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경오
임금이 친히 도정(都政)009) 을 행하여 조재호(趙載浩)를 평안도 관찰사로, 윤동도(尹東度)를 승지로, 이진의(李鎭儀)를 장령으로, 안윤행(安允行)을 수찬으로, 한명여(韓命輿)를 설서로, 조명교(曺命敎)를 이조 참판으로, 원경하(元景夏)를 빈객으로, 김양택(金陽澤)을 교리로 삼았으니, 이조 판서 이천보(李天輔)와 병조 판서 홍계희(洪啓禧)의 정사이었다.
2월 3일 신미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가서 동조(東朝)에게 전문(箋文)을 올렸으니, 대개 존호(尊號)를 의논하는 일로써 전문(箋文)을 올린 것이다.
환관(宦官) 김처선(金處善)에게 정문(旌門)을 세울 것을 명하였다. 김처선은 연산조(燕山朝) 때의 사람이다. 누차 충간(忠諫)을 진달하였으므로 연산군(燕山君)이 그를 미워하여 호랑이의 굴에 던졌으나 호랑이가 잡아먹지 않자 이에 결박하여 살해하니, 그 충렬(忠烈)이 늠연(凛然)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하교하기를,
"왕자(王者)가 충성한 이에 대하여 정문(旌門)을 세워 주는 것은 세상을 권면하는 큰 정사이니, 사람이 비록 미천하다 하더라도 없을 수 없는 일이다. 중관(中官) 김처선(金處善)이 충간을 하다가 운명(殞命)을 하였다는 것은 일찍이 지난날에 아주 익숙히 들었다. 그러므로 내부(內府)로 하여금 2백 년 뒤에 후사(後嗣)를 세우도록 하였으니, 뜻이 대개 깊다 할 것이다. 이러한 말세(末世)에 마땅히 포양(褒揚)하여 권면해야 할 것이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특별히 정문을 세워 주게 하라."
하였다.
사복시(司僕寺)에 명하여 무릇 연여(輦輿)를 금(金)으로 그리지 말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복식(服飾)에서 금(金)과 옥(玉)을 제거한 것은 바로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아름다운 일이다. 예전에 어진전(御眞殿)의 사장(紗帳)을 초장(綃帳)으로써 대신하고 석구(錫鉤)를 각구(角鉤)로써 대체하였으니, 훌륭하신 검소한 덕(德)은 따라서 본받을 만하다. 연여(輦輿)에 금으로 그리는 것은 삽시간에 지워져버리니, 다만 겉치레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비용이 또한 심하다. 태복시(太僕寺)에 분부하여 이 뒤로부터는 금으로 그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주서 김시묵(金時默)에게 그의 할아버지인 고(故) 상신(相臣) 김육(金堉)의 화상(畵像) 및 갑회첩(甲會帖)을 모시고 올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친히 열람을 마치고 이어서 숙묘 어제 화상찬(肅廟御製畵像贊) 및 갑회첩(甲會帖) 가운데의 칠언(七言) 사운(四韻)에 차운(次韻)하였다.
이조 참의 남태제(南泰齊)가 아뢰기를,
"전 현감 신유한(申維翰)은 시문(詩文)이 다만 일세(一世)에 이름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비록 외이(外夷)라 하더라도 또한 그의 성명(姓名)을 알고 있는데, 단지 처지(處地)에 연유해서 벼슬이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에 지나지 않았으니, 진실로 애석한 일입니다. 옛날에 최입(崔岦)은 승문 제조(承文提調)가 되었고 차천로(車天輅)는 봉상시 정(奉常寺正)이 되었습니다. 최입의 문장(文章)은 비록 경솔히 의논할 수 없지만 신유한의 문장이 차천로보다는 나으니, 마땅히 파격적으로 조용(調用)하는 도리가 있어야 합니다."
하고, 이조 판서 이천보(李天輔)는 말하기를,
"참의의 진달한 바는 인재(人才)를 아끼는 뜻에서 나왔는데, 신의 생각도 또한 그러합니다."
하고, 병조 판서 홍계희(洪啓禧)는 말하기를,
"신유한의 문장은 옛날에도 또한 견줄 만한 이가 드뭅니다. 봉상시 정은 예전에는 명환(名宦)이라 칭하였는데 오늘날에는 통청(通淸)하지 못한 자도 또한 이 벼슬을 하는 경우가 많으니, 만일 이 벼슬을 제수한다면 쇠퇴하는 세상을 용동(聳動)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자감 정(軍資監正)·봉상시 정(奉常寺正)·사예(司藝) 등의 자리 중에서 빈자리가 있는 대로 의차(擬差)010)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부수찬 박상덕(朴相德)이 상서(上書)하기를,
"조신(朝紳)들의 승진(陞進)과 발탁(拔擢)은 신중히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정익하(鄭益河)를 갑자기 포양(褒揚)하여 발탁한 것은 크게 물정(物情)에 어긋난 것입니다. 대개 정익하가 이름난 조상의 자손으로서 약간의 재구(才具)가 있기는 하지만, 누차 주번(州藩)을 맡음에 있어 완전히 자기 개인을 살찌우기를 일삼았고 역임(歷任)하는 경사(京司)마다 비방을 초래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재차 감옥(監獄)에 들어가 나라에 말이 떠들썩하였는데, 이번에 이 정경(正卿)의 발탁은 그 또한 무슨 명목입니까? 마땅히 빨리 개정(改正)을 명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였으나, 동궁(東宮)이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2월 4일 임신
윤학동(尹學東)·이홍덕(李弘德)을 정언으로, 김치인(金致仁)을 부교리로, 이명희(李命熙)를 수찬으로, 김양택(金陽澤)을 보덕으로, 홍중효(洪重孝)를 필선으로, 조운규(趙雲逵)를 겸 보덕으로, 조영국(趙榮國)을 대사헌으로, 이섭원(李燮元)을 사간으로, 유건(柳謇)을 장령으로 삼았다.
2월 5일 계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염세(魚鹽稅)를 정한 것에 대해 이현중(李顯重)은 말하기를, ‘해부(海夫)에게 이익이 없다.’고 한다."
하니, 우참찬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지금의 이 변통(變通)이 해민(海民)에게 혜택이 되는 것 같지만 호남 균세사(湖南均稅使)가 성책(成冊)한 것을 보니 어망(漁網)과 어전(漁箭)에 대해 낱낱이 세(稅)를 정하였으니, 뒤에 비록 감파(減罷)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해마다 장부(帳簿)를 살펴서 세금을 징수한다면 그 폐단이 백골(白骨)의 징수와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성상의 생각은 특별히 해민(海民)을 걱정하여 중첩된 세를 덜고자 한 것이지만, 도리어 폐해가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1, 2년 동안 시험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고 판서 이주진(李周鎭)의 처(妻) 민씨(閔氏)에게 정려(旌閭)할 것을 명하였다. 원경하(元景夏)가 아뢰기를,
"이주진(李周鎭)의 아내는 집상(執喪)하는 동안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끝내는 시진(澌盡)하는 데 이르렀으니, 마땅히 정표(旌表)의 은전(恩典)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신(重臣)을 추사(追思)하고 있던 터에 이제 진달한 바를 들었다. 아! 사람이 누가 죽지 않겠는가마는, 소중한 것은 절개이다. 여양(驪陽)011) 의 손녀로서 고 상신(相臣)의 부인(婦人)이 되어 종용(從容)히 운명하여 그 남편을 따라갔으니, 드문 일이라 할 것이다. 특별히 정려의 은전을 베풀도록 하라."
하였다.
2월 8일 병자
징사(徵士) 한원진(韓元震)이 졸(卒)하였다. 한원진의 자(字)는 덕소(德昭)로, 선정신(先正臣) 권상하(權尙夏)의 문인(門人)이다. 임금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 뽑혀서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는데, 한원진은, 임금이 새로 대위(大位)를 계승하여 협조를 구하는 마음이 있으시니 초야(草野)의 선비가 한갓 고상(高尙)한 뜻만 지키고 있을 수만은 없다 하여 드디어 부름에 나아갔다. 그때 겨우 세변(世變)을 겪어 의리(義理)가 밝지 못하였는데, 한원진은 생각하기를, ‘성무(聖誣)를 분변하고 징토(懲討)를 엄정하게 하는 것이 바로 당금(當今)의 급선무이다.’라고 여겨 들어가서는 고하고 나가서는 상소를 올려 간곡히 청해 마지 않았다. 임금이 본래 당론(黨論)을 싫어하고 조제(調劑)하려는 뜻이 있어 한원진이 진언(進言)할 때마다 비록 칭찬하고 권장하여 표시하였지만 실은 채용하지 않았으니, 한원진이 누차에 걸쳐 상소를 올려 돌아가기를 고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명(明)나라 태조(太祖)가 맹자(孟子)를 출향(黜享)한 일을 언급(言及)하면서 맹자의 말로써 잘못되었다고 하였는데, 한원진이 상소하여 간(諫)함에 있어 말이 매우 절직(切直)하니, 임금의 노여움이 심하였다. 정신(廷臣)들이 임금의 뜻을 엿보고는 잇달아 공격하여 마침내 견파(譴罷)를 당하였다. 얼마 안 있어 견서(甄敍)되었으나 권우(眷遇)는 더욱 쇠(衰)하였고 한원진도 또한 세상에 뜻이 없어 호해(湖海)의 물가에 숨어 살았는데, 협소한 집은 소연(蕭然)하고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했지만 대처(對處)하기를 유연(逌然)012) 하였고, 날마다 학자(學者)들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講論)하고 도(道)를 밝히면서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저술로는 《경의기문록(經義記聞錄)》·《주서동이고(朱書同異攷)》·《의례보(儀禮補)》 등이 있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가 70세였다.
판윤 정익하(鄭益河)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경윤(京尹)에 새로 발탁되었는데, 복(福)이 지나치면 재앙이 생기는 법이라 과연 박상덕(朴相德)의 상서(上書)가 있었습니다. 지난번 사람의 허황되고 이미 식어버린 말을 주워모아 듣기에도 지리(支離)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박상덕의 본심(本心)이겠습니까? 백수(白首)의 나이에 어찌 차마 망우(亡友)의 어린 손자와 말을 허비하며 변해(辨解)를 많이 하여 그 충후(忠厚)한 기풍을 손상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동궁(東宮)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2월 9일 정축
지평 이진길(李晉吉)이 상서(上書)하기를,
"대각(臺閣)은 이목(耳目)의 기탁하는 바인데 당직(讜直)한 소리를 듣지 못하겠고, 묘당(廟堂)은 모두가 바라보는 자리인데 문득 싸우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크고 작은 원인(援引)과 주변(州邊)의 차제(差除)는 대신(大臣)의 인친(姻親)이나 족당(族黨)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방백(方伯)의 추천(推薦)에 있어서는 연석(筵席)에서 청하여 별서(別敍)를 하고, 정경(正卿)의 중요한 자리를 연유도 없이 포탁(褒擢)합니다. 박정(駁正)하는 논의가 다행히 논사(論思)의 반열에서 나왔는데 과극(戈戟)으로 배척하고 제거(提擧)를 의망(擬望)하니, 어찌 삼사(三司)의 공의(公議)가 있지 않음이 이에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까? 이것은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니, 신은 그윽이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생민(生民)의 편안함과 근심은 수령(守令)에게 달려 있으며 한 사람의 무고(無辜)한 생명을 살해하는 것을 왕자(王者)는 하지 않는 것인데, 선천 부사(宣川府使) 이방좌(李邦佐)는 따로 큰 곤장[大棍]을 만들어 형장(刑杖)을 남용(濫用)하여 죄없는 백성을 박살(撲殺)한 것이 7, 8인의 많은 수효에 이르러, 잔학(殘虐)함이 무쌍(無雙)하니, 원성(怨聲)이 길에 가득합니다. 전주(全州)는 물품(物品)이 많고 땅이 커서 본래 다스리기가 어렵다고 일컬어지는데, 판관(判官) 윤동함(尹東涵)은 여섯 달 동안 자리를 비워서 백성의 일이 끝이 없습니다. 군정(軍丁)의 새 제도는 더욱 긴급하여 한결같이 그대로 오랫동안 비워 둘 수가 없습니다. 금천 군수(金川郡守) 윤상손(尹尙遜)은 관아(官衙)를 닫아놓고 질병을 치료하여 백성들이 얼굴을 보지 못하고 정사는 아래 아전들에게 맡겨 전연 사무를 처리하지 않습니다. 신은 선천 부사 이방좌는 조속히 파직시켜 서용하지 않도록 하고, 전주 판관 윤동함과 금천 군수 윤상손도 또한 체개(遞改)하게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평시서 직장(平市署直長) 정홍래(鄭弘來)는 전세(廛稅)를 마구 거두어 원망하는 소리가 떼 지어 일어나고 있고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 조구성(趙九成)은 시장(柴場)의 재목(材木)을 운반해다가 경강(京江)에 판매하였다는 비루한 소문이 낭자합니다. 모두 마땅히 태거(汰去)시켜야 합니다."
하였으나, 동궁(東宮)이 따르지 않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균세사(均稅使)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영남(嶺南)의 선세(船稅)는 종전의 정식(定式)이 대선(大船)은 4냥(兩), 중선(中船)은 3냥, 소선(小船)은 2냥이었는데, 중년(中年)에 각각 1냥씩을 감하여 3분(分)에서 1분의 수량을 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입법(立法)하는 초기에 헐하게 정할 수가 없기 때문에 신이 종전의 정식을 취하여 작정(酌定)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성(靈城)이 이미 왔으니, 여러 당상(堂上)과 더불어 강정(講定)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호남(湖南)의 상선(商船)은 그 이익이 매우 많으나 영남은 도내(道內)의 행상(行商)에 지나지 않고, 좌도(左道) 연해(沿海)는 단지 동해(東海)의 소산(所産)뿐이므로 이익이 호남만 같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상선은 20냥으로써 작정하였는데, 이것은 남거나 모자랄 우려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관동(關東)의 상선은 그 세(稅)가 얼마인가?"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모두 합한 숫자가 4천 7백여 냥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별군관(別軍官)의 일은 어떠한가?"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조가(朝家)에서 일을 할 적에는 마땅히 뜻이 바르고 말이 이치에 맞아야 합니다. 필(疋)을 감한 대신에 군관포(軍官布)로 충당한다는 뜻으로써 곧바로 선포(宣布)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어찌 군관 과거(軍官科擧)로써 칭하여 약점을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생각도 또한 그러하다."
하였다.
2월 11일 기묘
헌부(憲府)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 【정언 이홍덕(李弘德)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전 대사간 이응협(李應協)은 탐도(貪饕)하고 비쇄(鄙瑣)하여 이민(吏民)을 침학(侵虐)하였고 억지로 여가(閭家)를 빌려서 살아 사람들이 지탱해 감당하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거하소서."
하니, 동궁(東宮)이 답하기를,
"지나치다."
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 조상규(趙尙圭)는 사람됨이 음흉하고 교활하여 지난 가을 온천(溫泉)에 거둥하실 때에 갑자기 희기(希覬)하는 마음을 내어 거짓으로 온양(溫陽)에 이거(移居)한다고 일컫고서 본직(本職)에 제수됨을 얻었으니, 청컨대 조상규를 영구히 사판에서 삭거하소서. 우통례(右通禮) 우경한(禹景漢)은 지처(地處)가 비천한데 분관(分館)하는 초기에 일세(一世)를 기폐(欺蔽)하여 외람되이 국자감(國子監)013) 에 소속되어 전후(前後)의 천력(踐歷)이 과람(過濫)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청컨대, 우경한을 빨리 태거(汰去)시키게 하소서."
하니, 동궁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2월 11일 기묘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천보(李天輔)가 상서(上書)하기를,
"삼가 대신(臺臣) 이진길(李晉吉)이 상서한 것을 보니, 그 가운데 신에게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대개 광주 목사(光州牧使) 유봉(兪崶)과 위원 군수(渭原郡守) 김범로(金範魯)가 바로 대신의 인친(姻親)으로 먼 일가입니다. 두 사람의 성적(聲績)과 이력(履歷)은 모두 주목(州牧)이나 변지(邊地)에 합당하기 때문에 신이 이에 의차(擬差)하였습니다. 대저 사람을 논함은 마땅히 그 사람이 어떠한가를 논해야 할 뿐입니다. 대신(臺臣)이 만일 말하기를, ‘아무개는 주목(州牧)이 되기에 합당하지 않고 아무개는 변지를 맡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했다면 그래도 혹시 말이 될 수 있지만, 진실로 그의 말과 같이한다면 무릇 대신의 인친과 족당(族黨)이 된 자들은 비록 등용할 만한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정관(政官)이 감히 검의(檢擬)할 수 없고 일체 폐기(廢棄)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공도(公道)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제거(提擧)의 의망(擬望)에 있어서는 더욱 한번의 웃음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중신(重臣)이 비록 유신(儒臣)의 논핵(論劾)을 당했지만 정관(政官)은 스스로 정관의 정례(政例)가 있는데 대신(臺臣)이 이것으로써 신의 죄를 삼는 것은 어찌 그다지도 너무 심한 것입니까?"
하니, 동궁(東宮)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좌의정 김약로(金若魯)가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경윤(京尹)의 발탁이 신에게 있어서 무슨 죄가 되겠으며, 방백(方伯)의 천거가 신에게 있어서 무슨 부끄러운 점이 있습니까? 그런데 주먹질과 발길질이 번갈아 이르게 되고도 지조를 지키기에 그치지 않으며, 심지어는 ‘스스로 반성하지 않고, 설명을 요구하나 되지 않는다.’는 등의 말로써 척연(斥然)히 가하기까지 하니, 단지 사람으로 하여금 이상스럽고 또한 가소롭게 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옳다고 믿는 바를 곧장 행하였다가 시의(時議)에 죄를 얻고 하루아침에 이와 같은 좋지 못한 지목을 받았으니, 마음 가득히 스스로 슬플 뿐입니다. 오히려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였다. 대개 이진길(李晉吉)이 피혐(避嫌)한 계사(啓辭)에 ‘스스로 반성하지 않고, 설명을 요구하나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김약로의 차자 내용이 이와 같았다.
2월 13일 신사
지평 서해조(徐海朝)가 상서(上書)하기를,
"유정원(柳正源)은 대직(臺職)을 거치지 않고 갑자기 도당록(都堂錄)014) 을 더럽혔으므로 물정(物情)이 모두 해괴하게 여기니, 개정(改正)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부평 부사(富平府使) 이담(李墰)은 오랫동안 관무(官務)를 폐하여 민폐(民弊)가 날로 극심해졌으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선공감 봉사(繕工監奉事) 이정언(李廷彦)은 누차 그 이름을 변경하며 글을 파는 것으로 업(業)을 삼다가 외람되이 사적(仕籍)에 끼었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거하소서."
하니, 동궁(東宮)이 그대로 따랐다.
장령 박평(朴玶)이 상서(上書)하기를,
"주연(胄筵)의 권강(勸講)하는 일은 더욱 마땅히 신중히 간택(簡擇)하여야 하는데, 유수(柳脩) 같은 이에 있어서는 본래 인망(人望)이 부족한데다 또 학식(學識)도 없으니, 개정(改正)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좌변 포도 대장(左邊捕盜大將) 구수훈(具樹勳)은 어리석고 어두워 교졸(校卒)이 농간을 부려 절도가 발생하는 우환(憂患)을 제대로 기포(譏捕)하지 못했으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동궁(東宮)이 따르지 않았다.
영남(嶺南)의 유학(幼學) 조운(曹澐) 등이 상서(上書)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을 성묘(聖廟)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하였으나, 동궁(東宮)이 따르지 않았다.
2월 15일 계미
지평 서해조(徐海朝)가 상서(上書)하기를,
"새로 서번(西藩)에 제수된 중신(重臣)은 경월(卿月)015) 의 여러 관직에 오랫동안 왕명(王命)을 어겼으니, 염아(恬雅)한 절조(節操)를 누가 존경하고 부러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번의 내직(內職)을 사양하고 외직(外職)을 맡은 것은 혹시 편리를 도모한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관서(關西) 일로(一路)는 가장 물자가 풍부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일컬어지니, 결코 염정(恬靜)하고 아칙(雅飭)한 사람이 흔연(欣然)히 부임(赴任)하기를 즐겨할 곳이 아닙니다. 더구나 중신의 사양하는 글에도 이 의미를 대단히 말했습니다. 일전에 대각(臺閣)의 상서가 비록 중신을 지적하여 배척한 것은 아니지만 또한 어찌 편안하기 어려운 단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숙명(肅命)을 하여 처의(處義)함이 정당하지 못하였으니, 신은 마땅히 서번을 체직시켜 사양하고 받은 의리를 밝게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중신은 대개 조재호(趙載浩)를 지칭한 것인데, 동궁(東宮)이 따르지 않았다.
2월 18일 병술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정시(庭試)에 친히 임(臨)하였으니, 원손(元孫)이 탄강(誕降)한 경사이기 때문이었다. 오찬(吳瓚) 등 10인을 뽑았다.
임금이 이조 참판 조명교(曺命敎)에게 입시(入侍)하여 개정(開政)할 것을 명하여 이종백(李宗白)을 대사헌으로, 이존중(李存中)을 대사간으로, 김문행(金文行)을 사간으로, 황합(黃柙)을 헌납으로, 서지수(徐志修)를 교리로, 정광운(鄭廣運)을 장령으로 삼았다.
2월 20일 무자
평안도 관찰사 조재호(趙載浩)가 상서(上書)하기를,
"신이 오랫동안 은명(恩命)을 도피하다가 우연히 번임(藩任)을 맡게 되니, 의리상 끝내 사양하기가 어려워 한번 나아가 숙명(肅命)하였는데, 공격이 즉시 이르게 되었습니다. 거의 기다렸다가 발론하는 것 같기도 하여 비오(鄙汚)하고 염치없는 죄과(罪科)에 몰아넣었으니, 신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부임할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체개(遞改)를 허락하여 사람들의 말에 사과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동궁(東宮)이 허락하지 않았다.
2월 20일 무자
장령 유건(柳謇)이 상서(上書)하기를,
"논박(論駁)을 당하고 반박하는 것은 본시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정익하(鄭益河)가 박상덕(朴相德)을 반박하면서 심지어 ‘어린 손자가 본심(本心)이 아니다.’는 등의 설(說)로써 가하기까지 하였으니, 맑은 조정의 수치(羞恥)가 됨이 심합니다. 책비(責備)의 벌(罰)을 어찌 유독 높은 반열(班列)에는 행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수원 부사(水原府使) 장태소(張泰紹)는 날마다 탐음(耽飮)을 일삼고 큰 곤장으로 위엄을 세우고 지나치게 전세(田稅)를 거두어들여 민원(民怨)이 떼 지어 일어나고 있으니, 마땅히 삭탈 관직(削奪官職)해야 합니다. 남해 현감(南海縣監) 김호겸(金好謙)은 백성의 고택(膏澤)을 빨아 오로지 자기를 살찌우기를 일삼아 짐바리가 줄을 이어 온 경내(境內)가 근심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니, 동궁(東宮)이 그대로 따랐다.
2월 21일 기축
집의 이창유(李昌儒)가 상서(上書)하기를,
"우참찬 원경하(元景夏)는 말미를 청하고 물러나기를 고한 것이 몇 차례일 뿐이 아닌데, 한강(漢江) 나루터와 도성(都城) 밖에서 지체하고 머물러 있으면서 벼슬을 제수함이 있으면 오직 혹시나 상실할까 두려워하고 일이 있으면 마치 미치지 못할 것같이 하며 여러 사람과 같이 있을 때는 미치광이처럼 부르짖고 어지럽게 떠들며, 의논을 견지할 때는 아침에는 이랬다가 저녁에는 저랬다가 하여 거조(擧措)가 황혹(慌惑)하니, 청컨대 파직시켜 서용하지 마소서. 전 사간 신위(申暐)와 전 정언 윤득양(尹得養)은 지난번 감시(監試)의 패(牌)를 편복(便服)차림으로 수납(隨納)하여 보고 듣는 이를 놀라게 한 바가 있습니다. 모두 파직하게 하소서. 안악(安岳) 한량(閑良) 조상엽(趙尙燁)은 공첩(空帖)과 경적(京籍)을 그려내어 이소(二所)016) 에서 무거(武擧)에 응시(應試)하여 끝내는 탄로되어 자복(自服)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경조 당상(京兆堂上)은 추고(推考)하고 낭청(郞廳) 및 감동관(監董官)은 모두 잡아다 신문하여 정죄(定罪)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대구 영장(大邱營將) 조설(趙偰)과 안동 영장(安東營將) 심필(沈佖)은 피잔(疲殘)하고 어리석어 모두 직무를 맡기가 어려우니, 모두 마땅히 개차(改差)해야 합니다. 남양 부사(南陽府使) 유세덕(柳世德)은 송도(松屠)017) 를 금함이 해이하고, 여산 부사(礪山府使) 김상기(金相箕)는 형장(刑杖)을 외람되게 시행하고, 신천 군수(信川郡守) 조영증(趙榮曾)은 서현(西縣)에 비방이 쌓이고, 보성 군수(寶城郡守) 정승채(鄭承菜)는 외람되게 가권(家眷)을 인솔하고, 청도 군수(淸道郡守) 박사형(朴師衡)은 질병이 있고 또 교(轎)를 탔으며, 음성 현감(陰城縣監) 정석장(鄭錫長)은 혼미하여 일을 살피지 못했으니, 모두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장흥고 봉사(長興庫奉事) 안호(安祜)와 내섬시 주부(內贍寺主簿) 현태벽(玄泰璧)은 모두 장쾌(駔儈)018) 로서 외람되이 사로(仕路)를 더럽혔고, 장릉 참봉(長陵參奉) 정수(鄭檖)는 연로(年老)하여 들은 것이 없고, 전옥서 참봉(典獄署參奉) 이덕남(李德楠)은 글을 파는 것으로 업(業)을 삼다가 구차하게 충의(充擬)하였으니 마땅히 모두 태거(汰去)해야 하며, 이조 당상[銓堂]은 중추(重推)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동궁(東宮)이 답하기를,
"첫 번째 건(件)의 일은 지나치다. 두 번째, 세 번째 건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영장과 수령의 일은 먼 외방의 풍문(風聞)을 어찌 다 믿을 수가 있겠는가? 태거하는 것과 중추하는 일도 또한 지나치다."
하였다.
임금이 군역청 당상 및 균세사(均稅使)를 소견(召見)하였다. 영남 균세사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신이 명을 받고 내려갔는데, 어염세(魚鹽稅)를 오직 백성의 이익만 따져보면 국가의 용도(用途)에는 부족하고 만일 국가의 용도(用途)를 위한다면 혜택이 다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경중(輕重)을 참작하여 결정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곽전(藿田)019) 도 또한 어염(魚鹽) 가운데 들어갔는가?"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명칭은 비록 곽전이지만 물속에서 캐기 때문에 함께 포함시켰습니다. 영남(嶺南)의 행상선(行商船)은 5만 냥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에 3만 냥으로써 결정하였고 관동(關東)의 곽전 어조(藿田漁條)는 4천 8백 냥으로써 결정하였는데, 이 수량은 더할 수도 없고 감할 수도 없습니다."
하고, 호남 균세사 이후(李)가 말하기를,
"무릇 어선(漁船)은 다 그물이 있는데, 선박이 있는 자는 반드시 스스로 그물을 갖추지 못하고 그물이 있는 자도 스스로 선박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선박과 그물에 대해 다같이 세금을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영남의 절목(節目)을 보니, 망세(網稅)가 없습니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이미 선세(船稅)를 거두고 또 그물세를 받는다면 왕정(王政)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으니, 그 말이 옳습니다. 그리고 또 신이 정세(定稅)한 것은 4분의 1을 감하였는데 영남은 5분의 1로써 세금을 정한 것은 의도가 적게 거두려는 데 있으니, 한 나라의 안에서 다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영남세에 의하여 작정(酌定)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마음이 귀중하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호조(戶曹)에 진어(眞魚)020) 한 마리의 세(稅)가 있으니, 고인(古人)의 일이 옳습니다. 벌구리(筏仇里)의 소소(小小)한 곳들을 만일 작은 곳이라고 해서 감한다면 백성들이 모두 그 큰 곳을 헐어버리고 다투어 작은 곳으로 만들어 세금을 면제받는 계획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구별하지 않고 모두 똑같이 세금을 정하였는데, 통영(統營)의 3분의 1과 기장(機張)의 5분의 1과 동래(東萊)의 8분의 1은 대개 말엽(末葉)의 열에 그 하나를 취하는 의미가 됩니다."
하고, 균역 당상 홍계희(洪啓禧)가 말하기를,
"해서(海西)는 어장세(漁場稅)가 없습니다."
하니, 해서 균세사 황정(黃晸)은 말하기를,
"어장세를 거두면 중첩으로 세금을 거둔다는 원한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하니, 홍계희는 말하기를,
"어찌 한나라 안에 두 가지 법이 있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도백(道伯)으로 하여금 세금을 정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과 더불어 다시 소상히 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진상선(進上船)은 어떻게 구별(區別)하였는가?"
하니, 홍계희가 말하기를,
"진상선을 감세(減稅)하는 일은 마땅히 대신과 의정(議定)해야 합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북도(北道)의 민사(民事)가 매우 시급하여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도백(道伯)이 상서(上書)하여 영남의 곡물(穀物)을 추가로 청하고 평사(評事) 이이장(李彛章)도 또한 장청(狀請)을 하였는데, 듣건대, 교제창(交濟倉)에 비축된 곡식이 없다고 합니다. 영남의 곡식 3만 석(石)을 먼저 지급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절반은 북관(北關)으로 하여금 운반해 가게 하고 절반은 영남에서 운송하되 관동의 피곡(皮穀) 1만 석을 먼저 입송(入送)한 뒤에 영남의 곡식 5천 석으로써 관동에 대신 지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남에서는 정곡(正穀)으로 구획(區劃)해서 입송하여 우리 북방의 백성을 구제하라."
하였다.
함경 도사 임석헌(林錫憲)에게 입시(入侍)할 것을 명하였다. 임석헌이 말하기를,
"신이 북관(北關)에 들어가 덕음(德音)을 선포(宣布)하였더니, 유민(流民)들이 모두 말하기를, ‘대조(大朝)의 덕택으로 살아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장차 종자도 남지 않게 되었다. 주상(主上)이 대리(代理)하기 때문에 우리 북방의 백성들을 잊어버린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쇠모(衰耗)하기는 하였으나 적자(赤子)들이 나에게 먹여주기를 바라고 있으니, 어찌 소홀히 할 수가 있겠는가?"
하고, 이어서 북평사(北評事) 이이장(李彛章)을 체직하여 감진 어사(監賑御史)로 삼도록 명하고 부령 부사(富寧府使) 유언술(兪彦述)을 곧바로 그곳에 정배시킬 것을 명하였으니, 유 언술이 즉시 부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임석헌(林錫憲)을 부령 부사로 삼아 역마를 달려 내려가서 남관(南關)을 감진(監賑)하도록 명하였다.
호남 균세사 이후(李)가 호남의 해도도(海島圖)를 올리고 아뢰기를,
"섬 가운데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번성하고 생활이 풍족하여 육지(陸地)의 백성들보다 나았습니다. 차차 깊이 들어갔더니 등주(登州)·내주(萊州)와 서로 마주 바라본 곳이 있었는데, 대개 섬의 백성들이 모두가 죄를 범하고 도피했거나 혹은 사노(私奴)로 몰래 피신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섬의 백성들이 주현(州縣)에 통속(統屬)되지 않았는가?"
하였다. 이후가 말하기를,
"해도는 부근의 고을에 소속되어 약간의 세금을 거두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섬 사람들이 생전 관장(官長)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별성(別星)021) 으로서 위의(威儀)를 갖추고 들어가니, 남녀 노소(男女老少)가 크게 놀라고 조금은 괴이하게 여기며 모두 다 산(山)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불러서 안심시키고 모았습니다. 풍원군(豊原君)022) 이 본도(本道)의 감사(監司)가 되었을 때 고을을 설치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습니다. 조가(朝家)에서 마땅히 가어(駕御)를 기미(覊縻)하는 방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축(圖軸)을 유중(留中)하라."
하였다. 영남 균세사 박문수(朴文秀)가 아뢰기를,
"신이 전선(戰船)과 귀선(龜船)의 제도를 상세히 보았더니, 전선은 매양 개조(改造)할 때마다 그 몸뚱이가 점차 길어져 결코 운용(運用)하기가 어렵고 귀선에 있어서는 당초 체제(體制)는 몽충(艨衝)023) 과 같이 위에 두꺼운 판자를 덮어 시석(矢石)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신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기록한 바를 보았더니, 귀선의 좌우에 각각 여섯 개의 총(銃) 쏘는 구멍을 내었는데 지금은 각각 여덟 개의 구멍을 내었으니, 거북선이 종전에 비해 지나치게 커진 것을 또한 알 수가 있으므로 개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새로 제수된 도백(道伯)으로 하여금 순행하여 살펴서 장문(狀聞)하게 하라."
하였다.
지평 이진길(李晉吉)이 인피(引避)하기를, "신의 상서(上書) 가운데 ‘과극(戈戟)’ 두 글자는 대료(大僚)의 차자(箚字) 가운데의 말을 따온 것인데, 대료의 대차(對箚)는 신을 성죄(聲罪)하기에 여력을 남기지 않았으니, 어찌 의로(疑怒)함이 지나치고 스스로 반성하지 않음이 이 지경까지 이르른 것입니까?"
하고, 지평 서해조(徐海朝)는 인피하기를,
"중신(重臣)의 전후(前後)에 처의(處義)함이 판연히 두 갈래가 되었습니다. 신이 단지 책비(責備)하는 뜻으로써 서로 바로잡은 바가 있었는데, 예비(睿批)는 도리어 ‘지나치다.’는 것으로써 답을 하시었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무릅쓰고 눌러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장령 유건(柳謇)이 일을 처리함에 이르러, 이진길은 출사(出仕)하게 하고, 서해조는 체차시킬 것을 청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2월 25일 계사
하교하기를,
"두 대신(臺臣)이 오늘 한 중신(重臣)을 몰아내고 내일 한 중신을 몰아내어 그 일은 동일한데, 하나는 출사(出仕)할 것을 청하고 하나는 체차(遞差)시킬 것을 청하니, 또한 불공평한 데에 관계된다. 장령 유건과 지평 이진길을 모두 체차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영남 진사 남도철(南道轍) 등이 상서(上書)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을 성묘(聖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으나, 동궁이 허락하지 않았다.
북평사(北評事) 이이장(李彛章)이 상서하여, 쌀·콩 각각 1만 석을 추가로 구획하여 진자(賑資)에 보충할 것을 청하니, 동궁이 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2월 27일 을미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의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하기를 ‘정덕(貞德)’이라 하였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대사(大赦)를 내린 뒤 백관(百官)의 진하(陳賀)를 받았다. 그 반교문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선위(璇闈)024) 에 상서로운 기운이 어리니, 바야흐로 복(福)을 비는 정성이 간절하였다. 요책(瑤冊)이 아름다움을 드날리니, 이에 어버이를 현양하는 예(禮)를 거행한다. 더욱 구전(舊典)을 빛내어 사방(四方)에 모두 고(告)하노라. 지난날 과인(寡人)이 어린 나이로부터 문모(文母)의 의범(懿範)을 섬김을 얻었다. 덕(德)은 영고(寧考)025) 를 짝하여 부드러운 덕화(德化)가 일찍이 색연(塞淵)026) 에서 나타났고, 지위는 장추궁(長秋宮)027) 에 높아 지극한 은혜를 가장 비보(庇保)하는 데서 입었다. 위의(危疑)하던 즈음에 대책(大策)을 세워서 삼종(三宗)028) 의 통서(統緖)를 계승하였고, 몹시 어렵던 시기에 가르침을 받들어 위기 일발(危機一髮)에서 나라의 형세를 보존시켰다. 항상 만년에 복(福)을 더욱 누리시기를 기원했는데, 과연 큰 복이 조용히 이르렀다. 수요(壽曜)가 광휘(光輝)를 더하니 옥도(玉度)의 강태(康泰)하심을 기뻐했고, 자천(慈天)이 두루 덮히니 영록(靈籙)의 면연(綿延)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육순에 시선(視膳)의 즐거움을 받드니 나의 수염이 무성하고, 양세(兩世)가 함이(含飴)029) 의 즐거움을 제공하니 손자와 증손자들을 어루만진다. 자성(慈聖)의 수(壽)는 70에 가까우신데 국모(國母)로 임어(臨御)하신 지는 반백년(半百年) 가량 되었다. 훤초(萱草)030) 의 싹이 새로 싹트니 봄빛이 바로 삼양(三陽)031) 에 속하고 적유(翟褕)032) 가 광채롭게 임(臨)하니 천성(天星)이 곧 5기(五紀)033) 에 돌아왔다. 이장(彛章)을 돌아봄에 고사(故事)에 상고함이 있는데, 숭봉(崇奉)을 어찌 이 시기에 늦출 수가 있겠는가? 겸읍(謙挹)하신 마음을 돌리기 어려우니 뜻을 봉양하는 의리에 어둡지 않았다. 존귀(尊貴)함을 빛내는 소원이 몹시 간절하니 덕(德)에 보답하려는 정성을 마지못해 따랐다. 화갑(花甲)의 홍명(鴻名)034) 은 오히려 소게(昭揭)를 다하지 못하였으나, 보첩(寶牒)의 위열(煒烈)은 포장(鋪張)에 조금은 바칠 수 있었다. 종천(終天)035) 을 추모(追慕)하매 매양 견장(見牆)036) 의 아픔을 마음에 품고 있었는데, 높임을 바칠 곳이 있으니 애일(愛日)037) 의 마음을 펼침을 얻었다. 본년(本年) 2월 27일에 책보(冊寶)를 받들어 혜순 자경 헌열 광선 현익 강성 대왕 대비(惠順慈敬獻烈光宣顯翼康聖大王大妃)의 존호를 가상(加上)하여 ‘정덕(貞德)’ 이라 한다. 욕의(縟儀)가 능히 이룩되니, 어찌 내 한 사람만이 홀로 기뻐할 것인가? 쌓인 경사가 이에 모이매 만백성과 더불어 경사(慶事)를 같이하노라. 하우(夏禹)의 막복(幕服)038) 의 인덕(仁德)을 미루어 큰 죄인을 이에 사면하고, 은탕(殷湯)의 해망(解網)039) 의 축원(祝願)을 본받으니 사소한 과오를 어찌 논할 것인가? 본월(本月) 27일 새벽녘 이전으로부터 잡범 사죄(雜犯死罪) 이하는 모두 사면하여 용서해 주고, 관직에 있는 자는 각각 한 자급(資級)을 올려 주고 자궁(資窮)040) 한 자는 대가(代加)041) 하라. 아! 바야흐로 태형(泰亨)한 운수(運數)가 열리어 만물이 각각 생동한다. 삼전(三殿)의 화기(和氣)는 퍼져서 순희(純禧)를 인도하여 맞이하고, 팔역(八域)의 만물(萬物)은 희희(熙熙)하여 패택(霈澤)이 널리 흐른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생각건대, 마땅히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예문 제학 이천보(李天輔)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54책 73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96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 사법(司法)
[註 024] 선위(璇闈) : 황태후의 궁전을 말함.[註 025] 영고(寧考) : 숙종(肅宗).[註 026] 색연(塞淵) : 사려(思慮)가 깊고 성실함.[註 027] 장추궁(長秋宮) : 황후의 궁전.[註 028] 삼종(三宗) : 효종·현종·숙종.[註 029] 함이(含飴) : 엿을 먹고 손자를 희롱하며 정사에 관여하지 아니하는 것. 후한(後漢)의 마 황후(馬皇后)가 "나는 단지 엿을 머금고 손자나 희롱하며, 다시 정사에 관여하지 아니하겠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註 030] 훤초(萱草) : 원추리.[註 031] 삼양(三陽) : 《주역》의 괘(卦)로, 세 양효(陽爻).[註 032] 적유(翟褕) : 왕후(王后)의 옷.[註 033] 5기(五紀) : 1기가 12년임.[註 034] 홍명(鴻名) : 크디 큰 명예.[註 035] 종천(終天) : 돌아가신 부모.[註 036] 견장(見牆) : 앙모(仰慕)의 뜻. 요(堯)임금이 죽자 순(舜)임금이 3년 동안 앙모하여 담장[牆]에서도 요임금을 보고 국[羹] 그릇에서도 요임금을 보았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註 037] 애일(愛日) : 세월이 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효자(孝子)가 부모(父母)를 장구히 모시고자 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註 038] 막복(幕服) : 막(幕)은 막(漠)과 통용(通用)임. 《서경》 하서(夏書) 우공편(禹貢篇)에 "동쪽으로는 바다에 다다랐고, 서쪽으로는 유사(流沙)에 미치었으며, 북쪽으로부터 남쪽까지 명성과 교화가 온 세상에 퍼졌다.[東漸于海 西被于流沙 朔南曁聲敎 訖于四海]"라고 한 내용에서 나온 말로, 우왕(禹王)의 덕화(德化)가 거친 사막(沙漠) 지방까지도 복속(服屬)했다는 뜻임.[註 039] 해망(解網) : 전렵(田獵)할 때 그물의 한쪽을 약간 터놓아 짐승을 다 잡지 않는다는 것으로, 탕왕(湯王)의 인덕(仁德)을 나타낸 말임. 탕왕이 들에서 어떤 사람이 사방을 막은 그물을 쳐놓고 "모두 이 그물 속으로 들어오라." 고 비는 것을 보고 그 그물의 3면을 터놓은 채 "왼쪽으로 갈 것은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갈 것은 오른쪽으로, 그렇지 않을 것만이 그물 속으로 들어오라."고 빈 데서 나온 고사(故事)임.[註 040] 자궁(資窮) : 당하(堂下) 최고의 자급(資級)인 정3품 하계(下階). 곧 동반(東班)의 통훈 대부(通訓大夫), 서반(西班)의 어모 장군(禦侮將軍)에 이르는 것.[註 041] 대가(代加) : 자궁(資窮) 등의 이유로 자급을 올려 줄 당자 대신에 아들·사위·아우·조카 등에게 자급을 올려 주는 것.
임진하(任震夏)를 집의로, 이광익(李光瀷)을 장령으로, 김원행(金元行)·박사눌(朴師訥)을 지평으로, 황합(黃柙)을 헌납으로, 김성응(金聖應)을 판의금으로, 이현중(李顯重)을 수찬으로, 이양천(李亮天)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2월 27일 을미
대사성 민백상(閔百祥)이 상서(上書)하기를,
"지난 갑인년042) 원월(元月)에 대조(大朝)께서 특별히 양역(良役)의 폐단을 진념(軫念)하시어 그 당시의 총재(冢宰)043) 로 하여금 신의 조부(祖父) 봉조하(奉朝賀) 신(臣) 민진원(閔鎭遠)에게 묻도록 하였는데, 곧바로 사관(史官)의 선소(宣召)를 받고 친히 하교(下敎)를 받았습니다. 신의 조부가 우러러 대답하기를, ‘향곡(鄕曲)에는 중인(中人)·서인(庶人)의 무리가 많아 혹은 군관(軍官)에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교생(校生)에 들어가기도 하니, 이들의 무리가 군정(軍丁)에 적합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하루아침에 충군(充軍)을 한다면 원망과 비방으로 반드시 소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만일 비국 군관(備局軍官)이나 액외 교생(額外校生)이라는 명호(名號)로써 덧붙여 해마다 시재(試才)하여 그 가운데서 연차(連次)로 으뜸을 차지한 자는 혹은 급제를 내리거나 혹은 당년(當年)의 군포(軍布)를 면제하여 주고 교생으로 순통(純通)한 자는 또한 군포를 면제해 주며 그 나머지는 각각 한 필(疋)을 거두되 양군(良軍)으로 두 필을 내는 자는 그 한 필을 감면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먼저 두서너 고을에 시행해 보고자 하였는데 실천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결미(結米)를 수봉(收捧)하는 것에 있어서는 명색(名色)이 바르지 않으니, 옳은 줄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오늘날의 인심(人心)과 세도(世道)는 아무래도 성급하게 경장(更張)을 의논할 수가 없으니, 모름지기 5, 6인의 사무(事務)를 아는 신하로 하여금 의견을 적어서 올리게 하여 성상께서 마음을 비워 살펴보시고 천리(天理)와 시세(時勢)로써 참고하여 절충(折衷)해서 의심이 나면 조금 시험해 본다는 뜻으로써 먼저 두서너 고을에 시행하여 그 성취(成就)를 보되, 먼저 상하(上下)의 낭비하는 비용을 줄이고 또 경외(京外)의 무위 도식(無爲徒食)하는 벼슬자리를 감소시켜 부족한 숫자를 충당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신의 집에 사기(私記)로 소장된 것인데, 신이 이미 받았기 때문에 별군관(別軍官)을 초정(抄定)할 때 ‘다시 액외생(額外生)의 명호를 추가하자.’는 뜻으로써 비국(備局)에 논보(論報)하였는데, 비국에서 명색을 따로 창안하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명하였으므로, 신이 또 억지로 다투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개정(改正)하여 반포(頒布)한 절목(節目)을 보았는데, 이미 활쏘기를 시험하여 으뜸을 차지한 자에게 급제를 내리는 것으로써 정식(定式)을 삼았으니, 문예(文藝)가 있는 자는 고강(考講)을 받게 하고 군포를 면제하는 한 가지 사항도 또한 빠뜨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단지 조궁(操弓)한 사람에게만 격권(激勸)하는 정사를 행하고 협책(挾冊)하는 무리에게는 미치지 않는다면, 결국 균등하게 시행하는 방도가 아니고 또한 향우(向隅)의 탄식044) 이 있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선무 군관(選武軍官) 중에 무기(武技)가 없는 자는 수령(守令)이 먼저 고강(考講)을 받아 감영(監營)에 초보(抄報)하고 도회(都會)에서 시사(試射)할 때 도신(道臣)이 모두 모아서 수강(受講)하되 사서(四書)와 삼경(三經) 가운데 한 질(秩)을 찌[栍]를 뽑아 매 권(卷)마다 각각 1편(篇)을 강(講)하고 주(註)까지 모두 강합니다. 읽음에 있어 구두(口讀)에 익숙하고 문의(文義)를 이해하는 자를 좌도와 우도에서 각각 열 사람씩을 뽑아 그 당년(當年)의 군포를 면제해 준다면, 다만 그들을 위열(慰悅)하는 방도일 뿐만 아니라 실은 권장(勸奬)하는 방법이 됩니다. 아! 신의 조부의 당일(當日)의 연주(筵奏)는 진실로 될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보는 의도에서 나왔는데, 다만 지금의 절목(節目) 조건(條件)이 간혹 갑인년의 연달(筵達)한 말과 암암리에 부합되는 것이 많습니다. 교생이 수강하는 것이 유독 빠져 있기 때문에 신이 감히 사기를 등출(謄出)하고 소견(所見)으로써 참고하여 아울러 등문(登聞)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2월 28일 병신
좌의정 김약로(金若魯)·우의정 정우량(鄭羽良)·예조 판서 신만(申晩)·호조 판서 김상로(金尙魯)·공조 판서 유엄(柳儼)·판중추 부사 조관빈(趙觀彬)에게 안구마(鞍具馬)를 하사하고, 조운규(趙雲逵)·김양택(金陽澤)에게는 통정 대부(通政大夫)를 가자(加資)하였으며, 나머지에게는 모두 차등 있게 상을 반사하였으니, 존숭 도감(尊崇都監)의 노고 때문이었다.
2월 29일 정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좌의정 김약로(金若魯)가 아뢰기를,
"북평사(北評事) 이이장(李彛章)이 상서(上書)하여, 또 종자(種子)와 농우(農牛)를 먹일 콩 2만 석을 얻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영남(嶺南)의 곡물도 역시 바닥이 드러난 상태이니 포항(浦項) 창고의 벼[租]와 콩[太] 각각 5천 석을 획급(劃給)하도록 하였는데, 콩은 포항에 있는 것도 역시 매우 부족하다고 하니, 다른 것으로 회부(會付)하여 변통하여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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