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임진
신릉(新陵)의 혈(穴)을 결정하면서 조금 왼쪽으로 치우치게 하고 그 오른쪽을 비게 하여 정혈(正穴)을 삼도록 하였는데, 임금의 하교를 따른 것이었다.
호남 도신에게 명하여 나주(羅州)·옥구(沃溝)·장수(長水) 등의 주민을 위유(慰諭)하도록 하였다. 지난해 겨울에 호남 어사 이현중(李顯重)이 역적의 실정에 대해 허실(虛實)을 염탐해 온 뒤에 임금이 다시 가서 덕의(德意)를 선포하도록 명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현중이 돌아와 아뢰기를,
"나주에서는 역적 윤지(尹志)의 사건이 있은 후부터 항상 본주(本州)에 살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으며, 옥구와 장수에서도 송시택(宋時澤)·김의택(金義澤)의 변고로 인하여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으므로, 이런 명이 있었다.
원손(元孫)에 대한 강학(講學)을 공제(公除) 뒤에 행하도록 명하였다.
3월 2일 계사
임금이 공제(公除) 후에 여러 신하들이 진현(進見)할 때의 복색을 개정하였다. 이보다 앞서 뭇 신하들로 하여금 백모(白帽)와 포대(布帶)로 기년(朞年)을 마치게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그 임금은 익선관·오서대를 착용하는데 뭇 신하들이 백모를 쓰고 진현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옳지 못하다 하여 마침내 공제 후 진현할 때의 모자와 띠는 임금의 상복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신민(臣民) 집안의 대소의 상장(祥葬)에 대한 일을 공제(公除) 뒤에 시행을 허락하도록 명하였는데, 임금이 공제 후에는 조정에서도 이미 대·중·소의 제사를 폐하지 않으니, 사가(私家)에서도 시왕(時王)의 제도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 때문이었다. 장사(葬事)에 이르러서는 전부터 금령(禁令)이 없었는데, 이런 명이 있었다.
3월 4일 을미
당시 임금이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약방의 여러 신하들을 연달아 불러 동조(東朝)에게 올릴 약을 의논하였다.
3월 5일 병신
각도(各道)에 명하여 도년(徒年) 이하의 죄인을 석방하고 제색 미포(諸色米布)로 햇수가 오래 되도록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견감(蠲減)해 주게 하였는데, 동조(東朝)의 환후가 점점 차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금이 고 판서 이현석(李玄錫)이 지은 성두가(聖痘歌) 가운데, ‘덕의를 펴도록 재촉하여 조세를 감해 주니[催頒德意蠲祖稅], 밤은 조용한데 의금부의 형구가 한가하도다.[夜靜金吾閑械杻]’고 한 구절을 외고, 이어서 말하기를,
"이번의 이 거사도 옛날의 덕의를 계승하는 것이다."
하였다.
3월 6일 정유
내국(內局)에서 윤직(輪直)하도록 명하고, 제조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賞)을 주었으며, 친히 자성(慈聖)이 건강을 회복한 데 대한 경변송(慶忭頌)을 지었다. 그리고 공인(貢人)·시인(市人)에게 2년 동안 남아 있는 세금을 견감해 주게 하였으며, 경외(京外)에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는 정사를 미루어 행하도록 명하였다.
황단 대제(皇壇大祭)를 섭행(攝行)하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반드시 몸소 행하려고 했었는데, 시탕(侍湯)하는 일을 당하여 그렇게 못하였다. 이날 밤에 임금이 뜰에서 배회(徘徊)하다가 멀리에서 들려오는 종경(鍾磬) 소리를 듣고 서글픈 감회를 감당하지 못하다가, 종경 소리가 그친 뒤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3월 7일 무술
김기대(金器大)를 승지로, 윤동승(尹東昇)을 집의로, 오봉원(吳奉源)을 장령으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3월 9일 경자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거둥하였는데, 기신(忌辰)이기 때문이었다. 환궁할 때 화완 옹주(和緩翁主)의 집에 들렀다.
3월 10일 신축
임금이 익선관(翼善冠)에 흑단령포(黑團領袍)를 갖추고 황단(皇壇)에 나아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3월 11일 임인
백관의 공제(公除)는 임금의 식례(式例)에 따르도록 정하였다. 이보다 앞서 백관의 공제는 임금을 따라 15일로 하는 것이 적합한데 13일만 공제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그것이 어긋났음을 깨닫고 특별히 예당(禮堂)을 추고하게 하고, 이 명이 있었다.
하교하기를,
"노인을 노인으로 대접하여 효도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을 미루어 헤아려서 바른 길로 향하게 하는 도리인 것이다. 공자(孔子) 또한 이르기를, ‘예(禮)로 제사 지내라.’고 하였다. 만약 사대부와 서민으로 하여금 그 예(禮)를 펴지 못하게 한다면, 이것이 어찌 왕자(王者)가 효도하는 마음으로 다스리는 도리이겠는가? 비록 인산(因山) 이전의 제사를 금지하는 때를 당하였다 하더라도 상제(祥祭)와 담제(禫祭)에 이르러서는 공제(公除) 전후를 논할 것 없이 금지하지 않게 함으로써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본받아 상례(喪禮)를 소중하게 여기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장령 김원행(金元行)이 동궁(東宮)에 상서하여 서연(書筵)을 열 것을 청하였다. 그 상서에서 맨 먼저 상중[居喪]의 법칙도 본말(本末)이 있음을 말하고, 또 송(宋)나라와 우리 나라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인산(因山) 전에 서연을 열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상달한 바가 절실하고 지극하니 명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답하였다.
3월 12일 계묘
동조(東朝)의 환후가 평복되었다 하여 고묘(告廟)하였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권정례(權停例)로 반사(頒赦)하고 진하(陳賀)하였는데, 대행 왕비의 인산(因山) 전이었기 때문이었다.
김선행(金善行)을 대사헌으로, 서명응(徐命膺)을 대사간으로, 송문재(宋文載)를 교리로 허유(許瑬)를 황해 수사로 삼았다.
임금이 친히 대행 왕비의 행장(行狀)을 지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왕후(王后)는 성이 서씨(徐氏)로 본관(本貫)이 대구(大丘)인데, 고려조(高麗朝)의 소윤(少尹) 서한(徐閈)의 후손이다. 10대조 서미성(徐彌性)은 조선조[我朝]에 들어와 그의 아들 찬성 서거정(徐居正)의 공훈(功勳)으로 달천 부원군(達川府院君)에 추증(追贈)되었고, 9대조는 좌통례(左通禮)에 추증된 서거광(徐居廣)이니 바로 서거정의 형(兄)이다. 5대조 서성(徐渻)은 문과에 급제하여 판중추부사를 지냈는데, 시호(諡號)는 충숙(忠肅)으로 선조(宣祖)와 인조(仁祖) 두 조정의 명신(名臣)이었다. 고조(高祖) 서경수(徐景需)는 전첨(典籤)으로 판서에 추증되었고, 증조(曾祖) 서형리(徐亨履)는 첨정으로 찬성에 추증되었고, 조부(祖父) 서문도(徐文道)는 사평(司評)으로 의정에 추증되었다. 고(考) 서종제(徐宗悌)는 군수로 처음에는 찬성(贊成)에 추증되었다가, 또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갑진년026) 에 내가 왕위(王位)를 이어받은 뒤에 영의정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에 추증되고 효희(孝僖)로 증시(贈諡)되었다. 비(妣) 잠성 부부인(岑城府夫人) 이씨(李氏)는 본관이 우봉(牛峰)이다. 시조 이공정(李公靖)은 고려조의 삼중 공신(三重功臣) 문하 시중(門下侍中) 잠성 부원군(岑城府院君)으로,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8대조 이순(李淳)은 조선조에 들어와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5대조 이세명(李世銘)은 승지(承旨)로 추증되었는데, 기묘 명현(己卯名賢)027) 이다. 고(考)는 통덕랑(通德郞) 이사창(李師昌)이다. 왕후는 임신년028) 12월 초7일 술시(戌時)에 가회방(嘉會坊)의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는데, 갑신년029) 에 길례(吉禮)를 행하고, 달성 군부인(達城郡夫人)에 봉(封)해졌으며, 황형(皇兄) 원년(元年) 신축년030) 에 자교(慈敎)를 받들어 세제빈(世弟嬪)으로 책봉(冊封)되고, 갑진년031) 에 비(妃)로 책봉되었다. 경신년032) 에 혜경(惠敬)이란 호(號)를 받고, 임신년(任申年)033) 에 장신(莊愼)이란 호를 더하고, 병자년034) 에 강선(康宣)이란 호를 더하였는데 정축년035) 2월 15일 신시(申時)에 창덕궁(昌德宮)의 관리합(觀理閤)에서 훙서(薨逝)하니 향년(享年)이 66세이다. 시호를 정성(貞聖)이라고 의정(議定)하고, 같은 해 6월 초4일에 고양(高陽)의 창릉(昌陵) 왼쪽 산등성이 신향(辛向)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바로 명릉(明陵)의 오른쪽 산기슭이다. 이상이 왕후의 성씨와 본관 세계(世系)의 시말(始末)이다. 아! 왕후는 나이 겨우 13세 때에 우리 성고(聖考)의 간택(揀擇)을 받아 나의 배필(配匹)이 되었는데, 은혜와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었다. 언제나 진현(進見)할 적이면 반드시 웃는 낯빛으로 뵈었는데, 이는 바로 내가 직접 보았던 일이다. 기쁜 얼굴빛과 온순한 자태로 양전(兩殿)을 섬기며 7년 동안 시탕(侍湯)하였는데, 오래도록 대궐 안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경자년036) 에 성고(聖考)께서 돌아가시자, 왕후는 더 한층 몹시 애모(哀慕)하여 3년상을 마친 뒤에도 오히려 진전(眞殿)의 배알(拜謁)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이가 이미 많아 쇠약해졌지만 그 정성은 더욱 돈독하여 우리 자성(慈聖)께서 보산(寶算)이 더욱 높으신 것을 민망히 여겨 일정한 때가 없이 진찬(進饌)하고, 기거(起居)에 대한 안부를 받들어 묻기를 쇠모함을 꺼리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하였으며, 또 육상궁(毓祥宮)의 제전(祭奠)에는 반드시 성심(誠心)을 다하였다. 계유년037) 에 시호를 올리던 날에는 몸소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렸고, 매번 원릉(園陵)의 기신(忌辰)을 당하면 3일 동안의 소선(素膳)을 그치지 않았으며, 증 영상의 자손에게도 성심으로 대우하였다. 자애(慈愛)하는 마음에 이르러서는 나이가 많은데도 한결같아서 지난날을 돌이켜 생각하는 효성스런 마음은 말할 때마다 번번이 눈물을 흘렸는데, 비록 이번에 정신이 혼미하고 기운이 가라앉았을 적에도 오히려 사모하여 잘 보호할 것을 권면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탄복하는 까닭인 것이다. 아! 내가 왕후와 한두 살 차이가 있지만, 모두 60세를 넘기고서도 위로 80을 바라보는 자성(慈聖)을 받들어 모시고 있으니, 지난 사첩(史牒)에서 찾아보아도 드문 일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더욱 쇠모해져 원기(元氣)가 한 번 가라앉자, 인삼(人蔘)과 부자(附子)도 아무 효과가 없을 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아, 그가 재궁(梓宮)에 들어가던 날 하나의 봉치(封置)된 것을 보았더니, 바로 옛날의 어찰(御札)과 대궐에 들어온 뒤에 사명(賜名)한 것이었으니, 여기에서 왕후가 항상 추모(追慕)하던 마음을 알 수 있어서 더욱 슬펐다. 그러나 장락(長樂)038) 을 받들면서 기쁘게 한 나머지 조용히 돌아가서 오르내리며 배알(拜謁)할 것인데, 왕후가 어찌 슬퍼하겠는가? 내가 이러한 때에 미리 택조(宅兆)039) 를 점지하고, 능호(陵號) 오른쪽을 비워두는 제도를 적용하였으니 또한 무슨 유감(遺憾)이 있겠는가? 아! 부문(浮文)을 크게 과장하는 것은 바로 내가 마음속으로 바라지 않는데, 더구나 이 글에 있어서 어찌 한 글자라도 근거없는 것을 꾸미겠는가? 글이 비록 간략하지만, 왕후의 미덕(美德)을 대략 기술하였다. 시탕하며 초조하고 민망스러운 나머지 조금 심신(心身)을 수습하여 이 한 편(篇)을 불러주어 적게 하는데, 내용은 간단하지만 뜻은 다 표현하였으니, 구원(九原)으로 돌아간 왕후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맏이는 효장 세자(孝章世子)로 정빈(靖嬪) 이씨가 낳았는데, 처음에 경의군(敬義君)으로 봉하였다가 원년에 세자로 책봉하였고, 효순 현빈(孝純賢嬪) 조씨(趙氏)는 풍릉 부원군(豊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의 딸이다. 다음은 원량(元良)으로 영빈(暎嬪) 이씨(李氏)가 낳았는데, 왕후가 즉시 데려다 아들로 삼고 원자로 봉하였다가, 이듬해에 세자로 책봉하였으며, 빈(嬪)은 홍씨(洪氏)로 판서 홍봉한(洪鳳漢)의 딸이다. 원량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는 의소 세손(懿昭世孫)이고 다음은 원손(元孫)에 봉해졌다. 두 군주(郡主)가 있으니 두 왕손(王孫)과 모두 나이가 어리다. 친히 행록(行錄)을 짓고, 인하여 지문(誌文)을 지어서 영원토록 후세에 전한다."
하였다.
3월 14일 을사
임금이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소결(疏決)을 행하였다. 판의금부사 서명빈(徐命彬)이 윤시동(尹蓍東)을 그대로 두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고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늙었기 때문에 시험해 보려는 것인가?"
하고, 서명빈을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3월 15일 병오
정언 서형수(徐逈修)를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여 남해현(南海縣)에 방귀(放歸)하도록 명하였다. 당시에 서형수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윤시동(尹蓍東)이 연좌된 것은 마음속에 품은 바가 있으면 숨기지 않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비록 대조(大朝)께서 처분하신 것을 가지고 살펴보더라도 심도(沁都)040) 의 구수(舊守)는 죄가 없는 것이 아닌데, 중신(重臣)은 겨우 몇 달이 경과되자 그전처럼 견서(甄敍)하였고, 대신(臺臣)은 영외(嶺外)에서 몇 해 동안 지냈지만 죄명이 없어지지 않았으니, 국가의 형정(刑政)에 있어서 과연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그 글을 들여오도록 명하고, 승지로 하여금 독주(讀奏)하게 한 다음 그가 당습(黨習)을 다시 행하려 한다 하여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평안 감사 윤급(尹汲)을 파직하였다. 이보다 앞서 윤시동(尹蓍東)이 조영국(趙榮國)을 논박한 때문에, 임금은 윤시동이 조영국의 아들 조운규(趙雲逵)가 평안 감사로 떠나는 것을 저지시키려고 한 것은 혹 윤시동의 종조부 윤급이 지휘하여 시킨 것에 말미암았다고 의심하였는데, 뒤에 여러 대신들이 그것은 그렇지 않음을 밝혔으므로, 마침내 윤급을 평안 감사로 임명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서형수(徐逈修)가 상소하여 윤시동을 구원한 것으로 인하여 윤급을 파직하도록 명하니, 이때 윤급은 미처 부임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3월 16일 정미
서형수(徐逈修)를 흑산도(黑山島)에 찬축(竄逐)하고, 이틀 길을 하루에 걸어 압송하게 하였다. 임금이 서형수가 이미 진신(搢紳)들이 연명(聯名)한 소장에 참여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만약 당심(黨心)을 회복시킨다면 위로 군부(君父)를 속이고 아래로 조선(祖先)을 속일 것입니다."
하고, 이제 와서 다시 당습(黨習)을 부리고 있다 하여 여러 차례 엄교를 내리고, 인하여 이런 명이 있었다.
3월 18일 기유
중외(中外)에 신칙하여 서형수(徐逈修)에게 지휘하고 사주한 자는 자수[自現]하게 하였다.
3월 19일 경술
박창윤(朴昌潤)을 집의로, 이기덕(李基德)을 헌납으로, 홍낙명(洪樂命)·이담(李潭)을 정언으로, 홍자(洪梓)를 부교리로, 이인원(李仁源)을 부수찬으로, 이익보(李益輔)를 대사성으로, 김양택(金陽澤)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3월 22일 계축
관동 안집사(關東安集使) 구윤명(具允明)이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관동에 큰 흉년이 들어 유리하는 백성이 사방으로 흩어진다고 하므로, 사자(使者)를 보내어 안집(安集)하게 하고 구실을 견감하고 곡식을 옮기도록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구윤명이 일을 마치고 돌아와 아뢰었다.
3월 23일 갑인
달이 입성(立星)을 범하였다.
동조(東朝)가 편찮아서 다시 내국(內局)에 명하여 제조 한 사람이 직숙(直宿)하게 하였다.
3월 24일 을묘
임금이 동조(東朝)의 환후가 정신이 혼미하고 원기가 가라앉았다 하여 약원의 여러 신하들을 여러 번 접견하였는데, 걱정스러움이 표정에 나타났다.
3월 25일 병진
내국에 명하여 세 제조가 함께 직숙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동조에서 올린 다(茶)를 마시지 못한다 하여 임금도 탕제(湯劑)를 올리지 못하게 하였다.
3월 26일 정사
사시(巳時)에 대왕 대비전 김씨가 영모당(永慕堂)에서 승하(昇遐)하였다. 이 당(堂)은 당초에 이름이 없었는데, 임금이 영모당으로 이름을 붙여 효도하는 마음을 간직했다.
당시 동조의 환후가 더욱 위독해지자 임금이 밤을 지새며 초조해 하여 허둥대었으며, 좁쌀 미음을 받들어 올렸으나 조금도 효과가 없으니,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밤중에 영모당(永慕堂)의 전랑(前廊)에 나아가 입직한 유신 홍양한(洪良漢)을 명소(命召)하여 울먹이며 말하기를,
"자성(慈聖)의 환후가 지금 이미 위독해졌으니 즉시 종묘와 사직에 기도해야 마땅한데 문임(文任)을 미쳐 패초(牌招)하지 못하였다. 그대가 그 제문(祭文)을 지어 올리되 반드시 나를 대신하게 해달라는 뜻으로 지극히 간절하게 글을 짓도록 하라."
하므로, 홍양한이 마침내 지어서 올리자, 즉시 대신을 보내어 기도하게 하였다. 그리고 임금은 뜰에 내려가 한데에서 기도하여 하늘에 부르짖고 애태우며 울먹였는데, 사시(巳時)에 대비가 훙(薨)하였다. 이보다 앞서 유교(遺敎)가 있었으니, 모든 상사(喪事)에서의 진공(進供) 및 진향(進香) 때의 의물(儀物)은 힘써 절약하여 검소하게 해서 줄이는 데 따르도록 하고, 별도로 백금(白金) 1천 5백 냥(兩)과 금단(錦緞)·사초(紗綃) 등의 물품을 저축하여 국휼(國恤) 때의 경비로 쓰게 하였었다. 또 숙종[肅廟] 국휼 때에 사용했던 은기(銀器)를 봉(封)하여 보관하였다가 뒷날 사용에 대비하도록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유의(遺意)에 따라 해당 관사에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빈소(殯所)를 만들기 전에 우선 휘령전(徽寧殿)의 조석전(朝夕奠)과 주다례(晝茶禮) 및 가칠(加漆)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빈전 도감(殯殿都監)의 총호사 및 당상관, 낭청, 감조관은 휘령전(徽寧殿)에서 임명한 바를 그대로 하게 하였다. 뒤에 당상관과 낭청 한 사람씩을 더 임명하여 나누어 직숙하게 하고, 또 총호사의 주청으로 인하여 낭청 두 명을 더 차출하게 하였다.
임금이 친히 대행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행록(行錄)을 지었다. 시호(諡號)를 의정(議定)할 때가 닥쳤으므로, 밤에 승지를 불러 눈물을 삼키며 글을 불러주고 적도록 하였는데, 기운이 피로하여 이튿날에야 비로소 마치고 하교하기를,
"정신이 더 쇠모(衰耗)해지기 전에 자성(慈聖)의 덕행(德行)을 만에 하나라도 유양(揄揚)하려고 한다."
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우리 대행 자성은 바로 우리 성고(聖考) 숙종 대왕의 계비(繼妃)로서, 성은 김씨(金氏)이고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인데, 시조는 김알지(金閼智)이니 세조(世祖)로 추존(追尊)되었다. 27대손 김부(金傅)는 고려조에서 경순왕(敬順王)으로 봉(封)하였다. 그의 후손 김지윤(金智允)은 충근 양절 찬화 공신(忠勤亮節贊化功臣)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판도평의사(判都評議事)에 추증(追贈)되었다. 아들 김균(金稛)은 조선조에 들어와 개국 공신 좌찬성 계림군(鷄林君)으로, 시호는 제숙(齊肅)이다. 손자인 김종순(金從舜)은 청백리(淸白吏)에 뽑히고 시호는 공호(恭胡)인데, 세종(世宗)·문종(文宗)·단종(端宗)·세조(世祖)·예종(睿宗)·성종(成宗)을 대대로 섬겼었다. 6대조 김만균(金萬勻)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대사헌에 이르렀는데, 공훈으로 영의정 월성 부원군(月城府院君)에 추증되었으며, 생부(生父) 김천령(金千齡)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직제학에 이르렀다. 5대조 김명원(金命元)은 선묘조(宣廟朝)의 이름난 훈신(勳臣)인 좌의정 경림 부원군(慶林府院君)으로,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고조(高祖) 김수렴(金守廉)은 영의정 오원군(鰲原君)에 추증되었다. 증조(曾祖) 김남중(金南重)은 예조 판서 경천군(慶川君)으로 좌찬성에 추증되었는데,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조(祖) 김일진(金一振)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고(考)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은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비(妣)는 가림 부부인(嘉林府夫人) 조씨(趙氏)이다. 시조 조천혁(趙天赫)은 고려에 벼슬하여 가림백(嘉林伯)이 되었고, 9대조 조연성(趙連城)은 처음으로 조선조에 들어와 지홍주사(知洪州事)가 되었다. 고조(高祖) 조원(趙瑗)은 진사시(進士試)에 장원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가 되었고, 증조(曾祖) 조희일(趙希逸)은 진사시에 장원하고 문과와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었다. 조(祖) 조석형(趙錫馨)은 진사시에 장원하고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고(考) 조경창(趙景昌)은 소자(小子)가 왕위를 계승한 지 31년 만에 옛날의 고사(故事)를 준용(遵用)하여 특별히 좌찬성으로 추증하였다. 정묘년041) 9월 29일 축시(丑時)에 우리 자성께서 순화방(順化坊) 사제(私第)의 양정재(養正齋)에서 탄강(誕降)하셨으니, 바로 조희일의 구제(舊第)이다. 임오년(任午年)042) 에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고, 이어서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성후(聖后)께서 어렸을 적에 종조모(從祖母) 권씨(權氏)가 보고 특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걸음걸이가 얌전하고 행동이 단정하니 범상하지 않음이 틀림없다.’ 하였으니,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성모(聖母)께서는 성품이 본래 단정하고 엄숙하며 정숙하고 전일하며 조용하고 말수가 적어서 주남(周南)의 교화043) 가 궁곤(宮壼)에 가득히 넘치고, 탁룡(濯龍)의 경계044) 가 심상(尋常)한데서 뛰어나셨으며, 본가(本家)의 자손에 대해서는 비록 미관(微官)이나 소직(小職)이라 하더라도 번번이 지나치다고 일컬으셨다. 7년 동안 성고(聖考)를 시탕(侍湯)하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게을리 하심이 없었고, 다섯 달 동안 빈전(嬪殿)에서 모시며 아무리 혹독한 추위와 찌는 듯한 더위라 하더라도 일찍이 혹시라도 떠나시지 않았다. 3년 동안의 제전(祭奠)은 반드시 정성과 공경으로 하시니, 이 때문에 해사(該司)에서 올리는 제물(祭物)도 감히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의 성덕(聖德)을 깊이 본받아 백성을 사랑하는 은혜와 백성을 가엾게 여겨 돌보시는 혜택이 피부와 뼈속에 젖어드는데, 자애(慈愛)로운 어진 마음이 한(漢)나라 명덕 황후(明德皇后)보다도 뛰어나시니, 소자(小子) 같은 얕은 효성으로도 자성의 두터운 은혜를 입게 되었다. 비록 조용히 조섭(調攝)하는 가운데 계시면서도 오히려 잊지 않고 돌보아 마지 않으셨으니, 아! 자성의 은혜는 하해(河海)와 같아 헤아릴 수가 없다. 옥책(玉冊)을 올려 휘호(徽號)를 드날리고 칭상(稱觴)045) 하여 기쁨을 받드는 것은 신자(臣子)로서 당연한 일인데, 스스로 매우 겸손하여 억제하셔서 절대로 받지 않으셨으며, 비록 간혹 억지로 따르셨지만, 몇 차례의 진호(進號)와 몇 번의 진연(進宴)에 모두 몸소 나오지 않으셨다. 그러나 고복(顧復)하는 은혜는 쇠모해지기에 이르러 더욱 돈독하여 한 가지의 의복과 한 가지의 음식에 있어서도 자성의 은혜가 미치지 않음이 없었다. 이번에 병환이 낫지 않고 오래 끄는 가운데에서도 미음을 마시는 일에 있어서 소자(小子)를 위해 반드시 억지로 올리게 하면서 굽어 권면하셨는데, 25일 이후부터 다시 그런 말씀을 받들어 듣지를 못하였으니, 이것이 소자가 울부짖어 애모(哀慕)하며 차라리 죽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또 몸소 검소하여 절약하셨으니 이번의 대비전(大妃殿)에서 글로 남기신 것으로 살펴보면 우러러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무릇 제전(祭奠)에 대해서도 모두 그릇 수를 정해 놓으면서 예전에 있었던 것을 지금에 줄인 것이 많았다. 그리고 내탕(內帑)의 은자(銀子)와 어고(御庫)의 필단(疋緞)은 도감(都監)에 내려주도록 유명(遺命)을 남기셨고, 능전(陵殿)에 쓰는 은기(銀器)도 경자년046) 에 진용(進用)했던 것을 쓰도록 명하셨으며, 오늘날 염습(斂襲)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구와 빈전(殯殿)에 드는 물건은 유장(帷帳) 등속과 대여(大轝)의 장식이라 하더라도 모두 대비전에서 갖추어 두셨으니, 옛날을 사모하는 인자한 마음과 경비를 염려하는 아름다운 덕은 바로 옛날 사첩(史牒)에서도 듣지 못했으며, 옛날에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겨 돌보신 융성한 뜻은 지금까지 추모하고 있다. 한 번 바람이 불거나 한 번 비가 내리는 것도 한결같이 지나쳐 버리신 적이 없었고, 만약 소자가 능묘(陵廟)에 행례(行禮)할 때를 당하면, 혹 합문(閤門)을 열고 기상을 관측하거나 혹은 뜰에서 거닐며 하늘을 쳐다보고 관찰하였는데, 만약 날씨가 맑고 바람이 잔잔하면 소자를 대해 기쁜 뜻을 먼저 유시하셨으나 혹 오래도록 장마가 지거나 오래도록 가뭄이 들면 한 번 구름이 끼고 한 번 개일 때마다 번번이 소자를 위로하셨다. 아! 책으로 엮어 이미 유시하였으니 이는 바로 나의 마음을 아는 이로는 부모(父母)만한 이가 없다는 것이다. 아! 이 뒤로 소자가 아무리 옥음(玉音)을 다시 받들어 듣고자 한들 어떻게 받들 수 있겠는가? 불러주고 쓰기를 여기까지 이르니, 눈물이 불러주는 소리를 따라 흘러내림을 깨닫지 못하겠다. 아! 당론(黨論)은 바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근본이므로 이 폐단을 매우 염려하셨는데, 말씀이 간혹 이 문제에 미치면 반드시 척속(戚屬)은 서로 경계하여 편당(偏黨)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매우 강개하셨으니, 국구(國舅)의 집안에만 훈계한 것이 아니고 이는 또한 성자(聖慈)의 교화가 미치는 바였다. 그러다가 소감(昭鑑)이 이미 이루어진 뒤에 이르러서는 자성께서 기뻐하여 하교하시기를, ‘이것으로 인하여 만약 편당(偏黨)이 없어진다면 나라를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셨다. 아, 지난날의 역사를 상고하여 보면 비록 현명한 임금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편당 없애는 것을 어렵게 여겼었다. 후비(后妃)에 이르러서는 송(宋)나라 선인 황후(宣人皇后)가 있었지만, 이런 일이 있었음을 듣지 못하였으니, 아! 성대하도다. 아! 소자가 4기(紀)047) 동안 이 마음을 지키면서 오히려 혹시라도 게을러질 것을 두려워한 것은 한편으로는 성고(聖考)의 마음을 우러러 본받으려 한 것이고, 한편으로는 자성(慈聖)의 뜻을 위로해 드리려 한 것이었다. 따라서 지나간 해에 편당을 제거했던 것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성께서 부지런히 잊지 않고 돌보신 것은 이와 같이 옛날 사첩보다 탁월하셨지만, 소자가 불효(不孝)하고 불초(不肖)하여 성고의 뜻을 본받지 못하고 자성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지 못하였고, 그런 뜻을 천명(闡明)한 뒤에도 옛날의 풍습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이것은 지난날 〈편당을 없애려던 자성의 뜻을〉 저버린 것이다. 따라서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차라리 말을 하고 싶지가 않다. 아! 우리 자성께서 국모(國母)로 계신 지 5기(紀) 동안 자애로운 교화가 널리 미치었고, 보산(寶算)이 영묘하여 80을 바라보는 데 이르도록 장수하셨으므로, 애일(愛日)의 정성과 수복(壽福)이 강릉(岡陵)처럼 크고 길기를 축원하는 마음이 가슴속에 번갈아 간절했었다. 며칠 전에 편찮으셨을 적에는 다행스럽게도 천지 신명께서 가만히 도와주심을 의뢰하여 빨리 회춘(回春)하시는 데 이르렀으므로, 이 일로 인하여 송백(松栢)처럼 변함없이 오래사시기를 송축(頌祝)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했었는데, 쇠약해져 피로한 증세에다 외부의 해로운 기운을 끼게 되어 원기가 날마다 가라앉아 의약의 효과가 없어져서 정축년 3월 26일 사시(巳時)에 창덕궁(昌德宮) 경복전(景福殿) 서쪽의 영모당(永慕堂)에서 승하(昇遐)하실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이는 대체로 소자의 정성스러운 효심(孝心)이 천박(淺薄)한 소치이니, 하늘에 부르짖어 울어도 하늘이 응답하지 않고 땅을 치며 죽고 싶어도 땅이 또한 응답이 없으니 아득한 저 하늘이여,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이것이 바로 소자가 평생동안 영모(永慕)해야 할 것이다. 아! 이 달은 무슨 달인가? 지난번 육상궁(毓祥宮)의 기일(忌日)에 자성께서 옛날을 생각하여 눈물을 머금고 소자에게 가도록 권면하셨는데, 겨우 한 번 바라보고 나자 붕어(崩御)하셨으니, 아무리 따르려고 하여도 용염(龍髥)048) 에는 미칠 수가 없고, 아무리 봉양하려고 하여도 장락궁(長樂宮)은 고요하기만 한데, 아득한 저녁 구름을 바라보니, 눈물이 가슴을 적신다. 아! 소자가 머리를 땋을 때부터 우리 자성을 받들었는데, 자성께서는 80을 바라보도록 사시고 소자의 나이 또한 70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는 진실로 지난 사첩에서도 보기드문 일이므로, 마음 속으로 가만히 경사스러워하며 다행으로 여겼는데, 근래에 기운이 더욱 쇠모해져 갈수록 두려워하는 마음이 간절했었다. 무술년049) ·경자년050) ·갑진년051) ·경술년052) 에 최마(衰麻)를 입고 상장(喪杖)을 짚었었는데, 64세가 되어 다시 최마를 입고 다시 상장을 짚을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아! 저 내전(內殿)은 오늘날의 일을 보지 않아도 되는데, 아! 불초(不肖)한 나는 하얗게 머리가 센 나이에 머리를 풀지만, 자성의 음성은 아득하기만 하다. 아! 지난해 육상궁(毓祥宮)의 동향 제문(冬享祭文) 가운데 우리 자성의 한 가지 의복과 한 가지 음식도 잊지 않고 돌보았다는 귀절이 전적으로 위로하고 이해하려는 뜻에서 말미암기는 하였지만 아! 우리 자친(慈親)이 지금 자성을 모셨으면 반드시 기뻐하여 다행으로 여기셨을 터이고, 소자를 돌보시는 마음이 그 또한 갑절이나 더하실 것이니, 이것이 바로 소자가 더욱 상심하게 되는 까닭이다. 아! 자성의 자애로운 마음은 황형(皇兄)에게나 소자에게 조금도 차이가 없었는데,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을 염려하고 황형에게 후사(後嗣)가 없음을 민망하게 여겨, 특별히 건저(建儲)하도록 명하신 것은 지나간 사첩에서도 듣지 못한 바였으며, 이 일로 인하여 황형에게는 후사가 있게 되고 소자는 의지할 데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무신년053) 의 역모(逆謀)와 을해년054) 의 역모가 있을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이러한 일들은 소자만이 곧바로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니고, 실제로 온 나라 사람들이 함께 분개하던 바였는데도, 자성께서는 이 사건을 듣고 웃으면서 답하시는 것이 평상시와 다름이 없으셨다. 이것이 소자가 흠모하며 탄복하는 까닭이니 크고도 지극하도다. 승하[禮陟]하신 지 7일 만에 휘호(徽號)를 정의 장목(定懿章穆)으로 의정(議定)하고 6월 13일에 시호(諡號)를 인원(仁元)으로 올렸으며, 7월 12일에 명릉(明陵)의 오른쪽 산등성이 신향(辛向)의 언덕에 봉장(奉葬)하였는데, 춘추(春秋)는 71세이다. 부장(祔葬)한 것은 바로 옛날의 유교(遺敎)이었고, 자성의 지극한 소원이기도 하였는데, 마침 옛날에 표시해 두었던 좌향(坐向)에 기피할 일이 있었으나, 다행스럽게도 이 산등성이를 점지하게 되었다. 그전의 곳은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아주 가깝게 되었다. 구정자각(舊丁字閣)을 그대로 사용하고, 세 탑(榻)이 엄연하여 신리(神理)와 인정(人情)에 모두 흡족하니, 이것이 어찌 신명(神明)이 오르내리면서 돌보고 도와주며 자애로운 정성이 미친 바가 아니겠는가? 이제부터 이후로는 소자가 기쁘고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돌아가 배알(拜謁)할 면목이 있게 되었으니, 애모하는 가운데서도 거의 이 마음에 위로가 된다. 현궁(玄宮)에 내릴 명정(銘旌)과 재궁(梓宮) 위의 글자, 표석(表石)의 전면·후면을 모두 몸소 써서 애모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펴려고 하였다. 이번의 행록(行錄)에는 단지 사실만 열거하여도 오히려 다 기록할 수 없는데, 어찌 감히 쓸데없는 말을 번거롭게 수식하여 자성께서 날마다 겸양하신 덕(德)을 저버리겠는가?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이 글을 가지고 그대로 지문(誌文)을 짓게 하였는데, 한 편의 작은 정성을 여기에 모두 기재하고 불러서 쓰게 하기를 마치니, 피눈물이 얼굴을 덮는다. 우리 성고(聖考) 39년 계사년에 혜순(惠順)이란 존호(尊號)를 받으셨고 황형(皇兄) 2년 임인년에 또 자경(慈敬)이란 존호를 올렸고, 소자가 왕위를 계승한 2년째 되던 병오년에 또 헌렬(獻烈)이란 존호를 올렸고, 16년인 경신년에 또 광선(光宣)이란 존호를 올렸고, 같은 해에 또 현익(顯翼)이란 존호를 올렸고, 23년인 정묘년에 또 강성(康聖)이란 존호를 올렸고, 27년인 신미년에 또 정덕(貞德)이란 존호를 올렸고, 28년인 임신년에 또 수창(壽昌)이란 존호를 올렸고, 29년인 계유년에 또 영복(永福)이란 존호를 올렸고, 32년인 병자년에 또 융화(隆化)란 존호를 올렸었다. 아! 자성의 덕(德)을 유양(揄揚)하면 이 정도에 그치겠는가? 소자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는 효장 세자(孝章世子)로 처음에 경의군(敬義君)에 봉(封)해졌다가 왕위를 계승한 원년(元年)에 〈세자로〉 책봉(冊封)되었으며, 풍릉 부원군(豊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바로 효순 현빈(孝純賢嬪)이다. 다음은 처음에 원자(元子)로 봉해졌다가, 병진년055) 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판서 홍봉한(洪鳳漢)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12옹주(翁主)를 두었는데, 둘째인 화순 옹주(和順翁主)는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에게 하가(下嫁)하였으니 바로 의정(議政) 봉조하(奉朝賀) 김흥경(金興慶)의 아들이다. 셋째인 화평 옹주(和平翁主)는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하가하였는데, 바로 참판으로 의정에 추증된 박사정(朴師正)의 아들이며, 계자(繼子)인 박상철(朴相喆)은 문과 정시(文科庭試)에 합격하였고 현령 김간행(金簡行)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여덟째 화협 옹주(和協翁主)는 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綏)에게 하가하였는데, 바로 우의정 신만(申晩)의 아들이며, 계자가 있는데 나이가 어리다. 아홉째 화완 옹주(和緩翁主)는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에게 하가하였는데, 추증된 시호는 효민(孝敏)이니 바로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의 아들이며, 소주(小主)가 있다. 열째 화유 옹주(和柔翁主)는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에 하가하였는데, 바로 참판 황재(黃梓)의 아들이다. 열한째·열두째는 아직 어리다. 세자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는 의소 세손(懿昭世孫)이고, 다음은 원손(元孫)이니 모두 세자빈(世子嬪)이 낳았다. 두 왕손(王孫)은 모두 나이가 어리며, 두 군주(君主)가 있는데 나이 또한 어리다. 겸해서 행록(行錄)에 부쳐 천억 년 동안 영구히 전하게 한다."
하였다. 【승하한 지 7일만이라는 데서부터 그 이하는 뒤에 더 보태어 지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63책 89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43면
【분류】왕실(王室) / 인물(人物) / 역사(歷史)
[註 041] 정묘년 : 1687 숙종 13년.[註 042] 임오년(任午年) : 1702 숙종 28년.[註 043] 주남(周南)의 교화 :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후비(后妃)인 태사(太姒)의 덕(德)이 자손(子孫)과 종족(宗族)을 선화(善化)하고 여러 첩(妾)들을 감싸주었으므로, 상하(上下)가 화목하게 교화된 고사(故事).[註 044] 탁룡(濯龍)의 경계 :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비(妃)인 마황후(馬皇后)는 후덕(厚德)한 성품으로 장제(章帝)를 아들로 삼아 마음을 다하여 양육(養育)하고, 장제 또한 지성으로 마황후를 섬겼는데, 마황후는 평소 의복(衣服)과 궁실(宮室) 등을 검소하게 하여 모범을 보였음. 만년(晩年)에는 탁룡(濯龍) 가운데에 직실(織室)을 설치하여 누에 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고, 외척(外戚)의 전횡(專橫)을 경계하여 친가(親家) 형제의 조정 진출을 막은 고사임.[註 045] 칭상(稱觴) : 헌수(獻壽).[註 046] 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註 047] 4기(紀) : 12년이 1기(紀)임.[註 048] 용염(龍髥) : 황제(皇帝)가 용(龍)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자, 신하들이 용의 수염을 붙잡았으나 수염만 뽑아졌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임금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뜻함.[註 049] 무술년 : 1718 숙종 44년.[註 050] 경자년 : 1720 숙종 46년.[註 051] 갑진년 : 1724 경종 4년.[註 052] 경술년 : 1730 영조 6년.[註 053] 무신년 : 1728 영조 4년.[註 054] 을해년 : 1755 영조 31년.[註 055] 병진년 : 1736 영조 12년.
3월 27일 무오
염습(殮襲)하고 인해서 소렴(小斂)을 행하였는데 구례(舊例)를 따른 것이었다. 이미 염습하고 경복전(慶福殿)에 봉안(奉安)하였다.
국휼(國恤) 때의 전례대로 백성들의 세금 납부를 면제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비록 반벽(攀擗)056) 하는 가운데 있지만 백성에게 폐단끼치는 것을 염려하여 일마다 절약하는 데 힘써 따르도록 하였다.
3월 28일 기미
임금이 곡읍(哭泣)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으므로, 여러 대신들이 죽을 마실 것을 극력 권하였지만, 조금 들 뿐이었다.
3월 30일 신유
대렴(大斂)을 행하고 통명전(通明殿)으로 옮겨서 봉안(奉安)하였으며, 인해서 재궁(梓宮)에 내렸다.
백관(百官)과 군병(軍兵)의 반료(頒料)는 달을 넘길 수 없다 하여 녹도목(祿都目)057) 을 행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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