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6권, 영조 18년 1742년 7월

싸라리리 2025. 9. 26. 09:03
반응형

7월 1일 무오

이형만(李衡萬)을 정언(正言)으로, 서종옥(徐宗玉)을 형조 판서(刑曺判書)로, 엄우(嚴瑀)를 설서(說書), 권우(權祐)를 장령(掌令), 조원명(趙遠命)을 부제학(副提學)으로, 박필부(朴弼傅)를 집의(執義)로, 이수해(李壽海)를 사서(司書)로, 민백행(閔百行)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4일 신유

임금이 필선(弼善) 이연덕(李延德)에게 묻기를,
"지난번 남원군(南原君)164)  의 사행(使行) 때와 이번에 이광덕(李匡德)이 돌아올 때 모두 연석(燕石)을 구해 가지고 왔는데, 악기(樂器)에 쓸 수 있겠는가?"
하니, 이연덕이 말하기를,
"신(臣)이 전악(典樂)에게 들으니, 오음(五音)은 모두 돌에서 나온다고 하였는데, 전기(傅記)에는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전악을 부르라 명하고 관(管)이 없는 포(匏)165)  를 내보였는데, 그 위면과 바닥에 모두 구멍이 있었다. 이연덕이 말하기를,
"이것은 생황(笙簧)과 다른데, 신은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전악에게 묻자, 전악이 말하기를,
"우(竽)인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소(簫)에도 역시 12율(律)이 있는데, 청음(淸音)은 생황과 같으니, 경전(經傳)에 실린, ‘모양이 봉(鳳)의 날개와 같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세종조(世宗朝)에는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찬란하게 크게 갖추어졌으나, 지금은 아악(雅樂)이 거의 다 없어졌으니, 이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일 뿐이다. 오늘 너를 부른 것은 이정(釐正)하는데 뜻을 두고 있기 때문이니, 너는 모름지기 잘 바로잡아 교사(郊祀)·묘사(廟祀)에 아악이 끝의 조리(條理)를 이루는 공효(功效)가 있도록 하라."
하니, 이연덕이 말하기를,
"성음(聲音)은 정치와 서로 통하는 법입니다. 무릇 여러 아악을 어찌 제왕(帝王)이 유의해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마는, 음악의 근본은 덕(德)에 있으니, 전하께서 요(堯)임금이 극명(克明)한 것과 순(舜)임금이 윤협(允協)하신 것처럼 덕에 힘쓰신다면 천지의 조화가 저절로 서로 응하게 되어 봉황(鳳凰)이 와서 춤추는 아름다움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바가 질박하다. 지금 나에게 진계(陳戒)한 것으로써 나의 원량(元良)을 보도(輔導)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5일 임술

정언(正言) 민수언(閔洙彦)이 재이(災異) 때문에 상소하여 진계(陳戒)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해에는 바닷물이 붉게 썩어들어가고 강줄기가 끊어져 말라 붙었는가 하면 7월에 큰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리고 올 봄에는 요사스런 혜성이 나타났고 서리와 우박의 변괴가 있었으니, 지난 역사에서도 드문 바였습니다. ‘그런데 재이(災異)’ 두 글자는 사륜(絲綸)의 사이에서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간혹 이것을 가지고 경계의 말씀을 올리는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힘써 유의하겠다.’라는 하교가 언제나 예사 비답(批答)이 되고 말았고, 성궁(聖躬)을 책망하고 구언(求言)하는 뜻은 또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하늘에 대해 성실하게 응답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아! 언로(言路)가 통하고 막힘은 실로 국가의 흥망 성쇠에 관계되는 바이며, 지금 말하는 자들은 언로가 열리지 아니함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신처럼 꺾여 쇠약한 사람은 본디 족히 책망할 것도 없지만, 비록 조금이나마 기개(氣槪)가 있어 강직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두려워 입을 다물고 말하는 것을 조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곧은 말을 하는 기풍은 대각(臺閣)의 선단에서 이미 사라져 버렸고, 말이 없어 적막하다는 한탄이 여러 차례 연중(筵中)에서 나왔으니, 세도(世道)의 쇠퇴가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그윽이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개도(開道)하시는 바가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하여 그런 것인가 합니다.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이래 말 때문에 죄를 얻은 사람이 무릇 몇 사람입니까? 꾸짖어 내쫓는 일이 앞뒤로 서로 이어져 심지어 삼목(三木)166)  ·낭두(囊頭)167)  까지도 또한 어렵게 여기지 않으시니, 천둥 벼락 같은 위엄에 먼 곳에 있는 사람이건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이건 두려워 벌벌 떨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지나간 일이 된 뒤에도 여전히 거두어 서용(敍用)함에 인색하시고, 드러나게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셨습니다. 또 혹시라도 지나간 일을 다시 제기할 경우에는 마침내 관대하게 보아넘기는 뜻이 부족하였습니다. 대저 영화(榮華)를 탐하고 죄를 두려워함은 인지상정입니다. 지금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영화를 누리고 말을 하는 자는 죄를 얻으니, 죄를 두려워하여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또한 어찌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겠습니까? 요(堯)·순(舜)의 시대에도 오히려 비방목(誹謗木)168)  이 있었는데, 요·순을 비방함은 미친 것이 아니면 도리에 어긋난 짓일 뿐이지만 오히려 이로써 죄를 주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사목(四目)의 밝음과 사총(四聰)의 통달함이 어찌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널리 받아들이시는 도량을 더욱 넓히시고, 전후에 걸쳐 말한 것 때문에 죄를 얻은 사람들에게 그 좌죄(坐罪)된 바의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광탕(曠蕩)의 은전을 적절히 베풀어 주셔서 개도(開導)하는 방도를 다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 임금의 이목(耳目)의 관원이 되어 공정한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고 공정한 마음으로 남을 공척(攻斥)한다면, 위에 있는 사람이 어찌 그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관명(官名)을 빌려 사사로운 짓을 행하고 기회를 타서 경알(傾軋)하니, 조왕(錯枉)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신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삭직(削職)은 가볍게 감률(勘律)한 경우이니 검률한 것이 가벼웠던 것이다. 탕척(蕩滌)하려고 한 자는 그 어떤 사람이며, 이른바 가벼움을 보였다고 하는 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끝내 깨닫지 못하겠다."
하였는데, 민수언이 인피(引避)하지 않으니, 임금이 특별히 체직(遞職)시켰다.

 

약방(藥房)에서 진대(診對)하였다. 검열(檢閱) 조명정(趙明鼎)이 아뢰기를,
"신(臣)이 지난번 적상 산성(赤裳山城)에 갔더니, 의승(義僧)을 혁파(革罷)한 뒤로 중들이 피잔(疲殘)해져서 거의 지탱하여 보전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다른 산성의 의승은 오히려 혁파할 수 있지만, 적상 산성은 사체(事體)가 자별하니 의승이 번(番)을 서는 일을 복구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였다. 조명정이 또 아뢰기를,
"사고(史庫)의 참봉(參奉)은 전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있으며, 또 매달 돌아가며 차임(差任)하기 때문에 폐해(弊害)를 갖가지로 끼치고 있습니다. 청컨대 식견이 있는 선비를 가려서 차임하게 하고, 다시는 자주 갈거나 바꾸지 않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도신(道臣)에게 신칙하도록 명하였다.

 

7월 6일 계해

김한철(金漢喆)을 헌납(獻納)으로, 정석오(鄭錫五)를 우참찬(右參贊)으로, 남태제(南泰齊)를 교리(校理)로, 낙창군(洛昌君) 탱(樘)을 동지 겸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로, 서명구(徐命九)를 부사(副使)로, 이명곤(李命坤)을 서장관(書狀官)으로, 김윤(金潤)을 전라 수사(全羅水使)로 삼았다.

 

부수찬(副修撰) 이천보(李天輔)가 대신(大臣)의 차자(箚子)로 인해 상소하여 진변(陳辨)하였는데, 헐뜯고 배척하는 말이 많았다. 이보다 앞서 이천보가 번곤(藩閫)이 사사로이 돌이다니는 잘못을 논하자 대신이 상소하여 변명할 일이 있었는데, 이천보가 또 상소하여 공척(攻斥)하니, 임금이 사체(事體)가 미안하다 하여 비답을 내려 유시(諭示)하였다.

 

7월 11일 무진

승지(承旨) 이선행(李善行)이 액례(掖隷)가 어떤 사람에게 구타당하였다 하여 그 구타한 사람을 잡아 가두었다가 곧 풀어주었는데, 사알(司謁)이 방자하게도 수본(手本)169)  을 올린 까닭에 이선행이 상소하여 변명하였다. 임금이 그 상소를 도로 돌려주고 엄중하게 하교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언(正言) 이형만(李衡萬)이 상소하기를,
"자질구레한 일 때문에 부억(扶抑)하는 하교가 있었으니 가까운 반열의 신하를 대우하고 근시(近侍)의 기습을 억누르는 뜻이 아닙니다. 청컨대 비망기(備忘記)를 도로 거두어 성덕(聖德)이 빛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講)하였다. 강하기를 마치고 이어서 여러 신하들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임금이 백성의 고통과 농사의 형편을 하문(下問)하자, 승지(承旨) 남태온(南泰溫)이 아주 상세히 대답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신료(臣僚)를 자주 인접(引接)하시고 백성의 일을 널리 하문하시면 상하간의 정지(情志)가 막힘없이 소통될 것이니, 도움됨이 넓고 클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묘사 유파(卯仕酉罷)170)  에 대해 신칙하였었다. 묘사 유파가 되는 날은 비록 뜰을 소제하는 등의 일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효과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임금이 신료를 자주 인접하는 일이야 말해 무엇하랴? 나는 춘궁(春宮)에 있을 때부터 자못 글 읽기를 좋아하였는데 춘궁에서는 오래 전부터 석강(夕講)하는 법이 없었기에 내가 처음으로 열었던 것이다. 지난 번에 지은 심잠(心簪)과 서문(序文)은 모두 시상(時象)으로써 뜻을 붙인 것이었다. 옛날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께서는 도(道)를 행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글을 지어 후세에 전하였는데, 나는 비록 군사(君師)의 지위를 얻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도를 행할 가망이 없고 세도(世道)를 만회할 수도 없으니, 글을 짓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나는 무신년171)   이후로 하루도 편안하게 잠을 잔 적이 없었고 걸핏하면 옷도 벗지 못하였으며, 단지 비와 바람이 때에 어긋나고 백성들의 일에 어려움이 많았기에 한 생각하나마 혹시라도 해이해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일찍이 중관(中官)에게 비국(備局)의 긴요한 공사(公事)와 강변(江邊)의 시급한 장계(狀啓)가 있으면 비록 한밤중이라도 즉시 주달(奏達)하게 했던 것이다."
하였다.

 

7월 12일 기사

박사창(朴師昌)을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전 감사(監司) 김치후(金致垕)가 정주 목사(定州牧使)로 있다가 이배(移拜)되었는데, 미처 부임하기 전에 병(病)으로 죽었으므로, 박사창으로 대신케 한 것이다. 유수(柳綏)·구택규(具宅奎)를 승지(承旨)로, 조명교(曺命敎)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권신(權賮)을 장령(掌令)으로, 조경(趙擎)을 정언(正言)으로, 정휘량(鄭翬良)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북도(北道)의 범월(犯越)한 자는 지금 사감(査勘)함이 마땅하고,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는 법에 비추어 볼 때 파직(罷職)해야 마땅합니다."
하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범월한 백성들에게는 벌로 형률(刑律)을 베푸는 것이 마땅하나, 피국(彼國)에서 이미 호생지덕(好生之德)을 보였으니, 우리 나라에서는 도신(道臣)·수신(帥臣)에게 파직하는 율(律)을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함경도(咸鏡道) 전 감사(監司) 박문수, 전 북병사(北兵使) 윤광신(尹光莘), 무산 부사(茂山府使) 이태상(李泰祥)을 모두 파직하고, 파직했다고 회자(回咨)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하교하기를,
"대정(大政)이 멀지 않았는데, 병판(兵判)의 체임(遞任)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판(吏判)과 병판이 하찮은 허물로 체임되었지만, 전에도 도로 잉임(仍任)시킨 예(例)가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시법(諡法)은 엄중(嚴重)한 것이므로 여러 번 고칠 수가 없습니다. 고(故)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는 역명(易名)172)  하는 법에 있어서 그 ‘충(忠)’을 전혀 모른체할 수 없어서 과연 ‘충정(忠貞)’으로 시호(諡號)를 내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듣자 하니, 그 자손들이 ‘충(忠)’자는 그가 훈록(勳錄)을 사양한 본래 뜻에 어긋남이 있다 하여 연시(延諡)173)  하지 않고자 한다고 합니다. 그 소원대로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뜻에도 또한 고집할 만한 바가 있다."
하고, 시호를 고치도록 허락하였다.

 

7월 13일 경오

한림(翰林)의 권점(圈點)을 받은 사람들을 소시(召試)하였다. 이때 권점을 받은 사람은 이의중(李毅中)·조중회(趙重晦)·신위(申暐) 등이었는데, 모두 소명(召命)을 어기고 나가지 않았으며, 소명에 응한 사람은 단지 유언호(兪彦好) 한 사람뿐이었다. 임금이 엄지(嚴旨)를 내려 말하기를,
"새로 사진(仕進)하는 소관(小官)이 어찌 감히 나오지 않는단 말인가? 다시 천거하여 권점(圈點)하고 강(講)으로 시험을 보였으니,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다. 의리에 무슨 어긋남이 있는가? 그런데도 감히 정식(定式)에 불만을 품고 새 법(法)을 저희(沮戱)하여 매번 소시(召試) 때만 소명을 어기는 것을 일삼고 있다. 임금이 정령(政令)을 소관이 맞서 겨룸으로 인해 겨우 한 번 시행되고는 곧 중지되었으니, 오늘날 조선(朝鮮)은 ‘신하는 있고 임금은 없다.’고 할 만하다. 우선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그리고 만약 전처럼 맞서 겨루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중벌(重罰)로 다스릴 것이다."
하였다. 이의중 등이 그런데도 오히려 소명에 응하지 아니하자, 임금이 ‘나라는 나라답지 않고 임금은 임금답지 않다.’며 엄지(嚴旨)를 내려 준절(峻切)히 책망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부형(父兄)이 된 자가 그 자제(子弟)로 하여금 제멋대로 굴도록 내버려 두어 군부(君父)의 법령(法令)과 맞서 겨루도록 만들었다. 비록 한밤중이 되었더라도 소시(召試)하였던 자의 성적을 매겨 이의중·유언호 두 사람을 뽑고는 명하기를,
"이후로 본관(本館)에서 회권(會圈)할 경우는 구례(舊例)에 의거해 분향(焚香)하도록 하고, 관각(館閣) 회권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미 사관(史官)이 없으니, 분향의 규례를 논함은 부당하다."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명령은 믿음성이 있도록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권(翰圈)의 일은 이제 다른 염려가 없으나 이조 낭관(吏曹郞官)의 변통(變通)은 아직도 진선(盡善)하지 아니한 것이 있으니, 뒷날에 능히 잘 준수(遵守)하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지금 소상히 하려 하는 까닭이다. 비록 한림(翰林)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당초에는 권점의 취사(取捨)가 있었고, 뒤에는 불러 시험보이는 것의 입락(立落)이 있으니, 소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단지 법이 오래된 뒤에 사의(私意)가 점차 생겨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니,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이미 대신(大臣)을 시관(試官)으로 삼았는데, 대신이 아무리 형편 없을지라도 어찌 사정(私情)을 쫓아 법을 무너뜨리는 데에 이르겠습니까? 대개 대신은 인군(人君)이 대우하는 바에 다름이 있으니, 의심하면 임용하지 말아야 하고 임용했으면 의심하지 말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소관(小官)의 경우에 있어서는 일에 따라 칙려(飭勵)하여 사의(私意)를 엄격하게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수찬(修撰) 윤광의(尹光毅)가 말하기를,
"대신의 말은 실수한 것입니다. 사의가 있으면 대신이나 소신(小臣)이나 모두 칙려함이 마땅하고, 사의가 없으면 대신이나 소신이나 모두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대신이라 해서 유독 칙려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윤광의의 말이 질박하구나."
하였다. 윤광의가 또 말하기를,
"일전에 이천보(李天輔)가 우하형(禹夏亨)을 논척(論斥)하였는데, 신은 그 사람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건대, 삼사(三司)의 신하가 일개 변수(邊帥)를 논핵(論劾)하자 대신이 영구(營救)하여 마침내 사조(辭朝)도 하지 아니한 채 부임하게 했으니, 신은 개연스레 여기고 있습니다. 신은 북병사(北兵使) 우하형을 체직(遞職)시켜 삼사의 언의(言議)를 신장시켜야 옳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은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이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탐리(貪吏)를 징계하는 법이 요사이 점차 해이해지고 있다. 며칠 전에 윤식(尹植)이 대망(臺望)에 들었었는데, 이와 같이 한다면 박치원(朴致遠)·정택하(鄭宅河)의 무리도 또한 장차 차례차례 검의(檢擬)될 것이니, 장리(贓吏)가 어떻게 조금이나마 징즙(懲戢)되겠는가? 무릇 수령(守令)으로서 장오(贓汚)에 관련된 자를 금고(禁錮)하였으니, 천주(薦主)로서 아직까지 감죄(勘罪)되지 아니한 자를 전랑(銓郞) 김상적(金尙迪)으로 하여금 낱낱이 조사해서 밝혀내게 하라. 또 일찍이 법종(法從)을 거친 사람으로서 장오죄(贓汚罪)를 범한 사람은 금고를 풀어 주었다고 하더라도 다시는 청직(淸職)에 복직시키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요사이 늦더위가 갈수록 혹독하여 비록 넓은 집안에 있어도 오히려 찌는 듯 무더운데, 저 옥중(獄中)의 죄수가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느냐? 생각해 보니, 측은하다."
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전옥(典獄)에 가서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도록 하였다.

 

7월 13일 경오

정언 조경(趙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臣)은 고(故)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의 시호(諡號)를 바꾸라는 명(命)에 대해 적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저 최규서의 나라를 위한 정충(貞忠)은 세상이 모두 다 아는 바이고, ‘일사부정(一絲扶鼎)’이란 포장(褒奬)과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시호를 내리라는〉 명령은 성의(聖意)를 둔 곳이 있는 것입니다. 상신(相臣)의 겸손한 마음으로 생전에 비록 공훈(功勳)을 스스로 차지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사후에야 어찌 그 충정(忠貞)을 전혀 모른체할 수가 있겠습니까? 시법(諡法)이 이미 엄중(嚴重)하니, 그 자손들의 소원 때문에 고치는 바가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나라의 체통과 시법은 결단코 이와 같을 수 없으니, 신은 그 명(命)을 정지시켜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영남(嶺南)의 번얼(藩臬)은 직임이 가볍지 않고 무거운데, 새로 제수된 감사(監司) 박사창(朴師昌)은 자질과 명망이 평소 가벼운데다 이력(履歷)이 또 얕으니, 체직(遞職)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 시호에 관한 일은 대체(大體)가 옳다. 하지만 이미 그 뜻을 이루어 준 것이니, 어찌 자구(字句)를 아끼겠느냐? 영백(嶺伯)의 일에 관해서는 이미 주군(州郡)을 거쳤으니, 어찌 이력이 필요하겠는가?"
하고,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조경이 마침내 인피(引避)하였으나, 또한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뒤에 연진(筵診) 때 도제조(都提調)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고(故) 최 봉조하(崔奉朝賀)는 신이 일찍이 존상(尊尙)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그 자손들의 개인적인 소원 때문에 망령되게 시호를 바꾸는 것이 마땅하다고 진달하였습니다만, 고(故) 상신(相臣)이 사양한 바는 단지 책훈(策勳)뿐 이었으니, 죽은 뒤의 역명(易命)에 ‘충(忠)’이니, 정(貞)’이니 하는 것은 책훈과는 다름이 있으므로 그 아들과 손자된 자들이 이미 사양할 의리가 없는 것입니다. 또 본가(本家)의 뜻으로도 이미 사양할 의리가 없는 것입니다. 또 본가(本家)의 뜻으로도 이미 정한 시호를 가볍게 고치는 것은 또한 나라의 체통을 손상시키는 것이니, 조경의 사체(事體)로써 말한 것이 역시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충(忠)’ 자와 ‘정(貞)’ 자는 고 상신에게 아주 잘 들어맞는 글자이다. ‘일사부정(一絲扶鼎)’ 네 글자도 어찌 ‘충(忠)’ 자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에는 사양할 만한 의리가 없으니, 이미 정한 시호를 고치기 어렵다. 전에 의정(議定)한 시호를 그대로 하라."
하고, 즉시 선사(宣賜)하도록 하였다.

 

7월 15일 임신

부수찬(副修撰) 이천보(李天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엊그제 소시(召試) 때 비망기(備忘記)의 사지(辭旨)에 또 그 부형(父兄)에게까지 미친 것이 있었으니, 전하의 지나친 거조(擧措)는 어찌하여 그리 자주 반복되며 그치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즉시 시험에 나아가지 아니한 여러 사람들에게 명(命)에 응하도록 독촉하는 것은 곧 일개 유사(有司)의 일일 뿐이니, 성상께서 깊이 염려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논한다 할지라도 그 자제(子弟)의 죄로써 부형에게까지 미치는 것이 어찌 왕정(王政)이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그 사람이 성교(聖敎)가 자신의 부형에게까지 미친 것을 듣게 된다면 반드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고 기가 꽉 막혀 죽으려 해도 죽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그 부형이 이 세상에 있지 아니한 경우는 그 마음의 아픔과 낙담이 또 어떠하겠습니까? 한마디 말의 실수를 사관(史官)이 기록하여 사방에 전파될 것이니, 작을 일이 아닙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소시(召試) 때의 하교(下敎)는 비록 중도에 지나쳤지만, 당습(黨習)에 물든 사람에게 어찌 신칙(申飭)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미 하교한 뒤에는 임금이 신칙하고 아비가 훈계하여 다시는 방자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하려 한 것이다."
하였다.

 

장령(掌令)        권신(權賮)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 언로(言路)가 막혀 있음을 실로 성조(聖朝)의 고질적인 폐단이 됩니다. 정실(鄭實)이 엄교(嚴敎)를 받든 것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여정(輿情)을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이쪽 편에 어떤 일이 있으면 괴격(乖激)인가 의심하고 어떤 말이 저쪽 편에서 나오면 당동 벌이(黨同伐異)인가 의심하시므로 그릇 억측하고 거꾸로 헤아림이 전하의 마음을 동여매고 있습니다. 방촌(方寸)174)                   가운데 본체(本體)가 이미 가리워졌으니, 어떻게 넓고 좁음을 재량해서 처리하여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한 차이를 없게 할 것이며, 거조(擧措)가 마땅함을 얻어 사방의 청문(聽聞)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남몰래 엿보는 자들은 그 간교한 짓을 마음대로 하고 영합(迎合)하는 자들은 그 틈새로 끼어들고 있으니, 조용히 있으려 하면 할수록 더욱 시끄러워지고 제거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왕성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지난날 그러했던 명백한 효험인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고개를 돌리시고 전철(轉轍)을 바꾸어 건극(建極)의 다스림을 이루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신(臣)은 말 때문에 죄를 얻은 사람을 모두 석방시킨 뒤에야 곧은 말이 날마다 들리고 성덕(聖德)이 더욱 빛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 직임을 맡은 사람은 ‘잘못되었다.’라고 하는 하교가 있으면 스스로 인피(引避)해야 마땅한데, 의기양양하게 소장(疏章)을 올렸으니, 고례(古例)가 너에게서 쓴 듯이 없어졌다."
하였다. 대개 권신이 일찍이 정원(政院)과 서로 옥신각신한 적이 있었는데, ‘잘못되었다.’는 하교를 받들고도 권신이 인혐(引嫌)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비답이 있었던 것이다.

 

7월 16일 계유

올해 제도(諸道)의 수군(水軍) 조련(操鍊)을 정지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올해 큰 여역(癘疫)이 발생해 사망한 군민(軍民)이 자그마치 수십만 명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이보다 앞서 우리 나라의 사행(使行)이 연경(燕京)에 갔을 때 마침 옥대(玉帶) 하나를 가지고 와서 팔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옥의 품질과 조각한 것을 보건대 분명히 명(明)나라의 유제(遺制)였으므로, 역관(譯官) 한중강(韓重綱)이란 자가 거금을 주고 사가지고 왔으나 감히 여염(閭閻)에 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연신(筵臣)의 말로 인해 가져오라고 명하고, 논상(論賞)의 타당성 여부에 대한 하교가 있었다. 이때에 와서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가자(加資)는 지나친 것 같고, 그냥 가지는 것은 옳지 못하니, 지부(地部)175)  로 하여금 그 값을 후하게 지급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7월 17일 갑술

다시 박문수(朴文秀)를 병조 판서로 삼았으니,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김광세(金光世)·원경순(元景淳)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7월 18일 을해

정언(正言) 조경(趙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릇 무신년176)  의 역옥(逆獄)에 관련된 자들이야말로 어떠한 간범(干犯)입니까? 그런데 윤수(尹邃)는 가볍게 편배(編配)시키고 권섭(權攝)은 아직까지도 왕법(王法)에서 벗어나고 있으니, 인심(人心)은 세월이 오랠수록 더욱 격분하고 있습니다. 광탕(曠蕩)의 은택(恩澤)을 어찌 이 무리에게 베풀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전 전라 감사(全羅監司) 권적(權𥛚)은 느닷없이 품질(稟秩)에 두었습니다. 대신(大臣)의 진백(陳白)으로 인하여 비록 파직(罷職)시키기는 했지만 그 비호한 죄는 결단코 가벼운 감률(勘律)에 그칠 수 없습니다. 신은 권적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 것을 청합니다. 이광의(李匡誼)의 죄는 관계된 바가 지극히 무거우니, 도배(島配)의 율(律)은 실로 실형(失刑)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금오(金吾)의 회계(回啓)에서는 이에 감히 곧장 육지로 내보낼 것을 청하였습니다. 신은 판의금(判義禁) 김시형(金始炯) 또한 파직해야 마땅하고, 이광의를 육지로 내보내라는 명을 정지하여 제방(隄防)을 엄격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가(朝家)의 상벌(賞罰)은 마땅히 엄중함을 보여야지 전도(顚倒)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는 북변(北邊)에서 범월(犯越)한 사건 때문에 특별히 감률(勘律)하여 파직하라고 명하셨는데, 삼가 듣건대, ‘대신(大臣)이 전례에 의하여 잉임(仍任)시킬 것을 진달하였고 곧 복직시켜 그대로 제수(除授)하는 데에 이르렀다.’고 하니, 신은 그 전례가 과연 꼭 적합한가 아니한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번의 범월은 실로 국가의 수치이니 그 당시의 도신(道臣)을 며칠간 감률·파직하는 것으로는 그 죄와 잘못을 징계하고 변금(邊禁)을 엄하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잠시 파직했다가 다시 잉임시키는 것은 사체(事體)로 볼 때 매우 구차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지금부터 이후로는 무릇 상벌을 내릴 즈음에는 한결같이 엄중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막중한 장임(將任)의 직무를 어찌 비워둘 수 있겠는가? 여러 고례(古例)에 견주어 보더라도 조금 늦은 것이다. 그 나머지 진달한 바는 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7월 20일 정축

약방(藥房)에서 진대(診對)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재로(金在魯)가 날이 덥다 하여 종묘(宗廟)의 전알례(展謁禮)와 사직(社稷)의 친제(親祭)를 정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라의 소중한 바가 종묘와 사직에 있는데, 내가 직접 행하지 못한 것이 이미 3년이나 되었다. 그러고서도 어떻게 신명(神明)을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결단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섭행(攝行)하게 할 수는 없다."
하였다.

 

7월 21일 무인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조경(趙擎)이 상소한 일 때문에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상께서 건극(建極)하신 다스림이 20년 동안 하루 같아 조정(調停)하고 경륜(經綸)함을 극진히 하지 않음이 아니었지만, 당동 벌이(黨同伐異)의 습관은 날이 갈수록 더욱 교묘해지고 있습니다. 총재(冢宰)177)  와 사마(司馬)178)  야말로 어떠한 중임(重任)입니까? 그런데 정주(政注)를 살펴보아 흠이 없으면 터무니없는 말을 꾸며 내쫓고, 장재(將才)를 아깝게 여겨 잉임(仍任)시키면 전례(前例)까지 아울러 공격합니다. 그리하여 공적인 일이라 핑계하여 사사로운 일을 경영하며 다투어 빼앗은 것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조정의 논의가 이처럼 공정하지 못하니, 이것은 신이 능히 백료(百僚)를 감독해 바로잡고 온 세상을 진압하고 복종시키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젊은 대관(臺官)이 고례(古例)를 몰랐던 것이다. 비록 직접 당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혐의하지 아니할 것인데, 하물며 보상(輔相)의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병조 판서 박문수 역시 상소하여 의리를 끌어대니, 비답하기를,
"이미 상신(相臣)에게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講)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나라의 명제(明帝)는 제왕(帝王)이 되었을 때부터 이미 스스로 총명함을 자랑할 뜻이 있었다. 가령 총명함이 있다 하더라도 이미 스스로 자랑하고자 했다면 나머지는 볼 것도 없는 것이다."
하였다. 강관(講官)이 요(堯)·순(舜)의 사목(四目)이 밝고 사총(四聰)이 통달했던 뜻을 부연해서 아뢰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7월 22일 기묘

동의금(同義禁) 이수항(李壽沆)이 조경(趙擎)의 상소로 인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처럼 대사령(大赦令)이 내린 때를 당해서는 광탕(曠蕩)을 주로 하는 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민창수(閔昌洙)·이광의(李匡誼)처럼 죄명이 비록 무거운 자라도 아울러 모두 육지로 내보내게 했습니다만, 이것은 본디 수당(首堂)이 대료(大僚)에게 가서 상의했던 것이었으므로 신(臣) 또한 한마디 말도 서로 논란(論難)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관(臺官)이 상소하여 수당을 견책(譴責)할 것을 청하면서 유독 이광의의 감등(減等)만을 들어 죄안(罪案)으로 삼았으니, 그 또한 이상합니다. 이미 수당을 배척하였으니 신이 어찌 감히 죄에서 벗어난 것을 요행스럽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 조경도 또한 이수항의 상소로 인해 인피(引避)하였다.

 

7월 23일 경진

교리(校理) 남태제(南泰齊)와 부수찬(副修撰) 원경순(元景淳)이 조경(趙擎)의 처치(處置)를 맡았는데, 남태제가 조경을 낙과(落科)에 두고자 하니 원경순이 이론(異論)을 세워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 진소(陳疏)하고 같이 나가게 되었는데, 임금이 모두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임금이 필선(弼善) 이연덕(李延德)을 불러 보고 묻기를,
"생황(笙簧)과 소(簫)를 부는 방법을 요사이 이미 이정(釐正)하였는가?"
하니, 이연덕이 말하기를,
"근래에 자못 실마리를 찾기는 했지만 아직도 미비된 점이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연덕은 사람됨이 담박하고 안정되어 있어 반드시 모든 일에 잘 궁리(窮理)할 것이다. 악장(樂章)의 절주(節奏)도 또한 모두 상세히 알고 있는가?"
하니, 이연덕이 말하기를,
"젊었을 때 마침 율려(律呂)에 관한 여러 책을 보아 차례를 대략 알고는 있습니다만, 감히 상세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야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거칠고 천박한 일이라 할지라도 지극한 이치가 존재하지 않음이 없다. 우리 나라의 언서(諺書)도 모두 방언(方言)으로 해석하여 막히는 곳이 없으니, 여기에도 또한 지극한 이치가 있는 것이다."
하니, 이연덕이 말하기를,
"언서 역시 음률(音律) 가운데서 나온 것입니다. 율(律)에 12율이 있으니, 언서도 또한 마땅히 12음(音)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언문(諺文)은 1행(行)이 각각 11자(字)로 두 글자가 서로 짝을 맞추어 각가 음(陰)과 양(陽)이 있습니다. 하지만 율은 마지막 음(音)에 이르러 유독 한 글자만 있고 짝이 없으니, 우리 나라의 율에 미비된 곳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어서 이연덕에게 다시 교정(校正)하라고 명하였다.

 

7월 24일 신사

밤 4경에 임금이 면복(晩服) 차림으로 인정전(仁政殿) 계단 위에 나아가 친히 사직 대제(社稷大祭)의 서계(誓戒)179)  를 의식(儀式)대로 행하였다.

 

7월 26일 계미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가을 전알례(展謁禮)를 의식(儀式)대로 행하였다.

 

임금이 태묘(太廟)에 거둥하려 하였으므로 정원(政院)에서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를 패초(牌招)할 것을 청하였으나, 박문수는 나오지 않고 그대로 대명(待命)하고 있었다. 임금이 박문수에게 와서 기다리라고 명하였는데, 칙교(飭敎)가 몹시 엄하였다. 이에 박문수가 뒤따라 도착하니, 임금이 불러들이고 매우 간곡하게 위유(慰諭)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지금 조정을 보건대, 풍습이 아름답지 아니합니다. 대훈(大訓)을 내린 뒤로는 피차간에 실제로 다툴 만한 단서가 없어져 뭇 어진 이들이 무리를 지어 같이 나아와서 나랏일을 같이 해 나갈 것을 바랐는데, 요사이 보자니 경알(傾軋)하는 풍습이 점차 자라나고 있습니다. 신이 벼슬을 떠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족히 말할 것도 못됩니다."
하고, 승지 이세진(李世璡) 또한 조경(趙擎)이 협잡(挾雜)한 정상을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결탄코 예(禮)가 아닌 것으로 신하를 부리지 않을 것이다."
하고, 이어서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명소패(命召牌)를 가져다 박문수에게 주게 하니, 박문수가 감히 다시 사양하지 못하고 받아가지고 나왔다.

 

7월 27일 갑신

간원(諫院) 【정언(正言) 남혜로(南惠老)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급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협잡(挾雜)과 경알(傾軋)은 아주 옳지 못한 데 관계되니, 청컨대 정언(正言) 조경(趙擎)을 체직(遞職)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이때 조경에 대한 처치(處置)를 옥당(玉堂)과 대간(臺諫)이 서로 미루면서 입락(立落)하려고 들지 않은 것이 벌써 며칠째였다. 임금이 승지(承旨) 홍상한(洪象漢)을 불러 보고 여러 신하들이 서로 다투며 교묘하게 회피하는 정상에 대해 물어 보고는 마침내 하교하기를,
"아! 몇 해 동안이나 고심(苦心)한 끝에 대훈(大訓)을 반시(頒示)하기까지 했지만, 조정 신하들이 따르지 아니한 채 검은 것을 희다 하고 흰 것을 검다고 하는구나. 자신에 대해서는 희다 하고 저쪽에 대해서는 검다 하면서 각자 서로 옳은 듯이 서로 이기기에 힘써 여전히 옛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의심과 경알(傾軋)은 이미 한심한 일이거니와 지금의 이 한 가지 일 또한 한결같은 옛 습관이다. 조경의 소장(疏章)은 대체(大體)로 보아서는 옳은 것이었다. 하지만 ‘협잡(挾雜)’이란 말을 쓴 것은 생각과 뜻이 없지 않았으니, 내가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비지(批旨)에 전례를 따라 유시(諭示)한 것은 대개 뜻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는 큰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니, 잉임(仍任)시키거나 체직(遞職)시키거나 전례를 따라 처치했으면 되는 것이다. 비록 열 명의 조경과 같은 무리가 나온다 할지라도 자기 혼자 일어났다 자기 혼자 사라지는 데 불과할 것이니, 무슨 이기기에 힘써야 할 것이 있겠는가? 체직시키려 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고집하고 잉임시키려 하는 사람은 이것으로 인해 이기기에 힘써 우물쭈물하면서 마무리를 짓지 못한 것이 이제까지 닷새나 되었다. 이런 하찮은 일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다른 일이야 도리어 어찌 말할 수 있겠느냐? 만약 원신(院臣)의 처치가 아니었더라면 장차 마무리될 날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신(儒臣)의 최초의 진소(陳疏)는 지극히 한심한 것이었다. 남태제(南泰齊)·원경순(元景淳)·윤광의(尹光毅) 등을 모두 파직하라. 그리고 이제 조정 신하들은 모두 이 하교를 따라 한결같이 공정한 마음으로 하고 조금이라도 협잡하지 말라. 내가 비록 살피지 않는다 할지라도 누구를 속일 수 있겠는가? 높고 높다고 여기지 말고 각자 태극(太極)180)  을 지니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8일 을유

임정(任珽)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김종태(金宗台)를 사간(司諫)으로, 이창유(李昌儒)를 정언(正言)으로, 홍득후(洪得厚)를 장령(掌令)으로, 홍중일(洪重一)을 교리(校理)로, 조명교(曺命敎)·이천보(李天輔)를 부교리(副校理)로, 김한철(金漢喆)·서명신(徐命臣)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위보(李渭輔)를 문학(文學)으로, 신사철(申思喆)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삼았다.

 

7월 29일 병술

평안 감사(平安監司) 이주진(李周鎭)이 병(病) 때문에 체직(遞職)되었으므로 조관빈(趙觀彬)으로 대신하게 하고, 정찬술(鄭纘述)을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