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을미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지영례(香祗迎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판위(板位)로 내려가 부복하여 구주(口奏)하기를,
"24자의 존호(尊號)를 지금 후회하고 있는데, 만약 여덟 자를 더하면 신이 어떻게 감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한 자호(字號)에 한 잔의 술을 받는다면, 이것은 오르내리시는 영령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흥화문(興化門)에서 땅에 엎드리자, 여러 신하들이 자리에 오르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버려 두라. 스스로 고뇌(苦惱)하여 존호(尊號)를 속죄하려는 것뿐이다."
하고, 잠시 후에 침전으로 돌아갔다. 당시에 성수(聖壽)가 79세로 임어(臨御)한 지 49년이 되었고, 곤전(坤殿)이 재위한 지 15년이 되었는데, 뭇 신하들이 존호를 더하고 잔치를 베풀어 진하(陳賀)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겸양하여 굳게 거절하니, 상하가 서로 버티며 날마다 이것을 일로 삼았었다. 그래서 이날 이렇게 구주(口奏)하는 일이 있게 된 것이었다.
임금이 종부시(宗簿寺)에 나아갔다가, 걸어서 규장각에 나아가 봉심(奉審)한 후 이어서 보각(譜閣)에 전배(展拜)하였다. 다시 대청(大廳)에 나아가 본시(本寺)의 제조를 인견하여 선생안(先生案)을 읽도록 명하고, 친히 종신(宗臣)들에게 강독(講讀)을 시험한 다음 제조 이하 원역(員役) 등에게 각각 차등 있게 상을 내려 주었다. 손수 시 1구를 쓰고 여러 신하들에게 갱진(賡進)하도록 명하였다. 옛날 임진년111) 임금이 잠저(潛邸)에 있었을 때 종부 도제조가 되었었는데, 이제 구갑(舊甲)이 다시 돌아온 것도 또한 드물게 있는 경사라 하여 본시의 제조가 진찬(進饌)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태강(太康)을 깊이 경계하고, 또 대단한 가뭄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다. 이날 추모(追慕)로 인하여 왕세손과 함께 본시에 나아간 것이었다. 이어서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승지에게 어제(御製)를 쓰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여(輿)에서 내려 뜰 가운데에서 부복하였는데, 여러 대신들과 유신들이 번갈아 힘껏 간청하니, 밤이 깊어 환궁(還宮)하였다.
5월 2일 병신
심이지(沈頤之)를 승지로 삼았다.
이조의 세 당상이 즉시 개정(開政)하지 않는다 하여 아울러 서용하지 않는 형전(刑典)을 거행하게 하고, 특별히 민백흥(閔百興)에게 이조 참판을 제수하였다.
5월 3일 정유
이조 참판 민백흥(閔百興)이 또 시애(撕捱)하니,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고, 구익(具㢞)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임금이 전 관서백(關西伯) 구윤옥(具允鈺)이 아뢴 바로 인하여 박천 군수(博川郡守) 전광렴(田光濂)이 진휼(賑恤)을 잘했다 하여 특별히 가자(加資)하게 하였다.
임금이 관서 도신에게 자비전(自備錢)을 5만 냥이 넘지 않도록 하라고 엄중히 신칙하였다.
5월 4일 무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뜰에 나아가 향지영례(香祗迎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주강하여 《소학(小學)》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쇄소(灑掃)하고 응대(應對)하는 것은 잗단 일인 듯하나, 바로 《소학(小學)》의 근기(根基)이다."
하였다.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아뢴 바로 인하여 단오 물선(端午物膳)을 전례에 의거하여 바치도록 허락하였다.
특별히 조엄(趙曮)에게 대사헌을 제수하고, 심관(沈鑧)에게 대사간을 제수하였다.
임금이 비풍(匪風)·하천장(下泉章)을 외우고, 억석와(憶昔窩)에 나아갔다.
5월 5일 기해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상참례(常參禮)를 행하고, 이어서 주강하여 《소학(小學)》을 강하였다.
심욱지(沈勗之)를 승지로 삼았다.
내의(內醫) 허온(許溫)의 처(妻)가 그 지아비의 천첩(賤妾)을 투기(妬忌)하여 참형(慘刑)을 많이 썼으므로, 흑산도(黑山島)에 정배하도록 명하고, 허온은 내국에서 이름을 간삭(刊削)하게 하였다. 그리고 해청(該廳)의 행수(行首)와 삼청(三廳)의 행수 또한 서용하지 않는 형전을 시행하게 하였는데, 허온과 같은 원(院)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여 종사(從事)했기 때문이었다.
대사헌 조엄(趙曮)이 패초(牌招)를 어겼으므로, 서용하지 않는 형전을 시행하도록 명하고, 정운유(鄭運維)로 대신하게 하였다.
이조 참판 구익(具㢞)이 패초(牌招)를 어겼으므로, 민백흥(閔百興)의 예에 의거하여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게 하고, 특별히 조중회(趙重晦)에게 이조 참판을 제수하고, 서명선(徐命善)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5월 6일 경자
박상덕(朴相德)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지영례를 행하고, 하교하기를,
"한 나라의 영수(領袖)인 총재(冢宰)가 아들을 사환(使喚)하였다는 것이 변경진(邊景鎭)의 공초에서 탄로되었는데도, 이목(耳目)의 신하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듯이 하고 있도다. 설령 대간 거특(大奸巨慝)이 있어서 나라 일을 그르친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이목의 신하들을 보건대, 또한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달라서 세 통망(通望) 가운데 수망(首望)이었는데, 원보(元輔)와 총재로 더불어 같은 마음이었다. 개연(慨然)하게 여겨 하교하였는데도 근거없는 말을 많이 늘어놓았으므로, 강개(慷慨)한 생각이 가슴속에 뻗쳤으나 향(香)을 전함으로 인하여 이에 지식(止息)되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비록 패초(牌招)를 어긴다 하더라도 이 사람은 결단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과연 이것이 본래의 병통이 되었다. 어찌하여 가마 탄 것을 가지고 여러 차례 차대(次對)에서는 거론하지 않다가, 유독 도헌(都憲)을 특별히 제수한 때에 거론하는 것인가? 비록 내가 쇠모하다 하나, 어찌 이 사람에게 속겠는가? 오늘 본부의 계사(啓辭)는 거의 공의(公議)가 민멸(泯滅)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으므로 그 마음을 가상하게 여기나, 날마다 대각(臺閣)에 나아가기는 어렵다. 도헌 정운유(鄭運維)를 특별히 해면(解免)하고 그 대신에 송형중(宋瑩中)을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당시에 정운유가 조엄(趙曮)을 삭직(削職)해서 문외 출송(門外黜送)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이창임(李昌任)을 승지로 삼았다.
5월 7일 신축
심이지(沈履之)를 대사성으로, 서명응(徐命膺)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벼슬을 제수받고도 숙배(肅拜)하지 않은 사람들을 잡아들이게 하여 엄중히 하교한 다음 잡아 나가도록 하였는데, 헌납 이득신(李得臣) 또한 숙배를 조금 늦게 하였다 하여 잡아들이게 하고, 하교하기를,
"네가 김치인(金致仁)·조엄(趙曮)을 두려워하여 그러는가?"
하자, 이득신이 말하기를,
"합계(合啓)에 제일 먼저 참여하였으니, 무엇을 돌아볼 것이 있겠습니까? 집이 성 밖에 있으므로, 입궐(入闕)이 조금 지체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참작하여 방면하였다.
이중호(李重祜)를 이조 참판으로, 송형중(宋瑩中)을 승지로, 유언술(兪彦述)을 대사헌으로, 정운유(鄭運維)를 지의금(知義禁)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5월 9일 계묘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지영례를 행하고, 이어서 사옹원(司饔院)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大學)》을 강하고, 억석와(憶昔窩)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홍인한(洪麟漢)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송영(宋鍈)을 장기현(長鬐縣)에, 신대수(申大脩)를 기장현(機張縣)에 투비(投畀)하도록 명하였으니, 통례(通禮)로서 곧 출숙(出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5월 10일 갑진
정언 민항렬(閔恒烈)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언관(言官)은 중직(重職)이므로 패초를 기다려 들어와서 숙배(肅拜)하는 것이 고례(古禮)입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사은 숙배하는 것을 지체하였다 하여 죄로 삼아 궐정(闕庭)에 잡아와서 중죄(重罪)로 다스리시니, 성명(聖明)께서 전에 없던 일이 있을 줄 어찌 헤아렸겠습니까? 또 종전에 격뇌(激惱)하셨을 때에는 잡아들이는 즈음에 문득 금추(禁推)하는 예를 인용하시고, 뭇 신하들을 겸제(鉗制)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대저 이와 같으므로 후원(喉院)과 삼사(三司)의 신하들도 또한 모두 예규(例規)로 보고 한마디 광구(匡救)하는 말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상하가 서로 좇아서 이와 같이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자중(自重)하는 선비들이 발을 싸고 뒷걸음쳐서 감히 다시는 대단(臺端)에 나아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하교하기를,
"오늘 비가 내리려 하다가 내리지 않아서 나의 마음이 불안한데, 마침 김치인(金致仁)의 당류가 이르러 승지와 유신을 쫓아내려 하니, 이것은 그 임금을 고립(孤立)시키는 것이다. 그 마음이 탄로났으니 민항렬은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여 방축 향리(放逐鄕里)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황단(皇壇)을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명나라 사람의 자손과 척화한 사람들의 자손들에게 입시하도록 명하였는데, 삼공(三公)·구경(九卿)이 모두 참배(參拜)하였다. 대신과 여러 재신(宰臣)들에게 말을 내려 주는 은전을 시행하게 하였는데, 이날이 곧 명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예척(禮陟)한 날이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인하여 도총부에 거둥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임금이 민항렬(閔恒烈)의 상소로 인하여 격노(激怒)해서 곧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감에 호령이 엄중하여 위의(威儀)조차 갖추지 않으니, 시위하는 신하들이 넘어지며 걸어서 뒤따랐다. 임금이 어필(御筆)로 ‘두문성건(杜門省愆)’ 네 글자를 써서 내리고 궁문(宮門)에 붙여서 굳게 닫도록 하였는데, 늦은 후에 승선(承宣)이 작환(繳還)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여러 재신(宰臣)들을 소견하였는데, 삼사(三司)와 약방(藥房)에서 탕제(湯劑)를 진어(進御)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다시 말하기를,
"민통수(閔通洙)의 손자가 지금도 기세를 부려 내가 임금이 된 것을 지리(支離)하게 여기고 있다."
하였다.
5월 11일 을사
임금이 일한재(日閑齋)에 나아갔다. 시임 대신·원임 대신, 내국의 2품 이상이 입시하여 또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들이 만약 고집한다면 장차 연융대(鍊戎臺)에 나아가겠다."
하였다.
장악 정(掌樂正) 김용겸(金用謙)에게 가자(加資)하도록 명하고, 이어서 오위 장(五衛將)을 제수해서 그로 하여금 구저(舊邸)에서 사은(謝恩)하게 하였는데, 김상헌(金尙憲)의 후손이기 때문이었다.
홍양한(洪良漢)·안겸제(安兼濟)·이세택(李世澤)·박서량(朴瑞良)을 승지로 삼았다.
5월 12일 병오
임금이 환궁(還宮)하였다. 흥화문(興化門)·개양문(開陽門) 두 문의 부장(部將)에게 명하여 금관자(金貫子)·옥관자(玉貫子)를 단 자는 모두 출입을 금하게 하되, 승지는 금하지 말게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니, 여러 승지들이 구대(求對)하였다. 임금이 정상인(鄭象仁)을 갑산(甲山)에, 윤면승(尹勉升)을 삼수부(三水府)에 찬배(竄配)하도록 명하였다. 정상인 등이 아뢰기를,
"대신(大臣)이 수문장에게 쫓겨난 경색(景色)이 처량하였으니, 국체(國體)를 손상시킨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크게 격뇌(激惱)를 더하여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수문장을 잡아들이게 하고, 대신을 쫓아낸 까닭을 묻자, 수문장이 대답하기를,
"대신은 애당초 온 적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구축(驅逐)’ 두 자는 후세에 전할 수 없는 것이므로 억지로 전좌(殿座)에서 일어났는데, 과연 이런 일이 없었다고 하니, 이것은 그 임금을 협박하는 뜻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고, 이어서 사흘 길을 하루에 걸어 압송하도록 명하였다. 또 존호(尊號)를 받지 않는 까닭을 다 말하면서 이은(李溵)이 고집하는 것은 매우 그르다 하니, 또 이은을 직산현(稷山縣)에 부처(付處)하도록 명하였다.
5월 13일 정미
구익(具㢞)·민백순(閔百順)·유훈(柳薰)을 승지로 삼았다. 윤면승(尹勉升)은 90세의 어머니가 있다 하여 찬배하게 한 하교를 도로 정침하고, 정상인(鄭象仁)도 또한 석방하게 하였다.
조종현(趙宗鉉)을 승지로 삼았다.
5월 14일 무신
박사해(朴師海)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함평 현감(咸平縣監) 신익빈(申益彬)을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도록 하였는데, 육상궁(毓祥宮)의 세곡(稅穀)을 미처 다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집의 권영(權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동가(動駕)하여 경숙(經宿)하시며 탕제(湯劑)를 물리친 지 오래 되었으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대신(大臣)은 탕제를 진어(進御)하고 회란(回鑾)하시라는 뜻을 정성을 다해 말해야 할 것인데, 수규(首揆)112) 는 차자를 올려 대수롭지 않게 스스로 허물을 끌어대고는 마침내 한마디 말도 잘못을 바로잡는 뜻이 없으니, 신은 가만히 개연(慨然)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승지 박서량(朴瑞良)은 지처(地處)가 한미한데, 갑자기 특별히 발탁하셨습니다. 비록 큰 은혜는 지망(地望)을 가리지 않는다는 성의(聖意)에서 나왔으나, 마침내 임관(任官)을 어렵게 여긴다는 뜻에 어긋나니, 신은 개정(改正)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뜰에 나아가 향지영례(香祗迎禮)를 행하고, 다시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주강을 행하고 이어서 빈대(賓對)하였다.
심이지(沈履之)·서유녕(徐有寧)을 승지로 삼았다.
5월 15일 기유
윤동승(尹東昇)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청명당(淸名黨)의 지친(至親)을 어떻게 감히 도백(道伯)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특별히 호서백(湖西伯) 민백분(閔百奮)을 체차(遞差)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민백분은 곧 민항렬(閔恒烈)의 지친이기 때문이었다.
5월 16일 경술
신대현(申大顯)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자, 약방과 대신(臺臣)들이 입시하였다. 동몽 교관에게 동몽들을 데리고 입시하도록 명하고, 《소학(小學)》을 시강(試講)하고는 지필묵(紙筆墨)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5월 17일 신해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상참을 행하고, 이어서 조강하여 《소학(小學)》을 강하였다.
5월 18일 임자
임금이 과중한 전교를 내리자, 정원(政院)에서 반포하지 않은 까닭에 여러 승지들이 혹 삭직되거나 혹은 체차되었다. 윤득우(尹得雨)·이수봉(李壽鳳)·이흥종(李興宗)·임정원(林鼎遠)·김이주(金頤柱)를 승지로 삼았다.
5월 19일 계축
정상순(鄭尙淳)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복궁(景福宮) 교태전(交泰殿) 옛터에 나아가 부복(俯伏)하고, 이어서 문소전(文昭殿)의 옛터에 나아갔다. 회란(回鑾)하다가 경회지(慶會池)에 이르러 소척(疏滌)하는 것을 살폈는데, 전부터 가물 때에 경회지를 소척하면 비의 응험(應驗)이 있었으므로 임금이 친히 소척하는 것을 독려하였는데, 대개 가뭄을 근심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국초에 원묘(原廟)의 예(禮)를 본받아 문소전(文昭殿)을 구궐(舊闕) 가운데에 따로 세워서 향사하게 하였었는데, 전쟁 때 불탄 이후 단지 기지(基址)만 있으니, 임금이 친히 나아간 것도 또한 성효(聖孝)의 추모(追慕)하는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5월 20일 갑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전향례(傳香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태조(太祖)께서 동향(東向)하신 것은 무슨 뜻에서인가?"
하니,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생기(生氣)를 받는 방향을 취한 것인데, 태조께서 동향하시니 ‘소남 목북(昭南穆北)’이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하고, 판부사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문소전의 기지도 또한 동쪽에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야 희미하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하였다.
5월 21일 을묘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친히 적전(籍田)113) 의 모맥(牟麥)을 받은 후 탕제(湯劑)를 진어(進御)하고 침전(寢殿)으로 돌아갔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월대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大學)》을 강하고, 이어 빈대(賓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향민(鄕民)을 소견하고 민사(民事)와 물가[市直]에 대하여 하순하였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승지에게 어제(御題)를 필사하도록 명하였다.
5월 22일 병진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의 서무(西廡)에 나아가 약방과 대각(臺閣)에 나아간 대신(臺臣)을 소견하였다.
5월 23일 정사
하교하기를,
"몇백 년 후에 전(殿)의 터를 얻고 오늘 비를 얻게 되었는데, 이것은 누가 내려 준 것이겠는가? 마땅히 구궐(舊闕)에 나아가 시임 대신·원임 대신·구경(九卿), 정1품 종신(宗臣)·도위(都尉)와 더불어 강녕전(康寧殿)의 옛터에서 전배한 전례에 의거하여 예(禮)를 펴고 올 것이니, 충자(沖子)도 함께 패초(牌招)하여 어가를 수종(隨從)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지영례(香祗迎禮)를 행하였다. 이어서 경복궁(景福宮) 문소전(文昭殿)의 옛터에 나아가 사배(四拜)하고, 호조에 명하여 전(殿)의 터에 비(碑)를 세우게 하고, 어필(御筆)로 ‘문소전 옛터에 임진년 5월에 세우다.’고 써서 내렸다. 임금이 어가를 돌려 의정부에 들러 상신(相臣)과 참찬(參贊)에게 선생안(先生案)을 바치게 하였다. 안궤(案几)에 두니, 임금이 친히 본 후에 하교하기를,
"도총부·종친부·주원(廚院)의 예에 의거하여 청(廳) 북쪽에 장궤(藏櫃)를 설치하여 봉안(奉安)하되, 이제부터 시임(時任)은 다시 선생안을 수정(修正)하도록 하라."
하였으니, 대개 광묘(光廟)114) 가 영의정이 되었었으므로, 본안(本案)에 어휘(御諱)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구전(舊殿)의 기지(基址)를 찾아온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연춘문(延春門)·연추문(延秋門)·신무문(神武門)의 동·서·남·북의 방민(坊民)들에게 금년을 한정해서 부역을 면제해 주도록 하라."
하고, 드디어 회란(回鑾)하였다.
5월 24일 무오
임금이 가뭄을 근심하여 탕제(湯劑)를 진어(進御)하지 않았다.
5월 25일 기미
임금이 대신을 남교(南郊)에, 중신(重臣)을 북교(北郊)에 보내어 기우제(祈雨祭)를 행하게 하고, 제문(祭文)을 친히 지어서 내렸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이어서 빈대(賓對)하여 이은(李溵)을 석방하도록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의 거조(擧措)는 진실로 두루 살피지 못한 것이었지만, 그 마음은 임금을 사랑한데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바야흐로 가뭄을 근심하여 소석(疏釋)하는 때가 되었는데, 더욱이 대관(大官)이겠는가? 특별히 석방하고 여러 재신(宰臣)들 또한 아울러 서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내국에서 탕제(湯劑)를 진어(進御)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비가 오지 않으면 상선(常膳)도 물리치겠다."
하였다. 제조(提調)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백성이 중요합니까, 종사(宗社)가 중요합니까? 전하께서 스스로 가볍게 여기시는 것은 종사를 가볍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탕제를 진어하고, 말하기를,
"제조의 말에 감동하였지만, 진실로 백성을 위하는 뜻은 아니다."
하였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 지영례(祗迎禮)를 행하였다. 휘장을 거두도록 명하고, 예(禮)를 행한 후 억석와(憶昔窩)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삼경(三更)에 다시 연화문 밖에 나아가 오랫동안 부복(俯伏)하고 있다가, 원리(院吏)에게 명하여 남대문(南大門)에 나가서 사사(祀事)의 예(禮)를 마쳤는지의 여부를 알아가지고 들어오게 하였다. 해가 뜰 무렵에 침전(寢殿)으로 돌아왔다.
5월 26일 경신
이세택(李世澤)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선전관에게 명하여 금고(金鼓)에 나아가 연인손(延仁孫)을 잡아들여 가삽 삼잡(假揷三匝) 후에 영종진(永宗鎭)에 충군(充軍)하도록 하였다. 연인손이 공초하기를,
"오늘 녹봉(祿俸)을 받았으나, 상별감(上別監)에게 빼앗겼으므로, 신문고(申聞鼓)를 쳤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후 사건사(四件事)115) 가 아니면, 이 북을 울리지 못하게 하라. 그래도 북을 울 리는 경우 사서(士庶)를 가리지 말고 엄중히 세 차례 추문(推問)하여 해도(海島)에 충군(充軍)하게 하라. 혹 조정세(趙靖世)의 아들과 같은 자가 있으면, 비록 사건(四件)에 관계되어 토주(土主)를 신문(申聞)한 자라 하더라도 또한 이 율(律)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조정세가 대각(臺閣)의 탄핵(彈劾)을 받았는데, 그 아들이 신문고를 울렸기 때문이었다.
이한풍(李漢豊)을 경상 우병사로 삼았다.
5월 27일 신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주강하여 《소학(小學)》을 강하였다. 이어서 향지영례를 행하고, 친히 사직단(社稷壇) 기우제의 제문을 지었다. 향민(鄕民)을 명소(命召)하여 농사 형편에 대해 하순(下詢)하였다. 밤이 되어서 임금이 자극문(紫極門)에 나아가 부복(俯伏)하고는 사사(社祀)가 잘 이루어졌음을 알렸는지 알아 오도록 명한 다음에 침전으로 돌아왔다.
5월 28일 임술
임금이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가 사서인(士庶人)을 불러 품고 있는 생각을 물어 보았는데, 문경인(聞慶人) 민우룡(閔宇龍)은 조령(鳥嶺)에 성을 쌓아 불우(不虞)에 대비할 것을 청하고, 서강(西江)에 사는 절충(折衝) 정태항(鄭泰恒)은 향곡(鄕曲)의 양반의 폐단과 해서(海西)에서 당선(唐船)을 쫓는 폐단을 진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모년(暮年)에 가뭄을 근심하여 문에 임어하였는데, 칠실(漆室)에서 독서(讀書)한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마는, 저 두 사람 외에는 들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 그 또한 개연(慨然)한 일이다. 유자(儒者)라 일컫는 자는 청명(淸名)에 불과한데 시체(時體)에 붙좇고 있으니, 이것은 누가 시킨 것인가? 그 임금이 평소에 잘 거느려 인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목마른 때에 우물을 찾은들 어찌 우물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개연하게 여기는 까닭이다."
하였다.
사간 권영(權穎) 등이 절용(節用)할 도리에 더욱 진념(軫念)하고,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진휼(賑恤)하여 구제할 방책을 미리 강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5월 29일 계해
판부사 이은(李溵)에게 다시 우의정을 제배(除拜)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자,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대각(臺閣)에 나아가니, 대신(臺臣)들이 입시하였다. 김선(金煊)을 승진시켜 첨지를 삼게 하였다. 김선은 호남인(湖南人)인데, 헌납으로서 입시하여 나주 목사(羅州牧使) 송택휴(宋宅休)의 탐학(貪虐)한 실상을 논했었다. 또 선부(選部)에서 관리를 제수함에 있어서 관직을 위해 사람을 가리는 도리가 아니며, 도백(道伯)의 전최(殿最)는 단지 세력이 없는 사람으로 구차하게 중하(中下)에 채우는 폐단을 논했었다. 또 반드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엉뚱한 사람에게 분노를 풀지 않는다는 훈계를 생각하고, 연빙(淵氷)의 경계에 진념(軫念)하여 풍뢰(風雷)의 공효(功效)를 거두고, 실심(實心)에 힘쓰고 실정(實政)을 행하여 중화(中和)에 이르고 위육(位育)에 이르게 할 것을 청하였었는데, 임금이 특별히 한 자급을 더하여 가장(嘉奬)하는 뜻을 보인 것이었다. 해부(該府)로 하여금 송택휴를 잡아오게 하였다. 권영(權穎)도 또한 한 자급을 더하게 하였는데, 권영이 문에 임어하였을 때 진계(陳啓)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창관(倉官)을 소견하고, 올해에 이미 받아들인 세미(稅米)의 수에 대해 하순(下詢)하였다.
5월 30일 갑자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지영례(香祗迎禮)를 행하고, 이어서 경복궁(景福宮)에 나아갔다.
홍성(洪晟)·심이지(沈頤之)·이창임(李昌任)·김선(金煊)·권영(權穎)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문소전(文昭殿)의 구기(舊基)에 나아가 새로 세운 비각(碑閣)을 봉심(奉審)하고, 구궐(舊闕)의 차지 중관(次知中官)과 어가(御駕)를 수종(隨從)한 장번(長番) 이하에게 각각 상을 내려 주었다. 역사(役事)를 감동(監董)한 호조 판서 이사관(李思觀)에게 가자(加資)하고, 호조 낭청 이현철(李顯喆)·정일환(鄭日煥)을 승서(陞敍)하였으며, 감역(監役) 남현로(南顯老)를 승륙(陞六)하게 하고, 부장청 위장(衛將)을 조용하게 하였으며, 원역(員役)·공장(工匠)에게 쌀과 베를 제급(題給)하게 하였다. 또 어가를 수종한 부련군(扶輦軍), 무예청 금군 및 각색 군병들에게 내일 시사(試射)·시방(試放)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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