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경신
임금이 효소전(孝昭殿) 삭제(朔祭)를 거행하였다. 세자에게 명하여 휘령전(徽寧殿) 삭제를 섭행(攝行)하게 하였다.
임금이 다시 강경(講經)을 시작하게 하여 시사복(視事服)을 입고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3년 내의 대소 제전(大小祭奠)을 모두 친히 제사지내는 것으로 정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한 달에 삭망(朔望)의 두 번 제사와 오향(五享) 및 절일(節日)이 9차에 불과하니 《오례의(五禮儀)》에 따라서 친제(親祭)로써 거행하도록 하고, 이어서 《보편(補編)》에 싣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재실(齋室)에 나아가 원접사(遠接使)와 문례관(問禮官)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상·하마연(上下馬宴)을 저들이 만일 묻거든 우리 나라에서는 상례(喪禮)가 엄격하여서 경자년179) 대상(大喪)부터 연향(宴饗)을 베풀지 않는다고 하면 저들이 반드시 억지로 우기지는 않을 것이다. 또 우리 나라에서는 금주(禁酒)를 하여 예주(醴酒)를 대용(代用)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8월 2일 신유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병조 판서 홍계희(洪啓禧)를 특파(特罷)하고 이조 판서 정휘량(鄭翬良)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이때 구궐(舊闕)의 광화문(光化門)에 방(榜)을 붙인 자가 있었는데, 임금이 궐문을 지나다가 보고 궐문에 잡서(雜書)를 붙인 것은 전에 들어 보지 못한 바이라 하여 이런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위장(衛將)과 중관(中官)을 잡아다 신문하였다.
8월 4일 계해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좌·우상(左右相)과 원접사(遠接使)를 소견하고, 말하기를,
"칙사(勅使)를 맞이하여 조문(弔問)을 받을 때에 가혼전(假魂殿)을 함인정으로 정하였는데, 처지(處地)의 좌우에 보계(補階)180) 를 설치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니, 호조 판서 이종백(李宗白)이 아뢰기를,
"보계만 설치하게 되면 저들이 반드시 의심을 할 터이니, 주추를 박고 기둥을 세워서 건물 1간(間)을 더 만들고, 이어서 평상(平床)을 설치하여 교의(交椅)를 안치하며, 또 붉은 비단 장막[紅綃帳]을 더하여 은영(隱映)하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장막을 가리고 치제(致祭)하는 것은 벌써 성실하지 못할 뿐 아니라, 저들은 칙명(勅命)으로 치제하는 것인데 장막도 열지 않는다고 의심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차라리 앞에 장막을 드리우고 제물을 진설하여 저 사람들로 하여금 헌작(獻爵)을 하고 들어가게 하는 것이 옳겠다. 경(卿) 등은 다시 생각하여 보라."
하였다. 승지 정간(鄭榦)이 말하기를,
"신해년181) 의 치조(致弔) 때도 가주(假主)를 만드는 의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고, 좌의정 김상로(金尙魯)는 말하기를,
"가주는 허위(虛位)를 설치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일은 비록 중난(重難)하더라도 잠시 사용하는데 무슨 손상이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시(臨時)하여 다시 하교하겠다."
하고, 이어서 전교를 쓰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산릉 도감(山陵都監)은 비록 남은 쌀이 있어야 하나, 왕자(王者)가 백성을 위하는 데에 있어서 어찌 다만 목전(目前)을 위하여 2백 곡(斛)의 쌀을 아끼어 백성을 괄시하는 폐단을 하겠는가? 이 뒤로는 산릉에 진공(進供)하는 빙정(氷丁)은 영원히 없애고, 탁지(度支)182) 와 선혜청(宣惠廳)으로 하여금 각각 쌀 1백 석(石)으로써 본관(本官)에 획급(劃給)하여 주고 모든 것을 금년의 예에 따라 관(官)에서 준비하여 거행할 일을 《보편(補編)》에 싣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국상(國喪) 때에 기전(畿甸)에는 큰 폐단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선반미(宣飯米)이고, 또 하나는 빙정(氷丁)이었다. 기왕에 한 가지 폐단은 없앴는데, 또 그 한 가지를 어찌 미루어 두겠는가? 지금으로부터 시작하여 3년 안의 선반미는 선혜청으로부터 진공하게 하고 외읍(外邑)에서 진공하여야 할 것은 본색미(本色米)를 대동세(大同稅)에 첨납(添納)할 일을 영(令)으로 나타내어 《보편》에 싣도록 하라."
하였다.
이성중(李成中)을 이조 판서로 특제(特除)하였다.
8월 5일 갑자
산릉제(山陵祭)에 쓸 향(香)을 전하는 것을 모두 친히 거행하겠다고 명하였다.
훈련 도감에서 상달(上達)하기를,
"작년에 황해 감사가 황주(黃州) 등의 읍(邑)에 전정(田政)이 문란하다고 다시 측량하기를 장청(狀請)하였었는데, 본영(本營)의 소관인 재령(載寧) 철현진(鐵峴鎭)의 절수처(折受處)가 그 가운데 섞여 들어갔습니다. 이 진(鎭)은 깊은 산과 긴 골짜기 안에 위치하고 있어서 산전(山田)이 척박하여 거두는 세금이 매우 적으므로, 군기(軍器)와 철물(鐵物)을 전적으로 여기에 의지하고 있으니, 본읍(本邑)에 부속시켜 줄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진민(鎭民)으로 하여금 전과 같이 농사를 지어 먹게 하소서."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임금이 경주부(慶州府)에 신라(新羅)의 옛터를 그려 들이라 명하고, 또 홍문관에 삼국(三國)의 기지(基地)를 상고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이때 승지 정간(鄭榦)이 영남 사람으로서 입시하였으므로, 물어 본 뒤에 이런 전교가 있었던 것이다.
8월 6일 을축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 유신(儒臣)과 편차인(編次人)을 불러 《심감(心鑑)》을 읽게 하였다. 수찬 홍양한(洪良漢)이 삼국기지도(三國基址圖)를 들였는데, 각기 방위색(方位色)으로 그 경계를 표시하였다. 임금이 보고서 말하기를,
"삼국의 지형(地形)이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분명하다."
하였다. 홍양한이 말하기를,
"정항령(鄭恒齡)의 집에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가 있는데, 신이 빌려다 본즉 산천과 도로가 섬세하게 다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또 백리척(百里尺)으로 재어 보니 틀림없이 착착 맞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승지에게 명해 가져오게 하여 손수 펴 보고 칭찬하기를,
"내 70의 나이에 백리척은 처음 보았다."
하고, 홍문관에 1본(本)을 모사(摸寫)해 들이라고 명하였다.
8월 7일 병인
밤에 유성이 수위성(水位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크기는 주먹만 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 유신 남태저(南泰著)·홍양한(洪良漢)을 불러 무일편(無逸篇)183) 을 강하고,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읽게 하였다. 그리고 고(故)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와 고 참판 남태량(南泰良)의 아들들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전조(銓曹)에 고 명상(名相) 노수신(盧守愼)의 후손을 찾아보라고 명하였는데, 노수신은 선묘조(宣廟朝)를 당하여 《숙야잠주해(夙夜箴註解)》를 찬진(撰進)하여 진강(進講)에 대비하였었다. 이날 임금이 유신에게 이 책을 읽으라고 명하고 큰 감동을 받아서 이런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8월 8일 정묘
임금이 병조 판서 정휘량(鄭翬良)을 불러서 칙사를 맞이하는 시위 절목(侍衛節目)을 물었다.
8월 9일 무진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 유신을 불러 소고(召誥)184) 를 강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도(地圖)를 자세히 보니, 과연 기이하였다. 인군(人君)이 보고 싶어하기만 하면 가히 얻지 못할 물건은 없겠다."
하니, 수찬 홍양한(洪良漢)이 말하기를,
"위에서 좋아하는 바를 아래에서는 더욱 심하게 좋아하는 것이니, 임금의 호오(好惡)는 신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한 가지 일에서도 역시 경계하여야 할 도리가 있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하였다. 홍양한이 말하기를,
"또 8도 분도첩(八道分圖帖)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니, 가져오라고 명하고는 이를 보고서 하교하기를,
"이제 8도 분도를 보니, 더욱 지극히 정밀하다. 역시 전도(全圖)에 의거하여 모사하여 들이고 아울러 모사한 것을 본관(本館)과 비국(備局)에 비치하게 하라."
하매, 홍양한이 말하기를,
"신은 지도의 일에 대하여 삼가 소회(所懷)가 있습니다. 대개 여도(輿圖)라고 하는 것은 나라의 소중한 것인데, 우리 나라에서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찬성(纂成)한 것이 이미 수백 년이 지났습니다. 그뒤의 연혁(沿革)은 다시 고징(考徵)할 수가 없으니 이어서 찬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마는, 이것은 아직 경솔히 의논드리기 어렵습니다. 열읍(列邑)의 읍지(邑志)에 이르러서는 곧 여지(輿地)의 근본으로서 근래의 연혁을 가히 고징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본관으로부터 8도(八道)에 이문(移文)하여 열읍에서 읍지가 있는 것은 등본(謄本)이나 인본(印本)을 막론하고 모두 모아서 올려 보내게 하며, 글로써 이루어진 것이 없거든 곧 수집(修輯)해 엮어서 올려 보내게 하여 고거(考據)에 대비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가 매우 좋다. 곧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8월 10일 기사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앉아서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아뢰기를,
"조종조(祖宗朝) 때에 산릉 내광(山陵內壙)을 모두 석실(石室)로 만드는 제도를 《오례의(五禮儀)》에 실었는데, 비록 어느 왕조 때에 시작되었는지는 몰라도 중간에 돌을 없애고 숯[炭]을 썼으며 퇴광(退壙)에만 단지 8척(尺) 사방석(四方石)을 썼습니다. 그러나 숙묘(肅廟)신사년185) 에 5척 4촌(寸)으로 줄여 썼으며, 경자년에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지난번에 대조(大朝)께서 승군(僧軍)을 조발(調發)하는 데 폐단이 있다고 하여 지금 홍릉(弘陵)으로부터 사방석을 쓰지 못하도록 《보편(補編)》에 싣게 하였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기왕에 실어다가 놓은 돌을 쓰지 않는다면 애석한 일이라고 아뢰니, 성상께서 엄교(嚴敎)를 내려 오늘 안으로 깨어 버리라는 전교를 내리시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부득이 옮겨다가 곡장(曲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하니, 동궁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하였다. 김상로가 또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묘(墓)가 경기(京畿) 수원(水原)에 있는데, 듣자니 택조(宅兆)가 불길(不吉)하다 하여 호서(湖西)의 청주(淸州)로 이장(移葬)한다 합니다.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현인(賢人)으로서 사체(事體)가 매우 다르니, 단지 대신(大臣)들의 천장(遷葬)하는 예만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담여군(擔轝軍)과 조묘군(造墓軍) 및 장사(葬事)와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양읍(兩邑)으로 하여금 후하게 고조(顧助)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8월 12일 신미
윤득재(尹得載)를 도승지로, 이현중(李顯重)을 병조 참지로 삼았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유신(儒臣)을 불러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인재(人才)는 다른 시대에서 빌려 올 수가 없으니, 이것은 전적으로 임금에게 달린 것이다."
하니, 검토관(檢討官) 홍양한(洪良漢)이 말하기를,
"주(周)나라 때에는 공경 대부(公卿大夫)의 아들로써 숙위(宿衛)에 두었고, 한(漢)나라 때에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역시 이 법이 있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모두 폐지되었으니, 실로 애석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정병댁(正兵宅)과 갑사댁(甲士宅)이라는 칭호가 있었는데, 오늘날 정병(正兵)과 갑사(甲士)로 하여금 문(文)은 한림(翰林)·옥당(玉堂)이 되게 하고 무(武)는 선전(宣傳)·도총(都摠)이 되게 하는가?"
하니, 홍양한이 말하기를,
"지금 만일 문벌(門閥)에 구애되지 않고 오로지 인재만을 취한다면 어찌 옛날과 같지 못하다는 한탄이 있겠습니까?"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얼마 전에 맹유룡(孟儒龍)을 보았는데, 그는 맹사성(孟思誠)의 후손이었다. 아무리 대현(大賢)의 후손이라고 하나 이와 같아서는 어렵겠다."
하였다.
8월 14일 계유
임금이 포(布)로 싼 익선관(翼善冠)과 시사복(視事服)을 갖추어 입고,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망제(望祭)에 쓸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이길보(李吉輔)를 승지로 삼고, 김기대(金器大)를 병조 참판으로 특제(特除)하였다.
8월 15일 갑술
임금이 효소전 망제를 친히 거행하고 휘령전(徽寧殿) 망제는 세자에게 섭행하도록 명하였다.
8월 18일 정축
정시(庭試)와 무과(武科) 초시(初試)를 설행하였다. 양소(兩所)의 시관(試官)이 아뢰기를,
"초시의 규칙에는 육량전(六兩箭)·유엽전(柳葉箭)·편전(片箭)의 세 가지 기예 중에 두 가지 기예로 합격자를 뽑게 되었고, 양소(兩所)에서 각기 5백 명씩 뽑으라고 명하셨으나, 합격한 숫자가 원래 액수에 차지 못하여 거의 절반에 가깝습니다. 일찍이 한 가지 기예로서 승부(陞付)한 전례가 있었으니, 상재(上裁)를 우러러 청합니다."
하니, 전례에 따라 승부시키라고 명하였다.
8월 19일 무인
임금이 여차(廬次)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금년에 비록 조금은 풍년이 들었다고 하나 거듭된 흉년을 당한 나머지 구포(舊逋)를 모두 바치게 된다면, 백성들이 반드시 지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았다. 우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만일 일찍이 하교(下敎)를 하지 않고 그때에 임하여 바치는 일을 정지시킨다면, 도리어 간민(奸民)들의 농간 거리만 되고 백성들은 실제의 혜택을 입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전교를 쓰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속담에 이르기를, ‘백성이 풍년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그들의 마음을 궁구해 본다면 안타까워진다. 유약(有若)186) 은 이르기를, ‘백성이 풍족하면 임금이 무엇 때문에 부족할 것인가?’라고 하였고, 옛날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풍년이 들자 오히려 전조(田租)를 감하여 주었다고 하는187) 데, 하물며 구포이겠는가? 겹친 흉년 끝에 구포를 모두 받는다면 백성이 어찌 견디겠는가? 을해년188) ·병자년189) 두 해의 구포는 절반을 바치게 하고, 갑술년 이전의 조관(條款)은 특별히 바치는 것을 정지시켜 모년(暮年)에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김상로가 또 말하기를,
"제도(諸道)의 미봉(未捧)을 지금 이미 양정(量停)하였으니, 단양(丹陽)·회인(懷仁) 양읍도 마땅히 혜택을 주어야 합니다."
하고, 신만은 말하기를,
"그렇다면 회양(淮陽)·김화(金化) 양읍도 다르게 취급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하고, 전교를 쓰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단양·회인·회양·김화 네 읍의 전조(田租)나 정포(丁布) 중에 포흠(逋欠)이 있거든, 모두 면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상로가 또 호서(湖西)에서 진정(賑政)을 끝낸 상황을 가지고 아뢰기를,
"충원 현감(忠原縣監) 홍감보(洪鑑輔)는 진정을 잘한 것으로 수위(首位)에 있어 포장함이 마땅한데 선혜청 당상 홍봉한(洪鳳漢)이 지친(至親)이기 때문에 인혐(引嫌)하여 그 일을 담당하려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법외(法外)에 관계됩니다. 청컨대 신칙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홍감보는 민첩하고 단련되어 여러 번 주군(州郡)의 책임을 맡았는데, 치적(治績)이 매우 두드러졌으니, 진실로 쉽게 얻을 수 있는 인재가 아닙니다. 청컨대 정조(政曹)로 하여금 격식(格式)을 깨뜨리어 조용(調用)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아뢴 바를 들었는데 어찌 회계(回啓)를 기다리겠는가?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하라."
하였다.
호서 안집 어사(湖西安集御史) 홍경해(洪景海)가 복명하니, 임금이 어사가 두 번 내려가서 백성을 초집(招集)한 바가 많다 하여 말[馬]을 하사하고 칭찬하였으며, 관동 안집 어사(關東安集御史) 구윤명(具允明)과 전 도신(道臣) 이유신(李裕身)·호서 도신(湖西道臣) 김상철(金尙喆)에게도 똑같이 말을 하사하고, 단양 군수 정석교(鄭錫敎)는 준직(準職)190) 에 조용(調用)하도록 하였다. 청풍부(淸風府)의 대동세전(大同稅錢) 중에 취재(臭載)191) 로써 건지지 못한 3백 90 냥(兩)은 특별히 탕감하도록 허락하였다.
8월 20일 기묘
영접 도감(迎接都監)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조칙사(弔勅使)가 입경(入京)할 때에 나례(儺禮)를 베풀지 못하는 사유를 미리 통관(通官)에게 통고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8월 21일 경진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인병(引病)하여 정사(呈辭)하였으나, 동궁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좌승지 정간(鄭榦)이 상서(上書)하여 상례(喪禮)를 논하기를,
"해조(該曹)의 의주(儀註)에 의문점(疑問點)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한 가지는 백피화(白皮靴)이고, 또 한 가지는 공제(公除)192) 가 끝난 뒤에 제사를 평상시와 같이 지내는 일이고, 또 그 한 가지는 공제가 끝난 뒤에 뭇 신하의 진현복(進見服)이 오사모(烏紗帽)와 흑각대(黑角帶)입니다. 백피화에 대한 문제는 신이 지난번에 천견(賤見)을 진술한 바 즉석에서 개정(改正)을 허락하여 주셨으므로, 신은 진실로 감격하였습니다. 삼가 《예기(禮記)》를 상고하여 보건대, ‘상(喪)이 빈소(殯所)에 있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상(喪)의 경중(輕重)을 따져 그런 것이 아니라 다만 길흉(吉凶)을 서로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상이 비록 지극히 가벼운 것이더라도 빈소에 있으면 오히려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인데, 하물며 우리 곤전(坤殿)께서는 대조(大朝)에 대하여는 제체(齊體)가 되고, 조종(祖宗)에 대하여는 승중부(承重婦)가 되며, 신민(臣民)에 대하여는 모(母)의 도리가 있습니다. 재궁(梓宮)이 찬궁(欑宮)에 있으면 사직(社稷)에 제사지내는 일이야 부득불 상엿줄[紼]을 밟고 넘어서 행사한다지마는, 종묘(宗廟)나 능침(陵寢)에 대해서야 평상시처럼 어찌 제사를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생각하기를, 비록 내상(內喪)이 앞에 있었더라도 반드시 졸곡(卒哭) 전에는 제사를 멈추는 것을 마땅히 경술년193) 의 의주와 같게 하여야 된다고 여깁니다. 대저 대조(大朝)께서는 곤전에 대하여 제체(齊體)가 되어 복(服)을 입기 때문에 장기(杖期)는 부장기(不杖期)에 비하여 진실로 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공제 후에는 비록 익선관(翼善冠)과 오서대(烏犀帶)에 미길 미소(微吉微素)의 복을 사용하더라도 성심(聖心)이 오히려 편안할 것입니다마는, 신료(臣僚)들은 성모(聖母)에 대하여 아들된 도리가 있어서 공제 후에도 모름지기 순소(純素)의 복을 입고서야 비로소 마음에 편안할 수가 있습니다. 《의례(儀禮)》에는 모후(母后)와 후비(后妃)의 복을 모두 부장기(不杖期)로 하였고, 주소(註疏)에는 앞뒤 경중의 구별이 없으니, 신은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의 진현복도 모두 경술년과 같이 하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동궁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고 답하였다.
충원 현감(忠原縣監) 홍감보(洪鑑輔)와 한산 군수(韓山郡守) 김시교(金時敎)·명천 부사(明川府使) 정운일(鄭運一) 등의 관자(官資)를 더하였는데, 진정(賑政)을 잘한 것으로 수포(首褒)를 받았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임금이 영접 도감(迎接都監) 당상과 유신(儒臣)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칙사(勅使)가 치제(致祭)할 때에 저 사람들을 삼문(三門) 밖에 세워 놓고 제상(祭床)·향상(香床)·홍초장(紅綃帳)을 문밖에 설치하는 것이 옳겠다."
하매, 이종백(李宗白)이 말하기를,
"제상은 삼문 밖의 홍초장 사이에 설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들이 비록 혼전(魂殿)을 보고싶어 하더라도 다만 장막을 들어서 보이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옳겠다. 삼도 습의(三度習儀)도 모두 설장(設帳)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과거(科擧)의 복색(服色)에 대하여 묻고, 전교를 쓰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경자년194) 이전에는 3년의 복제(服制)가 회복되지 아니하여 포모(布帽)에 각(角)이 없고 수(垂)가 있었으므로 문무(文武)의 창방(唱榜)할 때에도 포모를 착용하였었는데, 경자년 이후에는 복제가 잘 갖추어져서 마대(麻帶)를 없애고 포각대(布角帶)를 착용하였으나 포수(布垂)는 그냥 있었다. 경술년에 이르러 포모에 각이 있었는데, 이와 같이 한 뒤에는 문무의 창방에 있어서 마땅히 포로 싼 복두(幞頭)와 포로 싼 야자대(也字帶)를 착용함이 마땅하였으나 경술년에 모각(帽角)이 있은 후로 겨를을 내지 못하였다. 지금 이 한 가지 일로 비교하여 보건대, 3년 내에는 여러 신하들의 복제가 다하기 전에 만일 소과(小科)가 있으면 마땅히 포로 싼 연건(軟巾)과 포삼(布衫)에 백도대(白絛帶)를 착용함이 마땅했으니, 이로써 보건대, 포로 싼 복두와 야자대를 착용한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어찌 잡과(雜科)의 방방(放榜)과 차이가 없겠는가? 지금으로부터 창방할 때에는 포로 싼 복두와 야자대로써 거행하라. 이를 인연하여 생각해 보니, 3년 내에 여러 신하들의 복제가 끝난 뒤에 진현(進見)할 때에는 마땅히 천담복(淺淡服)을 입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대과의 창방이 있게 되면 길복(吉服)을 입어야 하는가, 천담복을 입어야 하는가? 의조(儀曹)195) 로 하여금 전례를 참고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명년(明年)에 원량(元良)의 심제(心制)196) 뒤에 여러 신하들은 천담으로 진현하지마는 내외 시인(內外侍人)의 복색은 임금을 따라야 할 것인가, 원량을 따라야 할 것인가? 이것은 임오년197) 과는 차이가 있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대신(大臣)과 의논하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지금 관복(官服)의 일로 인하여 항상 안타까운 것이 있는데, 녹사(錄事)가 사람은 비록 미천하나 역시 의관(衣冠)을 한 사람이다. 하물며 출사(出仕)한 날짜를 계산하여 수직(授職)함에 있어서 의관의 제도는 마땅히 옛것을 따라야 하는데, 옛날에는 모대(帽帶)를 착용한 녹사가 있고 뿔이 있는 평정건(平頂巾)과 도대를 착용한 녹사가 있었는데, 근년(近年) 이래로 반행(班行)198) 에 모대를 착용한 녹사는 있어도 평정건을 쓴 자는 하나도 없으니, 이 역시 세도(世道)의 일단(一端)을 볼 수 있다. 의정부와 중추부(中樞府)로 하여금 고제(古制)를 회복하게 하라."
하였다.
8월 22일 신사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8월 23일 임오
임금이 여차(廬次)에 나아가 대신·예조 당상·편집 당상(編輯堂上)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속오례의(續五禮儀)》는 누가 편찬하였는가를 물으니, 우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이것은 판부사 이종성(李宗城)이 하교를 받들어 찬집(撰輯)한 것입니다."
하였다. 홍계희(洪啓禧)가 말하기를,
"갑진년199) 대상(大喪)에 전하께서 피발(披髮)200) 하셨던 것은 지나쳤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 나도 역시 마음에 의문이 있어 머리카락을 쥐고 물었었다."
하매, 홍계희가 말하기를,
"승중손(承重孫)201) 이라면 진실로 피발하는 것이 마땅하지마는, 왕세제(王世弟)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니, 고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서 단양(丹陽)과 회인(懷仁)의 백성들을 소견하였다. 이때 두 고을 백성들이 궐문(闕門) 밖에 많이 모여 있었는데, 임금이 소견하고, 묻기를,
"어사(御史)가 이미 안집(安集)시켜 놓았거늘, 너희들이 어찌하여 그 곳에서 편안히 살며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올라왔느냐?"
하니, 백성들이 일제히 같은 소리로 앙대(仰對)하기를,
"신 등이 성은을 입어 고향에 돌아와 모여서 처자식들과 서로 대하고 조상의 묘(墓)를 돌보게 되니, 하늘 같은 덕(德)을 어떻게 보답하겠습니까? 남부 여대(男負女戴)하고 한 번이라도 궐하(闕下)에서 배사(拜謝)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하니, 양식을 주어 내려 보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8월 24일 계미
의릉(懿陵)의 기신(忌辰)에 쓸 향을 명정전 월대(月臺)에서 친히 전하였다.
헌납 안극효(安克孝)를 특별히 파직하였다. 안극효가 상서하기를,
"병조 참판 이응협(李應協)은 성질이 미친 데에 가까워서 비쇄(鄙瑣)함이 많다고 비방하였으며, 제사(諸司)의 이예(吏隷)들이 오는 것을 언짢게 여기고 가는 것을 축하하니, 청컨대 영원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과천 현감(果川縣監) 홍헌보(洪獻輔)는 흉역(凶逆)의 가사(家舍)를 사들였으니, 청컨대 사적(仕籍)에서 삭제하소서. 울산 부사(蔚山府使) 심각(沈殼)은 국휼(國恤)의 공제(公除) 전에 날마다 소를 잡아 푸줏간에 공급하여 팔게 하였으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첫 번째 일은 구습(舊習)을 행하려고 협잡하여 상서한 것이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두 번째 일은 해부(該府)에서 조사하여 처치하게 하겠고, 세 번째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임금이 그 글을 가져다 본 뒤에 전교하기를,
"이응협에 관한 일은 그 사람을 논단(論斷)함에 있어 또한 어느 일을 지적하지 않고 멋대로 탄핵했으니, 안극효를 파직시키도록 하라. 홍헌보에 관한 일은 해부로 하여금 엄문(嚴問)하도록 하며, 심각에 관한 일은 과연 이와 같다면 그 율과는 상반되니, 해부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고, 또한 본도에도 사문(査問)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5일 갑신
새벽녘에 서리가 내리고 밤에 번개가 쳤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두 번째 정사(呈辭)하였으나,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고부사(告訃使) 안집(安𠍱)·김상중(金尙重)이 돌아오니, 임금이 소견하였다. 또 유신(儒臣)을 불러서 《서전(書傳)》의 이훈편(伊訓篇)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제주(濟州)의 세 고을에 역질(疫疾)이 크게 번져 사망한 자가 5백여 명에 이르렀고, 경기(京畿)·함경(咸鏡) 양도(兩道)에 더욱 치성(熾盛)하여 죽은 자가 수없이 많았다.
편집한 《보편(補編)》의 신간(新刊)과 대판(大板)에 새로 인각(印刻)한 경서(經書)를 다섯 곳의 사고(史庫)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8월 26일 을유
동적 친경전(東籍親耕田)에서 햇기장[新稷]을 올렸다.
선전관(宣傳官)을 동교(東郊)로 보내어 가을 곡식이 일찍 익는가, 늦게 익는가를 보게 하였다.
8월 27일 병술
예조에서 아뢰기를,
"지금 정시(庭試)를 설행함에 있어서 각 능관(陵官)들에게 전례에 따라 시험을 치를 여가를 주어야 하는데, 마땅히 충의위(忠義衛)로 가관(假官)을 삼아 차견(差遣)하지마는, 20명이 그래도 부족합니다. 청컨대 삼의사(三醫司)202) 를 전례에 따라 보충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8월 28일 정해
밤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세 번째 정사(呈辭)하니, 우답(優答)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와 우의정 신만(申晩)을 특별히 파직하였다. 김상로는 정시(庭試)의 명관(命官)203) 으로서 두 번이나 위소(違召)하였고, 신만은 차자(箚子)를 올렸으므로,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이르기를,
"이 과거는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보이는 것인데, 신자(臣子)된 자가 무슨 마음으로 부름을 거역하는가? 이는 특별히 그의 자질(子姪)들에게 과거를 보이기 위한 계획일 뿐이다."
하고, 이런 명령이 있었다. 이때 시임 대신(時任大臣)·원임 대신(原任大臣)이 모두 병을 핑계로 진차(陳箚)하였기 때문에 판서 이정보(李鼎輔)를 문과 명관(文科命官)으로 삼았고, 판부사 이종성(李宗城)을 무과 명관으로 삼았다.
8월 29일 무자
인원 왕후(仁元王后)의 환후(患候)가 평복(平復)된 데에 대한 경과(慶科)를 춘당대(春塘臺)에서 추설(追設)하여 이택진(李宅鎭) 등 15명을 뽑았다. 이보다 앞서 환후가 평복되어 이미 경사를 치루었고, 장차 가을을 기다려 과거를 설행하려 하였는데, 문득 승하(昇遐)하기에 이르자, 임금이 차마 중지하지를 못하여 인산(因山) 후에 추설하도록 명하고 부제(賦題)204) 를 ‘비록 효도하려고 하나 누구를 위하여 효도하겠는가?[雖欲孝誰爲孝]’로 하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무과(武科)에는 부방(赴防)을 면제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석년(昔年)의 은혜를 미루어 미치게 한 것이었다.
임금이 친림하여 선비들을 시험하였는데, 탁명(坼名)205) 함에 미쳐 안동(安東) 권정침(權正忱)의 이름을 보고, 임금이 하교하기를,
"옛날에 들으니, 정시(庭試)는 한강(漢江)을 건너가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홍패(紅牌)가 장차 조령(鳥嶺)을 넘어가게 되었으니, 경사를 함께 하려는 의도를 거의 저버리지 않겠구나."
하였다.
8월 30일 기축
이수득(李秀得)을 대사간으로, 서지수(徐志修)를 부제학으로, 윤동승(尹東昇)을 부응교로 삼았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양 혼전(兩魂殿)과 육상궁(毓祥宮), 산릉(山陵)의 삭제(朔祭)에 쓸 축문(祝文)에 친압(親押)하였다.
문과의 신은(新恩)206) 을 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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