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8권, 영조 32년 1756년 12월

싸라리리 2025. 10. 5.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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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갑자

임금이 밤에 극수재(克綏齋)에 나아가 좌직(坐直)하고 있던 승지를 소견하고 판의금 이철보(李喆輔)를 불렀다. 이때 경강(京江) 사람 고정엽(高廷燁)이 길을 가다 전주(全州)의 점사(店舍)에 이르러 송시택(宋時澤)의 부도(不道)한 말을 듣고 송시택을 결박하여 감사 이창수(李昌壽)에게 고하자, 이창수가 장문(狀聞)했기 때문이었다.

 

통영(統營) 소속의 소비포진(所非浦鎭)의 권관(權管)을 영등진(永登鎭)에 옮겨 설치하고 만호(萬戶)로 승격하라고 명하였다. 대개 통제사(統制使) 이경철(李景喆)이 영등진이 옛터에 진장(鎭將)이 없을 수 없다며 율포(栗浦)·가배량(加背梁)·소비포 세 진(鎭) 가운데 진 하나를 옮겨 설치함이 마땅하다고 장청(狀請)했기 때문이었다.

 

12월 2일 을축

임금이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판의금을 소견하고 금오랑을 전주(全州)로 파견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호남에는 옛부터 명신(名臣)·석보(碩輔)가 많은데, 근년 이래로 과환(科宦)이 모두 경화(京華) 사람의 차지가 되자, 먼 지방 사람들이 언제나 억울해 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므로 변괴가 겹쳐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상께서 만약 장려하고 발탁해 쓰신다면 실로 안정시키고 본보기로 삼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좋게 여겼다.

 

12월 3일 병인

임금이 효장묘(孝章廟)에 거둥하였다가 환궁(還宮)할 때 일성위주(日城尉主)의 집에 들렀다.

 

12월 4일 정묘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명성 왕후(明聖王后)의 기신(忌辰)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전 교리 유정원(柳正源)을 특별히 통정(通政)으로 승자시키고 조창래(趙昌來)를 특별히 우윤에 제배하였으니, 유정원은 영남 사람이고 조창래는 관서 사람이다. 이때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 각기 알고 있는 바를 천거하게 하자, 대신이 유정원은 경학(經學)이 있고, 전 부제학 권상일(權相一)과 전 승지 정옥(鄭玉)은 성망(聲望)이 영남에서 으뜸이 된다고 우러러 대답하였다. 이에 유정원을 승자하라 명하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식물(食物)과 의자(衣資)를 보내고 존문(存問)하게 하였다. 그리고 권상일과 정옥은 쓸 만한 사람이라 포장(褒奬)하고, 조창래는 수직(壽職)170)  을 주었는데 뒤에 실직(實職)을 거치지 않았다 하여 아윤(亞尹)을 제수하였으니, 대개 전날 영상이 아뢴 것을 깊이 받아들인 것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날 자성(慈聖)께서 김효대(金孝大)에게 하교하시기를, ‘나랏일을 부지런하고 정성스럽게 할 것이며, 등과(登科) 여부에 관계가 없으니 너는 모름지기 조심스런 마음으로 나랏일을 함이 옳다.’ 하셨다. 이 하교야말로 거룩하고 아름답지 아니한가?"
하니, 여러 대신들이 모두 찬탄하였다.

 

12월 6일 기사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죄인 송시택(宋時澤)과 소상교(蘇尙轇) 등을 친국(親鞫)하였다. 소상교는 곧 송시택과 흉언(凶言)을 수작한 자이다. 임금이 고정엽(高廷燁)의 나라를 위한 정성을 포장(褒奬)하여 특별히 가자할 것을 명하고 이어서 변장(邊將)에 제수하였다.

 

12월 7일 경오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송시택과 소상교를 친국하였다. 대신·옥관, 삼사의 문랑(問郞)이 모두 소상교에게 빨리 지정률(知情律)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으니, 대개 경폐(徑斃)할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있는가?"
하였다.

 

전 온성 부사(穩城府使) 이세형(李世馨)을 잡아오라고 명하였다. 이세형은 재임 당시 범월(犯越)한 사람의 뇌물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어사 조엄(趙曮)이 장문(狀聞)하였으므로 드디어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뒤에 숙천부(肅川府)로 유배하였다.

 

12월 10일 계유

헌부          【지평            구윤옥(具允鈺) 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송시택(宋時澤)의 네 글자의 부도(不道)한 말은 지극히 흉악하고 패려(悖戾)한데 지레 물고(物故)가 되었으니, 노적(孥籍)하는 한 가지 일은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청컨대 대조(大朝)께 품하여 빨리 노적의 법을 시행하게 하소서."
하고 또 상달하기를,
"소상교(蘇尙轇)가 송시택과 수작한 것이야말로 어떠한 흉언(凶言)입니까? 그런데 장전(帳前)에서 납초(納招)할 때 또 두 글자의 부도한 말을 더하였으니, 그 심장(心腸)을 논하건대 또한 한 놈의 송시택인 것입니다. 청컨대 대조께 품하여 빨리 전형(典刑)을 바루게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국수(鞫囚)의 문서(文書)야말로 얼마나 엄중한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송시택의 문서를, 잡아오는 도사(都事)가 버리고 가져오지 않았으니, 고험(考驗)에 실수를 초래하였습니다. 청컨대 해당 도사를 먼 땅으로 정배하소서."
하고, 또 상달하기를,
"흉적 송시택이 승복한 뒤 참국(參鞫)했던 간신(諫臣)이 다시 엄하게 형신(刑訊)을 더할 것을 청한 것은 마침내 사체를 잃는 데로 귀착되어 극적(劇賊)을 경폐(徑斃)하게 만들었습니다. 청컨대 사간        윤학동(尹學東)을 파직하소서."
하고, 또 상달하기를,
"목욕하고 토죄(討罪)하는 것은 대각(大閣)의 더욱 중요한 임무입니다. 그런데 장령        윤방(尹坊)은 집이 근기(近畿)에 있으면서도 여태 움직일 뜻이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고, 또 상달하기를,
"지난번 헌신(憲臣)이 한지(韓芷)를 논할 적에 이미 ‘부모께 순종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곧장엄한 처분을 청함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감률(勘律)이 삭판(削版)에 그쳤으니, 죄와 율(律)이 크게 서로 맞지 아니합니다. 청컨대 전 지평        이보관(李普觀)을 파직하소서."
하니, 모두 상달한 대로 하게 하였다. 간원          【정언            박규수(朴奎壽)이다.】        에서 전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경폐(徑斃)한 죄인 송시택에게 빨리 노적(孥籍)을 시행하소서."
하였으니, 모두 따르지 않았다.

 

12월 11일 갑술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여러 죄인들을 친국하고, 경폐(徑斃)한 죄인 송시택(宋時澤)에게 역률(逆律)을 추시(追施)하였다. 송시택은 본래 옥구(沃溝)의 상한(常漢)으로 일찍이 무신년171)  에 역적 박필현(朴弼顯)에게 응모(應募)했던 자이다. 이미 네 글자의 흉언(凶言)을 자복(自服)했는데, 이 외에도 역적이 환히 드러나 심지어 아무 조목의 역(逆)이 되는 말까지 있었다. 그러나 누차 엄하게 형신(刑訊)했지만 한결같이 버티어 뿌리를 캐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경폐하기에 이르렀으니 마땅한 형전(刑典)을 채 시행하지도 못하였는데, 여론이 분개하였다. 정원과 삼사에서 번갈아 노적(孥籍)을 청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헌납 심관(沈鑧)과 지평 이수일(李秀逸)의 소회(所懷)로 인해 윤허한 것이었다.

 

죄인 소상교(蘇尙轇)가 물고(物故)하였다. 소상교는 전주의 향족(鄕族)이다. 송시택과 점사(店舍)에서 수작할 때 네 글자 흉언(凶言)을 듣고, 중난(重難)하다 하였으며, 장전(帳前)에서 납공(納供)할 때는 또 송시택이 말하지 않았던 바의 두 글자를 말하였으니, 그 심적(心跡)을 논하건대, 그리 다를 것이 없었으나, 채 정실을 다 털어놓기 전에 갑작스레 경폐(徑斃)하였는데, 헌부에서 역률을 추시(追施)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역률(逆律)을 추시하는 자의 아비와 아들에게는 일률(一律)을 시행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노적법(孥籍法)은 해당자를 정법(正法)한 연후에 시행하는데, 추시하는 경우 원범(元犯)에게는 시행하지 못하고 아비와 아들에게 시행하는 것은 왕정(王政)의 마땅히 할 바가 아니다."
하고, 형제 응좌율(兄弟應坐律)에 의해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2일 을해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으므로 사흘 동안 감선(減膳)하였다. 이때 친국(親鞫)을 당하여 무지개가 해를 꿰뚫은 이변이 마침 이운징(李雲澄)이 직초(直招)할 즈음에 있었으니, 임금이 ‘이번의 역변(逆變)은 천의(天意)가 우연하지 않았다.’ 하고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이날 저녁에 임금이 장전(帳殿)에서 대내(大內)로 돌아와 달을 쳐다 보았더니, 또 안은 붉고 밖은 푸른 달무리가 있는지라 옷을 벗지 아니하고 희정당(熙政堂) 남쪽 기둥 바깥에 앉아 서운관(書雲觀)의 입직관(入直官)을 불러 쳐다보아 살피게 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또 승지에게 명하여 건상(乾象)을 쳐다보게 했는데, 달무리가 사라지고 하늘이 맑다고 고한 연후에야 그쳤다. 이어서 윤음(綸音)을 불러 쓰게 했는데, 하늘을 공경하는 뜻을 서술하고 재이(災異)를 만난 두려움을 말하였다. 그리고 써서 동궁에 들이라고 명하였다. 정원에서 수성(修省)하는 뜻으로 진계(陳戒)하였고, 다음날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각각 차자로 면계(勉戒)함이 있었다. 임금이 전 교리 이현중(李顯重)에게 호남을 암행(暗行)하라 명하였으니, 대개 여러 역적들의 정상과 허실을 살피고자 한 것이었다.

 

사충 서원(四忠書院)에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3일 병자

임금이 재실(齋室)에 나아가 승지를 불러, 내년 상신일(上辛日)에 사단(社壇)에서 기곡제(祈穀祭)를 친히 행하겠다는 명을 내렸다.

 

간원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니 따르지 않았다. 헌부 【지평 이수일(李秀逸) 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고, 또 상달하기를,
"청컨대 송시택(宋時澤)에게 응당 연좌될 자를 대조(大朝)께 품하여 모두에게 일률(一律)을 시행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12월 14일 정축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여러 죄인들을 친국하였다.

 

12월 15일 무인

헌부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2월 16일 기묘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여러 죄인들을 친국하였다.

 

12월 17일 경진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여러 죄인들을 친국하였다. 죄인 이운징(李雲澄)의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신은 무신년172)  에 박필현(朴弼顯)이 거병(擧兵)했을 때 송시택(宋時澤)·송시잠(宋時潛) 형제와 더불어 응모(應募)해 따라갔는데, 후대(後隊)가 되어 전주(全州) 삼천(三川)에 이르렀더니 성문이 닫혀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박필현이 먼저 징을 치고 달아났습니다. 그래서 신들도 또한 군복(軍服)과 조총(鳥銃)을 팽개치고는 각자 달아나서 돌아와 여태까지 버젓이 살아 왔습니다. 지금도 몰래 역심(逆心)을 품고 송시택의 무리와 치밀하게 체결하고 불궤(不軌)를 꾀하여 경향간(京鄕間)에 출몰하면서 도당(徒黨)을 구하였습니다. 항상 ‘의로운 당(黨)이니 천기(天機)니 기회를 얻었느니’ 하는 등의 말을 난만하게 수작하였고, ‘무신년에 잘못하였으므로 사람이 많이 죽었는데 만약 잘했다면 어찌 이루지 못하였겠는가?’라는 말로써 송시잠의 집에서 수작하였으며, ‘작년 나주(羅州)의 일은 천시(天時)를 알지 못해 양민(良民)이 많이 죽었다. 만약 때를 얻었다면 할 수가 있었다.’는 말을 또한 송시택의 집에서 수작하였습니다. 모역(謀逆)이 적실(的實)함을 지만(遲晩)합니다."
하니, 능지 처사(凌遲處死)하였다.

 

12월 18일 신사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여러 죄인들을 친국하였다.

 

12월 19일 임오

밤에 달이 태미 동원(太微東垣) 안으로 들어갔다.

 

대신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진하(陳賀)를 행하였으며, 팔도에 사문(赦文)을 반포(頒布)하였으니, 왕세자의 천연두가 나았기 때문이었는데, 임금이 국옥(鞫獄)이 한창 벌어지고 있다며 전(殿)에 임하지는 않았다.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여러 죄인들을 친국하였다.

 

역적 송시잠(宋時潛)·백수채(白受采)·이연우(李衍宇)·이지완(李枝完) 등이 복주(伏誅)되었다. 송시잠은 송시택(宋時澤)의 형으로서 무신년173)  에 전주에서 달아났다가 돌아왔던 자이다. 이연우·백수채는 또한 옥구(沃溝)의 상한(常漢)으로서 송시택의 당에 들었던 자인데, 모두 결안(結案)하여 정법(正法)하였다. 이지완은 본래 사헌부의 아전이었는데, 일찍이 역적 신치운(申致雲)의 겸종(傔從) 이대경(李大慶)에게서 역적 신치운의 망측한 흉언을 들었고, 고정엽(高廷燁)의 일을 보게 되자 비로서 선전관 박규환(朴奎煥)에게 말했던 것이다. 박규환은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에게 그것을 전하자 김상로가 즉시 장전(帳殿)에 진달하였으므로 이지완이 국청(鞫廳)에 잡혀와 이미 초사(招辭)를 바쳤던 것이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역적 이지완은 신치운 부자(父子)의 겸종과 망측하고 음참(陰慘)한 말을 수작했으니, 곧 또 하나의 신치운이다. 몇 해 동안 가슴속에 품어두고 있다가 감히 분수에 넘친 일을 바라고 이에 박규환에게 말한 것이니, 특별히 대역률(大逆律)을 시행하라."
하였다. 이때 여러 역적들이 모두 복법(伏法)되어 국사(鞫事)가 거의 끝나 가려는 참에 난데없이 한낱 이지완으로 인해 이장원(李章源) 등 여러 역적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국청에 잡혀와 역적들의 뿌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죄다 드러나게 되었으니, 천도(天道)의 밝고 밝음을 볼 수 있다.

 

임금이 이지완(李枝完)의 공초(供招)한 바의 음참(陰慘)하고 부도(不道)한 말을 듣고 하교하기를,
"무신년174)   이후로 망측한 흉언이 이르지 아니하는 바 없었는데, 작년에 역적 신치운(申致雲)이 또 만고에 없던 흉언을 하였다."
하고, 이어서 눈물을 흘리며 우니, 참국(參鞫)했던 여러 신하들이 모두 울며 감히 우러러 뵙지 못하였다. 박규환(朴奎煥)을 종성부(鍾城府)로 정배하라고 명하였으니, 이지완의 전한 바를 듣고도 5, 6일 동안 머뭇거리다가 비로소 대신에게 고했기 때문이었다.

 

12월 20일 계미

사직 정형복(鄭亨復)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고통이 몸에서 떠나면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진념(軫念)하여 구제할 바를 생각하고, 약의 어지럼증이 효과를 거두면 어진 선비의 충성스럽고 곧음을 생각하여 오게 할 방도를 생각하소서. 또 옛사람의 ‘고통이 안정되어도 그 고통을 생각한다.’는 경계를 생각하고 더욱 자신의 몸을 조심스레 보호하는 데 뜻을 더해 다시는 질병에 대한 근심을 우리 성상께 끼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답을 내렸다.

 

12월 21일 갑신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여러 죄인들을 친국하였다.

 

이최중(李最中)을 부응교로, 홍경해(洪景海)를 부수찬으로, 남태기(南泰耆)를 도승지로 삼았다.

 

12월 22일 을유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여러 죄인들을 친국하였다. 죄인 신치협(申致協)·김시억(金時億)을 결안(結案)하여 정법(正法)하였다. 신치협의 결안에 이르기를,
"신은 본래 역적 신치운(申致雲)의 지친(至親)으로서 그의 복심(服心)·편비(褊裨)가 되어 음참(陰慘)하며 망측하고 부도(不道)한 말을 역적 신치운에게서 듣고 이어서 김시억과 난만하게 수작하였습니다. 대역(大逆)에 동참한 것이 적실(的實)함을 지만(遲晩)합니다."
하였고, 김시억의 결안에 이르기를,
"신은 철원부(鐵原府)의 통인(通引)으로서 신치운이 본부(本府)의 부사가 되었을 때에 친애(親愛)를 받았습니다. 또 김해(金海) 임소(任所)에 따라가서 밤낮으로 함께 거처하면서 마치 종처럼 심부름을 하였습니다. 철원에 있을 때는 몰래 꾸민 망측하고 부도한 말을 역적 신 치운의 군관(軍官) 신치협에게 들었고 김해에 있을 때는 역적 이지완과 중동헌(中東軒)에서 같이 유숙하면서 신치협에게 들었던 흉언을 이지완에게 난만하게 전해 말하였습니다. 대역에 동참하였음이 적실함을 지만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여러 죄인들을 친국하고, 선인문(宣仁門)으로 나아가 총융사 이장오(李章吾)에게 역적 이흥효(李興孝)는 수구문(水口門) 밖에서 효시(梟示)하고, 신근(申慬)은 지정률(知情律)로 효시하라고 명하였다. 이흥효는 이진유(李眞儒)의 종손(從孫)으로서 신근의 초사(招辭) 때문에 국청에 잡혀왔던 것인데, 이진유를 역적이 아니라 하고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을 갈라서 둘로 보았고, 《천의소감(闡義昭鑑)》에 있는 역적 신치운의 망측한 말에 대해서는 단지 ‘해괴하다.’고만 하였으니, 이에 역장(逆膓)이 탄로났던 것이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작년에 처분한 이후 여러 역적의 잔당(殘黨)들이 징집(懲戢)되었는데, 이런 무리들이 먼 지방의 무식한 부류들을 속이고 유혹하였으니, 만약 이런 무리들이 없었다면 이운징(李雲澄)과 송시택(宋時澤)이 비록 불측한 마음을 품었다 할지라도 감히 이렇게 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날마다 장전(帳殿)에 임하였건만 단서는 캐낼 수 없었는데, 건도(乾道)가 밝고 밝아 이번에 이 역적을 잡게 되었다."
하고, 특별히 대역률(大逆律)을 시행하라고 명하고, 이어서 중외에 교시(敎示)하였다.

 

12월 24일 정해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여러 죄인을 친국하였다. 특별히 신완(申琬)을 석방했는데, 신완은 신치근(申致謹)의 아들로 역적 신치운의 지친(至親)이다. 이흥효(李興孝)가 끌어들였기 때문에 국청(鞫廳)에 잡혀 온 것이었는데, 임금이 그 공초(供招)한 바가 명백·정직하다 하여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중외에 교시(敎示)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축년175)   이후로 의리가 해와 별처럼 밝았으나, 당(黨)에 빠진 무리들은 오로지 비부(鄙夫)의 버릇만 일삼고, 효경(梟獍)과 같은 무리들은 감히 해를 쏠 마음을 내었다. 이로 인해 우리 동조(東朝)의 지극히 자애로운 덕과 우리 황형(皇兄)의 지극히 어지신 성덕(聖德)이 도리어 이 무리들이 속이고 유혹하는데 가려지게 되었다.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가 창도하자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이 제마음대로 날뛰었고, 이진유(李眞儒)·심유현(沈維賢)의 무리는 흉적과 한패가 되어 심지어 망측한 말을 지어내기까지 했으니, 이것이 내가 작년에 크게 처분을 내렸던 까닭이다. 그리고 어제 이흥효의 무상하고 망측한 마음에 대해 환히 유시하였으니, 오늘 어찌 신완의 정직한 공조에 대해 유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의 공초 가운데, ‘김일경·박필몽의 역적질은 만고에 없던 바이니, 사람이라면 누군들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조태구·유봉휘에 이르러서는 작년에 처분하기 전에 당과(黨科)에 빠져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이 모두 당(黨) 안에 있었으므로 능히 환히 깨닫지를 못하였으나, 《천의소감(闡義昭鑑)》을 한번 반포한 뒤로는 황연히 크게 깨달았으니, 비단 얼굴만 바꾼 것이 아니라 능히 스스로 마음까지 바꾸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그 공로를 보건대, 안팎이 다름이 없었으니, 더욱 가상하게 여길 만하다. 그리고 그의 처종조(妻從祖) 풍원(豊原)176)  은 말하기를, ‘작년 이전에는 오히려 미덥지 않았는데, 작년 이후에는 이에 깨달았다.’고 하였으니, 이는 마음을 쏟아내어 솔직하게 털어 놓은 것이다. 이흥효는 《천의소감》 가운데 있는 신치운의 망측한 말에 대해 재차 엄하게 묻자 단지 ‘해괴하다.’고만 하였으나, 이제 신완은 한번 묻자 ‘만고에 없던 역적이니, 만약 그것을 들었다면 어찌 손수 칼로 찌르지 않았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이흥효에 견주어 본다면 흑·백이 분명한 정도가 아니다. 이흥효는 정법(正法)하여 지금 세상을 징계하고 신완을 특별히 석방하여 다른 사람들을 권면토록 하라. 이것은 곧 ‘곧은 사람을 응용하여 굽은 사람뒤에 놓는다.’는 뜻이다."
하였다.

 

12월 25일 무자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여러 죄인들을 친국하였다. 역적 이장원(李章源)이 복주(伏誅)되었다. 이장원의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신은 역적 신치운의 생질로서 그의 양육을 받아 자랐기에 친자식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신 치운이 평상시에 음참(陰慘)하고 망측한 말을 신에게 전해 말하였으므로 신도 또한 일찍이 그과 더불어 수작하면서 옳다고 하였습니다. 신치운은 또 유봉휘·조태구의 상소와 차자를 모두 역(逆)이 아니라 했으므로, 신도 또한 ‘옳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역적 신치운의 망측하고 부도한 말을 모두 옳다고 하였으니, 대역(大逆)에 동참하였음이 적실(的實)함을 지만(遲晩)합니다."
하였다.

 

참국(參鞫)한 대간(臺諫)들이 모두 죄인 이광좌(李光佐)의 관작을 추탈(追奪)하고 역률(逆律)을 추시(追施)할 것을 청하였다. 대개 이장원의 공초에 이르기를, ‘《천의소감》에 실린 바의 흉언을 역적 신치운이 또한 일찍이 저에게 말해 주었는데, 역적 신치운은 그 당시 약방 도제거 이광좌에게 들었다고 했습니다.’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밤 5경에 임금이 인정전(仁政殿) 월대(月臺)에서 황단 망배례(皇壇望拜禮)를 행하였다.

 

12월 26일 기축

임금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도제조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지금 계책으로는 진안(鎭安)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좋다고 칭찬하였다. 이어서 전교를 써서 중외에 반시(頒示)하라고 명하였는데, 큰 뜻은 ‘정(靜)이란 한 글자와 ‘진(鎭)’이란 한 글자를 먼저 힘써야 할 것으로 삼은 것이었다.

 

12월 27일 경인

강화 유수 김상복(金相福)이 상서하여, 정축년177)   정월 22일에 근신(近臣)을 보내어 숙종 정축년178)  의 일과 꼭같이 충렬사(忠烈祠)에 제사를 내리고, 국상(國殤) 및 사민(士民)을 합제(合祭)하는 전례(典禮)도 또한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례(前例)에 의거해 거행토록 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해조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고 답하였다.

 

12월 28일 신묘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갔다. 죄수의 국문(鞫問)이 끝나자 흉장(凶杖) 등 여러 기구들을 불태워 버리라고 명하였으니, 다시 쓰고 싶지 않다는 뜻을 보인 것이었다.

 

교리 홍자(洪梓)와 부수찬 이인원(李仁源)이 상서하여 이광좌(李光佐)에게 역률(逆律)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그 글을 가져다 보고 하교하기를,
"지난날 신치운(申致雲)의 공초에 나온 ‘약방(藥房)’ 두 글자는 더욱 음참(陰慘)하고 망측한 것이었는데, 그때 약방에 예하(例下)하던 것을 가지고 이런 만고에 부도한 말을 날조해 꾸몄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장원(李章源)의 공초에서 이광좌를 핑계대고 있으니, 그 근본을 따져보건대, 마음이 마치 떨어지는 듯하다. 따라서 두 역적의 공초를 근본으로 삼는다면 그 계책을 적중시켜 주는 것이 될 것이니, 《천의소감(闡義昭鑑)》을 지은 뜻이 아니다. 이것을 그 당시의 도제거에게 돌린다면, 그 근본이 어찌 어지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어서 《약방일기(藥房日記)》를 상고하라고 명하니, 우의정 신만(申晩)이 임금께 아뢰기를,
"과연 그때 예하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삼사를 불러 통박(痛迫)한 뜻을 거듭 하유하고 다시는 제기하지 못하게 하였다. 마침내 일기 가운데 이 한 단락을 즉시 깎아 버리고, 《정원일기(政院日記)》에 실린 바도 또한 일체로 깎아버려, 흉역배(凶逆輩)들이 구실을 잡을 근본을 끊어버리게 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대조(大朝)에 상차하여 기곡 친제(祈穀親祭)를 정침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호남 암행 어사 이현중(李顯重)이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장전(帳殿)에서 소견하니, 이현중이 말하기를,
"송시택(宋時澤)과 소상교(蘇尙轇)의 무리는 혹은 술미치광이고 혹은 무식한 자들이니, 족히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와언(訛言)이 사방에 전파되면 백성들이 도망쳐 흩어질 마음을 품을 것이니, 성상께서 특별히 성유(聖諭)를 내리시고 온 도(道)에 선포하여 진안(鎭安)시키는 방도로 삼음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어서 이현중에게 다시 호서로 가서 조정의 덕의(德意)를 선포해 진안시키라고 명하였다.

 

이해 서울 오부(五部) 원호(元戶)는 3만 8천 1백 8호이고 【남자가 9만 1백 36명, 여자가 10만 7천 3백 16명이다.】  팔도의 원호는 1백 73만 3천 2백 42호였다. 【남자가 3백 44만 3백 98명이고, 여자가 3백 68만 5백 9명이다.】


【태백산사고본】 62책 88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37면
【분류】호구(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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