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정묘
부수찬(副修撰) 심태현(沈泰賢)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나홍언(羅弘彦)의 흉서(凶書)는 지금 비록 불에 타서 없어졌으나, 이 나홍언의 흉서와 같은 것이 몇 개나 음비(陰秘)한 곳에 숨겨져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날지를 알 수가 없으니, 일후(日後)의 근심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臣)은 생각건대, 성궁(聖躬)이 무함을 당한 전말(顚末)을 분명히 밝히고, 앞뒤에서 일어난 흉언(凶言)의 교모하고 참혹한 실상을 분석하여, 한 권의 책자(冊子)를 만들어 중외(中外)에 간포(刊布)하고 무궁한 후세(後世)에 전하게 하시는 것이 진실로 오늘날 성무(聖誣)를 분변하는 첫번째 의리(義理)가 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사신(詞臣)에게 빨리 명령하여 찬진(撰進)하게 하소서."
하니, 승정원(承政院)에서 미품(微稟)336) 하고 환급(還給)하였다.
사간원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대원(李大源)을 지평(持平)으로, 이종백(李宗白)을 부교리(副校理)로, 김취로(金取魯)를 판윤(判尹)으로, 이의풍(李義豐)을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로, 송인명(宋寅明)을 사복시 제조(司僕寺提調)로 삼았다. 사복시(司僕寺)는 세상에서 유관(腴官)337) 이라고 일컫고 있는데, 송인명이 이 자리에 머물러 스스로 차지하고 있으니, 견식이 있는 이가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겼다.
9월 2일 무진
대사간(大司諫) 김치후(金致垕)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흉적(凶賊)에게 무함을 받은 것이 지금 몇 번입니까? 첫 번째는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무함을 당하였고, 두 번째는 김일경(金一鏡)의 무함을 당하였으며, 세 번째는 이천해(李天海)의 무함을 당했는데, 이유익(李有翼)·심유현(沈維賢)·이인좌(李麟佐)·박필몽(朴弼夢)·나홍언(羅弘彦) 등의 아주 흉악(凶惡)한 무함에 이르기까지 네 번째와 다섯 번째가 됩니다. 전하의 신자(臣子)된 자는 마땅히 속을 썩히고 뼈에 사무쳐서 세상에 같이 살 수 없음을 맹세하여 반드시 죄상을 밝혀 낼 계획을 하여야 할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죽어도 책임을 면할 수가 없을 것인데, 오늘날 여러 신하들은 그와 반대로 하찮은 물건이나 조그마한 사고로 보아넘기고 마침내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며 입을 다물고 한번도 분변하려고도 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어찌 성상께서 당론(黨論)을 통금(痛禁)하기 때문에 저들이 성상의 무함을 변명하는 일로써 또한 당론(黨論)으로 인정하고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군부(君父)를 위하여 무함을 바로잡는 것을 당(黨)이라고 인정한다면 저 팔짱을 끼고 물러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자는 도대체 어느 당(黨)에 속하겠습니까? 지난번 우리 여중 요순(女中堯舜)과 같은 왕대비의 명백하고 통쾌한 유교(遺敎)가 없었더라면 전하께서 당하신 망극(罔極)한 무함이 거의 오늘에까지 환하게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물며 자교(慈敎) 가운데 ‘도리어 선왕(先王)을 모역했다.’는 말로써 살펴본다면, 그것이 전하 한 몸만을 무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어찌 그 무함한 근원을 분명히 밝히고 드러내어서 선왕(先王)과 선후(先后)를 위안하게 하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신축년338) 에 경종(景宗)께서 전하로 하여금 국가의 기무(機務)를 참결(參決)하게 하려고 한 것은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이는 당시 경옥의 옥체(玉體)가 위예(違豫)하여 국가의 만기(萬機)를 처리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춘추(春秋)가 아직 한창 젊으신 때이고 보조(寶阼)339) 에도 금시 올라서 신민(臣民)이 심복(心服)하여 떠받들고, 중외(中外)에서 기대(期待)하고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이런 거조(擧措)가 있었겠습니까? 다만 불행스럽게도 병환이 있어서 청단(聽斷)하는 데 방해가 되므로, 종사(宗社)의 계획을 깊이 생각하고 형제간(兄弟間)의 애정에 돈독하여 을병(乙丙)340) 의 노고를 나누고 병을 조양(調養)하는 편리를 도모하려 하였으니, 이는 선왕(先王)의 성덕(盛德)과 국가의 대계(大計)에 있어서 털끝만큼도 잘못됨이 무엇이 있기에 오직 저 흉사(凶邪)한 무리들은 자기들에게 불리할 것만 두려워하여 드디어 선왕의 병을 숨기는 꾀를 내어 그들의 불순(不順)한 계획을 몰래 만들어서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을 죽이고 한편으로는 힘으로 협박하니, 신축년·임인년341)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어 ‘성질(聖疾)’이라는 두 글자를 감히 입밖에 내어 말하지 못했습니다. 질병이 몸에 오는 것은 성인(聖人)도 면할 수 없는 것이므로 선왕께서는 스스로 숨기지 않았는데도, 교지(敎旨)에 발표된 것은 이 무리들이 얼마나 심하게 숨겼습니까? 마침내 갑진년342) 의 대점(大漸)343) 때를 당하여 시약청(侍藥廳)도 끝내 설치하지 않았으니, 먼 지방에 있는 신서(臣庶)는 거의 성후(聖候)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 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붕천지통(崩天之慟)344) 을 당하였습니다. 이에 흉역(凶逆)의 무리는 망측스러운 말을 만들어 내어 안팎에서 화응(和應)하게 되고 마침내는 요서(妖書)가 곳곳에 나붙었으며, 흉한 격문(檄文)이 전하여져서 화란(禍亂)이 드디어 하늘을 업신여기게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명철한 제왕(帝王)은 세상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관대(寬大)와 인서(仁恕)로써 힘쓰지 않은 이가 없지마는, 흉역(凶逆)을 대처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삼족(三族)을 멸하는 법과 수사(收司)345) 하는 형률이 대대로 더욱 엄밀(嚴密)하였던 것은 무슨 이유였겠습니까? 대개 효경(梟獍) 같은 흉독한 성품은 구구한 인덕(仁德)과 은혜(恩惠)로써 감화시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엄중한 법률로써 무겁게 다스리지 않으면 뒷날을 크게 징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만일 을사년346) 의 초기에 흉당(凶黨)을 끝까지 다스려 제왕(帝王)의 주살(誅殺)을 통쾌히 시행하였더라면 무신년347) 의 변고는 저절로 없었을 것이고, 무신년이 변고에도 역적들을 엄중히 다스려 요사스런 무리를 싹 쓸어 없앴더라면 오늘날의 근심은 저절로 없었을 것입니다. 남태징(南泰徵)과 박필몽(朴弼夢)은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을 죽일 때 법망에서 빠져나와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하는 변란을 양성(釀成)하였고, 권첨(權詹)과 정사효(鄭思孝)는 남태징과 박필몽의 주륙(誅戮)에서 요행히 도망쳐서 비수(匕首)를 손에 가지고 독물(毒物)을 대궐 뜰에 묻은 변고를 일으켰으며, 마침내 화를 세자에게 미치게 하여 세자께서 돌아가셨으니, 3백 년의 종사(宗社)를 의탁할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말이 여기에 이르니, 눈초리가 찢어지고 간담(肝膽)이 무너져서 흐느끼는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집니다. 상정(常情)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전하께서 이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차라리 지나치게 할지언정 너그럽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하는 일은 을사년이나 무신년의 옛 방법을 벗어나지 못하니, 신(臣)은 이 뒷날의 근심이 어느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유봉휘(柳鳳輝)·박상검(朴尙儉)·김일경·목호룡 등이 전하를 요동(搖動)하여 무함할 당시에 전하의 위태함이 잡아맨 기(旗)의 술[綴旒]과 같았습니다. 오늘 스스로 순신(純臣)이라고 하는 자들은 모두 당시에 공경 대부(公卿大夫)로서 육부(六部)348) ·삼사(三司)의 관원들이었습니다. 또한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한 마디의 말을 하여 전하를 위해 보호한 일이 있었습니까? 조성복(趙聖復)이 차꼬[桁楊]를 차고 죽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전하로 하여금 서무(庶務)를 참문(參聞)하게 하려고 주청(奏請)한 까닭이 아닙니까? 이정소(李廷熽)가 아주 먼 변방으로 유배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맨 먼저 건저(建儲)349) 를 주청한 이유가 아닙니까? 고(故) 상신(相臣) 이건명(李建命)이 더욱 참형(慘刑)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빨리 세자를 책봉하는 주청을 허락받으려고 한 까닭이 아닙니까? 이때를 당하여 주된 세력과 형세는 과연 어떠하였습니까? 역적 김일경을 추대하여 괴주(魁主)로 삼고, 역적 목호룡을 맹단(盟壇)에 올려놓아 몹쓸 짓 일색(一色)으로 거리낌없이 함부로 행동하다가, 드디어 전하께서 역적 김일경을 죽으려고 하자 혹은 복역(覆逆)하기도 하고 혹은 논구(論救)하기도 하다가 그가 죽임을 당한 뒤에도 차마 역적이라고 일컫지 못하고 무신년의 변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역적이라고 지칭하였습니다. 또한 소하(疏下)350) 의 여러 역적들의 일로써 살펴본다면, 정미년351) 〈소론(少論)이〉 득지(得志)하던 초기에 감히 역적들을 변경시켜 조정의 신하로 만들어 출륙(出陸)까지 하여 주기를 청하다가 역적 박필몽이 군사를 일으키자 또 조정의 신하를 변경시켜 역적으로 만들고서 의율(擬律)352) 하는 계사(啓辭)에 있어서는 반드시 형량을 한 등급 감하자고 청하여 혹시라도 그들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대개 이 무리들은 김일경과 박필몽 등의 여러 역적들과 처음에는 씩씩하게 서로 합심(合心)했다가 중간에도 형적(形跡)을 조금 보존하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스스로 갈라선 것으로 나타내어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성상의 뜻의 호오(好惡)를 엿보아서 그들의 향배(向背)를 삼고, 처분의 긴완(緊緩)을 보고서 취사(取捨)를 삼으며, 겉으로는 물리치는 체하지만 속으로는 남몰래 도와주고, 밖으로는 배척하면서 안으로는 아껴주어, 서로 돌보고 이끌어주고 차마 떼어 버리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사변(事變)이 겹겹이 발생하고 역절(逆節)이 분명히 드러나서 도저히 엄폐할 수가 없고 숨길래야 숨길 길이 없게 되어 어쩔 수가 없게 된 후에야 억지로 풀 베는 낫으로써 눈을 가릴 계획을 하였으니, 이것은 성상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통촉(洞燭)하신 정상입니다. 그들이 흉악(凶惡)에 편든 것이 이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임금을 배반하고 당(黨)을 비호한 책임을 이 무리들에게 하나도 지우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사신(四臣)의 원통함은 똑같습니다. 그런데도 성상의 처분에 그 절반만 신원(伸冤)하여 주고 그 절반은 처벌하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사신(四臣)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사실을 성상께서도 알고 계실 것이며, 여러 신하들도 말씀드렸습니다. 신은 다만 사리(事理)로 보아 달리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으로써 전하에게 진달합니다. 대개 대리(代理)하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연차(聯箚)가 있었으니,353) 대리하라는 명령이 없었다면 연차도 없었을 것입니다. 대리와 연차는 이미 두 가지 사건(事件)이 아닌데, 어찌 나누어서 두 가지로 만들겠습니까? 정미년의 흉당(凶黨)이 추죄(追罪)할 때에 대리와 연차를 나누어 구별하면서 남을 현혹시키는 교묘한 말로 뜻대로 기만하고 은폐시켜서 마침내 참화(慘禍)를 당한 여혼(餘魂)으로 하여금 저 천양(泉壤)354) 속에서 한 번 더 억울함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한 번 생각하여 보소서. 신축년·임인년 당시에 이 무리들이 대리와 연차로써 모두 함께 역적에 몰아넣었습니다. 더러는 경혹(驚惑)한다 하기도 하고 더러는 음이(陰移)355) 한다 하기도 하며, 심지어 찬탈한다는 일로써 지목하였으니, 어찌 일찍이 대리와 연차를 양 건사(兩件事)로 인정하였겠습니까? 그런데도 이제 와서 사리(事理)에 맞지도 않는 말을 교묘하게 꾸며서 한 가지의 일을 억지로 둘로 나누어 대리를 주장한 이는 놓아주고 연차를 올린 이는 죄를 주게 하였으니, 이는 알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에 와서 ‘대리(代理)’라는 두 글자는 저들도 성궁(聖躬)에 방해가 됨을 알기 때문에 숨겨 둔 채 말하지 않고 잠잠히 있으면서 입밖에 꺼내지 않았으나, 연차에 대하여서는 사신(四臣)들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저들이 새로 총애를 받고 크게 득세하는 시초를 타서 온갖 방법으로 농간을 하고 여러 가지로 달래어 필경에는 죄를 씌워주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나 연차한 자를 죄주게 되면, 이는 곧 대리를 원수로 대하게 되는 까닭을 알지 못하였으니, 통탄을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지금 전하께서 이미 그들의 억울함을 알고 있으며, 그들이 역적이 아닌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장전(帳殿)에 나와서 하교하고 합문(閤門)을 닫고는 자책(自責)하시면서 장차 큰 거조(擧措)나 명백한 처분을 내리실 듯하다가, 결국에는 보류하시고 겨우 양 대신(兩大臣)356) 만을 신원(伸冤)·복관(復官)시키는 일에 그치고 말았으니, 이것이 과연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거조라고 말할 수 있으며 성인(聖人)의 진선(盡善)하는 방도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가만히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바야흐로 조정(調停)하고 탕평(蕩平)하는 것으로써 임무를 삼기 때문에 혹시 성상의 생각으로는 모두 신원(伸冤)시키게 되면 반드시 다른 한쪽의 사람들은 편안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고, 또 모두 신원시키지 않는다면 반드시 한쪽의 사람들은 억울하게 여길 것이므로, 마침내 참작하여 반을 갈라서 반은 신원시키고 반은 그대로 두어 이쪽과 저쪽을 끌어당겨 합쳐서 모두 불러다가 함께 임용(任用)하려는 계획이십니까? 진실로 그 사람이 억울하고 그들이 한 일이 옳다면 모두 신원(伸冤)시키는 것이 옳고, 공평하게 씻어주는 것이 옳습니다. 어찌 이렇게 비교하여 서로를 뒤섞는 거조를 하십니까? 저 사신(四臣)은 그들이 종사(宗社)를 염려하는 생각도 같고, 나라를 위하여 죽은 충성도 같고, 정청(庭請)한 것도 같고, 연차(聯箚)한 것도 같았으며, 그러다가 결국 흉당(凶黨)의 독수(毒手)에 죽음을 당한 것도 같고, 또 지금 국인(國人)들이 불쌍히 여기고 슬퍼하여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원통하다고 하는 것도 같습니다. 진실로 동공 일체(同功一體)의 사람들입니다. 전하께서 애초에 모르셨으면 그만이겠지마는, 이미 이를 아셨다면 무엇이 기탄할 바가 있기에 똑같이 위로하여 주는 방도를 생각지 않으십니까? 애초에 신원(伸冤)하여 주지 않았다면 그만이겠지마는, 이미 신원하여 주었다면 무엇이 혐기(嫌忌)할 것이 있기에 똑같이 복관(復官)시키는 은혜를 끝내 아끼십니까? 삼가원하건대, 성상께서는 나머지 양신(兩臣)357) 을 특별히 복관시켜 주시어 충성스럽고 뜻있는 선비들의 소망을 위로하여 주소서.
신이 지금 저보(邸報)358) 를 보건대, 정언(正言) 윤흥무(尹興茂)는 박필균(朴弼均)이 양신(兩臣)의 신원(伸冤)을 주청(奏請)한 이유로써 논핵하여 파직시키기까지 했으니, 신은 해괴하고 분개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의 이른바 ‘오늘날 마땅히 있어서는 안될 일이라.’고 한 것은 무슨 일을 말하는 것입니까? 박필균(朴弼均)의 말이 비록 매우 공허하기는 하나, 그 대의(大意)를 따져보면 양조(兩朝)359) 를 위한 변무(辯誣)였으며 국가를 위한 토적(討賊)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냥 버려두고 논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 윤흥무가 ‘그냥 버려두고 논하지 말라’고 한 것은 이 양조(兩朝)의 무욕(誣辱)을 변명하는 일이나, 국가의 적을 징토(懲討)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그냥 둘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하여도 죄를 주지 않는다면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아! 오늘날 전하께서 정신과 뜻을 가다듬어 꼭 성취시키려는 것은 탕평(蕩平)의 정책이 아닙니까? 이것을 하자면 근본이 있어야 하고, 이것을 행하는 데도 도(道)가 있어야만 점차적으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는 말로써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위엄이 있는 명령으로써 억지로 성취되는 것도 아니며, 또 일조 일석(一朝一夕) 사이에 한꺼번에 몰아붙이어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옛날 탕평(蕩平)한 시대에는 준예(俊乂)한 사람을 등용하는 일에 힘쓰면서 말하기를 임인(壬人)360) 을 막으라고 하였고 현능(賢能)한 사람에게 모두 임용하면서 간사한 사람을 버릴 적에는 의심을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대개 간사한 사람을 버리고 간사한 신하를 막은 뒤에라야 착하고 간사하며 곧고 굽은 사람이 서로 뒤섞이는 근심이 없이 현능(賢能)과 준걸(俊傑)이 다 등용되어 마침내는 탕탕 평평(蕩蕩平平)의 효과가 성취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황극(皇極)361) 을 세우는 도리입니다. 지금의 이른바 탕평(蕩平)이라는 것을 살펴본다면 옛날의 탕평과 자못 다릅니다. 일의 시비(是非)도 그다지 분변하지 못하고 말의 곡직(曲直)도 그다지 구별하지 않아서, 벼슬을 줄 때는 이쪽과 저쪽을 다 들어 쓰며 벌을 줄 때는 갑(甲)과 을(乙) 양쪽을 다스리게 되니, 결국 선(善)한 자가 권장되지 않으므로 악(惡)한 자도 특별히 징계되지 못하며, 충신(忠臣)이 간혹 살펴지지 못하므로 죄인(罪人)이 간혹 요행스럽게 벌을 면하는 일이 많습니다. 충신(忠臣)과 사신(邪臣)을 섞어서 진용(進用)하고는 다만 분의(分義)로써 몰아내기도 하고 시비(是非)를 구분하지 않고는 다만 이록(利祿)으로써 얽매어 두려고 하니, 이는 마치 얼음과 숯불을 한 그릇에 담아 둠으로써 찬 것과 더운 것을 다 못 쓰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장차 무엇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 정책을 주장한 자는 또한 탕평의 근본을 밝혀서 우리 성상의 황극을 만드는 정치에는 돕지 못하고서 구차스럽게 미봉(彌縫)하려고 하며, 억지로 끌어다가 합하고 주워모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가끔 김일경이나 박필몽의 여당(餘黨) 중에 얼굴을 바꾸고 미조(媚竈)362) 하는 자를 그 사이에 끼워넣고 참여시키니, 만일 탕평의 극공(極功)이 여기에 지나지 않는다면 대순(大舜)은 어찌하여 팔원(八元)·팔개(八凱)363) 와 공두(共兜)364) 를 참여시켜 훌륭한 정치를 함께 만들어 내지 못하였으며, 무왕(武王)은 왜 굉요(閎夭)·산의생(散宜生)과 비렴(飛廉)·오래(惡來)365) 로 더불어 빛나는 업적을 함께 강구(講求)하지 못하였습니까? 신이 염려하는 것은 오늘날의 탕평(蕩平)이 송(宋)나라의 건중(建中)366) 에 시행하던 조정(調停)에 불과하므로 다만 사대부(士大夫)들의 풍습으로 하여금 남김없이 허물어지게 하여, 마침내는 난(亂)의 계단을 만드는 결과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신은 여기에 대하여 일찍이 성상께서 탕평을 시행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사모하면서도 성상께서 탕평의 근본을 잃은 데 대하여 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하여, 양(陽)을 끌어들이고 음(陰)을 소외(疏外)시키며, 군자(君子)를 받아들이고 소인(小人)을 멀리하며, 충정(忠貞)을 장려하고 흉추(凶醜)를 징계하며, 난원(亂源)을 막고 화근(禍根)을 끊어서 조정(朝廷)을 바로잡고 만민(萬民)을 바로잡아서 융성하던 옛날의 탕평(蕩平)을 바로 따라가지 않습니까? 진실로 그렇게 된다면 신은 비록 태평 만세(太平萬世)를 계승하지 못하지마는, 삼가 마땅히 연영문(延英門) 아래에서 두루 치하를 드리겠습니다.
제가 치국(齊家治國)하는 것은 증전(曾傳)367) 의 교훈인데, 일찍이 내치(內治)가 부정(不正)하면서 능히 그 나라를 다스린 자는 없습니다. 가만히 살펴보건대, 전하께서는 내치(內治)를 바르게 하고 궁금(宮禁)을 엄숙하게 하는 도리가 오히려 부족함이 있으니, 대개 평일에 궁속(宮屬)들을 단속하고, 액례(掖隷)를 금칙(禁飭)하는 일이 이미 열성조(列聖朝)들의 엄숙함만 못한 관계로 방범(防範)이 쉽게 무너지고 곤한(閫限)이 준엄하지 못하여 내정(內庭)의 비사(婢使)들이 함부로 밖에 나돌아 다녀도 구금(拘禁)이 없고 여염(閭閻)의 상천(常賤)들이 궐내를 마구 들어와서도 금하지 않으니, 이러한 풍습이 쌓인 지 이미 오래 되어 사경(邪逕)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대궐의 안팎에서 서로 교통(交通)하면서 거침없이 역모를 행하고 사예(邪穢)한 인골(人骨)과 흉추(凶醜)한 물건들을 대내(大內)에 가지고 들어오지 않는 것이 없어서 청금(淸禁)하여야 되는 곳에 두루 묻어 마침내 국가로 하여금 차마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참변(慘變)을 만나게 하였으니, 아! 절통합니다. 지난번에 전하께서 정가(正家)의 교화로 관어(貫魚)368) 의 반열에 평소부터 행하여 위엄을 두려워해서 스스로 움츠리고 제방(隄防)이 극히 엄중하여 궁액(宮掖)이 숙청(肅淸)되었더라면, 이러한 변괴가 어디로부터 발생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궁위(宮闈)를 엄중히 신칙하여 그 출입의 방금(防禁)을 엄하게 하고 내치(內治)을 더욱 바르게 하시면, 화란(禍亂)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던 초기에는 정신을 가다듬고 조정에 임하시어 부지런히 정치에 힘을 써서 한당(漢唐)의 범상(凡常)한 군주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시며, 말속(末俗)의 문위(文僞)369) 를 깊이 경계하시니, 성상의 뜻이 스스로 기약하던 바는 대개 초초(草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상변(喪變)을 거듭 당하고 역란(逆亂)을 여러 번 겪으면서 진작(振作)하려는 의지가 쇠약하여지고 독실(篤實)한 공부는 계속하지 못하여, 점차 끝을 잘못 맺는 한탄이 생기었고, 고식적(姑息的)이고 구차스럽게 일을 처리하려는 근심이 생겼났습니다. 또 학문을 강토(講討)하는 공부도 점점 처음만 못하고 정무(政務)를 청단(聽斷)하는 부지런함이 조금씩 전보다 못하여 갑니다. 그리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도량이 충분하지 못하여 지금에는 점점 사람의 말을 거절하는 뜻을 가지게 되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총명이 넓지 못하여 지금에는 점점 듣기를 싫어하는 기색이 있습니다. 사건이 궁금(宮禁)의 천례(賤隸)들에게 관계된 것이면 반드시 변명하여 치우치게 비호해 주고 말이 궁가(宮家)의 절수(折受)에 관계된 것이면 반드시 대단히 성내어 큰소리로 꾸짖습니다. 그리하여 나쁜 줄을 알면서도 허물을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어름어름 숨기는 습관은 스스로 성군(聖君)인 체 하는 데서 생겨나고, 아첨을 좋아하며 정직한 것을 미워하는 버릇은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의 생각대로 하는 데서 나와서 말이 많은 태도는 간혹 사령(辭令) 가운데 노출되고 서로 계교(計較)하는 사심(私心)은 일을 경영하는 즈음에 많이 나타납니다. 군하(群下)를 경시(輕視)할 적에는 말이나 소처럼 얽어매고, 종이나 개, 돼지처럼 나무라서 사기(辭氣)가 너무 급박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성심(聖心)대로 독단할 적에 시비(是非)를 무시(無視)하고 의리(義理)를 하찮게 여겨 공의(公議)의 엄중함을 돌아보지 않아서 희노(喜怒)가 대부분 그 중도(中道)를 잃게 되고 형정(刑政)이 간혹 어긋날 때가 있습니다. 군도(君道)는 날로 거만해지는데도 신도(臣道)는 날로 비굴(卑屈)해져서 바르고 곧은 의논은 들리지 않고 아첨하는 기풍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모든 장주(章奏)가 송공(頌功)하는 내용이 아니면 덕을 찬양하는 말입니다. 이는 모두 전하의 근본 바탕이 공심(公心)은 사정(私情)을 이기지 못하고 의리(義理)는 욕망을 이기지 못하여 허다한 병통이 곳곳에 발견되는 소치입니다. 이와 같은 규모(規模)로는 비록 잘 다스려진 태평한 세상일지라도 오히려 허물어지고 쇠망(衰亡)하는 근심을 당할 것인데, 하물며 요즈음같이 극도로 무너지는 국운(國運)과 기울어지고 엎어지려는 세상을 당하여 이것을 가지고 버티어 부지하려고 한다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는 지금부터 근본 바탕에 용력(用力)하여 마음속으로 하여금 환하게 밝히시어 측근의 사사로운 친분에 빼앗기지 말며 아첨하고 의혹시키는 말에 유혹당하지 말아, 계교(計較)하는 사심(私心)이 싹트지 않게 하여 한결같이 의리로써 재제(裁制)하고 시비(是非)의 분별이 반드시 분명해져서 호오(好惡)로써 이간하지 말게 하여 아무리 변고를 겪고 험난을 당하여도 처음과 끝이 변함이 없이 꼭 같다면 오늘날의 많은 근심과 어려움도 반드시 성상을 깨우치고 나라를 일으키는 바탕이 되지 않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하교(下敎)하기를,
"지금 미원장(薇垣長)370) 의 소본(疏本)을 보니, 그 가운데에 면계(勉戒)하는 말이 없지 않으나, 일편(一篇)의 정신(精神)이 구습(舊習)으로써 꼭 군부(君父)를 이기고 난 뒤에야 그만두려고 한다. 만약 김치후(金致垕)의 마음대로 한다면 조정의 규모(規模)가 한결같이 을사년371) ·병오년372) 같이 된 뒤에라야 탕평(蕩平)이라고 인정하겠는가? 이렇게 구습을 버리지 못한 사람을 결단코 오늘날 이목의 관직[耳目之官]373) 에 둘 수 없다. 만일 혹시 엄중히 죄를 다스린다면 이기기를 힘쓰는 것을 도와주게 되니 체차(遞差)하고, 원소(原疏)를 돌려주어라. 승정원(承政院)에서 퇴각(退却)하기 어려웠다면 먼저 품(稟)한 다음에 봉입(捧入)하더라도 무엇이 늦기에 오늘 미품(微稟)과 봉입을 동시에 하였으니, 기강(紀綱)이 과연 있다고 이르겠느냐? 한심(寒心)하다고 말할 수가 있겠다. 봉입한 승지(承旨)는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3일 기사
이삼(李森)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지제교(知製敎) 이광덕(李匡德)이 개성부(開城府)의 진향문(進香文)을 지어 바쳤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후(后)의 말씀이 역사에 있으니, 만세(萬世)가 되도록 징험이 될 것이다. 왕통(王統)을 계승한 대의(大義)가 지금에 와서 비로소 밝혀졌다."
하였는데, 임금이 보고 난 뒤에 찬탄하기를,
"말이 바르고 뜻이 곧아서 성덕(聖德)을 빛나게 하고 후세(後世)에 모범이 되겠다."
하고는, 상현궁(上弦弓) 1장(張)을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죄인 수(襚)를 결안(結案)하기를,
"청주 가병사(淸州假兵使) 신천영(申天永)이 3월 21일에 쌀 1두(斗)와 말 1필(匹)을 적진(賊陣)으로 재촉하여 보내었는데, 24일에 적(賊)의 패보(敗報)를 듣고 전의(全義) 지방으로 도주하였으니, 모역(謀逆)에 동참한 것이 적실(的實)합니다."
하므로, 능지 처참(凌遲處斬)하라 하였다.
조명익(趙明翼)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수항(李壽沆)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윤광운(尹光運)을 수찬으로, 남취명(南就明)을 좌윤(左尹)으로 삼았다.
9월 4일 경오
신방(申昉)을 승지(承旨)로, 심공(沈珙)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9월 5일 신미
장령(掌令) 김담(金墰)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박필균(朴弼均)의 소(疏)는 선왕(先王)을 위하고 전하(殿下)를 위하여 변무(卞誣)한 것인데, 윤흥무(尹興茂)가 감히 ‘우선 버려두고 논하지 말라[姑舍勿論]’고 하였으니, 듣기를 싫어하는 뜻이 분명하고, 양신(兩臣)을 끌어들인 일에 미쳐서는 되받아칠 자료로 삼았으니, 이러한 군부(君父)를 무시(無視)하는 사람은 마땅히 사판(仕版)에서 삭제(削除)하는 형률(刑律)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김치후(金致垕)의 소(疏)는 의리가 명백하고 사의(辭意)가 아주 적절(適切)하니, 진실로 근래의 소장(疏章)에서는 없던 바입니다. 전하께서 구습(舊習)으로 의심하시고 무승(務勝)374) 으로 나무라시어 그 소장을 환급(還給)하시고, 특히 그 직위를 체차(遞差)하시니, 이와 같이 하는 일을 그치지 않는다면 신은 오늘날 전하의 조정에는 다만 아첨하는 것만이 풍속을 이루고 곧고 바른 훌륭한 말이 들리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 소(疏)를 도로 받아들이시고, 다시 한번 더 밝게 살펴보소서. 오명신(吳命新)은 정업(貞業)과 계휘(啓輝) 두 역적의 초사(招辭)에 연좌된 사실이 마치 부계(符契)를 합친 것처럼 꼭 맞으니, 한 곳에서 불러다가 질변(質卞)하여야 되는 것은 결단코 그만둘 수가 없는 일인데, 그냥 도로 원고(元告)만을 신문하는 것은 옥체(獄體)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최명상(崔命相)이 대각(臺閣)의 직책에 있으면서 어찌 말을 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갑자기 위노(威怒)를 가하시어 견벌(譴罰)을 뒤따라 내리시었습니다. 그리하여 역적이 끌어들인 사람은 편안히 집에 있는데 옥사(獄事)의 체모를 논(論)한 대각(臺閣)은 삭출(削黜)까지 당하였으니, 그 처분이 과중(過重)한 것이 어떠합니까? 빨리 환수(還收)하라는 명령을 내려 주소서.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재항(李載恒)은 지난번에 해곤(海閫)으로 있을 때 더욱 탐오(貪汚)함을 자행하였고 겸제고(兼濟庫)에 준 빚을 받아들이지 못한 수량이 6,7만 냥(兩)이나 되는데,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핑계로 그 문권(文券)마저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부채(負債)를 못낸 사람들은 모두 부고(富賈)였다고 서부(西部)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말을 전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빨리 명령을 내리시어 잡아다가 신문하고 엄중히 사실을 조사하게 하소서. 영유 현령(永柔縣令) 오수엽(吳遂燁)은 읍기(邑妓)를 몰래 간통하여 밤낮으로 깊이 빠져 있다가 그 아내가 사납게 질투하여 그 기생의 어미에게 분풀이를 하기 위하여 곤장을 몹시 쳐서 죽였습니다. 오수엽은 그것을 금지하지 못하고 사나운 아내로 하여금 인명(人命)을 함부로 죽이게 하였으니, 신의 생각에는 빨리 오수엽을 파직시키시고 이내 도신(道臣)에게 명을 내려 조사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재항의 일은 모르는 체 그냥 둘 수가 없다. 아뢴 대로 시행하고, 오수엽의 사건은 도신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계문(啓聞)하게 하라. 한 편(篇)의 내용은 군부(君父)를 영호(營護)한 것이 아닌 것이 없는데,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이러한 버릇을 오늘날에 즐겨 써서 거림낌없이 함부로 날뛰는 것이 그대보다 더한 것은 없다."
하였다.
조최수(趙最壽)를 동의금(同義禁)으로, 김계환(金啓煥)을 승지(承旨)로, 조원명(趙遠命)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임수적(任守迪)을 집의(執義)로, 정필녕(鄭必寧)을 장령(掌令)으로, 이유신(李裕身)과 정형복(鄭亨復)을 지평(持平)으로, 장붕익(張鵬翼)을 지의금(知義禁)으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6일 임신
조석명(趙錫命)을 승지(承旨)로, 이현보(李玄輔)와 이희(李憙)를 장령(掌令)으로, 민선(閔墡)을 지평(持平)으로, 윤휘정(尹彙貞)을 수찬(修撰)으로, 박문수(朴文秀)를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9월 7일 계유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9월 8일 갑술
밤에 유성(流星)이 입성(立星) 위로 나와서 서쪽 하늘 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3자[尺]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었다.
재궁(梓宮)에 옻칠을 32도(度)쯤 하였다.
9월 9일 을해
본부(本府)에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홍민(弘敏)을 결안(結案)하기를,
"상년(上年)375) 2월에 장우규(張宇奎)의 집에 가니 나홍언(羅弘彦)의 아들 나계태(羅啓泰)가 좌석에 앉아 있다가 흉언(凶言)을 많이 하였는데, 박필몽(朴弼夢)·박필현(朴弼顯)·정사효(鄭思孝) 등이 역모(逆謀)를 했다는 말을 서로 수작(酬酢)하기에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였고, 나계태가 또 나라를 향하여 부도(不道)한 말을 하였는데, 너희들이 서울의 사대부(士大夫)들과 체결(締結)하였다 하니 이미 소문이 있었으므로 너의 말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신년376) 에 정사효가 전라 감영(全羅監營)에 있었는데 그때 나계태가 그 감영에 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소문이 있은 것입니다. 흉역(凶逆)에 대하여 실정을 안 것이 적실합니다."
하므로, 당고개(堂古介)에서 행형(行刑)하도록 하였다.
형조 참판(刑曹參判) 김유경(金有慶)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臣)이 을사년377) 초기에 금오(金五)의 임무를 맡고 있어서 임인년378) 의 옥안(獄案)을 보았는데, 최초로 상변(上變)한 일은 이미 착락(着落)함이 없었습니다. 설옥(設獄)을 하였을 때는 연루된 사실이 너무 많으므로 여러 가지 명색(名色)을 널리 펼쳐서 일세(一世)를 망라(網羅)하였는데, 거기에 빠져든 사람은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거기에 오로지 학살(虐殺)만을 일삼아서 항양(桁楊)의 참혹함과 함부로 죽이는 형벌이 형옥(刑獄)이 있은 후로부터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죄수를 신문할 때 곤장으로 겨드랑이를 쳐서 갈비뼈가 모두 부러진 일도 있었으니, 그들로부터 초사(招辭)를 받은 것이 대부분 협박에 의하여 나왔다는 사실은 남의 입을 통하여 전해 듣지 않아도 추측해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이우항(李宇恒)·장세상(張世相)의 결안(結案)은 모두 이미 죽고 난 후에 나온 것이므로, 사실을 조작하고 농간부리어 뜻대로 만들어낸 형상은 이 한가지만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나머지 옥사(獄事)의 긍경(肯綮)379) 은 다만 삼급수(三急手)380) 에 있었는데, 궤(櫃)에 단도(短刀)를 감춘 일은 진실로 한번 웃을 만한 일도 되지 못하는데 김성절(金盛節)이 끌어들인 장씨(張氏) 성을 가진 역관(譯官)이나, 오씨(吳氏) 성을 가진 말꾼[馬徒]이나, 김씨(金氏) 성의 궁인(宮人)들은 끝내 허위[虛無]로 귀결(歸結)되었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죄안(罪案)을 교묘하게 꾸며 만든 형상이 여지(餘地)가 없이 다 드러났습니다. 게다가 아주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이천기(李天紀)나 김용택(金龍澤)이 비록 역적 모의를 한 일이 있더라도 사신(四臣)381) 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또 사신(四臣)이 비록 부도(不道)한 마음을 가졌더라도 전하(殿下)에게 무슨 관련이 있기에 이른바 교문(敎文)382) 이란 것이 둥글둥글하게 말을 만들어서 한 개의 사건을 조작하였고, 끝에 가서는 차마 꺼낼 수 없는 말과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가지고 한 편의 종지(宗旨)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아! 통탄스럽습니다. 사건을 경영(經營)한 것이 오래 되었고, 계획을 본디부터 정하여 가지고 역적 목호룡(睦虎龍)을 시켜 사건을 만들어 내어 갑자기 대옥사(大獄事)를 일으켰는데, 대단히 악(惡)한 말이 오로지 감히 말할 수 없는 처지를 무핍(誣逼)한 것에 있었으니, 그 옥사(獄事)의 진위(眞僞)는 분변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신 등은 서로 의논하여 그 옥사를 신원(伸冤)하여 주기를 청하여 곧바로 윤허를 받았으며, 삭훈 파과(削勳罷科)하는 일도 차례로 청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날 신들이 진백(陳白)한 말이나 성상(聖上)께서 수답(酬答)한 하교는 신이 아직도 능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미년383) 에 이르러 옥안(獄案)이 다시 뒤집어졌으니, 신 등은 저절로 연좌되는 율(律)에 해당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신(廷臣)들은 아직까지 형벌을 청하지도 않았고, 성상께서도 역시 벌을 내리지 않으셨으니, 국가의 실형(失刑)한 일이 이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신 등이 죄를 요행히 모면한 것이 어찌 마음에 편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사사(史事)에 있어서도 더욱 두렵고 의혹스러운 바가 있으니, 옛날 송(宋)나라 철종(哲宗) 때에 채변(蔡卞)이 《신종실록(神宗實錄)》에 의혹스럽고 불공평한 곳이 많다고 그 역사를 고치기를 청하였는데, 구사(舊史)는 묵(墨)으로 썼고 신사(新史)는 주색(朱色)으로 썼으므로 당시에 이것을 ‘주묵사(朱墨史)’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보충하여 고친 것과 함께 같은 법칙이 되었는데, 그러나 그때 당초에 수사(修史)한 여러 사람 중에 범조우(范祖禹)나 황정견(黃庭堅) 같은 이들은 모두 안치(安置)하는 형률을 받았습니다. 지난해 연중(筵中)의 대신(大臣)들이 수사(修史)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써 신 등을 배척하기까지 했는데도 끝내 죄를 내리지 않는 것은 또한 무슨 뜻입니까? 이미 그 역사를 고쳤다면 수사(修史)한 사람이 유죄(有罪)하다는 것은 구례(舊例)에 분명히 있을 뿐 아니라, 사리(事理)를 헤아려 보아도 형정(刑政)에 있어서 단연코 버려둘 수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유사(攸司)에 특명을 내리시어 빨리 상전(常典)을 바로잡으소서."
하였다. 소(疏)가 들어가니, 하교하기를,
"지난 일을 끌어내는 일을 여러 번 신칙하였는데도 이와 같이 하니 매우 미안한 일이다. 도로 내려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이수항(李壽沆)·헌납(獻納) 한사득(韓師得)·정언(正言) 민정(閔珽)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황익재(黃翼再)는 무신년384) 역적의 초사(招辭)에 나왔는데도 끝까지 사실을 조사하지 못하였고, 이번 옥정(玉貞)의 초사에도 또 세교(細橋)의 황순천(黃順天)이라고 분명히 납초(納招)하여 앞뒤 사정이 모두 의혹된 점이 많은데 갑자기 전석(全釋)하라 하시니, 물정(物情)이 해괴하게 여깁니다. 청컨대 황익재를 원지(遠地)에 정배(定配)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김문경(金文慶)의 일은 정계(停啓)385) 하도록 하였다.
김상성(金尙星)을 수찬(修撰)으로 삼고, 부수찬(副修撰) 조명익(趙明翼)을 특별히 승지(承旨)로 제수하였다. 조명익은 척리(戚里)386) 와 친속(親屬)이 되어 자주 왕래하였고 또한 탕평(蕩平)의 당(黨)에 맨처음 들어갔었는데, 의논이 유엄(柳儼)의 무리들과 그다지 다른 점이 없었으므로, 제수하는 명령이 내리자 즉시 나오니, 임금이 기뻐하여 초탁(超擢)하는 일까지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비웃고 손가락질 하였으나, 조명익은 양양(揚揚)하게 곧 나왔다.
재궁(梓宮)에 ‘상(上)’자를 썼다.
9월 10일 병자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송진명(宋眞明)이 소매 속에서 한 폭(幅)의 지도(地圖)를 내어 올리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목극등(穆克登)이 백두산(白頭山)을 와서 보았을 때 몰래 지도(地圖)를 그려 본 것인데, 회령(會寧)의 장교(將校)가 방수(房守)로써 옮겨 베낀 것이라고 합니다. 육진(六鎭)에는 기계(器械)가 정리(精利)하기는 하지마는, 지킬 만한 산성(山城)이 없습니다. 조정에서도 철령(鐵嶺)을 한계로 하여 막는 요새(要塞)로 삼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그 바깥에 있는 10여 읍(邑)의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렇게 되면 우리들은 마땅히 모두 오랑캐로 변하고 말 것이다.’ 하고 옮겨 이사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오늘날 인심(人心)을 굳게 단결시키는 도리는 성을 쌓는 것이 급선무인데, 운두산(雲頭山)의 성(城) 모양으로 생긴 터는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곳으로서 성을 쌓는 것이 매우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지도를 펴놓고 안문(按問)하자, 송진명이 또 축성도(築城圖)를 올리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아뢰기를,
"별해 첨사(別害僉使)를 이곳으로 옮기게 하고, 종성(鍾城) 등 고을에 있는 군기(軍器)를 이곳에다가 저장하여 둔다면, 뒷날에 힘을 얻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좌의정 이집(李㙫)은 ‘상고(商賈)들이 왜관(倭館)에 들여 보내는 인삼(人蔘)의 정수(定數)는 본래 7백 근(斤)이었는데 요즈음에는 조절하는 일이 없다.’고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최초의 정식(定式)에 의하여 7백 근을 들여보내도록 허락하고, 이 수량을 넘거든 잠상(潛商)의 법률로 논죄하라."
하였다. 김재로(金在魯)는 ‘강계(江界)의 인삼(人蔘)에 잡물(雜物)을 끼워 넣는 폐단을 금(禁)하여야 한다.’고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집이 권혁(權爀)을 정의 현감(旌義縣監)으로 좌천시키라는 명령을 환수(還收)하기를 청하고, 승지(承旨) 유엄(柳儼)도 또한 힘써 그렇게 하기를 진달하니, 임금이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권혁이 소(疏)를 들인 뒤로 김치후(金致垕)의 무리가 차례로 소를 들이니, 이 사람들이 나를 이긴 것인가, 내가 이 사람들을 이긴 것인가? 처음에는 그가 해빈(海濱)까지 이르기를 기다려 그 근처 읍(邑)으로 바꾸어 보내려고 하였으나, 이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권혁은 본래 과격(過激)한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과격한 일을 하므로, 내가 귀양을 보낸 것이다. 김치후 같은 사람은 양선(良善)한 사람이었는데, 그의 소(疏)를 살펴보면 아주 달라진 것이 마치 두 사람인 것처럼 되었다."
하였다. 교리(校理) 이종백(李宗白)은 말하기를,
"김호(金浩) 같은 이는 한쪽으로 권혁(權爀)에게 배척을 당하고도 도리어 소(疏)로써 권혁을 구원하려고 하니, 신의 생각에는 분식(粉飾)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라 여깁니다."
하고,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혹시 사기(事機)와 관계됨이 있으면 때로 마음속으로는 그 사람됨을 깔보면서도 겉으로는 대충 구원하는 기색(氣色)을 보이는 것이 도리입니다. 대개 성상(聖上)께서 뜻한 바는 다 보일 필요는 없으니, 다 보이게 되면 옛것을 바꾸고 새것으로 나아간다는 혐의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사람을 살펴보는 도리와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은 같지 않습니다."
하고, 유엄(柳儼)은 말하기를,
"윤순(尹淳)은 사람이 옛날의 소견(所見)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으로 진달(陳達)한 바가 있었지마는, 신은 생각하기를, 사람이 전일의 소견(所見)이 잘못 되었으면 고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여깁니다."
하고, 이어서 신처수(申處洙)를 석방하여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러한 처분은 윗사람이 해야할 일인데, 비록 석방을 청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기세(氣勢)만을 증가시킬 뿐이지 반드시 은덕(恩德)으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신처수 외에 몇 사람이나 있느냐?"
하니, 송인명(宋寅明)이 도류안(徒流案)의 처분을 들여다가 보기를 청하니, 임금이 죄명(罪名)을 써붙여서 들이라고 명하였다. 유엄(柳儼)이 늘 노론(老論)들을 비호하면서 덕색(德色)을 보이고 또한 임금의 총애를 시험하기 때문에, 임금이 이와 같이 하교한 것이다. 이집(李㙫)이 말하기를,
"이병상(李秉常)은 몸가지기에 청렴하여 고립(孤立)하고 재식(才識)이 민첩하며 풍부하니, 이러한 사람을 불러 쓰시면 어찌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양진(楊震)387) 같은 청명(淸名)과 곽광(藿光)388) 같은 충근(忠勤)이 있을지라도 이와 같이 집체(執滯)한 사람을 나는 취하지 않겠다. 이병상은 임징하(任徵夏)를 처분할 때에 복역(覆逆)함이 있었는데, 그 뒤로는 내가 개석(開釋)한 일이 없다. 그가 처음 벼슬할 때에는 집체함이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당(黨)에 오염(汚染)되어 그렇게 된 것이다."
하였다. 이집(李㙫)은 서명연(徐命淵)을 조용(調用)하기를 청하고, 유엄(柳儼)과 송인명(宋寅明)은 서명연이 청주(淸州) 감영으로 부임할 때 길을 둘러 간 것은 장차 유위(有爲)하려는 뜻이 있어서 그러하다고 하고, 김재로(金在魯)도 또한 그 관문(關文)389) 의 뜻이 자못 엄격하였음을 일컬으니, 임금이 급첩(給牒)390) 하라고 명하였다. 무신년391) 초기(初期)에 서명언이 충청 감사가 되어 부임할 때에 내포(內浦)를 경유하여 갔는데, 곳곳에 두류(逗留)한 탓으로 죄를 입었었다. 그러나 그의 족당(族黨)이 강성(强盛)하여 서로 번갈아 가면서 거짓으로 주달(奏達)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이집이 말하기를,
"구가(丘價)392) 의 일에 대하여서는 매우 질서(秩序)가 없습니다. 비록 한 관사(官司)에 있어서도 판서(判書)는 혹 받지 못하는데, 참판(參判)이나 참의(參議)는 혹 받기도 하고 혹은 파(罷)하기도 하며, 혹은 다시 받기도 하니, 마땅히 획일적인 법이 있어야 합니다."
하고, 송인명은 말하기를,
"정미년393) 에 상하(上下)가 고생을 참겠다는 뜻을 가지고 임시로 감(減)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렴(養廉)394) 하는 도리에는 불만족함이 있음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구례(舊例)를 따라 시행하도록 허락하였다. 송인명이 또 아뢰기를,
"평양(平壤)의 고(故) 익찬(翊贊) 현술선(玄述善)이라는 자가 일찍이 효종(孝宗)을 따라 심양(瀋陽)에 갔었는데, 그의 집에 책자(冊子)가 하나 있어 거기에 소현 세자(昭顯世子)와 효종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의 손자가 상소(上疏)하고 입계(入啓)하려고 합니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신도 또한 이를 보았는데, 이것이 효종 일기(孝宗日記)인 듯합니다. 자체(字體)도 또한 비슷합니다."
하니,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서 그 사람을 불러들여 정납(呈納)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감란록(戡亂錄)》은 소루(疎漏)하여서 이사성(李思晟)과 이유익(李有翼) 같은 사람은 노륙(孥戮)하지 않았는데도 노륙한 것으로 기재되었습니다. 국법(國法)으로써 말한다면 마땅히 박필몽(朴弼夢)의 예(例)에 따라 거행하여야 합니다."
하고, 유엄(柳儼)은 말하기를,
"관인(寬仁)의 은전은 마땅히 쓸 곳이 있을 것이니, 이들 일족(一族)은 남겨두어서는 안됩니다."
하니, 임금이 지난(持難)하다가 한참 뒤에 허락하였다. 유엄이 삼사(三司)의 소장(疏章)을 먼저 품(稟)한 뒤에 들이라는 명령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근래 남에게 이기기를 좋아하는 폐단이 특히 심하니, 만일 거두어 들였다는 소문을 듣는다면 반드시 더욱 기(氣)가 날 것이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말라는 명령은 형식에 관계되니, 환수(還收)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사간원(司諫院) 【대사간 이수항(李壽沆)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황익재(黃翼再)의 일은 애초부터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유엄이 말하기를,
"황익재는 곧 영남(嶺南)에서 명망이 있는 사람으로서 김홍수(金弘壽)와 더불어 마음을 하나로 한 두 사람인 것입니다. 나홍언(羅弘彦)의 책(冊) 중에 재수(再叟) 운운(云云)한 사람이 바로 황익재입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계사(啓辭)를 따랐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이유신(李裕身)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신방 분관(新榜分館)395) 은 곧 벼슬에 처음으로 나아가는 길이므로 임의대로 출척(黜陟)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 분방(分榜)할 때에 이산배(李山培)의 문학과 지망(地望)으로서 괴원(槐院)396) 에서 빠졌으니, 공정하지 못함이 막심합니다. 그 권점(圈點)을 주관한 사람은 책임이 없을 수 없으니, 바라건대, 파직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분관(分館)할 즈음에 무단히 임의대로 하였으니, 매우 터무니없는 일이다. 나추(拿推)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지난번에 소론(少論)은 참하(參下)397) 가 적었는데, 윤순(尹淳)이 정시(庭試)를 주관하여 20명을 뽑았다. 그때 시배(時輩)로서 뽑힌 자가 15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나이 어린 명벌(名閥)들이었다. 이산배(李山培)는 어리석고 글도 잘 못하는데도 주시인(主試人)의 인가(姻家) 자제(子弟)로서 순전히 그의 아버지 이덕수(李德壽)가 지어 올린 전문(箋文)의 장구(長句)를 써내어 2등으로 급제하니, 국언(國言)이 떠들썩하였다. 방(榜)398) 이 나온 다음날 지평(持平) 최치중(崔致重)이 그 방을 소척(疏斥)하고 핵처(覈處)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채명보(蔡明寶) 등이 이산배를 방해하므로, 시배(時輩)들이 이유신(李裕身)을 사주(使嗾)하여 발계(發啓)하게 한 것이다. 임금은 시배를 곡호(曲護)하는 데 바야흐로 힘쓰는 중이므로, 처분이 이와 같았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7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225면
【분류】정론(政論) / 변란(變亂) / 역사-사학(史學) / 사법(司法)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註 395] 신방 분관(新榜分館) : 새로 급제한 사람을 승문원(承文院)·성균관(成均館)·교서관(校書館)의 세 군데로 배치시켜 권지(權知)라는 이름으로 실무를 익히게 하는 것.[註 396] 괴원(槐院) : 승문원(承文院).[註 397] 참하(參下) : 7품 이하의 관원.[註 398] 방(榜) : 급제명단.
사신은 말한다. 지난번에 소론(少論)은 참하(參下)397) 가 적었는데, 윤순(尹淳)이 정시(庭試)를 주관하여 20명을 뽑았다. 그때 시배(時輩)로서 뽑힌 자가 15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나이 어린 명벌(名閥)들이었다. 이산배(李山培)는 어리석고 글도 잘 못하는데도 주시인(主試人)의 인가(姻家) 자제(子弟)로서 순전히 그의 아버지 이덕수(李德壽)가 지어 올린 전문(箋文)의 장구(長句)를 써내어 2등으로 급제하니, 국언(國言)이 떠들썩하였다. 방(榜)398) 이 나온 다음날 지평(持平) 최치중(崔致重)이 그 방을 소척(疏斥)하고 핵처(覈處)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채명보(蔡明寶) 등이 이산배를 방해하므로, 시배(時輩)들이 이유신(李裕身)을 사주(使嗾)하여 발계(發啓)하게 한 것이다. 임금은 시배를 곡호(曲護)하는 데 바야흐로 힘쓰는 중이므로, 처분이 이와 같았다.
강원 감사(江原監司) 이진순(李眞淳)이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사대(賜對)하고 면칙(勉飭)한 뒤에 보내었다.
9월 11일 정축
당초(當初)의 여러 집사(執事) 중 외임(外任) 외에는 모두 입시(入侍)하여 재궁(梓宮)을 결과(結窠)399) 하도록 명하였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윤순(尹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臣)이 김유경(金有慶)의 소(疏)에 다시 사사(史事)를 제기(提起)한 것을 보니, 말씨[口氣]가 전일과 같아서 전대(前代)에 개사(改史)한 것 중에도 혼란(昏亂)한 사실들만 찾아내어 주묵사(朱墨史)에 비유하고 다른 사람은 채변(蔡卞)의 무리로 몰아 붙이면서 자신의 원우(元祐)400) 때의 군자(君子)로 자처(自處)하였습니다. 군자와 소인(小人)은 후세 사람들의 공의(公議)에 달린 것이므로 진실로 한 번 웃어넘길 일이지마는, 신과 같은 보잘것 없는 사람으로 외람되어 편마(編摩)를 맡았다가 남의 기노(忌怒)를 범하였고, 마침내 선조(先朝)의 실록(實錄)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추악한 지목을 받게 하였으니, 신이야 말할 것이 못되지마는, 전하의 위촉을 욕되게 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한 번 웃어넘길 것인데, 어찌 과혐(過嫌)할 것인가?"
하였다.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또 김유경의 소(疏)로 인하여 상소하여 인혐(引嫌)하니, 우비(優批)를 내렸다.
9월 12일 무인
약방 제조(藥房提調)가 여러 의관(醫官)들을 거느리고 임금의 체후(體候)를 입진(入診)하였다.
김상성(金尙星)을 부교리(副校理)로, 한현모(韓顯謨)와 황정(黃晸)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심택현(沈宅賢)을 판윤(判尹)으로, 이광운(李光運)을 헌납(獻納)으로, 송성명(宋成明)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조최수(趙最壽)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권혁(權爀)에 대한 처분은 끝내 과중(過中)하는 실수를 하였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진백(陳白)하였지마는, 모두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슨 대죄(大罪)이기에 성상(聖上)께서 고집하시기를 이와 같이 하십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역시 따르지 않았다.
9월 14일 경진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4일 경진
대사성(大司成) 박문수(朴文秀)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사람이 되어 불충 불효(不忠不孝)하면 그 죄는 죽어야 마땅하고, 만일 이보다 더 심하면 이는 곧 무군 무부(無君無父)입니다. 만일에 몹쓸 사나운 종이 그 주인을 해치려고 한다든지 못되고 흉한 신하가 나라에 대하여 역모를 하려고 하는데 남의 신자(臣子)가 되어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다면, 그 죄는 군친(君親)에 대하여 모역하는 자와 똑같으니, 어찌 이 천지(天地)의 사이에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이런 일이 없는데도 남을 빠뜨리려는 마음을 가지고 망측(罔測)한 지경으로 밀어넣으려고 한다면, 이는 사람을 악역(惡逆)으로 무함하는 것이니, 그 죄도 또한 응좌(應坐)하는 형률이 있습니다. 저 이양신(李亮臣)은 신이 역적들의 정세를 알고 있다고 의심하여 장주(章奏)의 사이에 논핵하였으니, 조정의 처치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두 사람을 다 잡아다가 대질시켜 밝히는 것을 단연코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만일 신이 지정(知情)한 형률에 걸리지 않으면, 이양신은 무고(誣告)한 죄를 받아야 하는데, 어찌 사실을 밝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경(卿)의 고집은 내가 실로 병통으로 생각한다."
하였다.
9월 15일 신사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익필(李益馝)을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박문수(朴文秀)를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9월 16일 임오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송인명(宋寅明)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아뢰건대, 신(臣)은 정지(情地)가 기궁 위얼(奇窮危臲)하여서 사람의 도리로 견디어 갈 수가 없습니다. 모든 장소(章疏)에 있어서 사리(事理)는 따져보지 않고 다만 마음을 다 쏟아 구함(構陷)하는 것만으로써 최상의 계책으로 삼고 있으니, 이번에 김치후(金致垕)의 소(疏)는 바로 그 중에서 더욱 심한 것입니다. 그의 이른바 ‘대리를 원수로 여겼다[讎代理]’는 설(設)에 대하여 신은 진실로 남김이 없이 다 변명하여 보였는데도 아직까지 이 세 글자를 가지고 버티려 하니, 이는 자못 천일(天日)이 두려운 줄을 모르는 자입니다.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지 않았다’는 설(說)에 대하여는 성상(聖上)께서 특별히 변리(辨理)를 하시어 명백하게 밝혀졌는데도 지금 그의 말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이른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대개 내가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않는 것은 곧 사람의 항심(恒心)입니다. 지금 시약청을 미처 설치하지 않았다는 일로써 딴 마음이 없었는가의 여부에 논급(論及)한 것은 이것이 어찌 인간으로서 마음속에 싹틀 일이고 생각이 미칠 바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이런 말을 하는 자는 그 마음이 진실로 의심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비(優批)를 내렸다.
9월 17일 계미
이천 현감(利川縣監) 민형수(閔亨洙)가 사폐(辭陛)하였다. 민형수는 처지[坐地]가 다른 사람과 다르고, 또 이광좌(李光佐)를 논핵하다가 엄한 분부를 당하여 아직 개석(開釋)도 받지 못하였는데, 인가(姻家)인 시상(時相)401) 의 주선으로 읍(邑)으로 제수하라 분부하고, 도사(都事) 이현보(李玄輔)와 혐의가 있는 까닭에 이현보를 옮겨 내직(內職)으로 부임시키니, 사론(士論)이 이를 비난하였다.
김시혁(金始㷜)을 승지(承旨)로, 김흥경(金興慶)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심준(沈埈)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정형익(鄭亨益)을 좌윤(左尹)으로, 황정(黃晸)을 수찬(修撰)으로, 심태현(沈泰賢)을 교리(校理)로, 윤휘정(尹彙貞)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이판(吏判) 송인명(宋寅明)이 유겸명(柳謙明)을 옥당(玉堂)으로 의망(擬望)하였는데, 이랑(吏郞) 이종백(李宗白)이 기록하지 않으므로,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는 숙견(宿趼)402) 을 의망한 데 불과하여 해로울 것이 없는데, 공(公)은 왜 기록하지 않는가?"
하니, 이종백이 마침내 기록하였다.
9월 18일 갑신
이보다 먼저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조신(朝臣)으로서 찬배(竄配)된 사람을 주(注)를 달아 써서 들이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하교하기를,
"윤봉조(尹鳳朝)는 참작(參酌)하여 방송(放送)하고 이의천(李倚天)은 그가 시상(時象)을 달갑게 여기는 버릇을 내가 마음에 늘 아프게 생각하나, 원찬(遠竄)한 것이 3년이고, 금고(禁錮)한 것이 6년이므로 특별히 양이(量移)403) 하게 하고, 이태원(李太元)은 당초에 원찬(遠竄)하게 한 것이 너무 지나쳤으니, 방송하도록 하라. 이의록(李宜祿)과 신익흠(申益欽)은 양이하게 하고, 김홍석(金弘錫)은 때에 따라 세력에 붙은 것이 늘 통탄스러웠으나, 수년 동안 원찬하게 하였으니 벌은 이미 행하여진 것이다. 방송하게 하라. 송봉원(宋逢源)과 정윤헌(鄭胤獻)은 모두 방송하게 하고, 윤무교(尹懋敎)는 출륙(出陸)하게 하라."
하였다.
9월 19일 을유
권점(圈點)을 주관한 괴원관(槐院官) 채명보(蔡命寶) 등이 납공(納供)하니, 하교하기를,
"신칙(申飭)을 내렸는데도 다만 구습(舊習)을 따르고 또 감히 이와 같이 하니, 모두 삭직(削職)하게 하라."
하였다.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이희(李熹)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삼가 작일(昨日)에 찬배(竄配)된 사람을 참작하여 소석(疏釋)하라는 명령을 보았는데, 사(赦)한다는 것은 소인(小人)에게 요행을 주는 것이므로 무단히 경솔하게 의논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그 가운데 윤봉조(尹鳳朝)의 죄명(罪名)은 명백하지 않았고, 이의천(李倚天)은 당습(黨習)에 감심(甘心)하였고, 이복연(李復淵)·이의록(李宜祿)의 죄는 탐오(貪汚)를 범하였고, 이태원(李太元)·김홍석(金弘錫)은 역적 김일경(金一鏡)에게 추부(趨附)한 것인데, 혹은 전석(全釋)하고 혹은 양이(量移)하라 하시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놀라고 의혹하면서, 모두 이 거조(擧措)를 애석히 여깁니다. 청컨대, 환수(還收)하시어서 사(赦)하는 일을 신중히 하는 뜻을 보여 주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지평(持平) 이유신(李裕身)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추안(推案)을 가져다 보니, 완천 좌상(完川座上) 남 진사(南進士)는 아마도 남하운(南夏運)을 가리키는 말인 듯하며 심익연(沈益衍)의 초사(招辭)에서 나왔습니다. 그 뒤 심익연을 엽(燁)404) 과 면질(面質)시켜 본 결과 엽이 또 말이 꿀려서 대답에 막혔으며, 얼굴을 안다고 하는 말은 그도 또한 납초(納招)하였으므로, 평상시에 서로 주선(周旋)한 자취는 환하여 숨길 수가 없으니, 청컨대, 나국 엄문(拿鞫嚴問)하게 하소서. 삼가 어제 판부(判付)한 것을 보니, 윤봉조(尹鳳朝)를 침작하여 방송(放送)하라 하셨는데, 윤봉조가 당초에 진 죄가 어떠했습니까? 그런데도 섬에서 출륙(出陸)하게 한 것도 이미 특별한 은전이었는데, 좋은 곳으로 이배(移配)시켰다가, 1년도 되기 전에 또 이러한 명령을 내리십니까? 전하께서는 이미 지나간 일이라 하여 현실과 관계가 없는 옛날의 일로 맡겼지마는, 그의 죄명(罪名)이 처음부터 깨끗이 벗겨지지 않았으니, 온 국민의 의혹이 오래 되어도 그치지 않습니다. 신(臣)은 그 명령을 곧바로 취소하시는 것[反汗]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윤봉조를 방송하라는 명령은 이미 참작한 것이다. 남하운(南夏運)에 대한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9월 20일 병술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말하기를,
"강화 유수(江華留守) 유척기(兪拓基)가 부후미(腐朽米)405) 를 탕감하여 달라고 청하였는데, 이것을 만일 허락한다면 감관(監官)과 색리(色吏)의 무리들이 전미(全米)406) 를 훔쳐 먹고 부미(腐米)로 전례를 삼아 해마다 탕감해 주기를 청할 것이므로, 실상 지탱하기 어려운 방법이 될 것입니다. 탕감을 허락하여 주려고 한다면, 수신(帥臣)407) 에게 분부하여 한 번 바로잡아 썩은 것은 버리게 한 뒷에 용구 축신(用舊蓄新)408) 의 방법을 쓰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고, 공조 판서(工曹判書) 윤순(尹淳)은 말하기를,
"옛날에는 강도(江都)의 쌀이 5,6만 섬[石]이나 되었으나, 지금은 4만 섬에 지나지 않는데, 2만 섬은 환상(還上)으로 받은 것이고, 2만 섬은 옮겨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썩었다고 보고한 양은 15,6만 섬이 있을 때나 다름이 없으니, 어찌 괴이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여러 신하들도 모두 허락하기 어려움을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궤짝 속의 책들이 상하는 것을 보면 곡물(穀物)이 썩는 것도 미루어 알 수가 있다. 이번만은 탕감하도록 허락하여 주고, 이 뒤로는 용구 축신의 방법을 쓰도록 각별히 신칙하여 해마다 청감(請減)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조문명이 말하기를,
"노비(奴婢)를 대대로 전하여 주는 법은 중국(中國)에는 없는데, 우리 나라는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어서 갑자기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노(奴)와 양처(良妻)에게 태어난 자식은 아비의 신분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더욱 무의(無義)한 것이 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양정(良丁)이 도리어 천적(賤籍)에 속한 자가 매우 많습니다. 현종조(顯宗朝)에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그것을 혁파(革罷)할 것을 주달(奏達)했으나, 그 뒤에 준행(遵行)하지 않았습니다. 이 법을 영원히 없앤다면 조정에서는 얼마나 많은 한량(閑良)을 얻겠습니까? 또한 족히 원기(怨氣)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자, 송인명(宋寅明)·송진명(宋眞明)·윤순(尹淳)·김취로(金取魯) 등도 모두 조문명의 말이 옳다고 하니, 임금은 이러한 길이 한 번 열리게 되면 반드시 주인을 배반하는 폐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를 어렵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이러한 것은 석상(席上)의 공담(空談)에 불과하다."
하였다. 조문명이 주전(鑄錢)하는 일을 힘써 청하였는데, 말이 매우 상세하였으나 마침내 윤허하지 않았다. 조문명이 또 아뢰기를,
"중서(中庶)409) 들에게 증직(贈職)하는 남잡(濫雜)이 근일처럼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국전(國典)을 상고하여 보니 옛부터 정하여진 법규가 있었고, 숙종조(肅宗朝)에도 역시 신칙하여 정탈(定奪)410) 한 일이 있었습니다. 신이 전조(銓曹)에 있을 때에는 일체 방색(防塞)하였는데, 마땅히 분부를 내려 신칙하여 영원히 정식(定式)을 만드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민정(閔珽)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영흥 부사(泳興府使) 김몽로(金夢魯)는 청주(淸州)에서 변란(變亂)이 난 초기에 창의(倡義)를 한다고 물러나 있었는데, 변란이 평정된 뒤에 외람되게 공(功)만 차지하였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이 여러 곳에 전파되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니, 임금은 체차(遞差)하라고 명하였다.
정언(正言) 이저(李著)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형작(刑爵)과 은위(恩威)는 비록 군주의 대병(大柄)이기는 하지마는, 시비(是非)를 따져 공(功)과 죄(罪)를 주는 것은 진실로 일세(一世)의 공의(公議)에 관련된 것입니다. 이번에 소석(疏釋)하신 거조(擧措)는 법관(法官)으로 하여금 의언(議讞)하게 한 것도 아니고, 대신(大臣)들과 더불어 상의 확정한 것도 아닙니다. 두어 줄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모두 탕척(蕩滌)하였으니, 가령 처분이 일일이 모두 적당할지라도 오히려 신중히 하여야 할 것인데도 하물며 모두 적당하지 못한 것이겠습니까? 마땅히 다시 대신과 법관들로 하여금 자세히 의논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헌신(憲臣)에게 내린 비답에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9월 21일 정해
이현보(李玄甫)를 집의(執義)로, 박규문(朴奎文)을 장령(掌令)으로, 윤유(尹游)를 호조 참판으로, 심공(沈珙)을 이조 참판으로, 이흡(李潝)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황정(黃晸)을 교리(校理)로, 윤광익(尹光益)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윤심형(尹心衡)을 응교(應敎)로, 이진망(李眞望)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사직(司直) 윤순(尹淳)이 아뢰기를,
"덕종묘(德宗廟)의 축문(祝文)에 ‘국왕(國王) 신(臣)’이라고 칭(稱)하는 것은 미안한 점이 있습니다. 전일에 밖에 있는 대신(大臣)과 유신(儒臣)들에게 문의(問議)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좌의정 이집(李㙫)은 말하기를, ‘추존(追尊)하여 올린 뒤로 미처 바로잡지 못하고 지금까지 그대로 따라 온 것이니 바로잡는 일은 그만두어서는 안된다.’하였고, 판부사(判府事) 이태좌(李台佐)와 우의정 조문명(趙文命) 등은 말하기를, ‘덕종(德宗)·원종(元宗)은 모두 추숭(追崇)한 위(位)인데 원종에 대하여 사왕(嗣王)이라 칭하고 덕종에 대하여 국왕(國王)이라고 칭하는 것은 뜻이 없는 것이 아니다. 원종에 있어서는 인조(仁祖)가 손자(孫子)로서 할아버지의 뒤를 이었으므로 원종은 자연히 예실(禰室)411) 로 들어가게 되고, 덕종에 있어서는 성종(成宗)이 조카로서 숙부(叔父)를 계승하였으므로 예종(睿宗)에게 칭고 칭자(稱考稱子)하게 되면 이고(貳考)가 되어 옳지 못하며 또 사승(嗣承)한 실제가 없으므로 사왕(嗣王)이라고 일컫지 않고 국왕(國王)으로 일컬은 것이 혹시 이 때문인 것 같으나, 다만 중통 별혐(重統別嫌)하는 의리는 그 당시에는 행할 수 있지만 세대(世代)가 바뀌어진 뒤까지 행할 필요는 없으니, 마땅히 경악(經幄)의 신하로 하여금 널리 전례(典禮)를 고찰하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고, 좨주(祭酒) 정제두(鄭齊斗)는 말하기를, ‘덕종은 비록 태묘(太廟)412) 에는 입부(入祔)하였으나 문소전(文昭殿)에는 배향(配享)되지 못한 까닭에 따로 의묘(懿廟)를 세워 제향(祭享)하다가 지금은 옮겼으며, 그 축판(祝板)에는 ‘효질 국왕 신 휘 감소 고우 황백고 모왕(孝姪國王臣諱敢昭告于皇伯考某王)’이라고 칭(稱)하였으니, 조종조(祖宗朝)의 전례(典禮)가 본래 이와 같았으므로, 지금은 마땅히 이어받아 준행(遵行)할 것이고 다만 질손(姪孫)과 백조(伯祖)로만 개칭(改稱)할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대신(大臣)과 유신(儒臣)들의 의논이 이와 같은데, 성상께서 재가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이 판부사(李判府事)와 우상(右相)의 의논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9월 22일 무자
영흥(永興)에서 수추(囚推)413) 하던 명화적(明火賊)414) 24명이 밖에 있던 무리들과 결탁하여 옥(獄)을 부수고 도망쳤다고 남 병사(南兵使)가 장계(狀啓)로써 주달하였는데, 임금이 겸관(兼官)인 고원 군수(高原郡守)가 사실을 떠벌려 보고한 장계에 노(怒)하여 나문(拿問)하라고 명하였다.
9월 23일 기축
이보다 앞서 예조 판서 서명균(徐命均)이 아뢰기를,
"졸곡(卒哭) 후에 포(布)로써 익선관(翼善冠)을 싸는 것은 옛부터 각(角)이 없었습니다. 백관(百官)의 포모(布帽)도 모두 각(角)을 제거했었는데, 지금은 마대(麻帶)와 다르니 최(衰)를 받을 때 사모(紗帽)를 만드는 양식과 같이 각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은 3년의 제도에 있어서 명(明)나라에서 마대(麻帶)는 포로써 싼 각대(角帶)로 하였으니, 포영(布纓)은 마땅히 각(角)으로 해야 할 것이나, 의관(衣冠)의 문제는 중(重)한 것이니 대신(大臣)에게 문의(問議)하되, 익선관에 대하여서도 역시 똑같이 문의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심수현(沈壽賢)의 의논이 가장 명백한데, 거기에 이르기를,
"경자년415) 이후 익선관은 비로소 포(布)로 싸고 그 각(角)을 버렸습니다. 대저 익선관의 제도는 백관들이 착용하는 오사모(烏紗帽)와 그다지 다르지 않고 다만 철각(鐵角)을 곧게 꽂고, 가로 꽂는 것으로써 구별하는데, 지금 만일 각(角)을 없앤다면 거의 구별할 수가 없게 됩니다. 백관의 시사복(視事服)에 있어서는 경자년 이후에 비로소 포로 단령(團領)416) 을 하고 포로 모대(帽帶)를 쌌는데, 포로 싼 모(帽)에 각(角)을 없앤 것과 포로써 대(帶)를 만들어 뒤로 늘어뜨리는 것은 《오례의(五禮儀)》에 있는 국휼(國恤) 초기의 최복(衰服)에 착용하던 제도입니다. 지금은 이미 최복(衰服)이 있고 또 시사복(視事服)도 있는데, 포모(布帽)에 대하여 최복에 착용하는 것을 시사복에 실시하는 데 있어서는 예(禮)에 참고하여 보아도 근거가 없습니다. 예관(禮官)들이 진술한 것은 진실로 의견(意見)이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자년 이후에 최복(衰服)과 장복(章服)이 특히 구별되어 있는데, 포루(布縷)를 그대로 둔 것은 미처 바로잡지 못한 때문이다. 익선관(翼善冠)과 포모(布帽)에는 모두 각(角)을 만들게 하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포각(布角)은 일상 제도와 달라서 등급(等級)이 없으니, 똑같이 단과(單裹)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곧바로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김성발(金聲發)을 정언(正言)으로, 이덕부(李德孚)를 수찬(修撰)으로, 김취로(金取魯)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송진명(宋眞明)을 형조 참판으로, 이삼(李森)을 판윤(判尹)으로 삼았다.
9월 24일 경인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25일 신묘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말하기를,
"이철보(李喆輔)의 소(疏)에 홍성보(洪聖輔)를 논핵한 것은 지나쳤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어찌 오래 폐고(廢錮)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성보가 그 처음의 뜻을 바꾼 것은 반드시 소견(所見)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일 것이다."
하였다.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공조 판서(工曹判書) 윤순(尹淳)이 연중(筵中)에서 ‘의논이 그전에서 준엄하다가 이제 와서 완화(緩和)한 자는 마땅히 통척(痛斥)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것 같은데 신(臣)은 이 말로써 그르다고 여깁니다. 만일 옛날의 당(黨)이 무상(無狀)하다면 그 견해를 변경하는 것이 또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치근(申致謹)을 외직(外職)으로 보임(補任)시킨 것은 무슨 일 때문인가?"
하니, 형조 참판 송진명(宋眞明)이 말하기를,
"역적 남태징(南泰徵)이 적소(謫所)에 있을 때에 몰래 호마(胡馬)를 사 가지고 보내 주었는데, 전(前) 북백(北伯) 조상경(趙尙絅)이 장교(將校)를 시켜서 빼앗아 속공(屬公)하였습니다. 그 뒤에 신치근이 북평사(北評事)로 되어 그 당시의 빼앗아 온 장교를 형장(刑杖)을 쳐서 신문하였습니다. 비록 역절(逆節)을 몰랐다고 하지마는, 자신이 명관(名官)이고 무장(武將)이 되어 이러한 거조(擧措)를 하였으니, 매우 해괴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신은 정관(政官)417) 에게 글을 보내어 그전 경력(經歷)을 방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염퇴(恬退)한 사람은 숭장(崇奬)하라고 청하면서 말하기를,
"이재(李縡)와 김진상(金鎭商)은 참으로 염퇴한 사람입니다."
하자,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지금 산릉 당상(山陵堂上)의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본받으려는 사람이다."
하니, 조문명이 말하기를,
"이재와 김진상은 염퇴하여 가계(家計)를 만들고 있으니 쉽사리 뜻을 바꿀 수는 없겠지마는, 이진망(李眞望) 같은 이는 만일 좀더 나아오기를 권유한다면 그가 어찌 감히 오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이희(李熹)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을 소석(疏釋)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 들이라는 일에 있어서 임금이 말하기를,
"처분(處分)은 이미 참작하여 헤아려서 한 것이나, 대신(臺臣)이 법령을 준수(遵守)하려는 의논도 신장(伸張)시키지 않을 수가 없으니, 그 가운데 전석(全釋)하게 한 자는 양이(量移)하게 하고, 양이한 자는 전례대로 감등(減等)을 하게 하라."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가 패부진(牌不進)418) 하였으나 본원(本院)에서 국구(國舅)를 추고(推考)한 전례가 없는 이유로써 앙품(仰稟)하니,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물었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말하기를,
"비국 당상(備局堂上)의 일을 가지고 국구(國舅)를 추구하는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이르기를,
"국구의 사체(事體)는 다른 보국(輔國)들과 다르다. 추고하라는 전지(傳旨)는 써서 들이지 말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9월 26일 임진
남취명(南就明)을 동의금(同義禁)으로, 김재로(金在魯)를 약방 제조(藥房提調)로 삼았다. 김재로는 노론(老論) 중에서 맨먼저 왕명을 받들어 스스로 좇아 근췌(勤瘁)하므로 임금이 총애하여 의망(擬望)한 세 사람 중 끝에 있었는데도 낙점(落點)하였다.
사간원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추조(秋曹)419) 에서 일차(日次)로 형신(刑訊)하는 것들은 혹은 강절도(强竊盜)에 관계되기도 하고 혹은 살인 사건에 관계되기도 하는데, 한결같이 곤장을 참고 실토하지 않으니, 매우 통탄할 일이다. 모두 심상하게 다루지 말고 각별히 엄하게 신문하여 기필코 공초(供招)를 아뢰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어제 무목왕(武穆王)420) 의 정충록(精忠錄)의 일로 하교하였었는데, 무목왕의 정충 대절(精忠大節)은 평소부터 일찍이 흠탄(欽歎)하였었다. 이미 유편(遺編)을 찾았으니, 하물며 그의 사당[廟]이겠는가? 우제(虞祭)를 지낸 후에는 영유현(永柔縣)의 합향(合享)하는 곳에 근시(近侍)를 보내어 제사를 드리게 하고, 한 사당에 같이 있는 제갈 무후(諸葛武侯)421) 에게도 똑같이 제사 드리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각사(各司)에서 회계(回啓)하는 일을 지체(遲滯)시키는 것이 요즈음처럼 심한 때가 없다. 그러나 추판(秋判)422) 이 출사(出仕)한 것은 근일(近日)인데 하루에도 입계(入啓)하는 것이 20여 번씩까지 되니, 나는 이를 칭찬하고 있다. 이밖에 미처 회계(回啓)하지 못한 것들은 연속하여 입계(入啓)하도록 하라."
하였다. 형조 판서 김취로(金取魯)는 처음 이 직책에 임명되어 공사(公事)를 입계(入啓)하는 것에 조급하게 서둘러서 그 재능(才能)을 자랑하므로 이러한 명령을 내린 것이다.
9월 27일 계사
신방(申昉)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윤섭(尹涉)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홍현보(洪鉉輔)를 우윤(右尹)으로 삼았다.
9월 29일 을미
밤에 비가 조금 오고 천둥 번개가 쳤으며, 우박이 내렸는데 모양이 팥알[小豆] 같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동필(金東弼)을 지의금(知義禁)으로, 박필건(朴弼健)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전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수항(李壽沆)을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이수항은 조금 아첨하는 일과 재능을 자랑하는 태도를 하여 의주 부윤에 발탁 임명되었는데, 방백(方伯)과 묘당(廟堂)에서 과장하여 포상(褒賞)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이 명령이 내린 것이다.
9월 29일 을미
반유(泮儒)423) 에게 내린 벌을 탕척(蕩滌)시키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은 반유들이 재(齋)를 지키지 않는 데 화가 나서 유적(儒籍)에서 빼어버리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좌상(左相) 이집(李㙫) 이하 여러 관원의 구해(救解)로 인하여 유적에서 빼어버리는 벌을 풀어 주고 3년 동안 정거(停擧)하라 명하였다가 이때에 와서 여러 신하들이 다시 정지하기를 요청하므로 이를 허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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