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4권, 영조 17년 1741년 11월

싸라리리 2025. 9. 25. 10:57
반응형

11월 1일 임술

홍상한(洪象漢)을 집의로, 유만추(柳萬樞)와 권우(權祐)를 장령으로, 안집(安𠍱)을 지평으로, 민응수(閔應洙)를 형조 판서로, 이종백(李宗白)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11월 2일 계해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천극 죄인(栫棘罪人) 이규채(李奎采)와 도배 죄인(島配罪人) 이우하(李宇夏)를 모두 출륙(出陸)시킬 것을 명하였다. 앞서 이규채와 이우하의 일로써 여러 신하들이 누차 말하여도 임금이 듣지 않다가 대훈(大訓)이 이미 완성되어 대신(大臣)이 또 진청(陳請)하니 드디어 출륙을 허락하였다.

 

11월 3일 갑자

부교리(副校理) 이명곤(李命坤)이 남유용(南有容)의 상소로 인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어두운 밤에 분주하게 붕비(朋比)를 교결(交結)하고 논의(論議)를 주장(主張)하여 파랑(波浪)을 취허(吹噓)하는 것은 다만 신이 배우지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신이 감히 하지 못했던 것인데, 이것으로써 죄(罪)를 삼으니, 신은 진실로 마음에 달갑게 여기겠습니다."
하니, ‘이미 하유(下諭)하였으니 사직하지 말라.’는 예사 비답을 내렸다. 처음에 이명곤이 이천보(李天輔)에게 아부하여 밤낮으로 왕래하니 이천보가 극력 추만(推挽)하여 오원(吳瑗)이 문형(文衡)이 되었을 때에 당해서 이명곤이 홍문록(弘文錄)에 참여하게 되었다. 남유용이 이를 보고 비루하게 여겨 드디어 이명곤을 탄핵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명곤이 마음속으로 이천보가 은밀히 남유용을 사주(使嗾)해 자기를 탄핵한 것으로 의심하여 소변(疏辨)하기를 이와같이 하였다. 그의 이른바, ‘붕비를 교결하고 논의를 주장했다.’는 등의 말은 대개 이천보를 지적한 것이다.

 

11월 5일 병인

어떤 별이 필성(畢星) 아래로 흘러갔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피국(彼國)에서 또 바다에 표류한 사람을 출송(出送)하는 자문(咨文)이 있으니, 마땅히 사은(謝恩)하는 표문(表文)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년의 절사(節使)를 기다릴 필요가 없이 즉시 해원(該院)으로 하여금 회자와 사은 표문을 찬출(撰出)하게 하여 이번의 사행(使行)에 부송(付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헌부(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춘추관 당상(春秋館堂上) 및 예문 제학(藝文提學)에게 명하여 한림(翰林)의 회권(會圈)을 행하였다. 처음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원래 권점(圈點)에 나아가 조금 징태(澄汰)를 가하려 하였는데 여러 사람의 의논이 다 불가(不可)하다는 입장을 견지하였으므로, 17인(人)에서 내쫓긴 자가 없었고 유독 이형만(李衡萬)과 김상철(金尙喆)이 탄핵을 받음으로 인하여 참여하지 못하였다.

 

11월 6일 정묘

임금이 동지 상사(冬至上使) 여선군(驪善君) 이학(李壆), 부사(副使) 정언섭(鄭彦燮), 서장관(書狀官) 김종태(金宗台) 등을 인견(引見)하고 선온(宣醞)하여 보냈다. 이학(李壆)이 말하기를,
"생황(笙簧) 및 아악(雅樂)의 음률(音律)을 교정(校正)하는 일로써 조가(朝家)에서 특별히 악사(樂師) 한 사람을 보냈는데, 그 사람이 음률을 통(通)하지 못하니, 청컨대 다른 전악(典樂)으로써 바꾸어 가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악원 제조(樂院提調) 민응수(閔應洙)·조관빈(趙觀彬)이 연명(聯名)하여 상소하기를,
"이번에 입송(入送)하는 악인(樂人)은 생황에 가장 정통하여 독판(獨辦)·신창(新創)하는 기예가 있는데, 사신(使臣)이 퇴척(退斥)하고 반드시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고자하여 번거롭게 연백(筵白)을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천컨대 처음에 청한 악인으로써 입송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한 명의 전악(典樂)의 일로써 환차(換差)하기를 서로 청한 것은 사체(事體)에 손상됨이 있다 하여 사신(使臣) 및 제조(提調)을 모두 추고(推考)할 것을 명하였다.

 

11월 7일 무진

태학(太學)에 귤[柑]을 나누어 주고 예문 제학(藝文提學) 정우량(鄭羽良)에게 시사(試士)할 것을 명하여, 수석(首席)을 차지한 유학(幼學) 이문제(李文濟)를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집의 홍상한(洪象漢)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방금 삼가 이우하(李宇夏)가 출륙(出陸)할 때의 거조(擧條)를 보니 우상(右相)이 그 찬적(竄謫)으로써 명분이 없다고 말하였는데, 신은 사사로이 여기에 대해 의혹을 갖는 바입니다. 대개 이우하의 상소는 바로 흉론(凶論)의 근저(根柢)이고 이광의(李匡誼)의 창귀(倀鬼)234)  입니다. 이광의를 엄하게 다스리는 날을 당하여 이우하가 홀로 어찌 안연(晏然)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신이 도배(島配)를 계청(啓請)한 것은 감사 천극(減死栫棘)의 율(律)에 비해 볼 때 약간의 차등(差等)이 있습니다. 만일 너무 관대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한다면 옳겠지지만 이제 도리어 명분이 없는 것으로 돌리는 것은 신은 진실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것을 가지고 어찌 시애(澌捱) 하는가?"
하였다.

 

11월 8일 기사

이광보(李匡輔)와 박필정(朴弼正)을 승지로, 이유신(李裕身)을 사간으로, 윤심형(尹心衡)을 겸보덕(兼輔德)으로, 정휘량(鄭翬良)을 겸문학(兼文學)으로, 정이검(鄭履儉)을 부교리로, 윤득경(尹得敬)을 수찬으로, 이광식(李光湜)을 헌납으로, 권기언(勸基彦)을 정언으로 삼았다.

 

11월 9일 경오

소유(疏儒) 진사(進士) 이보관(李普觀) 등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심공헌(沈公獻) 등이 조영근(趙榮謹)의 알성(謁聖)을 가로막았다 하여 이미 죄를 입었으므로, 이보관 등 23인(人)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영근의 조부(祖父) 조태억(趙泰億)은 전후에 걸쳐 저지른 범죄가 손가락을 구부려 낱낱이 다 셀 수가 없지만 그의 ‘문생 천자(門生天子)’235)  라는 말은 군부(君父)를 협지(脅持)하였고, ‘갑자기 빙궤(憑几)를 받았다.’는 글귀는 역란(逆亂)을 양성(釀成)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연차(聯箚)를 구시(仇視)하고 지친(至親)을 장살(狀殺)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국가(國家)의 역신(逆臣)이고 이륜(彛倫)의 죄인(罪人)입니다. 신 등이 그 손자와 더불어 부자(夫子)의 묘정(廟庭)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바로 성묘(聖廟)를 중히 여기고 왕강(王綱)을 부지하려는 까닭입니다. 4명의 유생(儒生)이 이것으로써 처벌을 당하였으니 신 등이 일을 같이한 사람들로써 의리상 혼자 면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였는데,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임금에게 말하기를,
"대훈(大訓)을 내린 이후에 유소(儒疏)의 말한 바는 신축년236) 임인년237)  의 여론(餘論)에서 나온 것이니, 사사로이 시상(時象)이 안정될 시기가 없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사(君師)의 지위에 있으면서 훈칙(訓飭)을 제대로 하지 못함이다."
하고, 하교(下敎)하여 자책(自責)한 뒤 3일 동안 감선(減膳)할 것을 명하였다. 송인명이 환침(還寢)할 것을 굳이 청하니, 그대로 따르고 드디어 이보관 등의 이름을 삭제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 북도 구관 당상(北道句管堂上)을 인견(引見)하여 북민(北民)의 진정(賑政)을 의논하고, 경상 도사(慶尙都事) 정하언(鄭夏彦)으로써 진휼사(賑恤使)의 종사관(從事官)에 차임(差任)하여 영남(嶺南)에 가서 곡식을 운반하고 독운 어사(督運御史)를 체환(遞還)하게 하니, 박문수(朴文秀)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11월 11일 임신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방금 듣건대 동북(東北)의 기민(饑民)이 관서(關西)에 유입(流入)하는 자가 밤낮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각 고을에서는 이들을 용접(容接)하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하니, 이는 그 형세가 의귀(依歸)할 바가 없게 될 것으로서 오직 서로 모여서 도둑질 하는 길이 있을 뿐입니다. 신은 마땅히 관서(關西)의 구관 당상(句管堂上)으로 하여금 본도(本道)에 나아가 풍력(風力)이 있는 수령(守令)을 선택하여 차원(差員)을 분정(分定)해서 공곡(公穀)의 약간 석(石)을 획속(劃屬)시키게 하고 이어서 다시 지휘(指揮)를 강구(講究)하여 접제(接濟)하고 안돈(安頓)시키는 방도로 삼아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옳다. 그것이 동포(同胞)의 의리에 있어 어찌 차마 아무런 근심없이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있겠는가? 도신(道臣)에게 분부(分付)하고 기타의 여러 도(道)에 대해서도 일체 신칙(申飭)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2일 계유

홍경보(洪景輔)를 대사헌으로, 권신(權賮)을 헌납으로, 임집(任)을 지평으로, 홍정명(洪廷命)을 정언으로, 서명연(徐命衍)과 오수채(吳遂采)를 승지로 삼았다.

 

식년(式年)의 전시(殿試)를 실시하여 안극효(安克孝) 등 37인(人)을 뽑았다.

 

지평 이기언(李箕彦)이 상소하여 과거(科擧)의 폐단을 논하기를,
"식년과(式年科)의 출신(出身)이 통사(通史)를 읽을 적에 귀절을 분변하지 못하고 대축(大祝)을 차임(差任)하자 축(祝)을 제대로 쓰지 못하였습니다. 명경(明經)의 실상이 없음이 이와 같으니 초시(初試)를 보일 때는 차술(借述)하는 것을 엄중하게 금하고 시강(試講)을 할 때는 문의(文義)에 능통(能通)한 자는 뽑아서 다 생획(生劃)에서 엄정한 고사(考査)를 하여 차제(次弟)를 정하고, 본 액수(額數) 안에서 절반은 강경(講經)을 뽑고 절반은 제술(製述)을 뽑되 식년 이외에 다른 별과(別科)는 모두 없애며, 만일 알성(謁聖)의 정시(庭試)를 설행(說行)할 경우는 마땅히 초시(初試)나 회시(會試)로 하여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정(田政)이 문란하니 마땅히 개량해서 부세(賦稅)를 균등하게 하여야 하고 군포(軍布)는 차원(差員)이 친히 거두어 영납(領納)해서 중간의 간사한 폐단을 막아야 합니다."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비국(備局)에 내려 재량(裁量)해서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11월 13일 갑술

헌부(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4일 을해

경기 감사 박필균(朴弼均)을 파직(罷職)시켰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금년 기읍(畿邑)의 재민(災民)을 구호(救護)한 것은 매우 균등하지 못하였으니 이 한가지 일만 가지고도 재년(災年)의 번임(蕃任)을 그대로 맡겨 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박필균을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15일 병자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일양(一陽)이 처음 동(動)하니 천심(天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양(陽)이 쇠하였다가 회복하는 것은 이것이 만물(萬物)을 생(生)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고 마음을 방심(放心)하였다가 찾으면 이것이 선(善)을 회복하는 기미가 되는 것입니다. 양(陽)이 이미 회복되었으면 그것을 배양(培養)시키고자 하고, 마음이 이미 찾아졌으면 그것을 간직하고자 합니다. 하늘과 사람이 동일한 이치로서 속일 수가 없는데, 건건(乾乾)하고 일신(日新)하는 것이 바로 그 시기 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겨울의 절기가 이미 중반에 접어들었는데 따뜻하기가 봄날씨 같고 음침한 안개가 날로 쏟아지며 내뿜기만 하고 들이마시질 않습니다. 시기(時氣)가 이와 같으니 오는 해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보상(輔相)하는 이가 직무를 제대로 다하지 못하고 섭리(燮理)에 방술이 없는 소치로서 신은 진실로 스스로 그 죄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한 전하의 대월(對越)하는 마음이 혹시나 방일(放逸)하여 항상 간직하지 못함이 있으신 것입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마땅히 힘쓰겠다."
하였다.

 

11월 16일 정축

동지(冬至)의 하례(賀禮)를 정지할 것을 명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동지(冬至)에 문을 닫고 양(陽)을 부양하는 뜻으로써 특별히 정하(停賀)할 것을 명하였는데, 수일(數日)이 지나서 또 하교하기를,
"지금 양(陽)이 미약하고 기강(紀綱)이 해이하게 된 시기에 마땅히 구전(舊典)을 회복해야 한다."
하고, 다시 하례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대사헌 홍경보(洪景輔)가 상소하기를,
"겨울 날씨가 상리(常理)에 어긋나 하늘에는 한 점의 눈이 없고, 땅에는 한 조각의 얼음이 없습니다. 얼음이 없고 눈이 없는 것을 《춘추(春秋)》에 기록하기를, ‘형정(刑政)이 해이해지고 권강(權綱)이 능체(陵替)된 것이 응험(應驗)이다.’ 하였는데, 불행히 오늘에 다시 이와 같이 음양(陰陽)이 차서를 잃은 것을 보게 되니 이것은 바로 군신(君臣)과 상하(上下)가 척연(惕然)히 경구(驚懼)할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정(大庭)에서 하례를 행하여, 우려할 때를 당해 기뻐한다는 것은 천심(天心)에 답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대신(大臣)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였다. 여러 대신들도 또한 홍경보의 말을 옳다고 하여 하례를 중지할 것을 청하니, 드디어 그대로 따랐다.

 

11월 17일 무인

조상경(趙尙絅)을 우참찬으로, 이주진(李周鎭)을 호조 참판으로, 윤득화(尹得和)를 좌윤으로, 윤용(尹容)을 경기 감사로, 이천보(李天輔)를 교리로, 김상적(金尙迪)을 수찬으로, 서명빈(徐命彬)을 대사성으로, 이창의(李昌誼)를 겸사서(兼司書)로, 권상일(權相一)을 필선(弼善)으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집의 홍상한(洪象漢)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난신(亂臣)과 적자(賊子)가 어느 시대인들 없겠습니까만 극도로 흉악(凶惡)함이 역적 목호룡(睦虎龍) 같은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 그 당일의 조정 신하들이 진실로 마땅히 성토(聲討)를 하기에 여가가 없었어야 할 터인데, 이에 도리어 포양(褒揚)하고 숭장(崇奬)하여 책훈(策勳)하는 데까지 이르렀고 점차로 역란(逆亂)을 초래하여 종사(宗社)가 거의 위태로운 지경까지 갔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무안(誣案)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성상의 결단이 혁연(赫然)하시니 엄중하게 징계(懲戒)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 당시에 역적 목호룡을 책훈할 것을 청한 훈부(勳府)의 당상(堂上)을 마땅히 즉시 조사해 내어 조속히 추죄(追罪)의 형벌을 시행해야 합니다. 신은 비국(備局) 초기(草記)의 두 방백(方伯)에 대한 일에 의아하고 한탄스러운 바가 없지 않습니다. 이종성(李宗城)이 전후(前後)에 걸쳐 사람들의 탄핵을 입은 것이 매우 비상(非常)하여 반드시 사체(辭遞)를 하려고 하는데도, 미미한 혐의로 핑계를 대어 억지로 재촉해 부임하게 하였고, 박필균(朴弼均)은 대소(臺疏)가 극력 공격하니 족히 체거(遞去)할 수가 있는데도 조금 비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견죄(譴罪)할 것을 청하였으니, 거조(擧措)가 온당한 점이 부족하여 안목(眼目)에 거슬림이 있어서 신은 진실로 개탄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마땅히 연중(筵中)에 하교하겠다."
하였다.

 

11월 18일 기묘

식년 문무과(式年文武科)를 방방(放榜)하였다. 강원(江原)·함경(咸鏡) 양도(兩道)의 문과(文科), 무과(武科)에 입격(入格)한 사람들은 남아서 기다릴 것을 명하여 인견(引見)하고, 이어서 해조(該曹)에 명하여 행자(行資)를 주어서 보내도록 하니, 본도(本道)에 흉년(凶年)이 든 까닭이었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관서(關西)는 연이어 기근(飢饉)이 들어 민사(民事)가 우려됩니다. 새로 부임한 방백(方伯) 이종성(李宗城)은 제배(除拜)된 지가 이미 오래인데, 연이어 기근을 당하고 있으니 마땅히 조속히 체직(遞職)을 허락해야 합니다. 전 방백 이주진(李周鎭)은 이제 이미 수서(收敍)되었으니, 진휼을 끝마칠 때까지 한정하고 그대로 유임(留任)시켜 공효를 이루는 것을 책임지워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9일 경진

대사간 한사득(韓師得)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돌아보건대 지금 북로(北路)에 재황(災荒)이 든 것은 예전에 없었던 것인데도, 비국(備局)의 여러 당상(堂上)들이 한결같이 늑장은 부리고 있습니다. 마땅히 비국에 모여 날마다 좋은 대책을 강구해서 우리 성상의 북쪽을 돌아보시는 우려를 풀어 드려야 하는데, 이에 소아(小兒)의 구기(拘忌)하는 질병으로써 오랫동안 행공(行公)을 하지 않고 있으니, 고인(古人)의 나라를 걱정하여 가정을 잊어버리는 의리에 있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말하기를,
"갑오년238)   이전에 서원(書院)의 참람되고 잡다한 것이 몇 개나 되는 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훼철하자는 의논의 미친 바가 10분의 1,2도 안되니 신은 갑오년 전후(前後)를 물론하고 무릇 서원·영당(影堂)·향현사(鄕賢祠)의 참람되고 잡다한 것은 마땅히 일체 훼철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삼성사(三聖祠)에 있어서는 그 당초에 창설(刱設)한 것이 비록 참월(僭越)한 데에 관계되었으나, 이미 창설한 뒤에는 경솔히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대체(大體)는 비록 옳으나 대신(大臣)에게 구비(具備)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외람되게 설립한 서원의 일은 갑오년 이전이 바로 품지(稟旨)하여 이정(釐正)한 것이니 다시 어찌 분운(紛紜)할 것이 있겠는가? 삼성사는 설월(屑越)하니 어찌 다만 외람될 뿐이겠는가?"
하였다.

 

11월 20일 신사

교리 이천보(李天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사사로이 보건대 근일에 언로(言路)가 막히고 형장(刑章)이 어긋나며 사의(私意)가 멋대로 행하여 다만 속이고 숨기는 것으로써 일을 삼아, 국사(國事)가 위태롭고 민생(民生)이 도탄에 빠진 것이 오늘날보다 극심한 적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괴기(乖氣)가 위로 범하여 하늘의 견책(譴責)이 거듭 내려서 겨울 날씨가 봄날과 같이 따뜻하고 음침한 안개가 매일 가득하니, 어찌 크게 두렵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음양(陰陽)의 나뉨을 깊이 살피시고 먼저 한 마음의 위로부터 더욱 성공(聖工)을 가하여 분발(奮發)하고 쇄려(刷勵)하여 군강(君綱)을 떨치고 국세(國勢)를 높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를 마땅히 스스로 힘쓰겠다."
하였다.

 

정언 홍정명(洪廷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춘방(春坊)의 여러 관료(官僚)는 책임이 가볍지 않은데 어제 정사(政事)에서 필선(弼善)의 의망(擬望)이 모두 인망(人望)의 의외였으니, 신은 그날의 정관(政官)에 대하여 마땅히 경칙(敬飭)을 보여야 한다고 여깁니다. 근래에 대선(臺選)이 적임자를 선택하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심지어는 몸가짐이 비굴(卑屈)한 강봉휴(姜鳳休)와 권문(權門)에 친압하여 종유한 김광국(金光國)까지도 또한 다 모점(冒玷)하였습니다. 청컨대 선부(選部)239)  로 하여금 다시는 대망(臺望)에 검의(檢擬)하지 말도록 하소서. 협중(峽中)에는 계속 기근(飢饉)이 든 나머지 도둑을 다스리기를 엄정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는 말을 듣건대 곡산부(谷山府)에서 도둑을 신문(訊問)하여 자백(自白)을 받아 장차 사형[死辟]에 두려고 하는데, 그 도당(徒黨)이 감옥(監獄)으로 돌진해 들어와 빼앗아 갔고 부사(府使)는 겁에 질린 나머지 탈옥한 것으로 거짓 보고하기까지 하였는데도 감사(監司)는 아직까지 계문(啓聞)하여 논죄(論罪)하는 조처가 없으니, 해당 부사는 마땅히 나문(拿問)하게 하고, 감사는 마땅히 문비(問備)240)  를 시행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강봉휴와 김광국의 일은 지나치다."
하였다.

 

장령(掌令) 유만추(柳萬樞)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에 과시(科試)가 외람된 점이 많습니다. 전 오위 장(五衛將) 박종귀(朴宗龜)는 자산(資産)이 풍부(豐富)하고 단지 한 아들이 있을 뿐인데, 이번의 감시(監試)에서 박항령(朴恒齡)·박백령(朴栢齡)으로써 호서(湖西) 및 경시(京試)의 초해(初解)에 모두 참여하였으니, 엄중하게 핵실(覈實)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전랑(銓郞)을 변통(變通)한 이후에 이미 선직(選職)이 없으니 문학(文學)을 저양(儲養)하는 방법이 없습니다. 마땅히 전조(銓曹)로 하여금 직제학(直提學)·전한(典翰)·예문 응교(藝文應敎) 등의 관직을 차출(差出)하게 하여 저양하고 격권(激勸)하는 방법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고, 이어서 이천보(李天輔)·심악(沈) 등을 추천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그러나 전조에서 근세(近歲)에 대단히 드문 직책인데다가 또 취사(取舍)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다고 하여 중지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예조 판서 신사철(申思喆)이 아뢰기를,
"세자(世子)가 여덟 살에 입학(入學)하는 것은 본래 이것이 고례(古禮)입니다. 명년(明年)은 바로 세자가 입학하는 해인데 지금 신력(新曆)이 이미 반포되었으니, 마땅히 미리 길일(吉日)을 가려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왕세자(王世子)의 입학이 멀지 않았고, 대제학(大提學) 이덕수(李德壽)의 지난번에 논박받은 것은 이미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마땅히 재촉해서 올라오게 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11월 21일 임오

달이 태미성(太微星)에 들어갔다.

 

11월 22일 계미

윤양래(尹陽來)를 좌참찬으로, 박문수(朴文秀)를 우참찬으로 삼았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저 두 도신(道臣)을 하나는 파직(罷職)시키고 하나는 독려(督勵)시킨 데 대하여 신(臣)이 만일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호오(好惡)가 그 사이에 개입된 점이 있다면 처형의 죄를 받아 마땅합니다. 신은 과연 이런 마음이 없었는데, 간신(諫臣)이 지나치게 의심을 하니 평일에 몸가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동조(同朝)에게 신뢰를 받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제 또 간장(諫長)의 상소를 보니 더욱 송구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이 그 당시에 마침 요척(夭慽)을 당하여 몸이 이미 범염(犯染)되어 형세가 경연(經筵)에 오르기 곤란하여 부득이 번품(煩稟)하였는데, 사직(司直)의 논의가 준발(峻發)하니, 이 일로써도 저 일로써도 신이 스스로 해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11월 23일 갑신

이덕수(李德壽)를 대사헌으로, 이정보(李鼎輔)를 대사간으로, 정준일(鄭俊一)을 집의로, 신처수(申處洙)를 사간으로, 안식(安栻)을 지평으로, 윤득경(尹得敬)을 부교리로, 조명교(曺命敎)와 이명곤(李命坤)을 수찬으로, 이종성(李宗城)을 호조 참판으로, 김약로(金若魯)를 예조 참판으로, 조상명(趙尙明)을 승지로 삼았다.

 

경상도 유생(儒生) 안세보(安世輔)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일찍이 이미 하유(下諭)하였으니, 가서 학업(學業)을 닦으라."
하였다.

 

11월 24일 을유

한사득(韓師得)을 승지로, 조명채(曹命采)를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희정당(熙政黨)에서 초복(初覆)241)  을 행하였다. 의주(義州)의 살옥(殺獄) 죄인(罪人) 이덕선(李德先)의 문안(文案)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한 사발의 죽(粥)을 가지고 다투다가 사람을 살해하였으니, 이것은 사람이 서로 잡아먹은 것에 가깝지 않은가?"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한 사발의 죽으로 인하여 두 사람의 목숨을 살해하였으니, 기한(飢寒)이 본성(本性)을 상실하게 하여 비록 이런 일이 있는 것이나 옥안(獄案)을 삼복(三覆)하매 고통이 나 자신에게 있는 것 같다. 아! 위에 있는 자가 유포(流布)하는 덕(德)이 없으니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이 된 자들이 어찌 능히 덕화(德化)를 받아서 베풀 수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그 직책은 중요하고 그 기대는 깊은데, 이런 측상(惻傷)한 일이 있으니, 또한 어찌 칙면(飭勉)이 없을 수 있겠는가? 도신(道臣)은 추고(推考)하고 부윤(府尹)은 파직(罷職)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도승지 오광운(吳光運)을 폄체(貶遞)하여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정언 홍정명(洪廷命)을 남해 현감(南海縣監)으로, 사간 신처수(申處洙)를 진도 군수(珍島郡守)로 삼으니, 그들이 소명(召命)을 어기고 계복(啓覆)에 참여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지평 임집(任)이 상소하여 견벌(譴罰)이 정도에 지나치다는 것을 말하였으나 불보(不報)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5일 병술

허옥(許沃)을 사간으로, 박춘보(朴春普)를 교리로, 권일형(權一衡)을 필선(弼善)으로, 이기언(李箕彦)을 사서(司書)로, 이하종(李夏宗)을 문학(文學)으로, 김상적(金尙迪)을 겸문학(兼文學)으로, 이천보(李天輔)를 겸사서(兼司書)로, 이익정(李益炡)을 병조 참판으로, 조상경(趙尙絅)을 지돈녕(知敦寧)으로 삼았다.

 

11월 26일 정해

헌부(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7일 무자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 【정언(正言) 조명채(曹命采)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광의(李匡誼)를 국문(鞫問)하는 일과 삼성사(三聖祠)를 훼철(毁撤)하지 말 것을 청한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또 아뢰기를,
"동부승지(同副承旨) 박필정(朴弼正)은 일찍이 판결사(判決事)가 되어 무릇 송사(訟事)를 결단함에 있어 다만 뇌물만을 보고 결단하니 사람들의 말이 낭자(狼藉)하였는데, 은대(銀臺)242)  의 남의(濫擬)에 발탁됨에 이르러 양양(揚揚)하게 무릅쓰고 나와서 수치를 알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개정(改正)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삼화 부사(三和府使) 전일상(田日祥)은 사람됨이 흉악하고 몸가짐이 광패(狂悖)하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지평 안식(安栻)은 시험을 관장하여 비난을 초래하였으니, 마땅히 대망(臺望)을 가로막아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조 참의 윤급(尹汲)은 정주(政注)·지통(枳通)을 제멋대로 하고 어려워하는 점이 없었으니, 청컨대 종중 추고하소서."
하고, 아뢰기를,
"찬배인(竄配人) 이규채(李奎采)·이우하(李宇夏)·남유용(南有容) 등은 모두가 언관(言官)으로서 죄를 얻었으니,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청컨대 모두 방석(放釋)하소서."
하니, 임금이 당습이 있다고 하여 삭탈 관직(削奪官職)할 것을 명하였다. 얼마후 대신(大臣)의 말로 인하여 삭탈 관직시키라는 명을 도로 정지하고,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사관(史官)으로 피선(被選)된 자들을 소시(召試)하여 조재민(趙載敏)·서지수(徐志修)·조재덕(趙載德)·조명정(趙明鼎)·민백창(閔百昌)·조운규(趙雲逵) 등 6인(人)을 뽑았다. 조재민 등이 처음에 응명(膺命)하지 않자.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엄지(嚴旨)를 내려 재촉해 불렀다. 이에 분부를 받고 전문(殿門) 밖에 이르렀으나 또 들어가기를 기꺼워 하지 않았으므로, 판중추(判中樞) 서명균(徐命均)을 파직(罷職)시키고 형조 판서 민응수(閔應洙)를 체직(遞職)시킬 것을 명하니, 그 자식을 가르치지 못한 까닭이었다. 서지수는 서명규의 아들이고 민백창은 민응수의 아들인데, 두 사람이 이미 입정(入庭)하자, 드디어 그 분부를 중지시켰다. 이의중(李毅中)·신위(申暐)·조중회(趙重晦)는 끝내 부시(赴試)하지 않으니, 임금이 그 부형(父兄)을 가둘 것을 명하였다가 얼마 후 대신(大臣)의 말로 인하여 그 명을 도로 중지시켰다.

 

11월 28일 기축

유복명(柳復明)을 대사간으로, 이광제(李光躋)를 정언으로 삼았다.

 

11월 29일 경인

교리 박춘보(朴春普)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 정언(正言) 조명채(曹命采)가 새로 발론(發論)한 계사(啓辭)에 그 당심(黨心)을 은근히 실현하고 전지(銓地)를 뒤흔들려 했던 태도는 진실로 매우 불미(不美)하나, 이것은 오히려 족히 말할 것이 없고, 두 계사를 성급하게 정계(停啓)한 것은 더욱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대저 삼성사(三聖祠)를 당초에 창건(刱建)한 것은 비록 설월(屑越)한 바 있으나 한 번 창건한 뒤에는 사체(事體)가 스스로 달라 훼철을 중지하라는 논의가 이미 대계(臺啓)에서 발론되었고 대신(大臣)도 또한 윤종(允從)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 어찌 방자하게 멋대로 정계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더군다나 이광의(李匡誼)의 죄범(罪犯)은 관계가 지극히 중대한데, 저 조명채가 대각(臺閣)에 들어온 처음에 자의(恣意)로 정계하였으니 삭탈 관직(削奪官職)의 처벌만으로는 족히 그 죄를 징계(懲戒)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엄중하게 처분(處分)을 가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조명채는 협잡(挾雜)하는 마음이 없지 않아서 바야흐로 처분(處分)하려고 하는데 이광의의 일은 송익휘(宋翼輝)와 비교할 것이 아니다. 설혹 협잡이라 하더라도 만일 정계하는 사람이 없다면 어느 때에 결말이 날 것인가? 서원(書院)의 일은 그가 정계한 것이 사체를 얻었다고 할 수 있는데, 어찌 엄중하게 처분할 이유가 있겠는가?"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한림(翰林)과 영사(領事)·감사(監事)는 친혐(親嫌)이 있으면 응강(應講)을 하지 않고 부직(付職)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소시(召試)가 바로 취재(取才)로서 비록 친혐이 있을지라도 참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방(榜)의 차례와 부직(付職)하는 것은 구별할 수가 없으니, 직위를 부여하는 경우에 친혐이 있는 자는 진소(陳疏)하여 준례에 따라 체직시키는 일을 청컨대 정식(定式)으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또 아뢰기를,
"한권(翰圈)에 든 자는 비록 10년이라 하더라도 곧바로 승륙(陞六)되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반드시 소시(召試)를 기다리게 하는 일을 컹컨대 정식으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권에 든 사람은 비록 설서(說書)가 되었을지라도 또한 출륙(出六)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30일 신묘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위를 범하여 부도(不道)하고 지만(遲晩)한 사람이 이목(耳目)의 직위에 있으면서 협잡(挾雜)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으니 무엄(無嚴)하다 하겠다. 전 정언(正言) 조명채(趙命采)를 파직 불서(罷職不敍)하도록 하라."
하니, 조명채가 이광의(李匡誼)를 정계(停啓)한 까닭이었다. 또 하교하기를,
"이우하(李宇夏)를 방송(放送)하고 이규채(李奎采)를 감등(減等)시키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송익휘(宋翼輝)와 이광의는 거론할 만한 자가 아니다. 이광덕(李匡德)·남유용(南有容)·이규채(李奎采) 이외에 일을 말한 것 때문에 귀양을 가게 되었거나 삭출(削黜)을 당한 자는 모두 방송(放送)하게 하라."
하고, 또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의금부에 나아가 죄가 가벼운 죄수(罪囚)를 석방하게 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