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계해
임금이 승지를 소견하고, 말하기를,
"내일은 바로 인묘(仁廟)께서 청한(淸汗)009) 을 답십리(踏十里)에 가서 만나보던 날이므로, 내가 마음속으로 갑절이나 사모하여 슬픔을 느끼게 된다. 내일 마땅히 선무사(宣武詞)에 나아가 전작(奠酌)하겠다."
하였다.
2월 2일 갑자
임금이 선무사(宣武祠)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이어서 의소묘(懿昭墓)에 거둥하고, 지나는 길에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나아갔다. 임금이 선무사에 이르러 읍례(揖禮)와 작헌례를 행하고, 이를 마치자 수위(首位)의 술잔을 가져다 임금이 먼저 마시고, 이어서 승지와 시위한 여러 신하들에게 내려 주어 차례로 마시도록 하였다. 또 부위(副位)의 술잔을 가져 오게 하여 충신(忠臣)의 후손 및 명(明)나라 사람의 후손에게 내려 주도록 명하고, 임금이 수심에 잠겨 말하기를,
"황하(黃河)가 맑지 못하여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흐리니, 오늘 제주(祭酒)로 그런 마음을 씻으려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지덕사(至德祠)에 치제(致祭)하도록 명하였다. 지덕사는 바로 양녕 대군묘(讓寧大君廟)로서, 남관왕묘(南關王廟) 앞에 있는데, 환궁할 때 듣고서 알고 하교하기를,
"양녕 대군은 우리 동방의 태백(太伯)010) 으로, 지덕의 이름을 얻게 된 까닭이다."
하고, 승지를 보내어 그 사우(祠宇)를 살펴보게 하고, 대궐에 돌아오기에 이르러서는 곧바로 관왕묘와 지덕사의 제문(祭文)을 친히 지어서 날짜를 정하지 말고 치제하도록 하였으며, 또 그 사우를 수리하고 후손을 조용(調用)하도록 명하였다.
2월 3일 을축
유신을 불러 《시경(詩經)》 비풍장(匪風章)과 하천장(下泉章)을 읽게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매번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비답을 생각하면, 스스로 모르는 사이에 밤중에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소주(小註)의 진씨(陳氏) 학설은 거짓인 듯하다.011) 정말 그의 말과 같다면 황하(黃河)가 맑아지는 경우가 어찌 이와 같이 기약이 없단 말인가?"
하였다.
2월 4일 병인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경서(經書)를 강독하였다.
2월 5일 정묘
임금이 자서(字書)를 들이도록 명하고, 원손(元孫)의 이름을 정하여 직접 써서 춘방관(春坊官)에게 주어 동궁에 고하도록 하였다.
호남 도신에게 명하여 무고(誣告)한 사람 김천성(金天成)을 베도록 하였다. 당시 김천성이 사사로움을 끼고 다른 사람을 무고하기를, ‘역적 이하징(李夏徵)과 함께 모의하였다.’고 하였으므로, 도신이 사실을 조사하여 아뢰었는데, 임금이 사람의 마음은 측량할 수 없다 하여 도신으로 하여금 남을 무고한 율(律)로 정법(正法)하게 하였다. 지난번에 김의택(金義澤)이란 자가 고발한 것이 있었는데, 도신이 허황되다는 것으로 장문(狀聞)하니, 임금이 일차(日次)에 구애받지 말고 엄중히 형신하여 남을 무고한 실상을 자복받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시기가 지나도록 혼취(婚娶)하지 못한 자에게 진휼청에서 쌀과 돈을 지급하여 혼인하게 하되, 남자는 30세로 한정하고 여자는 23세로 한정하여 혼인하기를 기다린 뒤에 부관(部官)이 진휼청에 보고해서 거짓이든 사실이든 서로 혜택을 받는 폐단이 없게 하라고 명하였다.
2월 7일 기사
계복(啓覆)012) 한 죄인 복도함(卜道咸) 등 4인을 작처(酌處)하고, 임금이 하교하기를,
"작처(酌處)해야 할 사람이 만약 해를 넘기다가 간혹 물고(物故)한다면 어찌 왕자(王者)가 삼복(三覆)하여 목숨을 살리는 뜻이겠는가?"
하고, 바로 대신과 형조 판서에게 명하여 문안(文案)을 가지고 입시하게 하였다. 복도함은 바로 경성(鏡城) 사람인데, 그의 처(妻)가 계모(繼母)에게 순종하지 않는다 하여 구타해서 죽게 하고는 스스로 목을 매었다고 핑계대었다. 임금이 그 문안을 보고 하교하기를,
"자식이 계모를 위하여 그 처를 구타하였고, 계모는 그 자식을 위하여 그 흔적을 없애려고 하였으니, 그것은 불쌍히 여길 만한 데 관계된다. 불효한 며느리를 위하여 그 남편에게 상명(償命)013) 하게 하는 것이 어찌 왕도 정치이겠는가?"
하고, 특별히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또 조노미(趙老味) 등 4인은 감률(勘律)을 차등 있게 특별히 감해 주도록 하였다.
홍경해(洪景海)를 영광 안핵 어사(靈光按覈御史)로 삼았는데, 당시 호남의 도신이 이세현(李世玄) 등의 음옥(淫獄)을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2월 9일 신미
헌부 【집의 박창윤(朴昌潤)이다.】 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고, 또 상달하여 임서호(任瑞虎)·민원해(閔元諧) 두 역적에 대한 노적(孥籍)을 빨리 왕부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는 일을 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친정(親政)을 행하였는데, 이조 판서 정휘량(鄭翬良)과 병조 판서 이후(李)가 행한 정사(政事)이었다. 홍계희(洪啓禧)를 좌빈객으로, 김치인(金致仁)을 부제학으로, 조숙(趙)을 교리로, 주형질(朱炯質)을 지평으로, 한광회(韓光會)를 대사성으로, 이득종(李得宗)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11일 계유
대사헌 김한철(金漢喆)이 상소하여 다섯 가지 일을 진달하였는데, 첫째 전제(田制)를 이정(釐正)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 도적을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고, 셋째 해방(海防)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고, 넷째 언로(言路)를 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고, 다섯째 학문의 강독을 부지런히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전제에 대해 논하기를,
"개정한 지 이미 오래되어 점차 무너져 어지러워져서 애당초 씨앗을 뿌리지 않았으나, 백지 징세(白地徵稅)하므로, 백성들이 지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고, 인하여 개량(改量)하기를 청하니, 왕세자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고 답하였으나, 뒤에 모두 시행되지 않았다.
임금이 대신과 선혜청 당상관을 소견하여 기민(飢民)이 얼마인가를 하문하자, 선혜청 당상 민백상(閔百祥)이 말하기를,
"며칠 전에는 7천여 명이었는데, 지금은 8천 7백여 명에 이르고 있으며,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도 없습니다."
하고, 신만(申晩)은 말하기를,
"밥을 빌어먹는 방법이 시골이 서울보다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유신에게 명하여 《서전(書傳)》을 읽게 하였다.
2월 14일 병자
중궁전(中宮殿)이 편찮은 까닭에 약방에서 주원(廚院)에 옮겨 직숙하였다. 당시 곤전(坤殿)이 피를 토한 것으로 인하여 원기(元氣)가 갑자기 가라앉았는데, 연달아 삼다(蔘茶)를 올렸지만 조금의 동정(動靜)이 없었으므로, 상하(上下)가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2월 15일 정축
신시(申時)에 중궁전(中宮殿) 서씨(徐氏)가 관리합(觀理閤)에서 승하(昇遐)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경우는 슬퍼할 바가 없으나, 원량(元良)이 슬퍼하며 몸이 야위는 모습을 보면, 장차 어떻게 억제하도록 해야 하겠으며, 동조(東朝)에는 또한 무슨 말로 진달해야 하겠는가? 옛날 사람은 색동옷을 입고 어버이를 섬겼는데, 이제 앞으로 기년복[朞服]을 입고 동조를 섬기는 처지가 되었다. 옛날에 내가 상복[孝純服]을 입고 여(輿)에 오르자 보는 사람들이 울먹였는데, 더구나 지금 나이 64세이겠는가?"
하였다.
이날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이 졸(卒)하였다. 예단(禮單)이 먼저 들어오고 조금 있다가 중궁전(中宮殿)이 승하하였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장차 곡반(哭班)에 나가려 하는데, 갑자기 좌의정과 우의정을 입시하도록 명하여 임금이 손을 잡고 말하기를,
"경들은 이 가슴속의 슬픔을 이해하여 한 번 덜 수 있게 하라."
하자,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우의정 신만(申晩) 등이 감히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고, 다만 곧바로 나아갔다가 일찍 환궁하라는 뜻을 아뢰고 물러났다. 이때 승정원과 삼사의 신하 및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서로 잇달아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미 좌의정과 우의정에게 하교하였는데 어찌 이런 일을 하는가?"
하고, 인하여 승지를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승지 이최중(李最中)이 빨리 앞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이렇게 망극(罔極)한 시기를 당하여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망극한 일을 하시려 합니까?"
하니, 임금이 잇달아 엄중한 하교를 내렸으나, 이최중이 눈물을 흘리며 더욱 힘껏 간쟁하였다.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이최중에게 물러나도록 명하였는데, 이최중이 말하기를,
"신은 청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감히 물러날 수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최중의 직임을 체차하도록 명하고, 인해서 합문(閤門)을 닫고 마침내 보련(步輦)으로 연영문(延英門)을 나갔다. 대간(臺諫)과 옥당(玉堂)에서 앞으로 나와 다투어 고집하자, 임금이 또 모두 체임하도록 명하였다. 대사간 이득종(李得宗)이 말하기를,
"신의 관직을 체임하더라도 전하의 이번 행차는 결단코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삼사의 신하를 중도 부처(中途付處)014) 하도록 명하였다가, 조금 뒤에 단지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밤 4경(四更)에야 비로소 궁궐로 돌아와 영의정 이천보(李天輔)를 총호사(摠護使)로 삼았다.
2월 16일 무인
염습(斂襲)하고, 이어서 소렴(小斂)을 행하였다. 소렴을 진행하는데는 일찍이 고례(故例)가 있었기 때문에 이날 행한 것이었다.
김상중(金尙重)을 고부사(告訃使)로, 이명식(李命植)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2월 19일 신사
대렴(大斂)을 행하고서 영상(靈床)을 경훈전(景薰殿)에 봉이(奉移)하고 인해서 재궁(梓宮)에 내렸다.
혜청 당상에게 명하여 기민(飢民)에게 건량(乾糧)을 지급하는 일을 돌아가며 감독하도록 하였는데, 당시 두 사람의 당상관이 모두 도감 당상의 직임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또 호조 판서에게 명하여 진휼청에 가서 죽(粥)을 마련하여 기민에게 먹이게 하였다. 또 기전(畿甸)과 관동(關東)에 국휼(國恤) 때에 전례(前例)로 하던 복정(卜定)015) 을 면제하도록 명하고, 또 호서(湖西)·영남(嶺南)·관동 세 도의 재결(災結)을 실결(實結)로 환원시킨 것을 감하도록 명하였다.
윤동승(尹東昇)을 특별히 제수하여 응교로, 이인원(李仁源)·정존겸(鄭存謙)을 부교리로, 홍양한(洪良漢)·김화진(金華鎭)을 수찬으로 삼았다.
2월 20일 임오
진시(辰時)에 성복(成服)하였는데, 그 의주(儀註)는 이러하였다.
전하는 자최 장기(齊衰杖朞)016) 이니, 의상(衣裳) 【차등(次等)의 거친 생포(生布)를 쓴다.】 중의(中衣) 【최복(衰服)을 받드는 자는 조금 가는 생포를 쓴다.】 를 입고, 관(冠) 【조금 가는 생포를 사용하여 세 번 주름을 잡아 오른쪽으로 향하게 하고 포(布)로 무(武)와 갓끈[纓]을 만든다.】 과 건(巾) 【상관(喪冠)을 받드는 자는 조금 가는 생포를 쓴다.】 을 쓰고, 수질(首絰)·요질(腰絰) 【모두 생마를 쓴다.】 ·교대(絞帶) 【거친 생포를 쓴다.】 를 착용하고, 상장(喪杖) 【오동나무로 한다.】 을 짚고, 흰 신 【흰 면포로 만든다.】 을 신는다. 공제(公除)017) 전의 시사복(視事服)은 백포(白袍)를 입고, 백포(白布)로 감싼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백포로 감싼 오서대(烏犀帶)를 띠고, 백피화(白皮靴)를 신는다. 무릇 상사(喪事)에는 최복(衰服)을 입는다. 연거복(燕居服)은 백포의(白布衣)를 입고, 백포립(白布笠)을 쓰고, 생포대(生布帶)를 띤다. 공제 뒤의 시사복은 백포(白袍)를 입고, 익선관을 쓰고, 오서대를 띠고, 백피화를 신는다. 연거복은 백포의를 입고, 흑포립(黑布笠)을 쓰고, 백포대(白布帶)를 띤다. 11개월의 연제(練祭)에는 연관(練冠) 【8승포(八升布)를 사용하되, 연포(練布)로 무(武)와 갓끈을 만든다.】 과 건(巾) 【연포를 사용한다.】 을 쓰고, 수질·부판(負版)·벽령(辟領)·최복(衰服)을 벗고, 의상(衣裳) 【승포를 사용하되 누비지 않는다.】 을 고쳐서 만들어 입고, 연중의(練中衣)를 입고, 연포대(練布帶)를 띠고, 요질 【요질은 다듬은 칡[葛]을 사용하며 갓끈은 연포(練布)로 한다.】 을 착용하되, 오동나무 상장(喪杖)과 흰 신[素履]은 그대로 한다. 그리고 13개월의 상제(祥祭)에는 참포(黲袍)를 입고, 익선관을 쓰고, 오서대를 띠고, 백피화를 신는다. 15개월의 담제(禫祭)에는 현포(玄袍)를 입고, 익선관을 쓰고, 오서대를 띠고, 백피화를 신는다. 담제 뒤에는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옥대(玉帶)를 띤다.
왕세자는 자최 장기(齊衰杖朞)이니, 의상 【차등의 거친 생포를 쓴다.】 과 중의 【최복을 받드는 자는 조금 가는 생포를 쓴다.】 를 입고, 관 【조금 가는 생포를 사용하여 세 번 주름을 잡되 오른쪽으로 향하게 하고 포(布)로 무(武)와 갓끈을 만든다.】 과 건 【상관(喪冠)을 받드는 자는 조금 가는 생포를 쓴다.】 을 쓰고, 수질·요질 【모두 생마(生麻)를 쓴다.】 을 하고, 교대 【거친 생포를 쓴다.】 를 띠고, 상장 【오동나무로 한다.】 을 짚고, 소리(疏履)를 신는다. 졸곡(卒哭) 뒤 시사복은 포포(布袍) 【생포를 쓴다.】 를 입고, 생포로 감싼 익선관 【삿갓도 포(布)로 감싼다.】 을 쓰고, 생포로 감싼 오서대를 띠고, 백피화를 신는다. 무릇 상사에는 최복을 입는다. 11개월의 연제에는 연관(練冠) 【8승포를 사용하되, 연포(練布)로 무(武)와 갓끈을 만든다.】 ·건 【연포를 쓴다.】 을 쓰고, 수질·부판·벽령(辟領)·최복을 없애며, 의상 【7승포를 사용하되 누비지 않는다.】 을 고쳐서 만들어 입고, 연중의를 입고, 연포대(練布帶)를 띠고, 요질 【요질은 다듬은 칡을 사용하며 갓끈은 연포로 쓴다.】 을 착용하고, 오동나무 상장은 그대로 짚고, 삼[麻]으로 만든 신을 신는다. 연제 뒤의 시사복은 백포(白袍)를 입고, 백포(白布)로 감싼 익선관 【삿갓도 백포로 감싼다.】 을 쓰고, 백포로 감싼 오서대를 띠고, 백피화를 신는다. 13개월의 상제에는 참포를 입고, 익선관 【삿갓은 그대로 흰 것을 쓴다.】 을 쓰고, 오서대를 띠고, 백피화를 신는다. 15개월의 담제에는 현포(玄布)를 입고, 익선관을 쓰고, 오서대를 띠고, 백피화를 신는다. 【졸곡(卒哭) 전에 진현(進見)할 때에는 생포 직령의(生布直領衣)를 입고, 생포로 감싼 삿갓을 쓰고, 생포대(生布帶)를 띤다. 졸곡 뒤에 진현할 때에는 포포(布袍)를 입고, 생포로 감싼 익선관을 쓰고, 생포로 감싼 오서대를 띠고, 백피화를 신는다. 상사에는 최복을 입는다. 상제 뒤 연거(燕居) 때에는 백의를 입고, 백립을 쓰고, 띠를 띤다. 담제 뒤 연거 때에는 백의를 입고, 흑립을 쓰고 흑대를 띠고 3년 동안 심상(心喪)한다.】
【태백산사고본】 63책 89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40면
【분류】왕실(王室) / 의생활(衣生活)
왕세자빈은 자최 기년(齊衰朞年)018) 이니, 대수(大袖)·장군(長裙) 【차등의 거친 생포(生布)를 쓴다.】 ·개두(盖頭)·두수(頭𢄼) 【조금 가는 생포를 쓴다.】 ·죽차(竹釵)를 착용하고, 삼띠 【삼띠는 거친 생포로 대용(代用) 한다.】 를 띠고, 면포(綿布)로 된 신 【백면포(白綿布)로 만든다.】 을 신는다. 11개월의 연제(練祭)에는 대수·장군 【7승 포를 사용하되 누비지 않는다.】 을 고쳐 만들어 입고, 연포(練布)로 된 개두·두수를 착용하고, 띠를 띠고, 백피혜(白皮鞋)를 신는다. 13개월의 상제(祥祭)에는 짙게 물들인 옥색(玉色)의 대수·장군을 입고, 흑개두(黑盖頭)·흑두수(黑頭𢄼)를 착용하고, 흑대(黑帶)를 띠고, 백피혜를 신는다. 15개월의 담제에는 흑색의 대수·장군을 입고, 흑개두·흑두수를 착용하고, 흑대를 띠고 백피혜를 신는다. 【졸곡(卒哭) 뒤에 진현(進見)할 때에는 생포로 된 대수·장군을 입고, 개두·두수를 착용하고, 띠를 띠고, 백피혜를 신으며, 3년 동안 심상(心喪)하는 것은 세자와 동일하다.】 친녀(親女)의 복제(服制)는 왕세자빈과 같다. 【연제·상제·담제와 3년 동안심상하는 것은 세자빈과 같다.】
【태백산사고본】 63책 89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40면
【분류】왕실(王室) / 의생활(衣生活)
[註 018] 자최 기년(齊衰朞年) : 거친 베로 상복을 만들어 만 1년 동안 입는 복상(服喪). 참최(斬衰)는 상복의 아랫도리를 꿰매지 않는 데에 비하여 자최는 그 곳을 꿰매는 것임.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은 자최 기년(齊衰朞年)이니, 대수·장군 【차등의 거친 생포를 쓴다.】 ·개두·두수 【조금 가는 생포를 쓴다.】 ·죽차(竹釵) 【전계(箭筓)이다.】 를 착용하고, 포대(布帶) 【거친 생포를 쓴다.】 를 띠고, 면포로 된 신 【백면포(白綿布)로 만든다.】 을 신는다. 공제(公除) 뒤에는 백포(白布)로 된 대수·장군을 입고, 흑개두·흑두수를 착용하고, 백포로 된 띠를 띠고, 기년(朞年)이 되면 길복(吉服)을 입는다.
내명부(內命婦)의 빈(嬪) 이하의 상복은 대왕 대비전과 같으며, 공제(公除) 뒤의 진현(進見) 때에는 흰 의상(衣裳)을 입고, 검은 띠를 띠며, 상제(祥祭) 뒤와 담제(禫祭) 전에는 같다.
상궁(尙宮) 이하는 자최 기년(齊衰朞年)이니, 배자(背子) 【본국의 몽두의(蒙頭衣)는 차등의 거친 생포를 쓴다.】 를 입고 개두·두수 【조금 가는 생포를 쓰며 시비(侍婢) 이하는 개두가 없다.】 를 착용하고, 삼띠[麻帶] 【거친 생포로 대용(代用)한다.】 를 띠고, 흰 신 【백피(白皮)로 만든다.】 을 신는다. 공제 뒤의 시위 때에는 흰 배자를 입고, 흰 띠를 띠며, 상제 뒤와 담제 전에는 짙게 물들인 옥색(玉色) 배자를 입고 검은 띠를 띤다.
수규(守閨) 이하는 자최 기년(齊衰朞年)이니, 배자 【차등의 거친 생포를 쓴다.】 를 입고 개두·두수 【조금 가는 생포를 쓰며 시비(侍婢)는 개두가 없다.】 를 착용하고, 삼띠[麻帶] 【거친 생포로 대용한다.】 를 띠고, 흰 신 【백피(白皮)로 만든다.】 을 신는다. 상제 뒤에는 짙게 물들인 옥색(玉色)의 배자를 입고, 검은 띠를 띠고 3년상(三年喪)을 마친다.
대왕 대비전 상궁 이하의 상복은 임금의 상복을 따르고, 지방에 나간 이는 대전 상궁 이하의 상복과 같다.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은 자최 기년이니, 의상(衣裳) 【차등의 거친 생포를 사용한다.】 ·중의(中衣) 【최복을 받든 자는 조금 가는 생포를 쓴다.】 를 입고, 관(冠) 【조금 가는 생포를 사용하여 세 번 주름을 잡되 오른쪽으로 향하게 하고, 포(布)로 무(武)와 갓끈을 만든다.】 ·건(巾) 【상관을 받든 자는 조금 가는 생포를 사용한다. 망건(網巾)은 흰 선을 두르되 금옥권(金玉圈)은 없애지 않는다.】 을 착용하고, 수질·요질 【모두 생마(生麻)를 쓴다.】 을 착용하고, 교대(絞帶) 【거친 생포를 쓴다.】 를 띠고, 백피화를 신는다. 공복(公服)은 면포로 된 단령의(團領衣) 【생포를 쓴다.】 를 입고, 생포로 감싼 모자 【뿔도 또한 생포로 싼다.】 를 쓰고, 생포로 감싼 각대(角帶)를 띠고, 삼으로 된 신을 신는다. 무릇 상사(喪事)에는 최복을 입는다. 연거(燕居) 때에는 생포의를 입고, 생포립을 쓰고, 생포대를 띤다. 공제 뒤에는 백포로 된 단령의를 입고, 백포로 감싼 모자를 쓰고, 삿갓도 같게 하고, 백포로 감싼 각대를 띤다. 상제 전에 입시할 때에는 백포로 된 단령의를 입고, 오사모를 쓰고 오각대(烏角帶)를 띤다. 13개월의 담제에는 천담복을 입고, 오사모를 쓰고, 흑각대를 띠고, 백피화를 신는다. 평상시에는 길복(吉服)을 입는다. 담제 전에 입시할 때에는 천담복을 입는다. 담제에는 흑의(黑衣)를 입고, 오사모를 쓰고, 흑각대를 띠고, 흑피화(黑皮靴)를 신는다.
종친 및 문무 백관의 처(妻)는 백포로 된 대수·장군을 입고, 개두·두수를 착용하고, 띠를 띠고, 백피혜를 신는다. 졸곡(卒哭)이 지나면 상복을 벗는다.
각도 대소 사신(使臣) 및 지방관과 전함관(前銜官)의 상복은 백관의 상복과 같으며 처(妻)의 상복은 백관의 처와 같다.
동성(同姓)과 이성(異姓)의 시마(緦麻) 이상 친족은 【전함(前銜) 및 시임(時任)과 무직인(無職人)을 논하지 않는다.】 자최 기년이니, 백관과 같다. 처(妻)는 백관의 처와 같다. 동성이나 이성의 시마 이상의 여자도 자최 기년을 입는다.
수릉관(守陵官)과 시릉 내시(侍陵內侍)는 자최 장기복(齊衰杖朞服)을 입는데, 친자(親子)의 복(服)과 같다.
내시(內侍)·사알(司謁)·사약(司鑰)·반감(飯監)은 자최 기년이니, 백관들의 상복과 같다. 【세자궁(世子宮)의 내시 이하는 13개월의 상제(祥祭) 뒤에는 천담복(淺淡服)을 입고 3년상을 마친다.】 별감(別監)과 각 차비인(差備人)은 거친 생포로 된 직령의(直領衣)를 입고, 생포건을 쓰고 생포대를 띠고, 【거친 생포를 쓴다.】 백승혜(白繩鞋)를 신는다. 졸곡 뒤에는 백의를 입고, 흑건을 쓰고, 흑대를 띤다. 상제 뒤와 담제 전에는 천담복을 입는다. 【세자궁의 별감 이하는 13개월의 상제를 지낸 뒤에는 천담복으로 3년상을 마친다.】
【태백산사고본】 63책 89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40면
【분류】왕실(王室) / 의생활(衣生活)
혼전(魂殿)에서의 종실(宗室)의 상복은 백관과 같다. 13개월의 연제(練祭)에는 천담복을 입고, 오사모를 쓰고, 흑각대를 띠고, 백피화를 신고 3년상을 마친다.
직사(職事)가 있는 전함(前銜) 각품(各品) 및 성중관(成衆官)은 【내금위(內禁衛)·충의위(忠義衛)·충찬위(忠贊衛)·충순위(忠順衛)·별시위(別侍衛)·족친위(族親衛)의 부류이다.】 면포로 된 단령의 【생포를 쓴다.】 를 입고, 생포로 감싼 모자 【각(角)도 생포로 감싼다.】 를 쓰고, 생포로 감싼 각대를 띠고, 백피화를 신는다. 연거복(燕居服)은 생포의(生布衣)를 입고 생포립(生布笠)을 쓰고, 생포대(生布帶)를 띤다. 공제 뒤에는 백포로 된 단령의를 입고, 백포로 감싼 모자를 쓰고, 백포로 감싼 각대를 띤다. 연거복은 백의를 입고, 백립을 쓰고, 백대를 쓰고, 기년(朞年)에 상복을 벗는다.
녹사(錄事)·서리(書吏)는 생포의를 입고, 생포로 감싼 모자, 생포로 감싼 평정건(平頂巾), 생포로 감싼 삿갓을 쓰고, 생포로 된 띠를 띠고, 백피화를 신는다. 공제 뒤에는 백의를 입고 백모(白帽)·평정건을 쓰고, 백대를 띠고, 기년(朞年)에 상복을 벗는다.
생원(生員)·진사(進士)·생도(生徒)는 생포의를 입고, 생포립을 쓰고, 생포대를 띠고, 백피화·백피혜를 신는다. 공제 뒤에는 백의를 입고, 백립을 쓰고, 백대를 띠고, 기년에 상복을 벗는다. 【학교(學校)에 들어갈 적에는 백건을 쓰고 전내(殿內)에 들어갈 적에는 흑건을 쓴다.】
【태백산사고본】 63책 89권 7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41면
【분류】왕실(王室) / 교육(敎育) / 의생활(衣生活)
사직서(社稷署)와 종묘서(宗廟署)의 관원 및 제릉(諸陵)·제전(諸殿)의 관원이 입직(入直)할 적에는 모두 평상복(平常服)을 입고, 오사모를 쓰고, 흑각대를 띠고, 흑피화(黑皮靴)를 신는다. 밖으로 나갈 적에는 백관의 상복(喪服)과 같다.
갑사(甲士)와 정병(正兵)은 백의를 입고, 백립(白笠)을 쓰고, 생포대를 띠고, 백피화를 신는다. 공제 뒤에는 백의를 입고, 백립을 쓰고, 백대를 띠고 기년(朞年)에 상복을 벗는다.
서인(庶人) 및 승도(僧徒)는 백의를 입고, 백립을 쓰고, 백대를 띠고, 기년에 상복을 벗는다.
서인(庶人)인 여자는 백의를 입다가 졸곡(卒哭)이 되어 상복을 벗는다.
초조례(抄皁隷)·나장(羅將)은 백건을 쓰고, 백대를 띠며 기년(朞年)이 되어 상복을 벗는다.
제도(諸道)의 대소 사신(使臣) 및 각 관원은 부고(訃告)를 받는 날에 정청(正廳) 【객사(客舍)이다.】 에 향탁(香卓)을 설치하고, 소복(素服) 【오사모를 쓰고 흑각대를 띤다.】 으로 입정(入庭)하여 사신은 동쪽에 외관(外官)은 서쪽에 두 줄로 북쪽을 향하여 꿇어앉고, 집사자(執事者)가 향(香)을 올리면 사신 및 외관이 부복(俯伏)하여 슬프게 곡(哭)하되, 사배례(四拜禮)를 행한다. 부음(訃音)을 들은 제6일째에 성복(成服)을 하는데, 그날 이른 아침에 정청(正廳)에 향탁(香卓)을 설치하고, 소복을 벗고 자최(齊衰)를 입고서 입정(入庭)하여 꿇어앉으면, 집사자가 향을 올리고 사신과 외관은 부복하여 슬프게 곡하고 사배례를 행한다. 공제 뒤에 상복(喪服)을 고치는 일과 연제·상제·담제 절차는 경관(京官)과 같다. 제도의 관찰사와 절도사 그리고 목사 이상은 사람을 파견하여 전문(箋文)을 올려 진위(陳慰)한다. 【2품 이상의 지방관은 목사가 아니더라도 전문을 올리며 연변(沿邊)의 고을에서는 거애(擧哀)하지 않는다.】
【태백산사고본】 63책 89권 7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41면
【분류】왕실(王室) / 의생활(衣生活)
임금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약방의 세 제조, 대신을 인견 하였는데, 모두 소선(素膳)을 올리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조(東朝)께서는 하루도 하기가 어려울 것인데, 어찌 성복(成服)한 뒤를 기다리겠는가? 나의 경우 방반(傍盤)을 설치하지 않고 밖에 있을 적에는 소선을 하고 대내(大內)에 들어와서는 고기를 먹는다면, 소선을 마련하는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동궁(東宮)에 이르러서는 오늘 밥을 먹도록 권하고 내일 고기를 먹도록 권하는 것은 너무 급박한 듯하다. 성인(聖人)이 말하기를, ‘예법과 겸양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면 무슨 어려운 문제가 있겠는가?’ 하였는데, 지금 갑자기 대리하는 원량에게 고기를 먹도록 청하는 일은 이웃 나라에 알려지게 할 수 없다."
하였는데,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극히 마땅합니다. 신 등이 날짜를 조금 늦추어 청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고, 좌의정 김상로(金尙魯)는 말하기를,
"국휼(國恤) 때에 대·중·소의 제사에 대하여 《오례의(五禮儀)》에는 졸곡(卒哭) 뒤에 행한다고 하였고, 《상례보편(喪禮補編)》에는 공제(公除) 뒤에 행한다고 하였으니, 손아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제는 정사를 보는 한계가 되는 것인데, 지금 공제 뒤라고 하여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너무 급박한 듯합니다. 그리고 뭇 신하들이 상복(喪服)에 대해 말한다면, 이는 바로 부장 기복(不杖朞服)인데, 공제 뒤에 백관이 백포모(白布帽)와 백포대를 착용한다면 어찌 너무 급박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공제하고 익선관(翼善冠)을 쓰니, 그것은 바로 오모(烏帽)인 것이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어찌 전하께서 공제하셨다고 하여 신 등도 복을 벗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홍계희(洪啓禧)를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이 단락(段落)은 《상례보편》의 범례주(凡例註)에 있는데, 내상(內喪)은 졸곡(卒哭) 뒤에 백포를 착용하지만, 만약 내상이 먼저 있으면 공제(公除) 뒤에 백포를 착용한다고 하였으니, 과연 어떤가?"
하자, 홍계희가 말하기를,
"금년을 경술년019) 에 비교하면 전하에게는 진실로 다름이 있겠지만, 뭇 신하들에게 있어서는 금년이나 경술년이 어찌 다르겠습니까? 〈내상(內喪)이〉 먼저 있을 경우에 대한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백관들에게 백포의 착용을 경술년의 전례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 《상례보편》 중의 먼저 있을 경우[在先]라는 두 글자는 바로 압존(壓尊)의 뜻으로 고치게 하고, 신료(臣僚)에게 《상례보편》에 의거하여 공제 뒤에 백모와 백대를 착용하고 기년(朞年)을 마치도록 명하였다.
평안 감사 홍봉한(洪鳳漢)을 내직(內職)으로 천전(遷轉)시키도록 명하였는데, 빈궁(嬪宮)을 위안(慰安)하려는 것이었다.
2월 21일 계미
대행 왕비(大行王妃)의 시호(諡號)를 정성(貞聖), 【너그럽고도 사사로움이 없다는 정(貞)과 여러 사람이 훌륭하다고 드날린다는 성(聖)이다.】 능호(陵號)를 홍릉(弘陵), 전호(殿號)를 휘령(徽寧)이라고 올렸다.
경차관(敬差官)을 양서(兩西)에 파견하여 우주(虞主)020) 에 쓸 뽕나무를 가져오게 하였다.
김상익(金尙翼)을 대사헌으로, 이유수(李惟秀)를 대사간으로, 김시묵(金時默)을 집의로, 송덕중(宋德中)을 사간으로, 박기채(朴起采)를 장령으로, 이세택(李世澤)을 헌납으로, 서형수(徐逈修)·임준(任㻐)을 정언으로 삼았다.
2월 22일 갑신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의 시호를 효민(孝敏)이라고 내렸다. 이날 임금이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정치달의 시호를 의논하도록 명하자, 옥당(玉堂)의 홍양한(洪良漢)·김화진(金華鎭)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빈례(殯禮)를 겨우 마쳐 많은 사람들의 슬픔이 바야흐로 새로우니, 공제(公除) 뒤를 기다렸다가 거행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또 차자를 올리기를,
"공제는 예(禮)로서 막는 것이며 제도로서 엄격히 하는 것으로, 모든 직사(職事)를 폐하고 그 기한을 기다리는 것이니, 어찌 중대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의정부는 정본(政本)인데, 공제가 끝나기도 전에 개좌(開坐)하여 의정부의 사무를 행하는 것은 다른 관사(官司)에 견주어 더욱 가볍게 논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도위(都尉)의 역명(易名)에 대해서는 서경(署經)021) 이 비록 아무 날짜와 어긋나서 지체된다 하더라도 아마 늦지는 않을 듯합니다. 청컨대 유신의 말을 따르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날마다 쇠모(衰耗)해 가는 임금을 어찌 고달프게 하는가? 즉시 거행하여 나의 병을 편케 하라."
하고, 마침내 참찬과 검상에게 명하여 구전(口傳)으로 차출(差出)하여 빨리 거행하도록 하고, 이어서 서경을 없애고 선시(宣諡)하게 하였다. 이에 태상시(太常寺)에서 의논하여 올리니, 그날 밤에 즉각 선시(宣示)하게 하였다.
홍상한(洪象漢)을 우참찬으로, 윤동승(尹東昇)을 검상으로 삼았다.
2월 23일 을유
임금이 도감 당상(都監堂上)을 소견하였다. 공조 판서 이정보(李鼎輔)가 빈전(殯殿)에 사용하는 오봉산 병풍(五峰山屛風) 한 조각이 파손되었다고 앙품(仰稟)하니, 종이를 발라서 사용하도록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단청(丹靑)도 때가 묻어 흐릿한 곳은 고치지 않을 수 없으며, 당가(唐家)022) 도 한쪽이 떨어진 곳은 비록 보수를 가한다 하더라도 다시 단청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두게 명하고, 이어서 전교(傳敎)를 쓰게 하기를,
"빈전에서 사용하는 찬궁(欑宮) 외의 소장(素帳)·홍초장(紅綃帳)·교의(交椅)·제상(祭床) 등의 물품은 산릉(山陵)에서 그대로 사용하고, 제상 및 촉대상(燭臺床)·향상(香床) 등의 물품은 혼전(魂殿)에서 그대로 쓰되 혼전의 모란병(牧丹屛)은 저포(紵布)를 사용하는 일을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4일 병술
수령들의 부임을 지체하는 일이 많다 하여 공제(公除)를 기다리지 말고 사조(辭朝)하도록 명하였다.
2월 25일 정해
신릉(新陵)을 창릉(昌陵)의 왼쪽 산등성이에 정하였다. 이보다 앞서 장릉(長陵)의 좌우 산등성이를 봉심(奉審)하였지만 연운(年運)이 맞지 않았으며, 임금이 장릉에는 지난날에 게판(揭板)한 일이 있었다는 것 때문에 오로지 서도(西道)에 뜻을 두고 다시 여러 대신들에게 남원군(南原君) 이설(李)과 함께 창릉의 국내(局內)에 가서 살펴보도록 하였는데, 총호사가 앵봉(鶯峰) 아래 셋째 기슭의 간좌(艮坐)에 새로 점지한 곳이 있다고 돌아와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뜻은 서도에 있었으니, 비록 주먹만한 곳을 얻더라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길 만하다."
하였는데, 그것은 대체로 명릉(明陵)과 소녕원(昭寧園)이 모두 서도에 있었기 때문에 성상의 뜻이 기필코 서쪽으로 귀착시키려고 한 것이었으니, 다함이 없는 효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충청 감사 김상철(金尙喆)이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진휼(賑恤)하는 일을 힘쓰도록 신칙하였다.
집의 이기경(李基敬)이 상달하기를,
"대행 왕비(大行王妃)가 편찮았던 환후(患候)는 여러 해 동안 위독했던 것에 견줄 것이 아닌데, 여러 의원(醫員)들이 증세에 대응하여 약재(藥劑)를 잘 올리지 못하여 이틀 만에 마침내는 병세가 위독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청컨대 대령(待令)했던 어의(御醫)들을 모두 잡아다 추문하여 정죄(定罪)하게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선묘(宣廟)을해년023) 의 졸곡(卒哭) 뒤에 백의(白衣)와 백관(白冠)을 착용하고 정사를 보았던 것은 장기복(杖朞服)으로 3년복(三年服)을 본받음이 있었던 것인데, 대조(大朝)께서 공제 뒤에 시사복(視事服)으로 익선관과 오서대를 착용하는 것은 갑자기 종길(從吉)024) 하는 것으로서, 아마도 예의(禮意)에 어긋나는 듯하며, 뭇 신하들이 새로 국모(國母)의 상사(喪事)를 당하여 겨우 10여일 동안 복(服)을 입었다가 거친 〈상복(喪服)을〉 바꾸어 흰 옷을 착용하면서 힘써 성상의 복장을 따르려고 하는 것은 생각이 옳지 않으며 절차가 점차 어긋납니다. 청컨대 대조의 시사복은 공제 전후를 논하지 말고 모두 포(布)로 감싸서 착용하다가 졸곡(卒哭) 때에 이르러 익선관과 오서대를 착용하고 백관 또한 그대로 생포(生布)로 된 공복(公服)을 입다가 졸곡 뒤에 변경하는 일을 대조께 앙품(仰稟)하셔서 널리 물어 재정(裁定)하게 하소서."
하니, 소조(小朝)가 이 일을 임금에게 품(稟)하였는데, 임금이 하교하기를,
"선묘(宣廟) 때의 일은 오늘날에 크게 적합하지 못한데, 생각이 옳지 못하다는 등의 말을 원량에게 상달하였으니, 분의(分義)에 있어서 한심하다."
하고, 이기경의 관직을 체임하도록 명하였다. 그 뒤에 임금이 마침내 이기경의 말과 같이 제도를 정하여 《상례보편(喪禮補編)》에 기재하게 하였다.
홍낙성(洪樂性)을 승지로 삼았다.
2월 27일 기축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이 편찮아서 약방에서 본원(本院)에 직숙하였다. 이날 임금이 바야흐로 빈전(殯殿)으로 가겠다고 하교하였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곧 동조(東朝)에 나아가 문후하였다. 동조의 환후는 담증(痰症)이 있음으로 인하여 원기(元氣)가 갑자기 가라앉은 것이었다. 인하여 삼다(蔘茶)를 달이도록 명하고, 잇달아 올리게 하였더니 차츰 조금 효과가 있었다. 이때부터 임금이 밤낮으로 옷을 벗지 않았고, 때로는 난간에 의지하여 옷을 입은 채 자기도 하였다.
2월 29일 신묘
임금이 선원전(璿源殿)의 재실(齋室)에 나아갔다. 당시 여러 의관들이 동조의 배꼽에 뜸질을 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스스로 손 위에 쑥뜸을 시험하였다. 도승지 김한철(金漢喆)이 말하기를,
"하필이면 직접 시험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 형제(兄弟)가 뜸질하여 고통을 나눈 일025) 이 있었는데 더구나 어버이를 위해서이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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