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8권, 영조 48년 1772년 4월

싸라리리 2025. 10. 16. 11:46
반응형

4월 1일 병인

김기대(金器大)를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광은(礦銀)으로 팔포(八包)101)  를 채워서 가지고 가는 것을 엄중히 금하도록 명하였다.

 

4월 2일 정묘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자,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민백순(閔百順)을 승지로 삼았다.

 

4월 3일 무진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자, 대신(大臣)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치인(金致仁)의 일은 어찌 괴이하지 않겠는가? 지위가 부족하였는가, 제우(際遇)가 부족하였는가? 그 조카들이 동요한 바에 어지럽게 될 수 있어서 이렇게 된 것이니, 내가 매우 애석하게 여긴다."
하였다.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근일에 매번 수수 방관(袖手傍觀)한다고 하교하시니, 신 등은 황송하여 등에 땀이 흐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이 한 것에 대해 좌상과 우상이 어떻게 면박(面駁)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4월 4일 기사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예의(隷儀)를 행하고, 이어서 주강하여 《소학(小學)》을 강하였다. 임금이 다시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두포(杜浦)의 유하정(流霞亭)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날을 가리지 말고 예관(禮官)을 시켜 곧 수보(修補)하게 한 후 복명(復命)하도록 명하였다. 유하정은 곧 의안 대군(義安大君)이 유람하던 곳인데, 또한 조종조(祖宗朝) 때 하룻밤 임금이 잔 방이 있으므로, 임금이 감회가 일어나서 수보하게 한 것이었다.

 

4월 5일 경오

임금이 유하정(流霞亭)에 나아갔는데, 단지 비국 당상만 어가(御駕)를 수종(隨從)하였다. 회란(回鑾)할 때 관왕묘(關王廟)에 들렀고, 또 저경궁(儲慶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4월 7일 임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지영례를 행하였다. 그리고 광명전(光明殿)에 들러 차비 소속(差備所屬)에게 쌀을 내려 주고, 다시 전설사(典設司)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4월 8일 계유

다시 김상복(金相福)에게 영의정을 제배(除拜)하고, 박상덕(朴相德)을 이조 판서로, 엄숙(嚴璹)을 대사헌으로, 남현로(南玄老)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9일 갑술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주강하여 《소학(小學)》을 강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김치인(金致仁)이 범한 것은 조재호(趙載浩)보다 더한 것이었다."
하니, 좌의정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지금 부박(浮薄)함이 날로 더하여 조정이 궤열(潰裂)되고 있으므로, 김치인은 마땅히 진압했어야 하는데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또 좇아 부범(負犯)하였으니, 지위가 높은 자로서 책임을 크게 잃은 것입니다."
하였다.

 

4월 10일 을해

임금이 북한산성(北漢山城)의 행궁(行宮)에 나아가 시단봉(柴丹峰)에 올랐다가, 날이 저물어 환궁(還宮)하였다. 북한산성은 도성의 북쪽에 있는데, 산이 높고 험준하고 가파라서 성궁(城宮)을 쌓아 진양(晉陽)102)  의 불우(不虞)에 대비하게 하였었다. 옛날 임진년103)   4월에 우리 숙묘(肅廟)께서 어가(御駕)를 타고 임어하여 친히 살펴보신 적이 있었는데, 이날 동가(動駕)한 것은 추모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남해(南海)·거제(巨濟)·웅천(熊川)에 사는 백성들이 해물과 생선을 채취하여 먹고 혹 중독되어 죽기에 이른 것을 도신이 장문(狀聞)하니, 어주(御廚)에 지공(支供)하지 말고, 백성들이 채취해서 먹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4월 11일 병자

도둑이 대낮에 도성에서 포교(捕校)를 죽였는데, 해청(該廳)에서 붙잡으니, 처음에는 효시(梟示)하도록 명하였다가, 대계(臺啓)로 인하여 정형(正刑)하였다.

 

하교하기를,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서장대(西將臺)는 곧 지나간 해에 올라갔던 곳인데, 그후 각(閣)을 세웠으니, 어찌 이것뿐이겠는가? 빛나게 의리를 드러낸 것도 또한 이곳이다. 지나간 해에 올라갔던 단(壇)에 어제 임어하였으니, 나의 마음에 감회가 일어나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경리청(經理廳)으로 하여금 높게 하는 데 힘쓰지 말고 각(閣)을 세우게 하라."
하였다.

 

4월 12일 정축

유언술(兪彦述)을 대사헌으로, 심발(沈墢)을 대사간으로, 정여증(鄭汝曾)을 황해 수사로 삼았다.

 

임금이 가뭄이 오래 되었다 하여 당상관을 목멱산(木覓山)·삼각산(三角山)·한강(漢江)에 보내어 기우제(祈雨祭)를 행하게 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동쪽 뜰에서 친히 향과 축문을 보내고, 자정문(資政門)에 나아가 향지영례(香祗迎禮)를 행하였다. 이어 걸어서 숭정문(崇政門)에 나아가 어제(御製)를 불러서 쓰게 하고, 다시 숭정전 동쪽 월대(月臺)에 나아가 조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엄숙(嚴璹)을 대정현(大靜縣)에 천극(栫棘)하도록 명하였다. 당시에 대신(臺臣)이 날마다 김치인(金致仁)에게 율(律)을 더하기를 청하였는데, 엄숙이 도헌(都憲)으로서 입시하여 진짜 청류[眞淸]와 가짜 청류[假淸]의 말을 하였으니, 대개 김치인을 가짜 청류(淸流)에 돌리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뢰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금이 진노하여 엄숙이 그 붕당에 붙좇고 있으면서 힘써 토죄하기를 청한다 하여 빨리 천극하도록 명하고, 입시한 삼사(三司)의 신하들도 아울러 체차(遞差)하게 하였다.

 

삼강 어사(三江御史) 조영진(趙英鎭)이 복명(復命)하여 아뢰기를,
"삼강에서 술을 파는 것이 낭자(浪藉)하여 10여 항아리를 양조해 둔 자가 있기에 이르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부관(部官)에게 명하여 달려가서 삼강 사람들과 서부(西部)의 사람으로 선조를 위해 제사를 지내거나 어버이를 위해 헌수(獻壽)하는 자에게 두루 주게 하였다.

 

4월 13일 무인

임금이 오랫동안 가물었다 하여 대신과 추조(秋曹)의 당상을 소견하여 소결(疏決)의 정사를 행하고, 오늘부터 보리가 익을 때까지 한정하여 감선(減膳)104)  하도록 명하였다. 대사헌 유언술(兪彦述)이 김종수(金鍾秀)를 절도(絶島)에 정배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4월 14일 기묘

중신(重臣)을 보내어 용산강(龍山江)·저자도(楮子島)에서 기우(祈雨)하게 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향지영례를 행하고, 이어서 주강을 행하였다.

 

4월 15일 경진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유언술(兪彦述)이 아뢰기를,
"북성(北城)에 거둥하였다가 회란(回鑾)하였을 때 관성장(管城將) 구현겸(具顯謙)이 지영(祗迎)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삭직(削職)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비가 내렸다 하여 당상관을 보내어 보사제(報謝祭)를 행하도록 명하고, 기우(祈雨)한 헌관(獻官) 이하에게 각각 상이 있었다.

 

4월 16일 신사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지영례(香祗迎禮)를 행하고, 이어서 주강하여 《소학(小學)》을 강하였다. 동몽 교관(童蒙敎官)에게 명하여 동몽을 거느리고 입시하게 하였다.

 

4월 17일 임오

왕손(王孫)에게 하교를 전하여 감하(減下)하고, 관례(冠禮)를 기다려 다시 주의(注擬)하도록 명하였다.

 

4월 18일 계미

임금이 빈객(賓客)에게 신칙(申飭)하여 상견례(相見禮)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관서(關西)와 관동(關東)의 도신이 눈비가 내렸다고 장문(狀聞)하였다.

 

4월 19일 갑신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추조 당상(秋曹堂上)에게 형옥 문안(刑獄文案)을 가지고 들어오도록 명하고, 사죄인(死罪人) 6명을 감등(減等)하여 도배(島配)하게 하였으니, 오랜 가뭄 때문이었다.

 

4월 21일 병술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자, 약방에서 입진하고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들이 입시하였는데, 단오의 물선(物膳)을 모두 정봉(停封)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유신에게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가지고 입시하도록 명하고, 문의(文義)를 강하였다. 이어서 문음(文蔭)인 당하관들에게 모두 입시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지금의 가뭄은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인가? 양대(兩代)를 섬긴 원보(元輔)가 죄를 받은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나에게는 중도에 지나친 잘못이 없고, 그에게는 또한 억울한 단서가 없었는가?"
하자, 모두 대답하기를,
"처분은 지극히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김치인(金致仁)은 죄줄 수 있지만 용서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였는데, 유독 전 군수 조정세(趙靖世)가 말하기를,
"원보의 죄는 진실로 무겁게 감단(勘斷)함이 마땅하지만, 김종수(金鍾秀)는 죄명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신은 처분이 지나쳤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것이 절실하다."
하고, 조정세를 우직(右職)에 조용(調用)하도록 명하고, 인하여 김종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임금이 자인(慈仁)의 사인(士人) 곽오(郭墺)가 5백 석의 곡식과 1천 냥의 돈으로 백성들을 구제하였다는 것을 듣고, 전조(銓曹)에 명하여 상당한 벼슬을 주고 곧 현주 조용(懸註調用)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에 월대(月臺)에서 아뢴 것은 주서(注書)로 하여금 먼저 아뢴 다음에 기록하여 대대로 영구히 전하게 하라."
하였다.

 

4월 22일 정해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주강하여 《소학(小學)》을 강하고, 대신(臺臣)들을 소견하여 입시한 여러 대신(臺臣)들을 삭직하라 명하였는데, 특별히 김종수(金鍾秀)를 석방하였는데도 대신들이 쟁집(爭執)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잇달아 엄교(嚴敎)를 내리고, 유신들도 또한 규경(規警)하지 않았다 하여 또 체차하도록 명하였으며, 김종수를 석방하고 조정세(趙靖世)를 조용하라는 명을 도로 정침(停寢)하였다. 하교하기를,
"그 숙질(叔姪)을 두려워하여 마땅히 혐의스럽게 여겨야 하는데도 혐의스럽게 여기지 않고, 마땅히 쟁집(爭執)해야 하는데도 쟁집하지 않은 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듯 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고 있다. 내가 만약 진압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임금이 비록 쇠모하나, 태아(太阿)105)  는 그래도 가지고 있다."
하고, 이어서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내가 장차 비가 온 후에야 돌아가겠다."
하였다.

 

4월 23일 무자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의 이안와(易安窩)에 나아가니, 세 상신이 입시하였다. 대령(待令)하는 향민(鄕民)을 소견하여 우택(雨澤)과 농사 형편에 대해 하순(下詢)하고, 이어서 환궁(還宮)하였다. 연추문계(延秋門契) 거민(居民)에게 보리가 여물기 전까지 특별히 부역을 면제해 주어 기쁜 뜻을 보이도록 명하였다.

 

헌납 곽진순(郭鎭純)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에 대망(臺望)이 한번 나왔는데, 늙어 쇠잔하여 세력이 없는 사람이 아닐 것 같으면 향곡(鄕曲)의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운 무리입니다. 신과 같이 느른하고 쇠잔하여 여러 번 시험해 보아도 보잘것없는 무리를 비의(備擬)하여 숫자만 채우고 있습니다. 청컨대 이조 판서 박상덕(朴相德)을 파직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먼저 사직한 후 사람을 논하는 것이 옳은데 이렇게 하지 않았고, 그 거의(擧擬)한 데 대해서만 분개하여 그 사람을 배척하기에 이르렀으니, 염치를 면려(勉勵)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도리에 있어서 엄중히 처분하지 않을 수 없다. 특별히 삭직(削職)의 형전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4일 기축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에게 입시하도록 명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탕제(湯劑)를 진어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다시 태양을 보았는데, 무슨 마음으로 탕제를 마시겠는가?"
하고, 이어서 걸어서 억석와(憶昔窩)에 나아갔다.

 

4월 25일 경인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약원 제거(藥院提擧)와 영상·우상을 소견하였다. 당시에 임금이 잇달아 2일 동안 탕제(湯劑)를 진어(進御)하지 않았으므로, 약원 및 대신(大臣)들이 합문(閤門)을 지키며 구대(求對)하니, 임금이 들어오도록 허락하고 인하여 빈대(賓對)를 행하였다.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평안 감사의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귀성(龜城)의 여러 가지 환곡(還穀)을 번작(反作)106)  하여 허록(虛錄)한 것과 무자년107)  ·기축년108)  ·경인년109)  의 3년 동안의 모곡(耗穀)을 탕감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말하기를,
"충자(沖子)가 음식을 물리치고 있어, 부득이 탕제를 진어하는 것이다."
하였다.

 

특별히 임희증(任希曾)에게 헌납을 제수하게 하였다. 임희증이 정언으로서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재해(災害)를 그치게 하고 백성을 구휼하는 도리는 더욱 신린(臣隣)을 연접(延接)하여 조용히 자문(諮問)함으로써 교수(交修)의 의리를 다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이러한 명이 있었다.

 

4월 26일 신묘

심이지(沈履之)를 대사헌으로, 이세택(李世澤)을 대사간으로, 원인손(元仁孫)을 이조 판서로, 구익(具㢞)을 도승지로 삼았다.

 

4월 27일 임진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도위(都尉)를 보내어 효장묘(孝章廟)·의소묘(懿昭廟)에 치제(致祭)하도록 명하고, 제문(祭文)을 지어서 내렸다.

 

4월 28일 계사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이사관(李思觀)이 경비(經費)가 부족하다 하여 관서(關西)의 쌀 1만석, 돈 2만 냥, 무명 1백 동(同)을 이획(移劃)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하순(下詢)한 후 그대로 따랐다.

 

4월 29일 갑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지영례(香祗迎禮)를 행하였다. 이어서 주원(廚院)에 나아가 사수(死囚) 6인을 작처(酌處)한 후 쟁집(爭執)하지 않았다 하여 여러 대신(臺臣)들을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주원 도제조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지난번 감선(減膳)하라는 명은 진실로 보리가 여물 때까지로 한정하였었는데, 이제 또 가을 농사가 염려스럽다고 하시니, 어찌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5월 5일까지 〈감선해서〉 그렇다."
하자, 김상철이 말하기를,
"50년 동안 재위하시면서 주량(舟梁)110)  의 큰 경사를 치렀고, 15년 동안 태평락(太平樂)을 누리셨으니, 신 등은 진실로 그 책임을 다해야 하겠고, 지금은 복선(復膳)하는 것이 급하며, 주원에서도 차례로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차례는 그렇다. 만약 32자를 받으면 나에게도 좋고 중궁(中宮)을 위해 진실로 하고 싶으나, 하늘에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정호인(鄭好仁)이, 특진관 채제공(蔡濟恭)이 융복(戎服) 차림으로 강에 참여하였다고 논척(論斥)하니,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호피(虎皮)를 내려 주었다. 당시에 이택진(李宅鎭)이 사명(使命)을 받들어 청(淸)나라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임금이 한인(漢人)과 청인(淸人)들이 서로 혼인[嫁娶]한다는 말을 듣고 수심에 잠겨 한참 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만약 하수(河水)를 다시 맑게 하려면,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