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3권, 영조 27년 1751년 3월

싸라리리 2025. 10. 2.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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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 기해

대사간 이존중(李存中)을 거제(巨濟)에 귀양보냈다. 이때에 이존중이 상서하여 당시의 일을 의논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아! 무신년045)  의 흉당(凶黨)이 나라를 원망한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기사년046)  에 처음 시작되어 신사년047)  에는 한층 격해졌고, 병신년048)  의 처분(處分)에 불만을 품어 마침내 하늘을 뒤덮는 재앙을 빚어 내기에 이르렀으니, 절통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우리 대조(大朝)께서 을사년049)  에 처음 정치를 하실 적에 어찌 광명 엄정(光明嚴正)하지 않으셨겠습니까마는, 간특한 무리는 오히려 왕장(王章)을 도피하였기 때문에, 윤강(倫綱)은 두절되고 의리(義理)는 막히어 신인(神人)의 울분이 오랫동안 줄어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날 합사(合辭)의 의논은 실로 군강(君綱)을 바로잡고 난적(亂賊)을 성토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만약 조금이라도 인리(人理)가 있는 자라면 감히 이 논의에 대해서 다른 주장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발론하자마자 문득 정계(停啓)하여 반드시 이기고서야 그만두려 하였지만 그러나 오히려 감히 드러내 놓고 방자하게 구원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유독 저 이종성(李宗城)이란 자는 이에 감히 ‘관일(貫日)’·‘유세(宥世)’ 등의 설(說)로써 흉당의 괴수를 편들어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고, 조정(朝廷)의 그에 대한 처치도 거의 사소한 일인 것처럼 하여, 추천하고 이끌어 올리기를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외의 대론(大論)에 간범(干犯)한 무리들을 전후의 전관(銓官)들이 잇달아 청선(淸選)에 검의(檢擬)하여, 점차 조명교(曺命敎)가 앞장서 홀로 담당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한번의 정사(政事)에 네 사람을 방자하게 주의(注擬)하여 제방(隄防)이 무너져 다시 여지가 없게 되고 토복(討復)의 주장은 날로 점점 없어지고 말았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전후의 대론(大論)을 저버리고 간범한 여러 사람을 주의(注擬)한 정관(政官)050)  은 의당 모두 견파(譴罷)해야 하고, 편들었던 이종성과 정계(停啓)한 여러 신하들도 마땅히 빨리 먼 변방에 추방하는 율을 시행하여 흉도(凶徒)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알게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라를 경영하는 요령은 오로지 사대부들의 명절(名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어지러워지려고 하면 명절이 그에 앞서 망하고, 명절이 망하면 염치(廉恥)가 없어지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진출하여 대권(大權)을 차지하여 그제서야 그 뜻을 제멋대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아! 오늘날의 세도(世道)는 통곡해도 부족하다고 하겠습니다. 온 나라가 미친 듯이 이익만을 추종하여 묘당(廟堂)에 있는 자들은 자리를 굳히고 총애를 요구하는 것을 명맥(命脈)으로 삼고, 비위를 맞추고 뜻을 받드는 것을 몸을 보전하는 계책으로 삼으며, 대간(臺諫)은 오로지 입을 꼭 다물고 말하지 않는 것을 일삼고 여러 관료들은 단지 먹고 마시는 것만 도모하여, 수백년 동안 열조(列朝)의 배양해온 명절(名節)이 땅을 쓴 듯이 남지를 않았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저하(邸下)께서는 대조(大朝)의 부탁하신 무거운 책임을 받으셨으니, 그 의지하여 맡기고 자문을 구하여 세도(世道)를 교정하는 것은, 단지 보상(輔相)의 적임자를 얻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저 대료(大僚)들은 자품이 본래 용렬하고 식견이 없어서 일생의 기량(伎倆)이라고는 오로지 권모 술수를 사용하는 것이고, 뱃속에 꽉 들어차 버티고 있는 것은 도시 욕심의 불길입니다. 중년(中年)에 벼슬 얻기를 근심하던 마음은 광역(狂易)051)  의 증세로 바뀌어, 감정이 일정하지 않고 행동이 해괴합니다. 들어가서는 얼굴을 쳐들고 웃으면서 조금도 경건하고 근엄한 뜻이 없고, 나가서는 기분내키는 대로 사납게 외쳐서 세상을 위협하고 사람을 제어하는 구실로 사용합니다. 심지어는반항(班行)052)  에서의 진신(搢紳)을 매도하고 공당(公堂)에서의 조사(朝士)를 구박(驅迫)하는 것과, 법전(法殿)053)  에서의 가죽신을 벗어버리고, 대로(大路)에서 맨발로 걸어다니는 것 등은 모든 보고 듣는 이들이 놀라워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대체로 그의 사람됨이 병이 들지 않은 시기에 있어서도 단지 하나의 비루하고 용렬한 무리에 지나지 않았는데, 당당(堂堂)히 모두가 우러러보는 자리를 바로 이런 실성(失性)한 사람으로 구차하게 자리를 메꾸고 있으니, 거리의 아이들과 하인들도 모두 미친 정승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그 조정의 욕됨이 어떠하겠습니까? 그의 아우 김상로(金尙魯)는 성품이 더욱 음험하고 행실은 또 교활하여 겉으로는 공평(公平)함을 가장해서 출세의 발판으로 삼고 속으로는 기괄(機括)을 감추어 한세상을 농락하고 있습니다. 형(兄)은 정석(鼎席)054)  을 차지하고 아우는 전지(銓地)에 처하여, 성세(聲勢)가 서로 의지하고 표리(表裏)가 함께 이루어져, 자기와 다른 이들을 남몰래 억제하고 같은 패거리를 드러내 놓고 밀어주어, 안으로는 경재(卿宰)의 승진과 밖으로는 번곤(藩閫)055)  의 천섬(薦剡)056)  을 주장하고 종용(慫慂)하지 않음이 없지만, 요는 인척(姻戚)과 혈당(血黨)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세리(勢利)가 있는 곳에는 추종자들이 날로 많아지는데, 급기야 그 허물이 더욱 쌓여 공의(公議)가 불울(拂鬱)해져 혹시라도 남들이 자기네를 비평할까 두려워하여, 이에 감히 언로(言路)를 틀어막을 계책을 세워 논핵하려는 대신(臺臣)은 먼 고을로 좌천시켰고, 입을 다물라고 넌지시 일러주는 말을 정석(政席)에서 발설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그 아내를 장사지낸 곳의 마을에서 수고한 자들을 몇년 안에 전후로 거두어 들인 것이 열 세 사람이나 되어, 감히 조정의 관작을 패거리로 삼아 공로에 보답하는 자료로 만들었습니다. 알선하고 운용함이 오직 자기 뜻대로 하고자 하였지만 권우(眷遇)가 지극히 중하고 뿌리의 기반이 매우 견고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그 음중(陰中)057)  의 화를 두려워하여 서로가 경계하면서 감히 잘못을 거론하지 못하고, 차라리 국가를 저버릴지언정 감히 김씨 형제를 거스르지 못하고 있으니, 아! 그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다만 그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세도(世道)를 주관하는 자가 이익을 즐기고 권력을 탐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풍문이 도달하는 바에 습속(習俗)이 크게 변하여 명절(名節)을 헌신짝으로 여기고 이록(利祿)을 표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가령 이양천(李亮天)처럼 겉으로는 사론(士論)을 핑계대어 당시의 명예를 취하고, 언의(言議)를 반복하며 마음을 돌려 바꾼 자가 외람되게 청선(淸選)을 더럽히고, 김선행(金善行)같이 오로지 당로(當路)에게 아양떠느라 앉은 좌석이 거의 해어지고, 형을 위해 관직을 구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애걸한 자가 분에 넘치게도 동벽(東壁)058)  을 더럽혔습니다. 사자(士子)의 신분으로 자취가 명도(名塗)에 끼어 있으면서도 값을 찾아 꼬리를 흔드는 작태를 달갑게 여겼으니, 듣는 이는 귀를 막고 말하기도 부끄럽습니다. 조명채(曹命采)는 막 자식의 상사(喪事)를 듣고서도 기생을 끼고 음악을 벌였으니 남중(南中) 사람들이 침뱉고 욕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엄우(嚴㻦)는 탐욕스럽고 더러우며 행사(行査)가 부실(不實)하여 서토(西土)의 백성들이 분개하고 원망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행동이 경박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무리들은 비록 명절로써 나무랄 수 없지만, 음로(蔭路)의 초선(抄選)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전적으로 행의(行誼)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재흥(崔載興)은 본디 검칙(檢飭)이 없이 더러운 패륜을 자행하던 자인데, 학식의 이름을 도둑질하여 역시 이 초선(抄選)에 참여되었으니,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소문이 퍼져 하나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가 의관(衣冠)059)  을 욕되게 한 것을 더 이상 무어라 말할 수가 없는데, 이는 대관(大官)이 그 적임자가 아니라서 풍속이 그에 따라 불미(不美)하게 된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아! 명절의 성쇠(盛衰)는 전적으로 대각(臺閣)에 달려 있는 것인데, 예로부터 나라의 정권을 잡은 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도 역시 대각이 과감히 말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었습니다. 오늘날은 대각의 권한이 재상(宰相)에게 돌아간 지 오래 되었습니다. 북돋아 심고 벌여놓은 것이 공손히 자기네에게 동조하는 무리가 아님이 없고, 간혹 자기 주견을 세운 자가 있을 경우 한마디 말이라도 입밖으로 나오면 욕설이 뒤따라 이르게 됩니다. 혹은 경알(傾軋)로써 참소하기도 하고 지주(指嗾)로써 핑계를 대기도 하며, 혹은 잡류(雜類)라고 헐뜯기도 하고 고르지 못했다고 비난하기도 하였습니다. 얼굴을 바꾸고 말을 돌려서 천총(天聰)을 어지럽혀 마침내는 한번의 배척으로 회복하지 못하게 만드니, 진실로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교묘히 벼슬하는 층계를 내버리고 등불을 부딪치는 화를 취하려 하겠습니까? 이때문에 머뭇거리는 풍습이 이루어져서 기절(氣節)은 사그라졌으며, 대각의 체면은 날로 낮아지고 재상의 기세는 날로 드높아졌으니, 신은 아마 이것이 국가의 사소한 염려가 아닐 듯싶습니다. 지금 저하께서 만약 명절을 부식(扶植)하고 세도(世道)를 만회하고자 하신다면 저와 같은 대신을 결단코 장려하여 등용해서는 안되며, 김상로와 같이 권세를 탐하고 즐기는 무리도 역시 빨리 척출(斥黜)을 가하여, 호오(好惡)를 보여야 합니다. 그외에 여러 사람들은 모두 사적(仕籍)에서 지워버리고 전후의 말 때문에 죄를 얻은 대관(臺官)들은 한결같이 모두 서용(敍用)하여, 타락한 풍속을 권면하는 것을 그만둘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양역(良役)의 폐단은 그 형세가 반드시 나라를 망치게 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이 성상의 마음을 유도하시어, 구원하시려는 생각을 단단히 가지고 처음에는 호포(戶布)를 의논하다가 끝내 이에 감필(減疋)하셨으니, 매우 큰 혜택입니다. 만약 뭇 신하들로 하여금 위로 성심(聖心)을 본받아서 다방면으로 강구(講究)하여, 완전히 정당(停當)060)  한 지경에 이르도록 노력한다면, 거의 누적된 폐해를 정리해서 점차 실효를 거둘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구획하고 강정(講定)하는 것은 단지 번곤(藩閫)이 약간의 전곡(錢穀)을 거둬들이고, 주군(州郡)에서 약간의 여결(餘結)을 긁어들여 동쪽이 터지면 서쪽이 보수하는 데 지나지 않고 그래도 충족하지 않으면 또 별군관(別軍官)이란 명목(名目)을 만들어, 처음에는 세족(世族)의 잔예(殘裔)로부터 향품(鄕品)의 서얼(庶孽)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호칭은 비록 편오(編伍)와 다르지만 수포(收布)는 실로 첨정(簽丁)과 같았으니, 조삼 모사(朝三暮四)하는 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8도가 오오(嗷嗷)하여 피난짐을 지고 서로 바라보다가 짐승처럼 놀라고 새들처럼 흩어져 근심과 원망이 길에 가득합니다. 어떤 이는 ‘아무 고을의 관장(官長)이 봉변을 당했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아무 고을의 마을이 거의 텅 비었다.’고 말하니, 먼 지방의 풍문을 비록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감포(減布)의 효과는 드러나지 않고 수포(收布)의 원성은 지금 일어나게 되니, 민정(民情)의 좋아하지 않음을 역시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규모(規模)는 다른 나라와는 달라서 상민(常民)들은 이미 천역(賤役)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곤궁하여도 반드시 탐심을 내지는 않고 사대부들은 도리를 잘 알기 때문에 혹사(酷使)되어도 원망이 없습니다. 유독 저 두 계층의 중간에 위치한 자들은 이미 항산(恒産)이 없고 또 항심(恒心)이 없으므로, 평소에도 홀로 분수를 편안하게 지키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지금 마침내 한꺼번에 납포(納布)의 최과(催科)로 몰아넣으니, 그 형세는 결국 반드시 ‘곤란함이 극도에 달하면 난(亂)을 생각한다.’는 데에 이르고야 말 것입니다. 신은 그윽이 두렵게 여기고 근심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대저 풍족한 지방[饒藩]에는 저축된 물자가 적지 않은데 나라의 재정은 넉넉하지 못하니 그것을 가져다 쓰는 것이 해롭지 않으며, 넉넉한 고을에는 전결(田結)의 누락이 많아 법전(法典)과 어긋남이 있으니 역시 찾아서 거두는 것이 마땅하지만, 열조(列朝) 이래로 내버려두고 불문에 부친 것은, 탐욕스런 무리의 주머니 속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영곤(營閫)의 용도는 넓고 크며 주현(州縣)의 지출은 단서가 많으니, 반드시 재용(財用)이 항상 여유가 있게 한 후에야, 홍수나 가뭄 때의 주진(賙賑)의 물자와 요역(徭役)의 줄어든 수효를 역시 미루어 보충해서 일시(一時)의 민막(民瘼)을 풀어 줄 수가 있습니다. 또한 뜻밖의 위급한 변고가 있으면 더욱 재물이 없이는 일을 해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일체 찾아 거둬들이는 것만 일삼으니, 이것이 어찌 먼 장래를 경영하는 계획이겠습니까? 감필(減疋)의 명령이 이미 공포되었고 많은 백성들의 바람이 바야흐로 간절하니, 지금은 중지할 수가 없습니다. 진실로 마땅히 정신을 모아 가다듬어 좋은 계책을 연구하여 완전 무결하게 영구히 준행할 계획을 만들어야 하며, 이처럼 자질구레하게 주워 모아 되는 대로 처리해서 생민(生民)의 원망을 증폭시켜서는 안됩니다. 신은 본래 오활(迂闊)한 쓸모없는 선비로 시무(時務)를 알지 못하니, 어찌 훌륭한 말과 좋은 계책이 있어서 성조(聖朝)의 분발하시는 뜻을 우러러 도울 수 있겠습니까마는, 다만 듣건대, 성인(聖人)이 치도(治道)를 논한 것은 ‘쓰임새를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한다.[節用而愛人]’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당(唐)나라 조정에서 크게 변통할 적에는 반드시 주현(州縣)을 합치고 이원(吏員)을 줄이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습니다. 우리 조정 선배(先輩)들의 사무(事務)를 논한 것은 반드시 쓸데없는 군사를 줄이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였으니, 진실로 이 몇 마디 말에 대해서 심사 숙고해 본다면 어찌 흡족하고 지당한 계책이 없겠으며, 오늘날 급대(給代)의 수효를 충당하고 백년의 고질적인 폐단을 줄여서 사방의 민심을 단결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글이 들어가자,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니, 동궁(東宮)이 시좌(侍坐)하였다. 이존중을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가 석갈(釋褐)061)  할 적에 이미 면대하여 계칙(戒飭)하였는데, 이것이 무슨 일인가?"
하니, 이존중이 말하기를,
"신은 세록(世祿)의 신하로서 나랏일이 날로 잘못되어 가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서, 만번 죽음을 무릅쓴 채 이 글을 올렸습니다. 신이 권행(權倖)에게 거슬려 크나큰 화가 즉시 이르게 될 것을 모르지 않지만, 충분(忠憤)이 북받쳐서 마지못하여 이렇게 하였으니, 의리(義理)의 관건에 이르러서는 변파(辨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일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도 필시 《대훈(大訓)》을 보았을 터인데, 감히 신축년062)  ·임인년063)  의 일로써 원량(元良)에게 진달하는가?"
하니, 이존중이 말하기를,
"신의 글 뜻은 본래 《대훈》과는 부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그대가 감히 《대훈》에 부당하다고 말하는가? 이미 그대의 뱃속에 당심(黨心)이 꽉 들어차 있으니,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대가 병신년064)  의 유감스런 말을 은연중에 무신년065)  에 귀착시켰으니, 병신년이 남인(南人)과 무슨 관련이 있어서 그대가 지금 두 편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역적의 죄과(罪科)로 몰아넣으려 하는가?"
하였으니, 이존중이 말하기를,
"무신년의 흉당(凶黨)은 바로 천고의 큰 변고이므로 기사년066)  ·신미년067)   이후로부터 양성(釀成)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단지 그중에 포함된 자만을 거론하여 배척하였으니, 신이 언제 두 편을 다 몰아넣은 적이 있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가 스스로 판단한 것은 아닐 테고 필시 가리켜 시킨 사람이 있을 것이니, 과연 누구인가?"
하니, 이존중이 말하기를,
"신이 비록 보잘것없지만 직책이 대관(臺官)인데, 어찌 이와 같은 하교(下敎)를 하십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종성(李宗城) 등은 조제(調劑)하던 사람인데, 그대가 다 쫓아내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당심(黨心)이 없는 것인가?"
하니, 이존중이 말하기를,
"바로 지금 ‘조제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조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당(私黨)을 수립(樹立)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 사람’이라 말한 것은 김시위(金始煒)·조진세(趙鎭世)·심악(沈) 외에 한 사람은 누구인가?"
하니, 이존중이 말하기를,
"서지수(徐志修)가 합계(合啓)를 정계(停啓)시켰습니다."
하였다. 도승지 윤동도(尹東度)가 말하기를,
"그때에 서지수가 ‘정계하고자 한다.’고 운운(云云)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이 일 때문에 지색(枳塞)할 수가 있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대신(臺臣)을 좌천시켰다는 것은 누구를 두고 한 말인가?"
하니, 이존중이 말하기를,
"이민곤(李敏坤)입니다. 김상로(金尙魯)가 고을을 제수하면서 말하기를, ‘아무개가 아무 말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밖으로 내보낸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입을 다물라고 넌지시 일러주는 말이 정석(政席)에서 나오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일인가?"
하니, 이존중이 말하기를,
"김상로가 전조(銓曹)에 있을 때에 대간(臺諫)을 임명하면서 말하기를, ‘말하지 않는 것이 묘(妙)가 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양천(李亮天)이 과연 이리저리 비호(庇護)했다는 지목에 부합하는가?"
하니, 이존중이 말하기를,
"이양천이 스스로 말하기를, ‘선발(選拔)에 들게 되면 당연히 합계할 것이다.’ 하였는데, 세 번 대각(臺閣)에 들어가고 두 번 옥당(玉堂)에 들어가게 되어서는 결국 한마디 말도 없었으니, 그 마음이 어찌 이리저리 비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명채(曹命采)가 과연 음악을 울렸는가?"
하니, 이존중이 말하기를,
"신이 상서(上書)한 뒤에 다시 들으니, 과연 사실과 어긋났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기생을 끼고 놀았는가?"
하니, 이존중이 말하기를,
"영남(嶺南)은 바로 예의(禮義)의 고장입니다. 조명채가 성복(成服) 안에 기생을 끼고 행락(行樂)을 하였기 때문에, 남토(南土)의 사람들이 퍼뜨려 말하지 않음이 없으니, ‘행락(行樂)’을 ‘장악(張樂)’으로 잘못 썼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 마음으로 백성을 위해 몇 번이나 전(殿)에 임하였는데 그대가 감포(減布)를 그르다고 하니, 이것은 바로 백성을 부동(浮動)시키는 뜻이다."
하니, 이존중이 말하기를,
"신이 어찌 감히 감포를 그르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이진길(李晉吉)은 세상 형편을 따라 협잡(挾雜)을 하며 먼저 스스로 날뛰더니, 이제 이존중이 뱃속에 당심(黨心)이 꽉 들어차서 대료(大僚)를 무시하고 짓밟은 것이 이진길보다 한 갑절 더하다. 일필(一筆)로 그 형제(兄弟)를 결단냈으니, 이것을 차마 하는데 무엇을 차마 하지 못하겠는가? 이종성(李宗城)의 일도 역시 당심이다. 《대학(大學)》에 이른바 ‘사예(四裔)가 있는 곳으로 쫓아서 중국(中國)068)  에서 함께 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따위의 사람을 가리킨 것이다. 이존중을 거제부(巨濟府)에 귀양보내되 배도 압송(倍道押送)하라."
하였다.

 

수찬 이현중(李顯重)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고 상신 황희(黃喜)는 일대의 명상(名相)이었으나 그 당시 대각(臺閣)의 말이 잇달아 나왔는데, 세종조(世宗朝)께서는 대신(臺臣)을 너그러이 용납하셨습니다. 지금 전하(殿下)의 처분이 이와 같으시니, 신은 훗날에는 간신(諫臣)을 때려 죽이는 일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동궁(東宮)이 지금 막 시좌(侍坐)하시는데 전하께서 이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니, 빨리 반한(反汗)069)  을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기사년070)  ·신미년071)  의 일을 그가 어찌 감히 말한단 말인가?"
하였다. 이현중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매번 여러 신하들의 상소에서 문자(文字)를 들추어 꼬집어내어서 엄중한 하교(下敎)를 내리기까지 하시니, 신은 실로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수찬 이현중이 몸소 청대하여 당(黨)을 비호하는 것을 마음에 달갑게 여기고, 감히 ‘들추어 꼬집어낸다.’는 따위의 말을 방자하게 아뢰었으니,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라."
하였다.

 

좌의정 김약로(金若魯)가 도성(都城)을 나가서 명소(命召)를 들여보내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3월 3일 경자

서명신(徐命臣)을 대사간으로, 유언국(兪彦國)을 사간으로, 김문행(金文行)을 보덕으로, 한광조(韓光肇)를 문학으로, 이유수(李惟秀)를 겸 문학으로, 김치인(金致仁)을 교리로, 정홍순(鄭弘淳)을 부교리로 삼았다.

 

간원(諫院) 【 헌납 황합(黃柙)이다.】 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근래에 언로(言路)가 두절되고 사기(士氣)가 사그러들었습니다. 그런데 전 대사간 이존중이 분발해서 몸을 돌보지 않고 숨김없이 말을 다하여 〈조정이〉 고요하던 나머지에 풍채(風采)가 볼 만하였으니, 마땅히 너그럽게 수용하고 용서하여 무너져가는 풍속을 붙잡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대조(大朝)의 처분이 엄중하여 심지어는 먼 바다에 귀양보냄이 있기까지 하였으니, 청컨대 대조께 여쭈어 귀양보내라는 명령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동궁(東宮)이 따르지 않았다.

 

3월 3일 경자

부제학 윤급(尹汲)이 차자를 올리기를,
"이존중(李存中)은 젊어서부터 명망을 짊어진 선비로서 대단(臺端)의 우두머리가 되어, 우직한 충성에 북받쳐 숨김없이 말을 다하였으니, 강직한 기풍이 존중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진실로 마땅히 너그럽게 용납하고 용서해서 퇴패한 세도(世道)를 부지해야 될 터인데, 대조(大朝)의 처분이 지나치게 엄중하여 불러서 힐책하고 즉시 먼 바다로 귀양보냈으니, 이것이 어찌 성명(聖明)의 세상에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아! 언로의 열리고 닫힘은 실로 나라의 흥망에 관계되는 것이니, 결단코 경솔하게 꺾어서 국맥(國脈)을 손상시켜서는 안됩니다. 더구나 간의(諫議)의 중대함은 더욱 각별히 대우해야 하는데, 아침에 아뢰고 저녁에 귀양을 가 경황없이 서울을 떠났습니다. 모양은 보기 딱하고 사기(士氣)는 위축되었으니, 신은 밤을 지새우며 근심하고 벽을 맴돌며 탄식하였습니다. 짧은 차자를 대충 얽어서 그윽이 광구(匡救)의 뜻을 보태었으니, 위로 대조께 여쭈어 빨리 앞서의 교지(敎旨)를 거두시어, 곧은 선비들에게 말을 못하지 말게 하소서."
하였다. 이때 윤급이 병 때문에 정고(呈告)072)  하였는데, 이존중이 거제(巨濟)로 귀양갔다는 말을 듣고 바로 집에서 차자를 올려 극력 구원하였으나, 임금이 특별히 파직시켰다.

 

우승지 황경원(黃景源)이 상서(上書)하여, 대조(大朝)께 우러러 여쭈어 이존중을 귀양보내라는 명령을 환수하기를 청하였으나, 동궁(東宮)이 따르지 않았다.

 

3월 5일 임인

임금이 친히 대보단(大報壇)에서 망위례(望位禮)를 행하였다.

 

3월 6일 계묘

좌의정 김약로가 상서(上書)하여 면직(免職)하기를 바라니, 동궁(東宮)이 수서(手書)로 우악하게 답하여 승지를 보내 돈유(敦諭)하고, 그와 함께 오도록 하였다.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차자를 올리기를,
"좌의정 김약로는 지론(指論)이 공평하고 나라를 위하고 자기 자신은 잊어버리며, 호조 판서 김상로(金尙魯)는 어려운 일을 맡길 만하니, 이와 같은 사람들은 어찌 천하를 위해 함께 아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간신(諫臣)의 이른바 ‘대관(大官)이 녹이나 생각하고 비굴한 행동을 했다.[大官懷祿苟容]’라는 여섯 글자는 신의 몸에 해당되는 것이니, 빨리 물리쳐 주시어 공의(公議)에 사과하소서."
하니, 동궁이 우악하게 답하였다.

 

3월 7일 갑진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대사간 서명신(徐命臣) 및 정언 윤학동(尹學東)이 상서하여 이존중을 신구(伸救)하고, 빨리 성명(成命)을 거두기를 청하니, 동궁이 하령(下令)하기를,
"성상(聖上)의 참소를 미워하는 하교(下敎)가 엄정하시니, 두 대신(臺臣)의 장주(章奏)를 되돌려 주고 이런 따위의 협잡하는 장주는 받지 말라."
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연명으로 상달하여 장주(章奏)를 받지 말라는 명령을 환수하기를 청하니, 동궁이 그대로 따랐다.

 

3월 8일 을사

임금이 육상묘(毓祥廟)에 나아갔다.

 

3월 9일 병오

임금이 육상묘에 제사지내고, 저녁에 환궁하였다.

 

3월 11일 무신

우박이 내렸다.

 

3월 12일 기유

김정구(金鼎九)를 의금부에서 국문하였다. 임금이 영화당(映花堂)에 나아갔는데, 훈련 도감 포수(砲手)인 김정구(金鼎九)가 어전(御前)에 함부로 들어왔기 때문에 포도청(捕盜廳)으로 이송하였다. 김정구가 공초(供招)하기를,
"적도(賊徒)가 수안 군수(遂安郡守)와 체결하여 장차 서울을 범하려 한다."
하니, 마침내 추국(推鞫)을 행할 것을 명하였다.

 

정이검(鄭履儉)을 대사간으로, 김상구(金尙耉)를 사간으로, 정기안(鄭基安)을 헌납으로, 이유수(李惟秀)·이극록(李克祿)을 정언으로, 서명구(徐命九)를 대사헌으로, 신위(申暐)를 집의로, 홍중효(洪重孝)·이사조(李師祚)를 장령으로, 박상덕(朴相德)·이득종(李得宗)을 지평으로, 조돈(趙暾)을 부응교로, 신회(申晦)를 교리로, 홍낙성(洪樂性)을 부교리로, 이규채(李奎采)를 부수찬으로, 신위(申暐)를 겸 사서로, 조영국(趙榮國)을 동의금으로, 신민(申旼)을 충청 병사로, 최상형(崔尙衡)을 전라 우수사로 삼았다.

 

영남(嶺南) 유학(幼學) 박윤광(朴胤光)이 상서(上書)하여, 신라(新羅)의 시조왕묘(始祖王墓)에 묘표(墓表)를 세우는 것을 허락해 주기를 청하니, 동궁(東宮)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3월 13일 경술

홍익삼(洪益三)을 승지로, 이훈(李塤)을 집의로, 조돈(趙暾)을 사간으로, 권기언(權基彦)을 장령으로, 한광조(韓光肇)·채제공(蔡濟恭)을 지평으로, 유건(柳謇)을 헌납으로, 유건(柳健)을 정언으로, 유언민(兪彦民)을 필선으로, 박상덕(朴相德)을 문학으로, 홍봉한(洪鳳漢)을 좌윤으로 삼았다.

 

3월 14일 신해

임금이 친히 김정구(金鼎九)를 국문하였다. 김정구가 공초(供招)하기를,
"수안(遂安) 사람과 혐의와 원망이 있었기 때문에 말을 꾸며 고변(告變)한 것은 오로지 입소(入訴)의 계책을 인연하여 나왔습니다."
하고, 사람을 악역(惡逆)으로 무함한 것으로 승복하였다. 한 차례 형벌을 가하고 사형을 감면해 정배(定配)할 것을 명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사사로이 비호함을 마음에 달갑게 여기고 거만하게 명령에 응하지 않았으니, 대사헌 서명구(徐命九)와 장령 홍중효(洪重孝), 정언 이유수(李惟秀)를 체차(遞差)하고 모두 귀양보내는 율을 시행하라."
하였는데, 친히 국문할 때 부름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김시찬(金時粲)을 승지로 삼았다.

 

3월 15일 임자

헌부(憲府) 【지평 채제공(蔡濟恭)이다.】 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김정구(金鼎九)가 함부로 들어와서 사람을 무함한 것은 일마다 헤아릴 수가 없으니, 청컨대 왕부(王府)073)  로 하여금 법률에 따라 정형(正刑)하게 하소서. 일전에 본부(本府)에 개좌(開坐)074)  하지 말라는 하교를 해가 저물기 이전에 내리셨는데, 중관(中官)075)  이 지체하여 3경(三更)에 이르러서야 파좌(罷坐)하였으니, 청컨대 해당 중관을 종중 감처(從重勘處)하소서. 대신(臺臣)이 패초(牌招)를 어김으로써 귀양을 보내기까지 한 것은 죄는 가볍고 벌은 무거움을 면치 못하니, 청컨대 성명(成命)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동궁(東宮)이 따르지 않았다.

 

3월 16일 계축

우박이 내렸다.

 

3월 19일 병진

임금이 후원(後苑)에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으니, 의종 황제(毅宗皇帝)의 기신(忌辰)이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의종이 우리 나라가 성하지맹(城下之盟)076)  을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조금도 성내는 뜻이 없이 단지 일찍 구원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였으니, 명나라 조정의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메인다."
하고, 하교하기를,
"삼황(三皇)077)  을 보사(報祀)한 뒤에 오늘의 의종 황제의 기신(忌辰)에 후원에서 망배(望拜)하니, 향 연기가 북쪽으로 향하여 어슴푸레 용어(龍馭)078)  가 다시 내려온 것 같다. 지난 세월을 회상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적신다. 아! 해동(海東)의 한 모퉁이에 명나라가 아직 존재하고 있도다. 5월 초 10일은 고황제(高皇帝)의 기신이고 7월 21일은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기신이니, 마땅히 한결같이 예(禮)를 행하여 조그마한 정성이나마 표할 것을 의조(儀曹)에 분부하라. 아! 수염이 희어진 만년에 편안한 날이 항상 적으나, 만약 지금 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훗날 사왕(嗣王)이 나의 이런 마음을 생각해 준다면 어찌 다만 나만의 다행일 뿐이겠는가? 바로 우리 성조(聖祖)와 성고(聖考)의 존주(尊周)의 거룩한 덕을 본받는 것이니,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이다."
하였다.

 

3월 21일 무오

홍상한(洪象漢)을 대사헌으로, 심성진(沈星鎭)을 대사간으로, 남태혁(南泰赫)·이수관(李壽觀)을 장령으로, 황최언(黃最彦)·장주(張澍)를 지평으로, 한명여(韓命輿)·현광우(玄光宇)를 정언으로, 김선행(金善行)을 부응교로, 이이장(李彛章)을 부교리로, 박상덕(朴相德)을 수찬으로, 한광조(韓光肇)를 부수찬으로, 이위보(李渭輔)를 필선으로, 신회(申晦)를 겸 필선으로, 이규채(李奎采)를 겸 문학으로, 이철보(李喆輔)를 이조 참판으로, 조명리(趙明履)를 강원도 관찰사로, 이기진(李箕鎭)을 광주부 유수로, 신위(申暐)를 광주 시재 어사(廣州試才御史)로, 서지수(徐志修)를 수원 시재 어사(水原試才御史)로 삼았다.

 

3월 23일 경신

함경도 관찰사 이철보(李喆輔)의 유임을 명하였으니, 진휼(賑恤)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3월 25일 임술

김재로(金在魯)를 다시 영의정으로 삼았다.

 

유척기(兪拓基)를 판중추부사로, 한사득(韓師得)을 도승지로, 남태량(南泰良)을 이조 참판으로, 김치인(金致仁)을 교리로, 임상로(林象老)를 보덕으로, 조돈(趙暾)을 겸 보덕으로, 유한소(兪漢蕭)를 문학으로, 서명빈(徐命彬)을 지의금부사로, 이득종(李得宗)을 수찬으로 삼았다.

 

3월 26일 계해

헌부(憲府) 【지평 황최언(黃最彦)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무안 현감(務安縣監) 박수유(朴垂裕)는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터놓고 지낸 박징빈(朴徵賓)의 아들로 세상의 버림을 받았는데, 부임한 뒤에는 오로지 자기를 살찌우기를 일삼으니, 청컨대 영원히 사판(仕版)에서 지워버리소서."
하니, 상달한 대로 하게 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새로 급제한 조윤옥(趙潤玉)은 시(豕)와 해(亥)도 분별할 줄 모르는 인물로, 처음에 과장(科場)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호명(呼名)되었을 적에는 두루 찾아도 찾지 못하다가 나중에 반촌(泮村)에서 간신히 찾아냈으니, 일이 매우 해괴합니다. 청컨대, 유사(有司)로 하여금 사실을 밝게 조사하여 빼어 버리게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3월 28일 을축

집의 이훈(李塤)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일전에 삼가 대조(大朝)의 전교(傳敎)를 보니, ‘승지는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고 비국 당상도 함께 들어오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근래에 정석(鼎席)이 한결같이 비어 있고 빈대(賓對)도 오랫동안 폐지되었으니, 이번에 이 성교(聖敎)는 참으로 기무(機務)를 소통시키려는 뜻에서 나온 줄은 알지만, 다만 생각건대, 묘당(廟堂)의 체모가 중대하니, 대신(大臣)을 기다리지 않고 단지 비국 당상으로 하여금 입대(入對)하게 한 것은 끝내 구차한 데에 관계됩니다. 성지(聖旨)를 우러러 여쭈어 성명(成命)을 환수하소서. 헌부(憲府)의 관직은 관리의 부정을 규찰하여 바로잡는 것인데, 근래에는 이 직책에 있는 자들이 법사(法司)의 위엄을 빌어 여항(閭巷)에 원한을 풀려는 자가 빈번히 있습니다. 그런데 전 지평 채제공(蔡濟恭)은 어떤 중인(中人)의 분산(墳山)079)  을 빼앗으려다가 그에게 구타당하고 내쫓기게 되자, 스스로 반성할 줄은 모르고 세력을 믿고서 침학(侵虐)하여 여러 날을 가두어 두었으며, 추조(秋曹)080)  에 이송하여 속전(贖錢)을 함부로 거두어 대각(臺閣)에 수치를 끼쳤으니,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동궁(東宮)이 답하기를,
"비국 당상의 입시는 대조(大朝)께서 이미 하교하셨다. 채제공의 일은 상서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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