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4권, 영조 17년 1741년 7월

싸라리리 2025. 9. 25.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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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계해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갑오년093)   이후에 금법을 무릅쓰고 사사로이 서원(書院)을 세운 것에 대하여 그 당시의 도신(道臣)을 파직(罷職)하고 수령(守令)은 나처(拿處)할 것을 명하였다.

 

공홍 감사(公洪監司) 송익보(宋翼輔)가 송익휘(宋翼輝)의 일로써 의리를 끌어대어 기꺼이 부임하지 않으므로,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체직(遞職)시키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함경 감사 민형수(閔亨洙)가 북관(北關)의 지도를 그려 와서 앙달(仰達)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하자, 임금이 불러서 물어 보았는데, 민형수가 지도를 갖고서 모처(某處) 변장(邊將)의 파면할 만한 것과 모처 진보(鎭堡)의 설치할 만한 것을 지적하여 진달하였다. 임금이 지도를 친히 열람하고 말하기를,
"후주(厚州)를 버리기가 아깝다는 것은 진실로 북백(北伯)의 말과 같으니, 이곳에도 또한 변장을 설치할 수 있는가?"
하니, 민형수가 말하기를,
"한두 개의 진(鎭)을 설치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것으로써 여러 대신들에게 묻자, 모두 말하기를,
"농사가 몹시 흉년이 들어서 진정(賑政)이 시급하니, 마땅히 후일을 기다려 의정(議定)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민형수가 또 선혜청(宣惠廳) 쌀 1만 곡(斛)을 나누어 주어 북관의 진자(賑資)에 보충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경기 어사(京畿御史) 임상원(林象元)에게 입시할 것을 명하여 수령의 현부(賢否)를 묻고 그 별단(別單)은 비국에 내려 품처하게 하였다. 임상원이 고 충신(忠臣) 부산 첨사(釜山僉使) 정발(鄭撥)의 자손이 바야흐로 마전군(麻田郡)에 있는데, 그 첩(妾)이 따라서 순절(殉節)한 것을 미처 정표(旌表)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작설(綽楔)094)  의 은전(恩典)으로써 포양하기를 송상현(宋象賢)의 예(例)와 같이 할 것을 청하자, 그대로 허락하였다.

 

대관(臺官) 김광국(金光國)을 파직하였다. 김광국이 대간(臺諫)으로서 패초(牌招)를 받들고 대궐에 나아가다가 길에서 종묘(宗廟)의 향축(香祝)을 만났으나, 말에서 내리지 않았는데, 헌관(獻官)이 그 죄를 논계(論啓)하니, 파직시킬 것을 명하였다.

 

7월 2일 갑자

서명형(徐命珩)을 대사간으로, 권우(權祐)를 지평으로, 남태제(南泰齊)를 응교로, 홍상한(洪象漢)을 부교리로, 서종급(徐宗伋)을 동의금(同義禁)으로, 김상익(金尙翼)을 공홍 감사(公洪監司)로, 구성익(具聖翼)을 북병사로 삼았다.

 

태학(太學)의 유생(儒生)들이 임금의 연교(筵敎) 때문에 스스로 안정하지 못하여 권당(捲堂)095)  하기에 이르렀는데, 대사성(大司成)이 그 일을 아뢰자, 개유(開諭)하여 들어가도록 권고하라고 명하였으나, 여러 유생들이 기꺼이 들어가지 않았다.

 

7월 3일 을축

대사성이 지관사(知館事)가 같이 모여서 들어가도록 권고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그대로 따랐다. 반유(泮儒)096)  가 소회(所懷)를 적어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갑오년097)   이후에 세운 서원(書院)과 영당(影堂)을 모두 훼철(毁撤)하도록 하여 선현(先賢)의 영위(靈位)를 모시는 장소로 하여금 곤궁하여 잡초가 무성한 곳이 되도록 하였으므로, 신 등은 서로 이끌고 상소하여 전지(前旨)를 회수하기를 바랐습니다. 이러한 즈음에 갑자기 현관(賢關)098)  을 적간(摘奸)하라는 분부가 있었고, 또한 이어서 사석(師席)을 추고(推考)하고 재색(齋色)099)  을 정거(停擧)100)  시키라는 하교가 있었으며, 그리고 또 즉시 권당(捲堂)하지 않는 것으로써 회책(誨責)하기를 매우 심하게 하였습니다. 대저 적간을 시행하는 것이 혹은 도기(到記)101)  로 인하고 혹은 원점(圓點)으로 인하여 하는데 이번의 분부는 이 두 가지 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불시에 적간을 하여 무고하게 최억(摧抑)하여 처음에는 회책하는 것 같다가 끝내는 허물을 잡게 되었습니다. 소비(疏批) 가운데, ‘한심하다.[寒心]’는 두 글자에 있어서는 오히려 짐작하여 하교를 하신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세도(世道)는 비록 타락하고 사기(士氣)는 비록 없어졌으나, 전하께서는 군사(君師)의 지위에 처하였으니, 배식(培植)하고 우용(優容)하여 오히려 사기가 진작(振作)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야 할 것인데, 더구나 질욕(叱辱)하고 만매(慢罵)할 수가 있겠습니까? 뇌위(雷威)102)  의 가하는 바에 저절로 사기가 소저(消沮)됩니다. 신 등은 족히 걱정할 것이 없지만, 유독 성조(聖朝)의 원기(元氣)를 배양(培養)하는 방도에 부족한 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그 일은 도리에 있어 몹시 잘못된 바가 있으니, 기필코 들어오기를 권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반유(泮儒)가 다시 들어감에 미쳐서 대사성 윤급(尹汲)이 또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원기의 소재(所在)를 깊이 생각하셔서 무릇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에 더욱 성례(誠禮)를 힘쓰시고, 경솔하게 최절(摧折)하지 마소서. 일을 처리하는 데 실수가 있으면 황봉(黃封)103)  을 내려 벌주기를 인조[仁廟] 때의 고사(故事)와 같이 하시고, 식당(食堂)에서 혹시 권당을 하면 종백(宗伯)을 보내 위로하기를 숙종[肅廟] 때의 구례(舊禮)와 같이 하소서. 그러면 비록 오늘날 이미 무너진 사기일지라도 또한 반드시 감동해 분발하여 떨치고 일어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권면(勸勉)한 바가 옳으니,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7월 4일 병인

정언 홍익삼(洪益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송익휘(宋翼輝)가 설계(設計)하여 대신을 끌어대도록 권유한 것은 진실로 이미 몹시 통탄스럽게 해괴한 일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친히 국문(鞫問)하시고 엄중하게 신문하신 까닭은 오로지 끌어댄 한가지 일에 있을 따름이 아니니, 그것이 대료(大僚)의 처의(處義)에 있어서는 오직 마땅히 처분을 공손히 기다렸어야 하는데, 처음에는 이미 잡아오기를 청하였다가 곧바로 다시 소구(疏救)하였고, 끝내는 또 비답을 받들기도 전에 급급히 청대(請對)하였으니, 신은 삼가 대료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신의 일은 규면(規勉)한 뜻이 옳다."
하였다.

 

지평 권우(權祐)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범상(氾上)하여 지만(遲晩)104)  한 이광의(李匡誼)를 경솔히 앞질러 작처(酌處)하여 아직까지도 천지의 사이에서 가식(假息)하도록 하고 있으니, 이제부터 이후로는 범상(犯上)한 무리를 장차 어떻게 징계하고 두렵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광덕(李匡德)은 국사(鞫事)가 바야흐로 한창이던 때를 당해서 방자하게 상소하여 조금도 엄외(嚴畏)하는 뜻이 없었고, 이에 감히 말하기를, ‘이 말의 근저(根柢)는 실로 신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하였으니, 이것은 송익휘(宋翼輝) 무리의 옥하(屋下)에서 사사로이 서로 모의한 것과는 비교할 게 아닙니다. 엄중하게 조사하여 끝까지 핵실(覈實)하는 일을 결단코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갑오년105)   이후로 유생(儒生)의 무리가 사원(祠院)을 창건하여 조정의 금법(禁法)을 함부로 범한 것이 혼잡한 폐단이 없지 않았으니, 훼철하라는 분부를 내린 것은 성상의 의도가 있었던 것이나, 대유현(大儒賢)·대명절(大名節)을 여러 해 동안 제사지내던 장소를 하루아침에 철거하고도 고석(顧惜)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아마 치세(治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닌 듯합니다. 구별하는 방도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매우 옳으나, 처분한 것 또한 이미 깊이 헤아려서 한 것이다."
하였다.

 

선혜청(宣惠廳) 및 각 군문(軍門)의 낭청(郞廳)을 소견(召見)하여 각사(各司)의 폐막(弊瘼)을 하문(下問)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7월 5일 정묘

달이 화성(火星)을 범(犯)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7월 6일 무진

윤지태(尹志泰)를 정언으로, 서명신(徐命臣)을 부교리로, 신처수(申處洙)를 필선으로, 정준일(鄭俊一)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7월 7일 기사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홍익삼(洪益三)의 상소로써 차자(箚子)를 올려 인구(引咎)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진차(陳箚)하여 구대(求對)한 것은 뜻한 바가 진실로 있었으나, 사례(事例)는 이상(異常)하고 형적(形跡)은 모순(矛盾)되었으니, 비난이 이르는 것은 곧 당연한 일입니다. 신이 감히 남을 탓할 수가 없는데, 비록 항안(抗顔)을 하고자 하더라도 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그때의 일은, 경(卿)은 비록 고심(苦心)하였으나 법을 집행하는 신하는 규면(規勉)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이날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서 가을의 전알(展謁)을 행하였다. 이보다 먼저 종묘 도제조(宗廟都提調)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중종실(中宗室)의 신탑(神榻)이 협착하여 사위(四位)의 독대(櫝臺)에 독(櫝)을 봉안할 수가 없습니다. 묘사(廟司)가 말하기를, ‘신탑의 동서(東西)를 조금 그 넓이를 더한다면 사의(事宜)에 합당할 것 같다.’고 하는데, 다만 신탑을 이미 넓힌다면 기둥에 핍근(逼近)하여 사람의 출입을 용납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일 조금만 남북(南北)의 길이를 감소시킨다면 주선(周旋)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봉심(奉審)하실 때에 마땅히 친히 살펴서 결정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김재로가 태묘의 낭관(郞官)과 더불어 입시하니, 임금이 묘사에게 명하여 종이로써 주척(周尺)을 만들어 신탑의 사면(四面)을 재게한 뒤에 하교하기를,
"제6실(第六室)의 신탑이 길이는 일독대(一櫝臺)가 더하고 넓이는 두 치가 모자라니, 가을에 봉심할 때 일체 수개(修改)하여 길이와 넓이의 증감(增減)을 본서(本署)의 등록(謄錄)에 기재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 임금이 환궁[回鑾]하는 길에 혜정교(惠政橋)에 이르러 연(輦)을 멈추고 하교하기를,
"마을의 이름이 승모(勝母)라고 되어 있자 증자(曾子)가 들어가지 않았으니106)  , 예로부터 이명(里名)과 교명(橋名)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제 길 곁에 혜정 석교(惠政石橋)가 있음을 들으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회가 일어나게 된다. 이 다리는 옛 궁궐에 가까워 깊은 인덕(仁德)과 은혜로운 혜택이 민심(民心)에 스며들었기 때문에 다리의 이름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 지난번에 고사(故事)에 따라 이 다리에 임(臨)하여 결수(決囚)의 정사를 시행하고 외방(外方)은 감세(減稅)의 혜택을 시행하였다. 그런데 서울 백성의 도현(倒懸)과 시민(市民)의 곤경을 받음과 공가(貢價)가 균등하지 못하니 이것이 소민(小民)의 큰 폐해이다. 공시인(貢市人)의 폐단을 해방(該房)에서 불러다가 물어 보고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태묘(太廟)를 배알함에 있어 유사(有司)가 미리 막차(幕次)를 설치하였는데, 도둑이 어연(御筵)·유장(帷帳)·지의(地衣) 등을 도둑질해 갔으므로, 포도청(捕盜廳)에 염탐하여 붙잡아 들일 것을 명하였다. 뒤에 과연 나포하여 절도(絶島)에 형류(刑流)시켜 종으로 삼고 본시(本寺)의 관원은 검찰(檢察)하지 못한 것으로써 나처(拿處)하였다.

 

7월 11일 계유

임금이 한학 문신(漢學文臣)의 전강(殿講)에 임시(臨試)하여 거수(居首)한 사람인 학정(學正) 노태관(盧泰觀)과 부정자(副正字) 권항(權抗) 등에게 상전(賞典)을 하사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국가(國家)에 우려가 없는 것은 보장하기 어려운 것이니, 혹시 사변이 있는 때를 만나게 되어 상역(象譯)은 담당할 사람이 없으면 문관(文官)으로 통사(通事)를 삼는다. 임진 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에는 고(故) 상신(相臣) 이정귀(李廷龜)도 또한 역어(譯語)를 이해하는 것으로써 천사(天使)107)  에게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이제부터는 문지(門地)는 물론하고 한학(漢學)을 익숙하게 이해하는 자로써 한학 교수(漢學敎授)에 차임(差任)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윤용(尹容)이 말하기를,
"고 상신(相臣) 오명항(吳命恒)이 마종(馬種)을 취하기 위하여 암수 달마(撻馬) 수백 필(匹)을 사들여 선천(宣川)의 신미도(身彌島) 부근 작은 섬에 방목(放牧)하였는데, 섬 가운데 수초(水草)가 모자라서 말이 번식하지 못하므로, 매년 추동(秋冬)의 사이에 백성들로 하여금 곡초(穀草)를 운반해 들여가도록 하는데, 운반해 들여갈 때 바람이 높고 물살이 거세서 번번이 몰닉(沒溺)하는 경우가 많아 크게 민폐(民弊)가 됩니다. 마땅히 신미도 목장(牧場)에 따로 한 구역을 만들어 이목(移牧)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중화(中和)의 사인(士人) 임필경(林弼景)의 처(妻) 이씨(李氏)의 문(門)을 정려(旌閭)할 것을 명하였다. 이씨가 그 지아비 임필경과 더불어 포구(浦口)를 건너가 밭을 김매고 해질녘에 미쳐서 갯가로 돌아왔는데 조수(潮水)가 급히 밀려오는 바람에 임필경이 잘못 들어갔다가 익사(溺死)하자 이씨가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마침내 가슴에 돌을 품고 물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죽은 뒤 3일 만에 비로소 그 시신(屍身)을 찾아보니 두 시체가 한곳에 있어 동시에 모두 건져냈다. 그 뒤로 갯가에서는 귀신의 울음 소리가 났는데, 이따금 지아비를 살려 달라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부사(府使) 윤광의(尹光毅)가 스스로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내 주자 그 소리가 이에 그쳤다. 윤용(尹容)이 서로(西路)에 봉사(奉使)하였다가 이 말을 듣고 주달(奏達)하니, 임금이 드디어 정포(旌褒)할 것을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종묘(宗廟) 각실(各室)의 축문(祝文)에는 다 존호(尊號)와 시호(諡號)를 씁니다. 그런데 유독 소혜 왕후(昭惠王后)의 존호 인수(仁粹)와 안순 왕후(安順王后)의 존호 인혜(仁惠)와 정현 왕후(貞顯王后)의 존호 자순 화혜(慈順和惠)는 이미 지장(誌狀)과 책보(冊寶)에 기재되고 당저(當宁) 을묘년108)  에 어첩(御牒)에 추가로 기재하였는데도 축문 가운데에 아직까지 빼놓고 쓰지 않았으니 미처 품정(稟定)하지 못한 결과에 연유된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예판(禮判)과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향실(香室)에 가서 축식(祝式)을 상세히 기준하여 바로잡게 하였다.

 

승지 김상성(金尙星)이 말하기를,
"장악원(章樂院)의 누각[樓] 위에 옛 석경(石磬)이 계축년109)  에 제조되었다고 새겨진 것이 있는데 혹자는 사직단(社稷壇)의 옛터에서 얻은 것이라고 말하고 혹자는 비변사(備邊司)의 옛터에서 얻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해를 상고해 본다면 바로 세종(世宗) 15년입니다. 황조(皇朝)에서 악(樂)을 하사한 것이 어느 해에 있었던 일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계축년에 비로소 아악(雅樂)을 바르게 하였으니, 이 석경은 바로 그 당시에 제조된 것입니다. 황단(皇壇)의 악기(樂器)에 사용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몇 매(枚)나 되는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거의 10여 매인데 사용할 수 있는 것은 4매라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악공(樂工)으로 하여금 세척하여 쓰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3일 을해

영제(禜祭)110)  를 사문(四門)에서 행하였다.

 

호남(湖南)에 큰 홍수가 져서 7백 78호(戶)가 표류(漂流)하였으며,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어지고 가옥(家屋)이 무너졌다. 관서(關西)에는 크게 역질(疫疾)이 돌아 사망한 자가 무릇 3천 7백여 명이나 되었다.

 

신사건(申思建)을 승지로, 정익하(鄭益河)를 대사간으로, 한익모(韓翼謨)를 수찬으로, 서명신(徐命臣)을 검상(檢詳)으로 삼았다.

 

병조 판서 정석오(鄭錫五)를 파직하고 윤양래(尹陽來)로 대신하게 하였다.

 

7월 14일 병자

사간 정희보(鄭熙普)를 특별히 체직(遞職)시켰다. 정희보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에 의리(義理)가 회색(晦塞)하고 변괴(變怪)가 번갈아 발생하여 분수를 범하고 의리를 배반하는 무리가 전후에 서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번 국옥(鞫獄)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친히 신문(訊問)하실 때에 오늘의 신자(臣子)된 자들은 진실로 마땅히 피가 흘러서 얼굴을 씻은 듯이 되더라도 성토(聲討)를 벌이기에 여가가 없어야 하는데, 그날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이 혹은 영구(營救)하는 자가 있었고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면서 극력 구원하기까지 하였으니, 인심(人心)의 함닉(陷溺)이 어찌하여 이러한 극도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까? 이광의(李匡誼)와 송익휘(宋翼輝)의 죄는 그 본말(本末)을 논한다면 차제(次第)를 논의할 만한 것이 없지 않은데, 전하께서 송익휘를 영구(營救)하는 승선(承宣)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귀양보냈다가 끝내는 삭탈 관작(削奪官爵)을 시키고, 이광의를 곡호(曲護)하는 승선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포용을 하시니, 신은 대성인(大聖人)의 처분이 또한 그 사이에 반박(斑駁)을 면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아! 탕평(蕩平)의 정치는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것은 성상께서 10년 동안 고심(苦心)하여 만들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저 승선이 비상(非常)한 시기를 조우(遭遇)하여 크게 진작(振作)시키려는 성상의 뜻을 우러러 인식하고 크게 탕평하는 주인(主人)임을 자부하여, 영증(榮贈)의 요청이 멀리 산남(山南)의 이미 백골(白骨)이 된 신하에게 미쳤고, 추천[薦剡]의 주달은 또한 국외(局外)의 교분이 소원한 사람을 먼저 하였습니다. 외면상으로 보아서는 그 말이 한개의 ‘공(公)’ 자에서 나온 것 같았지만, 그 실상을 따지고 보면 자기가 그것을 이용해 진취를 매개하려는 계략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대탕평(大蕩平)이란 것은 다만 한편의 사람을 기만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바로 일세(一世)의 사람을 기만하는 것이며, 다만 일세의 사람을 기만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바로 구중(九重)의 들으심을 기만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록(銓錄)과 이의(吏議)의 비방은 바로 자질구레한 일이니, 신은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적객(謫客)을 송별(送別)할 적에는 밤중을 이용해 몰래 찾아가 액례(掖隷)가 와서 엿보는 것을 피하였다고 말하고, 국수(鞫囚)를 신구(伸救)함에는 사사로운 은혜를 베풀고자 하여 춘방(春坊)111)  의 수작(酬酢)을 주장(譸張)하였으니, 비록 자기들끼리의 서로 사랑하는 자라 하더라도 해탄(駭歎)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더구나 온 세상의 공론(公論)이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간 지 5일이 되어도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다가 이날 임금이 승지 민통수(閔通洙) 등을 불러 묻기를,
"정희보의 상소 가운데 이른바 ‘산남(山南)’이란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니, 민통수가 대답하기를,
"원경하(元景夏)가 이동표(李東標)의 증직(贈職)을 요청하였는데, 이동표가 영남(嶺南)에 있었기 때문에 ‘산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추천[薦剡]이란 것은 무엇인가?"
하니, 민통수가 말하기를,
"원경하가 일찍이 홍경보(洪景輔)를 추천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적객을 송별했다는 것과 춘방의 수작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니, 민통수가 말하기를,
"이규채(李奎采)가 대정(大靜)에 귀양갈 적에 원경하가 밤중을 이용해 가서 작별하였고, 춘방의 수작에 있어서는 원경하가 말하기를, ‘일찍이 춘방을 지나가는데, 이광의가 문학(文學)의 직책으로서 숙직(宿直)하고 있으면서 말하기를, 「이거원(李巨源)은 목호룡(睦虎龍)의 위훈(僞勳) 교서(敎書)를 지었으니, 마땅히 청망(淸望)을 가로막아야 한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원경하가 이광의를 당(黨)이 없는 것으로 여겨 이광의가 추국(推鞫)받을 때에 당해서 원경하가 이 말로써 진주(陳奏)하여 신구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록과 이의란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니, 민통수가 말하기를,
"원경하가 항상 이조 홍문록(吏曹弘文錄)과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비부(鄙夫)의 일이니 원경하가 어찌 이런 짓을 하겠는가?"
하니, 민통수가 말하기를,
"지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실지로 탕평(蕩平)의 논의를 주관하고 있지마는 비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원경하는 탕평으로 인해서 근거없는 비난이 많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경하가 급제하기 이전에 홍경보는 이미 발탁 등용되었으니, 원경하에게 무슨 힘을 빌렸겠는가? 군자(君子)는 그럴 듯한 방법으로써 속일 수가 있는 것이니, 어찌 이치가 없는 말로써 나를 속일 수가 있겠는가?"
하니, 민통수가 말하기를,
"정희보의 소론(疏論)한 것은 임금을 기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머리를 감추고서 말을 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비로소 정희보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내려 당습(黨習)의 부효(浮囂)로써 꾸짖고 그 관직을 체직시켰다. 이어서 원경하를 내직(內職)에 옮길 것을 명하였다. 이때 원경하가 이광의를 읍구(泣救)한 일로 인해 동료들의 버림받은 바가 되자 스스로 안주하지 못하고 극력 외직(外職)을 요구하여 청풍 부사(淸風府使)가 되었는데, 겨우 수일(數日)만에 임금이 정희보의 상소로 인해 전조(銓曹)에 내직으로 옮길 것을 특명(特命)하였다.

 

하교하기를,
"이광의(李匡誼)·송익휘(宋翼輝)를 작처(酌處)하는 일로써 이목(耳目)의 관원(官員)이 법(法)을 지켜 진달하는 것은 옳지만 만일 다시 본사(本事)를 제기할 경우는 마땅히 대불경(大不敬)의 형률(刑律)을 시행할 것이다."
하였다.

 

경기 감사에게 명하여 고 상신(相臣) 이완(李浣)의 무덤을 수치(修治)하게 하였다. 승지 민통수(閔通洙)가 말하기를,
"이완의 무덤이 여주(驪州)에 있는데, 자손이 영체(零替)해서 수호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무덤 앞의 섬돌들이 붕괴되었습니다. 효종(孝宗) 때 제우(際遇)의 성대함을 소급해 생각한다면 마땅히 고휼(顧恤)의 은전을 베풀어야 합니다."
하니, 드디어 이런 분부가 있었다.

 

장령 송시함(宋時涵)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광의(李匡誼)의 주상을 침범한 말과 하늘에 통한 죄는 누군들 감히 비호(庇護)할 뜻을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친국(親鞫)이 바야흐로 베풀어질 때에 우참찬 이덕수(李德壽)가 방자하게 투소(投疏)하여 반한(反汗)할 것을 곧바로 청하니 지의(指意)를 헤아릴 수 없으며, 성상을 비난하여 우롱(愚弄)하고 모만(侮慢)하는 뜻이 드러나 있으니 신이 글귀마다 지적해 진달하여 그 패무(悖誣)함을 밝히고 싶지마는 기(氣)가 치솟고 쓸개가 찢어지는 듯하여 차마 붓에 먹을 묻히지 못합니다. 이덕수가 겉으로는 박야(樸野)함을 장식한 채 속으로는 음휼(陰譎)한 계략을 꾸미어 문형(文衡)의 권한을 잡고서 불령(不逞)의 무리들을 끌어들였습니다. 권점(圈點)을 주장함에는 이광덕(李匡德)처럼 요악(妖惡)한 인물인데도 의발(衣鉢)로써 전하였고 시험을 관장할 적에는 이현필(李顯弼)처럼 부도(不道)한 사람인데도 외과(嵬科)로써 선발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이광의와 같은 매우 흉악한 자까지도 또한 다시 영구(營救)하였으니, 마땅히 찬배(竄配)의 형률(刑律)을 시행하여야 합니다. 구성익(具聖益)의 동읍(東邑)의 치적(治績)에 대해서 신은 과연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겠으나, 이미 수계(繡啓)112)  에 들어 죄파(罪罷)당한 지가 얼마 되지도 않는 터에 곧바로 북병사(北兵使)를 제수하여 마치 발탁해 등용하는 자와 같음이 있으니, 다만 조정의 체모에 어긋남이 있을 뿐만 아니라 후일에 과죄(科罪)할 무리에게 장차 그 악습을 징계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북병사 구성익을 마땅히 즉시 개차(改差)하여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 일을 가지고서 이와 같이 진청(陳請)하니 간섭이 지나치다. 구성익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 참의 박성로(朴聖輅)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동몽선습(童蒙先習)》은 운각(芸閣)113)  에서 간행(刊行)하라는 분부가 있으셨는데, 이 책은 바로 신의 5대조이신 고 헌납(獻納) 신(臣) 박세무(朴世茂)가 지은 것입니다. 신의 5대조는 일찍이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과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으셨는데, 이 책(冊)은 단지 일가(一家)의 자제들로 하여금 가숙(家塾)에서 과학(課學)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고 상신(相臣) 노수신(盧守愼)이 신의 선조(先祖)의 문인(門人)으로서 연중(筵中)에 건백(建白)하여 서연(書筵)에서 사용하게 되니, 드디어 국가에 통행하는 책이 되게 된 것입니다. 이 책은 두 본(本)이 있는데, 구본(舊本)은 바로 신의 증종조(曾從祖) 고 승지(承旨) 신 박지계(朴知誡)와 신의 증조(曾祖) 고 징사(徵士) 광흥수(廣興守) 박지양(朴知讓) 등이 손수 스스로 교정(校正)한 것입니다. 또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의 권후(卷後) 발문(跋文)이 있으니, 이 책의 지의(旨意)를 발명(發明)한 것이 매우 절실(切實)합니다. 이제 만일 이 발문으로써 아울러 덧붙여 간행한다면 아마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원하건대 해관(該館)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거행하게 하여 막중한 서연에서 사용하던 책자(冊子)로 하여금 와오(訛誤)나 흠결(欠缺)의 우려가 없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를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5일 정축

관학 유생(館學儒生) 황상관(黃尙寬) 등이 상소하여 사원(祠院)을 훼철하지 말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초비(初批)에서 이미 효유(曉諭)하였다."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여 비로소 《심경(心經)》을 강(講)하였다.

 

권현(權賢)을 사간으로, 이종적(李宗迪)과 윤득경(尹得敬)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7월 16일 무인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을 마치자, 대사간 정익하(鄭益河)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광덕(李匡德)을 국문(鞫問)하라는 계사에 이르러 정익하가 말하기를,
"이것은 정기안(鄭基安)이 발론(發論)한 바의 계사입니다. 정기안이 소적(踈逖)한 신하로서 능히 이런 계사를 발론하였으니, 족히 가상(嘉尙)한 바 있습니다. 그건데 계사가 오히려 미진한 점이 있기에 신이 마땅히 우러러 진달하겠습니다. 신이 영남(嶺南)에서 대죄(待罪)할 때 전하께서 하교하기를, ‘임금의 무함을 설치(雪恥)하지 못하였다.’고 하시기에 신은 임금을 위하여 종일토록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금 여러 신하들이 전하의 옷을 입고 전하의 음식을 먹고 있는데,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하여 무함을 씻어주는 자가 없으니,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광덕을 오히려 국문하지 않으면 전하의 무함을 어찌 씻을 수 있겠으며 대신(大臣)의 누(累)를 어찌 풀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송익휘(宋翼輝)로써 죄의 우두머리를 삼고 이광의(李匡誼)로 그 다음을 삼았는데, 간장(諫長)이 오로지 이광덕(李匡德)만을 논핵하는 것은 혹시 송익휘가 이광의보다 가볍고 이광의가 이광덕보다 가벼워서 그런 것인가?"
하였다. 정익하가 말하기를,
"이광덕은 벼슬이 태학사(太學士)에 오르고 또 동료들의 추중(推重)하는 바가 되었으니, 그 상소가 비록 주상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진실로 이미 국중(國中)에 전해졌습니다. 대신(大臣)이 재신(宰臣)에게 말하고 재신이 대신(臺臣)에게 말하여 대신은 전석(前席)에서 발설하기에 이르렀고 재신은 장주(章奏)에 드러내어 증거하였으니, 한 시대의 사람들과 백세(百世)의 이후에 의혹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대저 ‘부침(復寢)’은 《예기(禮記)》에 나타나는데, 대신(大臣)의 이른바 불분명하다는 것은 진실로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이광의가 이미 범상(犯上)하였다고 자복(自服)하였으니, 그 죄가 군대를 일으켜 대궐(大闕)을 범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이광덕이 언근(言根)을 스스로 담당한 것은 이 또한 이광의입니다. 전하께서는 매양 송익휘로써 수악(首惡)을 삼으시고 이광덕은 묻지 않으시니, 신은 삼가 애석하게 여깁니다. 대저 말을 지어낸 죄가 이광덕에게 있다면 이광덕을 목 베고, 송익휘에게 있다면 송익휘를 목베고 이광의에게 있다면 이광의를 목 베어야 합니다. 세 사람을 한 곳에서 머리를 맞대게 한다면 반드시 말을 지어낸 사람이 하나 있을 것이니, 비록 대신이라 하더라도 어찌 족히 애석히 여길 것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광덕을 불문에 부치는 것은 다만 대신을 덮어 주기 위한 것인데, 대신이 하루를 폭로하지 않으면 하루의 누(累)가 있고 이틀을 폭로하지 않으면 이틀의 누가 있으니, 대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국법(國法)이 지엄(至嚴)하니, 대신(大臣)의 지위가 높고 학사(學士)가 소중하다고 하여 저앙(低昻)하는 바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 말을 지어낸 사람을 핵실(覈實)하여 고가(藁街)114)  에 목을 매어단 후에야 임금에 대한 무함을 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따르고자 하신다면 신이 전계를 읽겠으며 따르고자 하지 않으신다면 신은 비록 하루 종일이라도 감히 물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간장은 일전에 내린 하교를 보았는가?"
하니, 정익하가 말하기를,
"하교가 매우 많으니 신은 어떤 하교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기를,
"크게 불경스럽도다."
하였다. 정익하가 말하기를,
"신이 이미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신의 말이 크게 불경스러운 것에 가까운 점이 있습니까? 옛적에 주공(周公)은 관숙(管叔)·채숙(蔡叔)도 목 베었습니다. 저 한 명의 이광덕에 무엇을 꺼릴 것이 있어서 불문에 부치십니까? 신이 전하를 섬겨 온 지 20년입니다. 삼강(三綱)이 장차 끊어지려 하는 것을 통탄하여 전하를 위해 할말을 다 하는 것은 감히 전하를 저버릴 수 없어서입니다. 지금 신이 머리가 흰 늙은 간관(諫官)으로서 단지 전하의 무함을 씻고자 할 뿐이니, 진실로 다른 뜻이 있다면 전하께서 비록 신의 목을 베더라도 신은 또한 마음에 달갑게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또 신은 원경하(元景夏)가 눈물을 흘린 일에 대하여 끝내 의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그가 눈물을 흘린 것은 나라를 위한 것입니까? 이광의를 위한 것입니까? 만일 나라를 위해서 눈물을 흘렸다면 마땅히 이광의를 엄중하게 국문하기를 청했어야 할 터인데, 도리어 구해(救解)하였으니, 진실로 괴이한 일입니다. 지난번에 김상중(金尙重)도 오히려 이 계사를 전하였으니, 여론을 알 수가 있는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김상중이 이 계사를 읽었다. 그러나 이광의의 일에 이르러서는 차마 읽지 못하고 부앙(俯仰)하기를 한참 동안 하다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읽자, 바라보던 연신이 그를 위해 입을 가렸으니, 그 거조(擧措)가 진실로 잔인(殘忍)하다."
하였다. 정익하가 말하기를,
"여기서 공의(公議)의 엄정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시험삼아 입시(入侍)한 승지에게 물어보소서."
하니, 승지 오수채(吳遂采)는 대답하지 않았다. 임금이 시독관(侍讀官) 이종적(李宗迪)과 검토관(檢討官) 조명경(曹命敬)에게 물으니, 이종적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의 말이 그런 것 같습니다."
하고, 조명경은 말하기를,
"신은 이 일에 대해 알지 못하므로 감히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정익하가 아뢰기를,
"조명경이 대답하지 않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하니, 조명경이 황포(惶怖)하여 나아가 대답하기를,
"대간(臺諫)의 체모를 보아서는 그러합니다."
하였다. 정익하가 말하기를,
"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신은 마땅히 천폐(天陛)115)  에 머리를 부숴뜨릴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또한 생각한 바가 있으니, 나중에 하교하겠다."
하였다. 처음에 임금의 의사도 또한 이광덕을 신문하고자 하였으나 특별히 일이 대신(大臣)에 관련되어서 난처하게 여겼다가 정익하의 말을 들음에 미쳐 드디어 나국(拿鞫)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부사직(副司直) 원경하(元景夏)가 정희보(鄭熙普)의 상소 때문에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신이 우직(愚直)한 말로써 당세(當世)에 질시를 당하여 비판이 상유(庠儒)116)  에게서 번갈아 발론되었고 조롱이 친우(親友)에게서 아울러 일어났습니다. 이제 대소(臺疏)가 그 뒤를 이어 신을 탄핵할 적에는, ‘국수(鞫囚)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말하고 신을 무함할 적에는, ‘탕론(蕩論)의 진출을 매개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한편을 기만하고 일세(一世)를 기만하고 구중(九重)을 기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천지(天地)가 맑게 임하고 귀신이 늘어서 있으니 화협(和協)하려고 괴로워 하는 마음은 백 번 죽는다 해도 후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조(同朝)의 마음을 얻지 못하여 세상에 화살의 표적[矢的]이 되어 있으니, 혈연(孑然)한 한 몸이 바야흐로 도마 위에 올라 곤욕을 치르고 있는데, 오히려 어찌 조제(調劑)·협찬(協贊)할 희망이 있겠습니까? 아! 발을 적시고 치마를 걷어붙이고서 명환(名宦)을 차지하기 위해 조급하게 경쟁을 벌이는 것은 바로 신이 수치스럽게 여기는 바인데, 단지 연(燕)·조(趙)의 절사(節士)·협객(俠客)의 기풍이 없어 목을 찔러 죽어도 이 마음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적객(謫客)을 송별하고 밤중을 이용해 몰래 찾아갔다는 말은 그 지어낸 의도가 대단히 불안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새파랗게 질리도록 합니다. 이 원한을 풀지 못한다면 살아서는 얼굴을 들고 하늘을 대할 수가 없고 죽어서는 눈을 감고 땅에 들어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정희보와 함께 사패(司敗)117)  에 내려서 언근(言根)을 분명히 질정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환히 알고 있으니, 어찌 진변(陳辨)을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지례 현감(知禮縣監) 성이홍(成爾鴻)이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소견(召見)하고 말하기를,
"그대는 바로 독서(讀書)한 사람이니 마땅히 옛 성현(聖賢)의 일을 배워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주자(朱子)의 남강(南康)의 고사(故事)118)  와 같이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고, 어제시(御製詩) 1절(一絶)을 써서 하사하여 보냈다.

 

7월 17일 기묘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악기 조성청(樂器造成廳)의 낭청(郞廳)을 소견(召見)하여 악률(樂律)의 차례를 질문하고 고경(古磬)에 계축(癸丑)이라 새긴 것을 취하여 관람하였다. 호조 좌랑 민광우(閔光遇)가 아뢰기를,
"옛 종(鍾) 중에도 또한 계축이란 글자를 새긴 것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청협종(淸夾鍾)의 곁에 걸어 두도록 명하여 전악(典樂)으로 하여금 치게 하면서 말하기를,
"성음(聲音)의 고저(高低)가 아주 다른가?"
하였다. 전악이 말하기를,
"다른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까닭을 물었다. 전악이 말하기를,
"척수(尺數)가 차이 나는 데서 연유된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예(禮)라고 하지만 이것이 옥백(玉帛)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악(樂)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종고(鍾鼓)를 말하는 것이겠는가? 예악(禮樂)은 본래 두 가지 물건이 아닌 것이고 한 사람의 몸에 다 예악을 구비하고 있다. 대개 예악의 근본은 바로 성경(誠敬)이다. 성인(聖人)은 능히 성(誠)과 경(敬)을 다 하기 때문에 소리는 법률이 되고 몸은 법도가 되는 것이다. 만일 성경의 공부에 힘을 쓴다면 스스로 소리가 들어가서 마음으로 통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참찬관(參贊官) 권적(權𥛚)이 말하기를,
"성(誠)이 도달하는 곳에 금석(金石)도 뚫을 수가 있습니다. 만일 지극한 정성으로써 한다면 또한 음률(音律)도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황단(皇壇)의 악기를 조성하는 즈음에 우연히 옛 경(磬)을 얻었으니 매우 이상한 일이다."
하고 이어서 여러 낭청(郞廳)에게 신칙(申飭)하여 조성하는 즈음에 구제(舊制)에 틀리지 않게 하도록 하였다.

 

7월 18일 경진

충청도의 비인(庇仁)·평택(平澤)·직산(稷山)·서천(舒川) 등 네 고을에서 해일(海溢)이 발생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대사간 정익하(鄭益河)의 연주(筵奏)로 인하여 의금부에서 대죄(待罪)하고 이어서 상소하여 인죄(仁罪)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이 일은 깊이 헤아려야 할 것이 있다. 수규(首揆)가 공무를 집행하기를 기다려 하문(下問)하여 처리하고자 하니, 대명(待命)하지 말고 인구(引咎)하지 말고서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
하였다.

 

7월 19일 신사

관학 유생(館學儒生) 심이지(沈履之) 등이 상소하여 사원(祠院)을 훼철하지 말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하유(下諭)하였다."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원도의 평해(平海) 등 아홉 고을에 바닷물이 줄어들어 육지와 같이 편편해졌다가 얼마 후에 물이 육지로 넘쳐 들어 하루에 번번이 7, 8차례나 넘어드니 바닷가의 인가(人家)가 많이 표몰(漂沒)되었고 주즙(舟楫)이 파손되었다.

 

7월 20일 임오

윤봉조(尹鳳朝)를 공조 참판으로, 정언섭(鄭彦燮)을 동의금(同義禁)으로, 허옥(許沃)을 보덕(輔德)으로, 민택수(閔宅洙)를 필선(弼善)으로, 홍익삼(洪益三)을 사서(司書)로, 홍창한(洪昌漢)을 겸필선(兼弼善)으로, 김유경(金有慶)을 지경연(知經筵)으로, 어유룡(魚有龍)과 조명신(趙命臣)을 승지로, 신만(申晩)을 동경연(同經筵)으로, 이수해(李壽海)를 문학(文學)으로, 홍득후(洪得厚)를 장령으로, 어석윤(魚錫胤)을 정언으로, 윤심형(尹心衡)을 부응교로, 박필재(朴弼載)를 집의로 삼았다.

 

7월 21일 계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호서 어사(湖西御史) 윤득재(尹得載)가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민은(民隱)119)  을 소문(所問)하였다. 윤득재가 말하기를,
"청주(淸州)에 옥수(獄囚) 홍주국(洪柱國)이라는 자가 있어 살인(殺人)한 죄로써 감옥에 들어가 있었는데 마침 무신년의 변란120)  을 당하여 적도(賊徒)들이 옥문(獄門)을 부수고 죄수들을 모두 석방한 뒤 위협하여 적을 따르게 하였는데, 홍주국은 도피(逃避)하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난리가 평정된 뒤에 도로 고향(故鄕)으로 돌아가니 감사(監司) 윤경룡(尹敬龍)이 기포(譏捕)해서 다시 가두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사람을 죽인 죄는 진실로 있지만 적을 따르지 않은 의리는 또한 가상한 것입니다. 마땅히 공(功)으로써 죄(罪)를 덮어주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무신년에 적변(賊變)이 일어났을 때 청주 백성의 공로(功勞)가 있는 자 중에서 1등인 두 사람에 대해서는 가자(加資)를 하였고, 3등인 20여 명에 대해서는 미포(米布)를 제급(題給)하였으며, 2등인 아홉 사람은 비록 그에 상당한 직(職)을 제수하라는 분부가 있었지만 전조(銓曹)에서 아직까지 봉행(奉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군정(群情)이 억울해 하고 있으니, 아홉 사람에 대하여 비록 다 벼슬을 제수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하더라도 그중에 한두 사람은 본도(本道)의 도신(道臣)·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장문(狀聞)하게 하여 격려·권장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윤득재가 또 남포(藍浦)의 군액(軍額)이 과다(過多)한 폐단을 말하여 잘 헤아려서 홍산(鴻山)에 이송(移送)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또한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대궐 가운데서의 전도(前導)는 스스로 등급이 있어 감히 일산(日傘)을 펼 수가 없기에 일찍이 칙려(飭勵)한 바 있었는데, 이제 승선(承宣)이 진달한 바로 인하여 기랑(騎郞)121)  을 초문(招問)하니 명령이 해이해진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뒤로 이를 범하는 자는 보는 대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대개 당하관(堂下官)이 시종(侍從)의 경우가 아니면 대궐 가운데서 일산을 펼쳐 들고 전도할 수 없는 것은 고례(古例)이다.

 

하교하기를,
"지난번에 금랑(禁郞)122)  이 지체함으로 인하여 간혹 결곤(決棍)을 명하기도 하였으나, 이것은 옛 제도가 아니다. 뒤에 계승하는 왕이 만일 이 법을 따라서 곤장을 쓴다면 정장(廷杖)의 폐단은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니, 이것은 나의 허물이다. 이 뒤로 군무(軍務)가 아닌데 이것을 하는 경우는 유윤(惟允)의 신하123)  만이 이 하교(下敎)로써 복주(覆奏)하고 경외(京外)의 법 밖의 곤장에 대해서도 또한 다시 엄중하게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도원(李度遠)을 응교로, 홍상한(洪象漢)을 부수찬으로, 정이검(鄭履儉)을 수찬으로, 서명신(徐命臣)을 겸보덕(兼輔德)으로, 최규태(崔逵泰)를 장령으로 삼았다.

 

우참찬(右參贊) 이덕수(李德壽)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에 이광의(李匡誼)를 국문(鞫問)할 때 천로(天怒)가 진첩(震疊)하였으니 이면(裏面)은 알 수 없으나 드디어 단소(短疏)를 초(草)하여 스스로 헌규(獻規)하는 의미를 나타내었습니다. 말한 바, ‘두 가지 큰 죄(罪)’라고 하는 것은 진실로 진심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임시 방편의 말로 억양(抑揚)하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대신(臺臣)은 이를 기절(譏切)·모만(侮慢)으로써 단정하였습니다. 대저 신하가 그 임금을 사랑하여 그 임금으로 하여금 희로(喜怒)의 공평함을 얻게 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 지정(至情)입니다. 돌아보건대 무슨 마음으로서 함부로 모만을 하였겠습니까? 오직 그 애증(愛憎)이 정(情)에 따르고 호오(好惡)가 관점을 달리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 덩이의 수정(水精)을 가지고서 말한다면 그 바탕은 혼연(渾然)히 흰데, 이를 붉은 그릇에 넣어 두면 보는 자가 붉은 구슬이라 말하고 푸른 그릇에 넣어 두면 보는 자가 푸른 구슬이라 말합니다. 단지 대신(臺臣)이 신을 질시(嫉視)하기를 깊이한 까닭으로 그래서 백색(白色)을 알기를 청색(靑色)이나 주색(朱色)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신이 전에 문형(文衡)을 맡고 있을 때 여러 차례 천거하는 일을 당하였는데, 이광덕(李匡德)에 이르러서는 신이 진실로 한결같이 공의(公議)를 따라 수천(首薦)하였습니다. 그 때에 당해서는 요악(妖惡)한 자라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였는데, 대신(臺臣)이 이 제목을 추가하여 급인(汲引)한 것으로써 신을 책망하니, 이것은 또 신의 생각에 미친 바가 아니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제 진달한 바를 보니, 세도(世道)의 효효(囂囂)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7월 23일 을유

사간(司諫) 권현(權賢)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신(大臣)이 간장(諫長)의 연주(筵奏)로 인하여 서명(胥命)124)  의 거조(擧措)가 있기까지 하였으니, 비록 간장이 진달한 바가 어떠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개 이광덕(李匡德)의 일에 연유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미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진달한 바로써 관계가 지극히 중대하니 만일 한번 구핵(究覈)하지 않는다면 군정(郡情)은 갈수록 더욱 불울(拂鬱)하고 대신(大臣)은 날로 점차 편안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비록 수규(首揆)에게 하순(下詢)한다 하더라도 별달리 선처(善處)할 방도가 없을 듯하니, 마땅히 조속히 대계(臺啓)를 윤허하여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처분(處分)하였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여러 신하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고, 하교하기를,
"송익휘(宋翼輝)의 일이 발생되니 이광덕(李匡德)이 아우를 위한 심정을 알 수가 있겠다. 이제 이광덕을 깊이 다스리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정익하(鄭益河)가 대신(大臣)을 조언(造言)의 죄과(罪科)로 곧바로 몰아서 그 출사(出仕)하는 길을 단절시킨 것은 바로 본사(本事)를 자중(藉重)하여 없는 것을 가리켜 있다고 한 것이니, 이것은 크게 불경(不敬)스러운 것이다."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마땅히 한번 이광덕을 신문(訊問)하여 언로(言路)를 진정시켜야 합니다. 정익하의 뜻은 단지 한번 이광덕을 신문한 연후에 대신(大臣)이 자백(自白)할 수 있다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광덕을 미워하는 자가 신문하고자 하고 이광덕을 사랑하는 자도 또한 신문하고자 하니 여러 신하들은 각각 진달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김시형(金始炯), 이조 판서 민응수(閔應洙), 한성 판윤 서종급(徐宗伋), 이조 참판 정우량(鄭羽良), 형조 참판 윤득화(尹得和), 병조 참판 김약로(金若魯), 교리 이종적(李宗迪)이 모두 이광덕을 마땅히 한번 심문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정언 어석윤(魚錫胤)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단지 이광덕의 상소를 보지 않았을 뿐입니다. 만일 그 상소를 보았다면 청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반드시 심문할 것입니다. 정익하가 말을 한 것이 수미(首尾)를 돌아보지 않고 망발한 점은 있지만 협잡(挾雜)한 것은 신이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비로소 이광덕의 상소를 가져다 보고 하교하기를,
"우상(右相)이 소진(疏陳)한 것과 다름이 없다."
하고, 이광덕을 거두어 국청(鞫廳)에 내릴 것을 명하였다. 또 정익하가 전석(前席)에서 승지(承旨)와 유신(儒臣)을 위협하고 또 스스로 노신(老臣)이라 칭한 것으로써 무엄(無嚴)하다 하여 파직시켰다. 승지 민통수(閔通洙)가 말하기를,
"그 말은 채용하고 그 사람은 처벌한다는 것은 어찌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정익하를 견파(譴罷)하라는 분부를 중지하여야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장차 물러가려고 하니 정우량이 반차(班次)에서 나와 아뢰기를,
"정미년125)   이후로부터 전하께서 고심(苦心)·혈성(血誠)으로써 당습(黨習)을 억제하시니 15년 동안 양쪽 편에서 살육(殺戮)하려는 마음을 감히 다시 실현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변괴가 횡생(橫生)하여 화심(禍心)이 이미 발동하였습니다. 이제 송익휘가 반드시 대신(大臣)을 원인(援引)하고자 하고, 정익하가 반드시 대신(大臣)에게 말의 근원을 돌리려고 한 것은 어찌 곤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상께서 곡진히 보전(保全)해 주심이 아니라면 대신(大臣)이 어찌 오늘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근일의 기상(氣像)이 몹시 아름답지 못하니 신은 세도(世道)가 미란(糜爛)하여 끝내는 지탱할 수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고, 이어서 부복(俯伏)하여 눈물을 흘리니, 임금이 경동(驚動)하여 말하기를,
"근일의 일은 경(卿)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내가 이미 환히 알고 있다."
하였다.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할 것을 명하니, 영의정(領議政) 김재로(金在魯)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박필성은 효종(孝宗)의 부마(駙馬)인데 이때에 이르러 나이가 90이 되었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경상(卿相)도 나이가 90이 되는 경우가 오히려 매우 드문데, 더구나 의빈(儀賓)이겠습니까? 태종조(太宗朝)의 부마 청평위(淸平尉) 이백강(李伯剛)은 나이 70이 되자 문종(文宗)께서 특별히 궤장을 하사하였습니다. 더구나 박필성의 나이는 이백강보다 20년이 더 많으니 고사(故事)에 따라서 마땅히 궤장을 하사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궤장을 하사하는 날에 선온(宣醞)을 명하고 어제(御製) 오언시(五言詩) 1률(一律)을 하사하였다. 이어서 대소(大小)의 조회(朝會)에 봉조하(奉朝賀)의 예(例)에 따라 궤장을 의지하고 보행할 것을 명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4일 병술

임금이 약원(藥院)에 명하여 경선당(慶善堂)에 입진(入診)하게 하니, 경선당은 바로 동궁(東宮)이 거처하는 곳이다. 임금이 도제조(都提調) 김재로(金在魯)에게 말하기를,
"경(卿)이 매양 세자(世子)를 보려하고 또 의관(醫官)으로 하여금 진찰(診察)을 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당(堂)에서 경(卿)을 부른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동궁(東宮)에게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읽을 것을 명하고 또 글자를 써볼 것을 명하니 세자가 두 폭(幅)을 써서 올렸는데, 하나는 ‘군신 부자(君臣父子)’란 네 글자를 썼고, 하나는 ‘충효(忠孝)’란 두 글자를 썼다. 임금이 보고 나서 영의정 김재로에게 전해 주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신이 여름에 글자를 써 주시기를 앙청(仰請)하였더니, ‘효제 충신 인태(孝悌忠信仁泰)’란 여섯 글자를 써 주셨습니다. 여섯 글자가 의미가 있었는데, 지금의 이 여섯 글자도 또한 다 의미가 있습니다. 예학(睿學)126)  의 숙성(夙成)함이 이와 같으니 우리 동방(東方)에 억만년의 한없는 복입니다."
하고, 김재로가 한 폭으로써 제조(提調) 조관빈(趙觀彬)에게 나누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조관빈이 ‘충효(忠孝)’란 두 글자를 취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제조가 두 글자를 취한 것도 또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권적(權𥛚)이 말하기를,
"신만이 홀로 향우(向隅)127)  의 탄식이 있습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또 ‘숙야(夙夜)’란 두 글자를 써서 주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두 글자도 또한 의미가 있으니, 경은 지신사(知申事)128)  를 체직(遞職)할 수 없다."
하였다. 임금이 또 하교하기를,
"숙종(肅宗)께서 일찍이 집희당(緝熙堂)에서 어제(御製)한 시가 있었는데, 오늘 여기에 오니 마음에 느낀 바가 있다. 주서(注書)는 기록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친히 외우기를,
"성문(聖門)의 천만 마디 말은,
방심(放心)한 곳을 찾아서 알게 하고자 한 것이라네.
천서(天叙)는 온전한 덕(德)을 밝혔는데,
인심(人心)은 암암리에 흩어져 옮겨 가네.
백사(百邪)를 장차 날마다 버리려 할진대,
일경(一敬)을 반드시 굳게 가져야 한다.
춘저(春邸)에 일이 없는 날에는,
항시 사부(師傅)를 대할 때와 같이 하라."
하였다. 외우기를 끝마치고 나서 주서 및 궁관(宮官)에게 일기(日記)에 기재할 것을 명하였다.

 

7월 25일 정해

원경하(元景夏)를 대사간으로, 이천보(李天輔)를 헌납으로, 이유신(李裕身)을 장령으로, 이광부(李光溥)를 집의로, 박문수(朴文秀)를 형조 판서로, 신사철(申思喆)을 공조 판서로, 이종성(李宗城)을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신만(申晩)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남덕하(南德夏)를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홍충 감사(洪忠監司)        김상익(金尙翼)을 소견(召見)하여 면유(面諭)하여 보냈다.

 

7월 26일 무자

형조 참의 심육(沈錥)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7일 기축

경상도 창원(昌原)·김해(金海) 등의 고을에 해일(海溢)이 있었다.

 

대사헌 원경하(元景夏)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정희보(鄭熙普)의 망극(罔極)한 참무(譖巫)를 당한 뒤로부터 침멸(湛滅)되기만을 기다렸었는데, 우러러 천일(天日)의 조림(照臨)하심을 힘입어 연교(筵敎)와 소비(疏批)에서 글자마다 통변(洞辨)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정희보의 상소 가운데 ‘잠방(潛訪)’ 이하의 일곱 글자는 이것이 얼마나 위포(危怖)스러운 것입니까? 정희보가 신에게 직접 들어서 십분(十分) 확실한 것도 아닌데, 어찌 감히 입에 발설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정희보와는 본래 구원(仇怨)이 없는데, 이제 화심(禍心)을 갖고서 위험한 함정으로 밀쳐 넣는 것은 그 형세가 또한 부득이 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신은 이 세상에 바로 하나의 빈 배[虛舟]인데, 창[戈]을 메고서 서로 공격하는 일이 앞뒤에서 번갈아 발생되고 있습니다. 간장(諫長)이 경연(經筵)에 오름에 미쳐서는 정희보의 상소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설을 끄집어다가 억양(抑揚)하기를 황홀하게 하여 신을 역적을 비호한 죄과(罪科)에 몰아넣었습니다. 아! 지난번 연석(筵席)에서의 세 글자의 엄중한 하교는 신자(臣子)의 감히 봉승(奉承)할 수 있는 바가 아니기에 이때를 당하여 눈물을 흘리며 극력 간쟁한 것은 다만 신 한 사람뿐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이광의(李匡誼)에게 무슨 관련이 있기에 간장이 신을 조절(操切)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 것입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전일에 내린 비답에서 이미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7월 28일 경인

관학 유생(館學儒生) 송의손(宋宜孫) 등이 상소하여 사원(祠院)을 훼철하지 말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하유(下諭)하였는데, 어찌하여 번거롭게 하는가?"
하였다.

 

병조 판서 윤양래(尹陽來)가 북도(北道)의 서원(書院)에 관한 일 때문에 좌파(坐罷)되고 김시형(金始炯)으로써 대신하였다. 김진상(金鎭商)을 대사헌으로, 민택수(閔宅洙)를 장령으로, 안집(安𠍱)을 정언으로, 홍창한(洪昌漢)을 응교로, 민백행(閔百行)을 부수찬으로, 김상중(金尙重)을 겸문학(兼文學)으로, 이기언(李箕彦)을 설서(說書)로, 김약로(金若魯)를 동경연(同經筵)으로, 이익정(李益炡)을 우윤(右尹)으로, 정언섭(鄭彦燮)을 호조 참판으로 삼았다.

 

부수찬(副修撰) 정준일(鄭俊一)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며칠전 관유(館儒)들의 상소는 대개 어진 이를 높이고 도의를 중히 여기는 뜻에서 나온 듯합니다. 그런데도 전하(殿下)께서는 한결같이 딱 잘라 거절하셨으니, 이것이 비록 새로 내린 명령을 고치기 어려운 데에서 나왔겠지만, 조정(朝廷)의 배양(培養)하는 도리에 있어서 기를 꺾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들이 상소하여 요청한 것은 기자(箕子)와 주자(朱子)를 제향하는 두 사원(祠院)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자는 우리 나라에 가르침을 폈고 주자는 우리 도학(道學)에 공로가 있으니, 비록 혹시 중첩되게 설치하는 일이 있더라도 어찌 높이 받드는 도리에 영광스러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일체의 법으로써 시행하시니, 신(臣)은 삼가 전하(殿下)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마땅히 곧바로 반한(反汗)하시어 많은 선비들의 희망을 위로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하유(下諭)한 뒤에도 오히려 지금까지 중지하지 않으니, 지나친 바가 있다. 비록 하루에 세 번 상소를 올리더라도 나의 이 뜻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숭정문(崇政門)에서 조참(朝參)을 행하고, 백관(百官)과 군민(軍民)들에게 유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우리 국민과 여러 선비들이여, 모두 이 유시(諭示)를 듣고서 나의 마음에 감동하라. 아! 내가 즉위한지 17년인데, 덕(德)은 아랫사람에게 미치지 못하고 은혜는 백성에게 젖어들지 못하여 중외의 백성들이 모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듯한 처지에 있다. 스스로 부덕(否德)을 부끄러워 하니, 먹으나 자나 어찌 해이해질 수 있는가? 몇년을 고심하며 조제(調劑)에 정성을 쏟아 왔다. 문을 닫고 수라[膳]를 물리친 것을 지난 역사에서 어찌 찾아볼 수 있는가? 몇 차례 칙유(飭諭)하였는데 그래도 붕당의 습관[黨習]을 달갑게 여기니, 아! 이런 얼굴로는 그대들을 대하기에 오히려 부끄럽다. 더욱이 뒷날에 무슨 낯으로 돌아가서 선왕(先王)들을 뵙겠는가? 돌아보건대 지금 조정(朝廷)에서 겉으로는 화합과 협동을 빙자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얼음과 숯처럼 서로 용납하지 않는다. 작년에 처분한 것을 어찌 감히 다시 거론한단 말인가? 쓸데없이 두려워하여 스스로 윗사람을 속이는 일을 범하며 남모르는 곳에서 교묘하게 꾸며서 지친(至親)도 돌보지 않으며, 그 습관을 따라 우리 조정을 어지럽히려 하는데, 그 정상(情狀)이 이미 드러났기에 엄중히 징계하였다. 아! 본 사건은 이미 귀결이 났으니, 임금이 비록 ‘무함’이라고 하더라도 신하가 감히 다시 거론할 수가 있겠는가? 수규(首揆)는 홀로 수고하고 이상(二相)129)  은 불안해 하고 있으니, 지금 상황을 돌아보면 한심하다 할 만하다. 체포(逮捕)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므로, 친히 신문할 날이 멀지 않으니, 사건의 흑백(黑白)은 얼마 안 가서 판가름이 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후로 다시 그것을 범함이 있으면 그대 무리들을 다 모아서 방형(邦刑)을 시행해야 할 것이니, 정부(政府)로 하여금 이 유시(諭示)를 포고(布告)하게 하라."
하였다. 이때 대사간 정익하(鄭益河)가 이광덕(李匡德)을 국문(鞫問)하기를 요청하였는데, 임금이 정익하가 대신(大臣)을 중상(中傷)한 것으로 의심하여, 드디어 조참을 행하고서 뭇신하에게 유시를 반포하여 말을 하는 자들을 억눌렀었다.

 

7월 29일 신묘

태학(太學)의 여러 유생들에게 칙유(飭諭)하였다. 이때 태학의 여러 유생들이 세 번을 연달아 상소하여 사원(祠院)을 헐지 말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마침내 여러 유생들을 광달문(廣達門) 밖에 불러서 도승지(都承旨)에게 명하여 선유(宣諭)하게 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저 태학을 바라보건대 선성(先聖)130)  이 문묘(文廟)에 계시고, 십철(十哲)131)  이 죽 나열(羅列)해 있으며 육현132)  이 충만(充滿)해 있다. 저 여러 향원(鄕院)은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폐단이 분운(紛紜)하여 도리어 설월(屑越)하게 되었으므로 유생[章甫]에게 수치를 끼치고 있다. 각자가 사원(祠院)을 세우려고 서로 앞을 다투니, 경중(輕重)이 거꾸로 되고 선비의 습관은 더욱 혼탁하다. 지금의 태학은 도리어 눈치를 살피는 곳이 되고 말았으니, 아! 그대 여러 유생들은 근본을 버려 두고 말단에만 힘쓴다고 말하겠다. 이번의 이 칙유는 성현(聖賢)에게 질정하여도 또한 잘못되지 않을 것이니, 그대들은 빨리 쓸데없는 상소를 중지하고 공경히 성묘(聖廟)를 지키라."
하였다.

 

7월 30일 임진

서종급(徐宗伋)을 호조 판서로, 이수해(李壽海)를 정언으로, 이기헌(李箕獻)을 장령으로, 권일형(權一衡)을 필선(弼善)으로 삼았다.

 

이달에 큰 물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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