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갑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때 이광덕(李匡德)의 소장 때문에 좌상과 우상이 인구(引咎)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자,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이광의(李匡誼)는 관계되는 바가 어떤 것인데, 그의 형이 언근(言根)을 가지고 대신을 끌어들이니 대신이 어떻게 끌려 들어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본 사건은 이미 드러나게 진달하는 과정을 거쳤으니, 돈면(敦勉)을 더하심이 적당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이광의의 계사(啓辭)로써 논핵받은 여러 신하들도 인혐(引嫌)하는 이가 많으니, 우선 체직(遞職)시켜 염우(廉隅)를 펴도록 함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날씨가 흐리고 비가 내린 지 열흘이나 되었으니, 두메 산골의 농사는 틀림없이 흉년이 들 것으로 판단이 되며, 동북(東北)의 지역이 가장 심한 듯합니다. 함경도 관찰사가 장청(狀請)한 내용에 의거하여 영남(嶺南)과 관서(關西)에서도 미리 곡식을 사들이도록 하고 또 공명첩(空名帖)을 발급하여 진자(賑資)를 미리 준비하게 하소서."
하니, 또한 그대로 허락하였다.
6월 2일 을미
권상일(權相一)을 장령으로, 남유용(南有容)을 정언으로, 남태제(南泰齊)를 부교리로, 홍창한(洪昌漢)을 겸 보덕으로, 이병상(李秉常)을 예조 판서로, 조석명(趙錫命)을 형조 참판으로, 신만(申晩)을 병조 참판으로, 이광세(李匡世)를 지의금부사로, 박필균(朴弼均)을 동의금부사로, 조명교(曺命敎)를 이조 참의로, 김시혁(金始㷜)을 강화 유수로 삼았다.
6월 3일 병신
소대를 행하였다.
경상 감사 심성희(沈聖希)가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소견(召見)하였다. 심성희가 아뢰기를,
"갑오년079) 이후에 건립한 서원(書院)과 영당(影堂)을 훼철하라는 성명(成命)이 이미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자 영당(朱子影堂)의 화상(畫像)은 지금 옮겨서 봉안(奉安)할 곳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주자 영당 가운데 금령(禁令)이 있기 전에 창건(創建)한 곳은 함께 봉안하는 것이 좋겠다."
하자, 심성희가 아뢰기를,
"만일 부득이한 경우에는 궤(櫃)를 만들어 화상(畫像)을 간직해서 향교(鄕校)에다 옮겨 봉안하는 것이 적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홍계유(洪啓裕)를 부응교로, 이종적(李宗迪)을 교리로, 유우기(兪宇基)를 부수찬으로, 서종옥(徐宗玉)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6월 4일 정유
김상성(金尙星)을 승지로, 한봉조(韓鳳朝)를 장령으로, 신사건(申思建)·김상적(金尙迪)을 교리로, 조명경(曹命敬)을 수찬으로, 이천보(李天輔)를 부수찬으로, 이종백(李宗白)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관동 안집 어사(關東安集御史) 김상적(金尙迪)이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불러다 진구(賑救)하는 행정 및 수령(守令)의 현명함과 무능함을 하문하자, 김상적이 매우 상세하게 대답하고, 이어서 관동의 삼(蔘)에 대한 폐단을 아뢰기를,
"1년의 공삼(貢蔘)이 합계가 40여 근(斤)인데, 그 값과 잡비(雜費)를 모두 백성들의 전결(田結)에서 내게 하니, 합하면 2만 8천여 냥(兩)입니다. 그 수효를 헤아려 감해 준다면 큰 은혜가 되겠습니다."
하고, 또 양구(楊口)에서 백토(白土)를 파서 번원(燔院)080) 에 바치게 하므로 백성들의 폐단이 매우 많다고 말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6월 5일 무술
주강을 행하였다. 강하기를 마치자 참찬관 조명리(趙明履)가 서원에 대한 일을 가지고 임금에게 아뢰기를,
"지난번에 ‘태산(泰山)이 임방(林放)만 못하겠는가?081) ’ 하는 하교가 있었는데 이는 노(魯)나라 계씨(季氏)가 예의(禮儀)에 어긋난 제사(祭祀)를 지내려 한 것에 대해 말한 것이니, 사자(士子)가 유현(儒賢)을 제사하는 데 이르러서는 그것과 같이 논할 수 없습니다. 금령(禁令)을 무릅쓰고 서원(書院)이나 사원(祠院)을 설치한 것은 진실로 죄가 있으나, 주자 서원(朱子書院)을 이미 설립하였다가 도로 훼철(毁撤)한다면, 미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주자 서원을 금지시키지 않으면 또 당장 공자 서원(孔子書院)이 있어야 할 것이니, 이것이 계씨(季氏)가 태산(泰山)에서 여제(旅祭)를 지내려 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전해지는 폐단은 당연히 막아야 하며, 흔들리거나 고칠 수 없다."
하였다. 이날 또 석강을 행하였는데, 이때 날씨가 매우 더웠다. 참찬관 김상성(金尙星)이 아뢰기를,
"한더위에 두 차례나 강독하는 것은 비록 성인(聖人)의 의지와 기상을 사모하는 것이라 하지만, 어찌 옥체(玉體)에 손상을 끼칠 염려가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의 고사(故事)에 반드시 이른 시각에 강독을 열어 한낮의 더위를 피하였으니, 나도 학문을 부지런히 하신 성의(聖意)를 뒤따라 계승하고 싶지만 승선(承宣)의 말도 옳다. 한추위와 한더위엔 비록 강독을 정지한 전례가 있다고 하더라도 시사(視事)와 아울러 정지하도록 아뢰는 것은 잘못된 데에 관계 된다. 일찍이 선조(先朝)의 실록(實錄)을 상고해 보았더니, 법강(法講)은 비록 정지하더라도 시사(視事)는 폐(廢)하지 않았으니, 승정원으로 하여금 《춘추(春秋)》의 강독을 마친 뒤에 비록 삼복(三伏) 더위를 만나더라도 전례대로 아뢰게 하되, 두 차례 경연(經筵)에서 강독하는 시각 또한 조금 일찍 하거나 조금 늦추어 한낮을 피해서 고사를 준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속오례의(續五禮儀)》를 찬술(撰述)하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먼저 임금이 지사 이덕수(李德壽)에게 명하여 《오례의(五禮儀)》를 수정하도록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덕수가 아뢰기를,
"의묘(懿廟)·문소전(文昭殿)·영성단(靈星壇)이 지금은 없으니 이것은 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 있었던 것을 지금 없앨 경우 주(註)를 다는 것이 적당하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군신(君臣)의 복제(服制)는 바로 역대의 제도를 한결같이 새롭게 한 것인데, 포모(布帽)를 가지고 말하면 후수(後垂)가 있으나 지금은 포각(布角)으로 하니 그 규례가 어떠한가?"
하니, 이덕수가 아뢰기를,
"포모의 후수는 대신이 진달한 것으로 인하여 포각으로 정했는데, 사대부(士大夫)의 연거복(燕居服)082) 은 처음에는 마대(麻帶)로 하다가 뒤에는 포대(布帶)로 하였으니, 당연히 어느 해에 했다는 것을 주로 달았어야 하나, 분명한 증거로 근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시독관 신사건(申思建)이 아뢰기를,
"그 당시 고(故) 찬선(贊善) 이희조(李喜朝)의 상소로 인하여 마대를 포대로 변경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이덕수가 아뢰기를,
"대저 기복(朞服)은 원래 기재된 바가 없으니, 이것은 대체로 왕자(王者)는 방계(旁系)의 기복을 단절했었기 때문에 애당초 편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왕자가 방계의 기복을 단절한다는 방(旁) 자는 바로 국척(國戚)을 가리키는 것이다. 무술년083) 과 무신년084) 의 복제(服制)에 이르러서는 비록 기복이라고 하더라도 바로 국가의 전례(典禮)이므로, 결단코 빠뜨릴 수 없으니, 마땅히 무술년과 무신년의 의주(儀註)를 가지고 기록하여 넣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아뢰기를,
"《증보오례의(增補五禮儀)》라고 책 이름을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속오례의(續五禮儀)》로 책 이름을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6월 9일 임인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민택수(閔宅洙)를 정언으로, 어석윤(魚錫胤)을 문학으로, 이광세(李匡世)를 공조 참판으로, 민통수(閔通洙)를 응교로, 오수채(吳遂采)를 승지로 삼았다.
특별히 효자(孝子) 김귀찬(金貴贊)과 효부(孝婦) 주씨(朱氏)에게 정문(旌門)하도록 명하였다. 김귀찬은 겨우 아홉 살인데 그의 아비가 죽자 시체를 안고 울부짖으니, 3일 만에 죽은 아비가 살아났다. 주씨는 김광벽(金光璧)의 처(妻)인데, 김광벽의 아비가 다른 사람에게 살해당하자, 주씨가 시아비를 위하여 13년 동안 최복(衰服)을 벗지 않다가, 〈시아비를 죽인〉 원수가 장형(杖刑)을 받아 죽게 된 후에야 비로소 최복을 벗었다. 관동 안집 어사(關東安集御史) 김상적(金尙迪)이 아뢰자, 마침내 이런 명을 내렸는데, 또 김귀찬에게 복호(復戶)하도록 명을 내렸다.
판중추부사 유척기(兪拓基)가 죄를 지은 신하라 하여 상소하여 치사(致仕)하기를 원했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6월 10일 계묘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갑오년 이후에 건립한 서원은 이미 모두 훼철하도록 명하시고, 또 영당(影堂)과 생사당(生祠堂) 및 향현사(鄕賢祠)를 구별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는 하교가 있었는데, 이것도 마땅히 갑오년으로 한계를 정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예조 판서 이병상(李秉常)이 아뢰기를,
"주자 서원(朱子書院)을 훼철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으니 마땅히 대신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게 하여 구별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회령(會寧)과 온성(穩城)의 곡식 3백 석(石)을 해마다 북병영(北兵營)에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먼저 북관 어사(北關御史) 조영국(趙榮國)이 아뢰기를,
"북병영과 행영(行營)의 수리(修理)로 여러 고을에 폐단을 끼치니, 청컨대 환곡(還縠) 3천 석을 나누어주고, 모곡(耗縠)을 받아서 수리하는 밑천을 삼게 함으로써 그 폐단을 제거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나누어준 원곡(元縠)을 바치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으므로, 전 북백(北伯) 박문수(朴文秀)가 해마다 전미(田米) 및 모속(牟栗) 각 1백 석을 지급하게 하여 그대로 정식(定式)을 삼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월 11일 갑진
주강을 행하셨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년(近年)에 대관(臺官)이 정국(庭鞫)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록 그 아래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천주(天誅)를 범하게 되는데, 인심(人心)이 이로부터 두려워하여 언로(言路)가 점차 더욱 막히게 될까 매우 두렵습니다. 신은 원하건대, 성상께서 반드시 형묵(刑墨)의 영(令)을 바로잡지 못한 것으로 많은 신하들에게 엄격히 유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지성으로 서로 돕고 흉금을 터놓고 듣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차자로 진달한 것은 벌써 수규(首揆)에게 유시하였다."
하였다.
6월 12일 을사
석강을 행하였다.
유학(幼學) 서종억(徐宗億)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해동(海東)의 한 모퉁이는 비록 주자(朱子)가 지나면서 백성을 감화한 지역은 아니지만 중국이 멸망하고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이 유독 우리 조선에만 남아 있으니, 주(周)나라의 예의(禮儀)가 노(魯)나라에 남아 있고 사문(斯文)이 이곳 〈조선에〉 있다고 말할 만합니다. 그래서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제향하는 것은 그 뜻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어찌 편액(扁額)을 내려준 일이 있고 없음을 따져서 뒤섞어 훼철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날 국사(國史)에 특별히 성상께서 신유년085) 에 주자 원우(朱子院宇)를 훼철하도록 명하였다고 쓴다면, 후세의 사람들이 전하를 어떤 군주(君主)로 여기겠습니까? 옛날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가 맹자(孟子)를 문묘 배향(文廟配享)에서 내치도록 명하였는데, 신하인 전당(錢唐)이 가슴을 열어젖히고 화살을 받으면서 고황제의 청문(聽聞)을 돌리게 하였으니, 만약 오늘날에 전당과 같은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반드시 피를 쏟고 머리를 부수면서 성명(成命)을 거두도록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날 동안 곁에서 들었지만, 아직까지 한 마디 말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관학(館學)의 유생(儒生)은 모범이 되는 곳에 있으면서 당연히 급박한 소리로 진달하여 호소해야 할 것인데, 지금까지 조용하게 있으니, 신 등은 가만히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삼가 원하건대, 빨리 도로 정지하도록 명하시고 여러 사원(祠院)도 유사(有司)로 하여금 그 가부(可否)를 의논하여 모두 훼철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소장을 봉입하자 비답을 내리지 아니하고, 소두(疏頭)에 대하여 햇수를 제한하지 말고 정거(停擧)시키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아뢰기를,
"주자 서원(朱子書院)을 훼철한다면 선비된 자가 서로 거느리고 진달하며 호소하는 것은 바로 사체(事體)가 그러할 따름이니, 깊이 죄주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정거하도록 한 명을 정지하게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 세도(世道)를 안정시키지 못하여 변괴가 뒤섞여 출현하도록 해서 지존(至尊)께서 홀로 근심하게 하였으니, 신의 첫 번째 죄입니다. 처신[行己]이 보잘것없어 이름이 상서롭지 못한 곳에서 나와 조정을 욕되게 함이 끝이 없었으니, 신의 두 번째 죄입니다. 말을 가지고 변명하고 대질함은 비천한 행동으로, 일반 관료의 처지에 있어서도 옳지 못한 일인데 더구나 대신(大臣)이겠으며, 다른 사람의 처지에 있어서도 옳지 못한 일인데 더구나 인친(姻親)의 숙질(叔姪) 사이이겠습니까? 매우 성세(聖世)의 풍속에 누(累)가 되었으니, 신의 세 번째 죄입니다. 더구나 두 사람의 말이 모순되고 사정이 분명하지 않음을 비록 천감(天鑑)으로 환하게 안다 하더라도 한 세상의 의혹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유신(儒臣)이 이광덕(李匡德)을 논한 것은 아직도 완결되지 않는 죄안(罪案)에 속해 있으니, 신이 대죄(待罪)하여 감단(勘斷)하기를 기다리지 않는 날이 없는데, 어떻게 감히 여러 사람이 쳐다보는 정승의 지위에서 잘난 척 얼굴을 쳐들고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6월 13일 병오
민통수(閔通洙)를 승지로, 홍창한(洪昌漢)을 부응교로, 김한철(金漢喆)·이명곤(李命坤)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주강을 행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입시하였다. 송인명이 스스로 이광의(李匡誼)를 변명하고 구원한 실수를 진달하면서 죽을 죄를 지었다고 거듭 말하니, 임금이 위유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이광덕(李匡德)의 상소 내용은 우상(右相)이 전일에 아뢴 것과 다름이 있으며, 심사(心事)를 스스로 분명하지 않은 데로 돌리면서 매우 두렵다고 말하였으니, 만약 재촉을 더하였다면 마땅히 명을 받들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이광덕을 추문(推問)하였다면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였다. 이날 석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을 소견(召見)하니, 조현명이 스스로 심적이 분명하지 않음과 실정과 처지가 편안하지 못함을 진달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광덕의 소장을 가져다 보는 것이 옳겠는가?"
하자, 조현명이 아뢰기를,
"신의 본뜻은 조당(朝堂)에서 그것을 보고 변명할 수 있게 할 것을 청한 것이며, 성상께서 가져다 보시는 것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광덕을 잡아다 추문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였는데, 조현명이 아뢰기를,
"이광덕을 만약 잡아다 추문한다면 변명할 길은 있을 것이나, 성상께서 이미 추문하지 않으려고 하셨으니, 신이 비록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다시 혐의스럽게 여기겠습니까? 신이 벌써 불행하게도 스스로 임금에게 보고하기를 사실대로 하지 아니한 죄과(罪科)로 돌아갔기 때문에 상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과 이광덕은 의리에 있어서는 숙질(叔姪)을 겸하였고, 정의에 있어서는 친구이니, 서로 변명하고 대질함은 풍속과 교화에 관계가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은 그렇지가 않다. 옛날 주계군(朱溪君)은 나라를 위하여 그의 아저씨를 고발하였으니086) 경을 뒤섞어서 몰아붙이려는 것이 아니다. 이광덕이 반드시 경에게 듣고서 지나치게 전파한 것인 듯하다."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일의 상황이 그렇지 않음이 있으니 신이 조용한 때를 기다려 진달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은 조용하니 경이 진달할 수가 있다. 군신(君臣) 사이에 어찌 숨기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임금이 이미 이광의를 귀양 보내고 노여움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었는데, 이광덕이 상소하여 조현명을 끌어들인 것이 또 명백하였으므로, 임금이 조현명이 실제로 말을 전한 것이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하여 마침내 그에게 다그쳐 물었던 것이다. 이에 조현명이 황공하게 여겨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이 지난 달에 이광의를 변명하고 구원한 일로 인하여 엄중한 하교를 받고 대궐 밖에서 명(命)을 기다리는데, 신의 조카 조재호(趙載浩)가 신을 보려고 오다가 길에서 이광의의 아우 이광문(李匡文)·이광회(李匡會)와 조카 이민효(李閔孝) 등을 만나 명을 기다리는 곳에서 위문(慰問)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민효가 말하기를, ‘나의 숙부가 국문을 당하여 놀라고 두려워하는 때에 송익휘(宋翼輝)가 이광문을 불러서 보고 말하기를, 「연석(筵席)에서 아뢴 여덟 글자가 이미 망발(妄發)한 것이라면 언근(言根)을 귀속(歸屬)시킬 데가 없지만, 만약 대신에게 귀속시키면 중망(重望)을 의뢰하여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고 하므로, 이광문이 마침내 그 말을 가지고 이광의에게 진달하여 그로 하여금 이것으로 공초(供招)를 바치도록 하였다.’라고 하자, 신의 조카가 말하기를, ‘이것은 틀림없이 죽게 하는 방도이다. 이광의가 처음에 대신과 서로 대면(對面)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이 일의 거짓과 진실은 마땅히 그 자리에서 판명될 것이다.’ 하니 그 무리들이 비로소 깨닫고 가슴을 치며 울던 즈음에 이광덕이 성밖에서 오다가 송익휘가 획책(畫策)한 것이 그릇되었음을 듣고 또한 그의 아우가 반드시 사형될 것을 알고서 곧바로 말하기를, ‘내가 대신에게 대략 들은 것이 있으니, 대신이 비록 옥사(獄事)의 실정을 숨기지 않은 실수가 있다 하더라도 내가 만약 스스로 감당한다면 내 아우의 죽음을 늦출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는 데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니 신이 전한 두어 귀절의 말은 언근(言根)이라고 할 수 없으며, 이광덕으로 하여금 이렇게 하도록 한 것은 송익휘가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교유(敎諭)하고 무함하여 끌어댄 정절을 깨뜨린다면, 이광덕의 소장이 연유하여 나오게 된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며, 그 말이 어긋나는 것은 신이 분변하여 드러내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명백해질 것입니다. "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과연 어렵다. 내가 지난번에 송익휘(宋翼輝)에게 중곤(重棍)을 쓰게 한 것은 강자(强者)를 억누르려는 것이었는데, 그가 이런 일을 했을 것이라 어떻게 헤아렸겠는가? 이광의가 처음에는 대신에게 직접 들었다고 말하였다가, 나중에는 다시 다그쳐 추문하였을 때에 머뭇거린 것은 그의 정직하지 못한 것이 심한 편인데 그 근본을 캐어 보면 바로 송익휘 때문이다."
하였다.
6월 14일 정미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송익휘(宋翼輝) 등을 국문하여 언근(言根)을 밝히려고 하였지만, 그래도 송익휘는 송인명(宋寅明)의 당질(堂姪)이 되고, 조재호(趙載浩)는 조현명(趙顯命)의 종자(從子)가 된다 하여 마음속으로 어렵게 여기고는 두 사람을 나국(拿鞫)하는 선후(先後)를 묻자,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조재호와 이광문(李匡文)을 먼저 추문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광문을 먼저 추문하였다가 만약 거짓으로 핑계를 대면 조재호를 다시 추문하는 것이 옳겠다."
하고, 마침내 이광문을 먼저 잡아다 국문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우상이 제시한 바를 보았더니, 조재호(趙載浩)가 길가에서 수작(酬酌)했던 사람은 바로 이민효(李閔孝)이고, 이광문(李匡文)은 이민효가 말을 할 때에 또한 곁에서 함께 들었다고 하였는데, 만약 언근(言根)의 계제를 논한다면 이광문이 아니고 바로 이민효입니다. 어제 연석(筵席)에서 우상이 진달한 것도 바로 이와 같다고 하였으니, 신은 이민효를 빨리 나문(拿問)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민효를 똑같이 국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광문과 이민효 등을 이미 옥(獄)에 가두고 의금부에서 먼저 이광문을 신문하니, 이광문이 공초(供招)하기를,
"신의 형 이광의(李匡誼)가 준엄한 전지(傳旨)를 받고 대궐 밖에서 명을 기다리자, 온 문중(門中)에서 놀라 두려워하였는데, 한 집안과 친구로서 누군들 그를 위하여 대신 두려워하지 않겠으며, 서로 상대하여 논의하는 말을 누군들 그를 위하여 서로 의논하지 않겠습니까? 송익휘(宋翼輝)는 친구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의 집안이 두 대신의 집안과 연인(連姻)하여 친절(親切)한 실상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것이므로, 두 대신을 끌어들여 혹시라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있기를 바란 까닭에 말한 것이 이와 같았지만, 어찌 극력 권면한 일이야 있겠습니까? 그 당시 형제의 마음으로는 기필코 좋은 말로 우러러 대답하여 살아서 옥문(獄門)을 나오게 하려고 하였으므로, 서로 상대하여 논의하는 말을 의논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송익휘가 대신을 끌어들이라는 말도 그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며, 신의 형도 그 말을 듣고서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했을 뿐입니다."
하였는데, 의금부에서 그 공사(供辭)를 올리고 이어서 송익휘를 나국(拿鞫)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이민효를 신문하자, 이민효가 공초하기를,
"신이 종숙부(從叔父) 이광의가 명을 기다리는 곳에 있었는데, 송익휘의 하인이 신의 종숙인 이광문을 맞이하여 가려 하자, 이광문은 차마 화고(禍故) 가운데에서 잠시라도 떠나지 못하고, 신에게 대신 가도록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가서 송익휘를 만나 보았더니, 송익휘가 말하기를, ‘언근(言根)은 이미 확실하게 지적한 것이 없으니, 옥에 갇힌 뒤의 공사에서 만약 두 대신이 가까운 인척(姻戚)이 되기 때문에 그 말을 대략 들었다고 한다면 좋겠다.’고 하므로, 신이 과연 이광의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재호(趙載浩)에 이르러서는 신의 종숙부를 보러 왔다가 공사에 관한 일로 수작하였는데, 신이 송익휘에게 들은 것을 조재호에게 전하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송익휘를 신문하자, 송익휘가 공초하기를,
"신은 이광의와 대대로 사귄 교분이 있으며, 또 젊어서부터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며칠 전 준엄한 전지가 내린 뒤에 하인을 시켜 이광문을 맞이하여 오게 하였더니, 이광문은 오지 않고 이민효가 왔으므로, 먼저 조처할 수가 없다는 뜻을 말한 뒤에 또 말하기를, ‘국정(鞫庭)의 공사에 대답할 것이 없다고 하므로, 신이 과연 이광의의 말을 가지고 크게 망발(妄發)한 것이라고 여겨 망발한 것으로써 자복(自服)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약 전교(傳敎)의 내용과 같이 언근을 캐어 묻는다면 형세를 보아 대신에게 들었다는 것으로 대답하되, 만약 곧바로 대신에게 들었다고 하면, 대신에게 아마도 구애와 핍박이 있을 듯하니, 대신과 가까운 인척(姻戚)이기 때문에 이리저리 들을 수 있는 길이 없지 않다고 그말을 은미하게 둘러댄다면 무방할 듯하니, 돌아가서 이광의와 충분히 상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김복택(金福澤)이 장폐(杖斃)한 뒤에 국옥(鞫獄)에 대한 이야기는 신이 당숙부(堂叔父)인 송인명(宋寅明)과 비록 가까운 친척이라 하나, 또한 성상의 하교가 준엄했기 때문에 감히 신에게 전하지 못했습니다. 신이 들을 수 없었던 것을 이광의가 신을 보고서 그 한두 가지를 대략이나마 전해 주었기 때문에 신이 그것을 해괴하게 여겨 물었더니, 우상이 그의 형을 보고서 대략 전해 주었다는 것으로 대답하고, 그는 그의 형으로 인해서 들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그런 말을 들었었기 때문에 이민효와 수작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좌상이란 두 글자에 이르러서는 애당초 일찍이 신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으니, 어찌 혹시라도 이민효가 허둥대는 가운데 신이 대신을 끌어댄 말을 듣고 의심하여 말을 뒤집어 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풍병(風病)이 들어 본성(本性)을 잃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차마 친구를 위해서 가까운 친척을 끌어댔겠으며, 바로 당초에 듣지 못한 그에게 아울러 끌어대도록 권하였겠습니까?"
하였다. 여러 공초(供招)가 들어간 뒤에 임금이 승지 민통수(閔通洙) 등을 불러 하교하기를,
"송익휘가 대신을 끌어대도록 가르치고 이광의가 이로 인하여 살아났다면, 이는 바로 송익휘가 중간에서 스스로 편한 데에 따르고자 하는 계책인 것이다. 일반 사람의 마음으로는 비록 살옥(殺獄)이라 하더라도 들어가서 보려고 하지 않는데, 더구나 국수(鞫囚)이겠는가? 송익휘가 이 사건과 관계가 없는 사람으로 자신이 초토(草土)087) 에 있으면서 공공연히 하인을 시켜 맞이해 지시하고 가르쳤으니, 이것이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더욱이 한 사람의 대신을 무함하여 끌어댄 것도 율(律)을 적용하기에 충분한데, 만약 전한 것이 없다고 한다면, 또한 무엇 때문에 그의 당숙(堂叔)을 끌어들이도록 가르쳤겠는가? 내가 친히 송익휘를 신문하고자 한다."
하자, 민통수가 말하기를,
"이러한 일은 깊이 조사하여 엄중히 처단한 후에야 세도(世道)를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기고 마침내 내일 친히 국문(鞫問)한다는 명을 내렸다가, 마침 비바람으로 인하여 다시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 판의금부사 김시형(金始炯) 등이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왕부(王府)에서 신문(訊問)하여도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을 것인데, 어찌 반드시 친림(親臨)하셔야 하겠습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6월 15일 무신
조석명(趙錫命)을 대사헌으로, 안상휘(安相徽)를 집의로, 이징하(李徵夏)·이제담(李齊聃)을 장령으로, 홍계유(洪啓裕)를 사간으로, 김종태(金宗台)를 헌납으로, 성범석(成範錫)을 지평으로, 정기안(鄭基安)을 정언으로, 정실(鄭宲)을 교리로 삼았다.
6월 16일 기유
원주(原州)에 큰물이 져서 떠내려 간 민가(民家)가 모두 1백여 호(戶)나 되었으므로,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어찌 감히 죄수(罪囚)의 가까운 친척으로 국문하는 일을 바야흐로 베풀려는 때에 갑자기 소장을 올렸겠으며, 사건이 죄수와 관계되지 않는데 자신이 혼자서 그 지극히 원통함을 부담하게 된다면 또한 어떻게 감히 드러내어 진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성교(聖敎)에 신이 지난날 인죄(引罪)한 말을 거론하여 송익휘를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것으로 결단하셨다고 하는데, 이는 자못 천일(天日)의 밝음으로도 간혹 비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날의 죄명(罪名)은 허실(虛實)을 논할 것 없이 전적으로 신 등을 무함하여 끌어댄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이미 가까운 친척이 되었으니, 그 죄를 변명하면서 스스로 인책(引責)하는 상소에서 가르치고 인도함이 본래 없었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말이 뜻을 통달하지 못해서 스스로 서로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죄과(罪科)로 돌아가게 됨을 면하지 못하여 신이 여기에서 차마 골육지친(骨肉之親)을 서로 해치는 죄인이 되었으니, 위를 쳐다보거나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부끄럽고 슬퍼져서 감히 스스로 인류(人類)에 낄 수가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송익휘의 교활하고 악독함이 경(卿)에게 무슨 누(累)가 되겠는가? 지난번의 하교에서 대체로 송익휘를 이와 같이 무상(無狀)하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비록 좌규(左揆)088) 라 하더라도 감히 서로 구원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어찌 서로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으로 경을 의심할 리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송익휘(宋翼輝)·이민효(李閔孝)·이광문(李匡文) 등을 친히 국문하였다. 이광의(李匡誼)의 임금을 범한 언근(言根)을 가지고 송익휘에게 신문하자, 송익휘가 공초(供招)하기를,
"이광의가 두 글자를 가지고 와서 전하였을 적에 신은 김복택(金福澤)은 극도로 흉악한 사람인 듯하다고 말하였습니다. 끌어댄 말에 이르러서는 신이 어찌 차마 당숙(堂叔)을 끌어대어 터무니없이 속이겠습니까? 이민효의 이른바, ‘두 대신(大臣)’이라고 한 것은 신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이광의가 연석(筵席)에서 아뢴 여덟 글자는 신이 전후(前後)에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민효에게 신문하자, 이민효가 공초하기를,
"송익휘가 신에게 말하기를, ‘두 대신이 모두 연인(連姻)한 사람들이니, 끌어대어도 좋겠다.’고 하였었는데, 지금 송익휘가 스스로 두 대신을 거론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로 교묘하게 속이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민효와 송익휘를 면질(面質)시키도록 명하였다. 송익휘가 말하기를,
"네가 찾아왔을 때에 내가 이광의가 진달한 여덟 글자를 가지고, ‘대단한 망발(妄發)이다. 그날의 일을 아는 사람은 세 대신과 승지 원경하(元景夏)뿐이었으니,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말해야 좋겠는가?’라고 하였다."
하자, 이민효가 말하기를,
"‘두 대신[兩大臣]’이란 두[兩] 자를 내가 어찌 분명하게 듣지 못하였겠는가?"
하므로, 송익휘가 말하기를,
"‘두 대신’이란 말은 무엇 때문에 발설하였다는 것인가?"
하였는데, 이민효가 말하기를,
"‘두 대신을 끌어대라.’는 말이 정녕(丁寧)할 뿐만 아니라, 내가 그날 좌상을 보고 말하기를, ‘네가 두 대신을 끌어대라는 말을 하였다.’고 하였더니 좌상이 크게 놀라며, ‘큰 일이 생겼다.’고 말하였으며, 그날 밤에 송익보(宋翼輔)도 가서 좌상을 보았다고 하였으니, 좌상이 반드시 그 일을 송익보에게 말하였을 것이고, 송익보도 틀림없이 또 너에게 전하였을 것이다. 두 대신이란 두 자가 만약 그대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네가 놀라고 동요함이 어떠하였는데, 네가 나를 힐난하고 책망하기 위해 어찌 시각을 기다렸겠는가? 그리고, ‘꾸짖어 욕했다. [詬罵]’는 두 글자도 그대가 역시, ‘어찌 「차마 듣지 못하겠다.」는 것으로 말을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
하니, 송익휘가 말이 막혔다. 임금이 이민효가 면질하면서 명백하였다 하여 먼저 형구[枷]를 풀어 주게 하고, 특별히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또 이광문을 신문하니, 이광문의 공초가 전과 같았으므로, 마침내 송익휘를 형신(刑訊)하여, ‘차마 듣지 못하겠다.[不忍聞]’는 세 글자를 무슨 의도에서 지어냈는가를 묻고, 차례를 따라 형벌을 실시하니, 송익휘가 공초하기를,
"이번에 이광의의 사건이 터진 뒤로 과연 두 대신을 끌어들일 뜻으로 그에게 권하였습니다. 그리고 ‘차마 듣지 못하겠다.[不忍聞]’는 세 글자는 애당초 신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도리에 어긋난다.[不道]’는 두 글자는 신이 과연 두 불(不) 자를 ‘도리에 어긋난다.[不道]’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신문하기를,
"네가 ‘차마 듣지 못하겠다.[不忍聞]’는 것을 ‘도리에 어긋난다.[不道]’는 것으로 돌리고 있으나, ‘도리에 어긋난다.[不道]’는 글자라 하더라도 대신이 말하지 않은 것을 네가 감히 지어낼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당습(黨習)으로 먼저 지만(遲晩)하였는가?"
하였는데, 송익휘가 승복하지 아니하니, 임금이 곧바로 정법(正法)하려고 여러 신하들에게 묻자, 모두가 갑자기 죽이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하므로, 임금도 옳게 여기었다. 마침내 형신을 가하도록 명하고, 또 하교하기를,
"송익휘가 친우(親友)에게 권하여 거짓을 꾸며 임금을 속인 것이 어찌 옛날의 고윤(高允)089) 에게 부끄럽지 않겠는가? 이광의의 사건은 당습(黨習)에서 나온 것이며, 송익휘는 그중에 가장 심한 자이다. 그의 공초에서 이른바, 세 대신과 원경하(元景夏)만이 그날의 일을 유독 들었다.’고 말한 것은 그가 틀림없이 편당에 느슨한 자에 대하여 윗사람의 명령 따르기를 힘쓰도록 한 것이며, 그가 ‘공사(供辭)를 가지고 여러 곳에다 널리 의논하였다.’고 한 것은 반드시 집안에서 떠벌리면서 조정의 득실(得失)을 망령되게 의논한 것이 없지 않으니, 송익휘의 마음이 어찌 당심(黨心)에 말미암지 않았겠는가?"
하자, 승지 김상성(金尙星)이 아뢰기를,
"집안에서 떠벌렸다는 하교는 바로 성상께서 뭇 신하들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천하(天下)에 부모(父母)를 옳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으니, 만약 옳게 여기지 않는 마음이 있다면 이는 신하로서의 분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광의가 법에 벗어나게 논계(論啓)한 것은 이미 극도로 놀랍고 망령스러우며, 송익휘가 임금을 속이고 정직하지 않은 것은 그 죄를 결단할 만합니다. 대저 군신(君臣)은 삼강(三綱)에 들어가며 붕우(朋友)는 오륜(五倫)에 들어가는데, 처음에는 이미 붕우에게 권하여 거짓을 꾸미고, 마침내 또 군부(君父)를 속이면서 공초(供招)를 바쳤으니 인정과 법으로 참작하여 헤아리면 임금을 속인 죄로 처단함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뭇 신하들을 의심하여 서로 비난한다는 하교에 이르러서는 비유하건대, 부모가 여러 자식들을 둔 것과 같은데, 한 자식이 비록 혹시라도 무상(無狀)하다 하더라도 여러 자식들을 모두 의심한다면, 여러 자식들의 마음이 은연중에 아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이미 마음속에 품은 것이 있어 감히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의 말이 옳다."
하고, 송익휘를 왕부(王府)에 내렸다. 송익휘가 형장(刑杖)을 맞을 때를 당하여 승지(承旨) 민정(閔珽)이 차마 보지 못하고, 반열(班列)에서 벗어나 나아가 아뢰기를,
"이광의의 죄에 대해서도 전하께서는 오히려 형장을 시행하지 않으셨는데, 지금 송익휘에게만 유독 엄중한 형장을 받게 하시니, 형정(刑政)이 뒤섞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광의는 송익휘와 죄가 동일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형장(刑杖)을 시행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형장을 시행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의도한 바가 없이 한 것과 의도한 바가 있어서 한 것을 구별하였기 때문이다. 승지는 언관(言官)이 아닌데 감히 이런 말을 하는가?"
하고, 민정의 관직을 체임하도록 명하고, 이어서 갑산부(甲山府)로 귀양보내게 하였다. 동의금부사 정우량(鄭羽良)이 민정의 숨김 없음을 말하니, 임금이 마침내 단지 관직만 삭탈하도록 명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箚子)를 올려 송익휘(宋翼輝)를 용서하도록 원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조현명이 이미 송익휘의 사건을 발설한 것에 대하여 스스로 해명한 것과 송익휘가 형장받은 것을 가지고 마침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송익휘의 죄는 사형을 시킨들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마는, 그의 드러난 죄명(罪名)은 다른 사람을 사주(使嗾)해서 대신을 무함하여 끌어들인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율문을 상고하면 마땅히 사형에 이르지는 않는데, 번거롭게 친히 신문하시기에 이르렀으니, 너무 지나친 일이 아닙니까? 가만히 성교(聖敎)를 생각하건대, 이광의(李匡誼)를 둘째로 삼고 송익휘를 첫째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광의는 직접 이 말을 전석(前席)에서 발설하였으나, 오히려 실정이 있기도 하고 실정이 없기도 하다는 것으로 참작하고 헤아려 특별히 그 죄를 경감(輕減)하여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 가령 송익휘가 과연 수작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전석(前席)에서 발설한 것과는 차이가 있어야 마땅한데, 도리어 더 무겁게 가하였으니, 진실로 경중(輕重)을 고르게 하는 뜻이 아닙니다. 더구나 신이 이 사건을 발설한 것은 만부득이한 데에서 나왔는데, 이 지경에 이르리라고는 실제로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스스로 해명하기에 급해서 남을 죽는 곳으로 밀어 넣는 짓은 물건을 훔치려고 구멍을 뚫고 담장을 뛰어넘는 좀도적도 하지 않는 일인데, 신이 비록 무상(無狀)할지언정 이런 평판을 뒤집어 쓴 채 어떻게 차마 얼굴을 들고서 스스로 조정에 서겠습니까? 그리고 또 좌상의 일로써 말한다면 그가 부끄럽고 통한스러운 뜻이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갑절이나 될 것이니, 자신의 일을 인연하여 골육지친(骨肉之親)을 해치는 것은 진실로 인정상 차마 하지 못할 바입니다. 신은 아마도 이로부터 다시는 조정에서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지 못할 듯하니, 바라건대, 송익휘의 실낱 같은 목숨을 용서하시어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빛나게 하소서."
하였는데, 차자가 들어가자 비답을 내리지 아니하였다. 조현명이 대궐에 나아가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불러다 하문하기를,
"경이 차자의 비답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들어왔으니, 어찌 송익휘를 위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자, 조현명이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송익휘가 준차(準次)의 형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람을 살리거나 사람을 죽이는 것은 왕정(王政)에서의 큰 일입니다. 신이 외람되게 보필(輔弼)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송익휘의 죄는 신 등을 끌어들인 데 있지마는, 그의 의도가 고의로 신 등을 모함하여 해치려고 하였겠습니까? 친한 벗을 구원하고 살리는 데 급해서 역시 가까운 친척을 핑계대는 것도 돌아보아 꺼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그것이 진실로 모함하여 해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역률(逆律)의 사죄(死罪)는 아닙니다. 그리고 또 신이 영상 김재로(金在魯)·좌상 송인명(宋寅明)과 지극한 정성으로 조제(調劑)하여 왕실(王室)을 돕다가 지금 요사한 옥사(獄事)로 인하여 신이 좌상과 함께 앞으로 일신을 편안히 할 수 없으니,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德)을 미루어 신 등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송익휘가 비록 반드시 진정으로 임금을 무함하는 마음이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만약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과 같은 종자가 이것을 핑계 삼아 임금을 무함하는 자가 있게 되면 그것을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하자, 조현명이 말하기를,
"무신년의 옥사를 진실로 이와 같이 다스렸다면, 역적의 무리는 남은 종자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비록 군사를 일으켜 무신년의 경우와 같다 하더라도 살릴 만하면 살릴수도 있지만, 송익휘에 이르러서는 용서할 수가 없다. 그리고 무신년 이전에 만약 두세 명의 당인(黨人)을 베어 버렸다면 기필코 무신년의 역변(逆變)은 없었을 것이다."
하니, 조현명이 황공하게 여겨 종종걸음으로 빨리 물러났다. 임금이 그제야 차자에 대한 비답을 내리기를,
"지금 사건의 단서가 더욱 중대한데, 경이 아뢴 바는 관계됨이 막중(莫重)하니, 지금의 처분(處分)은 당초와 비교할 것이 아니다. 송익휘가 살아서 나간다면 그것은 장차 국가가 국가답지 못하고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게 될 것임을 경이 입시하였을 적에 이미 상세히 유시하였다."
하였다.
6월 17일 경술
간원 【정언 정기안(鄭基安)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광의(李匡誼)가 연석(筵席)에서 아뢴 내용은 모두 극도로 음흉(陰凶)한데, 섬으로 귀양보내어 말감(末減)한 처분이 비록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德)에서 나왔다 하나, 신하가 임금을 범한 것으로 공초(供招)을 바친 경우 진실로 용서할 수 없는 죄에 관계되는데, 앞질러 먼저 참작하여 처분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분개하고 억울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송익휘(宋翼輝)를 조사하며 신문하는 때에 이르러 주무(綢繆)한 정절이 남김없이 드러났으니, 국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천극(栫棘)한 죄인 이광의를 다시 나국(拿鞫)하여 법으로 다스려 처단하도록 명하소서. 그리고 이광덕(李匡德)이 몰래 요사한 아우를 사주(使嗾)하여 흉설(凶說)을 지어내게 하고, 은밀히 간사한 친구와 체결(締結)하여 근거없는 말로 선동(煽動)하였으니, 정실이 교활하고 악독하여 뜻을 헤아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국문을 받는 날에는 상소하여 원통함을 호소하였으니 이미 극도로 무엄(無嚴)한데, 송익휘가 공초(供招)를 바친 뒤에는 간교한 실정이 드러나 더욱 다시는 숨기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분개하게 여깁니다. 왕장(王章)을 너무 관대하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니, 청컨대, 멀리 귀양보낸 죄인 이광덕을 나국(拿鞫)하고 엄중하게 신문하여 실정을 알아내도록 기필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6월 18일 신해
임금이 이미 본부(本府)에 명하여 송익휘(宋翼輝)를 다시 신문하여 승복(承服)받게 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다시 친히 국문하겠다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이 아마도 임금이 반드시 송익휘를 주참(誅斬)하고자 하여 이에 한더위를 무릅써 가며 친히 신문하는 것은 조용히 조섭(調攝)하는 데 해로움이 있다는 것으로 국문을 정지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에게 신문하도록 하면 틀림없이 승복을 받지 못할 것이므로, 다시 국문하도록 명한 것이다."
하고, 이에 먼저 이광문(李匡文)에게, 송익휘가 이광의(李匡誼)에게 발계(發啓)하도록 권하면서 수작했던 말을 물으니, 이광문이 공초하기를,
"송익휘가 비록 권한 바가 있다 하더라도 만약 신의 형이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인데, 신의 형이 스스로 하였으니, 어찌 다른 사람을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형으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한 것은 송익휘가 권한 때문이니, 어떻게 몹시 미워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마는, 지금에 와서 송익휘를 지목하여 배척한들 실제로 면목(面目)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은 정직하다."
하였다. 또 송익휘에게 ‘도리에 어긋난다.[不道]’는 두 글자를 ‘차마 듣지 못하겠다.[不忍問]’는 세 글자로 고쳐서 가만히 이광의에게 발계(發啓)하도록 사주(使嗾)한 실상을 신문하자, 송익휘가 터무니없는 말은 이광문으로부터 나온 것이 많다는 것으로 공초를 바치며 승복하지 않으니, 임금이 이광문에게 송익휘와 면질(面質)하도록 명하였다. 송익휘가 말하기를,
"내가 ‘도리에 어긋난다.[不道]’는 두 글자를 그대에게 말을 하였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차마 듣지 못하겠다.[不忍聞]’는 것으로 말을 하는가?"
하니, 이광문이 말하기를,
"이민효(李閔孝)가 와서 그대의 말을 전하기를, ‘차마 듣지 못하겠다.[不忍聞]’는 세 글자로 하였는데, 그대는 ‘도리에 어긋난다. [不道]’는 것으로 말했다고 하지만, 나는 명백히 세 글자로 기억하고 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다시 질문할 것이 없다."
하고, 이어서 송익휘에게 신문하기를,
"네가 신하로서 임금을 범한 사람을 교유(敎誘)하고서 어찌하여 스스로 임금을 범하는 죄에 빠졌다는 것으로 공초를 바치지 아니하느냐?"
하자, 송익휘가 공초하기를,
"인신(人臣)으로 무엄(無嚴)하게 임금을 범한 죄를 짓고서 살게 된들 무엇을 하겠습니까? 단지 임금을 속인 죄만 자복하게 하도록 원합니다."
하였는데, 잇따라 세 차례 형장(刑杖)을 가하였으나, 그래도 죽지 않았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송익휘가 반드시 정말로 이광의를 교유하여 꾸짖어 욕하는 등의 말을 발설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광의가 연석(筵席)에서 갑자기 근거없는 말을 발설하였다가 장차 사형을 당하는 데 이르렀으므로, 송익휘가 단지 친한 벗을 위하여 곡진하게 편을 들다가 요점을 모아서 교유하였으니, 또한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마음이 공정하다. 이광의의 경우에 끝내 이 뜰에서 곤장을 맞다가 죽는 꼴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나를 임금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송익휘가 이광의를 위하여 그의 당숙(堂叔)까지 함께 몰아넣은 것은 그 마음이 참으로 무상(無狀)하지만, 마땅히 경을 위하여 그를 용서하겠다."
하고, 마침내 사형을 감사(減死)하여 송익휘는 정의현(旌義縣)에 안치(安置)하고, 이광문은 특별히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간원 【사간 홍계유(洪啓裕)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어 이광덕(李匡德)의 사건에 이르니, 비답하기를,
"그의 상소가 비록 등철(登徹)되지는 않았으나, 그의 어귀(語句)는 이미 드러난 것으로써 미루어 보면 그도 역시 무엄(無嚴)하였으니, 지금 이 주청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다만 그가 상소한 것은 송익휘(宋翼輝)가 그의 아우를 교유(敎誘)한 것으로 인하여 장차 큰 죄과(罪科)에 빠져들게 되었으므로, 서둘러 해괴한 짓을 하고는 스스로 임금을 속인 데로 돌렸으나, 이미 악독한 역적이 아니었으니, 아우의 연고 때문에 추고(推考)가 그 형에게 미치는 것은 왕정(王政)에서 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멀리 귀양보낸 것은 가볍다고 할 만하니, 빨리 섬에다 귀양보내는 형벌을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6월 19일 임자
대신과 금부 당상과 삼사(三司)의 관원이 입시하였다. 장령 이징하(李徵夏)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교리 남태제(南泰齊)가 아뢰기를,
"송익휘(宋翼輝)를 참작하여 처단한 명이 비록 성상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德)에서 나왔다고 하나, 이목(耳目)의 관원으로서는 당연히 다투며 고집함이 있어야 하는데, 입시한 대신(臺臣)이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다가 물러났으니, 대간(臺諫)의 체모를 무너뜨리고 손상시킴이 심합니다. 청컨대, 파직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김이복(金履福) 등이 상소하여 서원을 훼철(毁撤)하라고 한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사원(祠院)을 훼철하도록 독촉하는 영(令)이 이미 3개월이 넘었으나, 관학 유생이 상소하여 다투지 아니하므로 많은 사람의 의논이 떠들썩하게 그 잘못을 공격하였다. 이에 김이복 등이 부득이 처음으로 상소하였지만, 내용이 격렬하고 절실하지 않았으므로, 사림(士林)이 전하여 웃었다. 상소가 들어가니, 비답하기를,
"성묘(聖廟)를 수호하라는 경계를 겨우 내렸는데 식견이 없는 유생을 따르는 소장을 갑자기 올리니, 그대들을 위하여 개탄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6월 20일 계축
조적명(趙迪命)을 대사간으로, 박준(朴㻐)을 장령으로, 김상중(金尙重)을 정언으로, 윤득화(尹得和)를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좌의정 송인명이 송익휘의 사건으로 스스로 편안하지 않게 여겨 금오(金吾)에서 명을 기다리니, 사관(史官)을 보내어 유시를 전하고 입시하게 하였다.
대신(臺臣)으로 말하지 않은 자를 삭출(削黜)하였다. 당초 송익휘를 참작하여 처분하였을 적에 입시했던 대간(臺諫)이 도로 정지할 것을 주청하지 않았으므로, 교리 남태제(南泰齊)가 그들을 파직(罷職)하도록 청하였다. 임금이 또 하교(下敎)하기를,
"송익휘를 참작하여 처분한 뒤에 대각(臺閣)에서 한마디 말도 없었으므로, 마침내 송익휘로 하여금 살아서 옥문(獄門)을 나가게 하였다. 만약 칙려(飭勵)함이 없다면 국가에 기강이 있다고 말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삭출(削黜)하는 형벌을 모두 시행하도록 명하였는데, 사간 홍계유(洪啓裕)와 집의 안상휘(安相徵) 등도 말하지 않은 것으로써 삭출당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이보다 앞서 묘당에서, 헌부에서 규정 이외의 금패(禁牌)를 많이 내보냈다 하여 엄중히 신칙하고, 만약 범하는 자가 있으면 삭직(削職)하는 율(律)로 감단(勘斷)하도록 청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시독관(侍讀官) 남태제(南泰齊)가 아뢰기를,
"대각(臺閣)은 묘당과 서로 가부(可否)를 다투어야 하는데, 지금 묘당에서 곧장 삭직으로 감률(勘律)하는 정식(定式)을 삼는 것은 대각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의 말이 옳다."
하고, 마침내 감률하는 것을 삭제하도록 명하였다. 검토관(檢討官) 김한철(金漢喆)이 아뢰기를,
"대관(臺官)과 유사(儒士)는 국가의 원기(元氣)이니, 배양하는 도리는 조종조(祖宗朝)에서부터 이미 가법(家法)이 있습니다. 반드시 유념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이 옳다. 나도 또한 나의 과실을 안다. 지난날 유학(幼學)이 먼저 상소하였기 때문에 반유(泮儒)090) 가 성묘(聖廟)를 수호하는 여부(與否)를 알고자 하여 적간(摘奸)해서 벌을 시행하되, 사유지장(師儒之長)091) 을 겸제(鉗制)하여 추문(推問)을 당하는 데 이르렀다면, 반유들은 당연히 권당(捲堂)하여 곧바로 나의 잘못을 배척했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도리어 염치가 없음을 알면서도 무릅쓰고 상소하였으니, 오늘날의 선비의 기풍 또한 알 만하다."
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정언 정기안(鄭基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송익휘(宋翼輝)가 몰래 서로 교유(敎誘)하여 인륜(人倫)을 손상시키고 의리를 무너뜨린 죄는 이미 말할 수 없을 정도이며, 더구나 그 세 글자에 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죄를 승복하지 않은 실상은 더욱 매우 음흉(陰凶)합니다. 그런데 섬으로 귀양보내라는 명이 뜻밖에 나왔지만, 입시했던 헌신(憲臣)들이 다투어 고집하지 못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갑자기 옥문(獄門)에서 나오게 하였으니, 대각(臺閣)의 수치(羞恥)가 극도에 달했습니다. 견책(譴責)하여 파직하는 가벼운 벌로는 징계(懲戒)할 수가 없으니, 송익휘를 천극(栫棘)하도록 한 명을 빨리 도로 정지하시고, 다시 엄중히 국문하도록 명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이목(耳目)의 관원들이 모두 잠자코 고요히 있는 때이니 체모를 얻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렇지만 그 참작하여 처리한 것도 깊이 헤아린 것이었다."
하였다.
6월 21일 갑인
권적(權𥛚)을 도승지로, 윤심형(尹心衡)을 집의로, 정희보(鄭熙普)를 사간으로, 송시함(宋時涵)을 장령으로, 조명리(趙明履)를 의주 부윤으로 삼았다.
간원 【정언 정기안(鄭基安)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음험하고 참혹한 말을 비밀리에 지시하고 가르치며 계획을 마련한 것은 측량하기 어려운 것인데, 죄상(罪狀)이 모두 드러났으니, 나라의 법으로 헤아려 본다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앞질러 참작하여 처리하였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청컨대, 천극(栫棘)한 죄인 송익휘(宋翼輝)를 다시 왕부(王府)로 하여금 나국(拿鞫)하여 엄중히 신문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처음에 신이 송익휘(宋翼輝)의 사건을 발설했던 것은 대체로 이광의(李匡誼)가 여덟 글자를 가지고 이미 스스로 신하로서 임금을 범한 것에 돌려 승복한 때문이었는데, 그 언근(言根)에 대해서는 신 등에게 돌렸습니다.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에 대해서는 우선 논할 것이 없겠지만, 그 까닭을 캐어보면 끌어댄 것은 오로지 송익휘가 〈신 등을〉 의뢰하려는 계교를 교유(敎誘)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이것이 만약 발로(發露)가 되었다면 두뇌가 파탄되고 지엽(枝葉)은 떨어져 부서질 것임은 분변하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저절로 명백해질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발설하였던 것입니다. 신이 어찌 즐겁게 여기면서 하였겠습니까? 이것으로 인하여 따로 갈등(葛藤)이 생겨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여기에 이르렀는데, 자취를 따라 관찰해 보면 마치 신이 스스로 해명하기에 급하여 다른 사람의 비밀[陰私]을 들추어 내어 죽는 곳으로 밀어 넣으면서 자신을 이롭게 한 것 같음이 있으니, 이는 실로 간사하고 야박한 비부(鄙夫)가 하는 짓입니다. 신이 아직도 차마 이런 평판을 덮어쓰고서 스스로 사군자(士君子)의 대열에 낄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다행스럽게 자인(慈仁)을 깊이 발동(發動)하시어 그 반드시 죽여야 할 죄인을 버려 두시고 곡진하게 용서를 더하시니,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德)을 누군들 흠모(欽慕)하며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신도 이를 힘입어 사람을 죽이면서 이로움을 꾀하는 결과가 됨을 모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리고 돈독하게 유시하였다.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6월 22일 을묘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여러 승지들과 옥당의 관원을 소견(召見)하였는데, 《춘추(春秋)》의 강독을 마쳤다는 것으로 장차 선온(宣醞)하려고 한 때문이었다. 왕세자(王世子)가 시좌(侍坐)하였는데, 임금이 필선(弼善) 박필간(朴弼榦)에게 명하여 동궁에게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올리게 하고, 동궁으로 하여금 그것을 읽도록 하자, 옥음(玉音)이 청량(淸亮)하고 구두(句讀)가 분명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똑같은 목소리로 하례하기를,
"종묘와 사직의 복입니다."
하니, 임금이 동궁을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입시한 여러 신하들은 모두 나에게 복종하여 섬기는 이들이다. 그들의 자손들 또한 모두 앞으로 너와 함께 늙어갈 사람들이니, 너는 그 사실을 알도록 하라."
하고, 또 유신 이명곤(李命坤)에게 명하여 어제 경현당명(御製景賢堂銘)을 읽게 하고, 동궁으로 하여금 그것을 듣도록 하였다. 읽기를 마치자, 내시가 음식을 차려왔으므로,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술을 마시도록 하면서 각기 그 주량(酒量)의 얕고 깊음을 물어 간혹 특별히 다른 술잔을 내려 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습(黨習)을 하지 말고 동궁을 잘 섬기도록 경계하고, 이어서 어제시(御製詩)를 내리면서 근신(近臣)으로 하여금 화답하여 지어 올리게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6월 23일 병진
수찬 박춘보(朴春普)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하읍(下邑)에 있으면서 저보(邸報)092) 를 보고 이광의(李匡誼)의 사건으로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모여서 의논하게 한 일이 있기에 이르렀음을 알았습니다. 종이에 가득한 사륜(絲綸)은 내용이 엄중하고 의리가 분명하여 왕강(王綱)을 진작시키고 신하의 직분을 힘쓰도록 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조정 안에서는 도리어 구원하고 해명하는 논의만 있고, 징토(懲討)하기를 청하는 사람은 적막하여 없었으므로, 마침내 처분(處分)이 섬으로 귀양보내는 데 그치게 되었으니, 국가에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이미 신하로서 임금을 범한 것으로 승복하였으니, 하루라도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살아갈 수 없으며, 법을 집행하는 논의는 진실로 간쟁(諫爭)하여 고집할 겨를이 없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날 입시했던 대신(臺臣)들이 머뭇거리면서 뒤돌아보기만 한 채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다가 물러났으니, 국가의 체모를 무너뜨리고 대간(臺諫)의 기풍을 손상시킨 것이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며칠 전에 송익휘(宋翼輝)를 참작하여 처분하였을 때 이징하(李徵夏)가 이미 당연히 논핵해야 할 일을 논핵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처벌을 받았으면, 지난날 간(諫)하지 않았던 대신(臺臣)들은 어찌 유독 죄가 없겠습니까? 더구나 송익휘와 이광의는 그 마음이 비록 같다 하더라도 송익휘의 경우는 단지 사실(私室)에서 모의(謀議)하였을 뿐이고, 이광의의 경우는 장독(章牘)으로 베껴서 연석(筵席)에서 아뢰었으니, 그 범한 죄를 논한다면 이광의의 죄가 송익휘보다 더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광덕(李匡德)에 이르러서는 그가 상소하여 아뢴 바는 이미 그 근저(根柢)를 스스로 담당하였지만, 관계됨이 지극히 중대하므로 엄중히 조사하지 않을 수 없으니, 어찌 이광덕을 신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간원에서 아뢴 바는 참으로 대간(臺諫)의 체모를 얻은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즉시 윤음(允音)을 내려 엄중히 국문하여 정법(正法)하시고, 그날 말하지 아니한 양사(兩司)의 관원도 사건이 이미 지나갔다고 하여 용서하는 바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 사건이 있고부터 대간의 지위에 들어가 있는 자는 머뭇거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동시에 열 명의 대각(臺閣) 관원이 모두 지방에 있었다고 핑계대고 있는 데 이르러서는 듣기에 놀랄 만한 점이 있으니, 이것도 경계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대체(大體)는 비록 옳다 하더라도 이광덕의 일은 중도(中道)에 지나침이 없지 않으며, 열 명의 대신(臺臣)이 지방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한심하다고 말할 만하다. 그들을 모두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부사직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지난번 송도(松都)에다 성을 쌓는 데 대한 의논이 있었습니다. 구도(舊都)가 비록 양서(兩西)로 가는 관문이고 요새지라 하더라도 청석동(靑石洞)이 중요한 요해처가 되니, 이 곳을 만약 지키지 못한다면 아무리 성이 있다 하더라도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니 첫째로 불가한 것입니다. 인호(人戶)가 매우 많아서 성을 쌓을 때에는 민호를 철거시키고 터를 개척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소요(騷擾)가 반드시 많을 것이니, 두 번째 불가한 것입니다. 식량을 잇댈 계책이 없는데, 시기에 알맞지 않은 일을 일으켜 한계가 있는 재물을 가지고 시급하지 않은 일을 하려 하니, 신의 생각에 그것이 옳은지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도 그렇게 여기고 마침내 그 의논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이 때 유수(留守) 서명구(徐命九)의 송도에 성을 쌓자는 의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6월 24일 정사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여 이틀 만에 파(罷)하였는데, 이조 판서 밍응수(閔應洙)와 병조 판서 정석오(鄭錫五)의 정사(政事)이었다. 이종성(李宗城)을 동지 경연사로, 이기진(李箕鎭)을 경기 감사로, 김광세(金光世)를 교리로, 신만(申晩)을 부제학으로, 여선군(驪善君) 이학(李壆)을 동지 정사로, 정언섭(鄭彦燮)을 부사로, 권현(權賢)을 서장관으로, 김약로(金若魯)를 병조 참판으로, 김성응(金聖應)을 형조 판서로, 이익정(李益炡)을 대사헌으로, 김광국(金光國)을 지평으로, 홍익삼(洪益三)을 정언으로, 김상철(金尙喆)을 사서로, 신사건(申思建)을 부응교로, 이중조(李重祚)를 설서로 삼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6월 26일 기미
어떤 별이 위성(危星) 아래로 흘러갔다.
좌의정 송인명과 우의정 조현명이 잇따라 차자(箚子)를 올려 사직하니, 승지에게 명하여 돈독하게 유시하도록 하였다.
6월 27일 경신
어떤 별이 규성(奎星) 아래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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