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0권, 영조 33년 1757년 7월

싸라리리 2025. 10. 6.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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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신묘

일식이 있었다.

 

임금이 휘령전(徽寧殿)125)  에 나아갔다. 승지 구윤명(具允明)이 말하기를,
"소조(小朝)께서 은전(殷奠)126)  을 몸소 거행하겠다는 일로 춘방(春坊)127)  에 명령을 내렸으니, 신은 실로 흠앙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궁(東宮)의 정례(情禮)로는 당연한 일이다. 춘방은 곧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반포(頒布)하게 하라."
하였는데, 이는 고례(古例)가 아니었다.

 

임금이 체원각(體元閣)에 나아가 편차인(編次人) 구윤명(具允明)을 불러서 친제(親製)한 《연대귀감서(年代龜鑑書)》를 승지 서명응(徐命膺)에게 명하여 《홍무정운(洪武正韻)》의 서체로 쓰게 하고, 운각(芸閣)128)  으로 하여금 간행하게 하였다.

 

예방 승지(禮房承旨)에게 명하여 전교(傳敎)를 쓰게 하였는데, 이르기를,
"효소전(孝昭殿)129)  을 부묘(祔廟)130)  한 뒤에 휘령전을 문정전(文政殿)에 봉안(奉安)하는 것이 마땅하다. 신좌(神座)·교의(交椅)·신탑(神榻)·제상(祭床) 등의 물건은 소화(燒火)하지 말고, 그대로 문정전에서 쓸 것이며, 어탑(御榻)만을 태우게 하라. 효소전의 능전(陵殿) 은기(銀器)는 곧 효령전(孝寧殿)131)  의 구물(舊物)이니, 3년이 끝난 뒤에는 마땅히 상방(尙方)132)  에 내려야 할 것이다."
하였다.

 

전라도 해남(海南) 등 네 고을에 해일(海溢)이 있었고, 순천(順天)에는 벼락을 맞아 죽은 자가 있었다.

 

7월 2일 임진

임금이 통명전(通明殿) 여차(廬次)에 나아가 충청도 안집 어사(安集御史) 홍경해(洪景海)와 회장관(會葬官)인 이천 부사(伊川府使) 채제공(蔡濟恭)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채제공에게 묻기를,
"민폐(民弊)를 아뢸 만한 것이 있는가?"
하니, 채제공이 말하기를,
"이천의 동북쪽 다섯 면이 양향청(粮餉廳)의 둔전(屯田)에 편입되었습니다. 당초 갑술년133)  에 상정(詳定)할 때에는 그 세총(稅總)을 정하여 거의 금석(金石)처럼 견고하였었는데, 근래에 이른바 둔장(屯將)들이 재물을 수탈하기를 그치지 않아서 세금이 해마다 증가하니, 백성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흩어져 떠난 자가 반이 넘습니다. 그래서 밭들도 따라 묵었으니, 이것이 진실로 본읍(本邑)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하니, 임금이 호조 판서를 중추(重推)하라고 명하고, 한결같이 갑술년의 상정한 것에 따라 시행하게 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어사(御史)의 서계(書啓)를 읽게 하고, 임금이 묻기를,
"어떻게 안집(安集)하였느냐?"
하니, 홍경해가 대답하기를,
"두 고을의 궁민(窮民)이 비록 많이 고향으로 돌아왔지마는 소가 없어 경작(耕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열읍(列邑)에서 돈을 빌려 영외(嶺外)에 가서 소를 사 가지고 단양(丹陽)에 23두(頭), 회인(懷仁)에 13두를 소가 없는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수령(守令)들의 능부(能否)를 물으니, 홍경해가 대답하기를,
"회덕 현감(懷德縣監) 김윤승(金允升)과 청안 현감(淸安縣監) 구덕훈(具德勳)은 잔민(殘民)을 소생시키고 폐단을 제거할 만한 재질이 못될 듯합니다."
하니, 모두 개차(改差)하고, 그 대임자(代任者)를 가려 보내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전교를 쓰라고 명하였는데, 이르기를,
"어사(御史)는 정성을 다하여 백성을 안집시켜 위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비록 가상하기는 하나, 두 고을에 돌아오지 않은 자가 아직도 1백 명이 넘는다고 하니, 아! 저 단양·회인의 백성은 나의 적자(赤子)들인데, 비록 한 사람이 못 돌아왔다고 하더라도 어찌 밥을 달게 먹겠는가? 어사는 감히 일을 다 끝내고 돌아왔다고 하겠는가? 홍경해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곧 다시 내려가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 밤에 큰비가 내렸다. 임금이 기전(畿甸)의 금년 결전(結錢)을 감하여 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바야흐로 가뭄을 근심하였는데, 이날 밤에 침실(寢室)에서 빗소리를 듣고 뜰아래로 내려가 서서 ‘이 비는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혼과 자성(慈聖)께서 돌보신 혜택이 아닌 것이 없는데, 금년에 기전은 두 번씩이나 산릉(山陵)의 부역에 시달렸으니, 특별히 결전을 감하여 자성의 은덕을 찬양한다.’는 뜻으로 효소전에 가서 몸소 고하고, 이어서 빈전(殯殿) 문밖에 나아가 윤음(綸音)을 불러 주어 쓰게 하였다. 또 제주(濟州)와 호남(湖南)의 조군(漕軍)으로 부역(赴役)한 자는 모두 복호(復戶)134)  하라고 명하였다.

 

7월 4일 갑오

임금이 여차(廬次)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손(元孫)이 군주(郡主)135)  를 거느리고 초석(草席)을 깔아 놓고 빈전(殯殿)에 망곡(望哭)하기를 참사(參祀)하듯 하였으니, 참으로 기특하다. 이 마음을 확충시킨다면 우리 나라가 거의 잘될 것이다."
하니, 총호사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원손께서는 전하께서 70 고령에 최마(衰麻)를 입으신 모습을 보고 감동된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7월 5일 을미

이보다 앞서 임금이 자성(慈聖)의 유의(遺意)를 우러러 체념하는 뜻으로 비국(備局)에 명령하여 기전(畿甸) 이외의 7도(七道)에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정치를 강구하라고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연석(筵席)에서 여쭈니, 7도와 3도(三都)의 가장 오래 된 포흠(逋欠)을 감하여 주라고 명하였다. 장령 윤재겸(允在謙)이 상서하여 말하기를,
"수령(守令)들이 대개 봉납(捧納)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이미 봉납하였다고 하였는데, 탕척(蕩滌)하라는 명령이 내려가게 되면 민간이 실제로 봉납하지 못한 것은 이미 봉납한 것으로 되어 탕감되지 못하고 그 탕감하는 것은 간리(奸吏)들의 여러 해 동안 쌓인 포흠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수령들의 주머니 물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지금 비록 탕감하라는 신령(新令)이 있지마는 실제의 혜택이 막혀서 시행되지 않음은 또 반드시 여전할 것입니다. 청컨대 어사를 보내어 제도(諸道)를 염찰(廉察)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록 채택하여 실시하지는 않았으나 식자(識者)들은 적론(的論)이라고 하였다.

 

임금이 여차에 나아갔는데,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발인(發靷)하는 날이 멀지 않았으니 약물(藥物)을 중지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마는, 이미 상여를 따라가기로 정하였으니 소중함이 있다. 마땅히 삼령(蔘苓)136)  이 든 약제를 복용할 것이다. 지금의 이 비는 빠르지도 늦지도 않으니, 가히 때를 아는 비라고 하겠다."
하매, 도제조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이는 전하께서 마음속으로 기원하시던 비이니, 실로 지극하신 정성에 말미암아서 그러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일에 심회(心懷)가 갈수록 진정하기 어려워지는데, 기(氣)가 쇠약한 소치만이 아니다. 인자(人子)의 도리가 어찌 그러하지 않겠는가?"
하고, 이어서 눈물이 말을 따라 흘러내렸다.

 

병조 판서 이후(李)가, 모레 마땅히 삼도 삼도 습의(三度習儀)137)  를 행하여야 함으로써 분 병조 참지(分兵曹參知)를 차출(差出)하여 진참(進參)하게 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7월 6일 병신

임금이 여차에 나아가 승지에게 이르기를,
"다섯 달을 여차에 있으면서 제전(祭奠)을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으니, 조금이나마 정례(情禮)를 폈다. 경자년138)   국휼(國恤) 때는 자성(慈聖)께서 늘 나에게 음식을 권하셨는데, 지금은 어디서 바라겠는가?"
하고, 이어서 여러 도(道)에서 바치는 물선(物膳)은 정지시키고 오직 효소전(孝昭殿) 상식(上食)에 소용되는 것만은 전례대로 바치라고 명하였다.

 

7월 7일 정유

어영 대장 정찬술(鄭纘述)이 병으로 면직되니, 판돈녕 홍봉한(洪鳳漢)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대여(大轝)의 삼도 습의를 거행하였다. 임금이 최복(衰服)을 갖추어 입고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139)  에 서서 영곡(迎哭)하기를 매우 애통하게 한 뒤, 신련(神輦)을 따라 건복문(建福門)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말하기를,
"날씨가 이와 같이 더운데, 군병(軍兵)이나 여사군(轝士軍)에게 미음(米飮)을 먹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신여군(神轝軍)과 대가 호군(大駕扈軍)들과 함께 모두 그늘져 서늘한 곳에 머물면서 기다리게 하였다.

 

7월 8일 무술

구선복(具善復)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7월 9일 기해

밤에 유성(流星)이 하늘가의 옅은 구름 사이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尺)쯤 되었으며, 빛깔은 흰색이었고 광채가 땅을 비추었다.

 

광주(廣州)에 해일(海溢)이 있었다.

 

정간(鄭榦)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통명전(通明殿) 영외(楹外)에 나아가서 인원 왕후(仁元王后)의 우제 축문(虞祭祝文)과 빈전(殯殿)의 다례 축문(茶禮祝文)을 쓰라고 명하였다.

 

송도(松都) 시민(市民) 50명이 부역(赴役)하기를 자원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불러서 물으니, 대답하기를,
"대여(大轝)를 메기 위하여 왔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신년140)   동가(動駕) 당시에 입은 너희의 노고를 잊지 못하였다. 지금 너희가 스스로 부역하러 왔으니, 그 정성이 갸륵하다."
하고, 이어서 제전에 쓰다 남은 밀과(蜜果)를 내렸으며 제주(濟州) 백성에게 베풀던 예에 따라 양식을 주고 금년을 한정으로 부역을 면제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또 통명전 영외에 나아가니, 승지 정간(鄭榦)이 아뢰기를,
"지금 백관(百官)의 복(服)은 바로 기년(朞年)의 복제(服制)로서 3년의 복제와는 다른 까닭에 금옥 관자(金玉貫子)를 제거하지 않았습니다마는, 신이 조신(朝臣)들의 말 안장을 보매, 아직도 청도(靑鞀)를 걸치고 있으니, 예(禮)에 불가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듣자니, 당상관이 아직까지 청도를 사용한다고 하는데, 이미 금옥 관자를 제거하지 않았다면 초모(貂帽)로써 등위(等威)를 분변하는 것 같은 것은 오히려 옳거니와 안비(鞍轡)에 이르러서는 어찌 화식(華飾)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지금으로부터 3년의 복제에는 포(布)로 안비를 싸게 하고, 기년의 복제에는 화식을 버릴 일을 《보편(補編)》에 싣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0일 경자

조전(祖奠)141)  을 거행하였다. 총호사(摠護使) 이하에게 집서문(集瑞門)으로 오라고 명하였다.

 

7월 11일 신축

대행 대왕 대비(大行大王大妃)의 발인(發靷)을 하였다. 임금이 최복(衰服)을 갖추어 입고 곡(哭)하면서 걸어 따라갔다. 홍화문(弘化門)에 나가서 비로소 보련(步輦)을 타고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러 견전(遣奠)142)  을 거행하였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인산(因山) 때에 임금이 여(轝)를 따라간 일은 열조(列朝)에 없었던 일인데, 우리 성상께서 불훼지년(不毁之年)143)  으로서 단연(斷然)히 행하셨으니, 진실로 천고(千古) 제왕의 성절(盛節)이십니다. 성상의 성효(誠孝)는 하늘에서 타고난 것이어서 시탕(侍湯)을 할 때부터 밖에서 밤을 새워 빌었고, 대고(大故)를 당하여서는 관을 붙잡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으므로 좌우에 있는 사람을 슬프게 감동시켰습니다. 염빈(斂殯)과 제전(祭奠) 이외에 자잘한 형식이나 세세한 일까지도 모두 몸소 주관하였으며, 의심나는 예절과 변경된 절차를 강구(講求)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마침 삼복(三伏) 더위를 당하여 햇볕이 불타듯 뜨거워도 늘 점려(苫廬)에 나아가서 잠시도 최복을 벗지 않았으며, 5개월 동안 모셔 놓은 빈전(殯殿)에서 하루 일곱 번 곡읍(哭泣)하는 일을 일찍이 한번도 폐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신료(臣僚)들을 인접(引接)할 때에도 슬픔이 북받치면 문득 곡(哭)을 하여 몸이 여위어지니, 장년(壯年)인 평범한 사람으로서도 미치지 못할 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흠의(廞儀)144)  를 거행할 때에 미쳐서는 슬픔으로 허둥지둥하는 중에도 몸소 감독하고 독려하여 반드시 정성스럽게 하고 반드시 미덥게 하였으며, 상여를 따라갈 즈음에는 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니, 시위(侍衛)하는 여러 신하들이 비통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고 도성 안의 사녀(士女)들이 길을 옹위(擁衛)하여 모두 곡을 하였으며, 반우(返虞)145)  할 때에도 그러하였습니다. 이때 심산 궁곡(深山窮谷)에 살던 사람들도 분주히 와서 보고 감동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모두 이르기를, ‘지극하기도 하구나! 우리 임금님의 효성이여’라고 하였습니다.

 

왕세자가 모화관에서 곡하고 영여(靈轝)를 작별하였다. 처음에 대여(大轝)가 노제소(路祭所)에 먼저 이르자 동궁이 궁관(宮官)을 보내어 문안하니 내시(內侍)가 무사하다고 전언(傳言)하였고, 주정소(晝停所)와 능소(陵所)에 이르러서도 역시 똑같이 하였다.

 

도유군(都游軍) 5백 명을 돌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전례에는 하현궁(下玄宮)146)   때에 이 군병으로 대여를 받들어 운반하여 능상(陵上)까지 이르게 하였는데, 임금이 백성들의 노고를 민망히 여겨 저치미(儲置米)로써 역군(役軍)을 모집하여 쓰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임금이 노차(路次)에서 여군(轝軍) 중에 까무러친 자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특별히 어약(御藥)을 하사하였으며, 또 날씨가 덥기 때문에 미리 더위를 다스리는 약물을 구비하여 가도록 지시하고 여러가지 방면으로 치료를 하였으므로, 상두꾼[轝人]들이 한 사람도 사상(死傷)한 자가 없었다.

 

임금이 능소(陵所)에 나아갔다. 최복을 입고 홍살문[紅箭門] 안에 나아가 먼저 알릉례(謁陵禮)를 행한 다음 가정자각(假丁字閣)에 나아가 곡배(哭拜)하는 예를 행하고, 이어서 찬궁(欑宮)147)  을 봉심(奉審)한 뒤에 능(陵)에 올라 봉심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새벽이나 밤에도 비통해 하였으며, 더위를 무릅쓰고 상여를 따라왔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성체(聖體)를 염려하였는데, 임금이 곧바로 능상(陵上)에 나아가서 조금도 피로해 하지 않았으니, 대개 성심(聖心)이 성경(誠敬)에 일관하여 억지로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었으므로, 신민(臣民)이 모두 감탄하고 이상히 여겼다. 임금이 별간역(別看役)148) 허규(許圭)·변흥서(卞興瑞) 등을 불러 하교하기를,
"비록 대련(大輦)의 몸체가 매우 무겁다는 소리는 들었지마는 오히려 이와 같은 줄은 헤아리지 못했었는데, 지금에야 그것을 보니 담부(擔夫)가 어떻게 견디어 낼 수 있겠는가? 이것은 사방석(四方石)의 배는 될 것이다. 나는 장차 그 제도를 고치어 민폐(民弊)를 덜 것이니, 이는 역시 우리 자성(慈聖)의 덕의(德意)가 만세에 전파하는 것이다. 대여(大轝)의 장강(長杠)에 연축(聯軸)한 것은 너희들이 곧 그 자리에서 줄여 경중(京中)에 보내어 두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보편(補編)》에 싣도록 하였다.

 

7월 12일 임인

인원 왕후를 명릉(明陵)에 장사지내었다.

 

인산 의주(因山儀註)는 이러하였다. 4월 초4일에 인원 왕후의 산릉(山陵)을 명릉의 우강(右岡)으로 정하고, 을좌 신향(乙坐辛向)으로 재혈(裁穴)하였다. 역사(役事)를 4월 16일 사시(巳時)에 시작하여 풀을 베고 흙을 파내는 일은 동월(同月) 19일 사시에 하였으며, 금정(金井)149)  은 6월 13일 묘시(卯時)에 열었는데, 혈(穴)의 깊이는 7척(尺) 4촌(寸)이었다. 【영조척(營造尺)을 사용하였다.】  7월 초10일 묘시에 찬궁(欑宮)을 열고, 발인(發靷)은 동월 11일 축시(丑時)에 하며, 산릉에서 찬궁을 여는 것은 동월 12일 축시에 하고, 하현궁(下玄宮)은 동일 묘시에 하였다. 하루 전에 임금이 몸소 견전(遣奠)을 거행하고 드디어 발인할 때 섭통례(攝通禮)가 영좌(靈座) 앞에 나아가 좌(座)에서 내려 여(轝)에 올릴 것을 계청(啓請)하니, 내시(內侍)가 혼백함(魂帛函)을 받들어 요여(腰轝)에 안치하고, 우주궤(虞主櫃)를 그 뒤에 두었다. 빈전(殯殿)의 문 밖에 이르러 섭통례가 여에서 내려 연(輦)에 올릴 것을 계청하고, 섭통례는 또 재궁(梓宮) 앞에 나아가 순(輴)에 나갈 것을 계청하니,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여재궁관(舁梓宮官)150)  과 내시(內侍)를 거느리고 재궁을 받들어 순에 올려서 외문(外門) 밖에 이르러 대여(大轝)에 올리니, 의위(儀衛)의 도종(導從)은 의식대로 하였다. 탁(鐸)을 잡은 자가 탁을 흔드니, 궁인(宮人)이 말을 타고 곡하며 따르고 승지 두 사람도 따라갔다. 영가(靈駕)가 출발하려고 하자 임금이 소여(素輿)를 타고 왕세자가 뒤를 따랐다. 영가가 종묘(宗廟) 앞길에 이르자, 여사(轝士)가 대여를 돌려 북향(北向)하고 욕석(褥席)에 안치하였으며, 조금 뒤에 출발하였다. 혼백련(魂帛輦)에 이르러서도 역시 똑같이 하였다. 대가(大駕)가 종묘 앞길에 이르자 임금이 여에서 내려 걸어 지나가서는 다시 여를 탔다. 영가가 숭례문(崇禮門) 안에 이르러서는 강(杠)을 바꾸어 문밖으로 나갔고 다시 강을 바꾸어 노제소(路祭所)에 이르렀다. 임금이 여에서 내려 악차(幄次)에 들어가고 왕세자는 막차(幕次)에 들어갔으며, 내시는 혼백함을 받들어 장전(帳殿) 가운데에 들어가 안치하였다. 영가가 잠시 머무르니, 도성(都城)에 머물러 있던 백관(百官)이 향불을 피워 노제(路祭)를 의식대로 올렸다. 왕세자가 봉사위(奉辭位)에 나아가 곡하고 애통함을 다하였다. 영가가 출발하니 임금이 악차에서 나와 연에 올라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렀다. 영가가 잠시 머무르고, 내시가 혼백함을 받들고 장전 가운데 들어가 안치하였다. 임금이 여에서 내려 악차에 들어가니, 유사(攸司)가 예찬(禮饌)을 조석전(朝夕奠)과 같이 올렸다. 영가가 출발하여 경릉(敬陵)151)   앞길에 이르자 혼백련과 영가와 그리고 대가가 잠시 머물렀다가 오르고 내리는 절차를 모두 종묘 앞길에서 거행한 의식과 같이 하였다. 명릉에 이르러 임금이 연에서 내려 여에 올랐다. 좌의정이 여재궁관을 거느리고 재궁을 받들어 윤여(輪轝)의 위에서 찬궁 안에 있는 탑상(榻上)에 남쪽으로 머리를 두고 안치하였다. 내시가 혼백함을 받들어 영좌(靈座)에 안치하고 우주궤(虞主櫃)를 그 뒤에 놓았다. 내시가 그 앞에 향안(香案)을 설치하고 명정(銘旌)을 영좌의 우측에 설치하였으며, 또 시책보(諡冊寶)와 애책(哀冊) 및 평상시에 쓰던 책보(冊寶)를 영좌의 왼쪽에 놓았고 영침(靈寢)을 재궁의 동쪽에 설치하였다. 대가가 홍살문[紅箭門] 밖에 이르러 여에서 내려 악차로 들어가 최복(衰服)을 갖추어 입고 장(杖)을 두고는 홍살문 안에 있는 판위(版位)에 들어가서 부복(俯伏)하여 곡하고 사배(四拜)하였다. 이어서 찬궁을 봉심(奉審)하고 또 능에 올라가서 봉심하고는 악차(幄次)에 들어갔다. 이날 임금이 친히 천전(遷奠)152)  을 거행하였는데 방상시(方相氏)153)  가 먼저 퇴광(退壙) 위에 이르러 창으로 4방의 구석을 쳤다. 섭통례가 영좌 앞에 나아가서 여에 올릴 것을 계청하고, 길유궁(吉帷宮)에 나아가서 여에서 내려 좌(座)에 올릴 것을 계청하니, 내시가 혼백함을 재궁 앞에 안치하였다. 섭통례가 받들어 영좌에 나아가서 순에 올려 현궁으로 나아가기를 계청하니, 좌의정이 여재궁관을 거느리고 재궁을 받들어 윤여 위에서 순에 올렸다. 담사(擔士)가 순을 받들어 왼쪽으로 돌아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장차 현궁에 나아갈 때 궁인이 모두 곡하였다. 임금이 악차에서 나와 장(杖)을 짚고 곡을 하며 봉사위에 이르니, 문무 백관(文武百官)들이 모두 곡하면서 따랐다. 순(輴)이 수도각(隧道閣)에 이르자 임금이 소차(小次)에 들어갔다. 좌의정이 여재궁관을 거느리고 윤여로 재궁을 받들어 소금저(素錦褚)를 덮고는 윤여 위에서 퇴광의 산륜(散輪) 위에 안치한 다음 소금저를 벗기고 해과(解裹)하는 것을 봉심하였다. 녹로(轆轤)154)  를 사용하여 퇴광 안에 있는 윤여 위에 안치하니, 우의정 신만(申晩)이 다시 관의(棺衣)와 명정을 정리하였다. 임금이 전옥백위(傳玉帛位)에 나아가자 봉애책관(奉哀冊官)이 애책을 받들어 근시(近侍)에게 꿇어앉아 주었고, 근시는 꿇어앉아서 올리니, 임금이 그것을 받아 영의정에게 전하였다. 【이때 영의정이 병으로 따라오지 못하였으므로, 좌의정이 대행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북향하고, 꿇어앉아 받아서 퇴광의 서쪽에 바쳤다. 봉옥백관(奉玉帛官)이 옥백을 받들어 근시에게 꿇어앉아 주매 근시가 꿇어앉아 임금에게 올리니, 임금이 받아서 좌의정에게 주었다. 좌의정이 북향하여 꿇어앉아 받아서 애책의 남쪽에 바쳤다. 임금이 봉사위로 돌아오니, 국장 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 홍상한(洪象漢)이 보불삽(黼黻翣)과 화삽(畵翣)을 재궁의 양쪽 곁에 세웠다. 임금이 부복하여 곡하고 애통함을 다한 뒤에 사배하니, 백관이 모두 부복하여 곡하고 사배하였다. 임금이 악차로 돌아가자 집의(執義) 박창윤(朴昌潤)이 봉폐(封閉)155)  를 감독하고, 우의정이 흙 아홉 삽을 덮은 다음 지석(誌石)을 내렸다. 임금이 악차에서 나와 영위(靈位)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서 우주궤(虞主櫃)를 받들어 향탕(香湯)으로 신주를 목욕시키고 수건으로 닦은 뒤, 임금이 최복을 갖추고 장(杖)을 두고는 손을 씻고 탁자 앞에 올라와서 서향(西向)하여 서고 친히 전면(前面)을 썼다. 내시가 우주(虞主)를 받들어 영좌에 안치하고 혼백함은 그 뒤에 두었다. 유사가 예찬(禮饌)을 올리니, 상식(尙食)156)  이 영좌 앞에 진설하고는 향(香)을 피우고 술을 따랐다. 전언(典言)157)  이 꿇어앉아 축문(祝文)을 읽자, 임금이 부복하여 곡하고 사배한 다음 악차로 돌아왔다. 임금이 장(杖)을 짚고 사릉위(辭陵位)에 나아가 부복하여 곡하고 사배한 후 홍살문 밖 악차로 나갔다. 내시가 우주궤를 받들어 연(輦)에 안치하고, 혼백함을 그 뒤에 두었다. 섭통례가 진발(進發)할 것을 계청하니 의장(儀仗)이 차례로 앞에서 인도하였다. 임금이 악차에서 나와 지영위(祗迎位)에 나아가니, 우주련(虞主輦)이 이르렀다. 임금이 국궁(鞠躬)하고 드디어 연에 올라서 경릉(敬陵) 앞길에 이르렀다. 우주련과 대가(大駕)가 잠시 머물렀는데, 오르고 내리는 절차를 의식대로 하였다. 주정소에 이르러 내시가 우주궤를 받들어 영좌에 안치하고, 임금은 연에서 내려 악차에 들어갔다. 유사가 예찬을 올렸는데, 모두 조석전(朝夕奠)과 같이 하였다. 섭통례가 영좌 앞에 나아가 좌에서 내려 연에 오를 것을 계청하니, 임금이 악차에서 나와 연에 오른 뒤에 드디어 진발하였다. 왕세자가 성문(城門) 밖의 모화관(慕華館)에 나와서 신련(神輦)을 공경히 맞아 부복하여 곡하고 애통함을 다하였으며, 종묘 앞길에 이르자 임금이 부복하여 곡하고 애통함을 극진히 하였다. 우주련과 대가가 잠시 머물러 오르고 내리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임금이 신련을 따라 건복문(建福門)에 들어가서 효소전(孝昭殿) 뜰 위에 이르자, 내시가 우주궤를 받들어 영좌에 안치하니, 임금이 초우제(初虞祭)를 의식대로 몸소 거행하였다.

 

초우제를 장차 거행하려고 할 즈음에 임금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초우부터 비로소 제사라고 일컫는 것이니, 곧 제례(祭禮)의 시초가 된다. 여러 집사(執事)들은 각기 정결하게 준비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찬궁(欑宮)에서부터 인산(因山)할 때까지 무릇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몸소 하였는데, 하현궁(下玄宮) 때의 명정(銘旌)이나 재궁(梓宮)의 상자(上字)가 표석(表石)의 전후면(前後面) 및 연주(練主)158)  를 모두 친히 써서 필성 필신(必誠必信)의 효도를 다하였다. 바야흐로 능상(陵上)에서 우주(虞主)159)  를 쓸 때에는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져서 악내(幄內)가 어두웠으나 글자의 획이 정세(精細)하니,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상히 여겼다.

 

산릉 도감(山陵都監)으로 하여금 남은 쌀 2백 석(石)을 고양군(高陽郡)에 주어, 산릉(山陵)의 빙정(氷丁)160)  에게 공급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은 빙정이 민폐(民弊)가 됨을 생각하여 기읍(畿邑)에 분정(分定)한 것을 모두 없애고, 36읍(邑)의 백성으로 하여금 선후(先后)의 덕택임을 모두 알게 하였다.

 

반우(返虞)할 때에 임금이 대신(大臣)을 보내어 근처에 있는 여러 능침(陵寢)을 봉심(奉審)하게 하고 또 예관(禮官)을 보내어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과 가림 부부인(嘉林府夫人)의 묘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지방관(地方官)인 고양 군수에게 용성 대군(龍城大君)과 명빈(明嬪)의 묘를 수축(修築)하라고 명하였으니, 모두 신릉(新陵) 근처에 있기 때문이었다.

 

7월 13일 계묘

임금이 재우제(再虞祭)를 친히 거행하고 혼백(魂帛)을 묻었다. 대축(大祝) 홍양한(洪良漢)에게 명하여 말로써 고유(告由)하기를,
"초우(初虞)가 이미 지나서 삼가 혼백을 묻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전문(殿門) 밖 계단 위에 물러나와 친히 혼백 상자를 싸서 내시에게 주며, 집사자(執事者) 김형대(金亨大)와 함께 남쪽 뜰에 받들어 묻게 하였다. 약원(藥院)의 문안에 대하여 답하기를,
"자성의 얼굴을 영원히 이별하고 연(輦)을 따라 돌아오니, 망극(罔極)함이 배가 된다. 어찌 내 몸을 돌보겠는가? 더군다나 어제 주정소(晝停所)와 산릉(山陵)에서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의 승전색(承傳色)의 소리를 듣고 또 대왕 대비전의 전어(傳語)를 보니, 이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다. 어찌 차마 답을 하겠는가?"
하였다.

 

7월 14일 갑진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서 경기 감사와 각무 차사원(各務差使員)들을 소견하고 명령을 내려 8도(八道)의 도신(道臣)과 3도(三都)의 유수(留守)들에게 신칙하는 윤음(綸音)을 쓰게 하였는데, ‘자성(慈聖)께서 백성을 돌보아 생각하시던 마음을 본받으라’고 한 그 사지(辭旨)가 간절하고 측은하였다.

 

상전(賞典)을 행하였다. 총호사(摠護使) 이천보(李天輔)와 김상로(金尙魯)에게는 안구마(鞍具馬)를 면사(面賜)하고, 빈전 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 이익정(李益炡)·이정보(李鼎輔)에게는 가자(加資)하였으며, 신회(申晦)·김한철(金漢喆)에게는 숙마(熟馬)를 주었고, 명정 서사관(銘旌書寫官) 이익보(李益輔)와 도청(都廳) 김시묵(金時默)·정존겸(鄭存謙)에게는 가자하였으며, 초상자 서사관(初上字書寫官) 박명원(朴明源)과 예방 승지(禮房承旨) 구윤명(具允明)·이규채(李奎采)·조명정(趙明鼎)과 국장 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 홍상한(洪象漢)·이철보(李喆輔)·이후(李)에게는 숙마를 주었고, 도청 윤학동(尹學東)·정순검(鄭純儉)에게는 가자하였으며, 낭청(郞廳)·원역(員役)·공장(工匠) 등에게는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지문 서사관(誌文書寫官) 박명원(朴明源)과 애책 서사관(哀冊書寫官) 김한신(金漢藎)과 시책 서사관(諡冊書寫官) 신만(申晩)과 보전 서사관(寶篆書寫官) 유척기(兪拓基)에게도 구마(廐馬)를 면사하였으며, 애책 제술관(哀冊製述官) 이정보와 시책 제술관(諡冊製述官) 원경하(元景夏)에게는 모두 가자하였고, 봉책보관(奉冊寶官) 이천보와 봉옥백관(奉玉帛官) 김상로에게는 안구마를 주었으며, 모든 집사(執事)에게는 각기 한 자급(資級)을 더하였고, 만장 서사관(輓章書寫官)에게는 각기 현궁(弦弓)을 주었다. 산릉 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이창의(李昌誼)·홍계희(洪啓禧)·이종백(李宗白)과 도청 황합(黃柙)·이의철(李宜哲)과 봉폐관(封閉官) 박창윤(朴昌潤)은 가자하였고, 식재궁 복토관(拭梓宮覆土官) 신만에게는 숙마를 주었으며, 취토 승지(取土承旨) 조재홍(趙載洪)에게는 아마(兒馬)를 주었고, 경기 감사 정홍순(鄭弘淳)에게는 숙마를 주었으며, 도차사원(都差使員) 및 지방관에게는 아마를 주었고, 낭청은 승서(陞敍)하였으며, 3도감 감조관(三都監監造官)은 모두 승륙(陞六)161)  시켰고, 영역 부장(領役部將) 등은 변장(邊將)으로 제수하였으며, 원역·공장 등을 등위를 나누어 시상하였다. 장생전(長生殿) 제조는 숙마를 주었고, 신련 시위 승지(神輦侍衛承旨) 구윤명·김기대(金器大)와 대봉옥백 애책 도승지(對奉玉帛哀冊都承旨) 조재홍은 모두 가자하였으며, 신련 시위 사관(神輦侍衛史官)과 주서(注書)는 모두 승륙시켰다.

 

7월 15일 을사

임금이 효소전(孝昭殿) 삼우제(三虞祭)를 친히 거행하였다. 세자에게 명하여 휘령전(徽寧殿) 망제(望祭)를 거행하게 하였다.

 

임희교(任希敎)를 집의로 삼고, 이정보·이창의는 숭록(崇祿)을, 홍계희는 숭정(崇政)을, 이종백은 정헌(正憲)을, 이익보는 자헌(資憲)을, 조재홍은 가의(嘉義)를, 구윤명·김기대는 가선(嘉善)을, 김시묵·정존겸·윤학동·정순검·황합(黃柙)·이의철·박창윤은 통정(通政)을 가자(加資)하였다.

 

장령 남언욱(南彦彧)이 후반(候班)162)  에 불참(不參)한 때문에 대신(大臣)이 하리(下吏)를 추치(推治)하니, 인피(引避)하여 체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7월 16일 병오

임금이 건극당(建極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신만(申晩)이 아뢰기를,
"내백(萊伯)163)  의 장계(狀啓)에 ‘왜차(倭差)가 아직까지 가지 않고 머물러 있다’고 하였는데, 혹시라도 사고를 일으킬 염려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중효(洪重孝)는 사람됨이 자상하기는 하나 근간(勤幹)한 사람은 아니다. 변신(邊臣)으로서 이와 같음은 부당한 일이니, 반드시 조정(朝廷)의 처분이 있은 뒤에 간왜(奸倭)를 탄압할 수가 있다."
하고, 동래 부사 홍중효를 거제(巨濟)로 정배(定配)하고 조엄(趙曮)으로 대신하게 하여 그날로 하송(下送)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이 양 도감(兩都監)의 재력(財力)이 반드시 바닥이 났을 것이다."
하니,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신(臣)이 전례를 상고하여, 보니 신사년164)  에는 9만 냥을 썼는데, 올해 양 산릉(兩山陵)의 소용은 8만여 냥에 불과하였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재물을 많이 쓰고 적게 쓰는 것은 전적으로 득인(得人) 여부에 달렸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도감의 낭청의 인원수가 너무 많습니다. 조금만 줄인다면 절용(節用)하는 도리에 거의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총호사(摠護使)와 상의하여 《보편(補編)》에 싣도록 하라."
하였다. 신만이 말하기를,
"판의금(判義禁) 홍봉한(洪鳳漢)은 바야흐로 장임(將任)을 맡았으니, 의언(議讞)165)  하는 직책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체직시킬 것을 윤허하고, 특별히 홍계희(洪啓禧)를 제수하여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호조 판서 이철보(李喆輔)가 노병(老病)으로써 해직하여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특별히 이종백(李宗白)을 제수하여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이조 판서 정휘량(鄭翬良)이 아뢰기를,
"궐문(闕門) 밖에 선비 한 사람이 다 해어진 옷을 입고, 혈서(血書)로써 아비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가 있어서 물어보았더니, 살옥 죄인(殺獄罪人) 박필윤(朴弼潤)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듣고 측은하게 여겨 말하기를,
"지난번 강상 어사(江上御史)가 와서 아뢰었을 때 그의 죄가 상명(償命)166)  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옛날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제영(緹縈)의 상서(上書)로 인하여 특별히 육형(肉刑)을 면제 시켰는데167)  , 하물며 이런 때에 이 일을 듣고 그냥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특별히 사형을 감하여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혼전(魂殿)에 공진(供進)하는 채소나 과일을 줄이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채소와 과일의 공물(貢物)은 그 폐단이 가장 크다. 해곽(海藿)168)  만 하여도 종류는 한 가지이지마는 명칭이 다섯 가지나 되어 분곽(粉藿)·조곽(早藿)·곽이(藿耳)·사곽(絲藿)·감곽(甘藿) 등의 구별이 있는데, 그것을 품종대로 다 각각 올리니 민폐가 매우 크다. 사곽·곽이 두 종류는 특별히 감하게 하라. 표고(蔈古)와 진자(榛子)169)   같은 것은 더구나 드문 종류이니, 그 폐단은 익히 안다. 모두 공진하는 것을 면제시키고 경무(京貿)로 대용하게 하여 외읍(外邑)에 사는 백성으로 하여금 자성(慈聖)의 유덕(遺德)을 모두 알게 하라."
하였다.

 

청주(淸州)의 주안면(周岸面)을 회인현(懷仁縣)으로 할속(割屬)시켰다. 우의정 신만(申晩)이 아뢰기를,
"단회 어사(丹懷御史)의 계언(啓言)에 ‘회인의 고을이 가장 벽소(僻小)하고 백성은 적은데 부역은 많아서 살 곳을 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주의 주안면은 회인의 남쪽에 있어서 경계가 서로 붙어 있고 청주와는 이어진 곳이 없으니, 이쪽을 베어서 저쪽에 보태어 잔읍(殘邑)의 폐단을 구하여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충원(忠原)의 율곡(栗谷)도 일찍이 음죽(陰竹)으로 할부(割付)한 예가 있으니, 청컨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피차의 형편을 자세히 헤아려 논계(論啓)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신만이 이어서 말하기를,
"양읍(兩邑)의 유민(流民)이 돌아와 사는 자가 이미 많습니다. 반드시 구적(舊籍)에 전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면 어사의 돌아올 시기가 오히려 멀어져서 공연히 주전(廚傳)170)  만 허비합니다. 청컨대 거두어 돌아오게 하소서."
하니, 전교(傳敎)를 써서 하유(下諭)하라고 명하였다.

 

7월 17일 정미

임금이 효소전(孝昭殿) 사우제(四虞祭)를 친히 거행하였는데, 왕세자는 아헌(亞獻)을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대행 왕비(大行王妃)의 복제(服制)에 있어 왕세자와 빈궁(嬪宮)이 졸곡(卒哭)이 끝난 뒤 진현(進見)할 때에 백포(白布)를 사용함은 곧 임금의 복제에 압존(壓尊)이 됩니다. 지금 임금께서는 양암(諒闇)171)  에 계시어 복색(服色)이 구애될 바가 없으니, 청컨대 그대로 포포(布袍)를 착용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4성문(四城門)에서 영제(禜祭)172)  를 거행하라고 명하였는데, 비가 오래 내렸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비가 비로소 개이자, 헌관(獻官)과 집사(執事)에게 숙마(熟馬)와 현궁(弦弓)을 주라고 명하였다.

 

함경도가 여러 달 동안 몹시 가물었는데, 초3일부터 연 4일 동안 큰비가 동이로 붓듯이 쏟아져서 인가(人家)가 많이 침몰(沈沒)되었다.

 

이철보(李喆輔)를 광주 유수로 삼았다.

 

7월 18일 무신

밤에 목성(木星)이 혼성(昏星)으로 들어가고, 화성(火星)이 정성(井星)으로 들어갔다.

 

김양택(金陽澤)을 대사헌으로, 유언국(兪彦國)을 대사간으로, 김광국(金光國)을 사간으로, 이만육(李萬育)·임명주(任命周)를 장령으로, 이봉상(李鳳祥)을 지평으로, 안극효(安克孝)를 헌납으로, 조현규(趙賢逵)를 설서(說書)로 삼았다.

 

7월 19일 기유

임금이 효소전 오우제(五虞祭)를 거행하였는데, 왕세자가 아헌을 하였다.

 

7월 21일 신해

밤에 달이 필성(畢星)을 침범하였다.

 

임금이 효소전 육우제(六虞祭)를 친히 거행하였는데, 왕세자가 배제(陪祭)하였다.

 

승지를 보내어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묘에 치제(致祭)하였다. 묘의 소재를 몰랐었는데, 후예(後裔) 김효대(金孝大) 등이 장단(長湍)에서 찾아 개봉(改封)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듣고 이런 명령이 있었다.

 

7월 22일 임자

봉조하(奉朝賀) 원경하(元景夏)를 파직시켰다. 이날 칠우제(七虞祭)에 배제(陪祭)할 조신(朝臣)들이 현탈(懸頉)173)  을 하고 많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기구(耆舊)174)  들 외에는 모두 파직시키라고 하였는데, 원경하도 거기에 끼어 있었다. 뒤에 임금이 ‘치사(致仕)175)  한 사람을 어찌 파직시키겠는가? 특별히 서용(敍用)하라.’고 하였다.

 

7월 23일 계축

임금이 효소전 칠우제를 친히 거행하였다. 승지를 보내어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의 묘에 가서 치제(致祭)하게 하고 고(故) 참의 김후연(金後衍)에게 참판을 특별히 증직(贈職)하여 함께 치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김후연이 국구(國舅)의 장자로서 근신(謹愼)하라는 가훈(家訓)을 받아 마땅히 척속(戚屬)의 본보기가 된다고하여 포상하라는 이런 명령이 있었다.

 

홍계희(洪啓禧)를 병조 판서로 삼았는데, 전 판서 이후(李)가 칠우제에 불참한 것으로 파직되었기 때문이었다. 전라 감사 이창수(李昌壽)가 병으로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허락하고 홍인한(洪麟漢)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경상 감사 이성중(李成中)을 내직(內職)으로 옮기고, 조운규(趙雲逵)로 대신하였으며, 이인배(李仁培)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예조 판서를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무릇 도감(都監)에 있는 의궤(儀軌) 1건(件)은 정부(政府)에 나누어 보내지마는, 만약 참고할 일이 있으면 예조에서 가져다가 보는 까닭에 정부에 쌓아 두고 살펴보지도 않다가 오래되면 간혹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지금부터는 정부로 보내는 의궤를 춘추관(春秋館)에 옮겨 보내어 포쇄관(曝曬官)의 행차를 기다려 사고(史庫)에 저장하여 오래도록 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7월 24일 갑인

임금이 효소전 졸곡(卒哭)을 친행하였는데, 왕세자가 배제하였다.

 

7월 25일 을묘

밤에 유성(流星)이 하늘 가운데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4, 5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니, 참핵사(參覈使) 이이장(李彛章)이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소견하니, 이이장이 아뢰기를,
"여러 죄인(罪人)들이 피국(彼國)에 들어가서 앞서 한 대로 납공(納供)하고 공사(供辭)를 변경하지 않으니, 저들 가운데 두 조사관은 순편한 데로 따르기에 힘썼으므로 조사하는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졌습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말하기를,
"가던 때의 말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임금의 명령을 욕되지 않게 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하였다. 이어서 묻기를,
"조사관은 만인(滿人)이던가 한인(漢人)이던가? 성명은 누구이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북경 낭중(北京郞中) 사달(四達)과 심양 원외(瀋陽員外) 관음보(觀音保)이었으며, 또 필첩식(筆帖式) 이리습(伊里拾)이 있었는데, 모두 청인(淸人)이었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조사할 때에 앉은 차례는 어떠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낭중은 주벽(主壁)으로서 가운데 있고 원외는 왼쪽에 있었으며, 필첩식은 오른쪽에서 조금 물러난 자리에 있었습니다. 참핵사는 우벽(右壁)에 있었고 형조 가낭청(刑曹假郞廳)은 참핵사의 우측에서 조금 물러난 곳에 있었으며, 저 나라의 통관(通官)은 좌벽(左壁)에 있었는데 남쪽에 가까워 감히 참핵사와 상대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7월 26일 병진

바람과 비가 크게 몰아쳤다. 휘령전(徽寧殿) 졸곡(卒哭)을 이날까지 물렸다가 행하였는데, 임금이 친히 제사지내고 왕세자가 아헌을 하였다.

 

7월 27일 정사

사직(司直) 윤봉구(尹鳳九)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개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장례(葬禮)를 읽고 장사를 치른 뒤에는 제례(祭禮)를 읽는 것은 곡례(曲禮)176)  에 있는 말입니다. 저하(邸下)께서 오늘날 독례(讀禮)하는 것은 바로 성인(聖人)이 독례한 뜻을 얻은 것이니, 신은 여기에서 흠탄(欽歎)함을 어찌 이기겠습니까? 다만 가만히 삼가 생각하여 보건대, 독서(讀書)를 하는 과정(課程)은 진실로 차례가 있는 것이니, 《예경(禮經)》이라고 어찌 유독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하(夏)나라와 상(商)나라 이래로 세대에 따라 감손하기도 하고 첨가하기도 하였는데, 주(周)나라의 문채(文綵)가 찬란한 것은 공자(孔子)께서 따르신 바이니, 이른바 《의례(儀禮)》라고 하는 것은 후세에 감히 견주어 의논하지 못한 것입니다. 《의례》는 주공(周公)이 만든 것으로서 예의 전서(全書)이며, 《예기》는 한유(漢儒)들이 성인의 논례(論禮)를 기록한 것에서 섞여서 나온 것이니,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의례》는 경(經)이고, 《예기》는 해(解)이다.’라고 한 것이 이 때문입니다. 만일 《의례》를 읽지 않고 먼저 《예기》를 읽는다면 《예기》에 실린 허다한 설(說)들을 과연 어디에 붙여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의례》의 주소(註疏)는 권질(卷秩)이 너무 많아서 실로 망망(茫茫)한 바다를 바라보는 듯한 한탄이 있으니, 처음 보아서는 갑자기 터득하기 어렵습니다. 오직 《주자가례(朱子家禮)》의 글은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만든 것으로서 간결하면서도 빠지지 않았고 자세하면서도 번거롭지 않아서, 바로 이것을 먼저 보아야 사례(四禮)의 강령 절목(綱領節目)을 알기가 좋습니다. 그런 뒤에 《예기》로 나아가서 제례(制禮)의 본뜻을 상고하고, 그것을 다시 전개해 키워서 《의례》에서 근원을 미루어 찾는다면, 예의 3백(禮儀三百)과 위의 3천(威儀三千)의 광대한 것을 세밀히 찾아내고 모두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예를 읽는 전체의 공부입니다. 이 《가례》가 있은 뒤에 송나라의 여러 현인(賢人)들로부터 우리 나라의 선정신(先正臣)에 이르기까지 먼저 《가례》를 연구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평일에 강론(講論)하고 질문한 것도 《가례》를 가지고 많이 하였으니, 어찌 《가례》가 예학(禮學)의 첫길이 아니겠습니까? 마치 《대학(大學)》이 입덕(入德)의 문으로서 반드시 《논어》·《맹자》·《중용》에 앞서야 되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이 역시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혹 어떤 이는 말하기를, ‘《가례》는 선비의 학문으로 왕조(王朝)의 예에는 간련됨이 없으니 법연(法筵)에서 강할 바는 아니다.’라고 하나, 이것은 그러하지 않습니다. 주자가 이르기를, ‘《의례》는 거의 전부가 사례(士禮)로, 천자(天子)나 제후(諸侯)의 예는 모두 사례를 가지고 증가(增加)하여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의례》에 있어서 관혼 상제(冠婚喪祭)를 모두 사례로 편명(編名)을 한 것은 진실로 예의 대체(大體)에 있어서 귀천(貴賤)이 없이 같기 때문입니다. 그 같은 가운데에 관복(冠服)의 도수(度數)를 사(士)와 차별되게 한 것은, 절목을 따라 보였을 뿐입니다. 지금 《가례》를 가지고 익숙하게 익히면 그 소소(小小)하게 차별되는 것들은 스스 쉽게 통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말하건대, 법연에서의 강하는 것 또한 어찌 《가례》로써 먼저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는 《가례》를 수첩(手帖)에 적어 경연의 신하에게 강문(講問)하셨으니, 《가례》가 과연 제왕가(帝王家)에서 강하여 밝힐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저하께서는 명심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약방(藥房)의 여러 신하를 소견하였다. 도제조 신만(申晩)이 경옥고(瓊玉膏)를 조제해 들일 것을 청하니, 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전에는 위로 자성(慈聖)을 모시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몸을 보호하려는 마음을 가졌었지마는, 지금은 자성이 계시지 않는데 어찌 혼자 내 몸을 위하여 먹을 수 있겠는가? 옛날 은(殷)나라 고종(高宗)은 3년 동안 양음(亮陰)177)  에 있었는데, 내가 효건(孝巾)을 벗지 않은 것은 효도하는 생각을 간직하기 위함이다."
하였다.

 

7월 28일 무오

전라도 무장현(茂長縣)에 배가 침몰하고 강물 주변에는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는데, 휼전(恤典)을 거행하라고 명하고 빠진 사람을 건져서 살린 자는 또한 시상하도록 하였다.

 

7월 29일 기미

박창윤(朴昌潤)을 승지로, 윤득양(尹得養)을 교리로 삼고, 강원 감사 이유신(李裕身)은 모친상을 당하였으므로 심수(沈鏽)로 대신하게 하였다. 이창의(李昌誼)를 원접사(遠接使)로, 송형중(宋瑩中)을 문례관(問禮官)으로 삼았으니, 조칙 패문(弔勅牌文)178)  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 동래 부사 홍중효(洪重孝)를 특별히 석방하였다. 이보다 앞서 차왜(差倭)가 왔을 때 그냥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는데, 차왜는 본래 관수왜(館守倭)인 귤여동(橘如棟)과 서로 좋아하지 않았다. 홍중효가 이를 염탐(廉探)해 알고서는 반간계(反間計)를 행하여 조정(朝廷)에서 장차 연례 공작미(年例公作米)를 모두 막아버리겠다는 뜻을 넌지시 알리니, 귤여동이 대마 도주(對馬島主)에게 득죄(得罪)할까 두려워하여 몰래 본부(本府)와 합모(合謀)해 축출하기로 기일(期日)을 정하여 수표(手標)를 만들어서 들여보냈다. 홍중효는 그것을 치발(馳撥)하여 올렸는데, 얼마 안되어 정배(定配)하라는 명령이 내렸었다. 조금 있다가 차왜가 약정한 기일에 돌아갔고 홍중효의 계문(啓聞)도 지금에서야 비로소 도착하니, 임금이 공과(功過)가 서로 비슷하다고 하여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 대차왜(大差倭)가 축출을 당하여 돌아간 것은 여기서부터 비롯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 임금이 그 공로를 가상히 여겨 직첩(職牒)을 주어 서용하게 하였고 경직(京職)에 조용(調用)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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