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6권, 영조 18년 1742년 11월

싸라리리 2025. 9. 26.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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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병진

번개가 쳤다.

 

11월 2일 정사

번개가 쳤다.

 

교리(校理) 김한철(金漢喆)이 원경하(元景夏)의 상소 때문에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다. 처음에 원경하가 사학(四學)의 묵벌(墨罰)을 받았는데, 해를 넘기도록 풀리지 않았으므로 임금이 특별히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원경하의 인당(姻黨)이 때마침 사학의 재임(齋任)이 되었으므로 홀로 나아가 사학의 벌을 죄다 풀어주었으나, 한 재임이 홀로 제멋대로 사학의 벌을 풀어주는 것은 옛날의 규례가 아니었다. 그래서 김한철의 아우 김한열(金漢說)이 태학(太學)의 장의(掌議)가 되자 드디어 사학의 규례를 끌어대어 묵벌을 풀어주었던 유생을 벌주었다. 김한철은 바야흐로 이천보(李天輔)와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서로 당원(黨援)이 되어 원경하를 공격하니, 원경하가 몹시 화를 내었다. 그러다가 이선태(李善泰)의 상소가 나오게 되자, 이천보와 김한철등 여러 사람이 서로 잇따라 진소(陳疏)하니, 원경하가 갈수록 더욱 분노한 나머지 연달아 상소하여 성내고 꾸짖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김한철이 또 상소하여 그 일을 변명하고 원경하를 침척(侵斥)하니, 임금이 비답으로써 화해시켰다.

 

11월 5일 경신

조윤성(曹允成)과 구택규(具宅奎)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임금이 장차 숙빈묘(淑嬪廟)에 전배(展拜)하려 하였으나, 성후(聖候)가 현기증으로 오랫동안 시조(始祖)하지 못하고 계속 정섭(靜攝)하고 있었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성후가 미령(未寧)하시니, 노동(勞動)하심은 마땅하지 아니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늙었으니, 내년에 질병이 없을 줄 어떻게 알겠느냐?"
하고, 이어서 오열하며 눈물을 흘렸다. 김재로가 감히 다시 청하지 못하고 마침내 아뢰기를,
"무릇 사묘(私廟)에 관계되는 일에 대해 조정 신하들이 혹시 한마디 말이라도 하면, 성심(聖心)에 번번이 의심과 노여움을 더하시니, 사리(事理)로 헤아려 보건대, 아마도 이와 같아서는 마땅하지 않은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묘에 관한 일로 여러 신하들이 누차 말한 경우가 있었지만, 내가 사묘에 대해 비록 한번도 전배(展拜)하지 않는다 해도 뭇 신하들 중에 반드시 청하는 자가 없을 것이니, 명류(名流)란 이름을 잃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어찌 부모 없는 명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는 ‘옥당(玉堂)에서 대원군(大院君)의 묘(廟)에 친제(親祭)하지 말 것을 청한 것’을 그르게 여겨 심지어 학식(學識)이 없다고까지 하였으니, 오늘날 뭇 신하들은 유독 선정에 대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인가?"
하였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와 전 대장(大將) 구성임(具聖任)이 연석(筳席)에서 서로 싸운 일 때문에 오랫동안 병출(屛黜)의 벌이 풀리지 않고 있었는데, 대신(大臣)이 말을 하자 임금이 모두 놓아주라고 명하였다.

 

우참찬(右參贊) 서종옥(徐宗玉)이 상소하기를,
"대동법(大同法)이 백성에게 큰 은혜가 되고 있으나, 유독 관서(關西) 일로(一路)에는 시행하지 아니하므로 고을마다 정해진 제도가 없어서 백성들이 명(命)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관서에 양전(量田)과 상정법(詳定法)236)  을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국(備局)에 내려 품처(稟處)케 하라고 명하였다.

 

장령 권해(權賅)가 상소하여, 질병에 조심해야 한다는 뜻으로 사묘(私廟)에 동가(動駕)하겠다는 명(命)을 정침(停寢)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남의 자식이 된 정리(情理)야 상하간에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하고, 노하여 책망하였다.

 

정언 이창유(李昌儒)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천재(天災)가 거듭 닥쳐 성심(聖心)이 근심하고 계신데도 묘당(廟堂)에서는 직무를 게을리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주사(籌司)의 자리에서는 전례(前例)를 따라 문구(文具)로 응할 따름입니다. 서번(西藩)의 자리를 수십 일 동안 궐(闕)한 채 그냥 둔 것은 전에 듣지 못한 일이며, 북관(北關)의 자리를 자주 바꾸고 오랫동안 비워두는 것은 끝내 법을 굽혀 사정(私情)을 따른 데 관계됩니다. 전하께서 이미 도민(都民)의 질고(疾苦)를 물으시고, 또 부관(部官)을 따로 선택하도록 명하셨는데, 종신(宗臣)이 사납고 방자하게 구는 것이 오히려 다시 여전하여 여염집의 서까래를 톱으로 잘라 냈습니다. 사문(私門)에서 남의 빚을 받아 주는 것이 실로 여항(閭巷)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는데, 유사(有司)는 능히 잡지를 못하고 대간(臺諫)은 보고하지 아니하니, 오부(五部)에 신칙하여 조사해 드러나는 대로 엄하게 다스림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사치가 갈수록 심해져 서민(庶民)의 납폐(納幣)가 심지어 천금(千金)을 넘는가 하면, 기강이 점차 무너져 백의(白衣)로 난입(闌入)하되 다시 꺼림이 없으니, 금제(禁制)에 관한 법령을 거듭 밝히고 또 근수(跟隨)에 관한 법을 신칙해야 마땅합니다. 요사이 일을 논하는 글에 간혹 협잡(挾雜)하는 버릇이 있기는 합니다만, 전하께서 언외(言外)의 뜻에 의심을 두어 지나치게 책벌(責罰)을 더하시니, ‘남이 속이는가 넘겨 짚지 말고 남이 믿어 주지 않는가 억측하지 말라.’는 가르침에 부족함이 없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납폐에 관한 일은 비록 사치스런 풍속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신칙한다면 백성들을 소란케 할까 두려우니 그냥 두고, 근수(跟隨)에 관한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1월 6일 신유

임금이 숙빈묘(淑嬪廟)에 거둥하여 전배례(展拜禮)를 행하였다. 효장묘(孝章廟)에 나아가 날씨가 춥다 하여 군사들에게 죽을 먹이라고 명하였다.

 

11월 7일 임술

옥당(玉堂)          【교리(校理)            김한철(金漢喆)과 수찬(修撰)            윤광의(尹光毅)이다.】        에서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원컨대, 전하께서는 대계(大戒)를 삼가시어 수성(修省)의 방도를 극진히 하시고, 언로(言路)를 열어 직절(直切)한 상소를 오게 하실 것이며, 춘추(春秋)가 원만(畹晩)          【해가 짐. 노년(老年)을 말함.】        하다 하여 성학(聖學)에 부지런한 것을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지 마시고, 언의(言議)가 오원(迃遠)하다 해서 혹시라도 유도(儒道)를 숭상하는 데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하소서. 그리고 양역(良役)의 사정(査正)과 전화(錢貨)를 더 주조(鑄造)하는 것은 비록 백성들의 곤궁함을 불쌍히 여기고 재용(財用)을 넉넉히 하려는 정사(政事)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윗사람의 것을 덜어 내어 아랫사람을 이익되게 하는 것은 직접 절검(節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관제(官制)를 줄이고 변경하며 과거법(科擧法)을 새로 정함이 비록 조경(躁競)을 억제하고 요행을 막는 뜻에서 나오기는 하였지만, 사욕(私慾)을 제거하고 공도(公道)를 넓힘은 임용(任用)을 신중히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또 근래에 여기(癘氣)가 다시 크게 번져 사망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는데, 여제(癘祭)의 설행(設行)은 단지 기호(畿湖)와 양남(兩南)에만 미쳤으니, 똑같이 보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도(道) 역시 거행함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또한 선조(先祖) 기묘년237)                  의 전례(前例)에 의거해 여역(癘疫)으로 죽은 인민(人民)에게 또한 제사를 내린다는 뜻을 제문(祭文) 가운데 첨가해 넣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면계(勉戒)한 것에 더욱 힘쓰겠다. 진달한 바는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때 천재(天災)가 거듭 닥치고 나랏일은 반환(泮渙)하여 거의 위망(危亡)의 형상이 있었으나 성상께서 부격(孚格)·수성(修省)하신 나머지 드러난 실덕(實德)은 역사에 이루 다 쓸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동조(東朝)께 효성(孝誠)을 다한 것은 이러하다. 동조께서 계시는 곳은 대궐의 서쪽에 있어 임금의 침전(寢殿)과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비록 지독한 추위와 찌는 듯한 더운 날이라 할지라도 아침 저녁으로 문안(問安)하되 반드시 법복(法服)을 갖추었고, 일찍이 하루라도 혹 폐한 날이 있지 않았으며, 말이 동조께 미치면 곧 얼굴빛을 고치고 말씀을 삼가시며 감히 방과(放過)하지 아니하셨다. 그 종묘(宗廟)에 이르러서도 또한 그러하였다. 능침(陵寢)을 전알(展謁)할 때는 비록 가파른 고개나 미끄러운 뗏장이라 할지라도 또한 천천히 가지 아니하고 발걸음이 뛰는 듯하였다. 임어(臨御)한 지 20년에 춘추(春秋)가 쉰이었으나, 하루라도 만기(萬機)가 엄체(淹滯)된 적이 없었고, 연대(筵對)는 밤까지 계속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러 신하들은 간혹 배고픔과 피곤함을 느꼈으나 임금만은 홀로 피로함을 알지 못하였다. 한 생각으로 백성을 걱정하여 다친 사람처럼 여겨 사랑하는 말이 사표(辭表)에 흘러 넘쳤으니, 그 정사(政事)에 부지런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덕은 ‘해가 기울어도 밥먹을 겨를이 없었던 성인(聖人)’에 거의 가까웠다. 다만 조정에 경계하고 꺼릴 만한 신하가 없었고 세상에는 아첨하는 기풍이 많았기 때문에 임금의 마음이 뭇 신하들을 경시(輕視)하게 만든 나머지 항상 채찍질로 몰아대고 제어(制馭)하고자 하여 예(禮)로 부리는 도리에 부족함이 있었다. 때문에 풍속은 마침내 진작되지 못하는 데 이르고 성심(聖心)은 혹 스스로 성인(聖人)으로 여기는 데 가깝게 되었던 것이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41책 56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74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 보건(保健)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註 237]          기묘년 : 1699 숙종 25년.
사신은 말한다. "이때 천재(天災)가 거듭 닥치고 나랏일은 반환(泮渙)하여 거의 위망(危亡)의 형상이 있었으나 성상께서 부격(孚格)·수성(修省)하신 나머지 드러난 실덕(實德)은 역사에 이루 다 쓸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동조(東朝)께 효성(孝誠)을 다한 것은 이러하다. 동조께서 계시는 곳은 대궐의 서쪽에 있어 임금의 침전(寢殿)과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비록 지독한 추위와 찌는 듯한 더운 날이라 할지라도 아침 저녁으로 문안(問安)하되 반드시 법복(法服)을 갖추었고, 일찍이 하루라도 혹 폐한 날이 있지 않았으며, 말이 동조께 미치면 곧 얼굴빛을 고치고 말씀을 삼가시며 감히 방과(放過)하지 아니하셨다. 그 종묘(宗廟)에 이르러서도 또한 그러하였다. 능침(陵寢)을 전알(展謁)할 때는 비록 가파른 고개나 미끄러운 뗏장이라 할지라도 또한 천천히 가지 아니하고 발걸음이 뛰는 듯하였다. 임어(臨御)한 지 20년에 춘추(春秋)가 쉰이었으나, 하루라도 만기(萬機)가 엄체(淹滯)된 적이 없었고, 연대(筵對)는 밤까지 계속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러 신하들은 간혹 배고픔과 피곤함을 느꼈으나 임금만은 홀로 피로함을 알지 못하였다. 한 생각으로 백성을 걱정하여 다친 사람처럼 여겨 사랑하는 말이 사표(辭表)에 흘러 넘쳤으니, 그 정사(政事)에 부지런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덕은 ‘해가 기울어도 밥먹을 겨를이 없었던 성인(聖人)’에 거의 가까웠다. 다만 조정에 경계하고 꺼릴 만한 신하가 없었고 세상에는 아첨하는 기풍이 많았기 때문에 임금의 마음이 뭇 신하들을 경시(輕視)하게 만든 나머지 항상 채찍질로 몰아대고 제어(制馭)하고자 하여 예(禮)로 부리는 도리에 부족함이 있었다. 때문에 풍속은 마침내 진작되지 못하는 데 이르고 성심(聖心)은 혹 스스로 성인(聖人)으로 여기는 데 가깝게 되었던 것이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11월 8일 계해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9일 갑자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이때 평안 감사(平安監司) 조관빈(趙觀彬)이 아뢰기를,
"무신년238)  에 망명(亡命)했던 역적 황진기(黃鎭紀)가 변장하여 중이 된 것을 감영(監營)의 장교(將校)가 형찰(詗察)해 내어 바야흐로 옥(獄)에 가두어 놓고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그 장계를 가지고 임금께 아뢰어 잡아와 핵실(覈實)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포청(捕廳)에 명하여 구문(究問)하게 하고 윤광신(尹光莘)을 우포도 대장(右捕盜大將)으로 삼았다. 잡아 와서 자세히 캐어 물으니, 곧 관서(關西)의 중 적원(寂元)이었는데, 그 아비의 이름과 향관(鄕貫)·연기(年紀)가 분명히 충청도 홍주(洪州) 사람이었고, 남한 산성(南漢山城)에서 중이 되어 관서로 옮겨가 살고 있는 자였다. 또 그 종형(從兄)인 강만봉(姜萬奉)이란 자를 잡아다 대면(對面)시켰더니, 손을 잡고 기뻐하며 웃으면서 각기 이별한 회포를 푸니, 사건은 마침내 실상이 없게 되었다. 그 잡아온 감영 장교 이경하(李慶夏)란 자도 역시 착각하여 잘못 고한 죄를 인정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자가 황진기가 아님은 의심할 것이 아주 없다. 즉시 놓아 주도록 하라."
하고, 상(賞)을 바라고 거짓으로 고한 감영 장교는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0일 을축

조관빈(趙觀彬)을 판윤(判尹)으로, 이천보(李天輔)를 교리(校理)로, 박필재(朴弼載)를 사간(司諫)으로, 민원(閔瑗)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우승지 이세진(李世璡)은 연로(年老)하다 하여 특별히 동중추(同中樞)로 발탁하였다.

 

11월 12일 정묘

임금이 대신(大臣)과 대사성(大司成)을 인견(引見)하였다. 태학 유생(太學儒生)의 원점 절목(圓點節目)의 편리 여부에 대해 하문(下問)하고, 대사성으로 하여금 묘당(廟堂)에 가서 절제(節製)의 시취법(試取法)을 경정(更定)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무릇 절제 때 외방(外方)의 유생을 아울러 시험보이지 않고 단지 태학 유생만 시험보일 것이며, 태학에 거재(居齋)하고 있는 1백 명 중에서 50점(點)이 된 유생을 시취(試取)하고, 도기 유생(到記儒生)을 시취할 때는 제술(製述)과 강(講)을 스스로 원하는 대로 써 넣게 하되 제술과 강에서 각각 한 사람을 뽑으며, 재임(齋任)의 천거는 일곱 사람에게 ‘근실(謹悉)’을 받은 뒤에 천거해서 쓰는 일로 정식(定式)하였다.

 

윤광의(尹光毅)를 헌납(獻納)으로, 엄우(嚴瑀)를 정언(正言)으로, 심성희(沈聖希)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전(前)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민익수(閔翼洙)가 졸(卒)하였다. 민익수는 판서(判書) 민진후(閔鎭厚)의 아들로, 자신을 단속하고 행실을 닦아 능히 그 가풍(家風)을 이었으며, 신축년239)  ·임인년240)   이후로는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다. 대직(臺職)에 천거하여 제배(除拜)하였으나 고사(固辭)하고 끝내 명에 응하지 아니하다가 이때에 와서 졸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11월 13일 무진

헌부(憲府) 【장령(掌令) 권해(權賅)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파춘수(坡春守) 목(穆)은 하찮은 일로 인해 황성(皇姓)의 사부가(士夫家)에 돌입(突入)하여 부녀자를 잡아갔는데, 밧줄로 묶고 수갑을 채워 구박하며 더럽게 욕보였습니다. 청컨대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가 뒤에 대신(大臣)의 말로 인해 영남(嶺南)의 바닷가에 목을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태학(太學)의 재임(齋任)을 숭문당(崇文堂)에서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이 당(堂)은 곧 선조(先朝) 때 지은 것으로 ‘숭문(崇文)’이라 편액(扁額)한 것은 ‘숭유(崇儒)’의 뜻이며, 이 당에서 너희들을 소견하였으니 내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어제문(御製文)을 내렸는데, 제목은 총영현관(寵榮賢關)이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저 현관(賢關)을 바라보매 경전(經傳)에 실려 있도다. 열조(列朝)의 배양(培養)은 현관을 우선으로 하였도다. 옛 전례(前例)를 수명(修明)케 하였으니, 뜻이 어찌 우연하랴? 마주 대하여 주효(酒肴)를 내리노니, 더욱 힘씀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어서 주효를 내리고 여러 유생과 함께 마시도록 하였다.

 

응교(應敎) 정휘량(鄭翬良)을 발탁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삼았다. 정휘량은 정우량(鄭羽良)의 아우로서 탕평론(蕩平論)을 극력 협찬(協贊)해 바야흐로 임금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발탁된 것이었다.

 

11월 14일 기사

찬선(贊善) 어유봉(魚有鳳)이 상소하여 나이가 노경(老境)에 이르고 병이 위중하다고 하여 해직(解職)을 바라니,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사정청(査正廳)의 여러 당상들을 인견(引見)하고 사정(査正)에 관한 일을 물었다. 이때에 경외(京外)의 양역(良役)이 번중(繁重)하여 백성들이 명(命)을 견디지 못하였다. 숙묘(肅廟) 때부터 청(廳)을 설치하고 여러 당상을 차출해 이정(釐正)하고자 하였으나, 일을 마치지 못하고 곧 혁파하였다. 이때에 와서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의 건백(建白)으로 인해 다시 양역 사정청(良役査正廳)을 설치하고, 삼공(三公)으로 하여금 그 일을 구관(句管)하게 하였다. 그리고 서종옥(徐宗玉)·이주진(李周鎭)·원경하(元景夏) 등으로 하여금 먼저 경중(京中)의 제사(諸司)에 대해 함부로 증가시킨 것을 조사해 도태(淘汰)하게 하였다. 서종옥 등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숙묘 때 정식한 이후로 증치(增置)한 것은 마땅히 모두 조사해 도태해야 합니다. 내취(內吹) 3백 50명은 한갓 그 이름만 있고 입직(入直)하는 자는 단지 1백여 명이니, 청컨대 감(減)하게 하소서."
하자, 원경하가 불가하다며 극력 다투었다. 서종옥이 또 장악원(掌樂院)의 악생(樂生)을 선상(選上)하는 폐단을 진달하고 그 숫자를 감할 것을 청하자, 조현명이 향사(享祀)에 관계되는 일이라 변통(變通)하기 어렵다 하니, 의논이 마침내 정지되었다.

 

11월 17일 임신

근신 10명을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나누어 보내어 여제(癘祭)를 지내게 하였다. 이때에 겨울이 봄처럼 따뜻하고 여기(癘氣)가 크게 번져 여러 도(道)의 인민(人民)의 사망에 대한 장계(狀啓)가 계속 이어졌으므로, 이 명(命)이 있었던 것이다.

 

11월 19일 갑술

장령 민정(閔珽)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피국(彼國)에서 집을 지어 선비를 시험하는 규례(規例)에 의거하여 인정전(仁政殿)의 동서(東西)에 50칸(間)을 수즙(修葺)해서 매번 생원(生員)·진사(進士)의 방(榜)을 낼 때면 시(詩)·부(賦)·의(義)·의(疑)를 나흘간 나누어 돌아가며 시험하되, 묘당(廟堂)의 여러 재신(宰臣)으로 하여금 일제히 모여 회시(會試)의 시권(試券)을 하나하나 비교해 보아서 문필(文筆)이 현저하게 다른 자와 면시(面試) 때 백지를 낸 자는 모두 뽑아버리게 하고, 여러 종류의 대과(大科)도 또한 한결같이 이 제도를 쓰게 한다면 과장(科場)의 온갖 폐단은 제거하기를 기필하지 않아도 절로 제거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우리 나라의 규제(規制)는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어찌 경장(更張)할 필요가 있겠는가? 예전대로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11월 20일 을해

이정보(李鼎輔)를 승지(承旨)로, 이명곤(李命坤)을 사간(司諫)으로, 조재민(趙載敏)·임박(任璞)을 정언(正言)으로, 권우(權祐)를 장령(掌令)으로, 남태제(南泰齊)를 부응교(副應敎)로 이제원(李濟遠)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관상감(觀象監)에서 아뢰기를,
"절행(節行) 때 구해 온 천문도(天文圖)와 오층 윤도(五層輪圖)는 모두 천문(天文)·지리(地理)의 쓰임에 긴요한 것이니, 청컨대 본떠 만들어 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1월 21일 병자

부교리(副校理) 이천보(李天輔)가 상소하여 진계(陳戒)하기를,
"근래 재이(災異)가 겹쳐서 발생하고 있으니 겨울 우레와 지진(地震)이 모두 예사롭지 않거니와, 여역(癘疫)이 더욱 번져 들판에 해골이 널려 있고 음려(陰沴)의 기운이 위로 하늘에 사무쳤으니, 하늘이 우리 전하를 고계(告戒)함이 어찌 이리도 부지런합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시비(是非)를 밝혀 명실(名實)을 변정(辨正)하시고, 정령(政令)을 신중히 하시어 기강(紀綱)을 정제(整齊)하시며, 붕당(朋黨)을 타파하여 교구(交構)의 습관을 끊으시고, 요행의 문을 막아 조경(躁競)하는 풍습을 억제하소서. 명실이 뒤섞이면 인심이 복종하지 않고 기강이 떨어지면 국체(國體)가 존엄하지 아니하며, 교구의 습관이 이루어지면 충성스럽고 어진 이가 보존될 수 없고 조경하는 풍습이 자라나면 사악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날뛰게 될 것이니, 네 가지를 갖추고도 나라가 위태롭지 아니한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11월 23일 무인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동궁(東宮)의 관례(冠禮)와 가례(嘉禮)를 새해를 기다려 길일(吉日)을 가려서 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관례는 봄을 기다려 길일을 가리도록 하고, 가례는 화협 옹주(和協翁主)가 이강(釐降)241)  한 뒤를 기다려 그 이듬해로 정해서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성의(誠意)는 옹주(翁主)가 동궁의 누이였기 때문에 대개 그 윤서(倫序)를 중히 여겼던 것이다.

 

사정청 당상(査正廳堂上) 서종옥(徐宗玉)이 말하기를,
"충의위(忠義衛)는 모두 훈신(勳臣)의 적장(嫡長)으로 구전(口傳)한 자입니다. 숙묘조(肅廟朝) 때 정신(廷臣)과 유현(儒賢)에게 수의(收議)하여 대왕(大王)의 자손과 더불어 일체 9대(代)로 한정했다가 그 뒤에 5대로 고쳤습니다. 장차 어느 쪽을 따라야 마땅합니까?"
하니,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물었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사부(士夫)는 비록 백대(百代)가 지나도 군역(軍役)의 염려가 없지만, 훈신의 후예로 몇 대 동안 몰락하여 거의 상천(常賤)이 된 자는 어찌 반드시 9대로 한정 할 것이 있겠습니까? 가까운 규정을 따름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근래 종반(宗班) 가운데 부직(付職)된 자가 거의 없으니, 나도 모르게 측연스레 여겨진다. 어찌 그 몰락하는 것을 보전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오늘 여러 신하들의 후손도 또한 군역을 면하지 못할 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일이란 마땅히 후(厚)한 쪽을 따라야 하는 법이니, 훈신의 후예는 선조(先祖) 때 강정(講定)한 바에 의거해 9대를 정식(定式)으로 삼는 것이 옳다."
하였다. 임금이 또 영남(嶺南) 시노비(寺奴婢)의 폐단을 홍상한(洪象漢)과 심성희(沈聖希)로 하여금 상의해 이정(釐正)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원점법(圓點法)을 이미 시행하고 있으니, 국자(國子)의 장관(長官)은 구임(久任)시켜 성효(成效)를 책임지움이 마땅합니다. 대사성(大司成) 김상로는 대사성을 겸임시킬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직(移職)한 뒤에 다시 의논해도 또한 늦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윤허하지 않았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변지(邊地)의 승탁(陞擢)하는 자리는 묘당(廟堂)에 물어서 차출(差出)하도록 일찍이 정식(定式)한 것이 있었는데, 이번에 이산 부사(理山府使)를 승품(陞品)해 차출하면서도 묘당에 묻지 않았습니다. 좌이(佐貳) 【육조의 참판·참의, 또는 기타 관사의 차석(次席).】 의 정무(政務)는 수당(首堂)과는 차이가 있으니, 경책(警責)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품할 때 차당(次堂)은 묘당에 물어보고 의차(擬差)하는 일을 지금부터 정식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윤봉구(尹鳳九)를 집의(執義)로, 이성중(李成中)을 사간(司諫)으로, 이회원(李會元)·서지수(徐志修)를 정언(正言)으로, 원경순(原景淳)을 헌납(獻納)으로, 윤광의(尹光毅)를 장령(掌令)으로, 서명신(徐命臣)을 수찬(修撰)으로, 김광세(金光世)를 필선(弼善)으로 삼았다.

 

지평 조중직(趙重稷)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하유(下諭)한 기한을 넘긴 삼사(三司)는 곧장 금추(禁推)를 받들게 하라는 명(命)은 실로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법이 아닙니다. 더욱이 사정이 있거나 병이 있어 무릅쓰고 나오기 어려운 경우와 수령(守令)으로서 내직(內職)으로 옮기느라 관부(官簿)를 정돈하는 경우는 기한에 맞추어 올라올 수 없으니, 어찌 방애되는 단서가 아니겠습니까? 신은 도로 정지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 유건(柳謇)이 연석(筵席)에서 인피(引避)한 것은 뜻이 변명하는 데 있어 대간(臺諫)의 체통을 크게 잃었으니, 파직의 법을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 경상 도사(慶尙都事) 남혜로(南惠老)는 금법(禁法)을 범하고 교자(轎子)를 탔으니, 역시 견파(譴罷)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시종(侍從)으로서 신칙(申飭)에 불만을 품고서 버젓하게 협잡(挾雜)하는 자는 내가 비록 정신이 어지럽기는 하지만 강기(鋼紀)가 손에 있다. 유건과 남혜로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1월 24일 기묘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6일 신사

이 날은 동짓날이었다. 임금이 특별히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옛날 선왕(先王)들은 양기(陽氣)를 부식(扶植)하는 도리가 지극하였다. 그때는 임금의 기강이 서고 온갖 법도가 다스려졌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이런 때이겠는가? 그 임금이 몇 해 동안 고심(苦心)하여 대훈(大訓)을 내린 뒤에도 예전 버릇이 여전하여 매일같이 개정(開政)하여 대망(臺望)이 계속 이어지는데도, 곧 외방(外方)에 있다는 핑계로 우물쭈물 망설이는 짓을 일삼고, 교만한 것이 버릇이 되어 경알을 일삼는다. 나랏일에 부지런한 자를 일러 ‘일이 많다.’고 하고 우물쭈물 망설이는 자를 고치(高致)로 여기면서 나랏일을 한쪽편에 밀쳐 놓고 날마다 당심(黨心)쪽으로만 간절히 마음을 매어두고 있으니, 관서(官署)에는 백관(百官)이 상규(相規)하는 일이 없고 낭묘(廊廟)에는 인순(因循)하는 폐단만 있다. 따라서 온갖 법도는 날로 해이해지고 기강은 날로 떨어지며 나랏일은 점차 해이해지니, 우리 백성들이 곤고(困苦)를 받음이 어찌 다른 이유이겠는가? 위에서는 기강이 서 있지 않고 아래서는 뭇 신하들이 교만하여 한번이라도 혹시 칙려(飭勵)하면 곧 ‘새 법(法)’이라면서 그 임금을 구속하려 한다. 옛날 제갈양(諸葛亮)은 한(漢)나라의 한 재상이었으나 촉(蜀)을 다스림에 엄격함을 숭상했는데, 하물며 임금이 된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충성(忠誠)·질박(質朴)과 손(損)·익(益)이 각각 그 때가 있는 법이니, 그 임금이 된 사람이 어찌 이완시키고 긴장시키는 도리가 없을 수 있겠는가? 아! 이 백성들의 곤궁함과 양역(良役)의 폐단은 지금 죄다 하유(下諭)할 수가 없다. 하지만 무릇 일이란 대강(大綱)을 들면 세목(細目)은 절로 환해지는 법이다. 조정에서 동인협공(同仁協恭)하고 대소 신료(臣僚)들이 삼가 힘써 직무(職務)에 이바지한다면 우리 백성들을 구제할 수도 있고 양역도 너그럽게 할 수 있을 것이니, 음양(陰陽)을 조화시키고 시기(時氣)를 고르게 하는 것은 이에서 벗어나 어디에서 구하겠는가? 이제 양기(陽氣)가 회복되는 날이라 원(元)을 본받아 유시(諭示)하니, 그대 대소 신료들은 이처럼 애써 유시함을 깊이 유념하여 각자 면려(勉勵)하도록 하라. 정백(精白)한 한마음으로 모름지기 공경히 본받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7일 임오

간원(諫院) 【정언(正言) 이회원(李會元)과 서지수(徐志修)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 소결(疏決)했던 일은 전적으로 가뭄을 안타깝게 여기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만, 결국에는 김성탁(金聖鐸)·이헌장(李獻章) 등의 무리를 출륙(出陸)시키고 방귀(放歸)시키는 데 불과하였을 뿐입니다. 김성탁은 사람들마다 모두 반드시 죽이고자 하는 죄가 있어 중간에 도배(島配)한 것만 해도 이미 형정(刑政)을 잃은 것인데 이제 와서 출륙시켰으니 더욱 왕법(王法)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이헌장은 곧 연좌된 경우로 중간에 양이(量移)한 것이 이미 타당성을 벗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온전히 석방(釋放)하였으니, 그래도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배소(配所)에 돌려 보내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11월 30일 을유

북관(北關)의 신유년242)  조(條)와 내수사(內需司), 여러 각사(各寺) 및 사노비(私奴婢)의 공미(貢米)를 모두 탕감(蕩減)하고, 관서(關西)와 호남(湖南)의 추노(推奴)·징채(徵債)를 내년 가을까지 한정하여 정지하라고 명하였으니, 모두 제도 감사(諸道監司)의 장청(狀請)을 따른 것이었다.

 

해서(海西)의 해주(海州)·금천(金川) 등 고을에 천둥하고 번개가 치고 우박이 쏟아졌다.

 

이달에 경기(京畿)·호서(湖西)·호남(湖南)·영남(嶺南)·관서(關西)·북도(北道) 및 송도(松都)에 여역(癘疫)이 다시 크게 번져 사망자가 계속 발생하여 거의 1만 명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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