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일 병신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의식대로 봉심(奉審)하였는데, 제향(祭享)의 희생(犧牲)이 규격에 차지 않고 또 살지지 않았다 하여 책망하는 교지를 내리고, 해서(該署)의 제거(提擧) 및 해당 낭관을 파직하게 하였다.
4월 3일 정유
임금이 태묘(太廟)의 하향(夏享)을 친히 행하였다. 예를 마치고 재실(齋室)에 나아가 예방 승지 원경하(元景夏)를 불러 묻기를,
"국가에서 소제(素祭)하는 규례는 어떤 사람이 정한 것인가?"
하자, 원경하가 말하기를,
"고 상신 황희(黃喜)가 정난종(鄭蘭宗)과 상의하여 강정(講定)한 것입니다. 정난종은 국가에서 이미 소제(素祭)를 행하면 사가(私家)에서도 역시 고기를 쓰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겼으며, 정씨(鄭氏) 집안에서는 지금까지 소제를 행한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조심하고 경계하여 법을 지키는 규모를 볼 수 있습니다."
하였다.
관서(關西)의 여러 군(郡)에 홍수가 졌다.
4월 4일 무술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홍문관에 명하여 명나라 조정의 남긴 책을 모아다 간직하도록 하였다. 이때 검토관 이성중(李成中)이 옛날 홍문관에 소장된 책을 열람하다가, 북경본[燕本]인 《역대통감찬요(歷代通鑑纂要)》를 찾아 올렸는데,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내보이며 말하기를,
"책의 상단에 찍힌 광운지보(廣運之寶)는 어느 시대의 어보(御寶)인가?"
하자, 기사관 황경원(黃景源)이 아뢰기를,
"명나라의 어보입니다. 신이 일찍이 명나라 조정의 고 병부 상서 전응양(田應暘)의 제서 모본(制書摹本)을 보았는데, 역시 이 어보가 찍혀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선왕(先王)이 명나라 조정의 마패(馬牌)를 상서원(尙瑞院)에서 소장하도록 명하셨는데, 지금 이 책은 명나라 조정의 옥새(玉璽) 흔적이 보존된 것으로 전자(篆字)의 획(書)이 아직도 분명하며, 보주(寶朱)가 새로운 듯하니, 매우 이상스럽다. 홍문관의 관원으로 하여금 그 남은 책을 모아 보배처럼 수중히 간직하여 나의 하천(下泉)054) 에 대한 생각을 나타내게 하라."
하였다.
4월 5일 기해
소대를 행하였다. 사어(司禦) 성이홍(成爾鴻)을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성이홍은 고 왕자 사부 성만징(成晩徵)의 아들이다. 대대로 영남 상주(尙州)에 살았는데, 독실한 행실로 알려졌으므로, 불러다 세자 익위사의 사어로 임명하였다. 경성(京城)에 이르자 수찬 이성중(李成中)이 임금에게 소견(召見)하도록 청하니 즉시 입대(入對)하도록 명하고, 임금이 하문하기를,
"삼대(三代) 뒤에 삼대와 같은 시대가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성이홍이 말하기를,
"삼대의 인군은 직도(直道)로 천하를 다스렸는데, 후세의 인주는 직도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삼대의 정치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른바 직도란 그 의리를 바르게 하되 그 이익을 도모하지 않고, 그 도리를 밝히되 그 공효(功效)를 꾀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삼대 이후에는 어찌하여 직도(直道)가 없었는가?"
하자, 성이홍이 아뢰기를,
"공명(功名)과 이욕(利慾)을 추구하는 마음이 날마다 증가되어 직도가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칭찬하고 인하여 유시(諭示)하기를,
"사어는 구원(丘園)의 사람으로 와서 동궁(東宮)을 보필(輔弼)하게 되었으니, 나의 마음이 매우 기쁘다. 마땅히 때때로 경연(經筵)에 들어와서 나의 미치지 못하는 것을 돕도록 하라."
하였다. 또 경상 감사에게 명하여 성이홍의 노모(老母)를 위문하고 식물(食物)을 실어 보내도록 하였다. 이때 성이홍이 산림(山林)의 인사로 처음 강연(講筵)에 들어가 한 마디 말도 군덕(君德)을 절실하게 경계함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더러 부족하게 여겼다.
한림(翰林) 이익보(李益輔)와 김상복(金相福)을 파직하였다. 이때 이익보와 김상복 등이 각각 추천한 바가 있었는데, 모두 다른 당(黨)에게 패배당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유수원(柳壽垣)의 관제 서승도(官制序陞圖)를 보고 경장(更張)할 뜻이 있었지만 아직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당인(黨人)이 명환(名宦)을 서로 다투어 빼앗으려는 것을 미워하여 마침내 한원(翰苑)에서 회천(回薦)하는 법을 혁파하려고 먼저 이익보 등을 파직한 것이었다.
4월 7일 신축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처음으로 강독하였는데,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유자(儒者)를 업신여기며 꾸짖은 일로 인하여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무력(武力)을 남용한 임금이었지만, 오히려 급암(汲黯)055) 에게는 의관(衣冠)을 갖추지 않고는 접견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산야(山野)에서 독서한 자이겠는가?"
하고, 이어서 사어(司禦) 성이홍(成爾鴻)에게 하문하기를,
"유자(儒者)와 은자(隱者)가 같은가, 다른가?"
하니, 성이홍이 대답하기를,
"유자는 오륜(五倫) 가운데 사람이고, 은자는 바로 한 가지 절개를 지키는 선비로서 과감하게 세상 일을 잊어버리는 사람이니 유자와 은자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요즈음 세상에서 유자를 반드시 은사(隱士)라고 일컫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자, 성이홍이 아뢰기를,
"유자가 은사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위에 있는 분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인군이 정성을 다하여 불러와서 말이 채용할 만하면 채용하되, 형식적인 데에 돌아가지 않게 한다면, 유자가 어찌 은자가 되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옳게 여겼다. 검토관 남태제(南泰齊)가 아뢰기를,
"옛날 융성하던 시기에는 선비된 자가 오히려 구검(拘檢)을 숭상하였는데, 지금은 도학(道學)을 온 세상에서 기휘(忌諱)하는 것이 풍습을 이루어, 뜻이 있는 선비가 조금만 구검을 하여도 반드시 여러 사람이 비평하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니라 실제로 전하께서 도학을 높이고 유자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데 말미암은 소치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유자와 은자가 같은가 다른가를 물은 것은 내가 성리학(性理學)이 간혹 전해지는 폐단이 없지 않았던 때문이었고, 내가 진정으로 유자를 배척한 것은 아니었는데, 사어의 말을 들으니 과연 나의 잘못이다. 이제부터 스스로 힘써야 하겠다."
하였다.
유사(有司)에게 신칙하여 도둑 다스리는 형벌을 경솔히 적용하지 말게 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형법(刑法)을 마련한 것은 각기 합당한 바가 있으니, 왕부(王府)와 추조(秋曹)에서 마땅히 추문(推問)해야 할 자를 포도청에서 대신 행하게 하는 것은 바로 법에 벗어난 것이니, 이 뒤로는 도둑질한 자 외에는 포도청에서 도둑을 다스리는 형벌을 적용하지 말도록 하라. 그리고 중외에서 받들지 않는 자는 법령(法令)을 준행하지 않는 율(律)로 논죄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8일 임인
권적(權𥛚)을 대사헌으로, 이광식(李光湜)을 장령으로, 성범석(成範錫)을 지평으로, 송시함(宋時涵)을 정언으로, 서종옥(徐宗玉)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봉상시 제조를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고, 제물(祭物) 가운데 토끼젓이나 사슴젓 및 절여서 말린 것은 냄새와 맛이 쉽게 변하는 것으로써 대신에게 물어서 고치고자 하였는데, 대신이 품질을 숭상하고 맛을 숭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의논이 결정되지 않으니 그대로 정지하게 하고, 절이는 것은 그때에 이르러 소금에 조금 담갔다가 간장을 제거하고 쓰게 하였다.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복색(服色)은 그전대로 홍단령(紅團領)을 쓰도록 명하였다. 당초에 관학 유생이 거재(居齋)할 때와 부거(赴擧)할 때에 모두 홍단령을 입게 하였는데, 유생들이 불편하게 여겨 번번이 〈《시경(詩經)》 정풍(鄭風)의〉, ‘푸르고 푸른 그대 옷깃이여[靑靑子衿]’라는 글을 가지고 마땅히 푸른 색의 옷을 입어야 한다 하였다. 대사성이 그 일을 아뢰자, 임금이 예조 낭관으로 하여금 대신과 지방에 있는 여러 유신들에게 문의하도록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연주(筵奏)하기를,
"《경국대전(經國大典)》 횡간도(橫看圖)에, ‘제학 생도(諸學生徒)는 단령(團領)을 입는다.’ 하였는데, 주(註)에 이르기를, ‘유학(儒學)은 청금(靑衿)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유학이란 유생이고, 청금은 혹 그것이 푸른 옷[靑衣]인가 의심하기도 하고, 혹은 옷은 붉은데 옷깃을 푸르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시경(詩經)》의 주(註) 및 자서(字書)에 이르기를, ‘금(衿)이란 영(領)이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써 살펴보건대, 혹 붉은 옷에 푸른 깃을 말하는 것인 듯합니다.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이르기를, ‘우리 나라 유사(儒士)들이 사사로이 출입(出入)할 때에 역시 홍직령(紅直領)을 착용하였는데 명종(明宗) 말년에 연달아 국상[國恤]을 당하여 흰 옷을 입는 것이 습관이 되어 그대로 풍속을 이루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써 살펴보건대, 붉은 옷은 반드시 조종조(祖宗朝)의 구제(舊制)일 것입니다. 무릇 복색(服色)은 청색과 흑색을 함께 쓰지만, 흑단령(黑團領)은 홍단령(紅團領)에 비교하여 더 중하므로, 중한 곳에는 흑단령을 입고 경(輕)한 곳에는 홍단령을 입으니, 조신뿐만 아니라 유사(儒士)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묘(聖廟)에 들어갈 때에는 푸른 옷을 입고 식당(食堂) 및 재(齋)에 모일 때에는 붉은 옷을 입었으니, 의도한 바가 대체로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바로 조종조에서 행하던 것이므로 경솔하게 고칠 수 없을 듯합니다."
하고, 부호군 윤봉구(尹鳳九)는 선정신 권상하(權尙夏)의 말과 명나라 조정의 태학생(太學生)이 난삼(襴衫)을 입었던 제도를 인용하여 난삼과 복두(幞頭)를 사용하도록 청하였다. 부사과 양득중(梁得中)과 전 군수 박필보(朴弼普)의 의논 또한 윤봉구의 의논과 같았는데, 임금이 김재로의 의논을 따르도록 명하고, 그대로 홍단령을 입게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곤복(袞服)을 입으시면 아래에 있는 신하들은 모두 흑단령(黑團領)을 입는 것이 사체(事體)에 당연합니다. 상참(常參) 및 전강(殿講)에 모두 흑단령을 착용한다면 주강(晝講) 또한 법강(法講)인데, 성상께서 곤복을 입기 때문에 흑단령을 착용한다는 것이 《실록(實錄)》과 홍문관의 고사(故事)에 기재되어 있으니, 지금 홍단령(紅團領)으로 고치는 것은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정의 신하가 임금의 옷을 따르는 것은 옳다."
하고, 고사(故事)를 널리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팔도의 서원과 사묘(祠廟) 가운데 사사로이 건립한 것 및 사사로이 제향(祭享)하는 것을 없애게 하였다. 애초에 함경 감사 박문수(朴文秀)가 이광좌(李光佐)를 이항복(李恒福)의 서원에 배향(配享)하게 한 것으로써 범금(犯禁)한 죄를 자수하였는데, 예조 판서 서종급(徐宗伋)이 숙종(肅宗)갑오년056) 의 금조(禁條)를 인용하여 다투었었다. 이날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지방 고을의 사자(士子)들이 대신을 마음대로 제향하는 것은 아첨하는 기풍을 열게 되어 뒷날의 폐단에 관계된다는 것으로 서원 건립에 대한 금령을 거듭 밝힐 것을 청하니, 임금이 새로 건립한 사원(祠院)은 허물도록 하였으나, 유독 유현(儒賢)으로 드러난 이와 충신(忠臣)으로 국가의 일로 죽은 이의 경우는 그 사우(祠宇)를 모두 허물지 말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선조(先朝) 갑오년의 수교(受敎)에 무릇 서원 가운데 조정에 아뢰지 않고 설립하였거나 마음대로 추향(追享)하는 것은 모두 허물어 버리도록 하였으니, 마땅히 일체 법을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마침내 하교하기를,
"무릇 법령이 해이해지는 것은 오로지 흔들고 어지럽히는 데 연유한다. 갑오년에 정식(定式)한 뒤에 조정에 아뢰지 않고 사사로이 건립한 사원(祠院)과 사사로이 추향하는 경우 대신이나 유현을 논하지 말고 모두 철거하도록 하고, 이미 죽은 도신은 논하지 말되, 나머지는 모두 파직할 것이며, 수령은 나처(拿處)하도록 하라. 그리고 수창(首唱)한 유생은 모두 5년을 기한하여 정거(停擧)하게 하라. 이후로 사사로이 건립하거나 추가로 제향하는 경우 도신과 수령은 모두 고신(告身)을 빼앗는 율(律)을 시행하고, 유생은 멀리 귀양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조문벽(趙文璧)을 영춘역(迎春驛)에 유배(流配)하였다. 조문벽이 앞서 숙천 군수(肅川郡守)가 되었을 적에 서로(西路)의 극적(劇賊) 지용골(池龍骨)을 법으로 당연히 참(斬)했어야 하는데, 갑자기 도망해 버렸으므로 조문벽이 죄수를 놓아 주었다 하여 옥에 갇혔다가 도배(徒配)되었다. 이때에 관동(關東)·관북(關北)·관서(關西)·해서(海西) 4도(道)에 크게 기근(饑饉)이 들어 도적이 여러 곳에서 일어나 각기 단호(團號)를 만들어 노략질과 겁탈을 행했는데, 서울에 있는 것은 후서강단(後西江團)이라 하고, 평양(平壤)에 있는 것은 폐사군단(廢四郡團)이라 하고, 재인(才人)057) 은 채단(彩團)이라 하고, 돌아다니며 빌어먹는 것은 유단(流團)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기회를 틈타 도둑이 되어 부고(府庫)를 습격하여 탈취하는데, 장리(將吏)가 감히 체포할 수 없었으므로, 조정에서 이를 근심하여 영(令)을 내려 염탐하도록 하였지만 끝내 체포하지 못하였다.
김상성(金尙星)을 도로 비변사 부제조에 임명하였는데, 김상성이 이제 막 부모(父母)의 3년 상(喪)을 마쳤기 때문이었다. 이때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원경하(元景夏)를 부제조에 임명하도록 의논하였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일부러 허락하지 않았다가 이때에 이르러 다시 김상성을 기용하여 원경하를 저지하였다.
종2품의 대제학(大提學)에게 모두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고 대제학 김유(金楺)와 오원(吳瑗)에게 시호를 내리도록 명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태상시(太常寺)로 하여금 무릇 종2품 대제학으로 죽은 자는 모두 시호를 내려 주도록 허락하고 제도를 정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4월 9일 계묘
해가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집의 정희보(鄭熙普)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조상경(趙尙絅)의 일에 대하여 공정한 마음으로 관찰하였는데, 말할 만한 것이 없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조상경에게 책임을 지워 부린 지 오래 되었으니, 그의 본말(本末)과 장단(長短)은 명철하신 전하의 감식(鑑識)에서 도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조상경이 10년 동안 동전(東銓)과 서전(西銓)에서 정사를 집행하였는데, 전후의 주의(注擬)가 어찌 모두 물정(物情)에 만족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만, 얼제(孼弟)를 지나치게 사랑하여 공기(公器)를 끌어다 주어 팔아서 사사롭게 집안에 들인 것에 이르러서는 결단코 옳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저 대신(臺臣)들도 그 사이에서 사사로운 원한이 있는 자는 아닙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세도(世道)가 이미 막혔고 풍문(風聞)으로 전해지는 것이 잘못된 부분이 많아 그들이 사람을 논하는 체례에 있어서 상세히 살피는 것이 너무 부족하고 남을 함정에다 밀어 넣으면서 조금도 어려워하는 빛이 없었습니다. 만일 나열하려고 하면 오로지 그 사람만 곧바로 배척하는 것이 마땅한데, 어떻게 반드시 미천한 동생의 이름에 손을 써서 그 형(兄)의 낯에다 피를 뿜어야 하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조사한 일이 이미 공안(空案)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지금 만약 두 가지를 그대로 두고서 그 시비(是非)를 밝히지 않는다면, 신은 아마도 전지(銓地)에 완전한 사람이 없을 듯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노신(老臣)은 우악하게 용납하여 깨끗하게 되는 은혜를 내려야 할 것이고, 대신(臺臣)을 칙려하여 경솔하게 떠드는 풍습을 진정시키도록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4월 10일 갑진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석강을 행하였다. 사어(司禦) 성이홍(成爾鴻)을 명소(命召)하여 입대(入對)하게 하고, 태극설(太極說)을 논하게 하였다. 성이홍이 말하기를,
"태극(太極)은 둘이 아니고 사물마다 각기 하나의 태극이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무릇 사물에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있고 또 그렇게 되는 까닭이 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자, 성이홍이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모두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는데,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인(仁)에서 나오는데, 인이란 그렇게 되는 까닭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의심스럽게 여겼다. 기사관 황경원(黃景源)이 말하기를,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직분(職分)을 가지고 말한 것이고 그렇게 된 까닭이라는 것은 성분(性分)을 가지고 말할 것이니, 마치 자식이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것과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자식이 어버이에게 효도해야 하는 까닭과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해야 하는 까닭과 같으니, 이는 그렇게 해야 하는 까닭이며 모두 같은 이치입니다."
하니, 성이홍이 말하기를,
"한림(翰林)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4월 11일 을사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이때에 송충(松蟲)이 성하게 일어나서 사산(四山)의 소나무를 갉아 먹으니 말라 죽은 소나무가 많았다. 한성 판윤 윤양래(尹陽來)가 아뢰기를,
"부민(部民)에게 송충(松蟲)을 잡아서 날마다 3승(升)씩 바치도록 하였는데, 간혹 간사한 주민이 파묻은 것을 파서 다시 바치는 폐단이 있으니, 태워 죽이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묻는 것도 오히려 부족하여 태워 죽이려까지 하는가? 맹자(孟子)도 말하기를, ‘맹수(猛獸)를 몰아낼 뿐이다.’고 하였다. 이것도 생명이 있는 것이니 태워버리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겠는가? 여러 날 잡게 하면 백성들에게 폐단이 또한 많을 것이니, 다 잡게 하는 것은 즉시 중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2일 병오
조명리(趙明履)를 승지로, 이도겸(李道謙)을 집의로, 이응협(李應協)을 지평으로, 이광덕(李匡德)을 예조 참판으로, 민형수(閔亨洙)를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다시 민통수(閔通洙)를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처음에 조현명(趙顯命)이 이조 판서가 되어 심악(沈)을 천거하여 낭관을 삼으려고 하였는데, 참의 신만(申晩)이 민통수를 천거하여 모두 거취(去就)를 가지고 굳게 다투므로, 임금이 특별히 심악을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임명하고, 민통수를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임명하였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그 명을 정지하고 민통수를 마침내 전랑(銓郞)으로 삼았는데, 뒤에 대정(大政)을 집행하기에 이르러 명을 받들지 않으므로, 임금이 즉시 친히 정사를 행하고 나오도록 부르니, 그제야 나왔었다. 이때에 옥당(玉堂)에 신록(新錄)된 자가 이미 1년이 넘었는데, 전조에서 취사(取捨)를 어렵게 여겨 전랑(銓郞)으로 한 사람도 통의(通擬)할 수 없도록 하였으니, 근세(近歲) 이래로 없었던 바였다. 그러자 민통수가 처음으로 신사건(申思建)을 추천하여 자신을 대신하게 하고, 또 이천보(李天輔)를 천거하였으나, 참의 이종백(李宗白)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그만 그쳤다. 대정이 끝나자 민통수가 당초에 명을 받들지 않은 일에 연좌되어 의금부에 회부되자, 사간 이도겸(李道謙)이 삭출(削黜)하도록 계청(啓請)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낭관이 되었으나, 이미 신사건 한 사람만 천거할 수가 없었고, 또 이천보를 함께 천거할 수도 없었는데 원경하(元景夏)가 이미 임금에게 아뢰어 낭선(郞選)을 혁파하도록 하였다.
4월 13일 정미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경기 감사 이익정(李益炡)과 경기 수사 이행검(李行儉)을 소견(召見)하여 해방(海防)과 군민(軍民)에 대한 일을 묻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이번에 기백(畿伯)을 소견하고 백성의 일을 물은 것은 옛날에 사목(四牧)의 장관을 소견한 성의(盛意)를 따른 것이다. 그리고 또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의 봉사(封事)로써 살펴보면, 중국 조정의 고사(故事)도 그러하였다. 이 뒤로 상참 때 지방의 수령 가운데 간혹 공무(公務)로 인하여 올라온 자가 있으면, 그도 들어와서 참여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 날 나주 영장(羅州營將) 김석기(金錫基)가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소견하고 면유(勉諭)하기를,
"영장(營將)은 바로 도적을 다스리는 직책이다. 다만 도적만 다스린다면 도리어 양민(良民)에게 해(害)를 끼치게 될 것이다. 자세히 조사하는 것을 이미 어렵게 여기면 뜻밖에 재앙을 만나게 될 경우 더욱 민망스러울 것이니, 그대는 경계하도록 하라."
하니, 김석기가 대답하기를,
"도적이 끌어들인 자가 각 고을에 퍼져 있는데, 포교(捕校)를 보내면 폐단이 되고 보내지 않으면 체포하기가 어려우니, 이것이 민망스럽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뜻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체포할 때에 설혹 폐단이 없다 하더라도 구금(拘禁)하여 조사하는 즈음에 거짓과 실상을 분변하기가 어려우니, 만약 혹시라도 옥석(玉石)을 구분하지 않고 다만 자복받기만 기필한다면, 양민과 기민(飢民)을 논할 것 없이 반드시 형장(刑杖)을 견디지 못하여 거짓으로 자복하는 데 이를 것이니, 측연(惻然)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진실로 도둑을 많이 잡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싶지 않은데, 그대는 혹시라도 많이 잡을 수 없을까 두려워하여 고민하니, 내가 묻는 바와 다른 것이다."
하였다.
4월 17일 신해
석강을 행하였다.
이저(李著)란 자가 있었는데, 명(明)나라 장수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樑)의 후손이었다. 그가 사신을 따라 피중(彼中)에 들어가 영원백의 화상(畫像)을 얻어 가지고 왔는데, 임금이 듣고서 가지고 들어오도록 명하여 관람하고 말하기를,
"그 모습이 근신하는 길인(吉人)인 듯하다."
하고, 이어서 이저의 동생 별군직(別軍職) 이훈(李薰)을 소견하고 화상을 사가지고 온 연유를 묻자 이훈이 매우 자세하게 대답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화상을 보니 마음에 느낌이 많다. 영원백의 자손으로 피중(彼中)에 있는 자는 의관의 제도가 다르지만, 그대들은 그대 선조의 관복(冠服)을 고치지 말 것이며, 모름지기 그대 조상을 생각하여 선대의 업적을 떨어뜨리지 말고 국가를 섬기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8일 임자
석강을 행하였다.
이도겸(李道謙)을 승지로, 신만(申晩)을 대사헌으로, 홍상한(洪象漢)을 부교리로, 남유용(南有容)을 정언으로, 오수채(吳遂采)를 부응교로, 홍창한(洪昌漢)을 집의로 삼았다.
4월 19일 계축
주강을 행하였다.
이조 낭청을 통청(通淸)하는 법과 한림(翰林)을 회천(回薦)하는 규례를 혁파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늘 조정의 붕당(朋黨)을 근심하였는데, 이조 낭청과 한림을 선발할 때를 당하면 피차 두 당에서 서로 부호하고 억제하며 싸우기를 그치지 않으니, 임금이 그들의 하는 짓을 싫어하고 미워하여 이미 경장(更張)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송인명(宋寅明)·조현명(趙顯命)·원경하(元景夏)·정우량(鄭羽良) 등 여러 사람들이 극력 찬성하니, 이에 임금의 뜻이 결정되어 이 날 한림 황경원(黃景源)을 불러다 앞으로 나오게 하고, 하문하기를,
"한림의 추천은 국초(國初)에 시작되었는가?"
하였는데, 황경원(黃景源)이 말하기를,
"국초부터 있었습니다만, 광해군(光海君) 때에 이르러 이이첨(李爾瞻)이 대제학으로 추천을 주관하면서 흉당(凶黨)을 끌어들였기 때문에 관각(館閣)에서 추천을 주관하는 법이 이이첨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조(仁祖)께서 개옥(改玉)하기에 이르러 추천하는 법이 옛날대로 회복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하교하기를,
"기강(紀綱)이 위에 있으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권병(權柄)이 아래에 있으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 우리 나라는 예의(禮義)로 법을 제정하여 개국(開國)한 이후로 권신(權臣)이 권병을 도둑질한 경우는 없었으나, 다만 문(文)을 숭상한 폐단이 있었으니, 어찌 쇄약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아! 당습(黨習)이 나의 여러 신하들을 함몰(陷沒)시키고 기강을 문란시키고 있으니, 교목(喬木)의 신하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편당 만드는 것뿐이다. 사물이 극도에 이르면 통(通)하게 되는 것은 이치의 떳떳함이고, 폐단이 극도에 이르면 바뀌어지는 것은 일의 적당함이다. 그것을 만약 고치거나, 바꾸려고 한다면 마땅히 그 근본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이조 낭청의 추천은 비록 혁파하더라도 통청(通淸)하는 권한이 그대로 있으면, 이름은 바꾸었다고 하지만 폐단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국초의 옛 제도가 아니고, 또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기재되어 있지도 않은데, 낭관이 사사로운 뜻을 행하는 문(門)을 따라 우리 조정의 공정함을 전하는 법을 어지럽히고 있으니, 나의 뜻은 경장(更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구전(舊典)을 따라 폐단을 인해서 개혁하려는 것이다. 이조 낭청의 통청을 마땅히 먼저 혁파해야 할 것이니, 그 절목(節目)을 대신과 총재(冡宰)가 고사(故事)를 널리 상고하여 품지해서 처리하도록 하라. 한림의 추천은 3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온 규례인데, 비록 하루아침에 혁파할 수는 없다 하나, 한번 함께 병용한 후부터 분경(奔競)과 야료가 오로지 여기에서 연유하였다. 저편에서 패하면 이편에서 추천하고 이편에서 패하면 저편에서 추천하는 등 마치 서로 보복하는 듯하니, 이 뒤로는 한번 방(榜)을 써 붙인 뒤에 응당 한림으로 추천할 자는 분관(分館)하는 예에 의거하여 빠뜨림 없이 모두 추천한다면, 결단코 많고 적음을 비교하여 서로 야료를 부리는 폐단이 없어질 것이다. 본관(本館)의 영사(領事)·감사(監事)·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하여금 일제히 모여 절목을 강정(講定)해서 아뢰도록 하라. 아! 권강(權綱)이 아랫사람에게로 옮겨지면, 왕정(王政)이 진작되지 못하니, 그 계획과 그 결단을 윗사람이 하지 아니하고 누가 하겠는가? 아! 소신(小臣)들은 사사로운 뜻을 행하려고 감히 저지시키거나 방해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0일 갑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고 상신 서문중(徐文重)과 이이명(李頣命)이 종묘서 제거가 되어 수정(修正)한 의궤(儀軌)가 참고하고 증거로 삼을 만한데, 이미 여러 해 지나 그 뒤에 첨가하여 넣을 전례(典禮)도 많으니, 다시 첨가해서 수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신이 어제의 성교(聖敎) 가운데 기강과 권병의 비유에 대하여 우러러 권면할 것이 있습니다. 진평(陳平)이 말하기를, ‘옥사를 판결하고 곡식을 관리하는 데는 각기 주관하는 자가 있다.058) ’고 하였으니, 인군이 아래로 유사(有司)의 일을 행하면 도리어 번거롭고 잗단 데로 돌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오직 건강(乾剛)을 굳게 지켜 조금도 흔들리거나 빼앗기지 않은 후에야 이것이 바로 권병(權柄)이 되는 것입니다. 조정의 신하가 아무 생각없이 잘못을 저지른 경우에도 만약 기강을 진작시키는 사례로 간주하여 엄중히 조처하는 바가 있다면,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는 데 가까워져서 혹 성덕(聖德)에 결점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직신(直臣)을 억제하는 것을 가지고 기강(紀綱)을 진작시키는 것으로 간주하겠는가? 이는 바로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이 하는 일이며, 중주(中主) 또한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나도 마땅히 이를 힘쓸 것이다."
하였다.
여러 도(道)로 하여금 차사원(差使員)을 내보내어 서원의 훼철(毁撤)을 감독하게 하고, 아울러 향현사(鄕賢祠)와 영당(影堂)을 금지하도록 하였으니,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갑오년059) 이후에 설립한 서원을 훼철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여러 도(道)에서 아직도 죄다 훼철하지 않자, 이때에 이르러 조현명이 아뢰기를,
"사륜(絲綸)은 한번 내려지면 반드시 시행되어야 하는 것이니, 그런 후에야 법이 백성들에게 신임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신과 수령들이 용납하고 보호하고 숨기고 방치하는 폐단이 없지 않으니, 청컨대 여러 도로 하여금 별도로 차사원(差使員)을 정하여 직접 가서 훼철하게 해서 기필코 실질적인 성과가 있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만일 숨기거나 방치하는 자가 있으면 본율(本律)에 의거하여 감단(勘斷)하겠다."
하였다. 그 뒤에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선조(先朝)에서 서원을 훼철하도록 명하였을 때 주자(朱子)의 서원은 특별히 그대로 보존시키도록 명하였으며, 그 밖의 큰 유현(儒賢)과 큰 절의(節義)를 제향(祭享)하는 사원(祠院)도 그대로 보존시키게 한 것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에서 그대로 보존시키도록 명한 것은 그대로 두고, 그 나머지는 비록 주자의 서원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훼철해야만 할 것이다. 이 서원을 건립한 것이 어찌 높이고 사모하는 성심(誠心)에서 나왔겠는가? 그것을 빙자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이루려는 데 불과하니 도리어 선현(先賢)에게 오욕을 끼치는 것이다."
하였다. 이때 주자의 서원과 사당(祠堂)으로 각 고을에 있는 것이 모두 여섯 곳이었는데, 처음 세운 것이 갑오년 이후에 있었기 때문에 모두 훼철하게 하였으며, 그 외의 사원(祠院)으로 훼철된 것이 모두 1백 70여 곳이었다.
김성응(金聖應)을 다시 어영 대장에 임명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4월 21일 을묘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홍성보(洪聖輔)를 대사간으로, 박필재(朴弼載)를 집의로, 박치문(朴致文)을 장령으로, 윤동준(尹東浚)을 정언으로, 조상경(趙尙絅)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금오(金吾)와 추조의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여기(癘氣)가 치성하여 병든 죄수가 많았는데, 임금이 듣고 하교하기를,
"영어(囹圄)를 세척(洗滌)하는 것은 왕정(王政)에서 의도하는 바가 있는데, 인명(人命)을 소중히 여기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조금도 걱정이 없이 볼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이 명을 내린 것이다.
4월 22일 병진
관동(關東)의 회양(惟陽)과 관서(關西)의 삭주(朔州) 등지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비둘기 알만하였다.
이조 낭관의 선발을 이혁(釐革)하는 절목이 이루어졌다. 영의정 김재로, 좌의정 송인명, 우의정 조현명, 이조 판서 민응수, 참판 정우량이 의논하여 정한 것으로 절목이 9조이었는데, 이르기를,
"첫째, 신록(新錄) 때에 이조록(吏曹錄) 및 낭관이 주장하여 통망(通望)하던 규례를 이제부터 혁파한다.
둘째, 낭관은 모두 옥당(玉堂)으로써 윤차(輪次)로 비의(備擬)하며 비록 아당(亞堂)060) 이 독정(獨政)하더라도 궐원(闕員)에 따라 전차(塡差)한다.
셋째, 낭관이 주장하여 통망하던 것을 이미 혁파하였으니, 모든 청망(淸望)의 신통(新通)061) 에 대해서는 당상관이나 당하관을 물론하고 수당상관(首堂上官)이 주관하되, 또 반드시 아당(亞堂)의 인원이 갖추어지기를 기다려 통의(通擬)한다.
넷째, 전조의 낭청은 15개월을 채우고 실제로 60일을 근무해야만 비로소 승품(陞品)을 허락한다.
다섯째, 낭관 6원(員)을 반드시 한꺼번에 차출하기는 어려우니, 4원에 한하여 우선 차출한다.
여섯째, 시임(時任)의 참의와 낭청은 비록 간혹 적합한 자나 적합하지 않은 자가 있다 하더라도 집안에 있는 자에게는 글로써 묻지 말도록 한다.
일곱째, 앞서 호칭하던 존선생(尊先生)이란 고풍(故風)은 모두 혁파한다.
여덟째, 비록 시임(時任)인 옥당(玉堂)이나 춘방(春坊)의 관원이라 하더라도 구애하지 말고 비의(備擬)한다.
아홉째, 가랑청(假郞廳)은 계하(啓下)할 수 없다."
하였다.
한림(翰林)의 추천을 이혁(釐革)하는 절목이 이루어졌다. 춘추관 영사 김재로, 감사 송인명·조현명, 지사 정석오, 동지사 정우량이 의논하여 정한 것으로 절목은 모두 10조(條)이었는데, 이르기를,
"첫째, 한림(翰林)의 추천은 본관에서 홍문록(弘文錄)062) 의 예에 의거하여 모여서 논의하고 추천하여 권점(圈點)한 뒤에 도당록(都堂錄)063) 의 예에 의거하여 영사·감사·관각 당상이 다시 모여서 권점한다.
둘째, 한림으로 만약 3원(員)을 비의하였으면, 마땅히 회권(回圈)하되 이는 바로 법을 제정한 처음이니, 시임(時任)은 한 사람에 불과하도록 하고, 일찍 한림을 거친 사람은 겸춘추(兼春秋)의 예에 의거하여 직임이 당하관으로 있는 이로 하여금 함께 참여하게 하며, 혹시 가지런하지 않은 경우 시임을 추천하는 예에 의거하여 3원을 비의하면 거행한다.
셋째, 현재 참하관(參下官)으로 있는 자는 방목(榜目)의 권점을 살펴서 차점(次點) 이상을 뽑되, 수효를 제한하지 말고 뽑는다.
넷째, 추천받은 사람으로 상고(喪故)를 당했거나 상피(相避) 때문에 부직(付職)하지 않은 자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부직하게 한 뒤 구방(舊榜)을 논하지 말고 다시 신방(新榜)으로 의논하여 추천한다.
다섯째, 본관에서 추천하여 권점한 뒤에 영사·감사 및 춘추관 지사·동지사, 예문관 대제학·제학이 회권(回圈)하되, 양관(兩館)의 당상관이 비록 정원을 갖추지 못하더라도 춘추관의 당상관 2원(員)과 예문관의 당상관 1원이 나와서 참여하였으면 또한 반드시 거행한다.
여섯째, 관각(館閣)의 권점 또한 차점 이상을 뽑되, 부직(付職)에 있어서 동점(同點)인 경우에는 방차(榜次)로써 선후(先後)를 삼는다.
일곱째, 향(香)을 피우고 강독에 응하던 일 및 차례로 부직하는 개월 수의 한계는 한결같이 전례에 의거하되, 이미 회권을 거쳤으면 사체가 더욱 중대하니, 회천하는 한 가지 항목은 지금부터 혁파한다.
여덟째, 벼슬의 임기를 채우고 15개월 이상이 되어 사초(史草)를 정리하여 바친 인원(人員)은 차례를 따라 승륙(陞六)한다.
아홉째, 회천(回薦)하는 한 가지 항목은 이미 혁파하였으니, 추천에 실패한 경우는 논할 바가 아니며, 설령 소장(疏章)을 올리는 즈음에 헐뜯는 의논이 있더라도 그 지명(指名)하는 자를 제외하고는 함께 추천된 다른 사람은 또한 인혐(引嫌)하지 않아도 된다.
열째, 지금 추천하여 권점하는 것은 문득 분관(分館)과 같아서 한번 추천하는 가운데에서 누락되면 구방(舊榜)에서 다시 추천하는 길이 없으니, 합당한 인원(人員)을 일시(一時)에 모두 뽑되 관원(館員)으로 상피 및 상중에 있거나 파직된 사람은 홍문록의 예에 의거하여 일체로 천거한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때에 권세를 제멋대로 부리던 자가 사대부(士大夫)들이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음을 근심하여, 청요직(淸要職)의 권한을 모두 거두어 들이고 폐고(廢錮)된 친족을 끌어다 진출시켜 탕평(蕩平)하는 길을 넓히려고 하였었다. 그러나 발의하는 이가 없었는데, 마침 유수원(柳壽垣)이 관제 서승도(官制序陞圖)를 올리자, 송인명·조현명 등이 원경하와 함께 의논하여 마침내 극력 찬성하고, 신충(宸衷)으로 결단하기를 청하니, 이에 곧바로 낭관의 선발을 혁파하고 사관(史官)의 추천을 고치도록 명하였다. 김재로는 마침 휴가를 받아 고향에 있었는데, 후에 조정에 돌아와서 성상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음을 알고는 감히 다투지 못하고, 즉시 새로운 절목(節目)을 기초하여 정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9책 53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2면
【분류】인사(人事) / 사법-법제(法制) / 역사-사학(史學)
[註 062] 홍문록(弘文錄) : 홍문관(弘文館)의 교리(校理)·수찬(修撰)을 임명하기 위한 제1차 선거 기록. 먼저 7품 이하의 홍문관원의 뽑힐 만한 사람의 명단을 만들면 부제학(副提學) 이하 여러 사람이 모여 적합한 사람의 이름 위에 권점(圈點)을 찍는데, 이것을 기록하는 것을 홍문록이라 함.[註 063] 도당록(都堂錄) : 의정부(議政府)에서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수찬(修撰)을 선임하기 위한 제2차 추천 기록. 의정(議政)·이조 판서(吏曹判書)·참찬(參贊)·참의(參議) 등이 홍문록(弘文錄)에 오른 사람 가운데서 뽑음.
사신은 말한다. "이때에 권세를 제멋대로 부리던 자가 사대부(士大夫)들이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음을 근심하여, 청요직(淸要職)의 권한을 모두 거두어 들이고 폐고(廢錮)된 친족을 끌어다 진출시켜 탕평(蕩平)하는 길을 넓히려고 하였었다. 그러나 발의하는 이가 없었는데, 마침 유수원(柳壽垣)이 관제 서승도(官制序陞圖)를 올리자, 송인명·조현명 등이 원경하와 함께 의논하여 마침내 극력 찬성하고, 신충(宸衷)으로 결단하기를 청하니, 이에 곧바로 낭관의 선발을 혁파하고 사관(史官)의 추천을 고치도록 명하였다. 김재로는 마침 휴가를 받아 고향에 있었는데, 후에 조정에 돌아와서 성상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음을 알고는 감히 다투지 못하고, 즉시 새로운 절목(節目)을 기초하여 정하였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모여서 의논한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고, 이조 판서 민응수(閔應洙)로 하여금 이조 낭관 선발 절목을 읽게 하였다. 민응수가 읽기를 마치고, 아뢰기를,
"전조의 낭관이 주장하던 당하관의 통청(通淸)에 대하여……."
하면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금이 크게 노여워하여 말하기를,
"전조 낭관의 통청은 이미 혁파하였는데, 어찌 감히 다시 통청에 관한 일을 말하는가?"
하고, 민응수를 종중 추고하도록 명하자, 민응수가 감히 말을 끝내지 못하였다. 임금이 한 조목을 첨가하여 쓰도록 명하기를,
"이미 전조 낭청의 통청을 혁파하였으니, 정랑(正郞)과 좌랑(佐郞)은 각기 3원(員)을 배치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적당하게 줄이는 때를 당하여 임시로 줄이는 예에 따라 4원(員)으로 제한하여 차출(差出)하되, 그 관장하는 관사에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상고하여 그것도 손질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또 동지춘추관사 정우량에게 명하여 한림을 추천하는 절목을 읽도록 하였다. 정우량이 읽기를 마치자 임금이 그것을 검열 황경원(黃景源)에게 물었는데, 황경원이 대답하기를,
"대저 사관(史官)의 추천은 다만 적당한 사람을 얻는 것으로 주장을 삼아야 하는데, 이미 적당한 사람을 얻었다면 선진(先進)의 문(門)에 두루 미쳐서 그 가부(可否)를 물은 후에 향(香)을 피우고 천지(天地)에 고하니, 그것이 얼마나 엄격합니까?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지금의 폐단을 보고서 매우 싫어하셔서 마침내 옛날의 제도를 고치셨으니, 이는 밥을 먹다가 목이 메이는 것으로 인하여 밥을 먹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밥을 먹다가 목이 메이는 것으로 인하여 밥을 먹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비유이다."
하였다. 황경원이 아뢰기를,
"사관의 선발을 엄격히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옛날의 제도를 보존한다 하더라도 가려서 뽑는 것이 오히려 부족할까 근심이 됩니다. 진실로 혹시라도 신법(新法)이 여러 당인(黨人)의 마음을 만족하게 할 수 없다면, 전하께서 앞으로 또 고치시겠습니까? 그리고 사관이 각기 사사로운 마음으로 서로 통하게도 하고 막기도 하면서 어지러이 승부를 다투는 것은 불법한 죄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림(翰林)이 이른바 불법한 죄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옳다. 다만 옛날에는 사실(私室)에서 물었고 지금에는 공청(公廳)에서 회권(回圈)하니, 실제로 사관(史官)의 선발은 그전과 같을 뿐이다."
하고, 임금이 또 옥당(玉堂) 이성중(李成中)과 원경순(元景淳)에게 묻기를,
"원임 사관(原任史官)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이성중의 대답은 황경원의 말과 같았고, 원경순은 대답하지 않았다. 임금이 또 두 조목(條目)을 첨가하여 쓰도록 명하기를,
"1. 지금 고쳐서 청한 절목(節目)은 폐단으로 인해서 개혁해서 회천(回薦)을 변경하여 회권(回圈)하게 한 데 불과할 뿐이니, 추천하는 일은 사체를 엄중히 하도록 힘써야 한다.
1. 지금 개정한 것은 야료를 막고 사국(史局)을 소중히 여기는 뜻이며, 이미 널리 추천하게 한 것 또한 모두 정원을 갖추게 한 것이니, 겸춘추(兼春秋)의 입직(入直)은 다시 논할 것이 없도록 한다."
하였는데, 승지가 쓰기를 마치자,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이번에 법을 변경시킨 것은 바로 천지(天地)에 사심(私心)이 없는 덕(德)입니다. 그러나 홍문록과 대간을 통청(通廳)하는 것 또한 폐단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두 가지 새로운 제도로써 지금 세대의 폐단을 모두 구제할 것으로 여기신다면 신은 아마 일월(日月)의 밝음으로도 비치는 데 빠진 부분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은 폐단이 진실로 많지만 끝내 두 가지 폐단의 심한 것보다는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경장(更張)한 것이다."
하였다.
4월 23일 정사
이천보(李天輔)·김한철(金漢喆)을 이조 정랑으로, 신사건(申思建)·이성중(李成中)을 좌랑으로 삼았는데, 네 사람이 맨 먼저 전조 낭관이 되었다. 그러나 전조 낭관이 이로부터 용관(冗官)이 되었다.
검열 황경원(黃景源)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른바 한림(翰林)을 추천하는 것은 비록 열 사람이 모여서 의논하더라도 반드시 귀일(歸一)되기를 기다린 뒤에야 추천하기 때문에,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는 것은 자기 양심을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권점(圈點)하는 자가 각각 자기 뜻대로 권점하여 권점이 많은 자는 참여하게 되고 권점이 적은 자는 참여하지 못하게 되는데, 권점의 많고 적음이 가끔 자기의 견해 밖에서 나왔으면, 그것을 장차 자기 양심을 속인 추천이라 하여 신에게 맹서하는 축문을 읽어야 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감히 알지 못하는 바입니다. 조종조(祖宗朝)로부터 사관을 의논하여 추천하면서 임금에게 아뢰지도 않고 재상에게 모의하지도 않는 것은 그 의미가 깊고도 은미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로 재상으로 하여금 그 권점을 관장하고 그 사람을 배치하게 하니, 불행히도 권간(權奸) 가운데 조정(朝廷)을 담당하여 그 자취를 천백세(千百世) 뒤에 숨기려고 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장차 사사로운 뜻으로 그 사이에서 뽑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면서 전수하는 길이 점점 넓어져서 사법(史法)을 더럽히고 문란시키는 데 이른 뒤에야 그칠 것입니다. 지금은 성명(聖明)께서 위에 있으니 진실로 이런 염려가 없겠습니다만, 무릇 법을 제정할 적에는 진실로 한 시대만 행할 수 있게 해서는 안되니, 염려하는 도리는 멀리 내다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 인조조(仁祖朝) 임오년064) 에 의논하는 자가 망령되게 이이첨(李爾瞻)이 관각(館閣)에서 추천을 주관한 사례를 인용하여 사국(史局)에서 추천하는 법을 혁파하려고 하자, 고 상신 최명길(崔鳴吉)이 불가하다고 말하니, 인조께서 마침내 최명길의 의논을 따랐는데, 이는 진실로 전하께서 당연히 본받아야 할 바입니다."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황경원을 불러다 묻기를,
"어제 새로 만든 제도를 그대에게 물은 것은 사관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지금 법이 벌써 갖추어졌는데도 그대가 또 회권(回圈)의 불편함을 성대하게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이때 임금이 몹시 노하자, 측근의 신하들이 두려워하였는데, 황경원이 대답하기를,
"사관(史館)에서 추천하는 법은 지극히 엄중한데 지금 회권(回圈)하는 즈음에 본관(本館)에서 권점(圈點)하지 않은 자를 묘당에서는 간혹 권점하기도 하고, 본관에서 권점한 자를 묘당에서 간혹 권점하지 않기도 하여 선후(先後)의 차례가 바뀌고, 취하고 버리는 것이 귀취(歸趣)가 다르게 되면 본관에서 의논하여 추천하는 뜻이 도리어 어디 있겠습니까? 마침내 회천(回薦)하여 서로 가하다 가하지 않다고 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그럴 듯하나, 이는 관각(館閣)에서 주장하여 추천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그리고 그대가 상소에서 맹서하는 글을 읽지 않으려고 할 것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자, 황경원이 대답하기를,
"신이 듣건대, 추천하는 경우 한 사람이라도 불가하다고 말을 하면 열 사람이 비록 가하다고 하더라도 기용할 수 없지만, 권점(圈點)하는 경우 두 사람이 만약 점을 찍었으면 한 사람이 비록 점을 찍지 않았다 하더라도 오히려 장차 기용할 것이니, 권점이 이루어진 뒤에 저 권점하지 않은 자는 반드시 아무개가 권점을 받은 것은 내가 추천하고 싶었던 자가 아니라고 여겨 기꺼이 맹서하는 글을 읽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의 뜻이 조금 풀리었다.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이미 권점하는 일에 참여하고서 내가 추천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그대가 이이첨의 일을 억지로 끌어다가 새 법을 헐뜯으려고 하니, 매우 무엄하다. 그러나 내가 이미 그대의 문학을 아깝게 여겨 법으로 조치하지 않을 뿐이다."
하고, 인해서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황경원이 나가자, 임금이 승지 임정(任珽)에게 유시하기를,
"내가 처음에 생각하기로는 황경원이 나의 새 법을 어지럽힌다고 여겼었는데, 지금 그의 말을 들이니 역시 옳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회천(回薦)과 회권(回圈)은 동일한데도 당상관의 회권을 오히려 불만스럽게 여기니, 애당초 회시(會試)하려고 한 뜻은 대체로 이 때문이다. 한림을 추천하는 회권은 절목(節目)에 의거하여 그대로 두고 당상관의 회권은 회시로 개부표(改付標)065) 하여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처음으로 문신의 제술법(製述法)을 제정하고 하교하기를,
"봄·가을의 중월(仲月)에 당하관인 문신의 제술(製述)을 품지(稟旨)하여 시행하되, 〈임금이〉 친히 임어하지 않는 경우 명관(命官)066) 이 제목(題目)을 쓰되, 과제(科題)하는 예에 의거하여 수점(受點)하고, 고관(考官)의 수효도 전강(殿講)의 예에 의거하고, 참고관(參考官)은 모두 당상관으로 비의(備擬)하고, 아무 연고 없이 참석하지 않은 사람과 시간을 넘긴 자는 금추(禁推)하게 하라."
하였다.
4월 24일 무오
조원명(趙遠命)을 대사헌으로, 한익모(韓翼謨)를 교리로, 김상중(金尙重)을 부수찬으로, 홍창한(洪昌漢)을 응교로 삼았다.
4월 25일 기미
어떤 별이 진성(軫星) 아래로 흘러갔다.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서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한림 소시법(翰林召試法)을 제정하였다. 처음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사관을 강독(講讀)에 응하게 하는 것은 실제로 형식에 불과하니, 제술(製述)을 시험하여 인재를 뽑는다면, 오히려 강독에 응하게 하는 것보다 낫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회시(會試)는 박절한 듯하다."
하자, 동지춘추관사 정우량이 아뢰기를,
"옛날에도 지제교(知製敎)의 시험이 있었으니 공평한 도리를 삼으려고 한다면 회시(會試)만한 것이 없습니다. 비록 시골 사람으로 말하더라도 사환(仕宦)할 수는 없지만 과거(科擧)는 볼 수가 있는데, 과제(科制)에다 권점법(圈點法)을 두게 되면 영남과 호남의 사람들이 어떻게 참여할 리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회시하는 법이 공정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고, 마침내 회시의 이름을 고쳐서 소시(召試)로 하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에게 명하여 절목(節目)을 의논해서 정하도록 하였는데 모두 여덟 조목이었다. 이르기를,
"첫째, 소시(召試)의 처소는 시어소(時御所)의 전정(殿庭)에서 설행한다.
둘째, 이미 소시하는 전례를 본받아 당일에 응시하는 인원을 패초(牌招)하여 소시하되, 패초를 어기거나 지방에 있다고 핑계대는 자는 나추(拿推)한다.
셋째, 시취(試取)할 때 대신 및 관각 당상관과 춘추관 당상관이 함께 나아가 참여하며, 대독관 4원(員)은 옥당(玉堂)의 관원으로 차출한다.
넷째, 양사(兩司)에서 각각 1원(員)씩 감시관(監試官)으로 월대(月臺)에서 마주 앉아 일에 따라 규검(糾檢)하되, 시관과 섞여서 있지 않도록 한다.
다섯째, 시험에 나아간 인원은 중시(重試) 때의 복색(服色)을 입는다. 시험에 쓸 종이·붓·벼루는 공조와 장흥에서 진배(進排)하고 점심은 응판소(應辨所)에서 영(令)을 기다린다.
여섯째, 시험에 나아간 인원이 스스로 시권(試券)을 써서 올리면 뒤섞어서 축(軸)을 만들고 글자를 채워서 역서(易書)067) 한다.
일곱째, 시관이 응시한 사람을 인솔하여 숙배(肅拜)하는 일 및 수권관(收券官)·역서관(易書官)·사관(査官)·지동관(枝同官) 등의 일은 한결같이 전시(殿試)의 예에 의거하여 거행한다.
여덟째, 시험에 나아간 인원의 사환군(使喚軍)은 해조(該曹)에서 원래의 군사를 지정하여 지급하고 잡인은 출입할 수 없게 한다."
하였다.
승지 원경하(元景夏)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회권(回圈)을 회시(會試)로 고친 임금의 사려(思慮)가 깊고도 원대하여 신은 삼가 우러러 흠모합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주관하는 신하가 두루 생각하고 상세히 헤아리지 못하여 그들이 마련한 절목이 또 잘못 가혹하게 되었으니, 속박하고 조절하는 것이 자못 장옥(場屋)보다 심합니다. 거자(擧子)에게는 장차 천고에 직필(直筆)의 권한을 주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을 먼저 의심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옛날 송(宋)나라 조정에서 관시(館試)를 베풀었을 때 간혹 응시하지 않은 자가 있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고상하여 중용(中庸)의 행위가 지나친 사람이므로, 진실로 본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간사한 짓을 한 것으로 유사(有司)에게 의심을 받고서도 부끄럼을 무릅쓰고 응시하는 경우 자중(自重)하는 선비는 그렇게 하고 싶어허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경하의 뜻이 비로소 나와 같다. 그러나 지금에야 이 말을 하는 것은 마음속으로 이리저리 굽혔다 폈다 한 것이니 매우 옳지 못하다."
하고, 비답이 없었다. 또 하교하기를,
"임금이 비록 금(金)을 돌(石)이라고 하더라도 아래에 있는 자들은 마땅히 준행해야만 하니, 진실로 응시하지 않으면 저절로 나라의 형법(刑法)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수십 인이 모두 응시하지 않는다면 죄다 처벌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상앙(商鞅)068) 이 진(秦)나라 법을 시행한 것과 같이 한다면 비록 수십 인이라도 모두 처벌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니, 지금 나의 법은 반드시 시행하고야 말겠다. 다만 조절(操切)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니, 대감(臺監)·선반(宣飯)·역서(易書)·조사(調査)·지동(枝同)하는 일은 고치도록 명하는 것이 적당하다."
하였다.
4월 29일 계해
사간 권현(權賢)이 상소하기를,
"관제(官制)를 변통(變通)한 것은 바로 편당을 미워하는 뜻에서 나왔으니, 누군들 성상의 고심을 모르겠습니까만, 그 직무가 사국(史局)에 있는 자가 처음으로 하루아침에 3백 년을 내려온 관규(館規)를 변경시키는 것을 보고 법을 집행하는 의리에 있어서 어찌 한 마디 논란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그것이 그렇지 않음을 타파하여 성상의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할 따름인데, 어찌 반드시 법을 제정하는 초기에 먼저 성색(聲色)을 더하여 도유우불(都兪吁咈)069) 하는 아름다운 일을 손상시키십니까? 이번의 견책과 처벌은 마침내 타당하지 못한 데 관계됩니다. 신은 황경원(黃景源)을 파직하도록 하신 명을 도로 거두심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한림을 지나치게 비호한다. 임금의 이목(耳目) 구실을 하는 사람이 이와 같은데 법이 잘 시행되었는가?"
하였다.
장령 박치문(朴致文)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공흥 병사 한범석(韓範錫)은 일찍이 함경도 병사의 임무를 맡아 이미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책망이 많았으며, 본직에 임명되어서도 물의(物議)가 있었지만, 모르는 체 하면서 부끄럼을 무릅쓰고 부임하여 군정(軍政)을 던져 버리고 오로지 재물 탐하는 것을 일삼고 있으니, 마땅히 파직해야 합니다. 개천 군수(价川郡守) 손진민(孫鎭民)은 아객(衙客)이 폐단을 일으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유혹하자, 행장을 꾸려 영문(營門)으로 보내어 자기의 치적(治績)을 칭송하게 하였는데, 대간의 상소가 준엄하게 발론되었으나, 지금까지 주저앉아 있으니, 마땅히 체개(遞改)해야 합니다. 숭릉 참봉(崇陵參奉) 이달중(李達中)은 본래 경신년070) 의 여얼(餘孼)로서 사류(士類)에게 버림받았으니, 관직을 삭탈하여 도태시켜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한범석과 손진민의 일은 지나치다. 이달중은 그의 할아버지의 관직을 회복시켰으니, 그 손자의 죄를 탕척하여 기용하는 것이 무슨 상관 있겠는가?"
하였다.
금군 도시(禁軍都試)를 행하였다. 영의정 김재로 등이 각기(各技)를 시취(試取)하였다. 숙종(肅宗)을미년071) 에 도시를 행하였었는데, 그 뒤 26년 만에 처음으로 행하니, 도태된 금군으로 원망하고 비방하는 자가 많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개성 유수 서명구(徐命九)가 송도(松都)의 형승(形勝)과 무력(武力)이 강해야 한다는 데 대해 말하고, 이어서 군량미 2만 곡(斛)을 비치하여 성(城) 쌓는 일을 다스릴 것을 청하였는데, 여러 대신들이 이를 어렵게 여겼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성을 쌓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군량은 없을 수 없다."
하고, 마침내 먼저 참착하고 요량하여 나누어 주도록 명하였다.
다시 이익보(李益輔)를 예문관 대교로, 김상복(金相福)·황경원(黃景源)을 검열로, 김한철(金漢喆)·정이검(鄭履儉)·이성중(李成中)·원경순(元景淳)·이종적(李宗迪)을 별겸춘추로 삼았는데, 장차 본관(本館)의 회권(會圈)을 시행하기 위해서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장차 회권을 행하려 하는데, 일찍이 사관을 거치고서 추천에 실패한 자는 반드시 권점(圈點)에 참여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내가 반드시 시행하도록 한 뒤에야 그만두겠다. 만약 명에 응하지 않으면 내가 마땅히 대명(大明)의 관제(官制)를 적용하여 문벌과 지위의 높고 낮음을 논하지 않고 한결같이 모두 재능을 시험하겠다. 만약 대명의 관제를 그르게 여긴다면, 이는 불경한 것이다. 제가 어찌 감히 근거없는 의논으로 군부(君父)와 승부를 다투려 할 것이겠는가?"
하였다. 황경원 등이 부름을 어기고 들어오지 않자, 임금이 크게 노하여 승정원에 명하여 모든 사관이 패초를 어긴 경우 임금에게 아뢰지 말고 소장(疏章)도 올리지 말도록 하였는데, 이에 황경원 등이 마침내 명에 응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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