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6권, 영조 18년 1742년 8월

싸라리리 2025. 9. 26.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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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정해

임금이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사단(社壇)에 거둥하였다.

 

8월 2일 무자

임금이 친히 추향 대제(秋享大祭)를 지냈다. 예(禮)를 마치자, 하교하기를,
"올해는 마침 임술년인데, 선조(先朝)의 춘향이 임오년 2월 2일에 있었으니, 봄과 가을의 계절은 비록 같지 않지만, 날짜가 우연히 꼭 부합됨은 그 또한 이상한 일이다."
하고, 드디어 7언 절구(七言節句) 1수를 짓고 새겨서 재실(齋室)에 걸어 두라고 명하였다. 그 기구(起句)에 이르기를,
"임오년 뒤 40년 만에
옛일 자취 따라 사단(社壇) 앞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에게 갱진(賡進)하게 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필선(弼善) 이연덕(李延德)이 음률(音律)을 잘 안다 하여 아악(雅樂)을 이정(釐正)하게 했는데, 사단에서 음악을 연주할 때에 소(簫)의 소리가 몹시 작고 또 율(律)에 맞지 않았다. 임금이 이연덕에게 묻기를,
"12율(律)에는 각자 궁성(宮聲)이 있는가?"
하니, 이연덕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종묘악(宗廟樂)의 경우에는 황종궁(黃鍾宮)을 쓰고 사직악(社稷樂)의 경우에는 임종궁(林鍾宮)을 쓰는데, 그 가운데 각각 12율이 있으니, 이것이 8율을 사이에 두고 상생(相生)하는 뜻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음악이란 신명(神明)을 감동시키는 것인데 지금 아악이 이와 같으니, 그 태만함을 신칙함이 마땅하다."
하고, 드디어 이연덕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다시 익도록 명하였다. 악원 제조(樂院提調) 민응수(閔應洙)가 말하기를,
"임진년181)   이후로 악기(樂器)가 망가지고 없어져 지금의 성률(聲律)은 거의 다 훼손되어 남은 것이 없습니다. 지나간 해에 악공(樂工) 황세대(黃世大)가 북경(北京)에 들어가 생황(笙簧)을 배워 가지고 왔으니, 이번의 사행(使行)에도 또한 들여보내어 배워 오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영빈 김씨(寧嬪金氏), 광성 부원군(光城府阮君)182)                  의 묘(廟)에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김씨는 곧 숙종[肅廟]의 후궁(後宮)이고 광성은 곧 숙묘의 국구(國舅)인데, 묘우(廟宇)가 모두 사단(社壇)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8월 3일 기축

임금이 수가 군병(隨駕軍兵)의 시사(試射)에 친림하여 차등 있게 상을 내려 주었다.

 

헌납(獻納) 김한철(金漢喆)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원경하(元景夏)와 애당초 은원(恩怨)이 없었으니, 어찌 서로 해칠 뜻이 있었겠습니까? 만약 원경하로 하여금 신의 말을 경계로 삼아 마음을 씻고 의도를 고쳐 우리 전하의 의지하고 신임하는 실상에 부응하게 한다면, 망언(妄言)한데 대한 주벌(誅罰)을 신은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다면 전하께서 추후에 신의 말을 생각하는 날이 없을 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가 도리어 신을 꾸짖고 협박하면서 연달아 소장(疏章)을 올려 모욕한 것을 돌아보건대, 스스로 ‘누가 감히 무어라고 할 것이냐?’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에는 공안(公案)이 있으니 신은 많이 변명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또 무슨 족히 책망할 것이 있겠습니까? 전하의 고심(苦心)은 건극(建極)에 있지만, 행하시는 데 요체를 얻지 못하셨기 때문에 지치(至治)를 구하는 것이 성실하면 성실할수록 효험은 더욱더 아득해집니다. 그리하여 기회를 틈타 조경(躁競)하는 무리로 하여금 날마나 앞으로 나아가 명분과 실제를 어지럽게 만들게 하니, 신은 그윽이 통탄하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처사(處事)는 한결같이 의리로 재단(裁斷)하시어 편견을 위주로 하지 마시고, 용인(用人)은 한결같이 공의(公議)를 따르시어 사의(私意)를 용납하지 마소서. 그러면 그 극(極)으로 모이고 그 극으로 돌아갈 것이니, 군신 상하가 반드시 함께 대도(大道)에 이를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면계(勉戒)한 것에 더욱 힘쓰겠다."
하였다.

 

8월 5일 신묘

조석명(趙錫命)을 대사헌(大司憲)으로, 남태제(南泰齊)를 집의(執義)로, 이정욱(李廷郁)을 사간(司諫)으로, 이휘항(李彙恒)을 장령(掌令)으로, 조윤제(曹允濟)를 지평(持平)으로, 남태기(南泰耆)를 정언(正言)으로, 이기진(李箕鎭)을 형조 판서(刑曺判書)로, 박필부(朴弼傅)를 진선(進善)으로 삼았다.

 

장령 홍득후(洪得厚)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 온갖 법도가 좀먹고 무너져 당사(黨私)가 크게 행해지고 있습니다. 단지 대각(臺閣)의 처치(處置)에만 고의(古意)가 약간 보존되어 공의(公議)가 있어서 감히 배치(背馳)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남혜로(南惠老)의 일이 발생하자 대각의 기풍이 추락하여 다시는 여지가 없게 되었습니다. 조경(趙擎)이 병판(兵判)을 도로 잉임(仍任)시킨 일을 논박한 것은 대개 변금(邊禁)을 엄중히하고 사체(事體)를 무겁게 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무슨 경알(傾軋)하고 협잡(挾雜)하는 뜻이 있었다고 교묘하게 제목(題目)을 만들어 억지로 당벌(黨伐)의 죄과로 귀착시키는 것입니까? 진실로 협잡의 잘못은 남혜로에게 있고 조경에게 있지 않은 듯하니, 남혜로를 견파(譴罷)하여 다른 사람들을 격려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소장(疏章)을 도로 돌려주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조경을 체차(遞差)한 것은 비단 원신(院臣)의 처치였을 뿐만 아니라 곧 내가 처분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홍득후가 감히 부억(扶抑)하여 사의(私意)를 성사시키려 하니, 무엄하다고 할 수 있다. 서로 협잡이라 하면서 아울러 체차하기를 청한다면 장차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고심(苦心)을 깊이 유념하지 않고 있으니, 지극히 놀랍다."
하고, 이어서 홍득후를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판돈녕(判敦寧) 이병상(李秉常)이 휴가를 받아 시골로 내려가면서 상소하여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책유(責諭)하고 즉시 올라오게 하였다. 이때 이병상이 또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사론(士論)이 ‘이병상이 유척기(兪拓基)와 같이 나아갔는데, 유척기가 이미 물러났으니 이병상이 홀로 머무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자못 비난한 바 있었다. 이병상이 이것을 몹시 괴롭게 여겨 드디어 휴가를 청해 돌아간 것이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병판(兵判) 박문수(朴文秀)가 직사(職事)에 아주 힘쓰고 있어서 모두 ‘적절한 사람을 얻었다.’고 하였으므로, 신은 구임(久任)시켜 성효(成效)를 책임지우고자 하였는데, 조경(趙擎)이 상소하여 도로 잉임(仍任)시킨 것을 논박한 것은 협잡(挾雜)에서 말미암은 것 같습니다. 하물며 근래에 잉임한 전례(前例)가 한둘이 아니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자,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처치(處置)하면서 경알(傾軋)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홍득후(洪得厚)의 상소가 또 나왔던 것입니다."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당벌(黨伐)의 습관을 엄히 징계하시기 때문에 비록 드러내놓고 공척(攻斥)을 가하지는 못하나, 매번 미세한 사체(事體) 사이의 일을 대충 여유 있게 말하면서 단지 그 사람만을 해쳐 그 자리에서 불안하게 만들고 있으니, 이런 조짐을 조장(助長)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미세한 일도 또한 말하지 못한다면, 어찌 언로(言路)를 여는 데 부족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혜로(南惠老)였기 때문에 내가 깊이 죄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경의 경우 어떤 마음이 있어 그 미세한 일을 우선 대략 말했던 것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조정에서는 예양(禮讓)의 풍습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대신(臺臣) 권신(權賮)은 승지와 옥신각신하다가 심지어 ‘공상(空桑)’이란 말까지 장주(章奏)에 올렸으니, ‘공상’이란 아비가 없음을 말합니다. 입버릇이 거칠고 패려하니, 삭직(削職)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각 궁방(宮房)에 도서(圖書)란 것이 있는데, 이는 궁방의 소속에 행용(行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도서를 낙인(烙印)으로 변개(變改)하여 사상(私商)의 물건을 쓰고 있으니, 반드시 강제로 사게 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일체 금단(禁斷)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전 승지 이중경(李重庚)의 아들 진사(進士) 이장오(李章吾)는 용력(勇力)이 남보다 뛰어난데다가 또 병서(兵書)에도 아주 익숙하니, 참으로 장재(將才)입니다. 무예(武藝)를 권려(勸勵)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여러 신하들도 또한 그가 활을 잘 쏜다고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선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초관(哨官)에 차임(差任)하게 하라. 내가 마땅히 불러 보겠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박사창(朴師昌)은 탄핵(彈劾)을 당했으니, 억지로 부임 시키기 어렵겠습니다. 체직(遞職)시키고 양양(襄陽)에 잉임(仍任)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대신할 만한 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송인명이 이어서 김상로(金尙魯)·윤득화(尹得和)·김상성(金尙星)을 추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득화는 늙었고 김상로는 이제 막 동번(東藩)183)  에서 체직되었다.
하고, 드디어 김상성을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임금이 이조 낭관(吏曹郞官)을 변통(變通)한 뒤에도 여전히 권한이 무거운 폐단이 있다 하여 양사(兩司)로써 통의(通擬)할 것을 명하고자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임금이 또 통청(通淸)되지 아니한 사람을 곧바로 제수(除授)하고자 하니, 여러 신하들이 또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남태제(南泰齊)와 윤광의(尹光毅)의 무리가 ‘뒷날에 이조 낭관(吏曹郞官)은 또 장차 권한이 무겁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또한 옳다."
하고, 뒤에 마침내 뭇사람들의 의논을 물리치고 양사(兩司)의 사람을 이조 낭관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제도(諸道) 육군(陸軍)의 가을 조련(操鍊)을 정지시키라고 명하였다. 올해 여역(癘疫)으로 사망한 군병(軍兵)이 몹시 많아 액수(額數)를 채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황해 수사(黃海水使) 홍원익(洪元益)을 나문(拿問)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청나라 사람들의 배가 어채(漁採)하기 위해 해서(海西) 지방의 경계를 들락거리며 사람과 군기(軍器)를 노략질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황해 감사(黃海監司) 송수형(宋秀衡)이 지방관인 장연 부사(長淵府使)와 오차포 첨사(吾叉浦僉使)가 능히 금집(禁戢)하지 못하였다 하여 장문(狀聞)해 파출(罷黜)시켰다. 또 수사(水使)가 즉각 감영(監營)에 보고하지 않았다 하여 엄하게 핵문(覈問)한 뒤에 장문하여 죄줄 것을 청하였다. 대신(大臣)도 또한 그렇게 말을 하였으므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8월 7일 계사

임금이 승지(承旨) 남태온(南泰溫)과 필선(弼善) 이연덕(李延德)을 불러 보고, 《악학궤범(樂學軌範)》의 서문(序文)을 친히 지으면서 선조(先祖) 병술년184)  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병술년에 시측(侍側)했던 일을 추억하노라니 슬픈 감회가 일어난다. 고(故) 봉조하(奉朝賀) 이태좌(李台佐)가 일찍이 말하기를, ‘듣건대, 성상께서 어렸을 적에 선조(先祖)를 시측하면서 무더운 여름날 부채질을 하느라 손에 못이 박혔다고 하셨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전한 사람의 잘못이다. 옛말에 ‘어버이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니, 아무리 효도하고자 한들 할 수가 있으랴?’라고 하셨는데, 내가 지금 아무리 다시 부채질을 하고 싶다 한들 어찌 할 수가 있겠는가?"
하고, 오열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서문을 다 쓰자 이연덕으로 하여금 읽게 하고, 이어서 이연덕을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이배(移拜)하여 구임(久任)으로 성효(成效)를 책임지우도록 명하였다. 남태온이 말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임금은 악관(樂官)을 밝게 알지만 음악 자체에는 밝지 않다.’고 하였으니, 이연덕과 같은 사람은 적절한 사람을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뒤에 드디어 춘방(春坊)의 관원으로 악정(樂正)을 겸해 그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선릉(宣陵)의 행행(行幸)이 이미 정해졌었다. 연신(筵臣)이 말하기를,
"선조(先祖)의 전알(展謁)이 임신년185)  에 있었는데 이번에 또 임술년을 만났으니,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길을 닦을 때 혹시라도 길 옆의 벼를 해칠까 걱정하여 직접 섭이중(聶夷中)186)  의 시를 읊조리고 말하기를,
"한 알 한 알의 곡식이 어찌 아까운 것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남태온이 말하기를,
"어로(御路)를 침범해 경작한 백성에게는 본디 해당되는 죄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길을 닦지 않은 데 노하여, ‘짐(朕)이 다시는 이 길을 다닐 수 없다고 하는 것인가?’라고 하였지만, 나의 뜻은 이와 같지 아니하다. 곡식을 해칠까 하는 염려는 혹시라도 백성을 해칠까 두려워해서이다."
하였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원경하(元景夏)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 정언(正言) 이형만(李衡萬)이 신에게 한을 품은 것이 어떤 일이기에 넉달 동안이나 헐뜯고도 오히려 스스로 그치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그가 과연 신과 서로 사이가 좋다면 이처럼 신을 조절(操切)하는 것은 그의 본 마음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런데 이제 창을 잡고 앞잡이가 되어 스스로 애석해 할 줄을 알지 못하니, 신은 그윽이 이형만을 위하여 걱정하는 바입니다. 또 신을 누차 김한철(金漢喆)이 쏜 독(毒)에 맞았습니다. 신은 평소 김한철이 벗을 경함(傾陷)하는 사람이 아닌 줄로 알고 있는데, 전후의 작용(作用)이 판연히 두 사람인 것 같았으니, 또한 그 본심이 아니란 말입니까? 대저 언의(言議)를 주장하여 온 세상을 뒤흔드는 자를 ‘기세(氣勢)’라고 할 수 있는데, 신처럼 약질(弱質)로 혼자 고립(孤立)되어 바야흐로 두려워 떨기에도 겨를이 없는 사람에게 어찌 말할 만한 기세가 있겠습니까? 신은 그윽이 스스로 슬퍼하는 바입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지평(持平)        박성옥(朴成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살펴보건대, 전하께서는 임어(臨御)하신 이후로 토목 공사의 낭비가 없었고, 성악(聲樂)을 좋아하거나 기이하고 교묘한 물건을 완상(玩賞)함이 없었습니다. 지극한 정성으로 지치(至治)를 구하시어 금의 옥식(錦衣玉食)도 편히 여기지 않았고, 백성을 애휼(愛恤)하고 붕당(朋黨)을 제거하시려는 마음이 수십 년 동안 하루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성심(聖心)에 부응하고 뭇사람들의 바람을 위로할 만한 공효(功效)는 없었습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전하의 근본을 바로 잡고 나아가 다스리시는 도리가 혹시라도 옛 성왕(聖王)에 손색이 있어 그러한 것입니까? 칠정(七情) 가운데 쉽게 폭발되어 제어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노여움이 가장 심하니, 한 번이라도 중도(中道)에 지나치게 되면 그 해(害)가 됨이 가장 큽니다. 성상께서는 지난날부터 여러 번 격뇌(激惱)하심이 중도를 넘는 거조(擧措)가 있었으니, 진실로 성상께서 시상(時象)을 통탄하고 미워하시어 절로 이와 같이 되니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대성인(大聖人)의 가슴속에 어찌 조금이라도 극복하지 못하는 곳이 있어 폭발하도록 내맡겨 두는 것입니까?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지난번에 《심경(心經)》을 임강(臨講)하였다고 하였고, 또 삼가 20운(韻)의 어제시(御製時)를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또 《노론(魯論)》 가운데서 요결(要訣)을 따내서 금석(金石)에 새길 가르침으로 삼아 여러 유생(儒生)들을 타이르고 경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첨하고 성실하지 않은 풍습[比而不周立習]은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으니, 또한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반성할 바를 생각하소서. 수령(守令)의 탐오(貪汚)는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심해지고 권세자의 자제(子弟)들은 오로지 제멋대로 횡렴(橫斂)을 일삼는데도 겨울과 여름의 고적(考績)에는 잇따라 최(最)를 차지하며, 상관(上官)을 섬기고 자기를 살찌우느라 백성의 고혈이 거의 바닥이 났습니다. 속담에 ‘가식적인 청백(淸白)이 솔직한 탐욕보다 낫다.’고 하니, 이는 실로 세상을 개탄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시험삼아 보건대, 오늘날은 가식적인 청백조차 또한 많이 얻을 수 없으니, 백성들이 어찌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성상께서 장법(贓法)을 엄격히 신칙하게 하고 끝에 가서 곧 말씀하시기를, ‘청직(淸職)을 허락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탐오(貪汚)한 무리들을 단지 청직에만 저지하고 곧 외직(外職)의 벼슬자리를 허락한다면, 이는 도둑을 잡았다가 놓아주어 다시 도독질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서울에 들어온 북관(北關)의 유민(流民)들을 중외(中外)에 신칙하여 양식을 주어서 쇄환(刷還)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면려(勉勵)한 것에 더욱 힘쓰겠다. 유민에 관한 일은 오부(五部)에 신칙하여 뜻을 기울여 거행토록 하겠다."
하였다.

 

8월 8일 갑오

허옥(許沃)을 집의(執義)로, 원경순(元景淳)을 헌납(獻納)으로, 이선태(李善泰)를 장령(掌令)으로, 김상적(金尙迪)을 수찬(修撰)으로, 조상경(趙尙絅)을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삼았다.

 

헌부(憲府)          【지평            박성옥(朴成玉)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친림(親臨)하여 서계(誓戒)했을 때 불참했던 집사(執事)들을 모두 파직하소서."
하고, 또 이르기를,
"장법(贓法)을 신칙(申飭)하여 천주(薦主)를 현고(現告)케 하라는 명(命)까지 있었습니다만, 전랑(銓郞)이 즉시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종중 추고(從重推考)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여역(癘疫)의 기운이 아직도 채 그치지 않고 있으니, 청컨대 능행(陵行)의 기일을 물려서 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혈구지도(絜矩之道)187)                  란 위아래로 통하는 것이다. 저 박성옥에게만은 유독 상로(霜露)의 감회(感懷)가 없단 말인가?"
하고, 박성옥을 불러 들여 계사(啓辭)를 읽어 아뢰게 하였다. 드디어 비답을 내려 준절하게 책망하기를,
"옛날 유곤(庾袞)은 능히 병이 전염되지 않았다.188)                  내가 비록 정성이 얕기는 하지만 예(禮)로 본다면 당연한 일인 것이다. 또 날씨의 따뜻함과 추움을 살피는 것은 약원(藥院)의 일이고, 능행의 기일을 당기거나 물리도록 청하는 것은 보상(輔相)의 직무인 것이다. 이목(耳目)의 관원이 되었으면 도양(導揚)해야 마땅한데, 어찌 감히 정지하기를 청하는가? 빨리 그 해괴한 계사(啓辭)를 그만두고 물러가서 《대학(大學)》의 혈구장(絜矩章)을 읽도록 하라."
하였다. 박성옥이 황공하여 인피(引避)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전례를 따라 인피하는 것은 스스로 반성하는 것만 못하다."
하고, 사직하지 말라고 명했다가 이윽고 하교하여 박성옥을 특별히 체직시켰다.

 

장령(掌令)        이선태(李善泰)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지 수십 년 동안 반드시 붕당(朋黨)을 타파하고 황극(皇極)을 세우고자 하시며 공평(公平)·인협(寅協)한 디스림을 이룩할 것을 기약하셨으니, 뭇 신하의 감열(感悅)과 조정의 화협(和協)을 바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몇 백 년이나 된 습속은 변화시키기 어려워 한두 당(黨)의 고집과 억셈은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몰래 명로(名路)를 통색(通塞)하는 권병(權柄)을 쥐고 전하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다스림을 무너뜨리려 하니, 이는 참으로 청명(淸明)한 조정의 큰 좀인 것입니다. 다만 그 세력이 성립되고 권병이 무거워서 사람들이 누구도 어찌할 수 없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신은 이미 발로(發露)된 것을 가지고 한 번 진달하려고 합니다. 옛날부터 인주(人主)가 크나큰 다스림을 이룰 적에는 반드시 아래서 받들어 돕는 신하가 있었습니다. 알 수 없습니다만, 오늘날 전하께서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몇 이나 됩니까? 권주(眷注)189)                  하는 하교가 전후 찬성(贊成)의 의망(擬望)에 여러 번 나와 멀리 중외(中外)에 전파된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원경하(元景夏)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원경하는 출신(出身)한 초기부터 전하께서 칙려(飭勵)하시는 하교를 받고 전하의 지치(至治)를 구하시는 정성에 감격한 나머지 자기 한 몸으로 세상 일을 담당하여 들어가서는 연석(筵席)에서 진달하고 나와서는 조정에서 논의(論議)했던 것이니, 성주(聖主)를 보좌하여 지치를 이룰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저 이정보(李鼎輔) 형제는 그의 평생 동안의 오랜 벗으로서 이에 총애가 치우치게 높음을 도리어 시기하고 언의(言議)가 혹 다름을 미워한 나머지 스스로 청론(淸論)을 주장한다고 청탁하고 극력 그의 언의를 배척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사사로운 혐의(嫌疑)를 끌어대어 편지를 보내어 절교(絶交)하더니, 끝에 가서는 또 친당(親黨)을 발탁했다고 노골적인 말로 배척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암암리에 사주하고 부탁하여 서척(書尺)이 벗들 사이에 낭자한가 하면 대각(臺閣)에서는 소장(疏章)이 번갈아 나오게 되었고, 심지어는 ‘남의 집과 나라에 화(禍)를 끼치고 염치로 남을 경계한다.’는 말이 과연 그의 죽은 벗과 압객(狎客)190)                  의 입에서 나오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전후에 걸쳐 탄핵을 당한 것이 모두 몇 차례나 되었는데, 그 하는 말들이 모두 한 꿰미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그것이 딴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만약 전하의 참소를 미워하는 밝으심이 아니었다면, 그가 어찌 오늘날까지 보전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저 턱짓으로 삼사(三司)를 지휘하고 선비들을 마구 부린 자에 대해서 전하께서 또한 어떻게 그 정상을 죄다 통촉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아! 뿌리가 깊고 굳어서 갑자기 동요시키기 어렵고 언론(言論)이 준엄하게 나오니 충분히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합니다만, 염치없이 영화(榮華)만 탐하는 무리를 꾀어 불러모으고 한마음으로 사사로운 일을 좋아하는 무리들을 모아들여서 곧 스스로 과장(誇張)하기를, ‘아무개는 이 일을 처리하였으니 아무 벼슬에 통의(通擬)해야 하고, 아무개는 내 말을 배반하였으니 청로(淸路)를 막아야겠다.’고 하매, 이해(利害)가 즉시 판별되고 득실(得失)이 환해지니, 저 빌붙어 따르는 무리로서 앞을 다투어 공을 세우려는 자가 온 세상을 통틀어 보건대, 거의 반이나 됩니다. 그리고 한천(翰薦)을 처음 고쳤을 때에 구례(舊例)를 끌어대며 강력히 다투고 소시(召試)를 회피하여 군명(軍命)을 무시한 자야말로 어찌 모두 사당(私黨)에게 명예를 구하고 국론(國論)에 배치(背馳)된 자가 아니겠습니까?
아! 저 무리들은 족히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한스러운 것은 원경하입니다. 원경하가 은총을 받음이 어떠하였으며 스스로 기약했던 것이 어떠하였습니까? 비록 저 무리들이 백방으로 동요시킨다 해도 원경하의 도리로는 진실로 자기 자신을 믿고 앞으로 곧장 나아가 뜻을 지키며 동요되지 않아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도리어 두려워 위축되고 기가 꺾여서 눈치를 보며 불쌍히 보아줄 것을 애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비탈을 달리던 말이 반드시 잠시 멈추고자하고 활에 놀란 새가 빈 시위에 깜짝 놀라는 것처럼 거조(擧措)는 타당성을 벗어나고 정주(政注)는 중망(衆望)을 잃게 되어 전후가 판연히 양단(兩斷)한 것처럼 되었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저번에 춘궁(春宮)이 입학(入學)할 때의 일입니다. 유생(儒生)의 무리들이 괴귀(怪鬼)한 무리들을 모아서 입학 때의 집사(執事)를 패악한 말로 모욕하고, 심지어 지나간 해에 원경하의 유벌(儒罰)을 풀어준 유생들을 끌어 넣어 극벌(極罰)을 베풀고 심지어, ‘감히 상묵(庠墨)을 풀어주었다.’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그가 아무리 이정보 등의 풍지(風旨)를 승망(承望)하여 원경하를 원수처럼 본다 할지라도 또한 어찌 감히 이처럼 사체(事體)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원경하가 벌을 받았을 때에는 전하께서 누차 특교(特敎)를 내리시고 심지어 성균관[國子]의 장관에게 벌봉(罰俸)까지 명하셨습니다만, 유생들은 이를 무시하고 명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최후에 가서야 한 유생이 엄교(嚴敎)에 몰려 비로소 벌을 풀어 주었으니, 이것이 무슨 큰 죄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 김한철(金漢喆)의 아우 김한열(金漢說)이 반임(泮任)으로서 재빠르게 그 유생에게 벌을 베풀었던 것은 이미 군부(君父)의 명을 공경히 여기는 뜻이 아니었으니, 지금 와서 다시 벌을 준 것은 너무 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 벌목(罰目)에 쓴 ‘감히[敢]’라는 글자는 가리키는 곳이 어떤 것입니까? 그 사당(私黨)을 경외(敬畏)하고 군부(君父)를 가볍게 보는 마음이 탄로났음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초에 벌을 풀어 주도록 명하신 것은 전하이셨고 명을 받들어 벌을 푼 것은 유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의(黨議)가 배격하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그 노여움을 폭발시킬 곳이 없어 그 칼날을 옮겨 급히 공격하기에 이르렀던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당습(黨習)의 소굴이 이곳에 있고 조정에서 성원(聲援)함이 여기에 있어, 진신(搢紳)과 장보(章甫)가 머리부터 꼬리까지 서로 얽혀 있는데, 이러함에도 놓아두고 지나간다면 세도(世道)의 풍파(風波)는 끝내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존하의 염려하심이 이에 미쳐 반교(泮橋) 곁에 비석191)                  을 세우고 성훈(聖訓)을 환히 게시하셨으니 돈어(豚漁)도 족히 감동시킬 만하였습니다만, 채 수십 일도 못되어 저 유생들이 또 이런 짓을 하여 심지어 군부(君父)의 고심(苦心)과 맞서 겨루어 반드시 완염(琬琰)192)                  의 문자와 운한(雲漢)193)                  의 글을 한바탕의 헛된 글로 돌리고야 말려고 하였으니, 아! 심합니다. 성상께서 만약 신의 말을 소원(疏遠)하다고 여겨 믿지 못하신다면, 근밀(近密)과 묘당(廟堂)에 하문하여 재량하여 처리하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당습(黨習)에 대해 칙려(飭勵)하는 것이 나의 고심(苦心)이다. 대훈(大訓)을 내린 뒤로 감히 예전 버릇을 부리는 자는 내가 마땅히 경중에 따라 면칙(勉飭)할 것이니 어찌 그 면려(勉勵)하는 것을 기다릴 것이며, 공심(公心)인지 당심(黨心)인지를 그 임금이 살필 것이니 어찌 들추어내기를 기다릴 것인가? 이 또한 예전의 버릇인데, 감히 오늘 써 먹으려 하는가?"
하고, 이어서 패초(牌招)하라고 명하였다. 이선태가 소패(召牌)를 받들고 감시관(監試官)으로서 나아가니, 드디어 하교하기를,
"이선태가 진달한 바는 그 뜻이 놀라웠다. 그가 아무리 볼품이 없다 할지라도 관명(官名)이 아까웠기 때문에 대략 조왕(錯枉)의 뜻을 보였던 것이니, 그 신칙함은 심각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의기양양하게 시험을 감독하였으니 거조(擧措)가 해괴하다. 염치를 권려(勸勵)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신칙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체직(遞職)시키라."
하였다. 이때 원경하는 탕평(蕩平)을 자임(白任)하고는 송인명(宋寅明)·조현명(趙顯命) 등에게 붙어 급작스레 경재(卿宰)의 반열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이천보(李天輔)와 화협(和協)하지 못해 곧 구적(仇敵)이 되고 말았다. 이천보는 문장(文章)과 언론(言論)으로 바야흐로 성명(盛名)이 있었는데, 그 종부(從父) 형제인 이정보(李鼎輔)·이익보(李益輔)와 함께 청도(淸塗)194)                  의 반열에 있으면서 교유(交遊)가 넓고 벗이 많았다. 이에 힘써 원경하를 배척하였으니, 원(元)·이(李)가 붕당(朋黨)을 나누었다는 표방(標榜)까지 있었다. 이에 원경하는 또 대탕평(大湯平)의 설(說)로 몰래 남인(南人)·소북(小北)과 결탁하여 조력(助力)으로 삼았다. 이선태는 남인이었는데 대각(臺閣)에 들어가자 하룻밤 사이에 이 소장을 올렸던 것이니, 이른바 사우(死友)·압객(押客)이란 김한철·이형만을 가리킨 것이라 하며, 겉으로 부추기고 속으로 누른 것은 대개 원경하의 당(黨)이 사주한 것이라 한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원경하가 상소하여 이선태의 상소에 대해 변명하기를,
"신(臣)은 행실이 볼품없어 벗들 사이에 믿음이 없습니다. 이정보(李鼎輔) 형제와는 인척간이자 절친한 벗이지만 옛날의 좋은 사이를 보전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또한 불행한 일입니다. 이것은 사사로운 일에 관계된 바이니, 본래부터 조정에까지 미루어 올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장주(章奏)에 올려 신을 ‘고주(孤注)195)  ’로 삼았으니, 이것이 어찌된 까닭입니까? 풍랑(風浪)이 한 번 세차게 부딪쳐 여파(餘波)가 곧 빈 배를 쏘아대니, 실로 다시는 맑은 조정에 낄 면목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환히 알고 있다. 어찌 족히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대사성(大司成) 이정보(李鼎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이선태(李善泰)의 상소는 종이에 가득히 늘어놓은 것이 인신(人臣)의 극죄(極罪)가 아님이 없어서 문을 닫고 두려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가 성죄(聲罪)한 바는 거의 수천 자(字)의 말이었는데, 전적으로 원경하(元景夏)의 처지를 위하여 신 등의 형제에게 피를 뿜는 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만, 그 수미(首尾)를 찬찬히 따져보건대, 모두 포착해 낼 만한 형체나 그림자조차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크게 떠벌리고 현란시켜 신 등의 종족(宗族)을 아주 멸망시킬 계책으로 삼았으니, 또한 무슨 마음입니까? 신은 원경하와 일찍이 수 십 년의 교의(交誼)가 있었습니다만, 불행하게도 절교(絶交)하지 않을 수 없는 사의(私義)가 있어 편지를 보내어 절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적인 일에 관계되는 것이었으니, 또 어찌 조정에 미루어 올릴 수 있겠습니까? 근래에 원경하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은 걸핏하면 신 등의 사의(私義)에 관한 한 가지 일을 가지고 곧장, ‘다른 사람에게 부탁받아 남을 함해(陷害)한 경우’로 몰아대며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으로 삼고 있습니다. 어떤 낌새가 그 사이에 잠복(潛伏)해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그 흉측하고 기만하는 계책을 꾸민 것과 두서없이 말을 지어낸 데 대해서는 성감(聖鑑)이 이미 환히 알고 계실 것이기에 신은 감히 많은 말로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부교리(副校理) 이천보(李天輔)도 또한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선태의 상소에서 종이에 가득히 늘어놓은 것은 한편으로는 신 등을 구함(構陷)하고 한편으로는 천청(天廳)을 공동(恐動)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신 등이 원경하와 절교한 것은 사적인 일에 불과하였으니, 돌아보건대, 조정의 논의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한 가지 일을 빌려 남을 헤아릴 수 없는 죄과(罪科)에 몰아넣고 인주(人主) 앞에서 참소하고 고자질하려 하였습니다. 이는 비단 신 등을 얽어 죽이고자 한 것일 뿐만 아니라 진신(搢紳)과 장보(章甫)196)  까지 아울러 일망타진할 계책을 꾸민 것이니, 아! 너무나도 심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이미 환히 알고 있다는 예사 비답을 내렸다.

 

8월 10일 병신

정언섭(鄭彦燮)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석복(李錫福)을 장령(掌令)으로, 김상적(金尙迪)을 헌납(獻納)으로, 한덕량(韓德良)을 지평(持平)으로, 구성필(具聖弼)을 판결사(判決事)로 삼았는데, 이판(吏判) 민응수(閔應洙)의 정사(政事)였다. 구성필은 구성임(具聖任)의 중제(仲弟)인데 처음에 음사(蔭仕)로 벼슬을 하여 수령(守令)에 이르렀고, 대신(大臣)이 또 장재(將才)로 천거하여 곤임(閫任)에 발탁하여 제수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또 문직(文職)에 통의(通疑)하여 벼슬길이 외잡(猥雜)하니 물의(物議)가 놀라워 하였다.

 

8월 11일 정유

임금이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를 불러 보았다. 대개 능(陵)에 거둥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장차 친히 열무(閱武)를 행하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의주(儀註)를 마련해 품(稟)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박문수가 인하여 말하기를,
"무과(武科)가 많은 것이 요사이보다 더 심한 것은 있지 않았습니다. 신(臣)의 문하(門下)에 와서 벼슬을 구하는 무사(武士)가 매일 거의 천여 명이나 되는데, 먼 지방에서 상경(上京)한 무사들의 경우 여러 해 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두록(斗祿)을 바라고 있어서 이미 차마 버리고 돌아가지도 못하고, 또 그 전토(田土)를 팔았으므로 궁박하여 돌아갈 곳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저자 거리에서 구걸까지 하게 되었으니, 비단 그 처자(妻子)가 굶주려 죽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까지도 마침내 북망산(北邙山)의 객귀(客鬼)가 된 자까지 간혹 많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그 살아있는 자가 또 어찌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무리들의 신수(身手)와 재략(才略)이 어찌 경화(京華)197)  의 무변(武弁)에게 아주 뒤떨어지겠습니까? 다만 세력(勢力)이 상대가 되지 않을 뿐인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무변(武弁)으로서 부정(副正)이나 부사(府使)를 거치지 아니한 자는 훈련원 정(訓鍊院正)이 되지 못하게 하여 조경(躁競)을 억제하고, 또 무겸(武兼) 1과(窠)를 한산인(閑散人)이 복직(復職)하는 자리로 정해 엄체(掩滯)된 자들을 진작시켜야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8월 12일 무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선태(李善泰)가 올린 소장의 뜻은 진실로 헤아릴 수가 없으니, 곧 하나의 급서(急書)입니다. 이것은 비단 이정보(李鼎輔) 무리 때문에 나온 것일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통틀어 무욕(誣辱)하고 남을 ‘임금을 잊고 사당(私黨)에 빌붙은 죄과’로 몰아넣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참소를 이루고 사욕(私慾)을 성사시키는 데 급하다 할지라도 말이 너무 도리에 어긋나니, 어찌 감히 그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화심(禍心)을 몰래 품고 있다가 기회를 틈타 날뛰는 무리를 만약 별도로 통렬히 징계하지 아니하고 단지 전례를 따라 체직(遞職)만 한다면 신은 진신(搢紳)의 화(禍)가 장차 하늘을 뒤덮는 데 이르러 국가에도 선후책(善後策)이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 엄하게 더 감처(勘處)하여 음흉하고 사특한 무리들로 하여금 숨을 죽이게 하여 조정이 편안하고 맑아지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전조(銓曹)에서 가려서 의차(疑差)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옳다."
하고, 드디어 전관(銓官)은 종중 추고하고 이선태는 삭직(削職)하라고 명하였다.

 

8월 13일 기해

우박이 쏟아졌다.

 

8월 16일 임인

임금이 선릉(宣陵)에 거둥하여 전배례(展拜禮)를 행하고 이어서 의식(儀式)대로 제사를 지냈다. 지나는 길에 정릉(靖陵)을 배알하고 장차 출발하려 하니, 태복시(太僕寺)에서 소교(小轎)를 대령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위 능(陵)과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탈 필요가 없다."
하니, 근시(近侍)가 아뢰기를,
"휘장이 중간에 가려 있으므로 능소(陵所)가 보이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군자(君子)는 밝은 곳이라 해서 예(禮)를 펴지 않고 어두운 곳이라 해서 행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는 법이다."
하고, 드디어 걸어서 언덕 밖에 이른 뒤에야 비로소 소교를 탔다. 이때 왜창(倭槍)을 잡고 있는 위사(衛士)가 앞에 늘어서 있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두 능(陵)이 당한 변(變)198)  은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픈데, 바야흐로 이 능을 공경스럽게 배알하는 날 비록 창·검(劍)이라 할지라도 ‘왜(倭)’라고 이름하는 것은 또한 차마 볼 수가 없다.
하고, 드디어 치워 버리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돌아오는 길에 서빙고(西氷庫) 나루를 건너 장차 친히 열무(閱武)를 행하려고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를 불러 하교하기를,
"선조(先朝) 임신년199)  에 칠덕정(七德亭)에서 열무하셨으니, 내가 그것을 계술(繼述)하고자 한다."
하였다. 강을 건너 임금이 단(壇)에 올라 박문수에게는 중군(中軍)의 일을 행하고 훈련 대장(訓鍊大將) 구성임(具聖任)·금군 별장(禁軍別將) 이우(李玗)는 영장(營將)의 일을 행하라고 명하였는데, 각각 거느리는 군사를 인솔하여 군례(軍禮)로 임금이 뵈었다. 드디어 마군(馬軍)·보군(步軍)에 명하여 두 진(陣)으로 갈라 부딪혀 공격하는 모양을 짓게 하고 한참 있다가 파하였다. 각 장신(將臣)에게 말을 하사하고 드디어 환궁(還宮)하였다. 이때 장신(將臣) 중에 장식을 한 갑옷을 입은 사람이 있었는데, 임금이 하교하기를,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창·칼을 잡는 것은 장차 사졸(士卒)과 더불어 기쁨과 괴로움을 같이하려는 것이다. 사졸은 쇠갑옷을 입고 있는데, 장수는 비단 갑옷을 입고 있으니, 어찌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뜻이겠는가? 이후로 다시 이렇게 하는 사람은 마땅히 군율(軍律)을 시행하겠다."
하였다. 대개 장식 갑옷이란 무늬 있는 비단으로 꾸며서 만든 갑옷이다.

 

8월 19일 을사

영남에 홍수가 졌다.

 

8월 20일 병오

팔도(八道)의 여역(癘疫)으로 사망한 사람의 신포(耳布)와 환곡(還穀)을 견감(蠲減)하라고 명하였다. 이 해에 팔도에 큰 여역이 발생하여 사망자가 셀 수가 없을 정도였고 온 가족이 몰사(沒死)한 경우도 아주 많았다. 제도(諸道)의 감사(監司)가 서로 잇따라 탕감해 줄 것을 장청(狀請)하자,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연신(筵臣)이 말하기를,
"온 가족이 몰사한 경우를 이미 정확하게 알기 어렵고 한둘이 사망한 경우 또한 그 가운데 들어갔을 것이니, 허실(虛實)에 헷갈리기 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령 그들에게 속는다 할지라도 차라리 백성에게 속는 실수를 한다면 어찌 왕자(王者)의 주휼(賙恤)하는 정치에 해될 것이 있겠느냐?"
하였다.

 

헌부(憲府) 【집의(執義) 허옥(許沃)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야대(夜對)를 행하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講)하였다. 두헌(竇憲)200)  의 일에 이르러 참찬관(參贊官)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인신(人臣)에게 권세(權勢)가 있으면 나라에 흉(凶)하고 집안을 해치니, 인주(人主)는 마땅히 작을 때 억제해야 할 것입니다. 대저 조정(朝政)의 권한을 탁란(濁亂)시키는 자는 형체가 있는 도적이지만, 당의(黨議)의 권세를 주장하는 자는 형체가 없는 도적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묻기를,
"이선태(李善泰)의 상소는 반드시 사주한 자가 있을 것이다."
하니, 홍상한이 말하기를,
"어찌 사주한 자가 있겠습니까마는, 오늘 한 사람을 해치고 내일 한 사람을 해친다면 조정의 어찌 거의 비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시고 짠 맛을 조화시키고 부억(扶抑)하되 치우치지 않아야 하는 방도를 진달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한밤중이 되자 선온(宣醞)하라 명하고, 부조(父祖)를 추념(追念)하여 당습(黨習)을 제멋대로 부리지 말라는 뜻으로 여러 신하들에게 면칙(勉飭)하였다.

 

8월 21일 정미

대사간(大司諫) 정언섭(鄭彦燮)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선태(李善泰)는 형적(形跡)을 감춘 채 달가운 마음으로 화(禍)를 즐기고 몰래 규결(赳結)하여 이름을 빌려 소란을 일으켰으니, 찬배(竄配)하는 법을 시행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엄하게 처치하였으니, 어찌 반드시 투비(投畀)할 것이야 있겠는가?"
하였다. 이조 판서 민응수(閔應洙) 또한 이선태를 의망(擬望)했던 잘못 때문에 상소하여 스스로 인책(引責)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8월 22일 무신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선릉(宣陵)·정릉(靖陵) 두 능이 임진년201)  에 변(變)을 당했을 때의 사적(事蹟)을 연신(筵臣)에게 물었으나 상세히 아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야사(野史)를 구해 들이고 아울러 실록(實錄)도 상고하게 하였었다. 이때에 와서 예조에서도 또한 《개봉릉의궤(改封陵儀軌)》를 찾아서 들이니, 임금이 보고 나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선대(先代)의 화변(禍變)이 이와 같았는데도 지금에야 비로소 상세히 알았으니, 이는 내가 불초한 탓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언제나 병자년202)  ·정축년203)  의 일만 깊은 원수로 여기고 있으나, 만세(萬世)토록 잊을 수 없는 실로 여기에 있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또 말하기를,
"함경도는 거듭 흉년이 든데다가 또 여역(癘疫)을 겪었으니, 각종 군안(軍案)과 각사(各寺)·각역(各驛)의 노비안(奴婢案) 및 식년 호적(式年戶籍) 등 무릇 백성을 소요케 하는 것에 관계되는 정무(政務)는 일체 정지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제도(諸道)의 복심(覆審)하는 행차에는 주전(廚傳)의 폐단이 있을 것이니, 또한 잠시 정지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유우기(兪宇基)를 수찬(修撰)으로, 윤광의(尹光毅)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서명신(徐命臣)을 헌납(獻納)으로, 강봉휴(姜鳳休)를 지평(持平)으로, 송시함(宋時涵)을 정언(正言)으로, 서종옥(徐宗玉)을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권현(權賢)을 황해 수사(黃海水使)로 삼았다.

 

8월 23일 기유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와 훈련 대장 구성임(具聖任)이 같이 입시(入侍)하였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임금이 열무(閱武) 때의 홀기(笏記)에 관한 일을 물었다. 박문수가 대답을 마치고 구성임과 절목(節目) 사이의 일을 논하였는데, 서로 자기의 견해를 내세우다가 그대로 임금 앞에서 노여움을 드러내어 너니 나니 하며 소리치고 꾸짖어 말씨가 도리에 어긋나게 되었다. 승지가 추고(推考)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하교하기를,
"‘두 마리 범이 싸운다.’는 말이 옛말에도 있다. 혈기(血氣)가 많은 박문수와 거칠고 호기 있는 구성임이 서로 다투어 이기고자 하는데, 전(殿)에 올라서는 비록 무례(無禮)하지만 전 아래로 내려가서는 능히 서로 잊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마침내 누누이 타이르고 개석(開釋)하였다. 두 신하가 그래도 시끄럽게 다투기를 그치지 아니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이웃 나라에 들리게 할 수 없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지금 이미 밤이 깊었으니, 청컨대 물러가고자 합니다."
하고, 이어서 장부(將符)를 풀어서 바치고 나갔다. 다음날인 경술일에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불러 먼저 두 사람의 일을 언급하고 하교하기를,
"이 또한 당심(黨心)인 것이다. 그리고 조신(朝臣)이 만약 그 사이에 부억(扶抑)한다면, 그 폐단은 장차 장신(將臣)이 분당(分黨)하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다. 내가 두 신하를 모두 군율(軍律)로 효시(梟示)하여 당습(黨習)을 징계하고자 한다."
하니, 이에 대신과 비국 당상 및 대간(臺諫)·승지(承旨) 등이 모두 말하기를,
"두 신하가 조정의 대체(大體)를 무너뜨리고 훼손한 죄는 진실로 엄하게 처분해야 마땅하지만, 군율은 서로 들어맞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집에 있으면서 입대(入對)하지 아니한 영상(領相) 및 우상(右相)을 찾아가 물어 보게 하였는데, 그 말도 또한 여러 신하들과 같았다. 임금이 그래도 군율을 시행하고자 하니, 여러 신하들이 굳게 간쟁하였다. 저녁때가 되어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무릇 처분이 타당함을 얻으면 비록 가벼운 벌이라 할지라도 또한 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찌 반드시 살육(殺戮)으로 사람을 징계할 것이야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안상(案床)을 치며 말하기를,
"마땅히 경(卿) 등을 위해 애써 따르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제갈양(諸葛亮)이 눈물을 흘리며 마속(馬謖)을 참(斬)해던 고사(古事)204)  를 본받고자 하였으나, 이제 끝내 그렇게 하질 못하였다. 그러나 만약 참으로 당습(黨習)을 부리는 자가 있다면 경들이 비록 견거(牽裾)205)  하며 다툰다 할지라도 내가 어찌 용서하겠는가?"
하고, 이어서 ‘마땅히 어떤 율(律)을 써야 할 것인가?’를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삭직(削職)하고 마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삭직하라고 명하였다.

 

금중(禁中)에 있는 《병장도설(兵將圖說)》을 인간(印刊)하라고 명하였다. 《병장도설》은 세조 대왕(世祖大王)이 병조 판서가 되었을 때 친히 지은 것인데, 초본(草本)을 대내(大內)에 비장(秘藏)해 두고 채 간행하여 배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의 서손(庶孫)을 수령(守令)에 제수(除授)하라고 명하였다. 선정(先正)에게는 단지 서파(庶派) 후손만 있었는데, 그때 마침 참하관(參下官)이 되었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 선정을 숭봉(崇奉)하는 뜻으로 그 서파 중에서 서사(筮仕)한 사람을 격식에 구애되지 않고 수령에 곧바로 차임(差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번에도 이 전례를 씀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장령 이석복(李錫福)을 파직(罷職)하라고 명하였다. 이석복이 박문수(朴文秀)와 구성임(具聖任)이 임금 앞에서 다투고 싸웠다 하여 상소하여 논하고 책벌(責罰)을 청하자, 임금이 두 사람이 잘못한 것은 경중(輕重)과 선후(先後)가 있는데도 동인한 예(列)로 감률(勘律)할 것을 청한 것은 은연 중에 협잡(挾雜)하는 뜻이 있다 하여 특별히 파직시킨 것이다.

 

8월 25일 신해

이성중(李成中)을 장령(掌令)으로, 원경순(元景淳)을 부교리(副校理)로, 조경(趙擎)을 지평(持平)으로, 이언상(李彦祥)을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김성응(金聖應)을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김시형(金始炯)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삼았다. 박문수(朴文秀)가 이미 죄를 입자 임금이 그 대신할 사람을 어렵게 여겨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천거하게 하였다. 이에 묘당(廟堂)에서 이종성(李宗城)을 천의(薦擬)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종성은 아경(亞卿)의 직질(職秩)로서 막 호서(湖西)의 번임(藩任)에 부임하였으므로, 임금이 다른 사람을 천의하라고 명하였다. 묘당에서 또 서명빈(徐命彬)을 천의했는데 서명빈 또한 재신(宰臣)이었으므로, 임금이 끝내 쓰지 아니하고, 전망(前望)을 가지고서 김시형을 병조 판서에 제수하였다.

 

8월 26일 임자

박찬신(朴纘新)을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정수송(鄭壽松)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신덕하(申德夏)가 장계(狀啓)하기를,
"촉석 산성(矗石山城)의 군사들이 화포(火咆) 쏘는 법에 완전히 어두우니, 청컨대 재예(才藝)가 있는 사람 2초(哨)를 뽑아 연습시키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8월 27일 계축

필선(弼善) 권현(權賢)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임박(任璞)이 재차 상소하여 신을 구함(構陷)한 데는 까닭이 있었습니다. 임박의 형 임정(任珽)은 젊어서 헐뜯는 말과 비방이 있었습니다. 신의 종제(從弟) 권경(權顈)이 괴원(槐院)의 권점(圈點)하는 자리에 참석하였는데, 임정이 그 선발에 지색(枳塞)되자 이때부터 신의 집안을 피맺힌 원수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임정의 아우인 임집(任)이 고산 찰방(高山察訪)이 되었을 때 법(法)에 벗어난 일로 글을 올려 신의 종형(從兄)을 구함하였으므로, 그때의 도사(都事) 신(臣) 권해(權賅)가 중벽(重辟)에 두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임박이 또 근거없는 말을 꾸며내어 반드시 보복하고야 말려 하니, 그 주먹질하는 형세를 보건대, 너무나도 두렵습니다. 더욱이 그는 전조(銓曹)에 들어간 뒤로 장료(長僚)를 순종해 섬기며 흉억(兇臆)을 자행하였고, 추조(秋曹)의 수의(首擬)에 이르러서는 극도에 도달하였으니, 이는 실로 종전에 있지 않던 정격(政格)입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8월 28일 갑인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고 다시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시독관(侍讀官) 정휘량(鄭翬良)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예의(禮義)로 나라를 세워 상제(喪制)를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근래에 풍속이 점차 허물어져 여항(閭巷)에서는 상(喪)을 치를 때 중이 염불(念佛)을 하기도 하고 풍악을 잡으며 뒤를 따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대부 집안에서는 간혹 여역(癘疫)으로 상을 당하면 구기(拘忌)를 핑계대고 장례(葬禮)가 끝난 뒤 성복(成服)을 행하기도 합니다. 이는 실로 풍화(風化)에 관계되는 일이니, 엄하게 금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들어 보니 지극히 한심하다. 경조(京兆)의 당상(堂上)을 모두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그리고 만약 신칙(申飭)한 뒤에 또다시 그런 경우가 있으면, 여러 법사(法司)를 마땅히 죄주겠다."
하였다. 정휘량이 또 말하기를,
"조정은 예양(禮讓)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필선(弼善) 권현(權賢)은 임박(任璞)에게 탄핵을 받고서 변명하는 상소를 올릴 적에 도로 꾸짖어 욕한 것이 임박의 부형(父兄)에까지 미쳤습니다. 풍습이 아름답지 못하니, 마땅히 칙려(飭勵)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권현을 삭직(削職)하라고 명하였다.

 

8월 29일 을묘

어떤 별이 여성(女星) 아래로 흘러갔는데, 크기는 주먹만 하였고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이때 장차 경과(慶科)의 정시(庭試)를 설행(設行)하기로 되어 있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원량(元良)이 입학(入學)한 뒤 선비들 가운데서 준재(俊才)를 얻고자 하여 특별히 시학(視學)을 명했으나 곧 문구(文具)와 같이 되어버려 마음속으로 항상 개연스럽게 여겼다. 이번의 정시도 또한 친히 현량(賢良)을 시험하고자 하는 것인데, 만약 당일로 방방(放榜)한다면 반드시 인재를 놓쳐버리는 일이 많을 것이다, 그것을 고관(考官)에게 신칙하여 정신을 가다듬어 모래를 일어 금을 가려내듯 함으로써 나의 지극한 뜻을 준행(遵行)케 하라."
하였다.

 

8월 30일 병진

이때 관동(關東)의 여러 고을에 거듭 흉년이 들었으므로 굶주린 백성들이 무리를 지어 도둑이 되어 공겁(攻劫)을 자행하니, 조정에서 근심거리로 여겼다.

 

헌부(憲府)와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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