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경인
임금이 효소전(孝昭殿) 삭제(朔祭)를 몸소 행하였다. 왕세자는 백총 망건(白驄網巾)에 백포 익선관(白布翼善冠)·백포 단령(白布團領)을 갖추어 포(布)로 싼 승여(乘輿)를 타고 집영문(集英門)을 나가서 동룡문(銅龍門)을 경유하여 지영(祗迎)한 다음, 재실(齋室)에 들어갔다. 최복(衰服)을 갖추고 휘령전(徽寧殿)에 나아가서 삭제를 섭행(攝行)하였다.
9월 2일 신묘
임금이 여차(廬次)에 나아가서 유신(儒臣)을 명소(命召)하여 《주례(周禮)》를 읽게 하고 문의(文義)를 강하였다. 9월 13일 효소전의 별다례(別茶禮)와 29일 탄일 다례(誕日茶禮)의 제문을 친히 지었다.
전라 감사 홍인한(洪麟漢)이 장차 사조(辭朝)하려 하니, 임금이 소견하고 면유(勉諭)하였다.
9월 3일 임진
임금이 강경(講經)을 행하였다. 전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와 우의정 신만(申晩)을 서용하여 다시 상직(相職)에 제배(除拜)하라고 명하였다. 이날 유신 남태저(南泰著)가 《중용(中庸)》의 ‘대신(大臣)을 공경하라’는 뜻으로 인하여 진백(陳白)하니,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
9월 4일 계사
밤에 유성(流星)이 천진성(天津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장령 조중명(趙重明)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출륙 죄인(出陸罪人) 윤광찬(尹光纘)과 조재민(趙載敏)은 간범(干犯)한 것이 가볍지 않는데도 지난번에 감등(減等)하였으니, 비록 대조(大朝)께서 경사를 맞이하여 광탕(曠蕩)하려는 은전(恩典)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제방(隄防)의 엄격하지 못함은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집법(執法)하는 처지에 있는 자들이 끝내 환수(還收)하라는 상달이 없어 좋은 장소로 양이(量移)207) 하는 것을 도배(徒配)와 같이 보아 넘겼으니, 신은 그 당시 말하지 않은 대신(臺臣)을 모두 똑같이 파직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간신(諫臣)이 재신(宰臣)을 논박하는 데 있어서 자질구레한 몇 가지 일을 주워다가 단안(斷案)으로 삼았으니, 진실로 논사(論事)하는 체통을 잃은 것입니다마는, 저 재신은 지난번 정원(政院)의 조좌(稠坐)한 가운데서 조신(朝紳)들을 낱낱이 세어 오귀(五鬼)로 지목하였는데, 말이 우스개와 달라 분위기가 아름답지 못하였습니다. 재작년 이후 옛날 오염된 풍습을 모두 새롭게 하였으니, 이와 같이 서로 헐뜯는 것은 진실로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애석하게도 대간(臺諫)의 상서에는 이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신(臺臣)은 견책(譴責)을 당하고 재신은 아무렇지도 않았으니, 물정(物情)을 공평하게 하여야 하는 도리에 어긋날까 두렵습니다. 신은 병조 참판 이응협(李應協)을 파직(罷職)하여야 된다고 여깁니다. 대각(臺閣)의 언사(言事)는 얼마나 엄중한 것인데, 전 장령 윤재겸(尹在謙)은 상서(上書)를 정원(政院)에 머물러 두었다가 수일이 지난 뒤에 도로 가지고 가서는 긴요한 내용들을 다 빼어 버리고 다시 올렸으니, 대체(臺體)가 전도(顚倒)되어 온 세상에 비웃음을 끼쳤습니다. 신은 개정(改正)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첫 번째 일과 세 번째 일은 말한 대로 시행하라. 다만 두 번째 일은 대조께서 지난번 하교에 세쇄(細瑣)하다고 하셨는데, 그것을 아호(阿護)하기 위하여 ‘애석하게도 대서(臺書)에서 이것을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그 협잡(挾雜)한 바가 참으로 한심하다."
하였다.
편차인(編次人) 구윤명(具允明)을 불러서 친히 지은 어용 지문(御容識文)을 쓰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서 《주례(周禮)》를 강론하였다.
9월 5일 갑오
김시영(金始煐)·박평(朴玶)을 승지로 삼았다.
전 장령(掌令) 조중명(趙重明)을 대정현(大靜縣)에 천극(栫棘)하게 하고 배도(倍道)하여 압송(押送)하라고 명하였다. 대리(代理)를 한 뒤로부터 소장(疏章)이 모두 소조(小朝)로 들어갔으나, 언사(言事)에 대한 소에 있어서는 대조(大朝)께 아뢰게 되었다. 이날 승지가 조중명의 상서가 있다고 아뢰자, 임금이 가져오게 하여 보고 또 소견하여 그 글의 뜻을 물으니, 조중명의 주대(奏對)가 분명하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귀(五鬼)에 대한 말은 이응협(李應協)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 사람을 욕보이기 위한 것이다. 몰래 기관(機關)을 쓴 것은 차마 바로 볼 수가 없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없다면 저절로 남을 무함한 율(律)이 있을 것이나, 저로 볼 것 같으면 곧 하나의 미련스러운 사람으로서 남의 사주(使嗾)를 받은 것이니, 족히 책할 것이 못된다."
하고, 드디어 이런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9월 6일 을미
유신(儒臣)을 불러서 《주례》를 강하였다.
국휼(國恤)을 당하여 대소과(大小科)의 창방(唱榜) 때 복색(服色)을 이정(釐正)하여 《보편(補編)》에 실었다. 하교하기를,
"지금 듣자니, 여러 대신(大臣)들의 헌의(獻議)가 나의 뜻과 똑같다. 아! 상제(喪制)의 기제(朞制)를 복구(復舊)시킨 뒤에 예문(禮文)을 수거(修擧)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대소과의 창방 때에는 모두 그때 진현복(進見服)의 복색을 따른다. 경자년208) 같은 때에는 포모(布帽)와 포포(布袍)가 해당되었고, 금년 같은 때에는 여러 신하들의 복이 끝나기 전이라 포포와 포모가 해당되지만, 복이 끝난 뒤에는 오모(烏帽)와 천담복(淺淡服)이 해당된다. 신사년209) 이나 무신년210) 같은 때에는 군신(君臣)의 복이 끝나기 전인 데도 오모와 천담복에 해당되었고, 임신년211) 같은 해에는 여러 신하들은 비록 복이 없었으나 임금의 복이 끝나기 전이라 역시 진현복을 오모와 천담복으로 따라 하였다. 그런데 신은(新恩)의 복색은 천담 포포(淺淡布袍)를 논하지 않았고, 창방할 때에는 모두 그 복색을 따라 하였으나 화사한 것을 제거하였다. 대개 생진(生進)에게 술을 내릴 때에는 천담 포포는 논할 것 없이 모두 그 색을 따라 하였는데, 건(巾)은 한결같이 색을 따라 연건(軟巾)을 썼으며 포(袍)는 포포(布袍)에 포대(布帶)를 쓰고 담포(淡袍)에 흑포대(黑布帶)를 썼지만, 난삼(襴衫)과 도대(絛帶)를 제거하고 역시 술을 내리는 일도 제거할 것을 《보편》에 싣도록 하라."
하였다.
9월 7일 병신
부제학 서지수(徐志修)가 관록(館錄)212) 을 사피(辭避)하였다고 하여 특별히 교동 수사(喬桐水使)에 보외(補外)하였다.
9월 8일 정유
이보다 앞서 조정에서는 북로(北路)에 목면(木綿)이 없기 때문에 매년 태복시(太僕寺)에서 세입(稅入)한 면화(綿花) 8천 5백여 근(斤)을 지부(地部)213) 에서 가져와 북관(北關)으로 입송(入送)한 것이 백년(百年) 가까이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태복시에서 ‘연달아 목면의 흉년을 당하여 세액(稅額)이 크게 줄었다.’고 하면서 2천 근만 보내고 그 나머지 채우지 못한 수량은 호조에서 무송(貿送)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9일 무술
영접 도감(迎接都監)에서 계언(啓言)하기를,
"원접사(遠接使)가 이문(移文)하였는데, 서울의 일곱 군데에서 연향(宴享)하는 일과 유관우(遊觀牛)·타락우(駝駱牛)·군위군(軍威軍)·헌가(軒架)·잡희(雜戱) 등을 칙사(勅使)가 모두 정감(停減)하라고 하였다 합니다. 종전에 연향을 정지하도록 허락하였을 때에는 전례에 따라 별도로 문안사(問安使)를 보내어 치사(致謝)하는 뜻을 보였습니다."
하니, 전례와 같이 하라고 명하였다.
9월 10일 기해
정원(政院)에 명하여 신방(新榜)의 가주서(假注書)에 시골 사람을 우선하여 의망(擬望)하라고 하였다.
9월 11일 경자
왕세자의 두후(痘候)가 평복(平復)된 것을 경축하는 정시(庭試)를 춘당대(春塘臺)에서 거행하여 이재협(李在協) 등 8명을 뽑았다.
경상도 장기현(長鬐縣)에 땅이 갈라졌다.
9월 12일 신축
밤에 유성(流星)이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문과(文科)의 신은(新恩)과 무과의 장원(壯元)을 소견하였다.
하교하기를,
"칙사가 가지고 온 은단(銀緞)은 곧 이것이 제수(祭需)이니, 정원에 도착한 뒤에 바로 호조(戶曹)로 내려 보내고 이어서 《보편(補編)》에 싣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와 우의정 신만(申晩)이 차자를 올려 인구(引咎)하여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리기를,
"며칠 전의 하교는 국체(國體)를 중히 하려고 한 것이다. 지금 칙사가 도강(渡江)하였는데, 이때 상직(相職)을 어찌 하루인들 비울 수가 있겠는가? 경은 사직하지 말고 곧바로 나와서 일을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4일 계묘
오시(午時)에 눈이 부렸다.
임금이 양 혼전(兩魂殿)·산릉(山陵)·육상궁(毓祥宮)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명정전(明政殿)에서 친히 전하였다.
제학(提學)에 명하여 태학(太學)에서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이게 하고, ‘육아장(蓼莪章)214) 을 세 번 반복하다[三復蓼莪]’라는 것으로 부제(賦題)를 삼으라 명하여 유통(柳侗)과 윤득맹(尹得孟) 2명을 뽑아 모두 급제(及第)를 내렸다. 입시(入侍)한 과차 시관(科次試官)에게 준여(餕餘)215) 를 내려 주고 말하기를,
"자성(慈聖)께서 늘 이런 날을 당할 때마다 꼭 여러 신하들을 먹이고 싶어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주는 것이니, 경 등은 모두 이 뜻을 꼭 알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5일 갑진
임금이 효소전(孝昭殿) 망제를 친히 거행하고, 세자에게 명하여 휘령전(徽寧殿) 망제를 섭행하게 하였다.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기제(朞制)가 끝나기 전에는 외방의 영읍(營邑)에서 문(門)을 개폐(開閉)할 때의 고취(鼓吹)와 도로(道路)에서 행취(行吹)하는 일을 금하게 하였다.
9월 16일 을사
밤에 천둥과 번개가 쳤는데, 청대(靑臺)216) 관원이 궐직(闕直)하여 보고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엄중히 처벌하게 하였다. 정원(政院)·대신(大臣)·삼사(三司)에서 재이(災異)로써 진계(陳戒)하였다.
이조 참판 남태제(南泰齊)를 특별히 파직하고, 김치인(金致仁)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이때 조칙사(弔勅使)가 가까이 왔으므로 이날 양 혼전(兩魂殿)의 조제 습의(弔祭習儀)를 거행하였는데, 이조에서 제관(祭官)을 계차(啓差)하니, 임금이 대축(大祝)을 유신(儒臣)으로 차임하지 않고 양사(兩司)로써 채웠다고 하여 해당 당상은 파직시키게 하고, 해당 낭관은 귀양 보내게 하였다. 또 칙사의 일행이 당도하게 되었는데 대신(大臣)이 모두 외방에 있었다고 하여 엄교(嚴敎)를 내리자, 우의정 신만(申晩)이 입성(入城)하여 대명(待命)하니, 사관(史官)을 보내어 효유(曉諭)하여 조정에 나오게 하니 신만이 명을 받들었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는 원기(遠畿)에 있어서 그 다음날 비로소 명을 받들었다.
성천주(成天柱)를 승지로, 홍중효(洪重孝)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9월 17일 병오
밤에 달이 필성(畢星)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서 중시(重試)를 설행하여 이기경(李基敬) 등 7명을 뽑고, 김상숙(金相肅)·박사형(朴師亨)을 음가주서(蔭假注書)로 삼았다. 문관(文官)은 모두 중시에 나아갔기 때문에 전례에 따라 음참하(蔭參下) 중에 명칭이 있는 사람으로 차의(差擬)하였는데, 박사형이 외방에 있었으므로 이정진(李定鎭)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좌·우사(左右史)와 한림(翰林)에게 명하여 모두 중시에 나아가게 하고 겸춘추(兼春秋)로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옥당(玉堂)에서 역시 천둥과 번개로써 진차(陳箚)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아! 부재 양덕(不才凉德)한 처지에 더욱이 또 쇠모(衰耗)하여 한 가지 정사(政事)도 거행할 수 없고 한 가지 혜택도 백성에게 미친 것이 없으며 정사를 하는 전당(殿堂)은 닫힌 지 오래 되고 장서(藏書)를 한 집에는 먼지가 이미 쌓였다. 사치스러운 풍조와 어지러운 습관은 날이 갈수록 심하여 지고, 탐관 오리(貪官汚吏)들은 모두 징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조정의 대각(臺閣) 위에서는 우물쭈물 예전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청대(靑臺)를 설치한 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 관상(觀象)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높디높은 인애(仁愛)의 하늘이 어찌 깨우침을 보여 주지 않겠는가? 그 허물을 추구해 본다면 바로 나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바야흐로 송구스러움이 절실하다. 깊이 반성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9월 18일 정미
임금이 여차(廬次)에 나아가 대신(大臣)·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함경도의 보로지진보(甫老知鎭堡)를 혁파하라고 명하였다. 당초에 경성(鏡城)의 육보(六堡)는 오로지 야인(野人)을 방비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인데, 야인들이 퇴주(退走)한 뒤로 혁파하자는 의논이 있어서 우선 장군파진(將軍坡鎭)을 혁파하고 단지 5보만 두었었다. 올해 가을에 보로지진이 큰물에 떠내려가게 되자, 감사(監司) 권혁(權爀)이 장문(狀聞)하여 이설(移設)을 하든지 혁파하든지의 당부(當否)를 품의하였다.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물으니,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와 행 사직(行司直) 김한철(金漢喆)이 모두 혁파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여 그대로 따른 것이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말하기를,
"영희전(永禧殿)217) 에 세조 대왕의 수용(晬容)을 봉안(奉安)한 연기(年紀)가 일찍이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수정(修正)할 때에는 인조(仁祖) 14년(1636) 병자(丙子)로 실려 있었고, 지금 본전(本殿)의 등록(謄錄)에는 병자년 7월 24일로 실려 있지마는, 강화 유수(江華留守)가 장청(狀請)한 제관(祭官)의 말을 보면 세조의 영정이 병자년에 아직 강화의 봉선전(奉先殿)218) 에 있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정축년219) 2월 14일 유수의 장계(狀啓)에 의하면 봉선전의 세조 영정은 병화 중(兵火中)에서 얻어 예조 참판 여이징(呂爾徵)이 배행(陪行)하였다는 말이 있고, 또 등록에는 세조의 영정이 강도(江都)에 매안(埋安)할 때에 훼손된 것을 정축년 4월에 개장(改粧)하였고 같은 해 윤4월 24일에 봉안하였다는 말이 있으니, 이로써 보건대, 영정을 봉안한 것이 병자년이 아니고 정축년 난리를 겪은 뒤입니다. 막중한 봉안에 대한 연기가 이와 같이 착오 되었다면 예전 그대로 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지금 《보략》을 수정할 때에 인조 15년 정축으로 고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아뢴 바와 같이 개정하라고 명하였다. 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여러 군문(軍門)의 교련관(敎鍊官)으로 오래 근무한 자를 천전(遷轉)시키는 규정에, 병조와 3군문(軍門)에서는 1도정(都政)에서 2명을 옮겨 주고 후도정(後都政)에서 1명을 옮겨 주며, 수어청·총융청 양영(兩營)에서는 간도정(間都政)에서 1명을 옮겨주는 일이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1년을 통계하여 3군문에서는 당연히 3명을 옮기고 수어청·총융청 양영에서는 당연히 1명을 옮기어 공평하여 원망이 없도록 하여야 하는데, 해조에서 수용하는 규정은 병조가 앞서고 3군문은 그 다음이며 수어청·총융청 양영은 또 그 다음이 되었으므로 늘 도정을 열 때마다 병조에서는 제 숫자대로 옮겨 주고, 3군문에 대하여서는 혹은 옮겨 주기도 하고 혹은 그냥 두기도 하며, 수어청·총융청에는 전연 옮겨 주지 않습니다. 이는 빈자리[窠闕]가 적은 까닭에 옮겨 주지 못하는 것이지마는 무사(武士)가 억울하게 여김은 당연합니다. 신은 청컨대 지금으로부터는 도정(都政)이나 산정(散政)220) 을 물론하고 병조와 여러 군문의 교련관을 정식(定式)대로 천전시키되 한바퀴 돌거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여 모든 도정에서 앞뒤를 정한 법에 구애되지 않게 하여 앞의 도정에서 미처 옮겨 주지 못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옮겨 준다면 공평하지 못한 폐단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였고, 좌의정 김상로도 역시 편리하다고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함경 감사 권혁(權爀)을 발탁하여 지돈녕(知敦寧)으로 삼았는데, 조정에 들어온 차서가 오래 되었다고 하여 좌의정 김 상로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유신(儒臣)을 불러 《주례(周禮)》를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부제(祔祭)를 행하지 않는 것은, 옛날에는 묘(廟)를 각각 따로 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묘제(廟制)는 옛날과 달리한 데에 인하여 그런 것인가?"
하니, 승지 성천주(成天柱)가 말하기를,
"옛날에 천자(天子)는 7묘(七廟), 제후(諸侯)는 5묘(五廟)로서 모두 묘를 각자 세웠기 때문에 부제를 행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한 곳의 묘에 함께 받들기 때문에 부제를 행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문소전(文昭殿)221) 만이 고제(古制)와 비슷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녕전222) 의 제도는 나는 실제로 알 수 없다. 맨 처음에는 4왕(四王)223) 을 받들었으나 뒤에 내려오면서 점점 많아진 때문에 그 제도가 이와 같아진 것 같다. 사부가(士夫家)에도 부조지위(不祧之位)224) 가 있으면 별묘(別廟)를 만드는가?"
하니, 성천주가 말하기를,
"혹은 별달리 묘를 세우는 자도 있고 혹은 고조(高祖)를 체천한 뒤에 증조(曾祖) 이하와 함께 묘에서 같이 제사를 지내게 하여 참례(僭禮)를 피하기도 합니다. 대개 부조라는 의의는 매우 중한 것이므로 오직 왕자(王子)나 훈신(勳臣)들만을 체천하지 않는데, 혹 연달아 2, 3세(世)에 책훈(策勳)을 받는 자가 있어 모두 부조에 부치게 된다면 참람에 가까운 혐의가 있으므로, 선유(先儒)들의 논의에 혹 이르기를, ‘단지 맨 첫번째 신위만 체천하지 말고 그 아래로는 아무리 공훈이 있더라도 역시 체천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는 신위는 역시 부조에 해당된다."
하였다.
9월 19일 무신
이극록(李克祿)을 집의로, 정상순(鄭尙淳)을 부응교로, 유건(柳健)을 헌납으로, 이언형(李彦衡)을 보덕(輔德)으로, 홍낙명(洪樂命)을 사서(司書)로 삼았다.
장령 안치택(安致宅)·이광익(李光瀷)이 천둥의 이변으로 인하여 진계(陳戒)하니, 왕세자가 우비(優批)로써 답하였다.
이기경(李基敬)·남태저(南泰著)를 승지로 삼았다.
시부 죄인(弑父罪人) 윤택상(尹宅尙)을 양주(楊州)에서 주살(誅殺)하라고 명하였다. 윤택상은 양주의 사족(士族)이었는데, 국옥 결안(鞫獄結案)을 살펴본 뒤에 임금이 이러한 불륜의 무리는 도하(都下)를 더럽힐 수가 없다고 하여 특별히 본주(本州)로 보내어 선비와 백성들을 많이 모아 놓고 정형(正刑)225) 한 다음 법과 같이 처자를 종으로 삼고 파가 저택(破家瀦宅)226) 하라 명하였다.
9월 20일 기유
밤에 유성이 여성(女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앉아서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장령 안치택(安致宅)이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9월 21일 경술
밤에 유성이 장성(張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조칙사(弔勅使) 상태(祥泰) 등이 왔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과 흑단령포(黑團領袍)를 입고 모화관(慕華館)에 나가 맞이하였으며, 왕세자가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지영(祗迎)하고 이어서 어가(御駕)를 따랐다. 임금이 먼저 명정전(明政殿)으로 돌아와 함인정(涵仁亭)에서 조제(弔祭)를 받고 막차(幕次)에 나아가서 칙사(勅使)를 접견하였다.
영조제칙 의주(迎弔祭勅儀註) 【효소전(孝昭殿)·휘령전(徽寧殿)의 양 혼전(兩魂殿)이 같다.】 는 이러하였다. 하루를 전기(前期)하여 전설사(典設司)에서 칙사(勅使)의 위차(位次)를 혼전(魂殿)의 중문(中門) 밖에 서향(西向)으로 만들고, 액정서(掖庭署)에서는 칙사의 위차를 영좌(靈座)의 동쪽에 서향으로 설치하였으며, 제문(祭文)과 폐백(幣帛)을 권치(權置)할 탁자를 호외(戶外)의 서향으로 설치하였다. 전하(殿下)의 입위(立位)는 영좌의 서쪽에 동향으로 설치하고, 또 전하의 입위를 동계(東階) 아래 북향으로 설치하였으며, 소차(小次)는 전정(殿庭)의 동남에 설치하고, 또 지영위(祗迎位)는 소차의 앞에 설치하였다. 전의(典儀)와 제집사(諸執事)의 위차는 동계의 아래 서향으로 하고, 종친(宗親)·문무 백관(文武百官)·감찰(監察)의 위차는 전정의 동서에 설치하였다. 그날 전하는 백포(白袍)·소익선관(素翼善冠)·포(布)로 싼 오서대(烏犀帶)·백피화(白皮靴)를 갖추고, 재전(齋殿)에 나아갔다. 좌통례(左通禮)가 중엄(中嚴)227) 을 계청(啓請)하니, 전하는 최복(衰服)을 갈아입고, 왕세자와 종친·문무 백관도 최복을 입었다. 전사관(典祀官)과 전사(殿司)는 각각 그 소속을 거느리고 들어와서 제문과 폐안(幣案)을 영좌의 왼쪽 남향으로 설치하고 향로(香爐)·향합(香盒)과 촛불을 영좌의 앞에 설치하였으며, 다음은 뇌찬(牢饌)을 설치하였다. 준(尊)228) 은 호외(戶外)의 왼편에 놓고, 술잔 3개를 준소(尊所)에 두었다. 인의(引儀)가 종친·문무 백관을 나누어 이끌고 최복을 갖추어 입은 다음 위차에 나아갔다. 대축(大祝)과 제집사는 먼저 전정에 들어가서 북쪽을 향하여 서쪽 위차에 서니, 전의가 사배(四拜)하라고 하자, 찬의(贊儀)가 ‘사배’라고 창(唱)하매, 대축과 제집사가 사배하고 관세(盥稅)한 뒤에 각각 취위(就位)하였다. 상례(相禮)가 왕세자를 인도하여 기복(朞服)으로 갈아입은 다음 【휘령전에 치제(致祭)할 때에는 본복(本服)인 최복(衰服)으로 갈아 입고 거장(去杖)한 다음 들어와서 취위하였다.】 먼저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갔다가 소차(小次)에 들어갔다. 【효소전에서 치제한 뒤에 명광문(明光門) 밖에서 여(輿)를 타고 휘령전 문 밖에서 여에서 내려 위차에 들어갔다.】 좌통례가 명정전 소차 앞에 나아가 출차(出次)할 것을 청하니, 전하가 곧이어 최복과 장(杖)을 갖추고 나왔다. 상례가 꿇어앉아 왕세자가 출차하여 지영위에 나아가기를 청하였고, 전하가 이르자 상례가 왕세자에게 국궁(鞠躬)하기를 청하였다. 전하가 소차에 들어가자, 왕세자도 도로 소차에 들어갔다. 인례(引禮)가 칙사를 인도하여 혼전(魂殿) 【효소전(孝昭殿)이다.】 중문(中門) 밖에 나아가 위차에 들어갔다. 제사할 때가 이르자 상례가 왕세자에게 청하여 출차하여 취위할 것을 청하고, 좌우 찬례(左右贊禮)는 전하를 인도하여 동계(東階) 아래 위차에 이르러 서향으로 서게 하였다. 전의가 곡(哭)하라고 하자, 좌찬례가 전하께 곡하기를 청하였고, 왕세자와 종친·문무 백관에게도 똑같이 하였다. 【찬의(贊儀)가 역시 창(唱)하였고, 무릇 왕세자가 행례할 때에는 상례(相禮)가 모두 찬청(贊請)하였다.】 좌찬례가 전하에게 장(杖)을 버리고 질(絰)을 벗으라 청하고, 좌우 찬례는 전하를 인도하여 중문에 나아갔다. 좌찬례가 전하에게 곡(哭)을 그치기를 청하고, 왕세자와 종친·문무 백관에게도 똑같이 하였다. 좌우 찬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중문 밖의 서쪽에서 동향으로 서서 맞이하게 하고, 인례는 칙사를 인도하여 위차에서 나와 서향으로 서게 하였다. 전하는 서문(西門)을 지나 먼저 서계(西階) 아래 위차에 나아가서, 칙사를 인도하여 정문(正門)을 지나 제문(祭文)이 놓인 탁자 앞으로 들어왔다. 집사가 제문과 폐백을 받들어 칙사의 앞에 꿇어앉아 올리니, 칙사가 제문과 폐백을 받들어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칙사가 영좌 동쪽에 나아가서 서향으로 서니, 전하는 서계를 지나 올라가 동향의 위차에 나아가서 칙사를 인도하여 향안(香案) 앞에 나아가 북향으로 섰다. 찬의가 ‘궤(跪)’라고 창하니, 왕세자 및 종친·문무 백관이 꿇어앉았다. 인례(引禮)가 꿇어앉아서 ‘세 번 향불을 피우시오.’ 하니, 칙사가 서서 세 번 향불을 피웠다. 인례가 또 ‘폐백과 제주(祭洒)를 올리시오.’ 하매 〈칙사가 폐백과 제주를 올리고,〉 인례가 칙사를 인도하여 위차에 돌아갔다. 독제문관(讀祭文官)이 제문안(祭文案) 앞에 나아가 서향하여 서서 〈제문을〉 다 읽은 뒤에 탁자 위에 도로 올려 놓았다. 전의가 곡하라고 하자, 좌찬례가 계청(啓請)하매 전하께서 곡하였고, 인례가 ‘칙사는 곡하시오.’ 하였으며, 왕세자 및 종친·문무 백관은 부복하여 곡하였다. 전의가 곡을 그치라고 하자, 전하가 곡을 그치고 칙사도 곡을 그쳤으며 왕세자 및 종친·문무 백관도 곡을 그친 뒤에 일어나서 사배하였다. 집사자(執事者)가 제문과 폐백을 받들고 요소(燎所)에 나아가 불사른 뒤에 좌우 찬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계상(階上)에 나가서 동향으로 섰으며, 인례는 칙사를 인도하여 계상에 나가서 서향으로 섰다. 전하가 읍(揖)을 하니, 칙사가 답읍(答揖)하였다. 인례가 칙사를 인도하여 동계로부터 내려오고, 좌우 찬례는 전하를 인도하여 서계로부터 내려와서 중문 밖까지 갔다. 인례가 칙사를 인도하여 휘령전(徽寧殿)에 나아가 앞에서 한 의식과 같이 행례(行禮)하였는데, 오직 복색(服色)만은 각각 본복(本服)을 착용하였다.
9월 22일 신해
유성(流星)이 허성(虛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누른 색이었다.
임금이 관소(館所)에 거둥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에게 치제(致祭)하게 하였으니, 임금이 관소로부터 돌아올 때에 그의 집이 가까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으므로, 이런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9월 23일 임자
천둥하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내렸다.
임금이 여차(廬次)에 나아가 편차인(編次人)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손(元孫)의 기질(氣質)이 처음에는 매우 호매(豪邁)하였는데, 지금은 변화하여져서 마치 딴사람이 된 것 같으니, 실로 빈궁(嬪宮)이 잘 깨우친 공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지난번에 독서(讀書)하는 소리를 들으니, 매우 홍량(洪亮)하여 능히 그의 할아버지를 닮았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3년상의 제도에 인산(因山) 전후의 복색(服色)은 경자년229) 과 갑진년230) 에 이미 정례(定禮)가 있으나, 기년제(朞年制)에 이르러서는 바로잡는 것이 마땅하겠다. 군신(君臣)이 성복(成服)한 뒤에는 포모(布帽)·포포(布袍)·포과대(布裹帶)를 착용하고, 졸곡 후에는 흑모(黑帽)·백포(白袍)·흑대(黑帶)를 착용할 것이며, 연거복(燕居服)은 포립(布笠)·포포·포대(布帶)를 착용하게 하라. 11개월째의 연제(練祭) 후에는 백립(白笠)·백포·백대(白帶)를 착용하고 13개월 후에는 구례(舊例)대로 착용하며, 만일 담제(禫祭)가 없는 기복(朞服)일 때에는 여러 신하들에게는 복이 없다. 오직 임금의 복에 대해서는 성복(成服) 후에 익선관(翼善冠)·백포·오서대(烏犀帶)를 착용하며, 연거복은 흑립(黑笠)·백포·백대를 착용한다. 장자(長子)의 3년복(三年服)과 시사복(視事服)은 장기(杖朞)와 모두 같고 연거복은 포립·포포·포대이다. 연제 후에는 흑립·백의·백대를 착용하며 상제(祥祭)에 이르러 그친다. 이 복(服)은 여러 신하들도 역시 기년제(朞年制)가 있으니, 복색은 기년제에 의하여 거행할 일을 《보편(補編)》에 싣도록 하라."
하였다.
경기의 교동(喬桐) 등 3읍(邑)과 평안도의 양덕(陽德) 등 10읍과 경상도의 안음(安陰)과 강원도의 평강(平康) 등 4읍과 충청도의 제천(堤川)과 함경도의 무산(茂山) 등 3읍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달걀만 하여 사람이 상처를 입었다고 도신(道臣)들이 서로 이어서 장문(狀聞)하였다.
9월 24일 계축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대신(大臣)과 정원(政院)에서 천둥의 이변으로 인하여 모두 차자(箚子)를 올리어 면계(勉戒)하니, 대조(大朝)·소조(小朝)께서 모두 가납(嘉納)하였다. 임금이 12가지 일로 자책(自責)하였는데, 말하기를,
"국세(國勢)가 떨어지고, 기강(紀綱)이 날마다 무너지며, 생민(生民)이 고통을 당하고, 대간(臺諫)들은 아첨하며 비위나 맞추며, 정당(政堂)에는 먼지가 쌓였고, 서각(書閣)에는 늘 정품(停稟)이 많았고, 후원(喉院)에서는 공사(公事)를 주달하지 않았으며, 부효(浮囂)는 날마다 심하고, 사치스러운 풍속은 나날이 번성하며, 여항(閭巷)에서는 금주(禁酒)의 명령도 효과가 없고, 조정의 인사(人事)는 날마다 이기려고만 하니, 굳이 그 원인을 따진다면 바로 나 한 사람 때문이다."
하고, 이어서 3일 동안을 감선(減膳)하라고 명하였다. 유신(儒臣)을 불러 《주례(周禮)》를 강하였다. 명(明)나라의 일에 이야기가 미치자, 승지 성천주(成天柱)가 말하기를,
"명나라 말기에 모기령(毛奇齡)이라는 자의 문집(文集)이 우리 나라에 들어왔는데, 오삼계(吳三桂)231) 에 대한 일을 말한 것이 있습니다. 당초에 오삼계에게는 진원원(陳圓圓)이라는 축희(畜姬)가 있었는데 진원원은 강남(江南)의 명창(名娼)이었습니다. 이자성(李自成)이 모반하여 북경(北京)을 함락하던 날 오삼계는 곧바로 항복하는 글[降表]을 보내려고 하였는데, 이자성이 장차 진원원을 겁탈하려고 영중(營中)에 두었다는 소문을 듣고는 분개하여 항복하는 글을 거두고 청(淸)나라에 구원을 청하며, 임금을 위하여 복수한다고 일컬었습니다. 청나라의 힘으로 이자성을 쫓아낸 뒤 우리 나라에서는 오삼계가 운남(雲南)에서 기병(起兵)하여 청나라에 대항하였음으로써 명나라가 흥복(興復)될 것을 기대하였었는데, 오삼계는 마침내 스스로 황제라고 하여 나라를 세웠으니 그의 마음이 여기서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이명곤(李命坤)을 함경도 관찰사로, 이의로(李宜老)를 지평으로, 정상순(鄭尙淳)을 부응교로, 홍자(洪梓)를 겸필선(兼弼善)으로, 이성중(李成中)을 지경연(知經筵)으로, 윤봉조(尹鳳朝)를 우빈객(右賓客)으로, 권혁(權爀)을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남유용(南有容)을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삼았다.
양사(兩司)의 여러 신하들이 천둥의 이변 때문에 진계(陳戒)하니, 왕세자가 모두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앉아서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재이(災異)로써 진계하니, 모두 가납(嘉納)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아뢰기를,
"제주(濟州)의 3읍(邑)에서 굶주림을 고하니, 청컨대 본도(本道)의 연해(沿海)에 있는 상진곡(常賑穀) 6천 석(石)을 획급(劃給)하여 진휼하소서."
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고, 남태적(南泰績)의 일은 정계(停啓)하게 하였으니, 물고(物故)되었기 때문이었다.
9월 26일 을묘
밤에 유성이 필성(畢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달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갔다.
9월 28일 정사
밤에 유성이 실성(室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 3 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9월 30일 기미
밤에 유성이 하고성(河鼓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 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친히 양 혼전(兩魂殿)·산릉(山陵)·육상궁(毓祥宮)의 삭제(朔祭)에 쓸 향(香)을 명정전(明政殿)에서 전하였다.
구선복(具善復)을 금위 대장(禁衛大將)으로 삼았다.
칙사(勅使)가 돌아갔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서 전송할 때 연향대(宴享臺)에 나아가니, 칙사가 이르렀다. 임금이 재배례(再拜禮)를 행한다고 청하니, 칙사가 말하기를,
"국왕(國王)의 춘추(春秋)가 이미 높아서 예(禮)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며, 고사(固辭)하였다. 임금이 읍례(揖禮)를 행한다고 청하니, 칙사가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국왕께서는 쇠로(衰老)한 나이에 겹쳐 상중(喪中)에 계셨는데, 처음 왔을 때에 이미 왕림하였거늘 지금 또 멀리 전송하시니, 대단히 마음에 불안합니다. 그리고 접대가 매우 풍성 정결하였으며 약이(藥餌)를 골고루 공궤(供饋)하였으니, 은혜가 매우 두터워 감사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어서 다례(茶禮)를 행한 뒤에 환송하고, 회가(回駕)할 때에 의소묘(懿昭墓)를 두루 들렀다.
영접 도감(迎接都監)에서 아뢰기를,
"칙사를 보낼 때에 접견(接見)하고 이야기한 것을 써서 아뢰었는데, 혹 미비(未備)한 곳이 있을 것이니, 비국에서 가감(加減)하여 예람(睿覽)에 대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또 아뢰기를,
"통관(通官) 서종익(徐宗益)이 증급(贈給)한 백면지(白綿紙) 2천 5백 권(券)과 잡물(雜物)이 담겨 있는 버들 고리짝 두 상자와 은(銀) 3천 냥을 호조(戶曹)에 유치(留置)하여 두었다가 동지사(冬至使)의 행차를 기다려 부쳐서 보낼 일을 청하여 수역(首譯)으로 하여금 내고(來告)하였습니다. 대개 통관들이 행장(行裝)의 물건을 칙사에게 들킬까 두려워하여 이러한 청을 하는데 일찍이 전례가 많았으니,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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