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4일 병인
조동점(趙東漸)을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11월 6일 무진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11월 7일 기사
전 정언 오찬(吳瓚)이 삼수(三水)에서 졸(卒)하였다. 오찬은 대제학 오원(吳瑗)의 아우이다. 석갈(釋褐)229) 한 초기에 할 말을 다 하고 숨기지 않다가 드디어 엄중한 견책(譴責)을 받고 절새(絶塞)에서 죽으니 사람들이 다 가련하게 여겼다.
하교하기를,
"바람이 불면 풀[草]따라 쓰러지는 도리에 있어 마땅히 먼저 절작(節酌)을 하여야 하는데, 더구나 균역(均役)이 바야흐로 베풀어진 시기이겠는가? 본가(本家)에 신칙(申飭)하여 유과(油果)를 사용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대개 화유 옹주(和柔翁主)가 장차 하가(下嫁)하기 때문이었다.
사은 겸 동지 정사(謝恩兼冬至正使)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 부사(副使) 신사건(申思建), 서장관(書狀官) 조중회(趙重晦)가 길을 떠났다.
11월 8일 경오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11월 10일 임신
왕세자(王世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예조 참판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성지(城池)는 전연 제도(制度)가 없으니 비록 다 개축(改築)할 수는 없지마는 치첩(雉堞)에 있어서는 조속히 쌓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제도가 어떠한가?"
하였다.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가령 경복궁(景福宮) 문(門)의 성각(城角)이 있는 것과 같으니, 그 넓이는 2칸(間)쯤 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거기에 소요되는 비용은 얼마나 들고 몇 달이면 역사(役事)를 끝마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굳이 조가(朝家)에서 물력(物力)을 마련해 줄 필요가 없으며 각 영문(營門)에서 마땅히 스스로 준비해야 하는데, 비용은 수만 냥(兩)에 지나지 않고 역사(役事)는 몇 달 동안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성중(城中)의 개울이 거의 모두 막혀서 매양 여름 장마철을 당하면 개울가에 사는 백성들이 피난 갈 준비를 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더러는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발생하기도 하니 만일 경조(京兆)로 하여금 방민(坊民)과 삼군문(三軍門)을 출동시켜 힘을 합치게 한다면 막힌 것을 뚫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성첩(城堞)에 비하여 더욱 시급하니, 내년 봄에는 마땅히 소통시켜 뚫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내년 봄에 개울을 소통시킨다면 재명년(再明年) 쯤에나 비로소 성(城)을 쌓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반드시 먼저 물력(物力)과 기계(器械)를 예비(豫備)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11월 10일 임신
오도(五道)의 유생(儒生) 박춘신(朴春新) 등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호서(湖西)의 옥천군(沃川郡) 구룡(九龍) 마을은 바로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태어난 곳입니다. 여주 목사(驪州牧使) 이유신(李裕身)이 사론(士論)을 돌보지도 않고 국법(國法)을 안중에 두지 않은 채 갑자기 장지(葬地)로 점유하고 비밀리에 몰래 상(喪)을 치르면서 군(軍)을 출동시켜 진(陣)을 배치한 뒤 밤중에 장례(葬禮)를 끝마쳐버려 많은 선비들이 일제히 분개하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그가 국법(國法)을 어기고 함부로 장사를 치룬 무덤을 파내게 하시고 어진이를 업신여기고 국법을 무시한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본도(本道)로 하여금 조사하여 장문(狀聞)하게 하라."
하였다.
11월 12일 갑술
호랑이가 서울에 들어왔다.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11월 13일 을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1월 14일 병자
현빈(賢嬪)이 환후(患候)가 있어 약원(藥院)에서 직숙(直宿)하였다. 정랑(正郞) 조재홍(趙載洪), 사과(司果) 조재부(趙載溥)에게 별도로 입직(入直)할 것을 명하였다. 이날 밤에 현빈이 건극당(建極堂)에서 훙(薨)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 및 예조 당상(禮曹堂上)을 소견(所見)하고 하교하기를,
"무신년230) 이후로부터 의지한 바는 현빈(賢嬪)이었는데, 이제 또 상서(喪逝)하니 슬픈 감회를 어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예조로 하여금 무릇 여러 가지 일들을 《무신등록(戊申謄錄)》을 가져다 참고하여 즉시 거행토록 하고, 수묘관(守墓官)도 또한 해조(該曹)로 하여금 차출(差出)하게 하라."
하였다. 도제조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 만일 여기에서 성복(成服)을 하고자 하시면 신 등이 마땅히 승문원(承文院)에서 직숙(直宿)하면서 승후(承候)231) 에 편리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하필 그렇게 할 것이 있겠는가? 곡반(哭班)을 마땅히 연희문(延喜門) 밖에 설치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임금의 영의정 김재로에게 묻기를,
"내가 마땅히 어떤 복(服)을 입어야 하며, 무술년232) 〈왕세자빈(王世子嬪) 심씨(沈氏)의〉 예(例)와 동일하게 할 것인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미 대통(大統)을 받들었으니, 동일하게 하지 않을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말이 옳다."
하였다. 김재로가 《속오례의(續五禮儀)》를 가져다가 보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대공복(大功服)을 입는 것이 과연 의심이 없는가?"
하였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말하기를,
"예제(禮制)는 마땅히 소공복(小功服)을 입어야 합니다."
하니, 김약로가 말하기를,
"신의 생각에는 대공복이 의심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곤전(坤殿)의 복(服)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또한 마땅히 대공복을 입어야 하고 자전(慈殿)은 장손부(長孫婦)에게 마땅히 대공복을 입어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동궁(東宮)과 빈궁(嬪宮)은 다 마땅히 소공복을 입어야 할 것인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그럴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복제(服制)가 정해진 연후에 상의원(尙衣院)에서 비로소 거행할 수가 있으니, 조속히 결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고, 이어서 예조 당상에게 하순(下詢)하니, 예조 참판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이미 장자부(長子婦)로서 결정을 하였다면 대공복을 입는 것에 대해 어찌 다른 의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김약로가 말하기를,
"무술년에 처음에는 대공복으로써 결정을 하였다가 나중에는 기년복(朞年服)으로써 고쳤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유자(儒者)들이 기년복을 가지고 잘못되었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기년복이 과연 예(禮)에 어긋나는가?"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것은 사종설(四種說)233) 로써 말을 한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종(四種)의 의미를 내가 상세히 알 수가 없으니, 경(卿)이 간략하게 진달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바로 정(正)하되 체(體)가 아닌 것과 체이되 정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인데, 효종[孝廟]의 국휼(國恤) 당시에 대비(大妃)의 복제(服制)를 유현(儒賢)이 사종설을 인용하자 고 상신 정태화(鄭太和)가 손을 내저으며 저지하기를, ‘나는 단지 국제(國制)가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하였다 합니다."
하고 김약로가 말하기를,
"지금의 대공복은 바로 국제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단지 국제를 따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공복을 입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지나치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익정이 말하기를,
"무술년의 전례(前例)는 공제(公制)가 13일이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13일로써 결정을 한다면 성복일(成服日)로부터 마땅히 9일이 될 것이니 바로 일(日)로써 월(月)을 바꾸는 것으로, 이것으로써 결정을 하는 것이 합당하겠다."
하였다.
11월 15일 정축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현빈궁(賢嬪宮)의 습(襲)과 소렴(小斂)을 행하였다.
오언유(吳彦儒)를 승지로, 심익성(沈益聖)을 집의로, 이종백(李宗白)을 호조 참판으로, 김광세(金光世)를 동의금으로, 박문수(朴文秀)를 판윤으로, 유언국(兪彦國)을 좌익선으로, 이명희(李命熙)를 겸 우찬독으로, 김재로(金在魯)를 삼도감 제조(三都監提調)로, 해봉군(海蓬君) 이인(李橉)을 수묘관(守墓官)으로, 이익정(李益炡)·홍계희(洪啓禧)를 빈궁 도감 당상(殯宮都監堂上)으로, 김선행(金善行)을 낭청(郞廳)으로, 이춘제(李春躋)·서명구(徐命九)를 묘소 도감 당상(墓所都監堂上)으로, 윤상임(尹尙任)을 낭청으로, 김상성(金尙星)·정익하(鄭益河)를 예장 도감 당상(禮葬都監堂上)으로, 김치인(金致仁)을 낭청으로, 홍봉조(洪鳳祚)를 명정 서사관(銘旌書寫官)으로, 낙풍군(洛豊君) 이무(李楙)를 빈궁 내재실(殯宮內梓室)의 상면 상자 서사관(上面上字書寫官)으로, 심성진(沈星鎭)을 우주 제주관(虞主題主官)으로 삼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무술등록(戊戌謄錄)》을 가져다가 상고해 보았더니, 초상(初喪)으로부터 졸곡(卒哭)까지는 모두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를 정지하고 빈소(殯所)를 만든 뒤에는 오직 사직단(社稷壇)에만 제사를 지냈습니다. 대개 고례(古禮)에는, 같은 궁(宮) 안에서는 비록 비상(卑喪)이 있더라도 석 달 동안 제사를 지내지 않고 오직 교사(郊社)의 예(禮)만을 월불(越紼)234) 하여 행사하였습니다. 산천(山川)의 절사(節祀)는 바로 교사이니 마땅히 설행(設行)해야 할 것 같고 종묘(宗廟)·각릉(各陵)의 삭망(朔望) 및 대제(大祭)와 각릉의 기신제(忌辰祭)를 마땅히 정행(停行)하는 일로써 계품(啓稟)하여 윤허를 내리셨었으니, 지금도 또한 이것에 따라 거행하면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그 뒤에 예조에서 또 아뢰기를,
"다시 《무술등록》을 상고해 보았더니, 그 당시에 약방 제조(藥房提調) 민진후(閔鎭厚)의 아뢴 바를 인하여 상례(喪禮)가 융쇄(隆殺)의 절차가 없지 않았습니다. 빈궁(嬪宮)의 상(喪)에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를 모두 정지하는 것은 그것이 합당한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공제(公除)한 뒤에 대사·중사·소사를 예에 의거하여 거행하는 일을 정식(定式)하소서."
하니, 임금이 정식에 의거하여 거행할 것을 명하였다.
11월 16일 무인
현빈(賢嬪)의 훙서(薨逝)로써 태묘(太廟) 및 영녕전(永寧殿)에 고제(告祭)하였다. 이날 현빈궁(賢嬪宮)의 대렴(大斂)을 행하여 재실(榟室)에 모셨다.
임금이 요화당(瑤華堂)에 나아가 영의정 김재로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삶은 밤을 좋아하였는데, 예전에 밤중에 내가 갑자기 삶은 밤을 먹고 싶어하면 현빈(賢嬪)이 곧바로 진상하였다. 그뒤에 동조(東朝)의 하교(下敎)를 들으니, 현빈이 미처 신[履]을 신을 사이도 없이 즉시 부엌에 들어가 친히 스스로 삶아 왔다고 하니, 이것이 효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람의 마음이 반드시 사친(私親)이 고관(高官)이 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데, 현빈은 그렇지 않았다. 만일 영돈녕(領敦寧)235) 이 시임(時任)이 되었다는 것을 들으면 그는 매양 말하기를, ‘우리 숙부(叔父)는 어찌하여 물러가서 쉬지 않는가?’ 하였으니, 여기서 그의 염담(恬澹)한 성품을 알 수가 있다.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지문(誌文)을 인간(印刊)한 것을 현빈이 벽(壁) 위에 보관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그것을 보게 되었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성복(成服)을 한 뒤에는 마땅히 시호(諡號)를 의논하여야 하는데, 효(孝) 자로써 정하고자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말이 옳다. 현빈의 시호에 어찌 효(孝) 자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시민(市民)에게 폐해를 끼치고 싶지 않은데 소용없는 물건을 또한 진배(進排)하는 경우가 많으니, 마땅히 도청(都廳)에 신칙(申飭)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원경하(元景夏)를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11월 17일 기묘
현빈궁(賢嬪宮)의 성복(成服)을 행하였다. 대전(大殿)의 복(服)은 대공복(大功服)으로, 의상(衣裳) 【조금 거친 숙포(熟布)를 사용한다.】 ·관(冠) 【포(布)로써 무(武)와 영(纓)을 만든다.】 ·수질(首絰)·요질(腰絰) 【아래로 드리운 것을 풀었다가 성복(成服)한 뒤에 다시 얽어매되, 50일 동안 그 드리운 것을 풀지 않는다.】 ·포대(布帶)·백피화(白皮靴)로 아홉 달 동안 최복(衰服)을 입는다. 공제(公除)한 뒤에 사무를 보는 옷은 길복(吉服)이고 평상시에는 흑두면(黑頭冕)·소복(素服)·소대(素帶)로 아홉 달을 마친다. 중궁전(中宮殿)의 복은 대공복으로 대수(大袖)·장군(長裙)·개두(蓋頭)·두수(頭𢄼)·포대 【약간 거친 숙포(熟布)를 사용한다.】 ·백피혜를 착용한다. 9일을 공제(公除)한 뒤에는 짙게 옥색(玉色)을 물들인 대수·장군과 흑개두·두수 및 대(帶)·피혜(皮鞋)를 착용하고 아홉 달을 마친다.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의 복은 소공복(小功服)으로, 대수·장군·흑개두·두수 및 대 【아주 가는 숙포(熟布)를 사용한다.】 ·백피혜를 착용하고 다섯 달을 공제한 뒤에는 짙게 옥색을 물들인 대수·장군·흑개두·두수 및 대·피혜를 착용하여 다섯 달을 마친다. 왕세자(王世子)의 복은 소공복으로, 의상(衣裳) 【아주 가는 숙포(熟包)를 사용한다.】 ·관 【포(布)로 무(武)와 영(纓)을 만든다.】 ·수질·요질·포대를 【아주 가는 숙포(熟布)를 사용한다.】 ·백피혜를 착용하고 5일을 공제한 뒤에 사무를 보는 옷은 길복(吉服)을 입고 평상시에는 흑두면·소복·소대를 착용하고 다섯 달을 마친다. 빈궁(嬪宮)의 복은 소공복으로, 대수·장군·개두·두수 및 대 【아주 가는 숙포(熟布)를 사용한다.】 ·백피혜를 착용하고 5일을 공제한 뒤에는 옥색을 짙게 물들인 대수·장군과 흑개두·두수 및 대·피혜를 착용하여 다섯 달을 마친다. 현빈궁에 소속한 상궁(尙宮) 이하는 자최 기년(齊衰朞年)을 하는데, 배자(背子) 【약간 가는 생포(生布)를 사용한다.】 ·개두·두수 【약간 가는 생포를 사용한다.】 ·포대·백피혜를 착용한다. 시비(侍婢)는 포대·백혜(白鞋)로써 한다. 수묘관(守墓官)과 시묘관은 자최 3년으로 한다. 현빈궁의 내시 별감(內侍別監) 이하는 자최 기년으로 한다.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은 성복(成服) 및 초종(初終)에 곡림(哭臨)할 때 천담복(淺淡服)을 착용하고 대조(大朝)·소조(小朝)를 진현(進見)할 때나 평상시에는 길복(吉服)을 착용한다. 파산관(罷散官) 및 관학 유생(館學儒生)은 소복(素服) 차림으로 외반(外班)에서 모여 곡(哭)한다. 각도(各道)의 대소(大小) 사신(使臣)과 소관(小官)은 천담복(淺淡服)을 입고 거애(擧哀)한다. 명정식(銘旌式)은 ‘효순 현빈 재실(孝純賢嬪梓室)’이라 한다. 제주식(題主式)은 외면(外面)은 ‘효순 현빈 신주(孝純賢嬪神主)’라 하고 함중(陷中)은 ‘조선국 효장 세자빈 조씨 신주(朝鮮國孝章世子嬪趙氏神主)’라 한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아뢰기를,
"사대부가(士大夫家)의 혼인(婚姻) 일절(一節)은 《무술등록(戊戌謄錄)》을 가져다가 상고해 보았더니 또한 장례(葬禮)를 지내기 전에 혼인을 금지한다는 영(令)이 없으니, 품정(稟定)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도제조 김약로(金若魯)는 말하기를,
"조신(朝臣)은 이미 복제(服制)가 없으니 장례 전에 혼인을 지내더라도 예(禮)에 어긋나지 않을 듯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제(公除)한 뒤에 혼인을 치르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9일 신사
현빈(賢嬪)의 시호(諡號)를 내리기를 효순(孝純) 【자충(慈忠)·애친(愛親)을 ‘효(孝)’라 하고 중정(中正)·화수(和粹)를 ‘순(純)’이라 한다.】 이라 하였다.
11월 21일 계미
하교하기를,
"시호를 하사하는 날에 효장궁(孝章宮)에 일체 먼저 고유(告由)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3일 을유
임금이 《진향초기(進香草記)》를 가져다가 보고 하교하기를,
"한과(漢果)가 쓸데없는 비용으로 많이 드는데 몹시 정(精)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그것을 감(減)하려고 하였는데, 이제 자교(慈敎)를 받으니, ‘용문(龍紋)·귀문(龜紋)의 과(果)를 항상 모두 감하고 싶었다.’고 하교하시었다. 훌륭하도다 자교시여! 내가 그것을 감하려고 하였는데, 더구나 이런 하교를 받았음에랴. 이 뒤에는 모든 제사에 있어서 한과라고 이름한 것은 한결같이 모조리 없애 인삼 정과(人蔘正果)와 같은 등속들도 또한 감제(減除)하여 이를 영원히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현빈(賢嬪)의 행록(行錄)을 지어서 내리고 행록으로써 이어서 묘지(墓誌)를 지었다. 또 하교하기를,
"현빈이 투서(套署)236) 로써 표(標)를 하여 그 형제(兄弟)의 아내에게 나누어 보냈고, 무릇 문안(問安)하는 서찰(書札)은 반드시 그 가장(家長)에게 보인 후에 그제야 들여보내게 하였으니, 그가 심우(深憂)·원려(遠慮)함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하니, 연신(筵臣)이 말하기를,
"이것은 후일(後日)에 후비(后妃)의 모범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11월 26일 무자
종묘(宗廟)·사직(社稷)의 납향(臘享) 대제(大祭) 때에 무술년237) 의 예(例)에 의거하여 음악을 사용할 것을 명하였다. 대개 무신년238) 에 대신(大臣)의 헌의(獻議)로 인하여 종묘와 사직에는 공제(公除)한 뒤 제사를 행할 때 모두 음악을 사용하고 영소전(永昭殿)과 경녕전(敬寧殿)은 시어소(時御所)에 있어 빈궁(殯宮)에 가까웠기 때문에 모두 진열만 하고 사용은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런 명이 있었다.
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중국 사람[華人]의 자손(子孫)에 대해서 야인(野人)이나 왜인(倭人)의 향화(向化)한 예를 적용하지 않고 특별히 신포(身布)를 면제하여 주니 성상의 뜻에 대해 신은 실로 흠앙(欽仰)하는 바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명목상으로는 비록 예조(禮曹)에 소속되었다고 하나 전연 납부(納付)하는 바가 없다면, 각 고을에서 비록 군액(軍額)을 충당한다 하더라도 본조(本曹)에서는 반드시 괄시(恝視)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차라리 약간의 토산(土産)으로써 그들의 납부할 바를 정하여 그 무리들로 하여금 소속된 바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원통한 일이 있어, 와서 하소연할 경우에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관할하는 바가 있음을 알아서 일에 따라 고휼(顧恤)하게 한다면 외읍(外邑)에서 함부로 침해할 우려가 없을 수 있고 실제로 영원히 혜택을 베푸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삼도감 도제조(三都監都提調)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아! 무신년239) 에 효장 세자(孝章世子)를 잃고 금년에는 현빈(賢嬪)을 잃게 되니 내 심장이 이미 차갑게 식었다. 하지만 백성을 위한 마음은 어찌 잠시라도 해이될 수가 있겠는가? 기유년240) 에도 또한 선유(宣諭)한 일이 있었으니 여사군(轝士軍)·승군(僧軍)·공장(工匠) 등에 대한 노문(勞問)은 앞으로 마땅히 하교를 해야 할 것이나 시기가 엄동(嚴冬)을 당하여 무신년과 차이가 없으니 도감(都監)에서 추위를 방어할 도구를 나누어 주도록 하라. 이번의 역사(役事)는 무신년과 비교하여 경중이 현격하게 다른데, 분정(分定)된 승군을 나의 생각에는 오히려 많다고 여기고 있다. 그 역사를 살펴보아서 남는 자들을 먼저 방송(放送)하고 기타의 경우도 또한 긴급하고 대수롭지 않은 것을 헤아려서 차례대로 방송하라. 그리고 저들이 비록 치도(緇徒)이지만 또한 하나의 내 백성이다. 승도(僧徒)가 항시 고달프다는 것은 본래 아는 바이니, 그들을 어루만져 주고 구휼하여 원망하고 괴로워하지 않도록 하고, 또한 무신년의 하교에 따라 일로(一路)의 백성들로 하여금 예장(禮葬)이 지나가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승인(僧人)의 신역(身役)이 또한 고달프다."
하니, 김상성(金尙星)이 말하기를,
"승역(僧役)이 평민(平民)들 보다 많기 때문에, 감필(減疋)한 이후로부터는 승려가 되는 자가 적다고 합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승인이 만일 다 장발(長髮)하고 환속(還俗)을 한다면 어찌 태평(太平)의 기상(氣像)에 아니겠는가?"
하였다.
하교하기를,
"꼴[蒭]을 묶어서 허수아비[俑]를 만들었는데, 그 폐단이 순장(殉葬)을 하는 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가 비난을 하였던 것이다. 지난번에 목노비(木奴婢)를 제거했던 뜻은 대개 이런 것이었는데, 이제 들으니 또 악인(樂人)이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또 제거하였다. 대저 목노비와 악공(樂工)은 모두가 목인(木人)이다. 목인의 사용을 금지하는 내용은 이미 《속대전(續大典)》에 기재되어 있으니, 이번에는 품의(稟議)하지 않아야 될 것을 품의한 것이다. 이 뒤로는 무릇 모든 사람의 형상을 본뜬 것들은 모두 영원히 제거시키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예장의궤(禮葬儀軌)》의 권수(卷首)에 써서 영구히 준행(遵行)할 것을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나라의 대상(大喪)·소상(小喪)에 쓰는 영침(靈寢) 제구(諸具)를 종전에 비단[緞]으로 하던 것을 명주[紬]로써 대체하고 이것도 또한 《묘소도감의궤(墓所都監儀軌)》의 권수(卷首)에 기록하라."
하였다.
11월 27일 기축
이 때에 칙사(勅使)가 나온다는 보고가 있자, 임금이 말하기를,
"칙사가 행차하면 소용되는 비용이 절제가 없을 것이므로 생각이 민사(民事)에 미치매 먹어도 달지가 않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칙사를 영접(迎接)하자면 마땅히 평상복(平常服)을 착용하여야 할 터이지만 음악을 울리고 연향(燕享)하는 절차를, 장례(葬禮)지내기 전에 만일 종전과 같이 한다면 몹시 합당치 않을 것이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만일 상(喪)을 당하여 음악을 울릴 수 없다는 뜻으로써 잘 말한다면 저들은 본래 우리 나라의 예의(禮義)의 풍속을 알기 때문에 반드시 받아들여 허락할 것입니다."
하였다.
11월 29일 신묘
어떤 별이 호시성(弧矢星)의 아래로 지나갔다.
임금이 통명전(通明殿)에 나아갔다. 내의원 제조(內醫院提調) 홍상한(洪象漢)이 아뢰기를,
"이번에 도감(都監)의 모든 것을 성상께서 절손(節損)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창의궁(彰義宮)에 보내는 것에 있어서도 또한 무신년에 비해 절반을 줄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묘소 도감(墓所都監)에서 복정(卜定)241) 한 진청미(賑廳米) 1천 5백 석(石)은 무신년에 비하여 도리어 1백 석이 추가되었으니, 아마도 성상께서 감손(減損)을 신칙(申飭)하신 뜻과는 어긋남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절반으로 감(減)하여 보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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