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계사
행 도승지(行都承旨) 권적(權𥛚) 등이 아뢰기를,
"본원(本院)은 바로 계판(啓板)133) 을 받들고 왕명(王命)을 출납(出納)하는 곳이니, 비록 품계가 높은 공경(公卿)이나 재신(宰臣)이라 하더라도 감히 조의(朝衣)를 벗지 못하는 것이 바로 3백 년의 오랜 규범입니다. 근자에 형조 판서 박문수(朴文秀)는 조의를 벗고 기대어 앉아서 하리(下吏)가 예(例)에 의거해 고하는 데 대해 성을 내었고 심지어는 원리(院吏)의 어머니를 가두어 객기(客氣)를 부려 으러렁거리기까지 했으니 이것은 실로 전에 없던 해괴한 일입니다. 청컨대 박문수를 종중 추고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이종성(李宗城)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설서(說書) 이기언(李箕彦)을 발탁하여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이기언이 등과(登科)한 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4품에 뛰어 올랐으니, 관방(官方)134) 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그 명령을 거두고 교리(校理) 정실(鄭宲)을 장령으로 삼았다.
자정전(資政殿)에서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를 소견(召見)하니, 박문수가 막 함경도 관찰사에서 교체되어 왔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북도(北道)의 일을 물으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함흥(咸興)은 기유년135) 의 수재(水災) 이후부터 냇물의 흐름이 옛 물길을 따르지 않고 범람하여 둑이 터져서, 전야(田野)가 문득 모래와 자갈밭이 되었습니다. 만약 힘을 들여 치수(治水)하지 않는다면 영읍(營邑)이 실로 물에 잠길 염려가 있으니, 마땅히 별도로 차원(差員)을 정하여 서너 고을의 민정(民丁)을 징발[調發]해서 물길을 다스리고 둑을 고쳐 쌓아 효과가 있게 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박문수가 또 말하기를,
"북도의 봉수(烽燧)가 소홀하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각 고을을 엄중히 신칙(申飭)하게 하시고 장교(將校)와 친기위(親騎衛)의 자리를 봉무사(烽武士)로써 뽑아 임명하여 그들이 기꺼이 달려갈 길을 열어 주소서. 그리고 또 남병사(南兵使)·북병사(北兵使)로 하여금 각별히 조관(照管)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박문수가 또 말하기를,
"덕원(德源)과 원산(元山)의 창고에는 저장된 곡식이 많지 않고 또한 곡식을 운반할 선박도 없습니다. 청컨대 도신으로 하여금 원산 창고의 선박과 곡식을 조치(措置)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북도에는 밭[旱田]이 많고 논[水田]이 적은데, 삼수(三水)에 논이 가장 많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김우태(金遇兌)가 귀양가 있을 때에 개간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지금 김우태는 신임 관찰사의 편장[編裨]이 되어 있으니, 마땅히 김우태로 하여금 각 고을의 민전(民田) 이외에 비습한 곳에 나아가 논으로 만들게 한다면 온 도(道)에 마땅히 크게 도움 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도신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였다.
임금이 호서 도신(湖西道臣)의 서원(書院)에 대한 사계(査啓)136) 를 보고, 하교하기를,
"이산(尼山)에 문선왕(文宣王)137) 의 영당(影堂)이 있는 것은 참으로 태산임방(泰山林放)의 비유138) 와 유사하다. 일이 매우 설월(屑越)하니, 영정(影幀)을 향교(鄕校)에 옮겨 모시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보은현(報恩縣)에서 문선왕과 주부자(朱夫子)139) 를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영당(影堂)에 추봉(追奉)한 것은 경중(輕重)이 도치(侄置)되었다. 어떻게 선성(先聖)과 선사(先師)를 강등해서 선정(先正)의 영당(影堂)에 모실 수가 있겠는가? 그 당시의 감사(監司) 김시형(金始炯)은 파직하고, 현감(縣監) 권의형(權義衡)은 나처(拿處)하며, 그 일을 주창했던 윤봉구(尹鳳九)는 삭탈 관직하도록 하라. 그리고 영정(影幀)은 본현(本縣)의 향교에 봉안하고, 위판(位版)은 해당 수령(守令)이 친히 가서 교전(校殿) 뒤의 정결한 땅에 공경히 묻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공홍도(公洪道)의 사장(査狀)을 보니, 세덕사(世德祠)의 일은 매우 해괴한 바가 있다. 이것을 엄중히 징계하지 않는다면 시골에 사는 사대부(士大夫)들이 자기 선조(先祖)에 대해서 어찌 친진(親盡)이 있겠는가?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일체 초록(抄錄)해 올려서 서원(書院)의 관례에 따라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병조 참지(兵曹參知) 조영국(趙榮國)에게 묻기를,
"그대가 새로이 호서(湖西)로부터 왔는데, 그쪽 백성의 일은 어떠한가?"
하니, 조영국이 말하기를,
"호서의 폐원(弊源)은 모두 세 가지 피폐한 데서 나온 것으로써 고을이 피폐하고, 관리가 피폐하고, 백성이 피폐한 것입니다. 고을이 피폐하면 수령(守令)이 법을 범하고, 관리가 피폐하면 촌리(村里)를 침탈하게 되니, 백성이 피폐하게 된 것은 오로지 여기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호서의 백성들이 가장 가련한데, 제일의 실질적인 정치는 수령을 잘 선택하여 그들의 피폐를 소생시키는 데에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장령(掌令) 정실(鄭宲)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2일 갑오
조명교(曺命敎)를 이조 참의로, 조상명(趙尙命)을 대사간으로, 임집(任)·남태혁(南泰赫)을 정언으로, 홍계희(洪啓禧)를 교리로, 김성응(金聖應)을 병조 판서로, 윤동준(尹東浚)을 문학(文學)으로, 신사철(申思喆)을 판의금(判義禁)으로, 홍경보(洪景輔)를 지의금(知義禁)으로 삼았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서 이광덕(李匡德)을 친국(親鞫)하였는데, 국문을 마치고 해남(海南)으로 귀양 보낼 것을 명하였다. 이광덕이 잡혀 온 뒤에 임금이 이광덕에게 묻기를,
"지난번에 이광의(李匡誼)의 행동은 무엄(無嚴)하다고 이를 만하다. 연석(筵席)의 주대(奏對)에서 스스로 도리에 어긋남을 범하였으니, 이 때문에 친히 국문을 한 것이다. 네가 이광의의 형으로서 황송하여 대명(待命)하였으니, 분의(分義)로 봐서는 그렇게 해야 되겠지만 감히 방자하게 소장(疏章)을 올릴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국체(鞫體)에 있어서도 이미 무엄한 데에 관계된다. 가령 네가 풍문으로 들은 바가 있어서 네 아우에게 말하여 이런 괴이한 일을 일으키게 되었다면, 비록 스스로 감당하고자 하더라도 역시 마땅히, ‘이광의가 경솔하게 윗사람을 속인 죄는 그 근본이 바로 신에게서 연유된 것입니다.’라고 한다면 임금에게 바른대로 말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감히 거짓말을 꾸며서 만들어 이광의의 후매(詬罵) 등의 말에 부합되게 하려고 하여 ‘후무 부도(詬誣不道)’, ‘만만흉패(萬萬凶悖)’ 따위의 말을 장주(章奏)에 기록하였으니, 아! 이광의가 연석에서 아뢴 것은 오히려 망솔(妄率)하다고 할 수 있는데, 네가 문자(文字)를 가지고 교묘히 꾸민 것은 또한 경솔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지난번에 이광의를 친국한 것은 그가 그때에 없었던 말을 지어 냈기 때문이었다. 대신(大臣)이 비록 혹시 너에게 말한 것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분의(分義)에 있어 감히 문자에 나타내서는 안 될 것이다. 더구나, 대신(大臣)이 말한 바는 바로 ‘부침(復寢)’이란 두 글자와 두 ‘불(不)’ 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여기에 무슨 근사한 점이 있기에 대신(大臣)이 말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스스로 지어 내서 말하여, 교묘히 꾸며 윗사람을 속이는 것인가? 그 무엄함이 어찌 이광의보다 더한 것이 아니겠는가? 더욱 매우 놀라운 것은 송익휘(宋翼輝)의 일이 있은 뒤로, 그가 두 정승[兩相]을 끌어들이려 한다는 말을 듣고, 혹시나 이광의가 이것을 납공(納供)하여 죄 위에 죄를 더하게 될까 두려워 하며 이에 이광의가 연석에서 아뢴 것과 부합되게 하고자 하여 이런 현란(眩亂)한 계략을 꾸미고 고윤(高允)140) 의 정직한 진술을 본받지 못하였으니, 또한 임금을 기만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단지 이광의를 감싸 준 것만이 아니라 또한 간교하고 참혹한 송익휘를 숨겨 준 것이니, 임금을 기만하고 윗사람을 속임이 모두 도리가 어긋나는 데로 귀결된다. 이것이 진실로 무슨 마음이었는가? 더구나 송익휘의 공초(供招)로써 살펴본다면 ‘이광의의 가율(加律)하라는 요청은 그 형이 권유하여 이루어진 결과이다.’라고 하였으니, 네가 다만 이광의에게 말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또 이어서 권유한 것은 또한 무슨 마음에서 였던가?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끓어오르고 대신(臺臣)이 면전에서 간쟁하므로 그 상소를 가져다 보니, 무엄함이 이미 드러났으니, 관계가 막중하여 친히 국문하지 않을 수 없다. 대신(大臣)이 말하지 않은 말을 만약 네 자신이 지어 낸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그 말을 듣게 된 근원이 있을 터이니, 숨김없이 바른대로 고하라."
하니, 이광덕이 공초하기를,
"신의 죄로 봐서는 벌써 죽었어야 했습니다. 신의 아우 이광의는 사람됨이 그다지 볼 만한 점은 없지만, 그러나 문자(文字)를 조금 잘하고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효성스러웠으며, 일체의 세상 일에 대하여는 두서(頭緖)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염려를 하였습니다. 신(臣)이 교외(郊外)에 물러가 살면서 신의 아우가 간관(諫官)의 직책을 맡았다는 말을 듣고, 편지를 보내서 지난 일을 거론하지 말게 하였습니다. 뒤에 회의(會議)에서 죄를 얻은 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 허둥지둥 달려 들어와 전교(傳敎)를 보고는 절대로 살아 남을 이치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신은 아비가 죽은 뒤에 단지 한명의 아우와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는데, 하루아침에 그가 장차 죽게 됨을 당하자, 실로 합연(溘然)히 먼저 죽고 싶은 심정이 있었습니다. 너무도 슬퍼 어찌 할 줄을 모르는 즈음에 신의 종질(從姪) 이민효(李閔孝)가 늦게서야 신의 아우가 진술할 말을 ‘이러이렇게 하려고 한다’고 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비록 송익휘라 하더라도 반드시 전혀 맹랑한 말을 하는 자는 아닐 것이고 우상(右相)은 이미 신과 말한 것이 있으니, 생각에 신의 아우가 그것을 송익휘에게 전해준 것으로 여겼습니다. 좌상(左相)에 이르러서는 신과 더불어 비록 이미 주고받은 말은 없었으나 말이 이미 송익휘에게서 나왔으니, 생각하기에 송익휘가 혹시 신의 아우에게 언급한 것이 있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김복택(金福澤)의 일이 발생한 뒤에 신이 신의 아우에게 물으니, 신의 아우는 전연 듣지 못했다 하므로 신이 과연 대신(大臣)과 주고받은 말로써 신의 아우에게 언급하였던 것입니다.
신의 아우가 국문에 나아간 뒤에 신이 이런 상소를 올린 것은 눈앞의 재앙을 구원하려 하고 또 그와 더불어 죽고자 하여 다급하게 상소를 올리느라 그날 정신이 황란(慌亂)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무 부도(詬誣不道)’란 조항은 대신(大臣)이 신에게 전해 준 것이 바로 두 ‘불(不)’ 자였는데, 두 불(不) 자가 행용(行用)의 문자(文字)가 된다는 것은 신이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감히 두 조항의 어구(語句)를 임금께 올리는 문자(文字)에 곧바로 쓸 수가 없고 단지 신의 아우의 감률(勘律)로써 ‘무상 부도(誣上不道)’를 삼았기 때문에 상(上)자를 고쳐서 후(詬)자로 만들었습니다. 그 때에 전혀 점검하지 못해서이지, 대신(大臣)을 밀치고 핍박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상(上)자를 피하려 하다보니까 점차 여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신이 귀양갈 때에 대신(大臣)이 상소한 것을 보고 남에게 부탁해서 편지로 대신에게 물어보았는데, 그 편지에 부침(復寢)이란 두 글자는 문자(文字)의 출처와 위아래를 모두 기억하지 못하겠으나 《예기(禮記)》에서 나온 문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예기》에서 나왔다면 그 위에 반드시 대(待) 자가 있어야 하는데, 대(待) 자는 없고 또 건저(建儲)의 위에 있기에 그 의도가 흉참(凶慘)하여, 이로써 국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아 두 불(不) 자로써 감률하기에 이르렀습니다.’고 말하였더니, 대신(大臣)이 편지로 답하기를, ‘두 글자의 위아래는 모두 이해하지 못하겠다. 죄인(罪人)은 《예기》의 ‘부침’이라고 말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그 위에 반드시 대(待) 자가 있어야 하는데도 없고, 또 건저의 위에 있으니, 임금의 생각에 음흉하고 참혹하다고 여겨서 이로써 국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으므로 두 불(不) 자로써 감죄(減罪)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당초에 대신(大臣)이 신에게 말한 것은 두 불(不) 자와 부침(復寢)이란 두 글자에 지나지 않고, 다른 것은 말한 바가 없습니다. 대개 신의 아우가 발계(發啓)한 것은 오로지 이 두 글자 때문이었는데, 임금의 하교(下敎)를 받음에 있어서는 이 두 자가 허공에 떨어진[落空] 뒤였습니다. 창졸(倉卒)하고 황겁(遑怯)한 나머지 이에 이와 같이 갑자기 마련하여 우러러 아룀이 있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계사(啓辭)에 대해 너는 편지를 해서 만류하였다고 하였는데, 송익휘의 공초에, ‘그의 형도 일찍이 권유하여 만들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이광덕이 공초하기를,
"송익휘의 공초가 어떠한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광의가 비록 혼미하고 졸렬하나 반드시 자기의 형이 권유하여 만들게 하였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신은 시골에 있었고 송익휘는 상중[守喪]이어서 한번 조문한 뒤로는 다시 서로 만나지도 못하였는데, 권유하여 만들게 했는지 안했는지를 그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광의의 발계는 대개 연유한 바가 있습니다. 수십 년 전에 신의 부자(父子)가 신축년141) ·임인년142) 무렵을 당하여, 모두 삼사(三司)에 열거(列擧)하면서 일찍이 한번도 발계를 하지 않았고 한 사람도 논죄(論罪)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신의 부자가 집 안에서 서로 말하기를, ‘한 편[一邊]도 진실로 잘못이지만, 한 편 또한 잘못이다. 우리 부자는 다만 입을 막고서 말하지 말고 단지 성명조(聖明朝)에서 저쪽과 이쪽을 모두 성토하는 시기를 기다려, 임금의 마음을 협찬(協贊)하여 천토(天討)를 받들어 행함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수십 년을 끝내 말없이 지내오다가 지난번에 국옥(鞫獄)에서 김복택(金福澤)의 죄를 성토하는 일을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아우는 김복택의 죄를 성토하는 것은 임금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니, 지난날 말했던 ‘협찬·봉행(奉行)’ 등의 말과 서로 부합된다고 생각하여, 발계하려는 뜻을 갖기에 이른 것이고 신도 또한 신의 아우가 발계를 잘못하였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그가 입대(入臺)하였다는 말을 듣고 편지를 써서 만류하였던 것은 단지 이해(利害)의 사사로운 계산에서 나온 것입니다. 단지 신의 아우가 무식(無識)함으로 인하여 대죄[大僇]에 빠지게 되었으니, 다시 무슨 진달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른바, ‘후매(詬罵)’ 등 여덟 글자는 신의 아우가 입대(入對)한 뒤에 일시적인 혀끝의 말로써 경솔하게 우러러 대답하여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공초를 끝마치자 다시 이광덕에게 묻기를,
"네가 아무리 아우를 구원하는데 다급하더라도 임금에게 고하는 말을 거짓으로 꾸며대는 것은 용납치 않을 것이며, 이 일은 관계가 지극히 중대하다. 네가 만약 이광의가 대신(大臣)을 끌어들이려 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가 당장 죽을 죄를 첨가하게 될 것이 염려되었다면 비록 먼저 소장(疏章)을 올리더라도 단지 당연히 말하기를, ‘신의 아우가 남의 권유를 잘못 받아들여 두 정승을 끌어들이려한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대신(大臣)은 원래 서로 대면한 일이 없고, 한 대신은 비록 주고받은 말을 신의 아우에게 전해 준 것이 있으나, 실은 그가 연석(筵席)에서 아뢴 여덟 글자와는 아주 다릅니다. 그는 애초에 부침(復寢)이란 두 글자를 흉악한 말이라고 인식하여 이런 법에 벗어난 계사(啓辭)를 올린 것에 불과한데, 연교(筵敎)가 명백하여 지적(指的)할 수가 없게 되자, 그 구어(句語)를 무겁게 하려고 갑자기 이런 후매(詬罵) 등의 말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임금께서 또 그 말의 뿌리를 캐어 묻자 이에 ‘신이 대신(大臣)에게서 들은 말을 일러 바치려고 하나, 그렇다면 이 말의 뿌리가 신에게로 돌아오고 그는 스스로 장차 기망(欺罔)에 빠져들게 되니, 이렇게 자수(自首)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어찌 임금 섬기기를 정직으로써 하는 도리에 부합되지 않겠는가? 지금에 그렇게 않고서 대신(大臣)이 하지도 않은 말을 부연(敷演)하고 꾸며대어, 은연중에 네 아우의 말과 부합되게 하려고 하여 부질없고 시끄러운 말이 지금껏 그치지 않게 하고 있으니, 실로 매우 해괴한 일이다. 그 사실을 다시 솔직하게 진술하라."
하니, 이광덕이 공초하기를,
"당초에 올린 상소 내용은 창졸한 사이에 이런 생각을 내지 못했으니, 이것은 실로 신의 죄입니다. 신은 이 일을 당함으로부터 어찌 할 바를 몰랐는데, 마침 이민효가, ‘송익휘가 운운(云云)한 바가 있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신은 이 말을 듣고 처음에 놀라워서 과연 상소를 올렸는데, 상소 가운데 ‘망유기극(罔有紀極)’이라는 네 글자는 신이 애당초 부합시키려는 데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 하문(下問)하시면서 신의 상소 가운데 자구(字句)가 고의로 대신(大臣)을 애핍(碍逼)한 것으로 하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신의 마음은 아우를 구원하기에 다급하였는데, 어느 겨를에 대신(大臣)의 애핍 여부에 생각이 미쳤겠습니까? 대저 신의 상소 가운데의 자구는 애초에 굳이 마음을 써서 신의 아우의 공사(供辭)에 맞추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일편(一篇)의 명의(命意)가 오로지 이광의를 위하는 처지에서 나온 것이니, 그 말이 저절로 이와 같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공초를 끝마치자 임금께서 이광덕의 뜻이 아우를 구원하려는 데에 있어서, 정상이 용서해 줄 만한 것이 있다 하여 드디어 귀양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헌부 【집의 이광부(李光溥)이다.】 에서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죄인 이광덕(李匡德)은 죄를 받은 바가 작은 잘못에 비유할 것이 아니니 해남(海南)으로 멀리 귀양 보낸 것은 너무 가벼운 처분입니다. 청컨대 이광덕을 절도(絶島)에 이배(移配)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이미 친히 국문하여 작처(酌處)하였는데, 또 어떻게 형벌을 더한단 말인가?"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과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모두 이름이 국문의 공초에서 나온 것으로써 의리를 이끌어 명령을 기다리니, 임금이 돈유(敦諭)하여 함께 들어올 것을 명하였다.
8도의 유생(儒生) 권궤(權蕢) 등 수천 명이 연명(聯名)으로 상소하여 사원(祠院)을 훼철하지 말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이미 태학(太學)에 하유(下諭)하였으니, 가서 학업을 닦도록 하라."
하였다.
8월 3일 을미
헌부(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기를,
"신이 전하(殿下)를 섬겨온 지 20년 동안 나라를 향한 마음은 하늘과 땅이 밝게 보고 계신데, 이제 갑자기 말의 근원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의심을 당하여 몸과 명예가 상실되고 욕(辱)되어 다시 인류(人類)에 끼일 수가 없습니다."
하니,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8월 4일 병신
우의정 조현명이 또 상소하여 물러나기를 바랬는데, 승지(承旨)를 보내 돈유(敦諭)하였다.
8월 5일 정유
태학생(太學生) 임연(任筵) 등이 상소하여 사원(祠院)을 훼철하지 말기를 청하니, 임금이 ‘칙유(飭諭)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으로써 비답을 내려 책망하였다. 여러 유생들이 권당(捲堂)하니 임금이 대사성(大司成) 윤급(尹汲)이 권유(勸諭)하지 못했다고 견책하여 체직(遞職)시키고, 조명교(曺命敎)로써 대신하였으며, 이어서 다른 유생(儒生)들을 권유하여 들어가게 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과 우의정 조현명(趙顯命)도 명을 받아 함께 들어갔다. 해서(海西)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모맥(牟麥)의 환자곡[還上穀] 3천여 곡(斛)의 아직 봉납(捧納)하지 못한 것을 정지하게 할 것을 명하였다. 또 관동(關東)의 진자(賑資)로써 병조(兵曹)의 목면(木綿) 1백 동(同)과 돈 5천 꿰미를 획송(劃送)하여 진곡(賑穀)을 경기(經紀)하게 할 것을 명하였다. 또 포항(浦項)의 곡식 1만 곡(斛)을 관북(關北)에 운송하여 굶주린 백성을 진휼할 것을 명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이광덕(李匡德)은 참판[亞卿]·대제학 [文衡]으로서 체모(體貌)가 자별(自別)한데, 이제 말의 근원[言根]을 대신(大臣)에게 돌렸다고 하여 국문까지 하여 형제를 모두 귀양보냈으니 아무래도 너무 지나친 듯합니다. 신이 묵묵히 세도(世道)를 관찰해보건대 사람들의 심지(心志)가 안정되지 못하여 매양 기회를 엿보아 갑자기 일어날 염려가 있습니다. 신이 해직(解職)을 요구하는 까닭은 혹시라도 죄려(罪戾)를 면해볼까 해서입니다. 바라건대 전하(殿下)께서는 먼저 성지(聖志)를 결정하시어 신공(臣工)을 격려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의 골수(骨髓)를 씻어낸 후에야 비로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신이 지금 다른 사람에게 의심을 받아서 마음이 손상되었으니, 어떻게 백료(百僚)의 우두머리에 처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전하께서 신에게 화합과 협동의 책임을 맡겨 주시어 시행한 지 10여 년인데, 인심과 세도(世道)는 바람이 불면 풀이 쏠리듯하여 재앙을 일으키려는 마음과 죽일 기회를 엿보는 것이 바로 옛날 그대로입니다. 이광덕이 신의 일 때문에 천 리 먼길에 체포를 당하였으니, 신의 마음이 그 때문에 몹시 아픕니다. 신이 이런 인륜을 상하게 한 죄를 저지르고서 무슨 면목으로 다시 정승의 자리에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번에 영의정의 공평한 마음이 없었다면 이광의(李匡誼)와 송익휘(宋翼輝)는 반드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정익하(鄭益河)는 내가 비록 엄중히 처단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또 붕당(朋黨)의 마음을 실현하려는 자가 있다면 내가 장차 고가(藁街)에 머리를 매달 것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지난번 정희보(鄭熙普)의 상소 가운데, ‘액례(掖隷)가 와서 엿보는 것을 피했다.’라고 말한 것은 그가 어찌 감히 이것을 가지고 임금께 아뢸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단지 원경하(元景夏)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고의적으로 이런 말을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컨대 임금의 노여움을 격발시켜 저들의 죄를 무겁게 하려 한 것입니다. 진실로 정희보 같은 무리를 엄중히 징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뒷 사람을 권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체차(遞差)의 처벌은 너무 관대한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도량이 얕지만 이규채(李奎采)가 귀양갈 적에 어찌 사람을 시켜서 엿보기까지 했겠는가? 정희보는 삭출(削黜)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8월 6일 무술
윤급(尹汲)을 이조 참의로, 형조 판서 박문수(朴文秀)에게 어영 대장(御營大將)을 겸직시켰다. 박문수가 자신은 기폐(起廢)143) 의 몸으로서 함부로 차지할 수 없다 하면서 상소를 올려 병부(兵符)를 들여보냈는데, 임금이 윽박질러 나오게 하고 입시(入侍)하게 하여 친히 주기에 이르렀다.
8월 7일 기해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기자[箕聖]와 주자(朱子)의 사당을 훼철하지 말라고 청하기를,
"사자(士子)들이 제멋대로 사당을 건립하여 금령(禁令)에 어긴 것을 면치 못하였으나, 기자·주자의 사당에 이르러서는 사체(事體)가 절대로 다르니, 결단코 일률적인 관례로 훼철하는 과목(科目)에 포함시킬 수는 없습니다. 아! 천 세대가 앞에 있고 만 세대가 뒤에 있으니, 어찌 일시적인 의견에만 맡겨 위에서 혼자 결단하여 나쁜 줄 알면서도 시행하고서 기분좋게 하는 것처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또 삼가 듣건대 이산(尼山)의 궐리사(闕里祠)에 모신 선성(先聖)의 영정(影幀)도 또한 장차 아울러 철거(撤去)하는 가운데에 포함시키려고 한다 하니, 매우 경악스럽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중지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비록 옳지만, 내가 주장하는 것도 역시 어진 이를 존중함이며 올바른 도리이다."
하였다.
정원 【우승지(右承旨) 어유룡(魚有龍)·좌부승지(左副承旨) 민통수(閔通洙)이다.】 에서 아뢰기를,
"삼가 비지(批旨)를 보건대, 대사성을 개차(改差)하고 다른 유생들을 권유하여 들여보내라는 하교가 있으셨으니, 신 등은 삼가 성명(聖明)을 위하여 이 조치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지난번에 전하께서 관유(館儒)들을 불러들이어 손수 칙교(飭敎)를 써서 은근하고 간절하게 회유(誨諭)하셨으니, 여러 유생들이 어찌 우러러 성상의 뜻을 본받을 줄 모르겠습니까마는, 반드시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선성(先聖)을 위하고 선현(先賢)을 위한 것이라 여겨 힘써 간쟁하여 그칠 줄을 모르니, 이것은 아마도 전하를 인자한 아버지처럼 믿은 데서 나온 것일 것입니다. 본래 죄를 줄 만한 단서가 없으니, 청컨대 삼사(三思)144) 를 더하시어 빨리 그 명령을 중지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8월 8일 경자
형조 좌랑 이길보(李吉輔)를 의금부에 하옥(下獄)시켰다. 처음에 액례(掖隷) 등이 창녀(娼女)를 끼고 음악(音樂)을 베풀어 모여서 술을 마시는 것을 형리(刑吏)가 붙잡자, 액례들이 여럿이서 일어나 두들겨 팼다. 형조 참의(刑曹參議) 임정(任珽)이 액례와 창녀 두 사람을 붙잡아 가두자, 승지 신사건(申思建)이 액례를 위하여 그 형리를 가두고, 임금에게 말하여 임정을 추고(推考)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형조 낭관 이길보(李吉輔)를 도태할 것을 명하자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낭관은 죄가 없으니, 청컨대 잡아다 핵실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에 액례가 교만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니, 비록 사대부(士大夫)일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신사건이 이미 정원에 있으면서 액례를 억제하지 못하고 도리어 형관(刑官)에게 죄주기를 청하였으므로 액례가 이로 말미암아 더욱 제멋대로 행동하였다.
대사간 조상명(趙尙命)이 상소하기를,
"과거 시험이 멀지 않았으니, 각도(各道)의 시험을 담당하는 도사(都事)의 명경(明經)으로써 결과(決科)한 자는 마땅히 그 직임을 체직시켜 조속히 택차(擇差)하게 해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액례(掖隷)의 알소(訐訴)145) 로 인하여 형조의 당상에게 죄주기를 요청한 것은 사체(事體)에 손상됨이 있습니다. 청컨대 해당 승지를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시행하라고 비답을 내렸다.
8월 9일 신축
윤심형(尹心衡)을 사간으로, 허옥(許沃)을 집의로, 정휘량(鄭翬良)과 이제원(李濟遠)을 수찬으로, 홍계희(洪啓禧)를 정언으로, 조관빈(趙觀彬)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또 상소하여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요청하니, 비답을 내려 면유(勉諭)하였다.
8월 10일 임인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11일 계묘
이제원(李濟遠)을 헌납으로, 김한철(金漢喆)을 교리로, 조상경(趙尙絅)을 판의금으로, 신사철(申思喆)을 예조 판서로, 이재(李縡)를 좌참찬으로, 정석오(鄭錫五)를 우참찬으로, 이종백(李宗白)과 임주국(林柱國)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판부사 유척기(兪拓基)·이조 판서 민응수(閔應洙)·어영 대장 박문수(朴文秀)를 파직(罷職)하였으니, 서원(書院)을 사사로이 세울 때의 도백(道伯)으로서 금지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판부사 김흥경(金興慶)도 또한 파직시켰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고(故) 대사헌 권변(權忭)은 문학(文學)이 있고, 또 그가 의리를 인용하여 스스로 그만둔 점은 풍교(風敎)146) 에 도움이 있습니다. 마땅히 그의 아들에게 벼슬을 주어 연시(筵諡)에 참여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문신(文臣)의 제술(製述)에서 연이어 세 차례 장원(壯元)을 차지한 자는 마땅히 가자(加資)하여 권장(勸奬)을 보여야 한다고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그 동안에 세 차례 장원을 차지한 사람을 우직(右職)147) 으로 올려 주도록 하였다.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 구성임(具聖任)이 말하기를,
"훈영(訓營)148) 의 승호군(陞戶軍)이 정배(定配)의 형률을 범한 자로서 생소나무를 몰래 베고, 성(城) 안에다 포(砲)를 쏘아 일부러 작간(作奸)하는 죄를 고의(故意)로 범하는 것 같은 경우는, 청컨대 지금부터 정배하지 말고 군문(軍門)에서 곤장으로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종묘(宗廟)에 관원(官員)이 봉심(奉審)하는 의식을 정하였으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말에 따른 것이었다. 장내(帳內)의 봉심은 2일간 【5일·20일이다.】 으로 하고, 문내(門內)의 봉심은 5일간 【5일·10일·20일·25일·30일이다.】 으로 결정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아뢰기를,
"북도(北道)의 농사는 벌써 큰 흉년으로 결판이 났습니다. 영남(嶺南)의 사군목(射軍木)으로 보리를 사들인 것을 2만 곡(斛)을 한정하여 해가 다가기 전에 들여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북도(北道)와 영남에서는 모두 미처 배를 만들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우선 각진(各鎭)의 병선(兵船)으로써 실어 보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8월 12일 갑진
종묘서(宗廟署)에서 아뢰기를,
"태묘(太廟)의 《의궤속록(儀軌續錄)》을 완성하였으니, 청컨대 날을 가려 모셔 올리소서."
하였다. 대개 예전에 임금의 하교(下敎)로써 사적(事蹟)을 조사해 편집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다.
8월 15일 정미
서종옥(徐宗玉)을 이조 판서로, 유건기(兪健基)와 윤휘정(尹彙貞)을 승지로, 조명택(趙明澤)을 대사간으로, 윤양래(尹陽來)를 형조 판서로, 조관빈(趙觀彬)을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이병상(李秉常)을 지경연(知經筵)으로, 박춘보(朴春普)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재(李縡)를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박필균(朴弼均)을 경기 감사로 삼았다.
사학(四學)의 유생(儒生) 김원좌(金元佐) 등이 상소하여 사원(祠院)을 훼철하지 말기를 청하고, 또 삼사(三司)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배척하니, 비답하기를,
"겨우 태학(太學)에 칙유(勅諭)하였는데, 다시 이것을 감히 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태학의 유생들이 전일에 이미 상소를 올려 권당(捲堂)하였으므로, 사학 유생들이 또 상소를 올린 것이었다.
8월 16일 무신
대사헌 김진상(金鎭商)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대개 김진상이 당(黨)을 하지 않는 것으로 발탁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상소할 적 마다 스스로 변명하고 끝내 나오려 하지 않았다.
8월 17일 기유
교리 김한철(金漢喆)과 수찬 민백상(閔百祥) 등이 사학 유생의 상소 때문에 상소하여 인구(引咎)하고, 유생들의 말에 따라 사원(祠院)을 훼철하지 말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신 등이 명(明)나라의 유사(遺史)를 보니, 천계(天啓)149) 5년(1625)에 천하(天下)의 서원(書院)을 훼철하라는 조서(詔書)를 내렸었습니다. 그 당시에 이 조치는 또한 폐단을 구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다만 그 위망(危亡)을 재촉하였을 뿐이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때 유생(儒生)들이 앞을 다투어 힘써 간쟁하기를 오늘날처럼 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성상께서 북돋아 키우신 공효가 전대(前代)보다 훨씬 뛰어나서, 국가의 원기(元氣)가 그래도 아직 없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청컨대 소각(鎖刻)의 혐의를 구애하지 마시고 빨리 반한(反汗)의 명령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8월 20일 임자
장령 최규대(崔逵泰)가 상소하여 과거의 폐단을 논하고, 중묘조(中廟朝) 기묘년150) 의 고사(故事)에 따라, 별도로 천거과(薦擧科)를 설치하여 거주(擧主)151) 의 법을 거듭 엄중히 하여 사(私)가 공(公)을 이기는 폐단을 막기를 청하니,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서원(書院)의 일에 죄를 얻어 파직된 여러 신하들을 비로소 서용(叙用)할 것을 명하여 다시 조현명(趙顯命)을 우의정으로, 김흥경(金興慶)과 유척기(兪拓基)를 판중추로 삼았다.
서명구(徐命九)를 대사간으로, 원경순(元景淳)을 부교리로, 정휘량(鄭翬良)을 수찬으로, 이제원(李濟遠)을 겸문학(兼文學)으로, 박문수(朴文秀)를 영성군(靈城君)으로, 민응수(閔應洙)를 판윤(判尹)으로, 정우량(鄭羽良)을 좌윤(左尹)으로 삼았다. 고려 충신(高麗忠臣) 길재(吉再)의 시호를 ‘충절(忠節)’로, 증(贈) 영의정(領議政) 황정욱(黃廷彧)의 시호를 ‘문정(文貞)’으로,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의 시호를 ‘문충(文忠)으로, 증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변(權忭)의 시호를 ‘문정(文貞)’으로 내렸다.
8월 22일 갑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향현사(鄕賢祠)·영당(影堂)·정사(精舍)·이사(里社)의 명목(名目)을 교묘하게 만들어, 금령(禁令)을 어기고 창건(刱建)한 자는 한결같이 서원(書院)의 관례에 따라 감률(勘律)할 것을 명하였다.
8월 23일 을묘
송시함(宋時涵)을 장령으로, 이종성(李宗城)을 부제학으로, 홍상한(洪象漢)을 수찬으로 삼았다.
수찬 정휘량(鄭翬良)이 상소하기를,
"북관(北關)의 재황(災荒)152) 은 근래에 없던 바입니다. 그런데 북청 부사(北靑府使) 임익빈(林益彬)은 피로에 지치고 어리석으며 용렬하여 진정(賑政)을 맡길 수 없으니, 마땅히 개차(改差)를 명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월 24일 병진
어떤 별이 북두성(北斗星)의 아래로 흘러갔다.
판부사(判府事) 유척기(兪拓基)가 또 상소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였다. 유척기가 정승에서 파직된 뒤로부터 임금이 여러 번 회오(悔悟)하는 하교를 내리고 애써 부르기를 마지 않았으나, 유척기가 끝내 응하지 않으니, 사관(史官)과 승지(承旨)가 해가 지나도록 서로 버티었다. 이때에 이르러 서원(書院)의 일 때문에 잠시 파직시켰다가 곧바로 서용(叙用)하고 사관(史官)을 보내 불렀다.
8월 25일 정사
안변 부사(安邊府事) 이철보(李喆輔)가 상소하기를,
"본읍(本邑)의 흉황(凶荒)은 다른 읍(邑)에 비해서 더욱 심합니다. 영남(嶺南)과 포항(浦項)의 창고의 곡식을 옮겨서 진휼(賑恤)하게 하소서."
하니,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비국에서 회계(回啓)153) 하기를,
"청컨대 영남의 모맥[牟] 2천 곡(斛)과 포항 창고의 콩[太] 1천 곡(斛)을 옮겨서 획급(劃給)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8월 27일 기미
윤득화(尹得和)를 대사헌으로, 민응수(閔應洙)를 동경연(同經筵)으로, 홍창한(洪昌漢)을 사간으로, 윤식(尹植)을 장령으로, 유우기(兪宇基)를 헌납으로, 김상적(金尙迪)을 지평으로, 어석윤(魚錫胤)과 홍경보(洪鏡輔)를 정언으로 삼았다.
8월 28일 경신
임금이 효릉(孝陵)154) 을 전알(展謁)하였다. 이날 임금이 주정소(晝停所)에 나가서 경기 감사 박필균(朴弼均) 및 도내(道內)의 수령(守令)을 소견(召見)하고 농사의 상황과 백성의 일에 대하여 물었다. 희릉(禧陵)155) 에 이르러 능을 배알하고 봉심(奉審)하기를 의식과 같이 하고서 다음 효릉(孝陵)에 나아가 친제(親祭)를 행하고 제사가 끝나자 재실(齋室)에 나아갔다. 승지(承旨) 박사창(朴師昌)이 아뢰기를,
"인종[仁廟]의 성덕(聖德)은 백왕(百王)에 높이 뛰어납니다. 등극(登極)하신 처음에 유생(儒生) 등이 상소하여 기묘년(1519 중종 14년.) 여러 신하들156) 의 원통함을 펴주기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너희들이 시비(是非)를 논의하는 것은 가하지만 시비를 결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임금의 병세(病勢)가 위급함에 미쳐서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 등의 관작(官爵)을 회복시킬 것을 특명(特命)하였고, 또 현량과(賢良科)를 회복시켰습니다. 승하(昇遐)하시던 날에는 심산 궁곡(深山窮谷)의 부유(婦孺)·노소(老少) 할 것 없이 모두 달려나와 호곡(號哭)하였으니, 즉위(即位)하신 지 1년도 채 안되었지만 덕교(德敎)가 사람에게 스며든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고, 도승지(都承旨) 권적(權𥛚)이 말하기를,
"인종께서는 김인후(金麟厚)를 궁관(宮官)으로 삼아 대우(待遇)가 절이(絶異)하였으며, 을사년157) 이후로 김인후는 벼슬하지 않고 매양 휘일(諱日)158) 을 만나면 번번이 산중(山中)으로 가서 통곡(痛哭)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해마다 7월이 되면[年年七月日] 만산중(萬山中)에 가서 통곡한다.[痛哭萬山中]’는 시(詩)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주서(注書) 이의중(李毅中)이 말하기를,
"본릉(本陵)의 재실 벽(壁) 위에 인종께서 김인후에게 하사한 묵죽(墨竹)의 인본(印本)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보기를 끝마치고 나서 어제시(御製詩) 1절(一絶)을 써서 내리어 아울러 재실 벽 위에 붙였다.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묘소에 이르러 예(禮)를 행하고 말하기를,
"내가 이 묘소에 대하여 특별히 창상(愴傷)한 바가 있다. 당습(黨習)의 연고로 인해서 무신년159) 에 이탄(李坦)160) 의 일이 있게 된 것이다."
하였다. 숭선군(崇善君)의 형제(兄第) 사당에 치제(致祭)하고 그 자손(子孫)에게 식물(食物)을 내려 줄 것을 명하니, 여러 승지(承旨)가 말하기를,
"대계(臺啓)가 바야흐로 노적(孥籍)으로써 청하고 있는데, 그 자손들에게 어찌 식물을 공급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환침(還寢)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8월 29일 신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하전(廈氈)161) 과 부옥(蔀屋)162) 이 현격하기가 하늘과 땅 같다. 그러므로 예전에 밤에 숙위(宿衛)하는 군병(軍兵)을 위문한 성거(盛擧)가 있었다. 상번(上番)한 정병(正兵)이 비록 지척(咫尺)에서 숙위를 하고 있지만 하정(下情)을 어떻게 도달(導達)할 수가 있겠는가? 고례(古例)에 따라 중사(中使)와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민막(民瘼)을 물어보았더니, 그 중에 늙었는데도 부역(夫役)이 면제되지 않은 자가 있고, 한 몸에 중첩된 부역을 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 이미 물어본 뒤에 괄시(恝視)할 수 없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제도(諸道)에 신칙(申飭)하여 나이를 상고하여 면제시키고 중첩된 부역을 면제시키도록 하되, 이밖에 폐단이 있는 것도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개혁하게 하라."
하였다.
부교리 윤득경(尹得敬)이 상소하여 삼성(三聖)163) 의 원우(院宇)를 훼철(毁徹)하라는 분부를 중지할 것을 청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이미 하유(下諭)하였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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