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4권, 영조 27년 1751년 9월

싸라리리 2025. 10. 2.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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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 을축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광주 유수(廣州留守) 이기진(李箕鎭)을 소견(召見)하니, 이기진이 한봉도(汗峰圖)를 올리고 말하기를,
"한봉(汗峰)은 남한(南漢) 성중(城中)을 굽어보는 곳으로 영돈녕이 수어사(守禦使)가 되었을 때 한봉에다가 성(城)을 쌓았는데, 한쪽은 쌓지 않았기에 지금 도면(圖面)을 만들어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도제조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이기진의 말을 들으면 쌓지 않은 곳이 5백 보(步)가 되니 축조하기가 어렵지 않고 양쪽 편에도 또한 돈대(墩臺)를 쌓으면 좋다고 하는데 영돈녕은 말하기를, ‘돈대를 쌓는 것은 좋으나 다시 한쪽만 쌓는다면 그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하고, 이기진은 말하기를,
"도적(盜賊)이 성(城)을 쌓지 않은 곳으로부터 올라올 수 있습니다. 혹시 성(城)을 지킬 경우가 있다면 한봉을 지키는 병사들은 바로 죽을 곳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그 한쪽을 쌓고 또 돈대(墩臺)를 쌓아서 지킨다면 적병(賊兵)이 감히 올라오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봉의 성을 쌓지 않은 곳이 골짜기인가?"
하였다. 이기진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장신(將臣)으로 하여금 가서 소상하게 살펴보게 한 연후에 축조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경(卿)에게 맡겼으니, 하필 다시 장신(將臣)으로 하여금 보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황정(黃晸)을 함경도 관찰사로, 조관빈(趙觀彬)을 강화 유수로, 심발(沈墢)을 집의로, 성천주(成天柱)를 겸 필선으로, 윤동성(尹東星)을 사서로, 이익정(李益炡)을 예조 판서로, 원경하(元景夏)를 겸 세손부로 삼고, 이이장(李彛章)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9월 6일 기사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관무재(觀武才)214)  를 하였는데, 무릇 4일만에 끝마쳤다. 이 날 문신(文臣)의 정시(庭試)도 겸하여 시행하여 김한철(金漢喆) 등 네 사람을 뽑았다.

 

9월 9일 임신

우박(雨雹)이 내리고 천둥하였다.

 

성천주(成天柱)를 사간으로, 임집(任)을 부응교로, 정홍순(鄭弘淳)을 부교리로, 김치인(金致仁)을 부수찬으로, 유언술(兪彦述)을 보덕으로, 김선행(金善行)을 겸 보덕으로, 윤득양(尹得養)을 좌찬독으로, 이춘제(李春躋)를 공조 판서로, 신만(申晩)을 판윤으로 삼았다.

 

9월 10일 계유

조운규(趙雲逵)를 도승지로 삼았다.

 

9월 11일 갑술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부응교 임집(任)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진계(陳戒)하니, 왕세자(王世子)가 답하기를,
"마음이 몹시 늠척(懍惕)하니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날 임금이 수성 윤음(守城綸音)을 지어서 내렸는데, 윤음에 이르기를,
"수성 절목(守城節目)을 아직까지 반포(頒布)하지 않았으니, 도성(都城)의 사서(士庶)들이 어떤 부(部)가 어느 영(營)에 속하고 어떤 방(坊)이 모자(某字)의 안에 속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설령 징소(徵召)함이 있게 되면 혼륜(混淪)·착잡(錯雜)하여 사율(師律)215)  을 위반해 범(犯)할 것이니, 이것은 백성을 위한다는 뜻이 가르치지 않고 사율을 범하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그 절목(節目)을 첨가 윤색(潤色)하여 오부(五部)에 간포(刊布)하게 하여 사서로 하여금 사변이 없을 때는 소속된 영(營)과 지켜야 할 곳을 상세히 알게 하고, 혹시 사변이 있어서 징소(徵召)할 때는 부관(部官)을 따라 첩(堞)216)  에 오르게 하라. 비록 그러나 첩에 올라갈 때는 성(城)을 지키는 도구가 시·석(矢石)에 지나지 않으니 궁시(弓矢)와 조총(鳥銃)이 있는 자는 이것을 가지고 올라가겠지만, 이 두가지가 없는 자들은 마땅히 돌[石]을 가지고 올라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사서들이 그 임시의 편의(便宜)에 따라 해야 할 것이니 어찌 미리 지휘(指揮)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아! 사서들이 능히 나의 뜻을 알 수가 있겠는가? 옛적에 촉한(蜀漢)의 소열 황제(昭烈皇帝)217)  는 한 조그마한 성(城)의 백성도 오히려 차마 버리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도성(都城)의 누십만(累十萬)의 사서들은 바로 옛날에 애휼(愛恤)하던 백성이니, 어찌 차마 버리고 홀로 갈 수가 있겠는가? 이것으로써 생각을 한다면 모든 백성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한다고 할 수가 있다. 이번 이 하교(下敎)의 의도(意圖)는 실상 백성을 위한 것이다. 지금 비록 원기(元氣)와 정신이 피곤하지만 도성(都城)을 지키려는 뜻은 저 푸른 하늘에 질정할 수 있으니, 설혹 이런 일이 있다면 내가 먼저 기운을 내서 성위의 담에 올라가 백성을 위로할 것이다. 만일 근거없는 의논으로 인하여 그 지키는 바가 흔들린다면 이는 다만 우리 백성들을 속이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이것은 내 마음을 속이는 것이니,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 인간 반포한 것은 늘 신실함이 부신(符信)과 같으니 아! 우리 사서들은 과인(寡人)의 뜻을 헤아려 달라."
하였다. 이에 앞서 병인일(丙寅日)에 절목(節目)을 지을 것을 명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비로소 반포(頒布)하였다.

 

9월 12일 을해

정원(政院)에서 천둥의 이변으로써 진계(陳戒)하니, 왕세자(王世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9월 14일 정축

한억증(韓億增)을 대사간으로, 성천주(成天柱)를 교리로 삼았다.

 

9월 15일 무인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왕세자(王世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9월 17일 경진

윤동준(尹東浚)을 대사간으로, 남태혁(南泰赫)을 사간으로, 조중직(趙重稷)을 집의로, 이규휘(李奎徽)·남학종(南鶴宗)을 장령으로, 이수봉(李壽鳳)을 정언으로, 이현조(李顯祚)를 지평으로, 윤상임(尹尙任)을 수찬으로, 신회(申晦)를 승지로 삼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함경 감사 황정(黃晸)이 청대(請對)하고 입시(入侍)하여 북관(北關)의 흉황(凶荒)한 상황을 남김없이 진달하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영남과 관동의 곡식을 구획(區劃)하여 진자(賑資)에 이급(移給)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교제창(交濟倉)이 있는데, 요즈음 해마다 다급함을 고(告)하여 영남의 곡식을 운반해 가려 하니,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금년에 또 이와 같으니, 겨우 살아난 우리 백성을 어찌 구제할 수 있겠는가? 마치 아픔이 내 몸에 있는 것 같도다. 삼명일(三名日)218)  의 방물(方物)·물선(物膳)을 정봉(停封)하고 가미(價米) 및 주창(州倉)의 비국(備局)에서 구관(勾管)하는 옛 봉미(捧米) 가운데 남은 것들을 가지고 모조리 진자(賑資)에 보태도록 하며, 금년의 납육(臘肉)도 또한 정봉(停封)하라."
하였다.

 

9월 18일 신사

지진(地震)이 있었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정시(庭試)와 전시(殿試)를 행하니, 동조(東朝)의 존호(尊號)를 가상하고 임금의 환후가 평복(平復)되며, 왕세손(王世孫) 책봉(冊封) 및 환후(患候)가 평복(平復)되는 등 합하여 네 가지 경사가 겹쳤기 때문이다. 윤득우(尹得雨) 등 20인을 뽑았다.

 

9월 20일 계미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9월 23일 병술

전 승지 조명정(趙明鼎)을 삼수부(三水府)에 귀양보냈다. 지난번에 연석(筵席)에서 아뢰는 것이 상세히 살피고 하지 않은 것으로써 엄중한 교지(敎旨)를 입고 체직(遞職)되었는데, 그 뒤에는 대신(大臣)이 죄(罪)를 청하지 않은 것으로써 연달아 엄중한 하교를 내렸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로 삭출(削黜)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오히려 그 처벌이 가볍다는 것으로써 꾸짖는 하교가 있었다. 이때에 와서 도제조 김약로(金若魯)가 아뢰기를,
"전하(殿下)께서 즉시 처분하지 않으시고 단지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만을 내리니, 신은 실로 개탄스럽게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삼수부(三水府)로 귀양보내라는 명을 내렸다. 하교하기를,
"암아(媕婀)219)  한 대신(臺臣)은 모두 파직시켜 서용하지 말고 뒤에 제배(除拜)한 대신도 모두 고신(告身)을 빼앗는 형률(刑律)을 시행하라."
하였다.

 

9월 24일 정해

어떤 별이 삼성(參星)·기성(旗星)의 아래로 지나갔다.

 

윤봉구(尹鳳九)를 집의로, 김상구(金尙耉)를 사간으로, 안치택(安致宅)을 지평으로, 최규태(崔逵泰)를 정언으로, 윤상임(尹尙任)을 부교리로, 조중회(趙重晦)를 겸 우찬독으로, 신사건(申思建)을 호조 참판으로 삼았다.

 

9월 25일 무자

조돈(趙暾)을 승지로, 김상석(金相奭)을 대사간으로, 성천주(成天柱)를 사간으로, 박창윤(朴昌潤)을 헌납으로, 이의암(李宜馣)·박첨(朴)을 정언으로, 정홍순(鄭弘淳)을 수찬으로, 윤광찬(尹光纘)을 겸 필선으로, 유언국(兪彦國)을 보덕으로, 정홍순(鄭弘淳)을 겸 문학으로, 윤상임(尹尙任)을 우익선으로, 이장하(李長夏)를 지평으로 삼았다.

 

예문 제학 이천보(李天輔)에게 반궁(泮宮)에서 시사(試士)할 것을 명하여 이우(李堣)를 뽑아서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온성(穩城)에 들쥐가 있어 인가(人家)에 피해를 끼쳤는데, 사람의 머리털과 피부를 물어 뜯고 혹은 사람의 눈을 할퀴기도 하여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였다.

 

9월 26일 기축

어떤 별이 옥정성(玉井星)의 아래로 지나갔다.

 

9월 27일 경인

정언 이의암(李宜馣)이 상서(上書)하기를,
"이증(李增)의 역절(逆節)이 환히 드러났는데 법(法)을 집행하는 신하가 단지 천극(栫棘)만을 청한 것은 잘못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대조(大朝)께 앙품(仰稟)하여 왕법(王法)을 바르게 하여 신인(神人)의 분노를 풀어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와 같은 청은 자못 몹시 한심(寒心)한 일이다."
하였다.

 

고려(高麗)의 두문동(杜門洞) 72인(人)의 충신(忠臣)에게 제사(祭祀)를 지내도록 명하였으니, 개성 유수 서종급(徐宗伋)의 장문(狀聞)으로 인한 것이었다. 또 어필(御筆)로서 ‘고려 충신이 지금도 그 명성이 남아 있으니 특별히 그 동(洞)에 세워 그 절개를 표창한다.[勝國忠臣今焉在 特竪其洞表其節]’는 열 네 글자를 써서 내리고 비(碑)에 새겨서 세울 것을 명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두문동 72인 가운데 이제 단지 임(林)·조(曹) 두 성(姓)이 있을 뿐이라고 하니, 매우 개탄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두 성(姓) 가운데서 직임(職任)을 감당할 수 있는 자는 해부(該府)로 하여금 장문(狀聞)하게 하여 즉시 조용(調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8일 신묘

간원(諫院) 【정언 박첨(朴)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전 대사간 이존중(李存中)을 풀어 주는 일을 그대로 두라는 하교와 절도(絶島)에 이배(移配)시키라는 하령(下令)은 그윽이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이존중의 직언(直言)은 꺼리지 않아 옛 쟁신(諍臣)의 바른말하는 풍도(風度)에 부끄러움이 없는데, 대조(大朝)의 일시(一時)의 처분(處分)은 비록 칙려(飭勵)하는 의도에서 나왔지만 어찌 반드시 물간 사전(勿揀赦前)220)  하여 끝내 영해(嶺海)의 귀신으로 삼으려는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나라의 경사가 양일(洋溢)하여 큰 은택(恩澤)이 널리 미치고 있습니다. 이 광탕(曠蕩)의 은전(恩典)으로 인하여 석방(釋放)하라는 청을 준허(準許)한다면 성상의 뜻을 잘 받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저하(邸下)의 직언(直言)을 용납하시는 거룩한 뜻이 잠깐 싹트다가 곧바로 막혀서 명령이 전도(顚倒)되니 보고 듣는 이마다 모두 놀라고 있습니다. 저하께서 만일 대조께 품의(稟議)하지 않은 것으로써 미안(未安)하게 여기신다면 어찌하여 문침(問寢)할 때 종용(從容)히 도달(導達)하여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리지 않으십니까? 청컨대, 전 대사간 이존중을 멀리 유배시키라는 하령을 환수(還收)하소서."
하였으나, 왕세자(王世子)가 따르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시세(時勢)에 붙좇아 방자(放恣)하고 무엄(無嚴)하니, 그것이 원량(元良)을 위하고 대각(臺閣)을 맑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마땅히 이 사람을 먼저 해야 할 것이다. 정언 박첨(朴)을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하라."
하였다.

 

9월 29일 임진

왕대비(王大妃)의 탄일(誕日)을 맞아 임금이 왕세자(王世子)와 백관(百官)을 인솔하고 진하(陳賀)하였다.

 

9월 30일 계사

천둥하고 번개가 쳤으며, 우박(雨雹)이 내렸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첫번째 정사(呈辭)를 하니, 왕세자가 허락하지 않고 수서(手書)로써 하답(下答)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문신(文臣)의 한학강(漢學講)을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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