이덕부(李德孚)를 교리(校理)로, 신사철(申思喆)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숙묘보감(肅廟寶鑑)》 【도합 6권이다.】 이 완성되었다.
수어청(守禦廳)에 명하여 평총(平銃) 9백 자루와 장총(長銃) 1백 자루를 제조하게 하였으니, 남한 산성(南漢山城)에 군기(軍器)가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숭정문(崇政門)에 나가서 친히 국문하였다. 죄인 심익연(沈益衍)을 신문하고는 곧이어 심상관(沈尙觀)을 심익연과 대질(對質)시켰다. 심익연이 심상관을 향하여 말하기를,
"신주(神主)를 어찌하여 묻었는가?"
하니, 심상관이 말하기를,
"내가 그 때에 이미 강상(江上)에 나가 있었는데, 어느 겨를에 〈신주를〉 묻었겠는가?"
하였다. 심익연이 말하기를,
"이사성(李思晟)의 아내를 무슨 일로 너희 집에 유접(留接)시켰는가? 만약 박윤복(朴尹卜)을 잡아서 문초(問招)한다면 네가 장차 어찌할 요량인가?"
하니, 심상관이 말하기를,
"박윤복이 비록 유접하였더라도 내가 어찌 알겠는가?"
하였다. 심익연이 말하기를,
"박윤복은 너희 집에 있었으니, 어찌 너희 종이 아닌가? 네가 어디에 가 있었기에 알지 못한다 하는가?"
하니, 심상관이 말하기를,
"내가 글을 강독(講讀)하는 기회에 둔지촌(屯之村)에 나가 있었다."
하자, 심익연이 말하기를,
"난리 때에 어찌 글을 읽을 겨를이 있겠는가?"
하였으며, 심상관은 말하기를,
"이사성의 아내를 유접시켰다는 말은 이제 처음 들었다. 만약 유접시킨 것을 알았다면 박윤복에게 어찌 곤장을 치지 않았겠는가?"
하였다. 심익연이 말하기를,
"네가 무슨 일로 평안 병영(平安兵營)에 뇌물을 보냈는가?"
하니, 심상관이 말하기를,
"네가 증거할 만한 문적(文跡)을 내어 놓음이 옳다. 귀세(貴世)는 의주(義州) 사람이니, 그 부모를 찾아뵈러 고향에 내려갔다가 지나는 길에 병영(兵營)에 들어간 것을 어찌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는가? 제 마음에 가고 싶어 내려간 것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하매, 심익연이 말하기를,
"귀세는 3세(歲) 때부터 너희 집에서 심부름하고 있었는데, 그가 평안 병사가 누구인지 어찌 알고 내려가겠는가?"
하였으며, 심상관은 말하기를,
"나는 이사성(李思晟)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심익연이 말하기를,
"돈을 대출(貸出)하는 일에 관하여는 네가 나의 형님과 전에 이미 대질(對質)하였는데 네가 장차 무엇을 하려 했는가?"
하니, 심상관이 말하기를,
"돈을 대출하여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하매, 심익연이 말하기를,
"나는 사리(事理)를 조금 알고 있으므로 네가 말하지 않았으나, 나의 형님에게는 말하였다. 네가 어찌 장차 여흥(驪興)을 추대(推戴)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네가 유일(柳逸)의 가문(家門)으로 하여금 여흥(驪興)의 가문과 더불어 연혼(連婚)하려고 하여 그 아들의 양 손 새끼손가락을 자르게 하지 않았는가?"
하니, 심상관이 말하기를,
"손가락을 자른 여부(與否)는 그 아비가 한 일이니 내가 어찌 알겠는가? 유일의 가문은 최원대(崔遠大)와 결혼했다."
하였다. 심익연이 말하기를,
"위에서 물으니, 내가 어찌 감히 고하지 않겠는가? 내 형님과 부친도 죽었다."
하니, 심상관이 말하기를,
"네가 움츠리고 있는 것이 마땅한데,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는가?"
하였다. 심익연이 말하기를,
"돈을 대출하는 일에 관하여는 내가 너에게 말하기를, ‘나에게 비록 돈이 있더라도 어찌 너에게 대출하겠는가?’ 하니, 네가 배를 사서 삼남(三南)의 곡식을 실어오겠다고 어찌 말하지 않았는가?"
하니, 심상관이 말하기를,
"네가 어찌 많은 돈이 있었는가? 삼남의 곡식을 어찌 배 한 척(隻)으로 실어오겠는가?"
하였다. 심익연이 말하기를,
"심종연(沈宗衍)의 여동생이 정사효(鄭思孝)의 손자와 결혼한다고 네가 어찌 말하지 않았으며, 또 장차 여흥(驪興)을 추대(推戴)하려고 한다고 네가 어찌 말하지 않았는가?"
하니, 심상관이 말하기를,
"우리 집에서는 혼인을 의논한 일이 없다. 너희 집에서는 정도형(鄭道亨)의 딸과 너희 아우가 어찌 의혼(議婚)하지 않았는가? 너는 지친(至親)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나는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추대한다는 말은 나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는데, 그 때에 누구에게서 들었는가?"
하자, 심익연이 말하기를,
"추대한다는 말을 네가 만약 승복(承服)한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니, 한 차례 형문(刑問)도 하기 전에 어찌 말하겠는가? 밀풍군(密豐君)을 실제로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네가 왜 말하지 않았는가?"
하니, 심상관이 말하기를,
"밀풍군이란 칭호를 나는 알지 못한다."
하였다. 심익연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번 정사효(鄭思孝)의 옥사(獄事)에 여흥(驪興)의 문제가 어찌 다시 나왔는가?"
하니, 심상관이 말하기를,
"네가 그 때의 이야기를 상세히 말하라."
하매, 심익연이 말하기를,
"그 때에 내가 너에게 말하기를, ‘밀풍군이 요즈음 죽었는데, 네가 어찌 이렇게 무서운 일을 저지를 수가 있는가?’ 하니, ‘밀풍군은 가짜가 되고 여흥(驪興)이 진짜가 된다.’고 네가 어찌 말하지 않았는가? 네가 이런 일을 하면서 대간(臺諫)으로 하여금 우리 집 일을 발계(發啓)하게 하는가?"
하니, 심상관이 말하기를,
"네가 이 일로써 우리 집을 원망하는가?"
하였다.
삼사(三司) 【대사헌(大司憲) 이세근(李世瑾), 대사간(大司諫) 성덕윤(成德潤), 집의(執義) 박필기(朴弼琦), 지평(持平) 심성진(沈星鎭), 헌납(獻納) 김상성(金尙星), 정언(正言) 윤지원(尹志遠)·신택하(申宅夏), 부수찬(副修撰) 신치근(申致謹)·임정(任珽)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여 해(垓)와 기(圻) 두 역적을 형률(刑律)에 의해 처단하기를 청하였는데, 따르지 않았다.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한 죄인 업덕(業德)을 다시 국문(鞫問)하여 정상을 밝힐 일에 대하여는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5월 7일 갑술
임금이 숭정문(崇政門)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였다. 송질(宋瓆)·유건기(兪健基)와 그 아들 유언국(兪彦國) 및 유시모(柳時模)를 정혼(鄭渾)과 더불어 대질시켰는데, 정혼은 불량한 무리로서 공명첩(空名帖)124) 을 도둑질하여 해서(海西) 지방에서 발매(發賣)했다가 그 일이 드러나 잡히게 되자, 옥사(獄事)를 늦추기 위하여 송질 등이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의 일이 원통하다고 말했다 하였으며, 또 장차 모역(謀逆)한다고 무고(誣告)하였는데 대질하게 되자 무고했다고 자복(自服)함으로써 사형(死刑)에 처하였고, 송질 등은 석방하였다.
이승원(李承源)을 승지로, 조현명(趙顯命)과 이정걸(李廷傑)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로, 서명균(徐命均)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신사철(申思喆)을 공조 판서(工曺判書)로, 신택하(申宅夏)를 정언(正言)으로, 정우량(鄭羽良)을 응교(應敎)로, 황재(黃梓)를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우의정(右議政) 이집(李㙫)과 공조 판서 신사철(申思喆) 등이 해(垓)와 기(圻)를 형률에 의해 처단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5월 9일 병자
신방(申昉)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이유(李瑜)를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윤광익(尹光益)을 수찬(修撰)으로, 조한위(趙漢緯)를 교리(校理)로, 송진명(宋眞明)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서명균(徐命均)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5월 10일 정축
임금이 약방(藥房)의 여러 신하를 불러 보았다. 제조(提調) 윤순(尹淳)이 말하기를,
"의관(醫官) 최덕령(崔德鈴)은 곧 익명(翊明)의 이성 사촌(異姓四寸)이요 김경윤(金慶尹)은 곧 김수창(金壽昌)의 동성 오촌(同姓五寸)인데, 이미 죄인의 친족이니 의관(衣冠)의 반열(班列)에 둘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죄인의 친척이란 이유로써 이들을 버린다면 세상에 온전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또 연좌(連坐)에 관련된 자도 아니니 그대로 두어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곤양(昆陽)에 있는 세종대왕(世宗大王) 태실(胎室) 난간석(欄干石)에 탈(頉)이 있는 곳을 영백(嶺伯)의 장계에 따라 이제 곧 개수(改修)하려고 하오나, 이러한 농번기(農繁期)에 백성을 부역(赴役)시키는 것이 염려되오며, 또 봉내(封內)에 탈이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니 우선 장마철이 지나기를 기다려 공역(工役)을 시작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근래에 풍속이 점점 경박하여 동몽(童蒙)들이 당초에 교관(敎官)에게 나아가 배울 생각을 하지 않으며, 교관도 또한 착실히 가르치지 않습니다. 청컨대 1개월에 세 차례 강독(講讀)하는 규정을 거듭 밝히고 따르지 않는 자는 죄를 주어 태만한 관원을 격려(激勵)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월 11일 무인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이태좌(李台佐), 우의정(右議政) 이집(李㙫), 형조 판서(刑曹判書) 서명균(徐命均),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어유귀(魚有龜), 공조 판서(工曺判書) 신사철(申思喆), 이조 판서 조문명(趙文命), 우참찬(右參贊) 박사익(朴師益),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동필(金東弼), 예조 판서(禮曹判書) 윤순(尹淳), 병조 판서(兵曹判書) 김재로(金在魯), 부호군(副護軍) 이익한(李翊漢), 사직(司直) 이만선(李萬選), 예조 참판(禮曹參判) 조최수(趙最壽),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 김흡(金潝), 우윤(右尹) 김취로(金取魯), 행 사직(行司直) 윤유(尹游),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 행 사직(行司直) 채팽윤(蔡彭胤), 병조 참판(兵曹參判) 이진순(李眞淳), 공조 참판(工曺參判) 이정걸(李廷杰), 행 부호군(行副護軍) 원백규(元百揆) 등이 빈청(賓廳)에서 아뢰기를,
"청컨대 해(垓)·기(圻) 두 역적을 형률에 의거하여 처단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으며, 재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장령(掌令) 박규문(朴奎文)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오늘날 이 변란(變亂)을 초래(招來)한 것은 실로 법망(法網)에서 빠져 나간 무리들이 모두 의심과 두려운 마음을 품고 죽을 곳에서 도망할 길을 찾는 계책이 날마다 더욱 깊어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정사효(鄭思孝)와 권첨(權詹)의 무리들이 무신년125) 에 복주(伏誅)되었더라면 흉역(凶逆)의 도당(徒黨)들이 거의 징즙(懲戢)이 되어 반드시 오늘날의 변란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이 역옥(逆獄)을 다스릴 즈음에 만약 신문할 것을 신문하지 않고 다스릴 것을 다스리지 않고서 다시 무신년의 일과 같이 관대(寬貸)한다면 정사효와 권첨 같은 무리들이 후일에 연달아 일어나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오늘날의 도리로써는 흉역(凶逆)을 다스림에 있어 바람과 번개와 같이 격렬(激烈)하고 국법을 굽히지 않고서 조금도 가차(假借)함이 없어 전일에 적도들을 놓아준 것을 경계로 삼고 앞으로 다가올 화변(禍變)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역적의 초사(招辭)에 나온 여러 사람을 추문(推問)하자는 장계에 대하여 3년을 버틴 끝에 비로소 윤허한 것도 이미 토적(討賊)을 허술하게 했다는 탄식이 있는데, 여러 날을 기다렸으나 아직도 사핵(査覈)하라는 분부가 없으니, 신은 가만히 미심쩍어 합니다. 처음에 윤허하지 않았다면 그만이겠지마는, 이미 윤허하신 후에 이와 같이 지연한다면 또 어떠한 변괴가 어느 곳에서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세월을 끌어서는 안되며, 또한 성심(聖心)을 번거롭게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빨리 국청 대신(大臣)과 의금부(義禁府)의 여러 당상관으로 하여금 한결같이 국안(鞫案)에 기재된 바에 따라서 무릇 의심스럽고 추문(推問)할 일에 관련된 것은 일체 사핵(査覈)하여 화근(禍根)을 끊도록 하소서.
이명언(李明彦)의 아들 이하택(李夏宅)의 경우는 이미 역적의 초사에 긴급하게 나왔으니, 정절(情節)이 의심스럽습니다. 그런데 이제 국옥(鞫獄)이 처음 일어나게 되자 그 아비의 배소(配所)에서 노새를 타고 빨리 달려 몰래 서울에 들어와 종적이 비밀스러웠으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두 의심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이 비록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소문이 이와 같이 시끄러우니, 아마도 거짓말로 돌릴 수는 없을 듯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더욱 자세히 살피고 엄중히 신칙하여 흉적(凶賊)의 음험한 역모(逆謀)를 방지하소서. 황익재(黃翼再)가 역모에 가담한 정상은 이미 무신년에 낭자하게 드러났는데, 또 이번 역적의 초사에 나왔으니, 원래 털끝만치도 용서할 만한 단서가 없습니다. 그리고 청파(靑坡) 및 광주(廣州)에서 떠도는 소문도 또한 서로 부합(符合)했으니, 스스로 변명할 날짜는 조사할 필요가 없고 곧장 엄중히 신문하여 꼭 그 정상을 알아내야만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하택에 관한 일은 지나치게 염려함이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르는가? 황익재의 일은 조사한 계사(啓辭)를 본 다음에 조처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교리(校理) 조명택(趙明澤)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심성연(沈成衍)이 반역을 고발한 글과 공사(供辭) 가운데에 나온 여러 사람들은 마땅히 똑같이 잡아 들여야 할 것인데, 현재 잡아 가둔 이외에도 또한 누락된 자가 많다고 하니, 마땅히 모두 잡아다 국문(鞫問)하라 명하여 흉역(凶逆)의 잔당(殘黨)으로 하여금 다시는 법망(法網)에서 빠져나가는 폐단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세열(李世說)은 아픔을 참고 버티다가 형장(刑杖) 아래에서 지레 죽었으니 매우 통탄할 일이오며, 그 아비는 잠깐 가두었다가 곧 석방했으니 옥사(獄事)의 체통이 크게 어그러졌습니다. 아! 이감(李椷)은 평일의 처신(處身)이 실로 의심스러움이 많았는데 그 후에 이름을 변경했으니 더욱 수상하오며, 정수명(鄭守命)과 최필웅(崔必雄)은 그 집에 왕래하며 주도(周到)하게 일을 꾸몄으니 그 부자(父子)가 역모에 함께 참여한 것은 불을 보듯 환하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술을 팔았다는 경미(輕微)한 죄로써 처벌하고 그만둘 수는 없으니, 신의 생각에는 마땅히 다시 국청(鞫廳)에 옮겨 똑같이 엄중히 신문하여 꼭 그 정상을 알아내야만 할 것입니다. 아! 난역(亂逆)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무엇이든지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빚어 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김일경의 도당(徒黨)을 끊어버리라는 하교는 진실로 제방(隄防)을 엄중히 하는 뜻에서 나왔으니, 유시모(柳時模) 같은 무리는 결단코 다시 의관(衣冠)의 반열에 둘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신의 전일 상소에 논열(論列)한 바가 있었으며, 그 후 유시모가 다시 대간(臺諫)에 들어갔을 때에 헌신(憲臣)이 또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기를 청한 것도 또한 이 때문이었습니다. 직책이 전선(銓選)의 자리에 있는 자는 이런 사람을 갑자기 청현(淸顯)의 벼슬에 의망(擬望)할 수 없는 일인데, 얼마 가지 아니하여 또다시 의망에 갖추어 반드시 공의(公議)와 힘써 싸우고 사당(私黨)을 법을 굽혀 비호하려 하였으니, 신의 생각에는 경책(警責)의 도리가 없을 수 없습니다. 외방에 있는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돌아갈 즈음에 오히려 차마 어지러운 세도(世道)를 잊지 못하고 면계(勉戒)의 말과 우국애민(憂國愛民)의 정성이 문자의 사이에 넘쳤습니다. 그런데 비지(批旨)의 내용과 연석(筵席)의 하교에 미워하고 냉대(冷待)함이 너무 심하고 사기(辭氣)가 박절하여 미안한 뜻을 현저히 보였으니, 이것이 어찌 평일에 전하에게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유시모의 일에 관하여 공의(公議)와 힘써 싸우려 한다는 등의 말은 자못 타당하지 못하다. 말단의 일은 직접 개연(慨然)하다는 하교를 받들고 감히 변명 두둔하려는 뜻을 진달했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하였다.
5월 12일 기묘
별겸 춘추(別兼春秋) 한현모(韓顯謨)가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릇 별겸(別兼)의 차출에 있어서는 반드시 아래에서 먼저 추천하는 것이니, 이는 관규(館規)126) 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흡(李潝)·민형수(閔亨洙)·정익하(鄭益河)·윤득화(尹得和) 같은 여러 신하들은 모두 차례로 돌려가며 천거(薦擧)를 주관하는 사람들이니, 신이 대신 담당할 수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례에 비추어 변통하소서."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매 하교하기를,
"이렇게 버티고 상지(相持)한다면, 사관(史官)의 추천이 기약이 없으니, 이 소는 돌려주고 이 후에는 사국(史局)의 일로써 진소(陳疏)하는 자는 받아들이지 말라."
하였다.
윤유(尹游)를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삼았다.
판부사(判府事) 심수현(沈壽賢) 등이 빈청(賓廳)에서 아뢰기를,
"청컨대 해(垓)·기(圻) 두 역적을 빨리 형률에 의하여 처단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하유(下諭)했는데 어찌 번거롭게 하는가?"
하였다.
5월 13일 경진
윤득화(尹得和)를 지평(持平)으로, 이광부(李光溥)와 이중진(李重震)을 장령(掌令)으로, 윤광익(尹光益)을 사간(司諫)으로, 이유(李瑜)를 대사간(大司諫)으로, 김재로(金在魯)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한현모(韓顯謨)를 부교리(副校理)로, 이병태(李秉泰)를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삼았다.
죄인 이진유(李眞儒)가 물고(物故)되었다.
5월 14일 신사
우의정(右議政) 이집(李㙫) 등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죄인 해(垓)·기(圻)를 빨리 정형(正刑)에 처하기를 청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하고 비답하였다.
5월 16일 계미
영의정(領議政) 홍치중(洪致中)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해(垓)·기(圻)를 빨리 정형(正刑)에 처하기를 청하여 1일에 다섯 차례 계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여성군(礪城君) 집(楫) 등이 해(垓)·기(圻)를 정형(正刑)에 처하는 일로써 세 차례 계청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삼사(三司) 【대사헌(大司憲) 이세근(李世瑾), 부제학(副提學) 송진명(宋眞明), 집의(執義) 박필기(朴弼琦), 응교(應敎) 정우량(鄭羽良), 장령(掌令) 이광부(李光溥)·이중진(李重震), 지평(持平) 심성진(沈星鎭), 교리(校理) 조명택(趙明澤)·조한위(趙漢緯), 부교리(副校理) 한현모(韓顯謨), 정언(正言) 윤지원(尹志遠)·신택하(申宅夏), 부수찬(副修撰) 임정(任珽)이다.】 등이 해(垓)·기(圻)를 정형(正刑)에 처할 일로써 다섯 차례 계청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강화 유수(江華留守) 유척기(兪拓基)를 인견(引見)하였다. 유척기가 말하기를,
"본부(本府)의 군향(軍餉)은 실로 형편이 없습니다. 전(前) 유수(留守) 박사수(朴師洙)의 장청(狀請)으로 인하여 호조(戶曹)에서 빌려간 양곡(糧穀) 중에서 3만 6백 석을 우선 돌려보낼 뜻으로 묘당(廟堂)에서 분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 보내지 않으니, 만약 세미선(稅米船)이 경창(京倉)에 당도하기를 기다려 배에 실어 도로 내려보낸다면 폐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청컨대 삼남(三南)의 조선(漕船) 중에서 각 고을의 곡식 수량을 구별하여 마땅히 보내야 할 수량을 합계(合計)하여 호조에서 본부에 통첩하여 곧장 수봉(受捧)하게 한다면 이미 수봉하였다가 곧 내려보내는 폐단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월 17일 갑신
김시혁(金始㷜)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강필경(姜必慶)을 사간(司諫)으로, 유언통(兪彦通)을 헌납(獻納)으로, 오언주(吳彦胄)를 지평(持平)으로, 권혁(權爀)을 부교리(副校理)로, 김시환(金始煥)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윤혜교(尹惠敎)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박사익(朴師益)을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서명균(徐命均)을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로, 어유룡(魚有龍)·이승원(李承源)·이수항(李壽沆)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해(垓)·기(圻)에게 차율(次律)을 적용하여 교형(絞刑)에 처할 것을 분부했으니, 여성군(礪城君) 집(楫) 등이 연계(連啓)한 청을 따른 것이었다. 영의정(領議政)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대군(大君)의 봉사(奉祀)할 후사(後嗣)는 조가(朝家)에서 결정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의원군(義原君)의 아들 유일(有一) 등은 어떠한가?"
하자, 홍치중이 말하기를,
"다른 무고(無故)한 사람으로써 대군(大君)의 후사를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의원군(義原君)의 아들도 연좌(緣坐)에 들어가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이미 사촌(四寸)이 되니 연좌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진실로 얻기 전에 얻으려고 근심한다면 또한 얻은 다음에는 그것을 잃을까 걱정하게 되는 것이다. 올빼미와 경(獍) 짐승 같은 흉악(凶惡)한 무리들이 그 뜻을 펴지 못하면 이런 요악(妖惡)한 짓을 하는 것이니, ‘욕(慾)’ 한 글자에서 나온 데에 지나지 않는다. 저도 또한 사람이며 대대(代代)로 국은(國恩)을 받아왔는데, 어찌 나라를 원망할 일이 있기에 역모(逆謀)에 달갑게 가담하겠는가? 이는 모두 명예와 이익 중에서 말미암아 나오는 것이다. 해(垓)·기(圻)는 무신년127) 의 추대(推戴)와는 다르기에 조가(朝家)에서 관대한 은혜가 이와 같았는데, 감히 매부(妹夫)와 인척(姻戚)을 위하여 이러한 역모에 가담했으니, 이는 반드시 충동시킨 자가 있으므로 이에 응한 것이다. 조정에서 만약 금석(金石)과 같은 법전(法典)에 따라 인재를 등용한다면 비록 쓰이지 않은 자일지라도 반드시 기뻐하여 복종할 것이다. 영남(嶺南) 사람으로써 말한다면 선조(先朝) 때에 등용된 자가 많았으니, 명분(名分)과 의리에 어긋난 자는 쓸 수 없지마는, 무죄한 자는 소통하여 쓰는 것이 좋겠다. 다만 한 사람의 근거가 없는 일로 인하여 그 무리에게까지 연루되어 무신년 이후에는 차별 대우를 하였으므로 조정에 등용되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알고 사람도 아니요 짐승도 아닌 어리어리한 지경에 빠져 하지 못할 짓이 없게 된 것이다. 선조(先朝)에서 처분이 엄정(嚴正)하셨고 경종(景宗)께서는 한결같이 선지(先旨)를 따랐으므로 갑진년128) 이후에는 저들이 길이 폐족(廢族)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시상(時象)을 만약 고치지 않는다면 해와 기를 비록 정형(正刑)에 처했다 하더라도 이 뒤에 또 몇 명의 해와 기가 있게 될지를 알 수가 없다. 흉악한 무리들이 공족(公族)을 빙자하여 이런 난역(亂逆)을 일으키니, 공족인들 어찌 모두 착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정성이 천박(淺薄)하여 요제(堯帝)가 구족(九族)129) 을 친애(親愛)한 것처럼 하지 못하였다. 오늘의 하교는 경(卿) 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공족은 반드시 씨가 남지 않을 것이다. 인조(仁祖)의 자손 중에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집이 다만 두 사람이 남았는데 이와 같이 되었고,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자손도 또 저렇게 되었으니 남아 있는 자들이 어찌 안심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당론(黨論)은 좋지 않은 일이니, 좋지 않은 곳에서 폐단이 생기는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한 시대(東漢時代)에 청의(淸議)가 비록 좋으나, 말엽(末葉)에는 또한 당화(黨禍)가 있었다. 말류(末流)에는 그 마음을 알지 못하고 일을 함께 하였으므로, 구차히 부동(附同)하는 버릇은 커지게 할 수는 없다. 성인(聖人)의 말씀이 절실하지 않음이 없으니, ‘군자는 보편(普徧)하고 편당(偏黨)하지 않으며 소인은 편당하고 보편하지 않는다.’는 말이 어찌 진실로 옳지 않겠는가?"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심수현(沈壽賢)은 말하기를,
"이제 임금의 하교를 받자오니,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어찌 면려(勉勵)할 마음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신이 합문(閤門) 밖에 이르러 비로소 종신(宗臣)의 계사(啓辭)에 내린 비답을 보았는데, 해(垓)·기(圻) 두 역적을 차율(次律)에 처한다고 말씀하셨으니, 신 등이 불현듯이 서로 돌아보며 실망하였습니다. 전하께서도 또한 용서할 수 없다는 뜻을 보였는데, 이제 도리어 차율에 처한다고 말씀하시니, 이것이 어찌 역적을 다스리는 도리가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 등은 아마도 차율이 어떠한 형벌인지를 알지 못하는 듯하다. 상(相) · 인엽(人燁)130) ·정(檉)131) 도 차율을 적용하였는데, 비납 가운데에 차율이라고 한 것은 곧 이것이다."
하매, 홍치중이 말하기를,
"공족(公族)인 까닭에 비록 교형(絞刑)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여러 사람들 마음에 매우 분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부제학(副提學) 송진명(宋眞明)은 말하기를,
"사형(死刑)의 처단을 여러 신하의 비답에 내리지 않고 먼저 종반(宗班)의 비답에 내렸으니, 신 등은 그것이 옳은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고, 홍치중은 말하기를,
"삼사(三司)의 의논도 진실로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이세근(李世瑾), 대사간(大司諫) 김시혁(金始㷜), 교리(校理) 조한위(趙漢緯) 등은 말하기를,
"해(垓)·기(圻) 두 역적을 정형(正刑)에 처하라는 청은 그만둘 수가 없는 일인데, 전지(傳旨)가 갑자기 내려 힘써 쟁론(爭論)하기도 전에 유사(有司)가 먼저 거행하여 대각(臺閣)의 의논이 그 사이에 아무런 존재(存在)가 없게 되었으니, 신 등이 어떻게 염치를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사직(辭職)하지 말라고 하였다.
5월 18일 을유
죄인 윤성시(尹聖時)가 물고(物故)되었다.
이재항(李載恒)을 평안도 병마 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해(垓)·기(圻)에 대한 연좌(連坐)와 가산 적몰(家産籍沒)을 계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柟)132) 의 전례(前例)의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9일 병술
김진상(金鎭商)을 사간(司諫)으로, 윤유(尹游)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조적명(趙迪命)을 수찬(修撰)으로, 김상석(金相奭)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임금이 약방(藥房)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 보았다. 도제조(都提調) 홍치중(洪致中)과 제조(提調) 윤순(尹淳)이 토역(討逆)한 후에 진하(陳賀)·고묘(告廟)·반사(頒赦)를 거행하기를 우러러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신년133) 토역(討逆)할 때에 반사(頒赦)·설과(設科) 등의 일이 있었던 것은 나도 이미 알고 있는데, 나는 이번의 일은 경신년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무신년134) 겨울 일을 돌이켜 생각한다면 무슨 기쁜 마음이 있어 하례(賀禮)를 받겠는가? 경(卿) 등의 마음은 비록 이와 같을지라도 나의 마음은 오히려 불쾌하다. 이제 비록 백명을 죽인다 하더라도 무신년 겨울의 분개한 마음을 어찌 조금이나마 풀 수가 있겠는가? 고묘(告廟)와 반사(頒赦)는 비록 하지 않을 수 없지마는, 하례를 받는 것은 결단코 들어줄 수 없다. 무릇 하례를 받는 도리는 조금이라도 기쁜 일이 있은 후에야 하례를 받는 것인데, 나는 앞에서나 뒤에서나 실로 기뻐할 만한 일이 없으니, 어떻게 하례를 받겠는가? 나로서는 이번에 역옥(逆獄)을 다스린 것은 병란(兵亂)을 평정한 것이 될 수 없으니, 만약 조정(朝廷)을 잘 조제(調劑)하여 화평한 기상(氣象)을 이룩한다면 뒷날 선조(先祖) 앞에 돌아가더라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된 후에야 조선(朝鮮)이 있다 할 수 있고 동국(東國)에 임금이 있다고 할 것이니, 전정(殿庭)에서 진하(陳賀)하는 것보다 어찌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5월 20일 정해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께서 안질(眼疾)로 인하여 침(鍼)을 맞았다.
5월 21일 무자
찬수청(纂修廳)에서의 노고로써 전(前) 참의(參議) 이덕수(李德壽)는 가자(加資)하고 판서(判書) 윤순(尹淳)은 숙마(熟馬) 1필을 사급(賜給)하였다.
오명신(吳命新)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채팽윤(蔡彭胤)을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윤심형(尹心衡)을 부응교(副應敎)로, 유엄(柳儼)을 교리(校理)로, 조명택(趙明澤)을 수찬(修撰)으로, 김상성(金尙星)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5월 22일 기축
조원명(趙遠命)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서종급(徐宗伋)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정우량(鄭羽良)를 집의(執義)로, 송수형(宋秀衡)과 김담(金墰)을 장령(掌令)으로, 신택하(申宅夏)와 정익하(鄭益河)를 지평(持平)으로, 심성진(沈星鎭)과 채응만(蔡膺萬)을 정언(正言)으로, 윤광운(尹光運)을 수찬(修撰)으로, 조한위(趙漢緯)를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임금이 약방(藥房)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보고 하교하기를,
"권익관(權益寬)과 이명언(李明彦)의 계사(啓辭)에 대하여 윤허하지 않은 것은 의도(意圖)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권익관이 함경도(咸鏡道) 감영(監營)에 있을 때에 불행히 윤헌주(尹憲柱)를 만났는데 때마침 박창제(朴昌悌)가 말[馬]을 점검(點檢)하게 되었으나 곧 정파(停罷)하게 하였으니, 남들의 의심을 초래(招來)하는 단서가 되었다. 그러나 평상적인 인정으로써 말한다면 괴이하게 여길 일이 아니다. 이명언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연경(燕京)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의주(義州)에 머물러 호복(胡服)을 입고 거사(擧事)하려 한다는 것이 과연 말이 조리에 맞는가? 그리고 그 아들 이하택(李夏宅)이 서울에 왕래하여 종적이 수상하다고 하는 것이 문득 한 급서(急書)와 같았으니, 그 말이 참으로 괴이하다."
하였다.
5월 24일 신묘
이덕수(李德壽)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이덕부(李德孚)를 부교리(副校理)로, 홍현보(洪鉉輔)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어유봉(魚有鳳)을 집의(執議)로, 이성효(李性孝)를 지평(持平)으로, 정도은(鄭道殷)을 정언(正言)으로, 이세근(李世瑾)을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원필규(元弼揆)를 황해 병사(黃海兵使)로 삼았다.
5월 25일 임진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영의정(領議政) 홍치중(洪致中)이 함께 입시(入侍)하였으니, 해(垓)와 기(圻), 정사효(鄭思孝)·정도륭(鄭道隆)·최필웅(崔必雄)·순정(順正)·박도창(朴道昌)·박재창(朴再昌)을 역괴(逆魁)로 감단(勘斷)하여 장차 반교(頒敎)하기 위함이었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26일 계사
대사간(大司諫) 홍현보(洪鉉輔)가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엊그제 연중(筵中)에서 권익관(權益寬)과 이명언(李明彦) 부자(父子)에 관한 일로써 하교한 바가 계셨는데, 이러한 엄중히 징토(懲討)할 날을 당하여 어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대저 권익관의 일에 관하여는 당초 안무사(按撫使)의 소장(疏狀)은 다만 박창제(朴昌悌)의 군마(軍馬)를 별달리 점검(點檢)하는 것과 군기(軍器)를 넉넉히 준비하는 등의 정상(情狀)에 의거하여 논주(論奏)하였을 뿐이요, 원래 권익관의 일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언급(言及)된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박창제의 초사(招辭)에는 모두 주장(主將)에게 품(稟)했다고 말하였으므로, 저 권익관은 안무사가 차례로 적발할 것을 두려워하여 먼저 소주(疏奏)의 말단에 집어넣어 말하기를, ‘박창제가 말을 점검하는 것은 신이 참여하여 알고 있는 일이요, 역적 남태징(南泰徵)의 말을 돌려보낸 일도 신이 마련한 것이며, 흉적 황부(黃溥)가 배를 제조한 것도 또한 신이 참여하여 알고 있었으며, 황진기(黃鎭紀)의 봉발(烽撥)을 적간(摘奸)한 공문도 또한 신이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대간(臺諫)에서 장계를 올려 국문(鞫問)하기를 청하여 마침내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게 되었는데 전하의 하교에 불행히 윤헌주(尹憲柱)를 만났다는 것은 어디에 의거하여 나온 말씀입니까? 또 전하께서 말을 점검하는 것을 곧 정파(停罷)시킨 일은 인정으로써 헤아려 보아 괴이한 일이 아니라고 분부하셨는데, 그 정파한 것이 만약 연례(年例)로 말을 점검하는 것을 곧바로 정파하였다면 오히려 괴이한 일이라고 아니하겠으나, 2월 초순(初旬) 도시(都試)135) 의 다음날에 이미 연례의 점검을 거행하였고, 그 후 역란(逆亂)이 일어나던 3월 초두(初頭)에 군마(軍馬)를 모아 또 별달리 점검을 거행하며 군사를 주둔시켜 고함을 치면서 훈련한 지가 여러 날이 되었는데, 안무사가 내려온다는 정보(情報)를 듣고 갑자기 빨리 정파시켰으니, 그 마음에 품은 바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어찌 이를 보고 괴이쩍은 일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이명언에 이르러서는 사람 됨됨이 원래 음험하였으며, 호복(胡服)을 입고 거사(擧事)한다는 한 조항에 있어서는 그가 정미년136) 에 내침을 당한 후 앞뒤 여러 차례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한 번도 왕명에 응하지 않았는데, 연경(燕京)에 들어가는 사신(使臣)으로 차출됨에 미쳐서는 아무런 말도 없이 즐거이 들어갔으니, 대개 그 뜻이 연경에 가지 않으면 그 계획을 이룩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저곳에 당도한 후에는 전일에 입은 무함(誣陷)을 씻지 못했고, 새로운 치욕(恥辱)을 또 입었으나 쟁변(爭辨)할 방도는 생각하지 않고 조급하게 서둘러 회정(回程)했으니, 그 의도(意圖)는 3월의 거사(擧事)하기로 된 기일(期日)에 반드시 다다르려고 함이었습니다. 다만 이 두 조항에서도 그의 한정없는 흉심(凶心)이 이미 드러났으며, 더구나 《감란록(勘亂錄)》에 기재된 적(賊)의 초사(招辭) 가운데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돌아올 때에 평안도에서 거사(擧事)하겠다.’는 말이 명백할 뿐만 아닌데, ‘그 말이 조리에 맞는가?’라는 하교는 어찌하여 나오게 된 것입니까? 그 아들 이하택(李夏宅)은 그가 잡히게 될 것을 스스로 알고 서찰을 바지 속에 감추어 스스로 벗어날 증거를 삼았는데, 이는 한갓 간사한 정상이 저절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번 국청(鞫廳)을 설치한 후에 노새를 타고 빨리 달려 몰래 서울에 들어와 종적(蹤跡)은 은비(隱秘)하므로 온 나라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했으니, 이는 대신(臺臣)이 소(疏)를 올려 논박했던 바입니다. 소가 나온 다음날 다시 그 노새를 타고 황급히 달아나 그 왕래한 자취를 숨기려 했으니, 사람들의 의혹이 더욱 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은비한 일을 하는 무리들은 듣는대로 논열(論列)하여 국문을 청하는 것이 〈신의〉 직책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한 급서(急書)와 같다고 하교 하셨으니, 신은 참으로 그 이른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빨리 권익관·이명언 양적(兩賊)에 대한 계사(啓辭)을 윤허하시고 이하택도 또한 국청으로 하여금 잡아들여 엄중히 사핵(査覈)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 가운데 진달한 바는 고집불통(固執不通)을 모면하지 못하며, 이명언에 관한 일은 더욱이 중도(中道)를 지나친 데 관계된다."
하였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송인명(宋寅明)이 소를 올려 사면(辭免)하였다.
5월 27일 갑오
봉조하(奉朝賀) 심단(沈檀)이 졸(卒)하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임금이 애통한 조서(詔書)를 내려 이르기를,
"심단은 삼조(三朝)의 옛 신하로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마음이 심히 슬프다. 상장(喪葬) 등의 일은 한결같이 봉조하(奉朝賀) 이관징(李觀徵)의 전례에 따라 시행하여 나의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지평(持平) 정익하(鄭益河)가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대사간(大司諫) 홍현보(洪鉉輔)의 상소를 보았는데, 그가 권익관과 이명언 양적(兩賊)을 성토(聲討)한 바는 모두 근거댈 실상이 있습니다. 종전(從前)에 언관(言官)들이 이로써 말한 것도 또한 한두 번이 아닌데, 이제 이 홍현보의 상소에 무슨 별다른 괴격(乖激)한 말이 있기에, 심지어는 고집불통이라느니 의심하고 막혔다느니 하는 등의 하교로써 이같이 최절(摧折)하십니까? 반드시 거사(擧事)의 기일(期日)에 맞추어 가려고 했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거의 억측(臆測)에 가까우나, 적(賊)의 역모(逆謀)는 추측하기 어려운 것이니, 그 마음이 반드시 거사(擧事)의 기일에 맞추어 가지 않을 것을 성명(聖明)께서 또한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이하택(李夏宅)이 원래 청주 읍(淸州邑)내에 거주하였는데, 이인좌(李麟佐)의 변란 때에 비밀히 왕래한 것은 다만 청주 사람들이 소상히 말할 뿐만 아니라, 비록 수원 진(水原陣)에 잡혀온 이명의(李明誼)가 이하택에게 보낸 서신 가운데 이른바 ‘임금이 있는 곳에 가려고 한다.’는 말로써 살펴보더라도 그 반역(反逆)의 정상이 낱낱이 징험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아들이 반역을 범함이 이와 같으니, 그 아비가 함께 참여한 것은 더욱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권익관의 허다한 죄악에 이르러서는 송진명(宋眞明)과 정수송(鄭壽松)이 직접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입니다. 송진명은 권익관과 동문수학(同門受學)을 한 친구이며, 정수송은 또 무변(武弁)으로서 원래 편계(偏係)된 마음은 없었으나 이제 두 사람의 말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역심(逆心)을 숨기기 어려움은 이에서 더욱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데도 한결같이 관대(寬大貸)하여 곧 바로 공개적으로 죽이지 않는다면, 신인(神人)의 분심(憤心)을 풀고 국가의 환난을 제거할 수 없으니, 신의 생각에는 양적(兩賊)에 대한 계사(啓辭)를 빨리 윤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어제의 계사(啓辭)와 이제 그대의 상소는 모두 중도(中道)에서 지나침을 면하지 못한다. 그대가 다시 이와 같으니, 다른 사람이야 어찌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였다.
5월 28일 을미
임금이 하교하기를,
"죄를 사면(赦免)하는 것은 소인(小人)의 다행이니, 옛사람이 그 임금에게 절대로 죄를 사면하지 말기를 청하였다. 오늘 별세초(別歲抄)137) 를 명(命)하고 명일에 또 예세초(例歲抄)138) 가 있는데, 세초(歲抄)에 들어간 자는 범(犯)한 바가 비록 가볍다 하더라도 그 밖에는 탐리(貪吏)가 아니면 무법자(無法者)들이다. 오늘 별세초를 거행한 후에 명일 또 세초하는 것은 다만 시행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또 탐리를 엄금하고 무법자를 징계하는 뜻이 아니니, 6월 세초는 거행하지 말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역적을 토평(討平)한 후에 설과(設科)한 전례를 상고해 보니, 갑신년139) ·경신년140) 양년(兩年)에는 별시(別試)를 설행하여 6백 명을 발취(拔取)하였고, 무신년141) 에는 정시(庭試)를 설행하였습니다. 이제 이 토역 경과(討逆慶科)는 어느 연조(年條)의 전례(前例)에 의하여 거행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시(庭試)로써 설행하라."
하였다.
이종성(李宗城)을 응교(應敎)로, 한현모(韓顯謨)를 부교리(副校理)로, 윤취함(尹就咸)을 장령(掌令)으로, 임정(任珽)과 정언섭(鄭彦燮)을 정언(正言)으로, 채팽윤(蔡彭胤)을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성덕윤(成德潤)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중외(中外)의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기로(耆老), 군민(軍民) 및 한량인(閑良人)에게 교서(敎書)를 내렸는데, 이르기를,
"왕(王)은 말하노라. 놀랄 만한 단서(端緖)가 금중(禁中)에서 여러 차례 발생되었으니 온 나라 사람의 분노가 더욱 심각(深刻)하였고, 완악한 종족(種族)은 그 근원이 제거되었으니 조가(朝家)의 토적(討賊)이 이에 끝났도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사방에 널리 고(告)하노라. 생각건대, 나의 졸렬한 자질(資質)로써 이 험난한 운회(運會)를 만났도다. 지난해 역적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그대로 방치(放置)하고 묻지 않은 자가 많았는데, 평일에 종족(宗族)을 사랑하여 매양 살리고자 하는 뜻을 보였다. 은덕이 아래에 미치지 못하여 흉악한 무리의 뉘우침을 듣지 못했고, 지혜는 간사함을 살피지 못하여 법망(法網)을 빠져 나간 흉적이 많았었다. 이에 적도(賊徒)의 잔당(殘黨)이 몰래 자라나서, 나라의 형세가 철류(綴旒)와 같이 위태로웠다.
역적 해(垓)와 기(圻)는 경신년142) 역종(逆宗)143) 의 종손(從孫)이요 기사년144) 흉적(凶賊)145) 의 잔당(殘黨)에서 나왔도다. 아직도 종반(宗班)의 적(籍)에 기재되어 있어 처우(處遇)가 융숭했는데, 앞 수레의 엎어짐을 경계하지 않고 원망이 더욱 깊었도다. 어리석은 족속들과 연결하여 화심(禍心)을 품고 기회를 기다렸으며, 흉악한 무리를 선동(煽動)하여 기화(奇貨)로 여기고 은밀히 뜻을 붙였도다. 그러므로 난역(亂逆)이 3년만에 연달아 일어났으니, 그 근원은 실로 해(垓)·기(圻) 두 흉적에게 있다. 해(垓)는 아내를 죽여 누설(漏洩)할 계제(堦梯)를 끊었으니 계획이 매우 은밀하였고, 은전(銀錢)을 흩어 뇌물의 길을 열었으니 체결(締結)한 것이 더욱 깊었다. 다만 그 범상(犯上)의 역모(逆謀)가 몰래 자라났으니, 또한 그 도당(徒黨) 중에서 촉망(囑望)한 바가 있었다. 기(圻)는 아들 중에서 가장 어질다는 지칭(指稱)이 있었으니, 참으로 추대(推戴)된 자는 네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쳤으니 처음에는 윤리(倫理)를 잃지 않았으나, 사정에 끌려 죄악을 실행했으니 마침내 역모가 드러났다. 형제간에 죄악이 같았으니 참으로 마음이 아팠는데, 앞뒤의 증거를 구비했으니 어떻게 도피(逃避)할 수가 있겠는가?
정사효(鄭思孝)는 성품이 원래 탐학하고 간사했으니, 대대로 요악(妖惡)한 짓을 이어왔도다. 원주(原州) 병영(兵營)에서 돈을 빌렸으니 역당(逆黨)을 도와줄 마음이 이미 싹텄으며, 전주(全州)의 부중(府中)에 서신이 막혔으니, 우연히 적군(賊軍)을 맞아들일 계획이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에 경벌(輕罰)에 처하여 대계(臺啓)를 오래도록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우선 사형(死刑)을 용서하여 변방에 정배했는데, 도마에 오른 고기로 자처하여 죽을 곳에서 살아날 길을 힘써 구했다. 그 아들 정도륭(鄭道隆)은 흉악하고 간사함이 아비보다 더했으니, 역심(逆心)을 품어온 지 오래였다. 죄고(罪辜)에서 벗어나기를 꾀하였고 부귀(富貴)를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드디어 못할 짓이 없는 마음으로서, 아주 흉악한 일을 자행(恣行)하였다. 휘하(麾下)의 비장(裨將)들은 심복이 되어 역모에 동참(同參)하였고, 문하(門下)의 제생(諸生)들은 길러 준 은혜를 생각하여 목숨을 바쳤도다. 세정(世貞)을 인연하여 나라를 원망하는 요망한 궁비(宮婢)와 통하였고, 흉적 백세빈(白世彬)의 소개로 인하여 궁부(宮府)에서 쫓겨난 흉악한 내시(內侍)와 체결(締結)하였다. 도깨비 같은 잡된 무리가 횡행(橫行)했으니 금중(禁中)의 시위(侍衞)들이 감싸 주었고, 금전(金錢)을 남용(濫用)했으니 항간(巷間)의 간사한 무리들이 모두 한통속이 되었다. 흉물(凶物)을 묻고 음식에 독약을 타는 끔직한 일이 있더니, 무신년146) 겨울에 변란이 일어났다. 말이 여기까지 미치니, 아픈 마음이 어떻겠는가? 우리 종사(宗社)에 재앙을 끼침이 심하였고 이 어린아이에까지 미쳤으니, 또한 참혹하였다. 무릇 나라를 전복(顚覆)할 음모(陰謀)는 불을 지름에 이르러 더욱 치밀하였다. 독살(毒殺)된 시체를 재차 검사(檢査)하매 장차 드러날 형적(形跡)이 있었으니, 내국(內局)에 간직한 독약을 몰래 훔쳐내어 망측한 계획을 시도(試圖)하려 하였다. 서울을 옮긴다는 말은 요망함이 극도에 달하였고, 조신(朝臣)을 죽일 음모 또한 매우 흉악하고 간사하였다. 대개 그 마음은 빼앗지 않으면 만족치 않으니, 그 계획이 갈수록 더욱 심각하였다. 지난날 호서(湖西)·영남(嶺南)에서 거병(擧兵)한 일은 오히려 형상이 있는 도둑이었는데, 이러한 금중(禁中)에서 독약을 사용하는 일은 실로 자취도 찾을 길이 없었다. 이를 정탐(偵探)하여 잡는 데에 혹여나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다면, 위태로움이 장차 호흡(呼吸) 사이에 절박할 것이다. 다행히 신인(神人)의 도움을 힘입어 마침내 흉적이 사로잡힘에 이르렀다.
국옥(鞫獄)을 다시 설치하매 앞뒤의 정상이 모두 드러났고, 흉적을 모두 제거했으니 종묘 사직(宗廟社稷)이 다시 편안하였다. 이미 역적 해(垓)·기(圻)를 교수형(絞首刑)에 처하였고, 정사효·정도륭·최필웅(崔必雄)·순정(順正)·박재창(朴再昌)·박도창(朴道昌) 등을 정형(正刑)에 처하였다. 춘추(春秋)의 왕법(王法)을 대대적으로 시행했으니 여러 사람의 울분(鬱憤)이 비로소 풀어졌고, 성조(聖祖)의 지손(支孫)이 함께 처형되었으니 나의 마음을 슬프게 하였다. 조서(詔書)를 널리 선포(宣布)하는 날을 당하여 하례(賀禮)를 받음이 즐겁지 않으나, 우레와 비가 내리는 은혜에 젖었으니, 만물과 더불어 함께 기뻐하기를 바란다.
아! 조용히 생각해 보건대, 모든 일에 원인이 있도다. 정사효의 죽을 죄를 관대(寬貸)하니 정도륭이 죄악을 뉘우쳐 고치지 않았고, 심성연(沈成衍)의 옥사(獄事)를 방치(放置)해 두니 해(垓)·기(圻)의 흉계가 더욱 방자(放恣)하였다. 너그러운데에 힘쓰면 반측(反側)하는 자147) 의 마음이 안정(安定)된다고 하나, 한갓 간사하고 흉악함만 조장(助長)시키게 되니 효경(梟獍)과 같은 완악한 성품은 고치기 어려움을 과연 알았노라. 그 당시에 처치가 모두 적당했더라면 어찌 오늘날에 화란(禍亂)이 거듭 일어났겠는가? 만약 근본을 추구(追究)하여 말한다면 붕당(朋黨)의 해(害) 아님이 없다. 같은 조정에서 살육을 일삼으니 원한은 더욱 깊어져 갔고, 졸졸 흐르는 물이 쌓여 하늘에 닿았으니, 반역(叛逆)이 잇달아 일어나도록 점차 초래(招來)하게 되었다. 어찌 한갓 과인(寡人)만 경계할 뿐이겠는가? 또한 여러 신하들도 서로 화협(和協)함이 타당(妥當)하다.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모두들 소상히 알아야 한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송성명(宋成明)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20책 26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206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 / 변란(變亂) / 사법(司法)
[註 142] 경신년 : 1680 숙종 6년.[註 143] 역종(逆宗) : 복선군(福善君) 남(柟)을 가리킴.[註 144] 기사년 : 1689 숙종 15년.[註 145] 흉적(凶賊) : 남인(南人)을 가리킴.[註 146] 무신년 : 1728 영조 4년.[註 147] 반측(反側)하는 자 : 마음이 불안하여 모반(謀叛)을 생각하는 사람. 후한(後漢) 광무 황제(光武皇帝)가 이들의 기록한 문서를 받아서 살펴보지도 않고 태워 반측자로 하여금 안심하도록 한 고사에서 나온 말.
사간원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부제학(副提學) 이덕수(李德壽)가 상소(上疏)하여 근세(近世)의 처사(處士) 조성기(趙聖期)를 포양(褒揚)할 것을 청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저 학문을 논한다면 오직 이치를 궁구(窮究)하는 것과 몸가짐을 경근(敬謹)하는 것 두 가지 뿐입니다. 이제 조성기의 학문이 만약 몸가짐을 경근하는 것으로 논한다면 신이 그 어떠한가를 알지 못하지마는, 만약 이치를 궁구한 것을 말한다면 그 이룩된 경지(境地)가 또한 뛰어납니다. 그 높고 밝은 경지에 마음을 두고 풍경(風景)과 화초(花草)에 흥취(興趣)를 붙이는 것은 소옹(邵雍)과 비슷하고, 고금(古今)의 사적(史籍)을 관철(貫徹)하여 치란(治亂)의 이치를 궁구한 것은 여조겸(呂祖謙)에 근사하며, 고담 준론(高談峻論)이 강하의 물결같이 용솟음치는 것은 진양(陳亮)과 같고, 근본(根本)에 돌아가서 만 가지 이치를 종합하는 것은 반드시 고정(考亭)148) 을 본받았으니, 우리 나라 3백년 이래 석학 거유(碩學巨儒)를 손꼽아 보더라도 아마 견줄 자가 없을 것입니다. 고(故) 참판(參判) 임영(林泳)과 고(故) 판서 김창협(金昌協) 등 여러 사람들이 함께 사귀어 의심된 것을 물어보고 매양 망양(望洋)의 한탄149) 을 하였습니다. 만약 조성기가 중조(中朝)에 태어났다면 조가(朝家)에서 포장(褒奬)하여 등용하고 유림(儒林)에서 우러러 사모하여 명성(名聲)이 한 세대(世代)에 빛났을 것인데, 우리 나라에서도 옛 도(道)를 좋아하고 인재(人材)를 사랑하는 기풍(氣風)이 전혀 없었으므로, 비록 조성기와 같은 뛰어나고 기이(寄異)한 인물에게도 그 생전(生前)에 징소(徵召)가 미치지 못하고 사후(死後)에도 포장이 없었으니, 어찌 차탄(嗟歎)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특별히 증직(贈職)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관(堂上官)을 불러 보았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문명(趙文命)이 말하기를,
"이번에 최필웅(崔必雄)을 잡은 사람에 대하여는 그 직분에 당연히 할 일이니, 논상(論賞)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하교하셨습니다. 그러나 외간(外間)의 의논에 모두 말하기를, ‘마하라(馬何羅)를 잡은 사람도 또한 후(侯)를 봉(封)하였으니, 최필웅이 비록 하찮은 환관(宦官)이나 그날 화기(禍機)가 호흡(呼吸) 사이에 닥쳤으며 또 여러 흉적들과 체결(締結)하여 역모(逆謀)가 낭자(狼藉)하게 드러났으니, 잡은 자를 상(賞) 주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영의정(領議政) 홍치중(洪致中)에게 물었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최필웅은 실로 흉악한 역적이니, 잡은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지나친 일이 아닙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날 일에 대하여는 이미 하교하였다. 내가 마침 잠이 오지 않기에 중관(中官)을 불러 대초(代草)하게 한 일이 있었는데, 물러갈 즈음에 수상한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낮은 목소리로 군사를 불러 말하기를, ‘모물(某物)을 나에게 가져다 달라.’ 하니, 도둑이 그 소리를 듣고 뛰어 달아났다. 이에 내반원(內班院) 고군(雇軍)이 급히 쫓아가 잡아 호패(戶牌)를 상고해 보니 과연 최필웅이었는데, 이는 좀도둑질을 하러 온 것이 아니므로 물으니 과연 생각한 바와 같았다. 대개 발각한 자는 중관(中官)이요 잡는 자는 군사이니, 만약 중관이 아니었다면 마땅히 녹훈(錄勳)을 해야 할 것인데, 이미 중관이므로 다만 전례를 상고하여 논상(論賞)하도록 명하였다. 일찍이 사첩(史牒)에 중관을 녹훈한 것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항상 그르게 여겼는데, 중관에게 만약 시상(施賞)의 길을 터놓으면 후일에 반드시 책훈(策勳)하는 폐단이 있을 것이니, 내가 지난(持難)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자, 홍치중이 말하기를,
"성교(聖敎)는 환시(宦寺)를 억제하고 후폐(後弊)를 막는 뜻에서 나왔으니, 참으로 거룩한 덕망(德望)의 일입니다. 그러나 다만 최필웅을 잡을 때에 그 사람이 지휘한 공로가 있으니, 약간 상전(賞典)을 베푸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환시(宦寺)에게 상을 주면 후세에 반드시 말썽거리가 될 것이다. 군사에게는 권장(勸奬)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으니, 특별히 가자(加資)하고 쌀과 무명을 넉넉히 주는 것이 옳다."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동필(金東弼)은 말하기를,
"역가(逆家)의 전토(田土)로써 약간 지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토건 미포(米布)건 간에 그 소원에 따라 참작하여 지급하게 하라."
하였다.
5월 29일 병신
"해(垓)의 집을 헐어 없애고 그 터에 못을 파지 말라는 일로써 이미 하교하였는데, 해조(該曹)에서 구별하지 않고 혼동하여 서계(書啓)하였다. 이와 같이 한다면 어의궁(於義宮)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둔 대지(垈地)는 빈터만 남을 것이니, 다만 나의 마음이 슬플 뿐만 아니라, 사체에 있어서도 또한 미안한 일이다. 그 낭관(郞官)을 잡아들여 추문하여 정죄(定罪)하게 하라."
하였다.
정우량(鄭羽良)을 응교(應敎)로, 여선장(呂善長)을 교리(校理)로, 윤휘정(尹彙貞)을 부교리(副校理)로, 윤순(尹淳)을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삼았다.
임금이 성균관(成均館)의 도기(到記)를 상고해 보고 유생(儒生)과 재임(齋任)이 원점(圓點)150) 에 부지런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는 하교를 내리니, 여러 유생들이 서로 이끌고 권당(捲堂)151)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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