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9권, 영조 33년 1757년 5월

싸라리리 2025. 10. 6.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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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신묘

함경도 영흥(永興)·안변(安邊) 등의 고을에 토충(土蟲)의 재해(災害)가 있었다.

 

5월 4일 갑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황해 수사 최진해(崔鎭海)가 장계하기를, ‘본영(本營)의 육로의 봉수(烽燧)는 앞뒤로 균형이 맞게 서로 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청컨대 성(城) 안의 덕월산(德月山) 가장 높은 곳에 한 봉수대(烽燧臺)를 설치하고, 도내(道內)의 여섯 산성(山城)에 각기 봉수대를 설치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여섯 군데에 봉수대를 아울러 설치하는 것은 아직 가볍게 의논하기가 어렵겠지만, 덕월산에 봉수대를 설치하는 일은 먼저 허락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조 참판과 참의의 의망(議望)은 바로 본과(本窠)로 신통(新通)하게 하는 일을 제도로 정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옛날의 제도를 변경하여 경연(經筵)과 국자감(國子監)078)  에서 통망(通望)된 자를 참판과 참의의 계제(階梯)로 삼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조 판서 정휘량(鄭翬良)이 아뢰기를,
"한번 새로 정식(定式)한 뒤로부터 경연과 국자감에서 통망이 1년에 거의 3, 4차례에 전관의 의망 또한 따라서 증가하고 있으니, 신의 생각에 전조 당상관의 통의(通擬)는 경연과 국자감을 경유할 필요 없이 곧바로 본과로 신통(新通)하게 한다면, 전관의 통망은 간소화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간소해질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하교하기를,
"왕위에 오른 지 30년이 되었지만, 한 가지도 은혜를 베푼 정치는 없었다. 그러나 여염집을 함부로 빌려서 들어가는 것을 금지시킨 것은 바로 나의 처음 정사였는데, 햇수가 오래되어 법이 해이해져 한 사람이 그것을 범하게 되면 또한 1백 명이 본받고 있으니, 통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유생은 종신토록 정거(停擧)시키고 조사(朝士)는 종신토록 금고(禁錮)시키되, 사사로움을 끌어대어 말하지 않는 자와 해부의 관원은 범한 자와 같은 율을 적용하도록 하라. 재능이 있는 관리의 폐단이 탐욕스러운 관리보다 심하다. 법에 벗어난 장형(杖刑)은 일찍이 이미 거듭 신칙하였지만, 그 영(令)이 반드시 행해진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도신으로 하여금 장문하게 하여 종신토록 수령으로 임명하지 말게 하고, 덮어 둔 도신은 수령과 똑같이 죄주도록 하라. 경옥(京獄)에서 정처(正妻)를 대신 가두거나 군무(軍務)가 아닌데도 곤장을 사용하는 것은 모두 이미 신칙하였지만, 국가의 기강이 해이(解弛)해졌으니 이런 폐단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을 논함이 없이 현직(顯職)에 임명하지 말게 하고, 덮어 두고 보고하지 않은 해당 관원은 우직(右職)에 임명하지 말도록 하라. 어염(魚鹽)은 옛날 상태로 돌아가게 하면 국가가 반드시 망할 것이다. 그리고 사노비(寺奴妃)에 대한 법과 관동(關東)의 상정(詳定) 등에 대한 일은 모두 균역청(均役廳)에 관계되는 것인데, 균역(均役)이 만약 무너진다면 국가 또한 따라서 망하게 될 것이다. 이 뒤로 어염에 대해 진고(陳告)하는 사람은 세 차례 형신(刑訊)하여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섬에 귀양 보내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전후(前後) 인산(因山) 때의 여사(轝士)를 겹쳐서 쓰지 말도록 명하였다.

 

박상덕(朴相德)을 이조 참의로, 심익성(沈益聖)을 사간으로, 이정철(李廷喆)을 장령으로, 김영섭(金永燮)을 지평으로, 김방(金埅)을 정언으로, 남태저(南泰著)를 교리로, 이응협(李應協)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무릇 국휼(國恤) 때 돈녕부(敦寧府)에서 진향(進香)하는 것이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지 않았으나, 인묘 임신년079)   뒤에는 계품(啓稟)하여 설행(設行)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하교하기를,
"《오례의》에 실려있지 않은 것은 바로 빠뜨려진 전례(典禮)이다. 이제부터는 정례(定例)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하고, 인하여 《상례보편(喪禮補編)》에 싣도록 하라."
하였다.

 

진휼청에서 아뢰기를,
"감관(監官) 홍계흥(洪繼興)·이진방(李振旁)이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죽(粥)을 끓여 먹이는 일로 분주히 애쓰다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듣고 측은하게 여겨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명하고, 기타 굶주리는 백성으로 물고(物故)된 자가 있으면 각부(各部)로 하여금 즉시 묻어주게 하였다.

 

5월 5일 을미

대행 대왕 대비 빈전의 시책문(諡冊文)과 애책문(哀冊文)을 언문(諺文)으로 써서 들여오도록 명하였다.

 

빈전 도감 당상 이익정(李益炡)이 아뢰기를,
"대행 대왕 대비의 발인(發靷) 때 성상께서는 대여(大轝)를 따름이 마땅한데, 현궁(玄宮)을 묘시(卯時)에 〈광중(壙中)에〉 내리게 되니, 제주전(題主奠) 뒤에는 즉시 반우(返虞)해야 하며, 초우제(初虞祭)는 혼전(魂殿)에서 행함이 적당합니다. 그리고 반우할 때에도 성상께서 역시 모시고 뒤따름이 적당합니다. 청컨대 이를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홍릉(弘陵)의 사방석(四方石)을 제거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옛날 우리 태종 대왕(太宗大王)께서 친히 왕후(王后)의 능에 나아가 광(壙) 위의 개석(蓋石)으로 으레 전석(全石)을 쓰던 것을 두 조각의 돌로 쓰도록 명하셨으므로, 이로써 제도로 정한 것이 《국조보감(國朝寶鑑)》에 분명히 기재되어 있는데, 지금 그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전석을 쓰는 것은 이상하다. 이제 이미 떠낸 전석은 명릉(明陵)에 사용하도록 명하라. 대저 내광(內壙)에는 단지 천회(天灰)만 사용하고 사방석의 덮개는 없는 것인데, 내광에도 없는 것을 외광(外壙)에 쓴다면 경중(輕重)이 어떠하겠는가? 더구나 천회는 오래되면 돌이 되어 곧 하나의 석광(石壙)인데, 석광 위에 또 편석(片石)을 더한다면 형식 가운데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옛날에 두 조각을 썼던 것도 아무 까닭 없이 고쳐서 썼던 것이니, 석공(石工)에 대한 큰 폐단과 승군(僧軍)이 깔리거나 다치는 것도 전적으로 이로 말미암는 것이었다. 수도각(隧道閣)은 얼마나 중요한 것이겠는가마는, 긴 나무를 가져다 쓰니 외방에 폐단을 끼치게 되므로, 이미 처음으로 제도를 변경하여 그림을 《상례보편(喪禮補編)》에 싣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한 가지 폐단을 없앤 것이다. 그리고 지석(誌石)을 떠오는 것 또한 하나의 큰 폐단인데, 새기고 나서 인진(印進)하는 즈음에 드는 비용이 많고 매우 설만(褻慢)하였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대궐 안에서 몇 조각의 자지(磁誌)를 얻었으니, 바로 영릉(寧陵)에 쓰고 남은 조각이었다. 이로 인하여 지금부터 명릉(明陵)에는 자지를 쓰도록 명하였으니, 이것은 두 가지 폐단을 없애는 것이다. 세 가지 폐단에서 이미 두가지를 없앴는데 어찌 또 한 가지를 없애지 않겠는가? 옛날의 성의(盛意)를 본받아 나무로 돌을 대신하게 한다. 그리고 홍릉(弘陵)에서부터 특별히 사방석(四方石)을 없애도록 하고, 이미 떠낸 돌은 능(陵) 안에 두었다가 뒷날 돌을 뜨는 데 하나의 도움이 되도록 하니 다른 의논은 하지 말고 즉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대저 사방석이 쓸모가 없음은 진실로 성상의 하교와 같았는데, 다만 일이 산릉(山陵)에 관계된다는 것으로 열조(列朝)에서 그대로 답습하여 감히 경솔하게 의논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하늘이 성상의 결단을 내리도록 인도하여 여러 사람에게 모의(謀議)하지도 않고 한 번에 없애버렸으니, 아! 성대하도다. 그리고 또 두 산릉(山陵)과 빈전(殯殿)·혼전(魂殿)의 의물(儀物) 중 무릇 형식적인 것과 민간의 폐단에 관계되는 것은 일체로 덜어 없애거나 면제하도록 법식(法式)을 정하였다. 선반미(宣飯米)를 옮겨 획급하게 하고, 대여강(大轝杠)을 가볍게 만들도록 한데 이르러서는 애휼(愛恤)하는 성의를 볼 수 있다."


【태백산사고본】 63책 89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48면
【분류】왕실(王室) / 역사(歷史)
사신은 말한다. "대저 사방석이 쓸모가 없음은 진실로 성상의 하교와 같았는데, 다만 일이 산릉(山陵)에 관계된다는 것으로 열조(列朝)에서 그대로 답습하여 감히 경솔하게 의논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하늘이 성상의 결단을 내리도록 인도하여 여러 사람에게 모의(謀議)하지도 않고 한 번에 없애버렸으니, 아! 성대하도다. 그리고 또 두 산릉(山陵)과 빈전(殯殿)·혼전(魂殿)의 의물(儀物) 중 무릇 형식적인 것과 민간의 폐단에 관계되는 것은 일체로 덜어 없애거나 면제하도록 법식(法式)을 정하였다. 선반미(宣飯米)를 옮겨 획급하게 하고, 대여강(大轝杠)을 가볍게 만들도록 한데 이르러서는 애휼(愛恤)하는 성의를 볼 수 있다."

 

5월 6일 병신

예방 승지를 불러 하교하기를,
"어제 하교한 바는 미진(未盡)한 부분도 있고 또 상세히 구명하지 않은 것도 있다. 대저 《오례의(五禮儀)》 본문(本文)의 석곽(石槨)의 제도를 보면 그 제도가 오늘날에 견주어 다른 점이 있다. 그러므로 《상례보편(喪禮補編)》을 만든 것은 대체로 이 때문이었다. 내광(內壙)에 돌로 싸는 제도는 비록 없다 하더라도 외광(外壙)에 하나의 돌로 덮는 것은 그대로 있으며, 내광 가운데 횡대판(橫帶板)을 바로 외재궁(外梓宮) 위에 설치하는 것은 대체로 감히 천회(天灰)를 재궁 위에 갑자기 설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외광은 여기에 견줄 것이 아니니, 바로 석함(石函) 위에 천회(天灰)를 다지는 가운데 양쪽 천회 사이에 판목(板木)을 설치하는 것은 자못 긴요하지 않은 것이다. 회는 썩지 않는다 하더라도 판목은 당연히 썩는 것인데, 이미 썩은 뒤에는 상하(上下)의 천회 사이에 가로로 하나의 틈만 생기게 되고, 천회가 내려앉을 때에는 능(陵)의 흙 또한 반드시 따라서 내려앉게 될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긴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광중에 해로움이 있게 되니, 이것이 상세하게 궁구하지 않은 것이다. 3백 년 동안 그대로 사용했던 돌을 지금 백성들의 폐단을 없애려고 했기 때문에 나무로 돌을 대신하도록 하였으나, 뜻이 미봉(彌縫)하는 데 가까웠다. 나도 또한 이와 같은데, 누가 사방석을 없앨 것을 청할 수 있겠는가? 어렴풋이 깨달았으니, 어떻게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빈전의 고유문(告由文)에 처음에는 나무로 돌을 대신하게 했다.[以木代石]’고 하였다가, 이제 고쳐서 ‘전적으로 천회로 다졌다.[全以灰築]’고 하였으니, 이것은 비록 한 글자 한 귀절이라도 감히 오르내리는 영령께 만홀(慢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감으로 하여금 단지 사방석만 없애고 외광(外壙)가운데에 배치하는 잡물(雜物)은 천회를 다진 뒤 한 조각의 판목도 쓰지 말고 전적으로 천회로 다져서 사발[盂]을 덮어 놓은 모양이 되도록 하는 데 이른다면, 현문(玄門) 밖은 바로 하나의 석광(石壙)이 될 것이니, 여기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7일 정유

하교하기를,
"옛날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가 〈탁무(卓茂)를〉 포덕후(褒德侯)로 봉(封)하였는데, 그 뜻이 대체로 깊다고 하겠다. 전 승지 김상석(金相奭)의 청렴하고 단아한 지조는 경박하고 떠벌리는 이들을 징계할 만하다. 사람됨이 편당이 없음을 근래에 더욱 상세히 알겠다. 판윤(判尹)에 과궐(窠闕)이 있으면 특별히 임명하도록 하라."
하였다.

 

특별히 위창조(魏昌祚)를 임명하여 승지로 삼았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듣건대, 승군(僧軍)으로 부역(赴役)하는 자들 가운데 경자년080)  에 와서 부역하는 자가 있다고 하니, 본도로 하여금 식물(食物)을 후하게 지급하도록 하고, 해조에서는 통정 대부(通政大夫)의 첩지를 내려 주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승지 이현중(李顯重)의 고집스럽고 막히고 치우치고 좁은 성격을 일찍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지척(咫尺)의 지위에 있으면서 웃음과 말을 번갈아 말하며 자신의 견해를 세우려 하는 등 매우 방자하고 무엄(無嚴)하였다. 먼저 그의 관직을 체차(遞差)시키고 삼등(三等)의 고신(告身)을 빼앗는 율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8일 무술

특별히 어석윤(魚錫胤)을 동지중추부사로 발탁하였는데, 어석윤은 선의 왕후(宣懿王后)의 종제(從弟)이다. 하교하기를,
"옛날 두 자성(慈聖)을 받들던 때를 돌이켜 생각하니, 감회(感懷)가 더욱 간절하다."
하고, 마침내 이 명이 있었다.

 

5월 9일 기해

굶주린 백성들에게 죽(粥)을 끓여 먹이던 일을 그만두도록 명하고, 병이 든 백성으로 미처 소복(蘇復)되지 않은 자는 활인서(活人署)로 하여금 구료(救療)하게 하였으며, 농촌으로 돌아가길 자원(自願)는 자는 노정(路程)을 헤아려 식량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5월 10일 경자

왕세자가 옥화당(玉華堂)에 좌기하여 차대를 행하였다. 대사간 남태회(南泰會)가 상달하기를,
"아비를 시해(弑害)한 죄인 이조원(李祚遠)이 추조(秋曹)에 공초를 바친 내용을 살펴보건대, 곧 결안(結案)이었으니, 빨리 유사(攸司)로 하여금 율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달한 바가 비록 옳지만, 대조께 계품(啓稟)하지 않고 청납하여 시행하기는 어렵다."
하고, 따르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도감 당상과 옥당 춘방의 관원을 인견(引見)하고, 대여(大轝)를 따를 때에 임금이 정문(正門)으로 출입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모두 대궐문은 종묘(宗廟)의 문과 다르므로 협문(挾門)을 경유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조칙(弔勅)이 오면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서 조칙을 받고 효소전(孝昭殿)의 치제(致祭)는 선정전(宣政殿)에서 행하며, 휘령전(徽寧殿)의 치제는 자정전(資政殿)에서 행하도록 명하였다.

 

5월 11일 신축

동적전(東籍田)의 친경전(親耕田)에 보리가 익었는데, 국휼[國哀]을 당한 것 때문에 베는 것을 섭행(攝行)하도록 명하였다.

 

5월 12일 임인

지평 김영섭(金永燮)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상순(鄭尙淳)이 영남에 사명(使命)을 받들어 채방(採訪)하는 즈음에 소홀하게 한 경우가 너무 많았습니다. 곧바로 공당(公堂)에 들어가 여러 날 동안 머물다가, 마침내 포장(褒奬)하도록 아뢰어 한결같이 사사로운 인정을 따랐습니다. 관기(官妓)에게 빠져 그의 추태(醜態)를 드러내었고, 본쉬(本倅)에게 돈을 구걸하여 그의 뜻을 즐겁게 하려고 힘썼습니다. 그가 중화(中和) 고을을 맡았을 때에는 여색(女色)을 좋아한다는 비방이 더욱 드러났었고, 지난번에 실화(失火)했던 것도 반드시 여색에 빠진 데에서 말미암지 않았다고 못할 것이니, 신은 삭거 사판(削去仕版)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또 대구 부사 최경흥(崔景興)과 면천 군수 임상익(林象翼)의 탐욕스러운 정상을 논하여 모두 체임시켜 파직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삭거 사판하는 것은 잡아다 추문(推問)한 뒤에 조처하도록 하겠으며, 파직하는 일 또한 일체로 잡아다 추문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그 글을 가져오게 하여 보고는 헌신(憲臣)이 일찍이 풍기(豊基) 고을을 맡았을 때 부정한 짓을 하여 남을 속이며 본도 어사에 대해 터무니없는 사실을 꾸몄다 하여 특별히 함문(緘問)081)  하도록 명하였다가, 곧 김영섭이 해조(該曹)에 나아가 함답(緘答)함으로써 먼저 특별히 체임하도록 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기생(妓生)과 놀아난 말을 어떻게 여막(廬幕)에서 기거하는 시기에 진달할 수 있겠는가? 그 말은 이를 것이 못된다."
하였다.

 

5월 13일 계묘

이태상(李泰祥)을 통제사로 삼았다.

 

산릉 도감(山陵都監)에 명하여 홍릉(弘陵)의 오른쪽 비어 있는 곳에 숭릉(崇陵)·명릉(明陵)의 예에 의거하여 조각에 십자(十字) 모형을 새겨 정혈(正穴)에 묻어 표시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대행 왕비의 시책(諡冊)과 시보(諡寶)를 내입(內入)하거나 배진(陪進)하는 당상관과 낭청및 봉입(捧入)하는 승지의 복색(服色)은 한결같이 경신년082)                  ·신사년083)                  의 전례에 의거하여 백의(白衣)와 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를 착용하고, 대행 대왕 대비(大行大王大妃)의 시책과 시보를 배진하는 관원의 복색 또한 계해년084)                  ·무진년085)                  ·경술년086)                  의 전례에 의거하여 면포 단령(綿布團領)·면포 모자·면포 띠를 착용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한성부에서 아뢰기를,
"인산(因山) 때의 여사(轝士)는 마땅히 실제 수효를 들여보내야 하는데 1만 7백 78명이 되며, 전어군(傳語軍)은 1백 50명이 됩니다. 그런데 부관(部官)이 연달아 찾아서 모으고 있지만, 아직도 부족할까 걱정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의 국역(國役)은 지난 사첩(史牒)에도 없는 것인데, 신민(臣民)이 된 자가 요행히 빠지기를 바란다면, 바로 난민(亂民)인 것이다. 다시 가려서 아뢰도록 하라. 아! 경자년087)  에는 탐라(眈羅)088)  의 백성들이 서로 이끌고 서울에 와서 산릉(山陵)에 흙을 져다 나르기를 원했었다. 아! 내가 비록 부덕하지만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몸소 최질(衰絰)과 기복(朞服)을 입고 이와 같이 찾아 모으게 하는 것은 두 달 안에 차마 겹쳐서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옛날의 깊은 인애(仁愛)를 생각한다면, 비록 평상시 호적에서 누락된 자가 있더라도 그가 울먹이며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민간(民間)에 효유(曉諭)하도록 하라."
하였다.

 

총융사 홍봉한(洪鳳漢)이 관서(關西)에서 돌아와 입사(入謝)하니, 임금이 여차(廬次)에서 인견할 것을 명하고, 곡(哭)하며 말하기를,
"오늘날 이 최복(衰服)을 입고 경을 보게 될 줄 어찌 요량하였겠는가? 경이 오래도록 지방에 있었으니, 안색(顔色)을 보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는데, 홍봉한이 우러러 쳐다보며 울먹이기를,
"천안(天顔)이 청수(淸瘦)089)  하여 옛날 같지 않으시니, 신은 근심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관서(關西)는 국가의 중요한 지역인데, 경(卿)이 비록 갑자기 체임되었지만 무슨 설시(設施)할 것이 있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신이 출발하여 미처 절반도 순행(巡行)하지 못하고 철수하여 돌아왔으므로, 미처 관방(關防)을 두루 시찰하지는 못하였습니다만, 대략 생각하고 헤아렸던 것을 새로 부임한 감사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견해가 같지 않으니, 과연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집의 김원행(金元行)이 한 달 전에 동궁(東宮)에게 올린 사직서(辭職書)를 가져오게 하여 본 다음 특별히 본직을 해임하도록 허락하고, 유시하기를,
"말이 매우 절실하고 정직하여 원량(元良)에게는 급소를 찌르는 매서운 충고라고 할 수 있다. 유신(儒臣)으로서의 체모를 깊이 얻었으므로,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모름지기 서연관(書筵官)으로 즉시 길에 올라 우리 원량을 보필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4일 갑진

김시영(金始煐)을 승지로 삼았다.

 

5월 16일 병오

정찬술(鄭纘述)을 포도 대장으로, 심관(沈鑧)을 집의로, 이세택(李世澤)을 지평으로, 김화진(金華鎭)을 부교리로, 홍봉한(洪鳳漢)을 판의금부사로, 신회(申晦)를 동지 경연사로 삼았다.

 

동적전(東籍田)의 친경전(親耕田)에 소맥(小麥)이 익었으므로, 또 섭행(攝行)하여 베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광주 유수 한익모(韓翼謨)를 인견하여 농작물의 형편을 하문하고, 하교하기를,
"보리 농사가 이미 영글었으니 갈고 김매는 일을 어긋나게 해서는 안된다. 비록 망극(罔極)한 슬픔 가운데 있지만, 밤낮으로 한결같이 생각하는 것은 오직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것인데, 요사이 가뭄으로 인하여 마음이 아주 민망스럽다. 비록 크고 작은 제사를 정지하도록 한 시기이지만, 이미 고례(古例)가 있으니, 근시(近侍)를 삼각산(三角山)·한강(漢江)·목멱산(木覔山)에 보내어 기우제(祈雨祭)를 행하도록 하라. 아! 성효(誠孝)가 천박(淺薄)하여 시탕(侍湯)하는 데 정성을 다하지 못하였고, 또 부덕함으로 말미암아 조금의 비도 내리게 할 수 없으니, 하늘을 우러러 보거나 땅을 내려다 봄에 있어서 부끄러운 이 마음을 억제하기 어렵다. 비가 내릴 때까지 한정하여 감선(減膳)함으로써 자신을 경계하는 뜻을 보이겠다."
하고, 인하여 가벼운 죄를 범한 죄수를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휘령전(徽寧殿)의 6월 망제(望祭)와 7월 삭제(朔祭)에 삼헌례(三獻禮)를 행하기로 결정하자,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아뢰기를,
"휘령전(徽寧殿)의 인산(因山) 뒤 삭제(朔祭)·망제(望祭)에는 삼헌례를 갖추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6월·7월 두 달은 대행 대왕 대비의 인산 전으로 제사를 정지한 때이니, 품정(稟定)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우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삭제·망제는 졸곡(卒哭) 등의 제사와는 다르니, 행할 수 없다는 의리는 없는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행하도록 명하였다. 이익정(李益炡)이 또 아뢰기를,
"대행 왕비의 발인(發靷) 때 으레 계빈(啓殯)하기 3일 전에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고유(告由)하는 것이 마땅하니, 대행 대왕 대비의 빈전에서도 고유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아비를 시해(弑害)한 죄인 이조원(李祚遠)을 율(律)에 의거하여 정형(正刑)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간신(諫臣)이 이 일을 소조(小朝)에 청하였는데, 대조(大朝)에게 계품(啓稟)하지 않은 까닭에 청납하여 시행하기 어려움이 있다고 답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형조에서 아뢴 바를 듣고 빨리 형을 집행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연곡(輦轂) 아래에서 이러한 변고가 있었다 하여 특별히 해부(該部)의 도사(都事)와 봉사(奉事)를 10년 동안 기한하여 반열의 말석(末席)에 두도록 명함으로써 강상(綱常)을 엄중하게 하는 뜻을 보였다.

 

임금이 통명전(通明殿)의 여차(廬次)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개성 유수        서종급(徐宗伋)을 파면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장단 부사(長湍府使)        이적(李樀)을 잡아다 추문하는 일로 인하여 송도(松都) 아병(牙兵)의 신역(身役)에 대한 일을 들으니, 양군(良軍)은 돈 1냥(兩) 5전(錢)을 받고, 사노(私奴)는 6전을 받으므로, 이웃 고을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피하여 헐한 데로 나아가니, 폐해를 끼침이 많습니다. 더구나 균역(均役)하는 법을 마련한 뒤에 군역(軍役)을 마음대로 줄이는 것은 조령(朝令)에 크게 어긋나니, 파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광희문(光熙門) 밖에서 적인(賊人)이 대낮에 총(銃)을 쏘아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았으므로, 임금이 인산(因山) 뒤를 기다렸다가 효시(梟示)하도록 명하였다.

 

5월 17일 정미

용산강(龍山江)과 저자도(楮子島)에서 재차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여군(轝軍)의 자원자(自願者)인 성묘(聖廟)090)  의 수복(守樸) 40명에게 다섯 달의 속전(贖錢)을 덜어주고 동문 외계(東門外契)에게 1년의 구실을 면제하여 주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여군이 부족한 때문에 경조(京兆)091)  에 신칙하여 누락자로 하여금 자수하게 하였는데, 성균관의 수묘(守廟)로 당연히 면제될 자 40명이 자원하여 응모(應募)하였고, 동문 밖의 백성들 또한 〈대여(大轝)〉 맬 것을 자원하여 사현(沙峴)에 나아갔으므로, 임금이 그들의 정성을 가상하게 여겨 이런 명이 있었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지금의 민심[民情]을 보니, 내마음이 부끄럽다. 임어(臨御)한 지 30년이 되었으나, 백성들에게 한 가지 은혜도 미치게 한 것이 없었으며, 도성의 백성들에 이르러서는 더욱 은혜를 도모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 나이에 몸소 최마(衰麻)를 입게 되어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안하게 여기는 것은 인산(因山)에 있었다. 그러나 두 달 만에 역사를 겹치게 하는 것 또한 옛날의 덕의(德意)를 우러러 본받는 것이 아니므로, 전후에 부지런히 하문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성균관 주위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동교(東郊)의 백성들까지 참여하였으니, 민심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뒷날 왕위를 계승하는 임금은 모름지기 오늘날의 뜻을 본받아 정성스런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도록 하라. 아! 그대들 3백 60고을의 수령은 모두 이 뜻을 본받아 백성을 동포(同胞)같이 사랑한다면 우리 나라는 잘 다스려질 것이다."
하였다.

 

5월 18일 무신

이날 큰비가 내렸다. 이보다 앞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도록 명했었는데, 두 번째에 이르러 비가 내리지 않으니, 임금이 민망하게 여겨 포도 대장에게 명하여 죄질이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도록 하고, 또 어사 홍양한(洪良漢)·남태저(南泰著)를 동강(東江)과 서강(西江)에 나누어 파견하여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염탐하게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비가 내렸으나 임금이 그대로 감선(減膳)하였는데, 이 비가 마침 어사가 사명(使命)을 받든 때에 내리고 복명(復命)하던 날에 또 비가 내렸으므로, 사람들이, ‘성상께서 소격(昭格)한 정성이 기약한 것처럼 하늘에 감통(感通)되었다.’고 말하였다.

 

호랑이가 동오릉(東五陵)의 국내(局內)에 들어갔으므로 군문(軍門)에 명하여 잡도록 하였다.

 

5월 19일 기유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태형(笞刑)과 장형(杖刑)은 본래 법도(法度)가 있으니, 50대 이하는 태형이고 1백 대 이하는 장형이다. 장형은 오직 추조(秋曹)에만 있는데, 그 명목을 빌린 자들이 더러 작은 것을 태라고 하고 큰 것을 장이라고 하고, 대소를 헤아리지 않고 50대 이하는 태형이라고 하고, 60대 이상은 장형이라고 하니, 만약 개정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어떻게 그것을 감당하겠는가? 이 뒤로 추조 외에 지방 고을에서는 단지 태형 50대로 제한하고, 다시는 장형을 일컫지 말도록 하라. 아! 왕자(王者)의 존엄(尊嚴)으로도 국문(鞫問)하고 신문(訊問)하지 않으면 감히 형벌을 시행하지 못하는데, 사족(士族)과 서인들도 종으로 불리는 자에게는 사삿집에서 형벌을 시행하기도 한다. 사사롭게 난장(亂杖)을 시행하는 데 이르러서는 본래 법조(法曹)와 해청(該廳)이 있으므로 혹 장고(壯告)하거나 혹은 정상을 말하여 법에 의거해서 조처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다고 흔쾌하게 여겨 사사롭게 시행하는 것인가? 이 뒤로 엄중히 경계시켜 범하는 자는 중하게 다스리도록 하라. 그리고 군무(軍務)가 아닌데 곤장(棍杖)을 쓰는 것은 일찍이 신칙하는 하교가 있었으니, 병조와 도총부에서는 모든 순검(巡檢) 때에 중죄를 범한 자라도 10대에 지나지 않도록 하는 일을 엄중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0일 경술

왕세자가 옥화당(玉華堂)의 여차(廬次)에 좌기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집의 심관(沈鑧)이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대각(臺閣)의 사체(事體)는 다른 관사와 저절로 다르므로, 조정에서 비록 함문(緘問)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대신(臺臣)이 된 자는 대각의 사례를 근거로 끌어대고 승정원에 오가면서 대신이라는 직함이 자신에게서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바야흐로 함사(緘辭)를 써서 바쳐야 하는가를 의논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 지평 김영섭(金永燮)은 대관(臺官)의 직임을 띠고 있는 몸으로 형조의 문 밖까지 나아가 마치 죄수가 공초를 바치듯이 함사를 써서 바쳤으니, 대각에 수치를 끼친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5월 21일 신해

대행 왕비의 발인(發靷)에 대한 첫 번째 습의(習儀)를 행하였다.

 

김상석(金相奭)을 강화 유수로 삼았다.

 

5월 22일 임자

조명채(曹命采)를 대사헌으로, 이수득(李秀得)을 대사간으로, 정항령(鄭恒齡)을 장령으로, 이석상(李錫祥)을 수찬으로, 김한철(金漢喆)을 판윤으로 삼고, 부제학 김양택(金陽澤)에게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자급을 더하여 원손(元孫)의 사부(師傅)로 삼았으며, 이지억(李之億)을 특별히 좌윤으로 임명하였다.

 

5월 23일 계축

임금이 통명전(通明殿)의 여차(廬次)에 나아가 대신과 예조 판서·경기 감사를 인견하였다. 임금이 경기 감사 정홍순(鄭弘淳)에게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고, 하문하기를,
"비의 혜택이 과연 두루 흡족하였는가?"
하였는데,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자 하문하기를,
"도내(道內)에 품처(稟處)해야 할 일이 있는가?"
하니, 정홍순이 아뢰기를,
"죽산(竹山)과 파주(坡州) 두 고을에서 타량(打量)하려고 하였으나, 신이 단지 진전(陳田)만 허락하였습니다. 양주(楊州)와 장단(長湍) 등 여섯 고을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개량(改量)한 뒤에 강속(降續)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만, 모두 재해를 입은 고을이기 때문에 미처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도신이 완급(緩急)을 자세하게 살펴서 풍년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개량해야 합니다. 파주(坡州) 두 고을에서도 모두 자원(自願)하였으면, 아울러 차례대로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양전(量田)은 중대한 일이다. 요체는 적합한 사람을 수령으로 얻는 데 달려 있으나, 그 책임은 감사에게 있다."
하자, 정홍순이 인하여 말하기를,
"바야흐로 인산(因山)의 역사(役事)를 당한데다 또 칙사(勅使)의 행차를 만나게 되었으니, 경기 내의 역(驛)들이 지탱하기 어려운 염려가 있습니다. 본도에서 진휼하고 남은 곡식으로 도로 회록(會錄)해야 할 것 가운데 청컨대 1천 석(石)을 획급하여 역졸(驛卒)들을 구휼(救恤)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특별히 허락하였다.

 

삼강 어사(三江御史) 남태저(南泰著)·홍양한(洪良漢)이 복명하니, 임금이 통명전(通明殿)의 여차(廬次)에서 소견하였다. 남태저가 종신(宗臣) 서청수(西淸守) 축(蹴)이 이웃에 사는 박씨 성[朴姓]의 사람을 죽인 일을 아뢰니, 잡아다 추문(推問)하여 엄중히 조사하여 아뢰도록 명하였다. 또 아산(牙山)에 살고 있는 홍호(洪暠)의 아들이 역적(逆賊) 이성(李𣛮)의 딸로 본부(本夫)와 이이(離移)한 자와 몰래 간통한 일을 아뢰니, 임금이 홍호의 자식은 정의현(旌義縣)에 형배(刑配)하고, 이성의 딸은 비(婢)로 삼아 절도(絶島)에 보내도록 명하였다. 홍양한이, 광흥수(廣興守) 이태상(李泰祥)이 지나치게 공인(貢人)의 종[奴]에게 곤장을 때려 죽이기에 이른 정상을 아뢰니, 해부(該府)에 명하여 엄중히 조사하게 하였다. 홍양한이 인하여 양창(兩倉)에 거짓으로 기록된 실상과 빙호(氷戶)에게 돈을 거두는 폐단을 아뢰니, 모두 낭관(郞官)을 잡아다 추문하도록 명하였다. 홍양한이 또 통진(通津)·김포(金浦)·양천(陽川)·부평(富平) 등 고을의 유민(流民)이 강가에 와서 살며 저절로 한 마을을 이루었는데, 호적에도 누락되었고 더러는 폐단을 일으킨다고 아뢰고, 한성부로 하여금 찾아 모아 입적(入籍)시키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들은 교화가 미치지 않는 곳의 백성들이다. 모두 모아서 경적(京籍)에 소속시키도록 하고, 네 고을의 수령은 잡아다 처분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양한이 또 아뢰기를,
"서잠실(西蠶室)이 한강(漢江)가에 있는데, 이는 바로 공상(公桑)의 중지(重地)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말라 죽은 나무를 베어내고, 인하여 그 지역 안에서 경작하고 있는데, 내시부(內侍府)에서는 그 지역의 지세(地稅)를 이롭게 여겨 또한 묻지 않으므로, 뽕나무 밭이 아주 없어지기에 이르렀으니, 자못 설치한 본 뜻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잠실(蠶室)은 후비(后妃)를 위해 설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궐 안에도 일찍이 잠판(蠶板)이 있었는데, 지금 이와 같은 사실을 듣건대, 내시들이 뽕나무를 없애고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는 신하보다 심하다. 특별히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092)  을 시행하고, 단지기[壇直]는 형배(刑配)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강촌(江村)의 호강(豪强)한 사람을 정배(定配)하고 합몰(合歿)한 가호에 대하여 돌보아 구휼할 것을 아뢰니,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5월 25일 을묘

총호사 이천보(李天輔)가 차자를 올렸으므로 체임하고, 좌의정 김상로(金尙魯)로 대신하게 하였다.

 

호군 김원행(金元行)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바야흐로 엄려(嚴廬)에 계시므로 명계(命戒)를 두지 못하시는데, 오히려 저군(儲君)093)  을 훈도[訓迪]하는 데 조급하셔서 신의 불초(不肖)함을 모르시고 친히 덕음(德音)을 내리시어 보도(輔導)하는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참된 정성이 발하는 곳에서 나무나 돌멩이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인데, 신은 오히려 사람이 되어서 감읍(感泣)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즉시 수레를 기다리지 않고 천폐(天陛)에 나아가 사은(謝恩)함이 마땅합니다만, 진실로 감히 그렇게 할 수 없고 차마 하지 못할 까닭이 있으니, 신은 눈물을 흘리며 그것을 진달하고자 합니다. 신은 타고난 운명이 지극히 험난하고 만난 시기가 망극(罔極)하였습니다. 신의 조부 신(臣)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이 숙종께 지우(知遇)를 받고 국가의 형세를 매우 염려하여 1백 번 죽을 것을 돌보지 않은 채 위충(危忠)을 다하다가 흉적(凶賊)들의 장해(戕害)를 면하지 못하였는데, 참혹하고 악독한 예봉(銳鋒)은 신의 부형(父兄)에게도 아울러 미쳐서 온 집안이 온통 뒤엎어진 것은 세상에서 슬퍼하는 바인데, 신이 다시 무슨 마음으로 차마 스스로 일반 사람들과 화합하여 그 불효(不孝)를 더 무겁게 하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천일(天日)094)  이 밝아서 삼세(三世) 동안 빠졌던 원통함을 차례로 모두 풀었고, 작년에 강사(江祠)를 건립하기에 이르러서는 선인(先人)의 정성 또한 이미 명백해졌으며, 천신(賤臣)의 사정 또한 풀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지 화란(禍難)의 시초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뼛골이 놀라고 마음이 무너지는 듯하여 굽히거나 펴거나 저승에서나 이승에서 가는 곳마다 슬프지 않은 데가 없는데, 한없이 통분스러운 마음이 간(肝)과 폐(肺)를 관철(貫徹)하니, 단지 자신이 없어진 뒤에야 그칠 것입니다. 아! 이미 죽은 재[灰]는 다시 태울 수 없고, 이미 말라버린 샘물은 다시 마실 수 없습니다. 신이 아무리 은혜를 머금고 의리를 두렵게 여겨 지우(知遇)에 보답하려 하지만, 이러한 마음으로 어떻게 다시 당세(當世)의 일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그대의 소장을 보니, 옛날의 일이 생각나서 슬픈 마음이 일어난다. 그대가 지금 원량(元良)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힘을 다하는 것은 바로 그대 조부(祖父)의 뜻을 좇는 것인데, 어찌하여 이와 같이 스스로 체념하는 것인가? 즉시 올라와서 특별히 유시한 데 대하여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6일 병진

두 혼전(魂殿)의 축문(祝文)과 폐백(幣帛)을 망료(望燎)095)  하는 의식을 정하고, 임금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예기(禮記)》 곡례편(曲禮篇)을 가지고 입시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명집례(大明集禮)》에는 제향하고 축문(祝文)은 모두 망료(望燎)한다고 하였는데, 오직 《오례의(五禮儀)》에는 망예(望瘞)한다고 일컬었으니, 오래도록 구덩이에 쌓아두는 것은 불결(不潔)하기가 더 심할 수 없다. 그런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은 중대한 예(禮)이므로, 감히 혼자의 견해로는 개정할 수 없는 것이고, 궐전(闕殿)에서 부묘(祔廟)한 뒤에 이르러서는 종묘와 사직에 견줄 것이 아니니, 효소전(孝昭殿)과 휘령전(徽寧殿)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제향(祭享)의 축문과 폐백은 구덩이 위에서 망료하고, 재는 구덩이 속에 묻는 일을 《상례보편(喪禮補編)》에 기재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도감 당상을 소견하였다. 이창의(李昌誼)가 말하기를,
"능상(陵上)의 사방석(四方石)은 바로 국조(國朝) 4백 년 동안의 고례(古禮)인데, 하루아침에 변개하게 하시니 신자(臣子)의 마음이 어찌 서운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홍계희(洪啓禧)는 말하기를,
"이는 바로 우리 성상께서 백성들의 폐단을 염려하여 국가의 비용을 절약하려는 성대한 뜻이지만, 지금 이미 떠내었으니, 단지 이번만 사용하도록 하고 뒤에는 다시 쓰지 말라는 뜻으로 하교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꾀하는 것은 아랫사람에게 달려 있지만, 그것을 결단하는 것은 윗사람에게 달려 있다. 그 돌이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하자, 이창의가 아뢰기를,
"이미 능혈(陵穴) 앞에 운반해 놓았으므로 당상관과 낭청이 볼 때마다 번번이 쓸 수 없음을 한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청컨대 대신과 예(禮)를 아는 유신에게 널리 묻고 살펴서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은 그치도록 하라. 내가 이미 빈전(殯殿)에 우러러 아뢰었는데, 어찌 감히 속일 수 있겠는가? 경들이 반드시 근거 없는 의논에 동요되어 그런 것이다."
하고 인하여 노한 음성으로 물러가게 하였다.

 

부사직 정간(鄭榦)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의례(儀禮)를 살펴보건대, 참최(斬衰)에는 관구(管屨)를, 자최(齊衰)에는 소구(疏屨)를, 부장기(不杖朞)에는 마구(麻屨)를 자최 3월(齊衰三月)과 대공(大功)에는 승구(繩屢)를 신고, 소공(小功)과 시마(緦麻)는 복(服)이 가벼워서 그 신의 이름이 없었습니다. 대체로 관구·소구·마구·승구는 복(服)에 따라 점차 줄어들었지만, 최복에는 진실로 신[屨]이 없을 수 없으므로, 신은 그 등급을 뒤섞이게 하여 어지럽힐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이 때문에 경자년096)  과 갑진년097)   두 해의 의주(儀註)에는 모두 관구를 착용하였으니, 상하(上下)의 복이 모두 참최였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경술년098)  에는 성상의 복은 자최 3년이 되고, 종친과 문무 백관의 복은 부장기가 되니, 성상께서는 소구를 신었어야 마땅하고, 신하들은 마구를 신었어야 마땅한데, 종친과 문무 백관이 동일하게 소구를 착용하였으니, 진실로 변별(辨別)하는 데 부족하였습니다. 금년에 신하의 복은 경술년과 같이 부장기이므로, 마땅히 마구를 착용해야 하는데, 예조에서 행회(行會)하여 종친과 문무 백관에게는 최복을 입게 하면서 원래 신의 이름을 빠뜨리고 백피화(白皮靴)를 대신 신도록 하였으니, 백피화란 바로 공복(公服)에 착용하는 것입니다. 경술년의 소구를 비록 상하의 복에 뒤섞어 착용하게 하였지만, 그래도 후한 편을 따르는 뜻에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지금 두 분은 성모(聖母)를 위하여 기년복(朞年服)을 입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복제(服制)인데, 그 신의 이름을 빠뜨려서 시마복(緦麻服)이나 소공복(小功服)과 다름이 없게 하였으니 진실로 이미 미안(未安)한 일입니다. 위에서는 최질(衰絰)을 입고, 아래에서는 공복에 착용하는 백피화를 신는다면, 어찌 심하게 뒤섞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대체로 유사(有司)의 신하가 《오례의(五禮儀)》를 준용(遵用)하였지만 줄어든 것이 그렇지 않음이 있어서입니다. 대저 《오례의》에 참최 이하는 모두 백피화를 착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최복이란 바로 생포(生布)로 감싼 모자와 띠를 착용하고, 생포로 된 단령의(團領衣)를 입는 것이니, 바로 선정신 서경덕(徐敬德)이 말한 장포(長布)의 옷은 서인(庶人)에 가깝다는 것으로서, 공복을 조금 변절(變節)시켜서 보이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비록 최복이라고 말하지만 곧 공복이니, 백피화를 신게 하는 것 또한 저절로 서로 알맞을 것입니다. 경자년 이후로 방상(方喪)099)  의 제도는 오로지 주 자 복의(朱子服議)를 적용하여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이후 천고(天古)의 고루(固陋)함을 씻고 관질(冠絰)과 의상(衣裳)을 모두 고제(古制)를 준용하였으면, 어찌 유독 신[屨]만은 그 복(服)에 맞는 마구(麻屨)를 버리고 예경(禮經)에도 드러나지 않는 백피화를 착용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또 삼가 생각하건대, 존귀(尊貴)함도 같고 복도 같은데, 경술년에는 구(屢)를 착용하게 하였으니, 어찌 전례에 익숙하지 못해서이겠습니까? 아니면 변경시킬 의도가 있어서입니까? 어찌하여 앞뒤가 자못 다른 것입니까? 구라는 물건이 비록 미미한 것이지만, 그것을 착용함에 있어서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하는데, 어찌 고운 것을 가만히 보아넘길 수 있겠습니까?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최복이 예제(禮制)에 맞지 않으면 차라리 최복을 입지 않아야 한다.’ 하였으니, 비록 복제(服制)로써 결단하더라도 제도가 예제에 맞지 않는다면, 어떻게 개정해야 할 바를 생각지 않겠습니까? 옛날 송(宋)나라 영종(寧宗) 때에 유사(有司)가 흑사[漆紗]와 천황(淺黃)으로 된 복을 잘못 착용하였으므로, 주자(朱子)가 계빈(啓殯)과 발인(發靷)에 복제(服制)를 변경하는 절차로 인하여 다시 초상(初喪)의 복을 착용함으로써 이미 지나간 잘못을 추후에 고칠 것을 청하니, 영종이 조칙(詔勅)을 내려 그대로 따르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잘못된 전례를 고친 하나의 큰 증거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신의 이 글을 가지고 위로 대조(大朝)께 계품(啓稟) 하시고, 아래로 대신과 유신에게 하문하셔서 발인하는 날에 이르러 백피화를 버리고 마구를 착용하신다면, 방상(方喪)하는 제도가 순수하여 한결같이 바른 데로 돌아가 옛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구차한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5월 27일 정사

예관(禮官)이 정간(鄭榦)의 글을 가지고 아뢰니, 임금이 그 의논을 따라 백관이 최복(衰服)을 입을 때에는 마구(麻屨)를 착용하여 백피화(白皮靴)를 대신하게 하였다. 인하여 《상례보편(喪禮補編)》에 기재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유신에게 명하여 《예기(禮記)》를 가지고 입시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50세에는 몸을 극도로 훼상(毁傷)하지 않게 하고, 60세에는 몸을 훼손하지 않게 하고, 70세에는 최마복(衰麻服)을 입기만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자, 교리 김화진(金華鎭)이 말하기를,
"70세에 만약 상인(喪人)으로 자처(自處)한다면, 어찌 병(病)이 나지 않겠습니까?"
하고, 수찬 홍양한(洪良漢)은 말하기를,
"50세에 기력이 비로소 쇠약해지기 때문에 극도로 훼상하지 않아야 하고, 70세에는 더욱 쇠약해지기 때문에 최마복(衰麻服)을 입는 외에 음식(飮食)과 거처(居處)는 평상시와 다름이 없게 하라는 것이니, 대개 반드시 문 밖의 의려(倚廬)에 있지 않아도 됨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량(元良)이 강례(講禮)를 요즈음에 폐(廢)하지 않는가?"
하자, 홍양한이 말하기를,
"춘방(春坊)의 말을 들으니, 근래에는 날마다 개강(開講)하였다고 합니다. 다만 지금은 계찬(啓欑)100)  할 시기가 며칠 남았으니, 비록 이것이 예경(禮經)을 읽는 공부라 하더라도 아마 개강할 때가 아닌 듯하고, 성상의 하교를 받들지 못하였기 때문에 감히 갑자기 정지하였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시기가 닥쳤는데, 어떻게 개강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성 왕후(貞聖王后) 빈전(殯殿)의 계찬(啓欑)을 〈발인(發靷)〉 하루 전에 행하고, 《상례보편(喪禮補編)》에 기재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오례의(五禮儀)》에 3일 전에 계빈(啓殯)한다는 문구(文句)가 있다는 것을 가지고 대신에게 문의하도록 명하였는데, 영중추부사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그 문세(文勢)를 살펴보건대, 이미 계빈의(啓殯儀)라고 말하였는데, 3일 전에 종묘 사직에 고(告)한다는 것은 계빈(啓殯)하기 3일 전을 가리키는 듯하며, 그 날이란 계빈하는 정일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지금 만약 종묘에 고하는 날에 찬궁(欑宮)을 철거한다면, 그 사이 며칠 동안 가리는 것이 없게 되어 참으로 매우 미안(未安)합니다. 사가(私家)의 전례를 가지고 말한다면 발인(發靷)하기 하루 전에 조전(朝奠)101)  으로 인하여 구(柩)를 궤연(几筵)에 옮긴다는 것을 고하고 이어서 청사(廳事)에 옮기게 되니, 예의(禮意)로 미루어 보면 계빈은 발인하기 하루 전에 있어야 마땅하고, 종묘 사직에 고하는 일은 계빈하기 3일 전에 있어야 마땅합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이종성(李宗城)은 말하기를,
"계빈(啓殯)하는 예(禮)는 장차 조조(朝祖)102)  하려는 것이고, 발인하기 3일 전에 태묘에 고하는 것은 조조를 대신하는 것이니, 계빈하는 절차는 발인하는 전날 저녁에 있어야 마땅합니다."
하고, 유척기(兪拓基)는 말하기를,
"옛날에는 토감(土坎)103)   속에서 구(柩)를 꺼내어 그 구를 가지고 조조(朝祖)하였으므로, 전기(前期)에 빈소(殯所)를 헐어야 했지만, 지금은 옛날과 다르니 전기에 계빈(啓殯)하는 것은 공경하는 마음이 부족한 듯합니다. 신의 의논은 이종성(李宗城)과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발인하기 하루 전에 계빈하는 것은 바로 왕공(王公)과 필서(匹庶)가 공통으로 행하는 전례인데, 더구나 계빈하는 일이 옛날 제도와 다른 것이겠는가? 지금의 경우는 날마다 열지 않음이 없는데 어떻게 국한시킬 수 있겠는가? 대신의 의논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5월 28일 무오

서지수(徐志修)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5월 29일 기미

임금이 예방 승지와 편차인(編次人)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통명전(通明殿) 곁에 샘이 있는데, 이름을 열천(冽泉)이라고 부르도록 하라"
하고, 소지(小識)를 불러주어 쓰게 하고, 통명전에 걸게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 전(殿)에서 네 차례 진연(進宴)하였고, 휘호(徽號)를 올린 것이 여덟 차례였는데, 지금 화변(禍變)을 만났으니, 여기에서 슬픔과 기쁨이 진실로 상반된다."
하고, 또 술회(述懷)하는 글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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