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신유
임금이 친히 정성 왕후(貞聖王后)의 명정(銘旌)을 쓰고, 또 친히 대행 대왕 대비 재궁(梓宮)에 상(上)자를 썼다. 재궁에 옻칠하게 하였는데, 모두 25차례 하고 마쳤다.
6월 2일 임술
제주(濟州)의 백성 40인(人)이 산릉(山陵)의 역사에 나아가기를 자원(自願)하여 올라왔으므로, 임금이 명정전(銘政殿)에 나아가 소견하고 위유(慰諭)하였다. 〈그 중에〉 표고(蔈古)를 바치는 자가 있었는데, 임금이 하문하기를,
"무엇 때문에 가지고 와서 바치는 것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일찍이 권민가(勸民歌)를 보니 미나리를 바친 자가 있었으므로, 신 또한 이런 뜻입니다. 신 등이 멀리 떨어져 있는 바다 가운데 살면서 자주 흉년을 만났지만, 굶어 죽는데 이르지 않았던 것은 진실로 우리 성상께서 곡식을 옮겨 구휼하신 은혜에 말미암았으니, 신 등이 비록 지식은 없으나 어찌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마저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백성들에게 한 가지도 은혜가 미치도록 한 것이 없으므로, 진실로 너희가 바치는 것을 받을 의리가 없다. 그러나 너희들의 정성은 실제로 선조(先朝)의 은덕에 감격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바친 것으로 빈전(殯殿)에 올리도록 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제주(濟州)의 사노(寺奴) 유만길(兪萬吉)과 김원행(金遠行)은 바로 경자년104) 인산(因山) 때에 부역(赴役)한 자인데, 또 부역하려 왔음을 듣고 매우 가상하게 여겨 그의 아들과 손자를 모두 영원히 천인(賤人)을 면하도록 허락하였다.
양 의사(兩醫司)105) 및 군문(軍門)에 명하여 더위를 씻을 약제(藥劑)를 넉넉하게 가지고 가서 여군(轝軍)의 병(病)을 치료해 주도록 하였다.
특별히 전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을 서용하여 다시 전의 직임을 제수하였다. 이보다 앞서 헌신(憲臣)이 경성(京城)의 가까운 지역에서 훈국(訓局)의 뇌자(牢子)가 조총(鳥銃)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겁탈하기에 이르렀다고 한 까닭에 훈련 대장을 파직할 것을 청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서용한 것이었다.
6월 3일 계해
대행 왕비의 발인(發靷)에 임금이 단양문(端陽門) 밖에 나아가 대여(大轝)를 바라보며 곡(哭)하고, 인해서 대여를 따라 숙장문(肅章門) 밖에 나아가 두 번 절한 다음 곡하면서 전송하고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임금이 말하기를,
"적체(敵體)106) 의 의리는 매우 중대한 것이다. 지금 내가 최복(衰服)을 입었으므로, 대궐 안에서 곡하며 전송하였지만, 평상시의 경우는 대궐 밖에서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뜻을 《상례보편(喪禮補編)》에다 기재하도록 하고, 또 정축년에 처음으로 시행한 까닭을 주석(註釋)으로 달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호읍(號泣)하면서 대여(大轝)를 따르는데, 눈물이 잇달아 흘러내렸다.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러 곡하며 하직하자 따르던 신하들이 모두 곡하였는데, 반우(返虞) 때에도 그렇게 하였다.
단양(丹陽)과 회인(懷仁)의 금년 전조(田租)를 감해 주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두 고을의 백성들이 이미 3분의 2가 넘게 도로 모였다는 것을 아끼고 보호하는 도리를 깊이 생각하여 회양(淮陽)과 금성(金城)의 전례에 의거하라는 이런 명이 있었다.
6월 4일 갑자
정성 왕후(貞聖王后)를 홍릉(弘陵)에 장사지냈다.
인산 의주(因山儀註)이다. 3월 초2일에 정성 왕후(貞聖王后)의 산릉(山陵)을 창릉(昌陵) 왼쪽 산등성이에 정하여 을좌 신향(乙坐辛向)으로 능혈(陵穴)을 마름질하고, 3월 19일 사시(巳時)에 역사를 시작하였다. 같은 달 30일 오시(午時)에 풀을 베고 흙을 팠으며, 5월 초2일 사시(巳時)에 금정(金井)을 열었는데, 능혈의 깊이는 8척(尺) 4촌(寸)이었다. 【영조척(營造尺)을 썼다.】 6월 초2일에 찬궁(欑宮)을 열고, 같은 달 초3일 축시(丑時)에 발인(發靷)하였다. 같은 달 초4일 축시에 산릉(山陵)의 찬궁을 열고 같은 날 진시(辰時)에 현궁(玄宮)에 내렸다. 시보(諡寶)와 시책(諡冊)은 5월 25일 사시(巳時)에 내입(內入)하였다가 같은 날 27일 진시에 내출(內出)하였고, 빈전(殯殿)에 증시(贈諡)는 같은 달 사시에 하였다. 명정(銘旌)은 같은 날 미시(未時)에 고쳐 썼다. 6월 초2일에 찬궁을 열었다. 왕세자가 최복(衰服)을 갖추고 〈곡(哭)하는〉 자리로 나아가 곡하니, 상식(尙食)이 향안(香案) 앞에 나아가 향을 올리고, 술잔에 술을 부어 영좌(靈座) 앞에 드렸다. 전언(典言)이 축문(祝文) 읽기를 마치자, 상식이 영좌와 전(奠)을 전내(殿內)로 옮겼다. 우의정 신만(申晩)이 꿇어앉아 아뢰기를, ‘삼가 좋은 때에 찬궁을 열게 되었습니다.’ 하자, 상전(尙傳)이 여러 내시들을 거느리고 찬궁을 걷어 치웠다. 상전이 수건으로 재궁(梓宮)을 닦고 관의(棺衣)를 덮으니, 내시가 영좌(靈座)와 영침(靈寢)에 휘장을 설치하기를 모두 처음과 같이 하였다. 6월 초4일에 정성 왕후(貞聖王后)의 장사를 지냈다. 하루 전에 견전제(遣奠祭)107) 를 의식대로 지냈다. 섭통례(攝通禮)가 영좌 앞에 나아가 어좌에서 내려와 여(轝)에 오르기를 계청(啓請)하였다. 내시가 혼백함(魂帛函)을 받들어 요여(腰轝)에 안치하고, 우주궤(虞主櫃)는 그 뒤에 안치하였다. 빈전(殯殿)의 문 밖에 이르러 여에서 내려 연(輦)에 올랐다. 섭통례가 재궁 앞에 나아가 순(輴)에 올리기를 계청하자,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재궁을 마주 들 궁관(宮官)과 내시들을 거느리고 재궁을 받들어 윤여(輪轝)를 따라 순소(輴所)에 나아가서 소금저(素錦褚)로 덮으니, 내외(內外)가 모두 곡을 하였다. 내시가 삽(翣)108) 과 행장(行障)으로 재궁을 가리고, 명정(銘旌)을 든 사람이 먼저 행진하여 빈전의 문 밖에 이르니, 순에 올리고 외문(外門) 밖에 이르러 대여(大轝)에 올렸다. 의위(儀衛)가 인도하여 따르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요령[鐸]을 잡은 자가 요령을 흔들자, 궁인(宮人)이 말을 타고 곡하며 따르는데, 곡하는 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영가(靈駕)가 숭례문(崇禮門) 밖에 이르러 개강(改杠)하여 문 밖으로 나가고, 또 개강하여 노제(路祭)를 지내는 곳에 이르니, 섭통례가 여 앞에 나아가 연에서 내려 여에 오르기를 계청하였다. 또 여에서 내려 영좌에 올리기를 계청하였다. 내시가 혼백함을 받들어 장전(帳殿) 가운데 안치하였다. 섭통례가 대여 앞에 나아가 조금 머물기를 계청하니, 유도 백관(留都白官)이 진향(進香)하고 노제를 의식대로 지냈다. 왕세자가 봉사(奉辭)하는 자리에 나아가 곡하며 슬픔을 다하였다. 섭통례가 영좌(靈座) 앞에 나아가 영좌를 내려 여(轝)에 올리기를 계청하였다. 또 여에서 내려 연(輦)에 올리기를 계청하고, 섭통례가 대여(大轝) 앞에 나아가 출발할 것을 계청하였다.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러 예찬(禮饌)을 올리기를 조석전(朝夕奠)과 같이 하였다. 창릉(昌陵)의 홍살문[紅箭門] 밖에 이르러 섭통례가 혼백연(魂帛輦) 앞에 나아가 조금 머물기를 계청하니, 연을 멘 군사들이 연을 돌려 북향하여 욕석(褥席)에서 멈추었다. 조금 있다가 또 출발하기를 계청하였다. 대여가 이르니 역시 그와 같이 하였다. 대여가 출발하여 능소(陵所)에 이르니, 섭통례가 대여 앞에 나아가 여에서 내려 순(輴)에 올리기를 계청하였다. 정자각(丁字閣)에 이르니 또 순에서 내릴 것을 계청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재궁을 마주 들 궁관(宮官)을 거느리고 재궁을 받들어 윤여(輪轝)를 따라 나아가 찬궁(欑宮) 안의 탑(榻) 위에 머리를 남쪽으로 향하게 하여 안치하였다. 섭통례가 혼백련 앞에 나아가 연에서 내려 여에 올리기를 계청하고, 정자각에 이르러 또 여에서 내려 영좌에 올리기를 계청하니, 내시가 혼백함(魂帛函)을 받들어 영좌에 안치하고, 우주궤(虞主櫃)는 뒤에 안치하고, 향안(香案)은 그 앞에 설치하고, 명정(銘旌)은 영좌의 오른쪽에 설치하였다. 또 시책(諡冊)·시보(諡寶)·애책문(哀冊文) 및 평상시 사용하던 인보(印寶)를 영좌의 왼쪽에 두고, 또 영침(靈寢)을 재궁의 동쪽에 설치하였다. 궁인이 자리에 나아가 곡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이날 천전의(遷奠儀)를 의식대로 행하였다. 섭통례가 영좌 앞에 나아가 여에 올라 길유궁(吉帷宮)으로 나아가기를 계청하고, 또 여에서 내려 영좌에 올리기를 계청하니, 내시가 혼백함을 받들어 영좌에 안치하였다. 섭통례가 또 재궁 앞에 나아가 순에 올라 현궁(玄宮)으로 나아가기를 계청하니, 우의정 신만(申晩)이 수건을 받들어 재궁을 닦았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재궁을 받들어 순에 올리고, 순을 메는 군사가 순을 받들어 왼쪽으로 돌아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게 하여 현궁으로 나아가니, 궁인들이 모두 곡을 하였다. 순이 수도각(隧道閣)에 이르러 윤여(輪轝)로 재궁을 받들어 퇴광(退壙)의 산륜(散輪)109) 위에 올려 안치하고, 소금저를 제거하였다. 감싼 것이 제대로 풀어졌는가를 봉심(奉審)하고 녹로(轆轤)를 사용하여 퇴광 안의 윤여 위에 안치하니, 우의정 신만이 수건을 받들어 재궁을 닦고, 관의(棺衣)를 세 겹으로 덮고, 명정을 그 위에 두었다. 좌의정 김상로가 재궁을 마주 드는 궁관을 거느리고 재궁을 받들어 외재궁(外梓宮) 안에 안치하였다. 우의정 신만이 다시 관의와 명정을 정돈하였다. 국장 도감 제조 홍상한(洪象漢) 등이 보삽(黻翣)·불삽(黻翣)·화삽(畵翣)을 재궁의 양쪽 옆에 꽂았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애책문(哀冊文)을 퇴광의 서쪽에 올리고, 증옥(贈玉)과 증백(贈帛)을 애책문의 남쪽에 올리니, 집의 심관(沈鑧)이 봉폐(封閉)한 것을 감시하였다. 우의정 신만이 아홉 번 삽질하여 흙을 덮었다. 지석(誌石)을 내리고 우주(虞主)를 세워 전례(奠禮) 행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섭통례가 길유궁(吉帷宮) 앞에 나아가 어좌에서 내려와 여(轝)에 오르기를 계청하였다. 내시가 우주를 받들어 여에 안치하고, 혼백함(魂帛函)은 그 뒤에 두었다. 길유문 밖에 이르니 여에서 내려 연(輦)에 오르기를 계청하고, 의장(儀仗)이 앞에서 인도하였다. 창릉(昌陵)의 홍살문[紅箭門] 밖에 이르니 연을 돌려 북쪽을 향하여 욕석(褥席)에서 멈추고, 조금 있다가 출발하였다.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러 예찬(禮饌) 올리기를 조석전(朝夕奠)과 같이 하였다. 도성문(都城門) 밖에 이르니, 왕세자가 지영(祗迎)하며 곡배(哭拜)하기를 의식대로 하고, 뒤따라 대궐로 돌아왔다. 우주연(虞主輦)이 종묘(宗廟)의 앞길에 이르니, 연을 돌려 북쪽을 향하여 욕석(褥席)에 멈추고, 조금 있다가 출발하였다. 혼전(魂殿)의 문 밖에 이르니, 섭통례가 연에서 내려 여에 올리기를 계청하였다. 혼전의 뜰 위에 이르니, 또 여에서 내려 영좌에 올리기를 계청하자, 내시가 우주를 받들어 영좌에 안치하였다.
이날 진시(辰時)에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망곡(望哭)하였으며, 왕세자는 덕성합(德成閤)에서 망곡하였다.
왕세자가 반우(返虞) 행렬을 교영(郊迎)했을 적에 멀리에서 신여(神轝)를 바라보며 부복(俯伏)하여 곡(哭)하였는데, 잠시 흘린 눈물이 자리에 가득하여 흐를 정도에 이르렀으므로, 둘러서서 보던 신민(臣民)들이 감동하여 울먹이지 않은 이가 없었다. 삼경(三更)에 신위(神位)를 휘령전(徽寧殿)에 봉안(奉安)하였는데, 왕세자가 최복(衰服)을 갖추고 초우제(初虞祭)를 행하였다.
6월 5일 을축
새벽에 왕세자가 최복(衰服)을 갖추고 재우제(再虞祭)를 행하였다.
임금이 통명전(通明殿)에 나아가 총호사, 삼도감의 당상·낭청, 여사 대장(轝士大將)에게 상(賞)을 내렸다. 총호사 이천보(李天輔)·김상로(金尙魯)에게는 구마(廐馬)를 대면하여 내리고, 빈전 도감 제조 이익정(李益炡)·이정보(李鼎輔)·신회(申晦)에게는 숙마(熟馬)를 내리고, 김한철(金漢喆)에게는 아마(兒馬)를 내렸으며, 도청(都廳) 김시묵(金時默)·정존겸(鄭存謙)에게는 준직(準職)110) 에 임명하도록 하였다. 국장 도감 제조 홍상한(洪象漢)·이후(李)·이철보(李喆輔)에게는 반숙마(半熟馬)를 내리고, 민백상(閔百祥)에게는 아마를 내리고 도청 윤학동(尹學東)·정순검(鄭純儉)에게는 준직을 임명하게 하였다. 장생전(長生殿)의 도제조 이천보, 제조 이정보·송창명(宋昌明)에게는 숙마를 내리고, 지문 서사관(誌文書寫官) 신만(申晩), 애책문 제술관(哀冊文製述官) 원경하(元景夏), 서사관(書寫官) 박명원(朴明源), 시책문 제술관(諡冊文製述官) 정휘량(鄭翬良), 서사관 김한신(金漢藎)에게는 숙마를 내리고, 제주관(題主官) 조재홍(趙載洪), 봉폐관(封閉官) 심관(沈鑧)에게는 가자(加資)하도록 하고, 증옥백관(贈玉帛官) 이천보에게는 구마를 내렸다. 금정(金井)에 취토(取土) 한 승지에게는 숙마를 내리고, 신련(神輦)을 시위한 예방 승지에게도 숙마를 내리고, 사관(史官)과 병조·도총부 당상관과 옥당(玉堂)의 관원에게 모두 아마를 내리고, 여사 대장(轝士大將) 구선복(具善復)에게는 숙마를 대면하여 내렸다. 종사관(從事官)에게는 아마를 내리고, 산릉 도감으로 식재 궁관(拭梓宮官)인 신만과 제조 이창의(李昌誼)·홍계희(洪啓禧)·이종백(李宗白)에게는 숙마를 내리고, 도청 황갑(黃柙)·이의철(李宜喆)은 준직으로 임명하도록 하고, 낭청(郞廳)과 원역(員役) 등에게는 전례를 상고하여 차등이 있게 상을 베풀도록 하였다.
6월 6일 병인
해서(海西)의 장연(長淵)에 황재(蝗災)가 있었다.
박창윤(朴昌潤)을 집의로, 서유량(徐有良)을 지평으로, 이방수(李邦綏)를 교동 부사로 삼고, 명정 서사관(銘旌書寫官) 신회(申晦)에게는 자헌 대부(資憲大夫)를 더하고, 우주 서사관(虞主書寫官) 조재홍(趙載洪)에게는 가선 대부(嘉善大夫)를 더하고, 봉폐관(封閉官) 심관(沈鑧)에게는 통정 대부(通政大夫)를 더하였다.
6월 7일 정묘
새벽에 왕세자가 최복(衰服)을 갖추고 삼우제(三虞祭)를 행하였다.
임금이 도감 당상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박지성(朴知誠)은 장례 뒤에도 영침(靈寢)을 설치해야 한다고 하는데, 혼백(魂帛)을 이미 상자 속에 안치하여 영침에 넣어두는 것은 아마도 해로울 것이 없는 듯하지만, 신주(神主)같은 데 이르러서는 눕혀 두는 것이 적합하지 않으니, 이 예(禮)는 자못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니, 이철보(李喆輔)가 말하기를,
"신주는 눕혀 둘 수 없으니, 장례를 치른 뒤 영침(靈寢)을 설치하는 것은 부당한 듯합니다."
하였다.
6월 8일 무진
사우제(四虞祭)를 행하였다. 임금이 휘령전(徽寧殿)의 초우제(初虞祭)가 일중(日中)의 예(禮)에 벗어났다 하여 일부러 효소전(孝昭殿)의 초우제를 행궁(行宮)에서 설행(說行)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대신에게 문의하게 하였다. 판중추부사 유척기(兪拓基)는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 초우조(初虞條)에 장례를 치르는 날 일중(日中)에 행하는데, 간혹 길이 먼 경우 이 날만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하며 만약 하루 밤을 지내야 하는 이상의 경우에는 행궁(行宮)에서 행한다고 하였고, 《주부자가례(朱夫子家禮)》에도 또한 이르기를, ‘집이 하루 밤을 지내야 하는 이상의 거리에 있으면 묵는 곳에서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주부자의 정론(定論)이 이미 이와 같고 《오례의》 역시 이와 같으니, 어찌 궁실(宮室)에 돌아와서 우제(虞祭)를 지내고 편안히 모시기를 조금이라도 지체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또 인산(因山) 및 반우(返虞) 때에 전하께서 대여(大轝)를 따르는 의절은 모두 《오례의》에 실려 있는데, 유독 초우(初虞)만 행궁에서 행하지 않고 반드시 혼전(魂殿)에서 행하는 것은 아마도 정밀한 뜻이 그사이에 있는 듯하니, 결단코 경솔하게 변경할 수 없습니다. 다시 삼가 생각하건대 명릉(明陵)의 현궁(玄宮)을 내리는 길시(吉時)가 묘시(卯時)이니, 반우가 반드시 매우 늦지 않고, 모든 거행도 아마 지체되지 않을 듯합니다. 비록 혹시 조금 늦어진다 하더라도 우제를 먼저 행하고 다음으로 다례(茶禮)를 행하는 것이 예(禮)에 적합할 듯합니다. 그리고 《오례의》에 실린 것이 만일 고례(古禮)에 어긋난 것이 있지 않거나 사세(事勢)에 매우 방해되지 않는 경우에는 아마도 용이하게 변통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한 듯합니다."
하였는데, 여러 대신들의 의논이 모두 같았으므로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반우한 뒤에 소차(小次)에 머물면서 정돈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즉시 효소전(孝昭殿)에서 초우제를 행하고, 다음에 다례를 행하고, 그날 밤에 곧 재우제를 행하도록 명하고, 이것을 예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였다.
조명정(趙明鼎)·구윤명(具允明)·채제공(蔡濟恭)을 어제 편차인(御製編次人)으로 삼았다. 임금이 예방 승지와 편차인을 인견하였다. 친히 우제문(虞祭文)을 짓고, 이철보(李喆輔)에게 말하기를,
"경이 이제 늙었으므로 쉬게 하고 싶지만, 대신할 만한 이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조명정(趙明鼎)은 조명리(趙明履)의 종제(從弟)이고, 구윤명(具允明)은 그의 아비가 일찍이 찬집(纂輯)하는 역사에 참여하였으며, 채제공(蔡濟恭)은 내가 오광운(吳光運)을 생각한 때문인데, 세 사람을 아울러 임명하는 것이 가하겠는가?"
하자, 이철보가 말하기를,
"모두 마땅한 사람을 얻었습니다."
하였다.
6월 9일 기사
종성(鐘城)의 주민 조자영(趙自永) 등이 범월(犯越)하였으므로 예부(禮部)에서 자문(咨文)을 보냈는데, 의주 부윤이 그 사실을 치계(馳啓)하자, 비국에서 조사하여 아뢰기를,
"경오년111) 의 전례를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참핵사(參覈使)를 보내어 죄인을 압송해 오는 것이 마땅한데, 지역이 멀어서 지체될 터이므로, 먼저 이자(移咨)를 금군 기발(禁軍騎撥)에게 부쳐 의주(義州)에 보내어 북경(北京)으로 전송(轉送)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비국에서 인하여 이이장(李彛章)을 추천하여 참핵사로 삼게 하였는데, 그 뒤 얼마 안되어 의주 부윤[灣尹]이 또 치계(馳啓)하여 성경(盛京)의 자문이 또 왔다고 하므로, 비국에서 북경의 예부에 이자한 예와 같이 회자(回咨)를 먼저 보내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장령 정항령(鄭恒齡)이 《어제상훈(御製常訓)》을 가지고 널리 해석하여 12편(編)을 만들고, 동궁에게 상서하며 바치니, 왕세자가 가납(嘉納)하였다. 뒤에 임금이 그 내용을 듣고서 정 항령에게 녹비(鹿皮)를 내려 주었다.
6월 10일 경오
참핵사(參覈使) 이이장(李彛章)을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이이장이 말하기를,
"피국(彼國)에는 반드시 수색(需索)112) 이 있어야 하니, 전례에 의거하여 관향고(管餉庫)·운향고(運餉庫)의 은(銀) 각각 4백 냥(兩)을 가지고 가고, 면대하여 전하는 예물은 평안도 병영에서 준비해 가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하교하기를,
"범월한 사람 조자영(趙自永)·강비암(姜非巖) 등은 이미 자문(咨文)에 등재되어 있으니, 참핵사(參覈使)가 모두 압송하여 가서 모든 실제의 상황을 낭중(郞中)에게 말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이장이 말하기를,
"죄인을 모아서 조사할 장소는 의주(義州)로 정하였는데, 고사(故事)를 가져다 상고해 보건대, 형조에서 다시 문초할 때에는 반드시 세 당상관이 모두 합좌(合坐)하여 추문하였으니, 사체(事體)가 가볍지 않습니다. 도신과 함께 합좌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이미 의주에서 행하도록 하였으니, 별도로 지망(地望)이 있는 수령을 정하여 회동(會同)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평양(平壤)에서 회동하기로 기약하였다면, 도신과 함께 합좌하는 것이 옳겠다. 전(傳)에 이르기를, ‘임금의 명을 욕되지 않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번에 조사하는 일은 오로지 참핵사(參覈使)에게 맡겼으니, 모쪼록 잘 주선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니, 이이장이 대답하기를,
"신이 감히 생사(生死)를 걸고 그 사건을 처리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6월 11일 신미
오우제(五虞祭)를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산릉(山陵)의 역사에 가난한 사대부들이 자원하여 부역(赴役)하였고, 또 어떤 과부가 자원해 와서 부역을 하였으며, 조선군(漕船軍) 역시 자원하였다. 옛날의 깊은 은혜가 사람들에게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으니, 영원토록 잊지 못할 일이다."
하였는데, 당시 삼창(三倉)의 조군(漕軍) 1백 80명이 부역하기를 자원하였으므로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제주(濟州) 주민들의 전례대로 돌아갈 양식을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이철보(李喆輔)·홍계희(洪啓禧)에게 《속상례보편(續喪禮補編)》을 증수(增修)하도록 명하고, 조명정(趙明鼎)·구윤명(具允明)에게 교정(校正)하게 하였다.
산릉(山陵)에서 취토(取土)했던 낭청 김인대(金仁大)를 소견하여 흙의 빛깔이 어떠했는지를 하문하자, 대답하기를,
"돌 같으면서도 돌은 아니었습니다. 견고하고 또 윤기가 있는 것이 홍릉(弘陵)의 흙 빛깔과 같았는데, 대체로 이것은 같은 산맥(山脈)이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김인대가〉 고 판 결사 김태연(金泰衍)의 아들임을 물어서 알고, 하교하기를,
"고 좌상 송인명(宋寅明)이 일찍이 김태연(金泰衍)을 추천하였었는데, 미처 헤아려서 기용하지 못하였으므로, 마음에 늘 애석하게 여겼었다. 지금 그의 아들 김인대(金仁大)를 보니 그의 아비와 비슷하다."
하고, 해조(該曹)로 하여금, 외임(外任)에 조용(調用)하도록 하였다.
6월 12일 임신
대빈전(大殯殿)에 시호(諡號)를 올린 뒤에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시책(諡冊)과 시보(諡寶)를 명정전(明政殿)에 임시로 안치할 곳을 마련하고, 제집사(諸執事)가 수직(守直)하도록 명하였다.
6월 13일 계유
사경(四更)에 왕세자가 휘령전(徽寧殿)에서 육우제(六虞祭)를 행하였다.
임금이 봉조하(奉朝賀) 원경하(元景夏)를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능(陵)에 알현할 때 곡(哭)하며 네 번 절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하문하자, 원경하가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고례(古禮)에 있지 않던 것이고, 열성조(列聖朝)에서 시행하지 않았던 것이므로, 근거할 만한 예(禮)가 없습니다. 다만 방조(傍照)한 것이 있는데, 조조(朝祖)하는 예는 상인(喪人)이 상복(喪服)을 입고 구(柩)를 따르며 사당 앞에서 곡하게 되어 있으니, 전하께서 이미 여(轝)를 따라 선릉(先陵)을 알현하신다면, 곡하며 절하는 예를 행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남의 자식이 된 인정과 도리로 어떻게 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어서 원경하에게 하문하기를,
"경의 집안에서도 장례를 치른 뒤에 영침(靈寢)을 설치하지 않는가?"
하였는데, 대답하기를,
"장례를 치른 뒤에 영침을 철거한다는 글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실려 있지 않고 신의 고조부(高祖父) 형제가 박지계(朴知誡)에게 수학(受學)하였으므로, 박지계의 예를 적용하여 장례를 치른 뒤에도 영침을 철거하지 않았었습니다. 신의 어미는 바로 문경공(文敬公) 이세필(李世弼)의 딸인데, 이 세필 집안의 상례(喪禮)는 전적으로 《상례비요(喪禮備要)》를 쓰기 때문에, 신의 어미가 일찍이 장례를 치른 뒤 영침을 설치하지 말라는 말을 하였으므로 지금은 설치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였다. 원경하가 이어서 아뢰기를,
"신은 바로 이미 벼슬에서 물러난 신하인데, 지금 처음으로 엄려(嚴廬)에 입시하여 삼가 보건대, 여차(廬次)가 낮고 좁아서 날이 개이면 아침저녁으로 햇볕이 내리쬐고 비가 내리면 습기(濕氣)가 침입하여 닿게 될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70을 바라보는 춘추로 이렇게 극심한 더위를 당하여 상복[衰麻]을 벗지 않으신 채 육시(六時)로 곡읍(哭泣)하시며, 한 차례도 빠뜨리지 않으시니, 성체(聖體)가 어떻게 손상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송(宋)나라 효종(孝宗)은 지극한 효성으로 제왕가(帝王家)에서 일컬어지는데, 61세 때에 고종(高宗)의 상사를 당하여 성복(成服)한 뒤에 백관(白官)이 다섯 차례나 표문(表文)을 올려 대내(大內)로 돌아가도록 청하였으니, 그 당시의 여러 신하들이 임금을 스스로 편안하게 하려고 인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열성조(列聖朝)에서도 현종[顯廟]께서 매우 더운 때를 당하여 여차에서 기거하셨으므로, 근신(近臣)이 서늘한 가을까지 한정하여 다른 곳으로 이어(移御)할 것을 청하였었습니다. 효종[孝廟]께서는 손가락을 자르시면서 시탕(侍湯)하신 하늘에서 타고난 효성이 많은 제왕(帝王) 가운데 뛰어나셨지만, 약원에서 의려(倚廬)가 낮고 습하다 하여 여차를 옮길 것을 청하며 위로 동조(東朝)께서 오직 병들까 근심하시는 마음에 부응해야 한다고 말하니, 효성께서 억지로 따르셨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도 동조께서 평소 자애(慈愛)하신 마음을 돌이켜 생각하신다면, 어떻게 스스로 보호하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평소에 자성(慈聖)을 우러러 의지했었는데, 이제 의지할 곳이 없어졌으므로 단지 자식의 도리를 다할 뿐이다. 만약 잠깐이나마 이곳을 떠나 조금이라도 최복(衰服)을 벗는다면, 마음이 문득 불안할 것이며, 마음이 불안하면 기운 또한 편치 않을 것이니,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6월 14일 갑술
사경(四更)에 왕세자가 휘령전(徽寧殿)의 칠우제(七虞祭)를 행하였다.
우의정 신만(申晩)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상례보편(喪禮補編)》을 속성(續成)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오례의(五禮儀)》와 《상례보편》은 각기 조건(條件)이 있어서 참고하여 열람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지금 만약 합쳐서 한 책(冊)으로 만들고, 따라서 그 아래에다 주석(註釋)을 달게 한다면 거의 참고하고 증거를 대는 데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매우 훌륭하다."
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상례보편》과 본편(本編)을 참고하여 보면 간섭하여 제지하는 단서가 많이 있다. 그런데 또 속편(續編)을 만든다면 《오례의(五禮儀)》·《속오례의(續五禮儀)》·《상례보편(喪禮補編)》·《속상례보편(續喪禮補編)》 네 책(冊)이 함께 시행할 경우 더욱 현란(眩亂)해질 것이니, 《상례보편》의 체제를 조금 고쳐서 일체 통틀어 기록하되, 당상관으로 신회(申晦)와 김치인(金致仁)을 추가로 임명하고, 교정관(校正官)으로 성천주(成天柱)와 홍낙성(洪樂性)을 추가로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만이 또 아뢰기를,
"해서(海西)의 흑두포(黑頭浦)에서 고기잡이하며 해물을 채취하던 당선(唐船)에 〈탄 사람들이〉 육지에 올라와 난동을 부리며 감관(監官)을 구타한 사실을 수사가 장달(狀達)하였습니다. 방어를 잘못하여 이런 일을 초래하였으니 추포 별장(追捕別將) 및 포감관(浦監官)은 본도로 하여금 곤장으로 엄중히 다스리게 하고, 지방관(地方官)은 잡아다 추문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호조 판서 이철보(李喆輔)가 말하기를,
"민결(民結)에서 바치는 제수가(祭需價)를 이미 견면(蠲免)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묘당에서 구획(區劃)하도록 하셨으니, 청컨대 균역청 당상으로 하여금 강확(講確)해서 아뢰게 하소서."
하였는데, 총융사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묘당에서는 저치미(儲置未)와 사군포(射軍布) 등속(等屬)을 가지고 그 숫자를 나누어서 채워야 하는데, 지금 선혜청(宣惠廳)에 저축된 쌀이 크게 모자라고, 영남과 호남의 군포(軍布)도 여러 갈래로 나누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관서(關西)의 세수미(稅收未) 2만 석(石)과 해서(海西)의 상정미(詳定未) 1만 석을 균역청(均役廳)에 나누어 주게 하고 해마다 조적(糶糴)113) 하여 외원(外援)하도록 하되 균역청에서 절가(折價)한 3냥(兩)을 호조에 이송(移送)하게 한다면, 양쪽이 편리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물어 보고 그것을 허락하였다.
6월 15일 을해
호서(湖西)의 덕산(德山)에 지진(地震)이 있었는데, 죽은 사람이 있었다.
6월 16일 병자
달이 토성(土星)을 범(犯)하였다.
임금이 여차(廬次)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당시 인산(因山)을 당하여 경사(京司)에 전최(殿最)114) 를 행할 수 없게 되자, 임금이 이방 승지와 병방 승지에게 명하여 제도(諸道)의 전최를 아뢰도록 하였다.
6월 17일 정축
임금이 경기 감사 정홍순(鄭弘淳)을 소견하여 외재궁(外梓宮)을 배진(陪進)하는 연도(沿道)의 일을 하문하고, 친히 정자각(丁字閣)의 성빈 제문(成殯祭文)을 지었다.
6월 18일 무인
임금이 옥백(玉帛) 증정(贈呈)을 친행(親行)하는 것이 적당한지의 여부를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하였다. 판중추부사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인산(因山) 때에 여(轝)를 따르는 예(禮)는 비록 《오례의(五禮儀)》에는 기재되어 있다 하나 여러 공사(公私)의 문헌(文獻)을 상고해 보면 열성조(列聖朝)에서는 일찍이 행하지 않았습니다. 진실로 인정과 예의는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왕조(王朝)의 전례(典禮)는 필부(匹夫)·서인(庶人)과는 아주 달라서 형세로 보아 행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옥백(玉帛)의 증정(贈呈)은 저절로 신료(臣僚)로 대신하지 않을 수 없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예를 찬술(撰述)한 신하가 반드시 헤아린 바가 있었을 것이며 고례(古禮)의 뜻에 어두운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지금 전하께서 이미 몸소 임어(臨御)하셨으니, 《오례의》에 대신 행한다는 글은 준행(遵行)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고, 유척기(兪拓基)는 말하기를,
"영의정이 애책문(哀冊文)과 증정할 옥백(玉帛)을 가지고 들어가 꿇어앉아 바친다는 글은 고례(古禮)에 주인(主人)이 증정한다는 것과 조금 다른데, 어찌 친히 올라가서 몸소 행하는 의절(儀節)에 대해 편리하지 않게 여기겠습니까? 만약 성상의 하교와 같다면 광상(壙上)의 위치에 나아가 근시(近侍)가 봉헌(奉獻)하여 영의정에게 전달하고, 그로 하여금 받들어 올리도록 한다면, 이미 고례에도 맞게 될 것이며, 또한 여러 가지 절차에 구애됨에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모든 대제(大祭)에서 성생(省牲)115) 에 대해 《오례의(五禮儀)》에는 아헌관(亞獻官)이 행한다고 하였으며, 상례(喪禮)에 반함(飯含)은 내시가 행한다고 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그것을 행하는 데 편해서 그렇게 한 것이며, 옥백(玉帛)의 증정을 영의정이 대신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성생례(省牲禮)는 이미 구준(丘濬)116) 의 학설로 인하여 고례(古禮)에 의거하였으며, 반함을 친히 행하는 것 역시 고의(古儀)를 따랐었는데, 산릉(山陵)에 따라 나가는 것은 바로 지금 처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막중(莫重)한 옥백을 어찌 편의(便宜)한 전례를 따르겠는가? 여러 사람의 의논을 물었더니 의논이 같았다. 이번에는 현궁(玄宮)에 내린 뒤 광(壙)의 오른쪽에서 근시(近侍)가 옥백을 받들어 나에게 올리면, 내가 그것을 영의정에게 전하여 광중(壙中)에 올리는 일을 예조[儀曹]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고, 《상례보편(喪禮補編)》에 기재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19일 기묘
왕세자가 강학(講學)을 시작하였다. 임금이 우제(虞祭)가 이미 지났다 하여 춘방(春坊)에 명하여 진강(進講)하게 한 것이었다.
6월 20일 경진
헌부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왕세자가 덕성각(德成閣)에 좌기하여 차대를 행하였다. 우의정 신만(申晩)이 아뢰기를,
"평안 감사 민백상(閔百祥)이 장달(狀達)하기를, ‘내수사(內需司)에서 본도에 점이(粘移)117) 하기를, 「영유현(永柔縣)에 해숭위(海崇尉)의 전토(田土)가 있는데, 영빈방(寧嬪房)에서 매득(買得)한 것으로, 세금을 거둘 적에 돈으로 값을 환산해서 상납하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지금 타량(打量)하는 지역은 바로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벌로 당초에 방죽을 쌓아 개간[起墾]한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간사한 소인의 무리들이 내수사의 세력을 의뢰하여 매득하였다고 칭탁하고, 사방으로 넓게 표시를 하고 있는데, 요체는 백성들의 전지를 억지로 빼앗으려는 계책을 삼은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청컨대 내수사에 신칙해서 《속전(續典)》에 의거하여 시행하지 말게 하고, 정당하지 못한 전례를 처음으로 만든 자는 형법(刑法)을 적용하여 감죄(勘罪)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여차(廬次)에 나아가 총호사 및 제도(諸道)의 차원(差員)을 인견하고, 농사의 형편과 민간의 폐단 및 산릉(山陵)의 보토(補土)할 역사에 대하여 하문하자,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아뢰기를,
"선릉(先陵)의 뒤 산맥(山脈)은 바로 사석(沙石)의 땅으로, 수목(樹木)이 적으니, 널리 심고 금양(禁養)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명릉(明陵)의 능관(陵官) 두 자리는 장릉(長陵)의 예에 의거하여 모두 참봉(參奉)으로 만들되 봉사(奉事)와 직장(直長)은 그대로 그곳에서 으레 승진시키게 하고, 나무를 심어 울창하게 되기를 기다린 후에 승륙(陞六)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시임관(時任官)은 다른 관직으로 옮기게 하라."
하였다. 김상로가 또 말하기를,
"산릉(山陵)의 재력(財力)을 경술년118) 에 견주어 너무 지나치게 재감(裁減)하였으므로, 도감의 지용(支用)을 진실로 조처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진휼청(賑恤廳)이 돈 2천 냥(兩)과 관서(關西) 별향고(別餉庫)의 돈 2천 냥을 획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여기에 신하들이 이미 물러나자, 또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을 불러 국휼 등록(國恤謄錄)을 가져다 열람하면서 인산(因山) 때의 명기(明器)를 줄여서 정하는 일에 대해 윤음(綸音)을 적도록 명하기를,
"명기(明器)와 복완(服玩)이 비록 목노비(木奴婢)나 공가인(工歌人)의 형상과는 다름이 있지만, 더러 사치스러운 데 가깝고, 더러 장난에 가깝고, 더러 긴요하지 않은 것이 있는, 더러 쓸데없는 것이 있다. 그 사치스러운 데 가깝다는 것은 나전(螺鈿)으로 된 소함(梳函) 같은 것이고, 그 장난스러운 데 가깝다는 것은 자질구레한 기용(器用)의 물건이고, 그 긴요하지 않다는 것은 토등상(土藤箱)·타우(唾盂)·수기(溲器) 같은 것이고, 그 쓸데없다는 것은 주준(酒樽)·주잔(酒盞) 같은 것이다. 더구나 공가인을 이미 없앴는데, 악기(樂器)를 그대로 두는 것은 또한 핵심을 보존하지 않는 것과 같다. 지금 《상례보편(喪禮補編)》을 개정하는 때를 당하여 비록 한결같이 모두 제거한다 하더라도 혹 불가할 것이 없겠지만 공자(孔子)가 예(禮)를 사랑한 뜻119) 을 따라서 그 번문(繁文)은 제거하고, 그 예기(禮器)·관(冠)·의(依) 등속은 홀[圭]·면류관[冕] 상의(上衣)·하상(下裳)·대대(大帶)·중단(中單)·방심패(方心)·패옥(佩玉)·수(綏)·폐슬(蔽膝)·홍말(紅襪)·적석(赤舃)을 보존하고, 자기(磁器)는 반발(飯鉢) 하나, 시첩(匙楪) 하나, 잔[爵] 하나, 보(簠) 하나, 궤(簋) 하나, 향로(香爐) 하나를 보존하고, 와기(瓦器)는 부(釜) 하나 정(鼎) 하나를 보존하고, 죽기(竹器)는 서직(黍稷)·도량(稻梁)·마자(麻子)·숙(菽)·소두(小豆)·맥(麥)을 담는 초(筲) 여덟, 멱(冪) 여덟을 보존하되, 변(籩)은 절반을 줄여 여섯 개만 보존하고, 목기(木器)는 두(豆)는 절반을 줄여 여섯 개만 보존하고, 악기(樂器)의 팔음(八音)은 바로 명(明)나라에서 하사(下賜)한 것이니, 단지 동종(銅鐘) 하나, 자경(磁磬) 하나만 보존하고 틀[機]은 없애며, 훈(壎) 하나, 당금(唐琴) 하나, 생(笙) 하나, 소(簫) 하나, 고(鼓) 하나만 보존하고, 틀과 축(祝)은 없애고 그 나머지도 없앤다. 홀[圭]과 패옥(佩玉)을 만약 평상이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여 사용하게 한다면 더 만들지 말도록 한다. 내상(內喪)의 경우는 《오례의》에 실린 의복(衣服)의 제도가 이미 예관(禮冠)과 적의(翟衣)가 아니므로 그 제도가 이상한데, 이미 유의(遺衣)를 썼으니, 지금 줄이는 것이 적당하다. 소함(梳函)에 이르러서는 바로 없어서는 안되는 것들이니, 나전(螺鈿)과 구갑(具匣)은 없애고 거울 하나만 쓰되, 이 두가지 물건이 만약 평상시에 쓰시던 것이라면 더 만들지 말도록 하라. 이번에 보존한 것이나 줄인 것은 내상(內喪)이나 외상(外喪)을 논하지 말고 거행하는 일을 《상례보편》에 기재하도록 하라."
하였다.
권영(權潁)을 봉교로, 이세연(李世演)을 대교로, 김화택(金和澤)·이진항(李鎭恒)·이동태(李東泰)를 검열로 삼았다.
6월 21일 신사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東方)으로 들어갔는데, 꼬리의 길이는 3, 4척이었고,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예방 승지를 인견하고, 울먹이며 말하기를,
"작년 9월 및 11월과 금년 2월에 직숙한 세 제조에게 자전(慈殿)께서 시상하고자 하여 궁수(宮繡)120) 등속을 봉(封)해 두었는데, 미처 반사(頒賜)하지 못하였으므로 이제야 비로소 약원에 내리니, 그것을 공경히 받도록 하라."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감격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6월 22일 임오
임금이 편차인(編次人)을 인견하고 술회(述懷)하는 글을 지었다.
하교(下敎)하기를,
"낭중(郞中)이 비록 봉성(鳳城)에 도착하였지만, 자문(咨文)을 가져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았으니, 주선할 수 없었던 것은 그 형세가 진실로 그러하다. 그러나 성장(城將)이 힐문(詰問)하여 논란(論難)하기를, ‘이미 경자년121) 의 전례가 있는데 어찌하여 이와 같이 지체하는가?’고 하였으니, 예부(禮部)에서 의논하여 아뢰고 내각(內閣)에서 뜻을 내리는데 대해 어찌하여 미리 헤아려 자문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나아갔는가? 이는 이치가 분명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자문을 가지고 간 관원이 만약 국상[國恤]이 잇달았기 때문에 상하(上下)가 애통하여 허둥대느라 미처 주선하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면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가 비록 보잘것없는 관원이라 하더라도 이 일을 주선하여 머리를 숙이고 듣지 못하고, 한마디도 여기에 대해 언급함이 없었으니, 국가의 체모에 있어서 엄중히 조처하지 않을 수 없다. 의주 역학(義州譯學)을 참핵사(參覈使)로 하여금 종중 결곤(從重決棍)하게 하라."
하였다.
6월 23일 계미
유성(流星)이 천시원(天市垣)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길이가 3, 4척이었다.
남언욱(南彦彧)을 장령으로, 권세숙(權世櫹)을 지평으로, 박상면(朴相冕)을 정언으로, 이심원(李心源)을 부교리로, 남정오(南正五)를 경상 좌병사로 삼았다.
임금이 좌의정과 우의정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피국(彼國)에서 회사(會査)하러 처음 왔습니다. 의주 부윤[灣尹]의 등보(謄報)를 보면, 성장(城將)의 언사(言辭)가 대체로 불순(不順)한 기색이 있었는데, 역관(譯官)이 비록 잘 대답하지 못하였지만 참핵사(參覈使)가 당도한 뒤에는 염려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동래부(東萊府)에서는 예단(禮單)을 되돌려 보내어 왜인(倭人)으로 하여금 마침내 와서 빌게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이렇게 잇달아 상사(喪事)를 당하였는데, 그들이 어떻게 더디게 온다고 책망할 수 있겠는가? 재자관(䝴咨官)이 한 짓은 내가 매우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신릉(新陵)이 바로 오른쪽 산등성이에 있으나, 옛날 유교(遺敎)에 이미 목릉(穆陵)의 예에 의거하도록 명하셨으니, 지금 오른쪽 왼쪽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 3년상이 끝난 뒤에는 세 어탑(御榻)의 차서(次序)를 한결같이 목릉의 예에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자, 김상로가 말하기를,
"당상관 홍계희(洪啓禧)가 목릉(穆陵)에 나아가 제도를 봉심(奉審)해 보니, 의인 왕후(懿仁王后)의 능은 대왕(大王) 능의 왼쪽 산등성이에 있는데 능혈(陵穴) 아래에서부터 돌로 신로(神路)를 만들어 정자각(丁字閣)의 신교(神橋)에 이어지도록 하였으며, 인목 대비(仁穆大妃)의 능은 〈대왕 능에서〉 동남쪽 산등성이에 있는데, 역시 능혈 아래서부터 신로를 만들어 왼쪽 산등성이에 이어지도록 하였으며, 신로와 정자각 신교의 거리는 가깝기가 4, 5보(步)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목릉의 제도로 말한다면 이번 신릉(新陵)의 능혈 아래에도 역시 구정자각(舊丁字閣)으로 이어지는 신로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정자각(假丁字閣)을 이미 신릉을 위해서 설치하였으니, 3년상을 마친 뒤 가정자각을 철거하는 때를 기다렸다가 비로소 목릉 신로의 제도를 적용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다만 신로는 역사가 중대하니 지금의 형편으로는 신릉의 능혈 아래에 신로를 설치하여 우선 가정자각의 신교에 이어지도록 하고, 3년상을 마친 뒤에 신로를 옮겨서 구정자각의 신교에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3년 안이라 하더라도 구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신로가 없을 수 있겠는가? 신릉(新陵)의 능혈 아래에서부터 구정자각의 신교(神橋)에 이르기까지 우선 신로를 설치하는 것이 옳겠다."
하자, 김상로가 말하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가정자각(假丁字閣)에도 역시 신로(神路)가 없을 수 없으니, 일체로 다듬어 설치하도록 하고, 3년상을 마치기를 기다린 뒤에 철거하고, 단지 구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신로만 보존하게 하는 일을 아마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6월 24일 갑신
해서(海西)의 배천(白川) 등 고을에 해일(海溢)이 있었다.
6월 25일 을유
임금이 하교하기를,
"윤여(輪轝)로 흙을 채우는 역사에 그전에는 시민(市民)과 자문감(紫門監)의 인원을 쓰다가, 임신년122) 이후 처음으로 위군(衛軍)을 썼었는데, 두 달 동안 겹친 역사로 불쌍히 여길 만하니, 경고군(京雇軍)은 대내(大內)에서 식량을 지급하고 향군(鄕軍)은 선혜청(宣惠廳)으로 하여금 양미(糧米)를 후하게 지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6월 26일 병술
유성(流星)이 북락성(北落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꼬리의 길이는 4척 쯤이고,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6월 27일 정해
관구(菅屨)와 소구(疏屨)의 제도를 가지고 대신에게 문의(問議)하도록 명하였다. 판중추부사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참최(斬衰)에는 관구(菅屨)를 착용하고 자최(齊衰)에는 소구(疏屨)를 착용하는 제도가 모두 예경(禮經)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다만 관(菅)과 괴(蒯)가 어떤 풀인가를 모름지기 먼저 안 후에야 바야흐로 그 제도와 모양을 의논할 수 있습니다. 또 《오례의(五禮儀)》의 주해를 보건대, 관구와 소구는 아울러 백면 포혜(白綿布鞋)로 대신 쓴다고 하였는데, 어찌 최질(衰絰)에 비록 옛날 제도를 적용하려고 하였지만, 관구를 상세히 알 수 없었던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상세하게 알 수 없는 제도를 모방하여 다른 신[屨]을 개조(改造)하는 것보다는 고금(古今)에서 시행하는 바를 준용(遵用)하는 것이 낫습니다. 또 주자(朱子)의 학설에 의하면 졸오(卒伍)들이 착용하는 제도도 의리에는 해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이종성(李宗城)은 말하기를,
"삼가 주자서(朱子書)를 살펴보건대, 이르기를, ‘관구(管屨)와 소구(疏屨)에 대하여 비록 상고할 수 없다고 하지만, 대략 경중(輕重)을 가지고 미루어 보건대, 참최(斬衰)에는 지금의 초혜(草鞋)를 착용하고 자최(齊衰)에는 마구(麻屨)를 착용하는 것이 가하다’고 하였는데, 마혜(麻鞋)는 지금 졸오(卒伍)들이 착용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관(菅)과 괴(蒯) 또한 어떠한 풀인지 모르므로, 형편상 칡[葛]이 없으면 경(顈)을 활용한다는 뜻으로 짚[藁]으로 대신하게 하였는데, 관과 괴를 대신하는 짚을 가지고 상고할 수 없는 모양을 만들어 단연코 시행하려는 것은 이미 신중(愼重)한 뜻이 아닙니다. 지금 상하(上下)가 공통으로 착용하는 것은 바로 주자(朱子)가 이른바 졸오가 착용하는 것 또한 기인하는 근거가 있는 것이고, 또 열성조(列聖朝)에서 이미 시행했던 것은 바로 예(禮)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자의 뜻도 그러하다면 풍속을 따르는 것이 옳다."
하였다.
임금이 춘방(春坊)의 관원을 소견하여 요즈음에 무슨 책을 강독하는가를 하문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어제 내가 우연히 휘령전(徽寧殿)에 갔더니, 원량(元良)이 보는 서책(書冊)이 책상 위에 쌓여 있었는데,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이 많았다."
하자, 보덕 윤동승(尹東昇)이 말하기를,
"박학(博學)하여 국한됨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강학(講學)할 때에 무슨 옷을 입고 하는가?"
하자, 윤동승이 말하기를,
"최복(衰服)을 입습니다. 그런데 덕성합(德成閤)이 매우 좁아 한낮을 당하면 매우 뜨거운데도 어려운 것을 질문하면서 고달파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량(元良)이 매우 총명하여 읽기만 하면 문득 욀 수 있을 것이다."
하자, 윤동승이 말하기를,
"강학(講學)을 부지런히 잘할 뿐 아니라, 다섯 차례 우제(虞祭)를 행하면서 슬픔과 공경하는 마음이 모두 극진하였으며, 제사를 지내며 주선함에 조금의 실수도 없었고, 대수롭지 않은 작은 절차도 강구(講究)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예(禮)가 적합한데 돌아가게 하려고 힘썼으므로, 신들이 서로 마주 보며 감탄(感歎)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하였다. 이어서 김재로(金在魯)가 편집(編輯)한 《예기보주(禮記補註)》를 꺼내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영중추부사가 《예기(禮記)》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하였다."
하자, 윤동승이 말하기를,
"범례(凡例)는 의심스러운 부류를 기록한 것 같고, 그 가운데 서지수(徐志修)의 학설(學說)이 많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믿고 따르기 때문에 쓴 것이며 서지수(徐志修)도 틀림없이 《예기(禮記)》에 대해 익혔을 것이다."
하였다. 또 《예기》를 편집(編輯)한 자가 누구인가를 하문하자, 윤동승이 말하기를,
"한(漢)나라의 유학자(儒學者) 대성(戴聖)이 편집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예기(禮記)》가 주자(朱子)의 손을 거치지 않았음을 한스럽게 여길 뿐이다."
하자, 윤동승이 말하기를,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는 바로 주자가 범위를 분류하여 모은 것이며 면재(勉齋)123) 의 《속통해(續通解)》도 역시 주자가 규획(規畵)한 바를 지시해 준 것이니, 전혀 〈주자의〉 손을 거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6월 28일 무자
임금이 여차(廬次)에 나아가 대신과 예조 판서를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청학(淸學)과 한학(漢學) 가운데 청학 김진하(金振夏)·한학 변헌(邊憲)이 청어(淸語)와 한어(漢語)를 잘 해독(解讀)하므로, 지난번 칙사(勅使)를 접대할 적에 그들을 기용하였었다. 그런데 지금 참핵사(參覈使)의 장문(狀聞)을 보건대, 역관 김진하가 봉성(鳳城)에 가서 수작(酬酢)한 근거가 있을 뿐만 아니고, 바야흐로 국가에 일이 있는 시기를 당하여 말단(末端)에서 수작하여 나의 뜻을 잘 깨우쳤다. 그가 비록 미천(微賤)하지만, 이는 바로 임금의 명을 욕(辱)되게 하지 않은 것이니, 권면하고 장려함이 없을 수 없다.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하라. 그리고 어전 통사(御前通事)로 적합한 인재가 부족한 때를 당하여 예비로 승진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한학 변헌도 일체로 가자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나라에서 지금 바야흐로 술마시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니, 객사(客使)를 대접하는 예(禮)에 있어서 단술[醴酒]을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경중(京中)에서 이미 단술을 사용하게 하였으면, 서로(西路)의 여러 고을 또한 당연히 그와 같이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6월 29일 기축
참핵사(參覈使)에게 하교하여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구별하되, 경오년124) 의 전례처럼 하지 말도록 하였다. 이보다 앞서 경오년에는 범월인(犯越人)에 대하여 수범과 종범을 분간하지 아니하고 아울러 일률(一律)을 적용했었기 때문이다.
6월 30일 경인
황최언(黃最彦)을 장령으로, 이광익(李光瀷)을 헌납으로, 조명정(趙明鼎)을 이조 참의로, 정존겸(鄭存謙)을 부응교로, 조숙(趙)을 교리로, 해흥군(海興君) 이강(李橿)을 동지 사은 정사(冬至謝恩正使)로, 김상익(金尙翼)을 부사로, 이언형(李彦衡)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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