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정유
판부사(判府事) 이의현(李宜顯)이 상개(上价)238) 의 임무를 사체(辭遞)하였다.
8월 2일 무술
대신(大臣)과 늙고 병든 신하에게 개소(開素)239) 하게 하였다.
비로소 개정(開政)하여 윤순(尹淳)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가 판의금(判義禁)으로 승진시키고, 이진순(李眞淳)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이유(李瑜)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김흥경(金興慶)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김상규(金尙奎)와 권적(權𥛚)을 승지(承旨)로,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를 사은 정사(謝恩正使)로, 유엄(柳儼)을 수찬(修撰)으로, 황정(黃晸)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비로소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4일 경자
김흥경(金興慶)·윤순(尹淳)·윤유(尹游)·송진명(宋眞明)·박문수(朴文秀)를 비국 당상(備局堂上)에 임명하였다.
야대(夜對)240) 를 행하였다. 임금이 최질(衰絰)을 갖추고 소석(素席)을 펴고서 앉았다.
8월 5일 신축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당(備堂)241) 을 불러 비로소 차대(次對)242) 를 행하였다. 금오 당상(金吾堂上)도 함께 들어오니, 임금이 국수(鞫囚)의 초부(抄簿)를 점검하였다. 이때 국청(鞫廳)의 여러 죄인 중에는 형장(刑杖)을 받다가 죽은 자도 많고, 혹은 실정(實情)을 추구하였으나 거짓말을 하고 자복하지 않는 자도 또한 많았다. 동의금(同義禁) 조원명(趙遠命)은 붓을 잡고 임금의 하교(下敎)를 받들어 여러 죄인들의 이름 밑에 기록을 달았다. 우의정(右議政) 이집(李㙫)이 말하기를,
"국청 죄인 중에도 아직 안문(按問)하지 않은 자도 많은데다가 판의금(判義禁) 윤순(尹淳)도 새로 임명되어서 옥정(獄情)을 아직 잘 모르는데, 어찌 경솔하게 작처(酌處)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조 판서 조문명(趙文命)은 말하기를,
"끝까지 캐어 보지 않고 이와 같이 작처하게 되면 반드시 사람들의 말썽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70여 명이나 되는 사람을 소석(疏釋)하지 않고 그대로 겨울을 지내게 하면 반드시 여위어서 죽게 될 걱정이 있을 것이다."
하고는, 권섭(權攝)은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고, 최종하(崔宗夏)와 황익재(黃翼再)는 석방하여 보내고, 김중기(金重器)는 도로 배소(配所)로 돌려보내라고 명하였다. 권섭은 고(故) 부제학(副提學) 권변(權忭)의 손자이고 역적 권첨(權詹)의 아들이었으며, 최종하도 바로 전 승지 최종주(崔宗周)의 형이고, 나홍언(羅弘彦)의 매부(妹夫)인데, 흉언(凶言)의 내력(來歷) 때문에 나홍언에게 고발당하였고, 황익재는 역당(逆黨) 중에도 가장 흉악한 자로서 역적(逆賊)의 공초에 긴요하게 나왔으나 계제(階梯)243) 가 중간에서 끊어지고, 날짜가 조금 틀렸다는 이유로써 모두 그냥 석방된 것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다음부터는 역적(逆賊)의 부자(父子)가 혹시 사건(事件)이 각기 다르고 혹은 각기 흉모(凶謀)를 내어서 함께 흉역(凶逆)을 한 사람 외에는 사정을 알고 동참(同參)한 것으로써 그 자식에게 자복을 받아내어 곧바로 연좌(緣坐)시키는 법은 시행하지 말게 하라."
하고, 이것으로써 기록하여 법식(法式)으로 삼게 하였다.
죄인 나숭헌(羅崇獻)이 승관(承款)을 한 뒤 형(刑)을 집행하기 전에 죽으니, 김남복(金南復)과 나숭열(羅崇說)의 예(例)에 의하여 수노 적산(收孥籍産)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의금부(義禁府)의 계사(啓辭)를 따른 것이다.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이귀휴(李龜休)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으니, 새로 아뢰기를,
"죄인 김중기(金重器)는 허다한 죄의 실상이 모두 놓아줄 수 없는 데 관계되어 구핵(究覈)한 것이 절반도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배소(配所)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내리시니, 옥체(獄體)에 어긋나고 왕장(王章)244) 도 굽히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죄인 김중기에게 배소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거두시고,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엄한 형벌로 죄상을 알아내어서 왕법(王法)을 바로잡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죄인 권섭(權攝)의 이름은 역적의 공초에 긴요하게 나왔습니다. 권첨(權詹)은 천리의 바깥에 있었고, 여러 역적들과 중간에 끼어서 모의(謀議)한 자는 실제 권섭이었습니다. 사실의 조사도 끝나지 않았데 갑자기 작처(酌處)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니, 국청의 체모가 뒤바뀌었습니다. 청컨대 권섭에게 감사 도배(減死島配)하라는 명령을 거두시고, 이내 국청으로 하여금 엄중히 사실을 조사하여 죄상을 알아내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이기진(李箕鎭)이 말하기를,
"대흥 산성(大興山城)은 천험(天險)의 요지(要地)인데, 조정에서 그냥 내버려 두니 참으로 아깝습니다."
하고, 장붕익(張鵬翼)·윤순(尹淳)·이광덕(李匡德) 등도 합사(合辭)하여 그 성이 국중(國中)의 산성(山城)에서 가장 험고(險固)하다고 일컬었다. 이기진은 용현(龍峴)과 여현(礪峴) 사이에 진(鎭)을 하나 설치하여서 관방(關防)을 튼튼히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확(商確)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기진이 말하기를,
"조정에서 공채(公債)에 대하여 10분의 2씩을 거두는 규칙을 금한 관계로 본부(本府)에서 칙사(勅使)를 접대하는 수용비(需用費)를 마련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10분의 2를 이자로 거두도록 허락하여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조정에서 7,8만 냥(兩)은 획급(劃給)하여야만 경비로 쓸 수가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광덕(李匡德)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어찌하면 되겠는가?"
하매, 이광덕이 말하기를,
"신(臣)의 소견으로는 국가에서 급채(給債)를 허락하여 경비로 쓰게 하는 것은 그 근본이 옳지 못합니다. 또 10분의 1의 규정을 정하여 놓고 그것을 지키지 못한다면 신은 가만히 부끄럽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은 쾌히 허락하기가 어려워서 민원(民願)에 따라 처리하게 하고 선혜청(宣惠廳)의 예(例)에 따라 경리청(經理廳)에 인신(印信)을 만들어 주기를 명하였으니, 이는 제조(提調) 김취로(金取魯)의 말을 따른 것이다, 군문(軍門)의 습진(習陣)은 졸곡(卒哭) 후에 실시하기로 하고 사습(私習)에 관한 절차도 계해년245) 의 예에 따라 거행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훈련 대장(訓鍊大將) 장붕익(張鵬翼)의 말을 따른 것이다.
뒤에 묘당(廟堂)의 복주(覆奏)에 따라 여현(礪峴)에 첨사(僉使)를 설치하고 첨사가 감영에 머무르면서 무사(武士)를 자의(自意)로 추천 임명하여 진수(鎭守)하도록 하였다.
이정제(李廷濟)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조적명(趙迪命)을 헌납(獻納)으로, 김상성(金尙星)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김호(金浩)를 승지(承旨)로, 송진명(宋眞明)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8월 6일 임인
약방 제조(藥房提調)가 임금의 체후(體候)를 입진(入診)하였다.
의관(醫官) 권성징(權聖徵) 등이 국문(鞫問)을 받고 삭직(削職)되었다가 석방이 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서용(敍用)하기를 명하였으니, 윤순(尹淳)의 말을 따른 것이다.
《삼강행실(三綱行實)》과 《이륜행실(二倫行實)》을 승정원(承政院)·옥당(玉堂)246) ·한원(翰院)247) 에 내려 주라 명하였다.
8월 7일 계묘
영원군(靈原君) 헌(櫶)이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헌은 나이가 늙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죽으니, 마음이 매우 슬프다. 옛날에 술을 내려 주던 생각을 하니, 더욱 마음이 아프다. 초상 장례를 치르는 데 드는 비용을 넉넉히 주어서 나의 슬픈 마음을 표하는 뜻을 보여라."
하였다.
8월 8일 갑진
수리청 당상(修理廳堂上) 이정제(李廷濟) 등에게 상(賞)을 주었다. 대개 창경궁(昌慶宮)·창덕궁(昌德宮) 두 궁궐은 순정(順正)이 매흉(埋凶)248) 한 옥사(獄事)가 일어난 뒤로 크게 수리(修理)를 하면서 묵은 흙을 파다가 궐(闕) 밖에 버린 것이 크기가 언덕과 산만 하였는데, 모두 새 흙을 수레로 실어다가 파낸 곳을 메웠다.
사간원(司諫院) 【정언 정광은(鄭光殷)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係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일의 계사 중에 권익관(權益寬)의 일은 정지하였다. 또 아뢰기를,
"박천 군수(博川郡守) 이희태(李熙泰)가 내사(內司)의 추쇄관(推刷官)을 구축(歐逐)한 데 대하여 신(臣)도 또한 전하여 온 소문을 대강 들었습니다. 그런데 추쇄관의 첩보(牒報)는 과장된 말도 많은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공제(公除)도 끝나기 전에 잡아다가 조사하라는 특명(特命)이 내사(內司)에 연관된 사람에게 맨 먼저 미쳤으니, 청문(廳聞)의 미치는 바에 있어 그것이 성덕(聖德)에 누(累)가 되고 후일에 끼치는 폐단이 크겠습니다. 청컨대 박천 군수 이희태를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라는 명령을 거두시고 본도(本道)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소서. 그리고 당시 연석(筵席)에서 그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하실 때에 입시(入侍)하였던 승선(承宣)249) 은 감히 한마디 말도 위복(違覆)250)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문 채 명령을 받들어 따랐으니, 이는 왕명을 출납하는 데 있어 다만 성실(誠實)하게 한다는 도리가 아닙니다. 청컨대 당일에 입시한 승지(承旨)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당초의 하교(下敎)는 구례(舊例)를 따르려고 한 것인데, 지금 와서 논핵하는 것은 사체(事體)를 알지 못하겠다. 위에 있는 자도 나문(拿問)하지 못하는데, 하나의 수령(守令)을 구차스럽게 조사를 하겠는가?"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니, 임금이 혼전(魂殿)은 창경궁(昌慶宮)의 문정전(文政殿)으로 고쳐 정하고 발인(發靷)한 후의 환어(還御)하는 한 가지 절차는 경자년251) 의 예(例)에 의거하여 거행하라 명하였다. 혼전을 처음에 읍화당(浥和堂)으로 정하였으며 어재실(御齋室)252) 은 사관(史館)으로 정하여 사관에 저장되어 있던 《실록(實錄)》을 시강원(侍講院)으로 옮겨 놓고 공사(工事)를 크게 일으켜 읍화당을 개수(改修)하는데, 나무와 돌, 단청(丹靑)을 입히는 역사가 매우 호대(浩大)하였다. 공사가 거의 끝나가는데도 소용(所用)이 없게 되었으므로 다시 창경궁에 공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또 명령을 내려 조포 곡반(朝晡哭班)과 은전 가칠 곡반(殷奠加漆哭班)은 영경문(永慶門) 밖으로 옮겨 설치하고 초곡반(初哭班)은 광달문(廣達門) 안쪽으로 연하여 설치하였는데, 빈전(殯殿)과 조금 떨어져 있는 이유로써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8월 9일 을사
지평(持平) 심성진(沈星鎭)이 상소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마땅히 대신(大臣)의 병(病)이 차도가 있을 때를 기다려 그로 하여금 사사(史事)에 전념(專念)하도록 하여 빨리 역사(役事)를 마치도록 하고, 비국(備局)의 여러 재상(宰相)이 윤직(輪直)하는 법은 마땅히 더욱 분명하게 하소서. 근래에 반행(班行)이 희소(稀疎)하여져서 때로는 무재(武宰)가 반행을 위압(威壓)하는 때가 있으니, 더욱 신칙(申飭)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월 10일 병오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도정(都政)253) 을 행하여 이종백(李宗白)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조언신(趙彦臣)을 승지로, 조상경(趙尙慶)을 수찬(修撰)으로, 유엄(柳儼)을 부응교(副應敎)로, 이현보(李玄輔)를 헌납(獻納)으로, 조적명(趙迪命)을 교리(校理)로, 조명익(趙明翼)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유엄은 가세(家世)와 문벌(門閥)이 고단(孤單) 한미(寒微)하고 지위(地位)와 명망(名望)이 보잘것없지마는, 말과 글재주가 조금 있었고, 또 인아(姻婭)254) 의 세력을 믿고서 남을 헐뜯기도 하고 서로 사귀기도 하여 외람되게 동벽(東壁)255) 에까지 올랐다. 조명익은 명문(名門)의 자제(子弟)로서 영도(榮途)에 나아가는 데 조급하여 맨 먼저 출각(出脚)256) 하였고, 유엄과는 형제처럼 지내며 서로 추천하고 칭찬하여 전부(銓部)257) 의 의망(擬望)까지 받게 되었으니, 벼슬길의 혼탁하고 난잡한 것이 극도에 달하였다.
8월 11일 정미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유(李瑜)를 장연 부사(長淵府使)로 특별히 보직(補職)시켜 명일(明日)로 길을 떠나가게 하였다. 이유는 제수(除授)한 벼슬을 계속 사직하고 쌓여 있는 일을 처리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명령이 내린 것이다.
하교하기를,
"일찍이 남상(南床)258) 을 겪는 자로, 동벽(東壁)에 오른 지가 오래 되어서 전한(典翰)259) 으로 마땅히 나가야 하는데도 나가지 못한 것은 비의(備擬)260) 된 사람이 없어서인가?"
하였는데, 이는 임금이 마음속으로 이종성(李宗城)을 지적한 것이다.
장태소(張泰紹)를 회령 부사(會寧府使)로, 김상성(金尙星)을 교리(校理)로, 권혁(權爀)을 부교리로, 이일제(李日躋)를 장령(掌令)으로 송징계(宋徵啓)를 지평(持平)으로, 이유신(李裕身)을 정언(正言)으로, 김담(金墰)을 장령으로, 이덕수(李德壽)를 동의금(同義禁)으로, 김치후(金致垕)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신방(申昉)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이필구(李必耉)를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로, 윤택정(尹宅鼎)을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 조문명(趙文命)과 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의 정사(政事)였다.
8월 12일 무신
크게 천둥하고 폭우(暴雨)가 내렸다.
이조(吏曹)에서, ‘전한(典翰)은 드문 직책이기 때문에 의망(擬望)에 합당한 자가 쉽지 않으므로 차출(差出)할 수 없다.’고 아뢰니, 일찍이 남상(南床)을 지낸 자로써 단부(單付)261) 하라고 명하였다가 우의정 이집(李㙫)의 진달(陳達)로 인하여 정지하기를 명하였다.
8월 13일 기유
총호사(摠護使) 이집(李㙫)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산릉(山陵)의 가정자각(假丁字閣)은 경자년262) 의 예(例)에 의거해 5간(間)의 제도(制度)로 하여 대왕 신위(大王神位)는 구정자각(舊丁字閣)에 안치하도록 하고 내상(內喪)의 찬궁(欑宮)은 가정자각에 안치하도록 하며, 표석(表石)의 마정(磨正)은 3분(分) 정도를 넘지 않게 줄이고 농대(籠臺)263) 는 그대로 두고 쇳조각으로 빈 곳을 채우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월 14일 경술
본부(本府)에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역적 나홍언(羅弘彦)의 아들 나계태(羅啓泰)와 나숭헌(羅崇獻)의 아들 나계옥(羅啓沃)을 당고개(堂古介)에서 참형(斬刑)에 처하고, 배세익(裵世益)은 정상을 알면서도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당고개에서 참형에 처하였으며, 나계복(羅啓復)은 참형에 처한 뒤에 노적(孥籍)264) 하였다. 송내성(宋來成)을 결안(結案)하기를,
"전주(全州)의 통인(通引)으로서, 정사효(鄭思孝)의 부자(父子)와 박도창(朴道昌)의 고모(姑母)인 나인(內人)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정사효·박도창과 결합하여, 옥정(玉貞)으로 하여금 궐내(闕內)에 출입하게 하고, 초빈(草殯)을 허물어 사람의 뼈를 가져다가 행담(行擔)에 담아 가지고 박도창의 집에 보내어 국가(國家)를 저주(咀呪)하게 하였으며, 옥정이 매흉(埋凶)할 때에 흙을 파던 쇠가 집안에 있는데, 그 모양이 낫과 같이 생겼습니다. 박도창의 무리가 말하기를, ‘이것으로 저주(咀呪)한 뒤에 박도창은 크게 귀(貴)하게 될 것이고, 정사효는 정승(政丞)이 될 것이며, 정사효의 아들은 판서(判書)가 될 것이라’하여, 황도중(黃道重)의 처남(妻娚) 여릉군(驪陵君)을 추대(推戴)하려고 하였습니다. 모역(謀逆)한 것이 적실(的實)합니다." 하였으므로,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孥籍)하게 하였다.
8월 15일 신해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使)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흥무(尹興茂)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8월 16일 임자
이조 판서 조문명(趙文命)을 우의정(右議政)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임금이 복상(卜相)265) 을 할 것을 명하니,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은 병 때문에 못 나오고, 우의정 이집(李㙫)이 빈청(賓廳)에 나와서 복상할 명단을 봉입(封入)하자, 가복(加卜)하라고 명하므로, 이집이 청대(請對)하여 들어와서 임금의 의중(意中)이 어디 있는지를 앙청(仰請)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광좌(李光佐)와 민진원(閔鎭遠)은 진실로 오늘날의 영수(領袖)이지마는, 이광좌는 타인(他人)이 그를 조정에 편안히 있지 못하게 하고, 민진원은 자기 스스로 조정에 있지 않으려고 하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하고는, 마침내 이조 판서 조문명으로 정하였다. 하교하기를,
"가복(加卜)266) 한 사람은 공평(公平)하고 총민(聰敏)하지마는, 후중(厚重)한 태도는 끝내 부족한 것 같다."
하였으니, 매복(枚卜)하는 날에 당사자의 병통(病痛)을 말한 것은 대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듣고 면려(勉勵)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8월 18일 갑인
이집(李㙫)을 좌의정으로 승진시키니, 이집이 나아와서 숙배(肅拜)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이집을 면대하고 타이르기를, ‘윤혜교(尹惠敎)의 일로 경계할 것 없고 한 번 패초(牌招)하거든 곧 나오라’고 하니, 이집이 ‘녜, 녜’하면서 공손히 대답하고 물러 나갔다. 그것은 이철보(李喆輔)가 한 번 패초(牌招)에 곧바로 나왔던 이유로써 윤혜교를 탄핵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이렇게 전교한 것이다.
정언섭(鄭彦燮)을 발탁하여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았다. 정언섭은 자격(資格)과 경력이 미치지 못하고, 지위(地位)와 명망(名望)이 경미(輕微)하지만, 당시 재상(宰相)의 동내(洞內)에 살면서 계획을 세워서 자리를 얻으니, 물정(物情)이 해괴하게 여겼다.
8월 19일 을묘
박찬신(朴纘新)을 배왕 대장(陪往大將)으로 삼았다.
정언(正言) 박필균(朴弼均)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일종의 난역(亂逆)의 무리가 다만 하늘을 욕하고 해를 쏘는 것으로써 능사(能事)를 삼아서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변서(變書)와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교문(敎文)으로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 망측(罔測)스런 흉언(凶言)을 만들어 가지고 성궁(聖躬)을 무함(誣陷)하는 데 못하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나홍언(羅弘彦)의 글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습니다. 신(臣)의 생각에는 지금 첫번째 해야 할 일은 성궁을 무함하는 근원을 낱낱이 중외(中外)에 분명히 알려서 흉심(凶心)을 끊게 하고 난본(亂本)을 막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 명의 역적을 겨우 주살(誅殺)하고 나면 또 한 명의 역적이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니, 국가(國家)는 편히 쉴 곳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어제(御製) 대행 왕대비(大行王大妃)의 행록(行錄)을 보건대, 말단(末端)의 기록한 데에 ‘궁흉(窮凶)하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말은 당저(當宁)267) 만 무함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선왕(先王)까지 무함한 것이다.’라고 한 것이 있으니, 비록 저 흉역(凶逆)들이라도 어찌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전하(殿下)께서는 스스로 무함을 받으면서도 스스로 변명하는 일을 싫어하여 한결같이 덮어두어 난역의 무리들에게 더욱 기탄(忌憚)함이 없도록 하시니, 성모(聖母)의 놀라고 통탄하는 마음을 체득하는 것이 선왕을 밝게 드러내는 도리가 된다는 것을 생각지 않습니까? 장문(狀文)의 체재(體裁)는 원근(遠近) 지방에 파고(播告)하는 글과는 다르니, 특별히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별달리 문자(文字)를 찬술(撰述)하여 8방(八方)에 포시(布示)하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지난 가을 이래로 조신(朝臣)들 중에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을 모두 신원(伸冤)하여 주기를 앙청(仰請)한 사람이 있었는데, 번번이 조용히 진백(陳白)하라고 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간신(諫臣)에게 비답(批答)하기를, ‘대신(臺臣)이 간청(干請)할 것이 아니다.’라고 하교하였습니다. 훌륭한 임금이 말씀이 앞뒤가 서로 다르니, 어찌 지성으로 아랫사람을 통솔하는 도리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김중기(金重器)도 이유익(李有翼)과 가까운 인친(姻親)이므로 허다한 죄범(罪犯)이 몹시 흉악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도 갑자기 배소(配所)로 돌려 보내라는 명령을 내리시고, 권섭(權攝)은 흉역(凶逆)의 사실이 역적들의 공초에 여러 번 나왔는데도 갑자 감사(減死)하라는 명령을 내리시었습니다. 황익재(黃翼再)는 여러 번 역적들의 공초에 나와서 정적(情跡)이 의심할 만한데도 완전히 석방하라고 특명을 내리셨습니다. 전하께서 지난번에 난역이 거듭 일어나는 것은 ‘전적으로 무신년268) 의 역적을 완치(緩治)한 데서 나왔다.’ 하셨는데, 뒤따라 뉘우친 지가 오래지 않아서 다시 지난번의 실수를 밟게 되어, 신은 가만히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전하께서도 2신(二臣)269) 을 당연히 신원시켜야 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으실 터인데, 다만 시배(時輩)들의 마음에 거슬림이 있을까을 염려해 똑같은 4신(四臣)270) 중에서 억지로 구별하여 누구는 신원하고 누구는 신원하지 않아 피차(彼此)의 처지(處地)를 조정(調停)하려고 하였습니다. 김중기 무리들의 죄는 마땅히 신문(訊問)하여야 된다는 것을 모르시지는 않을 터인데, 조금도 유난(留難)하시지 않고 갑자기 작처(酌處)하라고 하시니, 삼척(三尺)271) 은 장차 어디에 쓰려고 하십니까? 신은 윤혜교(尹惠敎)와 홍성보(洪聖輔)의 일에 대하여 개탄스러워하는 것은 가령 윤혜교가 웅번(雄藩)에 적합하지 않는다면 부임(赴任)하기 전에 말하는 것이 옳은데도 교귀(交龜)272) 한 지 겨우 수일 만에 이와 같이 논핵(論劾)하여 그 직책에 편안하게 있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홍성보에 대하여서는 그가 만일 이익을 구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신축년273) ·임인년274) 당시의 형세가 과연 어떠하였었는데, 그 당시에 당로(當路)275) 한 이들에게 투합(投合)하지 않고, 그저 하나의 가관(假官)276) 으로서 한창 일어나는 의논을 역쟁(力爭)하여 틀림없이 돌아올 욕을 취하였겠습니까? 말하는 이들이 이익을 탐낸다고 지목하는 것은 말이 조리에 맞지 않습니다. 마땅히 개석(開釋)하여 주어서 뜻밖에 죄에 걸리는 원통함이 없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양신(兩臣)의 일은 임금이 특별히 처치할 문제이므로, 신하된 자가 번거롭게 청할 문제가 아니다. 지금까지 지체시켜 둔 것은 남을 이기려는 구습(舊習)을 바로 억제하려는 의도이었다. 김중기 등의 일은 이미 참량(參量)하여 한 것이고, 윤혜교와 홍성보의 일은 그대의 말이 옳다. 위의 조항은 앞뒤로 자세히 유시하였으나, 성후(聖后)의 하교(下敎)는 천년까지 전해갈 것이다. 어찌 문자(文字)를 별달리 찬술(撰述)하겠는가?"
하였다.
송인명(宋寅明)을 발탁하여 이조 판서로 삼고, 유엄(柳儼)을 승지로, 권이진(權以鎭)을 좌참찬(左參贊)으로, 권적(權𥛚)을 승지로, 윤광익(尹光益)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8월 20일 병진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윤흥무(尹興茂)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국휼(國恤)의 졸곡(卒哭) 전에 백관(百官)들은 상복(常服)을 벗고 식가(式暇)277) 를 마련하는 것이 분명히 절목(節目)에 있는데도, 근래 후원(喉院)278) 의 신하와 한두 명의 경재(卿宰)가 혹은 식가(式暇)로써 현탈(懸頉)279) 하기도 하고 혹은 복제(服制)로써 정단(呈單)하기도 했으니, 해당 방(房)의 승지(承旨)는 추고(推考)하고 지금부터 신칙(申飭)하여 현탈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도사(都事)의 임무는 본래 풍력(風力)280) 을 바탕으로 하는 것인데, 금번 검전(檢田)에 대하여서는 더욱이 택차(擇差)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도 경상 도사(慶尙都事) 심일희(沈一羲)는 연약하고 무능하므로 이 임무를 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조현명(趙顯命)이 변경(邊境)에 찬배(竄配)된 죄인 박장윤(朴長潤)을 품질(稟秩)에 두니, 판의금(判義禁) 윤순(尹淳)이 복계(覆啓)하기를,
"박장윤이 당초에 연좌된 죄는 너무 망솔(妄率)한 것이었는데, 대관(臺官)의 계사(啓辭)에서 죄를 성토한 것도 역시 뜻밖이었습니다. 변찬(邊竄)한 것이 지금 벌써 6년이나 되었으니, 넉넉히 징계할 수가 있겠습니다. 소석(疏釋)하라는 은전을 내리시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정언(正言) 박필균(朴弼均)이 상소에 대한 비답 때문에 인피(引避)하니, 정언 윤흥무(尹興茂)가 처치(處置)하기를,
"대각(臺閣)에서 논사(論事)하는 체모는 품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고 일에 뜻을 진술하는 것이야 잘못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마는, 추탈(追奪)한 것을 다시 신원(伸冤)하라는 말을 소중(疏中)에 끼워넣었으니, 그가 사당(私黨)을 비호하고 구습(舊習)을 따르는 풍습은 실로 오늘날에 마땅히 있어야 될 것이 아닙니다. 그밖의 의논한 바의 옳고 그른 것은 그만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바로 이 한 가지 일만 가지고도 전례에 따라 체직을 청하는 것으로 그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정언 박필균을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약방 제조(藥房提調)가 여러 의관(醫官)들을 거느리고 임금의 체후(體候)를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박문수(朴文秀)가 금오(金吾)281) 에서 대명(待命)한다고 하는데, 사체(事體)에 미안한 일이다. 이와 같이 하게 되면 하대부(下大夫)의 반열(班列)에 있는 자도 또한 장차 대명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이 뒤로는 중신(重臣)과 장신(將臣)이 대단한 정세(情勢)가 있어 부득이한 것이 아닌 외에는 재신(宰臣)이 대명(待命)하는 일을 번거롭게 품(稟)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박문수는 영영(嶺營)282) 에서 돌아온 뒤에 이양신(李亮臣)에게 무함(誣陷)을 받았다고 핑계하면서 장황(張皇)하게 상소 변명하고 평상시 소명(召命)을 어겼던 까닭으로 이와 같이 하교한 것이다.
8월 22일 무오
이보다 앞서 하교하기를,
"재궁(梓宮)에 칠포(漆布)를 쓰는 것은 대부분 재궁에 백 번의 옻칠을 기준으로 하는데, 천개(天蓋)283) 의 은못[銀釘]을 박는 곳에 혹시 아득하게 흔적이 없을 수 없는 까닭으로 베[布]로 싸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쓰는 재궁은 전체(全體)의 은못에 똑같이 옻칠을 더하여 흔적이 전연 없으니, 칠포를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대신(大臣)들에게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좌의정(左議政) 이집(李㙫)이 아뢰기를,
"이번 은못을 박은 데에 전체 옻칠을 하여 깊고 얕은 색깔의 구별이 없으니, 성교(聖敎)가 진실로 합당합니다. 갑인년284) 과 경신년285) 의 예에 따라 칠포를 쓰지 말고, 모두 기준 도수(度數)대로 칠하여 쓰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판부사(判府事) 이태좌(李台佐)는 아뢰기를,
"칠포를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것은 진실로 성상의 하교와 같지마는, 갑진년286) 의 재궁은 오늘의 재궁과 서로 같으니, 갑진년의 일을 따라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이광좌(李光佐)와 심수현(沈壽賢)의 의논도 이태좌와 같았다. 임금이 이태좌의 의논에 따라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이집(李㙫)이 차자(箚子)를 올려 예조 참판(禮曹參判) 박문수(朴文秀)를 파직(罷職)시켜 패초(牌招)를 어긴 버릇을 깨우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8월 23일 기미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오광운(吳光運)을 승지(承旨)로, 임수적(任守迪)을 집의(執義)로, 민정(閔珽)을 정언(正言)으로, 한현모(韓顯謨)를 부교리(副校理)로, 조엄(趙儼)을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로 삼았다.
8월 24일 경신
하교하기를,
"갑진년의 예에 따라서 칠포(漆布)를 쓰려고 한다. 옛 제도를 봉심(奉審)하니, 세 번이나 베로 싸는 것은 허식(虛飾)에 가깝고 전연 베를 쓰지 않는 것도 역시 너무 뒤바뀐 것 같다. 칠포는 오늘에만 쓰게 하고 가칠(加漆)하는 도수(度數)는 32도(度)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6일 임술
이조 판서(吏曹判書) 송인명(宋寅明)이 나와서 숙배(肅拜)하였다. 송인명은 정미년287) 의 5품(五品)으로서 갑자기 총재(冢宰)288) 의 지위까지 뛰어올랐는데, 한 번 사직(辭職)하고는 곧바로 나와서 공무를 행하니, 사람들이 그의 방종(放縱)함을 근심하였다.
이봉익(李鳳翼)을 승지(承旨)로, 윤휘정(尹彙貞)을 집의(執義)로, 윤광운(尹光運)을 지평(持平)으로, 윤광익(尹光益)을 부응교(副應敎)로, 김재로(金在魯)를 지경연(知經筵)으로, 이광덕(李匡德)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김상성(金尙星)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삼았다.
8월 27일 계해
부교리(副校理) 한현모(韓顯謨)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사신(四臣)의 복삭(復削)289) 은 저절로 변경할 수 없는 시비(是非)가 있습니다. 그들이 죽은 경우를 물러 본다면 똑같이 함께 죽은 것이니, 그들에게 죄가 있다고 인정한다면 당연히 모두 삭직하여야 할 것이고, 죄가 없다고 인정한다면 당연히 모두 복직하여야 할 것이니, 구별하는 것이 합당치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지난 가을에 이들을 가엾이 여긴 교지를 내리시어 저들이 만들어낸 사신(四臣)의 죄는 깨끗이 모두 광명 정대(光明正大)한 지경으로 귀착되었습니다. 이에 마음속으로 무료(無聊)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억지로 그 사신(四臣)을 둘로 나누는 의논을 제기하여 자기들의 거취(去就)를 걸고 쟁론(爭論)하여는 듯하니, 전하(殿下)께서 이들의 뜻을 억지로 어기지 않으려고 소신을 굽혀 따랐습니다. 또 밖에 있는 사람들을 개진(開進)시키려고 하나 위안시킬 거리가 없으므로 곧 이어 제신(諸臣)에게 기다려 천천히 의논하라는 하교를 내렸습니다. 성심(聖心)은 먼저 탕평(蕩平)을 주장하여 인재를 모두 채용하는 데만 성급하게 하셨으니, 처분(處分)이 구간(苟簡)290) 하였음을 모르신 것은 아니겠으나, 일찍이 조금도 근심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복직시키면 조정에 있는 신하 중에 혹시 떠나가는 자가 있을까 염려되고 모두 삭직시키면 밖에 있는 신하 중에 혹시 떠나가는 자가 있을까 염려되고 모두 삭직시키면 밖에 있는 신하가 들어오지 않을까 염려되어, 반으로 나누어 복직시키고 삭직시킨 것입니다. 오직 균평(均平)을 힘써서 조정(調停)하여 모두 채용하는 방법을 삼았으니, 전하께서 사신(四臣)을 처분한 바는 본 사건에 있지 않고 다만 군하(群下)들의 진퇴(進退)만을 위한 것입니다. 언책(言責)에 있는 사람은 논열(論列)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들의 직분인데도 저 대신(臺臣)들은 천의(天意)를 엿보고 처치(處置)를 빙자하여 함부로 탄격(彈擊)하면서 조금도 돌아보아 꺼림이 없으니, 이것이 책망할 거리가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초래(招來)한 것입니다. 전하는 국세(國勢)가 고위(孤危)한 것을 민망히 여기고 난역(亂逆)들이 잇따라 생겨나는 것을 통탄(痛歎)하게 여겨서 신료(臣僚)를 협화(協和)시키는 것이 국가를 편안하게 하고 이롭게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탕평(蕩平)의 도(道)를 실행하는 자들이 다만 사의(私意)를 가지고 계교(計較)하는 사이에 작록(爵祿)을 나누어 골고루 얽매어 놓고 시비(是非)를 뒤섞어 양존(兩存)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끌어 가게 되면, 주자(朱子)가 이른바 ‘흑백(黑白)이 나누어지지 않았다.’ 한 것을 외람되이 당(黨)이 없다고 하는 것은 곧 대란(大亂)이 되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상소한 글 가운데 부진(附陳)한 것은 전후의 장주(章奏)하는 동안에 깨우쳐 준 것이 한 번만이 아니었으니 조만간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한데, 이와 같이 분요(紛鬧)하게 하니 사체(事體)에만 미안할 뿐 아니라 구습(舊習)을 다시 행하려 해도 상황은 더욱 해괴하다. 이것이 내가 시상(時象)이 어떻게 되는가를 기다리는 까닭이다. 이 소(疏)를 돌려주니, 이 뒤로는 협잡(挾雜)하는 이러한 말들은 봉입(捧入)하지 말라."
하였다.
8월 27일 계해
판부사(判府事) 이의현(李宜顯)이 대행 왕대비(大行王大妃)의 유지(幽誌)291) 를 찬진(撰進)하였는데, 그 글 가운데 성상(聖上)을 책봉(冊封)하여 사하(嗣下)로 삼을 적에 혹은 차자(箚子)로 혹은 소(疏)로써 안팎이 서로 결탁하여 위핍(危逼)하고 모해(謀害)하였다는 귀절이 있었으니, 대개 조태구(趙泰耉)와 유봉휘(柳鳳輝) 등의 제적(諸賊)을 지적한 것이었다. 임금이 그 글을 보고 대노(大怒)하여 하교하기를,
"무신년292) 의 난역(亂逆)은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이 앞에서 일으켰고, 세력을 잃어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들이 뒤에서 잇달았는데, 역적 김일경의 마음은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를 이끌어 들여서 흉역(凶逆)한 심사(心思)를 성취하려고 하였으나 국본(國本)이 이미 정하여져서 그 계획을 행할 수가 없게 되자, 교문(敎文)을 가지고 난역의 근본을 앞장서 부르짖었으며, 갑진년293) 의 대상(大喪) 뒤에 김일경이 형벌에 복종하여 죽임을 당하자 역적 박필몽(朴弼夢)과 같은 우두머리 제적이 차마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흉언(凶言)을 만들어내어 폐족(廢族)의 무리들을 선동하여 그 역모(逆謀)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 전말(顚末)이 이와 같은데도 구습(舊習)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문(誌文)으로써 후일 조정 고관(高官)을 병들게 하는 칼자루를 만들었다. 일찍이 시상(時象)을 통한(痛恨)한 것은 곧 성후(聖后)께서 평일에 가지신 뜻인데 지문(誌文)으로 인하여 해가 더욱 크게 되었다. 성덕(聖德)을 빛내려고 하다가 도리어 누(累)가 된다면, 그것은 곧 나의 불효(不孝)이다. 지문을 찬진한 신하는 어찌 이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유쾌한 마음으로 글을 지었겠는가? 나는 가만히 개탄하는 바이다."
하고, 인하여 첨삭(添削)하여 내려 주니, 지문(誌文)에 이르기를,
"성상께서 즉위하신 지 6년 경술년294) 6월 29일 병인(丙寅)에 경순 왕대비(敬純王大妃)께서 경덕궁(慶德宮)의 어조당(魚藻堂)에서 훙(薨)하시니, 춘추(春秋)가 26세였다. 7월 6일 계유(癸酉)에 유사(有司)가 ‘선문 주달(善聞周達)’과 ‘온유 성선(溫柔聖善)’의 2법(二法)을 써서 존시(尊諡)를 선의(宣懿)라 올리고, 휘호(徽號)를 효인 혜목(孝仁惠穆)이라 올렸으며, 방상(方上)은 의릉(懿陵)에 하여 이미 정하여지니, 우리 전하(殿下)께서 드디어 어제 행록(御製行錄) 한 통(通)을 내리면서 신(臣) 이의현(李宜顯)에게 유택(幽宅)의 지문을 쓰라고 명하셨다. 신은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아서 배수 계수(拜手稽首)하고 엎드려 그 행록을 읽은 뒤 감탄하기를, ‘우리 성후(聖后)의 지덕(至德)은 진실로 결함이 없었는데, 성상께서 쓰신 글이 밝고 뚜렷하여 기재(記載)한 것이 상세하였으니, 신이 어찌 감히 외람되게 모화(模畫)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삼가 행록(行錄)을 상고하니, 후(后)의 성은 어씨(魚氏)로 세계(世系)는 함종(咸從)이다. 원조(遠祖)는 화인(化仁)인데 여조(麗朝)에 비로소 드러났으며, 국초(國初)에는 직제학(直提學) 어변갑(魚變甲)이 염퇴(恬退)295) 한 절개가 있었고, 판중추(判中樞) 어효첨(魚孝瞻)과 호조 판서 양숙공(襄肅公) 어세공(魚世恭)에게 전해 와서는 이들 부자(父子)가 훈덕(勳德)으로써 3세(三世)에 현양(顯揚)되었으며, 좌참찬(左參贊) 어계선(魚季瑄)은 또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에 현달(顯達)하였다. 고조(高祖) 어한명(魚漢明)은 수운 판관(水運判官)으로 증(贈) 좌찬성(左贊成)이고, 증조(曾祖) 어진익(魚震翼)은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서 증(贈) 좌찬성(左贊成)이며, 조부(祖父) 어사형(魚史衡)은 한성 우윤(漢城右尹)으로서 증(贈) 영의정(領議政)인데, 이 분이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를 낳았다. 어유귀는 해미 현감(海美縣監) 이하번(李夏蕃)의 따님에게 장가갔는데, 중종 대왕(中宗大王)의 6세손(六世孫)으로서 완릉 부부인(完陵府夫人)에 추봉(追封)되었다. 숙종(肅宗) 31년 을유296) 10월 29일 기미에 후(后)가 한사(漢師)297) 숭교방(崇敎坊)의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는데, 탄생할 때에 부부인(府夫人)이 꿈속에 해와 달이 벽 위에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을 보았으므로, 꿈을 깬 뒤에 이상히 여겼었다. 후께서는 어려서부터 단중(端重)하여 함부로 유희(遊戲)하지 않았으며, 행동거지가 저절로 법도에 맞았다. 말수가 적고 기쁨과 성냄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며 늘 해어진 옷을 입고 남의 화식(華飾)을 보아도 부러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성품이 효순(孝順)하였다. 7세에 부부인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몸소 제전(祭奠)에 참여하여 슬퍼하기를 성인(成人)과 같이 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늘 부부인을 추사(追思)하여 눈물을 흘렸으며, 비록 부원군(府院君)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으나 일찍이 교타(驕惰)한 모양을 보이지 않았다. 무술년298) 에 단의 왕후(端懿王后)가 세자빈(世子嬪)으로서 일찍 별세(別世)하니, 숙종께서 경종을 위하여 명가(名家)의 현숙(賢淑)한 이를 극도로 간택하였다. 후(后)께서는 처음 입궐(入闕)할 때의 나이 겨우 14세이었는데, 질풍 폭우(疾風暴雨)를 만나도 엄숙하게 앉아 조금도 얼굴을 변하지 않았다. 임금299) 이 크게 기특하게 생각하여 예간(睿簡)300) 을 드디어 정하고 이에 빈(嬪)으로 책봉하여 9월 16일에 가례(嘉禮)를 거행하였다. 후께서는 책명(冊命)을 받은 뒤에 양전(兩殿)을 받들어 섬기면서 화열(和悅)한 얼굴 빛으로써 일심(一心)으로 경외(敬畏)하니, 숙종께서 늘 손을 잡고 하교하시기를, ‘나는 너의 착함을 알고 있으니, 훗날에 너를 믿는 것이 많을 것이다.’ 하였다. 또 하교하시기를, ‘듣건대, 너의 증왕모(曾王母)께서 오래 살고 복이 많았다고 하니, 너도 그와 같기를 바란다.’ 하였는데, 후께서 물러나와 좌우(左右)에게 말하면서 울기까지 하였었다. 대상(大喪)을 당하여 애통하고 사모하기를 제도대로 다하고, 약방(藥房)에 답하기를, ‘재궁(梓宮)이 한 번 닫히면 어찌 다시 천안(天顔)301) 을 뵐 수 있겠는가?’ 하니, 신료(臣僚)들이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여시(女侍)들을 부리는 데 있어서 은혜를 골고루 흡족하게 베풀었으며, 어려서 부모(父母)를 여윈 자를 보면 더욱더 돌보고 어루만져 주었는데, 이는 자신이 어릴 때 어머님을 여읜 슬픔때문에 그것을 아랫사람에게 미루어 미치게 한 것이다. 경자년302) 에 왕후(王后)로 진위(進位)하고, 임인년303) 가을에 예를 갖추어 책봉(冊封)되었다. 갑진년304) 에 경종이 승하(昇遐)하고 지금의 전하(殿下)께서 사위(嗣位)하시니, 후께서는 또 왕대비(王大妃)로 진위하였다. 병오년305) 상제(喪制)가 끝나니, 군신(群臣)이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경순(敬純)’이라고 하였다. 당시 경종께서 위예(違豫)306) 할 때에 병세가 4순(四旬) 동안을 위중하였는데, 후(后)가 정성을 다하여 구호(救護)하였으며 밤낮으로 애태우고 당황하였다. 마침내 거창(鉅創)307) 을 당한 초기에 슬퍼하여 몸이 바싹 여윈 것이 예절에 지나쳤으며, 빈소(殯所)를 만들 때부터 찬궁(欑宮)을 열 때까지 몹시 추운 날씨인데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곡읍(哭泣)하다가 드디어 고질(痼疾)에 걸리게 되었다. 이 병은 여러 해 동안 낫지 않다가 마침내 금일(今日)에 이르렀으니, 그 근원을 따진다면 원인이 있는 것이다. 후(后)는 매양 경종이 돌아가신 달을 당하면 그달 초하루부터 상선(常膳)을 들지 않았으며, 평일에 즐기던 음식도 종신토록 입에 대지 않았다. 경종이 처음에 인현 성모(仁顯聖母)의 자육(慈育)을 받아 성효(誠孝)가 돈독하였는데, 후(后)도 그 덕의(德懿)를 추모(追慕)하여 작고 큰 일을 물론하고, 반드시 성모(聖母)가 살았을 때의 규제(規制)를 물어서 행하였다. 경종을 이미 종묘(宗廟)로 모신 뒤에 고(故) 신(臣) 민진후(閔鎭厚)를 배향(配享)하게 하였는데, 후(后)는 그가 성모(聖母)의 동기(同氣)란 이유로써 연시(延諡)308) 하는 연수(宴需)를 특별히 내렸으니, 이는 또한 경종께서 그를 권대(眷待)하던 뜻을 깊이 본받은 까닭이다. 후(后)는 포용하는 덕을 스스로 숨기고 총명(聰明)을 나타내지 않았지마는, 자못 문학(文學)을 좋아하여 별궁(別宮)에 있을 때에 《소학(小學)》을 부원군에게 배웠는데, 쉽게 외우기를 평소에 익힌 것처럼 하였다. 숙종께서는 늘 책을 읽게 한 뒤에 읽는 소리를 듣고 음운(音韻)이 맑고 명랑(明朗)한 것을 자주 칭찬하였다. 후(后)는 평소에 옛날 현비(賢妃)들의 가언 미행(嘉言美行)을 즐겨 읽어서 부원군으로 하여금 《효경(孝經)》·《예기(禮記)》·《서경(書經)》·《시경(詩經)》 중에 본받을 만한 글을 골라 베껴 들이게 하여 항상 좌우(左右)에 두고 조석(朝夕)으로 살펴보았다. 지금 성상께서 절황(窒皇)309) 에 들이라고 명령하신 것은 바로 후(后)의 유지(遺旨)를 따른 것이다. 후(后)는 평소부터 검약(儉約)을 숭상하여 분수에 지나친 사치(奢侈)를 물리쳐 버렸는데, 일찍이 이르기를, ‘우리 집은 본래 평범한 가문이고, 형제들도 모두 선비의 며느리이니, 궁정(宮廷)의 양식처럼 장식(粧飾)하는 것은 분수에 맞지 않는다.’ 하고는 절대로 내려 주지 않았으며, 다만 백성의 고통만을 진념(軫念)하였다. 경종이 부묘(祔廟)310) 된 뒤에 동조(東朝)에게 상수(上壽)하는 것은 곧 국가의 고사(故事)인데도, 후(后)는 흉년이 들고 백성이 굶주린다는 이유로 겸양(謙讓)하여 받지 않다가 뒤에 어쩔 수 없어서 따랐으며, 번번이 상공(常供)을 줄이고, 방물(方物)을 못 들이게 하여 절손(節損)함을 보였다. 상(喪)을 당하자 후(后)의 유교(遺敎)로써 평소에 저장하여 두었던 의대(衣襨)를 내어다가 여러 가지 수용(需用)에 보태게 하고, 상방(尙方)311) 에서 으레 들여놓던 필단(疋緞)을 면제하였으며, 제기(祭器)는 갑진년에 쓰던 것을 사용하게 하고 새로 만드는 것을 못하게 하였으니, 그가 간략하게 줄이는 데 힘쓰고 경비(經費)를 걱정하는 뜻이 아! 지극하도다. 지난날 경종을 양주(楊州)의 의릉(懿陵)에 장사지낼 때 후(后)가 그 왼편에 묘(墓)를 쓸 만한 혈(穴)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부원군에게 이르기를, ‘나는 반드시 이곳을 돌아갈 터로 삼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경종과 동강(同崗)에 정하게 되니, 대개 성상께서 후(后)의 그때의 뜻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신도(神道)와 인정(人情)이 양쪽 다 유감이 없게 된 것이다. 후(后)의 장지(葬地)는 신좌 인향(申坐寅向)으로 했으니, 영릉(寧陵)312) 의 유제(遺制)를 모방하여 상하혈(上下穴)로 썼는데, 본릉(本陵)에서부터 80척(尺)쯤 떨어져 있었다. 능호(陵號)는 그전대로 하고 고치지 않았다. 10월 19일 오시(午時)에 현궁(玄宮)으로 모셨다. 이보다 앞서 단의 왕후(端懿王后)와 후(后)는 모두 후사가 없었으므로 경종은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해 성상을 책봉하여 후사(後嗣)로 삼았던 것인데, 나라를 원망하는 나쁜 무리들이 이때부터 더욱 화심(禍心)을 품고 흉계(凶計)를 쌓아서 역신(逆臣)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과 흉적(凶賊) 목호룡(睦虎龍) 등은 안팎에서 서로 결탁하여 몰래 뜻을 잃은 무리들과 약속해 위핍(危逼)함이 이르지 않은 데가 없었으나, 경종의 깊은 우애(友愛)와 후(后)의 끊임없는 도움을 받아 음모(陰謀)가 마침내 실행되지 못하자, 역적 김일경은 또 차마 들을 수도 없는 흉언(凶言)을 교문(敎文)에 베껴 써서 8방(八方)에 전파시켜 인심(人心)을 속이고 현혹하게 하다가, 갑진년 대상(大喪) 뒤에 그 무리들은 길러온 세력을 선동(煽動)시켜 무신년의 변란을 만들어 내니, 후(后)는 더욱 통탄하면서 하교하기를, ‘세도(世道)가 이와 같아서 궁흉(窮凶)하여 헤아릴 수 없는 말을 지어내니, 이는 당저(當宁)만 무함하는 것을 뿐 아니라, 사실은 선왕(先王)을 모욕(侮辱)하는 것이니, 원통함을 견딜 수가 있겠는가?’ 하였는데, 아! 당일(當日)의 일은 후(后)께서 실제로 몸소 경종을 부축하여 일어나 앉고 약을 마시는데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유감(遺憾)이 없게 했으니, 곧 후(后)가 몸소 당한 일로써 깊이 아는 것이므로, 그들이 거짓말을 만들고 꾸며내어 무함하는 것에 더욱 통탄했던 것이다. 이러한 간정(奸情)을 타파하고 국가의 무함을 밝히는 것이 진실로 우리 성후(聖后)의 탁월한 지식과 밝은 살핌이 천고(千古)에 뛰어난 이가 아니었다면 또한 어떻게 성의(聖意)를 밝혀 타일러서 후세(後世)에 전하여 알리기를 이와 같이 할 수가 있겠는가? 마침내 올해 여름에 와서 흉역(凶逆)이 다시 일어나서 사정이 더욱 사방에 전파(傳播)되니, 후(后)께서 또 하교하기를, ‘이것은 필시 무신년의 여당(餘黨)일 터인데, 이 역적들이 지금까지 이렇게 할 줄을 어찌 헤아렸겠는가?’ 하고, 경심 통골(驚心痛骨)하는 교지를 내리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성상께서 바야흐로 몸소 국문(鞫問)하고 엄중히 사실을 조사하여 기필코 흉역(凶逆)의 무리들을 없애서 후(后)의 자애스러운 마음을 위안하려고 하였는데, 장추(長秋)313) 가 갑자기 막혔고, 휘음(徽音)314) 이 영원히 닫혔으니, 이것이 성상께서 슬퍼하고 한스러워하는 바이다. 아! 신이 삼가 성상의 제술(製述)을 가져다가 위와 같이 문장을 배열하여 놓고 다시 한 번 생각하건대, 우리 성후(聖后)의 철범 혜문(喆範惠聞)은 비록 동사(彤史)315) 에 기록된 어떤 일도 이보다 나을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는 마땅히 하늘의 도움을 받아 복록을 향유하여야 할 터인데, 돌아보건대, 경자년 이후로 10여 년 간에 국운(國運)이 망극하여 상변(喪變)이 거듭 일어났는데, 후(后)는 이에 눈물로써 날을 보냈으므로 슬픔이 쌓여 홧병이 생겨 수(壽)까지 오래 누리지 못하게 되니, 천리(天理)를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도다. 그러나 위로 종팽(宗祊)316) 을 염려하여 위태한 정세가 마음을 애태웠으나 성사(聖嗣)를 보호 안정시켜 화맹(禍萌)을 점차 사라지게 하여 양궁(兩宮)의 사이에 화기가 흡족하여졌다. 난역(亂逆)이 창궐(猖獗)할 때를 당하여서는 그 근본 원인을 분석하는 데 말과 의리가 엄정(嚴正)하니, 그것은 양성(兩聖)317) 이 모욕을 당한 것을 통분히 여겨 일언지간(一言之間)에 명쾌하게 분변한 것이 더욱 명백하고 준엄하여 족히 군정(群情)을 진압하고 흉도(凶圖)를 막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세도(世道)가 유지(維持)하게 되고 국기(國基)가 공고(鞏固)하게 되는 것은 앞으로 여기에 힘입음이 있을 것이다. 그 의덕(懿德)과 휘열(徽烈)을 하찮은 문자(文字)를 가지고 그 만분의 일도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신민(臣民)의 지극한 슬픔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것이겠는가? 아! 융성합니다."
하였다.
8월 28일 갑자
고부사(告訃使) 신무일(愼無逸)·남태량(南泰良)이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서 사대(賜對)하였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세 번이나 상소(上疏)하여 사직하였으나, 임금은 모두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려 나오라고 권유하였다. 조문명이 이에 나와서 숙배(肅拜)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다. 조문명이 하원(下元)을 보하는 약제를 드시어서 사자(嗣子)를 구하는 방법을 다하기를 청하고, 경비(經費)와 저미(儲米)에 돈을 사용하여 수해(水害)와 한재(旱災)에 대비하기를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삼(李森)이 판부사(判府事) 민진원(閔鎭遠)의 말로써 인혐(引嫌)하여 공무를 폐하였는데, 장신(將臣)의 사체(事體)는 자별(自別)하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장붕익(張鵬翼)을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심공(沈珙)을 지의금(知義禁)으로 삼았다.
정언(正言) 윤흥무(尹興茂)가 한현모(韓顯謨)의 소(疏) 때문에 인피(引避)하니, 옥당(玉堂) 【부응교(副應敎) 윤광익(尹光益)과 부수찬(副修撰) 황정(黃晸)이다.】 에서 처치(處置)하기를,
"당초의 처치가 이미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인데, 유신(儒臣)의 소척(疏斥)은 혐피(嫌避)할 필요가 없습니다. 청컨대 출사(出仕)하게 하소서."
하였다.
부교리(副校理) 권혁(權爀)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엊그저께 장소(章疏)를 들이지 말라고 하신 하교는 개탄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국가에서 삼사(三司)를 설치한 것은 장차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임금의 덕(德)이 모자란 데가 있어도 바로잡지 못하고 시정(時政)이 실수가 있어도 고치지 못하며 사리(事理)의 시비(是非)는 논하지 않고서 군상(君上)이 명령한 것을 한결같이 보고서 감히 한 마디도 가부(可否)를 말하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시행하는 일만 삼간다면, 전하께서는 위에서 혼자 운영하시고, 유사(有司)는 아래에서 받들어 시행하니, 이와 같이 하면 만족할 것인데, 삼사(三司)는 무엇에 쓰려고 하십니까? 본래의 일이 어떠한지는 논하기 전에 다만 이 한 가지 하교만에서도 한마디 말로써 나라를 잃게 된다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전하의 삼사(三司)의 반열(班列)에 있는 자들은 오직 의리를 따라 벼슬을 내어 놓고 스스로 뜻을 세울 계획을 하는데도 겨를이 없을 것인데, 후사(喉司)318) 의 신하들은 오직 처분이 이와 같은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한 마디도 돌려 말하지 않았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윤흥무(尹興茂)의 인피한 것을 보니, 매우 무엄(無嚴)합니다. 게다가 본죄(本罪)라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방자하게도 문장으로써 써서 표현하였으니 어찌 아주 절패(絶悖)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처분(處分)이 마침내 분별하여 밝히지 않고 부정(不正)을 막음이 점점 엄격하지 못하니, 지금 이 사람들이 불쑥 머리를 내밀어 엿보는 마음이 생겨 대소(臺疏)에는 본죄(本罪)라는 명목으로 앞에서 이끌고 옥당(玉堂)에서는 공의(公議)라는 말을 가지고 뒤에서 이어, 친절한 성상(聖上)의 하교를 현혹시켜 다시 신축년319) ·임인년320) 당시의 수단을 시행하려고 합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조금도 놀랍게 여기지 않으시고 한결같이 용서해 주시니, 이와 같은 일을 그치지 않는다면 앞날의 변괴(變怪)가 다시 어느 지경에까지 와서 끝날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臣)은 가만히 상심(傷心)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지난번에 이러한 소(疏)를 받아들이지 말라는 명령이 있기 때문에 품계(稟啓)하고 봉입(捧入)하니, 돌려주라고 명령하고, 하교하기를,
"군부(君父)가 지성(至誠)을 다하여 신칙(申飭)하는 날에 신자(臣子)된 자가 구습(舊習)을 버리지 못하였으니, 매우 미안한 일이다. 권혁은 장단(將壇)의 정녕(丁寧)한 교지(敎旨)도 오히려 감동시킬 수가 없다. 어제 엄중한 교지를 내렸는데도 이와 같이 영호(營護)하니, 오늘날에 을사년321) ·병오년322) 과 같이 한 후에야 그의 마음이 복종하겠는가? 권혁을 정의 현감(旌義縣監)으로 제수하여 명일(明日) 안으로 출발시키도록 하여 구습(舊習)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늘날 군부(君父)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라. 또 옥당(玉堂)의 처치(處置)는 만일 품은 생각이 있으면 진달하는 것은 좋으나, 공의(公議)라는 말을 가지고 구차히 남을 따르는 버릇을 차마 버리지 못하였으니, 이러한 버릇도 나는 역시 미워한다. 타이르려고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처치한 옥당도 체차(遞差)시키라."
하였다. 승정원에서 계사(啓辭)로, 권혁을 외직(外職)에 내보내는 일과 옥당(玉堂)을 체차(遞差)시키는 일을 중지시키기를 청하면서 권혁에 대하여 ‘권혁의 소(疏)는 한결같이 한현모(韓顯謨)를 영호(營護)하여 힘써 이기려 함을 본받은 것’이고, 옥당에 대하여서는 ‘예(例)에 따라 조사(措辭)한 데 불과하며 다른 의도가 없었다는 것’으로써 아뢰니, 비답하기를,
"권혁은 무신년323) 홍문록(弘文錄)324) 에 오른 자로서 시상(時象)에 득죄(得罪)할까 두려워 이와 같이 스스로 한계(限界)를 그었으니, 나라에 대하여서는 그 임금을 본받지 않고 가정에 대하여서는 그 아비를 본받지 않는 것이다. 이는 시상(時象)만을 달갑게 생각하는 것이니, 이번에 먼 지방으로 보직(補職)하는 것은 가장 가벼운 징계[末減]라 할 수 있다. 옥당을 특별히 체직하라고 한 것은 시작을 안 하였으면 그만이지만, 〈명령을 내린 이상〉 어찌 옛날처럼 용서할 수가 있겠느냐?"
하였다.
어유귀(魚有龜)를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삼았다.
8월 30일 병인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소견(召見)하였는데, 좌의정 이집(李㙫)이 말하기를,
"옥당(玉堂)의 신하를 먼 지방으로 보직(補職)하라는 명령을 내리시었는데, 말의 잘잘못은 그만두고 말로써 죄를 얻게 된다는 것은 성세(聖世)에 있어서 좋은 일이 못됩니다. 윤흥무(尹興茂)의 처치도 잘못이 있습니다. 어찌 박필균(朴弼均)을 논박하여 파직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일이 이리저리 변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하고,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은 말하기를,
"그 소(疏) 가운데 ‘의리를 따라 벼슬을 내어 놓는다.’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 아래의 말들이야 모양이 좋지 못한 데 이르지는 않았는데, 어찌 절도(絶島)에까지 멀리 보직(補職)시킬 수야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군부(君父)를 강박(强迫)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이미 올라왔는데, 어찌 처분(處分)을 내리지 않느냐?’고 하니, 도리가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신축년325) 의 일은 참혹하였기 때문에 내가 가엾이 여겨 회복시키는 처분이 있었으나, 거조(擧措)에 미진한 점이 있어서 정미년326) 의 일이 있었고, 정미년 뒤에 폐합(閉閤)한 일이 있는 것은 마음에 정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복관(復官)되지 않은 양신(兩臣)에 대하여서는 내가 곧 처분을 내릴 것이나, 끝내 미안한 점이 있어서 쉽사리 처리할 수가 없다. 지금 만일 여러 신하들의 말에 핍박(逼迫)되어 처리한다면 기강(紀綱)이 위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조정의 상황이 화합되기를 기다리려는 것이지 여러 신하들을 속이려고 시간을 지연시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비록 건망증(健忘症)이 있기는 하지마는, 이 양인(兩人)의 일을 어찌 잊겠는가? 어제 승정원(承政院)의 계사(啓辭)는 이미 복역(覆逆)327) 한 것이라 이를 수 있는데, 힘써 이기려 한다는 등류의 말로 배척하는 것은 억지로 꾸미려는 태도가 드러난 것이다. 시상(時象)이 이와 같으니, 남의 위가 된 사람이 마음이 유쾌한 일이라고 하겠는가?"
하였다. 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지난 가을의 처분은 체단(體段)을 이루지 못하여 똑같은 일을 한 신하 중에 한쪽은 신원(伸冤)이 되었고 한쪽은 신원이 못되었습니다. 게다가 신원된 사람도 역시 법에 따라 내려 주는 시호(諡號)를 아끼어 반쯤 하늘에 올라가다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으니, 진실로 성상의 의도는 시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겠습니다마는, 이미 한 돌[朞年]이 지났는데도 처분이 내리지 않으니, 여러 신하들의 심정(心情)이 어찌 억울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기필코 여러 신하들이 다 조정에 오기를 기다리려고 한다면 천하(天下)의 일이 이렇게 정제(整齊)될 이치는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의 신자(臣子)는 마땅히 군부(君父)를 따라야 하겠는가? 마땅히 사당(私黨)을 따라야 하겠는가? 벼슬하지 않는 의리가 어느 고전(古傳)에 나타나 있는가?"
하니, 이조 판서(吏曹判書)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무릇 남을 속이기 위하여 거짓을 꾸미는 일은 위노(威怒)로써 제압하여야 합니다. 권혁(權爀)의 이러한 버릇은 양지 양능(良志良能)328) 과 같으니, 어찌 이를 고치겠습니까?"
하였다. 김재로는 말하기를,
"밖에 있으면서 출사(出仕)하지 않는 사람은 꼭 4대신(四大臣)의 문제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디에서 그런 괴이한 의리를 탐구(探究)하여 고집을 하는 것인가?"
하였다. 조문명은 말하기를,
"의리는 군부(君父)를 버리고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필 이런 의리를 세워야만 공무(公務)를 행한다는 말입니까? 이런 등처(等處)에는 억제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시상(時象)의 통탄할 일이 참척(慘慽)을 당한 것보다 심하다. 이같이 하고서도 성궁(聖躬)을 보전하라고 말하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은 말하기를,
"전하께서 주장하시는 바를 나라의 절반 사람은 옳다고 하고 나라의 절반 사람은 그르다고 하니, 이와 같은 즈음에 국사(國事)는 날마다 잘못되어 가는데, 일부러 골동(汨董)의 모양을 만들어 나라를 진안(鎭安)시키는 도리로 삼고 있습니다. 권혁과 같은 무리들이 고인(古人)의 그림자만 붙들고 기필코 자신이 옳다고 여기니, 전하의 수없이 많은 말씀도 그를 감동시킬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판(吏判)의 말은 그릅니다. 어찌 골동의 모양으로써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을사년329) ·병오년330) 의 사람은 한 사람이 희다고 하면 모두 따라 희다고 하고 한 사람이 검다고 하면 모두 따라 검다고 하면서 반드시 꼭같이 하려고 하니, 마치 한 가지 모자를 씌운 것 같다. 지난해 폐합(閉閤)한 뒤로 신축년331) ·임오년332) 때의 예기(銳氣)는 갑자기 꺾여졌지마는, 을사년·병오년 때의 사람들은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갑자기 기세가 꺾인 자는 내가 마땅히 위안시킬 것이나 기세가 꺾이지 않은 자는 내가 기세를 꺾으려고 한다. 권혁은 생각하기를 그의 아비와 같이 충박(忠朴)하다고 하나, 비유하건대, 만철(慢鐵)을 불에 달군 것 같다. 그리하여 고퇴(告退)한다는 말이 있으니, 어찌 괴이하지 않는가?"
하였다.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 명령을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원(吳瑗) 같은 자는 양선(良善)한 사람인데, 그의 소(疏)는 그가 홀로 만든 것이 아닐 것이다."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오원이 일전에 신(臣)을 찾아왔었는데, 신이 그 소(疏)가 당론(黨論)에 너무 치우쳤다고 하였더니, 그는 말하기를, ‘삼사(三司)의 의논은 으레 남의 결점(缺點)을 공격하게 되므로 소론(疏論)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내가 당론에 치우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뒷날 내가 한 일에 마땅히 증험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말이 맞습니다."
하고, 조문명은 말하기를,
"오원은 고집(固執)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반성하여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지난번에 그를 만났는데, 신이 이르기를, ‘그대가 대신(大臣)들을 소척(疏斥)하기를 저[渠]라고 하였는데, 그 사람이 비록 그대의 말과 같을지라도 지위가 대신인데 어찌 이렇게 할 수야 있겠는가?’ 하니, 그가 말하기를, ‘이것은 잘못하였음을 스스로 알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사로이 보았을 때 그를 소대(所對)한 일이 있었는데, 얼마 안되어 소(疏)를 올렸으니, 반드시 중심이 굳지 못하여 그렇게 된 것일 것이다."
하였다. 이집이 김취로(金取魯)의 재주가 구비되어 있음을 장려하고 이진망(李眞望)은 구근(久勤)한 것으로 승품(陞品)하여 쓰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또 말하기를,
"정형익(鄭亨益)은 관직에 있을 때에 볼 만한 일이 많았는데, 한 번 내친 뒤에 복직시키지 않았으니 애석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의논을 듣건대, 역시 평순(平順)하다고 합니다."
하고, 조문명도 또한 말하기를,
"그의 의논이 전일에 비록 날카로웠지마는, 어찌 오랫동안 이와 같겠습니까?
수용(收用)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조문명이 주전(鑄錢)하는 일을 순문(詢問)하여 결심코 시행하기를 청하자, 이집이 말하기를,
"재화(財貨)는 국가에 소중한 바로서 돈을 사용하여 온 지가 지금 거의 5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돈을 혁파(革罷)한다면 그만이지마는, 그렇지 않다면 다시 주전하는 외에 다른 계책이 없습니다."
하였다. 송인명은 말하기를,
"공물 주인(貢物主人)333) 의 말을 듣건대, 조정에서는 쌀 1섬[石]에 값[代錢]을 6냥(兩)으로 정하여 놓고 줄 때는 쌀로 주는데, 그것을 팔게 되면 2냥의 돈에 지나지 않으나, 나라에 바치는 물건은 모두 돈으로 대신 갚게 되니, 지탱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하고, 김동필(金東弼)은 말하기를,
"백성은 풍년(豐年)이 든 것을 원망하니, 지금 쌀 10말[斗]의 값이 1냥입니다. 그리하여 서울과 지방의 백성들이 모두 견딜 수 없다고 하는데, 이는 돈이 귀한 까닭입니다."
하니, 송인명은 말하기를,
"2만의 생동(生銅)을 사들인 뒤에 그냥 방치되어 있으니, 이것으로써 먼저 돈을 주조(鑄造)하면 어찌 안되겠습니까?"
하고, 김재로는 말하기를,
"돈을 주조한다면 1년의 축적(蓄積)을 감당할 것입니다."
하였다. 조문명이 주전을 첫째의 묘모(廟謀)334) 로 삼아 힘껏 청하자, 입시(入侍)한 비국 당상(備局堂上)들도 한 목소리로 따랐으나, 유독 김취로만은 불편(不便)하다고 말하고는, 대충 말하기를, ‘반드시 사주(私鑄)와 도주(盜鑄)의 근심이 있을 것이라.’ 하고 특별한 소견(所見)은 없었는데, 임금이 의심을 가진 채 윤허하지 않았다.
한사득(韓師得)을 헌납(獻納)으로, 이저(李著)를 정언(正言)으로, 황정(黃晸)을 부교리(副校理)로, 임정(任珽)을 교리(校理)로, 정우량(鄭羽良)을 부응교(副應敎)로, 심태현(沈泰賢)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윤유(尹游)를 동경연(同經筵)으로, 최명주(崔命柱)를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조호신(趙虎臣)을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민정(閔珽)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정배 죄인(定配罪人) 조덕보(趙德普)는 무신 역옥(戊申逆獄)335) 때 민백효(閔百孝)의 초사(招辭)에 긴요하게 나왔는데 사실을 끝까지 조사하여 보지도 않고 앞질러 작처(酌處)하였고, 또 얼마 전에 진영(震榮)의 초사에서도 나왔으니, 그가 역모(逆謀)에 관련된 형상은 명백하여 숨길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정배 죄인 조덕보를 잡아와서 엄중히 신문한 뒤에 왕법(王法)으로 빨리 바로잡으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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