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5월 2일 정묘
윤학동(尹學東)을 부수찬으로, 임집(任)을 겸 보덕으로, 서명빈(徐命彬)을 우참찬으로, 서명신(徐命臣)을 충청도 관찰사로 조재호(趙載浩)를 홍문관 제학으로, 신만(申晩)을 세손부(世孫傅)로 삼았다.
윤5월 3일 무진
헌부(憲府)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윤5월 5일 경오
김약로(金若魯)에게 안구마(鞍具馬)를 하사하고, 신만(申晩)을 숭록 대부로, 한사득(韓師得)을 가의 대부로 가자(加資)하였으니, 약원(藥院)에서 숙직한 노고 때문이었다.
윤5월 6일 신미
윤급(尹汲)을 부제학으로, 김문행(金文行)을 응교로, 김상구(金尙耉)를 부교리로, 이형신(李衡身)을 전라 병사로, 원중회(元重會)를 경상 우병사로 삼았다.
윤5월 7일 임신
헌부(憲府)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경기 암행 어사 정홍순(鄭弘淳)이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소견하고 어·염·선(魚鹽船)에 대한 세 가지 일을 물었다. 정홍순이 말하기를,
"신이 해도(海島)에 출몰(出沒)하면서 상세히 탐문해보니, 이른바 백성의 원성이라고 한 말은 보통과 반대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뱃사람들은 말하기를, ‘옛날에는 납부하는 것이 비록 많았지만 오히려 침탈의 염려가 있었는데, 지금은 한번 납부한 뒤에는 다시 다른 염려가 없다.’ 하고, 어부(漁夫)와 염호(鹽戶)들도 모두 말하기를, ‘여러 곳에 세금 내기가 번거로웠던 것이 지금은 일시에 가볍게 납부하기 때문에 편리하다.’ 하였습니다. 대저 민정(民情)이 비록 새 법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조정(朝廷)의 의논이 분분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법이 오래 가리라고 믿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뢴 것을 자세히 기록해서 들여보내라고 명하였다.
윤5월 8일 계유
약원(藥院)에서 숙직을 그만두었다.
윤5월 9일 갑술
신회(申晦)·박상덕(朴相德)을 승지로, 정형복(鄭亨復)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윤5월 10일 을해
북관(北關)의 금법(禁法)을 어기고 국경(國境)을 넘어 타국(他國)으로 간 김인술(金仁述) 등 일곱 사람을 국경에서 효시(梟示)하였다.
헌부 【지평 안치택(安致宅)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채제공(蔡濟恭)은 법에 종사하는 신하인데 길 한복판에서 방가(方哥) 성(姓)을 가진 사람에게 구타를 당하였으니, 모든 조신(朝紳)들이 누군들 놀라고 분개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전 집의 이훈(李塤)이 단지 채제공의 감죄(勘罪)만을 청하고 방가(方哥)를 징계하여 다스릴 것을 청하지 않았으니, 그가 방가의 처지를 위한 것은 부지런하였지만, 유독 대각(臺閣)이 날로 경시되고 기강이 더욱 무너지는 것은 생각지 않는 것입니까? 그가 조정을 욕되게 한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훈을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마시고, 방가는 엄중히 조사하여 중죄(重罪)로 다스리소서. 호조 좌랑 이보순(李普淳)은 비루하고 잗달은 것이 버릇이 되어 모든 물품을 무역할 적에 오로지 하인들에게 맡겨 비싼 값에 경솔히 사들였으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남양 부사(南陽府使) 유세덕(柳世德)은 어호(漁戶)와 염한(鹽漢)에게 싼값으로 미리 지급하고서 그보다 열 배 비싼 값으로 강제 징수하여 자기집에 실어 보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남병사(南兵使) 이언섭(李彦燮)은 흉년을 당하여 진휼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절미(折米) 수백 석을 가지고 대부분 초서(貂鼠)를 사들이어 각박하고 잔인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경상 감사 윤득재(尹得載)는 인품(人品)이 유약하여 본시 물망(物望)이 적어서 영남(嶺南)의 웅번(雄藩)114) 을 제대로 복종시키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세손 사부(世孫師傅)는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는 것인데, 박문수(朴文秀)는 성질이 허황해서 본래 선비의 단아(端雅)한 명망이 적었으니, 청컨대, 개정(改正)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보순(李普淳)의 일은 상달한 대로 시행하라."
하고, 박문수·윤득재·이훈·방가(方哥)·이언섭·유세덕의 일은 따르지 않았다.
안윤행(安允行)을 교리로, 윤상임(尹尙任)을 부교리로, 조재호(趙載浩)를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장령 강필신(姜必愼)이 상서(上書)하기를,
"간원(諫院)에서 문을 굳게 닫은 지가 지금 다섯 달이나 되었는데, 잘 알 수는 없지마는 본원(本院)에서 전달한 것이 어떤 불편한 점이 있길래 연이어 상달하지도 않고 상달을 정지하지도 않으며, 또 인혐(引嫌)하지도 않은 채 오직 패소(牌召)를 어기기만을 일삼는 것입니까? 심지어는 며칠 전에 한두 명의 간신(諫臣)이 입궐(入闕)을 하고서도 대각(臺閣)에는 나오지 않았으니, 대각의 체통을 손상시키고 사람들을 놀라게 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청컨대, 조속히 견삭(譴削)의 율을 시행하소서."
하니, 동궁(東宮)이 그대로 따랐다.
윤5월 11일 병자
차비문(差備門) 안에 실화(失火)가 있었다. 조정(朝廷)에서 문안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대신과 균역 당상을 소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경기 어사의 말을 들어 보니, 어·염·선(魚鹽船) 세 가지 일이 모두 원성이 없다고 한다."
하니, 좌의정 조현명(趙顯命)과 병조 판서 홍계희(洪啓禧)가 말하기를,
"어염선의 세금을 정하는 명령은 실로 선왕조(先王朝) 병신년115) 에 있었고, 선배들도 그에 대해 말한 분이 많습니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새 법은 실로 시행하기가 어렵고 나라의 재정은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신은 복구(復舊)해야 된다는 것으로써 여러 차례 진달하였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거둬내는 수효를 줄인다면, 역시 그것을 대신 충당할 계책이 있는가?"
하니, 홍계희가 말하기를,
"문자(文字)로써 두세 조항의 시행할 만한 계책을 써서 여러 대신들에게 의논하였는데, 첫째는 결전(結錢)으로, 매 1결(結)마다 돈 5전(錢)의 세금을 매기는 것이며, 둘째는 공주(公州)의 사인(士人) 민우하(閔遇夏)의 말처럼 1결마다 1냥(兩)의 세금을 매기는 것이며, 셋째는 좌상(左相)의 책자(冊子)에서 진술한 것처럼 금위영·어영청의 두 영(營)을 변통하는 것과 주군(州郡)을 합병하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신도 첫번째 조항이 편리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조현명은 말하기를,
"만약 신의 책자의 방안을 사용한다면, 족히 서로 맞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김약로(金若魯)는 말하기를,
"책자의 계책은 한 가지도 쓸 만한 것이 없습니다. 결전은 명분이 바르고 백성들도 편리하게 여길 듯하니, 신도 제일 좋은 계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 결전을 편리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세금을 더 거두는 우려가 없겠는가?"
하니, 홍계희가 말하기를,
"옛날 당(唐)나라의 조용조법(租庸調法)은 실로 토지 중에서 취한 것이지 세금을 더 거두려는 뜻이 아니었으니, 바로 이것이 땔감[柴]을 가지고 작목(作木)하는 격입니다."
하였다.
윤5월 12일 정축
장령 박첨(朴)이 상서(上書)하기를,
"감찰 정양신(鄭良臣)은 본래 내력이 없고 문벌이 보잘것없으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평창 군수(平昌郡守) 유언휘(兪彦徽)는 차원(差員)으로 올라와서 신칙하여 내려보내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하직(下直)하였는데, 지금까지도 편안히 집에 있으니 빨리 먼저 파직한 뒤에 잡아오도록 하소서."
하니, 동궁(東宮)이 그대로 따랐다.
윤5월 14일 기묘
헌부 【장령 강필신(姜必愼)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이훈(李塤)·유세덕(柳世德)·이언섭(李彦燮)의 일은 상달한 대로 하였다. 방가(方哥)의 일는 채제공(蔡濟恭)과 같은 예로 추문(推問)하였다. 그 뒤에 채제공은 삼척(三陟)으로 귀양보내고 방가는 사대부를 능욕(凌辱)하여 벌상(伐喪)한 형률을 적용하였다.
민백상(閔百祥)을 대사간으로, 정기안(鄭基安)을 사간으로, 정한규(鄭漢奎)를 장령으로, 임원(任遠)과 남혜로(南惠老)를 지평으로, 박창윤(朴昌潤)을 헌납으로, 오찬(吳瓚)을 정언으로, 정휘량(鄭翬良)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윤5월 15일 경진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백관(百官)의 하례를 받고 반사(頒赦)하였으니, 임금의 몸이 평상으로 회복된 경사 때문이었다.
윤5월 16일 신사
장령 강필신(姜必愼)이 상서(上書)하기를,
"전 충청 감사 이익보(李益輔)는 아무런 단서도 없이 체직되었으니, 듣는 이가 모두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대개 균역법(均役法)에 대한 논의가 벌어진 뒤로부터 그에 동조하는 자에게는 이익이 있고 공격하는 자에게는 해가 있었는데, 이익보는 균역법을 공격하는 자였으므로 그가 이유 없이 체직을 당한 것이니, 신은 그윽이 애석하게 여깁니다. 새로 임명된 평안 감사 남태량(南泰良)은 염간(廉簡)하다는 평판을 어느 곳에서도 들은 바가 없고, 좁은 국량은 사물을 진정시키기 어렵습니다. 또 그의 처신은 옛사람의 ‘부귀를 사양하고 빈궁에 처한다.[辭富居貧]’는 뜻과 어긋남이 있습니다. 지난번 함경도[北藩]는 어찌하여 체직되기를 꾀하고, 이번 평안도[西臬]는 어찌하여 부름에 응한 것입니까? 이는 북도(北道)는 황량한 데 지나지 않고 서도(西道)는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양하고 받음이 의리가 없고, 물러나고 나아옴이 눈에 거리끼니, 신은 빨리 개차(改差)를 명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였으나, 동궁(東宮)이 윤허하지 않았다.
윤5월 18일 계미
신위(申暐)를 승지로, 박사눌(朴師訥)을 문학으로, 이명희(李命熙)를 겸 사서로 삼았다.
장령 정한규(鄭漢奎)가 상서(上書)하기를,
"대론(大論)에 합사(合辭)한 것에 대해서 오늘날의 신하들은 참으로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일종의 역적을 비호하는 무리들이 제멋대로 갑자기 정계(停啓)하고, 처벌을 청하는 계사(啓辭)도 역시 독단으로 정계하였습니다. 전관(銓官)이라는 자들이 방자하게 검의(檢擬)하였는데, 저 이중조(李重祚)는 자기 당(黨)을 위해 죽는 것을 달갑게 여겨 극력 비호하였으니, 그의 죄범을 논한다면 정계한 여러 사람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데, 그 독정(獨政)116) 을 이용하여 감히 논사(論思)에 의망(擬望)하였습니다. 신은 이중조를 영원히 사판(仕版)에서 지워버리고, 그 당시 전조 당상에게도 견파(譴罷)를 시행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으나, 동궁(東宮)이 따르지 않았다.
정언 오찬(吳瓚)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그윽이 오늘날의 나라 형세를 생각해보면 매우 위태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천심(天心)이 안정되지 못하여 재이(災異)가 거듭 나타나고, 해마다 전염병이 돌아 사망(死亡)이 잇따릅니다. 재정은 이미 바닥이 드러났고 법제(法制)는 경장(更張)하여 백성들의 놀라 소란스럽고 원망함이 떼 지어 일어납니다. 이는 대개 망하려는 징조이며 비색(否塞)한 운수(運數)입니다. 그러나 천하의 일은 근본[本]과 지말[末]이 있으니, 그 근본이 바르다면 지말의 다스려지지 않음은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 비로소 오늘날의 일을 가지고 논해본다면 의리가 어둡게 막히어 흉역(凶逆)에 대해 징계함이 없으며, 충사(忠邪)가 뒤섞여 부정한 무리들이 조정에 가득하며, 명절(名節)이 사라져서 아부와 아첨이 풍습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대환(大患)의 근본입니다. 만일 이것을 구제할 방법이라 한다면 역시 징토(懲討)를 엄정히 하여 윤강(倫綱)을 부지하고, 시비(是非)를 분명히 하여 조정을 바로잡고, 충직(忠直)을 장려하려 풍속을 권면하는 것일 뿐이라 할 것입니다.
이른바 ‘징토를 엄정히 하여 윤강을 부지한다.’는 것은 신이 듣건대, 옛사람이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천지 사이에서 도피할 곳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임금은 신하의 벼리가 된다[君爲臣綱]’는 것으로, 오륜(五倫)의 첫머리에 있는 것입니다. 대체로 신하가 패역(悖逆)하면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만약 주벌(誅罰)을 엄정히 하지 못하거나 잘못 너그럽게 용서해 주면, 난적(亂賊)이 두려워 움츠러들질 않고 윤강은 그로 인하여 두절될 것입니다. 아! 신축년117) ·임인년118) 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우리 경종 대왕(景宗大王)께서는 나라의 근본이 의탁할 데가 없음을 염려하시어 자전의 하교를 받들어 대조(大朝)를 저부(儲副)로 책봉하시고, 이어서 서무(庶務)를 대리(代理)할 것을 명하셨으니, 그것은 종사(宗社)의 만세(萬世)를 위한 계책으로 광명 정대하여 길이 천하 후세에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종의 흉도(凶徒)들이 불만스런 뜻을 드러내 감히 동요(動撓)의 계책을 세워 유봉휘(柳鳳輝)와 조태구(趙泰耉)가 기치(旗幟)를 세우자 여러 역적들이 그림자처럼 추종하였고, 역적 목호룡(睦虎龍)을 은밀히 사주하여 무옥(誣獄)을 양성(釀成)하였습니다. 대저 그들의 뜻이 어찌 다만 충량(忠良)을 해치고 그치는 데 있겠습니까? 음흉한 말과 패악(悖惡)한 무함이 위로 감히 말할 수 없는 곳까지 미쳐서 점차 무신년119) 의 하늘을 업신여기는 화(禍)를 초래하였습니다.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인들 없겠습니까마는, 그 천지(天地)에 가장 흉악하고 만고(萬古)에 가장 큰 죄악이 이와 같은 무리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벌[天討]을 엄정히 하지 않았고 드러내어 죽이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악인의 괴수가 그 관직을 보존하여 집에서 편안히 늙어 죽게 하였습니다. 전후로 합사(合辭)의 논의가 여러 차례 발론되었지만, 대조께서는 지나치게 관용을 베푸시어 추탈(追奪)의 법이 단지 세 역적에게만 미쳤습니다. 그래서 이광좌(李光佐)같이 간사하고 음험한 자가 불측한 마음을 포장(包藏)하여 감히 대리(代理)의 논의를 동요시키면서 ‘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연명 차자(聯名箚子)하는 일을 저지하려고 하면서 ‘신하의 절개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음흉한 조태구, 간사한 최석항(崔錫恒)과 함께 무옥(誣獄)을 단련(鍛鍊)하여 오직 혹시라도 헛되게 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지은 교문(敎文)이 한번 나오자, 역적의 윤곽이 다 드러났는데, 다만 징토(懲討)를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에 도리어 팔좌(八座)120) 의 반열에 승진 발탁시켜 공로가 있어서 상을 주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갑진년121) 〈경종(景宗)〉께서 병환이 위독하실 때에 이르러서는, 보호하는 직책에 있으면서 증환(症患)을 은폐하여, 여러 흉적(凶賊)들이 망극한 무함을 지어내어 끝내는 군사를 일으키는 변고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정미년122) 에 재차 정승이 되었을 적에는 감히 역적 목호룡이 자백한 죄안(罪案)을 번복시켜 그 변서(變書)의 무함을 반드시 실증하려고 하였으니, 그가 무슨 마음을 먹고 있었는지는 길가는 사람도 다 아는 바입니다. 죄악이 넘치고 쌓여 가장 흉악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도 패만하고 음독스런 조태억의 간흉(奸凶)과 체결하였고, 역적 김일경이 지은 교문이 이만저만 흉패(凶悖)한 것이 아니었는데 문형(文衡)123) 의 신분으로서 참여하고 간섭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의 ‘정책 국로(定策國老)·문생 천자(門生天子)124) ’라는 말은, 이것이 어느 시대 무슨 일인데 감히 두 분 임금께서 왕위(王位)를 주고받으신 일에 견준단 말입니까? 그 범죄를 따져보면 김일경·목호룡·이인좌(李麟佐)·박필몽(朴弼夢)과 함께 동일한 심장(心腸)인데, 모두 왕법을 도피하여 주토(誅討)가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 두 역적은 역절(逆節)이 낭자하여 숨길 수 없고 임금을 무함한 데에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 역적을 정법(正法)하기 이전에는 임금에 대한 무함을 씻을 수 있는 날이 없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이 여기 미치니, 간담(肝膽)이 파열되는 듯합니다. 아! 세월이 점차 오래 갈수록 의리는 더욱 어두워져서 여러 신하들은 바야흐로 녹이나 먹고 자리나 보전하여 자신을 위한 계책을 세우기에 바쁘고, 몇마디 베껴 전달하던 계사(啓辭)마저도 정폐(停廢)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저하(邸下)께서는 이극(貳極)의 지위에 거하시어 위복(威福)의 권한을 담당하셨으니, 군부(君父)의 원수에 대해서 마땅히 분명한 결단을 내려 빨리 징토(懲討)의 형률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렇게 두려워하면서 머뭇거리시니, 신은 그윽이 이것이 아마 여러 신하들의 죄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 무신년 이후로 그 일에 주동이 되었던 여러 신하들이 비록 흉당(凶黨)에서 빠져나왔다고 말들은 하지만, 오히려 다시 기관(機關)을 희롱하고 임금의 귀를 현혹시켜서 무릇 징토의 논의에 대해 비호하고 감싸고 돌아 혹시라도 다치게 될까 두려워하며, 반드시 한줄기 종자(種子)를 남겨서 구실의 빌미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의(公議)와 극력 싸워 방자하게 구제해 주자는 주장을 하는 자들이 또다시 꼬리를 물고 일어났는데, ‘차라리 군부를 저버릴지라도 차마 흉역(凶逆)을 저버리지는 못한다.’는 것이 진실로 이 무리들의 기량(伎倆)입니다. 그들이 이른바 ‘징토에 스스로 몸담는다.’는 것도 역시 이미 애통(哀痛)과 측달(惻怛)의 뜻이 위로 주상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점이 없고 천리(天理)와 민이(民彛)의 중대함에서 놓고 볼 때 자신의 사정(私情)이 섞임을 면치 못하여 성의가 순수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눈치만 많이 보고 있습니다. 이래가지고서야 나라의 역적을 징토할 수 있는 날이 있겠으며, 역순(逆順)을 분변할 기약이 있겠습니까? 신은 그윽이 이를 가슴 아프게 여기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대조께 여쭈어 조속히 두 역적의 죄를 바로잡으시고 전후의 역적을 비호한 자들도 또한 마땅히 사방의 변방에 추방해야 합니다.
이른바 ‘시비(是非)를 분명히 하여 조정(朝廷)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신은 듣건대,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옛날에 붕당(朋黨)을 미워해서 이를 제거하고자 한 사람들은 이따금 나라를 망치게 하는 데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대저 붕당이 국가에 해악을 끼친 것은 옛적에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제거하는 방법에는 그 방도가 있으니, 진실로 혹시 시비가 분명하지 않다거나 호오(好惡)가 공정하지 않은 채 단지 그 이름만을 싫어하여 군자와 소인의 구분을 분변하지 않고 뒤섞어 혼합시키는 정치를 하는 데 힘쓴다면, 그 폐단은 반드시 군자는 항상 물러가고 소인은 항상 나아오게 되어 난망(亂亡)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조정에서 두루 다스리고 태평(太平)을 빛내려는 것이 탕평(蕩平)의 정치가 아닙니까? 생각건대, 우리 대조(大朝)께서 붕당을 몹시 징계하시고 만회(挽回)의 계책을 깊이 진념(軫念)하시어 탕탕 평평(蕩蕩平平)의 방도로써 보합(保合)하고 조제(調劑)하려 하시니, 그 뜻이 매우 거룩하십니다. 그러나 시행한 지 수십년 동안에 작은 효험도 나타나지 않고 온갖 폐단만 겹겹으로 나타나 단지 나라의 형세가 날로 위망(危亡)한 곳으로 나아감을 보게 되는 것은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진실로 아랫사람들이 받들어 시행하기를 잘못하여, 임금께서 다만 명분만을 소유하고 그 이익은 향유하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예로부터 국가의 치란(治亂)·안위(安危)가 뭇 관원들의 현사(賢邪)에 관련되지 않은 적이 없는데 같은 종류는 한곳에 모이고 사물은 같은 무리로 나뉘어져서 군자는 군자의 무리[朋]가 있고, 소인은 소인의 패거리[黨]가 있는 것은 역시 그 이치와 형세의 필연적인 것입니다. 진실로 지공(至公)으로써 다스리고 대명(大明)으로써 보아, 그것이 군자의 무리인 줄 알면 좋아하기를 여색(女色) 좋아하듯이 하고, 그것이 소인의 패거리인 줄 알면 미워하기를 악취(惡臭)를 싫어하듯이 한 뒤에야 조정에는 서로 화합하는 기상이 생기고, 선비들은 갈라지는 논의가 없어져서 나라가 화평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홍범(洪範)125) 탕평의 정치가, 반드시 호오(好惡)가 그 정당함에 근본하여 스스로 무당 무편(無黨無偏)함에 이르게 된 까닭입니다. 그것은 선악(善惡)을 따지지 않고 충영(忠佞)을 분변하지 않으며,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수용(收用)하고 뒤섞어 조제(調劑)하여, 여기에도 저기에도 좋아함이 없고 싫어함이 없는 연후에 바야흐로 비로소 무당 무편하여 그것을 이름하여 ‘탕평’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 신축년에 임금을 무함했던 음흉한 모략이 일전(一轉)하여 무신년에 군사를 일으킨 독봉(毒鋒)이 되었습니다. 저 전에 없던 흉역(凶逆)이 그 무리에게서 나온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간담이 서늘하고 의기가 저상하여 스스로 세상에 용납되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은근히 임금의 뜻이 매번 화란(禍亂)의 근원이 당론(黨論)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에 갑자기 변신할 계책을 세워, 탕평의 주장을 올렸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두 글자의 명목을 핑계하고 속으로는 한 몸의 사욕(私欲)을 이루어 이를 반석(盤石)처럼 뽑히지 않는 토대로 여기고, 기권(機權)을 농락하는 술책으로 삼아 한 세상을 파롱(簸弄)126) 하여 스스로 좋은 계책이라고 여겼으니, 그들이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그르친 죄는 참으로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다른 한편에서 조금 자신의 명예를 아끼려는 자들이 처음에는 본래 명의(名義)가 두려운 것이고 저들의 작태가 가증스러운 것이라는 것으로 앞에서 함께 일하기를 부끄러워하더니, 끝에 가서는 이해(利害)에 이끌리고 화복(禍福)을 두려워하여 나날이 변화해서 태도가 점점 바뀌어 차츰차츰 그들 속에 들어가 결국에는 한통속이 된 점입니다. 이익만 좋아하고 수치를 모르는 무리들이 한번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면, 학식과 재지(才智)가 어떠한가는 불문하고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어주어 앞길이 훤히 열리니, 이세(利勢)가 있는 곳에 온 세상이 소란스럽게 서로 다투어 사모하고 본받아 마치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와 주장이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은 과격하다고 고자질해서 배척하고, 자기의 주장에 잠시라도 동조하는 자는 공평하다고 인정하여 선발합니다. 이렇게 해서 위로는 임금을 속여 총애를 다지고 아래로는 사람들을 막아 기세를 올리니, 그들이 밤낮으로 경영하고 췌마(揣摩)127) 하는 것이 단지 좋은 관직이나 얻고 높은 지위나 보전하는 데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군부(君父)의 무함과 충역(忠逆)의 구분에 있어서도 막연히 망각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아! 옛날에 당(黨)을 하는 자들이 다투던 것은 시비(是非)였는데 지금의 당을 하는 자들이 다투는 것은 은총(恩寵)이며, 옛날에 당을 하는 자들이 다투던 것은 사정(邪正)이었는데 지금의 당을 하는 자들이 다투는 것은 작록(爵祿)이니, 이는 어찌하여 당(黨)을 제거한 세상인데 당이 없는 실상을 보지 못하고 갑자기 다시 하나의 음붕(淫朋)의 당이 생긴 것입니까? 만약 조정(朝廷)의 처분이 분명하게 권선 징악(勸善懲惡)을 보인다면, 그 누가 악을 피해 선으로 향하지 않겠으며 명의(名義)의 길에 즐겁게 달려가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죄가 많고 잘못이 큰 무리가 아니라면 반드시 길을 바꾸고 태도를 변경하여 교화에 따를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그중에서 수립(樹立)된 사람을 뽑아내어 그 어질고 어질지 못함에 따라 진용(進用)하기도 하고 물리치기도 하며, 그 재능을 보아 고루 등용한다면,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저절로 안정되어 곧바로 예전의 색목(色目)을 잊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수백년 동안 쌓여 고질이 된 당습(黨習)이 얼음이 녹고 안개가 흩어지듯 부지 불식 중에 사라질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옳고 그름을 꿰뚫어 분변하시고 현명하고 간사함을 나누어 구별하시어, 온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성조(聖朝)의 호오(好惡)의 공정함을 환히 알게 하신다면, 거의 참으로 평평 탕탕(平平蕩蕩)의 경사(慶事)를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충직(忠直)을 장려하여 풍속을 권면한다.’는 것은, 신은 들으니, 〈송(宋)나라의〉 장남헌(張南軒)128) 이 말하기를, ‘절개를 위해 죽고 의리를 위해 죽는 선비는, 면전(面前)에서 따지고 간쟁하는 사람 중에서 찾아야 한다.’ 하였으니, 대개 선비가 평소 아무 일 없을 때에 임금이 잘못을 할까 두려워하여 말을 숨김없이 다하여 벼락 같은 위엄과 부월(鈇鉞)의 처벌을 돌보지 않는다면, 반드시 난리를 당하여도 절개를 굽히지 않고 몸을 바쳐 나라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임금이 곧은 말을 수용하고 명절(名節)을 장려한다면, 조정에는 충당(忠讜)129) 을 다투어 권면함이 있을 것이고, 선비들은 절의(節義)를 힘써야 할 것을 알아서, 임금의 마음은 위에서 저절로 바루어지고 풍속은 아래에서 저절로 아름다워질 것이니, 그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으려고 해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하께서 보시기에 오늘날 세상 형편과 인심이 어떠하다고 여기십니까? 아! 재앙과 사고가 휩쓸고 간 뒤에 진신(搢紳)들의 습성은 갑자기 달라졌고, 바람 서리에 자지러진 나머지 사대부들의 기절(氣節)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욕(理欲)·왕패(王覇)에 대한 분변은 강론이 날로 짧아지고, 춥고 따뜻하며 배고프고 배부름에 대한 지식은 추구하고 회피함이 더욱 분명하여, 대관(大官)은 임금의 비위나 맞추고 뜻이나 받들기를 일삼고, 소관(小官)은 다만 아첨하고 비굴한 짓을 하기에 힘씁니다. 대각(臺閣)에서는 이런 기풍이 더욱 심하여 습관적으로 부드러운 태도와 비위를 맞추는 말을 하여,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않고 잘잘못을 분변하지 않는 것을 능사로 여겨서, 의연(依然)히 마치 절중(浙中)130) 의 풍습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어쩌다가 강직하고 정직하여 강포함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그 사이에서 나오면, 곧 벌떼처럼 일어나 헐뜯어 못하는 짓이 없고, 심지어는 그를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게 한 뒤에야 그만둡니다. 임금이 그런 사람을 처분함에 너그럽게 용납하고 가상히 여겨 권장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고, 싫어하고 박대하는 것도 부족해서 견책하고, 견책하는 것도 부족해서 귀양까지 보내게 되니, 말 때문에 처벌을 당하는 이들이 연이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치세(治世)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대저 신하로서 임금의 아픈 곳을 건드려 면전에서 따지고, 권귀(權貴)에게 대들고 거스르며,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진실로 나라를 염려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성심(誠心)에서 나온 것이지 자기 개인을 위한 어떤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위에 있는 이가 아무리 흉금을 열어 받아들이고, 포상하여 존중하고 총애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주저하고 머뭇거려 감히 입을 떼지 못할 터인데, 도리어 이처럼 몰아붙이시니, 그 누가 경솔하게 귀에 거스리는 말을 올려, 성대(聖代)의 내버려진 물건이 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모두 말하는 것을 꺼려하여 습속(習俗)이 이미 이루어져서, 그 마음속으로 계획하는 바는 요컨대, 자신과 처자(妻子)를 보전하는 계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첨하고 알랑거리는 작태는 온 세상이 다 그러하고 정직하고 곧은 기풍은 땅을 쓴 듯이 없어졌으니, 전연 예의나 염치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충신 명절(忠藎名節)이 소중한 줄도 모릅니다. 대저 이와 같은 기상(氣像)과 규모(規模)로 만약 화란(禍亂)이 앞에 닥친다면, 또 누가 끓는 물이나 타는 불길에 달려가 몸을 돌보지 않고 목숨을 바쳐 국가의 위급함을 구하겠습니까? 명절(名節)은 나라의 원기(元氣)이니, 원기가 먼저 망하고도 그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경우는 있지 않습니다. 어찌 소름이 오싹하게 끼치고 한심(寒心)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오래 생각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고려하시어 숨기지 않는 문호를 넓게 여소서. 사람에게는 충성스러움과 간사함이 있으니 취하거나 버릴 때에 현혹당하지 마시고, 말에는 거스름과 공순함이 있으니 반드시 도(道)와 비도(非道)의 사이에서 찾으시어, 충직한 기상을 장려하고, 선비의 절개를 부식(扶植)하고, 전후의 말 때문에 처벌을 당한 사람들도 역시 다 대조(大朝)께 여쭈어 한결같이 다시 이끌어 향용(嚮用)131) 하시어 충신(忠臣)을 드러내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뜻을 보여 주신다면, 정직한 선비들은 눈썹을 치켜 뜨고 착한 무리들은 얼굴빛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교묘히 아첨하고 아양 떠는 무리들도 역시 며칠 안 되어 임금의 위엄 아래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어찌 거룩하지 않겠습니까? 아! 무릇 이 세 가지는 비록 각각 별개의 일인 것 같지만, 실상은 한 가지 일일 뿐입니다. 대체로 징토(懲討)의 논의가 거행되지 않자 탕평의 주장이 일어났고, 탕평의 정치가 시행되자 명절(名節)이 땅에 떨어져서 인심은 날로 비루하고 구차한 지경에 들어갔으니, 그래서 나랏일이 더욱 어찌해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는 다만 성상의 뜻을 따라야 할 뿐이다. 더구나 대조(大朝)께서 몇년 동안 고심(苦心)하신 것을 지금 어찌 나에게 이처럼 번거롭게 할 수가 있는가? 참으로 한심스럽다."
하였다.
장령 강필신(姜必愼)이 상서(上書)하기를,
"양남(兩南)132) 의 어·염·선(魚鹽船) 세 가지 세(稅)와, 각도(各道)의 별군관(別軍官)의 폐단 및 거제(巨濟)의 7진(鎭)은 폐지할 수 없고, 진장(鎭將)의 삭포(朔布)도 줄일 수 없는 형편입니다."
하니, 동궁(東宮)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윤5월 23일 무자
홍낙성(洪樂性)을 사간으로, 유건(柳謇)·권항(權抗)을 장령으로, 남학로(南鶴老)를 지평으로, 황합(黃柙)을 헌납으로, 유언술(兪彦述)을 보덕으로, 이이장(李彛章)을 겸 보덕으로, 박준(朴㻐)을 좌윤으로 삼았다.
이존중(李存中) 등을 석방하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었다. 지난번에 사령(赦令)으로 인하여 전라 도신이 안치된 이존중 등을 품질(稟秩)하니, 금오(金吾)에서 복달(覆達)하여 풀려나게 되었었다. 이에 이르러 하령(下令)하기를,
"대조(大朝)께 여쭈어보지 않고 갑자기 석방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미안하니, 그대로 두라."
하였다.
윤5월 24일 기축
정원(政院)에서 연명으로 상달하고, 옥당(玉堂)에서 차자를 올려 이존중에 대한 석방을 도로 그대로 두라는 명령을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윤5월 25일 경인
지평 남학로(南鶴老)가 상서(上書)하기를,
"전 평안 감사 남태량(南泰良)이 일찍이 영번(嶺藩)133) 으로 있을 적에, 청렴하고 대범하며 강직하고 엄정하니, 영남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습니다. 그런데 강필신(姜必愼)이 영남 사람으로서 문득 음해하려는 마음을 먹고, 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이르지 않은 바가 없었습니다. 강필신은 본시부터 허물이 있어 세상의 버림을 받았는데, 대선(臺選)에 거듭 통망(通望)되니 물정(物情)이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묘히 참소하는 말이 아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이치에 어그러진 말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하겠습니다. 빨리 삭직(削職)을 명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동궁이 그대로 따랐다.
윤5월 26일 신묘
수찬 이현중(李顯重)이 상서(上書)하기를,
"지평 남학로(南鶴老)는 대각(臺閣)에 들어온 초기에는 먼저 전조 당상과 가까운 족속의 탄핵을 당한 자를 변호하였는데, 급기야는 그것을 말한 사람의 삭직(削職)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청명(淸明)한 조정(朝廷)에서 이목(耳目)의 소임을 맡은 신하 중에 이런 염치가 없는 인간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강필신은 그때의 권귀(權貴)에게 죄를 지은 것이 많으니, 어찌 유독 한 번신(藩臣)의 거취(去就)를 논한 것이 그의 죄가 되겠습니까? 지금 일을 맡은 신하들은 여러 원망을 깊이 깎아 내는 부서(府署)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여러 장님들이 코끼리를 더듬고 여러 아이들이 눈가리고 술래잡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제 살을 베어 배를 채우는 것은 멸망을 더욱 재촉할 뿐이니, 비로소 진(秦)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호해(胡亥)가 아니라, 실은 상앙(商鞅)134) 때문임을 알겠습니다. 수백 년 조종(祖宗)의 산하(山河)가 장차 한두 사람의 일 좋아하는 무리 때문에 이유없이 무너지게 될 것이니, 만일 가의(賈誼)135) 가 다시 태어난다면 반드시 통곡해마지 않을 것입니다. 흰 머리의 늙은 대신(臺臣)이 오랫동안 폐직(廢職)되었다가 등용되어, 한 번 상서(上書)하고 두 번 상서하여 억지로 떠들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묘당(廟堂)이 듣기 싫어하는 바였고 그때의 재상(宰相)의 뼈에 사무치는 바였으니, 위태롭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과연 윗사람의 비위나 맞추는 사람의 음해를 입게 된다면, 이로부터 일을 말하려는 자들은 첫째로 이익보(李益輔)를 경계로 삼고 둘째로 강필신(姜必愼)을 거울삼아, 모두 머리를 숙이고 말을 못하여 감히 지적하여 진술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니, 신은 그윽이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신은 강필신을 삭직하라는 명령을 빨리 거두시고 남학로는 개정(改正)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동궁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장령 유건(柳謇)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대사성은 진실로 모두가 꼭 적임자는 아니지만, 애당초 성인(聖人)을 무시한 자를 그 선임(選任)에 참여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저 조명채(曹命采)는 성사(聖祠)136) 에 죄를 지은 사람인데, 외람되게도 사유(師儒)137) 의 의망(擬望)에 올랐으니, 중외(中外)의 유생들이 놀라워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빨리 개정(改正)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이수징(李壽徵)이 산림(山林) 합사(合辭)의 주장에 따라 참여한 것은, 그 죄범(罪犯)이 비록 10세(世)를 지나더라도 용서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수징의 자손으로서 이름이 대적(臺籍)에 올라 있는 자들을 개정(改正)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조명채의 일은 지나치다. 개정하는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윤5월 27일 임진
헌부(憲府)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장령 권항(權抗)이 상서(上書)하여, 강필신(姜必愼)의 삭직(削職)을 거두어 직언(直言)을 용납하는 뜻을 보이고, 남학로(南鶴老)를 대선(臺選)에서 영원히 지워버려 참소를 미워하는 총명을 나타내기를 청하였으나, 동궁(東宮)이 따르지 않았다.
윤5월 29일 갑오
대사헌 정형복(鄭亨復), 부제학 윤급(尹汲), 사간 홍낙성(洪樂性), 응교 김문행(金文行), 장령 유건(柳謇)·권항(權抗)·교리 안윤행(安允行), 수찬(修撰) 이규채(李奎采)·이현중(李顯重), 정언 오찬(吳瓚), 부수찬 윤학동(尹學東)이 상달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신축년138) ·임인년139) 이 있었고 무신년140) 이 있었으니, 그때 흉역(凶逆)의 무리가 적지 않았습니다만, 만약 크게 포장(包藏)하고 지극히 음휼(陰譎)하여 명백히 분변하지 않을 수 없고 엄중히 토죄(討罪)하지 않을 수 없는 자를 논한다면, 이광좌(李光佐)와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지난 병신년141) 처분(處分)이 있은 뒤로부터 원망이 누적되어, 경자년142) 정곡(庭哭)의 반열에 참여하지 않았고, 대리 청정(代理聽政)의 명령이 내려진 때에 미쳐서는 방자하게도 ‘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이다. 신하의 절개가 없다.’는 말로써 조정(朝廷)에서 큰 소리를 쳤습니다. 아! 우리 대조(大朝)께서는 삼종(三宗)143) 의 혈맥(血脈)으로서, 동궁(東宮)의 자리에 오르시어 경묘(景廟)의 고난(苦難)을 나누려는 뜻을 받드셨고, 선조(先朝)가 이미 행한 법도를 따르셨으니, 이는 실로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더할 나위 없이 큰 행복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이다. 신하의 절개가 없다.’고 한 것은, 어찌 아주 흉패(凶悖)한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변서(變書)는 오로지 성상의 몸을 위태롭게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조금도 놀라워하지 않고 온갖 생각으로 단련(鍛鍊)하였으나, 그가 주무(綢繆)하고 꾸며낸 실상이 필경에는 국수(鞫囚)의 공초(供招)에서 다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김일경(金一鏡)이 국문받는 날에 미쳐서 비로소 ‘목호룡이 절통(絶痛)하다.’는 말을 하였으니, 목호룡의 죄가 어찌 다만 절통할 뿐이겠습니까? 그리고 또 이미 참으로 절통하게 여겼다면 어찌 상변(上變)할 때에 토죄(討罪)하기를 청하지 않고, 진장(眞贓)이 다 들통나고 와굴(窩窟)이 장차 깨지려 할 때에 말한단 말입니까? 역적 김일경의 말 한 마디 행동 한 가지가 역절이 아닌 것이 없는데, 토죄(討罪)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본병(本兵)144) 으로 발탁하여 의망(擬望)해서 공로에 포상하여 보답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그들이 마음을 서로 연결하고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서로 따르게 된 것을 여기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정미년145) 에 재차 정승이 되어 들어와서는 무옥(誣獄)을 다 뒤집고, 심지어는 건저 대리(建儲代理) 때의 여러 신하들을 도로 역안(逆案)에 두어 역적 목호룡의 무고(誣告)한 말을 실증하기까지 하였으니, 그가 만약 조금이라도 우리 대조(大朝)께 북면(北面)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감히 김일경·목호룡이 복주(伏誅)된 뒤에 다시 그 본심(本心)을 나타내기를 이처럼 방자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그가 추천하고 육성한 자들은 남태징(南泰徵)·이사성(李思晟)·이명언(李明彦)·권익관(權益寬)·정사효(鄭思孝)·홍계일(洪啓一)·이유익(李有翼)의 무리인데, 무신년에 난을 일으킨 자들이 모두 다른 사람이 아니고 보면, 그가 남모르게 역적의 종자를 심고 은밀히 흉악한 무리에 동조한 것이 어찌 일조 일석(一朝一夕)의 일이겠습니까? 대체로 갑진년146) 에 〈경묘(景廟)께서〉 병환이 위급할 때로부터 보호의 책임을 맡은 신분으로 증환(症患)을 숨기고 약 이름을 개칭(改稱)해서 중외(中外)를 혼란케 하여, 마침내 심유현(沈維賢)·이인좌(李麟佐)의 무리가 핑계를 삼을 거리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돌아보건대, 그가 10년 동안 배포(排布)하고 경영하여 암암리에 양성(釀成)한 것이 필경에는 큰 재앙이 하늘을 업신여기고 종사(宗社)를 거의 엎어질 뻔하게 하였으니, 이는 비단 신축년·임인년의 원악(元惡)일 뿐만 아니라 실로 무신년의 괴수가 되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 죄악의 가득 찬 것이 이와 같았는데 단지 그가 속으로 숨겨 감추고 결탁하여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며, 또 곧장 손을 써서 범하기를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유봉휘(柳鳳輝)·조태구(趙泰耉)의 행위처럼 하지 않았으니, 비록 우리 대조(大朝)의 밝고 성스러우심으로도 역시 그 간악한 실상을 다 아실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분명하게 분변하지 않을 수 없고 엄중하게 토죄(討罪)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저하께서 대리(代理)하신 뒤에 주토(誅討)의 법을 더욱 조금이라고 늦춰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찌 성상의 몸을 핍박하여 위협하고 종사(宗社)에 재앙을 끼친 역적으로 하여금, 상공(上公)147) 의 반열에 그대로 무릅쓰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고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의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소서.
지난 사첩(史牒)을 두루 보건대, 역적의 종류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난을 일으키기 전에 감히 임금을 무함하는 패륜적인 말로써 대찬(代撰)하는 글에 붓을 제멋대로 놀린 자는 그 옛날의 사첩(史牒)에도 없는 바입니다. 흉당(凶黨)이 신축년·임인년 간에 뜻대로 하게 되었을 때에 김일경과 조태억(趙泰億)이 우두머리로 문자(文字)를 주관하였습니다. 그 글로 인해서 하유(下諭)라 핑계하여 성상을 후욕(詬辱)한 것은 김일경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조태억이 개가 으르렁거리듯 뒤에서 부화하였으며 뒤에 나온 글은 더욱 교묘하고 간악하였습니다. 비록 그 허황한 말로 어지럽게 함이 곧장 김일경의 손놀림을 드러내고 환하게 벌여 놓고 무함과 핍박을 한 것과 같지는 않았지만, 그 말이 어둠침침하고 의도가 음흉하고 교활하여 더욱 난적(亂賊)의 구실이 되고 여러 흉적의 무함을 실증하기에 충분하였으니, 흉역(凶逆)의 마음은 김일경과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였습니다. 더구나 김일경의 음흉한 말은 그가 혼자서 한 것이 아니고 한 글자 한 구절을 모두 문형(文衡)148) 의 첨삭과 검증을 거쳤습니다. 그가 스스로 변명한 말로써 논해 보면, ‘두 글자의 흉악한 말을 이미 뽑아버리게 했다.’ 하였는데, 그 외의 허다한 흉악한 말은 그대로 둔 채 없애버리지 않은 것은 대체 무슨 마음이겠습니까? 지어 올리는 것을 비록 김일경에게 맡겼지만 감정(勘定)은 실로 조태억에게서 나왔으니, 만일 송사(訟事)를 공평하게 하기를 고요(皐陶)149) 같이 하는 자가 그 정법(情法)을 따져 본다면, 김일경과 조태억의 죄 가운데 누가 무겁고 누가 가볍겠습니까? 아! 절통합니다. 조태억이 몰래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을 가져온 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대저 그가 한마음으로 분개하고 원망한 것은 오로지 건저(建儲)에 있었으니, 저사(儲嗣)를 세운 여러 신하들을 반드시 역적으로 몰아 모두에게 참벌(斬伐)을 행한 연후에 저위(儲位)는 기울어지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기울어질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무옥(誣獄)을 협조(挾助)하고 충량(忠良)을 살육(殺戮)하여 그 지친(至親)을 해치기를 죽기를 각오한 원수와 같이 한 것입니다. 그가 당나라 말기의 고사(故事)를 인용(引用)하여 군부(君父)를 위협한 말을 보면, 그가 독(毒)을 퍼뜨리기를 마음껏 하고 백방으로 위협하고 핍박한 형상이 분명하여 숨길 수가 없으니, 이 한마디 말을 가지고 곧장 단안(斷案)을 한다면 죽어도 남는 죄가 있을 것입니다. 신 등이 더욱 통탄스럽게 여기는 것은 우리 성상(聖上)께서 들어가 저위(儲位)를 이으신 다음해에 종신(宗臣)의 소청(疏請)으로 인하여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수정하였습니다. 정통(正統)이 밝게 이어져 보첩(寶牒)을 새로 쓰는 데 있어 사신(史臣)된 자가 유양(揄揚)하고 찬탄해 마지않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도 조태억이 그 발문(跋文)을 지을 적에 위아래의 말이 조금도 경축하는 뜻이 없었으니, 그의 누적된 불만스러운 마음이 곳에 따라 탄로나게 되었음을 여기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만약 저하께서 시험삼아 가져다 보신다면 또한 그 정상(情狀)을 간파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역적을 토죄하지 않는다면 윤리 강상이 두절되고 난역(亂逆)이 멋대로 자행되어 금지하지 못할 것이니, 청컨대 고 좌의정 조태억은 관작을 추탈(追奪)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러한 말을 어찌 감히 이처럼 시끄럽게 할 수가 있겠는가?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더구나 오늘날의 신자(臣子)들이 만약 대조(大朝)께서 몇년 동안 고심하신 것을 생각한다면, 어찌 차마 나에게 다시 떠들어댈 수가 있겠는가? 더욱 매우 한심스럽다. 이와 같은 말을 다시는 번거롭게 떠들지 말고 빨리 정달(停達)하라."
하였다.
헌부(憲府) 【장령 유건(柳謇)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남학로(南鶴老)가 당후(堂后)150) 로 있을 적부터 이미 비루하고 잗달다는 비난이 많았는데, 대선(臺選)에 통망(通望)되게 되자 더욱 남우(濫芋)151) 의 기회를 초래하였습니다. 대각(臺閣)에 들어온 초기에 탄핵을 당한 번신(藩臣)을 위하여 탐오스럽고 수치심 없게도 감히 염칙(廉飭)으로써 떠벌려 의분에 북받쳐 진언(進言)을 하였다가 도리어 패악한 것으로써 배척하였으니, 정태(情態)가 가증스러워 대각[法從]에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영원히 사적(仕籍)에서 지워버리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도록 하였다. 간원(諫院) 【정언 오찬(吳瓚)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일전의 영지(令旨)에 전 대사간 이존중(李存中)과 전 정언 이유수(李惟秀)의 석방을 그대로 두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대저 이존중은 숨기지 않고 곧은 말을 하다가 마침내 엄중한 견책을 당하였고, 이유수는 죄가 패초(牌招)를 어김에 있었는데, 처벌은 멀리 유배하는 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대조(大朝)의 처분은 어찌 두 신하를 물간 사전(勿揀赦前)152) 하여 끝내 영해(嶺海)의 귀신이 되게 하려 함이겠습니까? 이번에 크고 넓은 은전(恩典)으로 인해서 두 신하의 석방을 준허(準許)하신 것은, 성상의 뜻을 잘 받들었다고 할 만하겠습니다. 그런데 한 대신의 쓸데없는 말로 조종한 것 때문에 저하께서 직언(直言)을 수용하시려는 성대한 뜻을 잠시 움텄다가 도로 사그러들게 하였으니, 그가 저하의 밝은 덕에 누를 끼침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두 신하를 그대로 두라는 명령을 환수(還收)하소서. 사직 이종성(李宗城)은 본래 사납고 악독한 성품으로 흉역(凶逆)의 주장을 이어받아, 대론(大論)을 원수처럼 보고 공의(公議)와 힘을 다하여 싸우는 것이 평소의 기량(伎倆)이었는데, 끝에 가서는 ‘관일(貫日)·유세(宥世)’ 등의 말로써 방자하게도 대론(大論)이 막 펼쳐지려는 때에 진달하였습니다. 아! 두 사람의 악역(惡逆)이 어떠한 관계(關係)인데 그가 감히 마음을 다해 추천하고 장려하여 조금의 거리낌도 없단 말입니까? 만약 오늘날에 북면(北面)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무엄하고 방자함이 어찌 이런 극단에까지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심지어 흉역의 괴수를 가리켜 ‘사표(師表)’라고까지 한 것은 바로 자복(自服)의 안(案)이나 다름없는데, 교외에서 편히 쉬면서 형장(刑章)이 가해지지 않았으니, 나라에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이종성을 절도에 안치(安置)하소서. 삼사(三司)에서 합사(合辭)한 청은 바로 군부(君父)를 위하여 난적(亂賊)을 성토하는 대론(大論)이니, 오늘날의 신자(臣子)라면 어찌 감히 그 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달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일종의 악당(惡黨)에 편드는 무리들이 감히 비호하려는 마음을 품고서 대의(大義)를 저버리고 방자하게 정계(停啓)하였습니다. 윤리가 두절되고 인심의 타락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전후의 정계한 여러 신하들을 모두 아주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도록 명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삼사(三司)에서 인피(引避)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한성 우윤 이병연(李秉淵)이 졸(卒)하였다. 이병연의 자(字)는 일원(一源)으로 한산(韓山) 사람이며, 호(號)는 사천(槎川)이다. 성품이 맑고 드넓었으며, 어려서 김창흡(金昌翕)을 종유(從遊)하였다. 지은 시(詩)가 수만 수(首)인데, 그의 시는 강건하고 웅장하여 이따금 옛것을 압도함이 있어, 세상에서 시를 배우려는 자들이 많은 본보기로 삼았다. 음사(蔭仕)로 벼슬길에 나와 아경(亞卿)에 이르러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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