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8권, 영조 48년 1772년 3월

싸라리리 2025. 10. 16.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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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병신

김재순(金載順)을 대사간으로, 조정(趙晸)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지영례(香祗迎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임금이 한성부의 사찬 단자(賜饌單子)를 보고 그 가운데 85, 6세 된 사람들 모두에게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3월 2일 정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향지영례를 행하였다.

 

임금이 승지를 보내어 태묘(太廟)·영희전(永禧殿)을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임금이 오언 이구(五言二句)를 지어서 내리고 여러 신하들에게 갱진(賡進)하도록 명하였다.

 

이석재(李碩載)를 승지로 삼았다.

 

3월 3일 무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지영례를 행하고, 이어 사옹원에 나아가 승지를 보내어 황단(皇壇)을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이어서 억석와(憶昔窩)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임금이 송풍천(誦風泉)093)  을 제목으로 삼아 대궐에 있는 여러 신하들에게 십운 율시(十韻律詩)를 지어서 바치도록 명하였다.

 

3월 4일 기해

홍검(洪檢)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지영례를 행하고, 승지를 보내어 영희전(永禧殿)을 봉심하게 하였으니, 수보(修補)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걸어서 사옹원(司饔院)에 나아갔다가 잠시 후 침전으로 돌아왔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서명응(徐命膺)에게 명하여 풍천 율시(風泉律詩)를 고사하여 뽑도록 명하고, 뽑힌 사람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려 주었다.

 

예관(禮官)을 보내어 고 의병장 조헌(趙憲)에게 이순신(李舜臣)에게 행한 예에 의거하여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3월 5일 경자

민지열(閔趾烈)을 황해 병사(黃海兵事)로 삼았다.

 

장령 윤석주(尹錫周)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 고성 현령(固城縣令) 정필신(鄭弼臣)은 3년 동안 거관(居官)하면서 불법(不法)한 일을 많이 행하였습니다. 성첩(城堞)을 수보(修補)한다고 일컬어 고을 백성들의 역가(役價)를 횡렴(橫斂)하여 사복(私腹)을 채우고, 공해(公廨)를 수리한다고 칭탁하며 전관(前官)이 영건(營建)한 것을 모두 자기의 공으로 돌리고는 몰래 수신(帥臣)에게 청탁하여 장황하게 포계(褒啓)를 올렸습니다. 봉산(封山)의 금송(禁松)을 방자한 뜻으로 외람되게 베어 판재(板材)를 많이 만든 다음 그 집으로 몰래 운반하거나 혹 폐비(嬖婢)의 집에 감추어 두었는데, 통수(統帥)가 수색하여 포착한 것이 반백(半百)에 이르도록 많았습니다. 신대현(申大顯)은 일찍이 영곤(嶺閫)을 역임하였을 때 온갖 계책으로 이익을 꾀하여 동서의 군창(軍倉)을 네 곳에 나누어 만들었으며, 창고를 영건한다고 칭탁하여 기와를 굽고 재목을 베어서 고가(高價)로 발매하였고, 이속(移粟)을 칭탁하여 분수에 넘치게 많은 수량을 백성들에게 대여하였습니다. 정필신의 일로써 말씀드리건대, 은밀히 사사로운 청탁을 받아들여 거짓 포계(褒啓)를 꾸며 올렸습니다. 신은 전 고성 현령 정필신에게 가자(加資)하라는 명을 특별히 도로 거두고, 간삭(刊削)해서 금고(禁錮)094)  하는 형전(刑典)을 시행하게 하시고, 황해 병사 신대현은 빨리 간삭의 형전을 시행하게 하시고 또한 선부(選部)로 하여금 다시 검거(檢擧)하지 말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상 좌병 우후 조성(趙)은 사람됨이 추악하고 비루하며 일을 처리함이 패려하고 망령됩니다. 일찍이 흥해(興海)를 역임하였을 때에도 추잡한 비방과 탐욕스럽다는 소문이 사방에 떠들썩하게 전파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아 비루하게 여기며 같은 반열(班列)에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였습니다. 그런데 감히 외람되게 통망(通望)할 계책을 품고 올바르지 않은 길을 뚫어 마침내 주의(注擬)받기에 이르니, 뭇사람들의 의논이 적합하게 여기지 않았고 물정(物情)이 크게 놀랐습니다. 신은 조성의 부정(副正)에 대한 통망(通望)을 빨리 개정하시고 사판(仕版)에 삭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화 유수 유언민(兪彦民)은 사폐(辭陛)한 후 대간(臺諫)의 평론이 준엄하게 일어났으나, 한번 상소하여 예사로 사양하고는 한 해가 지나도록 쭈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신은 유언민에게 파직의 형전을 시행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곤수(閫帥)는 지위가 높고 중요하여 풍문을 믿기 어려우니, 알 수 없는 죄과(罪科)에 놓아 둘 수 없는 것이다. 해부(該府)로 하여금 곧 잡아와서 처분토록 하라. 정필신이 봉산(封山)의 소나무를 몰래 벤 것도 또한 무상(無狀)한 데 관계되니, 도신으로 하여금 직접 엄중히 조사하여 계문(啓聞)하도록 하고, 조성의 일은 그대로 시행하라. 유언민의 일은 이 사람이 지금까지 성실하고, 비록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감당하여 스스로 자처(自處)하는 바가 있으니, 이제 어떻게 처분하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상참을 행하고, 이어서 주강하여 《소학(小學)》을 강하였다. 하교하기를,
"어제 밤에 개정(開政)하였을 때 상참(常參)하겠다는 명이 있었으나, 일체 사은(謝恩)하는 자가 없으므로 칙교(飭敎)한 바가 있었는데, 유신이 감히 하나의 ‘관(寬)’ 자를 들어 면계(勉戒)하였다. 내가 처음에는 유의하겠다고 예사로 답하였지만, 하번(下番)한 후 이 문의(文義)를 가지고 다시 생각해 보았더니, 이 마음이 교묘해짐을 깨닫게 되었다. 그 주달(奏達)한 것이 방자하여 한번 신칙하는 데 그칠 수 없으니, 김노순(金魯淳)·정호인(鄭好仁)을 의금부에 내려 추고(推考)하게 하라."
하였는데, 이튿날 곧 석방하게 하였으니, 대개 처분이 지나쳤음을 후회했기 때문이었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강원 감사가 장문(狀聞)하여 강릉(江陵)·춘천(春川)의 삼폐(蔘弊)에 대해 청한 일을 가지고 절미(折米) 3천여 석을 획급(劃給)하여 이 도의 도신이 재임(在任)할 때 편리한 데 따라 설시(設施)하게 할 것을 우러러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집의 송영(宋鍈)이 아뢰기를,
"오늘 강연(講筵)을 열어 문의(文義)를 아뢰도록 명하시고, 문의 때문에 유신을 죄주었으니, 마침내 허심 탄회하게 받아들이는 성덕(聖德)에 부족함이 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속이지 않을 줄 헤아리지 못하였다. 비록 내가 쇠모하지만, 이것을 듣고 그 처분을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는가? 품고 있는 생각이 치장(鴟張)에 또한 가깝지 않은가?"
하니, 송영이 피혐(避嫌)하였다. 답하기를,
"지금 기강이 해이해진 것은 오로지 시종신이 영호(營護)함으로 말미암는데, 어떻게 예사로 비답하겠는가? 아뢴 대로 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문신에게 제술(製述)을 행하고, 도로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입시해 성적을 매기도록 명하여 수석을 차지한 박서량(朴瑞良)을 특별히 승륙(陞六)시키라고 명하였다.

 

3월 6일 신축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무신 당상에게 시사(試射)를 행하였는데, 어제 문신에게 제술을 시험하였으므로, 무사의 무예를 겸하여 동독(董督)한 것이었다.

 

3월 7일 임인

임금이 이조 판서 정존겸(鄭存謙), 이조 참의 이명식(李命植)을 아울러 파직하도록 명하고, 이은(李激)을 이조 판서로, 김치양(金致讓)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그리고 새로 제수한 대사성 김종수(金鍾秀)를 특별히 해임하여 염우(廉隅)를 신리(伸理)하게 하고, 서명선(徐命善)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정존겸 등이 조정(趙晸)·김 종수·서명천(徐命天)을 대사성의 망에 주의(注擬)했었는데, 모두 신통(新通)095)  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밤에 전교(傳敎)를 내렸는데, 사지(辭旨)가 자세하였으니, 그 대강에 이르기를,
"전망(前望)이 많이 있으면, 비록 통청(通淸)이 2인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지나친데, 더욱이 전망(全望)이겠는가? 옛날에 고 상신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한번 정주(政注)096)  하여 참호(參互)하지 않는다면 폐단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내가 사복(嗣服)한 초기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고심(苦心)하던 것이었다. 누가 감히 구습(舊習)을 위해 오늘날 한번의 정사에 세 사람을 통망(通望)할 수 있겠는가? 비록 사심(私心)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외람된 통망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고, 혹 사심이 있었다면 더할 수 없이 방자한 일이다. 이 사람이 이와 같다면 내가 장차 누구를 믿겠는가?"
하고, 이어서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3월 8일 계묘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에게 말하기를,
"대사성의 망에 세 사람을 통청(通淸)한 것은 극히 잘못된 일이다. 부망(副望) 또한 경을 보고서 한 것인데, 비록 경에게 아첨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반드시 자기의 얼굴을 숨겨서 그러한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전 이조 판서        정존겸(鄭存謙)에게 사판에서 간삭(刊削)하는 형전을 시행하도록 명하였으니, 대사간을 구차하게 비의(備擬)하였고, 통례(通禮)097)                  는 외임(外任)에 급급히 주의(注擬)하기를 청했기 때문이었다. 하교하기를,
"참판 이휘지(李徽之)는 그 뜻을 가상하게 여길 만하나, 분의(分義)로 보아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시애(撕捱)하도록 일임할 수 있겠는가? 특별히 그 벼슬을 체차(遞差)하고, 그 대신 구상(具庠)을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구상은 구택규(具宅奎)의 손자로서 전혀 이력(履歷)이 없었는데, 갑자기 제수하니 물정(物情)이 답답해 하였다.

 

임금이 양사(兩司)에서는 당류(黨類)를 심고 있는 것을 보고도 규정(糾正)할 줄 모른다 하여 모두 파직시키고, 이어 육상궁(毓祥宮)에서 경숙(經宿)하였다.

 

3월 9일 갑진

윤득양(尹得養)을 대사헌으로, 홍낙명(洪樂命)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궁정(宮庭)에서 향을 전하고, 겸하여 지영례(祗迎禮)를 행하였는데, 선잠단제(先蠶壇祭)098)   때문이었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을 특별히 해면(解免)하고 아울러 겸대(兼帶)한 관직도 해면하였으며, 내국 〈도제조〉 김상복(金相福)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어제 동가(動駕)하였을 때 임금이 김치인에게 말하기를,
"옛날 대신의 체모로 논하면 반드시 정관(政官)을 추고(推考)하도록 청했어야 한다."
하니, 김치인이 대답하기를,
"이뿐만 아니라, 전부터 또한 세 사람을 통청(通淸)한 전례가 있었습니다. 대저 근래에 한편의 사람들이 편사(偏私)함이 많으므로 피차를 논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전관(銓官)이 허다한 사람들을 모두 〈통망할〉 수 없으므로 자연히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전례를 상고하도록 명하자, 김치인이 물어 볼 필요가 없다고 앙대(仰對)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처분하는 전교를 내린 것이었다. 그 대강에 이르기를,
"몇 십년 동안 탕평(蕩平)에 고심(苦心)해 왔는데,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감히 구습(舊習)을 부리고 있으니, 또한 무슨 마음인가? 내가 비록 쇠모하지만 그 태도를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통청하기에 급급하여 1망에 세 사람을 통청하였는데, ‘그 임금이 있는데 어떻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미 처분하였는데 이제 어떻게 다시 논하여 미봉하고자 하겠는가?’라고 한 전례가 있으니, 어찌 선상신(先相臣)이 모년(暮年)에 절실히 부탁한 뜻을 생각한 것이겠는가?"
하였다.

 

홍검(洪檢)에게 이조 참의를 특별히 제수하였는데, 참판과 참의가 모두 패초(牌招)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아, 서용하지 않는 형전을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조중회(趙重晦)를 참판으로, 임희교(任希敎)를 참의로 삼았는데, 홍검과 임희교는 모두 이력(履歷)이 없었는데, 갑자기 청현직(淸顯職)을 제수하니, 식자(識者)들이 근심하였다.

 

3월 10일 을사

임금이 환궁(還宮)하여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대신과 2품 이하의 백관(百官)이 절하기를 마치자, 임금이 친히 선유문(宣諭文)을 지어 반고(頒告)하고 나서 동반(東班)·서반(西班)에게 나와서 각각 품고 있는 생각을 진달하도록 명하였다. 유신 김노순(金魯淳)·정호인(鄭好仁)·조재준(趙載俊)·조영진(趙英鎭) 등이 아뢰기를,
"1망(一望)에 세 사람을 통청(通淸)한 것은 실로 극히 잘못된 일입니다마는, 또한 어찌 한 사람 때문에 일세(一世)를 뒤섞어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아서 임금이 대신(大臣)을 영호(營護)한다 하여 아울러 사판에서 간삭(刊削)하고 김노순 등을 삼수(三水)에 찬배(竄配)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그나머지 3품 이하 가운데 말하지 않은 자와 응명(膺命)하지 않은 양사(兩司)의 사람들을 아울러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뜰에 들어온 사람으로 특별히 대직(臺職)을 제수하고, 재촉하여 앞으로 나오게 하자, 대사헌 한광회(韓光會)·대사간 이득배(李得培) 등이 아뢰기를,
"일전에 정주(政注)에서 1망에 세 사람을 통청한 것은 물정(物情)에 어긋난 것입니다. 하순(下詢)하는 즈음에 대신이 주대(奏對)하며 우리 성상께서 50년 동안 고심해 오신 바를 체득하지하지 못하고, 많은 말을 늘어 놓으며 미봉하려는 뜻이 있었으니, 국체(國體)에 있어서 상직(相職)을 해면하는 데 그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영부사 김치인을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윤허하였다가, 삭직(削職)하도록 명을 고쳤다. 한광회 등이 인혐(引嫌)하자 체차하도록 허락하였다.

 

조영진(趙榮進)을 대사헌으로, 이휘지(李徽之)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11일 병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자,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잇달아 탕제(湯劑)를 물리친 지 4일이 되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굳게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왕세손이 지극한 정성으로 도달(導達)하고 몸소 탕제를 받들어 나아가니, 임금이 감격해서 기뻐하며 비로소 진어(進御)하였다.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사책(史策)에 쓰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의 번뇌가 점점 심해져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많이 내리자, 대신들이 아뢰기를,
"원컨대 성려(聖慮)를 지나치게 허비하지 마시고, 아랫사람을 진압할 도리를 생각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의 차대(次對)에서는 경들의 거조(擧措)를 살펴보고자 하니, 경들은 자리에 나아가도록 하라."
하고, 단지 대신(臺臣)으로 하여금 먼저 앞으로 나오게 하였다. 대사간 이휘지(李徽之)가 김치인(金致仁)과 처남 매부지간의 인척이 되어 합사(合辭)에 참여하기 어렵다고 하여 인혐(引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사홍(任士洪)은 곧 주계군(朱溪君) 심원(深源)의 고모부였지만, 〈주계군이〉 오히려 탄핵(彈劾)하였으니, 이것은 경중(輕重)이 뚜렷이 다른 것이다. 어찌 이것뿐이겠는가? 설령 다른 사람이 매부(妹夫)가 나라를 그르치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면 처남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의리가 분명한 것이니, 사양하지 말고 또한 물러가 기다리지 말라."
하였는데, 이휘지가 대략 진계(陳啓)하고 두 번째 인혐하니, 임금이 잇달아서 엄교(嚴敎)를 내리기를,
"누구의 아들이기 때문에 유독 장강(張綱)099)  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단 말인가? 어찌 한 가지 일에 있어서 두 번이나 인피(引避)하여, 다시는 아뢰지 못하도록 하는가?"
하니, 이휘지가 두려워하여 위축되어 부복하매, 조영진(趙榮進)이 혼자 아뢰기를,
"직임(職任)이 원보(元輔)에 있으니 의지하여 믿는 바가 어떠하였겠습니까? 그 주대(奏對)하는 바가 몹시 개연(慨然)하여 성은(聖恩)을 저버린 채 뚜렷이 엄호(掩護)하는 말을 늘어놓았으니, 삭직(削職)하는 데 그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김종수(金鍾秀)를 대사성의 망(望)에서 발거(拔去)하고, 전 대사헌 한광회(韓光會)에게 특별히 삭직(削職)의 전형(典刑)을 시행하도록 명하였으니 합계(合啓)하면서 〈계사(啓辭) 가운데의〉 여러 행(行)을 미봉(彌縫)하였기 때문이었다.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여덟 글자로 하교하셨는데, 이것은 결단코 봉승(奉承)할 수 없습니다."
하고, 승지 민백흥(閔百興)·서유린(徐有隣)은 말하기를,
"신들이 조금 전에 겨우 작환(繳還)하였는데, 또 정원(政院)에 하교하셨으니, 신들은 결단코 봉승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며, 대사헌 조영진(趙榮進)·대사간 이휘지(李徽之)는 말하기를,
"신 등은 여덟 글자로 하교하신 것을 비로소 들었는데, 이는 한 사람이 바친 것이 아니라 곧 나라 사람들이 바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것을 물리치십니까? 어찌 중도에 매우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억양(抑揚)하는 말이다."
하니, 좌의정 한익모(韓翼暮)·우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만약 환수(還收)하신다는 윤허를 받지 못한다면, 여러 신하들이 범분(犯分)하는 죄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3월 12일 정미

심이지(沈頤之)를 승지로 삼았다.

 

3월 14일 기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뜰에 나아가 향지영례(香祗迎禮)를 행하고, 승지를 보내어 태묘(太廟)를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이어서 주강을 행하여 《소학(小學)》을 강하고는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영남의 과혼(過婚)·과장(過葬)에 대한 계본(啓本)을 보고 하교하기를,
"처(妻)를 얻은 자와 지아비를 얻은 자에 대해 서울에서는 사부(士夫)가 아닌 경우 1년을 한정하여 역을 면제해 주고, 향리에서는 사부가 아닌 경우 금년을 한정해서 군역(軍役)을 면제해 줄 것이며, 공천(公賤)·사천(私賤)으로서 비(婢)라고 이름하는 경우에도 또한 금년을 한정해서 부역을 면제해 주도록 하라. 과장(過葬)의 경우에는 사서(士庶)를 논하지 말고 제사지낼 수 있는 자는 물론, 주인이 없는 경우에도 경향(京鄕)에 명하여 관(官)에서 주과(酒果)를 주도록 하고, 동임(洞任)으로 하여금 일체 전(奠)드리게 하라."
하였다.

 

서회수(徐晦修)를 승지로 삼았다.

 

전 판서 홍중효(洪重孝)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무릇 여러 치부(致賻)는 서울의 예에 의거하여 본목(本牧)에서 거행하도록 하라. 제문(祭文)을 지어서 내릴 것이니, 본 목사로 하여금 곧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3월 15일 경술

월식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자,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대제학 서명응(徐命膺)으로 하여금 응제시(應製詩)를 고사(考査)하게 하고, 선발된 사람에게 각각 지필묵(紙筆墨)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임금이 서명응이 아뢴 바로 인하여 본관(本館)에서 활자를 주조(鑄造)하는 일을 간검(看檢)하도록 명하였다.

 

3월 17일 임자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시사(試射)하였다. 그리고 명나라 사람의 자손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려 주고, 전득우(田得雨)에게 특별히 한 자급 더하여 중추(中樞)를 부직(付職)하였다.

 

집의 이시정(李蓍廷)이 계청(啓請)하기를,
"국자장(國子長)의 신통(新通)은 공의(公議)를 크게 어긴 것입니다. 정사에 참여한 전 판서 정존겸(鄭存謙)과 전 참의 이명식(李命植)을 청컨대 삭출(削黜)하소서."
하니, 임금이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정세주(鄭世柱)를 흑산도(黑山島)에 정배(定配)하고, 그 아들과 사위는 청현직(淸顯職)을 허락하지 못하게 하도록 명하였다. 정세주는 일찍이 영원 군수(寧遠郡守)로 있으면서 환곡(還穀)을 발매(發賣)한 것이 5천 금에 이를 만큼 많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관서백(關西伯)이 논죄(論罪)하기를 장청(狀請)하였으므로, 임금이 왕부(王府)로 하여금 잡아 추문(推問)하게 하여 여러 번 형신(刑訊)을 가하였다. 그러나 정세주가 공초한 것이 끝내 명백하지 않아 드디어 작처(酌處)하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그 후 대신(臺臣)이 잇달아 아뢰어 쟁집(爭執)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8일 계축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명나라 사람의 자손들에게 쌀을 내려 주고, 15세 이상으로 미혼(未婚)인 사람에게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혼수(婚需)를 도와 주도록 하여 제때 혼인할 수 있게 하였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가 김노순(金魯淳)을 특별히 방면(放免)하도록 명하였으니, 고 충신 김상용(金尙容)의 후손이기 때문이었다. 하교하기를,
"내일이 어떤 날인가? 해동(海東)에 오늘이 있는 것은 고 충신의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 상신 김상용·김상헌(金尙憲)의 집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삼학사(三學士)의 집에도 예관을 보내어 치체하게 하라. 제문은 지어서 내리겠다. 두 상신의 손자들은 모두 직명(職名)이 있는데, 삼학사의 봉사손(奉祀孫) 가운데 직명이 없는 자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과궐(窠闕)이 있다면, 오늘 안에 구전(口傳)으로 부직(付職)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어제(御製) 1구를 내리어 여러 신하들에게 갱진(賡進)하도록 하고, 이어서 유숙(留宿)하였다.

 

3월 19일 갑인

임금이 새벽에 근정전(勤政殿) 구기(舊基)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고, 승지를 보내 대보단(大報壇)을 봉심하게 하였다. 그리고 명나라 사람의 자손과 척화(斥和)한 사람들의 자손을 소견하였다.

 

3월 20일 을묘

장령 원계영(元啓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북을 매달아 놓고 등문(登聞)하게 한 것은 대개 민은(民隱)을 살피고 억울함을 신설(伸雪)한다는 뜻에서 나왔으니, 이것은 진실로 성상께서 옛 성덕(聖德)을 본받으신 것입니다. 다만 근래에는 민심이 교악(巧惡)해져서 구허 날무(構虛捏無)하는 것이 풍습이 되어 반드시 진위(眞僞)를 현란(眩亂)시키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이로 인하여 수령을 체차하거나 파직하는 경우가 전후에 서로 잇달고 있습니다. 만약 수령이 죄과(罪科)를 범한 것이 진실로 등문(登聞)한 말과 같으면, 조정에서는 징려(懲勵)하는 방도에 있어 진실로 엄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격고(擊鼓)한 자의 말이 함해(陷害)하는 뜻에서 나왔는데, 그 간계(奸計)를 적중시킨다면, 이는 훗날의 폐단이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풍속을 교화하는 데 크게 관계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기사관(記事官)을 추천하는 법은 반드시 신중함을 더해야 하는 것인데, 주천(注薦)에 이르러서는 집안에서 각각 천거한다고 들은 듯합니다. 신은 고례(古例)가 혹 이와 같은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사실(私室)에서 공천(公薦)하는 것은 자못 신중하게 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한결같이 한원(翰苑)의 예에 의거하여 반드시 공청(公廳) 가운데에서 회천(會薦)하는 것을 영구히 정식(定式)으로 삼음이 진실로 사체(事體)에 합당합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맨 먼저 진계한 일은 그 말이 옳으니, 내가 마땅히 유의하겠다. 주서(注書)를 추천하는 일은 이것이 전해져 내려온 고규(古規)인데, 이제 어떻게 이것을 고치겠는가? 옛날 그대로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헌납 이형원(李亨元)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주자(朱子)가 이르기를, ‘예로부터 붕당(朋黨)을 물리치고자 하는 경우 사람과 나라를 망하지 않게 함이 없었다.’ 하였으니, 어찌 나라에서 마땅히 경계하여 체득(體得)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로지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고 어진 사람을 어질다 하고 나쁜 사람을 나쁘다 하여 덕을 헤아려 지위를 맡기고 재능을 헤아려 직분을 맡기되, 죄가 있는 자는 벌을 주고 잘한 것이 있는 자는 상을 주어 양쪽을 지극히 공명하게 하여 피차(彼此)를 함께 잊는다면 인물이 각각 인물에 적합할 것이니, 어찌 붕사(朋私)의 근심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아니하여 피차를 견주어 헤아려 먼저 색목(色目)을 나누고 의망(擬望)하는 사이에 이른다면, 반드시 마음을 쓰는 것이 뒤섞여 누런 것을 추려내고 하얀 것으로 대신 함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군자는 그 뜻을 행할 수 없고, 소인은 그 사사로움을 용납하게 되어 피혐(避嫌)할 자취를 돌아보며 부정한 사람에게 비위를 맞추어 아부할 것이니, 또한 다시 어떻게 나라에 도움이 있겠습니까? 아! 저 전관(全官)이 일시에 부응했던 것은 칙교(飭敎)가 지극히 엄중한으로 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차라리 견벌(遣罰)을 받을지언정 끝내 명에 응하지 않는 사람에 견준다면 피차 사양하고 받음이 의리에 합당한지는 식견이 있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분변(分辨)될 것입니다. 더욱이 임희교(任希敎)는 인망(人望)이 본래 경박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일찍이 장오(贓汚)의 무거운 죄과(罪科)를 범하여 어사(御史)의 논계(論啓)에 올라 한 해가 넘도록 절도(絶島)에 정배되기에 이르렀으니, 염치없는 행기(行己)와 봉공(奉公)의 무상함은 오래 되었다 하여 용서하기 어려울 것인데, 어떻게 천관(天官)의 좌이(佐貳)를 삼아 인물을 진퇴(進退)시킬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간개(刊改)의 형전을 시행해서 관방(官方)을 맑게 해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조종(祖宗)의 제도를 본받아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셨습니다마는, 단지 세도(世道)가 점점 쇠퇴해져 민속(民俗)이 많이 거직되어 한편에서 꾸민 말은 또한 준거하여 믿기 어렵습니다. 수령과 감사가 된 자가 만약 사사로움을 좇아 공정함을 버린다면, 죄주거나 태거(汰去)하는 것이 무슨 아까울 바가 있겠습니까마는, 만약 혹시라도 사실과 달리 토민(土民)이 관장(官長)을 쫓으려고 간계(奸計)를 부린 경우라면, 산관·구관을 맞이하고 보내는 폐단은 물론 그 폐단이 흘러 반드시 명리(命吏)를 업신여기고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데 이를 것입니다."
하였다.

 

정언 유강(柳焵)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에 김치인(金致仁)이 죄를 받은 것은 진실로 우리 성상께서 50년 동안 붕당(朋黨)을 없애려는 고심(苦心)에서 나왔으니, 합사(合辭)를 일으켜 누가 감히 이론(異論)을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휘지(李徽之)에 이르러서는 인친(姻親)의 관계가 있으므로, 마땅히 피혐(避嫌)하여 결단코 의논하는 데 참여할 수 없는 것인데도, 전하께서는 억지로 논계(論啓)하게 하셨으니, 이미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비록 이휘지가 자처(自處)하는 도리로써 말하더라도 오직 의리를 끌어대어 스스로 다스리어 죄받기를 기필해야 할 것인데, 한번 으레 인혐(引嫌)하고는 곧 무릅쓰고 의논에 참여하였으니, 풍속(風俗)을 돈후(敦厚)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일이 지났다 하여 버려 둘 수 없습니다. 신은 견파(譴罷)의 형전(刑典)을 시행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충량과(忠良科)를 설행(設行)하였다. 그리고 망배례(望拜禮)에 수종하여 참여한 척화(斥和)한 사람들의 자손을 시취(試取)하였는데, 수석을 차지한 김이용(金履鏞)에게 급제를 내렸다. 이 과거의 설행은 갑신년100)  부터 시작한 것이었다.

 

지평 유항주(兪恒柱)가 아뢰기를,
"윤태연(尹泰淵)은 간사하고 망령되며 비루하고 패려한 자로서, 복건(幅巾)을 쓰고 나귀를 탄 채 아침부터 저녁까지 출몰하며 장임(將任)을 얻기를 꾀하였습니다. 청컨대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신이 된 몸으로 복건을 쓰고 나귀를 탔으니, 더욱 극도로 한심하다. 이에서 그칠 수 없으니, 내가 마땅히 엄중히 추문(推問)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처남 매부는 비록 의(義)로 맺어졌다고 할 수 있으나, 매부는 처남과 다른 것입니다. 지난번에 간장(諫長) 이휘지(李徽之)는 이미 합사(合辭)의 의논을 알았으면, 마땅히 의리를 끌어대어 나아가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죄를 받기로 작정하고는 경솔하게 나아가 숙배(肅拜)하고 마침내 따라서 참여하기에 이르렀으니, 의리를 지켜 처신한 것이 마침내 미안(未安)한 데 관계되었으므로 견책(譴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삭직(削職)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관계되는 것이 어떠하며,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한때의 규정(糾正)하는 일에 견줄 것이 아닌데, 배척하고 있으니 진실로 이상하구나."
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윤태연(尹泰淵)을 잡아들이게 하였다. 임금이 나귀를 타고 복건(幅巾)을 쓴 일에 대해 물으니, 윤태연이 발명(發明)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재상의 말[言]을 위조(僞造)하여 순서를 뛰어넘어 명환(名宦)의 자리를 얻은 일이 너에게 있었느냐?"
하니, 윤태연이 말하기를,
"신은 일찍이 도감(都監)의 당하인 천총(千摠)을 지냈었는데, 고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연중(筵中)에서 이 말을 꺼내어 전갈(傳喝)하러 다녔던 사람 김도증(金道曾)을 추조(秋曹)에서 엄중히 추문하였는데, 신은 소석(昭釋)되고 김도증은 정배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장오(李章吾)에게 묻기를,
"이 사람이 어떠한가?"
하자, 이장오가 말하기를,
"비방이 많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홍양한(洪良漢)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전 판서 이창수(李昌壽), 전 참판 이담(李潭), 전 참의 권도(權噵)에게 서용하지 않는 형전을 시행하도록 명하였으니, 이형원(李亨元)을 통청(通淸)한 일에 대해 납언(納言)하였을 당시에 정관(政官)이었기 때문이었다.

 

하교하기를,
"이휘지(李徽之)를 엄중히 신칙한 나머지 대의(大義)로서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인데, 어제 소장(疏章)을 올리고 오늘 아뢰어 은연중에 보복하려 하니, 단지 김치인(金致仁)만을 위하고 그 임금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형원(李亨元)이 전말(顚末)을 숨기고 있어 흐릿하여 분간하기 어려운데, 그 마음을 구명해 보면 은연중에 붕당(朋黨)을 추종하는 자이다. 유항주(兪恒柱)가 아뢴 것은 그 마음의 소재를 길 가는 사람도 모두 아는 것이니, 모질 뿐만 아니라 전과 같지 않다. 국자장(國子長)이 그 계교가 이미 낭패(狼狽)하였으므로, 감히 무신(武臣)을 분격하게 만들어 당습(黨習)을 부리고자 하였으면, 마땅히 먼저 막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 군부(君父)를 배신하여 그 붕당을 심고자 하였다. 김치인(金致仁)은 직산현(稷山縣)에 부처(付處)하고, 이형원(李亨元)은 회양부(淮陽府)에 투비(投畀)하도록 하라. 유항주(兪恒柱)는 임금에게 거짓을 고하였으니, 그가 어떻게 감히 사피(辭避)할 수 있겠는가?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여 방축(放逐)하도록 하라. 유강(柳焵)이 지금 논한 것이 어찌 특히 이 휘지뿐이겠는가? 이것은 가볍고 저것은 무겁다. 방자함이 이와 같으니 흑백을 같은 색으로 하고 얼음과 숯불을 서로 섞은 것과 같다. 특별히 사판에서 간삭(刊削)하는 형전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1일 병진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지영례를 행하였다.

 

평안 감사를 파직하고 서명응(徐命膺)으로 대신하게 하였는데, 비국에 보고한 말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운유(鄭運維)를 도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자,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세 대신이 함께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김종수(金鍾秀)가 봉행(奉行)하여 징토(懲討)하기를 청한 것과 윤시동(尹蓍東)이 임금의 뜻에 영합(迎合)한 것은 그 마음이 한 꿰미에 꿰뚫은 듯 똑같은 것이다. 이로써 살펴보건대 또한 청당(淸黨)인 것이다. 유강(柳綱)·유항주(兪恒柱)는 그 이름을 아름답게 여겨 그 세력을 붙좇은 것인데, 그 형세가 진실로 그러한 것이다. 이형원(李亨元)은 그 말이 흐릿하지만 그 뜻은 무한한 것이다. 본래 그 붕당은 모두 그 이름을 아름답게 여겨 섞여서 한 붕당을 이루는 것이니, 엄중히 막아서 뒤폐단을 막아야 한다. 어떻게 처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러 사람들을 처음에 처분한 것도 또한 너무 가벼웠다. 한광회(韓光會)는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고, 유강은 추자도(楸子島)에, 유항주는 흑산도(黑山島)에, 김종수는 기장현(機張縣)에 투비(投畀)하고, 윤시동은 갑산부(甲山府)에 투비하도록 하라. 김치인(金致仁)은 이미 처분을 가하였으니, 정존겸(鄭存謙)은 회양부(淮陽府)에, 이명식(李命植)은 장연현(長淵縣)에 투비하여 한 붕당을 세 군데에 흩어 놓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명류(名類)는 방자한 뜻으로 이 붕당에 의탁하려 하였으니, 고모부와 처남 매부는 경중(輕重)이 어떻겠는가? 이 뜻은 미원장(薇垣長)에게 달려 있거늘 그 마음이 교사(巧詐)하여 비답을 정지하고 하순(下詢)하였는데도 상신(相臣)은 잗단 일로 간주하였다. 아! 저 미원장이 옛날부터 청했었단 말인가? 칙교(飭敎)를 내려서 도헌(都憲)을 따르게 하였다면, 그가 어찌 감히 이같이 할 수 있었겠는가? 그 마음은 백세에도 똑같을 것이다. 지난번에 문에 임어하여 물었을 때에는 잠자코 있다가 이제 붕당에 붙좇아 방자한 뜻으로 권세를 농락하니, 내가 어떻게 차마 주(周)나라의 난왕(赧王)과 한(漢)나라의 헌제(獻帝)처럼 암군(暗君)이 될 수 있겠는가? 유항주(兪恒柱)는 무당(武黨)의 전조(銓曹)를 양성하고자 하였는가?"
하였다.

 

채제공(蔡濟恭)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저 지엽적으로 붙좇은 자들을 모두 엄중히 처분하였는데, 하물며 그 근본과 와주(窩主)에 있어서이겠는가? 부처(付處)는 너무 가벼우니, 김치인(金致仁)을 해남현(海南縣)에 원찬(遠竄)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잇달아 탕제(湯劑)를 물리치고 진어(進御)하지 않았는데, 채제공(蔡濟恭)이 한 첩(貼)을 진어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이 노인 〈김치인(金致仁)〉에게 붙좇고 있는데, 경의 마음은 그렇지 않으니, 내가 마땅히 이것을 마시겠다."
하였다.

 

3월 22일 정사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쇠모(衰耗)하지만, 당인(黨人)은 보고 싶지 않다. 유언호(兪彦鎬)를 속히 내보내도록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김치인(金致仁)이 비록 무상(無狀)하다 하나, 이런 때에는 김 봉조하(金奉朝賀) 【김재로(金在魯).】 를 더욱 잊을 수가 없다. 제문(祭文)을 지어서 내릴 것이니,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의 시종(侍從)의 당상관과 당하관들을 모두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근일의 당론(黨論)이 옳았는지 여부와 처분이 어떠하였는가에 대해 물으니, 모두 지극히 엄정(嚴正)하여 흠앙(欽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우러러 아뢰었다. 임금이 정환유(鄭煥猷)에게 묻기를,
"이것은 청론(淸論)인가, 시체(時體)인가?"
하니, 정환유가 말하기를,
"이것은 청론에 동요되고 또한 시체에 동요된 것인데, 청론·시체 또한 모두 부박(浮薄)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임관주(任觀周)가 전후에 임금에게 고한 것이 두 사람과 판연히 같다 하여 서용하지 않는 형전(刑典)을 시행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비록 속임을 당해 거짓으로 응하였다 하더라도 관계되는 바가 막중하니, 《정원일기(政院日記)》 하단에 모두 그 이름을 기록하도록 하라. 이후 이형원(李亨元) 등이 작용(作俑)한 것은 마땅히 기군 망상(欺君罔上)한 뜻으로 직접 묻겠다."
하였다.

 

3월 23일 무오

윤득우(尹得雨)·윤면승(尹勉升)·조종현(趙宗鉉)·송재희(宋載禧)·김이주(金頤柱)·정환유(鄭煥猷)를 승지로 삼았다.

 

3월 24일 기미

임금이 신료(臣僚)들을 접견하지 않고 정원(政院)에 명하여 단지 민사(民事)에 관계된 것만 받아들이도록 하니, 내국의 여러 신하들이 대부분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밤새도록 합문(閤門)을 지킨 채 입시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자,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영진(趙榮進)은 당초에 아뢰면서 미봉(彌縫)하여 모두 그 임금으로 하여금 이목(耳目)의 일을 행하게 하였으니, 사체(事體)가 한심하게 여길 만하다. 특별히 서용하지 않는 형전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고, 정광충(鄭光忠)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대사간 이해중(李海重) 등이 아뢰기를,
"김치인(金致仁)은 우리 성상께서 50년 동안 고심(苦心)한 바를 체득(體得)하지 않은 채 붕당을 심어 사사로움을 이루었습니다. 스스로 청류(淸流)라고 일컬으며 일종의 부박(浮薄)한 무리를 부르자 다투어 서로 붙좇았는데, 그가 세도(世道)를 어지럽히며 나라를 저버리고 선조를 망각한 죄를 논한다면 원찬(遠竄)하는 데 그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정의현(旌義縣)에 천극(栫棘)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형원(李亨元)은 삼수부(三水府)에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정배하게 하고, 정존겸(鄭存謙)은 북청부(北靑府)에, 이명식(李命植)은 박천군(博川郡)에 원찬(遠竄)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니, 대신이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와 같은데도 수수 방관(袖手傍觀)하고 있으니, 대신에게 어찌 상직(相職)만 해면(解免)하고 그칠 수 있겠는가? 김상복(金相福)·한익모(韓翼謨)·김상철(金尙喆)에게 아울러 서용하지 않는 형전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정홍순(鄭弘淳)은 공교롭게 좋지 않은 때를 당하여 감히 모략(謀略)을 썼으니, 특별히 서용하지 않는 형전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그 신하를 위해 엄변록(嚴卞錄)를 만들었는데, 하물며 세도(世道)를 위해 고심(苦心)하는 것을 보이는 데 있어서이겠는가? 오늘 받아들인 것을 모두 운각(芸閣)에 내려 하교(下敎)를 첫머리에 두고, 직차(職次)에 따라 아울러 기록해서 활자(活字)로 인출(印出)하여 이름을 《영수백세록(永垂百世錄)》이라 하고, 청렴한 자, 명망이 있는 자, 시속에 따르는 자로 하여금 모두 우주(宇宙)의 사이에서 소융(消融)하게 하고, 또한 나라의 일을 맡고 있는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이것을 보고 징계하여 삼가게 하라."
하였다. 여러 시종(侍從)들을 명소(命召)하였는데, 나아가 엎드리자 종이와 벼루를 나누어 주게 하였다. 모두 받으니 스스로 독주(讀奏)하게 하였다.

 

이중호(李重祜)를 대사간으로, 이시정(李蓍廷)을 집의로, 이만육(李萬育)을 사간으로, 남주로(南柱老)를 헌납으로, 임희간(任希簡)·홍빈(洪彬)을 정언으로, 홍낙항(洪樂恒)을 지평으로 삼았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이태정(李台鼎)을 잡아들이게 한 다음 파직(罷職)하여 방송(放送)하게 하고, 민정렬(閔鼎烈)은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게 하였으며, 조정상(趙貞相)은 장기현(長鬐縣)에 정배하게 하고, 유언호(兪彦鎬)는 흑산도(黑山島)에 서민(庶民)을 삼게 하고, 변경진(邊景鎭)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곤장 1백 대를 때려 남해현(南海縣)에 영구히 충군(充軍)하게 하며, 송취행(宋聚行)은 삭직(削職)하여 방송하게 하고, 조명업(曹命業)은 방송(放送)하게 하였는데, 여러 사람들이 품고 있는 생각을 사실대로 아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3월 25일 경신

이창의(李昌誼)를 우의정으로 삼았다.

 

3월 26일 신유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자,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다시 김치인(金致仁)을 남해현(南海縣)에 안치하고, 천극 도사(栫棘都事)를 소환하라고 명하니, 임금이 고 상신 김재로(金在魯)에게 음식을 내려 주었던 일을 생각해서였다. 정존겸(鄭存謙)의 아들을 영구히 서민(庶民)을 삼아 사류(士類)에 끼지 못하게 하도록 명하였는데, 변경진(邊景鎭)이 공초에 ‘정존겸의 아들이 항상 김치인을 청류(淸流)라고 이른다.’고 했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게 된 것이다.

 

3월 27일 임술

우의정 이창의(李昌誼)를 해면(解免)하였다. 임금이 이창의가 연중(筵中)에서 이은(李激)을 파직할 것을 청하여 그 뜻에 적중시키려 하므로, 이런 명이 있었다.

 

신회(申晦)를 좌의정으로, 이은(李激)은 우의정으로, 송형중(宋瑩中)을 대사헌으로, 이득배(李得培)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명사강목(明史綱目)》을 친히 받고는 배진(陪進)한 당상 서명응(徐命膺)에게 숙마(熟馬)를 면대하여 주고, 감인관(監印官) 이창임(李昌任)을 가자(加資)하고, 교정관(校正官)을 승서(陞敍)하고, 사자관(寫字官) 이하 원역(員役) 등에게 차등 있게 상(賞)을 내려 주었다. 이보다 앞서 청나라 사람 주인(朱璘)의 일로 인하여 이현석(李玄錫)이 찬집한 《명사강목(明史綱目)》을 불태우도록 명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간행(刊行)하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주강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이택수(李澤遂)에게 송라 찰방(松羅察訪)을 제수하고 3일 길을 하루에 걸어 부임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이택수가 지금 정사(呈辭)한 것을 가지고 그 아비 이언형(李彦衡)이 아들을 잘못 가르친 것이라 하여 또한 파직하였다.

 

임금이 양사(兩司)의 여러 신하들을 일체 삭직(削職)하도록 명하였다.

 

구상(具庠)을 이조 참판으로, 홍검(洪檢)을 이조 참의로, 이창임(李昌任)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자, 대신(臺臣)들이 입시하였다. 대사헌 송형중(宋瑩中)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김치인(金致仁)을 그전대로 천극(栫棘)하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8일 계해

서명응(徐命膺)을 이조 판서로, 윤동섬(尹東暹)을 평안 감사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자, 유신(儒臣)과 대신(臺臣)이 함께 입시하였다.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여 김치인(金致仁)을 전대로 배소(配所)에 천극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응교 이병정(李秉鼎) 등을 아울러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도록 명하였는데, 여러 사람들이 모두 서울에 있으면서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득신(李得臣)을 교리로, 홍상간(洪相簡)을 수찬으로 삼았다.

 

도배(島配)한 죄인 장택하(張宅夏)를 베었다. 장택하가 병부(兵符)를 위조한 것으로써 대계(臺啓)에 여러 달 동안 쟁집(爭執)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이득배(李得培)를 곧 그 지역에 정배하도록 명하였다. 이득배가 양근(楊根)에 있으면서 대간(臺諫)에 제배(除拜)된 후 곧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3월 29일 갑자

이보관(李普觀)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자, 삼사(三司)에서 입시하였다. 합계(合啓)하여 김치인(金致仁)을 전대로 정의현(旌義縣)에 천극(栫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빨리 그만두어 번거롭게 하지 말라."하였다.

 

3월 30일 을축

안겸제(安兼濟)·임정원(林鼎遠)을 승지로 삼았다.

 

전 영상 김상복(金相福), 전 좌상 한익모(韓翼謨), 전 우상 김상철(金尙喆)을 서용하도록 명하였다.

 

만윤(灣尹) 황최언(黃最彦)을 파직하고, 서장관 이택진(李宅鎭)을 금부(禁府)에 회부하도록 명하였다. 금각(禁角) 때문에 붙잡힌 일을 만윤이 장문(狀聞)하면서 착오가 있었는데, 서장관이 만부(灣府)에 일임하여 이러한 거짓 보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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