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신유
제도(諸道)에 권농(勸農)의 윤음(綸音)을 내렸다.
1월 2일 임술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별유(別諭)하여 돈소(敦召)의 명을 내렸다. 또 삼성사(三聖祠)001) 의 원우(院宇)를 훼철(毁撤)하지 말 것을 청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성상의 비지(批旨)에 이른바 정도(正道)·존현(尊賢)의 하교에 대하여 삼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신은 감히 성상께서 도학을 바루려 하지 않으신다거나 어진 이를 존숭하지 않으신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다만 처분이 중도에 지나치시기 때문에 되레 그것에 가려 변별(辨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에는 진실로 비슷한 예가 있으니, 청컨대 산 사람을 두고 비유해 보겠습니다. 사람이 사는 집의 담장을 헐어 편히 살 수 없게 하고서 ‘내가 너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너를 돌봐 주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누가 믿겠습니까? 가령 다른 사우를 훼철한다면 그래도 옳겠으나 삼성(三聖)의 위판(位版)이 있는 곳이라면 사체나 도리로 보아서 단연코 극히 미안한 일인 줄로 압니다. 무릇 당초에 선비들이 자의로 신주를 봉안한 것이 참으로 참람된 일인 듯하기는 하지만, 전연 본데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비단 창주 정사(滄洲精舍)002) 의 고사(故事)가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신이 삼가 주자(朱子)의 행장(行狀)을 보니, 한거(閒居)할 때를 서술한 대목에 ‘동이 채 트기 전에 일어나서 심의(深衣)와 폭건(幅巾)·방리(方履)로 가묘(家廟)에 참배하고 선성(先聖)까지 참배한다.’ 하였는데, 이미 선성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부질없이 하는 일은 아닐 것이며 반드시 유상(遺像)이나 위패를 모신 곳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일이 참으로 참람하다고 할 수 있는데 주자가 어찌 그런 일을 했겠습니까? 또 성현의 신령은 마치 물이 땅속을 흐르듯 어디를 가나 없는 곳이 없기 때문에 진정으로 마음을 정성스럽게 하여 제사을 올린다면, 아! 밝은 신도(神道)는 바로 거기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사우를 세우고 정성을 드린 뒤인데 성신(聖神)의 의탁함이 그곳에 있지 않음을 어떻게 알아서 기어코 훼철하려고 하십니까? 신은 일찍이 주자가 《시경(詩經)》의 공손석부(公孫碩膚)003) 의 뜻을 해석한 대목을 음미한 바 있습니다. 거기에 이른바 ‘참사(讒邪)한 말이 주공(周公)의 충성(忠聖)에 가해지지 못하게 한다.’는 해석은 시를 읊은 사람의 의사를 잘 터득한 것으로, 그의 애경(愛敬)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음도 아울러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뜻에서 미뤄보면 ‘훼(毁)’의 한 글자는 삼성사에 가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헐라고 명하고 대신(臺臣)은 헐지 말라고 청하여 서로 견지하면서 어수선하게 날마다 조보(朝報)에 오르니, 그 체면을 손상하고 안목을 혼란하게 하는 것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이러한 일의 의의(意義)는 알기가 극히 어려운 일은 아닌데도 바로 군신(群臣)들이 잘 개진(開陳)하지 못한 탓으로 일월과 같이 밝으신 총명으로도 우연히 선입견(先入見)이 주(主)가 됨을 면할 수 없음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전하의 정도(正道)·존현(尊賢)의 본의에 흠이 되지나 않을까 그윽이 염려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유신(儒臣)을 대접하는 도리가 어떻게 매정할 수 있겠는가? 이미 거행한 것 이외에는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이에 미처 훼철되지 않은 것은 훼철을 면하게 되었다. 조금 후에 또 하교하기를,
"이 뒤로는 비록 삼성사라 할지라도 다시 짓는 자가 있으면 감사는 나문(拿問)하여 처리하고 수령은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임금이 인정전에서 원조(元朝)의 하례를 받으니, 좌의정 송인명(宋寅明) 등이 의식대로 하전(賀箋)을 바치고 칭하하였다.
1월 3일 계해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1월 4일 갑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 우의정 조현명(趙顯命) 등이 세시(歲時)가 신정(新正)에 속하는데 재변이 거듭 닥친 일로써 서로 함께 진계(陳戒)하기를,
"성상께서 춘추가 점점 높아지시니 분발하는 의지가 아마도 처음과 같지 못한 듯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호령을 내려 시행할 즈음에 몹시 성찰(省察)을 더하시어 거경(居敬)·궁리(窮理)로 마음을 다스리는 근본을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나이 이제 50에서 한 살이 모자라는데 정신도 따라서 줄어들었으니, 어떻게 국사를 꾸려나갈 수 있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생각해 보면 지금 세 곳 변방은 편안하고 조정도 일이 없으나, 삼남(三南)004) 의 백성들은 군역(軍役)에 시달려 변란(變亂)을 바라는 마음이 있고 양서(兩西)005) 의 백성들은 기근(飢饉)에 쪼들려 유리(流離)할 걱정이 있습니다. 신 등처럼 반식(伴食)하는 자는 논할 것도 없거니와, 분발하고 면려하여 억만년 끝없는 경상(慶祥)을 여는 일은 그 책임이 어찌 성상에게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조현명이 말하기를,
"성상의 춘추가 마침 거백옥(蘧伯玉)의 지비지년(知非之年)006) 에 미쳤으니, 경척(警愓)하는 마음이 다른 때와는 자별하실 것입니다. 성상의 학문이 고명(高明)하시니 어찌 49년 동안의 잘못됨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일마다 마음을 두고 살피시되 심술(心術)의 기미(機微)와 희로 애락(喜怒哀樂)의 발현에 있어서 언제나 절도(節度)에 맞는가 안맞는가와 대궐의 안과 조정의 사이에 일이 의리에 맞는지 안맞는지를 새겨보시어, 허물이 있으면 고치고 없는 경우 더욱 힘써서 실용상의 공부를 하시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매우 절실하니, 마땅히 힘써 보겠다."
하였다. 송인명이 또 효종조에 양송(兩宋)007) 을 대우하던 고사(故事)에 준하여 지성으로 유현(儒賢)을 초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산림의 선비는 매양 고집이 많은 편이다. 근년에 한 사람의 거칠고 질박(質朴)한 양득중(梁得中)을 겨우 불러들였더니, 그 역시 쫓아서 보내버렸다. 윗사람이 만약 정성과 예의가 모자라면 아래에 있는 자가 진실로 힘써 면계(勉戒)해야 하는데도 지금은 위에서 권면하고 아래에서는 쫓아내니, 그러면 내가 직접 가서 끌고 오라는 말인가?"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어유봉(魚有鳳)이 만약 세자가 입학할 때에 맞추어 올라왔으면 좋겠습니다마는, 한번 하유(下諭)하셨을 뿐이니 어찌 즐기어 오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에 정원으로 하여금 경연에서 뽑힌 신하들에게 다시 별유(別諭)를 매겨 세자의 입학에 맞추어 진참(進參)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송인명이 또 90세는 대질(大耋)의 나이이니, 마땅히 품계를 변경시키는 은전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하고 이어 몇 사람을 들면서 청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늙은이를 우대하는 은전은 음식물을 후히 내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어떻게 경솔히 관작을 제수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들은 얼마 안되어 죽을 사람들입니다. 설혹 은전이 과하다 한들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또 고례(古例)도 있습니다."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고례가 비록 있기는 하나 잘못된 전례를 따라서는 부당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이란 효도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니, 나이가 구질(九耋)에 이르렀다면 마땅히 그 아들의 애일(愛日)008) 하는 마음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작록(爵祿)은 끝내 양로(養老)를 위한 자료가 아닌데, 어땋게 그 자손의 사정까지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공흥도 경차관(公洪道敬差官) 홍익삼(洪益三)이 양전(量田)한 후에 묵은 전답은 강속전(降續田)009) 으로 세미(稅米)를 감면해 줄 것을 청했는데, 그 청을 허락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또 북도는 연이어 기근(饑饉)이 들어 백성의 사정이 목마르게 괴로워하는 형편이니 마땅히 향축(香祝)을 특별히 보내어 명산(名山)에 공경히 빌어서 풍년을 기원하여야 한다고 말하자, 예조 참판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사전(祀典)은 지극히 중대한 것이고 풍년을 비는 것은 더욱 성대한 예식입니다. 그러나 외방(外方)에 가서 풍년을 비는 일은 이미 이 예문에 없는 예이니, 새로 창시(創始)하여 행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예관의 말이 참으로 옳다.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대신과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를 소견하고 북도의 진정(賑政)을 의논하였는데, 영남의 곡물 1만 곡(斛)을 더 주기로 하고 영남과 관동의 배에 실어서 보내기로 하였다. 이때에 함경 감사 윤용(尹容)이 굶주린 백성이 30만 명이나 되어 전에 보내 준 영남의 곡물 10만 곡(斛)으로는 구제할 수 없다 하여 더 보내 줄 것을 장계로 청하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박문수가 북도의 사정을 잘 안다 하여 자주 물었는데, 박문수가 대답해 아뢸 때 목소리가 너무 컸고 또 경재(卿宰)들과 옳고 그름을 다투어 목소리와 얼굴빛이 매우 날카로우니, 승지가 추고(推考)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추고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예조 참판 김약로(金若魯)가 태묘(太廟) 전알(展謁) 때에 왕세자의 지영례(祗迎禮)와 지송례(祗送禮)를 행하여야 할지의 여부를 여쭈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는 마땅히 성인(成人)의 예(禮)로써 책임을 지워야 하니, 그 전례에 따라 행하라."
하였다. 김약로가 또 말하기를,
"왕세자가 입학에 이미 길일(吉日)을 가렸습니다. 일찍이 선왕조(先王朝) 때에는 입학 후에 관례(冠禮)를 행한 때도 있었고 혹은 관례를 행한 뒤에 입학한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연석(筵席)의 하교로 인하여 거행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왕조의 구례는 어떠하였는가?"
하자, 김약로가 말하기를,
"현종께서는 11세에 관례를 행하고 12세에 입학하셨으며, 숙종께서는 9세에 입학하고 10세에 관례를 행하셨으며, 경종께서는 8세의 봄에 입학하고 가을에 관례를 행하셨습니다."
하니, 임금이 초봄을 기다려 다시 품지(稟旨)하라고 명하였다. 김약로가 또 말하기를,
"왕세자가 태묘에 전알할 때 왕세자의 배위(拜位)는 묘정(廟庭)의 동북향에 베풀고 전하의 자리는 서향에 베풀어, 전하께서 먼저 사배(四拜)를 행하시면 왕세자는 북향 자리에 나아가 사배한 뒤에 전하와 세자께서 또 배례를 행하시고 봉심(奉審)하실 때에는 전하께서 섬돌에 올라서 태묘 안으로 들어가고 왕세자는 배위(拜位)에 그대로 서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이로써 마련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좌참찬 윤양래(尹陽來)가 나이 70세가 되었다 하여 《예경(禮經)》과 우리 나라의 옛 전례(典禮)를 인용하여 상소하고 치사(致仕)010) 를 청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1월 5일 을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서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몸을 가다듬고 수행(修行)을 하면 재앙이 바뀌어 상서로움이 된다고 진계하고, 또 말하기를,
"여기(癘氣)011) 가 바야흐로 치성하고 국고(國庫)가 비어 실로 목전에 닥칠 걱정이 있으니, 마땅히 부세(賦稅)를 맡은 신하를 신칙하고 절약하는 방도를 강구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기강이 서야만 모든 일이 따라서 제대로 되는 것인데, 연초(年初)의 차대(次對)에는 비국 당상이 결원(缺員)이더니 오늘의 조참에는 대간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이러고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나의 생각에는 대간은 혁파(革罷)해도 옳을 것이다."
하였다. 이어 선지(宣旨)하기를, ‘조종 백관으로 하여금 소회(所懷)가 있는 자는 들어와서 고하게 하라.’ 하였으나, 끝내 한 사람도 응지(應旨)하는 이가 없었다. 홍문관의 이창의(李昌誼)·이성중(李成中)·정휘량(鄭翬良) 등이 나아가 아뢰기를,
"정문(正門)의 조참에서 구언(求言)하는데도 뜰에 가득한 신료(臣僚) 가운데 한 사람도 진언(進言)하는 이가 없는 것은 전하께서 마음을 비우고 화평하게 받아들이시는 아량이 모자라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의당 마음을 기울여 면려하시고 언로(言路)를 넓히도록 하소서."
하였고, 송인명이 말하기를,
"옛날의 잘 다스려진 시대를 보면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말을 하라고 하여도 또한 말하지 않으니, 이는 바로 전하께서 몸소 반성해 보실 곳입니다. 아마도 이이(訑訑)012) 한 안색과 음성으로 인하여 그리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위(衛)나라의 대부(大夫)가 유유(唯唯)013) 하고 감히 임금의 잘못을 바로 잡지 못해서 위의 나라 일이 날로 그르쳐졌는데, 지금은 유유만이 아니라 모두가 묵묵히 있으니 망국(亡國)의 조짐이 불행하게도 가까워진 것입니다."
하고, 이어 함묵(緘默)한 대관(臺官)을 모조리 파직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다만 체직(遞職)하라고 명하였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이때에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북도의 진정(賑政)을 주관하고 있었는데, 영남의 곡물 운반이 제때에 미치지 못할 염려가 있어 임금에게 말하기를,
"신이 바야흐로 장임(將任)을 띠고 있으나, 지금은 평시라서 달리 보공(報功)할 길이 없습니다. 청컨대 우선 장임을 해체하고 필마(匹馬)로 북도에 달려가서 감사·어사와 진휼할 계책을 의논하고 또 관서로 가서 감사와 곡물 운반할 방도를 강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휼사가 어찌 곡물을 찾아서 다른 도로 직접 가겠다는 것인가?"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진정 백성에게 이롭다면 어찌 구구하게 일의 체모를 논하겠습니까?"
하고, 직접 가기를 굳이 청했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대신도 불가하게 여겼고 또 장임의 해직을 청한 것은 일이 외람된 데 관계된다 하여 추고(推考)하기를 청했으나,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을 구휼하기에 바빠서 그의 말이 이러한 것이니, 추고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나이 많은 늙은이를 존경하고 받드는 것은 왕정(王政)의 큰 일이니, 나이 90세가 된 사람은 우대하는 은전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고, 몇 사람의 성명을 일일이 들어가면서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애일(愛日)하는 마음으로 미루어 보면 어찌 혈구(絜矩)014) 의 정사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고, 조정 진신(搢紳) 중에서 나이 90세가 된 사람은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을 막론하고 모두 자급(資級)을 올려 주고 실직(實職)을 지내지 않은 사람도 가자(加資)하게 하였다.
1월 6일 병인
유만중(柳萬重)·이세진(李世璡)을 승지로, 윤득경(尹得敬)을 이조 좌랑으로, 조명겸(趙明謙)을 대사간으로, 허옥(許沃)을 집의로, 대사간 이제담(李齊聃)을 장령으로, 이제원(李濟遠)을 헌납으로, 이응협(李應協)을 지평으로, 홍계유(洪啓裕)를 응교로, 홍상한(洪象漢)을 겸 필선으로, 정석오(鄭錫五)를 예조 판서로, 조동점(趙東漸)을 남병사로 삼고, 이천보(李天輔)를 옥천 안핵 어사(沃川按覈御史)로 삼았는데, 옥천에 살인 사건이 생긴 때문이었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하기를 마치자, 궐내에 입직한 무신들에게 앞으로 나와 소회를 아뢰라고 하였으나 모두 대답하려고 하지 않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문법(文法)에 구애하지 않을 것이니, 만약 평상시에 생각해 둔 바가 있으면 마땅히 평온한 마음으로 말하라."
하였다. 부장(部將) 최필형(崔弼衡)은 북도 사람인데, 육진(六鎭)의 청차(淸差)015) 의 폐단을 들어 말하니,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 인심이 고약스럽습니다. 육진의 이교(吏校)016) 가 청차를 꾀어 그들을 빙자하여 정수(定數) 이상을 받아내는데 해마다 증가하여 전에 1필(疋)을 주던 것이 지금은 20필이 되었으며 다른 물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거두는 것이 자그마치 수십 필에 이르고 있습니다. 10년 사이에 육진의 백성이 텅 비어버릴 염려가 있으니, 묘당에서 의당 상의하여 변통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박문수가 또 관서(關西)의 곡물 1만 5천 곡(斛)을 북도로 덜어주어 진휼의 밑천으로 삼기를 청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가부를 물었다. 비국 당상 민응수(閔應洙)가 말하기를,
"대동강에서 배로 운반하여 성천(成川)에 이르면, 거기서 북도까지는 4, 5일 길밖에 되지 않습니다. 북도의 백성으로 하여금 옮기도록 하면 그리 어렵지는 않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에 앞서 우의정 조현명(趙顯命) 등이 아뢰기를,
"수안(遂安)에는 동산(銅山)이 있으니, 청컨대 돈을 주조하여 국용(國用)을 넉넉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돈의 주조는 폐단이 있다고 하여 윤허하지 않았는데, 이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내가 이미 돈의 폐단이 있음을 알고 있으니 어찌 더 돈의 주조를 가벼이 허락하랴마는, 이제 윤허하는 것은 곧 나라를 위한 심려(深慮)와 백성을 위한 장계(長計)에서이다."
하였다. 대개 의논하는 사람이 ‘해마다 흉년이 들어 국고가 비었으니 의당 돈을 주조하여 곡물을 사들여 흉년에 진휼할 대비책으로 삼아야 하고, 또 거두어 들이는 베를 쌀로 내게 하는 폐단을 없애야 한다.’고 해서 드디어 윤허하게 된 것이다. 조현명이 또 남유용(南有容)의 석방(釋放)을 청하였다. 남유용은 귀양간 지 오래여서 여러 신하들이 여러 차례 말을 했으나 임금이 당습(黨習)을 그르게 여겨 끝내 즐기어 윤허치 않다가 이에 이르러 비로소 윤허하였다.
1월 7일 정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8일 무진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0일 경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신이 병이 있어 그동안 등대하지 못했습니다. 북도의 흉년은 아득한 먼 옛날에도 없던 바인데, 지난 을묘년017) ·병진년018) 의 큰 흉년에는 본도의 곡물 저축이 꽤 많아 그것으로 진휼하였으나, 그 후에 점차 줄어들어 작년에는 창고를 털어서 나눠 주었고 되받은 것은 지극히 적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거듭 흉년을 만났으니, 풍문으로 듣기에도 매우 놀랍고 참혹하다 합니다. 포항(浦項)의 곡물은 오로지 북도를 위해서 저축해 둔 것이고 그 밖에 통영(統營)의 곡물을 비축해 둔 것이나 호남의 곡물을 옮겨 온 것도 역시 북도를 위해서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의당 4, 5만 곡은 더 주어야 할 것으로 아는데, 처음에 다만 1만 곡을 더 준 뒤에 또 박문수(朴文秀)의 말에 의하여 추가로 관서의 곡물 1만 5천 곡을 주고 영남의 1만 곡은 도로 정지하였다 합니다. 영성군(靈城君)의 이듬해 걱정은 신 등도 어찌 거기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겠습니까마는, 어떻게 이듬해의 미연(未然)의 걱정 때문에 목전에 꼭 죽게 된 백성의 목숨을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말에도 ‘금년에 눈 속에서 제가 얼어 죽어버리면 명년에 비록 큰 주발에 떡국이 있다 한들 누가 먹을지 알지 못한다.’ 했는데, 이는 참으로 애통한 말입니다. 삼가 듣건대 엊그제 영성군이 ‘제도(諸道)에서 진휼곡을 더 청해와도 지금부터 일체 윤허하지 마시라.’는 뜻으로 아뢰니, 성상의 전교에도 또한 ‘이 뒤로는 비록 한 되 한 말이라도 결코 윤허할 수 없다.’고 하셨다 하는데, 이는 말 한마디가 나라를 망친다는 것과 가깝지 않겠습니까?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제사 음식은 제한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제사의 음식도 오히려 미리 제한하지 않는 것인데, 하물며 만백성의 의지할 곳 없는 목숨을 구제하는 일을 어떻게 미리 제한하여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이것으로 원망을 한다면, 이는 나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다. 내가 만약 말을 달려 사냥의 비용으로 재물을 쓰려 한다면 참으로 잘못이지만, 아끼는 것은 결국 백성에게 돌리려 함인데 또 무엇이 그르겠는가?"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영상의 말은 대신의 도리에서 하는 말이고 신이 아뢴 바는 유사(有司)의 책임에서 드린 말입니다. 염려되는 것은 혹시나 곡물이 다하여 백성들이 죽어가는 일인데, 신이 윤허를 아끼시라 한 것도 곡물을 저축하여 흉년에 대비하는 계책을 삼으려는 까닭입니다."
하니,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영상과 영성군의 말은 둘 다 새겨 두어야 하고 하나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함경 감사 윤용(尹容)과 감진 어사(監賑御史) 홍계희(洪啓禧)가 계청하기를,
"함흥(咸興)이나 혹은 덕원(德源)의 원산(元山)에서 주전(鑄錢)을 개설하도록 허락하여 주조하는 대로 풀어서 쌀을 사들이면 미곡상들이 모여들어 구황(救荒)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북평사(北評事) 한억증(韓億增)이 계청하기를,
"흉년에 구원하여 살려 준 자를 그대로 노비를 삼는 일은 조정에서 이미 시행한 전례가 있습니다. 청컨대 정식(定式)을 만들어 진휼청에서 입안(立案)을 만들어 주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묘당에서 복계(覆啓)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진도 군수(珍島郡守) 신처수(申處洙)의 외보(外補)를 풀어주기를 청하였으니, 늙은 어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또 이광덕(李匡德)을 풀어 줄 것을 청하였고 좌의정 송인명도 말을 하니, 임금이 아울러 윤허하였다. 또 이규채(李奎采)도 풀어 주라고 명하였는데, 임금이 이미 이광덕을 풀어 주자 김재로가 이어서 ‘성은이 넓고 넓어 고루 입지 않은 이가 없는데 유독 이규채만은 아직도 감등(減等)의 율(律)에 걸려 있다.’고 말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김재로가 또 김시찬(金時粲)·이태중(李台重)이 용서받은 지 이미 오래이나 아직도 직첩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자, 박문수가 또 이태중의 쓸 만함을 왕성하게 말을 하니, 임금이 직첩을 내주라고 명하였다.
양서(兩西)에 여제(癘祭)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양서에 여역(癘疫)이 크게 번져 사망자가 서로 잇달았는데 묘당에서 별도로 향축(香祝)을 보내어 여제를 지낼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종신(宗臣) 한 사람이 점방 보는 사람[廛人]을 침범하여 괴롭히며 목화(木花)를 빼앗고 값을 치르지 않아서, 그 점방 사람이 값을 요구해도 받지 못하자 그 종신의 집 문밖에서 자살을 기도하기에 이르렀는데, 비록 죽지는 않았으나 피가 줄줄 흘러내려 그치지 않았다. 우의정 조현명이 그 사실을 듣고 임금에게 아뢰어 종신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정원(政院)에 사실을 조사하라고 명했는데, 바로 해릉군(海陵君) 이관(李爟)이었다. 이에 의금부에 감죄(勘罪)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1일 신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는 달이 정성(井星)을 범하였다.
장령 이제담(李齊聃)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요(堯)·순(舜)의 시대에도 오히려 비방목(誹謗木)019) 을 설치했었습니다. 요·순 같은 성인으로서 어찌 비방하거나 헐뜯을 일이 있었겠습니까? 진실로 실성을 하거나 환장한 자가 아니면 필시 천일(天日)을 꾸짖어 욕하는 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순은 오히려 비방을 듣지 못할까 걱정을 하였고 비방함으로써 죄를 얻는 자는 듣지 못했으니, 이 점은 요·순이 더욱 성인다워지고 더욱 잘 다스려지는 까닭이었습니다.
또 우리 나라 열성(列聖)으로 말하더라도 세종조 말년에 장차 거둥할 일이 있었는데 아래에서 간해도 듣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난여(鑾輿)가 장차 떠나려 하여 경계를 고하고 노부(鹵簿)020) 가 앞서 나갔는데, 지평 허척(許倜)이 그 이예(吏隷)를 이끌고 지공(支供)021) 할 것을 두들겨 부수어 그 행차를 막았습니다. 지금으로써 본다면 대불경(大不敬)으로 논해도 되고 무군 범상(無君犯上)으로 다스려도 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종께서는 죄를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리어 총애를 더하여 받아들이셨습니다. 하연(河演)이 이조 판서를 겸하여 주의(注擬)를 한번 잘못하자 대사헌 정갑손(鄭甲孫)이 곧바로 정국(庭鞫)을 청하였으니 격렬함이 크게 지나치다고 할 만한데, 세종께서는 온화한 안색으로 두 사람을 화해시키고 지나치게 격렬하다는 것으로써 정갑손을 지척(指斥)하지를 않았습니다.
또 박원종(朴元宗)은 원훈(元勳)입니다. 전폐(殿陛)를 출입할 때 중종께서 일어서기까지 하시니 지평 허굉(許硡)이 면전에서 발호자(跋扈者)022) 라고 지척하였는데, 발호란 말은 양기(梁冀)023) 에 대한 제목(題目)이었습니다. 박원종이 엎드려 울음을 그치지 않으니, 중종께서 지평의 보는 바가 지나쳤다고 위로하였으며, 끝내 그 일로써 허굉을 책하지도 않았습니다.
노수신(盧守愼)은 어진 정승이었습니다. 일찍이 어미를 위하여 선물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장령 김성일(金誠一)이 곧바로 연석(筵席)에서 노수신을 참(斬)하자고 청하였으니 그 논의가 너무나 가혹하다고 할 만하였으나, 선조께서는 노수신의 인책(引責)을 가납하시고 김성일은 직신(直臣)으로 허여하셨습니다. 우리 조종(祖宗)께서 대신(大臣)을 총애하여 우대하시고 당언(讜言)024) 을 높여 추장(推奬)하시기를 이같이 훌륭하게 하셨기 때문에 성덕(聖德)과 지치(至治)는 하늘과 같이 크고 해가 솟아오름과 같아 바로 요·순과 더불어 그 아름다움을 짝할 만하시니, 이 어찌 우리의 문자(文子)·문손(文孫)이 본받아야 할 점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그윽이 보건대, 근세에 대간(臺諫)을 선출한 것은 잘 살펴서 가리지 못한 점이 많습니다. 신처럼 천부당 만부당한 자가 또한 혹 그속에 끼이기도 하여 인품은 중망(衆望)에 차지 목하고 말은 성상의 마음에 들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우리 전하처럼 포용하는 아량을 가지신 분으로서도 혹 가벼이 보시는 마음이 없을 수 없어 한마디의 말만 사리에 당치 않으면 바로 위노(威怒)를 내리시어 경한 자는 찬축(竄逐)하고 중한 자는 정국(庭鞫)을 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대간의 자리를 마치 덫이나 함정처럼 보고 모면하는 것을 상책으로 여기며 함묵(含默)하는 것을 중책(中策)으로 여겨, 혹 한두 가지 진언할 것이 있으면 반드시 천번 만번 읽고 외고 하여 어떤 글자가 의사에 저촉될까 어떤 귀절이 눈에 걸릴까를 살핀 뒤에 조심스레 올리고, 올린 뒤에는 혹은 미리 변방으로 귀양갈 행장을 꾸리기도 하고 혹은 모여서 주벌(誅罰)의 명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아! 까마귀나 솔개가 죽임을 당하면 봉황은 피하여 멀리 떠나 가고, 미친 이가 베임을 당해도 곧은 선비는 더 깊이 숨는 법입니다. 저 말로써 죄를 얻는 자를 누가 감히 죄가 없다고야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은 이미 대신(臺臣)이요 말은 바로 대언(臺言)인데 형벌에 처해지고 변방에 내쳐진다면, 신은 그윽이 규피(規避)·함묵(含默)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두 걸음 더 나아가 결국은 아첨하는 것이 풍조가 되고야 말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아첨이 풍조를 이루는 것은 서한(西漢)이 망하게 된 까닭이 아니었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1월 13일 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응교 홍계유(洪啓裕)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국옥(鞫獄)은 지엄한 일이니, 자고로 친속이 방자하게 소장(疏章)을 올려 스스로 언근(言根)을 담당하기를 이광덕(李匡德)처럼 한 자가 있지를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 아우의 범죄는 아주 흉악하여 사람의 신하된 자로서는 참섭할 만한 바가 아닌 데이겠습니까? 좋은 곳으로 경하게 귀양보낸 것만도 이미 관전(寬典)인데 겨우 몇달이 지나자 급급하게 용서하여 돌아오게 되었으니, 조정의 처치가 이러하고서야 어떻게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신은 지금 이후로는 죄수의 지친(至親)이 상소를 올리고 격고(擊鼓)025) 하는 등 그 분운(紛紜)함이 말할 수 없게 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러한 하교가 내렸는데도 입시한 대관(臺官)이 사리에 의거하여 간쟁(諫諍)하지 않았으니, 신은 그윽이 통분하고 해괴하게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하교하였다."
하였다.
1월 14일 갑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조명리(趙明履)가 상소하여 전세(田稅)받은 것을 발매하여 이익을 남겨서 진자(賑資)에 보태도록 윤허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 상소를 되돌려 주었다. 뒤에 빈대(賓對)026) 에서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의주는 서도의 극변(極邊)으로 근년 거듭된 흉년으로 인하여 백성의 사정이 번민할 만한데, 수경(守令)의 상소를 되돌려 주어 변민(邊民)들을 실망시킨 것은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마땅히 도신(道臣)을 신칙하여 마음을 더 써서 구휼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월 16일 병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17일 정축
어떤 별이 북두성 아래로 흘러갔다.
1월 18일 무인
지평 이응협(李應協)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북도의 주전(鑄錢)은 간폐(奸弊)가 생기기 쉽고 완악한 백성이 범월(犯越)하면 반드시 사단이 벌어질 것이니, 묘당의 처사가 그윽이 개탄스럽습니다."
하고, 또 이천 부사(伊川府使) 유중규(柳重奎), 박천 군수(博川郡守) 장두주(張斗周), 봉산 군수(鳳山郡守) 심봉징(沈鳳徵) 등의 탐욕스러워 불법을 저지른 일을 논하여 파직을 청했으며, 영릉 참봉(英陵參奉) 이방준(李邦俊)은 향곡(鄕曲)의 용렬한 인품이고 장릉 참봉(莊陵參奉) 정태희(鄭泰熙)는 야비하고 좀스런 일을 많이 행하였으므로, 아울러 도태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바는 모두 그대로 시행하되, 주전(鑄錢)의 일은 뜻이 백성을 위함에 있다."
하였다.
1월 19일 기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20일 경진
목성(木星)이 귀성(鬼星)으로 들어갔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동·남·북 3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해신(海神)에게 치제(致祭)하였다. 임금이 북도의 곡물 수송이 복선(覆船)되기 쉬움을 염려하여, 예조에 명하여 특별히 3도에 향축(香祝)을 보내서 감사로 하여금 정성을 다해 몸소 기도하여 무사히 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빌게 한 것이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선혜청에 신칙하여 동·북도의 유민(流民)으로서 서울에 들어온 자들을 진제(賑濟)하게 할 것을 청하였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은 북도의 범월(犯越)한 여러 죄수들을 피국(彼國)027) 에서 이미 사죄를 면해 주라는 것으로 자문(咨文)을 보내 왔으니 오래 가두어 두는 것은 마땅치 못하다 하여 본도로 하여금 결장(決杖)하여 정배(定配)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1월 21일 신사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1월 22일 임오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심경》을 강하였다.
1월 25일 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조원명(趙遠命)을 이조 참판으로, 조명교(曺命敎)를 이조 참의로, 오광운(吳光運)을 대사간으로, 서명신(徐命臣)을 집의로, 허채(許采)를 장령으로, 홍정명(洪廷命)을 지평으로, 어석윤(魚錫胤)을 정언으로, 김성적(金尙迪)을 부교리로, 원경순(元景淳)을 수찬으로, 유수원(柳壽垣)을 필선으로, 홍창한(洪昌漢)을 겸 보덕으로, 이보혁(李普赫)을 동의금으로 삼았다.
임금이 종묘[太廟]에 나아가 춘전알(春展謁)을 행하였는데, 왕세자가 면복(冕服)을 갖추고 따랐다. 임금이 장차 종묘에 전알하려 하면서 하교하기를,
"나는 가례(嘉禮) 후 종묘에 전알할 때에 또한 배례를 행하였다. 예조(禮曹)에서는 어찌 세자의 배례 의주(儀註)를 올리지 아니하는가? 이는 예조의 실수이다."
하고, 위판(位版)을 옮겨 놓으라 명하고 세자도 함께 배례를 행하라고 명하였다. 그때에 세자의 나이 겨우 여덟 살이었는데 진퇴(進退)와 배궤(拜跪)가 모두 절도에 맞으니 좌우에서 모두 우러러보았으며, 저녁이 되어 환궁하였다. 밤에 북도의 감진 어사(監賑御史) 홍계희(洪啓禧)를 불러 진휼한 일을 물으니, 홍계희가 진휼 곡물이 넉넉지 못한 실상을 아뢰면서 말하기를,
"이 곡물로 이 백성을 살리는 것은 다만 신만이 못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재능이 있는 자라도 또한 방책이 없는 듯합니다."
하고, 이어 북도의 백성이 자식을 버린 자가 잇달았고 어민들은 간혹 어린이의 시체가 어망(魚網)에 걸리는 것을 보았으며 온 도의 정경이 놀랍고 참혹한데 진휼할 곡물은 다 되어 백성들이 장차 다 죽게 되었다고 성대하게 말하니, 임금이 측연히 여겨 영남의 감사에게 명하여 포항(浦項)의 곡물 수만 곡(數萬斛)을 더 보내어 구제하게 하였다. 무릇 어사가 청한 것은 모두 시행하도록 허락하였는데, 심지어 각사(各司)에 납입할 것과 어공(御供)에 진상할 물품까지 또한 그 절반을 감하게 하였으며, 홍계희에게 빨리 돌아가서 감진(監賑)하라고 명하였다.
이날 밤에 유신(儒臣)을 불러 《지치통감(資治通鑑)》을 강(講)하였는데, 춘방관(春坊官)028) 도 함께 들라 명하고 하교하기를,
"하루 종일 동가(動駕)한데다가 또 밤도 깊었으니, 진실로 사대(賜對)할 때는 아니나, 북도 백성을 생각하여 어사도 만나보고 싶었고 또 하유(下諭)하고 싶은 일도 있어서 이 때문에 피로한 줄을 모르겠다. 원량(元良)029) 이 이제는 나이가 되었으니, 양양(洋洋)하게 척강(陟降)하는 선령들도 또한 어찌 즐거워하지 않겠는가? 종묘에 배알하고 돌아오니 기쁨도 대단하지만 또한 서글픈 마음도 없지 않다. 배궤(拜跪)가 절도에 맞고 행동이 성인 같음을 보고 사람들은 필시 미리 절하고 일어서는 절차를 가르쳤을 것으로 여길 것이나, 나는 그러한 일이 절대로 없었다. 심지어 글자 중에서 분별하기 어려운 자라도 《동몽선습(童蒙先習)》 속에 있는 글자라면 반드시 기억했다가 짚어서 보여주니, 그 총명함을 알 만하다. 옛날 임금들이 간혹 소년 천자(少年天子)란 말을 듣기 싫어했지만 나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이제는 종묘에 배알하는 예도 이미 행하였고 입학할 기일도 정해졌다. 그러나 나이 아직 어리니, 나의 마음은 두렵기만 하다. 여러 신하들을 빙 둘러보아도 어린 세자를 맡길 만한 사람을 볼 수 없고 나의 박덕[凉德]으로는 경복(慶福)을 끼쳐 줄 가망도 없는데 신하들을 조정하여 기어코 좋은 정치를 이루어 보려고 몇 년을 고심해 보았지만 아직도 실효가 없으니, 이 또한 나의 성의가 부족한 소치이다.
방금 광무기(光武紀)를 강했는데, 광무는 말하기를, ‘적심(赤心)을 미뤄서 남의 뱃속[腹中]에 넣어 주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뜻은 있어도 이루지 못하니 자신을 돌아볼 때 부끄러움이 많다. 지금 군신(群臣)들에게 바랄 것은 나의 이 마음을 본받아 한마음으로 협조하여 나의 원량을 도와준다면, 이는 바로 나를 저버리지 않음이 되는 것이다. 궁료(宮僚)들은 세자를 보도하는 데 문의(文義)뿐만 아니라 오직 기거(起居)·언동(言動)의 절차까지도 일에 따라 바루어 주고, 비록 내시들이 만약 근실치 못한 자가 있으면 그것도 또한 마땅히 위에 아뢰어 엄히 단속해야 할 것이다. 국조(國朝)의 성대할 때에는 춘방(春坊)에 친림(親臨)하여 궁관을 자(字)로 부른 일이 있어 지금까지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상하 간에 정의가 서로 화합하여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이 바로 미사(美事)인 것이다. 비록 한 무제(漢武帝)가 군신을 대접함에 자못 소탈함을 숭상하였지만 유독 급암(汲黯)030) 을 만나 볼 때만은 관을 쓰고 대한 것을 보면 관을 쓰지 않았을 때도 필시 많았던 것이다. 지금은 예모(禮貌)를 너무나 차려 동궁이 궁료(宮僚)를 인견할 때에도 더욱 예모를 갖추기 때문에 정의가 통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강연(講筵)을 여는 것도 또한 따라서 사이가 뜨게 되는 것이다. 날씨가 조금 풀릴 때를 당하면 강연을 열도록 하겠으니, 궁관들은 모름지기 이런 뜻을 알아서 조용히 선도하기를 옛사람이 버들가지 하나 꺾는 것도 간하고 개미 한 마리 밟는 것도 경계하듯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이어 서연(書筵)을 열어 산림(山林)의 독서(讀書)하는 선비를 돈소(敦召)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월 27일 정해
전 부수(副率) 민창수(閔昌洙)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아우 민형수(閔亨洙)가 의당 한번의 소장을 올려 본심을 우러러 토로했어야 할 것이나, 처음에는 국경을 나갈 시기가 임박하였었고 돌아와서는 북도 도신(道臣)의 새로운 명을 받았기 때문에 올리지 못하고 떠나면서 소본(疏本)을 신에게 맡기어 기다리게 하고, 조만간에 한번 아뢰려고 하였으나 신의 아우가 불행히도 죽었습니다. 지금 그 소가 오히려 신에게 있었기에 이에 감히 〈등사(謄寫)하여〉 올립니다.
그 소에는 이르기를, ‘신은 일찍이 선신(先臣)의 서론(緖論)을 들었는데, 이른바 무옥(誣獄)이라는 것은 실로 성궁(聖躬)에 관계된 것이었으니, 이것을 신설(伸雪)하지 않으면 사람은 사람다울 수 없고 나라는 나라다울 수 없다 하였습니다. 신 등은 외람되게도 선신이 전하를 섬긴 도리로 전하를 섬기고 있기에, 지난 여름 조정에 돌아온 때부터 꼭 한번 그 일의 근본 원인을 여쭈어 선신의 위국 충정을 밝히고자 하였으나, 다만 사람이 졸렬하고 언의(言議)가 가벼워 신청(宸廳)을 감동시키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기밀(機密)을 신중히 하지 못하여 엉뚱한 사단이 벌어져 나라에는 도움이 안되고 한갓 그 자신에게 화만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지금의 우의정 신(臣) 조현명(趙顯命)과 더불어 신의 매제 이주진(李周鎭)의 집에서 만난 일이 있었는데, 조현명의 의중(意中)에 신이 이런 논의를 주장한 것으로 여겨 약간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대개 그의 생각에는 모인(某人)들의 경자년031) 전후의 일단(一段)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심지어 말하기를, 「참으로 이 일만 석연(釋然)해지면 우리들도 같은 목소리로 신설(伸雪)을 청하겠다.」고까지 하기에, 신이 대수롭지 않게 응답하기를, 「만약 듣고 싶으면 한번 나를 찾아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비국(備局)의 회좌(會坐)에서 신과 마주하여 다시 앞서의 말을 되풀이하였는데, 신이 일찍이 선조(先朝)에 대신(大臣)이 부탁을 받은 일이 있었음을 들었고 또 기유년032) 의 연석(筵席)에서 「과연 7신(七臣)의 고사(故事)가 있었다.」 운운(云云)하신 전교를 보았기에, 「숙종조 정유년033) 이후에 상신(相臣)에게 부탁한 일이 있었다.」고 대답하니, 조현명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만일 그렇다면 그때의 일은 오로지 숙종의 유의(遺意)에서 나온 것이니, 앞으로 천하 후세에 할말이 있는 일로 성덕(聖德)은 더욱 광명(光明)해지고 이들에게는 죄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근거가 될 만한 문적(文籍)이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부탁하실 때에 혹 증빙이 될 만한 문자가 있었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그때에 전하는 말로는 있었다고도 하고 없었다고도 하며 또 혹은 본래 있었으나 화변(禍變) 때에 불에 타버렸다고도 하나, 내가 그 집 자제들과 아는 이가 없기 때문에 있고 없는 허실을 전연 모른다.」고 하니, 조현명이 또 말하기를, 「상신(相臣)의 집에는 없다 하더라도 혹 달리 참조가 될 만한 것이 없는가?」 하기에, 신이 또 없다고 말하고, 이어 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김용택(金龍澤)의 집에 숙종께서 지으신 고기(古詩) 몇 귀가 있다고 하더라.」 하니, 조현명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하기를, 「연전에 김용택의 아들이 어찰(御札)을 나의 외숙에게 가지고 와서 보이면서 장차 주달(奏達)하려 한다고 하므로 외숙과 망형(亡兄)이 상의하여 꾸짖어 내보냈다 했는데 바로 그것이 아닌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그 집에 다만 어시(御詩)가 있다는 말만 들었지 어찰이 있다는 말은 못들었다.」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나는 어찰이 있는 줄로 알았는데 바로 신한(宸翰)034) 이었는가?」 하였습니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그 시(詩)가 과연 진짜인가?」 하기에, 신이 「진위(眞僞)는 알 수 없다.」고 하니, 조현명이 「욀 수 있겠는가?」 하므로, 신이 「나도 우연히 들었는지라 자세히 기억하지는 못한다.」고 했습니다. 대개 신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성상께서 옥사의 신설(伸雪)에 의심을 가지시고 몇 사람의 신하들과 참고하여 확인해 보고 싶으신 것이라 여겼는데 대신의 뜻도 이미 좋다고 했으며, 또 남과 더불어 일을 같이 하면서 조금이라도 의심하여 멀리함이 있어서는 마땅치 않기 때문에 드디어 곧 신축년035) ·임인년036) 이후에 오고가며 전해진 말을 모두 들어 장시간 토로하였더니, 조현명이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이 지금 당장 청대하여 옥안(獄案)을 모조리 번복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기에, 신이 처음에는 대신의 나라를 위하는 성의에 탄복하였으나 마침내 거조가 경거(輕擧)하다고 난색을 보이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그러면 오늘 내가 마땅히 두 동료 정승과 상의 할 것이니, 그대도 같이 가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정작 연석(筵席)에 나아가 말이 상신에게 부탁한 일에 미치자, 성상께서 전교하시기를, 「내가 이러한 일들은 반드시 흔적을 없애 버리고 처리하려 하였으나, 오늘 재신(宰臣)이 이러한 것으로 진달하니 진실로 옳긴 하지만, 재신으로 하여금 이러한 말을 하게 한 것은 어찌 경 등의 허물이 되지 않겠는가?」 하셨고, 이어 또 하교하시기를, 「내가 이미 짐작하였으니 지금 마땅히 시원스레 하유하겠으나,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한 일이라 동조(東朝)037) 께 마땅히 들어가 여쭈어야 하니 경들은 우선 물러가라.」 하셨습니다. 잠깐 물러나 있다가 다시 들어간 뒤에 우상(右相)이 갑자기 위시(僞詩)의 일을 여쭈어 보매, 전하께서 「몽매간(夢寐間)에도 알지 못한 일이다.」라고 하교하시니, 우상이 비로소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신 등이 고심하는 바는 매양 전하께서 순수하시니 하자가 없으시도록 하고 싶은 일념뿐이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아! 시가 위작(僞作)이었다면 저 위작자의 부도(不道)한 죄는 참으로 만번 죽어 마땅하지만, 신이 전연 그것이 허망한 것인 줄을 모르고 어리석게 처신했던 것 역시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순수하여 하자가 없게 한다.」고 말한 대목에 있어서는 바로 몇몇 신하들이 본래 지니고 있는 기량(伎倆)입니다. 진실로 그 말과 같다면 당초 신과 수작할 때에는 처음에 어떻게 「성덕이 더욱 광명해진다.」라는 말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전하의 앞에 이르자 말을 바꾸는 것은 옛날에도 이런 말이 있기는 했으나 신이 직접 목도(目睹)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신이 이른바 「실로 성궁(聖躬)에 관계된 것이었다.」라고 한 것은 모두 증빙할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이 옥사가 일어난 것은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바로 〈세제(世弟) 책봉에 대한〉 주청(奏請)의 일이 이루어졌다는 기별이 당도한 다음날이었습니다. 대개 역당(逆黨)의 계획은 처음에는 〈내시(內侍)〉 박상검(朴尙儉)과 〈내인(內人)〉 석열(石烈)로 하여금 중간에서 모해(謀害)하려 하였다가 박상검과 석열의 일이 실패하자 또 책봉의 주청이 이뤄지지 않기를 바랐고, 책봉의 주청이 이뤄지자 부득이 하책(下策)을 써서 크게 무옥(誣獄)을 일으켜 위로 미치도록 하려 하였습니다. 만일 박상검과 석열이 죽지 않고 책봉의 일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마땅히 수족(手足)을 드러내지 않고도 할 수 있으니, 고변(告變)할 것이 없었겠지요. 이는 그 뜻이 어찌 오로지 성궁(聖躬)을 모위(謀危)하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전하께서 세제(世弟)의 자리를 사양하고 합문을 나가실 때에 이미 「나의 명분을 미워해서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고변서(告變書)의 무함이 성궁(聖躬)에 미치게 됨은 더욱 알 만합니다. 안옥(按獄)한 신하도 또 일이 동궁(東宮)과 관련되었다 하여 옥안(獄案)을 쓰지 말도록 청한 것이 조보(朝報)에 올라 팔방에 전파되었으니, 옥사가 성궁에 연루되었음을 또 알 만합니다. 이 옥사가 이루어지자 김일경(金一鏡)이 지은 교문(敎門)에서 흉언(凶言)이 더욱 망극하여, 전하께서 보위를 이으시자 김일경과 목호룡(睦虎龍)이 모두 임금을 무망(誣罔)한 죄로 복주(伏誅)되었고, 을사년038) 초두에 성궁에 관련이 있다 해서 이 옥사를 신설하게 된 것입니다. 이 몇가지 일로써 보더라도 전하께서 무함(誣陷)을 받으심이 이 옥사 가운데 있으니, 둘로 나눠서 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 옥사가 신설된 연후에야 목호룡의 역상(逆狀)이 비로소 밝혀지고 성궁에 대한 무함도 자연히 씻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북면(北面)하여 전하를 섬기고 있는 자들이 어떻게 감히 신옥(伸獄)의 청(請)에 이의(異議)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옥사에는 이른바 승복자(承服者)가 많이 있어 한쪽 사람들이 꽤 많이 이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그 승복이라 한 것이 도무지 법리(法理)에 맞지 않은 것입니다. 혹 범연하게 낱낱이 지만(遲晩)039) 하였다고 하였으나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사람한테서 억지로 받아낸 것이며, 그 밖에도 의심스런 단서가 한둘에 그치지 않으니, 신이 낱낱이 아뢸 필요가 없겠습니다.
옛날 을사년040) 의 사화(士禍)에도 역모를 했다고 승복한 자가 《무정보감(武定寶鑑)》에 수두룩하게 실려 있었으나,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한마디로 단정하기를, 「이 일은 본시 사류(士類)를 모해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니 따질 것이 없다.」 하여, 다시는 구별도 하지 않고 아울러 신설하여 드디어 백대(百代)의 정론(定論)을 이루었습니다. 무릇 사류를 모해하려 한 것도 오히려 이러했거든, 더구나 일이 성궁에 관련된 것이겠습니까? 지금의 논자(論者)들은 더러 무옥(誣獄)을 사실(事實)로 돌리고자 하는 자가 있는데, 이는 김일경과 목호룡에게서 솜씨를 전수받은 자들이니, 진실로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무옥이라고 여기는 사람까지도 더러는 이 무리들을 위하여 자리에 나아가 공리(功利)를 도모하였고 은을 모아 환첩(䆠妾)들과 결탁한 일이 있으니, 그 형적이 비밀하여 알 길이 없습니다.
무릇 옥사는 실상이 없으면 무옥일 따름이며 죽을 일이 없는데 죽은 것은 원옥(冤獄)일 뿐입니다. 그 사람의 처지가 관을 쓰고 출세했거나 문을 닫고 은거중이거나 본심이 충의롭거나 공리를 탐했거나 하는 것은 원래 논할 것이 없습니다. 이들이 비록 교결(交結)함이 은밀했다 하더라도 그 뜻이 참으로 사직을 편안케 하고 성궁을 보호하려는 데서 나왔다면 충(忠)이라 해도 좋으니, 그 사이의 기정(奇正)041) ·득실(得失)은 따질 것이 없습니다. 경자년042) 한 단락에 있어서는 이 일의 요점이 오로지 대신(大臣)이 부탁을 받았는지의 여부에 있습니다. 무릇 성궁에 불안한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대신이 부탁을 받은 일이 있었고 대신이 부탁을 받은 것이 경자년 이전에 있었는데, 그들이 중간에서 충성을 바친 것이 어찌 경자년 전후의 다름이 있겠습니까? 또 목호룡이 스스로 말하기를, 「처음에는 백망(白望)과 한패거리였으나 뒤에 곧 배반하고 떠났다.」고 하였는데, 그들이 어떻게 능히 먼저의 목호룡이 뒤의 목호룡이 될 줄을 미리 헤아려 볼 수 있었겠습니까?
신은 생각하기를 뒤에 목호룡과 결탁한 자는 역적이니 베어도 좋거니와, 처음에 목호룡과 결탁한 자는 그 죄범(罪犯)을 논하자면 사람을 알아보는 데 어두운 것에 불과하다고 여깁니다. 이들이 또 어찌했기에 일이 경종(景宗)에 관계된다고 하는 것입니까? 만일 전하께서 저위(儲位)에 나가시기 전에 김일경의 상소가 들어와 조정이 갑자기 바뀌고 목호룡의 고변이 들어와 무옥이 크게 벌어졌다면, 전하께서 하루인들 보전하셨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으쓱하니 마음이 떨립니다. 이는 나라를 경영하는 대신들이 서둘러 대책(大策)을 정해야 할 일이며 또 그 동안에 힘을 쓴 무리들에게 힘을 입은 바가 없지도 않았습니다. 경자년 전후의 일에 있어서는 부탁을 받은 일이 이미 연중(筵中)에서 나왔은즉 전일의 의심이 거의 풀렸을 것인데도 듣고도 못들은 것처럼 하였으니 그 계획하는 바가 간계(奸計)를 부리려는 것에 불과하였고, 항상 옥안(獄案)을 쓰지 말라고 하던 자의 남은 꾀를 써서 옥안 중에 남이 있는 자구(字句)로 조금만 눈에 거스를 듯한 것은 깎아 없애서 후인으로 하여금 무함을 분변할 도리가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저들 몇몇 신하들은 곧 전하께서 믿고 의지하신 사람들임에도, 전하를 위해서 꾀하는 바가 기꺼해야 이런 것에 불과하였는데, 옛날에 이른바 순신(純臣)은 아마도 이러지는 아니했을 것이니, 신은 그윽이 통분하게 여깁니다. 혹시 전하께서 밝으신 전지를 내리셔서 무옥을 깨끗이 신설하시고 명분을 바루시는 뜻을 다해 주시면, 신은 마땅히 웃음을 머금고 지하에 들어가 선신(先臣)을 뵈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아! 신의 아우의 이 상소는 혼자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신과 상의하여 쓴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선신의 유지(遺志)와 죽은 아우의 본심을 살피셔서 신에게 참람한 죄를 내리소서."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정원에서는 금령(禁令)이 있어 감히 준례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위에 아뢰기에 이르렀는데, 임금이 오래도록 발락(發落)을 내리지 않았다. 이에 송인명(宋寅明)과 조현명(趙顯命)이 의금부에 나아가 명을 기다렸다. 임금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 비국 당상 박문수(朴文秀), 어사 홍계희(洪啓禧) 등을 소견(召見)하고 하교하기를,
"민창수가 누구인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민진원(閔鎭遠)의 아들이고 고(故) 감사(監司) 민형수의 형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상소의 내용은 무슨 일이었는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대의(大意)는 그 아비의 유지(遺志)와 그 아우의 본심을 진달하여 드러내 말하면서 그의 아우가 올리지 못한 소를 등사(謄寫)하여 올린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이어 상소 가운데 요긴한 말을 들어 일일이 진달하고 말하기를,
"대처분(大處分)이 내린 뒤에는 아무리 민형수라 하더라도 이런 짓은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 부수(副率)이 상소하였으니, 어찌 괴이하지 아니한가?"
하니, 박문수가 민창수는 당심(黨心)을 고치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또 그 소를 보고 처분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홍계희에게 물으매 홍계희가 말하기를,
"이것은 부자 형제간에 사정을 아뢴 것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박문수가 또 들여다가 보기를 힘써 청하기를,
"전하께서 노심 초사(勞心焦思)하여 이렇듯 대훈(大訓)을 내리셨는데 뜻밖에 이러한 소가 있으니, 참으로 통분합니다."
하니, 김재로와 홍계희는 모두 소를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박문수가 또 힘써 청하니, 이에 임금이 하교하기를,
"내가 어찌 민창수를 아끼겠는가? 광성(光城)043) 의 집에 남은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여양(驪陽)044) 의 후손이 남북으로 귀양간 나머지 지금 또 이렇게 상소를 하였다. 나는 선후(先后)045) 의 국양(鞠養)하신 은혜를 입었는데, 지금 민창수는 비록 여양의 적장손(嫡長孫)은 아니라도 그 대수(代數)가 멀지 않으니, 내가 불러 보고 처분하려 한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그 사람은 본래 고집스러우니, 혹 망발이나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두 대신이 의금부에서 머리를 맨 땅에 조아리고 있으니, 나라의 체통에도 관계가 있습니다. 그 상소를 들여다 보시고 바로 처분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대신과 훈신(勳臣)에게 개연(慨然)한 생각을 갖고 있다. 두 대신을 바로 들어오라고 하여 나의 면유(面諭)하는 뜻을 듣게 하라."
하고,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전유(傅諭)하게 하였다. 이윽고 여러 신하들을 조금 물러가 있으라 명했다가 조금 후에 김재로 등을 다시 입시하라 하여 하교하기를,
"전일 이광의(李匡誼)의 일은 오로지 당심(黨心)에서 나온 것이라서 모든 의논이 마땅히 엄한 처분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홍상한(洪象漢)만이 엄히 문책하는 것이 과하다고 하였다. 이광의가 살게 된 것은 대개 대관(臺官)으로 공심(公心)을 가지고 인도했기 때문인데, 오늘 영성(靈城)046) 이 두 대신만을 위하여 말한 것은 얕은 소견이다. 내가 영성을 대우함이 어떠했던가? 영성은 매우 그르다."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성상의 대훈(大訓)이 해와 별처럼 밝으신데 민창수 같은 사람을 즉시 청토(請討)하지 못한 것은 바로 신의 죄입니다. 전하께서 춘추가 높으시고 세자는 어린데 세도(世道)는 이러하니, 즉시 그 소를 가져다가 보시고 당장에 처분을 내리셔야 마땅합니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그 소는 대훈이 있기 전에 지어져 금령(禁令)에 포함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훈이 있기 이전의 말을 대훈이 이미 반포된 뒤에 올리는 것은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차라리 안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더구나 민형수는 남북으로 귀양다니다가 마침내 외지에서 죽어 지금 그 몸이 채 식지 않았을 것이다. 한 문제(漢文帝)가 박소(薄昭)047) 를 대한 것을 선유(先儒)들은 소은(小恩)이라 하였다. 내가 이 사람과 4촌(四寸)의 분의가 있으니, 의당 팔의(八議)048) 의 법이 있는 것이다. 김복택(金福澤)049) 을 처형할 때에 나는 차마 보지를 못하였다. 이 사람은 대대(大憝)050) 는 아니고 다만 당습(黨習)에서 나온 것인데, 내가 만일 민창수를 법으로 처치한다면 법이야 행해지겠지만 장차 무슨 낯으로 성모(聖母)를 대하겠는가?"
하고, 이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내가 감선(減膳)하여 사과하고자 한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임금의 하교가 너무나 지나치다고 번갈아 아뢰었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어떻게 한낱 민창수 때문에 이러한 과중(過中)한 하교를 내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을 덮어두면 대훈도 쓸모없이 될 것이니, 나는 마땅히 무거운 짐을 벗어야 할 뿐이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무거운 짐을 벗는다는 말씀은 크게 왕언(王言)을 잃은 것입니다. 하찮은 한낱 민창수 때문에 이렇듯 감히 듣지 못할 하교가 계시니, 전하에게 바라던 바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을 처분한 뒤에는 다시 경들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하였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왔는데, 그때에 밤은 이미 4경(四更)이었다.
1월 28일 무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29일 기축
임금이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2품 이상을 인견하였으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좌의정 송인명(宋寅明), 우의정 조현명(趙顯命), 우참찬 박문수(朴文秀), 좌승지 이광보(李匡輔), 우승지 유만중(柳萬重), 좌부승지 정필녕(鄭必寧), 우부승지 이세진(李世璡), 부교리 김상적(金尙迪), 부수찬 홍계희(洪啓禧), 영부사 이의현(李宜顯), 판부사 김흥경(金興慶), 지사 신사철(申思喆), 판윤 이병상(李秉常), 좌참찬 윤양래(尹陽來), 이조 판서 서종옥(徐宗玉), 호조 판서 서종급(徐宗伋), 예조 판서 정석오(鄭錫五), 병조 판서 김성응(金聖應), 형조 판서 민응수(閔應洙), 행 사직 정우량(鄭羽良), 예조 참판 김약로(金若魯), 병조 참판 이익정(李益炡), 좌윤 서명구(徐命九), 우윤 원경하(元景夏), 대사성 김상성(金尙星) 등이 입대하였다. 조현명이 나아가 말하기를,
"‘무거운 짐을 벗는다.[釋負]’라는 두 글자는 이것이 무슨 하교이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이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군신(君臣)은 서로 의지해야 하는데 유독 신 등만이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린 세자가 있지 않는가?"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살리고 죽이는 것을 오직 마음대로 하시는데, 어찌 한낱 민창수(閔昌洙)을 꺼리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민창수의 소가 들어왔으면 경 등은 즉시 청토(請討)해야 마땅한데, 어찌 대명[胥命]만을 하였는가?"
하였다. 조현명이 주먹으로 땅을 두드리면서 말하기를,
"민창수가 신을 지목하기를 군부(君父)를 협지(脅持)하고 있다 하는데, 신이 어떻게 감히 딴사람을 청죄(請罪)하겠습니까? 다만 대훈(大訓)이 이미 이뤄져 위로 척강(陟降)하는 조종 신령에게 고하였는데, 그가 진실로 종묘를 첨앙(瞻仰)하고 군부를 존경했다면 어찌 감히 이런 소를 올릴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그의 마음에 종묘도 없고 군부도 없으며 국법도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척완(戚琬)051) 의 자제로서 어떻게 감히 은을 모아 환시(宦侍)와 교통하는 것을 심지어 충(忠)이라 이르고 장소(章疏)에 올릴 수 있겠습니까? 이를 만약 놓아주고 묻지 않는다면, 나라는 반드시 망합니다. 신은 이 일에 기어코 목숨을 내놓고 배척하겠습니다. 신은 여러 자식이 있으니, 비록 함께 죽임을 당해도 한하지 않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을 들은즉 몸과 마음이 으쓱해지니, 문죄치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그 소의 절통한 바가 어찌 이것뿐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민창수를 불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미 죄가 있어 문죄한다 하셨으면, 어떻게 관대를 갖추고 입시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반드시 묻고자 하신다면, 법으로 묻는 것이 지당합니다."
하였다. 이에 드디어 친국(親鞫)의 명이 내렸다. 이날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민창수에게 묻기를,
"군신의 분의(分義)는 천지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상고(上告)의 글이나 대훈(大訓)의 글 및 반사(頒赦)의 글을 사신(詞臣)에게 명하지 아니하고 내가 직접 지어서 내렸다. 이로 말미암아 군신의 분의가 크게 정해졌고 충역(忠逆)의 분별이 자명해졌으며 서로 다투는 단서가 그치게 되었는데, 너는 신분이 척리(戚里)에 속하고 직임은 음관(蔭官)인데 방자하게 장소(章疏)를 올려 국시(國是)를 어지럽히려고 하였다. 그 정신의 대지(大旨)는 김용택(金龍澤)과 이천기(李天紀)를 신구(伸救)하려 한 것인데, 비록 선신(先臣)의 유의(遺意)와 망제(亡弟)의 유장(遺章)이라 하였지만 가령 너의 아비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필시 협찬하느라 겨를이 없을 것이며, 네 아우의 유소라 말하지만 이미 상확(商確)했다면 네 아우의 글이 아니라 바로 너의 글인 것이다. 창자에 가득찬 당심(黨心)으로서 대훈 이전에 글을 엮어 대훈 이후에 투장(投章)하였으니, 이는 고문(告文)을 경시(輕視)하고 대훈에 불만에 있었던 것이니, 임금을 업신여긴 불충은 어떻게 왕법[王章]에서 벗어 날 수 있겠는가? 처분에 불만하여 화란을 일으키려 한 실상을 숨김없이 곧바로 아뢰라."
하니, 민창수가 공초하기를,
"작년 겨울에 들은즉, 임인년052) 의 옥안이 쾌히 신설(伸雪)되어 선지(先志)가 쾌히 펴졌다고 하였으니, 신의 사정(私情)이야 어찌 기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후에 듣건대, 신의 아우의 경자년053) 전후의 말로 인하여 하나의 역안(逆案)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신이 놀라움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아우가 일찍이 엮어놓은 소가 있어 이 일단을 밝힐 수 있겠기에 한번 올려서 보시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들은즉 대훈의 처분이 엄정하고 또 금령(禁令)이 있다고 하기에 감히 올리지 못하다가, 대훈을 구해 보니 금하는 바가 이 일단(一段)에 있음이 아니었고 또 소는 대훈 이전에 엮는 것이라서 드디어 감히 올리게 된 것입니다. 어찌 감히 대훈에 불만을 품고 국시(國是)를 어지럽힐 계획을 하였겠습니까? 다만 아우의 일을 변명하려고 한 것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묻기를,
"너는 김용택의 무리들이 역모를 꾸민 줄을 알고 있느냐? 당습(黨習)을 마음에 달갑게 여기고 국시를 현란시킨 것은 네 어찌 승복하지 않느냐? 오늘 세자가 연(輦)을 따르는 것을 보고 틈을 타서 투소(投疏)하였으니, 이는 네가 일후에 난을 꾸미려는 계책인 것이다."
하니, 민창수가 공초하기를,
"‘당심(黨心)’ 두 글자를 신이 진실로 면할 수 없으나, 후일 난을 꾸미려 한다는 하교는 참으로 억울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다시 추국하라고 명하고 말하기를,
"네가 당습(黨習)을 마음에 달갑게 여겨 방자하게 투장(投章)하고 국시를 현란시킨 실상을 지만(遲晩)하지 아니하면 마땅히 엄한 형벌을 가하겠다."
하니, 이에 민창수가 드디어 지만(遲晩)으로써 공초를 바쳤다. 임금이 대신들을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여 하교하기를,
"이는 즐겨서 한 일이 아니고 큰 의리와 관련된 것이기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역(逆)도 아니고 또 범상 부도(犯上不道)한 것도 아니니, 경 등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당습’ 두 글자는 법에 저촉될 만하지만, 추념(追念)의 애절하신 하교를 우러러 체념한다면 어찌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고, 송인명이 말하기를,
"하교가 애절하시니, 참작해서 감사(減死)한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였으며, 조현명은 말하기를,
"신은 대훈과 관계된 자는 생사가 달려 있다고 압니다. 아무리 척신(戚臣)이라 할지라도 전하께서 올리고 낮추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소가 이미 그의 아우의 소라고 하였으니, 그가 지은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죄(死罪)에 이를 것은 없다고 봅니다마는, 집법관(執法官)이 어떻게 할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다시 의금부의 여러 당상과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모두 감사(減死)가 마땅하다고 말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는 대관(臺官)의 체통이 아닙니다. 법을 굽혀 은혜를 베푸는 것은 성상의 일입니다마는, 대관의 말은 이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관(臺官)이 기어코 간쟁하면 내가 비록 참작하고 싶어도 죄인을 반드시 살리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대관이라 할지라도 임금을 각박한 길로 인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니, 주(周)의 팔의(八議)도 또한 법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여러 대신들이 드디어 모두 물러나왔다. 집의 서명신(徐命臣)은 대신이 저척(詆斥)했다 해서 피혐(避嫌)하여 체직(遞職)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법으로 따져보아도 이미 꼭 죽여야 할 단서는 없었고 인정으로 참작해 보면 호생지인(好生之仁)에 방해로움이 없겠기에 하문하신 데에 대하여 대략 소견을 아뢴 것입니다. 대각(臺閣)의 언론은 비록 준엄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만약 늦추어야 할 데에 준엄하여 혹시 성세(聖世)에 무고(無辜)한 사람 하나라도 죽이게 한다면 이 또한 천지의 대덕(大德)에 협찬한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정언 어석윤(漁錫胤)도 피혐하니, 임금이 ‘무고한 사람 하나를 죽인다.’는 한 구절 말이 친국하는 본의와 크게 어긋나고 나라의 체통과도 관계가 있다 하여 특별히 서명신의 직을 파하고 어석윤에게는 사직하지 말라고만 명하였다. 임금이 이윽고 하교하기를,
"민창수는 무군(無君)·무엄(無嚴)하고 당심(黨心)을 참지 못하며 의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자하게 투장(投章)하여 국시를 현란시킨 죄상을 또한 이미 지만(遲晩)하였다. 아! 임금을 무시하고 당습을 달갑게 여기는 무리는 비록 대훈이 있기 이전이라도 그 머리를 거리에 내걸어 많은 사람을 후일까지 징계하여야 마땅하거늘, 하물며 대훈이 반포된 뒤이겠는가? 그 마땅히 백관과 군민(軍民)을 모으고 당인(黨人)의 머리를 매다는 것을 모두 시원히 보도록 해야 하지만, 지난날을 추념해서 보면 감회가 더욱 간절하여 법을 굽히고 은혜를 펴서 비록 죽음만은 용서하지만 어떻게 예사로이 작처할 수 있겠는가? 죄인 민창수를 특별히 감사(減死)하여 대정현(大靜縣)에 정배하라."
하였다.
영부사 이의현(李宜顯)에게 특별히 치사(致仕)를 명하였다. 임금이 이의현의 매우 늙었음을 보고 전교하기를,
"지난날의 기구(耆舊)로는 영부사만이 남았고 근력이 아직껏 강강(康强)하기에 치사의 청에 대해 매양 허락을 미루어 왔는데, 이번 입시(入侍)에서 그의 쇠로(衰老)하였음을 크게 깨달았다. 대신을 편히 쉬게 하는 것도 구경(九經)054) 의 뜻이다. 해조로 하여금 전례대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정언 조명채(曹命采)에게 탄핵을 당하자, 분의를 내세워 명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임금이 서종옥이 정사할 때 주의(注擬)한 것이 크게 공평하지 못하였다 하여 특별히 파직시키고 정석오(鄭錫五)로 대체하였다. 중비(中批)055) 로써 원경하(元景夏)를 이조 참판으로, 임정(任珽)을 이조 참의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이날 정사(政事)를 열어 조영국(趙榮國)을 승지로, 김한철(金漢喆)을 지평으로, 이의현(李宜顯)을 봉조하(奉朝賀)로, 서명균(徐命均)을 영부사로 삼았다.
1월 30일 경인
객성(客星)이 두성(斗星)의 도내(度內)에 나타났다. 유성(流星)이 북두성 아래에서 나와 헌원성(軒轅星) 아래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와 북도 어사 홍계희(洪啓禧)를 소견하고 북도의 진정(賑政)을 물었다. 박문수가 주달을 마치고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전하의 공명 정대하게 수수(授受)하였다는 전교가 분명히 대훈(大訓)에 실려 있어 해와 별처럼 밝은데, 민창수는 이것을 5적(五賊)의 공으로 삼고자 하였으니, 참으로 죽어도 남은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법을 굽히고 은혜를 편 것은 효제(孝悌)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도 감히 다투지 못한 것입니다."
하였고, 홍계희가 말하기를,
"국옥(鞫獄)은 쉽게 열 일이 아닙니다. 민창수의 일 같은 것은 비록 국문을 안하고 엄히 처분하더라도 무엇이 손상되겠습니까?"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근래에 죄를 진 자는 거의 당론 때문인데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서 유환(宥還)을 윤허하시니, 이러고서야 어떻게 인심을 징외(懲畏)하겠으며 당론이 어찌 성행하지 않겠습니까?"
하였고, 홍계희가 말하기를,
"비단 투비(投畀)하는 것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비록 친국(親鞫)이라 하더라도 경솔하게 행할 것이 못됩니다. 민창수에게 역모(逆謀)를 다스리는 율로 시행한 것은 이 무슨 법례(法例)입니까? 성상께서 비록 친문(親問)하려고 하셔도 대신된 사람은 의당 그만두시도록 청해야 했는데도 대신들이 이에 도리어 청을 하였으니, 신은 실로 그르다고 여깁니다. 참으로 역모를 다스리는 일이 아니면 의당 친국은 삼가야 할 일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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