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4권, 영조 17년 1741년 10월

싸라리리 2025. 9. 25.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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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임진

삭제(朔祭)로 인하여 대훈(大訓)을 짓고 무안(誣案)을 불살라 버린 일로써 태묘(太廟)에 고(告)하고 이어서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는데, 고묘문(告廟文)과 반교문(頒敎文)은 모두 임금이 직접 지은 것이었다. 이조 판서 서종옥(徐宗玉)과 병조 판서 김성응(金聖應)을 앞으로 나오게 하고 하교하기를,
"사람을 등용하는데 있어 반드시 호대(互對)로 할 필요는 없으니, 만일 등용할 만한 사람이 있다면 비록 한편의 사람을 백 번 들어 쓴다 하더라도 무슨 방해될 것이 있겠는가? 오늘의 처분(處分)이 있은 뒤에는 등용하고 버리기를 공정하게 하고 사사롭게 하는 것이 진실로 전조(銓曹)에 있으니, 그것을 각각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형조 참판 원경하(元景夏)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臣)이 고독하게 혼자 있어 외롭게 살아가며 벗도 없었는데, 이제 갑자기 별도로 한 당(黨)을 만든 것으로써 유신(儒臣)의 연척(筵斥)이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신이 오광운(吳光運)을 천진(薦進)하였다고 말하였는데, 대저 추천하여 진용시키는 것은 승선(承宣)이 감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전후(前後)의 연석(筵席)에서 그 성명(姓名)이 일찍이 신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으니, 어찌 감히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송(宋)나라의 여대방(呂大防)222)  과 명(明)나라 섭향고(葉向高)223)  는 신이 배우기를 원하는 자입니다. 당(黨)이 없는 것으로써 임금을 섬기고자 하다가 도리어 당(黨)을 만든다는 것으로써 비방을 만났습니다. 이러한 당명(黨名)을 짊어지고 나니 스스로 변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김한철(金漢喆)은 신의 평생(平生) 친구입니다. 어찌 신을 해치려고 그랬겠습니까? 저 자신을 반성하는 바이며 많은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 않습니다."
하고, 이어서 사직(辭職)하니, 비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2일 계사

어떤 별이 북하성(北河星) 아래로 흘러갔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성지(聖志)를 분발하시라는 뜻으로써 차자(箚子)를 올려 진면(陳勉)하니, 유중(留中)하고 내리지 않았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일전에 청대(請對)한 것은 진실로 혈성(血誠)에서 나온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상신(相臣)이 연석(筵席)에서 ‘수상(殊常) 가추(可追)’란 네 글자로써 신의 죄를 성토(聲討)하기를 매우 심하였다고 합니다. 신은 모르긴 하지만 어떤 흉악한 사람이 신의 당일(當日)의 연주(筵奏)에 대하여 상관(上款)엔 ‘수상(殊常)’이라는 두 글자를 덧붙이고 하관(下款)에는 ‘가추(可追)’라는 두 글자를 덧붙여서 상신으로 하여금 신의 종족(宗族)을 멸망(滅亡)시킬 죄안(罪案)으로 만들게 하는 것입니까? 신이 말하지도 않았던 네 글자를 누가 과연 교묘히 기만하여 경동(驚動)시켜 상신이 전하의 앞에서 진달하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까? 더군다나 이 구어(句語)는 관계(關係)되는 바가 어떠합니까? 성상께서 이미 원래 이런 말이 없었던 것으로써 하교하셨으니, 진실로 마땅히 말을 지어낸 죄인(罪人)을 찾아내야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그때에 진달한 바는 이미 그것이 진심에서 나온 것인 줄 알고 있으니 근거없이 와전(訛傳)된 말을 가지고 다시 어찌 실랑이를 벌일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이어 그 상소를 되돌려 줄 것을 명하였다.

 

10월 3일 갑오

어떤 별이 누성(婁星) 아래로 흘러갔다.

 

박천군(博川郡)에 천둥하였다.

 

정옥(鄭玉)을 정언으로, 이제원(李濟遠)과 김상적(金尙迪)을 교리로, 이윤신(李潤身)을 보덕(輔德)으로, 성범석(成範錫)을 문학(文學)으로, 윤득재(尹得載)를 사서(司書)로, 정휘량(鄭翬良)을 겸사서(兼司書)로 삼았다.

 

10월 4일 을미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의 상소에, 신이 그 연주(筵奏)를 제척(提斥)한 데 대해 분노를 품고 자의(恣意)로 질책하였으니, 신은 놀랍고 한탄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대개 중신(重臣)의 진달한 바는 비록 이 네 글자가 없었다 하더라도 진실로 망발(妄發)을 면하지 못하며 가령 있었다 하더라도 또한 망발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찌 종족(宗族)을 멸망시킬 죄안(罪案)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성상께서 듣지 못했다고 하교하셨으니 단지 기주(記注)의 잘못 들은 것에 돌릴 수 있을 뿐인데, 어찌하여 장황하게 협륵(協勒)함이 이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무슨 개체(介滯)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윤심형(尹心衡)을 겸필선(兼弼善)으로 삼았다. 윤심형은 고결(高潔)하여 절행(節行)이 있어 조정(朝廷)에 의리(義理)가 펼쳐지지 못한 것으로써 무릇 15년 동안을 숨어 살며 벼슬하지 않았다. 양양 부사(襄陽府使)를 제수하게 되자, 또 부임하지 않고 말하기를,
"외관(外官)은 내직(內職)의 〈다음〉 순서(順序)입니다."
하였으며,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승진되어서도, 또한 나가지 않았다.

 

10월 5일 병신

판부사(判府事) 유척기(兪拓基)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처음에는 자량(自量)하여 사람들의 뒷전에 서질 못하였고 또 성의(誠意)를 축적하여 천심(天心)을 감동시키지 못한채 끝내는 당비(黨比)로 성상을 기만하는 죄과에 스스로 빠졌습니다. 이제 새로이 대처분(大處分)이 있음으로 해서 성급히 몰염치하게 다시 나아가려고 한다는 것은 사리(事理)에 구해 볼 때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 일을 가지고 경(卿)은 어찌하여 개체(介滯)하는가?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수규(首揆)의 차자(箚子)와 영성(靈城)의 상소는 연설(筵說)이 와전(訛傳)된 결과가 아님이 없으니, 그 당시의 주서(注書)를 마땅히 견파(譴罷)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박문수의 일은 시의(時議)가 이해하지 못하고 대항하기를 너무 심하게 하기 때문에 분개(憤慨)가 극도에 달한 나머지 말을 골라서 하지 않은 것이 많았으므로 체통(體統)에 관계된 바가 있으니, 박문수 또한 마땅히 추고(推考)해야 합니다."
하니, 또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천(翰薦)의 절목(節目) 가운데서 처음에는 겸사(兼史)를 영구히 폐지하려고 하였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만일 상번(上番)과 하번(下番)이 모두 빌 때를 만난다면 좌사(左史)와 우사(右史)를 갖추지 않을 수 없으니, 겸사를 영구히 폐지하라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삼조(三曹)224)  의 문랑관(文郞官)과 승문원(承文院)의 판교(判校)와 종부시(宗簿寺)의 정(正)은 다 으레 춘추 사관(春秋史官)을 겸직(兼職)합니다. 하번이 만일 경출(徑出)하였는데 상번이 고규(古規)를 인용하여 직숙(直宿)을 교체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겸사가 숙직을 교대하는 일을 어찌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뒤로부터는 하번이 만일 여러 사람이 함께 아는 정세(情勢)가 있으면 우위(右位)가 숙직을 교체하는 일로 정식(定式)하되 겸사도 또한 영구히 폐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겸사를 영구히 폐지한다는 한 사항은 절목(節目) 가운데 부표[標]하도록 하라."
하였다.

 

판의금(判義禁) 김시형(金始炯)이 말하기를,
"임인년225)  에 어지럽게 공초(供招)한 무리들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을사년226)  의 처분(處分)에 따라서 시행하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문안(文案)을 가져와 상고해 보았더니 정미년227)  에 도로 역안(逆案)에 넣은 자가 13인인데, 아홉 사람은 연좌(緣坐)의 율(律)로써 시행하고 네 사람은 논죄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의 대훈(大訓) 가운데 김용택(金龍澤) 등 다섯 사람을 모두 역적(逆賊)으로써 단정하라는 하교가 있으시니 연좌시킬 것인가, 방송(放送)할 것인가의 한 사항은 품정(稟定)한 연후에야 거행할 수 있습니다."
하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말하기를,
"주상으로부터 이미 역률(逆律)로써 시행할 수 없다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대개 모역(謨逆)하려는 마음을 가졌거나 역심(逆心)을 품었거나 주상(主上)을 무함한 역적은 다 단지 그 몸을 처형하는 데 그칠 뿐입니다. 지금 만일 그대로 연좌에 배치한다면 이것은 임인년의 역안으로써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니, 결단코 그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정미년에 처분을 바꿀 때에 김용택의 무리에 대해서는 연좌의 율(律)을 시행하지 않았던 것은 대개 봉입(捧入)하지 않고 지만(遲晩)했기 때문입니다. 정인중(鄭麟重)과 심상길(沈尙吉) 무리의 연좌를 지금 만일 풀지 않는다면 김용택·이천기(李天紀)의 연좌도 마땅히 다시 거행하여야 합니다. 이제 와서 역안을 불살라 버린 뒤에 다시 정미년에도 하지 않았던 것을 한다는 것은 모르긴 하지만 옥체(獄體)에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처분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임인년의 역안을 불에 태워 버리는 것은 해부(該府)에서 마땅히 차제(次第)로 봉행(奉行)하여야 할 것이나, 다만 김용택·이천기·이희지(李喜之)·심상길·정인중의 이러한 불령(不逞)한 후손(後孫)들을 어찌 상례(常例)로 처리할 수가 있겠는가? 전리(田里)에 방축(放逐)하여 상인(常人)에 끼이지 말도록 하라."

 

10월 7일 무술

어떤 별이 천원성(天苑星) 아래로 흘러갔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이헌(李瀗)·홍우채(洪禹采)·김성절(金盛節)·이정식(李正植)·김창도(金昌道)·정우관(鄭宇寬) 등의 연좌(緣坐)된 형제(兄弟)·처첩(妻妾)·자녀(子女) 무릇 36인(人)을 방송(放送)하는 것과 심상길(沈尙吉)·정인중(鄭麟重)·이희지(李喜之) 등의 연좌된 형제·처첩·자녀 무릇 9인을 모두 향리(鄕里)에 방축(放逐)하는 일을 각도(各道)에 분부(分付)하였는데, 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 등의 연좌는 정미년에 이미 거론하지 말라는 분부가 있었기 때문에 본부(本付)에 재록(載錄)된 자가 없습니다. 마땅히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고적(考籍)하게 하여 똑같이 전리(田里)에 방축(放逐)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0월 8일 기해

안주(安州)에 크게 천둥하였다.

 

정언(正言) 어석윤(魚錫胤)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태학(太學)에서 삼성(三聖)의 사원(祠院)으로써 누차에 걸쳐 번거롭게 호유(號籲)하였으니, 마땅히 뜻을 굽혀서 거기에 따라 사기(士氣)를 펴 주어야 합니다."
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권혁(權爀)을 대사간으로, 이광운(李光運)을 집의로, 김상중(金尙重)을 부수찬으로, 이형만(李衡萬)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고 교리(校理) 김민택(金民澤), 고 집의(執義) 조성복(趙聖復)의 관작(官爵)을 회복시킬 것을 명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10월 9일 경자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승지(承旨) 오수채(吳遂采)가 말하기를,
"을사년의 일기(日記)를 가져와 상고해 보니, 조흡(趙洽)·김성절(金盛節)·김창도(金昌道)·이정식(李正植)·유취장(柳就章) 등 다섯 사람은 다 무고(誣告)의 율(律)로써 시행하였습니다."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유취장은 궁성(宮城)을 호위(扈衛)하는 일로써 다른 사람의 원고(援告)를 입고 곤장을 이기지 못하여 승복(承服)하였는데, 일자(日字)가 서로 틀리는 것을 그 당시에 이미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무복(誣卜)인데, 무고의 율로써 시행한 것은 진실로 잘못된 것입니다. 무복으로써 시행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한결같이 을사년의 처분(處分)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처분을 굳이 개역(改易)할 필요가 없으니, 한결같이 을사년의 처분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과거(科擧)의 잡란(雜亂)한 폐단을 말하고, 주상께서 친히 과시(課試)에 임하여 그 능부(能否)를 조사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각박(刻薄)한 정치를 하고자 하지 않는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12일 계묘

임금이 대신(大臣)과 북도(北道)의 구관 당상(句管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북도의 백성들을 우려하여 밤에 여러 신하들을 불러 진구(賑救)의 방책을 물었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요사이 추위가 매섭고 풍색(風色)이 더욱 높으니 멀리 북도(北道)의 백성들을 생각할 때 추위의 고통이 마치 내 몸에 있는 것 같다. 저 남도(南道)를 바라볼 때 운송(運送)해 올 기한이 막연(漠然)하니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유정지공(惟正之供)228)  을 구애하지 말고 잘 구획(區劃)하도록 하며, 독운 어사(督運御史)와 도신(道臣)은 아직까지 실어 보낸다는 소식이 없으니 매우 지체되는 데 관련된다. 모두 추고(推考)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4일 을사

박필재(朴弼載)를 보덕(輔德)으로, 이승원(李承源)을 호조 참판으로 삼았다.

 

임금이 자전(慈殿)의 명(命)으로써 관동(關東)·관북(關北)의 삭선(朔膳)229)  과 방물(方物)230)  을 정지시켰다. 이때 동북(東北) 지방에 계속 흉년(凶年)이 들어 각전(各殿)의 물선(物膳)을 정지시켰으나, 유독 동조(東朝)231)  에게는 정지시키지 않았었는데 왕대비(王大妃)가 이것을 듣고 모두 정지시킬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자성(慈聖)께서 정봉(停封)하라는 하교가 계셨으니 마땅히 성덕(盛德)을 유양(揄揚)하여야 할 것이다. 동북 지방의 삭선·방물을 특별히 정봉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6일 정미

임금이 경덕궁(慶德宮)에서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10월 17일 무신

윤득화(尹得和)를 대사헌으로, 한사득(韓師得)을 대사간으로, 이윤신(李潤身)을 집의로, 이도원(李度遠)을 사간으로, 이연덕(李延德)과 민택수(閔宅洙)를 장령으로, 이기언(李箕彦)을 지평으로, 이천보(李天輔)를 헌납으로, 이형만(李衡萬)을 정언으로, 이주진(李周鎭)을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10월 18일 기유

서명빈(徐命彬)을 대사헌으로, 이정욱(李挺郁)을 사간으로, 박필재(朴弼載)를 집의로, 남태혁(南泰赫)을 장령으로, 유언국(兪彦國)과 남유용(南有容)을 정언으로 삼았다.

 

헌부(憲府) 【지평 이기언(李箕彦)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능침(陵寢)의 제향(祭享)은 사체(事體)가 지중(至重)한데도 헌관(獻官) 및 집사(執事)를 전혀 택차(擇差)하지 않고 위장(衛將)·순장(巡將)·무겸(武兼)·훈련 봉사(訓鍊奉事)로써 구차하게 채워서 차송(差送)합니다. 청컨대 해조(該曹)에 신칙(申飭)하여 각별히 택차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기랑(騎郞)232)  은 바로 청관(淸官)에 통하는 계제(階梯)인데 근래에 외잡(猥雜)스러움이 많습니다. 김수(金修)·박창조(朴昌朝)·한제(韓濟)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으니, 마땅히 모두 태거(汰去)시켜야 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10월 19일 경술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장령 이제담(李齊聃)이 상소하여 기민(饑民)의 유리(流離)·사망(死亡)하는 상황을 말하면서 어사(御史)를 보내어 도신(道臣)을 신칙(申飭)하고 수령(守令)을 처벌하며 공적(公糴)을 늦추고 사채(私債)를 금하며 포흠(逋欠)을 정지하고 부세(賦稅)를 감할 것과 각역(各役)의 응봉(應捧)할 자를 모조리 정면(停免)하라고 청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그 말이 백성을 위한 것이므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측연(惻然)한 마음이 들게 되니 구획(區劃)을 잘하고 못하는 것은 바로 묘당(廟堂)의 책임이다."
하였다. 또 전조(銓曹)에 명하여 무릇 북도(北道)의 문관(文官)·무관(武官)의 객지(客地)에 벼슬하는 사람을 특별히 수용(收用)하여 진휼(軫恤)의 뜻을 보이게 하였다.

 

10월 20일 신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이선행(李善行)을 보덕(輔德)으로, 윤득경(尹得敬)을 겸사서(兼司書)로, 정준일(鄭俊一)을 겸필선(兼弼善)으로, 조명채(曹命采)를 설서(說書)로 삼았다.

 

포도청(捕盜廳)에 명하여 익명(匿名)으로 괘서(掛書)한 자를 살펴 체포하게 하였다. 생원(生員)·진사(進士)의 방(榜)을 내거는 날에 대궐 밖의 홍마목(紅馬木)233)  에 익명의 글을 걸어 놓은 자가 있었는데, 글 가운데 조현명(趙顯命)과 박문수(朴文秀)의 일을 말하였다. 임금이 듣고 이런 명을 내렸다.

 

헌부(憲府) 【지평(持平) 이기언(李箕彦)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괘서(掛書)의 변(變)은 전에도 비록 있기는 하였으나 홍마목(紅馬木)에 걸어 놓은 것은 있지 않았습니다. 삼군문(三軍門)의 대장(大將)과 당해(當該)의 포장(捕將)은 평상시에 제대로 검칙(檢飭)하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운 바가 있으니, 마땅히 모두 추고(推考)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언양 현감(彦陽縣監) 유한주(柳漢柱)는 능침(陵寢)의 제관(祭官)으로 차임되어 술에 취하여 위의를 상실하였고 본직(本職)에 제수되어서도 한 가지도 선상(善狀)이 없었습니다. 부안 현감(扶安縣監) 유건(柳謇)은 임지에 부임한 지 기한을 넘겼는데, 두 번의 고적(考績)에서 연이어 중(中)을 하고, 수안 군수(遂安郡守) 이정현(李鼎賢)은 사람됨이 잔렬(殘劣)하고 혼몽해서 일을 살피지 못하니, 세 고을의 수령(守令)은 마땅히 모두 견파(譴罷)하여야 합니다."
하자, 모두 아뢴 대로 따랐다.

 

10월 22일 계축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10월 23일 갑인

정준일(鄭俊一)을 교리로, 김광세(金光世)를 부수찬으로, 정우량(鄭羽良)을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김유경(金有慶)을 판윤(判尹)으로, 김종태(金宗台)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북로(北路)의 진자(賑資)를 정공(正供)에 구애하지 말고 구획(區劃)하라는 명이 있으셨는데 앞서 이미 구획한 것이 피곡(皮穀) 5만 곡(斛)입니다. 이제 또 영남(嶺南)의 대동미(大同米) 2만 곡, 군작미(軍作米) 1만 곡, 세태(稅太) 2만 5천 곡과 호남(湖南)의 위태(位太) 5천 곡으로써 마련하여 더 구획하였으니, 전후에 구획한 바가 도합 11만 곡으로써 입송(入送)하게 하였습니다. 양호(兩湖)의 군포(軍布)는 각각 2백 동(同)을 한정해 작미(作米)하여 선혜청(宣惠廳)에 상납(上納)하게 하고, 작미한 군포의 대가(代價)는 북관(北關)으로 하여금 구획하여 얻은 전목(錢木)으로써 군포를 낸 아문(衙門)에 추이(推移)하며 도로 갚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정언(正言) 남유용(南有容)을 해남현(海南縣)에 귀양 보내니, 상소하여 일을 말한 때문이었다. 그 상소에 대략 이르기를,
"하늘이 성충(聖衷)을 열어서 대훈(大訓)을 내리시니 국시(國是)가 이로 말미암아 조금 정(定)해졌고 조정의 상황이 이로 말미암아 약간 편안해졌습니다. 그러나 무궁한 것은 의리(義理)이고 만회(挽回)하기 어려운 것은 세도(世道)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국론(國論)이 조금 정(定)해졌다고 해서 오히려 그 미진함을 염려하지 마시고, 조정의 상황이 조금 편안해졌다고 해서 갑자기 그 장려(長慮)를 소홀히 하지 마시어, 더욱 명절(名節)을 힘쓰고 더욱 언로(言路)를 넓혀서 영구(永久)할 수 있는 왕업(王業)을 건립하소서."
하고 말하기를,
"조명겸(趙明謙)과 이명곤(李明坤)은 권세 있는 가문(家門)에 친압해 놀며 영도(榮塗)를 힘써 점유하여, 온 세상이 조롱하고 매욕하는데도 전혀 부끄러운 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종성(李宗城)은 불시(不時)에 수명(肅命)하고 창졸(倉卒)히 구대(求對)하여, 거조가 해괴하고 또 후일의 폐단에도 관계가 있습니다. 이재(李縡)는 경술(經術)에 정통(精通)하고 예의(禮儀)에 익숙하여 그 숙덕(宿德)과 아망(雅望)이 사림(士林)의 으뜸이 되고 있으니, 신이 생각하기에는 동궁(東宮)을 위해 박사(博士)를 선택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신하보다 나은 이가 없을 것으로 여깁니다. 서장관(書狀官) 권현(權賢)은 단지 하나의 용렬한 무리일 뿐입니다. 명령이 내려지는 날에 듣는 이들이 놀래어 비웃었으니, 마땅히 변통(變通)하여 사사(使事)를 안정되게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엄중한 하교를 내리어 해남(海南)에 찬배(竄配)시키도록 하고, 이어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친히 대훈을 지어서 종묘(宗廟)에 고하고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는데도 오히려, ‘국시(國是)가 조금 정해졌다.’고 말한 것은 바로 오로지 김용택(金龍澤)의 무리를 위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크게 노(怒)하여 남유용을 정의현(旌義縣)에 귀양 보낼 것을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남유용이 김용택의 무리를 위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대개 중론(衆論)이 오히려 안정되지 않은 것을 말한 것인데, 도배(島配)시키는 것은 진실로 지나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남유용을 엄중하게 처벌하지 않는다면 대훈을 장차 물에 내던지게 될 것이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만일 극률(極律)을 적용하고자 하신다면 신 등이 간쟁할 수 있지만 극률 이하의 형벌은 어찌 감히 간쟁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김재로는 말하기를,
"남유용은 아비가 늙고 또 병들었으니 정리(情理)가 민망합니다."
하니, 임금의 마음이 조금 풀려서 말하기를,
"수규(首揆)는 남유용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공심(公心)이다. 우규(右揆)도 또한 공심이긴 하나 오히려 사재(渣滓)가 있다."
하고, 드디어 정의(旌義)를 고쳐 해남(海南)으로 정했다. 수찬 홍계희(洪啓禧)가 상소하여 남유용을 찬배시키라는 분부를 환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불보(不報)하였다.

 

북청 부사(北靑府使) 한봉조(韓鳳朝)가 상소하여 진곡(賑穀) 5, 6만 곡(斛)을 요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른 고을에도 주지 않고 유독 북청에만 다 허락할 수 있겠는가?"
하고, 단지 우악한 비답만 내렸다.

 

북도(北道)의 감진 어사(監賑御史) 홍계희(洪啓禧)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비국(備局)에 나아가 북로(北路)를 진구(賑救)하는 일로써 반복해 상확(商確)하였는데, 영남(嶺南)의 곡식도 또한 넉넉하지 못할 것이 우려됩니다. 필경에 구획(區劃)한 것이 겨우 11만 곡(斛)에 그쳤으니, 이 11만 곡의 곡식으로써 27, 8만 명의 장차 죽게 되는 백성들을 구제하려 하다면 거의 작수(勺水)를 부어서 큰 물고기를 살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백성을 옮기는 것이 합당한 지의 여부는 지금 멀리서 헤아리기가 어려운데, 듣건대 관서(關西)의 세미(稅米)가 저축된 것이 1백여 만 곡(斛)쯤 된다고 하니, 만일 선속(船粟)이 이어지지 않아 백성들이 장차 다 죽게 된다면 백성을 이끌고 가서 먹게해야 할 것입니다. 해서(海西)이 상정미(詳定米) 수만 곡도 또한 마땅히 여기에 따라 대비(待備)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10월 24일 을묘

달이 태미 동원(太微東垣)에 들어갔다.

 

10월 27일 무오

김상구(金尙耉)를 정언으로, 이제원(李濟遠)과 유우기(兪宇基)를 수찬으로, 윤경룡(尹敬龍)을 강원 감사로 삼았다.

 

장령 민택수(閔宅洙)가 상소하여 남유용(南有容)을 찬배(竄配)시키라는 분부를 중지시킬 것을 청하고, 또 옥당(玉堂)에서 올린 상소에 대해 비답을 내리지 않은 실수를 말하니, 비답하기를,
"그 처분(處分)한 바도 말감(末減)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찌 비호를 하는가?"
하였다.

 

보덕(輔德) 이선행(李善行)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살피건대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감히 세자(世子)와 더불어 이름을 같이 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명자(名子)가 성(姓)을 갖추어 부르면 동궁(東宮)의 예휘(睿諱)에 실로 음독(音讀)이 서로 같은 점이 있으므로 저 자신의 마음에 황름(惶懍)하였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 이름이 궁료(宮僚)에 참여되니 더욱 송축(悚蹙)한 바 있습니다. 이에 감히 이름을 경행(景行)으로 바꾸어 준례에 의거해 진청(陳請)하니, 조속히 윤허를 내려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두 글자의 경우에 휘(諱)하지 않는다는 것은 옛사람이 말한 바이다. 이것으로써 휘한다는 것은 지나친 일이니, 그대로 두는 것이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북도(北道)의 감진 어사(監賑御史) 홍계희(洪啓禧)를 인견(引見)하였다. 홍계희가 곡식을 바치는 자에게는 벼슬을 제수하고, 따로 진휼사(賑恤使) 및 종사관(從事官)을 설치하여 구검(句檢)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다 허락하고 말하기를,
"내가 유서(諭書) 가운데, ‘무슨 얼굴로 돌아가 뵈올 것인가?’ 하는 말이 있었다. 어사(御史)가 만일 진구(賑救)하는 일을 잘하지 못한다면 또한 무슨 얼굴로 돌아와 나를 볼 것인가? 마땅히 척념(惕念)하여 거행(擧行)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박문수(朴文秀)를 북도(北道)의 진휼사(賑恤使)로 삼아 남북(南北)의 곡식을 운반하는 일과 진정(賑政)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북도의 대소 민인(民人)에게 별유(別諭)를 내려, ‘연이어 흉년이 들어 기근(飢饉)을 당하니 아픔이 나에게 있는 것 같다.’라고 효유(曉諭)하고, 본도(本道)의 공포(貢布)와 상방(尙方)에서 납부하는 초서피(貂鼠皮)를 감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북도에 해마다 연이어 흉년이 드는 것을 우려하여 비록 극심한 추위나 깊은 밤이라 하더라도 번번이 대신(大臣)을 인견(引見)하여 진제(賑濟)의 대책을 강구하고 도신(道臣)과 어사(御史)의 청하는 바도 또한 크고 작은 일 없이 아울러 다 시행을 허락하였다. 그러므로 북도의 백성들이 다 온전히 살아나게 되어 한 사람도 버려지거나 병든 자가 없었다.

 

10월 30일 신유

헌납(獻納) 이천보(李天輔)가 상소하여 《경종실록(景宗實錄)》을 개보(改補)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상소에 대략 이르기를,
"무안(誣案)을 불살라 버린 뒤에 나라의 기강(紀綱)이 비로소 밝아졌는데, 사국(史局)의 전례(前例)를 보면 대저 일이 국시(國是)에 관계된 것은 열성조(列聖朝)의 《실록(實錄)》을 가끔 추후(追後)에 별록(別錄)한 것이 있습니다. 대개 의리(義理)란 것은 일시(一時)의 의리가 아니고 바로 만세(萬世)의 의리이니, 만약 단지 일시에만 펴고 사책(史冊)에 명백히 기재하지 않는다면 또한 어찌 만세에 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대저 실록은 사체(事體)가 비록 지극히 중대하지만 의리가 이미 정해지면 혹은 그 오류(誤謬)를 바로잡기도 하고 혹은 그 빠진 것을 보충하기도 하는 것은 바로 《실록(實錄)》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입니다. 이제 구례(舊例)를 고거(考據)하여 따로 일록(一錄)을 만들어 석실(石室)에 보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대신(大臣)과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여 이천보의 상소를 내보이고 하교하기를,
"만일 궐루(闕漏)된 것이 있다면 보충해 삽입하는 것이 옳겠지만 바로 이번의 일을 가지고서 추록(追錄)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니,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이것은 진실로 옳지 않습니다. 이미 보유(補遺)하여 말할 것이 없는데, 만일 별록을 만든다면 더욱 사리(事理)에 맞지 않습니다."
하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말하기를,
"《단종대왕실록(端宗大王實錄)》은 수말(首末)을 합하여 하나로 만든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이를 원용(援用)하여 청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실록의 별록은 사체(事體)가 진실로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리기를,
"이번의 대훈(大訓)은 앞으로 만들 실록에서도 전록(前錄)의 빠진 것을 충분히 보충할 수가 있다. 이번의 처분(處分)으로써 어찌 전록(前錄)에 이은 속록(續錄)을 낼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대사성 조명교(曺命敎)를 파직(罷職)시켰다. 처음에 진사(進士) 심공헌(沈公獻) 등 여러 사람이 신방(新榜)으로써 문묘(文廟)를 배알할 때 조태억(趙泰億)의 손자 조영근(趙榮謹)을 축출하여 참여하지 못하게 하자, 조명교가 책유(策諭)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으므로 드디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사습(士習)이 예전과 달라 호오(好惡)를 협잡(挾雜)하여 동방(同榜)을 핍박하여 쫓아내고 알성(謁聖)하는 것을 저지해 가로막으니 이런 기풍(氣風)은 자라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간 지 13일이 되어도 비답을 내리지 않고 매양 연중(筵中)에서 대신(大臣)에게 물으니, 좌의정 송인명(宋寅明)과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유생(儒生) 등을 처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말하기를,
"유생을 굳이 처벌할 필요가 없습니다. 조명교가 진소(陳疏)하여 조정(朝廷)에 추상(推上)한 것은 매우 옳지 않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것은 추상한 것이 아니라 일이 알양(訐揚)한 데 가까우니, 신칙(申飭)함이 없을 수 없다."
하고, 조명교를 파직(罷職)시킬 것을 명하였다. 또 유생의 방자한 당습(黨習)으로써 연수(年數)를 한정하지 말고 정거(停擧)시키게 하였다.

 

고 참판(參判) 홍계적(洪啓迪)·김운택(金雲澤), 고 교리(校理) 김민택(金民澤), 고 집의(執義) 조성복(趙聖復), 고 대장(大將) 이홍술(李弘述)·윤각(尹慤), 고 통제사(統制使) 이우항(李宇恒)·이상집(李尙), 고 병사(兵使) 백시구(白時耉) 등 여러 사람에 전일의 증직(憎職)을 회복시킬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을사년에 모두 여러 사람에게 증직할 것을 명하였는데, 정미년에 이르러 혹은 증직을 회수하기도 하고 혹은 추탈(追奪)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바로소 복관(復官)하였으나 아직 증직을 회복하지는 않았는데, 영의정 김재로가 연백(筵白)을 하였기 때문에 드디어 이런 명이 있었다.

 

전 경연관(經筵官) 채지홍(蔡之洪)이 졸(卒)하였다. 채지홍은 선정신(先正臣) 권상하(權尙夏)를 사사(師事)하였는데, 추천(推薦)에 의해서 왕자 사부(王子師傅)와 시강원 자의(侍講院諮議)에 임명되었으나, 다 나아가지 않았다. 금상(今上)이 즉위(卽位)하게 되자 경연관(經筵官)에 피선(被選)되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와서 벼슬하지 않았다. 부여 현감(扶餘縣監)에 제수됨에 있어 어버이가 늙은 관계로 관직에 부임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경서(經書)를 궁구하고 책을 저술하며 후생(後生)을 훈회(訓誨)하니 원근(遠近)의 학자(學者)들이 종유(從遊)하는 이가 매우 많았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5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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