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신묘
목성(木星)이 적시성(積屍星)을 범하고 객성(客星)이 자리를 옮겨 우수(牛宿)에 나타났는데, 별의 형체는 혜성(彗星)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척이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차자를 올려 민창수(閔昌洙)의 소에 대하여 변명하니, 비답하기를,
"처분은 엄하였고 대의(大義)는 정해졌는데, 차자는 어찌하여 올리는가?"
하였다.
2월 2일 임진
밤에 혜성이 동쪽 우수(牛宿)의 도내(度內)에 나타났는데, 꼬리의 길이는 2,3척이었고 빛깔은 흰 색이었으며 모양은 하고(河鼓)와 같았다. 관상감(觀象監)에서 전례대로 문신 중에서 가려 측후(測候)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당치도 않은 위욕(危辱)을 당하고 불측한 경지에 빠졌는데, 곧 비상한 어명으로 인하여 염치를 무릅쓰고 연석(筵席)에 나오고 보니, 본의는 비록 왕명을 존중하는 뜻에서 나왔으나 형적(形跡)은 실로 혐의를 무릅쓴 것에 관계됩니다.
아! 민창수(閔昌洙)의 일은 이미 마감되었으니 그 소어(疏語)의 허실(虛實)과 진위(眞僞)는 다시 말할 것이 없겠고, 또 민형수(閔亨洙)가 이미 죽었으니 더불어 말을 따진다는 것도 어진 이의 할 바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 일은 관계된 바가 지극히 중대한데, 신이 어떻게 침묵하고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진실로 흰 것을 검다고 하고 있는 것을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마는, 그러나 전후의 수작과 수미(首尾)의 곡절이 정원 일기(政院日記)와 계하 연설(啓下筵說)에 모두 있는데, 어떻게 속이겠습니까? 신은 이 소가 과연 민형수한테서 나왔는지 안나왔는지는 알지 못합니다마는, 하여튼 하늘과 신명이 밝게 펼쳐 있는데, 이런 일을 어떻게 차마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민형수의 소 가운데에 이르기를, ‘신이 조현명과 더불어 이주진(李周鎭)의 집에서 만났는데, 조현명이 모인(某人)들의 경자년056) 전후의 일단(一段)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있기에, 신이 비국의 회좌에서 우상을 대하여 신이 들은 바 선조(先朝)의 대신이 부탁을 받은 일이 있었다는 것과 기유년057) 의 연설(筵說)에 과연 7신(七臣)의 고사(故事)가 있었다.’라고 하신 전교와 정유년058) 이후에 상신(相臣)에게 부탁한 일까지를 들어 대답하니, 조현명이 놀라면서 이르기를, ‘만일 그렇다면 그 일은 오로지 숙종의 유의(遺意)에서 나온 것이니 앞으로 천하 후세(天下後世)에 할말이 있겠으나, 빙거(憑據)할 만한 문적(文籍)이 없으니 어찌할 것인가? 상신의 집에 가지고 있는 것이 없더라도 혹 달리 참고가 될 만한 것이 없는가?’ 하기에, 신이 비로소 ‘김용택(金龍澤)의 집에 숙종의 어제시(御製詩)가 있다.’고 운운(云云)하였습니다. 민형수의 말뜻은 대개 저는 본시 위시(僞詩)의 일을 말하려 하지 않았는데 신이 꾀를 내어 유인하는 바람에 부득이 말을 하여 상신이 부탁을 받은 방증(旁證)으로 삼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아! 이 얼마나 거짓입니까? 상신이 신원(伸寃)되고 복관(復官)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가 부탁을 받은 여부를 논할 필요조차 없는데, 문적의 있고 없음이 무슨 관계가 있기에 방증의 문자까지 찾으려 들겠습니까? 그때 신이 민형수와 논란한 것은 다만 김용택·이천기(李天紀) 등의 신탈(伸脫) 여부였습니다. 민형수의 말에 이르기를, ‘정유년 이후로 숙종께서는 두 왕자의 보전을 생각하였는데 상신의 천거로 인하여 김용택과 이천기를 얻었기 때문에 김용택의 집에 어제시가 있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김용택은 비록 졸렬한 듯했지만 사실은 강개한 명이 있었으므로 상신이 천거했다.’라고 하였으니, 그의 뜻은 어제시로써 김용택·이천기의 무리들이 상신과 함께 부탁을 받았다는 점을 증명하여 그들을 신탈(伸脫)해 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 말의 귀추(歸趨)를 보면 오로지 김용택·이천기의 신탈에 있었는데도 억지로 상신의 부탁을 받은 일을 끌어내어 위시(僞詩)의 내력(來歷)으로 삼으려 한 것인데, 어찌 일찍이 위시로써 상신이 부탁을 받은 일의 방증이 되겠습니까? 일기(日記)에 상세히 실려 있으니, 조사해 봄직 합니다. 설령 신이 계책을 써서 유인하여 발단되었다 하더라도 이 일이 발단된 뒤에 삼성(三聖)059) 의 무함(誣陷)이 시원스레 해명되었으니, 이는 성상의 전교에서 ‘일찍 발명이 되니 다행이라.’고 한 것입니다.
민형수가 국경을 나가면서 올린 상소에서 또한 이르기를, ‘간악한 실상이 모두 드러났으니 실로 천만 다행입니다.’ 하였는데, 민형수의 다행은 또한 신의 다행이기도 합니다. 비록 ‘계책을 써서 유인하였다.’고 하더라도 신은 의당 죄로써 받아들일 수 있지마는, 더구나 신이 유인하기도 전에 제가 스스로 정녕코 증거를 대가며 거듭해서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또 민형수가 기왕 스스로 천만 다행이라고 하고서 지금에는 마음을 상실하고 면목도 없이 나타날 수 없다고 자회(自悔)·자책(自責)한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의 소에 또 이르기를, ‘신이 위시(僞詩)의 일을 말하니 우상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하기를, 「몇해 전에 김용택의 아들이 어찰(御札)을 가지고 와서 외숙에게 보이면서 장차 주달(奏達)하려 한다고 하므로 외숙과 망형(亡兄)이 상의하여 꾸짖어 내보냈다.」고 하였습니다.’ 운운하였으니, 아! 이 얼마나 거짓입니까? 신이 영남의 감영에서 돌아와서 들으니, 김용택의 아들이 격쟁(擊錚)하고자 하여 올라왔기에 신의 외숙이 꾸짖어서 돌려보냈다고 하였으나, 격쟁하고자 한 것이 무슨 일 때문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위시의 일을 듣고 비로소 종전에 들었던 바로써 민형수에게 말하기를, ‘격쟁하고자 한 것이 어시(御詩)가 있었기 때문이었느냐?’ 하였는데, 대개 의심하는 말이었고, ‘어찰’ 두 글자는 실로 신의 입에서 나온 일이 없었습니다. 민형수가 처음에는 위시의 일을 말하더니, 또 말하기를, ‘이이명(李頤命)의 집에는 숙종의 어찰이 있었는데 이미 불속에 던져졌다.’고 하였습니다. 빈청에 모였을 때에 민형수가 또 어찰의 일을 좌상 송인명(宋寅明)에게 말하였기 때문에 등대했을 때에 좌상이 전하께 앙문(仰問)하기를, ‘재신(宰臣)의 말을 들은즉 「선조(先朝)의 어찰이 이이명의 집에 있다.」고 하는데 그러합니까?’ 하니, 전하께서 없다고 분부하셨습니다. 어찰에 대한 말이 만약 신의 입에서 나왔다면 좌상이 어찌 신에게 들었다고 말하지 않고 재신에게 들었다고 했겠습니까? 또 민형수의 말에 의거하면 이상(李相)의 집의 어찰은 타 버린 지 이미 오래 되었다고 하였으니, 설사 김용택의 아들이 신의 외숙에게 찾아와서 보인 것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찰이 아니었음은 알 만하니 추후로 위작(僞作)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망형과 상의했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허황됩니다.
처음 민형수는 연중(筵中)에서 두 번이나 신의 외숙의 이름을 거론하였고 국경을 나갈 때의 상소에서도 언급하였으나 다만 신의 외숙을 거론하였을 뿐 일찍이 신의 망형을 언급한 일이 없었는데, 이제 무단히 끌어넣은 것은 무슨 의도이겠습니까? 대개 위시의 일은 이미 사핵(査覈)을 거쳐 더는 변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매(愚昧)·혼착(昏錯)으로 자복하고, 어찰의 일은 결말을 내린 일이 없었기 때문에 말의 발단을 은연중 신과 신의 외숙 및 신의 망형에게 돌려 의란(疑亂)을 일으키고 자신은 빠지려는 계책이었으나, 정원 일기가 분명하게 증거가 되고 있음을 전연 몰랐던 적이니, 그의 계획은 참으로 졸렬하다 하겠습니다. 민형수의 소에 또 이르기를, ‘성상의 앞에 이르자 뒤집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민형수의 의중은 대개 신과 서로 약속하고 청대한 것은 위시의 일이 아니라 오로지 상신에게 부탁한 일이었는데, 신이 전하의 앞에 이르러 갑자기 전약(前約)을 위반하고 위시의 일을 발론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거짓입니까? 신이 처음에 위시의 곡절을 듣고 민형수와 함께 청대하기로 약속하고서 이틀간 빈청의 회좌에서 영상·좌상과 힘써 검토한 것이 위시의 일이 아닌 것이 없었는데, 이제 또 배반했다고 한 것은 어인 일입니까? ‘어찌 경 등의 잘못이 아니겠는가?’ 운운했다는 전교에 이르러서는 그날 연중에서 실로 듣지 못하였고 일기를 상고해 보아도 또한 기록된 바가 없었습니다. 성상의 전교는 지중한 것인데 오히려 신축(伸縮)·변환(變幻)을 서슴없이 하니, 그 다른 것은 따라서 알 만합니다.
또 민형수의 말에 ‘시(詩)가 만약 엮어졌다면 사사로운 경로로 주무(綢繆)060) 하여 전하로 하여금 하마터면 망측한 경지에 빠지시게 하였을텐데 어떻게 죄가 없겠는가?’ 하길래 그 말이 엄정하여 신이 경복(敬服)하였던 것인데, 이제 그의 소에 이르기는 ‘이들이 비록 교결(交結)함이 은밀했다 하더라도 그 뜻이 참으로 종묘 사직을 편안케 하고 성궁(聖躬)을 보호하려는 데서 나왔다면 충(忠)이라 일러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하마터면 전하를 망측한 데 빠지시게 할 뻔했다.’ 하고서 성궁을 보호한다는 말은 어찌된 일이며, 이미 ‘어찌 죄가 없겠느냐?’ 하고서 ‘충’이라고 말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 자신이 말한 것이지만 전후의 모순이 이와 같으니, 신의 말을 옮기고 바꾸어 이르는 곳마다 파탄이 생기는 것쯤은 무엇이 괴이하다 하겠습니까? 신의 죄상을 나열한 대목에 있어서는 오로지 ‘깨끗하여 하자가 없어야 한다.’는 것과 ‘일이 선왕(先王)과 관련되었다.’는 두 마디 말로써 군부를 협지(脅持)하는 자로 지목함에 있습니다.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는 반드시 그 임금의 하자가 없게 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요악(妖惡)한 무리가 만일 임금의 위세를 가탁(假托)하고 자중(藉重)하여 성덕에 누를 끼치려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목숨을 내걸고 배척하게 되는 것이니, 이는 신하의 떳떳한 정리인데 민형수의 마음은 이와는 반대이니 또한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소의 생각한 바는 지극히 흉험하고 말을 하는 것은 지극히 교묘하여 원근에 전파되면 족히 듣는 이를 현란시킬 만하고 후세에 전해지면 족히 의혹을 자아낼 만하니, 조목조목 변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즉시 정원에 명하여 신과 민형수의 소를 가지고 계하 일기(啓下日記)에 참조하여 만일 신의 소에 일호라도 사실 아님이 있으면 빨리 위벌(威罰)을 내리시어 남의 신하로서 탄망(誕罔)한 자의 징계로 삼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바에 대해서는 입시했을 때에 마땅히 면대하여 유시하겠다."
하고, 그 이튿날 또 전교하기를,
"처분이 엄정하였으니 경에게 무슨 개의할 단서가 있겠는가마는, 너무 집착하는 마음이 없지 않다. 지나치게 고집하는 것은 경에게 바라던 바가 아니다."
하였다.
2월 3일 계사
혜성이 자리를 옮겨 여수(女宿)의 도내(度內)에 나타났는데, 별의 형체는 견우성과 같았고 길이는 2, 3척이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흉년으로 제도(諸道)의 봄철 조련(操鍊)을 정지하라고 명하였으니, 대신의 소청에 의한 것이었다.
북도의 감진 어사(監賑御史) 홍계희(洪啓禧)가 상소하여 영남에 가서 운곡(運穀)을 감독하겠다고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정언 정옥(鄭玉)이 상소하여 먼저 동궁의 요속(僚屬)을 잘 가려 보도(輔導)의 책임을 다하게 하고 몸소 먼저 바르게 하여 몸으로 가르치는 방법으로 삼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바는 마땅히 힘쓰겠다."
하였다.
강원 감사 김상로(金尙魯)가 상소하기를,
"백성의 굶주림을 날로 심해지는데 구제할 방책은 없으니, 믿을 것은 오직 영남의 곡물뿐입니다. 황급한 나머지 연속 공문을 띄워 조정의 명령에 따라 구획(區劃)하여 줄 것을 요망하였으나, 경상 감사의 회답에는 ‘북도에 곡물을 실어보낸 뒤에 여분이 있으면 본도(本道)에 줄 수가 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비국에서 4천 곡(斛)을 더 덜어 주라고 하였으나 결코 묶어 보내기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백성은 바로 나라의 백성이고 곡물은 바로 나라의 곡물인데, 동과 북이 무슨 차별이 있겠으며 사랑하고 미워함이 어찌 다를 수 있겠습니까? 만일 북도에 곡물을 다 실어보낸 뒤에 비로소 추후하여 주기로 한다면, 관동의 백성은 죽어버린 지 이미 오래일 것입니다. 청컨대 비국의 낭청(郞廳)을 보내어 기한을 정하고 운송을 독촉하여 관동 백성의 죽어가는 목숨을 구제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비국의 낭청이 왕래하자면 폐를 끼침이 없지 않을 것이니, 그 비국으로 하여금 엄히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2월 4일 갑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혜성(彗星)의 자리를 옮겨 여수(女宿)의 도내(度內)에 나타났다.
좌참찬 윤양래(尹陽來)가 세 번째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바랐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5일 을미
밤에 혜성이 자리를 옮겨 여수의 도내(度內)에 나타났는데, 꼬리의 길이는 3,4척이었고 빛깔은 흰 색이었으며 곤방(坤方)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비탄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2월 6일 병신
밤에 혜성이 자리를 옮겨 여수의 도내에 나타났다.
2월 7일 정유
밤에 혜성이 간방(艮方)에 나타났고 3경(三更)에는 자미 동원(紫微東垣) 밖으로 옮겼는데, 빛깔은 흰 색이었다.
2월 8일 무술
밤에 혜성이 자미 동원에 나타났는데, 별의 형체는 천봉성(天棓聖)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이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2월 10일 경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성변(星變)으로 차자를 올려 사면을 바라니,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려 전유(傅諭)하였다.
임금이 대신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성변(星變)으로 허물을 이끌어 진계(陳戒)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요사이 관상감에서 아뢴 것을 보니, 마음이 매우 놀랍고 두렵다. 좌상은 차자를 올리고 우상은 인혐(引嫌)하고 들어갔는데, 조정의 상황은 이처럼 불협(不協)하고 대신은 저토록 고집하고 있으니, 이러한 규모로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전일의 거조는 오로지 진정(鎭定)을 위한 것인데, 처분이 내린 뒤에도 오히려 또 이러하니, 내가 누구를 믿겠는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우상의 분의로써 인책(引責)하는 것을 신도 지나치다고 여깁니다. 성상께서 돈면(敦勉)하시면 어찌 끝내 나오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검열 조명정(趙明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의 자명소(自明疏)가 나오고부터 신의 송축(悚蹙)함이 더하여집니다. 대개 중신(重臣)의 연주(筵奏)는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중신이 경자년061) 이전의 5인을 역적으로 단죄하고, 이런 뜻으로 대훈(大訓)에 첨입(添入)하기를 청하면서 ‘불명(不明)’이라 하였는데, 이는 전하께서 마음을 밝히실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둘째는 이 일단(一段)에 관계된 것은 반드시 엄한 처분을 가하여야 고죽 청풍(孤竹淸風)의 마음062) 을 따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만일 경자년 이후만 논한다면 후세에 어찌 수상히 여기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연석(筵席)이 파한 후에 영상이 연석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듣기를 요구하므로 신이 드디어 대훈에 첨가하여 계하(啓下)한 사유를 갖추고는 이 세 가지도 아울러 기록하여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중신이 말하기를, ‘너의 붓끝으로 기록한 바를 버리고 나를 따르기가 어렵지 않겠느냐?’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리지 않고 되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대개 임금이 대훈을 지어서 내릴 때에 박문수의 아뢴 말이 해괴하고 패악스러웠기 때문에 제신이 글을 올려 성토하니, 박문수가 상소하여 자신을 변명하고 이어 기주(記注)의 잘못을 지척(指斥)하니 조명정이 죄를 입었는데, 이에 이르러 이렇게 상소하여 변명하게 된 것이다.
2월 11일 신축
김진상(金鎭商)을 대사헌으로, 이기진(李箕鎭)을 판윤으로, 윤광의(尹光毅)를 교리로, 이천보(李天輔)·정이검(鄭履儉)을 수찬으로, 심악(沈)을 필선으로, 원경하(元景夏)를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2월 12일 임인
판부사 유척기(兪拓基)가 상소하여 녹봉[月廩]을 사양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려 회유(回諭)하였다.
2월 13일 계묘
밤에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으로 들어갔고, 혜성이 또 자미 동원(紫微東垣) 밖에 나타났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다시 상소하기를,
"신은 민창수(閔昌洙)의 일에 있어서 눈으로 왕강(王綱)이 땅으로 떨어지고 왕위(王威)가 날로 낮아짐을 보고 이에 충분(忠憤)을 발하여 목숨을 내걸고 배척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종사의 무궁함을 위한 염려에서 나온 것이고 일호라도 그 사이에 사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불법이나 과중(過中)한 일로써 전하를 인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변함없는 단심은 삼광(三光)063) 에 질정(質定)하여도 부끄러움이 없고 여러 사람에게 버림을 당해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대저 명을 기다리는 것은 신하된 분의에 편히 하려 함이요 입대(入對)한 것은 광구(匡救)에 급하기 때문입니다. 기왕 등대하였으면 그 사람을 성토하여 나라의 체통을 높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또 이미 처분이 있었으면 분의를 이끌어 자처(自處)하여 그일로 인연하여 염의를 무릅쓰고 머물러 있을 계책에서 나옴이 아닌 것을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리지 않고 승지로 하여금 돈유하게 하였다.
대사성 김상성(金尙星)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지금 관동을 구관(句管)하는 소임을 띠고 있는데, 연석(筵度)에서 아뢰고자 하였으나 아뢰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동·북의 굶주린 백성들이 서울로 흘러 들어온 수효가 꽤 많습니다. 엊그제 강원 감사가 그들을 압령(押領)하여 본토로 보내 줄 것을 비국에 논보(論報)하였으나, 이 무리들은 유리(流離)하면서 이미 항심(恒心)을 잃어버렸으니, 지금 비록 쫓아 보낸다 하더라도 성문을 겨우 나서면 다시 도망해 흩어지지 않을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지금은 일일이 쇄환(刷還)하여 그들의 소원을 거스릴 것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자원하여 귀농(歸農)하겠다는 사람은 진휼청에서 식량을 주어 돌려보내되, 해읍(該邑)으로 하여금 농사를 짓도록 도와주고 권농(勸農)하게 하는 일은 단연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또 영동의 백성들의 형편은 아주 다급한데 영남의 곡물은 아직도 실려 오지 않으니, 감사가 청한 바에 따라 도사(都事)를 가려 보내어 재촉하여 보살피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바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2월 14일 갑진
정우량(鄭羽良)·이현보(李玄輔)·유건기(兪健基)·이정보(李鼎輔)를 승지로, 조명교(曺命敎)를 정언으로, 이병상(李秉常)을 판의금으로, 조덕중(趙德中)을 공홍도 수사(公洪道水使)로 삼았다.
이조 참판 원경하(元景夏)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화근(禍根)은 다만 ‘화협(和協)’ 두 글자에서 원인되었으니, 신을 훼방한 사람도 이것 때문이고 신을 칭찬한 사람도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빈 배는 가만히 있는데 풍랑이 뒤흔드니, 이것이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신이 고심한 바가 어찌 한갓 화협뿐이겠습니까? 시비는 꼭 밝히려 하고 의리는 꼭 바루려 하였으니, 이는 신이 연석(筵度)에 나가서나 소장을 올릴 때에 임금에게 아뢰는 제일의(第一義)의 본지(本旨)이기도 합니다. 하늘이 성심(聖心)을 열어 처분이 밝고 엄하여 무안(誣案)은 불에 태워버리고 보훈(寶訓)은 일월처럼 높이 게시(揭示)되어 빛나는 방전(邦典)은 백세에 드리웠으니, 무릇 우리 서민들은 감히 이 뜻을 실추(失墜)함이 없이 조심하고 합심하여 각자 당사(黨私)를 잊는 것이 여러 신하의 서로 힘쓸 바이어늘, 신은 화협을 가지고 도리어 당안(黨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당이라는 글자는 형체도 없고 자취도 없는 것이어서 점철(點綴)하고 은영(隱映)할 즈음에 사람이 저도 모르게 천인(千仞)의 구렁으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니 신에게는 이러한 염려가 없겠지마는, 사람들의 말이 여러 번 되풀이되다 보면 증자(曾子)가 사람을 죽였다는 말에 자애하신 어머니가 북[杼]을 던지는 것064) 과 같은 일이 없을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청컨대 신의 관직을 삭제(削除)하고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부수찬 정휘량(鄭翬良)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시경(詩經)》〈대아(大雅) 탕장(蕩章)〉에 이르기를, ‘시작이 없는 사람은 없으나 끝을 맺는 이는 드물다.[靡不有初 鮮克有終]’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윽이 보건대, 근년 이래로 조석(朝夕)의 잠계(箴誡)는 위(衛)나라 무공(武公)의 경계를 지은 것과 같음을 듣지 못하였고, 점점 처음만 같지 못하여 감은 위징(魏徵)065) 의 탄식한 바와 같음이 없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왕년에는 부지런히 공부하여 주강이 파한 뒤에는 다시 석대(夕對)에 납시었는데, 지금은 거의 전폐하다시피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왕년에는 장주(章奏)나 장독(狀牘)에 물 흐르듯 수응(酬應)하셔서 시각을 지체함이 없으시더니, 지금은 간혹 지체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왕년에는 5일마다 차대(次對)하고도 인접(引接)을 가지셔서 백성의 괴로움을 물으시더니, 이제는 점점 드물어지셨습니다. 전하께서 왕년에는 묘사 유파(卯仕酉罷)066) 의 개좌(開坐)와 형옥(刑獄)의 정무에 감독과 신칙이 서로 잇따르시더니, 이제는 거의 폐하다시피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왕년에는 초동 목수(樵童牧豎)의 하찮은 말까지도 반드시 두루 살피고 온화하게 받아들이시더니, 이제는 대신의 말도 더러는 대답을 아니 주십니다. 전하께서 왕년에는 수령의 폐사(陛辭)에 반드시 인견하고 직접 신칙하시더니, 이제는 수령의 하직에 사대(賜對)도 아끼십니다. 전하께서 왕년에는 무릇 수령의 제수에 반드시 가려서 의망(擬望)하라고 신칙하시더니, 이제는 전조(銓曹)의 신료들이 진실로 사정(私情)을 따르고도 다시 두려워하거나 삼가는 빛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왕년에는 무릇 탐관 오리(貪官汚吏)를 조사해 다스림에 반드시 징계와 격려를 엄격히 하시더니, 이제는 의언(議讞)의 신하들이 법을 어기고 사를 따르는 것이 얼음이 녹아 물에 풀리듯 합니다. 전하께서 왕년에는 유학(儒學)을 가려서 경연에 입시하게 하시더니, 이제는 비록 신료들의 건청(建請)이 있어도 예사로운 유지만 내리실 뿐입니다. 전하께서 왕년에는 한 재주와 한 기능이라도 반드시 찾아서 쓰려 하시더니, 이제는 비록 묘당의 추천서가 있어도 다만 휴지를 만드실 뿐입니다. 무릇 이러한 열 가지 일들은 모두 성상의 신종(愼終)하는 다스림에 누가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왕강(王綱)은 날로 퇴폐하고 국세(國勢)는 날로 비하(卑下)되어 대훈(大訓)을 비록 게시(揭示)하였으나 그 효과는 막연하고, 당론은 뒤얽혀 큰 종기[癰]가 곧 터지려 하는 형편입니다. 시사(時事)를 두루 돌아보건대, 하나도 믿을 만한 형세가 없는데도 전하께서는 또 안일(安逸)하게만 여기고 계시니, 이는 신이 애타게 걱정하고 탄식하는 바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 면계한 것이 절실하고 옳으니, 마땅히 힘쓰겠다."
하였다.
2월 15일 을사
임금이 숙빈묘(淑嬪廟)에 나아가 전배(展拜)하니, 왕세자가 배종(陪從)하였다. 약원의 도제조 김재로(金在魯) 등이 임금이 정섭(靜攝) 중에 있다 하여 청대하고 간하여 중지하게 하려 하였으나, 임금이 소견(召見)을 윤허하지 않았다. 대신이 빈청에 나아가 또 정행(停行)을 계청하였으나 임금이 드디어 외판(外辦)을 기다리지 않고 어가(御駕)가 장차 떠나려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하교하기를,
"오늘의 가행(駕行)이 급작스러움을 모르는 바가 아니나, 조제(調劑)로 나를 괴롭히고 대신이 나를 피곤하게 하는 와중에 지금에야 정신과 기운이 조금 나아졌으므로 반드시 전배하려 하는 것이다."
하고, 효장묘(孝章廟)에도 차례로 들렀다.
임금이 대신들이 배묘(拜廟)의 행차를 정지하기를 청한 탓으로 마음이 격뇌(激惱)하여 곧 하교하기를,
"오늘 일을 보니, 《대학(大學)》의 혈구지도(絜矩之道)067) 와는 다름이 있다. 부모의 병이 있다 해서 말미를 청하는 일이나 성묘하기 위해서 휴가를 청하는 따위는 일체 받아들이지 말라."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소보(小報)를 보니, ‘부모의 병이 있다 해서 말미를 청하는 일이나 성묘하기 위해서 휴가를 청하는 따위는 받아들이지 말라.’ 하는 하교가 계셨으니, 이는 아마 신하들이 잘 주선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그러나 혈구를 잘못한 것은 진실로 뭇 신하들의 죄입니다마는, 뭇 신하들이 혈구를 잘못했다 하여 전하까지 또 따라서 혈구의 정사를 행하지 않으신다면, 이는 잘못을 본받아 상하가 서로 실수하는 데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의당 번연(幡然)히 취소하여 전환(轉環)의 미(美)를 보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바는 그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2월 17일 정미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임금의 심사가 격뇌(激惱)하여 엄한 전교가 거듭 내리자 차자를 올려 인책(引責)하니, 비답하기를,
"당습(黨習)이 날로 성해가니, 현기증이 날로 심해진다. 그날의 실수도 마음이 괴로워서 그리된 것이니, 경이 무슨 인책할 일이 있겠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2월 18일 무신
밤에 혜성이 자리를 옮겨 자미원(紫微垣) 안에 나타났는데, 꼬리의 길이는 2척이고 빛깔은 흰 색이었다.
2월 19일 기유
밤에 혜성이 다시 나타났다.
2월 20일 경술
밤에 혜성이 다시 나타났다.
2월 21일 신해
혜성이 점점 줄어들어 있는 듯 없는 듯하였다.
2월 22일 임자
혜성이 다시 나타났다.
2월 23일 계축
혜성이 다시 나타났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성변(星變)으로써 차자를 올려 진계하니, 비답하기를,
"당습이 여전하여 보상(輔相)들이 주저하니, 나라의 형세를 유시하려 하매 내 스스로 피곤해진다."
하였다.
2월 24일 갑인
혜성이 다시 나타났다.
임금이 약원(藥院)068) 에 명하여 문후(問候)나 입진(入診)을 말라고 하였다. 약원의 제조들이 입진을 윤허하기를 연속 청하였고, 우의정 조현명과 영의정 김재로, 좌의정 송인명도 연차(聯箚)하여 청했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5일 을묘
혜성이 다시 나타났다.
2월 27일 정사
혜성이 거의 사라졌다.
교리 윤득경(尹得敬), 수찬 정이검(鄭履儉)·정휘량(鄭翬良), 사간 이정욱(李挺郁) 등이 상소하여 성변(星變)으로써 진계하고 입진을 윤허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상신에게 하유하였다."
하였다.
2월 28일 무오
임금이 비로소 입진을 허락하였다. 전교하기를,
"조제(調劑)하기에 피로가 쌓여 심기(心氣)가 이미 허약해졌다. 대훈(大訓)이 이루어지자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끝났다고 보고 피차의 당론도 더는 없으리라고 여겨 몸소 고문(告文)을 지어 위로 척강(陟降)하는 선령에 고하기까지 하였는데, 민창수(閔昌洙)의 소가 나왔다. 처음에는 그 소를 불사르고 엄중한 처분을 내리려 하였으나, 우상의 거조가 과당(過當)함으로 인해서 드디어 척신(戚臣)을 정국(庭鞫)하기에 이르렀다. 마치 의금부에서 원정(原情)069) 하는 자리와 같았으니, 어찌 나라의 체통을 크게 손상시킨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상은 까닭 없이 인책하고 들어가 날마다 소단(疏單)으로 번거롭게 하고 있으니, 이 뒤에는 민창수의 일로써 말썽을 일으킬 자가 또 몇 사람이나 될지 모르겠다. 묵묵히 세도(世道)를 본즉 할 수가 없으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휴식(休息)하는 것만 같지 못할 것 같다."
하였다. 이어 어제(御製)의 ‘회(回)’자 수십 구(數十句)를 내렸다. 김재로 등이 보기를 마치고 ‘휴식’이라는 등 문구는 반시(頒示)할 것이 못된다 하고 힘써 거두기를 청하였는데, 누차 청한 뒤에야 비로소 윤허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접때 우상의 사기(辭氣)가 혹 분격한 적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은 충분(忠憤)에서 나온 것이요 당론에서 나온 것은 아닌데 성상께서 당론으로 의심하시니, 이것은 억울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피차 경자년070) 전후의 일로 서로 다툰 바가 있었는데, 나의 생각에는 경자년 이전이라도 3종(三宗)071) 의 혈맥을 위해서였다면 이는 충성이고 경자년 이후라도 만일 당심(黨心)이 있었다면 이는 불령(不逞)이라 여긴다. 이 어찌 조정에까지 끌어올려 쟁변(爭辨)하는 단서를 삼을 수 있겠는가? 이는 우상의 기승스러운 병통인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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