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8권, 영조 32년 1756년 11월

싸라리리 2025. 10. 5.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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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갑오

이날은 동지였다. 임금이 황조(皇朝)를 감념(感念)하여 문안(問安)한 여러 재신(宰臣)들을 거느리고 명정전(明政殿)에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이 해가 거듭 돌아오자 풍천(風泉)165)  의 생각에 신충(宸衷)이 갑절이나 격동되어 향을 피우고 망배(望拜)하면서 옥루(玉淚)가 얼굴을 덮으니, 족히 지사(志士)와 충신의 마음을 감동시킬 만하였다. 대사성 오연유(吳彦儒)가 선조(先朝)께서 어제(御製)하고 충렬공(忠烈公) 오달제(吳達濟)가 그린 묵매 장자(墨梅障子)를 올리니, 임금이 제찬(題贊)을 이어 써 하사하였다. 오언유는 곧 오달제의 증손이었다.

 

동짓날에 윤음을 내려 여러 도의 도신과 삼도(三都)의 유수들을 효유하였다. 임금이 언제나 백성들의 일을 생각할 때면 눈물이 말을 할 때마다 따라 흘러내리고, 사륜(絲綸) 사이에 성의(誠意)가 피어오르니, 신서(臣庶)들이 감격하고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11월 2일 을미

동지사(冬至使)가 사폐(辭陛)하였다. 임금이 사신(使臣) 장계군(長溪君) 이병(李棅) 등을 문정전(文政殿)에서 소견하고 하유하기를,
"지난 병자년166)  에 김육(金堉)이 사신으로 갈 적에 이 전(殿)에 입시했는데, 오늘 경 등을 이 전에서 소견하였으니,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다. 경 등이 돌아올 적에 만약 하청(河淸)167)  의 소식을 듣는다면, 거의 내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강개하여 오열하다가 스스로 글을 짓고 친히 써서 주었다.

 

전 판윤 이광세(李匡世)가 졸(卒)하였다. 이광세는 조정에 선 지 40년 동안 청개(淸介)·염아(恬雅)하여 환로(宦路)의 정세에 담박(淡泊)하였다. 이진유(李眞儒)가 용사(用事)할 때를 당하여 이광세는 그의 같은 성(姓)의 친족으로서 오히려 그 자취에 물들지 않았다. 역적 이진유가 복법(伏法)된 이후 이씨(李氏)의 여러 겨레붙이들이 혹은 폐인(廢人)이 되거나 혹은 죽임을 당하여 온전한 집안이 거의 없었는데, 이광세만은 홀로 남아 있다가 이때에 와서 졸한 것이다.

 

11월 5일 무술

임금이 익선관과 곤룡포 차림으로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망위례(望位禮)를 행하였으니, 장차 동향제(冬享祭)를 행하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11월 6일 기해

4경(四更) 1점(一點)에 육상궁에 친히 제사를 지냈다. 환궁(還宮)할 때에 효장묘(孝章廟)를 두루 들렀다.

 

11월 8일 신축

임금이 문정전(文政殿)에 나아가 강경(講經)을 행하였다. 임금이 《중용(中庸)》 제19장을 읽으며 말하기를,
"이 장(章)은 비록 길지만 내가 장차 다 읽으려 한다."
하고, 마지막 장을 다 읽기를 마치자, 하교하기를,
"내가 나랏일에 대해 모두 능하지는 못하나, 조제(調劑)하는 한 가지 일은 실로 고심(苦心)에서 나온 것이다. 여러 신하들은 이 마음을 알아 나의 원량(元良)을 섬기는 것이 옳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예부(禮部)의 자문(咨文) 가운데 범월(犯越)한 우리 나라 사람 둘을 돌아오는 재자관(齎咨官)에게 딸려 보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유년168)  의 전례에 의거하여 만부(灣府)169)  에서 경옥(京獄)으로 압송한 뒤에 구핵(究覈)하여 감단하여 처리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1월 9일 임인

이익보(李益輔)를 대사헌으로, 윤동승(尹東昇)을 집의로, 남기로(南綺老)를 지평으로, 박필수(朴弼燧)를 정언으로, 서지수(徐志修)를 부제학으로, 남유용(南有容)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11월 10일 계묘

왕세자가 차대를 행하였다.

 

11월 13일 병오

임금이 유신을 불러 주송(周頌)을 읽게 하였다.

 

11월 14일 정미

이때 여러 도의 유민(流民)이 날마다 서울로 몰려들었으므로, 임금이 선혜청에 명하여 죽을 쑤어 진휼하게 하였다. 이날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어제훈서(御製訓書)》를 읽게 하였는데, 애민편(愛民篇)에 이르자 선혜청 당상 이후(李)를 불러 하유하기를,
"그윽이 유민이 걸식(乞食)하는 모습을 상상하건대, 지극히 처참하고 딱하여 실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이는 실로 나에게서 말미암는 것이니, 오히려 누구를 탓하랴? 그러나 우리 유민들로 하여금 굶주림과 추위가 없이 구덩이를 메우는 것을 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선혜청 당상의 책임이다."
하였다. 이어서 눈물을 흘리며 차마 하교하지 못하니, 이후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다치신 것처럼 하는 마음으로 말씀과 분부가 이에 이르니, 신이 아무리 못났다고 할지라도 감히 우러러 성의(聖意)를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어서 윤음을 써서 여러 도에 효유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6일 기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예조 참의 김치인(金致仁)을 특별히 발탁하여 공조 참판으로 삼고, 전 감사 서지수(徐志修)를 원손 보양관으로 삼았다.

 

이해 봄은 동조(東朝)의 칠순(七旬)이라 하여 경외의 사서(士庶)로서 70세 이상에게 모두 추은(推恩)할 것을 허락하였다는데, 해조(該曹)에서 미처 거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특별히 단부(單付)를 명해 하루만에 부망(付望)한 바가 거의 6천여 명에 이르렀으니, 석류(錫類)의 어짊은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나 은전(恩典)은 외람된 데 혹 가까웠다.

 

11월 17일 경술

왕세자에게 천연두(天然痘) 증세가 있었다. 임금이 약방의 세 제조와 여러 의관(醫官)을 소견하여 말하기를,
"내 마음이 안절부절하여 능히 스스로 안정될 수가 없구나."
하고, 이어서 약원의 여러 신하들에게 강서원(講書院)에서 직숙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2일 을묘

임금이 극수재(克綏齋)에 나아가 약방의 세 제조와 여러 의관을 소견하여 하교하기를,
"천연두는 본디 날짜가 있어 한 보름[望]도 지나가지 않는데 내 마음은 하루가 한 달 같아, 실로 산에 들어가 알지 못한 채 조금 낫기를 기다려 돌아오고 싶으나, 그렇게 할 수가 없구나."
하였다.

 

11월 23일 병진

대비전(大妃殿)에 환후(患候)가 있었다. 임금이 약원의 여러 신하를 소견하고 말하기를,
"옛날 7년 동안 시탕(侍湯)했을 때에 자성(慈聖)께서는 항상 좌우에서 시탕하시며 낮부터 밤까지 의대(衣襨)를 벗지 않으신 채 잠시도 떠나지 아니하셨으며, 일찍이 한쪽으로 기대는 일도 누워서 쉬시는 때도 없었다. 나는 아홉 살 때부터 우리 자성을 모셨는데, 언제나 우러러 뵐 때면 반드시 기뻐하시었다. 오늘 꿈속에서도 생각지 않게 이처럼 편찮으시어 피부가 작년만 못하고 맥후(脈候)도 또 작년만 못하시다. 조금 전에 시좌(侍坐)하여 상세히 우러러 뵈었더니, 신기(神氣)가 피곤하고 어지러우며, 눈을 움직여 보고자 하시지도 않으시고 손을 들어 물건을 잡으려고도 하지 아니하셨다. 내 마음이 답답하여 정신과 혼백을 잃은 듯 능히 진정할 수가 없어 지난밤에는 옷을 벗지도 않고 지냈고, 아침에 수라를 들지 않았어도 또한 배고픈 줄을 모르겠다."
하였다.

 

11월 25일 무오

임금이 기쁨을 표하는 글을 친히 지어 동궁(東宮)에게 하사하였다. 이때 동궁의 춘추(春秋)가 한창 때이어서, 몸이 편찮고부터 상하가 근심하고 당황하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이때에 와서 약을 쓰지 않고도 곧 나았으므로, 임금이 심히 기뻐하여 이에 면계(勉戒)하는 말로써 친히 기쁨을 표하는 글을 지어 내렸던 것이다.

 

11월 26일 기미

동궁의 의약청(醫藥廳)을 혁파하라고 명하였다. 약원의 세 제조 이하에게 각각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또 천연두가 회복되었으므로 경과(慶科)를 중시(重試)의 대거 별시(對擧別試)와 합쳐 내년 봄에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유최기(兪最基)를 대사헌으로, 이수훈(李壽勛)을 정언으로 삼았다.

 

11월 27일 경신

대비전의 환후가 회복되었다.

 

11월 28일 임술

동궁의 약원 직숙을 혁파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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