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26권, 영조 6년 1730년 6월

싸라리리 2025. 9. 9.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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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무술

신사철(申思喆)을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대사성(大司成)이 아뢰기를,
"유생(儒生)들을 불러와서 성교(聖敎)를 선포(宣布)하고 식당(食堂)에 들어가도록 간곡히 권유하니, 여러 유생들이 소회(所懷)를 써 올려 이르기를, ‘어제 재임(齋任)·색장(色掌) 등이 원점(圓點)에 달하지 못함으로써 성교에 말씀하시기를, 「선비가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는가?」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변화하기 어려운 선비의 기습(氣習)은 차라리 다스리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하셨으므로 재임과 색장이 물러나와 머리를 땅에 조아렸으니 불안한 점은 다름이 없기에 서로 이끌어 권당(捲堂)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되풀이하면서 개유(開諭)했으나 끝내 듣지 않고 식당을 비워버렸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제 소회(所懷)를 살펴본즉 과연 그 연유가 있으며, 삭수(朔數)도 또한 차지 않았으니, 마땅히 앞날의 결과를 살펴보겠다. 처음에 내린 비지(批旨)는 우선 효주(爻周)152)  만 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것이니, 여러 유생들도 또한 스스로 반성(反省)하여 면려(勉勵)하도록 효유하고 다시 권유하여 식당에 들어오게 하라."
하였는데, 여러 유생들이 하유(下諭)를 받들고 도로 들어왔다.

 

6월 2일 기해

이세근(李世瑾)을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삼았다.

 

부수찬(副修撰) 김상성(金尙星)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삼사(三司)를 업신여기는 것이 실로 성덕(聖德)에 누(累)가 됩니다. 복합(伏閤)했을 때의 일로써 말하더라도 삼사의 계사(啓辭)에 대하여는 조금도 가차없이 윤허하기를 거절하였는데, 종신(宗臣)의 계사에 대한 비답에는 〈윤허한다고〉 순순(諄諄)히 하유(下諭)하셨습니다. 또 어제 비망기(備忘記)를 삼가 본즉, 심지어는 사체를 알지 못한다고 헌신(憲臣)을 책망하였으며, 성균관 유생의 도기(到記)에 대한 비답에도 또한 사기(辭氣)가 평순(平順)하지 아니하여, 변화하기 어려운 기습은 차라리 다스리지 않는 것이 낫다는 하교는 사령(辭令)을 조심하는 뜻에 어긋났으니, 빨리 환수(還收)하기를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사체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사체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으로 개정(改正)하라. 도기(到記)에 대한 비망기는 이미 효주(爻周)했다."
하였다.

 

6월 2일 기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6월 3일 경자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병태(李秉泰)를 특별히 파직시켰으니, 지난해 하교한 후에 반드시 민진원(閔鎭遠)과 더불어 거취(去就)를 함께 하려 한 때문이었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정언(正言) 민정(閔珽)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제 국옥(鞫獄)에 참여하였을 때 마침 나계태(羅啓泰)를 잡아 올 때에 수색(搜索) 해 얻은 문서를 본즉 나계태의 아비 나홍언(羅弘彦)의 책자(冊子) 속에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 많았고,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이천해(李天海)를 포장(褒奬)한 데 이르러서는 더욱이 흉악하고 참혹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나홍언을 빨리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잡아들여 엄중히 국문(鞫問)하여 왕법(王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겠다고 비답하였다.

 

박필기(朴弼琦)를 집의(執義)로, 이귀휴(李龜休)를 장령(掌令)으로, 서명균(徐命均)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송성명(宋成明)을 공조 참판(公曹參判)으로, 조명익(趙明翼)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조현명(趙顯命)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6월 4일 신축

임금이 하교하기를,
"나홍언(羅弘彦)을 잡아 온 후에 마땅히 친히 국문하겠으니, 나계태(羅啓泰)는 그대로 본부(本府)에 가두어 두어 우선 신문하지 말고 이 봉서(封書)는 정원(政院)에 머물러 두게 하라."
하였다.

 

정언(正言) 정언섭(鄭彦燮)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나홍언이 차마 나라를 원수처럼 보는 마음으로써 흉적(凶賊)을 포장(褒奬)하는 말을 지어냈으니, 이는 일종(一種)의 흉역들이 불문(佛門)을 옹호(擁護)하듯 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 포장한 바가 아마도 몇 개의 흉역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이천해(李天海)의 사이에 함께 나열(羅列)하였을 것이니, 그 포장한 데에서 그 사람도 흉역에 동조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흉악한 말은 그도 반드시 전해 들은 곳이 있을 것이니, 그 내력(來歷)을 상세히 추문하여 빨리 왕법(王法)을 바로잡으소서. 나계태(羅啓泰)는 그 아비의 정상을 알지 못할 이치가 없을 것이므로 이로써 엄중히 사핵(査覈)하여 신문함이 옳으니, 우선 신문하지 말라는 하교는 타당한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역적의 괴수 이인좌(李麟佐)의 아들은 나이가 찼는데도 해도(海島)에 압송(押送)하여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빨리 정형(正刑)에 처하게 하소서. 이세열(李世說)이 최필웅(崔必雄)과 체결한 정상은 정수명(鄭守命)의 초사에 이미 밝혀졌고 신문 아래에 저도 또한 자복(自服)했으니, 역모에 함께 참여한 것은 다시 논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의(謀議)한 정상을 미처 취초(取招)하기 전에 형장(刑杖) 아래에서 버티다가 지레 죽었으니, 그 아비 이감(李椷)이 집에 있으면서 어찌 감히 모른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정상을 탐문하는 길은 오직 이함에게 달려 있으니, 비록 다른 죄로써 멀리 정배(定配)하였더라도 국청으로 하여금 잡아들여 그 정상을 사핵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말이 옳으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나계태의 일에 관하여 〈그 아비〉 나홍언을 기다린 것은 혹시 형장 아래에서 지레 죽을 것을 염려한 때문이다."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5일 임인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을 불러 보았다. 영의정(領議政)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삼가 여러 도(道)의 장계(狀啓)를 본즉, 양맥(兩麥)153)  이 흉작(凶作)인 것은 여러 도가 마찬가지이니, 민간의 일이 아주 급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 등이 각별히 염려하여 진휼(賑恤)의 방책을 미리 강구(講究)하라."
하매, 홍치중이 말하기를,
"호남(湖南)에 무역해 둔 쌀을 만약 실어오게 한다면 참으로 좋은데, 선척(船隻)이 매우 귀하니 별달리 양호(兩湖)에 통첩하여 지방의 선척으로써 시급히 실어 보내게 할 수는 있으나 이것도 또한 기일(期日)에 맞추어 올라오게 하도록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동필(金東弼)은 말하기를,
"호남(湖南)과 관서(關西)에 무역해 놓은 쌀의 수량이 4만여 석에 달합니다. 이제 만약 강도(江都)에 2만 석을 지급하고 본부(本府)로 하여금 주관하여 미곡(米穀)을 운반하게 한다면 강도에는 변란에 대비하는 선척이 많이 있으니, 차원(差員)을 정하여 압령(押領)하여 오게 하면 일이 착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 밖에 2만 석은 진휼청(賑恤廳)에 지급하고 이것은 본도(本道)에 본부하여 지방의 선척과 경강(京江)의 선척 중에서 편의에 따라 고용(雇用)하고 차원(差員)을 정하여 실어 보낸다면 또한 매우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홍치중이 또 심택현(沈宅賢)·송인명(宋寅明)을 비국(備局)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으로 차임(差任)하고 김취로(金取魯)를 경리청(經理廳) 주관 당상(主管堂上)으로 차임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홍치중이 또 말하기를,
"전(前) 판부사(判府事) 이관명(李觀命)은 아직도 파직(罷職) 중에 있으니, 사체에 비추어 어찌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척(咫尺)의 앞 자리에서 손을 잡고 면유(面諭)하니 다시는 이광좌(李光佐)를 원수로 보지 않겠다는 뜻으로 정녕히 말하였는데, 물러간 후에는 곧 뉘우치는 뜻으로써 소를 올리고 시골로 내려갔으니, 이것이 어찌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민진원(閔鎭遠)은 비록 고집스럽고 변통성은 없으나, 오히려 성품은 곧았다. 오늘 하교한 후에 여러 신하들이 민진원·이관명과 더불어 거취(去就)를 같이 하려고 하는 자는 나의 신하가 아니며, 내가 만약 관대(寬貸)한다면 또한 18일에 하교한 본의(本意)가 아니다."
하였다. 김취로(金取魯)가 말하기를,
"오늘날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어찌 감히 두 신하와 더불어 거취를 같이할 자가 있겠습니까? 나라에 명예(名譽)를 좋아하는 풍습이 있어서 여러 신하들이 모두 그 명예를 아끼고 진퇴(進退)에 구차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명예를 좋아하기 때문에 차라리 임금에게 죄를 지을지라도 그 당파에게 죄를 짓지 않으려 하니, 참으로 곤란한 일이다."
하니, 김취로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지성으로 나라가 다스려지기를 원하여 반드시 시상(時象)을 조화(調和)시키려고 한다면, 누가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민정(閔珽)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는데, 흉적의 초사(招辭)에서 나온 여러 사람을 빨리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치죄(治罪)하라는 일에 이르러서는 임금이 말하기를,
"일이 역옥(逆獄)에 관계된 것이면 대신(臺臣)들의 간쟁(諫諍)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 가운데 분명히 무함을 입은 자외에도 또한 경중(輕重)의 구별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근일에 문안(文案)을 상고해 보니, 이명언(李明彦)과 이하택(李夏宅)은 바야흐로 대계(臺啓)가 발단(發端)되었고 황익재(黃翼再)는 이미 잡혀 왔는데, 그 밖에는 모두 영남(嶺南) 사람이다. 영남 사람은 안문(按問)하지 말라는 일로써 이미 본도(本道)에 효유했는데, 만약 아무런 단서도 없이 또 안문한다면 믿음을 보이는 도리가 아니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신방(申昉)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심택현(沈宅賢)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조세후(趙世垕)를 장령(掌令)으로, 신택하(申宅夏)·심성진(沈星鎭)을 지평(持平)으로, 심태현(沈泰賢)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송인명(宋寅明)을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삼았다.

 

6월 6일 계묘

지평(持平) 신택하(申宅夏)가 상소(上疏)하여 임징하(任徵夏)를 국청(鞫廳)에 보내어 엄형(嚴刑)으로써 취초(取招)하기를 청하니, 이미 처분했다고 비답하였다.

 

본부(本府)에 국청(鞫廳)을 설치하였다. 죄인 김중기(金重器)가 공초(供招)하기를,
"신이 출정(出征)할 때 장전(帳殿)에 아뢰기를, ‘이제 출정함에 있어 말[馬]을 구(求)한 후에야 갈 수 있는데, 타고 갈 말을 창졸히 구하기가 어렵습니다.’고 하였으니, 이는 신이 창졸간에 말이 분명하지 못한 탓입니다. 신이 또 말하기를, ‘군대의 장비(裝備)를 정제(整齊)할 즈음에 반드시 밤이 깊어지게 될 것이므로 명일에 비록 길을 떠나더라도 수원(水原)은 갈 수 있습니다.’ 하니, 성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안으로 출발하라.’ 하셨으므로 조정을 하직하고 나왔는데, 남대문(南大門)에 당도한즉 문이 이미 닫혔으므로 표신(標信)을 계청(啓請)하는 즈음에 밤은 이미 2경(二更)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두류(逗遛)한 것이 되겠습니까? 이유익(李有翼)은 곧 신의 며느리의 남동생이니, 가난할 때에 말 쌀[斗米]을 보내 준 것은 며느리의 체면을 위한 일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유익이 비록 모역(謀逆)을 했다 하더라도 인아(姻婭)의 척분(戚分)이 있는 자들이 어찌 이유익을 따라 모두 역적이 될 이치가 있겠습니까? 신의 이름이 역적의 초사에 나온 내력을 논한다면, 이유익이 조덕규(趙德奎)에게 말하기를, ‘내가 만약 총융사(摠戎使)를 유도(誘導)한다면 반드시 들어올 것이다.’ 하자, 조덕규가 이 말을 조상(趙鏛)에게 전했는데, ‘반드시 들어온다[必入]’는 두 글자는 장차 들어올 것이라는 뜻이니, 그 후에 이미 들어왔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이유익이 망명(亡命)할 때에 말을 사서 준 사람을 포청(捕廳)에서 염탐하여 잡아들여 정배(定配)했으니, 신이 말을 주지 않은 실상은 이에 의거하여도 알 수가 있습니다. 신의 죽은 아들을 장사 지낼 때에 이유익이 철원 농장(鐵原農庄)에 갔었으므로 망명할 때에 제가 과연 농장에 숨어 있었으니, 어찌 가리켜 보낼 이치가 있겠습니까? 수원 부사(水原府使)를 무변(武弁)으로 차출(差出)할 것을 청한 일은 신이 15년 후에 다시 총융청(摠戎廳)에 들어와 보니 군제(軍制)가 모두 퇴폐(頹廢)해졌으므로, 신이 개연(慨燃)히 옛 제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과연 상소 한 장을 진달한 것인데, 묘당(廟堂)에서 문신(文臣)을 차송(差送)할 의논이 있음을 들었으므로 소본(疏本)을 도로 찾아 무변을 차출하도록 청한 말을 뽑아버렸으니, 이 밖에는 다시 진달한 말이 없습니다."
하였다.

 

6월 9일 병오

헌납(獻納) 유언통(兪彦通)이 상소(上疏)하여 시폐(時弊)를 진달하였는데, 말은 비록 번잡하게 많았으나 실로 채용할 만한 것은 없었다.

 

허옥(許沃)을 집의(執義)로, 조태언(趙泰彦)을 정언(正言)으로, 이삼(李森)을 한성 판윤(漢城判尹)으로 삼았다.

 

6월 10일 정미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 유언통(兪彦通)·정언(正言) 민정(閔珽)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흉역(凶逆)에 동조한 것은 참으로 보통의 인정으로는 추측할 수가 없으니, 이미 역적의 초사에서 나왔으면 한 번 사핵(査覈)하는 것은 단연코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의(信義)란 것은 진실로 왕자(王者)가 소중히 여기는 바이오나, 국옥(鞫獄)의 사체가 지극히 엄중하오니 구구(區區)한 소신(小信)은 이에 비교하면 도리어 가벼운 것입니다. 비록 영남(嶺南) 사람들이 스스로 도모(圖謀)하는 도리로써 말하더라도 이러한 죄명(罪名)을 짊어지고 한 번도 변명하지 않는다면 장차 천지 사이에 용납되지 못할 것이니, 그대로 버려두고 묻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빨리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正言) 조태언(趙泰彦)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의금부(義禁府)의 일차 죄인(日次罪人)154) 유호(柳灝)는 권익관(權益寬)의 심복 편비(心腹褊裨)로서 박창제(朴昌悌)와 더불어 막하(幕下)에 함께 있으면서 전립(戰笠)과 초혜(草鞋)를 시장(市場)에서 구입하는 일과 마철(馬鐵) 1천 부(部)를 급속히 제조하는 일들을 제가 스스로 주장하였으며, 박창제가 장교(將校)를 열(列)지어 세울 즈음에 손수 칼을 뽑아들었고, 공문(公文)를 가지고 온 금군(禁軍)을 불러 볼 때에 박창제가 유호와 함께 밀실(密室)에 몰래 들어가 도신(道臣)에게 전달하는 시급한 공문을 사사로이 뜯어 보았다는 등의 말이 이미 여러 사람의 초사에서 나왔으며, 안무사(按撫使)의 장계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또 변란의 초두에 유호가 군복(軍服) 차림으로써 각참(各站)에 큰 말 2필씩을 배정(排定)시키고 함흥(咸興)에서 안변(安邊)에 이르기까지 4일의 노정(路程)을 창황히 하루 사이에 달려갔으니, 그 정상을 추측할 수가 없습니다. 국청(鞫廳)에 옮겨 보내어 엄형(嚴刑)으로써 신문하는 것은 결단코 그만둘 수가 없는 일입니다. 윤유(尹游)가 관서(關西)의 도백(道伯)으로서 임기(任期)가 차서 체임(遞任)된 지 겨우 반년만에 또 그 아우가 부임(赴任)하였으므로, 관서의 중지(重地)가 문득 윤순(尹淳) 형제가 번갈아 대신하는 물건이 되었으니, 일반의 마음이 모두 해괴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빨리 다른 사람으로 바꾸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본부(本府)에 국청(鞫廳)을 설치하였다. 광악(光岳)을 두 차례 신문(訊問)하고 형장을 친 지 열 세 번만에 공초(供招)하기를,
"이른바 김 진사(金進士)란 자는 곧 김이로(金履輅)이니 나계태(羅啓泰)와 더불어 항상 정도륭(鄭道隆)의 책방(冊房)에 가서 머물러 있었습니다. 유속(柳涑)은 정사효(鄭思孝)의 서역(書役)을 맡은 사람이니 불러서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전라 감영(全羅監營)에 갔을 때에 어느 날 책방에서 관풍각(觀風閣)에 갔었는데 판관(判官)이 들어오니, 정사효가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너는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판관의 아들도 또한 감영에 왕래했는데, 수상한 일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무신년155)   1월에 올라온즉, 신의 종조(從祖) 만기(晩奇)가 말하기를, ‘근래에 전라 감사(全羅監司)가 모반(謀叛)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네가 올라왔으니, 참으로 잘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6월 11일 무신

환시(宦寺) 이선재(李善栽)가 전(前) 감찰(監察) 이우명(李遇命)과 더불어 산송(山訟)이 벌어졌는데, 이선재가 많은 장정(壯丁)을 이끌어 이우명의 내정(內庭)에 들어가 이우명의 상복(喪服)을 찢고 소란을 피우며 후욕(詬辱)한 것이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이에 이우명이 사헌부(司憲府)에 호소하매 장령(掌令) 조세후(趙世垕)가 이선재를 잡아 가두니, 임금이 대신(臺臣)이 사체(事體)를 알지 못한다고 하여 중벌(重罰)에 따라 추고(推考)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송성명(宋成明)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광덕(李匡德)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6월 12일 기유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문명(趙文命)과 병조 판서(兵曹判書) 김재로(金在魯)로 하여금 각기 자문(咨文) 1통(痛)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제주(濟州) 사람이 표류(漂流)하여 청(淸)나라 지경(地境)에 이르렀는데, 그가 가진 마패(馬牌)에 명(明)나라 천계(天啓)156)  의 연호(年號)가 새겨져 있으므로 호인(胡人)이 이로써 발문(發問)하였으니, 대개 마패는 조종조(祖宗朝) 때 옛날에 주조(鑄造)한 것으로 명나라 연호가 새겨져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장차 회자(回咨)를 보냄에 있어 사단(事端)이 발생될까 염려하여 말을 만들기에 현란(眩亂)하였다. 두 신하는 바야흐로 중용(重用)되어 실권(實權)을 잡았으므로, 영상(領相) 홍치중(洪致中)이 두 신하로 하여금 각기 지어 올리게 하여 이를 취사(取捨)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2일 기유

임금이 숭정문(崇政門)에서 친히 국문(鞫問)하였다. 죄인 나홍언(羅弘彦)을 신문하기를,
"너의 아들 나계태(羅啓泰)를 잡아 올 때 수색(搜索)하여 검사(檢査)한 문서 가운데에 네가 기록한 책자(冊子)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 차마 귀로 들을 수 없고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말이 있었다. 이는 시골 유생(儒生)이 지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니, 필시 말을 전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말단에는 경종(景宗)을 핍박한 부도(不道)한 말이 있었으니, 이는 반드시 경자년157)   이후에 일종(一種)의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들이 감히 나라를 원수처럼 여기는 마음이 생겨 흉악한 말을 지어내어 역모(逆謀)를 꾸밀 기회를 삼은 것이다. 그들이 뜻을 얻지 못한 까닭으로 원망하는 말을 만들어 감히 말하지 못할 자리에 미친 것이 더욱 불을 보듯이 분명하다. 그 밖에 흉악한 말이 모두 너의 책자에 기재되어 있으니, 비록 차마 문목(問目)에 제설(提說)하지 못했으나 그 들은 바 연월일과 그 말을 전한 사람을 처음부터 끝까지 낱낱이 바른 대로 공초(供招)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책자에 기록한 바는 그 때에 들은 바가 이와 같았던 때문이며, 그 기록 가운데 모발(毛髮)이 늠연(凛然)하다고 한 말은 듣고 놀라서 괴이하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나두동(羅斗冬)과 나두추(羅斗秋)가 서로 수작(酬酌)할 때에 이 말을 들었으며, 그의 아들 나만후(羅晩厚)도 자리에 있어 함께 들었습니다. 이른바 ‘절의(節義)가 늠연(凛然)하다.’는 것도 또한 널리 퍼진 말을 들은 것이며, 이른바 ‘시(時)’자(字)는 곧 남인(南人)이 득시(得時)한다는 말입니다. ‘나라의 형세가 오래 가겠는가?’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그릇 기록한 듯합니다.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이 신(臣)이라 일컫지 않고 나리[進賜]라고 일컬었다는 말은 나숭훈(羅崇訓)의 두 아우 나숭열(羅崇說)·나숭의(羅崇誼) 및 나만적(羅晩迪)에게서 들었는데, 나숭열이 영광(靈光)·창평(昌平) 등지에 왕래하면서 듣고 와서 김남복(金南復)에게 전했다고 하며, 제가 회진(會津)에 있는 박가(朴哥)에게 찾아가 이천해(李天海)에 관한 일을 박가에게 전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또 나계태(羅啓泰)에게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해가 오래 되어 상세히 기억할 수는 없는데, 김남복이 회진(會津)에 왕래하면서 이 말을 듣고 전하였습니다. 사인(士人) 최혼(崔俒)은 곧 김남복의 외사촌(外四寸)으로서 회진에 거주(居住)하고 있는데, 김남복이 자주 왕래했으니, 생각건대, 아마도 최혼에게서 들었을 것입니다. 김남복이 가끔 어두운 밤에 신의 아비에게 찾아왔는데, 시사(時事)를 전해 말하기를, ‘이천해와 김일경은 죽은 것이 그 죄에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나홍언이 두 차례 형문(刑問)을 겪고 바른 대로 공초하기를,
"신이 흉역(凶逆)한 마음으로 책자를 만들었는데, 그 말의 출처(出處)는 나두동(羅斗冬)·나두추(羅斗秋)·나숭의(羅崇誼)·나숭훈(羅崇訓)·나숭열(羅崇說)·김남복(金南復)·오창좌(吳昌佐) 등이며, 김남복은 회진(會津)에 거주하고 있는 진사(進士) 임광헌(林光憲), 유학(幼學) 박사맹(朴師孟)에게서 듣고 와서 신에게 전하였으니, 그가 전한 말은 곧 이천해에 관한 일이므로 신이 듣고 책자 속에 기록하였습니다. 역적 김일경에 관한 일은 나두동의 아들 나만조(羅晩肇)가 그 아비의 들은 곳을 알 듯합니다. 김일경과 목호룡의 일에 관하여는 나숭열이 또 말하기를, ‘저의 매부(妹夫) 이만춘(李萬春)과 최종조(崔宗朝)에게서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나홍언이 한 차례 낙형(烙刑)을 받고 바른 대로 공초하기를,
"책자에 기록된 흉악한 말은 김이로(金履輅)가 또한 일찍이 신에게 말을 전하였습니다."
하니, 이에 죄인 이만춘·김이로가 나홍언과 대질(對質)하였다. 나계태는 한 차례 형문을 치르고 낙형(烙刑)으로 시위(施威)했으며, 김이로는 한 차례 형문하였다. 진영(震榮)은 두 차례 신문을 받고 형장(刑杖)을 친지 4도(度)만에 바른 대로 공초하기를,
"괘서(掛書)는 신이 이인좌(李麟佐)·권설(權卨)·나만치(羅晩致)·나만서(羅晩瑞)·나만규(羅晩揆)와 더불어 함께 의논하여 착수하기로 결정하고 좋은 장지(壯紙)에 써서 나만치가 청주(淸州)로 가지고 갔습니다. 이인좌의 말에는 ‘이 방서(榜書)를 걸어 놓으면 사방 사람들이 바람 쓸리듯 할 것이다.’ 하였는데, 글의 내용은 신이 언뜻 보았으므로 지금은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이인좌가 권설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어찌 경종(景宗)의 신하가 아니겠는가?’ 하였으니, 괘서의 대지(大旨)는 이에게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나홍언과 나계태에 대하여 혹은 형장을 가하고 혹은 신문도 하며 심지어는 낙형(烙刑)까지 시행하였으나, 나홍언이 끌어댄 몇 명의 적도들은 모두 시골의 우준(愚蠢)한 무리와 이미 죽은 적도들이었으며 흉언(凶言)의 출처는 끝내 바른 대로 공초(供招)하지 않았다. 이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박사익(朴師益)이 말하기를,
"흉언의 출처를 구핵(究覈)하는 일은 이미 심유현(沈維賢)이 형을 집행하기 전에 죽은 데에서 증거댈 길을 잃었고, 지금 또 이 흉적에서도 단서가 끊겼으니, 어찌 통분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문사 낭청(問事郞廳)158) 유엄(柳儼)이 또한 박사익의 말에 따라 우선 이 적(賊)을 그대로 두고 여러 죄인들을 모두 잡아들이기를 기다려 사핵(査覈)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임금이 박사익의 진달한 바 심유현이 형을 집행하기 전에 죽었다는 설(說)로써 의조(疑阻)한다고 하였으며, 국문에 참여한 원임 대신(原任大臣) 이태좌(李台佐) 등은 모두 말하기를,
"이같은 흉적을 살려둘 수 없으니, 청컨대 박필몽(朴弼夢)의 전례에 의하여 빨리 정법(正法)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 전지(傳旨)로써 참형(斬刑)에 처하라고 명하였다. 전지에 이르기를,
"죄인 나홍언은 역적 나숭곤(羅崇坤)·나만치(羅晩致)의 가까운 친족으로서 매양 나라를 원망하고 임금을 원수처럼 여기는 마음을 품고 임금을 후욕(詬辱)할 계획을 실행하려고 하여 몰래 흉도(凶徒)와 더불어 흉악한 말을 지어내어 서로 전해 퍼뜨렸다. 책자에 기록된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흉악하고 참혹하였으며 경종을 핍박하여 말이 부도(不道)한 데에 관련되었으니, 이것이 이미 매우 흉악한 것이다. 김일경과 목호룡을 절의(節義)로서 포장(褒奬)하였고 이천해(李天海)를 의사(義士)로써 칭찬했으니, 그 마음이 있는 바를 전혀 추측할 수 없었다. 이는 실로 괘서(掛書)의 근거와 흉격(凶檄)의 발단이 되었으니, 무신년의 흉역(凶逆)과 더불어 심장(心腸)이 연결되었다. 제가 이미 대역 부도(大逆不道)로써 자복(自服)하였고 흉언(凶言)을 전해 준 여러 적도들을 곧바로 고발했으니, 흉역의 정상이 남김없이 드러났다. 이같은 흉적(凶賊)을 전례에 따라 결안(結案)하여 처치할 수 없으니, 박필몽(朴弼夢)의 예(例)에 의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13일 경술

정언(正言) 조태언(趙泰彦)이 상소(上疏)했으니, 대략에 이르기를,
"지난해 남태징(南泰徵)·민관효(閔觀孝)의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한 후에 차환(釵鬟)과 같은 사치품을 당상관과 낭청(郞廳)들이 욕심을 내어 가로챈 일이 많았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역적의 재물로써 당상관과 낭청(郞廳)에게 보수(報酬)로 주는 일을 엄중히 금지하소서. 차자(箚子)에 연명(聯名)한 대신(大臣)이 반은 신설(伸雪)되고 반은 신설되지 않았으니, 의리를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조정의 기상(氣象)은 〈완화시키기 위하여〉 온갖 심력(心力)을 기울였으나 한갓 흩어지고 분열(分裂)되는 결과를 불러왔으니, 오히려 작년 8월 이전에 한편으로 전일(專一)한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살펴보지 않았다.

 

임금이 약방(藥房)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 보았다. 영의정(領議政)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마패(馬牌)를 이미 개조(改造)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각도(各道)에 통첩(通牒)하여 낱낱이 거둬들인 후에 마땅히 개주(改鑄)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패는 항상 행용(行用)하고 있으니, 한꺼번에 거둬들인다면 반드시 불편함이 많을 것이다."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서로(西路)에 소용되는 마패를 시급히 먼저 개조하는 것이 마땅한데, 만약 모두 옹정(雍正) 연호(年號)로써 만든다면 현저하게 흔적이 있을 것이니, 순치(順治)와 강희(康熙)의 연호로써 반으로 나누어 만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정직(正直)한 일이 아니니, 모두 옹정 연호를 씀이 옳다."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마패는 각도(各道)에 있는 것이 1백 60여 개요, 서울에 있는 것이 5백 10여 개입니다. 지금도 또한 이 수량에 의하여 개조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도 또한 세 차례 추가하여 만든 것인데 이렇게 많다. 시급히 행용할 수량만을 우선 개조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치중이 또 말하기를,
"괴원 분관(槐院分館)159)  을 오랫동안 하지 아니하여 신방(新榜)160)  이 적체(積滯)되었으니, 청컨대 빨리 분관(分館)하도록 하소서."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일이 매우 늦어졌으니 각별히 신칙하라."
하였다.

 

본부(本府)에 국청(鞫廳)을 설치하였다. 죄인 이감(李椷)이 두 차례 신문(訊問)하고 형장을 친 지 4도(度) 만에 바른 대로 공초하기를,
"신의 여종[婢] 정업(貞業)의 말에 ‘내가 한 마디 말을 입 밖에 낸다면 우리 상전(上典)과 동리 사람들이 모두 화(禍)를 입을 것이다.’ 하매, 신의 아들 이세열(李世說)이 말하기를, ‘그 말은 이천해(李天海)의 무리를 지적한 듯한데 정수명(鄭守命)의 어미 및 최필웅(崔必雄)의 어미와 정업을 한 곳에서 사핵(査覈)한다면 낱낱이 고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작년 겨울에 정업을 불러 물어본즉, 정업이 말하기를, ‘최필웅은 나라에 대하여 죄를 짓고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는데 정수명과 함께 궐내(闕內)에 들어가 불을 지른다면 마땅히 보화(寶貨)를 얻을 것이므로 스스로 좋은 일이 많게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변고를 듣고 즉시 고변(告變)하지 않은 죄는 만번 죽어도 달갑게 받겠습니다. 최필웅과 정수명의 도당(徒黨)은 곧 한강(漢江) 건너편에 사는 황별장(黃別將)과 부동(部洞)에 사는 남경산(南慶山)의 아들 형제와 권해(權瑎)의 양자(養子)의 동생과 박행의(朴行義)의 아들과 목천임(睦天任)인데, 송산(松山)에 자주 왕래했다고 합니다. 고(故) 훈장(訓將) 이집(李䌖)의 아들과 둑도(纛島)에 사는 남하범(南夏範)과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 황진사(黃進士)와 광주(廣州)에 사는 이관제(李觀濟)와 김일기(金一夔)의 둘째 아들로서 급제(及第)한 자와 남소동(南小洞)에 사는 오경증(吳慶增)이 모두 그 도당에 들어갔습니다. 정수명의 어미가 정업에게 말하기를, ‘회현방(會賢坊)에 있는 심 판서(沈判書)의 집이 부유(富裕)하니, 그 도당에 끌어 넣었으면 좋겠다.’고 하였으며, ‘유내(柳䋱)의 아우도 또한 들어왔고 남인(南人) 가운데 조금 이름이 드러난 자들은 모두 그 도당에 들어왔고.’고 하였으니, 정업이 정수명과 서로 친밀했으므로 낱낱이 알고 있었습니다. 불을 지를 계획에 이르러서는 말하기를, ‘최필웅이 먼저 궐내에 들어가 불을 지르면 궐내가 반드시 요란할 것이니 이럴 즈음에 무뢰당(無賴黨) 6,70명을 이끌고 들어가 망측한 일을 할 계획이었으며, 무뢰배(無賴輩)에는 정사효(鄭思孝)의 군관(軍官) 여필적(呂必迪)도 들어오고 역관(譯官) 변삼석(卞三錫)과 그의 아들 변시창(卞時昌)·변시화(卞時和)도 들어오기로 되어 있으며, 대흥 군수(大興郡守) 조륭(趙隆)은 방화(放火)를 담당하여 휴가(休暇)를 얻어 올라오게 되었고, 주세방(朱世邦)도 또한 무뢰당 이몽엽(李夢燁)의 아들 급제한 자와 여필적(呂必迪)의 사촌(四寸) 여필언(呂必彦)을 거느리고 들어오고자 한다.’고 정업(貞業)과 정수명이 정녕 말을 전해왔습니다."
하였다.

 

오광운(吳光運)을 승지(承旨)로, 박문수(朴文秀)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저(李著)를 장령(掌令)으로, 윤득화(尹得和)를 지평(持平)으로, 조적명(趙迪命)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윤혜교(尹惠敎)를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친히 나가서 죄수를 국문(鞫問)하였다. 죄인 이감(李椷)에게 신문하기를,
"네가 어제 죄상(罪狀)을 토실(吐實)한 것이 매우 허황되고 두 번째 초사(招辭)도 또한 매우 수상(殊常)하다. 최필웅이 비록 요망(妖妄)하고 완악하더라도 이러한 흉모(凶謀)를 어찌 한낱 사대부(士大夫) 집의 여종과 함께 도모하겠는가? 네가 당초에 역모에 참여해 알지 않았다면 이런 등류의 말을 상전과 종 사이에 어떻게 경솔히 먼저 입 밖에 낼 수가 있겠느냐? 이는 네가 최필웅과 더불어 흉모를 난만(爛漫)하게 상의한 뒤에 감히 정상을 아는 죄과에 돌리고자 하여 말마다 정업(貞業)을 끌어대고 일마다 정업을 끌어댄 것이 불을 보듯이 환하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죄상을 토실할 때에 이천해(李天海)에 관련된 일은 더욱 흉악하다. 네가 어찌 나라를 원망할 마음이 있기에 흉역의 무리들과 체결하여 예전에 없었던 역모를 지어냈느냐? 숨김없이 곧바로 말하라."
하였다. 세 차례 신문하고 형장을 친지 16도(度) 만에 바른 대로 공초하기를,
"신의 집에 노송(老松)이 있어 거기에 시렁을 매고 〈앉을 좌석을 만들어〉 최필웅을 초청(招請)하였는데, 한두 번 찾아오게 되매 주식(酒食)을 대접하면서 서로 친밀하게 되었습니다. 최필웅이 수문장(守門將) 신행집(申行楫)의 종과 더불어 친밀하여 신행집이 그 종을 시켜 〈최필웅을〉 부르러 보냈습니다. 최필웅이 비록 용렬하지마는, 궐내(闕內)의 출입에 익숙하므로 일을 함께 한 후에야 모역(謀逆)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흉모를 듣고서도 즉시 고발하지 않았으니, 신은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 어제 본부(本府)에서 이미 여러 사람을 지적하여 고하였으니, 잡아들여 추문(推問)하면 상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박행의(朴行義)의 아들이 전부터 이런 일에 잘 가담한다는 것을 최필웅과 정수명이 정업(廷業)과 체결하였으므로 신에게 와서 말하였습니다. 최필웅이 일찍이 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양반(兩班)을 많이 상대하였으나 그대가 화초(花草)를 좋아함을 보고 말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곧이어 나라를 원망하여 모역을 하게 된 것을 신에게 말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너의 얼굴을 알게 된 것이 불행한 일이다.’ 하니, 최필웅이 말하기를, ‘지금은 비탈길을 달려가는 것과 같으니 이미 이 말이 나온 후에 만약 잡히게 된다면 나는 그대에게 책임을 떠넘길 것이다.’ 하므로 사세가 절박하여 함께 일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제 말한 바 여필적이 그 도당에 들어오게 된 일은 최필웅이 항상 말하였습니다. 대개 여필적은 오명항(吳命恒)에게 죄를 짓고 정사효(鄭思孝)의 군관이 되었는데, 최필웅이 이르기를, ‘화약을 가지고 궐내에 들어가 불을 지를 즈음에 여필적은 용력(勇力)이 있으니 쓸 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황기(黃琦)는 박필몽(朴弼夢)의 군관으로서 정수명과 항상 술을 나누며 친분이 두터웠으므로 그 도당(徒黨) 중에 들어온 것입니다. 남경산(南慶山)의 아들에 대하여는 최필웅이 항상 말하기를, ‘그 집은 부유(富裕)하니 우리 도당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는데, 그 후에 들은즉, ‘이 사람은 큰 집이 있었으나 작년에 무단(無端)히 팔아 그 값은 쓸 데에 썼다.’고 하였습니다. 권해(權瑎)의 양자의 동생이 도당에 들어왔다는 일은 정수명이 신에게 말한 것입니다. 목천임(睦天任)은 그 종의 말에 ‘한 번 실패하였는데 또 다시 이런 일로써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겠는가? 이른바 심부름을 시켰다는 것은 궁장(宮墻) 밖에 가서 기다리게 한 일이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목천임이 그 종으로 하여금 정도륭(鄭道隆)의 종과 함께 무덕문(武德門) 밖에서 모여 있게 하였으니, 그 곳에는 초가(草家)가 많으므로 숨어 있다가 기회를 기다려 궁장(宮墻)을 넘어가서 불을 지르려고 한 것입니다. 이집(李㙫)의 아들에 관하여는 정수명이 말하기를, ‘그 집은 매우 부유하므로 들어오기를 요망하였는데 이미 들어온 후에 본즉 매우 가난하여 도리어 나에게 빚을 얻어달라고 졸랐으니 대단히 괴로웠다.’고 하였습니다. 남하범(南夏範)은 점술(占術)에 익숙하므로 최필웅이 구하여 얻었는데 신에게 말하기를, ‘이른바 점치려고 하는 일은 곧 궁장(宮墻)을 넘어가는 일이다.’고 하였습니다. 황진사(黃進士)는 성균관(成均館)에 있는 유생(儒生)인데, 그 사람은 영남(嶺南)에서 올라와 성균관에 머물려 있었으니, 최필웅의 말에, ‘황진사는 의기(義氣)가 있고 또 문장을 잘 짓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관제(李觀濟)는 정수명의 말에 ‘또한 의기(義氣)가 많다.’고 하였고, 김일기(金一夔)의 아들에 대하여서도 정수명이 말하였습니다. 김일기의 조카 김원경(金遠慶)은 곧 신의 형 이집(李㙫)의 처남(妻男)이 되므로 정업(貞業)이 말하기를, ‘모댁(某宅) 양반은 모두 좋은 일에 가담되었다.’고 하였으니, 신이 이로써 김일기의 두 아들이 모두 도당(徒黨)에 들어온 것을 알았습니다. 오경증(吳慶增)은 최필웅과 더불어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친밀하였으며, 심 판서(沈判書) 집에 대하여는 최필웅이 말하였으나 신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신의 같은 도당은 혹은 약속을 하였으나 오직 않은 자도 있고 혹은 먼저 승낙했으나 뒤에 뉘우친 자도 있었으므로 도당이 많지 않았습니다. 유내(柳䋱)의 아우는 당초부터 들어왔고 여필적과 같은 무리는 양반의 오합지졸(烏合之卒)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몽엽의 아들은 선영(先塋)을 이장(移葬)하기 위하여 논[畓]을 팔아 은자(銀子) 50냥을 마련하였으므로 유인(誘引)하여 들어오게 했다.’고 최필웅이 말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여필언(呂必彦)이 만약 우리 편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일을 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천해에 관련된 일은 작년 가을에 박행의의 아들이 신에게 묻기를, ‘그대가 최필웅의 의기(意氣)를 아는가? 이 사람이 이천해가 일을 넉넉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으며, 정업은 항상 공갈하기를, ‘만약 나에게 대우(待遇)를 잘못하면 망측한 말로써 대가(大駕)161)   앞에 고발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천해에 관한 일은 신이 몸가짐을 삼가지 아니하여 최필웅이 왕래할 즈음에 뜻밖의 재난(災難)이 이미 나타났는데, 만약 급작스레 핍박하여 쫓아버린다면 큰 재앙이 즉시 닥쳐오게 될 것이므로 함께 일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모역(謀逆)에 같이 참여한 것이 확실합니다."
하였다. 이감(李椷)이 고발한 변시화(卞時和) 부자(父子)와 주세방(朱世邦)은 체포(逮捕)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니, 대개 변시화 등은 시골 사람으로서 흉모(凶謀)에 참섭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5일 임자

본부(本府)에 국청(鞫廳)을 설치하였다. 이감(李椷)이 세 차례 형문을 겪고 시위(施威)할 즈음에 바른 대로 공초하기를,
"신의 서오촌질(庶五寸姪) 이세엽(李世燁)이 작년 7월에 신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나리[進賜]께서 어떻게 최필웅을 아셨습니까?’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너는 어떻게 최필웅을 알았느냐?’ 하니, 이세엽이 말하기를, ‘최필웅이 나리에게 허무(虛無)한 말을 발설(發說)했으니 이 뒤에는 서로 말할 즈음에 삼가소서.’ 하였는데, 허무한 말이란 곧 모역(謀逆)을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때에 마침 손이 찾아왔으므로 이세엽이 일어나 물러갔습니다. 그 뒤에 또 찾아와 말하기를, ‘근일에 정수명(鄭守命)의 일로써 가슴이 황겁(惶怯)하여 마치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문밖에 당도한 것과 같습니다.’ 하기에, 신이 이내 함께 참여한 사람을 물으니, 이세엽이 말하기를, ‘최필웅과 정수명은 모두 나리께서 쉽사리 말을 누설할 것이라 여기면서 상세히 말하지 않았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별달리 말씀드릴 바가 있으니, 소론(少論)은 원래 태도가 발칙하였습니다. 당초 심유현(沈維賢)이 화약(火藥)을 잃었을 때에 조가(朝家)에서 만약 즉시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끝까지 사핵(査覈)했다면 반드시 최필웅의 일은 없었을 것인데, 그의 우족(右族)은 곧 일찍이 병판(兵判)을 지낸 우의정(右議政) 심수현(沈壽賢)이었습니다. 그 당시 심유현이 군기(軍器)와 화약을 잃은 뒤에 병사(兵使)가 장계를 올려 파직시켰으니, 반드시 조금이라도 의심할 만한 단서가 있었는데도, 대신(大臣)이 곧 국문(鞫問)하기를 청하지 않았으므로 공의(公議)가 매우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심유현의 의심스러운 일로써 이세엽에게 말하니, 이세엽도 그렇다고 말하였습니다. 어제 고발한 남하범(南夏範)·남하문(南夏文) 형제에 대해서는 당초에 정수명의 소개(紹介)로서 마침내 만나보게 되었고, 조륭(趙隆)은 항상 친밀히 지내는 처지로서 그가 역모에 말려들어간 것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근일에 정수명의 말을 들으니, ‘궐내(闕內)에 방화(放火)할 즈음에 조륭이 장차 기일(期日)에 맞추어 휴가를 얻어 서울에 올라오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번에 무슨 연유로 서울에 올라오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여필언(呂必彦)·여필적(呂必迪)이 함께 들어온다는 설(說)은 저들이 신에게 말하였고, 황가(黃哥)가 그 중에 들어왔다는 것은 신도 일찍이 의심하였습니다. 남경산(南慶山)의 아들에 관한 일은 신이 최필웅에게서 그가 함께 참여했다는 말을 들었고, 목천임(睦天任)의 일은 이세엽에게서 들었으며, 이집(李㙫)의 일은 정수명에게서 들었고, 이관제(李觀濟)에 대하여는 정수명이 매양 좋은 양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김일기(金一夔)의 두 아들에 관한 일은 정업(貞業)에게서 들었으며, 그의 큰 아들이 신을 찾아왔기에 신이 말하기를, ‘친밀한 사람이 가까운 곳에 있는데 어찌 찾아보지 않는가?’ 하였으니, 이는 대개 정수명을 가리킨 일인데 김일기의 아들이 〈이 말을 듣고〉 안색(顔色)이 빨갛게 변하였습니다. 이몽엽(李夢燁)에 관한 일은 최필웅에게서 들었고, ‘이 만호(李萬戶)란 자는 무덕문(武德門) 밖에서 살고 있는데 곧 이세기(李世機)의 첩(妾)의 아들로서 궁장(宮墻)을 넘은 발자취를 가끔 보았다.’고 최필웅과 정수명이 말하였습니다. 홍구장(洪九章)은 곧 신과 육촌(六寸)의 인척(姻戚)으로서 조문명(趙文命)과는 사촌(四寸)의 척의(戚誼)가 있었는데, 항상 돈놀이를 하여 이식(利息)을 늘렸으니 중인(中人)과 상한(常漢)들이 그 문(門)에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신이 정수명·이 만호와 둘러앉아 서로 의논할 즈음에 정수명이 말하기를, ‘나리의 친족도 우리 도당(徒黨)에 들어왔습니다.’ 하기에, ‘신이 누구냐?’고 물으니, 정수명이 말하기를, ‘홍구장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미 그 당(黨)에 들어왔으면 무슨 물건을 내놓았는가?’ 하니 정수명이 말하기를, ‘입사(入仕)한 지가 오래되지 않아 마침 돈이 없으므로 다만 50냥만 내놓았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6월 16일 계축

본부(本府)에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밤에 임금이 친히 나와서 죄수를 국문(鞫問)하였다. 죄인 이감(李椷)이 네 차례 형문을 받고 시위(施威)할 즈음에 바른 대로 공초하기를,
"최필웅에게서 들은즉, 종실(宗室) 학성군(鶴城君)이 추대(推戴)된다고 하였는데, 홍구장(洪九章)은 곧 신의 육촌친(六寸親)이니 무슨 혐의스럽고 원망할 것이 있어서 이런 말을 꺼냈겠습니까? 심유현(沈維賢)이 화약(火藥)을 잃은 후에 만약 국청을 설치하고 엄중히 심문했다면 반드시 최필웅의 변란은 없었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어제 과연 발설(發說)이 된 것입니다. 박행의(朴行義)는 원래 서로 미워한 일이 없었으니, 신과 정수명과 더불어 함께 일을 도모했던 자입니다. 남경산(南慶山)의 막내 아들은 일찍이 부채를 두들기며 신에게 말하기를, ‘이천해(李天海)가 한 일을 우리들이 하지 못한다면 이천해가 죄인이 되는데, 사생(死生)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최필웅에게 맡겨 두는 것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목천임(睦天任)은 이름만 걸어놓고 방관(傍觀)하고 있었으므로 일이 성취되면 자신의 공(功)으로 삼고 일이 실패되면 화란(禍亂)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으니, 그 꾀가 매우 간교했습니다. 이집(李㙫)의 아들은 서로 의논할 즈음에 신에게 말하기를, ‘기사년162)                  에 시기(時期)를 놓친 후에는 설령 급제(及第)를 하더라도 조정에서 반드시 등용하지 않을 것이니, 이 일이 성공되면 부귀를 누릴 것이요 실패한다면 비록 멸족지환(滅族之患)을 당하더라도 어찌하겠오?’ 하였습니다. 이관제(李觀濟)가 사는 곳에는 땔나무가 많으므로 정수명이 말을 보내어 땔나무를 가져오기도 하면서 그와 더불어 서로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오경증(吳慶增)은 허술한 인물이 아니니, 그 도당 중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여필적(呂必迪)은 정사효(鄭思孝)의 군관(軍官)이 되어 역모에 관한 일은 팔뚝을 걷어 붙이고 도맡아 말하기를, ‘내부(內部)의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진 후에 일이 성취되는 것인데, 다만 내부의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질지는 알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고발한 가운데 발칙스럽다는 말은 불측(不測)과는 다릅니다. 송인명(宋寅明)이 동류(同類)들을 잡아들여 노론(老論)에게 알랑거려 환로(宦路)에 현달(顯達)할 계획을 하였으니, 그 때에 공론(公論)이 모두 발칙스럽다고 하였습니다. 온건(穩健)한 소론(少論)과 노론(老論) 사이에 신은 용납될 곳이 없으므로 마지 못해서 폐족(廢族)과 더불어 흉역(凶逆)을 하게 되었습니다. 심수현(沈壽賢)에 관한 일은 과연 질시(嫉視)하는 마음으로써 끌어넣었습니다."
하였다. 이감과 정업(貞業)을 면질(面質)시켰는데, 정업이 말하기를,
"금년 3월 15일 내가 미음(米飮)을 가지고 사랑(舍廊) 앞에 가니, 상전(上典)의 처남(妻男) 오 참의(吳參議) 및 정수명(鄭守命)과 의금부(義禁府)의 후동(後洞)에 사는 윤봉사(尹奉事)와 과천(果川)에 사는 진사(進士)의 아들이 나리[進賜]와 더불어 방중(房中)에 앉아서 궁장(宮墻)을 넘어 방화(放火)할 일을 서로 의논하고 있었는데, 계휘(啓輝)가 나를 쫓았습니다."
하니, 이감이 말하기를,
"내가 언제 너로 하여금 죽(粥)을 가지고 오라 했더냐?"
하자, 정업이 말하기를,
"참의 영감(參議令監)은 어찌 젊은 영감이 아닙니까?"
하였는데, 이감이 말하기를,
"젊은 영감은 비록 찬(饌)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더라도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정업이 말하기를,
"4월 무렵에 반찬(飯饌)을 잘 사오지 못한 때문에 심한 형문(刑問)을 받았는데, 그 의도(意圖)는 좌중(座中)의 담화(談話)를 몰래 엿들은 것을 염려한 것이 어찌 아니겠습니까?"
하니, 이감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너를 내보내더라도 너는 매양 정수명의 말을 듣고 반드시 와서 고하면서 기쁜 소식이라고 하였다."
하매, 정업이 말하기를,
"나는 정수명을 알지도 못하는데, 어찌 계휘를 시켜서 불러 오지 않으셨습니까?"
하였다. 정업과 계휘를 면질(面質)시켰는데, 정업이 말하기를,
"3월 보름 무렵에 내가 미음(米飮)을 가지고 사랑(舍廊)에 들어가려 했는데, 과천 서방님 뒷집의 영감윤봉사(尹奉事)와 정수명 등이 함께 앉아 서로 이야기할 때에 네가 어찌 방중(房中)에서 나와 나를 발길로 차지 않았느냐?"
하니, 계휘가 말하기를,
"나는 알지 못하는 일이다."
하였다. 정업이 한 차례 신문을 받고 형장(刑杖)을 친 지 26도(度) 만에 바른 대로 공초하기를,
"안 상전[內上典]이 번번이 꾸짖으며 하는 말이 ‘바깥 양반이 비록 말을 하더라도 네가 어찌 몰래 엿듣느냐?’ 하였는데, 3월 15일에 있었던 일은 제가 고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였다. 계휘가 바른 대로 공초하기를,
"신의 상전(上典)이 비록 사람들을 모아 서로 이야기하는 일은 있었으나, 모두 문자(文字)를 사용했으므로 신이 알 수가 없었습니다. 윤가(尹哥)는 자주 왕래하였고 혹은 유숙(留宿)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오 참의(吳參議)는 곧 오 정승(吳政丞)의 아우인데, 상전의 집에 가끔 찾아와서 혹은 바둑을 두기도 하고 혹은 주찬(酒饌)을 베풀기도 했습니다. 3월 14일인지 혹은 15일에 오 참의가 낮에는 오고 밤에는 오지 않았는데, 바야흐로 찾아와서 상전과 더불어 바둑을 대국(對局)할 때에 정수명도 또한 찾아와서 혹은 대청(大廳)가에서 부복(俯伏)하기도 하고 혹은 뜰 위에 추창해 오기도 했습니다. 그 때에 참의 영감은 갓을 쓰고 남쪽 창문에 기대어 말 언치[馬韉]를 베고 있었는데, 정수명은 툇마루에서 두 손을 짚고 부복하여 감히 얼굴을 맞대고 말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영감과 나리는 문자를 써서 말을 하였고 이내 차고 있는 영락(瓔珞)을 어루만지면서 머리를 끄덕거리며 말을 하였으나, 신은 대문간에 있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날 밤에 정수명이 상전과 더불어 방중(房中)에 함께 있었는데, 신이 혹 사랑 근처에 가면 반드시 손을 휘두르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어찌 행랑방에 물러가 있지 않느냐?’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계휘는 형장 4도(度)를 쳤고, 이감은 결안(結案)을 받아 참형(斬刑)에 처하였으며 법에 의하여 처자(妻子)를 종으로 삼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였다.
임금이 어둔 밤에도 친히 국문한 것은 그 뜻이 옥사(獄事)를 빨리 끝내기 위한 것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감의 공초에 이른바 ‘심수현(沈壽賢)이 병판(兵判)에 있었기 때문에 심유현(沈維賢)의 화약(火藥)에 관한 사건을 〈무사히 해결지었다.〉’는 것은 심수현을 미워서 한 말이니 반드시 온 세상(世上) 사람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하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정업이 이감과 면질할 즈음에 문사 낭청(問事郞廳)        유엄(柳儼)이 말하기를,
"이감의 말이 이미 막혔습니다."
하니, 임금이 걱정이 되어 정업에게 신문하는 조목을 내어 말하기를,
"설령 오명신(吳命新)이 모의(謀議)할 일이 있더라도 정원 선생(政院先生)163)                  이 어찌 사령(使令)과 함께 앉을 이치가 있겠느냐? 포도청(捕盜廳)에서 신문할 때에 네가 겁을 내어 무고(誣告)했더라도 만약 사실대로 대답한다면 초사(招辭)를 변경한 죄는 마땅히 시행하지 않을 것이다."
하니, 정업이 말하기를,
"평일에는 정수명이 뜰 아래에 앉았었는데, 그 날은 한 방에서 같이 앉아 있었습니다."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정석오(鄭錫五)가 말하기를,
"3월 15일날 오명신은 이조 당상(吏曹堂上)으로서 궐내(闕內)에 들어와 정사(政事)를 집행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계휘에게 신문하기를,
"오명신은 그 날 궐내(闕內)에 들어왔다가 밤늦게 일을 마치고 돌아갔는데, 네가 어찌 무고(誣告)하느냐?"
하였으나, 계휘는 장독(杖毒)이 위로 치밀었기 때문에 대답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오명신을 위하여 정업과 계휘로부터 변경된 초사(招辭)를 받고자 하였으나, 두 죄수가 형장을 받으면서도 끝내 초사를 변경하지 않았다.
삼사(三司)          【장령(掌令)            이귀휴(李龜休), 정언(正言)            조태언(趙泰彦), 수찬(修撰)            윤휘정(尹彙貞)이다.】        에서 합계(合啓)하기를, "학성군(鶴城君)은 이름이 역적의 초사에서 나왔는데, 어찌 허망(虛罔)하다고 하여 잡아들이지 말라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레 잡아들였다가 어떻게 처단할 것인가? 미천한 종친(宗親)을 임금의 지위(地位)에 비긴다면, 임금의 지위가 어찌 욕되지 않겠는가? 문서 가운데에서 학성군의 한 조항은 뽑아버리는 것이 옳다."
하였다.

 

6월 17일 갑인

어유룡(魚有龍)을 승지(承旨)로, 윤급(尹汲)과 조상행(趙尙行)을 정언(正言)으로, 조명택(趙明澤)을 부교리(副校理)로, 서명균(徐命均)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前日)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부제학(副提學) 이덕수(李德壽)가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듣건대, ‘옛날 명신(名臣)인 신숙주(申叔舟)·김구(金絿) 같은 분은 매양 홍문관(弘文館)에서 숙직(宿直)할 때에 반드시 밤중까지 글을 읽었으며, 문종(文宗)·성종(成宗) 두 임금께서 혹은 달밤에 직소(直所)에 친림(親臨)하시기도 하고 혹은 물품을 넉넉히 하사(下賜)하기도 했다.’ 하니, 국초(國初)에 인재가 많이 나온 것은 대개 두 임금께서 진흥(振興)시킨 효과에 말미암은 까닭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옥당(玉堂)에서 숙직하는 자들은 당색(黨色)을 구별(區別)하는 말이 아니면 농담과 우스갯 소리로써 시간을 보낼 뿐입니다. 신은 원컨대, 성명(聖明)께서는 문학에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강의(講義)와 토론(討論)에 이바지하게 하시고, 만약 인접(引接)하지 못하는 날에는 또 고사(故事)를 써서 올리게 하여 좋은 언론(言論)이 날마다 옆에 이르도록 하소서. 옛날 송(宋) 인종(仁宗)은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당(唐)나라 고사(故事)를 검토(檢討)하여 날마다 다섯 조항을 써서 올리도록 함으로써 정사(政事)에 도움이 있게 하였습니다. 원우(元祐)164)   연간(年間)에 소자용(蘇子容)165)  이 옛일을 회복하기를 청하였는데 그로 인해서 강독관(講讀官)으로 하여금 강독하지 않는 날에는 각기 한(漢)·당(唐)의 고실(故實)166)   세 가지를 써서 올리도록 하여 마침내 규례(規例)를 삼았는데, 지금은 폐지되어 거행하지 않으니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송신(宋臣) 섭적(葉適)167)  은 말하기를, ‘사과(詞科)가 생기고부터는 사륙문(四六文)168)  을 가장 귀하게 여겼으나 그 글이 지저분하여 쓸모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변려(駢儷)의 괴상한 글로써 문사(文士)를 구(求)하니, 그것이 사리(事理)에 어긋남이 또한 크지 않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지금부터 사륙문을 숭상하지 말고 논책(論策)169)  에서 많이 취(取)한 다음에 당세(當世)의 급무(急務)와 정사(政事)의 궐실(闕失)을 묻고 그 식견과 언론을 상고하여 선발한다면, 거의 실용(實用)을 거둘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고시관(考試官)에 임용할 사람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미리 적임자를 뽑아서 다소(多少)와 자급(資級)에 구애(拘碍)하지 말고 오직 마음이 공정하고 식견이 밝은 사람을 뽑을 것이며, 그 의망(擬望)170)  할 즈음에 미쳐서는 전원(全員)을 써 넣어 성상께서 가려 뽑아 낙점(落點)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말이 매우 확실하니, 어찌 유의(留意)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6월 18일 을묘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친히 나가서 성균관(成均館) 재사(齋舍)에 있는 유생(儒生)에게 강독(講讀)을 시험하고 수석(首席)을 차지한 최덕후(崔德垕)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판부사(判府事) 심수현(沈壽賢)이 역적의 초사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왔다는 이유로 도성(都城)에 들어와 대죄(待罪)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위로하기를,
"경(卿)은 비록 허물을 자책(自責)하나, 나는 경을 보니 매우 기쁘다."
하였다.

 

박내정(朴乃貞)을 승지(承旨)로, 조한위(趙漢緯)를 수찬(修撰)으로, 이광부(李光溥)를 집의(執義)로 삼았다.

 

6월 19일 병진

효장 세자(孝章世子)171)  의 사우(祠宇)가 완성되었으므로 동독(董督)한 여러 신하에게 차등(差等)을 두어 상(賞)을 내렸다.

 

6월 20일 정사

국청(鞫廳) 죄수 광악(光岳)을 기장(機張)으로, 만행(萬行)을 언양(彦陽)으로, 양부(良夫)를 양덕(陽德)으로, 태만(太萬)을 곤양(昆陽)으로, 희태(熙泰)를 보성(寶城)으로, 세징(世徵)을 사천(泗川)으로 정배(定配)하였다.

 

이봉익(李鳳翼)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6월 21일 무오

임금이 친히 나가서 죄수를 국문(鞫問)하였다. 김남복(金南復)이 한 차례 신문을 받고 형장을 친 지 23도(度) 만에 바른 대로 공초하기를,
"나주(羅州)에 사는 김후연(金厚衍)·김후창(金厚昌)·장우규(張宇奎)·나숭헌(羅崇獻)과 그 아들 나계옥(羅啓沃)과 나숭로(羅崇老)로 아들 나계적(羅啓迪)과 배정묵(裵廷默)·배정눌(裵廷訥)과 나숭수(羅崇壽)가 장우규의 집에 모여 책자(冊子)에 적힌 차마 들을 수 없는 흉악한 말을 서로 주고받았으니, 그 시기(時期)는 바로 국상(國喪)이 난 뒤입니다. 배세익(裵世益)과 장우규는 나숭조(羅崇祚)에게서 흉악한 말을 듣고 와서 전해 주었으며, 이내 신으로 하여금 나홍언(羅弘彦)에게 가서 전해 주게 하였습니다. 작년 7월에 또 장우규·나홍언·김후연의 집에서 모여 서로 의논하고 각기 사람 뼛가루를 내어 1석(石) 정도를 만들어 가지고 정사효(鄭思孝)의 집에 보내어 궐내(闕內)에 저주(詛呪)차로 묻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도 또한 강변(江邊)에서 사람의 경골(脛骨)과 두골(頭骨)을 주워 모아 장우규에게 전해 주니 장우규·배세익·김후연 등이 주관하여 가루로 만들었고, 배세익과 장우규가 장차 뼛가루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간다고 하기에 각기 돈 3냥씩을 주어 노자(路資)로 쓰게 하고 겸하여 정채(情債)172)  에 쓰도록 하였습니다. 그 후에 두 사람이 과연 서울에 올라와 사람 뼛가루 4말 가량을 정사효에게 전하여 주니, 정도륭(鄭道隆)이 말하기를, ‘이번에는 이익을 얻을 수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나계태(羅啓泰)는 정사효의 처조카로서 서울에 왕래하면서 정사효의 집에서 유숙(留宿)하여 이런 흉악한 의논을 익숙히 들었으므로 내려온 후에 흉악한 계획을 선창(先倡)해 만들었는데, 장우규와 배세익이 실상은 괴수가 된 것입니다. 나숭훈(羅崇訓)과 나숭열(羅崇說)은 나만적(羅晩迪)의 아들로서 역모에 함께 참여한 것이 확실합니다."
하였다. 김남복이 낙형(烙刑)을 받은 지 5도(度) 만에 바른 대로 공초하기를,
"작년 12월에 나숭조(羅崇祚)가 판서(判書) 심단(沈檀)의 집에 가서 흉언(凶言)을 들었다고 장우규 등이 신에게 와서 전해 주었으며, 배정량(裵廷亮)의 처부(妻父) 정세남(鄭世南)도 또한 심 판서(沈判書)의 집에서 이 말을 듣고 배정량에게 전하였으며 배정량은 나홍언에게 전하였습니다."
하니, 인하여 김남복을 결안(結案)하였다. 임금이 김남복에게 신문하기를,
"나라를 해치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니, 김남복이 말하기를,
"남인(南人)들은 벼슬길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심단은 지위가 정경(正卿)과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너희들과 함께 역모를 하겠느냐?"
하였다. 김남복이 굶주려 먹을 음식을 구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도중(途中)에서는 먹지 않더니 지금은 먹고자 하느냐?"
하였다. 대개 김남복이 잡혀 올 때에 수원(水原)에 이르러 음식을 먹지 않으므로, 나졸(羅卒)들이 민망히 여겨 물으니, 김남복이 말하기를,
"이 나라 곡식을 어찌 먹을 수 있느냐?"
하였다. 문사 낭청(問事郞廳) 정언섭(鄭彦燮)이 금부 도사(禁府都事)에게서 이 말을 듣고 대궐에 들어와서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이 곧 결안(結案)이 된다."
하였다. 나숭열(羅崇說)이 공초(供招)하기를,
"경홍(景弘)은 곧 오신좌(吳藎佐)의 자(字)인데, 나홍언의 집에 오랫동안 있었으니 책자(冊子) 가운데 있는 흉언(凶言)을 알고 있을 듯합니다. 금년 3월 도중(道中)에서 나계태(羅啓泰)를 만났는데, 나계태가 말하기를, ‘정도륭(鄭道隆) 형제의 도모(圖謀)하는 일을 알고 있는가?’ 하기에, 신이 ‘무슨 일이냐?’고 말하니, 나계태가 말하기를, ‘중대한 일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도모한다는 것은 반역을 도모하는 일인 듯하였습니다. 신이 과연 나계태에게서 그 실정(實情)을 알게 되었으니, 흉모(凶謀)과 흉언(凶言)은 신이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나홍언의 아우 나홍헌(羅弘憲)이 서울에서 내려와 말하는 바가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과 비슷했는데, 흉언(凶言)의 근본은 안세항(安世恒)에게서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나숭열이 한 차례 신문(訊問)을 겪고 형장 28도(度)를 받았으며 낙형(烙刑)으로써 시위(施威)할 즈음에 바른 대로 공초하기를,
"안세항 및 그 조카 안윤중(安尹中)의 흉언을 매양 정사효의 집에서 탐문(探問)한즉 안세항의 말이 ‘내가 신축년173)  부터 시작하여 저술한 책자가 있었는데 매부(妹夫) 나홍언에게 보냈으며, 장흥(長興)에 사는 이수경(李綏慶)이 서울의 소식을 듣고 흉언으로써 나홍언에게 전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임징하(任徵夏)를 본부(本府)에 가두어 형추(刑推)하게 되었는데, 임금이 친히 국문(鞫問)을 가(加)하였다. 당시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신사철(申思喆)은 친병(親病)으로써 체차(遞差)되었고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박사익(朴師益)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이세근(李世瑾)은 소명(召命)을 어기고 나아가지 않으니, 임금이 노여워하여 모두 파직시키고 말하기를,
"판부사(判府事) 민진원(閔鎭遠)의 차자(箚子)는 임징하의 상소와 다른데도 스스로 같다고 하니,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금부 당상(禁府堂上)이 서로 연달아 체직(遞職)되므로, 두둔하는 마음이 현저히 있어 차마 형벌을 가하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신자(臣子)의 도리이겠는가? 내가 마땅히 친히 국문하겠다."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신문하기를,
"너의 지난해 한 장의 상소는 그 용심(用心)을 길 가는 사람도 알 수 있을 것이며, 비답을 받든 후에 미쳐 심장(心腸)을 털어놓았는데, 그 후에 피혐(避嫌)한 말이 너의 죄에 대한 단안(斷案)이 될 것이다. 네가 만약 조금이라도 윤리(倫理)를 지키는 마음이 있었다면 보통 사람의 형제간이라 하더라도 결단코 이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치(一治)와 일란(一亂) 등의 말에 있어서는 더욱이 흉악하고 참혹하다. 네가 임창(任敞)의 지친(至親)으로 임창이 죄를 받았다고 해서 마음에 원망을 품고 감히 사군(嗣君)에게 원한을 드러냈으니, 이를 차마 할진대 무슨 짓을 하지 못하겠는가? 이른바 일치·일란이라는 것을 홍수(洪水)와 맹수(猛獸)에 견주어 은휘(隱諱)할 계획을 하고자 했다면 발란·반정(撥亂反正) 등의 말은 또한 무슨 마음에서 나왔는가? 너와 같이 괴상하고 흉악한 무리가 감히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경종(景宗)을 침해 무함하고 군부(君父)를 도리어 무함했으니, 오늘날 세도(世道)가 땅에 떨어지고 의리가 어두워진 것은 네가 아직도 천지 사이에 목숨을 보존하고 있는 때문이다. 본부(本府)의 형장(刑杖) 아래에서 버티어 참고서 자복(自服)하지 않으니, 더욱이 흉악하고 참혹하다. 이제 너를 〈정형(正刑)에 처하지 못하고〉 옥중(獄中)에서 지레 쓰러지게 한다면 군신(君臣)의 분의(分義)가 장차 흔적도 없게 될 것이다. 이제 친히 국문하는 것도 이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숨김없이 곧바로 아뢰라."
하였다. 국문에 참여한 대신(大臣) 이의현(李宜顯)이 말하기를,
"저번에 임징하를 국문(鞫問)하자는 장계에 대하여 윤허하지 않은 것은 성명(聖明)께서 뜻한 바가 있어서입니다. 그런데 이제 금부 당상(禁府堂上)이 버티어 막음으로 해서 친국(親鞫)의 거조(擧措)가 있게 된 것은 타당함을 알지 못하겠는데, 더구나 지금 여러 적도(賊徒)들을 국문하는 날에 혼동하여 국문을 가한다면 사체(事體)에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징하를 국문하는 것을 경(卿)은 지나치다고 생각하는가? 경이 망발(妄發)하였다. 임징하가 물고(物故)되지 않으면 반드시 갈등이 생길 것이니, 임징하를 죽인 후에야 시상(時象)이 조화(調和)될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임징하에게 말하기를,
"네가 감히 결안(結案)을 거절하는데, 너의 생각에는 때를 만나면 살아날 것으로 알고 있지마는 천지(天地)가 뒤집히더라도 다시 너희 무리들이 뜻을 펼 날은 없을 것이다."
하고, 인하여 진노(震怒)하면서 말하기를,
"나장(羅將)은 형장 한 대에 그 정강이를 부러뜨림이 마땅하다."
하였다. 임징하가 말하기를,
"어찌 차마 결안(結案)에 응락할 수가 있겠습니까? 장차 지하(地下)에 돌아가 경종(景宗)을 뵈올 낯이 없는 것이 첫째요, 전하로 하여금 간신(諫臣)을 죽였다는 나쁜 평판을 듣게 함이 둘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간신(諫臣)을 죽였다고 운운하는 것은 장차 후일에 흉언(凶言)의 근저(根柢)가 될 것이다. 다른 죄인은 나졸(羅卒)들이 반드시 붉은 곤장(棍杖)으로 때리는데도 이 죄인에 대하여는 모두 둘러서서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위로는 대신에서부터 아래로는 나졸에 이르기까지 다만 임징하가 있는 것만 알고 임금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니, 임징하를 죽이지 않는다면 나라의 기강(紀綱)을 어떻게 세우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한 차례 형문(刑問)을 가한 다음 본부(本府)에 보내어 연달아 형문을 가하니, 여덟 차례에 이르러 물고(物故)되었다.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이저(李著)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친히 국문하는 사체는 지극히 엄중하온데, 새로 제수된 금부 당상(禁府堂上)이 또다시 패초(牌招)를 어겼으니 나라의 기강(紀綱)이 한심합니다. 청컨대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유숭(兪崇)과 홍현보(洪鉉輔)의 관작을 삭탈하고 성문(城門) 밖으로 내어쫓으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나홍언(羅弘彦)의 책자를 전정(殿庭)에서 불사르라고 명하였다.

 

6월 22일 기미

김동필(金東弼)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로, 김상옥(金相玉)을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삼았다.

 

6월 23일 경신

기우제(祈雨祭)를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최명상(崔命相)을 지평(持平)으로, 박필균(朴弼均)을 정언(正言)으로, 이종백(李宗白)을 교리(校理)로, 임정(任珽)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윤심형(尹心衡)을 응교(應敎)로, 송성명(宋成明)을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삼았다.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들이 14일 친국(親鞫)할 때에 서재(書齋)의 유생 오창좌(吳昌佐)의 이름이 역적의 초사(招辭)에서 나온 까닭에 승정원(承政院)에서 조례(皁隷)를 보내어 도기(到記)를 가져갔으며, 그 다음날 의금부(義禁府)에서 또 사람을 보내어 도기를 가져갔다가 여러 날이 지난 후에 아무런 말도 없이 돌려보냄으로 해서 여러 유생들을 의심의 죄과(罪科)에 두었으므로 권당(捲堂)하였다. 이에 하교하기를,
"유생들의 조치(措置)는 사체에 비추어 당연하다. 의금부에서 도기를 가져갔다가 뒤늦게 돌려보낸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니, 금부 당상(禁府堂上)은 추고(推考)하라."
하니, 여러 유생들이 그 분부를 듣고 도로 들어갔다.

 

교리(校理) 이덕부(李德孚)가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사형수(死刑囚)가 대단히 많으므로 감옥(監獄)에 수용(收容)할 길이 없어 뜰에 장막(帳幕)을 연결하여 수용하고 있으면서 오래도록 처결(處決)하지 못하고 있으니, 급한 경우는 최필웅의 변란과 늦은 경우는 박도창(朴道昌)의 화(禍)가 반드시 없으리라 어떻게 보장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 신하에게 엄중히 신칙하여 빨리 귀결(歸結)을 짓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지평(持平) 최명상(崔命相)이 상소(上疏)하기를,
"정업(貞業)과 계휘(啓輝)의 초사(招辭) 중에 오명신(吳命新)을 끌어넣은 말이 사핵(査覈)할 때에 낭자(狼藉)하게 나왔고, 신문(訊問)할 즈음에도 서로 부합(符合)되어 두 사람의 공초(供招)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과 같았습니다. 특히 날짜의 한 조항에 있어 혹은 14일이라 하고 혹은 15일이라 하였는데, 오명신이 정수명(鄭守命)과 더불어 모의(謀議)한 정상이 낱낱이 드러났으니, 14일이거나 15일은 원래 관계될 것이 없습니다. 하물며 정업이 포청(捕廳)에서 공초할 즈음에 날짜는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었으니, 날짜의 선후(先後)는 논할 바가 아닙니다. 또 오명신이 설령 변명할 만할 단서가 있다 하더라도 그대로 버려두고 신문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김남복(金南復)의 초사에 흉언(凶言)의 근거는 심단(沈壇)의 집에서 나왔다고 하였는데, 심단은 비록 죽었으나 그 아들 심득항(沈得恒)은 아직 살아 있으니, 한 번 잡아들여 사핵(査覈)하는 것이 옥사(獄事)의 사체에 당연합니다. 이러한 역모(逆謀)가 거듭 발생하고 인심이 의구(疑懼)한 날을 당하여 그대로 버려둘 수 없으니, 모두 잡아들여 정상을 사핵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다시 상세히 신문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니, 초사(招辭)를 살펴보고 조처함이 마땅하라."
하였다.

 

본부(本府)에 국청(鞫廳)을 설치하였다. 죄인 계휘(啓輝)를 다시 추문한 문목(問目)에 이르기를,
"너의 처음 초사에는 ‘3월 15일에 이감(李椷)의 집에서 원래 오명신과 함께 모여 유숙한 일이 없다.’고 하였으며, 포청(捕廳)에서는 공초(供招)하기를, ‘15일에 과연 함께 모여 유숙했다.’고 하였고, 친국(親鞫)할 때의 공초에는 ‘14일인지 혹은 15일에 오명신이 아침에 찾아왔으나 밤에는 오지 않았다.’고 했으니, 앞뒤의 초사가 서로 어긋난다."
하고, 형문(刑問)하여 시위(施威)하니 공초하기를,
"당초에 진달한 바가 옳습니다. 포청의 형벌을 참아낼 수가 없어 두 차례 초사를 바꾸었고, 친국(親鞫)할 때에는 정업의 형벌 받는 것을 눈으로 보고 겁에 질려 몽롱(朦朧)하게 공초하였습니다."
하였다. 정업을 다시 추문한 문목에 이르기를,
"네가 포청에서 공초하기를, ‘3월 15일에는 정수명과 오명신이 이감의 집에서 모여 모의(謀議)했다.’고 하였는데, ‘그 날 오명신은 공사(公事)로 인하여 궐내(闕內)에 있다가 저녁에 이감의 집에 가서 유숙했다.’는 것은 말이 이치에 맞지 않았다."
하였다. 형장을 친 지 5도(度)만에 공초하기를,
"오명신의 여종 차매(次梅)와 더불어 싸운 일로 인하여 오명신의 아내에게 가혹한 문책을 당했으므로 원한을 품고 보복(報復)하였습니다."
하였다.

 

6월 24일 신유

빈궁(嬪宮)이 종환(腫患)이 있으므로 내의원(內醫院)의 제조(提調)가 본원(本院)에서 숙직(宿直)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문명(趙文命)은 특별히 입직(入直)하였다.

 

지평(持平) 최명상(崔命相)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업(貞業)과 계휘(啓輝)는 원래 역적 이감(李椷)의 심복 노비(心腹奴婢)이며 오명신은 또 이감의 아내와 동기간(同氣間)이 되는 지친(至親)인데, 이감의 종들이 그 상전(上典)의 지친에게 무슨 원한이 있기에 반드시 죽을 땅에 감히 끌어 넣겠습니까? 하물며 정업의 처음 초사에는 다만 방중(房中)에서 함께 모여 모의(謀議)한 일만을 말하였고, 그 좌석에 있는 여러 사람의 성명을 물은 후에야 비로소 아무 아무가 함께 참여했다고 말했으니, 그 당초의 뜻이 오명신에게 있지 않았음을 이 말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또 그가 몰래 엿들은 일로써 가혹하게 형장(刑杖)을 받은 자취가 있으니, 그 당초의 뜻이 오명신에게 있지 않았음을 이 말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오명신의 아내에게 가혹한 문책을 당한 데에 원한을 품고 오명신에게 원한을 갚았다는 것이 어찌 과연 말이 이치에 맞겠습니까? 그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도리에 있어서는 오명신을 즉시 잡아들여 국문(鞫問)하고 한 곳에서 대질(對質)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끌려 들어온 사람은 그 집에서 의젓이 누워 있고 원고(元告)들은 초사(招辭)를 바꾸기 위하여 형법을 가(加)한다면, 저와 같은 천류(賤流)들이 또한 무슨 심정으로 그 상전의 지친을 돌보지 않고 반드시 나라의 토역(討逆)을 위하여 가혹(苛酷)한 형장을 달갑게 받아가면서 죽기까지 이르도록 변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정업과 계휘에게 앞뒤의 초사가 어긋나는 데에 대하여 더 신문을 가하며, 정업이 고한 바 과천(果川)의 이가(李哥)와 의금부(義禁府) 후동(後洞)의 윤봉사(尹奉事)란 자를 잡아들여 사핵하여 빙고(憑考)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듣건대, 어제 정업과 계휘에게 무고(誣告)로서 초사를 받았는데 문사 낭청(問事郞廳) 남태온(南泰溫)이 정업을 먼저 후청(後廳) 아래에 옮겨 놓고 한결같이 전일의 초사와 같았으므로, 남태온이 혹은 가혹한 형장을 치기도 하고 혹은 결박(結縛)을 풀어주기도 하면서 몇 차례 당겼다 밀었다 하면서 만단(萬端)으로 유혹하고 위협하여 마침내 그 초사를 받은 후에야 그쳤다고 합니다. 계휘에 이르러서는 형문(刑問)하기 전에 먼저 정업이 초사를 바꾼 뜻으로써 바로 언급(言及)하였으니, 그 시위(施威)할 즈음에 바른 대로 공초했다고 말한 것은 대개 이 때문입니다. 이로써 국청(鞫廳)의 자리가 겨우 파(罷)하자 소문이 낭자하게 퍼졌으니, 저 남태온은 어떠한 사람이기에 역옥(逆獄)의 죄수를 신문할 즈음에 감히 임의(任意)로 낮추었다 올렸다 하면서 기탄(忌憚)하는 바가 없단 말입니까? 죄인의 초사를 받을 때에 문사 낭청 한 사람이 초사를 듣고 문자(文字)를 부르면 한 사람은 책상(冊床) 앞에서 붓을 들고 있다가 부르는 대로 받아 쓰는 것이 규례입니다. 어제 나숭열(羅崇說)이 강필경(姜必慶)에 관한 일로써 공초(供招)할 적에 신은 사실을 캐어 묻고 이철보(李喆輔)는 붓을 들고 받아 썼습니다. 나숭열이 공초를 마친 후에 강필신(姜必愼)이 책상 앞에 서서 별달리 몇 줄의 문자를 부르니, 이철보가 한편으로 받아 쓰고 한편으로 강필신에게 묻기를, ‘이것이 과연 죄인의 말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 말을 듣고 괴상히 여겨 그 문자를 살펴본즉, 강필경이 어느 해에 외임(外任)에 나갔다는 등의 말로써 당초 죄인의 공초가 아니므로, 신이 이 구절을 삭제하였습니다. 죄인의 초사는 사사로운 뜻으로써 가감(加減)할 수가 없는 것인데, 저 강필신이 비록 강필경의 죄를 벗겨 주기에 급하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죄인이 당초에 고하지 않은 말을 함부로 불러 쓰도록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남태온은 잡아들여 국문할 것이며, 강필신은 관직을 삭탈하고 성문 밖으로 내어 쫓으소서."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크게 진노(震怒)하여 비답하기를,
"세도(世道)가 괴이하고 의심이 풀리지 아니하여, 만약 평일에 나오게 되면 기화(奇貨)를 얻은 것같이 여기고 다만 혹시 벗어날까 두려워한다. 정업(貞業)의 초사는 말이 이미 허무(虛無)한 데로 돌아가고 또한 수상한 데에 관련되는데, 그 후에 형벌을 가하여 바른 대로 공초하는 데에 돌아가게 했으며, 남태온이 정업의 바른 대로 공초한 것을 계휘에게 먼저 말해 주었으니, 이것도 경솔한 일이다. 그러나 어찌 국문하기까지야 하겠는가? 남태온 한 사람으로 인하여 국옥(鞫獄)의 일에 방해가 되었으니, 자못 미안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본부(本府)에 국청(鞫廳)을 설치하였다. 국청 승지(鞫廳承旨) 이광덕(李匡德)이 국청에 참여한 대신(大臣) 이하의 관원이 최명상(崔命相)의 상소로 인하여 모두 물러나가고 문안(文案)도 반납(返納)했다고 아뢰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본부(本府)에서 국문(鞫問)하는 것은 내가 친히 국문하는 것과는 구별이 있는데, 국문에 참여하지 않고 갑자기 밀갑(密匣) 중의 말을 쓰는 것은 매우 무엄한 일이니, 각별히 신칙하도록 사관(史官)을 보내어 대신 이집(李㙫)에게 전유(傳諭)할 것이며, 지평(持平) 최명상은 특별히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최명상은 언론(言論)이 어긋났고 시상(時象)의 분열(分裂)됨을 달갑게 여겼으므로 앞뒤의 의망(擬望)에 문득 청탁(淸濁)을 가려 의견을 제시(提示)하였다. 세월이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개전(改悛)되었는가 생각하였더니 지난번에 여러 역적의 초사(招辭)에 나온 자를 문득 지적하여 신문(訊問)하기를 청했으니, 마음에 이미 불평을 가졌으며, 상소를 한 번 올리고 두 번 올려 헐뜯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그 마음을 추측할 수 없다. 말은 비록 남태온(南泰溫)을 핑계댔으나 뜻은 실로 방해하는 데에 있었으니, 관작을 삭탈하고 성문 밖으로 쫓아내라."
하였는데, 승정원(承政院)의 복역(覆逆)174)  으로 인하여 옛 기습(氣習)을 개전(改悛)하지 않으니 체차하라고 엄중한 하교를 내렸다.

 

6월 26일 계해

삼품관(三品官)을 보내어 목멱산(木覔山)·삼각산(三角山)·한강(漢江)에 기우제(祈雨祭)를 행하였다.

 

 

 

6월 27일 갑자

왕대비전(王大妃殿)이 환후가 위중하므로 약방(藥房)의 여러 신하들이 통양문(通陽門)에 나아가 국구(國舅) 어유귀(魚有龜)로 하여금 입시(入侍)케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월 28일 을축

왕대비전이 구역증(嘔逆症)이 나고 몸을 떨면서 증후(症候)가 위급하였다. 내국 도제조(內局都提調) 홍치중(洪致中), 제조(提調) 윤순(尹淳), 부제조(副提調) 정석오(鄭錫五)가 임금의 분부로 인하여 달례문(達禮門) 밖으로 나아가니, 임금이 상휘당(祥暉堂)에서 인견(引見)하고 증후를 물었다.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의 하교로써 의관(醫官) 권성징(權聖徵), 현제강(玄悌綱)이 왕대비전의 침실(寢室)에 입시(入侍)하여 증후를 진찰하였다. 임금이 또 약방(藥房)의 여러 신하들을 융무당(隆武堂)에게 인견하고 증후를 묻기를,
"지나치게 몸을 떨고 혹은 통곡하는 소리를 내며 혹은 읍성(泣聲)175)  도 내는데, 의관들은 일찍이 이런 증후를 보았는가?"
하였는데, 중관(中官)이 와서 아뢰기를,
"왕대비전께서 헛소리를 하시는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일어나 침실(寢室)로 들어가니, 대신(大臣) 이하 여러 신하들이 모두 현광문(玄光門) 밖으로 물러갔다. 조금 후에 임금이 어좌(御座)에 나와서 말하기를,
"증후가 별로 아픈 곳은 없는 듯한데, 울음 소리 같은 음성을 내며 손으로 물건을 치는 듯한 형용을 한다."
하니, 홍치중 등이 말하기를,
"보통 이러한 증후가 많이 있으니, 그다지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하였다. 잠시 후에 중관(中官)이 또 와서 아뢰니, 임금이 급히 침실로 들어갔다가 도로 어좌(御座)에 나와서 말하기를,
"사람의 아들된 도리에 극진한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없으니, 기도(祈禱)를 조금도 늦출 수 없다. 종묘(宗廟) 및 사직단(社稷壇)에 대신을 보내어 기도를 거행하게 하고, 제문(祭文)은 교서관(校書館) 당상(堂上)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하며, 여러 집사(執事)는 각별히 선택하여 차출하고 제물(祭物)은 정결하게 갖추도록 신칙하라."
하였다. 임금의 하교로 인하여 약방의 여러 신하들은 주원(厨院)으로 옮겨 입직(入直)하고, 의관 허신(許信)·정이주(鄭爾柱)는 차비문(差備門) 밖에서 대령(待令)하게 했으며, 긴급하지 않은 공사(公事)는 승정원(承政院)에 머물러 두게 하였고, 의금부(義禁府)·형조(刑曹)의 당상(堂上)과 양사(兩司)의 관원은 빈청(賓廳)에 모여 현재 감옥에 갇히어 있는 죄수를 심리(審理)하여 석방하게 하였으며,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여 권성징 등을 대령하도록 하였다.


 

6월 29일 병인

인시(寅時)에 경순 왕대비(敬純王大妃) 어씨(魚氏)가 어조당(魚藻堂)에서 승하(昇遐)하였다. 임금이 어조당 남쪽 작은 난간 앞에서 약방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니, 집의(執義) 어유봉(魚有鳳) 등과 함평군(咸平君) 홍(泓) 등 및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들과 예조 판서(禮曹判書) 서명균(徐命均)이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머리를 풀고 묻기를,
"갑진년176)  에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의 복제(服制)는 어떠했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 때에 기년(朞年)으로 정했으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대신(大臣)에게 문의(問議)하게 하소서."
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제왕가(帝王家)에서는 서차(序次)를 계승하는 일로써 소중하게 여기니, 형제와 수숙(嫂叔) 사이에도 부자(父子)와 모자(母子)의 도리가 있습니다. 갑진년에 이미 거행한 예절이 있고 그 후에 명종(明宗) 때 《예정록(禮定錄)》의 논한 바를 상고해 보아도 또한 서로 부합(符合)되니, 이에 의하여 거행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우의정(右議政) 이집(李㙫)과 판부사(判府事) 이의현(李宜顯)·이태좌(李台佐)의 의논도 또한 같았으니, 의논한 바에 의하여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광명전(光明殿)에 빈전(殯殿)을 설치하였고, 성복(成服)하기 전의 복제(服制)와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 이외의 공사(公事)는 모두 승정원에 머물러 두게 하였으며, 조석명(趙錫命)과 이춘제(李春躋)를 특별히 승지(承旨)에 임명하였다. 이삼(李森)을 특별히 훈련 대장(訓鍊大將)에 임명하고 어영 대장(御營大將) 장붕익(張鵬翼)과 함께 패초(牌招)하여 각 궁문(宮門)의 파수(把守)를 신칙하게 하였으며, 무진년177)  의 전례에 의하여 삼군문(三軍門)178)  의 대장(大將)이 궐문(闕門) 밖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이조(吏曹)에서 빈전(殯殿)·국장(國葬)·산릉(山陵)의 3도감(三都監)에 당상(堂上) 및 낭청(郞廳) 각 8원(員)을 차출(差出)하고, 우의정(右議政) 이집(李㙫)을 총호사(摠護使)로 삼았으며, 해흥군(海興君) 강(橿)을 수릉관(守陵官)으로 삼고, 중관(中官) 박찬문(朴纘文)을 시릉관(侍陵官)으로 삼았다. 사시(巳時) 초(初)에 목욕(沐浴)을 행하고 미시(未時) 정각(正刻)에 염습(殮襲)을 행하였다.

 

 

 

총호사 이집(李㙫)이 어조당(魚藻堂)에 입시(入侍)하였다. 이집이 말하기를,
"서차(序次)를 계승하는 대의(大義)는 아들이 어미에게 대한 경우와는 다르니, 어찌 대의(大義)를 생각하여 몸에 손상(損傷)이 없도록 하지 않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참량(參量)하겠다."
하였다. 이집이 말하기를,
"일기가 이와 같이 무더우니, 시신(屍身)에 부기(浮氣)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을 입시하게 한 것은 이 때문이다. 경자년179)  에는 염습(殮襲)한 후에 부기(浮氣)가 있었으므로 가는 포대(布帒)에 흙을 담아 그 위에 올려놓았는데, 지금은 염습하기 전에 부기가 있으니 더욱 어렵다."
하매, 이집이 말하기를,
"토롱(土籠)은 민간(民間)에서 사용하는 자가 많으나, 혹은 설치하기도 하고 혹은 설치하지 않기도 합니다."
하였으며, 도승지(都承旨) 정석오(鄭錫五)는 말하기를,
"민간에서 토롱을 사용하는 자가 많으나, 부기(浮氣)가 가라앉기는 어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국상(國喪)의 성복(成服)은 으레 6일째에 있으며, 염습(殮襲)을 한 후에 1일을 걸러 소렴(小殮)을 하고 소렴(小殮)을 한 후에 1일을 걸러 대렴(大殮)을 하는 것인데, 경자년에는 8일에 승하(昇遐)하시고 소렴을 9일로 앞당겨 행하였으니, 지금도 또한 이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매, 정석오가 말하기를,
"예제(禮制)는 마땅히 신중(愼重)해야 할 것이니, 청컨대 대신(大臣)에게 수의(收議)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말하기를,
"‘연달아 국상(國喪)을 만나 경비(經費)가 고갈되었다. 지금은 이미 궁내(宮內)에서 준비된 바가 있으니 해사(該司)에서 올린 물품은 받아들이지 말라.’는 자성(慈聖)의 유교(遺敎)가 정녕하시니, 이 망극(罔極)한 날을 만나 나의 지극한 정리를 펴는 것은 다만 이런 일을 시행하는 데에 있다. 그것이 양지(養志)하는 의리에 있어 어찌 그 뜻을 본받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먼저 들여온 필단(匹緞)은 도로 내려보내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달리 사용할 곳에 보충해 쓰도록 하라. 제사(祭祀)에 상사할 은기(銀器)는 갑진년180)   국상 때에 쓰던 것이 있으니 제조해 들이지 말 것이며, 제기(祭器)가운데 새로 제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하교를 기다려 거행하여 중외(中外)로 하여금 자성(慈聖)께서 백성을 위하여 경비를 아끼는 지극한 뜻을 모두 알도록 하라."
하였다.
6월 30일 정묘

소렴(小殮)을 앞당겨 행하는 가부(可否)에 대하여 여러 대신(大臣)에게 수의(收議)하니,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이미 경자년에 거행한 전례가 있으니, 앞당겨 행하는 것이 실로 심사숙고(深思熟考)하는 도리에 합당합니다."
하였고, 다른 대신들도 이에 대하여 모두 이의(異議)가 없었다.


 

오시(午時) 초에 소렴을 행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재궁(梓宮)에 칠(漆)을 가할 때에 당상(堂上)·낭청(郞廳)은 흥명문(興明門)으로부터 왕래하며, 조석(朝夕)의 곡반(哭班)은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설행하라."
하였다.

 

총호사(憁護使)에 이집(李㙫) 등이 어조당(魚藻堂) 남쪽 협헌(夾軒)에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소렴 후에 재궁(梓宮)의 내광(內廣)을 넓혀야 하는데 형편상 갑진년의 전례에 의하여 부판(附板)하는 이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경자년·갑진년에는 모두 〈빈전(殯殿)에〉 옮긴 후에 대렴(大殮)을 하였는데, 이번에는 무진년181)  과 계해년182)  의 전례에 의하여 대렴을 한 후에 빈전에 옮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약방 제조(藥房提調) 윤순(尹淳) 등이 생맥산(生脈散)을 진어(進御)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마지못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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