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4권, 영조 27년 1751년 10월

싸라리리 2025. 10. 2.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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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갑오

좌승지 권일형(權一衡) 등이 아뢰기를,
"전하(殿下)의 한마음은 바로 하늘의 마음입니다. 전하의 마음이 만일 화태(和泰)하지 않으면 하늘의 마음이 어찌 기쁨에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일전에 천둥하는 이변(異變)이 처음 발생하였을 때 본원(本院)에서 성상의 마음이 화평(和平)한 것이 재앙을 없애는 급선무가 된다는 것으로써 그 진계(陳戒)한 바가 자세할 뿐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스스로 힘쓰겠다는 비답(批答)은 받았으나 스스로 힘쓰는 실상을 보지 못하여 연충(淵衷)의 번뇌는 제거되지 않고 연교(筵敎)의 비상(非常)함은 종전과 같으니, 온 조정이 우울해 하고 경색(景色)이 근심에 쌓였습니다. 그러니 인자하신 하늘의 경계가 이와 같이 중복되는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권일형 등이 또 왕세자(王世子)에게 진계(陳戒)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10월 3일 병신

어떤 별이 동벽성(東璧星)의 아래로 지나갔다.

 

10월 5일 무술

윤득재(尹得載)를 승지로, 엄우(嚴瑀)를 대사간으로, 이광직(李光溭)·이홍직(李弘稷)을 장령으로, 윤상임(尹尙任)을 헌납으로, 이성경(李星慶)·최규태(崔逵泰)를 정언으로, 성천주(成天柱)를 부교리로, 김상구(金尙耉)를 부수찬으로, 이창유(李昌儒)를 필선으로 삼았다.

 

특지(特旨)로 심육(沈錥)을 제배(除拜)하여 대사헌으로 삼았다.

 

황인점(黃仁點)을 창성위(昌城尉)로 삼아 화유 옹주(和柔翁主)에게 장가들게 하였으니, 황 인점은 참판        황재(黃梓)의 아들이다.

 

승지 신회(申晦)를 보내, 별단(別單)을 철회하고 조정에 나오라는 뜻으로써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에게 면유(勉諭)하였다.

 

10월 8일 신축

임금이 어의궁(於義宮)의 잠저(潛邸)에 거둥하니, 왕세자(王世子)가 어가(御駕)를 수행하였다. 임금이 조양루(朝陽樓)에 나가서 왕세자에게 하유(下諭)하기를,
"효종[孝廟]과 나는 다 들어가서 대통(大統)을 계승하였다. 효종은 형제(兄弟)가 세 분인데 소현 세자(昭顯世子)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인평 대군(麟坪大君)도 또한 세상을 떠나셨다. 나도 또한 형제가 세 사람인데 황형(皇兄)221)  이 승하(昇遐)하고 연령군(延齡君)이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아! 나의 일이 효종과 서로 부합(附合)되는 점이 많다. 오늘날의 세도(世道)를 돌아볼 때 내가 만난 시기가 어찌 지극히 어려운 시기가 아니었겠는가? 구궁(舊宮)을 와서 바라보고 오도위(五都尉)의 자손(子孫)들을 소견(召見)하니 갑절이나 감회가 더 일어난다. 아! 명종[明廟] 시호(諡號)의 하교는 일찍이 고 좌상에게 하유(下諭)하였는데, 장래의 바라는 바는 송(宋)나라의 영종(英宗)에 지나지 않는다. 영종의 만후(晩後)의 일은 내가 어찌 사모하겠는가? 다만 ‘나의 집[舍]을 삼가 지키라.’는 말과 그 행리(行李)가 쓸쓸하여 다만 서책(書冊)만 몇 상자[廚]일 뿐이었던 것은 또한 어찌 어질지 않겠는가? 바로 이 점이 나와 같다고 하겠다. 성조(聖祖)의 뜻과 사업을 제대로 준행(遵行)하고 계술(繼述)하지 못하니 이것이 가슴 아프게 여겨지는 점이다. 성조(聖祖)의 기해년222)  의 하교(下敎)는 족히 지사(志士)로 하여금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할만 하였는데 불행히도 그 해에 승하(昇遐)하셨으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돌아보건대 지금 성조(聖組)의 혈맥(血脈)은 단지 너와 원손(元孫)이 있을 뿐이니 성조(聖祖)의 후손에게 전하는 계획을 생각하여 생민(生民)에게 미친다면 이것이 국가(國家)의 다행스런 일일 것이다. 네가 나라를 보존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백성들을 보호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단 세신(世臣)은 나라의 원기(元氣)이다. 동중서(董仲舒)223)  가 ‘조정을 바르게 하여 백관(百官)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하여 만민(萬民)을 바르게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너는 모름지기 세신을 보호하고 소민(小民)을 화합하게 하는 것으로써 유념(留念)하여 오늘의 일을 잊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어필(御筆)로써 어제(御製)를 써서 내려 판(板)에 새겨 벽(壁)에 걸도록 명하였다.

 

이날 임금이 궁문(宮門) 밖에 사는 사람들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교하기를,
"명(明)나라 사람 자손(子孫)으로 태어난 자들을 효묘조(孝廟朝)에서 본궁(本宮)의 동내(洞內)에 살도록 하였다. 지금 그 곳을 지나면서 그 촌(村)을 보고자 하니 포장(布帳)을 낮게 설치하여 바라보기에 편리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문(門)밖에 사는 사람들은 바로 명나라 조정의 유민(遺民)이요 성조(聖祖)께서 애휼(愛恤)하던 자들이니, 비풍(匪風)224)  의 마음과 추모(追慕)의 감회가 더욱 마음속에 간절하다. 선혜청(宣惠廳)으로 하여금 후(厚)하게 고휼(顧恤)하도록 하여 나의 뜻을 보이라."
하였다.

 

10월 9일 임인

안흥군(安興君) 이숙(李埱)의 아들 이진익(李鎭翼)에게 열조(列朝)의 어찰(御札)을 받들고 입시(入侍)할 것을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삼조(三朝)225)  의 어필(御筆)과 두 분 성후(聖后)의 수찰(手札)을 봉람(奉覽)하고 세 차례 반복해서 장송(莊誦)하니 눈물이 두 눈에서 번갈아 흐른다. 옛날에 우애(友愛)하시고 돈목(敦睦)하시던 성덕(聖德)이 지금 단지 안흥(安興)의 부자(父子)가 있을 뿐이니 교릉(喬陵)을 멀리 바라 볼 때 슬픈 감회가 더욱 간절하다. 이제 어필(御筆)로 인하여 그 아들을 소견(召見)하니 사람됨이 정밀하고 자상하다. 대군(大君)의 적장 현손(適長玄孫)이 단지 이 한 사람 뿐이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특별히 벼슬을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 이성경(李星慶)이 상서(上書)하기를,
"유사(有司)의 신하가, 혜민서(惠民署) 전의감(典醫監)에 소속된 재력(財力)이 거의 거만(鉅萬)에 가까운데도 전연 실효(實效)가 없는 것으로써 그 비용을 파하여 경용(經用)에 보탤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조(大朝)께서 ‘예(禮)를 아껴서 양(羊)을 보존하는226)  ’ 뜻으로써 윤허(允許)를 내리지 않으셨으니 훌륭하신 왕(王)의 말씀을 누군들 흠탄(欽歎)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희양(餼羊)의 경비는 미세하기 때문에 공자(孔子)가 제거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만일 그 비용이 거만에 이르렀다면 성인(聖人)도 또한 반드시 허례(虛禮)를 아껴서 무거운 경비를 가벼이 여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이러한 쓸데없는 비용을 파할 수 있는 종류는 대조(大朝)께 품의(稟議)하거나 혹은 예충(睿衷)으로부터 결단을 내려 일체 제거하여 없애고 경비(經費)에 소속시킨다면 나라의 용도가 넉넉해 질 수 있고 백성의 힘도 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왕세자(王世子)가 따르지 않았다.

 

10월 10일 계묘

약방(藥房)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수교(手敎)를 빈청(賓廳)에 내렸다.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민백상(閔百祥)·조명정(趙明鼎)에 대해서 앞을 바라보고 뒤를 돌아다 보면서 오히려 혹시나 손상을 입을까 두려워 하면서도, 그 임금에게 약(藥)을 올리려 하고 있으니, 되겠는가?"
하니, 도제조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민백상의 일로써 말하면 편벽된 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저 고담(高談)이나 준론(峻論)을 하게 되면 자기들끼리의 물망(物望)이 가일층(加一層)이 되기 때문에 이따금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옥음(玉音)을 몹시 높혀 말하기를,
"일변(一邊)의 ‘군무 미설(君誣未雪)’이라고 말하는 자를 일변에서는 반드시 의심할 것이다."
하니, 김약로가 말하기를,
"민백상이 편벽된 논의를 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았던 것이며 어찌 성궁(聖躬)에게 참으로 무함함이 있으셨겠습니까?"
하였다. 이 때 임금의 마음이 격뇌(激惱)하여 탕제(湯劑)를 오랫동안 들지 아니하고 수서(手書)를 또 내리니, 대개 감히 들을 수 없는 하교였다.

 

10월 11일 갑진

빈청(賓廳)에서 탕제(湯劑)를 드실 것을 아뢰어 청하고 이어서 수서(手書)를 돌려보내니, 허락하지 않았다. 또 아뢰고 또 수서를 돌려보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약방(藥房)과 정원(政院)에서 탕제(湯劑)를 드실 것을 아뢰어 청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 판부사 정우량(鄭羽良)이 수서(手書)의 사교(辭敎)가 비상(非常)하다는 것으로써 금오(金吾)에서 서명(胥命)하니, 임금이 대명(待命)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10월 12일 을사

빈청(賓廳)에서 아뢰기를,
"신 등의 어제 일제히 호소한 계사(啓辭)는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몹시 절박한 나머지 말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였는데, 돌려보냈던 수서(手書)에 대한 비지(批旨)가 또 내렸습니다. 신 등이 머리를 맞대고 매우 두려워하였으나 계책이 나오질 않아서 하루 동안에 비지를 봉환(封還)한 것이 두 번 세 번에 이르렀습니다. 받은 바의 엄중한 하교는 모두 인신(人臣)의 극죄(極罪)이니 얼굴을 쳐들고 다시 들어간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성상의 마음은 평온함을 잃고 백료(百僚)들은 초조하고 황급하여 구구(區區)한 정세(情勢)는 감히 돌아볼 수가 없기 때문에 또다시 서로 인솔하고 일제히 호소합니다. 대저 민백상이 상서로 진달한 것은 실로 분변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으나, 단지 구습(舊習)에 젖어서 한갓 격론(激論)만을 주장하는 자들도 진실로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조명정(趙明鼎)의 연주(筵奏)는 전후(前後)의 서로 간섭(干涉)되지 않은 것을 알지 못하고 몽연(曚然)히 제달(提達)하여 스스로 무거운 견책(譴責)을 초래하였으니, 또한 매우 망령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 무리의 죄가 되는 데 지나지 않을 따름입니다. 우리 경종[景廟]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우애(友愛)와 우리 성상의 효제(孝悌)의 독실함은 온 동토(東土)의 생명을 가진 무리들이 모두가 송복(誦服)하고 흠탄(欽歎)하는 터이니 저들 민백상(閔百祥)과 조명정의 일시적인 그릇되고 망령된 말이 어찌 족히 성덕(聖德)에 만분의 일이나마 누(累)를 끼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이미 지나치게 스스로 폄손(貶損)하시어 감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내리시기까지 하시고 심지어 질병을 조심하라는 경계를 생각하지 않으시고 탕제(湯劑)의 올림을 허락하지 않는데까지 이르시니, 더욱 신 등의 의려(意慮)의 미치는 바가 아닌 것으로 실로 천지(天地)와 같은 큰 도량으로도 섭섭함이 없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위로는 종묘(宗廟)와 태후(太后)를 생각하시고 아래로는 백관(百官)과 만민(萬民)을 생각하시어 다시는 불평(不平)스러운 뜻으로써 심경(心境)에 간직하지 마시고 이내 즉시로 약(藥)을 올릴 것을 허락하소서."
하였다. 계사(啓辭)가 이미 들어가자, 임금이 어필(御筆)로써 ‘성심 실평(聖心失平)’이라는 네 글자를 지워버렸다. 또 먹으로 ‘지뉴 구습(只狃舊習)’의 구(舊) 자를 지워버리고 ‘당(黨)’ 자로 고쳐 썼다. 또 먹으로 ‘극류(極謬)’라는 두 글자를 지우고 ‘이통심(已痛心)’이라는 세 글자로 고쳐 썼으며 또 먹으로 ‘몽연(曚然)이라는 두 글자를 지우고 ‘방자(放恣)’라는 두 글자로 고쳐 썼다. 또 먹으로 ‘역극 망의(亦極妄矣)’라는 네 글자를 지우고 ‘기역 당심(其亦黨心)’이라고 고쳐 써서 내렸다. 하교하기를,
"어제 내린 비답(批答)에 대하여 경(卿) 등이 이와 같기 때문에 다시 비답을 내리니, 이것을 승수(承受)하라."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또 아뢰기를,
"이번에 내린 이 수서(手書)는 더욱 어제 내린 수서의 비답이 아니니, 마지못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환납(還納)합니다."
하였다.

 

정원에서 재차 아뢰어 여러 신하들의 심정(心情)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철보(李喆補)를 이조 참판으로, 이수관(李壽觀)을 집의로, 이광식(李光湜)을 사간으로, 남학로(南鶴老)를 지평으로, 박창윤(朴昌潤)을 헌납으로, 임희교(任希敎)를 정언으로, 정홍순(鄭弘淳)을 부교리로, 한명여(韓命輿)를 문학으로, 이인원(李仁源)을 사서로, 김선행(金善行)을 겸 사서로, 성천주(成天柱)를 겸 우익선으로 삼았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 판부사 정우량(鄭羽良)이, 비지(批旨)의 사교(辭敎)가 비상(非常)한 것으로써 금오(金吾)에서 서명(胥命)하니, 대명(待命)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10월 13일 병오

빈청(賓廳)에서 세 번째 아뢰었으나, 허락하지 않고 연이어 어제 내린 수서(手書)를 내리니, 빈청에서 돌려보냈다. 정원(政院)·옥당(玉堂)·간원(諫院)에서 청대(請對)하니, 답하기를,
"오늘의 세도(世道)를 다 보았으니, 물러가라."
하였다.

 

10월 14일 정미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백관(百官)들을 인솔하고 정청(庭請)하여 아뢰기를,
"신 등은 전하의 비상(非常)한 지나치신 거조를 눈으로 보았습니다. 3일 동안 빈청(賓廳)에서의 아룀에 한 자(字)의 비답(批答)도 받지 못하였는데, 죽음을 무릅쓰고 돌려보낸 수서(手書)는 환납(還納)하는 대로 다시 내려졌습니다. 전하께서 당습(黨習)을 몹시 싫어하시어 반드시 제거하고자 하는데 뭇 신하들이 불충(不忠) 무상(無狀)하여 제대로 봉승(奉承)하지 못하고 전하의 지나치신 거조가 있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하였으며, 무릇 몇 번에 걸쳐 이런 경우를 당하여 오늘날 약(藥)을 물리치시는 데까지 이르러 전하의 지나치신 거조가 더욱 크신데다가 내리신 수교(手敎)는 또 온 나라로 하여금 진탕(震蕩)하게 하였으니, 신 등의 죄(罪)는 더욱 이루 주벌(誅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의 마음을 돌리시어 빨리 연일 내리신 하교를 환수(還收)하시고 이어서 즉시 탕제(湯劑)를 올릴 것을 허락하시어 종사(宗社)와 신인(神人)의 여망(輿望)을 위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 요순(堯舜)의 도(道)는 효제(孝悌)일 따름이다. 내가 비록 덕(德)이 부족하고 학문이 천박하지만 이러한 의리(義理)는 조금 알고 있다. 지난날을 추상(追想)해 보건대 마음이 오히려 실추하고 싶어진다. 경(卿) 등이 곧바로 정지하고 나간다면 마땅히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들을 소견(召見)할 것이다."
하였다. 대신(大臣) 및 정원(政院)·옥당(玉堂)·간원(諫院)에서 청대(請對)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15일 무신

월식(月食)이 있었다.

 

백관(百官)이 정청(庭請)하여 계사(啓辭)를 올리니, 답하기를,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들되고 아우된 자가 이 〈‘불효 부제’〉 네 글자를 듣고서도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여긴다면 효도가 되겠는가, 공손함이 되겠는가. 어찌 다만 민백상(閔百祥)뿐이겠는가? 당심(黨心)은 다 그러하다. 다시 수서(手書)를 내리니, 경(卿) 등은 양해하라."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이와 같이 써서 내리는 것은 경(卿) 등은 비록 내 마음을 알지 못하겠지만 사첩(史牒)에 써서 후세(後世)의 사람으로 하여금 내 마음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였다. 김재로(金在魯) 등이 수서(手書)를 돌려보내고 정청(庭請)하여 재차 아뢰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또 수서를 내리니, 김재로 등이 또 돌려보냈다.

 

10월 16일 기유

백관(百官)들이 정청(庭請)하여 재차 아뢰니, 임금이 재차 수서(手書)를 내렸으나, 대신(大臣)이 돌려보냈다.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가 여러 종신(宗臣)을 인솔하고 정청(庭請)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약방(藥房)·정원(政院)·옥당(玉堂)·간원(諫院)에서 청대(請對)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날 임금의 하교가 수라[膳]를 물리치시는 데까지 미쳤다. 이에 대신(大臣)이 아뢰기를,
"하교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니 신 등이 비록 정반(庭班)을 철파(撤罷)하지 않을 수가 없지만 특별히 인접(引接)을 허락하시어 신들로 하여금 충정(衷情)을 다 진달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간원(諫院)과 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잠시 소견(召見)을 허락할 것을 청하였다. 이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니, 하교하기를,
"대관(大官)의 충후(忠厚)한 계사(啓辭) 가운데는 차마 ‘당(黨)’ 한 글자를 더할 수가 없는데, 저 이목(耳目)의 신하들도 또한 충후(忠厚)하여 그런 것인가? 당(黨)을 비호하며 암아(媕婀)하는 자는 족히 말할 것이 없다. 아! 저들 옥당(玉堂)의 차자(箚子)는 한결같이 어찌 그다지도 유연(柔軟)한가? 옥당의 차지를 올린 유신(儒臣)과 합문(閤門)에 나아온 대신(臺臣)들은 모두 문출(門黜)의 형률을 시행하라."
하였다.

 

10월 17일 경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 판부사 정우량(鄭羽良)이 진연(診筵)에서의 엄중한 하교로 인하여 금오(金吾)에서 서명(胥命)하니, 대명(待命)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김재로가 이내 명소(命召)를 반납하고 도성(都城)을 나갔다.

 

10월 18일 신해

임금이 전 함경 감사 이철보(李喆輔)를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들쥐의 재앙이 어떠한가?"
하니, 이철보가 말하기를,
"온성(穩城)과 경성(鏡城)이 더욱 심합니다. 12세 아이가 그 눈을 뚫림을 당하였는데, 쥐는 보통 쥐와 다름이 없으나 다 두만강(豆滿江)을 건너서 왔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고을을 다스림에 특이한 정사가 있자 범이 모두 하수(河水)를 건너가버렸으니227)  , 어찌 정성의 감동된 바가 아니겠는가?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황충(蝗蟲)을 삼킨 것228)  을 옛사람은 비록 비난하였으나 나는 실심(實心)에서였다고 생각한다. 만일 실심이 없었다면 어떻게 독물(毒物)이 병(病)이 되지 않을 것을 미리 알고 삼킬 수가 있겠는가? 나의 뜻도 이와 같으니 만일 북도(北道)의 쥐들이 서울에 와서 모여 나의 몸을 해친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10월 19일 임자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24일 정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27일 경신

김상중(金尙重)을 대사간으로, 박치문(朴致文)을 사간으로, 권신(權賮)을 헌납으로, 송문재(宋文載)를 정언으로, 이명희(李命熙)를 부수찬으로, 이창유(李昌儒)를 보덕으로, 윤상임(尹尙任)을 겸 우익선으로 삼았다.

 

10월 28일 신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승지를 보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를 하유(下諭)하고 이내 함께 오도록 할 것을 명하였다.

 

윤상임(尹尙任)을 부교리로, 이민곤(李敏坤)을 필선으로, 박사눌(朴師訥)을 좌찬독으로 삼았다.

 

이인원(李仁源)을 접위관(接慰官)으로 삼았으니, 왜차(倭差)가 와서 관백(關白)이 죽었다고 고(告)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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