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일 무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정경(正卿)이 몹시 적다 하여 재신(宰臣) 정우량(鄭羽良)과 김약로(金若魯)를 발탁할 것을 청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김약로의 경우 신(臣)처럼 불초(不肖)한 자가 어찌 감히 내거(內擧)의 뜻을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경(亞卿)의 숙망(宿望)으로는 이종성(李宗城)만한 이가 없는데, 지난번에 이미 천망(薦望)하였지만 아직 윤허받지 못하고 있으므로 신은 바야흐로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종성은 참으로 총재(冢宰)의 재목이다. 그러나 바야흐로 번선(藩宣)에 있으니, 우선 정사(政事)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려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정우량과 김약로를 승품(陞品)시키라고 명하였다. 김재로가 능행(陵行) 때 종신(宗臣)이 반열(班列)에서 지레 돌아간 것은 조정의 체통에 관계되는 문제라 하여 종부시(宗簿寺)로 하여금 규찰(糾察)하게 할 것을 청하고, 서장관(書狀官) 이명곤(李命坤)은 양친이 모두 연로하여 멀리 보내서는 안된다 하여 체임(遞任)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3일 기미
간원(諫院) 【정언(正言) 송시함(宋時涵)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송익휘(宋翼輝)·양취달(楊就達)을 국문(鞫問)하는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또 아뢰기를,
"남에게 탄론(彈論)을 입은 사람이 만약 변명할 만한 일이 있으면 단지 평탄한 말로 할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권현은 도리어 말한 사람을 꾸짖었으니, 너무나도 맑은 조정의 아름다운 풍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유신(儒臣)이 이미 죄줄 것을 청하였고 성명(聖明)께서도 또한 견벌(譴罰)을 베푸셨습니다. 임정(任珽)이 정사(政事)에 임하여 근실(謹實)하지 않았는데, 피혐(避嫌)하지 아니한 채 다른 사람에게 호의(呼擬)하도록 내맡겨 사람들의 말이 있게 한 데 대하여는 어찌 유독 규경(規警)하는 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전 대사간 임정을 파직(罷職)하소서. 함안 군수(咸安郡守) 이휘진(李彙晉)은 직접 악기(樂技)를 쥐고 영인(伶人)들 사이에 끼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기생과 마주보고 일어나 춤을 추면서 부끄러워할 줄을 몰랐습니다. 더욱이 대망(臺望)에 통의(通擬)된 것은 진신(搢紳)을 더욱 욕되게 만들었으니, 도태시키는 법은 이런 무리에게 먼저 베풀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청컨대 함안 군수 이휘진을 영원히 대선(臺選)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형조 참판(刑曹參判)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노쇠하고 병들었다는 이유를 들어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돈유(敦諭)하고, 사송(詞訟)의 직임은 유신(儒臣)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라 하여 체직(遞職)하라고 명하였다.
9월 4일 경신
조상경(趙尙絅)을 판의금(判義禁)으로, 김상석(金相奭)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윤급(尹汲)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정휘량(鄭翬良)을 응교(應敎)로, 민수언(閔洙彦)을 장령(掌令)으로, 홍계희(洪啓禧)를 정언(正言)으로, 이이장(李彝章)을 지평(持平)으로, 서종옥(徐宗玉)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홍중일(洪重一)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정준일(鄭俊一)을 승지(承旨)로, 박필주(朴弼周)를 찬선(贊善)으로 삼았다.
지돈녕(知敦寧) 김환(金鍰)을 불러 보았다. 김환은 춘천(春川) 사람으로 문과(文科)에 올라 6품관(六品官)을 거쳤는데, 임금이 기로(耆老)로서 특별히 직질(職秩)을 더하라 명하였으며, 누차 옮겨 지돈녕에 이르렀다. 김환이 상소하여 성학(聖學)에 부지런하고 보색(保嗇)에 힘쓸 것과 몸소 행하여 세자(世子)의 본보기가 되고 궁박한 백성을 우휼(優恤)할 것을 청하였는데, 질박하고 정직한 말이 많았다. 임금이 불러들이게 했는데 김환의 나이 그때 아흔 셋이라 임금이 두 환시(宦侍)로 하여금 겨드랑이를 부축해 오르내리게 하였다. 그러나 김환은 정력(精力)이 아직 강건하여 능히 응대(應對)하는 데 차이남이 없었다. 그리고 번뇌를 줄이고 절선(節宣)에 삼가시라고 면계(勉戒)하는 말을 진달하자 임금이 앞으로 나아와서 우러러 보라고 명하였다. 승지가 그는 시에 능하다고 말했으므로 지어 보라고 명하자 즉시 칠언 절구(七言絶句)를 지어 스스로 써서 올리니, 이에 임금이 고비(皐比)206) 를 내려 총애하였다. 그의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왔는데, 또한 나이가 일흔이 넘었으므로, 임금이 듣고 특별히 제직(除職)하라고 명하였다.
9월 5일 신유
11월과 12월에 형조(刑曹)의 계복(啓覆)207) 을 행하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승지에게 열성조에서 계복한 월차를 고찰하라고 명하니, 승지가 아뢰기를,
""선조(宣祖) 때에는 춘추(春秋)의 시기에 얽매이지 않고 2월, 3월에 행하였고, 인조(仁祖)·효종(孝宗) 두 조정에서는 9월, 10월에 행한 적이 많았으며, 선조(先祖)에서도 또한 9월, 10월에 행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곧 외방(外方)의 문안(文案)이 늦게 오기 때문이다."
하고, 마침내 이제부터 이후로는 반드시 11월, 12월의 순전(旬前)에 정행(定行)케 하라고 명하였다.
9월 6일 임술
평안 감사(平安監司) 조관빈(趙觀彬)이 대신(大臣)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지 않고 떠났다고 비국(備局)에서 초기(草記)로 추고(推考)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7일 계해
판부사(判府事) 유척기(兪拓基)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연전에 장임(將任)의 의망(擬望)에서 박찬신(朴纘新)을 빼버리고 새로 장태소(張泰紹)·윤택정(尹宅鼎)을 의망했다 하여 대신(大臣)이 심지어 신(臣)을 일러 오로지 편벽된 논의를 내고 있다고 했다 합니다. 대저 국가에서 사람을 임용함에 있어서 누군들 중요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만, 장임에 두는 것을 가장 중대하게 여기고, 인신(人臣)이 나라를 저버림에 있어서 그 죄가 한가지만이 아니나 편당(偏黨)을 가장 심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신이 외람되게도 묘당(廟堂)에 있으면서 진실로 장임의 진퇴(進退)에 있어서 전적으로 편벽된 논의를 내었다면, 그 죄가 큰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3년이 지난 뒤 연석(筵席)에서 대신의 논척(論斥)을 거듭 입었으니, 국법(國法)으로 헤아려 보건대, 엄한 견책(譴責)을 받음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시애(撕捱)함이 지나치다. 즉시 올라오라."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 또한 상소하여 연석에서 실언(失言)했다 하여 인구(引咎)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9월 9일 을축
어떤 별이 규성(奎星) 아래서 나왔는데, 크기는 주먹만 하고 빛깔을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정시(庭試)의 응시자에게 친히 책제(策題)를 내었다. 양역(良役)·학교(學校)·군제(軍制)·용인(用人)·전화(錢貨) 다섯 조목으로 문목(問目)을 냈는데, 거의 1천 자(字)가 되었다. 책제를 내걸자 이미 밥 먹을 시간이 되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논어(論語)》〉 향당편(鄕黨篇)에 ‘임금을 모시고 시식(侍食)한다.’고 하였으니, 옛날에 이런 예(禮)가 있었던 것이다."
하고, 여러 시관(試官)들에게 앞에서 시식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성심(誠心)으로 고시(考試)해서 준재(俊才)를 얻기를 기약하라고 면칙(面飭)하였다.
9월 10일 병인
입시(入試)해 과차(科次)하여 이맹휴(李孟休) 등 10명을 뽑았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윤용(尹容)이 삼수(三水)·갑산(甲山)의 여러 진보(鎭堡)가 조잔(凋殘)하다 하여 해마다 지급하는 무명을 더 줄 것을 청하고, 경상 감사(慶尙監司) 심성희(沈星希)가 울산(蔚山) 등 여섯 고을의 수재(水災)가 가장 혹심한 곳에 저치미(儲置米)를 내어 진휼(賑恤)할 것과 환곡(還穀)·신포(身布)도 또한 아울러 견감(蠲減)시켜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9월 11일 정묘
김상로(金尙魯)를 대사성(大司成)으로, 심악(沈)을 사간(司諫)으로, 김상적(金尙迪)을 수찬(修撰)으로, 이재(李縡)를 우참찬(右參贊)으로 삼았다.
간원(諫院)으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2일 무진
장령 민수언(閔洙彦)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일전에 정시(庭試)에서 친히 책제(策題)를 내셨을 때 부(賦)로 시권(試券)을 올린 유생(儒生)이 한 사람 있었다고 합니다. 자못 나라의 시험을 엄히 하고 사습(士習)을 바로잡는 뜻이 아니니, 적발해 멀리 귀양보내야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어찌 족히 책망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동경연(同經筵) 원경하(元景夏)가 붕당(朋黨)의 폐해(弊害)를 가지고 말하기를,
"섭향고(葉向高)는 동림당(東林黨)208) 의 사람으로서 지론(持論)이 공평하였습니다. 명(明)나라 말기에 당파(黨派)가 나뉘어졌을 때 미륜(彌綸)·보합(保合)의 책임을 스스로 떠맡아 반드시 국가가 화평(和平)한 복(福)을 누리게 하려 했으니, 매우 가상하게 여길 만합니다."
하고, 이어서 그 소장 가운데 한 두 구절을 외니, 임금이 옥당(玉堂)에 명하여 그 소장을 베껴서 들이게 하였다.
9월 13일 기사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6월에 단자(單子)를 거둔 뒤 지금 80일이 되도록 상직(相職)을 헛되이 띠고 있습니다. 정부(政府)의 등록(謄錄)을 상소해 보아도 신과 같은 경우는 있지 아니합니다. 일이 상례(常例)와는 달라 청문(聽聞)을 놀라게 하였으니, 바라건대, 처분(處分)을 내리시고 어질고 덕이 있는 이로 다시 복상(卜相)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9월 14일 경오
어떤 별이 왕량성(王良星) 아래로 흘러갔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불러 보았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흥해(興海) 앞 바다에는 산이 불쑥 솟아났고, 영남(嶺南)에는 홍수가 졌으며, 물고기의 뱃속에 사람의 귀·코·손가락 마디가 있어 바닷가의 사람들이 물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하니, 큰 변괴(變怪)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해서(海西)와 호서(湖西)의 도신(道臣)이 금년의 재결(災結)에 대해 조정에서 무오년209) ·을묘년210) 의 총수(總數)에 견주어 장차 근거없이 세금을 징수하게 한다는 이유로 해서는 2천 결(結), 호서는 3천 결의 재결을 더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관동(關東)의 수령(守令)은 진상(進上)을 궐봉(闕封)한 일로 좌파(坐罷)되는 수가 많은데, 보내고 맞아할 때 폐해를 끼치게 되니, 잉임(仍任)시킴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의 적손(嫡孫)에게 직임을 제수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송인명이 수안(遂安)의 동산(銅山)을 호조(戶曹)·진휼청(賑恤廳)·삼 군문(三軍門)으로 하여금 채취해 돈을 주조(鑄造)하게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북도 별견 어사(北道別遺御史) 홍계희(洪啓禧)가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불러 수령(守令)이 잘 다스리고 있는지의 여부를 물었다. 그리하여 진휼(賑恤)을 잘했다하여 정평 부사(定平府使) 조성서(趙星瑞)·고원 군수(高原郡守) 한지(韓址)는 가자(加資)하고, 부령 부사(富寧府使) 정여직(鄭汝稷)에게는 표리(表裏)를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또 잘 다스리지 못했다 하여 회령 부사(會寧府使) 우하형(禹夏亨)·홍원 현감(洪原縣監) 홍일함(洪一涵)을 모두 나처(拿處)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북로(北路)의 지형(地形)에 대해 묻자 홍계희가 소매 속에서 지도를 꺼내 올리고 조리 있게 대답했는데, 매우 상세하였다. 임금이 서계(書啓)를 보며 말하기를,
"어사(御史)가 정밀하고 상세하여 차견(差遣)한 뜻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마땅히 포상하여 발탁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며칠 뒤 마침내 중비(中批)로 홍계희를 발탁하여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삼았다. 홍계희는 재능이 조금 있었으나 성품이 간사(奸邪)하였다. 처음에는 이재(李縡)를 스승으로 섬겼으나 뒤에는 또 반대로 송인명에게 빌붙어 마침내 그 취허(吹噓)를 얻었으니, 사람들이 반복(反復)하는 소인(小人)이라 지목했다 한다.
강원(江原) 전 감사(監司) 김상로(金尙魯)가 아뢰기를,
"회양 부사(淮陽府使) 어유룡(魚有龍)은 진정(賑政)이 한 도내(道內)에서 으뜸입니다."
하고, 황해 감사(黃海監司) 송수형(宋秀衡)이 아뢰기를,
"서흥 현감(瑞興縣監) 서종수(徐宗秀) 또한 진정이 으뜸입니다."
하니, 모두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근래 고적(考績)이 공정하지 아니하여 진휼(賑恤)을 잘했다고 가자(加資)를 청함에 있어서도 세력이 있지 아니하면 불가능하니 진실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어유룡은 경내(境內)에 유민(流民)이 많다 하여 대간(臺諫)의 탄핵까지 받았는데 도신(道臣)은 도리어 맨먼저 포양(褒揚)하였으니, 그 종핵(綜核)하는 뜻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태백산사고본】 41책 56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8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근래 고적(考績)이 공정하지 아니하여 진휼(賑恤)을 잘했다고 가자(加資)를 청함에 있어서도 세력이 있지 아니하면 불가능하니 진실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어유룡은 경내(境內)에 유민(流民)이 많다 하여 대간(臺諫)의 탄핵까지 받았는데 도신(道臣)은 도리어 맨먼저 포양(褒揚)하였으니, 그 종핵(綜核)하는 뜻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9월 15일 신미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여 《심경(心經)》을 강(講)하고,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시독관(侍讀官) 김상적(金尙迪)이 말하기를,
"제왕(帝王)의 도(道)는 비록 학문을 근본으로 하지만, 또한 반드시 좌우에서 필위(弼違)하는 힘에 의지하는 법입니다.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 두연(杜衍)이 궁중(宮中)에서 내린 은지(恩旨)를 수십 차례나 봉환(封還)하자, 인종이 구양수(歐陽脩)에게 ‘짐(朕)은 궁중에서 은상(恩賞)에 관한 일이 있으면 두연이 불가하다 해서 그만둔 적이 많다.’ 하였습니다. 인신(人臣)이 임금의 잘못이 장차 싹트려 할 즈음에 능히 그치게 할 수 있다면 어찌 보탬이 적겠습니까? 전하께서는 한 번 생각해 보소서. 오늘날 조정 신하 중에 이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신 등은 비록 두연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전하께서는 마땅히 인종을 본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인종이 두연의 말 때문에 그쳤던 것은 또한 극기(克己)의 공력(功力)이 부족한 데 말미암은 것이다. 만약 자연스럽게 ‘극기복례(克己復禮)’ 한다면, 어찌 남의 말을 기다릴 것인가? 이것은 인종과 같이 되고 말 뿐인 것이다. 당(唐)나라 태종(太宗) 같은 이도 또한 남을 비평하는 데는 능했지만 능히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지 못했기에 후세 사가(史家)에게 기롱(譏弄)거리를 남겼던 것이다. 내가 지나간 해에 ‘양성(養性)’이라고 헌(軒)의 이름을 지었지만, ‘극기(克己)·진심(盡心)’의 공력에 내가 아직 능하지 못하기 때문에 능히 실천하지 못한 것이다. 돌아보고 스스로 반성하니 인종에게 부끄러움이 있다."
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정휘량(鄭翬良)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인종에게 부끄럽다고 하교하였습니다만, 신 등은 바야흐로 요(堯)·순(舜)으로써 전하께 바라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이처럼 스스로 보잘것 없다고 평가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에게 한 가지 병통(病痛)이 있다. 비가 오거나 볕이 나거나 춥거나 덥거나 간에 이것은 천시(天時)의 상도(常道)인데, 언제나 이것 때문에 밤낮으로 마음을 졸이고 있다. 지금 가을 기운이 바야흐로 생기고 있어 몹시 추운데 이르지는 않았지만, 항상 우리 백성들이 춥지나 않을까 염려가 된다. 한 번 비가 오면 장마가 질까 염려하고 한 번 볕이 나면 가뭄이 들까 염려하여 비록 한 발짝 떼놓거나 한 번 숟가락을 들 때라 하더라도 한결같이 백성의 일만 생각하느라 마음이 항상 어릿어릿하다. 이것은 비록 말 달리기나 사냥을 좋아하는 것과는 다르다 하더라도 중절(中絶)하지 못하는 병통인 것이다."
하였다. 정휘량이 등이 절하고 엎드려 말하기를,
"성상께서 백성을 걱정하심은 지극하니, 신은 흠탄(欽歎)해 마지 아니합니다만, 이 또한 집착하는 누(累)입니다. 물(物)이 올 때 순응(順應)하면, 일이 응하는 것은 과거(過去)에도 이미 있었던 효험입니다."
하고, 김상적이 말하기를,
"성심(聖心)이 홀로 노고(勞苦)하시지만 뭇 신하가 능히 대양(對揚)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북로(北路)의 재황(災荒)과 동협(東峽)의 도적의 경보(警報)가 마음을 놀라게 하지 않음이 없는데, 빈대(賓對)는 비록 행하고 있지만 실심(實心)으로 강구(講究)하여 행하는 정사(政事)가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신은 그윽이 개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어서 춘방(春坊)의 입직관(入直官) 민택수(閔宅洙)·조재덕(趙載德) 등을 부르라 명하고, 세자(世子)가 직접 쓴 ‘어제 동몽선습 서문(御製童夢先習序文)’을 내어 보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여 보고는 말하기를,
"어린 나이의 필세(筆勢)와 자획(字畫)이 엄정(嚴正)하니, 진실로 종사(宗社)의 무한한 복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어좌(御座)에서 내려와 앉아 친히 《병장도설(兵將圖說)》의 서문(序文)을 지었으니, 대개 《병장도설》은 성조(聖祖)께서 친히 지으셨으므로 공경하여 그러했던 것이다. 승지(承旨) 홍상한(洪象漢)이 동궁(東宮)의 필적(筆蹟)을 보배로 여겨 완상(玩賞)하는 자료로 삼기 위해 하사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지보(至寶)는 승지만 혼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신 등은 나누어 갖기를 청합니다."
하니, 홍상한이 말하기를,
"아무리 야광 명월(夜光明月) 같은 구슬이라 할지라도 나누어 깨뜨리면 어찌 완전한 보배가 되겠습니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다투며 갖고자 하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진본(眞本)을 춘방(春坊)에 그대로 두고 연신(筵臣)들이 각기 하나씩 본떠 가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임금이 날마다 경연(經筵)을 열었지만 유신(儒臣) 중에 박학(博學)하여 임금의 뜻에 맞는 사람이 없어 이미 문난(問難)하는 실효(實効)가 없었고, 알기 쉬운 한두 가지 문의(文義)만 대략 진달해서 책임을 면하니, 임금이 문득 책을 덮는지라 성학(聖學)에 도움되는 것은 조금도 없었다. 하루 종일 연석(筵席)에서 단지 아첨하는 말만 들리니, 식자(識者)들이 근심하고 탄식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1책 56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8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역사-고사(故事)
사신은 말한다. "임금이 날마다 경연(經筵)을 열었지만 유신(儒臣) 중에 박학(博學)하여 임금의 뜻에 맞는 사람이 없어 이미 문난(問難)하는 실효(實効)가 없었고, 알기 쉬운 한두 가지 문의(文義)만 대략 진달해서 책임을 면하니, 임금이 문득 책을 덮는지라 성학(聖學)에 도움되는 것은 조금도 없었다. 하루 종일 연석(筵席)에서 단지 아첨하는 말만 들리니, 식자(識者)들이 근심하고 탄식하였다.".
정우량(鄭羽良)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서명빈(徐命彬)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서명구(徐命九)를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이성중(李成中)을 수찬(修撰)으로, 남태제(南泰齊)를 교리(校理)로, 홍계희(洪啓禧)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9월 16일 임신
영남(嶺南)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에게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영남의 곡식을 북로(北路)로 운반하는 배가 많이 가라앉고 또 홍수로 인해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으니, 임금이 측은하게 여겨 하교하기를,
"백성의 군부(君父)가 되어 이 일을 듣고서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왕정(王政)을 비록 능히 파도 가운데 베풀 수는 없다 하나, 혹시라도 건져낸 사람이 있으면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고휼(顧恤)하고 묻어주게 하라. 아! 이번 홍수의 재해(災害)는 또한 나의 박덕(薄德)에 연유한 것이니, 이것이 어찌 백성을 몰아 홍수에 빠지에 한 것과 또한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하고, 사신(詞臣)에게는 제문(祭文)을 짓게 하고 도신(道臣)에게는 제단(祭壇)을 설치해 치제하게 하였다.
9월 17일 계유
성범석(成範錫)·김광국(金光國)을 정언(正言)으로, 서명빈(徐命彬)을 동지 부사(冬至副使)로, 심성진(沈星鎭)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유만추(柳萬樞)를 장령(掌令)으로, 김상적(金尙迪)을 헌납(獻納)으로, 조호신(趙虎臣)을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야대(夜對)를 행하여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강(講)하라 명하고, 말하기를,
"이 잠(箴)은 야강(夜講)에 적절하다."
하였다. 강하기를 마치자, 선온(宣醞)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윤광의(尹光毅)가 말하기를,
"군상(君上)이 비록 행하고자 하는 일이 있어도 대계(臺啓)로 쟁집(爭執)하면 행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조종의 아름다운 제도였습니다. 지난번 박성옥(朴成玉)이 능행(陵幸)의 기일을 조금 물리실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성상께서는 정계(停啓)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능행을 행하셨습니다. 후세의 인주(人主)가 만약 이것을 전례(前例)로 삼아 비록 지나친 거조(擧措)가 있다 할지라도 대계(臺啓)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행한다면, 장차 대각(臺閣)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신은 그윽이 개연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9월 18일 갑술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시독관(侍讀官) 정휘량(鄭翬良)이 말하기를,
"삼가 들으니, 서북(西北)과 송도(松都)의 무과(武科) 신은(新恩)을 후원(後苑)에서 불러 보았다 하는데, 정원(政院)에서는 이미 하교를 받고서도 승지와 사관(史官)이 같이 입시할 것을 청하지 않아 거의 사사로이 불러 보는 것과 같았으니, 승지의 실수입니다. 추고(推考)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례(古例)에 간혹 이와 같은 경우가 있었으니, 추고하지 말라."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극변(極邊) 사람 중에 혹 기용할 만한 사람이 많이 있으나, 전조(銓曹)에서 찾아 기용하지 않고 있으니, 개연하게 여긴다."
하니, 동경연(同經筵)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영남은 본래 추로(鄒魯)와 같은 지방인데도 조정에서 또한 수용(收用)하지 아니하니, 몹시 개탄스럽습니다. 고(故) 참의(參議) 이동표(李東標)와 같은 사람은 안동(安東) 사람으로 기사년211) 에 홀로 청의(淸議)를 지켰고,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 등을 신구(伸救)하는가 하면 민장도(閔章道)의 청선(淸選)을 저지해 막았으니, 이런 사람은 표장(表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일찍이 진백(陳白)하여 그 아들 이제겸(李濟謙)을 녹용(錄用)할 것을 청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대간(臺諫)은 이제겸이 무신년212) 에 찰방(察訪)으로 있을 때 말을 잃은 것을 범역(犯逆)한 죄과로 돌렸으니, 대개 그 말이 신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지금 듣건대, 이제겸은 이미 죽고 자손이 궁벽해서 굶주리고 있다 하니, 더욱 딱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봉사손(奉祀孫)을 조용(調用)하도록 허락하였다. 이어서 원경하에게 말하기를,
"경(卿)이 일전에 말하기를, ‘이맹휴(李孟休)는 이잠(李潛)의 조카인데, 이잠은 선조(先朝)께 득죄(得罪)한 자이며 그 조카도 또한 하자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잠이 가령 역적질을 했다 할지라도 그 조카의 사람됨이 쓸 만하다면 옛날에 도척(盜跖)과 유하혜(柳下惠)213) 의 경우처럼 비록 부자·형제 사이라 하더라도 또한 구애하지 아니한 경우가 있었다."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옛날의 심충(沈充)214) 은 범역(犯逆)했지만 그 아들 심경(沈勁)은 명신(名臣)이 되었습니다, 아조(我朝)의 경우 심정(沈貞)의 손자 심수경(沈守慶)은 〈선조(宣祖) 때〉 재상(宰相)이 되기도 하였으니, 조카는 손자에 견주어 볼 때 더욱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신이 어찌 저지해 막고자 해서 그랬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규모가 이와 같으니, 이것이 인재를 얻어 쓸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하였다.
9월 19일 을해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관동백(關東伯)이 환곡(還穀)의 묵은 포흠(逋欠)을 정지시켜 줄 것을 장청(狀請)하였는데 반을 감해 주도록 허락함이 마땅하여, 북백(北伯) 또한 관서(關西)에서 빌린 돈 2만 민(緡)을 우선 그대로 보류해 진휼(賑恤)에 보태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또한 허락해야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평안 병영(平安兵營)의 장십부군(壯十部軍)의 군제(軍制)가 문란한 것과 안주목(安州牧)의 성첩(城堞)이 허물어진 것에 대해서는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이정(釐正)하고 수리하도록 신칙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오랫동안 인입(引入)하다가 이때에 와서 또한 나와 입시(入侍)했는데, 상직(相職)을 굳이 사양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경상 감사 김상성(金尙星)에게 하유(下諭)하기를,
"경(卿)에게 방면(方面)을 맡겼고 경이 바야흐로 부임(赴任)하려 하니, 내가 남쪽을 돌아보는 근심이 없게 되었다. 힘쓸지어다."
하고, 드디어 하교하기를,
"영남의 좌도(左道) 연안(沿岸)에 관한 일은 이미 하교하였지만, 바닷가의 백성들을 상상한다면 먹고 쉬는 것을 어찌 방종하게 할 수 있겠는가? 크고 작은 진상(進上)으로서 좌도 연안에서 봉진(封進)하는 것은 맥추(麥秋)까지를 한정하여 정봉(停捧)함으로써 내가 자성(慈聖)의 덕의(德意)를 펴고 소민(小民)의 불쌍하고 측은한 정상을 진념(軫念)함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처음에는 동조(東周)에 진봉하는 것 외에는 정봉(停捧)하라고 하교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또 하교하기를,
"자성의 뜻은 이미 견감(蠲減)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니, 백성을 애휼(愛恤)하는 덕이 지극하다.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증자(曾子)와 같이 해야 옳으니, 내가 어찌 감히 우러러 체득(體得)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간원(諫院) 【대사간(大司諫) 심성진(沈星鎭)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무신(武臣)이 편안한 것만을 도모하는 습관은 진실로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북병사(北兵使) 정찬술(鄭纘述)은 원래 대단한 질병이 없는데도 변지(邊地)에 가는 것을 싫어하여 마침내 체직(遞職)되기에 이르렀으며, 묘당(廟堂)에서 체직할 것을 청한 것도 또한 법을 굽혀 사정(私情)을 따른 것입니다. 만약 이같이 하여 그만두지 않는다면, 국가에서는 장차 변지에 무신을 차견(差遣)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전 북병사 정찬술을 잉임(仍任)시켜 출발하도록 독촉하게 하소서. 근래 경관(京官)이 만일 잔폐(殘廢)한 고을을 얻으면 초기(草記)하여 잉임을 청하는 것이 진실로 하나의 폐습(弊習)이 되고 있습니다. 고성 군수(高城郡守) 조철명(趙哲命)이 한성부(漢城府)에 잉임된 것은 자취가 잉임을 도모한 데 관계되니, 청컨대 한성부의 해당 당상관(堂上官)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고성 군수 조철명은 잉임시키도록 하소서. 그리고 연석(筵席)이 엄숙하지 아니하여 잠시 재신(宰臣)과 중신(重臣)이 서로 번갈아가며 시끄럽게 떠들다가 말소리가 점차 높아졌는데도 승지가 경칙(警飭)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입시(入侍)했던 중신·재신·승지를 모두 추고(推考)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이휘항(李彙恒)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김원재(金遠材)를 국문(鞫問)하자는 청(請)은 정계(停啓)하였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신만(申晩)이 청석동(靑石洞)에 성(城)을 쌓아 서쪽의 적(敵)이 들어오는 길을 막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물어 보고 신만으로 하여금 지형(地形)을 그려 올리게 하였는데, 뒤에 끝내 그만두게 하였다.
9월 20일 병자
임금이 도목정(都目政)에 친림(親臨)하였다. 이조 판서 민응수(閔應洙)·참판 원경하(元景夏)·참의 윤급(尹汲)·병조 판서 김시형(金始炯) 등이 나아가니 임금이 민응수에게 말하기를,
"많은 선비에게 친히 시험을 보이고 대정(大政)을 친히 행하여 초야(草野)의 선비를 조용(調用)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기고 있다."
하고, 이맹휴(李孟休)는 친민(親民)하는 벼슬에 우선 시험해 볼 만하다 하여 한성 주부(漢城主簿)에 제수하라 명하고, 병조 정랑(兵曹正郞) 오명수(吳命修)는 재주가 있다 하여 외읍(外邑)에 시험삼아 기용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여러 신하들에게 선온(宣醞)하였는데, 이튿날에 파(罷)하였다. 민택수(閔宅洙)를 헌납(獻納)으로, 한억증(韓億增)을 수찬(修撰)으로, 남태제(南泰齊)를 보덕(輔德)으로, 조돈(趙暾)을 설서(說書)로, 김상적(金尙迪)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천보(李天輔)를 교리(校理)로 삼았다. 진사(進士) 이복해(李福海)를 부망(副望)으로 능관(陵官)에 의망(擬望)하고 ‘영남 사람’이라고 주(註)를 달았는데, 낙점(落點)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복해는 평소 서울 사람으로 영외(嶺外)에서 잠시 산 적이 있었는데, 임금이 누차 영남 사람을 수용(收用)하라고 신칙하자, 마침내 주까지 달아 벼슬을 얻게 되었으니, 전관(銓官)이 사정(私情)을 따라 임금을 속임이 대개 이와 같았다.
9월 22일 무인
경기(京畿) 사람 태막(太漠)이 그 형을 죽였으므로 삼성 추국(三省推鞫)하고 결안 정법(結案正法)하였다.
9월 23일 기묘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송(宋)나라 신하 사마광(司馬光)은 발병이 나자 면직(免職)을 바랐습니다. 대저 사마광의 숙덕(宿德)·중망(重望)으로는 앉아서 천하를 진압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조정에 나아가지 못하고 공직(供職)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니, 신이 감히 사마광이 하지 않았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걷고 추창(趨蹌)하고 절하고 무릎 꿇는 것이 모양을 이루지 못하는 정상은 천일(天日)이 해가 위에 있으니, 감히 속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청컨대 체면(遞免)을 허락하여 공사(公私)가 모두 다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연석(筵席)에서 이미 하유(下諭)하였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모름지기 잘 조섭(調攝)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4일 경진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서 친히 태학(太學)의 거재 유생(居齋儒生)을 시험하였다. 옛날의 제도는 거재 유생은 모두 이름을 기록하고 들어왔으며, 강(講)에 능하지 못한 사람을 스스로 ‘불통(不通)’이라 쓰고 나가게 되어 있었는데, 이 날은 임금이 특별히 스스로 원하는 대로 따라주라고 명하니, 혹은 강(講)으로 혹은 제술(製述)로 하여 이틀 만에 마쳤다. 고유(高裕)가 제술의 수석을 차지했는데, 그때 나이 스물 하나였다. 고유는 상주(尙州) 사람으로 주선(周旋)하고 응대(應對)하는 것이 자못 정상(精詳)·한숙(閑熟)하였으므로 그를 본 연신(筵臣)들이 모두 인재(人材)라고 칭찬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들으니, 그의 먼 조상을 향현사(鄕賢祠)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하니, 이 사람은 영남의 사족(士族)입니다. 옛날의 정경세(鄭經世)는 9대(代)의 유학(幼學)으로서 남상(南床)215) 의 극선(極選)이 되었으니, 사람을 쓰는 도리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는 법입니다."
하였다. 강(講)에서는 생원(生員) 김택려(金澤麗)가 또한 수석을 차지했는데, 고유와 함께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다. 참고관(參考官) 이중경(李重慶)이 막 안동(安東)에서 체임(遞任)되어 돌아왔으므로 임금이 본읍(本邑)의 사습(士習)을 물으니, 이중경이 말하기를,
"안동에는 무신년216) 에 관련된 자가 많은데, 나라에서 깊이 다스리지 아니하여 법망(法網)을 벗어난 자들이 제멋대로 당론(黨論)을 일삼기 때문에 신이 도신(道臣)과 의논하여 형벌로 다스린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그 향권(鄕權)을 나누어 그 무리들로 하여금 전적으로 그 직임을 맡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무신년에 역적을 다스린 것이 너무 너그럽긴 했지만, 이 또한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德)인 것입니다. 이제 와서는 적도(賊徒)가 변하여 이미 양민(良民)이 되었으니, 어찌 반드시 추구(追究)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남의 사람을 물리치고 쓰지 않아 자포자기함이 이와 같으니, 이 또한 조정의 잘못이다."
하였다.
태학유생(太學儒生)의 강제법(講製法)을 고쳐서 정하라고 명하였다. 예전의 제도는 태학의 거재 유생(居齋儒生)은 사맹삭(四孟朔) 때에 단지 강(講)만 시험할 뿐이었는데, 이때에 와서 임금이 이미 자원(自願)하는 대로 강(講)이나 제술(製述)로 하도록 특별히 명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학교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것은 그 근본이 임금과 스승에게 있다. 이제부터 이후로 도기 유생(到記儒生)은 이번의 강과 제술을 겸행(兼行)한 데 의거하되 사유(師儒)의 장관(長官)이 자주 고시(考試)하도록 하라. 그리고 만약 전강(殿講)이나 제술에 혹시라도 스스로 ‘불통(不通)’이라고 쓰거나 백지(白紙)를 낸다면 그때의 대사성(大司成)은 마땅히 그 태만함을 신칙하겠다. 모든 절제(節製)는 또한 혹 도기 유생으로써 시행하되, 강과 제술에서 마땅히 각각 수석 한 사람을 뽑을 것이니, 그것을 태학으로 하여금 잘 알도록 하라."
하고, 선비를 양성하는 비용은 묘당(廟堂)에 가서 의논하여 증액하게 하였다.
9월 26일 임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장령 유만추(柳萬樞)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정에서 무너뜨리고 훼손할 수 없는 것이 체통(體統)이요, 사대부(士大夫)가 제멋대로 전도시킬 수 없는 것이 염의(廉義)입니다. 그런데 저번에 평안 감사(平安監司) 조관빈(趙觀彬)은 이미 서쪽 변방에 경급(警急)을 알리는 보고가 없었는데도, 단지 말단을 재촉하는 명령만 핑계대고 즉일로 사폐(辭陛)하고 허둥지둥 부임(赴任)하느라 두루 찾아다니며 하직 인사를 하는 예절을 그대로 폐하고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 처의(處義)의 구차함은 족히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묘당(廟堂)에서는 혹은 안면과 인정에 구애되고 혹은 형적(形迹)에 걸려, 연석(筵席)에서 청한 것은 이미 법을 굽혀 사정(私情)을 따른 데 관계되고, 추고(推考)를 아뢴 것은 또한 책임이나 면하고자 한 데 가까우니, 신은 그윽이 개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체통을 높이고 염의를 칙려(飭勵)하는 도리로 보아 마땅히 그냥 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조관빈에게 견파(譴罷)의 벌을 더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조정은 교화(敎化)를 주로 하고 풍속은 돈후(敦厚)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 법인데, 지난번 송시함(宋時涵)이 임정(任珽)의 일을 논박한 것은 풍속을 손상시킴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임정의 아비는 전례(前例)에 따라 의망(擬望)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그 아들에게 힘을 빌린 것이겠습니까? 그런데도 다른 사람이 도로 꾸짖은 말을 주워모아 마음을 써서 앞뒤를 가리지 않고 헐뜯고 배척하여 반드시 전조(銓曹)의 의망에서 뽑아 버리고야 말았습니다. 아! 그 아들을 공격하고자 하여 말을 그 어버이에게까지 미치게 되었으니, 세도(世道)가 이에 이르러 참으로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신은 송시함에게 삭파(削罷)의 벌을 더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순사(巡司)의 직책은 가볍지 아니하고 무겁습니다. 신시(申時)에 패(牌)를 받고 묘시(卯時)에 패를 바치는 것은 정식(定式)으로 몹시 엄한데, 어제 한 순장(巡將)은 문(門)을 닫는 시한이 이미 지난 뒤에 비로소 왔으니, 나처(拿處)하게 해야 마땅합니다."
하였다. 대개 조관빈은 고(故) 상신(相臣) 조태채(趙泰采)의 아들로서 세상에 원수진 사람이 많았으므로 오랫동안 시골에 있으면서 벼슬하지 않다가 이때에 와서 관서백(關西伯)이 되었다. 전례에 따라 마땅히 삼공(三公)에게 하직 인사를 했어야 하였지만,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우의정 조현명(趙顯命)과는 모두 혐원(嫌怨)이 있었으므로, 찾아다니며 하직 인사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그의 뜻을 알고는 연석(筵席)에서 재촉할 것을 청하자 이에 다음날 사조(辭朝)하고 떠났던 것이고, 송인명이 추고할 것을 계청(啓請)했던 것이니, 그 이른바 안면과 인정이란 김재로를 가르킨 것이며 형적이란 송인명을 지적한 것이었다. 임정이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었을 때 전장(銓長)이 임정의 아비 임수적(任守迪)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의망(擬望)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대신(臺臣) 권현(權賢)은 일찍이 임정의 동생인 임박(任璞)에게 논박당한 일이 있었으므로, 다시 대각(臺閣)에 들어오자 진소(陳疏)하여 도리어 임박을 꾸짖으면서 그의 형 임정이 전조에 있을 때 그의 아비의 벼슬을 의망한 잘못을 싸잡아 논박하였다. 그러자 송시함이 또 계속해서 논박하여 말하기를,
"권현이 도리어 꾸짖은 것은 진실로 그릇된 것이지만, 임정이 피혐(避嫌)하지 아니하고 남으로 하여금 불러 의망하도록 내맡긴 것도 또한 잘못이 있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다. 이에 전조에서 이로 인해 마침내 임정을 전조의 망(望)에서 뽑아버렸고 그 계사(啓辭)도 또한 정지하였으니, 유만추가 논박한 바는 대개 이 때문이었다. 순장(巡將)이란 전 승지(承旨) 강일규(姜一珪)를 가리킨 것이었다. 비답하기를.
"조관빈이 감히 시애(摲捱)하지 아니한 것은 마땅한 일이며, 하직 인사를 하지 아니한 것은 또 전례가 있다. 협잡(挾雜)하는 옛 버릇을 어찌 감히 나에게 다시 부리려 하는가? 송시함과 순장의 일은 아뢰 대로 하라."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대훈(大訓)을 내렸는데 어찌 감히 옛 버릇을 부리는가? 화(禍)를 당한 집안의 자손(子孫)에게 여전히 다시 욕을 보이려 하는 자는 마땅히 중죄(重罪)에 처하겠다."
하였다.
9월 27일 계미
번개가 쳤다.
김시형(金始炯)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이기진(李箕鎭)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천보(李天輔)를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임금이 전경 문시강(專經文臣講)을 직접 시험하였다. 예전의 제도는 오경(五經) 가운데에서 돌아가며 뒤돌아 앉아서 암송하게 되어 있었으나, 명관(名官)들은 걸핏하면 스스로 ‘불통(不通)’이라 쓰고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임금이 그 폐단을 알고는 이에 자원하는 대로 강(講)에 임하라고 명하니, 또 언해(諺解)가 없는 《예기(禮記)》·《춘추(春秋)》로 강(講)에 응하였으므로, 드디어 《주역(周易)》·《서전(書傳)》·《시전(詩傳)》으로 차례차례 강(講)을 시험함으로써 차례에 해당하는 글을 알아 미리 더 강습(講習)하도록 하고, 또 강(講)에 임하여 불통한 자로 하여금 수치를 알게 하였는데, 이날을 바로 정식(定式)한 뒤 첫번째 날이었다. 강원(講員) 중에 한 사람도 통(通)한 자가 없었으니 규례로 보아 파직(罷職)시켜야 마땅했지만, 임금이 그 원하는 바를 적중시켜 줄 것이라고 하여 단지 금추(禁推)하라고만 명하였다.
태학(太學)의 재임(齋任)은 30점(點)이 찬 뒤에 반제(泮製)에 응시하도록 허락하는 법을 정했다. 대개 절일(節日)의 과제(課題)는 본래 반유(泮儒)를 위해 설치한 것이었으나, 중고(中古) 이래로 지방의 선비에게 또한 응시를 허락했기 때문에 서울의 선비들은 마침내 거재(居齋)하는 자가 없게 되었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원점(圓點)의 제도를 시행하여 오랫동안 거재하게 한 것이다, 30점이란 하루 거재하는 것을 1점(點)으로 치는 반규(泮規)이었다.
임금이 유만추(柳萬樞)의 일을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에게 물으니, 송인명이 그 상소의 내용 때문에 인구(引咎)하고, 또 유만추를 극력 신구(伸救)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관빈(趙觀彬)에게 무슨 죄줄 만한 것이 있는가? 그런데 유만추가 은연중에 근거없는 말을 하였다. 또 끝에 가서 견책(譴責)을 청한 것은 곧 예전 버릇이었다. 나의 생각으로는 대훈(大訓)을 내린 뒤로 세 당(黨)은 물론하고 단서(丹書)217) 에 이름이 있는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탕척(蕩滌)해서 쓰고자 하였기 때문에 이맹휴(李孟休)의 일도 또한 여러 차례 하교한 바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축년218) ·임인년219) 의 일에 불안스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신하의 분의(分義)가 아닌 것이다."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유만추의 상소를 만약 ‘여전히 당습(黨習)이 있다.’ 하여 죄를 주신다면 옳겠지만, 대훈(大訓)을 불만스럽게 여겼다고 하신다면 억울합니다. 또 성상께서 화(禍)를 당한 집안의 사람을 대우하시는 도리란 불쌍히 여길 만한 사람은 수록(收錄)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은 탁용(擢用)하는 것이겠습니다만, 죄가 있는 자에게는 죄를 준 뒤에야 인심(人心)을 진복(鎭服)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화(禍)를 당한 집안의 사람을 꺼려서 비록 죄가 있다 할지라도 감히 말하지 아니한다면 저 무리들은 장차 꺼리는 바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또 누차 하교를 도로 거루어들일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유만추가 입시(入侍)하여 인피(引避)하니, 임금이 ‘협잡(挾雜)’이라 나무라고 체직(遞職)시켰다.
9월 28일 갑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용히 허물과 잘못을 생각히 보건대, 신(臣)이 직임에 걸맞지 아니한 바가 많으니, 신은 청컨대 죄다 들어 보고자 합니다. 신은 비록 보잘것 없기는 하지만, 그 직책은 옛사람이 이른바 ‘대인(大人)으로서 임금을 깨우치는 소임’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신은 망령되게도 스스로 헤아리지 아니한 채 문득 맹자(孟子)의 방심(放心)을 구(求)한다는 말을 외어서 올렸으니, 이는 시로 근본은 바로잡고 근원을 맑게 하는 묘결(妙訣)이자 요법(要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은 능히 그것을 마음속에 갖추어 두지 못하고서 군부(君父)에게 그것을 구하였으니, 그 참람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개 또한 구구한 근폭(芹曝)220) 의 정성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신이 감히 알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과연 그 실상을 체득하여 시험해 보셨습니까? 마음을 보존하느냐 놓아버리느냐는 비록 볼 수 있는 형적(形迹)이 없는 것 같지만, 기뻐하고 노여워할 즈음이나 목소리나 기색의 사이에 저절로 숨길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전하의 마음을 능히 항상 보존하지 못하시기에 칠정(七情)이 발현(發現)할 즈음에 간혹 때때로 평정(平正)을 잃는 경우가 있으니,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정성은 족히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말을 족히 성심(聖心)을 계발(啓發)하지 못하여, 전하로 하여금 잘못을 자주 반복하심을 면하지 못하게 한 것은 모두 신의 죄이니, 신이 직임에 걸맞지 아니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기근과 흉년이 거듭 들고 여역(癘疫)이 해를 이어 유리(流離)하거나 사망한 사람을 걸핏하면 억(億)으로 계산하고, 해골이 들녘에 널려 있으며 통곡 소리가 여리(閭里)에 가득하니, 이는 모두 귀와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차마 보고 듣지 못할 바입니다. 그리고 거센 바람, 괴이한 비, 땅이 꺼진 것, 산이 솟아난 것은 모두 경악(驚愕)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대저 음(陰)과 양(陽)이 어긋나고 요기(妖氣)와 재앙이 일어남은 대신(大臣)의 죄이니, 이것이 신이 직임에 걸맞지 아니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능히 체통(體統)을 엄하게 하고 조정을 높이지도 못하며, 능히 염치(廉恥)를 권려(勸勵)하고 조경(躁競)을 억제하지도 못하는가 하면, 능히 호세(豪勢)한 자를 그치게 하지 못해 소민(小民)으로 하여금 원망하게 하고, 능히 예양(禮讓)을 숭상하지 못해 풍속이 더욱 야박해지도록 하기도 하고, 묘당(廟堂)의 신하들 가운데 기꺼이 성실한 마음으로 담당하려고 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도 신은 능히 감동(監董)하지 못하고, 거조(擧措)하는 곳에서는 능히 한결같이 공정함을 좇지 못하고 있는데도 신이 능히 규정(糾正)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직임에 걸맞지 아니한 세 번째 이유입니다. 신의 뜻은 본래 시고 짠 것을 조제(調劑)하고 보합(保合)하여 우러러 성화(聖化)를 돕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필경에는 신 자신이 또한 가시나무를 밟고 물과 불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지금의 세도(世道)는 더욱 분열되고 선비들의 풍기(風氣)는 더욱 비열해지며, 천하(天下)의 일은 더욱 걱정을 금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조화시켜 두루 다스리고 앉아서 부박(浮薄)한 자들을 진복(鎭服)시킴은 신이 능한 바가 아니니, 신이 직임에 걸맞지 아니한 네 번째 이유입니다."
하였다. 차자가 들어가자 비답을 내리지 않고 단지 승지로 하여금 돈유(敦諭)하도록 명하였다.
9월 29일 을유
번개가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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