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5권, 영조 18년 1742년 5월

싸라리리 2025. 9. 26.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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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기미

일식(日蝕)이 있었다. 임금이 친히 구식(救蝕)을 행하였으니, 예(禮)인 것이다. 구례(舊例)에는 본감관(本監官)124)  이 수시로 아뢰었는데, 임금이 그일을 중히 여기는 뜻으로 본감의 제조로 하여금 계고(啓告)하게 하고 이어 현저하게 정식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또 앞으로는 전기(前期)해서 하루를 재계(齋戒)하고 각사(各司)의 구식관(救蝕官)도 하루를 재계하라고 명하였다. 이날 임금이 익선관(翼善冠)·참포(黲袍)·오서대(烏犀帶)에 백피화(白皮靴)를 신고 편문(偏門)으로 나와 여(輿)를 타고 인정전(仁政殿)의 뜰 위에 나아가 여에서 내려 욕위(褥位)에 이르렀다. 임금이 해를 향하여 앉으니, 관상감 제조 서종급(徐宗伋)이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해가 장차 먹혀 이지러지려 합니다. 청컨대 경척(警惕)하고 수성(修省)하소서."
하고, 드디어 향을 피우고 북을 쳐서 전례대로 구식을 행하였다. 임금이 물동이가 상(床) 아래에 있는 것을 보고 상 위에 올려놓으라고 명하여 관측하였다. 감관(監官)이 바람이 불고 물이 출렁거려 관측하기가 어려우므로 규일경(窺日鏡)으로 관측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촉구(燭具)는 있는데 촛불이 없으니, 어찌된 일이냐?"
하니, 승지 조윤성(曹允成)이 말하기를,
"월식(月蝕)에는 촛불이 있고 일식에는 촛불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낮 제사[晝祭]에도 촛불이 있지 않으냐?"
하면서 드디어 촛불을 밝히라고 명하였다. 진시(辰時) 정1각(正一刻)에 이르러 일식이 심해지자, 서종급이 또 꿇어앉아 아뢰기를,
"해가 장차 많이 먹히겠습니다. 청컨대 더욱 경성(警省)을 더하소서."
하고, 해가 다시 둥그래지려 하자 서종급이 다시 꿇어앉아 아뢰기를,
"해가 장차 다시 둥그래지려 합니다. 청컨대 경성을 게을리 하지 마소서."
하였다. 해가 이미 둥그래지니, 드디어 북이 그치고 임금이 안으로 들어갔다. 하교하기를,
"역상(曆象)의 소임이 가볍지 않으니, 본감으로 하여금 인재를 찾아서 차하(差下)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5월 2일 경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헌 김유경(金有慶)이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바라니, 예사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홍문관 【부교리 윤광의(尹光毅), 부수찬 이성중(李成中)이다.】  등이 일식(日蝕)을 가지고 연명(聯名)으로 차자를 올려 진계하기를,
"일식은 비록 상도(常度)가 있는 것이기는 하나, 정양(正陽)의 달에 있게 된 것이 매우 이상합니다. 일식의 재이(災異)는 오로지 음(陰)은 성하고 양(陽)은 쇠한 데서 연유하는 것이니,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지금 기강은 무너져 나라의 체통은 날로 낮아지는 탄식이 있고 당습(黨習)은 결렬(決裂)되어 조정의 기상(氣象)은 인협(寅協)할 가망이 절무(絶無)하니, 참으로 대경동(大警動)·대진작(大振作)이 없고서는 세도(世道)를 만회(挽回)하고 천휴(天休)125)  를 이어갈 길이 없을 듯합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 정성을 더욱 돈독히 하고 이 뜻을 더욱 면려(勉勵)하여 굳세게 행하고 곧은 도리를 간직하며 뭇 신하를 동솔(董率) 신칙하여 상벌(賞罰)을 분명히 하고 권징(勸懲)을 엄하게 하시어 온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대성인(大聖人)의 수성(修省) 분발하시는 성의를 다 함께 우러러보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면계(勉戒)한 바는 마땅히 힘쓰겠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황해도의 황주(黃州) 등 6읍에는 우박이 내리고, 평안도의 은산(殷山) 등 5읍에는 지진이 있었으며, 숙천(肅川) 등 3읍에는 서리가 내렸다.

 

5월 5일 계해

부수찬 이창의(李昌誼)가 상소하여 진계(陳戒)하고 기유(耆儒)를 돈소(敦召)하여 먼저 한 자급을 더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며, 경학(經學)에 밝은 선비를 포장(褒奬)하여 특별히 벼슬을 제수하는 것은 옛 성왕(聖王)의 속백(束帛)126)  의 예(禮)와 치의(緇衣)의 정성이 아니라고 말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5월 6일 갑자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시독관 윤광의(尹光毅)에게 이르기를,
"요(堯)·순(舜)의 도리는 효제(孝悌)일 뿐인데 대신은 사사로운 글자로 보아 넘기고 있으며, 일전에 영상이 아뢴 말도 결국은 하나의 ‘사(私)’ 자로 귀결지었다. 나는 광무(光武)127)  의 ‘적심(赤心)을 밀어서 남의 뱃속에 넣어 준다.[推赤心置人腹中]’는 것으로써 마음을 삼고 있으나, 뭇 신하가 서로 믿어 주지 않음이 이와 같다. 돌아보건대 나의 추선(追先)하는 마음은 날로 더해가는데 죽 둘러보아도 신하들 중에는 하나도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 가·구(賈寇)128)  는 중흥 공신(中興功臣)에 지나지 않지만 광무가 성의를 다하는 도량으로 능히 감화하게 하였다. 오늘날 신하들은 모두 세록(世祿)의 후예들인데 몇 번이나 대유(大諭)를 반포했어도 끝내 감복하지 아니하니, 세도(世道)는 참으로 어찌할 수가 없다."
하였다. 윤광의가 말하기를,
"옛 습성을 뉘우치지 못하고 끝내 감화하지 않아 지존(至尊)으로 하여금 위에서 혼자 걱정하시게 하고 천재 지변이 달마다 생기게 하니, 이는 모두 뭇 신하들의 허물입니다. 그러나 믿을 바는 성상의 한마음뿐입니다."
하고, 이어 당습이 더욱 고질화되고 조정의 기상은 불화해져 간다고 반복하여 진달하고 성심을 다하여 뱃속에 넣어 주어 상하가 서로 믿게 하라고 진계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의 말이 옳으니, 마땅히 유념(留念)하겠다."
하였다. 대개 임금이 사묘(私廟)의 일에 관하여 여러 신하가 한마디의 말만 하면 위노(威怒)를 폭발하여 지나친 거조가 있었다. 이에 김재로가 조용히 풀어서 진달하였으니 과연 대신의 체통을 얻었다고 할 만한데, 임금이 이미 허심 탄회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안(未安)한 뜻을 드러내 보였다.

 

5월 7일 을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5월 8일 병인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연석에서의 하교가 미안하다 하여 차자을 올려 인책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5월 9일 정묘

임금이 날이 가문 것을 걱정하여 말하기를,
"나라에서 믿는 것은 백성이고 백성의 소중한 것은 농사이다. 지금 바람은 날로 더욱 건조(乾燥)하고 비는 더욱 가망이 없으니, 백성을 위한 기우(祈雨)를 잠시인들 늦출 수 있겠는가? 예조로 하여금 기우제를 설행하게 하라."
하였다.

 

5월 10일 무진

조상경(趙尙絅)을 지경연으로, 박추(朴樞)를 집의로, 이종백(李宗白)을 대사성으로, 김상신(金相紳)을 사간으로, 남태혁(南泰赫)을 장령으로, 정하언(鄭夏彦)을 정언으로, 윤심형(尹心衡)을 부응교로, 김상적(金尙迪)을 교리로, 김광세(金光世)를 부교리로, 원경순(元景淳)을 수찬으로 삼았다.

 

5월 11일 기사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관서 지방도 또한 가뭄이 심하니, 기우제를 지냈다.

 

5월 12일 경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5월 14일 임신

임수적(任守迪)과 이선행(李善行)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재이(災異)로써 진계하고, 이어 말하기를,
"신이 들은즉 중외(中外)에서 기근(饑饉)과 여역(癘疫)으로 사망자가 서로 잇달고 있다 하니 바야흐로 구제하는 방도를 강구해야 할 즈음에 지금 다행히 비가 내렸으니, 혹 풍년을 기대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비가 내렸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수야 있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장기 현감(長鬐縣監) 서성경(徐性慶)은 백성이 굶주린다 하여 마음대로 군작미(軍作米)를 풀어 조곡(糶穀)으로 내어 주고 그 죄를 자청하였습니다. 그 정상이 용서해 줄 만하니, 곧바로 사목(事目)을 가지고 죄줄 수는 없다고 여깁니다. 나문(拿問)을 참작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모두 사목대로 엄벌해야 한다고 하니 임금이 드디어 송인명의 말에 따르지 않았고, 감사 심성희(沈聖希)는 그의 죄를 계청하지 않았다 하여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저번에 관동의 기민(饑民) 중에서 귀농(歸農)을 자원한 자에게는 금년의 신포(身布)를 탕감해 주라시는 하명이 계셨습니다. 또 들은즉 진휼청에서 기민으로 신역(身役)이 있는 자를 가려내 보니 관동의 기민 중에는 신역이 있는 자가 극히 적었다 합니다. 이제는 진휼하는 일도 이미 끝났으니 또 마땅히 본토로 돌려보내야 할 텐데, 전일에 귀농한 자들과 아울러 금년의 신포를 똑같이 견감해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북도로 곡물을 운송하던 배가 관동에서 치패(致敗)하였는데 곡물을 건져낼 때에 농간과 투식(偸食)의 폐단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감사가 지금 거둬 들이고 있다 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건져낼 때에 굶주린 백성들이 설사 훔쳐 먹었다 하더라도 심하게 다룰 만한 일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또 운송하는 일도 이미 끝났으니 눈감아 주되 갇힌 무리들은 아울러 놓아보냄이 마땅하며, 곡물 또한 탕감해 줌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5월 15일 계유

민선(閔墡)을 장령으로, 홍계유(洪啓裕)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진휼청에서 아뢰기를,
"기민(飢民)에게 마른 곡식과 죽을 쑤어 주던 일을 이달 15일 거두는 일로 이미 윤허를 받들었습니다. 마른 곡식을 주던 기민 1천 7백여 구(口)와 죽을 쑤어 주던 기민 3백여 구를 오늘 일제히 밥을 먹인 뒤에 식량을 주어서 돌려보내고, 병막(病幕)에서 앓고 있는 기민 20여 구는 우선 막에 머물게 하여 식량을 지급하고 연속 구료하여 완쾌되기를 기다려 돌려보내기로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5월 18일 병자

날씨가 오래 가무니 여러 도에서 농사가 실기(失期)되었다 하여 장계가 잇달았는데, 이날 마침 작은 비가 내렸으므로, 우선 기우제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5월 20일 무인

부수찬 홍계유(洪啓裕)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재이(災異)는 거듭 나타나고 유민(流民)은 길에 널려 있는데 여역(癘疫)은 크게 번져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은 비었으니, 이는 바로 군신 상하가 황황(遑遑)하여 마치 불속에서 구하고 물속에서 건지듯이 해야 할 때인데도 시학(視學)에 친림하시어 10년 만에 다시 거행하시니, 듣고 보기에는 비록 아름답지만 시무(時務)에는 적절치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전례(典禮)는 다만 먹을 것이 풍부하고 백성이 편안할 때만 행하여 이로써 태평을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같은 기근과 여역이 나라 안에 가득하여 백성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때에는 아마도 급선무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또 반중(泮中)에 비를 세운 것은 붕당을 미워하시는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이겠으나, 실심(實心)으로써 실정(實政)을 행하면 저절로 당을 없애는 정책이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노론(魯論)》129)   1부(部)는 제생(諸生)들이 외우고 배우지 않는 자가 없는데 유독 한마디의 말을 뽑아내서 비석에 새겨 경계로 삼는 것은 이 역시 문구(文具)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비석의 공사에 들어가는 경비가 매우 많아, 지금 몇 천명의 굶주린 인구를 살릴 수 있는 밑천을 한 덩이 돌에 써버린 것입니다. 대저 노대(露臺)의 비용은 1백 금(金)에 지나지 않았지만, 한 문제(漢文帝)는 오히려 중산(中産) 열 집의 재산이 된다 하고 아끼어 중지시켰습니다. 전하께서 스스로 기약하셨던 바는 한(漢)·당(唐)의 중주(中主)130)  에게는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마는, 이번 하나의 착수한 일은 도리어 후원(後元)131)  의 정치를 일신하려고 한 일에도 손색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전하께서 뭇 신하들을 의신(倚信)하고 조정에 책면(責勉)한 바가 지극히 두터웁고 또 무거웠지만 뭇 신하들이 우러러 보답해 올린 바는 정백(精白)하게 받드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실로 염치가 날로 없어지고 사의(私意)가 넘쳐흘러 이름난 장원(莊園)이나 훌륭한 저택은 모두 호강(豪强)의 전유물이 되어 대수롭지 않은 차제(差除)에도 양전(兩銓)에서 임의로 하는 일이 적으며 좀스런 천역(賊役)도 모두 재상의 청탁이 있어야 합니다. 뇌물은 공공연히 행하여 상례(常例)의 존문(存問) 외에 별봉(別封)의 수효는 전보다 몇 갑절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작은 일에도 이러하니, 큰 일에는 알 만합니다. 전하께서는 누구를 믿고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면계(勉戒)한 바는 마땅히 힘쓰겠다."
하였다.

 

5월 21일 기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5월 22일 경진

관동 지방은 오래 가물고 황모(黃蟊)132)  가 일어 대·소맥이 크게 흉작이 들고 회양(淮陽) 등 3읍에는 우박이 내렸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홍계유(洪啓裕)의 소로 인하여 상소하여 인책(引責)하기를,
"청탁이란 말은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전연 없었다고 할 수는 없으며, 별봉의 선물은 이제 새삼스러운 것이 아닌데도 또한 예수(例受)를 면치 못하였으니, 신은 참으로 부끄럽고 자책이 되어 스스로 해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김재로는 오랫동안 수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사방의 궤유(饋遺)를 많이 받았는데, 홍계유가 비록 이름을 지적하지 않았으나 뜻은 김재로를 지적한 것이었기 때문에 김재로가 차자를 올려 인책한 것이다. 임금이 비답하기를,
"관례에 따라 서로 면계한 것인데, 경은 어찌 고집하고 있는가?"
하였다.

 

5월 23일 신사

이익정(李益炡)을 승지로, 이행민(李行敏)을 장령으로, 유언국(兪彦國)을 정언으로, 조상경(趙尙絅)을 판윤으로, 이제원(李濟遠)을 부교리로, 우하형(愚夏亨)을 북병사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진정(賑政)이 이미 끝났다 하여 기민(飢民)들을 구처(區處)할 방도를 물으니, 진휼청 당상 민응수(閔應洙)가 말하기를,
"이제는 밀과 보리가 다 익었고 영동과 북도의 기민들도 차차 돌아가므로 공문(公文)을 만들어 주어서 보냈으니, 비록 연로(沿路)에서 걸식(乞食)한다 하더라도 필시 굶어 죽을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
하고, 이어 말하기를,
"여기(癘氣)가 크게 번지는데 활인서(活人署)에서 구활(救活)하지 못하니, 한성부로 하여금 신칙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경옥(京獄)의 체수(滯囚)를 추려 내어 대신으로 하여금 형관(刑官)을 거느리고 함께 들어가 품결(稟決)하라고 명하였으니, 여역(癘疫)이 치성하기 때문이었다.

 

평안도의 은산(殷山) 등읍에는 우박이 내리고 황해도는 크게 가물었다.

 

5월 24일 임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의 정고(呈告)가 31차례에 이르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전유(傅諭)하였다.

 

5월 25일 계미

수찬 이천보(李天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년 이래로 재이가 거듭 나타나고 흉년 뒤에 계속 여역이 번져 사망이 서로 잇달으니, 거리는 쓸쓸하기가 마치 병화(兵火)를 겪은 것과 같습니다. 경성(京城)이 이러하니 먼 외방이야 알 만한 일입니다. 한 집안이 전염되고 앓으면 한 집안이 폐농(廢農)하고 한 마을이 전염되어 앓으면 한 마을이 폐농하여, 한 고을 한 도에 이르기까지 태반이 폐농하는 형편입니다. 비록 다행히 병에서 죽지 않고 살아난다 하더라도 곧 기아(飢餓)에 죽게 될 것이니, 이는 진실로 전하께서 크게 경척(警惕)하고 공구(恐懼)하여야 할 때입니다. 오직 원하건대, 신료들을 인접(引接)하시고 날로 백성을 구원할 계책을 강구하소서.
백성의 휴척(休戚)은 수령에게 달려 있고 수령의 출적(黜陟)은 방백에게 달려 있습니다. 근래에는 조경(躁競)이 풍습을 이루어 청환 요직(淸宦要職)은 모두 쟁탈하는 자리가 되었고, 감사나 병·수사(兵水使)에 있어서는 더욱 급급하게 도모하여 한 자리만 나왔다면 좌우에서 뚫고 들어가 천거를 맡은 사람은 하나의 걱정거리가 되어 취사(取捨)에 현란(眩亂)하고 은원(恩怨)으로 판단하게 되니, 필경에 천거되어 나간 사람이 반드시 모두가 적임자를 얻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묘당에 신칙하여 사의(私意)를 완전히 떨쳐버리고 일체의 청탁하는 무리로 하여금 경계할 줄을 알도록 하소서. 신이 언로(言路)가 막힘을 들어 진계(陳戒)한 것이 여러 차례였습니다마는, 전하께서는 오직 언로를 열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혹 말하는 자가 있으면 그 입을 여는 데 따라 견벌(譴罰)이 문득 이르렀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해 놓으시고 또 말을 안한다고 꾸지람을 내리시니, 지금 대각(臺閣)에 있는 사람은 어렵기만 합니다. 전하께서는 남의 말을 듣는 아량을 빨리 넓히어 언로를 열어 놓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 면계한 바는 마땅히 힘쓰겠다. 그러나 신칙하라는 청은 또한 사체(事體)에 흠이 있으니, 묘당의 천주(薦注)는 한결같이 공(公)에 따른 것인데 사의라고 비방하고 배척한 것은 과연 한결같이 공심에서 나온 말인가? 너부터 면계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경상도 삼가현(三嘉縣)에 서리가 내렸다.

 

5월 26일 갑신

진휼청의 당상 이하를 서계(書啓)하라고 명하였다. 진정(賑政)이 끝났으므로, 임금이 시상하려고 하여 서계하라고 명한 것이다. 진휼청 당상 민응수(閔應洙)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종전부터 진휼이 끝나도 논상(論賞)한 규례가 원래 없었으니, 청컨대 그 명을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 소를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에게 보였다. 김재로가 계축년133)  의 전례를 상고하기를 청하매,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상고해 보니 과연 시상한 전례가 없으므로, 드디어 그 명을 정지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 김재로가 아뢰기를,
"사관(史官) 조명정(趙明鼎)과 민백창(閔百昌)이 좌파(坐罷)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청컨대 서용(敍用)하여 관직을 부여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대개 민백창이 하번(下番)으로서 부모의 병이 있어 소를 올리고 상번(上番)에게 청하니 상번이 허락치 않자 민백창이 소를 올리고 지레 나와버렸는데, 이로 말미암아 모두 파직되었던 것이다. 임금이 이르기를,
"부모에게 병이 있어 소를 올리면 위에서도 오히려 구호하라고 윤허할 터인데, 어찌 상번의 허락 여부에 관계되겠는가? 이 뒤로는 부모의 병이 있어 소를 올리는 자는 윗자리의 허락을 기다릴 것이 없고, 상번도 지레 나갈 수는 없다."
하였다.

 

5월 27일 을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이천보(李天輔)의 소 때문에 차자를 올려 인책하기를,
"이천보의 상소가 참으로 말한 것이 너무 지나친 바가 없지는 않으나, 시정(時政)을 걱정하고 풍속을 바루어 보려는 뜻만은 아름답습니다. 관사(官師)134)  가 서로 규계(規戒)하는 말이 오랫동안 뜸하였습니다. 일은 범론(泛論)에 가깝다고 하겠지만 협잡의 사심을 품었다고 볼 수는 없으니, 신 등이 허심(虛心)으로 받아들여 면려를 더하는 것이 합당할 듯하며, 성상께서도 마땅히 우악하게 용납하여 신하들이 와서 말을 하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신 등의 천주(薦注)가 어떻게 감히 한결같이 공(公)에만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비지(批旨)에 공을 따른 것으로 신 등을 허여하시고 사(私)를 낀 것으로 유신을 의심하였으니, 삼사(三司)에서 부지런히 묘당을 공박하던 일이 이로부터 더욱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하고, 이어 비지 중에서 ‘사체에 흠이 된다’는 이하의 미안(未安)한 하교를 삭제하여 성덕을 빛나게 해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어찌 그리 고집하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도 차자를 올려 인책하기를,
"감사와 병·수사의 천망에 맨먼저 거론된 사람은 신이 전후로 여러 차례 공석에서 말했던 사람입니다. 그런즉 지금 그 거의(擧擬)의 죄를 논한다면 실은 신이 해당되는 것이니, 신이 어떻게 안연(晏然)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또 유신을 위해서 개연(慨然)한 바가 있으니, 진실로 안될 것이 있는데, 이제 이미 우물쭈물하여 말을 했으니 분명하게 밝혀야 하는 데에 크게 흠이 되는 일입니다. 또 ‘신칙’이란 두 글자는 마치 서료(庶僚)를 조절하는 것 같음이 있으니, 신은 진실로 우휼(憂恤)하는 데 부족합니다마는, 홀로 조정의 체통을 위하여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역시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이때에 경상 감사 자리가 비었다고 고하니, 임금이 적합한 사람을 얻기가 어렵다고 여겨 묘당으로 하여금 가려서 의망하라고 명하였다. 김재로가 김치후(金致垕)를 천거하며 재국이 방백을 감당할 만하다 하니 송인명도 덩달아 추천하여 드디어 김치후를 경상 감사로 삼았는데, 김치후는 바로 김재로의 근족(近族)이었다. 이천보의 소가 이 일을 지척한 것이니, 두 대신이 모두 불안하여 서로 잇달아 인책한 것이다.

 

5월 29일 정해

좌의정 송인명(宋寅明)과 형조 판서 민응수(閔應洙)가 입시하여 중외의 죄수를 처결하였으니, 정배(定配)된 자가 15인이요, 곧바로 석방된 자가 무릇 5인이었는데, 형조에 갇혀 있는 범월 죄인(犯越罪人)은 모두 감사 도배(減死島配)되고, 여자와 어린이는 모두 곧바로 석방되었으며, 북도에 갇혀 있던 여러 죄인들도 아울러 놓아 보냈다. 처음에 관서의 범월 죄인으로 형조에 이수(移囚)된 자들을 석방으로 결정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묘당의 논의가 일치하지 못하여 오래도록 체수(滯囚)된 것인데, 이때에 이르러 여역(癘疫)으로 소결(疏決)하였기 때문에 드디어 이러한 명을 내리게 된 것이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피국(彼國)135)  이 매양 호생(好生)의 도리로 각종 범월자를 일체 용서하여 주므로 변금(邊禁)이 이로부터 장차 허술해지겠으니, 변방 백성을 어떻게 징섭(懲懾)시키겠습니까? 이렇듯 거듭된 흉년을 당하게 되면 서북에서는 범월자가 반드시 더욱 많아질 것인데, 앞으로 사단이 생기지 않을는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피국에서 지금은 비록 관용을 베풀어 용서하지만 또한 어떻게 매번 무사하리라고 보장하겠습니까? 신의 생각 같아서는 별도로 자문(咨文)을 만들되 먼저 황명(皇命)에 의하여 감사(減死)한다는 뜻을 말하고 이 뒤로 범월한 자는 일체 법으로 다스려 변금을 엄히 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히면, 저들이 듣고 안 듣고는 고사하고라도 이 뒤에 일이 생기면 우리의 할말은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들이 만일 ‘너희 나라에서 금하지 못하고 되려 우리한테 와서 묻느냐?’고 하면,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 다시 영상(領相)과 상의하여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만추(柳萬樞)와 권굉(權宏)을 장령으로, 김상구(金尙耉)를 지평으로, 이광식(李光湜)을 헌납으로, 김치후(金致垕)를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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