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병술
이의중(李毅中)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임양군(臨陽君) 환(桓)의 연시례(延諡禮)가 이 날 있었는데, 임금이 듣고 법악(法樂)을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장령 이천보(李天輔)가 또 상소하여 이선태(李善泰)의 상소에 대해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인신(人臣)이 권세(權勢) 때문에 죄를 얻고 일찍이 멸족(滅族)되지 아니한 경우는 있지 아니하였으니, 옛날부터 나라의 명맥을 손아귀에 쥐고 족히 한 세대(世代)의 위복(威福)을 누린 자가 아니라면 일찍이 이런 제목(題目)을 받은 자는 없었습니다. 그가 이른바 몰래 통색(通塞)을 조종했다는 것에 대해 신은 통색했다는 것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의 종형제(從兄弟)가 외람되게 영도(榮塗)에 있는데, 비유컨대 약하게 서 있는 나무와 같아서 바람이 불어오면 흔들리어 스스로 설 수 없을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어찌 권세(權勢)란 이름과 비슷한 것이 있겠습니까? 한 붕우(朋友) 사이의 사의(私義) 때문에 인신(人臣)의 극죄(極罪)를 몸에 더하게 되었으니, 아! 통탄스럽습니다. 지난번 한두 신하가 재신(宰臣)을 논박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은 그 사람과 본대부터 일찍이 아주 친하게 지내긴 했지만, 그 사람은 재신과도 같은 벗이었으니, 설령 신이 남과 불화를 일으키고자 한들 어찌 기꺼이 신의 말을 들어 남과 원한을 맺고 윗사람에게 죄를 얻으려 했겠습니까? 이것은 반드시 그럴 이치가 없는 일인데 도리어 신에게 죄를 옮기고자 하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10월 2일 정해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서 상참(常參)을 행하였는데, 여러 신하들 중에 한 사람도 일을 아뢰는 자가 없었다. 임금이 양국(兩局)221) 의 대장(大將)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무사(武士)의 취재(取才)와 견발(甄拔)의 법규에 대해 논하도록 했다. 모두 말하기를,
"근래 정시(庭試) 때 무거(武擧)에서 시취(試取)하는 기예(技藝)가 너무 헐(歇)하기 때문에 한 방(榜)의 출신(出身)이 결핏하면 수 백 명에 이릅니다. 그리고 서전(西銓)222) 에서도 그중 나은 자를 견발하지 못해 무사(武士)가 죄다 쓰일 수가 없게 되어 있으니, 그 법규를 준엄하게 하고 그 시취를 간략하게 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 등은 매번 나에게 과거의 법규를 준엄하게 적용할 것을 청하곤 하는데, 반드시 원망을 나라에 돌리고자 하는 것인가?"
하였다.
외방(外方)에 있는 삼사(三司)의 관원에 대해 하유(下諭)한 기한과 길에서 걸리는 기한을 넘긴 것을 계산하여 곧바로 금추(禁推)하게 하고, 말미를 받아 기한을 넘긴 자도 역시 같이 처리하라고 명하고, 마침내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시골에서 부름을 받은 자는 날짜를 계산해 길에 오르지 않으면 모두 취나(就拿)되었고, 외임(外任)에 있다가 내직(內職)으로 옮기는 경우에 이르러서도 또한 미처 관부(官簿)를 정리할 겨를도 없이 떠나게 되었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과 사람을 쓰는 방도에 대해 논하자, 형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고유(高裕)의 재주를 칭찬하고, 또 말하기를,
"오늘날 사람을 쓰는 길이 넓지 못하여 소원(疏遠)한 사람은 한 사람도 재신(宰臣)의 반열에 없습니다. 이것이 어찌 ‘입현무방(立賢無方)’의 뜻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서신(胥臣)은 오히려 한 번 기결(冀缺)을 보고 천거하였으며, 진(晉)나라 문공(文公)도 한 번 그 말을 듣고서 능히 등용223) 했으니, 재주만 있으면 등용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비록 초야(草野)의 선비라도 얻어 쓰려고 하면, 정례(政例)에 구애된다느니 너무 빠르다느니 하고 말을 하니, 인재를 얻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하였다. 정우량이 말하기를,
"임석현(林錫憲)처럼 문신(文識)이 있는 사람이나 나삼(羅蔘)처럼 옛 글을 읽은 사람은 모두 계방(桂坊)의 직임에 둘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장령 이휘항(李彙恒)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성석범(成錫範)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비로소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의 상소에 대해 비답을 내리기를,
"끌어댄 네 조목은 곧 나의 허물이니, 더욱 절실히 부끄러워하고 있다. 어찌 스스로 힘쓰지 않겠는가?"
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傅諭)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 기를,
"조현명이 차자는 비록 스스로 인책(引責)한 것 같지만 진계(陳戒)한 것이 있었으니, 비답이 없음은 마땅하지 아니합니다."
하였으므로, 임금이 드디어 비답을 내린 것이었다.
10월 4일 기축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이어서 문신(文臣)들의 한학강(漢學講)을 직접 시험하였다.
묘당(廟堂)·오 군문(五軍門)의 대장(大將)에게 명해 군문(軍門)의 집사(執事)를 충원해서 차임(差任)하는 규정을 이정(釐正)하게 하고, 항오(行伍)에서 승진시켜 차임하지 않고 혹 한산인(閑散人)을 쓸 경우에는 그 기예(技藝)를 시험하여 충원해서 차임하게 하였다. 대개 경외(京外)의 무사(武士) 중에 적체(積滯)된 자가 많고, 대장(大將)이 전적으로 사인(私人)만 쓰니, 집사(執事)가 되고서도 군무(軍務)에 아주 어두웠으므로 이 명(命)이 있었던 것인데, 절목(節目)을 경정(更定)하고 영구히 준행(遵行)토록 하였다.
10월 5일 경인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황해 수사(黃海水使) 이의익(李義翼)이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불러 보았다. 이의익이 황당선(荒唐般)224) 의 폐단을 진달하기를,
"해삼(海蔘)을 채취하는 황당선이 우리 경내(境內)에 표박(漂泊)하는 일이 근래에 자못 잦아 바닷가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서로 낯이 익어 혹은 서로 상거래를 하여, 마침내 변금(邊禁)이 점차 해이해지게 만들고 있으니, 이것은 엄격하게 막아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수령(守令)과 변장(邊將)이 병위(兵威)를 많이 베풀고 황당선을 쫓아버렸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임금을 속이는 짓이다. 이후로 황당선이 지경을 범할 경우 수령과 변장은 율(律)에 의거해 엄하게 결곤(決棍)하고 서로 내통하여 상거래를 한 바닷가의 백성은 먼저 참(斬)하고 뒤에 아룀이 마땅하다."
하였다. 또 한성 주부(漢城主簿) 이맹휴(李孟休)와 오부(五部)의 관원을 불러 사대부가 여가(閭家)를 탈입(奪入)하는 것과 천경(踐更)225) 이 궐직(闕直)하는 폐단에 대해 묻고, 말하기를,
"범하는 자가 있으면 비록 귀가(貴家)·세가(勢家)라 할지라도 숨기지 말라."
하였다. 중부(中部)의 관원이 말하기를,
"탈입하는 폐단이 간혹 있습니다."
하고, 동부(東部)의 관원이 말하기를,
"조사(朝士)의 집에서 간혹 천경하지 아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추조(秋曹)로 하여금 조사해서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그러고 이맹휴의 대책(對策)에 경륜(經綸)의 재주가 있다고 크게 청산하고, 하교하기를,
"경조(京兆)는 옛날의 개봉부(開封府)이며, 부관(部官)은 옛날의 낙양령(雒陽令)이다. 그런데 이미 능히 명령을 시행하여 금지시키지도 못하고, 부례(府隷)226) 는 또 요포(料布)가 없어서 심지어 금속(禁贖)으로 겨우 먹고 산다고 하니, 이와 같고서도 어떻게 도민(都民)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상확(商確)해서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10월 6일 신묘
헌부(憲府) 【장령(掌令) 이휘항(李彙恒)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광흥창(廣興倉)에서 녹봉을 나누어줄 때에 본창(本倉)의 이속(吏屬)이 허명 녹패(虛名祿牌)를 가짜로 만들어 받아내 훔쳐 먹었습니다. 범한 자는 감률(勘律)해 처단하고 해당 창관(倉官)도 또한 나처(拿處)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정시(庭試)의 초시(初試) 때에 무겸(武兼) 허규(許奎)와 훈련 판관(訓鍊判官) 최서운(崔瑞雲)은 혹은 대신 활을 쏜 거자(擧子)의 보주(保主)를 숨기고 바른 대로 고하지 않았고, 혹은 거자와 상피(相避)라고 사칭(詐稱)하고 다금 시험장으로 이송(移送)하였으니, 간교한 짓을 한 정절(情節)이 모두 의심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왕부(王府)의 의언(議讞)은 죄명(罪名)만 기록하고 본직(本職)에 돌려보내는 것으로 감률하여 처분했습니다. 청컨대 해당 금부 당상(禁府堂上)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허규와 최서운은 모두 삭직(削職)하게 하소서. 일신 현감(一新縣監) 박필중(朴弼重)은 탐학(貪虐)한 데다 술주정이 아주 심하며, 따로 큰 곤장(棍杖)을 만들어 두고는 죄없는 백성에게 함부로 곤장을 치고 있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함경 도사(咸鏡都事) 이윤항(李胤恒)은 이미 지망(地望)도 모자라는 데다가 또 명칭(名稱)도 없으니, 또한 개차(改差)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처음에는 모두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했다가, 다음날 모두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10월 8일 계사
송익보(宋翼輔)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서명신(徐命臣)을 사간(司諫)으로, 이명곤(李命坤)을 헌납(獻納)으로, 김광국(金光國)·이창유(李昌儒)를 지평(持平)으로, 어석윤(魚錫胤)을 정언(正言)으로, 이천보(李天輔)를 교리(校理)로, 김상신(金相紳)을 보덕(輔德)으로, 김선행(金善行)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날씨가 춥다 하여 엷은 옷을 입은 군사들에게 유의(襦衣)를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10월 9일 갑오
헌부(憲府) 【지평(持平) 김광국(金光國)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어영 대장(御營大將) 박찬신(朴纘新)은 인망(人望)이 평소 가벼운 데다가 성품이 또 교만하고 망령되어 평생의 기량이라곤 윗사람이나 잘 섬기고 사치를 탐하는 데 불과합니다. 전후에 걸쳐 총융사(摠戎使)의 의망에서 발거(拔去)되고 지난번에는 경윤(京尹)으로서 논박(論駁)을 당하였으니, 공의(公議)가 만족스레 여기지 아니함을 이에 의거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친병(親兵)을 맡기게 되자 물정(物情)이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박찬신을 파직하소서. 명관(名官)이 지방관으로 나감은 임금과 근심을 나누는 뜻이 각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해 부사(寧海府使) 한사득(韓師得)은 일찍이 영암 군수(靈巖郡守)로 있을 때에 전해져 오는 장적(帳籍)을 가져다 종이를 떠서 유둔(油芚)을 만들었으니, 그 탐욕스럽고 비루하여 직음을 저버린 것을 이에 의거해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부(本府)에 부임하여서는 다스리지 못한다는 소리가 더욱 심해졌으니, 이런 때 목민(牧民)의 임무를 이 사람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청컨대 영해 부사 한사득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한사득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0월 10일 을미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전최(殿最)에서 하(下)에 해당하는데도 품계(品階)가 오르고 복직(復職)된 자가 있으니, 전관(銓官)을 추고(推考)해야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양정(良丁)을 사정(査正)하라는 성명(成命)이 있은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만, 양정의 모축(耗縮)은 단지 서울의 각사(各司)와 외방 영읍(營邑) 소속의 명목이 지나치게 번다(繁多)하여 그런 것입니다. 마땅히 절목(節目)을 작성하여 운관(芸館)에 맡겨 각도(各道)에 인출(印出)하여 반포(頒布)한 뒤에 만약 액수(額數)를 벗어나 모집해 사속(私屬)에 채워넣는 자가 있으면 중률(重律)로 다스림이 마땅합니다."
하고, 이어서 서종옥(徐宗玉)·김약로(金若魯)·이주진(李周鎭)을 사정 당상(査正堂上)으로 삼을 것을 청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또 말하기를,
"근래 인심이 흉완(凶頑)하여 장리(長吏)를 죽이는 변고(變故)가 많이 있습니다. 고성 군수(高城郡守) 이하귀(李夏龜)는 다스림이 강직하고 밝기 때문에 아전들이 도리어 원망하였으며, 또 포흠(逋欠)을 추징(追徴)하는 것이 엄격하다 하여 아전배들이 군아(郡衙)의 계집종과 더불어 흉악한 짓을 해서 독살(毒殺)하기에 이르렀는데, 단서가 이미 드러났다고 합니다. 이는 윤상(倫常)에 관계된 대옥(大獄)이니 성산(星山)의 전례에 의거해 어사(御史)를 파견해서 핵실(覈實)하여 다스려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조현명이 또 말하기를,
"지난번 병판(兵判)과 훈장(訓將)이 연석(筵席)에서 시끄럽게 다툰 일로 처분한 바가 있었습니다만, 병판은 군문(軍門)의 대장(大將)에 대해 체통(體統)이 자별(自別)합니다. 그때 비록 일체로 죄주기를 했지만, 체모(體貌)에 다름이 있다는 뜻을 보여 차등을 분명히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저쪽은 옳고 이쪽은 그르다고 하교하지 않았던 것은 또한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어서 두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다시 기용할 뜻을 보였다.
사신은 말한다. "아조(我朝)의 사마(司馬)는 곧 주관(周官)의 육사(六師)를 총관(總管)하는 직임이니, 각영(各營)의 대장(大將)과는 판연하게 서로 같지 아니하다. 중고(中古)이래로 비록 양국(兩局)이 대장이라 할지라도 병판(兵判)의 자리 앞에서는 거수(據手)하며 스스로 ‘소인(小人)’이라 했으니, 오히려 문무(文武)의 체통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임금이 명관(名官)이 스스로 중하게 여기고 무신(武臣)을 깔본다 하여 매번 문신을 억누르고 무신을 부추겼으니, 무신으로서 정경(政卿)과 승선(承宣)이 된 자가 전후로 계속 이어지고 전랑(銓郞)에 번갈아 차임(差任)된 것과 한천(翰薦)의 권점(圈點)에 든 것은 모두 이런 뜻이었다. 일찍이 문관은 교만하고 무신은 잔약(殘弱)하다고 조회(朝會)에 임하여 한탄까지 하니, 이로 말미암아 무변(武弁)이 문사(文士)를 무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심지어 구성임(具聖任)은 자질구레한 일로 인해 병판에게 화를 내기까지 하였고, 이에 천위(天威)의 지척 아래서 함부로 이름을 불러대며 업신여기고 꾸짖었던 것이다. 하지만 박문수(朴文秀)가 다툰 것도 또한 스스로 체모를 손상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임금이 두 사람을 죄줄 즈음에 송인명(宋寅明)이 문(文)·무(武)의 구별이 있다는 뜻을 꺼냈으나 노여움을 건드릴까 두려워하여 감히 명백하게 말하지 못하였다. 김성응(金聖應)의 경우는 도리어 훈장(訓將)이 병판(兵判)보다 중요하다고 했지만 여러 재신(宰臣)들 중에 또한 그에 대해 말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에 와서 조현명(趙顯命)이 비로소 이 뜻을 전달했지만 또한 통절(癨切)하게 논단(論斷)함이 부족했으니, 사람들이 혹 그르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41책 56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71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역(軍役) / 인사-선발(選拔) / 윤리(倫理)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아조(我朝)의 사마(司馬)는 곧 주관(周官)의 육사(六師)를 총관(總管)하는 직임이니, 각영(各營)의 대장(大將)과는 판연하게 서로 같지 아니하다. 중고(中古)이래로 비록 양국(兩局)이 대장이라 할지라도 병판(兵判)의 자리 앞에서는 거수(據手)하며 스스로 ‘소인(小人)’이라 했으니, 오히려 문무(文武)의 체통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임금이 명관(名官)이 스스로 중하게 여기고 무신(武臣)을 깔본다 하여 매번 문신을 억누르고 무신을 부추겼으니, 무신으로서 정경(政卿)과 승선(承宣)이 된 자가 전후로 계속 이어지고 전랑(銓郞)에 번갈아 차임(差任)된 것과 한천(翰薦)의 권점(圈點)에 든 것은 모두 이런 뜻이었다. 일찍이 문관은 교만하고 무신은 잔약(殘弱)하다고 조회(朝會)에 임하여 한탄까지 하니, 이로 말미암아 무변(武弁)이 문사(文士)를 무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심지어 구성임(具聖任)은 자질구레한 일로 인해 병판에게 화를 내기까지 하였고, 이에 천위(天威)의 지척 아래서 함부로 이름을 불러대며 업신여기고 꾸짖었던 것이다. 하지만 박문수(朴文秀)가 다툰 것도 또한 스스로 체모를 손상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임금이 두 사람을 죄줄 즈음에 송인명(宋寅明)이 문(文)·무(武)의 구별이 있다는 뜻을 꺼냈으나 노여움을 건드릴까 두려워하여 감히 명백하게 말하지 못하였다. 김성응(金聖應)의 경우는 도리어 훈장(訓將)이 병판(兵判)보다 중요하다고 했지만 여러 재신(宰臣)들 중에 또한 그에 대해 말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에 와서 조현명(趙顯命)이 비로소 이 뜻을 전달했지만 또한 통절(癨切)하게 논단(論斷)함이 부족했으니, 사람들이 혹 그르게 여겼다.".
헌부(憲府) 【지평(持平) 김광국(金光國)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니, 윤허하지 않았다. 박찬신(朴纘新)의 파직(罷職)에 대해서는 임금이 당습(黨習)이라고 책망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제 막 연신(筵臣)의 말을 들으니, ‘한 재신(宰臣)이 그 길이 몹시 좁아 초헌(軺軒)이 지나갈 수 없음을 혐의하여 톱으로 여가(閭家)의 지붕 서까래를 잘랐다.’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파직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조관빈(趙觀彬)을 파직하라 명하였다. 조관빈이 유만추(柳萬樞)가 상소하여 공척(攻斥)한 것 때문에 상소하여 대변(對辨)하기를,
"지금 외람되게 띠고 있는 직임을 곧 전날 반드시 체직(遞職)되었어야만 했던 것이었으나, 연교(筵敎)가 몹시 엄해 곧 보외(補外)의 명(命)과 같았으므로 허둥지둥 출사(出謝)하고 이어서 사폐(辭陛)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로(中路)에서 들으니, 비국(備局)에서 추고(推考)를 청하는 계사(啓辭)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체례(體禮)에 관계된 일이거니 하고 생각했는데, 이제 대간(臺諫)의 상소가 준엄하게 나와 견책(譴責)과 파직을 더할 것을 청했음을 듣고서 그 소어(疏語)를 보았더니, 비국의 계사와 한 꿰미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신을 기꺼워하지 아니하는 자가 반드시 물어뜯어 안팎으로 발자취를 붙이지 못하게 하고자 하는 것은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습니다. 만약 제목(題目)을 구하고자 한다면 어찌 말거리가 없음을 걱정하겠습니까? 하지만 두루 찾아다니며 하직 인사를 하지 않았던 것이 체통을 무너뜨렸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말이 되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이에 송인명(宋寅明)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한 번신(藩臣)이 묘당(廟堂)을 가벼이 보고 헐뜯어 말하는 바가 방자하여 이처럼 말을 가리지 아니하니, 이는 신을 가볍게 보는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고, 이어서 면직(免職)을 바랐다. 임금이 말하기를,
"체통에 관계되는 바이니, 그대로 둘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조관빈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강화성(江華城)을 개축(改築)하였다. 유수(留守) 김시혁(金始爀)이 말하기를,
"강화의 토성(土城)이 비를 맞으면 허물어지고 있으니, 청컨대 북경(北京)에서 벽돌을 구워 성을 쌓은 구례에 의해 개축하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여러 장신(將臣)들에게 물으니, 모두 ‘편리하다.’ 하였으므로 마침내 허락하였다. 처음에는 삼 군문(三軍門)으로 하여금 힘을 나누어 같이 쌓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지연되기 쉽고 또 소요가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 유수가 연도(年度)를 한정해서 구관(句管)하여 완전해 다 쌓도록 명하였다. 또 강도(江都)에는 묘사(廟社)를 받들 곳이 없다 하여 또한 영건(營建)하도록 명하였다.
10월 11일 병신
전후의 마전 군수(麻田郡守)를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경기 어사(京畿御史) 임상원(林象元)이 말하기를,
"경기의 고을 중에서 마전의 군액(軍額)이 도고(逃故)가 가장 많습니다. 적절하게 헤아려 다른 고을로 옮겨 보냄으로써 백성들의 폐해를 완화시켜줌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대신(大臣)이 말하기를,
"이것은 본군(本郡)의 군수가 대신 충정(忠定)하는 일을 잘하지 못한 소리입니다."
하고, 병진년227) 부터 경신년228) 까지의 전후 군수를 모두 파직하여 다른 고을을 징계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10월 12일 정유
번개가 쳤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서 종신(宗臣)의 강(講)을 시험하였다. 이에 앞서 《주례(周禮)》를 진강(進講)하는 일에 대해 의논을 묻자,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주례》는 비록 성인(聖人)의 글이기는 하지만, 대저 명물(名物)·도수(度數)가 많아 성학(聖學)에 몹시 절실하지는 아니합니다. 사서(四書) 중에서 돌아가며 진강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나는 《주례》를 한 번 강(講)하여 성인께서 제치(制置)한 뜻을 연구해 보고자 한다. 《심경(心經)》의 강이 끝난 뒤에는 《주례》로 계속 진강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응교(應敎) 정휘량(鄭翬良)이 말하기를,
"《주례》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 많고 현토(懸吐)하기도 쉽지 아니한데, 고(故) 유신(儒臣) 윤선거(尹宣擧)가 정력(精力)을 다 쏟아 손수 현토한 것이 상자(箱子) 속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가져오게 해서 진강을 대비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조관빈(趙觀彬)의 사소 중에서 ‘한 꿰미다’라고 한 말을 곧 일반적인 뜻이요, 대신(大臣)을 침척(侵斥)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대신이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파직시켰으니, 너무 지나침을 면할 수 없습니다. 전부터 방백(方伯)이 그날 즉시 사조(辭朝)할 경우 애초 두루 찾아다니면서 하직 인사를 해야 하느냐에 대해 논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묘당(廟堂)에서도 일찍이 허물을 책망하지 않았던 것이고, 또 이미 두루 찾아 다니며 하직 인사를 하지 말도록 허락했는데, 도리어 조정의 체통을 폐했다고 나무란다는 것은 또한 막혀서 통하지 아니하는 것인 듯합니다."
하고, 이어 송인명(宋寅明)과 주고받았던 말을 낱낱이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나간 일은 말할 필요가 없다. 경(卿)은 두 대신에 비해 나이가 가장 많은데, 어찌 반드시 서로 따지려 드는가?"
하였다. 김재로가 또 훈장(訓將) 김성응(金聖應)을 추고(推考)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처음에 김재로가 일찍이 무인(武人) 한 사람을 북한 관성장(北漢管城將)으로 천거한 일이 있었는데, 훈련 대장(訓鍊大將) 김성응이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김재로는 듣지 않았다. 김성응이 노하여 마침내 그 무인을 벌주자 김재로가 임금에게 말하기를,
"옛날부터 기기(忌器)229) 의 혐의는 있었습니다만, 신이 외람되게 대신(大臣)의 자리에 있는데 장신(將臣)이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습니까? 청컨대 추고하소서."
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사신은 말한다. "무신(武臣)이 상공(上公)을 경시하고 모욕함이 이에 이르렀는데도 대신은 겨우 문비(問備)만 청할 뿐이었으니, 그 경시당함은 마땅한 것이다. 또 대신이 청촉(請囑)하기를 좋아한 나머지 잗달고 구질구질한 일이 많이 있어 남에게 존대(尊待)를 받지 못하였으니, 조정에 체통이 어떻게 날로 허물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41책 56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72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註 229] 기기(忌器) : 투서기기(投鼠忌器)의 준말. 쥐에게 돌을 던져서 때려잡고 싶으나 곁에 있는 그릇을 깰까 두려워한다는 뜻으로, 임금 곁의 총신(寵臣)을 제거하려 하여도 임금에게 해가 미칠까 두려워한다는 말.
사신은 말한다. "무신(武臣)이 상공(上公)을 경시하고 모욕함이 이에 이르렀는데도 대신은 겨우 문비(問備)만 청할 뿐이었으니, 그 경시당함은 마땅한 것이다. 또 대신이 청촉(請囑)하기를 좋아한 나머지 잗달고 구질구질한 일이 많이 있어 남에게 존대(尊待)를 받지 못하였으니, 조정에 체통이 어떻게 날로 허물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10월 13일 무술
교리(校理) 유우기(兪宇基)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하늘에서 경계를 보여 오행(五行)이 서로 궤도를 범하고, 곤도(坤道)가 안정을 잃어 땅이 꺼지고 산이 솟아나니, 놀랄 만한 변괴(變怪)를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죄책(罪責)하는 하교를 내리시어 두려워하고 반성함이 마땅한데도, 여러 달 동안 기울려 들어보았지만 아직 들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낭묘(廊廟)에서는 직무를 게을리하고 삼사(三司)는 고요하기만 해서 전례(前例)를 따라 진계(陳戒)하는 것조차 또한 궐하고 있으니, 신은 그윽이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봄부터 여름까지 온 나라에 여역(癘疫)이 돌아 사망한 사람이 몇 십만 명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며, 경성(京城)을 두고 말하더라도 10명 중 병든 사람이 8, 9명이고 병든 사람 10명 중에 죽은 사람이 반이 넘습니다. 지난날 저잣거리에서 어깨를 비비고 옷소매가 잇닿을 정도로 번다하게 불어난 민물(民物)이 몇 달 사이에 전쟁이라도 겪은 듯 오직 들리는 것은 집집마다 울부짖는 소리이며, 곳곳마다 매장(埋葬)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조금 수그러지는 듯하다가 근래에 와서 또다시 크게 번지니,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대저 재이(災異)의 발생이 반드시 곧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은(殷)나라 고종(高宗) 때는 상곡(桑穀)의 변(變)230) 이 있었고 주(周)나라 선왕(宣王) 때는 운한(雲漢)의 변이 있었으나, 이 일로 인해 경계하고 두려워하면서 덕정(德政)을 더욱 닦았기에 위망(危亡)을 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드디어 중흥(中興)의 성세(聖世)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항상 요(堯)·순(舜)으로써 스스로 기약하시지만, 도리어 두 임금이 참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할 줄을 알아 성실한 마음으로 정사(政事)를 닦은 것만은 못하시니, 어찌된 까닭입니까? 더욱이 우리 문종 대왕(文宗大王)께서는 일찍이 몇 줄의 제문(祭文)으로써 능히 한 도(道)의 여귀(癘鬼)를 제거하고 억만(億萬) 명의 생명을 구제하셨으니, 이것이야말로 어찌 성상께서 본받으실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만약 전하께서 진실로 능히 허물을 반성하고 덕(德)을 닦으시되, 기강을 세우고 정사를 세움이 은나라 고종이나 주나라 선왕, 그리고 우리 성조(聖祖)께서 마음을 쓰신 것과 똑같다면, 하늘도 기쁘게 할 수 있고 재앙도 소멸시킬 수 있으며, 중흥의 성세(聖世)를 또한 손꼽아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지난 겨울에 감히 한 번 상소하여 성덕(聖德)에 힘쓰시길 우러러 바랐는데, 전하께서는 한결같이 대충 대충 넘기시고 더욱 힘쓰시는 뜻이 아주 없었으므로, 신은 그윽이 번민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이제부터 마음을 두렵게 가지시고 의도를 고치시며, 성의(誠意)를 드러내고 사위(詐僞)를 제거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 면계(勉戒)한 것에 더욱 힘쓰겠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행공(行公)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행공하고 있는 유신(儒臣)을 공척(攻斥)하니, 이것이 어찌 자신의 허물은 알지 못하면서 남을 비방하는 뜻이 아니겠는가? 분의(分義)에 있어서 지극히 한심한 데 관계된다."
하였다. 대개 유우기는 관직(館職)에 제수된 이래 늙고 재주가 짧다 하여 누차 제수받고서도 행공하지 않았으므로 임금이 비답에 언급한 것이다. 이에 입직(入直)했던 유신(儒臣) 정휘량(鄭翬良)·이성중(李成中) 등이 ‘삼사(三司)가 고요하다.’는 공척(攻斥) 때문에 인혐(引嫌)하고 경출(徑出)231) 했는데, 소어(疏語)에 유우기를 조롱하고 헐뜯는 말이 많았다. 유우기가 또 진소(陳疏)하기를,
"재이(災異)를 만나 진계(陳戒)하는 것은 삼사(三司)의 임무이니, 직책이 논사(論思)하는 데 있어 말할 만한 것이 있으면 말할 뿐입니다. 그런데 요신(僚臣)은 어찌하여 봉장(封章)해 인의(引義)하기까지 하면서 신 등이 말하거나 침묵하는 것을 모두 자기의 권서(捲舒)에 두려고 하는 것입니까? 요신은 시애(撕捱)하는 것을 스스로 득계(得計)라 생각하겠지만, 신을 ‘고주(孤注)’로 여겼으니, 곤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10월 14일 기해
김상적(金尙迪)·유건(柳謇)을 장령(掌令)으로, 박성원(朴聖源)을 정언(正言)으로, 김한철(金漢喆)을 지평(持平)으로, 이종적(李宗迪)을 교리(校理)로, 김성응(金聖應)을 포도 대장(捕盜大將)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오부(五部)의 관제(官制)를 변통(變通)하는 데 대한 타당성과 강도(江都)에 성(城)을 쌓고 묘사(廟社)를 세우는 일의 편리 여부를 논하고, 이어서 위급(危急)한 경우에는 장차 어디로 돌아가야 할 것인가를 물었다.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남구(南寇)232) 가 있을 경우 남한 산성(南漢山城)이 피할 만하고, 북적(北賊)233) 이 있을 경우 강도(江都)가 지킬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단 도성(都城)을 떠나게 되면 도성의 백성들이 장차 어육(魚肉)이 될 것이니, 내가 편안하겠는가? 도성을 지키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이것이 나라의 임금이 사직(社稷)을 위해 죽는다는 뜻인 것이다."
하였다. 대신이 유우기(兪宇基)의 상소 때문에 인구(引咎)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오부(五部)의 관제(官制)를 개정(改定)하였다. 애초에 경도(京都)에 오부를 설치하고 매 부(部)마다 주부(主簿)와 참봉(參奉)을 각각 한 사람씩 두어 부내(部內)의 크고 작은 사무(事務)를 맡겼는데, 주부와 참봉을 모두 중서(中庶)로써 삼았으므로 지체가 이미 낮고 보잘것없어 관인(官人)으로 자처하지 못하였으며, 부속(部屬)과 이례(吏隸)는 숫자가 적고 늠료(廩僚)도 없어 관부(官府)의 모양을 이루지 못하였었다. 따라서 임금이 ‘지금의 부관(部官)은 곧 옛날의 낙양령(雒陽令)이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서야 어떻게 명령이 행해지게 하고 금지시킬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변통하게 한 것이다. 이에 주부는 도사(道事)로, 참봉은 봉사(奉事)로 고치고, 사부(士夫)중에서 지망(地望)이 있는 자를 가려 부속(部屬)으로 삼았으며, 이례에게도 또한 늠료를 주게 하였다. 중서배(中庶輩)가 이미 오부를 잃었으니, 입시(入仕)할 길이 없어졌다 하여 예빈시(禮賓寺)와 전옥서(典獄署)에 각각 참봉 두 자리를 만들어 채워 넣게 하였다. 임금이 다시 어필(御筆)로 하교하기를,
"사람의 재능 여부가 어찌 사(士)·서(庶)에 관계되겠는가? 사부(士夫)만 치우치게 쓰고 있으니, 중서(中庶)로서 재주를 품은 자가 반드시 침체(沈滯)되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참봉의 자리는 정식(定式)한 뒤 한결같이 오부 참봉의 전례에 의거해 조용(調用)할 것을 전조(銓曹)에 신칙(申飭)하라."
하였다.
10월 15일 경자
천둥하였다.
각도(各道)에 명하여 《병장도설(兵將圖說)》을 중간(重刊)하게 하였다. 승지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병장도설》은 비록 중간하여 반사(頒賜)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마는, 서울에만 반사해서는 광포(廣布)할 수가 없으니, 각도로 하여금 중간해서 광포케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10월 16일 신축
월식(月蝕)이 있었다.
정원(政院)에서 겨울 천둥 때문에 진계(陳啓)하기를,
"오늘날 나랏일은 진실로 눈물을 흘리고 길게 탄식할 만합니다. 성상께서는 분발하는 뜻이 없으시어 조용하고 한가로이 계시며, 아랫사람들은 격려하는 뜻이 끊어져 소홀히 하고 게으름 피우는 것을 떨쳐 버리지 못합니다. 전에는 하루 세번 강(講)을 열고 이어 야대(夜對)까지 했는데, 지금은 법강(法講)을 정지하는 경우가 많은데다 소연(召筵) 또한 뜸하니, 그 성스럽고 공경하는 덕이 날로 진보됨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전에는 신료(臣僚)를 자주 인접(引接)하시고 또한 여러 관사(官司)에 묘사 유파(卯仕酉罷)의 법을 신칙하셨는데, 지금은 상참(常參)이 혹 드물고 빈대(賓對)도 또 소원해졌으니, 해가 질 때까지 밥먹을 겨들도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궐실(闕失)을 광구(匡救)하는 것은 전적으로 대각(臺閣)에 있는데, 곧은 말은 들리지 않고 견벌(譴罰)만 서로 계속되니, 와서 간(諫)하는 것을 꺼리시는 성지(聖志)를 알 수 있습니다. 생령(生靈)을 구제해야 한다고 누차 낭묘(廊廟)에 하유(下諭)했지만 실질적인 은혜를 강구하지 아니하여 근심과 원망이 날로 불어나니, 정사(政事)에 대하여 실질적인 계획이 전혀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10여 년 이래로 온갖 법도가 폐지되고 해이해져서 도리어 정관(貞觀)의 십점(十漸)234) 보다 심함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어찌된 까닭입니까? 성지(聖志)만 한갓 부지런할 뿐 그 보람은 아득하여 분려(奮勵)하던 뜻이 변하여 사그라진데다 게으름까지 계속됨이 마치 경생(經生)·학자(學子)가 〈학업의〉 어려움 때문에 싫증을 내고 뜻이 퇴보하여 과공(課工)을 게을리하는 것과 같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늘이 이런 예사롭지 아니한 재이(災異)를 보이는 것은 대개 우리 성상의 마음을 경계(警戒)하여 그 사그라지는 기운을 고무시키고자 함이니, 삼가 원하건대, 빨리 성지(聖志)를 넓히시어 혹 조금이라도 재이를 사라지게 하는 방도를 소홀하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면계(勉戒)한 것이 옳다. 더욱 힘씀이 마땅하다."
하였다.
10월 17일 임인
장령 유건(柳謇)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날 연중(筵中)에서 유만추(柳萬樞)의 상소 때문에, ‘이런 말이 매번 장령에게서 나오니, 그 자리를 혁파(革罷)해 버리고자 한다.’고까지 하교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전하의 한마디 말씀이 마땅함을 잃은 것이 이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대저 말하는 자의 공사(公私)·시비(是非)는 그 책임이 말을 한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그 직책까지 아울러 없애버린다는 것은 목이 메인다하여 밥을 먹지 않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왕언(王言)이 한번 전파되자 원근(遠近)의 사람들이 모두 놀라 장령을 말을 꺼리는 자리로 여기고 있으니, 이것은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옥당(玉堂) 【응교(應敎) 정휘량(鄭翬良)과 수찬(修撰) 이성중(李成中)이다.】 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여덟 조목으로 진계(陳戒)하였는데, 첫째는 성실하게 뜻을 세우고 대본(大本)을 세울 것, 둘째는 성학(聖學)을 강명(講明)하는 데 성실하게 부지런히 할 것, 셋째는 성실하게 몸소 가르치고 보양(輔養)을 높일 것, 넷째는 성실하게 간언(諫言)을 받아들이고 언로(言路)를 넓힐 것, 다섯째는 조경(躁競)을 억제하고 붕당(朋黨)을 타파할 것, 여섯째는 배양(培養)에 힘쓰고 사풍(士風)을 진작시킬 것, 일곱째는 백성의 고통을 살피고 실질적인 은혜를 강구(講究)할 것, 여덟째는 기강(紀綱)을 진작시키고 실질적인 정치를 행할 것이었다. 그 언로를 넓히는 것에 대해서 논하기를,
"전하께서는 경알(傾軋)하는 습관에 대해서 항상 몹시 가증스럽게 여기시고 진부(陳腐)한 이야기들을 또 익히 들으셨기 때문에 때로는 간혹 꺾어버리시기도 하고 아주 듣기 싫어하시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불행하게도 대각(臺閣)의 신하 중에 간혹 형벌을 받고 먼 곳으로 귀양가는 자가 있기까지 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대각은 반드시 회피하는 자리가 되어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상참관(常參官)이 끝내 전당(殿堂) 위에 오르지 아니한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또 삼가 듣건대, 지난번 ‘장령(掌令)은 마땅히 혁파해야 한다.’는 하교가 있었다고 하니, 전하께서는 또 실언(失言)하신 것입니다. 장령에게 폐단이 있음은 실로 차임(差任)해 제수(除授)하는 것을 가리지 아니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어찌 관명(官名)의 죄이겠습니까?"
하고, 조경(操競)을 억제하는 데 대해서 논하기를,
"사대부(士大夫)들이 이익을 추구하여 의리(義理)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기만을 도모하여 물러날 줄을 알지 못합니다. 때문에 재상(宰相)이 벼슬을 요구하여 정석(政席)에 편지질을 하고 명관(名官)이 염치를 잊은 채 깊은 밤중에 동정을 애걸하니, 모두가 교칠(膠漆)과 같은 도가니 속에서 빠져 허다한 기관(機關)을 빚어내고 있습니다. 만약 성상께서 염정(恬靜)을 숭상하시고 염치를 격려하여 조경하는 무리로 하여금 저절로 물러나 그쳐지게 하신다면, 붕당이 일어나는 것은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또 학교를 수명(修明)하여 사기(士氣)를 진작시키는 방도로 삼고 양역(良役)을 이정(釐正)하여 백성의 고통을 살피는 요체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으며, 또 삭주 부사(朔州府使) 심봉징(沈鳳徴)의 탐학(貪虐)함과 고성 현령(固城縣令) 이하연(李夏演)의 잔열(殘劣)함을 논하며 체개(遞改)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정원(政院)의 비답에 이미 하유(下諭)하였다. 조목으로 진달한 것에 대해서는 마땅히 하교하겠다."
하고, 원래의 차자는 유중(留中)하도록 명하였다.
10월 18일 계묘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천둥의 재이(災異) 때문에 차자를 올려 면직(免職)을 바라고, 이어서 말하기를,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본원(本源)을 바로잡고 맑게 하는 방법에 더욱더 힘쓰소서. 그리하여 진실(眞實)과 무위(無僞)로써 마음에 두고 화평(和平)과 안태(安泰)로써 기질을 지키셔서 항상 도심(道心)이 안에서 주장이 되게 하고 칠정(七情)의 발동은 그 명령을 듣게 하소서, 사람을 등용할 때는 충실(忠實)하고 근후(謹厚)하며 청개(淸介)하고 자신을 지키는 선비를 구하는 데 힘써 탐욕스럽고 비루한 자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알게 하고, 모나고 경박한 자로 하여금 감히 진출하지 못하게 하소서. 말을 들으실 때에는 언외(言外)의 은미(隱微)한 뜻을 억측하지 마시고 문자(文字)나 어구(語句)의 잘못을 세세하게 살피지 마시며, 말을 한 사람의 색목(色目)이 어떠한지도 묻지 마시고, 오로지 시비(是非)와 대체(大體)만을 보고 따르거나 거부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법과 기강을 진작시키되 귀천(貴賤)과 친소(親疏)를 묻지 마시고, 정사(政事)와 형벌을 엄숙히 하되 조그만 인(仁)이나 구차한 은혜를 행하지 마소서. 민폐(民弊)의 경우 일이 미세한 데 관계된다 하여 대충 처리하지 마시고, 재용(財用)의 경우 비용이 많지 않다 하여 절약하지 아니하는 바가 있지 않게 하소서. 무릇 과장(科場)의 방금(防禁)에 관계되는 일은 법강(法綱)이 너무 촘촘한 것은 꺼리지 마시고, 요컨대 간위(姦僞)가 용납되지 않게 하소서. 또 무릇 관방(關防)과 변란(變亂)에 관계되는 계책은 인심이 소동하는 것을 염려하지 마시고 요컨대 위급한 때 대비가 있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정휘량(鄭翬良) 등이 차자 중에서 양역(良役)과 학교에 대한 말을 다시 논하고, 또 두 수령(守令)을 체개(遞改)할 것을 거듭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훈몽(訓蒙)하는 관원을 설치하였지만 작성(作成)의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하여 하교하기를,
"교관(敎官)을 설치한 것은 법(法)의 뜻이 깊은 것인데, 해조(該曹)에서는 예강(禮講)을 폐지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간혹 강(講)에 응한다 해도 임시로 수만 채워 왔으니, 이것이 곧 내가 동몽(童蒙)을 구하는 까닭인 것이다. 봄·가을의 예강을 《대전(大典)》에 의거해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또 양역(良役)에 관한 일을 정휘량 등에게 묻기를,
"차자를 올렸던 유신(儒臣)이 이제 등대(登對)하였다. 변통(變通)의 계책은 어떠한 것인가?"
하니, 정휘량이 말하기를,
"양역의 고통과 무거움은 무명 2필(匹)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마땅히 반(半)을 감해 주는 은혜를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필수(匹數)를 감하는 것이 나의 평소 마음이지만, 지나간 해에 박문수(朴文秀)가, ‘무릇 일이란 마땅히 뒷날을 넉넉하게 하는 방도를 생각해야 하는 법입니다, 2필을 감하여 1필로 하고, 뒤에 또 1필의 폐단이 인족(隣族)에게 미치게 된다면 장차 어떻게 그 뒷날의 문제를 잘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므로 내가 마침내 황연(況然)히 옛 법을 수명(修明)함이 마땅하다. 그러니 원점(圓點)의 법을 신칙하고 수종(隨從)이 지나치게 많은 것을 금지해 과거 규정을 엄격히 하고 선비들의 버릇을 바로잡아야 마땅하며 반드시 경장(更張)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동경연(同經筵)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거재 유생(居齋儒生)에게 한 달에 두 번 과제(課製)하는 법을 시행하여 그 능하지 아니한 자를 쫓아내고, 30점(點)이 찬 뒤에야 비로소 부시(赴試)를 허락한다면 거재(居齋)하는 자가 반드시 많아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장령 유건(柳謇)의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박찬신(朴纘新)의 일에 이르러 유건이 말하기를,
"전계의 구어(口語) 가운데 깎고 빼버린 곳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과중(過重)하다고 하유(下諭)했는데, 어찌 구차하게 글을 깎는가?"
하였다. 유건이 인피(引避)하며 체직(遞職)시켜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처음에는 사직하지 말라고 명했다가, 검토관(檢討官) 이성중(李成中)이, ‘애초에 이미 분소(分疏)235) 하고도 끝내 미루고자 하니 대간(臺諫)의 체통에 구간(苟簡)하다.’고 하여 체직시킬 것을 청하자, 임금이 허락하였다.
10월 19일 갑진
이연덕(李延德)·권해(權賅)를 장령(掌令)으로, 조중직(趙重稷)·한억증(韓億增)을 지평(持平)으로, 이천보(李天輔)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중경(李重庚)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10월 20일 을사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고, 특별히 교리(校理) 유우기(柳宇基)를 폄직(貶職)하여 대동 찰방(大同察訪)으로 삼았으니, 유우기가 수차 관직(館職)에 제수되었는데도 끝내 명(命)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대동·고산(高山)·성환(成歡)의 찰방은 적절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하여 전조(銓曹)에 신칙해 옛 법을 준행(遵行)하고, 일찍이 시종(侍從)을 거친 자로 차견(差遣)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날씨가 춥다 하여 가벼운 죄수를 석방시키라고 명하였다.
10월 21일 병오
김한철(金漢喆)·이제원(李濟遠)을 부교리(副校理)로, 남태제(南泰齊)를 교리(校理)로, 김광세(金光世)를 수찬(修撰)으로, 이천보(李天輔)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제도(諸道)의 영수(營需) 및 관수(官需)를 줄이라고 명하였다. 선혜청(宣惠廳)에서 아뢰기를,
"동북(東北) 지방에는 흉년이 들었고 제도(諸道)도 모두 풍년은 아니니, 청컨대 영수·관수의 8분의 1을 줄이게 하소서."
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10월 23일 무신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표해(漂海)한 피인(彼人)이 있는데, 그들을 압령(押領)하러 온 통관(通官)이 마필(馬匹)을 가지고 와서 매매(賣買)를 청하므로, 의주(義州)에서 감영(監營)에 보고하자 감사(監司)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할 것을 장청(狀請)하였습니다. 하지만 통관은 칙사(勅使)와는 다름이 있어서 비록 요구하는 일이 있어도 혹은 사리에 의거하여 막기도 하고 혹은 전례를 상고해 잘 처리하기도 하는 것은 오로지 본부(本府)에 달려 있는 것이지 조정에다 번거롭게 알릴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해당 도신 조관빈(趙觀彬)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10월 24일 기유
중외(中外)에서 여제(癘祭)를 설행(設行)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여기(癘氣)가 다시 크게 번졌는데, 장령 이연덕(李延德)이 상소하여 근신(近信)을 보내 명산(名山)에 기도하여 재앙을 소멸시킬 방도로 삼을 것을 청하자,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예조(禮曹)에서 경중(京中)과 삼남(三南)에서 먼저 설행하고 다른 곳은 잠시 장문(狀聞)을 기다려 설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긴 것이다.
호서(湖西)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10월 25일 경술
약방(藥房)에서 진대(診對)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근래에 기강(紀綱)이 해이해졌기 때문에 성의(聖意)가 반드시 진신(搢紳)들을 조절(操切)하고자 하시어, 말미를 받아 기한을 넘긴 자는 곧바로 금추(禁推)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어버이에게 병(病)이 있거나 자신이 병을 앓는 사람도 또한 분간하지 아니하면, 예(禮)로 신린(臣隣)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또 기강을 세우는 근본은 이런 새로운 법에 있지 아니하니, 아마도 뒷날의 폐단에 관계될 듯하여 신은 그윽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이 ‘충(忠)’으로 섬겨야 한다는 선성(先聖)의 가르침이 있으니, 인신(人臣)으로서 시골집에 버젓이 누워 있으면서 임금의 명(命)을 어기고 버림을 ‘충’이라 할 수 있겠는가? 제갈양(諸葛亮)은 매번 엄격함을 숭상하는 정책을 썼는데, 나는 ‘너그럽다[寬]’란 한 글자를 비록 백성들에게 베풀 수 있겠지만, 조정 신하들의 풍습에 대해서는 엄격한 법을 써서 나태한 버릇을 경계시켜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또 나는 늙고 원량(元良)은 아직 어리니, 나는 모든 일에 대해 언제나 스스로 그 수고로움을 감당하고자 하고 있다."
하고, 드디어 당상(堂上)·당하(堂下)와 실직(實職)·군함(軍銜)을 물론하고 모두 과한법(過限法)을 적용하라고 명하였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정여창(鄭汝昌)이 살던 집이 회현동(會賢洞)에 있었는데, 언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귀속되었는지 알지 못하나, 동리 사람들이 아직도 능히 그 장소를 가리키며 선정(先正)의 유지(遺址)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듣건대, 근래에 역적의 집으로 적몰(籍沒)하는 데 들어갔다 하니, 정가(鄭家)의 후손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당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자손이 아주 가난하게 살고 있으니, 장용(將用)하여 조정에서 유현(儒賢)을 표장(表章)하는 뜻을 보임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27일 임자
원경순(元景淳)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제원(李濟遠)을 헌납(獻納)으로, 김종태(金宗台)를 사간(司諫)으로, 이창유(李昌儒)를 정언(正言)으로, 윤봉구(尹鳳九)를 군자감 정(軍資監正)으로 삼았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이연덕(李延德)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어장(御將) 박찬신(朴纘新)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10월 29일 갑인
김약로(金若魯)를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윤득징(尹得徴)을 필선(弼善)으로, 이재(李縡)를 좌참찬(左參贊)으로, 서종옥(徐宗玉)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삼았다.
10월 30일 을묘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호서(湖西)와 관동(關東)의 재해(災害)를 입은 고을에서 바쳐야 할 미포(米布)를 도신(道臣)이 이미 재감(裁減)해 줄것을 청하였으니, 모두 시행하도록 허락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경기(京畿)·해서(海西)·영남(嶺南)에 여역(癘疫)이 9월부터 다시 크게 번져 사망하는 사람이 계속 이어졌는데, 거의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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