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3권, 영조 17년 1741년 5월

싸라리리 2025. 9. 25.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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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갑자

심성진(沈星鎭)을 대사간으로, 민형수(閔享洙)를 함경도 관찰사로, 어석윤(角錫胤)을 정언으로, 유우기(兪宇基)를 교리로, 심성희(沈聖希)를 경상도 관찰사로, 송익보(宋翼輔)를 공흥도 관찰사로 삼았다.

 

상참을 행하였다.

 

임금이 주강과 석강에 나아갔다. 《오례의(五禮儀)》의 궁전 이름과 교량 이름으로 지금 것과 옛것이 변경된 것은 문형(文衡) 이덕수(李德壽)에게 명하여 수정하도록 하였다.

 

문신(文臣)·무신(武臣)의 전강법(殿講法)을 다시 정하였다. 임금이 문관으로 경전(經傳)을 읽지 않는 것과 무신(武臣)으로 병서(兵書)를 익히지 않는 것을 걱정하여 하교하기를,
"문신(文臣)의 전강(殿講)은 경학(經學)에 밝은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춘추(春秋)》에서 읽기 쉬운 것으로 강독에 응하게 하는데, 이는 바로 책을 읽지 않고 편한 대로 하는 풍습이다. 이 뒤로 강경(講經)은 스스로 원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오경(五經) 가운데 수점(受點)한 것을 가져다 강독에 응하게 하고, 무신(武臣)도 문신의 예에 의거하여 무경(武經)을 강독하게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아뢰기를,
"오경(五經)은 〈범위가〉 넓고도 많아서 겸하여 공부하기 어려움이 있으니, 비록 문관으로 하여금 임강(臨講)하게 하더라도 불통(不通)을 면하는 자가 거의 없어서 도리어 스스로 불통이라고 쓰는 폐단을 열게 되고, 또한 권과(勸課)하는 효과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강독할 경전(經傳)을 미리 사시(四時)에 알맞도록 나누어 정해서 두루 처음부터 복습하게 한다면, 2년이 안되어 오경을 두루 볼 수 있어 실질적인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주역(周易)》의 괘(卦)를 긋는 것을 《시경(詩經)》과 《서경(書經)》 앞에 두게 하고, 《역경(易經)》·《서경》·《시경》·《춘추(春秋)》·《예기(禮記)》를 차례로 정하도록 명하였다. 김재로가 또 아뢰기를,
"무신에게는 이미 빈청강(賓廳講)이 있는데, 또 춘하 추동(春夏秋冬)의 전강(殿講)을 시행하게 한다면 너무 잦으니, 춘추의 중월(仲月)에 시강(試講)하게 하고, 무경책(武經冊)도 윤회(輪回)로 시험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5월 2일 을축

처음으로 한림 권점법(翰林圈點法)을 시행하여 6점을 받은 이의중(李毅中) 등 12인을 뽑고 5점을 받은 신위(申暐) 등 7인을 뽑았다. 처음에 임금이 한림 권점을 행하도록 명하였는데, 별겸춘추 이종적(李宗迪)과 정이검(鄭履儉) 등이 장차 남북(南北) 두 당(黨)을 끌어 올리려 하니, 한림 황경원(廣景源)이 그 불가함을 말하며 서로 버틴 지 오래 되었는데, 얼마 있다가 전지(傳旨)로 사관(史館)에서 권점하는 일을 행하는지 그 여부를 하문하고, 매우 급하게 독촉하고 책망하자, 사관 8원(員)이 드디어 회권(會圈)하였다. 권지(圈紙)를 방 가운데에 두고 황경원부터 차례로 들어가서 주필(朱筆)을 가지고 권점하였다. 황경원이 처음에 김한철(金漢喆)과 7점으로 기준점을 삼기로 약속하여 김한철이 허락하였었는데, 권점을 행함에 이르러 또 민백상(閔百祥)이 7점으로는 기준이 안 된다고 하자, 김한철이 곧 다시 6점으로 기준점을 삼았다. 권점을 받은 자가 19인에 이르렀으며, 권점이 이루어짐에 이르러 김상복(金相福)이 물러나 상소하기를,
"이형만(李衡萬)은 본래 지망(地望)이 부족하고, 김상철(金尙喆)은 사관(史官)의 임무를 관장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자인데도 권점 가운데 참여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생각에 권점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이 만약 끝내 한 마디 말도 없이 함께 신에게 맹서하는 향을 피운다면, 이는 마음을 속이고 하늘을 속이게 되는 것이니, 죄가 이보다 더 클 수가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직접 집행하는 일을 가지고 진달하니 어찌 불가하다고 말하겠는가마는, 그것은 지나친 데 관계된다."
하였다. 며칠 있다가 정이검과 이종적 등이 상소하여 김상복의 상소에 대해 변명하기를,
"결점을 지적하는 의논이 그날 함께 일을 한 사람에게서 발설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진실로 그 뜻에 맞지 않은 것이 있었다면, 어찌 즉석에서 발론해서 이름을 지목하여 드러나게 배척하지 아니하고, 아침에 이미 권점을 완결짓고 저녁에 또 상소하여 자못 사국(史局) 밖의 사람처럼 하였으니, 그 까닭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김상철의 일은 듣건대 김상복이 한원(翰苑)의 선생안(先生案)을 끌어대어 말을 했다고 합니다. 대체로 김상철의 선조 김선여(金善餘)가 임진 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두 번 친상(親喪)을 당했었는데, 3년상을 마치자 사관(史官)의 직임을 도로 주었으니, 관고(官誥)072)                  가 아직도 그 집안에 있습니다. 과연 혹시 털끝만큼이라도 원안(院案)에 달린 주석(註釋)에 근사(近似)하다면, 성조(聖祖)께서 재위하실 때를 당하여 공의(公議)가 크게 행하여졌는데, 어찌 사국(史局)에 죄를 얻은 자에게 사관의 직임을 도로 주었겠으며, 또한 어찌 사관에서부터 한림으로 선발되었을 리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들이 그의 원통함을 대신 호소하니, 매우 일이 많은 데 관계된다. 그대들의 풍습이 어찌 감히 행하여지겠는가?"
하였다. 이조 좌랑 이성중(李成中)도 상소하여 김상철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기를 정이검 등의 말과 같이 하자, 임금이 책망하는 전교를 내려 그 글을 돌려주고, 서로 상소하는 것은 편당의 풍습에 관계된다고 하여 향(香)을 피우는 규정을 없애려고 하였다. 그런데 여러 대신(大臣)들이 우물쭈물하며 가부(可否)를 결정하지 못하자, 단지 향을 피우며 고하는 말을 고치도록 명하였다. 대체로 추천하는 것을 고쳐 권점(圈點)하게 하였으니 적당하지 않은 사람을 추천하는 것은 마땅히 쓸 수 없다는 말이기 때문에 마침내 권점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으로써 고치었다. 그 뒤에 권점하여 선발하는 것은 더욱 가벼워지고 향을 피우는 법도 마침내 폐지되었다.

 

임금이 친히 문신(文臣)의 제술(製述)을 시험하였다. 그리고 시험을 고사(考査)하여 수석을 차지한 사람에게 숙마(熟馬)를 내려주었다.

 

5월 4일 정묘

홍득후(洪得厚)·권상일(權相一)을 장령으로, 서종옥(徐宗玉)을 예조 판서로, 이보혁(李普赫)을 좌윤으로 삼았다.

 

관서(關西)의 이산(理山)과 희천(熙川)에 우박이 내렸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고,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독하였다. 시독관 홍상한(洪象漢)이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법(法)을 삼장(三章)으로 약속한 일로 인해서 아뢰기를,
"삼법사(三法司)에서 금란(禁亂)하는 폐단은 법을 어지럽힌 백성을 금하지 못하고 도리어 횡렴(橫斂)하는 길을 열어 여항(閭巷)이 소란스러운 것이 마치 물이나 불 가운데 있는 듯하니,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개혁해서 폐단을 제거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대(前代)의 제왕(帝王)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구제한 경우는 번저 제후(藩邸諸侯)로 있다가 대통(大統)을 계승(繼承)한 세대에서 많았으니, 그것은 대체로 여항의 병폐와 고통을 익히고 알았기 때문이다. 궁궐이 심원(深遠)하여 지금은 자세히 살필 수 없고 단지 여염 집을 빼앗아 차지하는 폐단만 제거할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살필 겨를이 없다. 대신으로 하여금 절목을 강확(講確)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뒤에 영의정 김재로가 법관(法官)이 집안에 있으면서 출금(出禁)하는 폐단과 금리(禁吏)가 때가 지난 것을 월권하여 잡는 풍습을 거듭 엄격히 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5월 6일 기사

임금이 석강을 행하였다.

 

5월 7일 경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5월 9일 임신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5월 11일 갑술

판중추부사 유척기(兪拓基)가 잇따라 상소하여 의리를 끌어대며 출사하지 않자,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돈독하게 불렀다.

 

임금이 석강을 행하고 윤대관(輪對官)을 인견하였다.

 

조석명(趙錫命)을 대사헌으로, 홍성보(洪聖輔)를 대사간으로, 안상휘(安相徽)를 집의로, 김종태(金宗台)·이봉령(李鳳齡)을 장령으로, 홍창한(洪昌漢)을 사간으로, 채응만(蔡膺萬)을 지평으로, 정기안(鄭基安)·정광운(鄭廣運)을 정언으로, 박춘보(朴春普)·윤득경(尹得敬)을 수찬으로, 이기진(李箕鎭)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5월 13일 병자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5월 14일 정축

오수채(吳遂采)를 승지로, 김상익(金尙翼)을 대사간으로, 홍계유(洪啓裕)를 집의로, 이창수(李昌壽)를 정언으로, 이천보(李天輔)를 교리로, 조명교(曺命敎)를 강화부 유수로 삼았다.

 

5월 15일 무인

임금이 영제(禜祭)073)  를 행하도록 명하였는데 비가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 우의정 조현명(趙顯命) 등이 차자를 올려 간하기를,
"요즈음 항우(恒雨)가 보리를 수확하는 데 방해가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비가 3일 이상 내려야 장마라고 하는데, 아직 3일을 지나도록 흐리고 흙비가 내린 것이 곡식을 병들게 할 정도는 아닙니다. 더구나 지금은 장마철을 당하였으니 이는 정상적이며 재해는 아닙니다. 재해가 아닌데 기도하는 것은 〈하늘을〉 번거롭게 하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하늘과 사람 사이는 매우 엄격하니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영제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5월 17일 경진

관서(關西)와 해서(海西)에 큰 바람이 불고 우박이 내렸는데, 우박의 크기가 박[瓢]만하였으며, 가사(家舍)가 바람에 뽑힌 것이 모두 1백 20여 채나 되었다.

 

5월 18일 신사

교리 이천보(李天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일전에 연중(筵中)에서 서원(書院)에서 향사(享祀)하는 것이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다 하여 갑오년074)   이후에 설립한 것과 배향(配享)하는 것을 모두 철거하도록 하셨습니다. 아! 서원의 설립은 사문(斯文)을 흥기(興起)시키고 인재를 양성하려는 데에서 나왔으니, 그 귀추를 요약하면 국가 교화(敎化)의 근원입니다. 천하의 일은 오래되어 폐단이 없는 경우는 없으니, 서원의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선비들의 추향(趨向)이 뒤섞여 문란한 것과 군정(軍丁)이 도망하여 숨는 것은 모두 그 폐단이 아님이 없으며, 그곳에서 제향하는 이도 반드시 모두 공의(公議)에 합당한 자가 아니니, 폐단을 구제하는 방도는 오직 우리 전하께서 정치와 교화를 다듬고 밝혀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잡아 풍속과 교화를 일으키고, 국가의 기강을 진작시켜 거짓을 없애게 하여 공의에 적합하지 않은 자로 하여금 그 사이에 참여하여 섞일 수 없도록 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로 그 근본을 찾지 아니하고 그 말단(末端)만 바로잡으려 하고 있으니, 비록 나라 안의 서원을 모두 훼철(毁撤)한다 하더라도 신은 아마도 그 이익되는 바가 그 손상된 바를 보충하지 못할 듯합니다.
전하께서는 학문(學問)이 고명(高明)하셔서 백왕(百王) 가운데 뛰어나시고, 유현(儒賢)을 높여서 예우하고 절의(節義)를 표창[表章]한 것이 빛이 나고 기술할 만하니, 무릇 신하로서 누군들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이 일은 선조(先朝) 때 이미 금령(禁令)이 있었으나, 시골의 선비들이 조정에 아뢰지도 않은 채 함부로 금령을 범하여 설립하여 제향한 것이니, 모두 유죄(有罪)를 면할 수 없으므로 일체 법을 적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도덕(道德)이 후세의 사법(師法)이 되고 절의(節義)를 온 나라 사람들이 경모(景慕)하는 자에 대하여 설립하여 제향하는 바가 간혹 갑오년 이후에 있었으므로, 지금 시골 선비들이 한때 금령을 함부로 범한 죄로 인하여 별도로 차사원(差使員)을 정해서 그 사우(祠宇)를 헐고 그 위판(位版)을 묻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지난날 제향하던 곳이 무성한 풀이 자라는 황폐한 빈 터가 되어 버렸으므로, 길을 가던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애달파하고 있는데, 경치가 처량하고 조치가 전도되고 빨랐으니, 이것이 어찌 전하께서 평소 유교를 보위하고 어진 이를 높인 본뜻이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서원을 훼철하게 한 하교는 바로 옛날의 전지를 따른 것인데, 진달한 바의 대체(大體)는 옳다."
하였다.

 

5월 20일 계미

이종성(李宗城)을 대사간으로, 윤동원(尹東源)을 집의로, 채응복(蔡膺福)을 사간으로, 이광의(李匡誼)를 지평으로, 이성중(李成中)을 부수찬으로, 이종적(李宗迪)을 이조 정랑으로, 이덕수(李德壽)를 우참찬으로, 서종급(徐宗伋)을 판윤으로 삼았다.

 

장령 김종태(金宗台)가 상소하기를,
"이언세(李彦世)는 주연(冑筵)의 참하관(參下官) 선발에 적합하지 않으니, 마땅히 개정하도록 명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채응만(蔡膺萬)은 몇 해 전에 당한 바가 어떠하였는데, 상소하여 변명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바쁘게 나와 숙배(肅拜)하였다가, 추후에 상소하여 인피(引避)한 실수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파직하여 염치와 부끄러움을 알도록 힘쓰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을 내려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헌부 【지평 이광의(李匡誼)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장폐(杖斃)한 죄인 김복택(金福澤)의 극도로 흉악한 정상은 서적[載籍]에서도 드물게 알려진 바입니다. 신명(神明)과 사람이 함께 분개하게 여기는 바인데, 왕법[王章]을 시행하기도 전에 곤장을 맞다가 앞질러 죽어버렸으므로, 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오래 되어도 더욱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난역(亂逆)을 알면서도 그치게 할 바가 없으니, 청컨대 장폐한 죄인 김복택에 대하여 빨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수노 적산(收孥籍産)하고 왕법(王法)을 바로잡게 하소서. 그리고 지난번에 섬에 유배한 죄인 김원재(金遠材)에 대하여 국정(鞫庭)에서 참작하여 처리하였는데, 대궐 문을 나가기도 전에 앞질러 형구[枷杻]를 풀고 당직청(堂直廳)으로 부축하여 들어가 죽(粥)을 쑤어 몸을 조리하게 하였으며, 그의 원기가 안정되기를 기다렸다가 그의 집으로 보호하여 되돌려 보내고 끝내 다시 본부(本府)에 들여보내지 않았으니, 옛 법을 무너뜨리고 어지럽힌 것이 이미 극도로 놀랄 만합니다. 김원재를 아끼고 보호하는 것이 또한 평범한 마음이 아니니, 청컨대 당시의 의금부 당상관은 모두 삭탈 관작(削奪官爵)하고, 그날 당직(當直)했던 도사(都事)는 나문(拿問)하여 엄중히 조처하소서.
그리고 작년에 제릉(齊陵)에 거둥하였을 때 공조 참판 김약로(金若魯)가 바야흐로 개성 유수의 직임을 맡아 그의 아우인 승지 김상로(金尙魯)로 하여금 원례(院隷)를 불러다가 직접 음식을 대접하게 하고, 또 행재소(行在所) 안의 액속(掖屬)을 불러다 각기 초립(草笠)을 주면서 친절하게 청탁하여 관할 지역에 들어가서 혹시라도 일이 생기지 않도록 바랐습니다. 종[僕隷]들 사이에서 기구(崎嶇)하게 처신하면서 정고가 아닌 지름길로의 도움을 얻고자 음식물을 보내 주면서 잘 보이기를 구하고 동정을 빌었으니, 그 마음과 행적을 미루어 보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청컨대, 공조 참판 김약로를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그리고 유작(柳綽)이 조상유(趙尙綏)를 논핵한 것은 비록 모두 사실이라고 기필하지는 못하지만, 금오(金吾)에서 회계(回啓)하였을 때 아무 이유 없이 분별하지 않고, 한 번 떠들고는 그대로 덮어 두었습니다. 청컨대, 판의금부사 윤양래(尹陽來)를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광의가 먼저 이 계사(啓辭)를 발론하여 시험해 볼 계책을 삼았는데 윤허하지 않았으므로, 온 조정이 의심하고 두렵게 여기면서도 임금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지 못하였다. 이튿날 이광의가 또 연달아 아뢰었다가 마침내 국문하라는 명을 받았으므로, 장령 정준일(鄭俊一)이 드디어 그 계사를 정지하였다.

 

5월 21일 갑신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헌부(憲府) 【지평(持平) 이광의(李匡誼)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요즈음 한림(翰林) 추천에 대한 폐단은 끝이 없다고 말할 만한데, 성상께서 이 폐단을 엄격하게 혁파하여, 추천하던 것을 고쳐 권점(圈點)하게 함으로써 장차 온 나라의 인재를 공정하게 널리 뽑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문예(文藝)를 시험하여 능력이 없는 자는 스스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재능이 있는 자는 스스로 진출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셨는데, 마치 천지(天地)가 조화(造化)된 것 같아 그 사이에 적막(適莫)이 없도록 하셨으니, 의도는 진실로 아름답고 법은 실로 훌륭합니다. 그래서 중외(中外)에서 바야흐로 눈을 닦고 기대하고 있으니, 지난날 세력이 없는 데서 곤궁함을 당하였거나 어느 당(黨)에도 소속되지 않았거나 억눌리고 막혀서 진출할 수 없었던 자들도 모두 왕성하게 흥기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회권(會圈)에 이르러 옛날대로 하였는데, 이는 본래의 모습으로 세상에서 일컫는 바 두 당(黨) 외에는 참여한 자가 있지 않았으니, 법을 고친 의도가 이에 그칠 따름입니까? 여덟 사람이 함께 권점하여 6점(點)을 기준으로 삼은 데 이르러서는 그들의 마음씀이 공정하지 않았던 흔적을 더욱더 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는 고심(苦心)과 혈성(血誠)으로 기필코 편당을 제거하려 하고 있는데 아래에서는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부라리며 기필코 편당을 수립하려고 하고 있으니, 차라리 군상(君上)을 저버릴지언정 차마 사사로운 편당을 버리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부득이 그 법을 바꾸면 또 다시 그 법을 인연하여 그 사심(私心)을 이루려고 하니, 이는 참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다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묻지 않고 구차스럽게 불러다 시험하고 대충대충 처리한다면, 편당의 세력은 성해지고 방자해져서 더욱 꺼려하는 바가 없어질 것이며, 기강(紀綱)은 폐기되고 무너져 더욱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니, 국가의 일은 힘이 없어져 더욱 어떻게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주장하여 권점한 한림은 모두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고, 다시 본관(本館)으로 하여금 고쳐서 권점하여 공정히 뽑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리지 않고 이어서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오수채(吳遂采)가 전횡(田橫)의 오호도(嗚乎島) 일075)  을 논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 이제묘(夷齊廟)와 제갈묘(諸葛廟)는 모두 산(山) 이름에 따라서 친히 묘호(廟號)를 써 준 것은 충성과 의리의 뜻을 오래도록 느끼게 하려는 까닭에서이다. 지금 듣건대, 오호도는 바로 우리 나라 홍주(洪州) 지방이라고 하니, 그것을 도신으로 하여금 옛날의 자취를 자세히 살피고 묻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북도(北道)의 오국성(五國城)에 휘종(徽宗)·흠종(欽宗)의 무덤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아닌가?"
하니, 오수채가 말하기를,
"백성들이 서로 전하기를 황제총(皇帝塚)이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당시 고려(高麗)에 길을 빌리려고 하였다면, 오국성(五國城)이 북도(北道)에 있었음은 의심할 것이 없다. 이미 황제총이라고 하였으며 또 무덤 모양도 있다고 하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나무하는 일과 짐승 치는 일을 금지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마침내 이광의를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고, 하문하기를,
"김복택(金福澤)이 나를 보려고 한 것은 무슨 일이었는가? 내가 김복택을 국문(鞫問)한 것은 단지 ‘부침(復寢)’ 두 글자 때문이었는데, 뒤에 가서야 부침이 《예기(禮記)》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위에 있는 사람은 비록 더러 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아래에 있는 사람은 의당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김복택의 살점을 먹고 싶어하는 자도 오히려 감히 말하지 못하는데, 네가 논계(論啓)한 것은 어찌 김복택이 나를 추대(推戴)한 때문이라고 여긴 것이 아닌가? 아니면 전달한 자가 잘못한 것인가?"
하니, 이광의가 말하기를,
"신은 단지 천일(天日)을 꾸짖어 욕함이 한정 없었다는 것만 들었습니다, 부침(復寢) 두 글자는 신도 어느 정도의 흉악한 말인지 모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분수는 엄격한데 지금 어떻게 감히 이 일을 다시 논하는가? 그리고 또한 김원재(金遠材)의 일에 대해서 형구[枷]를 풀게 한 것은 특별 전교에서 나왔는데, 금오(金吾)에 무엇이 관계되며, 김약로(金若魯)의 아우가 승정원에 있으면서 술과 음식을 보낸 것이 또한 무엇이 이상한가? 그리고 조상유(趙尙綏)에게 무슨 죄가 있기에 심지어 윤양래(尹陽來)에게까지 언급하는가? 한림(翰林)에 이르러서는 네가 중국의 서길사(庶吉土)076)  처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는가? 한림을 모두 쫓아 버린다면 새로운 권점은 누가 하겠는가? 네가 자진하여 이를 하려고 하는가?"
하니, 이광의가 죽을 죄를 지었다고 거듭 변명하였다. 임금이 이광의의 관직을 체임하도록 명하였는데, 이광의가 빨리 걸어 나가느라 곡배(曲拜)를 하지 않자, 임금이 삭직하도록 명하였다. 참찬관 오수채가 쓸데없는 말로 변명하며 구원하자, 시독관 홍상한(洪象漢)이 오수채를 무엄하다고 말을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가 진실로 잘못하였지마는, 유신(儒臣)도 당습(黨習)을 면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때 임금이 이광의를 국문하여 그 일의 근원을 엄중히 물으려고 마침내 전지를 내려 이광의의 죄를 낱낱이 들어 책망하고, 공경(公卿)과 여러 신하들에게 입시하도록 명하여 헌의(獻議)하게 하였다. 홍상한이 아뢰기를,
"이광의의 직임은 바로 대간(臺諫)입니다. 죄의 경중(輕重)을 논할 것 없이 대신(臺臣)을 국문하는 것은 아마도 아름다운 일이 아닌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내가 황형(皇兄)을 위하는 데에 어찌 한낱 이광의를 아깝게 여기겠는가? 그의 직명을 아깝게 여겼기 때문에 한(漢)나라 조정에서 의논하는 규례를 적용하였다. 이관후(李觀厚)는 형추(刑推)하게 했는데, 유독 이광의만을 애석하게 여기겠는가?"
하였다.

 

5월 22일 을유

이광의(李匡誼)를 국청(鞫廳)에 내리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인하여 목이 메어 흐느끼며 하교(下敎)하기를,
"이른바 소론(少論)이 만약 신축년과 임인년의 일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마음과 뼛골이 오싹할 것인데, 오히려 내가 저 무리들을 용납하여 보호한다고 여겨 심지어 근거 없는 말을 가지고 마침내 이광의와 같은 자를 시켜서 이 일을 하게 했을 뿐이다."
하였는데,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비록 근일의 원을 추문(推問)하려고 하여도 이는 이광의가 그 말을 준엄하게 하여 김복택의 죄를 무겁게 하려는 데 불과할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경들은 나를 어느 지경에 두려고 하는가? 나는 장차 어떤 임금이 되어야 하겠는가? 오늘날 내가 이것을 분변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저승에서 황형을 뵙겠는가?"
하니, 좌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신이 이광의와 비록 가까운 인척(姻戚)이라 하나, 평소 서로 왕래하지 않았습니다. 김복택의 일을 그가 어디를 연유하여 들었겠습니까? 이는 단지 난언(亂言)일 뿐입니다."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이 말하기를,
"김복택을 친히 신문하였을 때의 연설(筵說)은 매우 은밀하게 하였으므로, 다른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이른바 부침(復寢)이란 두 글자와 같은 것은 사람들이 잘못 전한 것이 많으니, 이광의가 반드시 근거 없는 말로써 이렇게 한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정말로 근거 없는 말인데도 그것을 믿는 자는 모두 그들의 편당이다."
하니, 사간 채응복(蔡應福)이 아뢰기를,
"신은 근본을 알지 못하여 비록 감히 우러러 대답할 수는 없지마는, 이광의를 춘방(春坊)에서 보고 그가 괴상한 인물임을 알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복택이 사사로이 알현(謁見)했다고 하는 것은 관계가 어떠한가? 채응복이 단지 인물이 괴상하다는 것으로 이광의를 논하였는데, 너무 부드러운 말이었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내가 김복택을 죽인 것을 후회하여 일찍이 눈물을 흘리며 동조(東朝)께 고하였다. 부침(復寢)이 《예기(禮記)》에 보였는데, 물을 만한 것이 없어서 역모(逆謀)로 처단하였으니, 어찌 측은하고 마음 아프지 않겠는가? 비록 김씨(金氏)를 미워하는 자라 하더라도 만약 성모(聖母)를 생각한다면 어찌 차마 이렇게 하겠는가?"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천일(天日)을 꾸짖어 욕했다고 한 것은 틀림없이 성상을 속이는, 도리에 어긋나는 해석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의 직임은 바로 언관(言官)인데, 해마다 언관을 국문(鞫問)하게 되니, 이것이 어찌 국가의 복이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축년 당시에는 국본(國本)이 이미 정해졌었지만 오히려 감히 이렇게 하지 못했는데, 더구나 임금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뒤이겠는가? 빨리 나라의 형정(刑政)을 바로잡아야 마땅한데, 그 편당에서 구실을 삼는 자는 틀림없이 내가 박살(撲殺)한다고 할 것이다. 정형(正刑)과 국문(鞫問) 두 가지 가운데 경들은 의당 모두 진달하도록 하라."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광의의 의도는 반드시 성상을 무함하고 핍박하려는 것은 아니며, 단지 김복택이 두 불(不) 자를 가지고 경묘(景廟)에게 공손하게 하지 않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가일층 그 말을 준엄히 하려고 한 것입니다. 만약 나라의 형률(刑律)을 바로 시행하여 혹시라도 국문(鞫問)을 가한다면, 그것이 적당할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송인명은 말하기를,
"우리 조정이 3백 년을 내려오면서 일찍이 경솔하게 언관(言官)을 죽이지는 않았는데, 만약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행동한 것으로 이광의를 죄준다면 이광의가 반드시 마음속으로 달갑게 여길 것입니다. 이미 간범(干犯)한 말이 없는데도 말 밖의 뜻을 미루어 넓혀서 그것을 신하가 임금을 범한 것이라 하여 극률(極律)을 시행하는 것은 아마도 성세(聖世)의 일이 아닌 듯합니다."
하고, 조현명은 말하기를,
"성상께서 이미 발설하셨으니, 신자(臣子)로서 마땅히 다시 성토(聲討)하기를 청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광의의 본뜻입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하고, 호조 판서 김시형(金始炯)은 말하기를,
"처분(處分)이 마땅함을 얻은 후에야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으니, 곰곰이 강구하여 조처하심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정석오(鄭錫五)는 말하기를,
"처분은 의당 엄격하고 또 상세하게 해야 합니다."
하고, 판윤 서종급(徐宗伋)은 말하기를,
"형벌은 차례가 있으니, 정형(正形)을 먼저 시행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한 듯합니다."
하고, 강화 유수 조명교(曺命敎)는 말하기를,
"그 정실(情實)을 관찰하여 참작해서 처리함이 적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정실(情實) 두 글자는 확정을 짓지 못하고 당심(黨心)이 있는 것이라 하여 조명교를 파직하도록 명하자, 채응복 또한 부드럽다는 전교를 가지고 인피(引避)하여 체임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아뢴 대로 하도록 명하였다. 수찬 정준일(鄭俊一)이 말하기를,
"이광의는 독립(獨立)하여 들은 것이 적을 뿐이며 실제로 다른 마음은 없으니, 살펴서 조처하심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채응복이 인피(引避)하자 즉시 체임하도록 하셨는데, 너무나 너그럽게 용납하는 뜻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채응복을 대간(臺諫)에서 체임하게 한 전교를 중지하도록 명하고, 이어서 승지 원경하(元景夏)를 불러 하문하자, 원경하가 대답하기를,
"우리 조정에서는 어질고 후덕함으로 간신(諫臣)을 우대(優待)하였는데, 만약 이광의를 국문하여 곤장을 치다가 죽게 되면 전하(殿下)께서는 틀림없이 대신(臺臣)을 죽였다는 이름을 듣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임금이 무함당한 것을 씻지 못하여 이광의를 국문하려는 것이니, 왕부(王府)로 하여금 국수(鞫囚)의 예에 의거하여 엄중히 가두도록 하라. 만약 지연시킨다면 금오랑(金吾郞)에게는 마땅히 역적을 비호한 형률(刑律)을 시행하겠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임금이 무함당한 것을 씻지 못하는 때에 이목(耳目)의 관원이 없을 수 없다."
하고, 교리 홍상한(洪象漢)을 정언으로, 수찬 정준일(鄭俊一)을 장령으로 삼아 모두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정준일이 말하기를,
"진실로 대계(臺啓)를 가지고 대관(臺官)에게 죄를 준다면, 틀림없이 앞으로 성덕(聖德)에 누가 될 것인데, 한 사람의 이광의를 애석하게 여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고, 홍상한이 말하기를,
"이광의가 말한 것이 만약 장전(帳殿)에서 직접 하문하였을 때에 그것을 말했다고 한다면 죄는 한갓 김복택에게만 있는 것이고, 만약 잠저(潛邸)에 사사로이 알현(謁見)하였을 때 그것을 말했다고 한다면 이광의의 죄는 참으로 성상의 하교와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환하게 알도록 유시하지 않는다면 비록 이광의의 모든 무리를 죽인다 하더라도 후세의 의혹을 풀 수 없을 것이며, 만약 처분을 엄정(嚴正)하게 한다면 비록 곧바로 이광의를 용서하더라도 전하에게 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상한의 말이 옳다."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소론(少論)에게 괴상한 논의가 있었기 때문에, 이광의 같은 자가 나타난 것이다. 김복택이 꾸짖고 욕한 바가 한정 없었다고 한 것은 누구에게 말했다고 하던가?"
하였는데, 송인명이 말하기를,
"그의 본 마음은 이와 같지 않았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이 장래에는 반드시 박필몽(朴弼夢)도 그 본 마음이 아니고 다만 정희량(鄭希亮)의 무리에게 속았다고 말할 것이다."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김복택의 죄는 그가 바로 미루고 넓혀서 말하면서도 스스로 그것이 무함하고 핍박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 것이니, 만약 당장 임금을 무함하였다고 말한다면 지나칠 듯합니다."
하였다 김재로 등이 또 극력 구원하니, 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경들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니, 마땅히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가 형(刑)을 집행하고 종묘(宗廟)에 고하겠다. 공자(孔子)가 소정묘(少正卯)077)  를 주참(誅斬)하지 않았는가? 경들의 뜻은 반드시 정희량의 무리와 같은 후에야 비로소 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니, 김재로가 이광의에 대하여 실정이 있고 없음을 관찰하도록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박필몽도 실정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자, 송인명이 말하기를
"비록 박필몽이라 하더라도 역적을 모의하기 전에 죄가 주참(誅斬)하는 데 이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반드시 주참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박필몽의 머리를 일찍 베었더라면 어찌 무신년의 변고(變故)가 있었겠는가?"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언자(言者)를 국문하는 것은 끝내 지나친 듯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만약 이광의를 국문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저승에서 황형(皇兄)을 뵙겠는가? 이광덕(李匡德)의 아우라 하여 경들이 비호하려고 하는가?"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여기에 이르니, 신이 무슨 면목으로 전하를 섬기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하늘을 꾸짖었다는 말을 나는 듣지 못했다. 만약 그것을 듣고서 이광의에게 전달한 자를 잡는다면, 마땅히 오형(五刑)을 갖추어 집행해야만 할 것이다. 대관(大官)이 반나절 동안 조정에서 다투며 한갓 군부(君父)를 피로하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만약 이광의를 애석하게 여겨서라면 어찌 잡아다 가둘 때에 다투지 않았는가?"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신 등은 합문(閤門) 밖에서 바야흐로 계사(啓辭)를 기초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경들이 한 사람의 이광의를 아껴서 나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는가? 내일부터 정전(正殿)을 피하겠다."
하니, 조현명이 먼저 나가 명을 기다리고, 송인명과 김재로 등이 서로 잇따라 물러나갔다. 원경하가 울먹이며 말하기를,
"신은 죽어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괴상하고 놀랄 만한 논의로 추잡한 욕을 많이 당하여 성명(姓名)이 묵삭(墨削)되는 데 이르렀지만, 그래도 감히 물러나지 않았던 것은 다만 몸소 성주(聖主)를 만나 장차 한 세대의 정치를 돕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 이런 과실이 있는데도 바로 잡아 구원할 수 없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청컨대 피전(避殿)하시겠다는 명을 빨리 정지하소서."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가며 나아가 극력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으니, 여러 신하들이 편전(便殿)에서 내려와 관(冠)을 벗고 엎드렸는데, 유독 서종급만 편전에서 내려오지 아니하였다. 여러 신하들에게 모두 편전으로 올라오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조현명이 의금부에서 명을 기다렸는데,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가서 명을 기다리지 말도록 유시하게 하고 피전 하겠다는 전교를 정지하고, 마침내 이광의를 내일 친히 국문하겠다고 명을 내렸다. 물러날 때에 임하여 장령 정준일과 지평 홍상한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처음에 이광의(李匡誼)를 국문하라는 명을 받고 우참찬 이덕수(李德壽)가 상소하기를,
"신은 가만히 이광의는 당연히 죽어야 할 죄가 두 가지 있다고 여깁니다. 이광의가 전하께서 일찍이 대신(臺臣)을 국문한 것을 알면서도 일찍 경계할 줄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임금의 위엄을 범하여 실책을 이루게 하였으니, 그 죄의 첫 번째입니다. 전하의 병원(病源)은 일찍이 화기(火氣)가 치솟는 데 있으므로, 일에 부딛칠 적마다 번번이 발생하여 스스로 버티지 못함을 이광의가 어찌 이를 몰랐겠습니까? 망령되게 임금의 위엄을 범하여 전하로 하여금 조섭(調攝)해야 하는 절차를 잃게 하였으니, 그 죄의 두 번째입니다. 그러나 이 명이 있고부터 비록 길거리의 부녀자나 어린이라 하더라도 두려워하여 도망가서 행동거지를 잃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성세(聖世)의 기상(氣象)이겠습니까?"
하였으나, 답을 내리지 아니하였다.

 

5월 23일 병술

이광덕(李匡德)을 의금부에 회부하였다. 이광덕이 그의 아우 이광의(李匡誼)를 위하여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비망기(備忘記) 가운데 일의 근원을 엄격히 하문하신 전교가 있었음을 읽고서 신의 아우가 입시했을 때에 천일(天日)을 꾸짖어 욕했다는 말로 인하여 전교가 나왔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의 근원은 실제로 신의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체로 몇해 전 김복택이 장폐(杖斃)되었을 때에 신은 시골 집에 엎드려 있었으므로, 까닭이 많은 것을 몰랐었습니다. 도성(都城)에 들어옴에 이르러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마침 신을 보러 왔으므로, 신이 그 죄상(罪狀)을 물었더니, 말하기를, ‘이 일은 조정에서 아주 엄중히 금지하고 있지만, 그대는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있는데, 그 대략을 어찌 모르게 할 수 있겠는가? 김복택의 죄는 도리에 어긋나는 말로 꾸짖고 무함한 것이 많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더욱 아주 흉악하고 참혹한 것이 있었지만, 그 문자(文字)의 출처(出處)도 알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 꾸짖고 욕한 것이 어떤 일인가를 물었더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그 대강만 알면 될 것이다. 그것에 대한 상세한 것은 이미 조정에서 금지하고 있으므로, 내가 말을 전하고 싶지 않다. 다만 성상께서 매우 분통하게 여기는 전교를 가지고 살펴보면, 그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용납하기 어려운 죄를 저질렀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신이 좌의정 송인명(宋寅明)과 인척(姻戚) 관계가 매우 긴밀하여 저절로 전해 들을 길이 있었으므로, 그 말을 들었는데 우의정의 말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신이 형제 사이에서 과연 두 정승의 말을 전한 사실이 있으며, 김복택의 도리에 어긋난 죄는 참으로 한정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성상의 처분이 엄정(嚴正)하고 정당함이 사첩(史牒)에도 드물게 있는 바이고, 장전(帳殿)에서 이미 비밀에 붙인데다가 조정의 법령도 또한 엄중하니, 대신이 아니면 대략을 어떻게 들을 수 있었겠으며, 신이 말을 전하지 않았다면 그가 보잘것 없는 후진(後進)으로서 어떻게 대신의 말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신의 아우가 이 일 때문에 장차 헤아릴 수 없는 주벌을 당하게 되었는데, 신이 말을 전한 사람으로서 유독 왕강(王綱)에서 빠진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승정원에서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그 일이 알려지자, 하교하기를,
"국수(鞫囚)는 사체(事體)가 얼마나 엄중한 것인데, 자신이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 어찌 감히 분소(分疏)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국수를 바야흐로 신문하려는 시기에는 비록 지극히 원통한 일이 있더라도 자식이 감히 아비를 위하여 원통함을 호소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형제(兄弟) 사이이겠는가? 기강(紀綱)에 관계되는 일로서 국가의 체모를 크게 무너뜨렸으니, 이광덕은 먼저 파직한 뒤에 나처(拿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특지(特旨)로 김시형(金始炯)을 발탁하여 판의금부사로, 정우량(鄭羽良)을 동의금부사로 삼고, 마침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이광의(李匡誼)를 친히 국문하였다. 임금이 이광의에게 하문하기를,
"네가 말한 꾸짖어 욕했다는 말이 극도로 흉참한데 그것을 들은 자는 누구이며 그것을 전한 자는 누구인가? 그것을 말한 자가 없으면, 이는 바로 네가 도리에 어긋나는 말로 임금을 무함하는 것이다."
하니, 이광의가 공초(供招)하기를,
"당초에 국옥(鞫獄)이 엄중하고 은밀하여 신이 들어서 알 수는 없었지만, 어떤 사람은 흉언(凶言)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또 부침(復寢)이란 두 글자에 대해서는 끝내 승복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부침이란 두 글자는 이미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닌데, 전하께서 어찌 모르고서 하문하셨겠습니까? 이 밖에 반드시 어떠한 융언(凶言)이 있었기 때문에 끝내 장폐(杖斃)하기에 이른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이는 너의 역심(逆心)이니, 너의 머리를 종가(鍾街)에 매달아야 마땅할 것이다. 부침(復寢)이란 두 글자에 대해서는 내가 처음에는 잘못 알았다가 그것이 《예기(禮記)》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다시 하문하지 않았었다. 네가 이른바, ‘모르고서 물었겠는가?’ 한 것은 임금을 비웃는 의도가 있다."
하니, 이광의가 공초하기를,
"국문에 참여한 좌상과 우상에게 물었더니, 좌상과 우상도 모두 도리에 어긋나는 내용이었다고 말하였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좌상은 애당초 너와 수작한 말이 없었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좌상을 끌어들이는가?"
하니, 이광의가 공초하기를,
"신이 좌상·우상과 서로 대면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좌상과 우상이 신의 형인 이광덕(李匡德)을 찾아와서 서로 수작한 말이 있었으므로, 신이 과연 듣고서 알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상은 너의 형을 찾아 보았지만, 좌상은 너의 형을 만나 보지 않았다고 하는데, 네가 만나 보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속이는 것이다. 우상은 단지 두 불(不)자만 말했다고 하는데, 지금 천일을 꾸짖어 욕했다고 한 것은 우상이 그것을 말하였는가, 그대가 스스로 그것을 지어낸 말인가?"
하니, 이광의가 공초하기를,
"우상은 단지 도리에 어긋난 말이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신이 실제로 미루어 넓혀서 말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복택에게 들은 자가 누구인데, 감히 이런 계사(啓辭)를 올렸는가?"
하니, 이광의가 공초하기를,
"신은 그 이면(裏面)의 일은 분명하게 알지 못합니다. 단지 그를 죽일 만하다고 여겨서 죽인 것이라고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가율(加律)하는 논의를 한 것이니, 신이 이런 계사(啓辭)를 발론한 것은 오로지 흠앙(欽仰)하고 찬양(贊揚)하는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엇을 말하는가?"
하니, 이광의가 공초하기를,
"온 나라의 신민(臣民)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전하께서 그 숨겨진 죄를 들추어 내어 성대하게 죄주셨으니, 이는 실로 성덕(盛德)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기필코 드러내려고 하였으니, 이것이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두 대신이 만약 흉언(凶言)이 한정없었다고 하였다면, 더러 끌어댈 만하지만, 지금은 이미 이런 것도 없는데, 어떻게 두 대신에게 언급하였는가?"
하니, 이광의가 공초하기를,
"성상께서 언근(言根)과 출처(出處)를 하문하셨는데, 비록 우러러 진달하고 싶지만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가 교묘하게 속이는 것을 책망하고 잇따라 언근을 들은 바에 대해 묻자, 이광의가 공초하기를,
"성상께서 김복택이 도리에 어긋난 말을 했다는 것으로 엄중한 처분을 내리셨으나, 신은 망령된 생각에 도리에 어긋났다는 말을 가지고 꾸짖어 욕하였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실로 신이 스스로 지어낸 말이고 전해 들은 말은 아니었습니다."
하니, 마침내 위엄을 베풀어 거듭 추문하여 그로 하여금 임금을 범한 죄를 지만(遲晩)하게 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이광의는 그것이 임금을 범하는 것임을 진실로 알지 못했다 하여 여러 번 추문하였지만 공초는 여전하였다. 임금이 이에 매우 노하여 빨리 형벌을 가하게 하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근거 없는 말로 이를 구원하였다. 원경하(元景夏)가 힘써 아뢰기를,
"그가 비록 괴상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직책이 언관(言官)이니, 이 일은 진실로 성조(聖朝)의 실책이 되는데, 신이 감히 죽음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바로잡고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눈물과 콧물을 번갈아 흘리자 임금이 마침내 형벌을 가하지 않고 단지 위엄을 베풀어 거듭 추문(推問)하도록 하였다. 이광의 또한 임금의 뜻이 끝내 죽이는 데 이르지는 않을 것임을 알고 드디어 무지(無知)하고 무엄(無嚴)하여 스스로 임금을 범한 것으로 돌리고, 지만(遲晩)하여 공초를 바쳤다. 이에 임금이 판의금부사        김시형에게 율문(律文)을 가지고 들어오도록 명하여 난언 범상율(亂言犯上律)을 가지고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임금을 범한 자는 율(律)이 참형(斬刑)에 해당되지만 스스로 임금을 범한 데 돌려서 지만(遲晩)하였으니, 마땅히 참작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전교(傳敎)로써이광의의 죄를 낱낱이 들어 책망하기를,
"국문하지 않고 베었다면 그만이겠지만, 이미 친히 국문하고 고율(考律)하였으니, 율(律)에 의거하여 참작해서 처단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그를 감사(減死)하여 흑산도(黑山島)에 천극(栫棘)하되, 이틀길을 하루에 걸어 발배(發配)하도록 하였다. 처음에 이광의가 발계(發啓)했을 적에 그의 편당 가운데 참여한 것을 알지 못하는 이가 없었지만, 그가 국문을 받음에 이르러서는 대신 이하가 두려워하여 감히 힘을 다해 구원하지 못하였는데, 유독 원경하만이 눈물을 흘리며 구원하여 마침내 이광의로 하여금 사형을 면하게 하였으며, 그의 편당이 연루되어 모조리 처벌을 받지 않은 것도 원경하의 힘이었다. 이날 좌의정        송인명과 우의정        조현명이 이광덕이 상소하여 끌어댄 것으로 인해 모두 금오(金吾)에서 명(命)을 기다리니, 임금이 명을 기다리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송인명 등이 잘못을 자책하는 말을 진달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비록 경알(傾軋)하는 부류라 하더라도 유방 찬적(流放竄謫)하면 또한 죄를 징계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후로 대각(臺閣)에서 한 말에 대해서는 선악(善惡)과 경중(輕重)을 논하지 말고 형벌과 국문은 일체 하지 못하도록 한 후에야 넉넉히 모범을 후대에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신이 이광의를 위해서 말한 것이 아니며, 혹시라도 성덕(聖德)에 누가 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극률(極律)에 대해서는 본래 시행하려 하지 않았었다. 비록 벌레나 파리같은 미물(微物)일지라도 죽이고 싶지 않은데, 더구나 사람이겠는가? 그렇지만 당론(黨論)을 하는 자에 이르러서는 중률(重律)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경이 경계를 진달한 것은 옳다."
하였다.

 

이광덕(李匡德)을 정주(定州)에 귀양보내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이광덕을 삭출(削黜)하도록 명하자, 영의정 김재로가 국체(鞫體)를 엄중하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너무 가볍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되었다.

 

5월 25일 무자

이선행(李善行)을 사간으로, 신수(申𢢝)를 장령으로, 안집(安𠍱)을 지평으로, 이하종(李夏宗)을 정언으로, 김한철(金漢喆)·한억증(韓億增)을 교리로, 윤용(尹容)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이조에서 아뢰기를,
"강화 유수 조명교(曺命敎)가 지금 이미 체파(遞罷)되었습니다. 종전에는 외직으로 나가면서 자급(資級)이 승진된 사람으로 부임하기 전에 체임된 경우에는 으레 자급을 강등시켰지만, 고 판서 김창협(金昌協)은 유수에서 체임된 뒤에 자급을 강등시키지 않고 그대로 형조 참판에 제수하였으며, 고 판서 서문유(徐文𥙿)와 영중추부사 이의현(李宜顯)과 고 부제학 최창대(崔昌大)의 경우에는 모두 자급을 강등시켰으니, 지금은 어느 예를 따라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의 자급을 도로 거두도록 하라."
하였다.

 

간원 【정언 홍상한(洪象漢)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광의(李匡誼)가 무엄(無嚴)하게 임금을 범한 죄는 왕법(王法)으로 용서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흉론(凶論)과 패설(悖說)을 몰래 서로 전수(傳授)한 것과 같은 일은 저절로 내력이 있으니, 이우하(李宇夏)가 앞에서 창도(倡導)하고 이광의가 뒤에서 호응한 것이었습니다. 이우하의 음험하고 참혹한 소어(疏語)와 헤아리기 어려운 조의(造意)는 자못 이광의보다 지나침이 있습니다. 청컨대, 전 헌납 이우하를 먼 섬에 정배(定配)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이광의를 친히 국문하였을 때 문사 낭청(問事郞廳)으로 규피(規避)하여 지방에 있었던 자는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광덕(李匡德)의 소어(疏語)에 신의 입에서 발설하지 않은 부분이 많이 있었는데, 이런 분명치 않은 일을 덮어 쓰고도 천일(天日) 아래에서 스스로 밝힐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조당(朝堂)에 명하여 이광덕의 등철(登徹)하지 않은 소장을 가져다 상고해서 신으로 하여금 조목 별로 분변할 수 있게 하소서."
하고, 송인명(宋寅明) 또한 이광덕의 소장 때문에 차자를 올려 자신의 잘못을 진달하자, 모두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또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이광덕(李匡德)이 상소하여 신을 끌어대어 말한 내용에 이르기를 ‘꾸짖어 무함하여 도리에 어긋난 말이 많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그 가운데 더욱 말의 뜻이 매우 흉패(凶悖)한 것이 있었는데, 문자(文字)의 출처는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어맥(語脈)을 찾아보니 윗 조항은 신의 말 가운데 두 불(不) 자를 가지고 그것을 말한 것이며, 아랫 조항은 신의 말 가운데 불분명(不分明)이라는 세 글자를 가지고 그것을 말한 것인데, 이 밖에는 번거롭게 전하고 싶지 않다는 등의 말은 신의 입에서 발설되지 않은 것이 많았습니다. 신은 이미 사실에 의거하여 말하였는데, 이광덕은 신의 말을 바로 거론하지 않고 반드시 이와 같이 말을 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리고 또 그의 소장 끝 부분에 이르기를, ‘대신이 이미 신에게 전하여 말해 준 것은 지금 일의 근원[根柢]을 국문하는 날을 당하여 다만 신의 아우에게 대면하여 말한 적이 없었던 까닭에 문득 스스로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으니, 신이 이런 상황에서 원통함이 없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의 의도는 대체로 신을 이 옥사(獄事)의 근원으로 삼고 신이 기꺼이 스스로 감당하지 않음을 책망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대저 이광의가 국문받은 것은 바로 ‘천일(天日)을 꾸짖어 욕하는 데 한정이 없었다.[詬天罵日 罔有紀極]’고 한 여덟 글자의 출처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이 이광덕에게 전한 것은 바로 두 불(不) 자와 불분명(不分明)이라는 세 글자로, 국안(鞫案)에 분명히 기재되어 있고, 말의 뜻도 얕고 깊음이 있을 뿐만이 아닌데, 이것을 가지고 뜻밖에 국옥(鞫獄)의 근원을 담당하여 친구의 아우를 위해서 스스로 위태롭고 욕되고 상서롭지 못한 지경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남자도 하지 않을 것이니, 이광덕이 신에게 바라는 바가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아! 이광덕은 바로 신의 질서(姪婿)로서, 어릴적부터 친구가 되었는데, 지금은 이미 늙어 머리가 하얗게 세었습니다. 따라서 언어(言語)로 분변하고 대질하는 것은 실로 차마 못할 바인데, 사사로이 좋아하는 데 끌려서 임금 속이기를 편안하게 여기니, 또한 신하의 의리로는 감히 나와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말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은 진실로 위를 쳐다보거나 아래를 내려다볼 적에 마음속으로 부끄러워 천일(天日) 아래에서 낯을 들 수가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한 번의 차자(箚子)도 지나친데, 더구나 두 차례나 이르는가?"
하였다.

 

5월 28일 신묘

조원명(趙遠命)을 대사헌으로, 정언섭(鄭彦燮)을 승지로 삼았다.

 

5월 29일 임진

부수찬 윤득경(尹得敬)이 상소하기를,
"이광의(李匡誼)가 범(犯)한 바는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대한 것인데 죄인의 친형이 방자하게 상소하여 아우를 위해 분소(分疏)하였으니, 이는 실로 고금(古今)에 없던 일입니다. 그리고 또 대신의 소장을 가지고 살펴보면 그가 대신의 높은 지위와 명망을 빌려 대신이 전하지 아니한 말을 새로 만들어 내어 그 아우의 여덟 글자의 흉언(凶言)에 대조하여 잘 맞도록 하였으니, 이는 그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면 반드시 다른 사람이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입시한 대신(臺臣)들도 또한 분명히 조사해야 한다는 주청이 없었으니, 신은 가만히 매우 한탄스럽게 여깁니다."
하였는데, 소장을 봉입(捧入)하자, 임금이 비답을 내리지 아니하고 이어서 승정원에 신칙하여 이와 같은 소장은 받아들이지 말도록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이 또 이광덕의 소장을 가지고 차자를 올려 스스로 변명하기를,
"신이 지난 겨울 이래로 이미 서로 대면(對面)하지 못하였고, 또한 일찍이 옛사람의 온실(溫室) 나무에 대한 의리078)  에 덧붙여 한 집안 사람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감히 전할 수 없다.[不取得]는 세 글자에 불과하였을 뿐인데, 무엇 때문에 신의 이름을 거론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신에게 들었다.’고는 말하지 않았고, 또 ‘어느 사람으로부터 신에게 들었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신이 아무리 그 일을 맡아서 처리하려고 하더라도 증거를 댈 수 없어서 일의 단서를 알 수 없고, 일의 행방이 위태하기 때문에, 장전(帳殿)에서 드러내어 진달한 것으로는 문득 감히 스스로 마음을 편안히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한 번의 차자도 지나친데, 더구나 두 번이겠는가?"
하였다.

 

5월 30일 계사

관서(關西)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여 죽은 자가 1천 명이나 된다고 도신이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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