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5권, 영조 18년 1742년 3월

싸라리리 2025. 9. 26. 08:45
반응형

3월 1일 경신

예조에서 숙빈묘(淑嬪廟)에 전배(展拜)할 일로써 품계한즉 초9일에 전작례(奠酌禮)를 행하라고 명하였으니, 사묘(私廟)의 기신(忌辰)이기 때문이었다.

 

3월 2일 신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의 정고(呈告)가 네 번에 이르렀고, 또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전하를 섬겨 온 지 20년에 밖으로는 군신의 의리로 의탁하였고 안으로는 부자의 은애(恩愛)로 맺어져 충성을 바치고 싶은 구구한 정성은 하늘에 다짐할 만하지만, 때를 불행하게 만나고 거조가 엉성하여 자신의 군부(君父)를 충애한다고 하였으나 종내에는 도리어 군부의 의심만 받아 드디어 배은 망덕한 신하가 되었으니, 눈물로 자신의 허물을 반성하였으나 미칠 바가 없습니다."
하였다. 대개 민창수의 일이 있은 뒤로 임금이 조현명에게 당심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연석의 하교에서 누차 나타내니, 조현명이 불안하여 비로소 차자를 올려 인책하였는데, 예사 비답을 내리고 승지에게 돈유(敦諭)할 것을 명하였다.

 

3월 3일 임술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였다. 김시형(金始炯)을 판의금으로, 민백창(閔百昌)을 겸 설서로, 조영국(趙榮國)을 부제학으로, 서종옥(徐宗玉)을 지춘추(知春秋)로, 원경하(元景夏)를 동경연(同經筵)으로, 임수적(任守迪)을 형조 참판으로, 유우기(兪宇基)·김한철(金漢喆)을 수찬으로, 홍상한(洪象漢)을 부수찬으로, 심악(沈)을 응교로, 오수채(吳遂采)를 대사간으로, 민수언(閔洙彦)을 장령으로, 홍중효(洪重孝)를 정언으로, 조돈(趙暾)을 설서로, 정준일(鄭俊一)을 필선으로, 송문흠(宋文欽)을 부수(副率)로 삼았으니, 이조 판서 정석오(鄭錫五)와 병조 판서 김성응(金聖應)의 정사였다.

 

3월 4일 계해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5일 갑자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북도는 굶어 죽은 시체가 서로 베고 누웠는데, 영남곡 운반선은 치패(致敗)가 많으며 또 농사철을 당하였는데 소가 없어 경작(耕作)을 폐한 자가 많다고 합니다. 청컨대 경사(京司)에서 1만 민(緡)의 돈을 빌려 주어 소를 사서 농사를 짓게 하며 또 진휼청에서 쌀을 내어 북도 백성으로서 서울에 올라와 쌀을 사려는 자에게 염가(廉價)로 팔도록 윤허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아울러 윤허하였다.

 

3월 7일 병인

사간 이정욱(李挺郁)이 상소하여 숙빈묘(淑嬪廟)에 행차하는 시기를 늦출 것을 청하니, 전지를 내려 엄히 꾸짖고는 그 소를 되돌려 주고 관직을 체차(遞差)하였으며, 받아들인 승지도 무겁게 추고(推考)하게 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현기증(眩氣症)이 있어 약원에서 입진을 청하고 또 숙빈묘의 전작례(奠酌禮)를 물려서 행하기를 청했는데, 여러 날을 힘써 청했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3월 8일 정묘

임금이 숙빈묘에 나아가 전작례를 행하고 이튿날 환궁하였다.

 

3월 11일 경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왕세자의 입학할 시기가 임박해 오니, 대제학을 반드시 권점(圈點)하여 서둘러 내야만 군급(窘急)한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듣건대 전 대제학 이덕수(李德壽)가 이미 들어왔다고 하니, 영상이 조정에 나오기를 기다려 명초(命招)하여 권점하게 함을 늦출 수 없을 듯합니다. 이덕수는 바야흐로 예조의 장관으로 있고 의절(儀節)도 듣건대 또한 많이 거행한 사람이니, 힘써 나오게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상하의 사이가 막히고 사무도 적체되어 있으니, 신은 병중에 걱정과 탄식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바는 마땅히 하교하겠다."
하였다.

 

3월 13일 임신

전 대제학 이덕수를 명초하여 문형(文衡)에 권점하게 하여 이병상(李秉常)을 대제학으로 삼았다.

 

3월 14일 계유

이도원(李度遠)을 사간으로, 홍상한(洪象漢)을 부응교로 삼았다.

 

3월 14일 계유

임금이 특별히 군민(軍民)에게 대유(大諭)를 내렸다. 이때에 임금이 이미 민창수(閔昌洙)를 국문하고 또 조현명(趙顯明)이 〈주먹으로〉 땅을 두드리며 기승을 부리던 것에 노하여 드디어 오랫동안 정사를 살피지 않았고 또 약원의 입진도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드디어 대유를 내리기를,
"아! 나같이 박덕한 사람으로서 조종의 무거운 부탁을 이어받아 백성에게 군림(君臨)한 지 1기(紀)072)   하고도 6년이 되었으나, 기강은 조정에 서지 못하고 덕은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여 우리 군민을 저버리게 된 것이 조석으로 부끄럽기만 하다. 돌아보건대 지금 조정 신하들에게 하유해 보았자 도움됨이 없을 것이기에 이제 마음을 다하여 군민에게 시원스레 하유하니, 모름지기 모두 들어라.
옛부터 제왕(帝王) 중에 창업(刱業)한 임금이 처음에는 비록 고난을 겪지만 역내(域內)가 평정되면 남면(南面)하여 편안이 다스리게 되었다. 어디 나같이 온갖 역경을 두루 겪은 사람이 있었느냐? 나는 신축년073)   저위(儲位)를 이으라는 명을 받고 또 삼종(三宗)의 혈맥에 대한 하교를 받고부터는 몸이 내 것이 아님을 알고 눈물을 머금고 명을 받기는 했으나, 남면(南面)을 달갑게 여기지 않은 것이 나의 본심이었다. 아! 환시(宦侍)와 교결(交結)하여 나로 하여금 사위(辭位)에 이르게 한 것도 당인(黨人)으로 말미암았고, 효경(梟獍) 같은 사나움을 참지 못하여 마침내 무신년074)  의 변란(變亂)을 일으키게 한 것도 당인으로 말미암았다. 황형(皇兄)의 우애가 없었고 척강(陟降)하는 조종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 우리 청구(靑丘)075)  에 어찌 오늘이 있었겠느냐? 돌아보건대 지금 임금의 권강(權綱)은 날로 떨어지고 신하의 오만은 날로 성하여 그 임금을 협지(脅持)하고 아직도 구습(舊習)을 일삼아, 한번 처분이 있으면 모두가 두호(斗護)하고 한번 혹 침묵을 아껴도 문득 곧 신구(伸救)를 청하니, 이러한 분의(分義)가 지난 사책(史冊)에 어디 있었는가? 대훈(大訓)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조정의 분위기가 진정이 되어야 마땅하건만, 또 민창수(閔昌洙)란 자가 있어 우리의 국시(國是)를 혼란시켰다. 사신(史臣)의 선유(宣諭)는 뜻을 보임에 불과한데 보상(輔相)이 민창수로 하여 〈주먹으로〉 땅을 두드리는 것이 어찌 그리 지나쳤는가? 아! 우리 군민들은 비록 나의 뜻을 알아주지 않으나, 아! 저 대신(大臣)도 관례에 따라 심단(尋單)하며 그 온유(溫諭)만을 기다리니, 이러한 국체(國體)는 오늘에야 처음 보는데 주(周)의 하당(下堂)076)  과 거의 근사한 일이다. 당인이 서로 공격하며 나라 일을 팽개쳐 버리면서도 오히려 그 임금더러 게으르다 한다. 아! 문리(文吏)가 날로 더욱 가찰(苛察)을 하고 명류(名類)는 장차 윤기(倫紀)가 없는 데 이르게 되니, 돌아보건대 나의 강개한 마음은 당세(當世)에 권권(眷眷)한 것이 아니라 군민에게 오히려 연연(戀戀)한다. 아! 나의 군민들은 모두 나의 이 민박(悶迫)한 마음을 이해하라."
하였다. 대개 민창수의 소가 들어왔을 때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서 조현명에게 전유(傅諭)하였으나 이는 조정의 체통에 불과하였는데 조현명이 전유를 듣고 바로 들어오니, 임금이 해괴하게 여겨 여러 차례 사관에게 ‘우상이 과연 들어왔느냐?’고 물었다. 이에 이르러 대유(大諭)를 내리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사관을 보내서 선유한 것은 뜻을 보임에 불과하였다.’고 한 것은 대개 조현명이 이미 민창수에게 탄핵을 받았으니 들어와서 국문을 청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었고, 국문을 청할 때에 거조가 해괴하고 패려(悖戾)하여 땅을 두드리기까지 하였기 때문에 ‘주(周)의 하당(下堂)과 거의 가깝다.’는 하교는 대개 이를 말한 것이었다.

 

약원에서 ‘문후(問候)도 하지 말고 의약(議藥)도 하지 말라.’는 전교로써 서로 이끌고 나와서 명을 거두기를 청하고 연거푸 재계(再啓)를 올리니, 임금이 소견(召見)하고 말하기를,
"나의 현기증은 실로 세상을 개탄스럽게 여기는 데에 연유하여 생긴 것이다."
하고, 이어 대리(代理)의 명을 내리면서 전교하기를,
"‘대리(代理)’의 두 글자는 문득 시휘(時諱)처럼 여기나, 한 번 뜻을 하유하려고 약원을 불러 본 것이다."
하니, 도제조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대유(大諭)를 뭇 신하들에게 반포하지 않으시고 다만 군민에게만 하유하시니, 신 등으로 하여금 부끄러워 죽겠금 하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상이 이미 대유를 듣고도 대명[胥命]하지 않고 오히려 인혐(引嫌)하고 들어가니, 어찌 신자(臣子)의 분의(分義)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대리의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날 조현명(趙顯命)이 엄한 하교로 인하여 대명하니, 임금이 대명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3월 16일 을해

우의정 조현명이 상소하여 자책(自責)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3월 17일 병자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빈청에 나아가 청대하여 아뢰기를,
"돌아보건대 지금 위아래가 막히고 인심이 술렁거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안정시키는 일은 오직 성상께서 신료(臣僚)를 불러 보심에 있는데, 줄곧 굳게 거절하여 서로 잊어버린 듯이 하고 계십니다. 청컨대 예절을 간략히 하시어 잠깐씩 인접하여 뭇사람들의 여정(輿情)을 진압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비록 입시한다 해도 다시 할말이 없다."
하고, 세 번을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고 말하기를,
"현기증이 조금 나으면 마땅히 불러 보겠다."
하였다. 응교 홍상한(洪象漢)·교리 윤득경(尹得敬)도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굶주려 죽은 시체는 길을 메우고 요망스런 혜성(彗星)은 달포나 끌어오고 있습니다. 군신 상하가 비록 날마다 소복(消伏)하는 방도와 진제(賑濟)하는 계책을 강구하기를 불 속에서 구제하고 물에 빠진 이를 건지듯이 하여도 오히려 이룩하지 못할까 걱정되거늘, 더구나 지금 묘당에서는 입대(入對)가 막히고 경연은 오래 중지되어 마음과 뜻이 단절되고 나라 일은 위태롭게 되었으니, 말하고자 한다면 슬프기만 합니다. 청컨대 나라와 백성의 괴로움을 생각하여 빨리 상신의 청대를 윤허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대유(大諭)에서 말하였다. 전일의 강학(講學)을 돌아보건대, 마음이 몹시 부끄럽다."
하였다.

 

3월 18일 정축

대신이 빈청에 나아가 청대하며 두 번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서로 잇달아 대명(待命)하였다. 판부사 김흥경(金興慶), 부제학 조영국(趙榮國), 응교 홍상한(洪象漢) 등이 서로 잇달아 차자를 올려 인접의 윤허를 청하고 정원에서도 청하니, 임금이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에게 별유(別諭)를 내리기를,
"이것이 어찌 보상(輔相)이 사면할 때이겠는가? 사소한 염우(廉隅)를 털어버리고 부지런히 나라 일을 함께 보살피는 것이 바로 경의 오늘날 할 책임이니, 안심하고 즉시 함께 들어오라."
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 좌의정 송인명(宋寅明) 등을 소견(召見)하였다. 대신이 신료의 인접을 윤허하여 중외의 우려와 의구(疑懼)를 풀어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당파가 각기 미견(迷見)을 고집하여 세도(世道)가 마치 물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으니, 내가 실로 돌아가서 조종을 배알할 면목이 없다. 일찍이 송주(宋主)077)  가 ‘짐(朕)을 어느 땅에다 두려고 이러느냐?’고 한 말을 비웃었더니, 지금 나의 이 전교는 바로 나의 고심(苦心)이며 지원(至願)이다."
하였다. 김재로 등이 아뢰기를,
"동궁께서 아직 어린 나이이시니 이것은 신 등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씀이며, 성상께서도 이러한 생각이 싹트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하였고, 송인명도 말하기를,
"이 일은 성상께서 게으른 데에 연유한 것이 아니라, 조정 신료들이 잘 받들어 모시지 못한 데서 온 일입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성상의 마음도 반드시 풀리실 것입니다."
하였다. 김재로가 선혜청 당상 민응수(閔應洙)에게 명하여 진정(賑政)을 전담하여 유민(流民)들이 죽어가는 환난을 구제하게 하기를 청하였고, 송인명이 또 북도(北道)에 소가 모자라 농사를 폐하는 것이 민망하니 관서(關西) 북도에 가까운 각 고을의 관향둔(官飼屯)에 있는 소 수백 두를 북도에 이송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송인명이 또 영남의 곡물을 미처 북도로 실어 보내지 못한 것은 병선(兵船)으로써 실어 보낼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
"대사(大赦)가 가까워 오니, 살필 것은 형정(刑政)이다. 감옥에 갇힌 자도 또한 나의 적자(赤子)가 아니겠느냐? 형조로 하여금 현재 갇혀 있는 죄수로 죄가 의심스러운 자를 초계(抄啓)하되 대신들과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홍상한(洪象漢)을 승지로, 이익정(李益炡)을 대사헌으로, 이정보(李鼎輔)를 대사간으로, 이광부(李光溥)를 집의로, 채응복(蔡膺福)을 사간으로, 허채(許采)를 장령으로, 민광우(閔光遇)·이형만(李衡萬)을 지평으로, 박준(朴㻐)을 헌납으로, 이제원(李濟遠)·박춘보(朴春普)를 수찬으로, 윤득경(尹得敬)을 겸 사서로, 박필부(朴弼傅)를 진선(進善)으로 삼았다.

 

3월 20일 기묘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납 박준(朴㻐)이 상하가 의심하고 멀리하여 마음이 막혀 있다고 상소하여 진계하니, 임금이 그 소를 되돌려 주게 하고 비답이 없었다.

 

3월 21일 경진

조윤성(曹允成)을 승지로, 이명곤(李命坤)을 겸 필선으로, 윤득화(尹得和)를 병조 참판으로, 이창유(李昌儒)를 정언으로, 윤심형(尹心衡)을 부응교로 삼았다.

 

3월 23일 임오

장령 허채(許采)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선 입진(入診)도 윤허하지 않으시고 신료도 접견하지 않으시니 대소 신료들이 초조하게 허둥대고 중외의 인민은 흉흉(洶洶)하게 들끓으니, 이는 3백 년 이래 없었던 일입니다. 또 논사(論思)의 소나 광구(匡救)의 글도 모조리 비답 없이 되돌려 주시니, 또한 어찌 성세(聖世)의 일이라 하겠습니까? 이는 모두가 정신(廷臣)의 죄입니다. 각기 당습(黨習)에 빠지고 시상(時象)을 벗어나지 못한 탓으로 성심(聖心)의 격뇌(激惱)를 불러일으킨 것인데, 필경에는 나라 일을 망치고 백성의 해독만 되니 도리어 전하의 걱정만 끼침이 아니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건단(乾斷)을 시원스럽고 통쾌하게 발휘하여 태화(太和)의 기운이 충만케 하시고 재앙이 영원히 사라지게 하소서.
전하의 ‘탕평(蕩平)’ 두 글자는 신인(神人)에게 다짐할 수 있는 일이므로 전관(銓官)을 특별히 제수하여 탕평의 소임을 맡겼으면 전관이 된 자는 의당 사의(私意)를 버리고 정백(精白)한 한마음으로 성상의 명지(明旨)에 보답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조 참의 임정(任珽)은 사정에 따르고 당심(黨心)에 끌려 초사(初仕)의 수령은 친족이 아니면 인척이고 양사(兩司)의 신통(新通)078)  도 역시 인망 밖의 사람이었으니, 이러한 사람을 전형에 참여시켜 ‘탕평’ 두 글자로 하여금 시험해 보나마나하다는 표제가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견책의 벌을 시행하여야 한다고 신은 생각합니다. 또 대각(臺閣)에서 한마음으로 함묵(緘默)만 지켜 백방으로 모면만 하려한 것은 오늘날의 고폐(痼幣)가 되고 있습니다. 전 장령 권우(權祐)는 6삭(朔)이나 허함(虛銜)만 띠고 잠깐 나왔다가 도로 들어갔고, 전 대사간 오수채(吳遂采)는 한번도 행공(行公)하지 않다가 무단히 사면(辭免)하였으며, 전 정언 이장하(李長夏)는 이미 나왔다가 도로 들어갔는데, 모두 논란할 정세(情勢)도 없으니 그 관직을 파면하여 신칙과 면려의 뜻을 보이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전관(銓官)을 쳐흔들 의사로써 협잡(挾雜)하여 소장을 올렸으니, 이것 역시 당습(黨習)이다. 마땅히 엄한 징계를 시행하여 사판(仕版)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여 향리로 방축(放逐)하고 소는 되돌려 주어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우상이 신을 보고 울면서 임금에게 의심을 받고 마음이 믿음을 받지 못함을 스스로 한탄한다고 하였으며, 또 그의 병세가 침중(沈重)합니다. 우상이 대훈(大訓)에 대해서 자신도 고심과 혈성(血誠)이 있어서 전에 민진원(閔鎭遠)이 죄를 입었을 때에도 오히려 힘써 구원했는데, 유독 민창수(閔昌洙)에게만 당습을 하였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이번 일은 충분(忠憤)에 격동하여 그렇게 된 것인데, 성상께서 지나치게 의심하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상이 본심을 만약 드러내지 못한 것이 있으면 비록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더라도 좋을 것이다. 내가 어찌 당심으로 우상을 의심하기야 했겠는가?"
하였다.

 

3월 25일 갑신

권현(權賢)을 사간으로, 윤지봉(尹志奉)을 장령으로, 이중조(李重祚)·박성옥(朴成玉)을 지평으로, 이수해(李壽海)를 정언으로 삼았다.

 

왕세자가 장차 입학하게 되어 성균관에서 생원·진사로 명망이 있는 사람을 정선(精選)하여 윤득민(尹得敏) 등 무릇 9인을 집사(執事)로 비원(備員)하였는데, 취향(趣向)이 다른 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미 참여한 사람도 서로 시벌(施罰)이 있어서 머뭇거린 사람이 많았다. 임금이 듣고 노하여 말하기를,
"대유(大諭)가 있은 뒤에도 집사되기를 즐거이 여기지 않으니, 이 역시 견빙(堅氷)의 조짐079)  이다. 장명(將命) 이하 행공(行公)하지 않은 자는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유생들이 엄한 하교로 인하여 인책(引責)하고 들어오지 않으니, 성균관에서 시벌(施罰)할 것을 청하여 임금이 윤허하였다가 곧 벌에서 풀어 주고 입참(入參)하게 하라고 하였다.

 

3월 26일 을유

왕세자가 입학하였다. 대제학 이병상(李秉常)이 박사(博士)로 진참(進參)하였는데, 장명(將命)은 윤득민(尹得敏)이었다. 이날 왕세자는 쌍동계(雙童髻), 공정책(空頂幘),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태학(太學)에 나아가 이어 학생의 옷으로 바꿔 입었는데, 청금(靑衿)과 연두건(軟頭巾), 세조대(細絛帶)를 갖추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으며, 이어 서치(序齒)080)  를 행하였다. 박사는 공복(公服)을 입었으며 장명(將命) 이하 제집사(諸執事)는 학생의 옷을 입고 진참하여 《소학(小學)》을 강하고, 강이 끝나자 비백(篚帛)과 포수(脯脩)를 박사에게 바쳤으니, 예(禮)인 것이다. 【의주(儀註)는   정미년081)  〈효장 세자의〉 입학 때와 같이 하였다.】  장명(將命)은 유생의 극선(極選)이었다. 태학에서는 처음에 김양택(金陽澤)을 장명으로 삼으려 하였다. 김양택은 고(故) 판서 김진규(金鎭圭)의 아들인데, 김양택이 일로 인하여 인혐(引嫌)하고 나오지 않자 윤득민으로 대신시킨 것이다. 윤득민은 이조 참의 윤급(尹汲)의 형의 아들이다.

 

왕세자의 입학하는 일에 노고(勞苦)하였다는 것으로써 사·부(師傅) 이하 대사성까지는 고비(皐比)를 내렸고, 장명(將命) 이하 제집사(諸執事)에게는 경서(經書)와 필묵(筆墨)을 차등이 있게 내렸으며, 보덕(輔德) 이선행(李善行)은 예모관(禮貌官)을 맡았기에 특별히 가자(加資)를 명하였다.

 

찬선(贊善) 어유봉(魚有鳳)이 성밖에 이르렀는데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재촉하여 부르니, 어유봉이 드디어 배명(拜命)하고 왕세자와 치학(齒學)082)  하는 예에 진참(進參)하였다.

 

임금이 영화당(映花堂)에 나아가 왕세자에게 유복(儒服)으로 진현(進見)하라고 명하였다. 또 장명 이하 제집사에게 입시(入侍)를 명하고 당습(黨習)을 일삼지 말라는 뜻으로 순순(諄諄)히 면칙(面飭)하고 어필(御筆)로 쓴 한 장의 종이를 유생에게 주어 돌아가서 대사성에게 전하도록 하면서 말하기를,
"후세로 하여금 마땅히 나의 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그 글에 쓰기를, ‘원만하여 편벽되지 않음을 곧 군자의 공심이요, 편벽되고 원만하지 않음은 바로 소인의 사심이다.[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 하였고, 그 아래에 연월(年月)을 썼는데, 비(碑)에 새겨 반수교(泮水橋) 위에 세우라고 명하였다.

 

3월 27일 병술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고 교서를 반포하였으니, 왕세자의 입학을 칭경(稱慶)한 것이었다. 그 교문(敎文)에 이르기를,
"왕(王)은 말하노라. 어린 자식이 원량(元良)의 책임이 있으니 이미 이극(貳極)083)  의 높은 자리에 있었고, 태학에 들어가 《소학》의 글을 강하니 이에 삼대(三代)084)  의 제도를 준행하였다. 이는 한 사람의 사사로운 기쁨이 아니라, 사방과 더불어 같이 아름답게 여길 일이다. 오직 원사(元嗣)085)  의 현량함을 생각하매, 일찍이 조민(兆民)의 촉망이 매어 있었다. 과매(寡昧)한 나의 저문 날에 진색(震索)086)  을 정하니 가만히 도우심은 다행히 신명(神明)에게 의뢰하였고, 종사(宗社)가 외롭고 위태로울 때에 이위(离位)087)  를 정하니 대본(大本)이 방국(邦國)에 길이 굳어졌다. 하물며 기억(岐薿)088)  함은 천부적으로 빼어났으니, 진실로 효경(孝敬)이 날로 드러났다. 지난해부터 처음으로 주연(冑筵)089)  을 여니 강해(講解)가 점차 성취되고, 올봄에 이르러 태묘(太廟)에 배종(陪從)하니 예절이 모두 의젓하였다. 비록 의방(義方)은 몸으로 가르치는 데 변함이 없었다 하나 학업은 반드시 스승에게 받는 것을 바탕으로 하였다. 이에 읍양(揖讓)을 가르칠 나이에 맞추어, 곧 입학의 의절을 거행하였다. 제생(諸生)과 함께 선사(先師)를 배알하니 소중한 것은 도학이요, 세자[貳君]의 존엄을 굽혀 박사(博士)에게 나가니 옷은 유복(儒服)을 입었다. 주선(周旋)·읍손(揖遜)하는 사이에 엄연(儼然)한 어른의 규도(規度)를 익히게 되고, 상하(上下)에서 토론할 즈음 뜰에 가득한 관청(觀廳)들을 용동(聳動)케 되리라. 이는 바로 학업을 숭상하고 스승과 친하는 첫걸음이요, 또한 백성을 교화하고 순속(淳俗)을 이룸도 여기에 달려 있다.
쇄소(灑掃)·응대(應對)에서 미루어 가면 치국 평천하(治國平天下)의 경지에 이를 수 있고, 학문과 사변(思辨)에서 다져 나오면 정일(精一)한 심법(心法)도 이어받을 수 있다. 열성조(列聖朝)에서 일찍이 행하셨던 바이니 옛것을 따르는 이장(彝章)이라 할 수도 있으나, 지금이 어떠한 때이던가? 실로 전고에 없는 경사인 것 같구나. 나의 마음은 이미 기쁨에 넘쳐 있으니, 군정(群情)도 모두 즐거워 함을 볼 수 있다. 오늘 새벽으로부터 그 이전의 잡범(雜犯)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죄를 면제해 주고 벼슬이 있는 자는 각각 한 자급(資級)을 올려 주되 자궁(資窮)090)  인 자는 대가(代加)091)  한다. 아! 삼선(三善)092)  을 모두 얻었으니, 어찌 한때의 감격한 일뿐이겠는가? 백록(百祿)이 다 모였으니 만세토록 태평의 기업(基業)을 열었다. 그래서 이렇게 교시(敎示)하노니, 생각건대 모두들 자세히 앎이 마땅하다."
하였다. 【대제학 이병상(李秉常)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41책 55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53면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국왕(國王) / 사법-행형(行刑) / 어문학-문학(文學)


[註 083] 이극(貳極) : 왕세자.[註 084]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의 세 왕조.[註 085] 원사(元嗣) : 원자(元子).[註 086] 진색(震索) : 《주역》 진괘(震卦) 상륙(上六)의 효사(爻辭). 장자를 얻음을 뜻함.[註 087] 이위(离位) : 밝게 서로 계승하는 자리로, 왕세자를 뜻함.[註 088] 기억(岐薿) : 뛰어나게 영리함.[註 089] 주연(冑筵) : 서연(書筵).[註 090] 자궁(資窮) : 품계(品階)가 다 되어 다시 더 이상 올라갈 자급(資級)이 없이 되는 것. 곧 당하관(堂下官)의 최고위(最高位)에 있는 것을 이름.[註 091] 대가(代加) : 품계를 올려 줄 사람을 대신하여 그 아들·사위·동생이나 조카들에게 대신 품계를 올려 주던 일.[註 092] 삼선(三善) : 세 가지 착한 일. 즉 부자(父子)의 도(道), 군신(君臣)의 의(義), 장유(長幼)의 예절.

 

3월 28일 정해

지돈녕(知敦寧) 조상경(趙尙絅)이 시골에서 명을 받들고 올라와 처음으로 출사(出仕)하였다. 이에 앞서 조상경이 유작(柳綽)의 소로 인하여 결심을 하고 물러갔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조상경의 아들 조엄(趙曮)이 입학 집사(入學執事)로서 입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참소한 말을 곧이 듣지 않았는데도 너의 아버지는 나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더냐? 요사이 내가 비록 신료(臣僚)들을 접견하지는 아니하나, 너의 아버지가 오면 당장 소견(召見)하겠다."
하고, 이어서 돌아가 이 전교를 전하라 하니, 조상경이 드디어 도성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임금이 그를 소견(召見)하고 위유(慰諭)하여 힘써 머무르도록 하고 이어 어제(御製) 칠언시(七言詩) 1절(絶)을 내렸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당인(黨人)의 협잡하는 뜻을 환하게 알면서도, 이제야 풀도록 타이르니 늦었다고 하겠구나.[洞察黨人挾雜意 于今諭釋可云遲]’라고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머무르고 싶으면 가지고 가고 돌아가고 싶으면 도로 바치도록 하라."
하니, 조상경이 감격하여 명을 받들고 ‘감히 돌아가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대개 조상경은 임금의 특별한 지우(知遇)를 입어 시종 권우(眷遇)함이 이와 같았다.

 

찬선(贊先) 어유봉(魚有鳳)에게 입시를 명하였다. 임금이 어유봉이 대례(大禮)에 입참했다 하여 은총 어린 유시를 내렸다. 어유봉이 언로(言路)를 열고 신료(臣僚)를 접견하도록 반복하여 진계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산야(山野)에 숨어 있던 사람이 경전(經傳)을 인용하여 나를 면려하니, 나의 마음에 느끼어 깨달음이 있다. 마땅히 힘써 그 말에 따라 일을 살피고 품지(稟旨)하여 명령하는 것을 전례대로 거행하겠다.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찬선이 만약 조금이라도 머물러 준다면, 내가 마땅히 태학에 친림(親臨)하여 삼로 오경(三老五更)093)  의 예를 행하여서 유생들로 하여금 용동(聳動)하게 하겠다."
하니, 어유봉이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사양하였다. 임금이 식물(食物)과 시탄(柴炭)을 실어다 주라고 명하고, 이미 예조로 하여금 알성(謁聖)과 시학(視學)의 의절(儀節)을 강구하여 정하라고 명하였다.

 

홍중효(洪重孝)를 정언으로, 이명곤(李命坤)을 교리로 삼았다.

 

3월 29일 무자

임금이 대신과 경재(卿宰)를 인견하였다. 먼저 당습을 시원히 고치고 인협(寅協)하여 다같이 충정(忠貞)하라는 뜻으로 유지를 내려 모든 신하에게 보이게 한 뒤에 비로소 입시를 명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아까 성교를 받들었는데, 요(堯)·순(舜) 같으신 마음이 사표(辭表)에 넘쳐흘렀으나, 잘 받들어 모시지 못한 것은 모두 신 등의 죄입니다."
하고, 이어 하향(夏享)의 섭행(攝行)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명지도(鳴智島)에서 소금 굽는 일을 민응수(閔應洙)와 박문수(朴文秀)에게 나누어 관장하게 하되 그들로 하여금 요량해 구획(區劃)하게 하여 재용(財用)이 넉넉해지는 방도로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유신(儒臣)을 머물도록 면려(勉勵)하여 몸소 시학(視學)을 행하려 하시니, 매우 성대한 예절입니다. 밖에 있는 유신으로 심육(沈錥)·박필주(朴弼周) 같은 이도 의당 초치하여 시학에 동참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여기(癘氣)가 치성(熾盛)하여 여제(癘祭)를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3월 30일 기축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의 직질을 특명으로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올려 주었다. 이어 수서(手書)로 하유(下諭)하기를,
"시학이 가까이 다가왔고 강연(講筵)이 다시 열리는데, 나의 양덕(涼德)을 돕는 일은 오로지 유림(儒林)에게 달려 있다. 성심으로 경을 보고 싶어서 수서(手書)로 안거(安車)에 대신하니, 경은 모름지기 번연히 오라."
하였고, 또 심육(沈錥)에게 수서를 내리기를,
"계방(柱坊)094)  에 있을 때부터 깊이 알고 있었다. 선상(先相)095)  에게 전일 명에 응하라고 권칙(勸飭)한 일이 마치 어제와 같다. 가령 선경(先卿)이 있었다면 그 마음이 어찌 지금이라고 해서 달라졌겠는가? 도성에 들어와 나의 양덕(涼德)을 보필하도록 하라."
하였으니, 송인명의 말에 따른 것이다.

 

예조에서 왕세자 입학의 경과(慶科)를 설행할 것을 품청(稟請)하니, 정시(庭試)를 행하라고 명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