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임진
박필균(朴弼均)을 대사간으로, 이정욱(李挺郁)을 사간으로, 유우기(兪宇基)를 헌납으로, 신사관(申思觀)과 임박(任璞)을 정언으로, 원경순(元景淳)을 지평으로, 이중조(李重祚)를 설서(說書)로 삼았다.
부교리 윤득경(尹得敬)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제 소시(召試)에 친히 임하시어 부시(赴試)하는 사람이 즉시 응명(膺命)하지 않는 것으로써 지나치게 위노(威怒)를 가하였고 심지어는 그 자식의 연고로 인해서 그 아비를 추죄(推罪)하기까지 하였으니, 더욱 왕정(王政)의 차마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비록 즉시 도로 정지하기는 하였지만 성상의 함양(涵養)하신 공부가 미진한 바가 있어 사령(辭令)이 절도에 맞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민망스럽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마땅히 힘쓰겠다."
하였다.
12월 2일 계사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삼복(三覆)을 행하여 사형수 두 사람을 단죄(斷罪)하였다.
12월 3일 갑오
교리 이천보(李天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왕세자(王世子)의 입학(入學)이 바로 명춘(明春)에 있는데, 그 예(禮)는 지극히 중대하고 그 일은 지극히 광활(曠闊)합니다. 그러므로 그 집사(執事)의 여러 책임을 선택하지 아니함이 없어야 합니다. 대저 찬선(贊善)·진선(進善)·자의(諮議)의 직임은 바로 일대(一代) 산림(山林)의 희망(希望)입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더욱 성의를 더하여 특별히 별유(別諭)를 내리시어 그들로 하여금 기한에 맞추어 조정에 나오도록 해서 예전(禮典)을 중대하게 하여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함경 감사 민형수(閔亨洙)가 졸(卒)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민형수는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의 아들이다. 정언(正言)이 되어 이광좌(李光佐)의 휘질(諱疾)243) 한 죄를 논핵하였다가 임금의 비위를 거슬려 삭출(削黜)당하였고, 옥당(玉堂)에 들어와서는 또 이광좌의 죄를 극언(極言)하였다가 갑산부(甲山府)에 귀양갔다. 오랜 시일이 지난 후 석방되어 승지(承旨)로 발탁되고 곧바로 다시 형조 참판에 발탁되어 조정에서 바야흐로 마음에 들어 임용(任用)하려 하였는데, 민형수가 성격이 소직(疏直)하여 다른 사람과 더불어 말함에 진역(畛域)을 두지 않아서 조현명(趙顯命)의 유혹을 받아 위시(僞詩)를 들추어내어 국옥(鞫獄)을 이루게 되니 이에 민형수가 마음으로 통한(痛恨)을 하며 졸(卒)하였으므로 그 형(兄) 민창수(閔昌洙)가 진소(陳疏)하여 그 마음을 폭로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0책 54권 39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42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註 243] 휘질(諱疾) : 임금의 질병을 숨긴 일.
사신은 말한다. "민형수는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의 아들이다. 정언(正言)이 되어 이광좌(李光佐)의 휘질(諱疾)243) 한 죄를 논핵하였다가 임금의 비위를 거슬려 삭출(削黜)당하였고, 옥당(玉堂)에 들어와서는 또 이광좌의 죄를 극언(極言)하였다가 갑산부(甲山府)에 귀양갔다. 오랜 시일이 지난 후 석방되어 승지(承旨)로 발탁되고 곧바로 다시 형조 참판에 발탁되어 조정에서 바야흐로 마음에 들어 임용(任用)하려 하였는데, 민형수가 성격이 소직(疏直)하여 다른 사람과 더불어 말함에 진역(畛域)을 두지 않아서 조현명(趙顯命)의 유혹을 받아 위시(僞詩)를 들추어내어 국옥(鞫獄)을 이루게 되니 이에 민형수가 마음으로 통한(痛恨)을 하며 졸(卒)하였으므로 그 형(兄) 민창수(閔昌洙)가 진소(陳疏)하여 그 마음을 폭로하였다."
12월 5일 병신
유정(柳綎)을 지의금(知義禁)으로, 김상성(金尙星)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12월 7일 무술
도승지 원경하(元景夏)를 특별히 제수하여 함경 감사로 삼았다. 뒤에 정언 임박(任璞)이 상소하기를,
"북방(北方)을 진휼(賑恤)하는 일이 바야흐로 펼쳐지고 있는데 도백(道伯)이 새로 갈리니 패국(敗局)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능란한 솜씨가 있는 사람에게 직무를 맡겨야 합니다. 새로 차임(差任)한 감사(監司)는 주군(州郡)을 역임하지 않았고 겨울 묘모(廟謨)에 참여하였으니, 이번의 이 특제(特除)는 아마도 종핵(綜核)의 정사가 아닌 듯합니다."
하고, 좌의정 송인명(宋寅明)과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또한 원경하의 일에 대해 보류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경기 감사 윤용(尹容)으로써 대체하고, 홍경보(洪景輔)로써 경기 감사를 삼았다.
12월 8일 기해
이성중(李成中)을 수찬으로, 윤득화(尹得和)를 도승지로 삼았다.
12월 9일 경자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진휼 당상(賑恤堂上)을 보내어 수안(遂安)의 동산(銅山)을 가서 살피고 주전(鑄錢)의 도구를 미리 저축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고 상신(相臣) 이경석(李景奭)의 문집(文集) 가운데 왕세자(王世子)가 입학(入學)할 때 먼저 태묘(太廟)를 배알(拜謁)하는 예(禮)가 있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례(典禮)가 그러할 것 같다."
하였다. 송인명이 또 수령(守令)의 비석(碑石)을 세우는 폐단에 대해 금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공조 판서 김시형(金始炯)이 또한 진선(津船)을 개조(改造)하는 것의 폐단이 많은 점을 진달하고 각 군문(軍門)에 분속(分屬)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또한 그 청을 따랐다. 예조 참판 김약로(金若魯)가 아뢰기를,
"중궁전(中宮殿)의 탄일(誕日)이 온릉(溫陵)244) 의 국기(國忌)와 상치(相値)되는데, 일찍이 재계(齋戒)로 인해서 진하(陳賀)를 퇴행(退行)한 예(例)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미년245) 이후에는 연이어 당일로써 진하하기를 청하였던 것입니다. 어제 해당 당상(堂上)을 추고(推考)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탄일(誕日)의 진하를 물려서 행하는 것은 이미 그 전례가 없으니, 이제부터는 하교에 따라 무고(無故)한 날로 퇴행하는 일로써 마땅히 정식(定式)을 삼아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삼가 듣건대 온릉의 기신(忌辰)에 3일 동안 소사(素食)를 하신다고 하니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3년의 의미를 약간 간직하여 그러하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온릉의 신하 누가 온릉을 아는가? 이것이 내가 마음속에 은통(隱痛)하여 차마 고기를 먹지 못해서 그런 까닭이다. 제왕(帝王)의 효도는 예(禮)에 지나치지 않는 것이니, 내가 3년의 의미를 간직하고자 함은 아니다."
하였다.
12월 10일 신축
헌납 유우기(兪宇基)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년 이래로 재이(災異)가 거듭 발생하여 금성(金星)이 달을 범하고 한여름에 서리가 내리고 경강(京江)의 물이 피처럼 붉고 동래(東萊) 바다에는 어류(魚類)가 썩어 문드러졌습니다. 금년에 있어서는 7월에 풍변(風變)이 일어나 삼변(三邊)에 해일(海溢)이 발생하였고, 겨울에 눈 한 점 내리지 않아 날씨가 따뜻하기가 봄날 같으니 상천(上天)의 견로(譴怒)가 극도에 달했는데 전하께서 공구(恐懼)·수성(修省)하시는 것은 한 때의 감선(減膳)하라는 하교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양남(兩南)의 백성들이 굶주려 사망한 자가 열아홉이나 되고, 동북(東北) 지방에 흉년이 들어 유민(流民)이 서로 잇닫게 되니 하민(下民)의 곤췌(困悴)가 극도에 달했는데 국가(國家)의 진제(賑濟)하고 안집(安集)하는 것은 팔로(八路)의 구관(句管)에 지나지 않아 단지 명호(名號)만 있을 뿐이고 해마다 보내는 수의(繡衣)246) 는 단지 주전(廚傳)247) 을 허비할 뿐이니, 또한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대각(臺閣)을 보기를 노예(奴隷)처럼 하시어 돼지나 개를 꾸짖듯하며, 한마디 말이 비위에 거슬리면 우레처럼 진노하시어 유방(流放)과 찬배(竄配)가 앞뒤로 서로 이어집니다. 또 대각의 시비(是非)를 가지고서 대신(大臣)에게 나아가 가부(可否)를 자문(諮問)하시니, 대신의 권한이 어찌 편중(偏重)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이 언지(言地)를 보기를 고확(罟擭)이나 함정(陷穽)처럼 하여 전률을 느끼며 눈을 돌리고, 망설이며 뒷걸음질을 칩니다. 일이 권귀(權貴)에 관계되면 감히 말하지 못하고, 말이 시휘(時諱)에 관섭되면 감히 말을 하지 못하여 어쩌다 간혹 입을 열어 혹시 촉범(觸犯)하는 데 가깝게 되면 다만 전하께서 죄주실 뿐만 아니라 반격하여 꾸짖는 말이 앞에서 나오고 은밀히 무함하는 화(禍)가 뒤에서 따릅니다. 오늘날의 언로(言路)는 또한 남김없이 막혀있다 하겠습니다. 열성조(列聖朝)에서는 유교(儒敎)를 숭상하고 도학(道學)을 중히 여겨 널리 초빙함이 산야(山野)에 두루 미쳤고, 배양(培養)하는 것은 사림(士林)에게 부지런히 하였는데, 우리 전하에 이르러서는 즉위(卽位)하신 지 10여 년 동안 산야에 있는 유신(儒臣)은 일찍이 한번도 법연(法筵)의 위에 초빙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전하의 유교를 숭상하고 도학을 중히 여기는 마음이 조종(祖宗)에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예로부터 국가에서 관아(官衙)를 설치하고 직무를 분장(分掌)함은 오직 그 재기(材器)가 서로 합당한 가를 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오직 문지(門地)와 이력(履歷)만을 따지게 되어 한번 화관(華官)·요직(要職)을 역임하고 나면 바로 통재(通材)가 됩니다. 영화(榮華)를 누리고 곤췌(困悴)를 당함과 주고 빼앗는 권한이 오로지 전지(銓地)에 있으므로 경쟁하고 뒤흔드는 폐단이 이로 말미암아 발생하여 폐단의 근원을 막지 못한 채 사의(私意)가 횡류(橫流)합니다. 이른바 사대부(士大夫)란 자들은 안으로 청고(淸苦)·지려(砥礪)의 절조(節措)가 없고, 밖으로는 수오(羞惡)하고 준순(逡巡)하는 의미가 결여되어 윗사람을 섬김에는 용렬(容悅)하여 스스로 보전(保全)하는 것으로써 양책(良策)을 삼고, 이익을 보면 남에게 노비(奴婢)처럼 지나치게 굽실거리는 것으로써 미행(美行)을 삼습니다. 심지어는 옆으로 뚫고 곡선으로 뚫어서 반드시 얻기를 기약하며, 탄핵을 받으면 더욱 일어나 오직 혹시나 잃을 것만을 두려워합니다. 사대부의 풍습(風習)이 이와 같으니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윤급(尹汲)이 이조 참의로써 정언(正言) 조명채(趙命采)의 탄핵을 받게 되었고, 이재(李縡)는 당세의 유종(儒宗)이 되었는데도 임금이 예우(禮遇)하기를 기꺼워하지 않았으며, 원경하(元景夏)는 누차에 걸쳐 탄핵을 받았으나 더욱더 장용(奬用)되었다. 그러므로 유우기(兪宇基)가 상소에서 약간 언급하였으나 또한 감히 명백하게 말하지는 못하였다. 임금이 또한 그 뜻을 헤아려 알고 드디어 협잡(挾雜)으로써 배척하였다.
정언 임박(任璞)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평(持平) 안식(安栻)이 호서(湖西)의 시험을 관장하여 비난의 소리가 떠들썩하게 일어났는데, 금방 파직시켰다가 곧바로 다시 제수하여 대각(臺閣)에 수치를 끼쳤으니,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능침(陵寢)의 화소(火巢)248) 안에서 몰래 도살(屠殺)을 한 것은 일이 매우 놀라우니, 해당 능관(陵官)을 즉시 사태(査汰)시켜야 합니다. 동지 부사(冬至副使) 정언섭(鄭彦燮)과 전 서장관(書狀官) 권현(權賢)은 행구(行具)의 수용(需用)을 빙자하여 시전(市廛)의 물건을 함부로 취하였으니, 마땅히 삭파(削罷)의 형벌을 시행하여야 합니다. 경성 판관(鏡城判官) 주기(朱杞)는 전관(前官)이 비치해 둔 진곡(賑穀)을 모두 아복(衙僕)의 실어가는 것으로 돌려 원망과 비난이 고을에 가득하니, 마땅히 삭탈 관직(削奪官職)시켜야 합니다. 성산 현감(星山縣監) 이수보(李秀輔)는 서원(書院)의 일로써 붙잡혀 와서 공초(供招)를 바침에 있어 충렬사(忠烈祠)의 명칭을 향현사(鄕賢祠)로 바꾸었는데 도신(道臣)이 조사하여 보고함에 미쳐서 서로 덮고 숨겨주어 끝내는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으니, 이수보는 마땅히 파직시키고 도신 또한 마땅히 종중 추고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되 주기는 굶주린 백성을 구원할 것을 걱정하지 않았고, 이수보는 일이 임금을 속인 것에 관계되니, 모두 해부(該府)로 하여금 사처(査處)하게 하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경기 감사 홍경보(洪景輔)와 함경 감사 윤용(尹容)이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모두 소견(召見)하고 면유(面諭)하여 보냈다.
조재덕(趙載德)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이때 조재민(趙載敏)과 서지수(徐志修)가 먼저 검열로 임명되었는데, 영상(領相)·좌상(左相)과 친척의 혐의가 있어 체직(遞職)되었다. 소시(召試)를 통해서 사직(史職)에 들어간 것은 조재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2월 12일 계묘
고산 찰방(高山察訪)을 가리지 않고 의망(擬望)하였다 하여 특별히 이조 좌랑 정이검(鄭履儉)으로써 고산 찰방을 삼을 것을 명하였다. 대신(大臣)이 모친(母親)이 늙은 것으로써 연백(筵白)하니, 체직시키고, 다시 일찍이 옥서(玉署)249) 를 지낸 자로써 차송(差送)할 것을 명하였다.
12월 13일 갑진
하교하기를,
"원량(元良)250) 이 입학(入學)하게 되어 성대한 예(禮)를 장차 거행하려 하는데, 이때의 보도(輔導)를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있겠는가? 학문을 강마(講磨)하고 기질(氣質)을 권성(勸成)하는 것이 오로지 산림(山林)의 사람에게 있으니, 찬선(贊善)·진선(進善)은 즉시 역마를 타고 올라오기를 허락하여 우리 원량을 보좌하게 하라."
하였다.
12월 14일 을사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이런 흉년을 당하여 마땅히 수령을 가려야 하는데, 반드시 지색(枳塞)당한 자를 불식(佛栻)한 후에야 직사(職事)에 마음을 다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강필경(姜必慶)을 천거하여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대개 강필경은 경술년251) 의 고옥(蠱獄)에서 역수(逆囚)의 원인(援引)한 바가 되어 지색을 당한 자이었다.
12월 18일 기유
소대(召對)를 행하고,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講)하였다.
12월 19일 경술
달이 태미원(太微垣)에 들어갔다.
12월 20일 신해
이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처음에 정언 조명채(曹命采)가 윤급(尹汲)을 논핵하였는데, 헌납 유우기(兪宇基)는 또 조명채가 전지(銓地)를 뒤흔든다고 논핵하였다. 그가 피혐(避嫌)함에 미쳐서 또 ‘용의(用意)하여 허위(虛僞)를 날조하고는 반드시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공격해 제거하고자 한다.’는 것으로써 조명채를 탄핵하였는데, 말 뜻이 아울러 서종옥(徐宗玉)에게까지 미쳤으므로 이에 서종옥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다. 이때 전조(銓曹)를 요지(要地)로 삼아 서로가 시기하였기 때문에 뒤흔들고 공격하는 일이 거의 그칠 날이 없었다.
교리 박춘보(朴春普)가 상소하기를,
"이우하(李宇夏)의 죄범(罪犯)은 경미하지 않은데, 탕척(蕩滌)을 입기까지 하였고, 남유용(南有容)은 한 글자를 망발하였는데도 유독 함께 사면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태중(李台重)·김시찬(金時粲)의 청개(淸介)함과 재식(才識)은 모두 마땅히 경악(經幄)에 배치해야 하는데도, 한마디 말이 전하의 비위를 거슬러 찬축(竄逐)·소기(疎棄)되었습니다. 유우기(兪宇基)의 상소는 다른 사람의 뜻을 조금 분발(奮發)시켰는데도, 전하께서 협잡(挾雜)으로써 비답을 내리신 것은 가위 대접하기를 너무 각박하게 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관료(館僚)의 자중(藉重)한 것에 대하여 성상께서 비답을 내려 낙과(落科)에 단치(斷置)하셨는데, 또 말하기를, ‘그 이른바 공의(公議)란 것은 참다운 공의가 아니다.’ 하였습니다. 관료가 일찍이 조명채(曹命采)를 영구(營救)하였으니, 그렇다면 사람을 논하고 일을 논하기를 반드시 조명채와 같이 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관료의 이른바 공의에 부합될 수 있겠습니까? 간관(諫官)이 된 몸으로 한마디 말이 입에서 나오자 묘당(廟堂)에서는 앞에서 경시(輕視)하고 유신(儒臣)은 뒤에서 무섭게 공격하니 이와 같이 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비록 충성하기를 원하는 신하가 있다 하더라도 입을 다물고 혀를 묶어 놓은 채 감히 전하의 앞에 진언(進言)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비답을 내리지 않고, ‘협잡(挾雜)해서 이기기를 힘쓴다.’는 것으로써 절책(切責)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2월 22일 계축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좌의정 송인명(宋寅明), 우의정 조현명(趙顯命) 등이 각각 차자(箚子)를 올려 사직하니, 박춘보(朴春普)의 상소에 대각(臺閣)을 경시(輕視)한다고 대신(大臣)을 배척했기 때문이었다. 비답하기를,
"그가 협잡(挾雜)한 바를 이미 알고 있는데 어찌 사직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12월 23일 갑인
수찬 이성중(李成中)이 어미는 늙고 집은 가난한 이유로써 수령(守令) 자리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해조(該曹)에 명하여 식물(食物)을 주게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변지(邊地)의 수령(守令)으로서 죄파(罪罷)되었거나 폄하(貶下)된 자는 이력(履歷)을 허락하지 말고 징권(懲勸)을 보일 것을 명하니,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의 청에 따른 것이었다.
12월 24일 을묘
이현보(李玄輔)와 정필녕(鄭必寧)을 승지로, 이종백(李宗白)을 이조 참의로, 원경하(元景夏)를 좌윤(左尹)으로, 권혁(權爀)을 대사간으로, 김진상(金鎭商)을 부제학으로, 이광부(李光溥)를 집의로, 민택수(閔宅洙)를 장령으로, 김상구(金尙耉)를 지평으로, 민백행(閔百行)을 헌납으로, 남태저(南泰著)와 홍익삼(洪益三)을 정언으로, 정실(鄭宲)을 교리로, 정휘량(鄭翬良)을 수찬으로, 이필구(李必耉)를 공홍 병사(公洪兵使)로, 심해(沈瑎)을 경상 좌수사로, 노계정(盧啓禎)을 전라 우병사로 삼았다.
12월 25일 병진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북도(北道)의 감진 어사(監賑御史) 홍계희(洪啓禧)가, ‘잡곡(雜穀) 1백 석(石)으로 진구(賑救)를 조력하는 자에게는 실직(實職)을 제수하는 것을 허락하기를 계청(啓請)하였는데, 이것은 외잡(猥雜)하니 마땅히 2백 석 이상으로써 실직을 제수하고 1백 석 이상은 상(賞)을 주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말하기를,
"홍계희가 이민(移民)을 시켜서 곡물이 여유가 있는 고을에 백성들을 나아가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것은 허락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의 의사로는 이를 난처하게 여기며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이민시키는 일은 단지 《맹자(孟子)》에 나타나 있을 뿐이며 지난날의 문적(文籍)에서 들은 바가 아닙니다. 북방(北方)은 몹시 춥고 비와 눈이 번갈아 내리니 옮겨가는 즈음에 도로(道路)에서 쓰러져 죽게 될 것은 형세상 반드시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날씨가 춥기 때문에 다른 옷을 입으려고 하다가 문득 위사(衞士)가 추워서 떨 것을 생각하니 마음에 차마 할 수가 없어서 동옷[襦衣]을 하사할 것을 명한 뒤에 내가 비로소 입었던 것이다. 수령(守令)이 된 자들이 그 자질(子姪)들에 대해서도 오히려 잘 먹이는 것을 어렵게 생각할 터인데, 더군다나 다른 고을의 백성이겠는가?"
하고, 드디어 홍계희의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날씨가 차가움으로 인해 꽁꽁 얼어붙은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염려하여 감옥의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시키고, 또 윤양래(尹陽來)를 판의금(判義禁)으로 삼아 왕부(王府)252) 에 갇혀 있는 자들을 의언(議讞)253) 하게 하였다.
각릉(各陵)의 별검(別檢)들에 대해서는 30삭(朔)만에 승륙(陞六)하는 것으로써 정(定)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12월 27일 무오
찬선(贊善) 어유봉(魚有鳳)이 상소하여 돈소(敦召)의 명(命)을 사양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광주 부윤(廣州府尹) 민통수(閔通洙)가 상소하여, 공명첩(空名帖) 수천 장(張)을 발행하여 군기(軍器)를 수조(修造) 하기를 청하고, 또 해서(海西) 열읍(列邑)의 전세(田稅)를 발매(發賣)해 그 잉여(剩餘)를 취하여 염철(鹽鐵)을 무역해 둘 것을 청하였다. 또 삼군문(三軍門) 및 병조(兵曹)의 1년 동안 사용하고 남은 포목(布木)을 남한 산성(南漢山城)에 유치(留置)하여 불시(不時)의 수요(需要)로 삼고, 향곡(餉穀) 가운데 저장해 둔 지 햇수가 오래 된 것은 증미(蒸米)로 만들어 위급한 상황에 임해 성(城)을 수비하는 용도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또 복호(復戶) 가운데 향곡을 보조한다는 명색(名色) 하에 추가로 징수하는 것을 혁파(革罷)하여 민(民)과 병(兵)이 모두 피곤하게 하지 말 것을 청하니, 비국(備局)에 품처(稟處)할 것을 명하였다.
12월 29일 경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나고, 어떤 별이 유성(柳星) 아래로 흘러갔다.
이해에 경중(京中) 5부(五部)의 원호(元戶)가 3만 4천 8백 86가구였고, 인구(人口)가 18만 9천 9백 85명이었다. 【남자가 9만 7명이고, 여자가 9만 9천 8백 78명이었다.】 제도(諸道)의 원호(元戶)는 1백 54만 69호이고, 인구는 6백 48만 3천 3백 48명이었다. 【남자는 3백 21만 1백 23명이고 여자가 3백 27만 3천 2백 25명이다.】
【태백산사고본】 40책 54권 41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43면
【분류】호구-호구(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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