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계사
임금이 황단(皇壇)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고, 인하여 감회문(感懷文)을 지었다.
권농(勸農)을 부지런히 하고 진전(陳田)을 개간하며 진제(賑濟)를 잘 하라는 세 가지 조목을 팔도(八道)와 삼도(三都)에 칙유(飭諭)하였다.
사대부와 서인으로 시집가고 장가드는 시기를 놓친 자에 대하여 중외(中外)로 하여금 돌보아 도와 주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가난한 선비가 시집가고 장가드는 시기를 놓친 것을 부끄럽게 여겨 가끔 숨기고 알리지 않는데, 부모의 물음에 자식이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만물은 봄을 맞이하면 모두 열매를 맺는 이치가 있는데, 아! 백성 가운데 혼인하는 시기를 놓친 자들은 초목(草木)만도 못하니, 어떻게 왕도 정치를 한다고 하겠는가? 나의 부지런하고 간절한 뜻을 본받아 실질적인 성과가 있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일 갑오
남유용(南有容)을 원손(元孫)의 사부(師傅)로, 홍계능(洪啓能)을 왕손의 교부(敎傅)로, 김상석(金相奭)을 대사헌(大司憲)으로, 홍계희(洪啓禧)를 좌빈객(左賓客)으로 삼았다.
1월 3일 을미
임금이 태묘(太廟)에 알현(謁見)하고 그 다음에 영희전(永禧殿), 저경궁(儲慶宮), 육상궁(毓祥宮)에 차례로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대궐로 돌아올 때 화완 옹주(和緩翁主)의 집에 들렀다.
전 판서 원경하(元景夏)의 치사(致仕)를 특별히 허락하였다. 원경하의 당시 나이가 60세이었는데, 구양수(歐陽脩)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쉬기를 바라는 글을 올렸으므로 임금이 듣고서 그의 뜻을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허락한 것이었다.
1월 4일 병신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강경(講經)을 행하였는데, 강경은 초6일로 정한 것을 명하여 이날 진행한 것이었다.
호서(湖西)에 명하여 흉년이 더욱 심한 고을은 미처 받아들이지 못한 대동세(大同稅)의 수납을 정지하도록 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도신의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호서의 흉년이 든 상황을 진달하기를,
"좌도(左道)가 가장 심하여 백성들 가운데 소금물을 마시고 스스로 죽은 자도 있고, 더러 부부가 서로 마주보며 목을 매어 죽은 자도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크게 놀라고 측은하게 여겨 대동세를 전부 감해 주려고 하였는데, 대신이 청하기를,
"우선 정지하여 풍년이 들도록 기다리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 뒤에 도신이 또 재해를 입은 두 번째에 해당하는 고을에 대하여 대동세의 절반은 〈수납을〉 정지하게 할 것과 영동(永同) 등 아홉 고을은 세포(稅布)를 돈으로 대신 바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어영 대장 정찬술(鄭纘述)을 특별히 파면하였다. 이때 병조 판서 이후(李)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여러 차례 만나기를 요청하였으나 정찬술이 끝까지 가서 만나지 않았으므로, 이후가 임금에게 아뢰어 이런 명이 있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제수하였다.
유리하는 백성 가운데 고향[本土]으로 돌아가는 자에게는 진휼청에서 돌아갈 동안의 양식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1월 5일 정유
임금이 선정문(宣政門)에 나아가 공인(貢人)·시인(市人) 등을 소견(召見)하여 폐단을 하문하고 구포(久逋)를 감해 주게 하였다.
지평 정운유(鄭運維)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진곡(賑穀)이 많지 않으니 청컨대 조정에서 경비(經費)를 제하고 각 고을에 나누어 주게 하소서. 또 청컨대 진전(陳田)은 개간하는 대로 세금이 부과되며 묵히면 번번이 세금을 감한다는 뜻을 수령들로 하여금 분명히 깨우쳐서 마침내 욕심을 극복하고 선행을 밝히는 뜻으로 우러러 힘쓰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 글을 가져다 보고 특별히 말을 하사하는 은전을 내렸다.
1월 6일 무술
중외(中外)에 명하여 백성을 역사시키는 정사를 금지하게 하였다.
유신을 불러 무일편(無逸篇)을 읽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오늘은 바로 원손(元孫)이 사부(師傅)와 서로 만나보는 날이므로, 유신을 불러 이 편(篇)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1월 8일 경자
원인손(元仁孫)을 대사간으로, 박도원(朴道源)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사직 기곡제(社稷祈穀祭)에 쓸 향(香)을 인정전(仁政殿) 월대(月臺)에서 친히 전하였다. 임금이 네 번 절하고 분향(焚香)하고 이를 마치자 또 네 번 절하였다. 대체로 처음에 친향(親享)할 것을 명하였다가, 삼공(三公)이 섭행(攝行)하도록 허락할 것을 힘껏 청함으로 인하여 이날 향을 전하고 분향하고 배례(拜禮)하기를 친향하는 의식과 같이 한 것이었다.
1월 9일 신축
유신을 불러 주송(周頌)001) 을 읽도록 명하였다.
1월 10일 임인
헌부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上達)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월 11일 계묘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1월 14일 병오
임금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유신을 불러 자성편(自省編)을 읽게 하였다.
문관·무관으로 침체된 사람의 관직을 특별히 임명하도록 하였다. 이보다 앞서 문관·무관의 당하관으로 침체된 사람에 대하여 첩지(帖紙)를 만들어 써서 올리라는 명한 바가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좌의정과 우의정을 입시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오늘 내가 선정(善政)을 하려한다."
하고, 전교를 쓰도록 명하기를,
"왕자(王者)의 정치는 한 사람을 기용하여 1백 사람을 용동(聳動)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문관·무관 당하관으로 침체된 사람에 대하여 첩지를 만들어 써서 들이도록 명한 것은 한편으로는 늘 눈여겨보는 자료를 삼으려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권면하여 기용하는 뜻을 삼으려는 것이니, 어찌 일반적인 사례를 따르겠는가? 통청(通淸)되지 않은 문신인 전 현감 권상용(權相龍)은 지평으로, 문신으로 수령을 거치지 않은 직강 고유(高裕)는 창녕 현감(昌寧縣監)으로, 전 도사 나충좌(羅忠佐)는 고양 군수(高陽郡守)로 임명하고, 무신 3품으로 영장(營將)을 거치지 않은 부사 이홍(李泓)은 나주 영장(羅州營將)으로 임명하고, 전 찰방 이인백(李寅白)은 과거에 합격한 지 이미 46년이 되었으니 특별히 도총부 도사로 임명하도록 하라. 아! 30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나이 지금 70을 바라보는데 어찌 지켜보기만 하고 그치겠는가? 아! 전조(銓曹)의 신하들은 이러한 뜻을 깊이 유념하여 침체된 사람을 거용(擧用)하고 적합한 사람을 가려서 뽑기를 급선무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6일 무신
임금이 명정문(明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고 동반·서반으로 하여금 각기 폐단을 진달하게 하였는데, 감찰 장한봉(張翰鳳)이 성의(聖意)를 스스로 힘써 가다듬을 것과 동궁(東宮)은 학문에 힘쓸 것을 우러러 권면하고, 또 수령을 가려 뽑아야 한다는 뜻을 진달하니, 임금이 그를 포장(褒奬)하여 우직(右職)에 조용(調用)하도록 명하였다. 호조 판서 민백상(閔百祥)이 말하기를,
"관동(關東)과 호서(湖西) 양 도의 도신이 연분(年分)002) 하는 전지의 총계를 마감하여 보고하는 장계에서 묵은 땅을 조사하고 세금을 면제해야 한다는 등의 명색(名色)으로 비총(比摠)003) 내에서 제하고 계산한 것은 사목(事目)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양 도신을 잡아다 추문(推問)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흉년이 든 해에는 농사를 짓도록 권면하는 일이 급선무인데, 이렇게 춘경(春耕)이 장차 시작되려는 시기에 이르러 묵은 전지를 기경(起耕)하도록 하는 일을 별도로 더 신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묵은 전지는 기꺼이 경작하려 하거나 기꺼이 경작하려 하지 않는 것을 논하지 말고 씨앗과 양식을 헤아려 지급하여 일일이 경작하도록 권면하고, 강등(降等)·강속(降續)은 일일이 직접 살펴보아 혹시라도 서로 뒤섞이는 일이 없도록 각도에 분부하소서. 그리고 흉년을 당하여 곤궁한 백성들이 반드시 농우(農牛)를 보유할 수 없을 것이니, 도살[屠宰]을 금지하는 일 또한 거듭 엄중히 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능창군(綾昌君) 이숙(李橚)이 동조(東朝)에 진연(進宴)할 것을 청하자, 김상로가 말하기를,
"봄철의 진휼하는 시기가 닥쳤으므로, 감히 갑자기 청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70세를 바라보는 나이로 80세를 바라보는 국모(國母)를 위로 받들고 있는데, 진실로 지난 사책에도 드문 바이다. 대신은 세수(歲首)에 앙청(仰請)했어야 마땅한데, 지금까지 조용히 있다가 바로 봄철의 진휼 때문이었다고 말하니, 참으로 매우 서글프다."
하였다.
승지를 보내어 금오(金吾)와 추조(秋曹)에 갇힌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도록 하였는데, 직강 위흥조(魏興祖)가 아뢴 바로 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예관(禮官)을 안변(安邊)에 보내어 정축년004) 전쟁에서 죽은 장사(將士)들에게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신회(申晦)를 대사헌으로, 심관(沈鑧)을 사간으로, 이언형(李彦衡)을 헌납으로, 윤동승(尹東昇)을 교리로, 오언유(吳彦儒)를 형조 판서로, 이창의(李昌誼)를 판의금부사로, 이정보(李鼎輔)를 예문관 제학으로, 이유신(李裕身)을 강원도 관찰사로, 김상철(金尙喆)을 충청도 관찰사로 삼았다.
1월 18일 경술
포도 대장 이장오(李章吾)가 청대(請對)하고, 장수(長水)사람 김의택(金義澤)이 비국에 정서(呈書)하여 다른 사람을 끌어대어 고발하면서 부도(不道)한 말이 있었다고 말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틀림없이 고정엽(高廷燁)의 일을 보고 이런 짓을 하는 것인데, 이런 부류를 만약 엄중히 징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말세(末世)의 사람들을 면려(勉勵)하겠는가? 즉시 전라 감영으로 압송(押送)하게 하여 피고인(被告人)과 대질시킨 뒤에 계문(啓聞)하여 엄중하게 다스림으로써 뒷날의 폐단을 막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9일 신해
정언 박규수(朴奎壽)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난날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호좌(湖左)에서 일정한 주거가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두 자녀(子女)를 데리고 다녔는데 남편이 그의 아내에게 말하기를, ‘우리 식구가 끝내 살아갈 길이 없고 굶주림과 추위만 절박하니, 차라리 빨리 결단을 내리는 것만 못하다.’ 하고, 먼저 그 자녀의 목을 매고 잇달아 그의 처의 목을 매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을 매어 4구의 시체가 나뭇가지에 달려 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듣고서 놀랍고 참혹함을 금하지 못하여 지나는 길에 도신을 보고 말이 이 문제에 언급되었는데, 도신 역시 이미 이 사실을 듣고 조사하여 보았더니, 정말로 그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길에는 굶주려 죽은 자가 서로 잇달았고, 떠돌며 빌어먹는 사람이 거리에 가득하여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애를 끌면서 울부짖으며 추위에 얼어서 죽으려는 모습은 차마 보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고향에 이르러 보니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었을 뿐만 아니라, 온 마을이 전부 빈 곳도 여기 저기 있었으니, 인가[人烟]가 적막하여 정경이 쓸쓸하고 참혹하였습니다. 백성은 국가의 근본인데, 국가의 근본이 이와 같으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으며 어찌 두렵고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특별히 은지(恩旨)를 내리고 도신에게 별도로 유시하여 각 고을에 신칙하게 함으로써 무마하여 안집(安集)하게 하되, 지성으로 백성을 보호하는 것을 제1의 의무로 삼도록 하고, 방편을 잘 마련하여 빠짐없이 징렴(徵斂)하는 것을 제2의 의무로 삼게 하소서. 따라서 지나치게 참혹하고 각박하게 하여 백성이 유리하며 흩어지게 한 자는 일체 대죄(大罪)를 삼도록 하고, 옛날의 포흠(逋欠)으로 징수할 데가 없는 것은 즉시 탕감(蕩減)해 주도록 하고, 이징(里徵)이나 족징(族徵)의 폐단을 엄중히 금지시키게 하고, 가난한 백성으로 의지할 데 없어서 바치기 어려운 자는 풍년이 들기를 기다리도록 허락하되, 추쇄(推刷)하는 정치를 시행하지 말도록 해서 이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조정의 덕의(德意)가 오로지 회유하고 보호하는데 있고 징렴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1월 21일 계축
임금이 화완 옹주(和緩翁主)의 집에 거둥하려고 하자, 여러 승지와 약방의 세 제조가 청대하여 입시하고, 도제조 신만(申晩)이 동가(動駕)하라는 명을 도로 정지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잠시 가서 보면 울적한 마음을 조금 풀 수 있을 것이니, 경들은 모름지기 심하게 만류하지 말라."
하였는데, 그것은 대체로 화완 옹주가 낳은 두 살이 된 딸의 병이 위중한 때문이었다.
1월 23일 을묘
임금이 화완 옹주의 집에 거둥하였는데, 옹주의 딸이 어린 나이로 죽었기 때문이었다. 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정지하도록 청하고, 여러 승지들과 약방의 세 제조가 청대하여 극력 말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1월 25일 정사
경기 어사 홍경해(洪景海)·관동 어사 윤동승(尹東昇)이 복명(復命)하였다. 경기의 양근 군수(陽根郡守) 유언현(兪彦鉉), 양천 현감(陽川縣監) 노언익(盧彦益), 관동의 낭천 현감(狼川縣監) 김순택(金純澤), 홍천 현감(洪川縣監) 홍익철(洪益喆)은 성실하다는 것으로 포창하여 어떤 사람은 새서(璽書) 표리(表裏)를 내려 주고, 어떤 사람은 말을 내려 주고, 어떤 사람은 우직(右職)으로 조용(調用)하게 하였다. 그 나머지 법을 어긴 수령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경중(輕重)에 따라 죄상을 감단하여 처분하게 하였다.
채제공(蔡濟恭)을 대사간으로, 박창윤(朴昌潤)을 집의로, 홍자(洪梓)를 헌납으로 삼았는데, 채제공은 바로 지방에 있다는 것으로 체임당하고, 특별히 김시영(金始煐)을 임명하여 대사간으로, 이현중(李顯重)을 승지로 삼았다.
1월 26일 무오
왕세자가 경춘당(景春堂)에 좌정(坐定)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구대(求對)하고 청하기를,
"와내(臥內)005) 에서 자주 궁관(宮官) 및 유사(有司)의 신하를 접견하여 경전(經傳)의 뜻을 강토(講討)하고, 백성들의 일을 상확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말하기를,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1월 27일 기미
회양(淮陽)·김성(金城)의 당년(當年)의 여러 공세(貢稅)를 면제하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어사 윤동승(尹東昇)이 돌아와 두 고을의 흉년이 든 상황이 관동(關東)에서 가장 심하여 한 지경이 거의 텅 비었다고 아뢰었는데, 대신이 진곡(賑穀)을 나누어 줄 것을 주청하자, 바로 이런 명이 있었다.
구윤명(具允明)·홍낙성(洪樂性)을 승지로, 윤방(尹坊)을 헌납으로, 김화진(金華鎭)을 정언으로, 이정보(李鼎輔)를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1월 28일 경신
구윤명(具允明)을 관동 안집사(關東安集使)로 삼았다. 당시 임금이 홍화문(弘化門)에 나아가 유민(流民)들 가운데 회양(淮陽)과 김성(金城)에 살고 있는 자를 소견하고, 임금이 하문하기를,
"너희들에게 신역(身役)을 모두 면제하고 또 북관(北關)의 곡식 3천 석(石)을 너희 고을에 수송하려 하는데, 너희들이 돌아가고 싶은가?"
하자, 모두 응답하기를,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정상이 서글프다."
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돌아갈 동안의 양식을 넉넉히 지급하도록 하고, 인해서 안집사(安集使)로 하여금 데리고 가게 하였다. 그리고 그 나머지 다른 도의 유민은 선혜청으로 하여금 양식을 번갈아 지급하여 본 고장으로 돌아가게 하고, 옷이 없는 자에게는 유의(襦衣)를 내려 주게 하였다. 또 강릉(江陵)·삼척(三陟)의 여러 공세(貢稅)를 차등 있게 감해 주도록 명했는데, 그것은 대체로 관동에 흉년이 든 것이 회양·김성이 가장 심하고 강릉·삼척 두 고을이 그 다음이었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인해서 제도에 칙유(飭諭)하기를,
"만약 방백과 수령이 진휼[賙賑]하고 권농(勸農)하는 정치에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것 같으면, 어찌 한갓 나만 저버리는 것이겠는가? 하늘이 앞으로 그대들에게 비칠 것이다."
하였다.
윤득우(尹得雨)를 발탁하여 승지로 임명하고, 교리 윤동승(尹東昇)을 파직하였다. 윤동승이 어사로서 복명(復命)할 적에 임금에게 아뢰기를,
"지난 겨울 이장원(李章源)의 초사(招辭)에, ‘흉언(凶言)의 근원이 이광좌(李光佐)에게 닿아 있다.’고 하였으니, 전형(典刑)을 명백히 시행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바로 또 덮어두게 하였으니, 가만히 생각하건대, 아마도 흉역(凶逆)의 여얼(餘孼)이 더욱 징계되어 두려워하는 바가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또 듣건대, 윤득우(尹得雨)의 이름이 긴요하게 역적의 초사에 나왔는데도 즉시 잡아다 국문(鞫問)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특지(特旨)로 진용(進用)하여 경악(經幄)의 반열에 두도록 하였으므로, 사방에 전파된 말이 모두 아무개는 이름이 역적의 초사에 나왔으나 오히려 가까운 반열에 있다고 하니, 어찌 국가의 형정(刑政)에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기뻐하지 않고 너무 괴롭힌다는 것으로 책망하였다. 그것은 대체로 윤동승 역시 일찍이 이광좌를 존모(尊慕)하다가, 을해년006) 이후로는 두려워하여 앞서의 견해를 바꾸었었다. 그리고 윤득우와는 가장 친한데도 이때에 이르러 이런 말을 하였으므로, 임금이 그를 야박하게 여겨 윤득우는 발탁하게 하고 윤동승은 파면하게 하였는데, 그것은 대체로 장차 진정시키려 한 때문이었다.
임금이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오늘 홍화문(弘化門)에 나아가 나의 백성들의 굶주려 누르스름한 얼굴빛과 갈가리 헤진 옷을 입은 몰골을 보았는데, 이로 미루어 먼 지방에서 가난하여 의지할 데 없어 구렁에 뒹구는 모양을 직접 보는 듯하였다. 이미 제도(諸道)와 삼도(三都)에 칙유하였고, 또 대신과 혜청의 당상에게 힘쓰도록 하였으나, 남은 회포가 불안하여 승선(承宣)을 불러다 힘쓰게 하였다. 아! 우리 주자(胄子)는 내 말이 혼모(昏耄)하다고 하지 말고 무릇 대리함에 있어서 반드시 백성을 우선으로 삼아 내가 30년 동안 미치지 못했던 정치를 보좌하도록 하라."
하고, 인해서 승지에게 명하여 동궁에게 구대하여 바치게 하였다.
이최중(李最中)을 승지로 삼았다.
1월 29일 신유
관동(關東)의 금년 가을 삭선(朔膳)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과 영희전(永禧殿)·저경궁(儲慶宮)·육상궁(毓祥宮)·문묘(文廟)의 삭제에 쓸 향과 목릉(穆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인정전(仁政殿)에서 친히 전하였다.
황단(皇壇)의 망배례(望拜禮)를 인정전 월대(月臺)에서 행하였는데, 이날이 바로 정축년007) 남한 산성에서 내려온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충렬사(忠烈祠)와 현절사(顯節祠)에서 〈제향(祭享)하는 충신의〉 후손(後孫)들을 아울러 입참(入參)하도록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당시의 일기(日記)를 보니, ‘태양이 빛을 잃었다’고 하였는데, 오늘날도 그러하다. 내가 64년 만에 다시 오늘을 보게 되었는데, 더구나 내일은 바로 목릉(穆陵)의 기신(忌辰)이다. 망의(蟒衣)를 입고 선왕(先王)을 찾아 뵈었다는 일과 해는 지고 갈길은 멀다고 하신 비답을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어찌 계승[繼述]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오랫동안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옥음(玉音)으로 울먹이다가, 삼학사(三學祠)에 치제(致祭)하도록 명하고, 또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을 특별히 부조(不祧)008) 하도록 명하였다.
호조 판서 민백상(閔百祥)이 진휼청에 저축된 곡식이 이미 다 떨어져 이 뒤로 발매(發賣)와 분진(分賑)을 분배(分排)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청하기를,
"호남청(湖南廳)의 창고에 보관된 묵은 쌀 1만 석(石)과 각청(各廳)의 감분미(減分米)에 한하여 모두 진휼청으로 이송(移送)하게 하고, 양호(兩湖)의 저치미(儲置米) 또한 1만 석에 한하여 나누어 보내게 해서 지금 배로 운송하여 계속 지급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민백상이 또 말하기를,
"기민(飢民)으로 추후에 내붙인 자는 그 숫자가 매우 많고, 무뢰(無賴)한 자들이 섞여 들어온 경우가 많이 있어 실직적인 혜택이 아래에까지 미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각부(各部)로 하여금 부장 한 사람을 가설(加設)하고, 또 군문(軍門)에서 일을 잘 아는 장교(將校)를 가려 뽑아 각부에 나아가 기민을 정밀히 가리게 하고, 성책(成冊)을 수정(修整)해서 5일마다 분진(分賑)할 때 원래의 기민(飢民)과 같이 진휼청에 영부(領付)하게 하소서. 그리고 진휼청의 낭청 두 사람으로는 두루 살피는 데 어려움이 있으니, 청컨대 선혜청 낭관 다섯 사람을 오부(五部)에 나누어 소속시켜 관장하여 진휼을 감독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홍계희(洪啓禧)를 예문관 제학으로, 김한철(金漢喆)을 대사헌으로, 심욱(沈勗)을 정언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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