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을축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사민(士民)을 소견하였다. 유생(儒生)들에게 명하여 차례로 앞으로 나와서 품고 있는 생각을 진계(陳啓)하게 하였다. 남익록(南益祿)이 진계하기를,
"개가(改嫁)한 사람의 자손이 청환직(淸宦職)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전고(前古)에 없던 법이며, 사천(私賤)을 대대로 사천으로 삼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하고, 또 진계하기를,
"적처(嫡妻)와 첩(妾)에서 모두 아들이 없는 경우, 입후(立後)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성상께서 가뭄을 근심하시는 때에 단지 ‘한 여자가 억울함을 품으면 5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것만 생각하시는데, 더욱이 나라의 왕손(王孫)이겠습니까?"
하고, 또 ‘아들이 아비가 군병이 된 것을 조롱하면 죄가 태형(笞刑)에 해당된다.’는 말이 있자, 좌우에서 모두 말하기를,
"광망(狂妄)한 사람입니다."
하니, 임금이 기뻐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너의 말이 외람되다."
하였다.
6월 2일 병인
중신(重臣)을 보내어 우단(雩壇)에서 기우하게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서형수(徐逈修)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구언(求言)하셨으나, 시종(侍從)하는 신하들 중에 한 사람도 강개(慷慨)하여 정직하게 진계(陳啓)하는 자가 없었으니, 몇십 년 동안 배양하신 공효(功效)가 어디 있습니까? 비록 더러 임금의 과실에 대해 언급한 바가 있었지만, 권세(權勢)를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거실(巨室)을 두려워함이 전하를 두려워하는 것보다 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는 성덕(聖德)이 관대(寬大)하셔서 매번 너그럽게 용서하시지만, 권세를 가진 사람은 반드시 중죄(重罪)로 보복하는 까닭에 오로지 옹폐(壅蔽)하여 미봉하는 것만 일삼아 장차 임금의 권세를 고립(孤立)시키게 될 것이니, 신은 개탄스러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동작(動作)이 너무 번거롭고 마음을 쓰시는 것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신은 감히 ‘간(簡)’과 ‘정(靜)’ 두 큰 자로 우러러 권면(勸勉)하고자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가 시폐(時弊)에 절실하게 맞으니, 척념(惕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발탁해서 예조 참의를 제수하여 내가 거리낌없이 직간(直諫)하는 문을 열어 놓은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지영례(香祗迎禮)를 행하고, 다시 억석와(憶昔窩)에 들어갔다. 사경(四更)에 연화문 밖에 나아가 부복(俯伏)하고는 우단(雩壇)에서 행사(行祀)를 마쳤다는 보고를 듣고 비로소 침전으로 돌아갔다.
6월 3일 정묘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금화(金化)의 유생 진처겸(秦處謙)을 소견하였다. 진처겸은 1백 세 된 늙은 부모가 있었는데, 임금이 그 부모의 침식(寢食)이 어떠한가에 대해 하순(下詢)하고, 이어서 그 가벌(家閥)에 대해 물어 본 다음 감역(監役)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그 양친에게 식물(食物)·의자(衣資)·연수(宴需)를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더 제급(題給)하게 하였다.
임금이 돈녕 도정(敦寧都正) 신광수(申光洙)가 노모(老母)가 있는데도 직방(直房)에 붙어 살고 있음을 듣고, 해조(該曹)로 하여금 집을 사서 주고, 또한 노비 각각 한 사람씩을 주어 그 노모를 봉양하게 하였다.
6월 4일 무진
비가 내리니, 기우제의 헌관 이하에게 말을 내려 주는 상전(賞典)을 베풀었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고, 주강하여 《소학(小學)》을 강하였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지영례(香祗迎禮)를 행하였다.
6월 5일 기사
정언 이상건(李商建)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돈녕 도정(敦寧都正) 신광수(申光洙)에게 집과 노비를 내려 주라는 명은 진실로 성상께서 노인을 우대하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아 주는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장원(壯元)한 사람에게 집을 내려 주는 것은 비록 중국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라 하나, 우리 조정에서는 듣지 못하던 것입니다. 노비를 내려 주신 총권(寵眷)에 이르러서는 이것은 훈로(勳勞)에 보답하는 은전(恩典)이니, 사람마다 외람되게 함부로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늠료(廩料)와 고기를 넉넉히 주거나 포백(布帛)을 내려 주더라도 불가(不可)할 것이 없는데, 이러한 비상(非常)한 일이 있었으니, 가만히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비답을 내려 꾸짖었다.
정언 임희우(任希雨)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각 궁방(宮房)과 아문(衙門)에서 면세(免稅)하는 규례는 토지가 있거나 없는 것을 물론하고 고을마다 모두 있는데, 시정(市井)의 무뢰배들을 차견(差遣)하여 도장(導掌)이라 하고는 조금 부요(富饒)하여 토지가 있는 백성들을 가려 그들로 하여금 세금을 바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징렴(徵斂)하는 것이 보통 부세(賦稅)보다 몇 갑절이 되며, 토지를 묵혔거나 기경한 것을 물론하고 쇠잔한 백성들의 기부(肌膚)를 벗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올라온 후에는 진폐(陳廢)하였다고 일컬어 그 원수(元數)를 줄이고 문득 미수(未收)에 돌리고는 혹 도서(圖書)를 내려 보내어 납세(納稅)를 독촉하거나, 혹은 잇달아 관문(關文)을 보내어 재촉하며, 심지어 각 해당 고을의 관속(官屬)으로서 일로 인해 상경(上京)한 자를 구류(拘留)해 놓고 징색(徵索)하는 등 이르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지금 만약 엄중히 과조(科條)를 세워 도장(導掌)을 차견하지 못하게 하고, 각 해당 고을에서 직접 혜청(惠廳)에 바치게 한 후 혜청에서 그 결수(結數)를 헤아려 각 궁방과 해당 아문에 대동미(大同米)를 이획(移劃)하는 규례처럼 내주게 한다면, 허다한 소민(小民)들이 안도(安堵)하고 즐거이 생업에 종사하는 다행스러움이 있을 것입니다. 근래에 인심(人心)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경솔하게 살인의 율법을 범하는 자들이 많은데도 법관(法官)이 된 자들은 법을 들어 구핵(究覈)하지 못한 채 시간에 얽매여 일부러 지체시키고 있는 자들이 있으니, 진실로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동교(東郊)에서 살인하였다는 말이 낭자하게 전파되었는데 아직도 일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으니, 해당 당상을 먼저 파직하여 서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옥사(獄事)를 지체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 교리 이갑(李𡊠)은 지난번에 제관(祭官)으로 차출되자, 성을 내며 해당 관리의 머리를 움켜쥐고 휘두르며 붙잡아 끌고 갔으니, 거조(擧措)가 놀랍습니다. 신은 파직하여 서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첫머리에 진계한 일은 세선(稅船)에 함께 실은 것이라 하더라도 중요한 바가 다른데, 어떻게 한 예로 할 수 있겠는가? 두 번째 일은 청한 바가 옳으니, 아뢴 바대로 시행하도록 하겠다. 세 번째 일은 아! 이러한 때에 어떻게 감히 이같이 할 수 있었단 말인가? 빨리 삭직(削職)의 형전(刑典)을 시행하게 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신회(申晦)가 어선(御膳)을 회복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사관(史官)을 보내어 우의정 이은(李溵)을 면려하게 하고 함께 오도록 하였다. 또 봉조하 홍봉한(洪鳳漢)에게도 면려하게 하고는 빨리 입시하도록 하였다.
6월 6일 경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니, 우의정 이은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집하던 상신이 다시 왔으니, 장차 나를 피곤하게 할 것이다. 경이 다시 굳게 청하겠지만, 나는 탕제(湯劑)를 물릴 것이다."
하였다.
사인(士人) 김이인(金履寅)을 특별히 참작해서 해남현(海南縣)에 정배하게 하였다. 김이인은 동리(洞里)의 일로 인하여 동네 사람에게 태형(笞刑)을 집행하였었는데, 그 사람이 보고 기한(保辜期限)116) 이 지나 죽었으므로, 임금이 어사를 보내어 안핵(按覈)하게 하고는, 드디어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6월 7일 신미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지영례(香祗迎禮)를 행하였다. 이어서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만안문(萬安門)에 들어가서 전배(展拜)한 후 태추문(泰秋門)을 나와 황단(皇壇)에 나아가 사배(四拜)한 다음, 어가(御駕)를 돌렸다.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재숙(齋宿)하고 이튿날 새벽 진전(眞殿)에 전배하였으니, 숙묘(肅廟)의 기일(忌日)이었기 때문이었다.
6월 8일 임신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다. 임금이 왕세손에게 명하여 문소전(文昭殿)의 구기(舊基)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6월 9일 계유
장령 이동현(李東顯)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일전에 문에 임어하여 구언(求言)하셨을 때 남익록(南益祿)이 아뢴 것은 지극히 해패(駭悖)한 것이니, 절도에 정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구상(具庠)은 본래 음흉한 성품에 겸하여 외람되고 교활한 습성을 갖추고 있으므로, 평생의 기량(伎倆)은 인물(人物)을 상해(傷害)하지 않는 일이 없었습니다. 밤낮으로 췌마(揣摩)117) 하는 것은 모두 영리(營利)를 좇아 사욕(私慾)을 경영하는 마음뿐이고, 경탈(傾奪)하는 곳에서는 팔을 걷어붙이고 시론(時論)을 주장(主張)한다고 자칭하며, 득실(得失)을 따지는 즈음에는 얼굴을 바꾸어 오로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을 설시(設施)하는 짓만 일삼았었습니다. 그가 세도(世道)를 괴란(壞亂)시키고 변화 무쌍하며 방자한 실상에 그의 아비와 숙부(叔父)가 함께 눈물을 흘리며 꾸짖기를, ‘이런 패악(悖惡)한 아들을 낳았으니 반드시 우리 집은 망할 것이다.’ 하였다는 말이 세상에 알려져 귀가 있는 사람은 모두 들었습니다. 환득 환실(患得患失)118) 하여 국가를 해친다는 자가 바로 이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은 구상의 전후의 자질(資秩)을 아울러 간개(刊改)하도록 명하고 병예(屛裔)119) 의 형전(刑典)을 시행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의인(醫人) 김적기(金迪基)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송절차(松節茶)를 진어(進御)하셨을 때 내원(內院)에서 송지절(松枝節)을 가져다가 그것을 쓰는 데 채웠다고 합니다. 신은 진실로 그것은 반드시 의거하는 바가 있을 줄 알고 있습니다마는, 신이 삼가 《본초강목(本草綱目)》 과부(果部)의 넷째 조항인 증목과원방(蒸木瓜圓方)을 살펴보니 ‘황송절(黃松節)은 곧 복신(茯神)의 중심목(中心木)이다.’라고 하였는데, 내원에서 쓴 것은 《본초강목》에 나온 것과 같지 않으니,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한번 살펴보시고 바로잡아 다른 날의 쓰임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살펴보지 않았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서 환궁하여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장령 이동현(李東顯)이 또 남익록(南益祿)과 구상(具庠)의 죄를 계청하니, 답하기를,
"남익록은 아뢴 대로 하도록 윤허한다. 구상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 처분하게 하겠다."
하였다.
6월 10일 갑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고양(高陽)·벽제(碧蹄)는 곧 임진란(壬辰亂) 때 명나라 장수가 패몰(敗沒)한 곳입니다. 옛날에는 단(壇)을 설치하여 치제(致祭)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조에서 이미 행한 전례가 있으니, 전례에 의거하여 치제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나졸(羅卒)에게 명하여 구상(具庠)을 잡아들이게 하고, 하교하기를,
"청명(淸名)과 시체(時體)가 모여 한 붕당(朋黨)을 이루었으니, 이것은 나라의 존망(存亡)과 관계되는 것이다. ‘시론을 주장하였다[主張時論]’는 네 글자가 이미 백간(白簡)에 올랐으니, 내가 엄중히 추문하는 일을 어떻게 느슨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구상을 엄중히 신문(訊問)하게 하였는데, 구상이 자복(自服)하기를,
"과연 청명을 좋아하여 그 붕당에 빠져 들어가 시론(時論)을 주장(主張)한 죄는 신이 진실로 도피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이동현(李東顯)의 말로 인하여 비로소 그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저 구상이 임금을 저버리고 할아비를 저버린 것은 김치인(金致仁)보다 심하다. 만약 형배(刑配)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여러 사람들을 면려(勉勵)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아비가 옛날의 훈척(勳戚)이었음을 생각하여 거리로 쫓아내게 하니, 지금 이러한 마음을 품고 있는 자들에게 이로써 징계하여 큰 죄에 빠지지 않게 하라."
하고, 판의금에게 명하기를,
"구상은 결박(結縛)을 풀지 말고 나졸(羅卒)로 하여금 그 형기(刑機)에 의지한 채 홍마목(紅馬木)120) 밖에 끄집어내어 도민(都民)들로 하여금 모두 알게 하라."
하였다.
대사헌 정광한(鄭光漢) 등이 구상(具庠)을 절도 정배(絶島定配)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6월 11일 을해
약방에서 문후(問候)하니, 답하기를,
"2대를 섬긴 원보(元輔)가 임금을 배신하고 선조를 배신하여 50년 동안 고심(苦心)했던 것에 어긋났는데, 이를 권하여 이룸에 있어 교활함에 능한 김종수(金鍾秀)는 오히려 아주 괴이하도다. 지금 임금을 배신하고 할아비를 배신하고 선조를 배신하면서 간사함에 능한 구상(具庠)이 청명(淸名)과 시체(時體)를 흠모(欽慕)하여 이런 아주 해괴한 일이 있었으니, 하나는 스스로 영수(領袖)가 된 것이고, 하나는 시론(時論)을 주장(主張)한 것으로 두 무리가 모두 드러났다. 그러나 나라 안에 몇 사람의 교활함에 능한 자와 몇 사람의 간사함에 능한 자가 나라 안에 널리 퍼져 있는지 알지 못하는데, 무슨 마음으로 임금이 되고 또한 무슨 마음으로 건공탕(建功湯)을 마시겠는가? 문후하지 말라."
하였다.
6월 12일 병자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자, 약방과 대신(臺臣)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총재(冢宰)의 아들로서 원보(元輔)와 서로 연접(連接)한 사실이 변경진(邊景鎭)을 장전(帳殿)에서 추문(推問)할 때 남김없이 탄로났었다. 원보는 영수(領袖)가 되고 전관(銓官)은 주장(主張)하였으니,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 만약 칠실(漆室)에서 탄식하는 자가 있으면 품고 있는 생각을 진계(陳啓)함이 마땅할 것이다. 다시 입을 다문 채 잠자코 있으면 조선의 대각(臺閣)이 먼저 망할 것이다."
하고, 또 큰 소리로 말하기를,
"대신(臺臣)들이 입을 다물고 있으면 마땅히 구저(舊邸)에 가서 누워 있겠다."
하고, 중관(中官)에게 가교(駕轎)를 대령(待令)시키도록 명하였다. 대신들이 구상(具庠)을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고, 김치인(金致仁)을 정의현(旌義縣)에 안치하고, 조엄(趙曮)을 변원(邊遠)에 정배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가, 잠시 후에 김치인은 도로 정침하고, 조엄은 율(律)을 더하게 하였다. 조엄의 아우인 조정(趙晸)이 또한 삼통(三通) 가운데 들어갔었으므로, 대신(臺臣)이 이것을 가지고 조엄에게 죄를 첨가하자, 임금이 윤허하였다가 곧 계사(啓辭)가 모호하고 또 집장(執贓)할 것이 없다 하여 이 명을 도로 정침하였다. 김치인은 그 아비를 잊지 않았다 하여 역시 율을 더하게 한 명을 정침하였다.
사간 김이희(金履禧)가 아뢰기를,
"정사하기에 임하여 간선(簡選)을 청탁하였다는 말이 대신(臺臣)의 소장(疏章)에 오르기에 이르렀고, 구상(具庠)도 또한 자복(自服)하였으니, 간선을 청탁한 사람도 죄를 달리 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추조(秋曹)로 하여금 자수(自首)시키게 하여 종중 감처(從重勘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월 13일 정축
이조의 관리가 공초한 바로 인하여 전 정언 이범제(李範濟)를 구상(具庠)의 예에 의거하여 금부에서 대령(待令)하도록 명하였다.
6월 14일 무인
유언민(兪彦民)을 대사헌으로, 조덕성(趙德成)을 대사간으로, 원인손(元仁孫)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뜰에 나아가 향지영례(香祗迎禮)를 행하고, 주강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으며, 빈대(賓對)를 행하였는데, 호조 참판 신수채(辛受采)가 입시하였다. 신수채는 관서(關西)의 향족(鄕族)으로서, 70세에 명경과(明經科)에 올랐었는데, 임금이 나이가 많다고 하여 잇달아 은대(銀臺)와 아경(亞卿)에 발탁하고, 안거(安車)와 역마로 불러 오도록 하고는 면대하여 표리(表裏)121) 를 내려 주었다. 또 약삼(藥蔘)을 내려 주고 그 조카 신점(辛漸)에게 특별히 감역(監役)을 제수하게 하였으니, 은수(恩數)의 외람됨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다.
6월 15일 기묘
승지 서형수(徐逈修)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신점(辛漸)에게 특별히 감역(監役)을 제수하라는 명(命)은 진실로 마땅하지 못합니다. 진실로 국가에 큰 훈로(勳勞)가 있는 자는 그 아들과 손자에게 벼슬을 주는 일이 더러 있었지만, 신수채(辛受采)의 종질(從姪)은 나이 40이 되지 않았는데 곧바로 실직(實職)인 감역을 제수하는 것은 더욱 상격(常格)이 아닙니다. 성조(聖朝)의 은수(恩數)가 이와 같이 너무 외람된 것은 마땅하지 못한 듯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사간 조덕성(趙德成)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세도(世道)가 무너져 어지러워지고 시상(時象)이 어긋나는 것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구상(具庠)이 당류(黨類)를 주무(綢繆)하고 시론(時論)에 참섭한 것에 대해서는 그가 이미 자복(自服)하여 단서가 드러났는데, 그 정태(情態)가 가증스러웠습니다. 조가(朝家)에서 사건의 본말을 조사하여 밝히는 정사와 죄인을 주도해 제거하는 도리에 있어서, 진실로 마땅히 그 당류는 누구이며 시론은 무엇을 논한 것인지에 대해 엄중히 핵실(覈實)해서 그 죄를 분명히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런 후에야 바야흐로 뭇사람들을 깨우쳐 뒤폐단을 막을 수 있을 것인데, 마땅히 추문해야 함에도 추문하지 않은 채 앞질러 찬배(竄配)의 형전(刑典)을 가하였으니, 아마도 마땅함을 잃은 것인 듯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구상이 한 짓은 아주 해괴하게 여길 만한 일이었다. 몇 대 동안 훈척(勳戚)의 집안 사람으로서, 임금의 뜻을 생각하지 않았도다. 이동현(李東顯)의 소장(疏章)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 아비와 숙부를 배신하며 시론(時論)을 주장한 것은 이미 말할 것이 없고 그도 또한 명예를 탐내었다고 자복하였으니, 이 또한 그에 대해 단안을 내려 이미 엄중히 처분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구상은 일개 재신(宰臣)에 지나지 않으니, 비록 시론을 주장(主張)하였다 하더라도 지금 처분한 것은 훗날 저절로 소멸될 수 있겠지만, 당류를 부식(扶植)하여 사사로움을 이루고 스스로 영수(領袖)가 된 것과는 경중(輕重)이 어떻겠는가? 그런데도 그 거괴(巨魁)가 되는 자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이제 그 다음이 되는 자에 대해서 묻고 있으니, 국강(國綱)에 있어서 어찌 흠전(欠典)이 되지 않겠는가? 간장(諫長)이 된 몸으로 이런 논의를 머뭇거리며 단지 그 다음이 되는 자에 대해서만 죄를 청하고 있으니, 이것이 너의 아비가 지나간 해에 아뢰었던 것을 본받는 것인가?"
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제주(濟州)의 표류한 사람들을 불러들여 각각 쌀과 무명을 주고, 연해 고을로 하여금 돌아갈 양식을 주게 하였다.
헌납 김재록(金載菉)이 아뢰기를,
"신점(辛漸)에게 벼슬을 제수하라는 명이 은전(恩典)을 너무 외람되게 한 것이라고 여겼으면, 직분이 후원(喉院)이었던 만큼 곧바로 작환(繳還)했어야 할 것인데도 곧바로 작환하지 않고, 밖에 나아가 소장(疏章)을 올렸으니, 청컨대 승지 서형수(徐逈修)를 체직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6월 16일 경진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지영례(香祗迎禮)를 행하였다. 무덕문(武德門)에 나아가 채제공(蔡濟恭)에게 문 안의 비문(碑文)을 읽도록 명하였다. 광명전(光明殿)에 나아가 도승지로 하여금 추모 어제(追慕御製)를 불러 주어 베껴 쓰게 하였다.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예조·이조·공조의 당상을 입시하도록 명하고, 우의정 신회(申晦)·이조 판서 원인손(元仁孫)을 파직하도록 명하였는데, 대개 신회와 원인손이 일찍이 예조 당상이 되었을 때 영희전(永禧殿)을 수보(修補)할 것을 곧 계청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자 예조·이조·공조의 세 판서가 입시하였는데, 중수 영건청(重修營建廳)을 설립하도록 명하였으니, 영희전(永禧殿)에 틈이 벌어진 곳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6월 18일 임오
이최중(李最中)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대신(臺臣)을 인견하고 혜청(惠廳)에 명하여 선미(鐥米) 50석을 도감(都監)에 주어 공장(工匠)과 모군(募軍)의 점심을 주는 쌀로 삼게 하였다.
6월 20일 갑신
임희교(任希敎)를 이조 참의로, 남현로(南玄老)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6월 21일 을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자, 약방과 대신(臺臣)이 입시하였다. 대사간 남현로(南玄老)가 아뢰기를,
"전장(銓長)이 된 몸으로 우러러 성의(盛意)를 체득(體得)하지 못하여 사단(事端)이 겹쳐 발생하기에 이르렀고, 또 아들을 잘 훈육(訓育)하지 못한 죄가 있으니, 정배하는 데 그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정존겸(鄭存謙)을 그 지역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주서(注書)의 신천(新薦)을 파(罷)하고, 추천에 상응한 여러 사람들을 오늘 당후(堂后)에 모아 양원(兩院)의 예에 의거하여 권점(圈點)해서 바치게 한 다음 전조(銓曹)에서 차례로 부직(付職)하라고 명하였다.
6월 22일 병술
임희교(任希敎)를 승지로 삼았다.
호남 도신의 사장(査狀)으로 인하여 송택휴(宋宅休)를 삼수부(三水府)에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정배하도록 명하였다.
6월 23일 정해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주서 소시(注書召試)를 행하고, 하교하기를,
"충장공(忠壯公) 심대(沈岱)는 이미 자손이 있으니, 본도로 하여금 돌보아 도와 주도록 하라. 그리고 선시(宣諡)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그 봉사손(奉祀孫)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오늘 안으로 구전 부직(口傳付職)하게 하라."
하였다.
제주의 공과인(貢果人)이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8개월 만에 비로소 서울에 도착하니 임금이 불러들여 쌀과 베를 주고 고기를 먹인 다음 위유(慰諭)하여 내려보냈다.
6월 24일 무자
유성(流星)이 벽성(璧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흰 색이었다.
정창성(鄭昌聖)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이언희(李彦熙)에게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이언희는 바로 종신(宗臣) 학성군(鶴城君) 이유(李楡)의 아들인데, 학성군이 갑술년122) 에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6월 25일 기축
해조(該曹)에 명하여 경자년123) 이전의 중관(中官)에게는 의자(衣資)를, 상궁(尙宮)에게는 음식물을 내려 주게 하였다.
윤득양(尹得養)을 승지로 삼았다.
지평 이득화(李得華)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번에 주서(注書)를 추천한 데 대해 다시 권점(圈點)하게 한 것은 진실로 우리 성상께서 사람을 임용함에 있어서 편사(偏私)함이 없게 하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왔으니, 그 일을 주관하는 자는 진실로 서로서로 신중하게 간선(簡選)함이 마땅할 것인데, 도리어 전혀 신중하게 가리지 않고 뒤섞여 권점하였습니다. 신은 일체를 아울러 고쳐서 권점하고, 권점을 주관한 여러 사람들에게 견파(譴罷)의 형전(刑典)을 시행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주서의 추천에 사정(私情)을 두어 공정하지 못하다 하여, 권점(圈點)하고 소시(召試)하는 규례로 고쳐 정하여 행하게 하였었는데, 귀를 기울여 듣고서도 이득화가 이런 소장(疏章)을 올리니, 이득화를 삭직(削職)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갔는데, 왕세손이 어가(御駕)를 수종(隨從)하였다. 임금이 본전(本殿)을 중수하는 곳에 나아가 봉심(奉審)하였다.
6월 28일 임진
임금이 영희전에 있으면서 친히 환안제(還安祭)를 행하고, 영정(影幀)을 환안(還安)할 때 지영례(祗迎禮)를 행하였으며, 전(殿)에 들어가서 봉심한 후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영건청을 감독하여 영조(營造)한 세 당상에게는 각각 말을 내려 주고, 낭청과 본전의 영(令)은 승서(陞敍)하게 하였으며, 감역(監役)은 승륙(陞六)시키게 하고, 간역(看役)은 가자(加資)하게 하였다. 또 하인들에게는 쌀과 베를 제급(題給)하게 하고, 제사에 참여한 집사(執事)·승지·사관(史官)에게는 각각 상전(賞典)을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저경궁(儲慶宮)에 나아가 동구(洞口) 안에 사는 백성들에게 차등 있게 쌀을 내려 주었다.
경기 감사 심수(沈鏽)·이조 판서 이최중(李最中)을 파직하도록 명하였는데, 이조 판서는 이득화(李得華)를 대망(臺望)에 의망(擬望)하였었고, 도신은 그 현도 봉장(縣道封章)124) 을 올려보냈기 때문이었다.
도감(都監)에서 이미 중수(重修)하는 역사(役事)를 마쳤음을 고하였으므로, 신회(申晦)·원인손(元仁孫)을 아울러 서용하도록 명하고, 다시 신회를 좌의정에, 원인손을 이조 판서에 제배(除拜)하였다.
홍인한(洪麟漢)에게 경기 감사를 제수하였다. 홍인한은 홍봉한(洪鳳漢)의 아우로서, 임금이 비록 끌어 임용하려 하였으나 홍인한이 감히 출사(出仕)하지 않으니, 임금이 외직(外職)에 출보(出補)하는 예로 기백(畿伯)을 제수하고, 재촉하여 부임하게 하였다.
6월 29일 계사
임금이 저경궁(儲慶宮)에서 무덕문(武德門)에 나아가 사단(社壇)을 우러러보고, 다시 광명전(光明殿)에 나아가 어제(御題)를 써서 내린 다음 여러 신하들에게 갱진(賡進)하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지영례를 행하고, 침전으로 돌아왔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자, 약방에서 입진하고, 겸하여 빈대(賓對)를 행하였다. 예조 판서 이창수(李昌壽)가 어선(御膳)을 회복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초9일에 거행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대사간 한필수(韓必壽)가 아뢰기를,
"주서의 권점(圈點)에 든 사람 가운데 만약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으면, 이름을 들어 논척(論斥)하는 것이 오히려 옳은데도, 50명의 신진(新進)을 뒤섞어 말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을 논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신은 이득화(李得華)에게 찬배(竄配)의 형전(刑典)을 시행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하교하기를,
"신진(新進)의 젊은이들을 어떻게 어두워 알 수 없는 지경에 둘 수 있겠는가? 더욱이 모년(暮年)에 일정(一政)을 행하면서 또한 어떻게 하나의 어긋난 일로 인하여 이들을 저지할 수 있겠는가? 아무 연고 없이 권점(圈點)에 상응한 사람들은 내일 아침에 패초(牌招)해서 권점하게 하라."
하였다.
우의정 이은(李溵)이 아뢰기를,
"근래에 ‘탕평(蕩平)’ 두 글자를 기휘(忌諱)하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말인가? 남의 재능을 시기하여 배척한다[齮齕]고 하면 오히려 옳겠지만, 기휘한다고 하는 것은 심히 수상(殊常)한 말이다."
하자, 이은이 말하기를,
"근래에 이름 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배치(背馳)하는 사람이 많으니, 기휘하는 자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이미 탕평을 기휘하는 것을 알았다면, 기휘하는 사람을 어찌 모르겠는가?"
하였는데, 이은이 말하기를,
"비록 눈앞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2대를 섬긴 원보(元輔)와 여러 대 동안의 훈척(勳戚)이 되는 집안의 사람이 그 부조(父祖)가 협찬(協贊)한 공과 우리 전하의 탕평(蕩平)에 대한 성의(盛意)를 잊어버렸으니, 이것이 바로 기휘하는 무리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120권, 영조 49년 1773년 1월 (0) | 2025.10.16 |
|---|---|
| 영조실록119권, 영조 48년 1772년 10월 (0) | 2025.10.16 |
| 영조실록118권, 영조 48년 1772년 5월 (0) | 2025.10.16 |
| 영조실록118권, 영조 48년 1772년 4월 (0) | 2025.10.16 |
| 영조실록118권, 영조 48년 1772년 3월 (0) | 2025.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