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0일 정축
임금이 친히 태묘(太廟)에 제사를 지냈다.
경기·충청·경상·평안·함경 5도의 유생 윤득형(尹得亨) 등이 상서(上書)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을 성묘(聖廟)081) 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으나, 동궁(東宮)이 따르지 않았다.
4월 11일 무인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1백 5번째 정사(呈辭)를 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로써 허락하였다.
정우량을 판중추부사로, 어석윤(魚錫胤)을 승지로, 김문행(金文行)을 응교로, 김상구(金尙耉)를 부교리로, 홍낙성(洪樂性)을 사간으로, 유언국(兪彦國)을 집의로, 유한소(兪漢蕭)·유건(柳健)을 지평으로, 이조망(李朝望)을 정언으로, 성천주(成天柱)를 헌납으로, 남학종(南鶴宗)·이봉령(李鳳齡)을 장령으로, 정기안(鄭基安)을 문학으로, 조돈(趙暾)을 겸 보덕으로 삼았다.
황해도 관찰사 조명채(曹命采)가 상서(上書)하여, 진곡(賑穀)을 특별히 백급(白給)082) 하고 세태(稅太)도 역시 백급하게 하기를 청하니, 동궁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4월 12일 기묘
내의원 제조(內醫院提調)에게 직숙(直宿)하도록 명하였으니, 원손(元孫)의 부스럼의 증세 때문이었다.
4월 15일 임오
왕세손(王世孫)의 책봉을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미 책봉 도감(冊封都監)을 설치하였으니, 강서원(講書院)과 위종사(衛從司)의 관원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차출(差出)하게 하라."
하였다.
원경하(元景夏)를 세손사(世孫師)로, 박문수(朴文秀)를 세손부(世孫傅)로, 신회(申晦)를 좌익선(左翊善)으로, 김선행(金善行)을 우익선(右翊善)으로, 박상덕(朴相德)을 좌찬독(左贊讀)으로, 이규채(李圭采)를 우찬독(右贊讀)으로, 유숙기(兪肅基)를 좌장사(左長史)로, 서명응(徐命膺)을 우장사(右長史)로, 최홍간(崔弘簡)을 좌종사(左從史)로, 송희상(宋羲相)을 우종사(右從史)로, 김재로(金在魯)를 책례 도감 도제조(冊禮都監都提調)로, 신만(申晩)·유엄(柳儼)·김상로(金尙魯)를 제조로, 조돈(趙暾)·신회(申晦)를 낭청으로 삼았다.
4월 19일 병술
좌의정 김약로(金若魯)가 상소(上疏)하여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로써 허락하였다. 다시 조현명(趙顯命)을 좌의정으로 삼았다.
김약로를 판중추부사로, 신사철(申思喆)을 지중추로, 김상성(金尙星)을 대사헌으로, 이이장(李彛章)을 집의로, 남태혁(南泰赫)을 사간으로, 정한규(鄭漢奎)·강필신(姜必愼)을 장령으로, 박기채(朴起采)를 지평으로, 성천주(成天柱)를 헌납으로, 이택징(李澤徵)을 정언으로, 신회(申晦)를 겸 필선으로, 김치인(金致仁)을 겸 문학으로, 조영국(趙榮國)을 예조 참판으로, 임상로(林象老)를 익례(翊禮)로 삼았다.
4월 20일 정해
임금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 병조 판서 홍계희(洪啓禧)를 소견(召見)하고, 균역(均役)에 관한 일을 물었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양역(良役)을 변통한 뒤에 해부(海夫)의 원성이 하늘까지 이르고 대소의 인정(人情)이 들끓었기 때문에 신이 여러 차례 소진(疏陳)하였습니다. 중외(中外)에서 긁어 모아 감포(減布)를 충당하느라 그 폐단이 도리어 심하니, 신의 생각에는 결국 호전(戶錢)이나 결포(結布)만 못한 것으로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다시 2필(疋)로 회복시켜야 하겠는가?"
하므로,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외에는 좋은 계책이 없는데 성상께서 신의를 잃을 것을 염려하시어 다시 다른 법을 만들었습니다만, 다른 법이 폐단이 없을 줄을 또 어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옛적의 2필로 회복시키고 인족(隣族)과 백골(白骨)의 징수를 잘 변통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관서(關西)의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은 본시부터 군저(軍儲)가 다른 곳에 비해 더욱 중한데, 기내(畿內)에 있어선 본래 쇠잔한데다가 이제 또 긁어 모아 쇠약하게 하여 서울에 가까운 고을로 하여금 모양새를 이루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어찌 민망스럽지 않겠습니까?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곡식이 썩어가는 때를 당하여 누차 1년의 반조(半租)를 감면하였다가 전조(全租)를 감면하는 데 이르렀으며, 경제(景帝) 원년(元年)에는 다시 조세(租稅)를 거두었지만, 이때문에 신의를 잃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나라 문제의 조세 감면은 1년의 조세에 불과하였을 뿐이다. 어찌 말년 이후에 해마다 모두 감면하였는데 경제(景帝)가 다시 거둔 것인가?"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말년으로부터 영원히 감면하였는데 경제가 다시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또 지금 감포(減布)의 정사는 맥도(貊道)083) 와 다름이 없습니다. 종묘(宗廟)의 봉사(奉祀)와 백관(百官)의 늠록(廩祿)을 어떻게 지탱할 계책을 한다는 말입니까? 몇 년을 지나지 않아 그 해로움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니, 결코 1년도 지탱할 계책이 못됩니다."
하고, 홍계희(洪啓禧)는 말하기를,
"대신이 아니면 그 누가 있는 힘을 다해 말하겠습니까? 하지만 신은 그래도 성취시키고자 하는 뜻이 있으니, 마땅히 대신과 상의해서 다시 진달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염세(魚鹽稅)를 해부(海夫)가 편하게 여긴다면, 소금이 어째서 귀하게 되었는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른바 ‘염부(鹽釜)’란 것은 전에는 통계(通計)하여 세금을 받았지만, 지금은 소소한 염부에게서 각각 세금을 거두기 때문에 모두 부(釜)를 깨뜨리고 달아나버리니, 소금이 어찌 귀하지 않겠습니까? 양역(良役)을 변통하는 것은 이미 반포(頒布)하였으니, 금년에는 역시 곧바로 폐지하기가 어렵습니다. 내년을 기다려서 폐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대로 회복하면 나라가 따라서 망할 것이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인장[印]을 소각(銷刻)084) 한 일이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대체로 우리 나라는 양민(良民)이 적고 문관(文官)도 아니고 무관(武官)도 아닌 자들이 많습니다. 지금 이 감포(減布)는 양민으로 혜택을 아는 자들은 적고 한가로이 노는 무리로 나라를 원망하는 자들은 많으니, 그 이해(利害)를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별군관(別軍官)도 역시 폐단이 있는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혹시 1냥(兩)의 돈을 거두어 그 액수를 넉넉히 하면 그래도 괜찮지만, 공통적으로 1필을 거두어 양역(良役)과 차이가 없게 하니, 어찌 원망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1냥의 돈을 거둔다면 양역도 반드시 반필(半疋)을 바치기를 원할 것이다."
하였다.
4월 21일 무자
함경도의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에 큰 눈이 내리니,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였다.
4월 24일 신묘
헌부(憲府)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4월 26일 계사
지평 박기채(朴起采)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양역(良役)의 1필로 이미 감면한 수량을 완전하게 보충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이것은 나라의 큰 일입니다. 지금의 이리저리 모아서 수량을 채우는 것은 명색(名色)이 많아서 다방면으로 거둬들이게 되니, 그 폐단을 구하려다가 도리어 원망을 일으킵니다. 어염세(魚鹽稅)에 이르러서는 그 해가 더욱 심합니다. 대저 바닷가의 백성들이 살아갈 수가 없어서 노분(鹵盆)을 깨뜨려버리고 강 둑을 헐어버리며 선박을 묶어두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니, 바닷가나 강가의 백성들도 오히려 어염(魚鹽)을 먹지 못하는 자가 보통 10명에 8, 9명이나 되는데, 더구나 도성의 백성과 산골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어떻게 소금 없이 밥먹는 근심을 면하겠습니까? 더러는 콩깍지를 물에 삶기도 하고 혹은 나무껍질을 물에 담그기도 해서 간장 대신으로 마시기도 한다고 합니다. 생민(生民)이 폐해를 받음이 이처럼 혹독하니, 위로는 비국 당상으로부터 삼사(三司)의 신하에 이르기까지 사실(私室)에서 서로 대면할 때는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으나, 등연(登筵)함에 이르러서는 한 사람도 국가를 위해서 남김없이 진달하는 이가 없으니, 신은 삼가 개탄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신이 전대(前代)를 낱낱이 살펴보건대, 새로운 법을 만들어 낸 자들이 상홍양(桑弘洋)085) 의 각염 세주(榷鹽稅舟)와 왕안석(王安石)086) 의 균수 청묘(均輸靑苗)가 있는데, 모두 ‘취렴(聚斂)하는 신하’가 됨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일을 맡은 여러 신하들도 또한 어찌 나라를 병들게 하고 백성을 시달리게 하는 정치를 하고자 한 것이겠습니까? 단지 억측하여 결정하고 거기에 창화(唱和)하여 혼미하게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비록 나라의 여론이 떼 지어 일어나더라도 오히려 또한 우기며 고집하고 있으니, 신은 삼가 민망하게 여깁니다."
하였으나, 회보(回報)하지 않았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리기를,
"이른바 균역(均役)이란 것은 치우치게 헐한 백성에게서 골고루 취하여 치우치게 고생하는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니, 열성조(列聖朝)에서 양역(良役)의 폐단을 강구하면서 호전(戶錢)087) ·구전(口錢)088) ·유포(遊布)089) 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은 것이 모두 이 뜻이었습니다. 지금에는 네 법을 버리고 행하지 못하면서 전적으로 공가(公家)의 응당 들여올 재물에서 깎아내어, 고식적으로 땜질하는 계획으로 삼으니, 해마다 공가의 재정 손실의 수효가 8, 90만에 이릅니다. 그래도 오히려 부족함을 근심하여 자질구레한 것을 긁어 모아 채우니, 사체(事體)의 구간(苟艱)함과 명목(名目)의 바르지 못함은 모두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어찌 그 균역의 본뜻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설령 이 법이 시행됨에 1명의 백성도 원망이 없고 1명의 백성도 폐단이 없더라도, 참으로 1, 2년 사이에 국가의 저축이 점차 바닥이 나서 군수(軍需)와 백사(百司)의 경비가 결단코 지탱하지 못할 것이니, 이와 같고서 나라를 경영할 수 있겠습니까? 불행하게 흉년이 이어지고 전쟁이 겹친다면 수입은 더욱 줄어들고 지출은 더욱 많아질 것이니, 장차 어느 곳에서 판출(辦出)을 요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지경에 이르면 나라는 나라 구실을 하지 못하여 저절로 무너져 버리게 될 것이니, 비록 혹시 노신(老臣)의 오늘의 말을 회상한다 하더라도 역시 미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4월 28일 을미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백관(百官)의 하례를 받고 반사(頒赦)하니, 원손(元孫)의 환후(患候)가 평상으로 회복하였기 때문이다.
김상구(金尙耉)를 사간으로, 박첨(朴)을 장령으로, 안치택(安致宅)을 지평으로, 유언민(兪彦民)을 헌납으로, 홍낙성(洪樂性)을 교리로, 조돈(趙暾)을 보덕으로, 정홍순(鄭弘淳)을 겸 사서로, 한익모(韓翼謨)를 경상도 관찰사로, 김상성(金尙星)을 호조 판서로 삼고, 신만(申晩)을 숭정 대부(崇政大夫)로, 한사득(韓師得)을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홍봉한(洪鳳漢)을 가의 대부(嘉義大夫)로 가자(加資)하니, 약방(藥房)에서 숙직한 노고 때문이었다.
이익정(李益炡)을 대사헌으로, 여선응(呂善應)을 지평으로, 김문행(金文行)을 겸 보덕으로 삼았다.
충청도 관찰사 이익보(李益輔)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염(魚鹽)의 일은 포구(浦口)의 백성들이 말하기를, ‘배 한 척에 토지(土地)·어장(漁場) 등의 세(稅)가 있고 또 그에 따른 소소(小小)한 선세(船稅)가 있으니, 이는 배는 1척인데도 세금은 모두 세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어전(漁箭)은 그 이로움과 이롭지 않음을 따지지 않고 단지 결전(結箭)의 길고 짧음과 넓고 좁음을 가지고 배와 아울러 분등(分等)하여 9등으로 하니, 종전에 1, 2냥으로 세금을 내던 것이 지금은 8, 9냥이 되었고 전에 5, 6냥을 내던 세금이 지금은 3, 40냥이 되었습니다. 고기잡이는 본래 일정한 장소가 없어서 간혹 금년에 이곳에서 이익을 보다가도 명년에는 이익을 보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어부(漁夫)가 이익을 쫓음은 단지 연파(煙波)090) 를 오르내리면서 거의 공중(空中)의 생애(生涯)와도 같습니다. 전일의 각처에서 세금을 거두는 것이 진실로 많았으나, 얻는 대로 납부하여 그것이 많은 줄을 몰랐습니다. 지금은 3, 40냥 혹은 8, 90냥을 일시에 징수해 가니, 설사 어리(漁利)를 얻음이 있더라도 진실로 그 여유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데, 만약 완전히 그 이익을 잃을 때를 당하면 실로 그 원래의 수량을 채워 납부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염분(鹽盆)의 좋고 나쁨은 전적으로 염전(鹽田)의 기름지고 척박함에 달려 있으니, 기름지면 이익이 많고 척박하면 이익이 적어 마치 전답(田畓)의 등품(等品)과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후박(厚薄)을 따지 않고 한결같이 결막(結幕)의 넓고 좁음과 구철(鉤鐵)091) 의 많고 적음에 따라 아홉 등급으로 나누어 세금을 거두고 있습니다. 대개 지난 겨울 균세사(均稅使)가 내려왔을 적에 때마침 한겨울 눈 쌓인 철이라서 어전(漁箭)은 매어놓은 것이 없고 염부(鹽釜)도 설치하지 않았으며 배는 혹시 다른 곳에 나가기도 해서 각 고을에서 어전(漁箭)의 넓고 좁음과 염분의 기름지고 척박함과 배의 크고 적음을 제대로 상세히 살피지 못하고 다만 감색(監色)과 호수(戶首)가 진고(陳告)하는 데 따라 뒤섞어 기록하여 보고하였으니, 간혹 선척과 어전의 작은 것이 중간 것으로, 중간 것이 큰 것으로 된 것이 있기도 하며, 염분도 역시 그러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신이 드디어 감영(監營)의 각 고을에 있는 안책(案冊)을 가져다가 조준(照準)해 보았더니, 과연 작은 것이 중간 것이 되고 중간 것이 큰 것이 되고 좁은 것이 넓은 것이 되고 척박한 것이 기름진 것이 된 것이 없지 않았으니, 이것이 원통함을 호소하는 단서가 된 것입니다. 어전·선척과 염분을 막론하고 각 아문(衙門)이나 혹은 부민(富民)이 모두 그 본주(本主)가 되어, 어전의 기계(機械)와 배의 노즙(櫓楫)과 염분의 구철(鉤鐵) 등의 물품을 담당하여 준비하는 것이 거의 4, 5백 금(金)을 사용하며 이를 결전(結箭)·조선(造船)·설염(設鹽)의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지금은 본주로 하여금 주장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이른바 본주는 모두 팔짱을 끼고서 뒤로 물러나 서 있고, 오직 저 선인(船人)·어한(漁漢)·염부(鹽夫)들은 모두 아침에 모였다가 저녁에 흩어지는 의탁할 데 없는 유개(流丐)의 무리들로서, 그 가운데서 사역(使役)하며 입에 풀칠이나 하는 자들에 불과합니다. 이미 물주(物主)가 없으니 허다한 비용을 그들이 무슨 방법으로 판출(辦出)하겠습니까? 실상이 이와 같기 때문에 이미 흩어져서 도피하는 자가 있어, 선척과 어전은 파괴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파괴되고 염분도 역시 묵혀 두고 설치하지 않았으니, 그들이 힘써 작업하기를 즐겨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힘써 일하지 않는데 다만 대장에 기록된 어기(漁基)·어장(漁場)·염분·선척만을 가지고 창고마다 세금을 거둔다면, 그 폐해는 인족(隣族)의 침징(侵徵)보다 심할 것입니다. 포구 백성의 실업(失業)은 피해가 온 나라에 미쳐 작년 겨울부터 어염의 가격이 매우 뛰어올라서, 1석(石)의 소금 값이 예전에는 1냥 미만이었는데 지금은 6, 7냥이 되었고 그래도 살 수가 없습니다. 금년의 고기 한 마리 값이 전년(前年)의 고기 열 마리 값이 되어 민정(民情)의 흉흉함이 곡식 흉년이 들었을 때보다 갑절이나 더하니, 참으로 수륙(水陸)이 함께 고통받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도내(道內)의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배도 모두 부수고 어전·염분도 모두 걷어치워야 한다.’고 합니다. 백성이 믿고서 살아가는 것이 어염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어염이 끊긴다면 백성이 장차 다 죽게 될 것입니다. 이 법을 지금 경솔히 의논하기가 어렵다면 특별히 그 세금을 줄여서 보전하기 어려운 근심이 없도록 해야만 할 것이니, 그런 후에야 흩어지고 일자리를 잃은 백성들이 거의 터전에 안정하고 생업을 즐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무 군관(選武軍官)의 일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조령(朝令)에 따라 충분히 정밀하게 뽑아서 군보(軍保)의 자손 및 향품(鄕品)의 천얼(賤孼)로서 모두 다 정원을 채웠는데, 조정(朝廷)에서 특별히 도시(都試)를 허락하여 발신(發身)의 계제(階梯)를 삼았으니, 그들에게는 다행스럽다 하겠습니다. 진실로 마땅히 앞다투어 참여해서 원한을 호소하고 면제를 도모하려는 뜻이 없을 것 같은데, 오직 그 충원이 된 자들은 크게 놀라고 조금은 괴이쩍게 여겨 지금까지 소요(騷擾)하고 있으니, 이는 다른 연유가 아니라 이 무리는 문관(文官)도 무관(武官)도 아니고 양반(兩班)도 아니며 상민(常民)도 아니므로, 혹은 농업(農業)에 힘쓰는 자도 있고 혹은 시장(市場)에 출입하는 자도 있어 문무(文武) 양자 간에 단연코 성취할 희망이 없습니다. 외관상으로 보면 바로 군보(軍保)에 적합한데, 오히려 이렇게 원망하고 호소하는 짓을 하는 것은 대체로 그들이 평소에 유의(儒衣)·유관(儒冠)을 하고 사대부(士大夫)를 모방하여 군보를 모면하려는 자료로 삼았는데, 지금 군관(軍官)으로 호칭하여 무예(武藝)를 익혀 발신(發身)하게 하니, 그들도 자신의 신수(身手)와 재능을 돌아보아 결단코 가망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번 그 장부[案]에 기록된 뒤에는 현관(縣官)이 으레 적혀진 이름마다 군포(軍布)를 거두어 양정(良丁)과 다름이 없으니, 자신이 죽거나 도망하거나 탈이 나서 대신하기 이전에는 역시 군보들과 같을 뿐입니다. 명색(名色)은 비록 다르지만 그 실상은 동일(同一)하니, 반드시 모면하기를 도모한 뒤에 그만두려고 하는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조정의 위열(慰悅)하는 하교(下敎)와 영읍(營邑)의 개유(開諭)하는 방도가 은근하였는데도 무지 몽매한 무리들이 조금도 감동하여 이해하는 뜻이 없고, 더욱 의심하고 겁내는 마음을 품어 가산(家産)을 경파(傾破)하고 동서(東西)로 도피하여 흩어지니, 몇 달 안에 죽거나 도망한 그 수효가 또한 많습니다. 앞으로 장차 어떻게 그들 대신으로 충원하여 그 군포를 거두겠습니까? 원성은 길에 가득하고 모습은 수심이 대단합니다. 백성의 습성은 비록 매우 밉지마는 그 정상은 또한 슬픕니다. 그리고 또 본도(本道)는 본디 사대부의 고을로 일컬어져서 양반(兩班)은 많고 양민(良民)은 적으니, 평소에 첨정(簽丁)을 얻기가 어려워 마치 거북이 등에서 터럭을 긁어 모으는 것과 같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큰 돌림병이 돈 뒤인데 또 전에 없던 명목을 만들었으니, 생산은 한정이 있고 양액(良額)은 갑절이 더해진 셈입니다. 수령(守令)이 된 자가 한정이 있는 민생(民生)으로써 끝없이 도망한 사람과 사망한 사람을 채운다면, 그 대신을 채우는 어려움과 소요(騷擾)의 폐단이 반드시 지금보다 배나 더할 것이고, 백골 징포의 참혹함과 인족 침징의 폐해가 형편상 반드시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일러 폐해 한 가지를 구하려다가 도리어 폐해 한 가지를 만들어 낸다고 하는 것으로 장차 수습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니, 등골이 오싹할 만큼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비록 미봉하여 진정시키고 벌어진 틈을 메꾸어 보려 하나 실로 그 계책이 없으니, 빨리 선처(善處)하시어 소요하는 군정(群情)으로 하여금 진정하게 하시고, 실업(失業)한 포구의 백성들로 하여금 돌아와서 편안히 살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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