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정유
일식(日食)이 있었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구식(救食)092) 하였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2필(疋) 양역(良役)의 폐단이 나라를 망치는 근저(根柢)가 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조종조(祖宗朝) 이래로부터 누차 변통시키는 계책을 강구하였지만, 지금에 이르도록 시일만 지체하면서 폐단은 날로 더욱 심해지니, 그 형세는 필경 백성도 없고 나라도 없게 된 뒤에야 그칠 것입니다.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이에 성상께서 만년(晩年)에 정치를 더욱 힘쓰시어 큰 뜻을 더욱 분발하여 반드시 백년 동안의 고질적 폐단을 진작시켜 하루아침에 개혁하려고 하시니, 매우 거룩한 일입니다. 급기야 재차 문에 임하기까지 하시어 민정(民情)을 널리 물으시고, 호전(戶錢)·결포(結布)의 주장을 모두 행할 수 없게 되자 마침내 개연(慨然)히 눈물을 흘리시며, ‘2필의 양역을 비록 다 혁파할 수는 없지만 1필로 줄이는 정치는 행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교하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성상의 뜻이 이처럼 간절하고도 독실하셨는데, 저는 대신의 신분으로서 한 가지 계획이라도 펼쳐 우리 전하의 백왕(百王)보다 높으신 지업(志業)을 우러러 돕지 못하였으니, 이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드디어 전배(前輩)의 서론(緖論)에서 얻어들은 것에다가 신의 어리석은 소견을 첨가하여, 홀기(笏記)093) 약간의 조항을 그어서 명정전(明政殿)에 전좌(殿座)하셨을 때에 올리고, 이어서 반령(頒令)을 청하였습니다. 부족한 신의 생각에는 대체로 양역의 폐단은 쓸데없는 비용의 용도가 많은 데에 말미암은 것이니, 그 중에서 변통할 수 있는 것은 변통하고 줄일 수 있는 것은 줄인 연후에 쓸데없는 비용의 지출이 막힐 것입니다. 쓸데없는 비용의 지출이 막히면 감포(減布)·급대(給代)의 수효가 많지 않을 것이고, 감포·급대의 수효가 많지 않으면 구획하여 재물을 만들어 내는 방책이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홀기 중에 가장 긴요한 여러 항목은 바로 군의(群議)의 견제를 당하여 채용됨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허다한 급대의 수효를 모두 백지(白地)에서 판출(辦出)해야 하므로 그 형세는 각 영곤(營閫)에 분배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그래도 부족함이 우려되니, 이는 목전(目前)도 지탱해낼 수가 없는데 더구나 영구히 준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이 뜻을 연중(筵中)에서 진달하여 마침내 4건(件)의 일을 구획한 것이 있으니, 이른바 ‘어염(魚鹽)·진전(陳田)·은결(隱結)·군관(軍官)’ 등의 일이 이것입니다. 그 의논은 혹은 신에게서 나오기도 하고 혹은 요상(僚相)과 여러 당상(堂上)에게서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대체로 모두 토지(土地)·인민(人民)의 소출(所出)로써 미려(尾閭)의 누설(漏泄)094) 을 거두어 들이고, 탈세의 전답에 대해 부세하고 부역을 도피한 무리를 찾아내는 것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애당초 일정한 세금 외에 각박하게 긁어내고 교묘히 거두는 것이 아니었으며, 또 거두어 들이고 나누어 주어 이식(利息)을 취하여 음험하게 백성의 재물을 빼앗기를 청묘법(靑苗法)처럼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허술하여 이루기 어려울까 우려되었는데, 지금은 점점 엉겨 모여 대략 계산해보니 급대의 미목(米木)의 수효와 거의 서로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크게 변통을 가하여 만족하게 구획하기를 신의 홀기의 주장처럼 하지 못했기 때문에, 구차스럽게 땜질한 부분이 오히려 많습니다. 신이 보기에도 감히 ‘만전 무폐(萬全無弊)하다.’라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중외(中外)에서 거행하는 즈음에 역시 다 잘하지 못한 점이 없지 않으니, 헐뜯는 말이 떼 지어 일어나는 것도 또한 마땅합니다. 그러나 대체(大體)는 이미 섰으니, 이것을 가지고 조금 발전시키고 점차 바로잡아 나가기를 대동법(大同法)을 처음 실시하던 때와 같이 한다면, 거의 이룰 수 있을 것이고 역시 거의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천하의 일이란 온전히 이롭기만 한 것도 없고 온전히 해롭기만 한 것도 없으며, 반드시 이로움과 해로움이 맞서게 되니, 요컨대 많은 것이 이길뿐입니다. 앞으로 설사 폐단이 있다 하더라도 1백여 만의 2필 양정(二疋良丁)이 아내와 자식을 팔고서 일자리를 잃고 떠돌아다니는 것과 비교한다면 그 폐단이 어느 것이 많고 어느 것이 적겠습니까? 원망하는 자가 참으로 또한 있기는 하지만, 1백여 만의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고통받는 백성들이 하루아침에 수화(水火)의 고통에서 벗어나 기뻐 고무(鼓舞)하는 것과 비교한다면, 어떤 것이 많고 어떤 것이 적겠습니까? 저 납포(納布)하는 자들은 모두 하호(下戶)·잔민(殘民)입니다. 그들이 고락(苦樂)의 심정을 스스로 진달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지금 사람들이 단지 그 원망이 있는 것만을 듣고 그 기쁨이 있는 것을 듣지 못하니, ‘부옥(蔀屋)095) 이 당폐(堂陛)096) 에서 멀리 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은 그윽이 홀로 슬프게 여깁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백성이 풍족하면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부족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의 백성은 거의 장차 풍족해질 것입니다. 비록 용도에 부족하더라도 의당 걱정하지 않을 일인데, 더구나 잘만 한다면 재용도 풍족해질 수 있는데 더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의(異議)와 분쟁(紛爭)을 싫게 여기지 마시고 더욱 소상함을 더하여 이 한 건의 큰 일을 성취해 내신다면, 실로 생민(生民)의 복이 될 것입니다. 지금의 균역(均役)을 의논하는 자들이 그 주장에 단서가 많으니, 신이 조목조목 변론하려면 문자(文字)가 번잡하여 전하께서 보시기에 방해될까 두렵기에 이 뒤에 마땅히 소책자(小冊子)로써 문답(問答)을 만들고, 겸하여 홀기의 앞서의 내용을 아뢰어 상소를 따라 올려서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상소를 다듬어 올리려 할 즈음에 헌신(憲臣)의 상소가 있어 지척(指斥)함이 범상치 않았다는 것을 듣고 신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바라건대, 신의 집요(執拗)하게 나라를 그르친 죄를 다스려서 대의(臺議)에 사과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5월 2일 무술
조영국(趙榮國)을 이조 참판으로, 윤득재(尹得載)를 경상도 관찰사로, 이현중(李顯重)을 부교리로, 황합(黃柙)을 수찬으로, 성천주(成天柱)를 부수찬으로, 이의암(李宜馣)을 설서로, 홍상한(洪象漢)을 판윤으로, 김상로(金尙魯)를 형조 판서로, 조재호(趙載浩)를 동지성균관사로, 남태량(南泰良)을 평안도 관찰사로 삼았다.
병조 판서 홍계희(洪啓禧)가 상서(上書)하기를,
"신이 어렸을 때에 하토(下土)에 왕래하며 양역의 폐단을 익히 알았습니다. 일찍이 생각하기를, ‘이것을 만약 변경시키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반드시 나라가 없어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리석음을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반복해서 강구하여 최초에 뜻을 둔 것은 호포(戶布)였습니다만, 곧바로 그것이 폐단이 있음을 깨닫고 돌이켜 공전(公田)에서 구하여 마침내 이것을 변통의 제일로 여기게 되자, 다만 사사로운 생각에 그치지 않고 역시 일찍이 임헌(臨軒)097) 의 물음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뒤에 세로(世路)에 나오게 되자 스스로 대갱(大羹)이 입에 맞지 않고 희음(希音)이 귀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서, 또 변경하여 한두 가지 일에 대해 사사로운 의논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일찍이 대조(大朝)께서 가져다 보시어 외람되게 화곤(華袞)098) 의 포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변통(大變通)·대작위(大作爲)에 속하여 하루아침에 거행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므로, 대조께서 물으실 때에는 ‘시행하기 어렵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신이 비국 당상으로 충원된 뒤로는 부좌(赴坐)할 적마다 번번이 양역의 일을 거론하였는데, 그때의 대료(大僚)가 바로 지금의 대료입니다. 영상(領相)은 말하기를, ‘내가 비록 정력이 미치지 못하여 주장할 수는 없으나 그대가 만약 이것을 처리한다면, 내가 어찌 다른 주장을 제기할 수 있겠는가?’ 하였고, 좌상(左相)도 역시 서로 돕기를 허락하였습니다. 미처 건백(建白)하기 전에 신이 호번(湖藩)의 임명을 받게 되었는데 출발에 임하여 구대(求對)하여 양역(良役)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상황을 극력 진달하였습니다. 대조께서 특별히 다시 상량(商量)하여 아뢰도록 하시니, 신이 임지(任地)에 부임한 뒤에 정성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밤낮으로 생각하여 이에 결포(結布)로써 재차 번거롭게 장문(狀聞)하여 시행이 되기를 기대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이 갈래가 많아 호전(戶錢)에 대해 분부가 있었습니다. 신이 호전에 대해 처음에 그 가운데 포함시키기는 하였으나 끝내 폐단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에 감히 계사(啓辭)를 봉(封)하고 다투었습니다. 편지로써 집정(執政)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결포는 시행할 수가 없고 호전도 시행할 수 없으니, 그만두지 않는다면 군포(軍布)의 절반을 감면하여 없애고 별도로 구처(區處)할 방도를 강구하는 것이 비록 결포의 노력을 드리지 않고 성취할 수 있는 것 같지는 못하지만 또한 어찌 적자(赤子)가 뒹굴며 부르짖는 것을 보고 구원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 뒤에 대조께서 재차 문에 임하여 사민(士民)에게 물은 뒤 특별히 군포를 감면하는 분부를 내리셨으니, 그 구처하는 방법이 반드시 전부 신의 견해와 같지는 않았지만 대체로는 동일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신의 의논을 올리지 않았는데 신의 견해는 시행이 된 것입니다. 그 호포를 주장하고 결포를 입법(立法)하는 데 당해서 돌아보건대, 어찌 일찍이 호포와 결포로써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여겼겠습니까? 평일의 주장한 바는 단지 호포·결포에 그칠 뿐이 아니었습니다. 신이 또한 무슨 마음이었겠습니까? 전적으로 주장하는 것도 없고 전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도 없어 오직 백성을 편리하게 하고 폐단을 구제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을 뿐입니다. 신은 일찍이 스스로 주견(主見)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대신(臺臣)의 처지에서 볼 때는 주견이 없다고 비난하는 것이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으니, 이것은 아는 자와 더불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대신이 어염(魚鹽)의 폐단이 양역보다 갑절이나 많은 것으로 말을 하니, 애석하지만 ‘사불급설(駟不及舌)099) ’이라 하겠습니다. 양역(良役)의 폐단은 전배(前輩)가 말하기를 상세히 하였으니, 하늘을 범하고 화기(和氣)를 손상함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염은 바로 전일의 아문(衙門)·궁가(宮家)·이서(吏胥)·도장(導掌)이 주구(誅求)100) 하기를 끝없이 하던 바입니다. 조가(朝家)에서 입법하여 세를 감하고 그 수입(收入)으로써 감포(減布)의 대가(代價)를 옮겨 충당하니, 그 이익을 상실하는 것은 아문·궁가·이서·도장이며 해민(海民)과 어부(漁夫)에게 있어서는 바로 그 하늘을 범하여 화기(和氣)를 손상하는 원기(冤氣)를 풀어주게 되는 것이니, 유독 1필(疋)을 감해 준 백성들만 그 혜택을 입는 것이 아닙니다. 받들어 행하기를 잘하지 못하여 폐단이 있음을 면치 못한다면, 단지 마땅히 그때마다 곧바로 개정(改正)하여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설사 받들어 시행하기를 참으로 잘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폐단이 또한 어찌 양역(良役)에 갑절이나 되는 데 이르겠습니까? 다만 대신(臺臣)이 양역의 폐단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능히 대사(大事)를 하는 것’에 있어서는 다만 대신이 신에게 허여(許與)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도 또한 감히 이것으로써 스스로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제 이 일에 있어서 이에 감히 더불어 듣고 피할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단지 조그마한 노고나마 바쳐서 오랜 옛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대신의 말이 오히려 책비(責備)하니, 신은 실로 부끄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오히려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니, 동궁(東宮)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5월 4일 경자
평안도(平安道)에 해일(海溢)이 있었다.
5월 5일 신축
판결사(判決事) 이형만(李衡萬)이 상서(上書)하기를,
"신의 지난번 죄안(罪案)은 바로 묘당(廟堂)에 천거한 한 가지 일에 있었습니다. 대개 민백창(閔百昌)이 신과 서로 좋은 사이였고, 그의 사람됨이 또 충성스럽고 조심성이 있으며 너그럽고 후덕해서 뚜렷하게 원대한 뜻이 있었으니, 신이 일찍부터 그를 재능 있는 사람으로 여겨서 승진시켜야 된다는 말로 동료들에게 공공연히 말해온 것이 오래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거상[居憂]하던 때에는 과연 친구 사이로서 서로 끌어 도운 적이 있습니다. 그윽이 생각해보면 선배 명현(先輩名賢)들 중에 비록 거상하는 중이라도 간혹 요직에 있는 사람에게 서신을 보내 조정(朝廷)의 잘잘못을 거론한 분이 있고, 또 더러는 전형을 맡은 관원에게 서신을 보내 사람을 천거한 분도 있으니, 모두 문집(文集)에 기재되어 있어서 고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이 끌어 도운 이 일은 예(禮)의 뜻에 그다지 어긋나지 않을 듯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경솔히 이렇게 하였으니, 이것은 신의 잘못입니다. 그리고 이태(李泰)의 일은 대개 이태는 매우 천한 사람으로서 시(詩)를 잘하고 글씨 잘 쓴다는 이름이 있어 당세의 명경(名卿)들이 대부분 아껴 주었고, 심지어는 그를 자기 집에서 보호해 주는 자가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그가 신의 집에 드나든 것도 신이 과거(科擧)에 급제하지 못했을 적의 일로서, 그와 친근하게 수십 년을 좋게 지내 왔습니다. 이태가 요즈음 이후로 유리 걸식(流離乞食)하면서 추태를 부렸지만 그를 안 지가 오래 된 점을 생각해서 그래도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이태가 신과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기 때문에 역시 민백창(閔百昌)과도 서로 가까워졌습니다. 천인(賤人)의 마음에 친한 사람이 고을을 얻는 것에 요행을 바라서 탐문(探問)하는 바가 있기에 신은 마침내 상정(常情)에서 묻는 대로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의 이른바 의서(擬書)라는 것은 요컨대 이 일에 불과한데, 그가 직접 썼으나 직접 전달하지 않았으니 더욱 거론할 만한 일이 못됩니다. 그때에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민백창이 신의 공송(公誦)101) 을 얻고자 하였지만 감히 신에게 직접 요청하지 못하고 필시 이태를 사주하여 그것을 도모한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바로 무리한 억측으로써 신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신은 들으니, 그때 이태의 전록(錢錄) 가운데 ‘정동(貞洞) 10냥(兩)’이란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복해(李福海)가 나누어 준 안(案)인데, 신의 집이 바로 정동에 있으니 어찌 감히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신도 처음에는 매우 경황이 없어서 그 까닭을 헤아리지 못했는데, 뒤에 들으니까 그것은 바로 낭하(廊下)의 노예(奴隷)가 사사로이 서로 빌려 준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전록(錢錄)’이라는 것은 바로 그의 채무 장부[債簿]입니다. 이처럼 기괴스러운 일이 전하의 귀에 전달되기까지 하였으니, 사람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아! 오히려 무엇을 말씀드리겠습니까?"
하니, 동궁(東宮)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장령 박첨(朴)이 상서(上書)하기를,
"어염세(魚鹽稅)의 폐단은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용관(冗官)을 줄이고, 주현(州縣)을 합병하고,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고, 군제(軍制)를 덜어내는 등의 계책을 강구(講究)하게 하여 영원히 행할 방도로 삼으소서."
하니, 동궁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5월 6일 임인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또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외방(外方)의 형편은 신이 본디 자세히 알지 못하니 민원(民怨)의 경중(輕重)은 우선 그만두고 논하지 않겠지만, 변변치 못한 신의 심원(深遠)한 염려는 바로 국가 경제[國計]가 반드시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경외(京外)에서 응당 2필의 포(布)를 거두어야 하는데, 명액(名額)이 완전히 감면된 것 및 비록 그 명액은 남아 있으나 감필(減疋)의 대가를 주지 않은 것이 매우 많으니, 이것은 곧장 깎아 내야 할 것입니다. 그 나머지 이른바 급대(給代)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어염선세(魚鹽船稅)·군관 포(軍官布)·은여결(隱餘結)로 충당하는데, 그래도 부족해서 선혜청(宣惠廳) 및 8도의 감영(監營)·병영(兵營)·통영(統營)·군읍(郡邑)에 몫을 할당하니, 이는 명목없이 긁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는 이미 깎아 내거나 감면을 받고 또 거듭 긁어 냄을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 합계하면 80여 만이나 됩니다. 해마다 이런 식으로 한다면 이것이 어찌 계속할 방도이겠습니까? 이 점이 신이 애당초 소진(疏陳)과 연주(筵奏)에서 오로지 여기에 중점을 두게 된 까닭인데, 주관하는 여러 신하들의 변명하는 상소는 모두가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으로 말해서 신으로 하여금 근심을 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다만 좌규(左揆)102) 의 상소 가운데 ‘쓸데없는 비용을 줄인다.’는 말이 이 일을 언급한 듯한데, 이른바 쓸데없는 비용을 줄인다는 것은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해서 그 저축(儲蓄)을 남기는 것일 뿐이니, 어찌 허다한 공재(公財)를 긁어 내고 깎아 내서 한정이 없는 수용(需用)에 대응하기를 지금처럼 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사마광(司馬光)의 《거가잡의(居家雜儀)》에 이르기를, ‘항상 모름지기 조금씩 나머지를 남겨서 뜻밖의 일에 대비한다.’ 하였으니, 필사(匹士)의 집안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한 나라의 살림을 하는 데 있어 조금의 나머지도 남겨두지 못하고 날로 바닥이 드러나도록 내버려 둘 수가 있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헌부(憲府)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5월 8일 갑진
강화(江華)에 우박이 오고 눈이 내렸다.
5월 10일 병오
임금이 후원(後苑)에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으니, 명(明)나라 태조(太祖)의 기신(忌辰)이었기 때문이다.
위장(衛將) 이면(李葂)을 특별히 동지중추부사로 임명하였다. 이면은 바로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의 후손이다.
5월 11일 정미
윤학동(尹學東)·안윤행(安允行)을 교리로, 김상구(金尙耉)를 부수찬으로, 권기언(權基彦)을 필선으로, 성천주(成天柱)를 겸 문학으로, 홍봉한(洪鳳漢)을 예조 참판으로, 윤급(尹汲)을 좌윤으로 삼고, 종부시 정(宗簿寺正) 허석(許錫)을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가자(加資)하였으니, 선원록청(璿源錄廳)의 노고 때문이었다.
5월 12일 무신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난번 상소의 말미에, 이 뒤에 마땅히 균역(均役)에 대한 일을 가지고 문답(問答)한 소책자(小冊子)를 만들어 예람(睿覽)에 대비하겠다는 뜻으로써 덧붙여 진달한 바가 있었는데, 지금에야 비로소 고쳐 베껴서 올립니다. 문답은 모두 12조항으로서, 첫머리에는 양역(良役)의 2필은 덜어 주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논하였고, 다음은 구획(區劃)한 재력(財力)의 부족한 실수(實數)를 말하였고, 다음은 균역법(均役法)을 공격하는 자들의 주장을 깨뜨렸고, 다음은 홀기(笏記) 이전의 주장을 다시 거듭하였고, 다음은 또 홀기 외에 그밖의 뜻을 말하였습니다. 대개 지금 구획된 것으로써 말한다면 그 수효가 남음이 있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절목(節目)이 이미 만들어지고 두서(頭緖)가 이미 이루어졌으니, 다만 마땅히 이에 따라서 행하면 될 뿐입니다. 어염세(魚鹽稅)에 불편한 점이 더러 있고 선무 군관(選武軍官)의 원망이 간혹 있기는 하지만, 어찌 법(法)의 잘못이겠습니까? 바로 받들어 시행하는 자들이 잘못해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어지럽게 이러니저러니하는 것은 역시 지나치지 않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5월 13일 기유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원손(元孫) 이정(李琔)을 책봉하여 왕세손(王世孫)으로 삼았다. 태묘(太廟)에 고하고 백관(百官)의 하례를 받았으며, 반사(頒赦)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나라의 근본은 만세의 터전을 공고히 하니, 바야흐로 좋은 운수가 열리었도다. 가손(家孫)이 이극(貳極)103) 의 다음 자리에 올랐으니, 이에 성대한 의식을 거행한다. 이에 온 나라와 함께 경축하고 마음을 펴서 밝게 고유(誥諭)하노라. 생각건대, 과인이 외람되게 대통(大統)을 이었는데 원손은 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다. 일각(日角)104) 은 서기(瑞氣)를 보이며 덕우(德宇)105) 는 중성(重星)의 밝음을 이었고 하늘은 징조를 나타내어 태어나던 집에서는 한밤중에 빛이 뻗치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조종(祖宗)의 남기신 은택을 생각하니, 백년 만의 두 번의 경사이다. 무릎을 붙잡고 원량(元良)의 문안(問安)에 따라오니, 한 궁전에 세 임금이 있는 것이다. 어찌 다만 나라의 무궁한 복일 뿐이겠는가? 또한 신인(神人)의 기대에 맞는 것이다. 모습과 거동은 어려서부터 매우 숙성하여 온문(溫文)106) 하다는 칭찬이 벌써 드러났고, 뛰어난 이해력은 미처 말을 배우기 이전에 먼저 열려 글읽는 소리를 좋아하는 듯하였다. 종통(宗統)은 더욱 중대하니, 거의 면록(綿籙)107) 이 길이 창성함을 보겠도다. 번다한 예절을 빨리 행하였으니, 어찌 나이가 더 들기를 기다리겠는가? 이에 자성(慈聖)의 가르침을 받들고 또 선조(先朝)의 옛 법을 상고하여 이미 이달 13일에 책봉하여 왕세손으로 삼았다. 명칭을 바로 함은 민정(民情)을 매어두는 것이고, 지위를 결정함은 국세(國勢)를 견고히 하는 것이다. 품계와 복식이 이미 빛나니 오장(五章)108) 의 몸에 편안함을 아름답게 여기고, 가르치는 분부가 매우 밝으니 8도의 몹시 기다림을 용동(聳動)시킨다. 바야흐로 대인(大人)의 책임을 기약하노니, ‘어린 나이’라고 말하지 말라. 새로 뽑은 그대 궁료(宮僚)를 두노니, 어린이를 인도하는 도리를 다하도록 하라. 내가 구저(舊邸)에서 쓰던 의물(儀物)을 주는 것은 대개 복을 주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옛날 외롭고 위태로웠던 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애초의 바란 바가 아니었다. 하늘의 돌보심을 힘입어 이런 경사(慶事)를 보게 되었다. 용루(龍樓)109) 에서 한가로이 지내며 나의 주름진 얼굴과 흰 머리털을 쓰다듬는다. 자손을 위한 계책을 세워 이런 훌륭한 아들과 손자가 있게 되었다. 비궁(閟宮)110) 에 제사를 올렸고, 마침내 온 나라에 윤음(綸音)을 반포한다. 건곤(乾坤)이 조화가 지극히 넓어서 만물과 함께 형통하며, 뇌우(雷雨)의 혜택이 넓게 펴져서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을 감싸서 흡족하게 적셔 준다. 이달 13일 새벽녘 이전으로부터 잡범 사죄(雜犯死罪) 이하는 모두 너그럽게 용서해 주도록 하라. 아! 한실(漢室)의 반석처럼 굳은 기반은 크게 창성할 때를 얻었고 주(周)나라 본지(本支)의 번성함은 큰 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생각건대, 마땅히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 이천보(李天輔)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54책 73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402면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 어문학(語文學)
[註 103] 이극(貳極) : 왕세자(王世子).[註 104] 일각(日角) : 귀인(貴人)의 상(相)으로, 이마의 뼈가 불쑥 나와 해 모양같이 된 것을 이름.[註 105] 덕우(德宇) : 너그러운 품성(品性).[註 106] 온문(溫文) : 온화하고 운치가 있음.[註 107] 면록(綿籙) : 끝없이 먼 미래.[註 108] 오장(五章) : 오복 오장(五服五章)을 이름. 《서경(書經)》 고요모(皐陶謨)편에 "하늘이 덕(德)이 있는 이에게 명하여 오복(五服)으로 다섯 가지 등급을 밝힌다.[天命有德 五服五章哉]"라 하고, 그 주(注)에 오복(五服)은 천자(天子)·제후(諸侯)·경(卿)·대부(大夫)·사(士)의 복색을 말하는데, 이로써 존비(尊卑)를 옷의 색깔로 구분하여, 덕(德)이 있는 이에게 명하여 천하의 질서를 바로잡도록 하였다." 하였음.[註 109] 용루(龍樓) : 궁중(宮中).[註 110] 비궁(閟宮) : 종묘(宗廟)의 이칭.
5월 13일 기유
유언국(兪彦國)을 사간으로, 신만(申晩)을 판돈녕으로 삼았다.
5월 15일 신해
김재로(金在魯)에게 안구마(鞍具馬)를 하사하고, 조현명(趙顯命)·유척기(兪拓基)·권적(權𥛚)·홍봉조(洪鳳祚) 등에게 말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으며, 조운규(趙雲逵)를 가선 대부로, 임상로(林象老)·조돈(趙暾)·신위(申暐)·신회(申晦)·박상덕(朴相德) 등을 통정 대부로 가자(加資)하였으니, 왕세손(王世孫)을 책봉할 때의 노고 때문이었다.
5월 17일 계축
장령 박첨(朴)이 상서하여 영양현(英陽縣)의 죄인 덕란(德蘭)과 석문(錫文)이 남편을 죽이고 아버지를 죽인 사건을 조사하여, 한결같이 《대명률(大明律)》에 의거하여 거행하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평산 부사(平山府使) 박재해(朴載海)는 오로지 가렴 주구[掊克]만을 일삼아 환곡(還穀)을 몰래 판매하였으니, 청컨대 삭직(削職)하소서."
하니, 동궁(東宮)이 그대로 따랐다.
5월 18일 갑인
헌부(憲府)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5월 19일 을묘
헌부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5월 19일 을묘
임집(任)을 사간으로, 이봉령(李鳳齡)을 헌납으로, 이인원(李仁源)·안치택(安致宅)을 지평으로, 한명여(韓命輿)·남운로(南雲老)를 정언으로, 이섭원(李燮元)을 보덕으로, 박문수(朴文秀)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병조 판서 홍계희(洪啓禧)가 상소하기를,
"균역법(均役法)의 여러 조항 중에 어염(魚鹽) 한 가지 일이 가장 말썽이 많은데, 당초에 절수(折受)111) 를 주라고 명하신 것은 실로 제왕(帝王)의 거룩한 일입니다. 설사 해부(海夫)의 원망이 있다 하더라도 받들어 시행하는 사람들이 잘못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결(餘結)에 대해서는 혹시 여러 고을에서 지탱하기 어려워서 도리어 민폐를 끼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바로 국법(國法)의 금하는 바이니, 이미 징수한 포를 군관(軍官)에게 되돌려 주는 것은 부당합니다. 진실로 한때의 소란스러운 단서가 되기는 하지만 별도로 명목(名目)을 만들어서 징수할 포를 초정(抄定)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이 세 가지 일에 대해서 보탰으면 보탰지 덜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은 또 군문(軍門)을 감하고 용관(冗官)을 줄이고 주현(州縣)을 합병하는 것 등의 일을 가지고 전후에 걸쳐 여러 차례 진달하였는데, 이것은 근거없는 말이 아닙니다. 신은 짐작컨대, 대료(大僚)도 역시 이전의 견해를 꼭 고수하지만은 않을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빨리 대신과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난만(爛漫)하게 강구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거행할 수 있는 것은 유의해서 거행하도록 하고, 어염·은결·군관의 절목은 다시금 더 소상히 대신·요당(僚堂)112) 과 함께 조용히 강구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0일 병진
동지 정사 해춘군(海春君) 이영(李栐)과 부사 황재(黃梓), 서장관 임집(任)이 청(淸)나라에서 돌아왔다.
5월 22일 무오
임집을 부응교로, 한광조(韓光肇)를 교리로, 이명희(李命熙)를 부교리로, 이규채(李奎采)를 수찬으로, 이득종(李得宗)을 부수찬으로, 홍낙성(洪樂性)·김문행(金文行)을 익선으로, 김치인(金致仁)을 좌찬독으로 삼았다.
5월 23일 기미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처음으로 정사(呈辭)하니, 동궁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답(下答)하였다.
동궁이 하령(下令)하기를,
"대조(大朝)께서 하교하시기를, ‘종반(宗班)이 매우 조령(凋零)하여 근친(近親)으로는 단지 여천군(驪川君) 형제가 있을 뿐인데, 지금 해도(海島)에 귀양을 가서 세 차례의 대사(大赦)를 거쳤지만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니,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하시며 이어서 눈물을 떨구시니, 내 가슴이 아프다. 이증(李增)을 특별히 석방하여 친족에 돈목(敦睦)하시는 성상의 마음에 우러러 부응하라."
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연명으로 상달하여 빨리 하령(下令)을 거두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즉시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4일 경신
부응교 임집(任)이 차자(箚子)를 올려 이증(李增)을 석방하라는 명령을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동궁이 따르지 않았다.
호조 판서 김상성(金尙星)이 아뢰기를,
"세손궁(世孫宮)에서 거행하는 범례(凡例)를 호조(戶曹)에서는 빈궁(嬪宮)의 관례에 따르고 선혜청(宣惠廳)에서는 세자궁(世子宮)의 관례에 따르니, 품정(稟定)해서 한가지로 결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빈궁의 관례에 따라 행할 것을 명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지금 세손궁을 위하여 많이 덜고 줄이는 것은 역시 복(福)을 아끼려는 뜻에서이다. 동조(東朝)께 진헌(進獻)하는 것도 10분의 2, 3을 줄이는데, 더구나 세손궁이겠는가? 지금을 위한 방법으로는 용도를 절약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일에 따라 줄이고 아끼도록 하라. 지난해의 진헌을 보고 자성(慈聖)에 대한 덜고 줄이는 성덕(盛德)을 받들어서 이미 행하였다. 탁지(度支)의 여분과 선혜청의 옛 비축은 감포(減布)의 대신으로 보충할 만하다. 여러 물품 중에 동조께 진헌하는 것 이외에는 긴급하지 않은 것을 모두 줄이고, 월령(月令)은 그대로 두어서 예(禮)를 사랑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5일 신유
임금의 몸이 편찮아서 약원(藥院)에서 직숙(直宿)을 바꾸고, 승문원(承文院)과 조정(朝廷)에서 아침저녁으로 문안하였다.
정원(政院)에서 거듭 상달하여, 이증(李增)을 석방하라는 명령을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 【장령 박첨(朴)과 지평 안치택(安致宅)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제주(濟州)에 안치(安置)한 죄인 이증(李增)은 당초에 사형을 감면해 준 것도 이미 잘못된 형정(刑政)입니다. 가율(加律)의 청이 아직 인준을 받지 못하던 차에 완전히 풀어 주라는 명령이 갑자기 내려졌습니다만, 왕장이 지엄하여 굽힐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석방하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시고 그 배소(配所)에다가 빨리 위리(圍籬)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동궁(東宮)이 따르지 않았다.
조돈(趙暾)을 승지로, 윤급(尹汲)을 대사헌으로, 김선행(金善行)을 사간으로, 이중조(李重祚)를 교리로, 윤상임(尹尙任)을 겸 필선으로 삼았다.
5월 26일 임술
임상로(林象老)를 승지로, 조운규(趙雲逵)를 좌윤으로 삼았다.
5월 29일 을축
우참찬 원경하(元景夏)를 공주목에 부처(付處)113) 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에 임금의 몸이 편찮아서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임금이 도제조 김약로(金若魯)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구궁(舊宮)에 돌아가 쉬려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루지 못했다. 지금 만약 내가 돌아가 쉬게 된다면, 내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다."
하니, 김약로가 말하기를,
"여러 대신들이 모두 창의궁(彰義宮)이 불편한 점이 없지 않다고들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불편한 것이 무엇인가?"
하니, 김약로가 말하기를,
"각전(各殿)에서 이미 따라갈 형편이 안되니, 모든 절차가 절로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행궁(行宮)이 있었는데, 이것이 어찌 방해롭겠는가?"
하니, 김약로가 말하기를,
"여러 의논 중에는 더러 구궁(舊宮)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사묘(祠廟)이기 때문에 방해롭다고 하기도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노(怒)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글을 읽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겠는가? 이것이 누구의 말인가?"
하니, 김약로가 말하기를,
"원경하의 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글을 읽은 선비가 어찌 이처럼 세속에서 꺼리는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참으로 근거가 없는 것이다."
하고, 이어서 원경하를 중도 부처(中道付處)하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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