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무진
유성(流星)이 하늘 한가운데 엷은 구름 사이에서 나와 손방(巽方)의 하늘가로 사라졌는데, 모양은 바리때[鉢]와 같고 꼬리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고 빛은 땅에까지 환하였다.
약방(藥房)의 3제조(三提調)들이 여러 어의(御醫)를 거느리고 임금의 체후(體候)를 입진(入診)하였다.
7월 3일 경오
을시(乙時) 【묘시(卯時)와 진시(辰時) 사이이다.】 에 영상(靈床)을 광명전(光明殿)에 이봉(移奉)하였다가 사시(巳時)에 대렴(大斂)을 하여 오정(午正)에 재궁(梓宮)183) 에 모셨는데, 애초에는 대렴을 한 뒤에 이봉(移奉)하기로 하였었다. 전교(傳敎)하기를,
"다시 내상등록(內上謄錄)을 상고하여 보니, 무진년184) 의 대렴도 역시 이봉한 뒤에 행하였었다."
하므로, 마침내 이봉하고 다음에 대렴을 하기로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내상등록을 상고하여 보니, 대렴전(大斂奠)과 성빈전(成殯奠)은 갑진년185) 에 겸행(兼行)한 예가 있다. 여기에 따라 거행하라."
하였다.
국구(國舅)는 내일 성복(成服)을 끝낸 뒤에 생기(省記)186) 를 없애고, 그 나머지 여러 집사(執事)들은 오늘부터 생기를 없애라고 명하였다.
7월 4일 신미
진시(辰時)에 성복(成服)하였다. 임금은 자최 3년(齋衰三年)이니, 의상(衣裳)은 차등(次等)의 굵은 생포(生布)를 쓰고, 관(冠)은 조금 고운 생포를 쓰며, 포(布)로써 무(武)187) 와 갓끈[纓]을 만든다. 그리고 수질(首絰)·요질(腰絰)·교대(絞帶)는 굵은 생포를 사용하고 동장(桐杖)·소리(疏履)를 쓴다. 졸곡(卒哭) 후에 시사복(視事服)은 포포(布袍)를 입는데 생포로 만들며, 포로 익선관(翼善冠)을 싸서 입(笠)은 흰색으로 만들되, 포로 싼 오서대(烏犀帶)와 백피화(白皮靴)를 착용한다. 13개월의 연제(練祭)에는 연관(練冠)을 쓰며, 수질·부판(負版)·벽령(壁領)·최(衰)를 제거하고, 백포(白袍), 백포(白布)로 싼 익선관, 백포로 싼 오서대·백피화를 착용한다. 25개월의 상제(祥祭)에는 참포(驂袍)·익선관·오서대·백피화를 착용한다. 27개월의 담제(禫祭)에는 현포(玄袍)·익선관·오서대·백피화를 착용하며, 담제 후에는 곤룡포(袞龍袍)와 옥대(玉帶)를 착용한다. 중궁전(中宮殿)은 자최 3년이니, 대수(大袖)·장군(長裙)은 차등(次等)의 굵은 생포로 만들고, 개두(蓋頭)·두수(頭𢄼)는 조금 가는 생포를 사용하며, 죽차(竹釵)를 꽂고, 포포(布袍)는 굵은 생포를 쓰고, 포리(布履)를 신는다. 13개월의 연제(練祭)에는 백포(白布)로 만든 대수·장군을 입고, 검은 개두·두수 및 대(帶)를 착용하며, 백피혜(白皮鞋)를 신고 금(金)·주(珠)나 붉은 수(繡)는 쓰지 않는다. 27개월의 담제 후에는 길복(吉服)을 입는다.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은 자최 기년(齋衰朞年)이니, 대수·장군을 차등의 굵은 생포를 쓰며, 포리를 신는다. 졸곡(卒哭) 후에는 백포(白布)로 된 대수·장군·개두·두수 및 대와 백피혜를 착용한다. 13개월의 연제 후에는 길복을 입는다. 빈궁(嬪宮)은 개최 기년이니, 대왕 대비전과 복(服)이 같다. 내명부(內命婦)는 중궁전(中宮殿)과 복이 같다. 상궁(尙宮) 이하는 자최 3년이니, 배자(背子)·포대(布帶)·소혜(素鞋)를 착용하며, 연제 후에는 백포(白布)로 된 배자·개두·두수 및 대와 백피혜를 착용한다. 대왕 대비전의 상궁(尙宮) 이하와 빈궁(嬪宮) 수규(守閨) 이하의 복(服)은 앞의 복을 따르고, 출외(出外)할 때에는 대전(大殿)·중궁전(中宮殿) 이하의 복과 같다.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은 자최 기년이니, 의관(衣冠)은 차등의 생포를 쓰며, 관량(冠梁)에 있어서 3품 이상은 3량(梁), 5품 이상은 2량, 9품 이상은 1량으로 하고, 조금 가는 생포를 쓴다. 포(布)로써 무(武)와 갓끈을 만들고 망건(網巾)은 흰 테[白緣]를 둘렀는데, 금·옥 관자(貫子)는 제거하지 않는다. 수질(首絰)·요질(要絰)·교대(絞帶)·소리(素履)를 착용하며, 공복(公服)은 포로 만든 단령(團領)을 입는데 생포를 쓰며, 싼 사모(紗帽)와 생포로 싼 각대(角帶)·백피화를 착용한다. 연거복(燕居服)은 생포로 된 입(笠)과 생포로 된 의대(衣帶)를 착용한다. 졸곡 후에는 백포로 된 단령(團領)·모(帽)·대(帶)를 착용하고, 입(笠)도 역시 같다. 13개월의 연제(練祭) 후에는 길복을 입는다. 종친과 문무 백관의 처(妻)는 백포로 된 대수·장군·개두·두수 및 백피혜를 착용하고, 졸곡 후에는 제거한다. 각도(各道)의 대소 사신(大小使臣)과 외관(外官)·전함관(前銜官)의 복은 백관의 복과 같다. 처복(妻服)도 백관의 처복과 같다. 동성(同姓)이나 이성(異姓) 중에 시마(緦麻) 이상의 친족은 전함(前銜)과 시임(時任)·무직인(無職人)을 가릴 것 없이 자최 기년이니, 백관의 복과 같고, 처복도 백관의 처복과 같다. 동성이나 이성(異姓) 중 시마(緦麻) 이상의 여복(女服)은 종친의 처복과 같다. 수릉관(守陵官)·시릉관(侍陵官)·내시(內侍)는 자최 3년이니, 최복(衰服)의 제도와 연제·상제(祥祭)·담제(禫祭) 때의 복제는 앞의 복제(服制)와 같다. 내시(內侍)·사알(司謁)·사약(司鑰)·서방색(書房色)·반감(飯監)은 자최 3년이니, 의상(衣裳)은 차등의 굵은 생포를 쓰고, 관(冠)도 차등의 굵은 생포를 쓰며, 수질·요질·교대도 굵은 생포를 쓴다. 또 포(布)로 만든 단령의(團領衣)와 포로 싼 모(帽)·대(帶)·백피화를 착용한다. 13개월의 연제(練祭)에는 연관(練冠)을 쓰고, 수질·부판(負版)·벽령(壁領)을 제거하며, 백포(白布)로 만든 단령의와 백포로 싼 모(帽)·대(帶)·백피화를 착용한다. 25개월의 상제(祥祭)에는 짙게 물든 옥색의(玉色衣)와 사모(紗帽)·흑각대(黑角帶)를 착용한다. 27개월의 담제(禫祭) 후에는 길복을 입는다. 별감(別監)이나 각 차비인(差備人)은 굵은 생포로 만든 직령의(直領衣)와 두건(頭巾)·생포로 만든 대(帶)·백승혜(白繩鞋)를 착용하며, 연제 후에는 백포의(白布衣)·백두건(白頭巾)·백대(白帶)로써 3년을 마친다.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의 내시(內侍) 이하와 빈궁(嬪宮)의 내시 이하와 별감 및 각 차비인의 복제도 모두 앞의 대전(大殿)·중궁전(中宮殿)의 내시 이하의 복과 같다. 직사(職事)가 있는 전함(前銜)의 각 품관(品官)과 중관(衆官)188) 은 포로 만든 단령의(團領衣)와 생포로 싼 모(帽)·대(帶)·백피화를 착용하며, 졸곡 후에는 백포로 만든 단령의, 백포로 싼 모(帽)·대(帶)를 착용하는데 기년(朞年)이 되면 벗는다. 녹사(錄事)·서리(書吏)는 생포의(生布衣)와 생포로 싼 평정 두건(平頂頭巾)·백대(白帶)를 착용하며, 기년이 되면 벗는다. 생원(生員)·진사(進士)·유학(幼學)·생도(生徒)는 포(布)로 만든 입(笠), 포로 만든 옷·건(巾)·대를 착용하며, 기년이 되면 벗는다. 학교(學校)에 들어갈 때에는 백두건(白頭巾)을 쓰고 전문(殿門)에 출입할 때에는 흑두건(黑頭巾)을 쓴다. 사직서(社稷署)·종묘서(宗廟署)·능참봉(陵參奉) 등의 관원은 입직(入直)할 때에 평상복(平常服)을 입고, 흑모(黑帽)·흑대(黑帶)를 착용하며, 외출할 때에는 백관의 복제와 같다. 정병(正兵)·갑사(甲士)는 백포의(白布衣)·생포대(生布帶)·백피화를 착용하고, 졸곡 후에는 백포대를 착용하며, 기년이 되면 벗는다. 서인(庶人)과 승도(僧徒)는 백립(白笠)과 백대(白帶)를 착용하며, 기년이 되면 벗는다. 조례(皁隷)·나장(羅將)은 흰색으로 된 옷·두건·대를 착용하다가 기년이 되면 벗는다. 의조(儀曹)에서 마련하여 계품(啓稟)하고 시행하였다.
궐문(闕門) 밖의 각 군문(軍門)에서 파수(把守)하는 군병(軍兵)과 추가로 입직(入直)하던 군병을 철수하라고 명하였다.
신무일(愼無逸)을 고부사(告訃使)로 삼고, 홍성보(洪聖輔)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었는데, 뒤에 남태량(南泰良)으로 대신하였다.
북도(北道)의 별과(別科)와 토역(討逆)한 후의 정시(庭試)는 졸곡(卒哭) 후에 물려서 행하도록 명하였으니, 의조(儀曹)의 계사(啓辭)에 따른 것이다.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이저(李著)이다.】 에서 아뢰기를,
"대행 왕대비(大行王大妃)께서는 비록 본래부터 담습(痰濕)의 증세가 있기는 하였으나 여러 해 동안 뿌리박힌 고질병과는 다른데, 여러 의관(醫官)들이 전연 치료하는 이치도 몰랐고 약물을 쓰는 것도 방법에 어긋나서 갑자기 망극(罔極)한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신(神)과 사람들이 모두 분통(憤痛)하게 여기므로 국법(國法)에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시약(侍藥)한 여러 의관들을 모두 나국(拿鞫)하도록 하소서."
하고, 사간원(司諫院)에서도 함께 발계(發啓)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에서 또 아뢰기를,
"무릇 상제(喪制)에 관계되는 일은 아무리 미세한 형식과 절차라도 소홀히 할수 없는 것인데, 삼가 보건대, 성복(成服)한 반열의 망건(網巾)과 갓끈이 어떤 이는 희고 어떤 이는 검어서 얼룩덜룩하여 같지 않았습니다. 예관(禮官)에게 다시 명령하여 동일하도록 부표(付標)189) 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어제 곡반(哭班)을 보니, 혹은 편하게 앉아서 부채를 부치기도 하고 또 어떤이는 대궐을 등지고 앉아서 침을 뱉고 있다가 감찰(監察)의 정과(呈課)에 들어가기도 했으니, 청컨대 모두 태거(汰去)하소서."
하니, 모두 대로 따랐다.
총호사(摠護使) 이집(李㙫)·산릉 당상(山陵堂上) 신사철(申思喆)·예조 판서 서명균(徐命均)·선공 제조(繕工提調) 어유룡(魚有龍)·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 윤유(尹游)·남원군(南原君) 설()이 여러 지사(地師)190) 를 거느리고 산(山)을 보기 위하여 나갔다.
좨주(祭酒) 정제두(鄭齊斗)·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가 시골에서 올라왔다. 임금이 소견(召見)하였는데, 이광좌(李光佐)가 함께 들어왔다. 약방 제조(藥房提調)가 여러 의관(醫官)들을 거느리고 임금의 체후를 입진(入診)하였다.
7월 5일 임신
총호사(摠護使) 이집(李㙫) 등이 복명(復命)하기 위해 입시(入侍)하여 산릉(山陵)은 의릉(懿陵)191) 의 하혈(下穴)에 정하였다. 판의금(判義禁)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죄인(罪人) 김남복(金南復)과 나숭열(羅崇說)은 요란스레 승관(承款)192) 을 한 뒤에 경폐(徑斃)193) 하여 정법(正法)194) 에 처하지 못하였으니, 노적(孥籍)195) 의 형전(刑典)을 행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대신(大臣)과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이 합사(合辭)하여 권도(權道)를 좇아 원기(元氣)를 돕도록 간청하고, 어유귀(魚有龜)는 아뢰기를,
"지금 권도(權道)를 따르지 않았다가 혹시라도 건강에 손상을 입게 되면 대행 왕대비(大行王大妃)의 영혼이 반드시 척강(陟降)하는 가운데 안타까워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달 27일 밤에 시질(侍疾)하고 있는데 자전(慈殿)께서는 내 몸이 혹시라도 더위에 손상될까 염려하여 창문을 열어 놓으라고 하셨는데, 평일에 진념(軫念)하여 주시는 지극한 뜻을 내 어찌 우러러 받들지 않을까마는, 계체(繼體)196) 의 의리가 중한데 미진(未盡)한 점이 있을까 두렵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행 판부사(行判府事) 심수현(沈壽賢)·이태좌(李台佐), 우의정(右議政) 이집(李㙫) 등이 2품(二品)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빈청(賓廳)에 모여서 복선(復膳)하기를 계청(啓請)하고, 옥당(玉堂)과 승정원(承政院)에서도 차자(箚子)를 올리기도 하고 혹은 계사(啓辭)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구전 개정(口傳開政)197) 을 하여 김시환(金始煥)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심공(沈珙)을 지의금(知義禁)으로 삼았다.
7월 6일 계유
빈청(賓廳)에서 진계(陳啓)하여 상선(常膳)을 회복하시기를 청하고, 옥당(玉堂)에서 세번이나 차자(箚子)을 올리고, 약방(藥房)에서 세 번이나 계사(啓辭)를 올렸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시임(時任)·원임(原任)의 대신(大臣)들이 정부 서벽(政府西壁)198) 과 육조 참판(六曹參判)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대행 왕대비전(大行王大妃殿)의 시호(諡號)를 선의(宣懿) 【선문 주달(善聞周達)을 선(宣)이라 하고, 온유 성선(溫柔聖善)을 의(懿)라 한다.】 휘호(徽號)를 효인 혜목(孝仁惠睦) 【자혜 애친(慈惠愛親)을 효(孝)라 하고, 시인 복의(施仁服義)를 인(仁)이라 하고, 애민 호여(愛民好與)를 혜(惠)라 하고, 포덕 집의(布德執義)를 목(睦)이라 한다.】 전호(殿號)를 경휘(敬徽), 능호(陵號)를 의릉(懿陵)이라고 의정(議定)하였다.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199) 에 대신(大臣)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200) 하여 구전(口傳)으로 상선(常膳)을 드시기를 대전(大殿)에게 권면(勸勉)하여 주기를 계청(啓請)하니, 하교(下敎)하기를,
"대전(大殿)은 애통함이 쌓인 나머지 소선(素膳)을 든 지 오래 되었으므로, 이것은 매우 민망한 일이니, 애통함을 참고 앞으로 상선을 회복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7월 7일 갑술
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상선(常膳)을 회복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조상행(趙尙行)이다.】 에서 아뢰기를,
"나라에 대척(大慽)이 있어서 온나라 사람들이 슬픔에 쌓여 있으므로 구구(區區)한 사의(私義)도 돌아볼 겨를이 없는데, 집의(執義) 이광부(李光溥)는 전사(前事)를 끌어내어 억지로 피혐(避嫌)하면서 다만 외반(外班)에만 참여하고 끝내 나와서 숙배(肅拜)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또 합사(合辭)할 일이 급한데도 들어올 의사가 없으니,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자, 하교하기를,
"매우 미안(未安)한 일이다. 체차하고 말 것이 아니라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고 종신(宗臣)이 진계(陳啓)하면서 모두 권도(權道)를 따르기를 주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으니, 대신(大臣)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여 아뢰기를,
"빈청(賓廳)에서의 계사(啓辭)가 두 번 세 번 있었지마는, 정성이 부족하여 성상께서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다시 백료(百僚)를 거느리고 모두가 대정(大庭)에 나와서 안타깝게 부르짖는 것은 우리들의 소망을 살펴 받아들이기를 바라서입니다. 전하(殿下)께서는 사친(私親)201) 상(喪)을 당한 이래 십수 년 동안 애통한 일을 여러 번 당하여 건강을 해친데다가 근래에는 흉역(凶逆)의 사건이 여러 번 일어나서 장전(帳殿)202) 에 자주 납시게 되어 더운 기운을 자주 쏘이고 새벽 안개를 자주 맞았습니다. 게다가 대행 왕대비(大行王大妃)께서 병환이 깊으신 뒤로 애타게 근심하여 한가하지 못했는데, 이와 같이 망극(罔極)한 일을 당하시어 미죽(糜粥)까지도 드물게 드시므로 건강이 모르는 사이에 많이 손상되셨습니다. 이러한 때 성궁(聖躬)을 보호하는 일은 상선(常膳)을 빨리 회복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대소(大小) 관원들이 분주히 나아와서 허둥지둥 울며 간청하여 반드시 준청(準請)203) 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신 등은 연석(筵席)에서 하신 하교(下敎)에 특별히 기세가 꺾이고 몹시 슬퍼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대행 왕대비(大行王大妃)께서 전하의 시탕(侍湯)하는 즈음에 전하의 건강이 혹시라도 상할까 두려워하여 그와 같이 돈독하게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마음대로 소선(素膳)을 드시고 근심하시는 빛이 날마다 더하여 가시니, 돌아가신 분의 척강(陟降)하는 영혼이 명명(冥冥)한 가운데서 살펴보시고 그 애처로움과 두려운 마음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오늘 억지로라도 권제(權制)를 따르시는 것은 예경(禮經)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고 제왕(帝王)의 효도에는 합당한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성상의 감정(感情)을 억제하시고 빨리 유음(兪音)을 내려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13년 동안 지극한 애통이 내 몸을 얽어매어서 신기(神氣)가 더 손상되고 마음에 손상이 쌓였으니, 이치로 보아 당연한 일이다. 이것들은 단시일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데, 어찌 하루에 강계(薑桂)204) 를 듦으로써 도움이 되겠는가? 지금 계어(啓語)를 보고 나의 지난 일을 돌아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흐느끼는 눈물이 나게 된다. 이와 같이 억지로 하기는 곤란한 것인데, 비록 굳이 청하지 않더라도 내 어찌 종사(宗社)의 중요함과 국세(國勢)가 이와 같음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다시 간청하지 않는 것이 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하는 것이다."
하였다.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 백관이 구전(口傳)으로 대전(大殿)에 상선(常膳)을 회복하도록 권유할 것을 계청(啓廳)하니, 하교하기를,
"겨우 성복(成服)이 끝났으므로 차마 진어(進御)하지 못하는데, 매우 민망하고 박절하지마는 이와 같이 진청(陳請)하니 마땅히 다시 권하겠다."
하였다. 이에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여 세 번이나 아뢰고 약방(藥房)에서 세 번이나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정청(庭請)하여 세 번이나 아뢰니, 비답하기를,
"애통한 마음과 참기 어려운 마음을 전후에 여러 번 유시(諭示)하였으나, 동조(東朝)205) 의 뜻도 간곡하시고, 경(卿) 등의 간청도 매우 돈독하며, 또 대사(大事)가 앞에 있는데, 이런 일 때문에 지체하게 되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억지로라도 경 등의 뜻을 따르겠지마는, 더욱 망극할 뿐이다."
하였다.
이철보(李喆輔)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7월 8일 을해
밤에 달이 남두(南斗)의 제 3성(第三星)을 범하였다.
전 판서(判書) 권성(權𢜫)이 졸(卒)하였다. 권성은 시무(時務)에 숙달(熟達)하고 이치(吏治)를 가장 잘하여 여러 번 주번(州藩)을 맡아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영고(寧考)206) 말년(末年)으로부터 벼슬을 버리고 물러가 살다가 이때에 이르러 향장(鄕庄)에서 졸한 것이다.
한덕후(韓德厚)를 집의(執義)로 삼았다.
7월 9일 병자
총호사(摠護使) 이집(李㙫)과 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의릉(懿陵)의 석물(石物)과 제도(制度)는 한결같이 명릉(明陵)207) 을 따라 하였는데, 이번에는 전대로 하겠습니다. 표석(表石)은 갑진년208) 에 이미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첨각(添刻)을 하여야 할 것인데, ‘부좌(祔左)’니 ‘부남(祔南)’이니 라고 쓰지 말고 다만 ‘부(祔)’ 자만 쓰는 것이 옳겠다. 《예기(禮記)》 내칙편(內則篇)과 《시경(詩經)》 후비편(后妃篇)은 국구(國舅)의 집에서 보낸 것으로, 대행 왕비(大行王妃)께서 늘 책상에 올려 놓고 보시던 것인데, 돌아가신 뒤에 광중(壙中)에 묻어 달라는 분부가 있었으며, 연갑(硯匣)209) 도 역시 선조(先朝)에서 내리신 것이니 마땅히 납광(納壙)하도록 하라. 고례(古例)에 의하면 내상(內喪)에는 내전(內殿)에서 행록(行錄)을 제술하는 일이 있는데, 동조(東朝)의 성덕(盛德)과 휘범(徽範)에 대하여 사저(私邸)의 일은 국구(國舅)에게서 들었고, 궁중(宮中)에 관한 일은 내가 직접 듣고 본 것이 있으며 혹은 좌우 근시(近侍)들에게서 들은 것도 있으니, 마땅히 제술하여 보이도록 하리라."
하였다. 이집은 이어서 빨리 매복(枚卜)210) 할 것을 간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새로 정승을 뽑는 데 있어서 뜻에 맞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게다가 공제(公除)211) 전에 대신(大臣)을 어찌 구전(口傳)으로 임명할 수야 있겠는가?"
하였다.
7월 10일 정축
김시혁(金始㷜)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7월 11일 무인
예조(禮曹)에서 비가 막 쏟아지려고 하는 이유로써 오차(五次)의 기우제(祈雨祭)를 우선 정지시키자고 계품(啓稟)하였다.
7월 12일 기묘
큰 비가 내렸다.
대행 왕대비(大行王大妃)의 인산(因山) 길일(吉日)에 대하여 8월 초6일 진시(辰時)에는 역사(役事)를 시작하고, 9월 13일 오시(午時)에는 금정(金井)212) 을 열고, 13일 사시(巳時)에는 외재궁(外梓宮)213) 을 배진(陪進)하고, 10월 16일 오시(午時)에는 찬궁(欑宮)214) 을 열고, 19일 자시(子時)에는 발인(發靷)을 하고, 19일 오시(午時)에는 현궁(玄宮)215) 에 하관(下棺)하는 것으로 택일(擇日)하였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조현명(趙顯命)과 희천 군수(熙川郡守) 김중만(金重萬)이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사대(賜對)하였다. 총호사(摠護使) 이집(李㙫)이 함께 들어왔는데, 임금이 대행 대비(大行大妃)의 행록(行錄)을 내어 보이고, 조현명에게 참관(參觀)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무신년216) 이후 민진원(閔鎭遠)의 말에 대하여, 송인명(宋寅明)은 ‘고심(苦心)한 데에서 나왔다.’고 말하나, 나는 생각하기를 그의 마음이 아무리 괴롭더라도 그의 말은 망발(妄發)이라고 여긴다. 흉역배(凶逆輩)들의 예측할 수 없는 말을 대동조(大東朝)217) 께서도 자세히 모르셨는데, 다만 대행 왕비(大行王妃)께서 아시었으니, 영상(領相)이 이른바 대비전(大妃殿)께서 하교(下敎)할 수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 뜻이었다, 그 때의 역서(逆書)를 바로 불에 태우게 한 것은 생각건대 이런 흉악스러운 말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으나, 지금 나홍언(羅弘彦)의 책자(冊子)를 보고 그 역서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이런 책자가 몇 개는 더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몸소 그 흉역배들을 국문(鞫問)하였으나 미처 수쇄(收殺)하기 전에 갑자기 이 애통한 일을 당하였다. 나는 난(亂)이 끝난 뒤에 이러한 일들을 다시 진달(陳達)하지 않았는데 나의 친국(親鞫)이 끝난 뒤에 대비전(大妃殿)에서 다시 하문(下問)이 있었다. 그리고 하교하시기를, ‘필시 무신 역당(戊申逆黨)들이 지금까지 이와 같이 하니, 마음이 놀라고 뼈에 사무친 것을 견딜 수 있겠는가? 하셨는데, 지금 생각하니, 당시의 감란록(勘亂錄)은 역시 소략(疏略)한 것 같다."
하였다. 이집이 아뢰기를,
"그 당시의 흉서(凶書)는 모두 불에 태웠으므로 내용을 신(臣)도 또한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중만은 그 당시 입시(入侍)하고 있었으니, 흉언(凶言)을 반드시 알 것이다."
하고는 이어 흐느껴 울었다, 이집이 말하기를,
"민진원이 양전(兩殿)으로 하여금 하교하여 반포(頒布)하도록 하려고 한 것은 일단(一段)의 고심(苦心)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만일 이 기록(記錄)으로써 중외(中外)에 반포한다면 힘이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이 기록을 반포하더라도 효경(梟獍)218) 같은 자들의 마음이 감화될 이치가 있겠는가? 또 지문(誌文)에 이 글을 가지고 쓴다고 하여도 사체(事體)에 옳지 못함이 있다. 이 기록으로써 행장(行狀)을 짓고 지문(誌文)은 별도로 지어 올리는 것이 좋겠다."
하니, 조현명이 이르기를,
"거기에 쓰인 ‘잉절복념(仍竊伏念)’ 이하를 사신(詞臣)에게 시켜서 두드러지게 표현하여 찬진(撰進)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이 옳다. 내사(內事)는 진실로 바깥 조정에서 모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선(御膳)으로서 늘 바치는 음식을 줄였다든지, 각도(各道)에서 바치는 방물(方物)을 정지시켰다든지, 내저(內儲)를 평소에 준비하여 두었다가 필요한 수요(需要)를 충당하였다든지 하는 실적(實蹟)이 매우 많으니, 사신(詞臣)이 마땅히 포장(鋪張)할 만한 것이다."
하였다. 이집이 분부를 받들고 먼저 물러가자, 임금이 조현명을 면유(勉諭)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무신년 역당 중에는 연좌(緣坐)로 처벌된 외에 편배(編配)219) 된 자가 신(臣)의 도내(道內)로써 말하더라도 2백여 명에 이릅니다. 그들이 데려온 처노(妻孥)까지 계산한다면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 폐단이 한정이 없으니, 마땅히 소결(疏決)하는 거조(擧措)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제(公除)가 끝난 뒤에 해부(該府)에 신칙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조현명이 청하기를,
"사진인(私賑人)220) 중에 가장 공이 많은 자를 골라서 논상(論賞)하고 격려하소서. 하직(下直)하는 수령(守令)을 인견(引見)하는 것은 거의 형식적인 것입니다. 그가 진달(陳達)하는 내용은 ‘도임(到任) 후에 도신(道臣)과 서로 의논하겠습니다.’ 하는 데 불과합니다. 만일 차사원(差使員)으로 올라온 사람을 번번이 인대(引對)하시면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지금의 시상(時象)이 아직 산만(散漫)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진정(鎭定)하여 편안하게 하는 방도를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외면(外面)으로는 전일에 비하여 조금 나은 것 같지마는, 본심(本心)은 그렇지 않은 까닭으로 외기(畏忌)하는 마음과 의조(疑阻)하는 감정이 풀리지 않았다."
하였다. 임금이 김중만에게 타이르기를,
"부임(赴任)한 뒤에 만일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있으면 나의 마음만 기쁠 뿐 아니라, 조정에서 임명 파견한 뜻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홍치중(洪致中)이 차자(箚子)를 올려 청하기를,
"김재로(金在魯)가 지은 마패 자문(馬牌咨文) 중에 ‘자유인순(自有因循)’ 등의 말은 빼버리도록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자문(咨文) 중에 ‘그전부터 구습(舊習)을 따라 행하여 명(明)나라 연호를 새긴 마패(馬牌)를 썼는데…[自前因循 用刻明年號馬牌 云云]’라고 하는 말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차자를 올려 청한 것이다.
7월 14일 신사
약방 제조(藥房提調)가 여러 의관(醫官)을 거느리고 임금의 체후(體候)를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제조 윤순(尹淳)에게 이르기를,
"자문 부본(咨文副本)에 대하여 경(卿)의 의사(意思)는 어떠한가?"
하니, 윤순이 말하기를,
"저들이 말하기를, ‘왜 지금까지 명조(明朝)의 연호(年號)를 쓰느냐?’고 하므로, 우리 나라에서 답하기를, ‘전부터 써 왔다.’고 하였으니, 저 사람들과 불화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기필할 수 없습니다. 한 나라 안에서 혹은 명(明)나라의 정삭(正朔)을 쓰기도 하고, 혹은 청(淸)나라 연호를 쓰기도 한 것을 저 사람들의 처지로써 볼 때 법령(法令)을 좇아 행하라는 의논이 있을 듯합니다. 정삭(正朔) 같은 중대한 일을 조관(照管)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말이 조리에 맞지 않을 듯 하니, 권사(權辭)로 답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역서(曆書)에 연호를 쓰지 않는데 대하여 저들이 성낼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비록 저들 나라에 있는 기명(器皿) 등의 물건에도 명나라의 연호가 없는지 어찌 알겠는가? 게다가 저들도 또한 우리 나라가 황명(皇明)의 역대 연혁(歷代沿革)을 잊지 않는 것이 옛날부터 있어 온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니, 그들도 또한 우리 나라가 청나라도 그렇게 잊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수찬(修撰) 조한위(趙漢緯)와 부수찬 김상석(金相奭)이 만일 분의(分義)를 알았다면 이런 때 위패(違牌)하고도 그들의 마음이 편하겠느냐? 변지(邊地)의 수령으로 구전(口傳)하여 보외(補外)221) 하고 명일 안으로 보내도록 하라. 그리하여 염우(廉隅)가 너무 강한 자로 하여금 분의(分義)의 소재(所在)를 조금이라도 알게 하라."
하였다.
7월 15일 임오
하교하기를,
"분명히 하교하노니, 군부(君父)가 지금 양음(亮陰)222) 중에 있는 것도 생각지 않고 한결같이 위패(違牌)하니, 매우 미안한 일에 관계된다. 판금오(判金吾)는 우선 체직시키고 뒤에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한위(趙漢緯)를 강진 현감(康津縣監)으로, 김상석(金相奭)을 무안 현감(務安縣監)으로, 조문명(趙文命)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삼았다.
약방 제조(藥房提調) 윤순(尹淳)이 구대(求對)하였는데, 판부사(判府事) 민진원(閔鎭遠)과 이태좌(李台佐), 총호사(摠護使) 이집(李㙫), 빈전 도감 당상(殯殿都監堂上) 김재로(金在魯)가 함께 들어왔다. 윤순이 말하기를,
"어제 판결사(判決事) 김후연(金後衍)이 자성(慈聖)의 하교를 가져와 전하기를, ‘성상께서 빈전(殯殿)의 조·주·석(朝晝夕) 제전(祭奠)에 몸소 참여하여 매일 5,6시(時)를 곡읍(哭泣)하는데, 이와 같은 한더위에 늘 최질(衰絰)을 착용하고, 삼경(三更)이 되어야 잠을 자며 파루(罷漏)만 치면 일어나니, 기력이 반드시 지탱하기 어려울 터인데, 약방(藥房)에는 이를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臣) 등은 이 하교를 듣고 우민(憂悶)함을 견디지 못하여 여러 대신(大臣)들과 함께 구대(求對)하였습니다."
하고, 이태좌는 울면서 말하기를,
"경자년223) 숙고(肅考)224) 의 침질(寢疾) 때에 전하(殿下)께서 시립(侍立)하고 부채질을 하여 주고 있었는데, 손목이 삼대[麻木]같이 여위었습니다. 경종(景宗)께서 파종(破腫)을 할 때에는 전하께서는 그 침(鍼)이 큰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근심이 얼굴에 나타났습니다. 이것들이 비록 작은 일이지마는, 지극하신 효행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번의 성복(成服) 전에는 반간(半間) 밖에 안되는 청(廳)에 계시면서 매우 더운 때를 당하여서도 초둔(草芚)까지 걷어 버리게 하고, 뙤약볕을 꺼리지 않고서 수일(數日) 동안이나 지났으니, 아무리 여염(閭閻)의 필서(匹庶)들이라도 건강을 해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경종과 대비(大妃)가 아니었다면 내가 어찌 오늘이 있었겠는가? 나는 대행 대비(大行大妃)에 대하여 그저 평범한 수숙(嫂叔) 관계와는 다르다. 내가 이미 머리를 풀었으니 마땅히 하여야 될 일을 다해야 할 것이다. 종사(宗社)의 중책이 내 한 몸에 있다는 것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이번에는 갑진년225) 에 비하여 그래도 경중(輕重)이 있으므로 곡읍(哭泣)하는 것도 준절(撙節)함이 있다. 그러나 왕가(王家)의 예(禮)는 여염집들과 달라서 조·포(朝晡)의 곡전(哭奠)이 있고, 주다례(晝茶禮)·기침(起寢) 등의 절차가 있어서 하루 동안의 곡(哭)이 무릇 8차(次)가 된다. 경자년226) 때에는 파루(罷漏)로부터 인정(人定) 때까지 최질(衰絰)을 벗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일일이 몸소 참여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자성(慈聖)의 말씀을 따라서 그렇게 한 것이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군주는 40세가 되면 필서(匹庶)의 80세와 같으므로, 비록 나타나는 어떤 병의 증세가 없더라도 마땅히 건강을 보호하고 아껴야 합니다. 신이 듣건대, 중종(中宗)께서 거우(居憂)227) 하실 때 여러 날을 소찬(素饌)만 드시다가 깨달음이 있어서 말씀하시기를, ‘소찬만 들기는 어렵다.’ 하시고 마침내 권도(權道)를 따라서 예방(禮防)을 하는 데만 진심하셨고, 인종(仁宗)께서는 효도가 지극하셔서 차마 권도를 따르지 못하시고 잠깐 권도를 따르다가 곧 중지하였으므로 건강을 해치어 상(喪)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오늘날 꼭 본받으실 것은 어찌 중종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종과 대비께서 믿는 바는 다만 나뿐이었는데, 춘추(春秋)가 그리 높지 않으셨는데도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상담(常談)에 이르기를, ‘양자(養子)로서 만일 효도를 다한다면 기출(己出)228) 이 아니더라도 기출과 같다.’고 하였는데, 오늘날 행할 수 있는 예절은 마땅히 다 해야 할 뿐이다. 내가 만일 경종께서 신축년229) 에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여 이와 같이 한다면, 이는 사의(私意)에 가까울 것이다. 대비전(大妃殿)께서는 일찍이 누워서 나를 본 일이 없고, 다만 병환이 위중하셨을 때에만 누워서 보았었다. 평상시에 이미 누워 있을 때 뵙지 않았으니, 지금 기침(起寢) 전에 가서 곡(哭)할 수가 없는 까닭으로 한 가지 절차만은 헤아려 참여하지 않더라도 나머지 제전(祭奠)은 내가 모두 참여한다면, 대비께서 명명(冥冥)한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내가 차마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내가 전대(前代)의 역사를 일일이 살펴보니 제왕(帝王)으로서 능히 계체(繼體)의 중대성을 아는 이가 드물었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서 예의(禮義)가 크게 밝아졌는데, 얼마 전에 《실록(實錄)》을 내어서 인종·명종 양조(兩朝)의 일을 보니 고금 중에 더욱 월등하게 뛰어났었다. 내가 비록 후세에 본받을 만한 행동은 못하였으나, 계체의 지극히 중대함은 대강 알고 있다. 이와 같은 큰 일을 당하여 그러한 예절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것은 역시 조종(祖宗)의 유범(遺範)을 이어받는 도리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하루에 두세 차례만 곡림(哭臨)하는 것으로 표준을 삼기를 굳이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기운이 불평(不平)하면 비록 1차라도 곡림할 수 없겠으나, 그렇지 않는 한 모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김재로가 이르기를,
"계체(繼體)가 비록 의중(義重)하지마는, 머리를 푸는 것은 지나칩니다."
하고, 민진원도 말하기를,
"김재로의 말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례(古禮)에는 어긋남이 있다고 한다."
하였다. 윤순(尹淳)은 말하기를,
"우리 조정의 명종(明宗)께서는 또한 머리를 풀었습니다."
하였다. 이태좌(李台佐)도 말하기를,
"내전(內殿)에서 주다례(晝茶禮)230) 에 음식이 백여 그릇이나 된다고 하는데, 그러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주다례가 없었다. 명성 왕후(明聖王后)께서 승하(昇遐)하였을 때 내전(內殿)에서 평일(平日)을 본떠서 내선(內膳)으로써 주다례를 베풀었었는데, 그대로 준행(遵行)하여 경자년에는 70그릇을 넘지 않았으니, 갑진년과 금번에는 여기에 준하여 시행하였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평일에 즐기던 음식으로 두세 그릇 정도로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로부터 폐지하려고 한다."
하였다. 이집(李㙫)이 말하기를,
"마패(馬牌)에 대한 자문(咨文)에 있어서 조문명(趙文命)·윤순(尹淳)·이의현(李宜顯)은 마땅히 권사(權辭)를 써야 한다 하고, 심택현(沈宅賢) 등은 마땅히 직대(直對)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판(兵判)의 글이 좋을 듯하다. ‘이보다 먼저 구습(舊習)을 따라 행했다[前此因循]’고 하는 것은 저 사람들의 노여움만 불러들일 것이니, 빼어버리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대개 김재로와 조문명의 글이 모두 권사(權辭)로써 쓴 것이지마는, 조문명의 글뜻이 더욱 교묘하였던 것이다. 이집이 유숭(兪崇)과 홍현보(洪鉉輔)를 석방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최명상(崔命相)도 석방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집 등은 현궁(玄宮)에 관(棺)을 내린 뒤에 초우제(初虞祭)는 능소(陵所)에서 행하고 익일(翌日)에 반우제(反虞祭)를 행할 것을 품정(稟定)하였다.
7월 16일 계미
이진망(李眞望)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정광은(鄭光殷)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7월 17일 갑신
총호사(摠護使)·빈전 당상(殯殿堂上)이 광명전(光明殿)에 입시(入侍)하여 발인(發靷)할 때에 병례문(秉禮門)과 영경문(永慶門)의 서쪽 곡장(曲墻)을 허물어 윤여(輪轝)의 봉행(奉行)하는 길을 넓히자고 품정(稟定)한 뒤에 호조 판서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제도(諸道) 중에 경차관(敬差官)231) 을 보내지 않은 곳에는 감사(監司)가 마땅히 전정(田政)을 구관(句管)해야 하는데, 10월 이후에 발순(發巡)하게 하는 것은 알맞은 때를 놓칠 염려가 있습니다. 비록 인산(因山) 전이라도 일찍이 출순(出巡)하게 하여 재실(災實)을 자세히 살피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인산(因山)할 때에 경계에 와서 기다리는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전례에 비추어 상고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동필이 말하기를,
"작년에 농사가 큰 풍년이었는데도 수조(收租)는 12만 석(石)에 불과합니다. 외부(外部)의 의논은 모두 말하기를, ‘만일 경차관을 보내어 수조(收租)하게 하였다면 반드시 이 정도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감사(監司)는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많이 하고 있으나, 그 마감(磨勘)한 실제 총수(摠數)는 오히려 경차관을 보내어 하는 것만 못합니다. 금년에는 응당 행하여야 할 법칙을 폐지할 수 없으니, 경차관은 반드시 삼사(三司)232) 를 거치고 백성을 교화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며, 전정(田政)에 밝은 사람을 잘 골라야 합니다. 그러나 혹시 시기를 지난 뒤에 내려 보낸다면, 명칭은 비록 차견(差遣)이지마는, 또한 실제의 효과는 없을 것입니다. 공제(公除)가 아직도 멀었으니, 구전 차출(口傳差出)하더라도 내월(來月) 보름 무렵까지는 발송(發送)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삼사 가운데서 뽑아 보내더라도 만약 잘못 고르게 되면 또한 효과를 거두기가 어렵다. 전일의 진달한 대로 각별히 택차(擇差)하고 혹시라도 직책을 다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수령(守令)의 은결(隱結)·누복(漏卜)과 함께 죄벌(罪罰)을 같이하도록 하라." 하였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윤혜교(尹惠敎)가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격려[勉飭]하여 보냈다.
7월 18일 을유
양성규(梁聖揆)를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7월 20일 정해
본부(本府)에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정업(貞業)을 다시 심문하니, 공초하기를,
"오 참의(吳參議)에 대한 일은 신(臣)이 그 집의 계집종 차매(次梅)와 서로 싸우다가 그 집 안양반[內兩班]에게 볼기를 얻어맞았습니다. 이 일로써 원망을 품었는데, 차마 그 안양반을 고발할 수가 없었으므로, 바깥양반을 끌어들여 고발한 것입니다. 3월 15일에는 과천(果川) 진사(進士)의 자서방(子書房)님·상전(上典)인 나리[進賜]님·윤봉사(尹奉事)와 정수명(鄭守命) 네 사람이 사랑(斜廊)에 모여 앉아서 서로 이야기할 때 이 궐내(闕內)의 형지(形止)233) 를 알기 때문에 궁시(弓矢)를 가지고 들여보낼 수 있다고 할 때에 신이 미음(米飮)을 가지고 가니, 계휘(啓輝)가 말하기를, ‘상전(上典)이 지금 비밀스러운 말을 하는데 네가 왜 엿듣느냐?’ 하고 이내 나를 발로 찼습니다. 그때 오 참의가 뒤따라왔고 신은 계휘에게 채임을 당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였는지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궁시는 호동(壺洞)에 사는 당상(堂上) 조가(曹哥)라는 이가 만들어 주었는데, 어느날 조가와 부동(部洞)의 이 교련관(李敎鍊官)이 함께 와서 묶은 화살 두서너 움큼을 반비(班婢)인 강아지(江阿只)를 시켜서 정수명에게 보내는 상황을 신이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오 참의가 뒤따라와서 한 말이 있는지의 여부도 듣지 못하였으므로, 지난날 친국(親鞫)할 때에 아뢴 바도 혐의를 품은 데서 나온 것이니, 과연 애매(曖昧)한 일입니다. 계집종 금옥(金玉)이는 계휘가 신을 발로 차는 모양을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 금옥에게 물어 보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과천의 진사는 형제가 없는 독신(獨身)이므로 명칭은 양반(兩班)이지만 늘 소시(小時)라고 부릅니다."
하였다. 나숭헌(羅崇獻)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장우규(張宇奎)는 과연 서로 친한 관계입니다. 일기(日記)에 대한 말은 나홍언(羅弘彦)의 막내아들 학회(學會)란 나이 12세의 아이에게 들었습니다."
하였다. 또 정관빈(鄭觀賓)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무신년 역란(逆亂)의 초기에 역당(逆黨)이 누구누구라는 것을 전연 몰랐으나, 다만 안익태(安益泰)가 전해 주는 말만 듣고서 상변(上變)하였습니다. 본현(本縣)의 전 파총(把摠) 어진혁(魚震虩)은 역괴(逆魁) 권서린(權瑞麟)의 혈당(血黨)으로서 좋은 말[馬]을 사다가 그의 사돈(査頓)인 심우명(沈遇溟)을 시켜 말을 타고 권서린의 진영(陣營)에 가도록 하였는데, 적진(賊陣)이 패하자 심우명이 말을 타고 달려서 어진혁의 집으로 도망가 숨어 있었습니다. 신은 장세문(張世文)·조정리(趙正履)와 함께 금년 6월에 같이 올라와서 진소(陳疏)하려고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어진혁은 그 자취를 감추려고 산송(山訟)을 꾸며 만들어 신과 함께 혐의가 있는 것처럼 꾸며내었으니, 더욱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나계태(羅啓泰)는 2차의 형벌을 가하니, 직초(直招)하기를,
"책자(冊子)는 과연 간간이 펴보았는데, 김남복(金南復)이 신의 아비에게 전하여 준 것이었습니다. 생각건대, 이천해(李天海)와 김일경(金一鏡)이 죽을 때에도 굽히지 않고 성상을 향하여 부도(不道)한 말을 꺼냈으니,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신은 곁에서 들었는데, 이 말은 김남복이 그의 외사촌(外四寸) 최완(崔浣)에게서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나계복(羅啓復)을 결안(結案)하기를,
"국사(國事)가 매우 잘못되고 국운(國運)이 날로 비색해진다는 말은 김남복(金南復)이 전한 것인데, 나홍언(羅弘彦)의 일록(日錄) 중에 김일경·목호룡(睦虎龍)·이천해(李天海) 등의 말까지도 역시 김남복이 전한 것입니다. 이러한 흉언(凶言)을 나만치(羅晩致)·나숭훈(羅崇訓)도 일찍이 전한 바로서 참청(參聽)하지 않은 것이 없느니, 흉역(凶逆)에 동참(同參)한 것이 확실합니다."
하였다.
7월 22일 기축
금오랑(金吾郞)을 보내어 역적 나홍언(羅弘彦)과 처자(妻子)를 참형(斬刑)에 처하고, 교형(絞刑)에 처하도록 하였다.
7월 24일 신묘
본부(本府)에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심우명(沈遇溟)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무신년234) 3월 11일에 권서린(權瑞麟)의 집에 찾아간 것은 아무 뜻 없이 한 것입니다."
하였다.
7월 25일 임진
조원명(趙遠命)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정언(正言) 정광은(鄭光殷)이 상소(上疏)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臣)이 국문(鞫問)에 참여할 때에 전후(前後)의 문안(文案)을 보니, 지금까지 찾아내려고 한 것은 모두 흉언(凶言)의 내력(來歷)이었습니다. 역적 나홍언(羅弘彦)의 공초에는 이르기를, ‘김남복(金南復)이 회진(會津)의 진사(進士) 임광헌(林光憲)과 유학(幼學) 박사익(朴師益)에게 들었다.’고 하니, 국체(鞫體)에 있어서 이는 마땅히 김남복과 함께 모두 잡아들여야 하는데도 지금까지 그들은 법망(法網)에서 빠져 있으니, 소홀함을 면할 수 없습니다. 김남복의 공초에도 역시 남평(南平)의 진사(進士) 정세남(鄭世南)이 듣고 전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아직까지도 그들을 잡아들이지 않았으니, 이는 상핵(詳覈)하는 도리에 전연 어긋납니다. 나계태(羅啓泰)와 나계복(羅啓復)의 공초(供招) 중에 끌어들인 최완(崔浣)도 또한 한 번 구문(究問)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모두 체포(逮捕)하여야 하고, 그 나머지 죄인들에 대하여서도 잡아들여야 될 자는 다시 국청(鞫廳)에 영을 내려서 나홍언·김남복의 공초를 상고하여 일일이 잡아와서 국문하게 하소서. 심단(沈檀)의 이름은 국초(鞫招)에까지 나왔었는데 은졸(隱卒)235) 의 은전(恩典)을 봉조하(奉朝賀) 이관징(李觀徵)의 예(例)에 따라 시행하도록까지 하였으니, 사체(事體)가 미안한 것이 이보다 더할 수가 없습니다. 빨리 환침(還寢)236) 하게 하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송내성(宋來成)은 결안(結案)한 뒤에 3삭(朔)이 지나도록 임시 휴식(休息)시키고 있습니다. 듣건대, 송내성과 관련된 자는 겨우 박만보(朴萬普)·장석(張奭) 등만 남았다고 하는데, 마땅히 빨리 핵처(覈處)하여 정법(正法)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심단은 백수 잔년(白首殘年)에 다시 무엇을 더 바라서 이와 같은 거조(擧措)를 하였겠는가? 게다가 그들이 원인(援引)한 것도 또한 분명하지 않은데, 어찌 은졸의 은전을 중지시키겠는가? 송내성은 박만보 등의 결말(結末)을 우선 기다려도 또한 늦지 않을 것이다. 다른 일은 상소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7월 26일 계사
본부(本府)에 국청(鞫廳)을 설치하고서 나숭헌(羅崇獻)을 4차(次)로 형문(刑問)을 실시하여 5번 형장(刑杖)을 가하니, 직초(直招)하기를,
"나홍언(羅弘彦)의 일록(日錄)은 과연 직접 보았습니다. 흉언(凶言)에 대하여서는 김남복(金南復)이 회진(會津) 지남동(指南洞)에 사는 최윤중(崔允中)·최완(崔浣)에게 들었으며, 지난해 9월 12일에 나주(羅州)에서 이중욱(李重郁)·이중무(李重懋)·이태령(李泰齡), 그리고 신(臣)의 조카 나계복(羅啓復)과 김공옥(金貢玉)이 장우규(張宇奎)의 종 학생(鶴生)의 집에 모였는데, 김남복이 이르기를, ‘인골(人骨)을 가지고 정사효(鄭思孝)의 집에 보내 주면 가루로 만들어 약(藥)에 타서 모역처(謀逆處)에 쓰려고 하나, 듣건대, 경중(京中)에는 인골(人骨)이 매우 귀하다고 하니, 만일 여기서 구하여 보낸다면 생색이 크게 날 것이다.’라고 하는데, 마침 나주(羅州) 죽포(竹浦)에서 산다는 낯선 손님이 왔으므로 그만 파거(罷去)하였습니다."
하였다.
7월 27일 갑오
약방 제조(藥房提調) 윤순(尹淳)이 여러 의관(醫官)들을 거느리고 임금의 체후(體候)를 입진(入診)하였다.
본분(本府)에 국청(鞫廳)을 설치하고서 장우규(張宇奎)를 3차 형문(刑問)하고 형장(刑杖) 13도(度)를 치니, 직초(直招)하기를,
"나홍언(羅弘彦)의 흉모(凶謀)를 신(臣)이 알고 있었습니다. 신이 나숭헌(羅崇獻)의 집에 가기도 하고 나숭헌 무리들도 신의 집에 모이기도 하여, 인골(人骨)을 나숭헌에게 주면, 정사효(鄭思孝)의 집으로 보내어 국가(國家)에 쓰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7월 28일 을미
밤 5경(五更)에 목성(木星)이 헌원성(軒轅星)을 범하였다.
본부(本府)에 국청(鞫廳)을 설치하고서 배세익(裵世益)을 4차(次) 형문(刑問)하니, 지만(遲晩)237) 하면서 이르기를,
"신(臣)이 나홍언(羅弘彦)의 집에 가니, 장우규(張宇奎)도 또한 와서 있었고, 나홍언의 형제 부자(父子)들도 모두 모여 종이에다가 약말(藥末)을 싸서 서울에 보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인골(人骨)인데 정 감사(鄭監司) 사효(思孝)의 집에 보내면 궐내(闕內)에 들여보내어 저주(咀呪)하는데 쓰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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