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갑오
봉조하(奉朝賀) 윤양래(尹陽來)가 졸(卒)하였다.
8월 2일 을미
명천현(明川縣)·부령부(富寧府)·온성부(穩城府)에 들쥐[田鼠]가 여진(女眞)의 경계로부터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넘어왔는데 부리는 길고 꼬리는 짧았다. 온 들판에 가득하여 낮에는 땅속에 들어가 숨어 있고 밤에는 밭 사이로 나와 서직(黍稷) 등 여러 곡식을 혹은 씹어 놓기도 하고 혹은 꺾어 놓기도 하여 한 줄기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8월 3일 병신
황해도(黃海道)의 문화현(文化縣) 등 고을에 우박(雨雹)이 왔는데, 크기가 계란(鷄卵)과 같아 화곡(禾穀)이 모조리 최박(摧剝)을 당하였다.
8월 4일 정유
남태혁(南泰赫)을 사간으로, 이광식(李光湜)을 집의로, 여선응(呂善應)을 장령으로, 박창윤(朴昌潤)을 헌납으로, 이극록(李克祿)을 정언으로, 신만(申晩)을 예조 판서로, 권적(權𥛚)을 좌빈객으로, 한광조(韓光肇)를 겸 문학으로, 이양천(李亮天)을 겸 사서로, 이이장(李彛章)을 수찬으로, 원경하(元景夏)를 지경연으로, 김진상(金鎭商)을 좌부빈객으로, 김윤(金潤)을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삼았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질병이 있어 향리(鄕里)로부터 도성(都城) 안에 들어오니, 어의(御醫)를 보내 간병(看病)하였다.
8월 6일 기해
임금이 명릉(明陵)을 전알(展謁)하고 박상덕(朴相德)을 승지로 삼았다.
8월 13일 병오
임금이 편치 않아 약원(藥院)에서 윤직(輪直)하였다.
8월 14일 정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홍문 제학 원경하(元景夏)가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중신(重臣)은 무슨 책(冊)을 가지고 왔는가? 반드시 《자성편(自省編)》일 것이다."
하였다. 원경하가 책을 가지고 앞으로 나가 말하기를,
"성상의 마음이 격뇌(激惱)하시어 항상 ‘불효(不孝)·부제(不悌)’로써 하교(下敎)를 하시니 이것은 신자(臣子)의 차마 들을 수 있는 바가 아닌데, 뭇 신하들이 한 사람도 환수(還收)를 청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감히 이 책(冊)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시험삼아 나를 위해 읽어보라."
하였다. 원경하가 읽다가 ‘세상에 어찌 형제(兄弟)가 없겠는가?’ 하는 글귀에 이르러 아뢰기를,
"이밀(李密)205) 의 진정표(陳情表)를 읽고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사람의 자식이 아닌데, 신은 이 《자성편》을 읽고서 감격(感激)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인신(人臣)의 마음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신이 어찌 감히 아첨하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장(章)은 수십 항(行)에 지나지 않지만 성상의 효제(孝悌)의 덕(德)이 일성(日星)처럼 밝게 게시되었습니다."
하고, 이어서 〈불효 부제(不孝不悌)라는〉 ‘4자(四字)’의 하교를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네 글자는 민백상(閔百祥)의 네 글자와 같은가?"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신의 네 글자는 바로 ‘불효 부제(不孝不悌)’의 하교이고 민백상의 네 글자는 바로 ‘성무 미설(聖誣未雪)’인 것이니, 지금 성상께서 편찮으신 것[違豫]은 실은 여기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은 능히 내가 병이 난 연유를 안다."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이 책에서는 성상의 효제(孝悌)의 덕(德)을 볼 수가 있고 또한 경종[景廟]의 우애(友愛)의 덕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제 어찌 한두 신하의 망령된 말에 격로(激怒)를 하시어 동조(東朝)께 우려를 끼치십니까? 전하께서 만일 한번 이 문귀(文句)를 들으신다면 반드시 성상의 답답하신 마음이 풀리실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시험삼아 다시 읽어 보라."
하였다. 원경하가 다시 읽다가 ‘황형 지덕(皇兄至德)’의 글귀에 이르러 눈물이 떨어지고 목이 메어 제대로 음성을 내지 못하며 말하기를,
"이 글을 한번 읽으면 누군들 감격하여 울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득재(尹得載)는 《자성편》으로써 《서경》의 전모(典謨)206) 에 비교하는데 나는 몹시 부끄럽게 여긴다."
하였다. 원경하가 또 말하기를,
"민백상의 상서(上書) 가운데의 네 글자는 그가 창설(刱說)한 것이 아니고 고 상신 민진원(閔鎭遠)의 수차(袖箚)에도 또한 이 네 글자가 있는데, 신의 어리석은 소견은 고 상신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러므로 다만 엄중하게 징토(懲討)하는 것으로써 의리(義理)의 주재(主材)로 삼았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신의 오랜 친구들이 간혹 신이 완론(緩論)을 하는 것으로 의심을 하기도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 상신도 또한 단단(斷斷)한 정성이었으니, 내가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주서(注書)에게 명하기를,
"상세히 기록하라."
하고, 하교하기를,
"일변(一邊)의 사람들은 경종[景廟]께서 편찮으신 것[違豫]을 모르고 강건(康健)하신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아무런 연고도 없이 대리(代理)하는 것으로 의심을 하였다. 심지어는 효경(梟獍)207) 의 무리가 합문(閤門)을 닫은 이후에 이광좌(李光佐)가 이태좌(李台佐)에게 편지를 보내어 스스로 말하기를 캄캄한 길을 지팡이로 더듬으며 간다.[㝠行摘埴]라고 한 일까지 있었다는 것은 대개 이런 까닭이다. 일변(一邊)의 사람들은 경묘를 섬긴 것이 오래지 않았기 때문에 대개 이와 같은 자가 많이 있었다."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근일에는 어찌 이와 같은 자가 있겠습니까? 윤득재(尹得載)도 또한 일찍이 개연(慨然)히 신에게 말하기를, ‘만일 내가 승지(承旨)가 되었다면 마땅히 명백하게 진달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고, 부제조 조운규(趙雲逵)는 말하기를,
"신의 심사(心事)도 또한 윤득재(尹得載)와 동일합니다. 매양 서로 만나면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득재는 바로 윤유(尹游)의 아들이기 때문에 능히 이와 같은 것이다. ‘위예(違豫)’라는 두 글자는 내가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마는, 대개 황형(皇兄)의 지극한 덕(德)을 표양(表揚)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현일(李玄逸)의 죄목(罪目) 가운데의 ‘적서(嫡庶)를 분명히 하라.’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하였는데 김성탁(金聖鐸)을 국문(鞫問)할 때에 일기(日記)를 가져다 보니 진실로 몹시 음참(陰慘)하였다. 국가에 있어서나 사가(私家)에 있어서나 이와 같은 옛 제왕(帝王)이 만나지 않았던 바를 만나게 되니 가슴이 아팠다. 황형(皇兄)이 일찍이 내가 강독(講讀)하는 데에 와서 듣고자 할 때 이것을 저지하는 자가 있으면 하교하기를, ‘내가 우리 아우의 독서(讀書)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데 누가 감히 나를 저지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또 대점(大漸)의 시기에 지필(紙筆)을 찾자 좌우(左右)에서 드리지 않았는데, 이는 필시 나에게 하교하는 바가 있고자 하였는데 결국 못하신 것으로서 이것이 내가 지극히 가슴아프게 생각하는 바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민 봉조하(閔奉朝賀)의 ‘군무 미설(君誣未雪)’이라는 말은 비록 나라를 위한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나 ‘무(誣)’라는 한 글자를 어찌 사용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을 질병으로 인해 면직(免職)시키고 영돈녕(領敦寧)으로 삼았다.
엄우(嚴瑀)를 대사간으로, 임집(任)을 집의로, 이창유(李昌儒)를 사간으로, 이명희(李命熙)를 헌납으로, 여선응(呂善應)을 장령으로, 유건(柳健)을 지평으로, 남태회(南泰會)를 정언으로, 한광조(韓光肇)를 수찬으로, 정익량(鄭益良)을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8월 15일 무신
장령 정광운(鄭廣運)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에 헌신(憲臣)이, 고 참판 이수징(李壽徵)의 아들과 손자들을 대선(臺選)에서 삭제해 버리라는 청이 있어, 아뢴 대로 따름을 입기까지 하였습니다. 대저 이수징은 실로 여러 사람을 따라서 계품(啓稟)에 참여한 일이 있었으나, 그 자신에 있어서는 오히려 잠깐 귀양갔다가 곧바로 서용(敍用)되어 직질(職秩)이 옛날과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근 백년 뒤에 죄를 추가로 처벌하여 그 아들과 손자들에게 미치기까지 한다는 것은 어찌 너무 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환수(還收)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삼사(三司)의 합계(合啓)는 누차 발론하였다가 누차 정지하여 해를 넘기고 세월이 지났으니 실로 갑자기 처음 발론한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선후(先後)·경중(輕重)의 구별이 있어야 하지만 견벌(譴罰)은 너무 지나치니 공평함을 상실한 결과를 면치 못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우연히 윤득재(尹得載)를 만났더니, 그 전관(銓官)의 형세를 빙자하여 이익으로 유혹하고 위세(威勢)로 위협하여 신으로 하여금 그 사당(私黨)에 빌붙어서 공의(公議)를 배격하게 하였습니다. 그 같은 용렬한 자로써도 오히려 능히 사람을 유혹하여 위협함이 이와 같으니 세도(世道)가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환수(還收)하는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그 아래의 말들은 은연중에 다시 협잡(挾雜)하는 마음을 행하려는 것인지,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였다.
8월 16일 기유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화상(畵像)에 치제(致祭)할 것을 명하였으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8월 17일 경술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친히 향과 축문을 전(傳)하였으니, 숭릉(崇陵)의 기신(忌辰)이 하루 뒤로 다가온 때문이었다.
예조(禮曹)에서 성상의 환후(患候)가 평복(平復)하신 것으로써 고묘(告廟)하고 반사(頒赦)하고 진하(陳賀)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8월 18일 신해
빈청(賓廳)에서 재차 계품(啓稟)하여 빨리 해조(該曹)의 청(請)을 윤허하여 응당 행해야 할 예(禮)를 거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8월 19일 임자
특지(特旨)로 윤광의(尹光毅)를 이조 참의에 임명하였다.
북도 어사(北道御史) 이이장(李彛章)이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묻기를,
"관동(關東)의 곡물(穀物)이 과연 시기에 맞추어 도착되었는가?"
하니, 이이장이 말하기를,
"3월 초순(初旬)에 비로소 배[船]가 출발하여 17일에 도착되었습니다. 가고 옴이 매우 빨랐기 때문에 진정(賑政)이 잠시라도 끊김이 없습니다. 신이 돌아올 때 북도(北道)의 백성들이 노인(老人)을 부축하고 어린이를 이끌고 와서 신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이 다 우리 주상이 내리신 은혜입니다.’ 하면서 모두 다 눈물을 흘리면서 온전히 살려준 덕택에 감사해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수심(愁心)에 잠긴 안색으로 말하기를,
"북도의 백성들이 과연 지금까지 그 임금을 잊지 않고 있으나 어찌 오늘날 내 병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겠는가?"
하고, 이어서 어사(御史)의 서계(書啓) 별단(別單)을 올릴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일어나 꿇어앉아 말하기를,
"한 지방(地方)의 백성의 목숨을 내가 공경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친히 받아 자리에 놓은 뒤 하교하기를,
"회령 부사(會寧府使) 김윤(金潤)은 잘 다스리고 잘 진구(賑救)하여 한 도(道)의 가장 우수한 치적(治績)이 되니, 특별히 새서 표리(璽書表裏)를 하사(下賜)하고, 경성 부사(鏡城府使) 김우철(金遇喆)과 경흥 부사(慶興府使) 홍중일(洪重一)은 각각 숙마(熟馬)를 하사하고, 잘 다스리지 못한 수령(守令) 이정현(李鼎賢) 등은 각각 그 죄(罪)로써 처벌하라."
하였다.
8월 20일 계축
윤득재(尹得載)를 대사간으로, 이이장(李彛章)을 사간으로, 정기안(鄭基安)을 집의로, 이홍직(李弘稷)을 헌납으로, 김조윤(金朝潤)·이만회(李萬恢)를 지평으로, 이극록(李克祿)을 정언으로, 윤광찬(尹光纘)을 교리로, 한광조(韓光肇)를 겸 우찬독으로, 윤득양(尹得養)을 사서로 삼았다.
8월 21일 갑인
정익하(鄭益河)를 형조 판서로, 서명신(徐命臣)을 대사간으로, 이명희(李命熙)를 겸 사서로, 박성원(朴盛源)을 사서로 삼았다.
지경연(知經筵) 원경하(元景夏)가 차자(箚子)를 올려 성궁(聖躬)의 효제(孝悌)의 덕(德)을 성대하게 진달하고, 이어서 ‘불효 불제(不孝不悌)’라는 네 글자의 하교를 환수(還收)할 것을 요청하니,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고 되돌려 주었다. 원경하가 재차 차자를 올려 거듭 청하였으나, 또한 도로 되돌려 줄 것을 명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하교하기를,
"사실(私室)에서 수작(酬酢)하는 것은 비록 마음에 언짢은 생각을 가질 수도 있겠으나 어찌 감히 공조(公朝)에서 감정(憾情)을 드러낼 수가 있겠는가? 전 장령 정광운(鄭廣運)을 영원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5일 무오
이광식(李光湜)을 집의로, 한광조(韓光肇)를 교리로, 이양천(李亮天)을 좌찬독으로, 원경하(元景夏)를 판돈녕으로, 조관빈(趙觀彬)을 공조 판서로, 조영국(趙榮國)을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8월 26일 기미
윤광찬(尹光纘)을 좌익선으로, 한광조(韓光肇)를 겸 문학으로 삼았다.
8월 30일 계해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자성편(自省編)》을 강(講)하였다. 교리 한광조(韓光肇)가 말하기를,
"근일에 내린 〈‘불효 부제(不孝不悌)’라는〉 네 글자의 하교(下敎)는 중도에 지나치십니다. 원경하(元景夏)가 환수(還收)하기를 청한 것은 옳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홍계희(洪啓禧)는 말하기를,
"중신(重臣)이 차자를 올린 것은 지나친 것입니다. 이 하교는 지묵(紙墨)에 나타낸 것도 아닌데 중신(重臣)이 환수(還收)할 것으로써 차자(箚子)로 진달하였으니, 외부의 사람들은 반드시 의혹을 가질 것입니다. 원래 차자(箚子)를 다시 들여오도록 하여 명백하게 비답(批答)을 내려 성상의 뜻을 회오(回悟)한 것을 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타당할 듯합니다."
하고, 승지 조명정(趙明鼎)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이 하교는 이미 연석에서 발표하였으니 신자(臣子)된 자는 마땅히 쟁집(爭執)하여 환수(還收)를 청해야 하며 어찌 전교(傳敎)에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드디어 그만둘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하는 것이 지리(支離)하니, 이 뒤에는 마땅히 다시 제기하여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술편(述編)》에 어찌 ‘능히 효도하지 못하고 능히 공손하지 못하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여러 신하들은 저것을 가지고 간쟁(諫爭)하지 않고 이것을 가지고 간쟁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조명정(趙明鼎)은 말하기를,
"이것은 성인(聖人)208) 이 스스로 겸양하신 말씀이니, 근일의 하교와는 크게 다릅니다."
하고, 한광조는 말하기를,
"성상께서는 매양 일변(一邊)의 사람들이 아직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의심을 하시지만 이것은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지난번 갑진년209) 7월에 신의 아비가 대각(臺閣)에 들어가 김일경(金一鏡)을 논핵하여 파면시키니, 이광좌(李光佐)가 당시에 약원(藥院)에 있다가 그 계사(啓辭)를 보고 놀라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반드시 화(禍)를 당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뒤에 고 판윤 이세진(李世璡)은 유봉휘(柳鳳輝)의 상소로써 《감란록(勘亂錄)》에 기재할 것을 청하자, 전하(殿下)께서 외직(外職)에 보임(補任)할 것을 특명(特命)하였고, 신의 아비는 또 환수(還收)할 것을 상소(上疏)하여 청하였습니다. 대개 수십년 전에는 잠에서 깨지 않은 것 같은 자가 많았습니다. 세월이 이미 오래 지나자 인심(人心)이 징창(懲創)되었으며 그리고 또 인자하고 은혜로운 풍화(風化)의 가운데 목욕(沐浴)하여 차례로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만일 사람마다 모조리 사재(査滓)가 없다고 말한다면 신이 감히 딱 잘라 말할 수 없지만 대저 종전과는 크게 다릅니다. 오늘날 신자(臣子)로 북면(北面)한 자가 진실로 이런 마음이 있다면 이것은 시랑(豺狼)이요 사갈(蛇蝎)입니다. 어찌 사람의 부류에 포함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의 말은 진심(眞心)에서 나온 것이나 내가 스스로 서글프게 생각하는 바가 있다. 내가 만일 효제(孝悌)의 본래 진실한 바가 있었다면 이런 말을 어찌 나에게 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조명정(趙明鼎)이 말하기를,
"주공(周公)과 같은 성신(聖人)도 관숙(管叔)과 채숙(蔡叔)210) 의 참소를 당했으며 그 참소에 심지어는 ‘유자(孺子)211) 에게 불리(不利)하다.’는 말까지 하였으나, 주공에게야 무슨 손상됨이 있었겠습니까? 전하(殿下)의 효우(孝友)하신 지극한 덕(德)으로써 이와 같은 전고(前古)에 없는 역적 김일경을 만났으니 어찌 은통(隱痛)212) 한 마음이 없겠습니까? 다만 ‘나에게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하는 것으로써 대처(對處)하면서 스스로 마땅히 침착하고 편안히 있을 것인데,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연석(筵席)에서 자주 발표하시니, 중외(中外)가 우려하고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민백상(閔百祥)의 상서(上書)는 단지 징토(懲討)를 엄중히 하고 의리(義理)를 밝히려는 데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민백상이 그 부조(父祖)의 말로써 옳게 여기고, 또 ‘하이감지(何以堪之)’라는 네 글자를 보고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혹시 원량(元良)이 이전의 일을 알지 못할까 염려하여 그 초정(初政)에 있어서 반드시 한번 명백히 이야기하려고 하였다. 내가 민백상을 잘못했다고 한 것은 아니다."
하였다. 한광조는 말하기를,
"합사(合辭)의 의논도 그 중에 또한 정도에 지나친 것이 있으니 마땅히 제재하고 억눌러야 하지만, 처분(處分)이 중도(中道)를 얻은 연후에야 그 죄를 승복(承服)시킬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이것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이제 이미 몇 년이 되었는데, 마땅히 그쳐야 할 것을 그치지 않고 반드시 ‘임금의 당한 무함을 설치(雪恥)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일변(一邊)의 사람은 반드시 하려고 하고 일변의 사람은 하지 않으려고 하니, 다 잘못 된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지 않은 것은, 이것은 내가 지극히 가슴아프게 생각하는 것이다. 계사(啓辭) 가운데 이것으로써 죄를 논하고 있지만 나도 또한 마땅히 그 가운데 들어가야 하니, 이것이 어찌 말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하였다. 조명정(趙明鼎)은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 그 시기를 당하여 비록 문침(問寢)·시선(視膳) 등의 절차라 하더라도 또한 자유로이 할 수가 없었는데, 그 밖의 다른 것은 더욱 어찌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문침의 절차는 단지 하루만 궐(闕)한 것이며 연일(連日) 저지를 당한 것은 아니다."
하였다. 홍계희는 말하기를,
"박상검(朴尙儉)·필정(必貞)의 무리들이 나쁜 짓을 거리낌없이 할 때를 당해서 전하께서 문침(問寢)·시선(視膳)하지 못한 것이 어찌 하루에 그쳤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단지 내 마음을 굳게 지켰을 뿐이다."
하였다. 그 이튿날 하교하기를,
"연석(筵席)에서 주달하는 말은 사체(事體)가 엄중한 것이다. 근일의 야료(惹鬧)213) 를 비호하고자 하여 상세히 살피지 않고 말을 하였으니, 조명정(趙明鼎)을 특별히 체직(遞職)시키라."
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74권, 영조 27년 1751년 10월 (0) | 2025.10.02 |
|---|---|
| 영조실록74권, 영조 27년 1751년 9월 (0) | 2025.10.02 |
| 영조실록74권, 영조 27년 1751년 7월 (0) | 2025.10.02 |
| 영조실록74권, 영조 27년 1751년 6월 (0) | 2025.10.02 |
| 영조실록73권, 영조 27년 1751년 윤5월 (0) | 2025.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