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4권, 영조 27년 1751년 7월

싸라리리 2025. 10. 2.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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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일 병인

오찬(吳瓚)·황합(黃柙)·윤학동(尹學東)·안윤행(安允行)을 문출(門黜)시키고, 이존중(李存中)을 정의현(旌義縣)에 이배(移配)시켰다. 이때 합계(合啓)한 여러 신하들이 금오(金吾)에서 서명(胥命)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비로소 엄중한 하교(下敎)를 내려 합계(合啓)를 수창(首唱)한 대신(臺臣)을 문출(門黜)의 율(律)로써 시행할 것을 명하고 또 안윤행·윤학동 두 사람에게 모두 문출을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존중은 바로 민백상의 선봉(先鋒)이고 합사(合辭)의 인로(引路)이다. 앞에는 황합이 있고 뒤에는 오찬이 있어 방자하게 사당(私黨)을 비호하니, 이존중의 기세(氣勢)를 미루어 알 수가 있다."
하고, 드디어 정의현으로 이배시키라는 명을 내렸으며, 황합·오찬에 대해서도 또한 문출을 시행하였다.

 

사마온공(司馬溫公)196)  의 《계고록(稽古錄)》을 간행(刊行)할 것을 명하였다. 우리 나라에는 일찍이 인본(印本)이 없었으며, 유척기(兪拓基)가 예전에 영남(嶺南)197)  에서 얻어 왔는데, 이때에 와서 간행할 것을 명하였다.

 

승지를 보내 영상과 좌상에게 돈유(敦諭)하였다.

 

7월 4일 무진

임집(任)을 응교로, 정휘량(鄭翬良)을 부제학으로, 이의암(李宜馣)을 지평으로, 성천주(成天柱)를 수찬으로, 조중회(趙重晦)를 겸 필선으로, 한광조(韓光肇)를 겸 우찬독으로, 홍상한(洪象漢)을 좌참찬으로, 홍계희(洪啓禧)를 동경연으로, 유한소(兪漢蕭)를 문학으로, 윤동도(尹東度)를 대사간으로,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을 사은 겸 동지 정사로, 이의벽(李義璧)을 남병사(南兵使)로, 남익령(南益齡)을 경상 우병사로 삼았다.

 

7월 5일 기사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민백상(閔百祥)이 말하기를, ‘나라의 역적을 다 토벌하지 못하고 임금의 원수를 다 갚지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통분(痛憤)한 생각이 간절한 탓으로 이처럼 너무 과격한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전하께서 지나치게 번뇌하시어 우울함이 풀어지지 않고 심지어는 성상의 몸을 아끼지 않고 지나치게 스스로 폄손(貶損)하는 데까지 이르니, 신은 그윽이 개연(慨然)히 통탄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면대(面對)하여 유시할 것이다."
하였다.

 

이조 판서 이천보(李天輔)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어제 정석(政席)에서 김시위(金始煒)를 승선(承宣)에 의망(擬望)하지 않은 일로 해서 대조(大朝)께서 전교(傳敎)하셨는데, 사지(辭旨)가 엄절(嚴截)하셨습니다. 김시위가 연좌(連坐)된 일이 있은 이후로부터 신이 외람되이 전지(銓地)에 있으면서 한번도 일찍이 검의(檢擬)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지금은 이름이 대신(臺臣)의 계달(啓達)에 있으니, 의망(擬望)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정례(政例)198)  입니다. 만일 엄명(嚴命)에 몰려서 갑자기 의망을 한다면 다만 정례의 있지 않은 바일 뿐만 아니라 신의 몸이 나뉘어 두 동강이가 나게 됩니다. 비록 중형(重刑)을 당한다하더라도 결코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왕세자(王世子)가 예사 비답을 내렸다.

 

오찬(吳瓚)을 삼수부(三水府)에 귀양 보냈다. 하교하기를,
"방(榜)의 먹물로 마르기 전에 당습(黨習)에 양양(揚揚)한 것이 오찬(吳瓚)이요, 이존중(李存中)을 두둔하고 민백상(閔百祥)의 효시(嚆矢)가 된 것도 오찬이며, 군부(君父)의 힘써 신칙(申飭)한 하교를 저버리고 그 형(兄)의 나라를 위한 마음을 배반한 것이 오찬이다. 여기에 한 가지만 해당되는 것이 있어도 함께 나라 일을 볼 수가 없는데, 더구나 이것을 겸한 경우이겠는가? 오찬을 삼수부(三水府)로 귀양보내되 밤낮을 쉬지 말고 가서 압부(押付)하라."
하였다.

 

7월 6일 경오

이정보(李鼎輔)를 좌윤으로, 심악(沈)을 형조 참판으로, 유언민(兪彦民)을 좌익선으로, 이중조(李重祚)를 교리로 삼았다.

 

왕세자(王世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召見)하였다.

 

조운규(趙雲逵)·안상휘(安相徽)·조명정(趙明鼎)을 승지로 삼았다.

 

예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에게 열조(列朝)의 어압(御押)을 모아서 첩(帖)을 만들 것을 명하고, 이어서 친히 소지(小識)를 지어 첩(帖)의 아래에 쓰게 하였다.

 

7월 8일 임신

임금이 태묘(太廟)를 전알(展謁)하였다.

 

7월 11일 을해

사문(四門)에서 영제(禜祭)199)  를 지냈으니, 가을비가 곡식을 손상시켰기 때문이었다.

 

7월 13일 정축

달이 견우성(牽牛星)을 범(犯)하였다.

 

김진상(金鎭商)을 부제학으로, 한광조(韓光肇)를 부수찬으로, 윤광찬(尹光纘)을 겸 사서로 삼았다.

 

7월 14일 무인

정기안(鄭基安)을 집의로, 임집(任)을 사간으로, 유만추(柳萬樞)·이택징(李澤徵)을 장령으로, 이제화(李齊華)를 헌납으로, 송문재(宋文載)·임원(任遠)을 정언으로, 장주(張澍)를 지평으로, 이명희(李命熙)를 부수찬으로, 신위(申暐)를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았다.

 

7월 15일 기묘

왕세자(王世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7월 17일 신사

임금이 탕춘대(蕩春臺)에 나아가 장사(將士)들의 활쏘기를 시험하고, 지나는 길에 육상묘(毓祥廟)를 배알하였다.

 

7월 19일 계미

임집(任)을 부응교로, 성천주(成天柱)를 겸 우익선으로, 윤광찬(尹光纘)을 좌찬독으로, 정이검(鄭履儉)을 대사간으로, 황정(黃晸)을 우윤으로, 이징서(李徵瑞)를 남병사(南兵使)로 삼았다.

 

간원(諫院) 【정언 임원(任遠)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종성(李宗城)을 안치(安置)하는 일과 정계(停啓)한 여러 신하들을 멀리 귀양보내는 일은 정달(停達)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이존중(李存中)이 종이 가득히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비록 협잡(挾雜)이 많기는 하지만 죄(罪) 위에 벌(罰)을 추가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청컨대, 이존중을 멀리 유배(流配)시키라는 전후의 하교를 환수(還收)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조(大朝)의 처분(處分)이 정대(正大)하니, 어찌 이와 같이 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7월 20일 갑신

왕세자(王世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헌부(憲府) 【지평 장주(張澍)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청컨대 이종성(李宗城)을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키고 전후(前後)로 정계(停啓)한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을 모두 극변(極邊)으로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고, 또 상달하기를,
"정언 임원(任遠)은 함부로 대선(臺選)에 통한 뒤 시배(時輩)에 달라붙어 사욕(私慾)을 추구해 사당(私黨)을 비호하여 급급히 정달(停達)하였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특지(特旨)로써 지평 장주(張澍)를 진도군(珍島郡)에 귀양보냈다.

 

7월 21일 을유

어떤 별이 하고성(河鼓星) 아래로 지나갔다.

 

임금이 후원(後苑)에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으니,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기신(忌辰)이기 때문이었다. 하교하기를,
"아! 우리 나라를 재조(再造)하신 덕(德)은 하늘과 동일하게 크니, 다만 망배(望拜)만을 행해서야 어찌 감회를 펼칠 수가 있겠는가? 내일 예관(禮官)을 보내서 선무사(宣武祠)200)  에 치제(致祭)토록 하라."
하였다. 승지 권일형(權一衡)을 명하여 황단(皇壇)의 향로(香爐)를 봉심(奉審)하도록 하니, 대개 금년에 동지사(冬至使)로 갔던 사행(使行)이 얻어 온 것이었다. 권일형이 돌아와 아뢰기를,
"향로의 전면에는 ‘대명(大明) 선덕년(宣德年)에 제조(製造)했다.’고 쓰여 있고 향로의 뒷면에는 ‘내단 교사(內壇郊社)’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는데, 이끼[苔]가 짙게 끼어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홍계희(洪啓禧)는 말하기를,
"주전소(鑄錢所)에 향로를 판매하는 자가 있는데 또한 명(明)나라 선덕(宣德) 연간에 제조한 것입니다."
하고, 도제조 김약로(金若魯)는 말하기를,
"향로가 적으면 마땅히 향합(香盒)으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져올 것을 명하였다.

 

전 장령 유건(柳謇)을 기장현(機張縣)에 귀양보냈다. 하교하기를,
"지난번에는 이존중(李存中)이 음악(音樂)을 연주한 명목으로써 조명채(曹命采)를 배척하였는데, 이번에는 유건이 또 지난날 정계(停啓)한 일로써 조명채를 비난하여 배척하니 그 마음이 불미(不美)스럽다. 법(法)에 종사하는 몸으로서 소중한 것을 돌아보지 않고 신하의 직분이 있다고 말을 하니, 유건을 기장현(機張縣)에 귀양보내라."
하였다.

 

7월 22일 병술

달이 목성(木星)을 범(犯)하였다.

 

사직 박필정(朴弼正)·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그 여러 일족들을 인솔하고 상서(上書)하기를,
"숭덕전(崇德殿)201)  의 위판(位版)에 단지 신라 시조(新羅始祖)라고만 쓰고 왕자(王字)를 쓰지 않았으니, 청컨대 위판 및 비(碑)에 ‘신라 시조왕(新羅始祖王)’이라 쓰고 비문(碑文)도 또한 숭인전(崇仁殿)202)  ·숭의전(崇義殿)203)  의 준례에 따라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7월 24일 무자

어떤 별이 천진성(天津星) 아래로 지나갔고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7월 26일 경인

도정(都政)204)  을 행하여 이후(李)를 대사간으로, 이현조(李顯祚)를 정언으로, 이창유(李昌儒)를 사간으로, 이일제(李日躋)를 좌윤으로, 임집(任)을 좌익선으로, 이명희(李命熙)를 겸 우찬독으로, 한광조(韓光肇)를 부교리로, 윤광찬(尹光纘)을 북평사(北評事)로 삼으니, 이조 판서 이천보(李天輔)와 병조 판서 홍계희(洪啓禧)의 정사(政事)이었다.

 

이조(吏曹)에서 아뢰기를,
"숭덕전(崇德殿)에 설치한 전감(殿監)을 연한을 기준하여 영(令)으로 승진시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그 적손(嫡孫)으로서 장문(狀聞)하게 하여 차하(差下)하게 하되 한결같이 숭인전(崇仁殿)의 준례에 따라 정식(定式)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대개 영남(嶺南)의 유생(儒生) 박윤광(朴胤光) 등의 상서(上書)로 인하여 청한 것이다.

 

7월 29일 계사

왕세자(王世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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