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5권, 영조 18년 1742년 4월

싸라리리 2025. 9. 26.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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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경인

임금이 인정전(仁政殿) 섬돌에서 친히 종묘 하향(夏享)의 서계(誓戒)를 행하였다.

 

4월 2일 신묘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또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의 권고(眷顧)를 입어 지위가 이에 이르렀는데 이제는 또 불행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기 전에는 다시 천안(天顔)을 못 뵈올 듯합니다.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신의 죄가 지극히 중하고 병세도 이와 같으니, 바라건대 파직을 명하여 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날의 하교는 분개로 인하여 유시한 것이다. 어찌 깊은 뜻이 있었겠는가? 경의 나라를 위한 공심(公心)은 나도 깊이 알고 있으니, 경은 모름지기 잘 조섭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백창(閔百昌)을 검열로 삼았다.

 

대제학 이병상(李秉常)이 세 번째 상소하여 대제학의 체직을 바라니, 비답하기를,
"이번에 행공(行公)한 것은 원량(元良)에 대한 충성이었다. 경이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니, 나도 마땅히 예로써 경을 대우한다. 특별히 사임(辭任)을 들어주어 경의 뜻을 이루게 하겠다.
하였다.

 

고창 현감(高敞縣監) 유응기(兪應基)가 그의 스승 채응복(蔡膺福)이 제자를 가르쳐서 대과(大科)에 오른 사람이 2인이고 소과(小科)에 오른 사람이 10인이나 된다 하고 열성조의 구례를 들어가며 상소하여 가자(加資)을 청하니, 임금이 해조(該曹)에 내려 품처(稟處)하라고 명하였다.

 

4월 4일 계사

김유경(金有慶)을 대사헌으로, 정언섭(鄭彦燮)을 대사간으로, 채응복(蔡膺福)을 사간으로, 이봉령(李鳳齡)을 장령으로, 민백행(閔百行)을 헌납으로, 이형만(李衡萬)을 지평으로, 남혜로(南惠老)를 정언으로, 정준일(鄭俊一)을 부응교로, 김한철(金漢喆)을 교리로, 김상적(金尙迪)을 부교리로, 한익모(韓翼謨)·남태제(南泰齊)를 부수찬으로, 조영국(趙榮國)을 승지로 삼았다.

 

수찬 이천보(李天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신료(臣僚)의 인접을 허락하지 않으신 지가 거의 수십 일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감히 알 수가 없으나 성심(聖心)에 무슨 격심한 고뇌(苦惱)가 있어서 이러한 거조를 하십니까? 근년 이래로 전하께서는 혹 한 사람 한 일이라도 성의(聖意)에 맞지 않은 바가 있으면 문득 과거의 역사에도 없었던 거조(擧措)를 하심이 전후로 무릇 몇 번째입니다. 전하께서 지나친 거조를 하면, 조정에 가득한 신료들이 두려워서 분주히 움직이니, 조정은 단합이 되는 것 같고 인심은 징계가 되는 듯하오나 마침내는 여러 신하들이 새로 시작하는 정사(政事)처럼 어지럽게 헌송(獻頌)하여 문구(文具)를 빌어 잘 다스려지는 형상으로 꾸미고 있으며, 더러는 기회를 타서 총영(寵榮)을 굳히고 진취(進取)를 매개(媒介)로 삼는 자가 있으니, 신은 그윽이 민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전하께서는 한 번만 격동한 바가 있으면 반드시 비상한 거조가 있으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함구하여 한 마디의 말이나 한 가지의 일도 말하거나 논하지 아니하고 미봉(彌縫)을 상책으로 삼으며 아유(阿諛)를 진충(盡忠)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다만 관(冠)을 맞대고 홀(笏)을 나란히 하여 한 청당(廳堂)에서 주선하는 모습이 전일의 창·칼로 서로 싸우듯 할 때와 같지 않은 것만 보시고 진실로 황극(皇極)의 치효(治效)가 이미 크게 이루어졌다고 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붕당이 더욱 성하고 사심(私心)은 더욱 자행되어 천기 백괴(千奇百怪)가 없는 것이 없으나 감히 전하를 위하여 말하는 자가 없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군자(君子)가 개과(改過)를 귀중히 여기는 것은 고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한 번 고치면 다시 허물을 범하지 않는 것을 위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지나친 거조를 아시고 뉘우치시면서도 또다시 하여 전전하여 마지 않다가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확연히 고치셔서 다시는 미혹되고 되풀이하는 근심이 없도록 하소서.
또 신이 이미 명을 받들고 호서를 안핵(按覈)하였으니, 연도에서 들은 바를 한두 가지 부연해서 아뢰겠습니다. 천안 군수(天安郡守) 이언소(李彦熽)는 별달리 향약(鄕約)을 세워 백성으로 하여금 안접(安接)하여 살게 하고 있으며 민호(民戶)의 잡역(雜役)을 관에서 마감(磨勘)하였고 백골 징포(白骨徴布)하던 것을 매호마다 거두어 보충하고 있습니다. 옥천 군수(沃川郡守) 서명오(徐命五)는 정사가 상명(詳明)하여 이속(吏屬)은 징계되고 백성은 편안해졌으며 방역(防役)096)  을 자력으로 대비(對備)한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조적곡(糶糴穀)이나 공부(貢賦)를 받아들이는 것도 모두 규모가 있어 칭송하는 소리가 경내에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특별히 포상하여 격권(激勸)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괴산 군수(槐山郡守) 정동우(鄭東羽)는 남장(濫杖)을 많이 써서 아전이나 백성들이 모두 괴로워하고 있으며 일념으로 재물을 함부로 거두어 들여 원망과 비방이 길에 가득 차 있습니다. 아산 현감(牙山縣監) 이홍령(李弘齡)은 모든 행정을 오로지 간교한 아전에게 일임하고 있으며 정사를 하는 것도 어둡고 나태하여 하나도 좋은 실상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모두 파직하여 민폐를 제거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좌의정 송인명(宋寅明), 예조 참판 김약로(金若魯) 등이 청대하매 임금이 소견하였으니, 대개 시학 의절(視學儀節)을 강구하여 정하는 일 때문이었다. 대사성 김상성(金尙星)도 함께 입시하여 시학 절목을 의정(議定)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번의 시학 의절은 계축년097)  에 비하여 별로 증감(增減)된 것은 없고 다만 참입된 것은 곧 양로(養老)의 한 절목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기로(耆老)는 백성인데도 임금이 또한 그를 위하여 일어나 주는데, 하물며 어진 이를 존경하는 것이겠는가? 지금의 양로(養老)는 대개 존현(尊賢)의 뜻을 겸한 것이니, 벽옹(辟雍)098)  에 임하여 늙은이에게 절을 한 것은 한(漢)나라 제왕도 또한 행했던 바이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세자가 찬선에게는 상견례(相見禮)가 있어야 마땅하기 때문에 찬선 권시(權諰)가 올린 상견례 의절을 나도 어렸을 때에 본 바가 있다. 세자가 사부(師傅)에게 절하는 예로써 찬선을 보는 것은 공경하고자 하는 뜻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찬선도 궁관(宮官)이니, 반드시 절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하였고, 송인명이 말하기를,
"입학한 뒤에는 찬선이 서연(書筵)에 들어가야 하니, 지금 먼저 예로써 서로 보는 것은 혹 어긋나는 데에 관련되는 듯 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축년099)   입학할 때에도 사부가 입참하였었으나 그 뒤에 별도로 상견례를 행하였으니, 어진이를 존경하는 뜻에서 먼저 찬선을 보는 것이 어찌 안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성균관에 명하여 유생(儒生)의 원점(圓點)100)   절목(節目)을 강구하여 정하게 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장차 시학(視學)하려 하니, 좌의정 송인명이 이어서 말하기를,
"다사(多士)들을 반궁(泮宮)101)  에 있게 한 것은 실로 선비를 성취시키는 아름다운 규례입니다. 성상께서 유학을 숭상하고 도학을 중히 여기시는 날에 서울의 식견 있는 선비들로 하여금 예양(禮讓)하는 자리에 제제(濟濟)102)  하게 하면 예컨대 동조(同朝)의 사람끼리 정지(情志)의 막힘이 저절로 없어질 것이고 논의할 즈음에 괴격(乖激)한 바도 없어질 것이며 서로 보고 느끼면 사습(士習)을 바르게 기르는 도(道)가 클 것입니다."
하였다. 대개 노소(老少)가 당을 나눠 의논이 둘로 갈라진 뒤로는 유생이 된 자는 각기 무리끼리 서로 어울리어 서로 비방하고 배척하기를 마치 원수처럼 하였기 때문에 송인명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임금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태학은 나라의 근본이다. 수령 칠사(守令七事)103)  에도 학교를 일으킴을 우선으로 삼았는데, 하물며 태학이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성균관에 있는 유생에게는 원점(圓點)의 규례가 있는데, 요즈음 서울 유생들은 거의 그것을 싫어하여 성균관에 있지를 않습니다. 이제 모든 유생들로 하여금 모두 원점을 준용한 뒤에야 비로소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신칙하되 적당히 규식을 정하면, 모든 유생들이 성균관에 있으려고 서로 모여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고, 영의정 김재로와 대사성 김상성도 또한 그것이 편리하겠다고 말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드디어 김상성에게 고규(古規)를 널리 상고하여 등대하여 품정(稟定)하라고 명하였다.

 

대신(大臣)의 서계(書啓)를 뒤섞어 내려 준 중관(中官)104)  을 잡아들여 추문(推問)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판부사 유척기(兪拓基)가 밖에 나가 있었는데 여러 차례 돈소(敦召)하였으나 병이 위독하다 하여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사관(史官)이 그의 말로 서계하였는데 비답도 없이 도로 내려 주었다. 장령 윤지태(尹志泰)가 상소하여 진계(陳戒)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삼사(三司)의 소를 한결같이 비답도 없이 되돌려 주시니, ‘이이(訑訑)한 성음(聲音)과 안색(顔色)이 사람을 천리 밖으로 물리치게 된다.’는 비방을 면하기 어려우며, 대신의 서계를 되돌려 준 일은 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한 일입니다. 설령 성심(聖心)에 미안(未安)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유독 《중용(中庸)》의 구경(九經)의 뜻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승정원에 출납(出納)을 둔 것은 바로 그것을 책(責)하기 위함인데, 함묵(含默)하고 날만 보내면서 구차하게 일이 없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신은 아직껏 봉작(封繳)105)  의 고사(故事)를 보지 못하였으니, 그윽이 한심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그때의 승지도 마땅히 무겁게 추고(推考)하여 경계(警戒)하는 뜻을 보이셔야 합니다."
하였는데, 소가 들어갔으나 또한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영의정 김재로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대신의 서계를 되돌려 준 것은 전에는 없었던 일이고, 정원에서 마땅히 작환(繳還)해야 한다는 것도 대관(臺官)의 말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뢰지도 아니하고 뒤섞어 내려 준 것은 중관(中官)의 잘못이다.
하고, 드디어 해부(該府)에 내려 처치하라고 명하고 승지도 무겁게 추고하라 하였으며, 윤지태의 소에 비로소 비답을 내렸다.

 

4월 5일 갑오

찬선 어유봉(魚有鳳)이 상소하여 물러가기를 청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곧 시학(視學)하고 양로례(養老禮)를 행하려 하였는데, 어유봉이 상소하여 돌아갈 뜻을 고하고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사양한 것이다. 임금이 수서(手書)로 답하기를,
"지금까지 기유(耆儒)를 기다려 온 뜻은 오로지 나의 충정에서 나온 것이다. 경은 교목지신(喬木之臣)으로서 어찌 차마 매매(邁邁)106)  하는가? 면유(面諭)할 것이 있으니, 모름지기 이 뜻을 몸받아 면유를 기다려서 위로 의릉(懿陵)107)  의 마음을 위로하고 아래로 다사(多士)들의 마음을 위로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 승지 양득중(梁得中)이 졸(卒)하였다. 양득중은 호남 사람인데, 경술(經術)로 천거되고 여러 차례 옮겨서 승지에 이르렀다. 일찍이 소명을 받고 올라왔는데, 언의(言議)는 보잘것없었다.

 

4월 6일 을미

달이 귀성(鬼星)을 범하였다.

 

4월 7일 병신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갔으니, 곧 하향(夏享)을 행하려 함이었다. 망묘례(望廟禮)를 행하고 의식대로 봉심(奉審)했으며, 이어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위의 의식대로 예를 행하였다.

 

4월 8일 정유

임금이 태묘에 제사를 지내었다. 바야흐로 제사를 지내려 할 때 비가 그치지 않고 내리니, 임금이 아헌관(亞獻官) 이하에게 월랑(月廊)으로 들어가라고 명하였다. 승지가 임금에게 소차(小次)로 들기를 청하니, 윤허치 않고 말하기를,
"‘체제(禘祭)108)  에서 이미 강신(降神)이 끝난 뒤로는 내가 보고 싶지 않다.’고 한 말은 헌작(獻爵)도 하기 전에 정성이 해이해짐을 이름이 아니었던가?"
하였다. 이미 찬수(饌需)를 올리매 의식대로 초헌(初獻)을 마치고 내려와 제자리로 돌아온 뒤에야 비로소 소차를 들었다. 풍악을 옮겨 전우(殿宇)의 처마 아래에 헌가(軒架)109)  를 매달라고 명하고 예가 끝난 뒤에야 재실로 돌아갔다. 종묘 도제조 김재로(金在魯)를 인견하고 전전(前殿)의 동쪽 월랑에는 사면(四面)에 벽이 없어 후전(後殿)과는 다르다고 지적하고 개수할 때는 한결같이 후전의 예(例)에 의하여 고치라고 명하였다.

 

4월 9일 무술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진연(診筵)에 나아가 도제조 김재로(金在魯)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찬선이 아직도 머물러 있으면서 시학(視學)에 입참하겠다고 하던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그의 뜻은 감히 시학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여기고 있는데, 대개 의절(儀節)에 있어서도 불안한 점이 있어서 지레 돌아가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그의 뜻이 양로례(養老禮)에 입참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하매, 김재로 말하기를,
"그것도 감당하지 못할 바라고 여기고 있습니다마는, 또 찬선이 상소를 올린 뜻은 시학까지 아울러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오며, 현재 기근(饑饉)과 여역(癘疫)이 대단히 심한데 이러한 때에 시학하는 것은 이 역시 지나친 겉치레에 관련된다고 하였으니, 체념(體念)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여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찬선(贊善) 어유봉(魚有鳳)도 함께 입시하여 ‘경(敬)의 자의 뜻을 풀이했는데, 매우 자세히 하였다. 또 동궁을 보도(輔導)함에 있어서는 숙덕(宿德)의 선비를 초빙해야 하니 이재(李縡)·박필주(朴弼周) 같은 사람을 일체로 돈소(敦召)하여 훈도(薰陶)의 책임을 맡겨야 한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어유봉이 또 말하기를,
"하늘에도 음양이 있는바 그 덕(德)에도 숙특(淑慝)이 있고 그 종류에도 흑백이 있어 시비(是非)가 판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하늘을 본받아 도(道)를 행하되 반드시 양(陽)을 부추기고 음(陰)을 억제하며 정(正)을 취하고 사(邪)를 버리며 군자는 받아들이고 소인은 물리치는 것이니, 이는 고금을 통하여 바꿀 수 없는 정리(正理)입니다. 만약 시비가 없기로 말하면 바로 긴 밤과 같아서 일의 득실(得失)이나 사람의 현사(賢邪)가 전도되고 혼란하여져 나라가 반드시 위태롭게 되어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옛날 제왕(帝王)은 시비 사이에서 반드시 밝게 분별하고 훤히 살펴서 반드시 ‘중(中)’이란 한 글자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요체(要諦)를 삼았던 것입니다. 대개 우리 유학(儒學)에서 이른바 중(中)이란 것은 곧 시비를 밝게 분별함을 천리 자연(天理自然)의 중(中)으로 삼은 것인데, 후세의 속유(俗儒)들은 ‘중(中)’ 자를 잘못 해석하여 모호(模糊)하고 불분명한 것을 중으로 여겼기 때문에 혹은 자막(子幕)의 집중(執中)110)  에 흘러 도리어 고식적이고 구차한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반드시 이 뜻을 밝힌 연후에라야 비로소 분석(分析)하는 효과가 있어 일을 경영하는 데에 응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맹자(孟子)는 이르기를, ‘지혜로움에 미워하는 바는 그 천착(穿鑿)함을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지혜로운 사람은 우(禹)가 물을 다스리듯 무사(無事)한 방도로 행하는 것입니다. 지금 물이 동(東)으로 흐르는 것은 물길을 터서 동으로 흐르게 하고 서(西)로 흐르는 것은 믈길을 터서 서로 흐르게 하고, 서로 흐르는 것을 반드시 끌어당겨 동으로 흐르게 한다면 공력(功力)을 들이기도 어렵거니와 일도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만일 마음을 공평하게 가지고 이치를 살펴 시비 사이에서 반드시 중(中)을 적용하기를 우(禹)가 물을 다스리듯 한다면, 천하의 일도 어려움이 없을 것이고 나라도 잘 다스려질 것입니다."
하였으니, 대개 그의 뜻은 탕평책(蕩平策)을 공격하는 것으로써 임금의 마음에 듣기 싫어하는 것이었다. 임금이 한동안 묵연히 있다가 말하기를,
"지금 중(中)으로써 하려 한다면, 반드시 ‘공(公)’자를 함께 쓴 뒤라야만 옳을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또 어유봉의 손을 잡고 머물도록 면려(勉勵)하기를 매우 은근히 하며 더 머물면서 시학에도 입참하고 주연(冑筵)111)  에도 자주 들라 하였으나, 어유봉은 굳이 사양하고 물러갔다.

 

장령 윤지태(尹志泰)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근래에는 은전(恩典)을 구하는 길이 점점 넓어지고 있는데, 유응기(兪應基)의 상소는 그 극에 달했다 하겠습니다. 문도(門徒) 중에서 과환(科宦)이 많이 나면 비록 혹 특별히 은자(恩資)를 베푼 예가 있기는 하였습니다마는, 이번의 채응복(蔡膺福)은 경학(經學) 출신으로서 설령 남을 가르친 일이 있기는 하나 겨우 구두(口讀)의 공부일 뿐입니다. 어떻게 특례로 논상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시행치 말라고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사직(司直) 오광운(吳光運)이 상소하여 《중용(中庸)》의 계구(戒懼)·신독(愼獨)의 뜻을 인용하여 수백여 말을 진계(陳戒)하였는데, 예사 비답을 내렸다.

 

4월 10일 기해

김진상(金鎭商)을 부제학으로, 홍창한(洪昌漢)을 응교로, 이창의(李昌誼)·이성중(李成中)을 부수찬으로, 남태기(南泰耆)를 정언으로 삼았다.

 

찬선 어유봉(魚有鳳)이 동궁에 육잠(六箴)을 올리는 한편, 상소를 남겨두고 곧장 돌아갔다.

 

지평 이형만(李衡萬)이 상소하여 마음을 정성스럽게 가지기에 더 힘쓰고 전 참판 이재(李縡)를 돈소(敦召)하여 주연(冑筵)에 출입하게 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회보하지 않았다.

 

심육(沈錥)에게 특별히 별유(別諭)를 내리고, 또 고(故) 상신(相臣) 박세채(朴世采)에게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에게 하교하기를,
"찬선이 숙특(淑慝)과 군자·소인을 분별하라는 말들로 진계하고 이어 ‘중(中)’ 자를 말하였다. 그러나 건중(建中)·건극(建極)을 피차에 서로 말하니, 천하에 어떻게 양중(兩中)과 양극(兩極)이 있을 수 있겠는가? 심육(沈錥)에게 별유한 것은 그 사람의 질실(質實)을 취한 것이고 박세채(朴世采)에게 치제(致祭)한 것 역시 그 정직함을 취한 것이다. 저번에 태학(太學)에서 ‘주비(周比)’ 등의 어구(語句)를 써 주었는데, 지금 들은즉 비석을 이미 세웠다 하니, 후세에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의 동비(銅碑)가 될 것을 염려한다. 그러나 사람은 죽어도 돌은 남을 것이니, 백세(百世) 뒤에라도 나의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내가 선성(先聖)112)  을 꼭 배알하려 한 것도 또한 세도를 개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하전(廈氈)113)  에서의 법강(法講)은 선성(先聖)이 강림(降臨)하는 것 같은데, 어찌 도리어 시학(視學)만 못하겠습니까? 찬선이 상소 가운데에서 지나친 겉치레라고 한 것이 모두 옳은 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시학이 어찌 학문을 일으키는 근본이 아니된단 말인가?"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학문을 일으키시려는 뜻을 신도 흠앙(欽仰)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습(士習)을 일시에 크게 바꾸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이제는 또 찬선도 이미 돌아갔으니, 정지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고, 벌을 받은 중외(中外)의 유생을 풀어 주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시학이 임박했으나 무릇 위에서 내린 벌을 아래에서 감히 풀어줄 수 없으므로 대사성 김상성(金尙星)이 말을 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른 것이다. 지난달에 태학에 내린 엄교(嚴敎)도 도로 거두라고 명하고, 또 대사성에게 제생(諸生) 중에서 경학(經學)으로 이름이 있는 사람을 가려 시학에 참강(參講)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굶주린 백성의 신포(身布)를 감해 주고 타일러 본토로 돌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영동(嶺東)의 유민(流民)으로 서울에 들어온 자가 매우 많아서, 진휼이 이미 끝났어도 오히려 돌아가려 하지 않자 대신이 말을 하였는데,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만일 신포를 감해 주면 저절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견감(蠲減)을 허락하고 효유하여 귀농(歸農)케 하라고 명한 것이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포항창(浦項倉)의 쌀과 보리를 지금 배에 실어서 북도로 보내고 있습니다마는, 북도의 소식을 들은즉 영흥(永興) 이남은 5월에 진휼이 끝나므로 진휼곡을 혹 잇대어 줄 수 있거니와, 정평(定平) 이북은 6월 그믐께나 진휼이 끝날 것인데 진휼할 밑천이 계속 잇대어 줄 만한 형편이 아니라고 합니다. 간신히 살려놓은 백성이 장차 모두 죽게 되었으니, 만약 몇만 곡(斛)의 알곡을 얻을 수 있다면 거의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하(嶺下) 7읍의 세미(稅米)와 야읍(野邑)에 있는 공목 작미(公木作米)114)  를 연해(沿海)의 군작미(軍作米)와 교환하여 북도로 실어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2만 곡은 대신이 이미 어렵게 여기니, 5,6천 곡만이라도 우선 바꾸어서 보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북도의 일이 급하니 속히 거행해야 할 텐데, 2만 곡의 수량을 대신이 이미 어렵게 여긴다면 우선 5천 곡만이라도 바꾸어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시학할 때의 강관(講官)의 인원수의 식례(式例)를 정하라고 명하매, 승지 조영국(趙榮國)이 강관의 인원수를 가지고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시강관(侍講官)은 경연의 영사·지사·동지사 및 성균관의 지사·동지사 중에서 사고가 없는 사람을 모조리 써 넣고, 강서관(講書官)은 옥당(玉堂)과 일찍이 한림(翰林)을 지낸 사람 7원(員)을 초계(抄啓)하는 일로 지금부터 정식(定式)을 삼으라."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11일 경자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참찬관 정우량(鄭羽良), 동지사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찬선이 돌아갔다고 해서 성심(聖心)에 결연(缺然)하게 여기실 일이 아니라, 산림(山林)의 선비를 돈소(敦召)하여 서연(書筵)에 출입하게 하는 것이 오늘의 급선무입니다."
하고, 이어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경연관을 초선(抄選)하도록 청하면서 ‘한(漢)나라 때에 조서를 반포하여 인재를 구한 것도 이러한 뜻이었다.’ 하니, 시독관(侍讀官) 김상적(金尙迪)이 말하기를,
"저번에 찬선이 연석(筵席)에서 아뢴 바는 말이 간결하면서도 요령을 얻었다고 하겠으니, 산림에서 글 읽은 선비는 신 등처럼 경연에서 숫자나 채우고 있는 사람과는 훨씬 다르다는 것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이미 돌아갔다고 단념하지 마시고 정초(旌招)115)  하는 정성을 더욱 가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찬선에게 손을 잡고 머물도록 면려(勉勵)하였고 또 함원(咸原)116)  을 다시 만난 듯하다는 등의 말로 일렀으나 끝내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으니, 이는 나의 정성이 부족하고 나의 어진이를 좋아함이 혹 예주 불설(醴酒不設)117)   하는데 가까워서 그런 것인가?"
하였다. 정우량이 말하기를,
"산야(山野)에서 글을 읽은 사람을 옛날의 도덕 정치가 행해지기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또 자신의 재분(才分)이 감당키 어렵다는 것도 헤아리고 있기 때문에 만류하기 어려움이 옛날부터 이러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치의(緇衣)118)  의 정성을 늦추지 마시고 더욱 궁정(弓旌)119)  의 예를 돈독히 하여 온 세상에서 모두 성상의 숭유(崇儒)의 성의(誠意)를 알도록 하신다면 풍속과 언론이 크게 변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그 자손에게 안정을 물려주는 모유(謨猷)가 어떠하겠습니까?"
하였고, 김상적이 말하기를,
"찬선이 지레 돌아간 것만 겨우 보시고 오히려 다른 유신(儒臣)들도 또다시 이와 같으리라고 생각하신다면, 전하의 초치(招致)하시려는 정성이 간단(間斷)되기 쉬울 것이니, 신은 장차 산림의 선비를 이로 말미암아 더욱 초치하기 어렵게 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 일은 말할 것이 없고, 마땅히 더욱 힘쓰겠다."
하였다. 이어 지금 계방(桂坊)에는 어떠한 사람이 있느냐고 물으매 김상적이 일일이 들어가며 대답하니, 임금이 경연관을 초선하였다가 계방에 자리가 비면 차례대로 보충하라고 명하였다.

 

4월 12일 신축

정원에서 아뢰기를,
"시학할 때 시강관이 될 만한 사람은 밖에 있는 자가 많습니다."
하니, 임금이 정경(正卿) 이상으로서 서울에 있는 사람으로 가려서 들이라고 명하였다.

 

4월 13일 임인

임금이 태학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이어 시학 의주(視學儀註)대로 시학례(視學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집춘문(集春門)을 나서니, 종친과 문무 백관의 4품 이상은 조복(朝服)을, 5품 이하는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지영(祗迎)한 뒤 배종(陪從)하였다. 임금이 면복(冕服)을 입고 문묘(文廟)에 들어가 선성(先聖)을 뵙고 의식대로 작헌례를 행하였다. 의식이 끝나자 임금이 대차(大次)로 돌아와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로 바꾸어 입고 여(輿)에 올라 명륜당(明倫堂)에 이르니, 시강관 이하는 흑단령을, 유생은 청금복(靑衿服)을 입고 지영하였다. 임금이 명륜당에 나아가니, 행 도승지 정우량(鄭羽良), 좌승지 정필녕(鄭必寧), 우승지 이세진(李世璡), 좌부승지 조영국(趙榮國), 동부승지 홍상한(洪象漢), 가주서(假注書) 이운해(李運海)·홍길보(洪吉輔), 기사관 조재덕(趙載德)·민백창(閔百昌) 등은 동쪽 섬돌을 거쳐 동영(東楹) 안으로 나아가 북향하여 엎드렸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시강관과 강서관을 거느리고 섬돌 아래에서 사배(四拜)를 행하였으며, 대사성 김상성(金尙星)은 제생(諸生)을 거느리고 서쪽 뜰에서 사배를 행하였다. 시강관 의정부 좌참찬 윤양래(尹陽來), 한성부 판윤 이기진(李箕鎭), 지돈녕부사 조상경(趙尙絅), 행 공조 판서 김시형(金始炯), 호조 판서 서종급(徐宗伋), 예조 참판 김약로(金若魯), 이조 참판 원경하(元景夏) 등은 동영(東楹)과 서영(西楹) 안으로 나아가 좌우로 나눠서 엎드렸다. 김재로는 어좌(御座)의 왼쪽에 나아가 서향하여 엎드렸고 강서관(講書官) 부응교 정준일(鄭俊一), 교리 김상적(金尙迪), 부교리 윤광의(尹光毅), 부수찬 이성중(李成中) 등은 서쪽 보계(補階) 위에 나아가 엎드렸다. 시위(侍衛) 제신들이 동서로 나눠 차례로 승지·사관의 좌우와 시강관의 뒤에 서자, 내시가 서안(書案)을 올렸다. 임금이 강소관을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고 승지로 하여금 책을 주게 하여 차례로 진강(進講)하니, 임금이 질문을 던져 논난(論難)하였다. 또 시강관에게 명하여 함께 반복하여 문난(問難)하라 하였는데, 그 일이 끝나자, 또 태학의 동서 재임(齋任)과 초선(抄選)한 유생 등 9인을 차례로 진강하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대사성은 유생으로 문학이 있는 사람을 초선하여 강에 응하게 하려 했는데, 조금 이름이 있는 유생은 모두 병을 핑계하거나 혹은 시골로 내려가고 이른바 초선했다는 사람들은 거의가 노둔한 사람이었다. 그 중에서 나삼(羅蔘)과 임석헌(林錫憲)이 가장 잘 주대(奏對)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전조(銓曹)에서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강이 끝나자, 대사성이 관관(館官) 및 재임(齋任)과 제생(諸生)들을 거느리고 뜰에서 배사(拜謝)하였으며, 내시는 서안을 치우고 통례(通禮)가 예가 끝났음을 고하니, 대신과 시강관·강서관·승지·사관·시위 제신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임금이 대차(大次)에 들어가 원유관과 강사포를 갖추고 여(輿)에 올라 집춘문을 경유하여 환궁하였다. 임금이 영화당(映花堂)에 나아가 대사성과 재임 등을 소견(召見)하고, 대사성에게는 표피(豹皮) 1령(令)을, 재임 등에게는 경서(經書)를 차등 있게 내리고 전(殿) 앞에서 사은(謝恩)하라고 명하였다.

 

4월 15일 갑진

월식(月蝕)이 있었다.

 

4월 16일 을사

판부사 유척기(兪拓基)가 상소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였다. 시학의 기일이 임박하니 감히 물러나 있을 수만도 없어서 성밖에 와서 머물다가 이에 이르러 돌아가겠다고 고한 것인데, 예사 비답을 내렸다.

 

승지에게 시제(試題)를 가지고 홍문관 제학 서종급(徐宗伋)과 더불어 태학에 가서 시사(試士)하라고 명하였다.

 

4월 17일 병오

반제(泮製)에서 으뜸을 차지한 진사 현광우(玄光宇)와 유학(幼學) 오순(吳洵)에게는 직부 전시(直赴殿試)를 내리고, 그 나머지에게는 모두 급분(給分)120)  하였다.

 

4월 18일 정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는 달이 남두성(南斗星)으로 들어갔다.

 

장령 이봉령(李鳳齡)이 상소하여 여역(癘疫)의 재앙에 대해 성대히 아뢰고 여제(癘祭)를 지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에 여역이 크게 치성하여 경외(京外)에서 죽은 자가 몇십만 명이나 되는지 모를 지경이었고, 팔도에서는 장계가 서로 잇달았다.

 

4월 19일 무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공홍 감사(公洪監司) 김상익(金尙翼)이 병으로 체직(遞職)을 바라니, 대신도 말을 하여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이종성(李宗城)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4월 20일 기유

박춘보(朴春普)를 수찬으로, 서종급(徐宗伋)을 지경연으로, 서명빈(徐命彬)을 동경연으로, 정준일(鄭俊一)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하기를 마치자, 지경연 서종급(徐宗伋)이 그때 호조 판서로서 나와서 아뢰기를,
"각 궁방(宮房)의 면세(免稅)에 대하여 지난 기유년121)  에 원결(元結)은 2백 결, 신결(新結)은 6백 결로 식례를 정했었습니다. 그 뒤에 간혹 별사(別賜)가 있었습니다마는, 그것은 둔결(屯結)이요 민결(民結)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옹주방(翁主房)에 2백 결을 별사(別賜)한다는 명이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민결이었습니다. 이 길이 한번 트이면 장차 후폐(後弊)가 될 것이니, 청컨대 한결같이 기유년의 정식(定式)에 의하여 성명(成命)을 도로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아래에서 조종할 만한 일이 아니다."
하고, 드디어 윤허하지 않았다.

 

4월 21일 경술

정언 남태기(南泰耆)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에 전지(銓地)는 하나의 경탈(傾奪)의 장소가 되어 성상의 지극하신 뜻이나 나라의 대체(大體)는 생각지도 않으니, 진실로 개탄할 일입니다."
하고, 이어 임정(任珽)과 원경하(元景夏)가 탄핵을 받은 뒤로 앞에 나서서 뜻을 펴지 못하고 있음을 일일이 아뢰고 말을 잇기를,
"이러고서야 어떻게 전지(銓地)를 책려(責勵)할 수 있겠습니까? 또 유민(流民)이 안접(安接)하지 못하고 서울로 많이 들어온 것은 수령이 안집(安集)을 잘 못해서입니다. 그 유민이 가장 많은 곳은 해당 고을 수령을 파직하여 다른 사람을 경계하게 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4월 22일 신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4월 23일 임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윤휘정(尹彙貞)을 승지로, 김상익(金尙翼)을 대사간으로, 이명곤(李命坤)을 장령으로, 박춘보(朴春普)를 헌납으로, 이회원(李會元)을 지평으로, 유우기(兪宇基)를 교리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특진관(特進官)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진휼하는 고을의 수령을 교체하는 것은 크게 민폐가 따르는 일입니다. 대관(臺官)의 말을 굽어 따르는 것은 대간(臺諫)의 체통을 중히 여기시는 데서 나온 것이겠으나, 우선 참작하여 용서하고 앞으로의 공효를 책(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때에 안변 부사(安邊府使) 이철보(李喆輔)와 회양 부사(淮陽府使) 이이장(李彝章)도 좌파(坐罷) 중에 끼여 있으므로 박문수가 말을 한 것이다. 박문수가 또 말하기를,
"북도의 운곡 어사(運穀御史)와 감진 어사(監賑御史)에게 포상을 더하여 그 노고를 위로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에게 물었는데, 김재로가 말하기를,
"어사는 본래 시상하는 규정이 없습니다."
하자, 드디어 정지하였다. 박문수가 또 돈이 귀한 폐단을 극진히 말하고 자문(咨文)을 보내서 청나라 돈[北錢]을 무역해 오기를 청하고, 또 대신으로부터 소민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사기(沙器)만을 쓰도록 하고 국내의 유기를 모조리 거두어 돈을 주조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대신과 더불어 의논해 보겠다."
하였다.

 

4월 24일 계축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희로 애락(喜怒哀樂)의 글 뜻을 들어 매양 존양(存養)의 공부에 마음을 쏟고 절도에 맞게 하는 방법에 더욱 힘쓰도록 진계(陳戒)하였으며, 이어서 말하기를,
"전부터 혹 일이 묘향(廟享)이나 능행(陵行)에 관계된다 하더라고 과중(過中)한 거조가 있으실 경우 여러 신하들로 입이 쓰도록 힘써 간쟁하는 자는 일찍이 위노(威怒)를 가하심이 없으시다가, 일이 사묘(私廟)에 관계될 경우에는 번번이 의심과 노여움을 일으키셔서 매양 비상한 하교가 계시니, 신은 그윽이 민망스럽게 여깁니다. 성상께서 평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시고 매양 폭노(暴怒)가 많기 때문에 그 노여워하신 것이 도리어 사적(私的)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시군(時君)122)  이 만일 사친(私親)에게 과중한 일이 있다면 아래에 있는 사람이 간쟁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나는 지금 지나친 일이 없는데 아래에 있는 자가 반드시 조절을 하려 하니, 어떻게 격뇌(激惱)치 않을 수 있겠는가? 〈인조께서〉 원묘(元廟)123)  에 사친(私親)을 봉안할 때의 고사(故事)를 일기(日記)에서 상고해 보건대, 그때에도 역시 과격한 하교가 많았었다. 내가 만일 추호라도 지나침이 있다면, 이는 그 어버이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욕을 끼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신하가 임금의 지극한 비통을 알지도 못하고 번번이 격노를 촉발하므로 나 역시 폭노하는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이니, 이는 가위 허물을 보고 인(仁)을 안다고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였다.

 

4월 25일 갑인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의 정고(呈告)가 여섯 차례에 이르자, 임금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에게 묻기를,
"우상의 병이 과연 어떠한가?"
하매, 김재로가 실지로 앓고 있다고 대답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금 쉬게 해야 하겠다."
하고, 드디어 함께 오라고 한 분부를 거두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4월 26일 을묘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4월 27일 병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경기도 양성(陽城) 등지에 서리가 내렸다.

 

형조에서 아뢰기를,
"여역(癘疫)이 치성하여 죄수의 사망이 잇달으니, 청컨대 전옥서(典獄署)의 입직(入直)을 전례대로 다른 곳으로 옮기고 죄인에게 형을 가할 문서는 여역이 수그러질 때까지 우선 출납을 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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