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19권, 영조 48년 1772년 10월

싸라리리 2025. 10. 16.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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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임술

천둥하고 번개가 치니, 임금이 10일 동안 감선(減膳)을 명하였다.

 

이한응(李漢膺)을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좌의정 김상철(金尙喆)·우의정 원인손(元仁孫)이 차자를 진달하여 면직을 빌고 간략하게 면계(勉戒)를 진언하였으며, 은대(銀臺)·옥당(玉堂)·백부(柏府)·미원(薇垣)의 신하 역시 상소하여 대략 군덕(君德)에 힘쓰기를 진달하였다.

 

10월 2일 계해

약방에서 합문(閤門)을 지키며 구전(口傳)으로 다섯 번 아뢰어 탕제를 가지고 입시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3일 갑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하교하기를,
"이제 대신(大臣)이 합문을 막고 앉아서 임금을 협박하니, 이것이 무슨 기강이며 무슨 국가의 체모인가? 모두 임금이 노쇠한 데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다."
하니, 시임·원임 대신과 약방 제조가 관을 벗고 합문 밖에서 서명(胥命)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이처럼 지나치게 하는가?"
하고는, 비로소 약방 및 시임·원임 대신의 입시를 허락하였다. 대신이 관을 벗고 계단 아래에 엎드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관을 쓰고 오라."
하였다. 영의정 김상복 등이 나아가 엎드려 말하기를,
"황송하여 감히 연중(筵中)에 들어가지 못하고, 탕제 때문에 감히 들어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탕제를 복용한다면 비록 천한 여대(輿儓)들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말하기를, ‘대신이 관을 벗었기 때문에 우리 전하께서 탕제를 드신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
하였다. 김상복이 탕제를 올리자, 임금이 받아서 엎질러 버리고 말하기를,
"만약 이것을 마시면 여대들이 반드시 말이 있을 것이다."
하고는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정원에 있는 삼상(三相)의 명소패(命召牌)를 가져 오게 하여 임금이 친히 삼상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받으라."
하니, 김상복이 말하기를,
"탕제를 올리지 못하였는데 신이 무슨 낯으로 이것을 받겠습니까?"
하매, 하교하기를,
"대관(大官)과 중재(重宰)는 혹시 이렇게 할 수 있더라도 양사(兩司)가 시끄럽게 하는 것이 직분인가? 이는 아첨하는 것이 아닌가? 옛날 계사년에는 여러 날 정청(庭請)236)  을 한 후에야 양사에서 비로소 청하였었고, 또한 두 사람에 불과하였었는데, 지금은 한 자리에 여섯 사람이고, 또한 경서(經書)를 이끌어 의리에 의거해야 할 유신(儒臣)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한 사람이 상소한 것에 말미암아서이다. 여러 대관(臺官)에게 아울러 삭판을 명한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하교를 써서 전하는 즈음에 착오가 막심하니 해당 승지를 파직하고 신익빈(申益彬)으로 대체하라."
하였다.

 

10월 4일 을축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니, 영의정 김상복 등이 다시 존호(尊號) 올리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세 차례나 받았는데, 이제 어찌 또 더하겠는가? 오늘 문을 열고 들어온 여러 신하들은 이미 곤란을 받고 있음을 알 것이다."
하였다.

 

10월 5일 병인

유언민(兪彦民)을 대사헌으로, 안겸제(安兼濟)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숭정전 동월대에 나아가 동향 대제(冬享大祭) 의식을 거행하고 시임·원임 대신의 입시를 명하였다. 영의정 김상복이 말하기를,
"신들의 소청은 참으로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이 모름지기 아뢰기를, 태실(太室) 제일실(第一室)이 받아야 된다고 한다면 내가 반드시 받을 것이나 후일의 일이 어렵게 된다. 3전(殿)에 시호를 더하는 예는 사체가 매우 중한 것인데 일마다 방해하고 있으니 오늘에야 경들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찌 수(壽)를 누린 것으로 홀로 존호를 받겠는가?"
하매, 좌의정 김상철이 말하기를,
"하교가 이에 이르심은 모두 신들의 죄입니다."
하고, 판부사 한익모 등은 ‘일이 매우 중하여 감히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겠다.’고 앙주하였다.

 

삼상(三相)의 면직을 명하고, 한익모를 영의정으로, 이창의를 좌의정으로, 이사관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조영석(趙榮祏)은 지난해 자정전(資政殿)에서 며칠 동안 함께 일했는데, 그 아들 조중첨(趙重瞻)이 근자에 피선되었다가 발거(拔去)되어 마음이 항상 애석하였다. 아직 참하(參下)에 있으니, 특명으로 승륙(陞六)시키라."
하였다.

 

10월 6일 정묘

영의정 한익모가 상소하여 사면하니, 비답하기를,
"부자(夫子)께서 말하기를, ‘부모의 나이를 알아두지 않으면 안되니, 하나는 기뻐서이고, 하나는 두려워서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성인의 가르침이다. 기쁘기 때문에 두렵고, 두렵기 때문에 기쁜 것이니, 이 두 가지 일은 털끝만큼도 치우친 것이 아니다. 비록 임금을 사랑해서라고 말하겠지만 크게 벌이고 칭상(稱觴)하는 것은 역시 일유(逸游)를 경계한 뜻이 아니다. 기쁨을 십분 억제하는 것 역시 어버이를 사랑하는 뜻이다. 한 잔의 술과 한 그릇의 찬(饌)도 오히려 이러한데, 하물며 여덟 자의 존호로 기쁨을 꾸미는 커다란 방비를 하여 조정에 있는 공경(公卿)이나 초야에 있는 사서(士庶)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렇게 한 연후에야 임금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하니 그 미혹됨이 어찌 이처럼 심한가? 이러하기 때문에 이에 그저께의 거조가 있었던 것인데, 아들된 자가 이런 일을 한다면 어찌 만세에만 비난을 받겠는가? 이는 두 번째 일이다. 내가 장차 무슨 얼굴로 후일에 오르내리는 영령을 뵙겠는가? 내가 이러한 까닭에 깊은 밤중에 개탄하는 것이다."
하였다.

 

10월 8일 기사

교리 이문원(李文源)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관록(館錄)을 행하는 날에 점수가 모자란 자가 있었는데, 추가로 권점하여 완료한 후에 권점의 일이 엄하지 못해 듣는 자들이 모두 놀라고 있습니다. 신 역시 관록에 든 사람이니, 실로 그대로 무릅쓰고 있기 어려운 단서가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걸어서 숭현문(崇賢門) 판위(板位)에 나아가 향지영례를 행하고 이어서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이문원을 장전(帳殿)으로 입시하라 명하였다. 이문원이 ‘먼저 입시한 후에 사은(謝恩)한 예가 없다.’고 하니, 하교하여 개양문(開陽門) 밖에서 석고 대명(席藁待命)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홍문 관리를 계방(桂坊) 앞에 매달 것이다. 재촉하여 사은하게 하라. 만약 즉시 들어오지 않으면 마땅히 고상(故相)을 삭판(削版)할 것이다."
하니, 이문원이 비로소 들어와 숙배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점수가 부족한 자는 누구이며, 권점한 후에 추가로 점수를 준 자는 누구인가?"
하니, 이문원이 대답하기를,
"이갑(李𡊠)이 잊어버리고 한광근(韓光近)의 이름 아래에 권점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제학 정상순(鄭尙淳)이 추가로 들어와 가점(加點)하였습니다. 남이 권점하지 않은 것을 함부로 대신 권점한 것은 고례(古例)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누구에게서 들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김하재(金夏材)에게서 들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한광근을 권점한 가운데에서 빼고 정상순은 아울러 파직하라."
하였다. 이문원은 상소에서 그의 당숙(堂叔)이 참여하지 않은 것을 논한 까닭에 북청부(北靑府)에 원찬(遠竄)하고, 김하재는 안산군(安山郡)에 정배하였다.

 

김재순(金載順)을 승지로 삼았다.

 

10월 9일 경오

다시 이담(李潭)을 이조 판서로, 박도원(朴道源)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임금이 숭현문에 나아가 향지영례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세도(世道)가 떨어지고 기강이 쇠하여 엄칙하는 것은 사세가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서민을 삼는 것이 예전에 어찌 많이 있었겠으며, 강교(江郊)로 방축(放逐)함 역시 어찌 예전에 있었겠는가? 서민으로 삼고 강교로 방축한 자들을 한결같이 아울러 탕척하라."
하였는데, 이때 임금의 격노함으로 인해서 시종(侍從)과 유생(儒生)이 이 죄를 많이 범했기 때문이었다.

 

10월 10일 신미

전 오위 장(五衛將) 곽성제(郭聖濟)를 동중추(同中樞)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대개 곽성제의 종조(從祖)인 사부(師傅) 곽시징(郭始徵)과 감반(甘盤)237)  의 구의(舊誼)가 있었고, 곽성제의 나이 또한 79세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10월 11일 임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니, 대신(臺臣)이 입시하였다. 대사간 안겸제(安兼濟)가 송명흠(宋明欽)에 대한 전계(前啓)를 정지하면서 아뢰기를,
"추율(追律)하는 것은 이미 법령이 있으며, 근일의 성교(聖敎)로 보건대 성상의 뜻이 굳게 정제(定制)를 지키고자 하시니, 죽을 죄인을 특사하는 임금의 덕과 후손에게 남겨 주려는 모책을 신이 실로 흠앙합니다. 신이 이미 집법관(執法官)으로 재직하면서 법외(法外)의 일로 쟁집(爭執)하는 것은 성상의 뜻을 우러러 본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송명흠에게 역률을 추시하는 일을 신이 과감히 정지하겠습니다."
하였다.

 

영의정 한익모가 경기 감사의 장계(狀啓)로써 2천여 결(結)을 더 급재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10월 12일 계유

대사간 안겸제가 밖에 있는 삼사의 관원을 아울러 파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의(公議)를 볼 수 있으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0월 13일 갑술

원의손(元義孫)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대사간 안겸제가 아뢰기를,
"호남의 수신(帥臣) 윤희동(尹僖東)은 보수를 한다고 이름하여 명목을 헛되게 떠벌려 막비(幕裨)를 포상하였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랐는데, 그 후에 유임시키기를 특명하였다.

 

임금이 사관을 보내 봉조하 홍봉한(洪鳳漢)에게 유시를 전하고 인하여 함께 오도록 하였다.

 

영릉(英陵)의 정자각(丁字閣)을 개수(改修)한 것으로써 예조 판서 심각(沈殼), 호조 판서 조운규(趙雲逵)에게 각기 숙마(熟馬)를 사급하고, 본릉의 참봉 두 사람에게는 아울러 승륙(陞六)을 명하였다.

 

10월 14일 을해

임금이 숭정전에 나아가 향지영례를 행하였다. 용호장(龍虎將) 원중회(元重會)에게 명하여 갑주(甲胄)를 갖추어 입번(入番)한 금군(禁軍)을 거느리고 원앙대(鴛鴦隊)로 늘어서게 하여 군례(軍禮)를 행하게 하였다. 인하여 각종의 병기(兵器)와 군장(軍裝)을 점검하였다.

 

이최중(李最中)·한광회(韓廣會)·서명응(徐命膺)·정상순(鄭尙淳)을 서용하라 명하고, 이문원(李文源)은 하교하여 탕척하라 특명하였다.

 

이주진(李周鎭)·조관빈(趙觀彬)·김취로(金取魯)·홍용조(洪龍祚)·홍서(洪曙) 등의 관작을 회복하라 명하였는데, 임금이 그 여러 사람에게 다른 뜻이 없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10월 15일 병자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저 한필수(韓必壽)·윤면승(尹勉升)에 대해서는 아까워할 것이 없지만, 한 사람은 도헌(都憲)이었고, 한 사람은 간원[薇垣]의 장이었다. 지난해 장전(帳殿)에서 고(故) 재신(宰臣) 이광덕(李匡德)에 대해 묻자, 그때 대신이 말하기를 ‘문형(文衡)을 지냈다.’라고 한 것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 한필수와 윤면승을 그 곳에 찬배함으로 인해서 이제 율(律)을 청하는 것은 바로 당습(黨習)이니, 윤성시(尹聖時)와 이진유(李眞儒)가 소청한 율이다. 이렇게 하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누가 기꺼이 양사가 되려 하겠는가? 하교에 의하여 빨리 정지하라. 만년에 원보(元輔)로 기대한 자가 어찌 이런가? 임금을 등지고 선인(先人)을 배반하였으니,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또 무신년·을해년에 있었던 무리들에게 비할 바는 아니니, 마땅히 참작하여야 한다. 이제 만약 모두 방송(放送)하면 이목(耳目)의 신하가 간하는 것이 마땅하나 그렇다고 율보다 지나치게 하겠는가? 모든 일에는 비록 차례가 있다고는 하나 이미 남해(南海)로 명한 뒤에는 마땅히 가율(加律)을 청해야 했는데, 단지 정의(旌義)·남해(南海)로써 전계(傳啓)238)  할 바탕을 삼았다가 그후에야 깨달아서 억지로 의율하기를 청하니, 남해로 청하는 것인가? 정의로 청하는 것인가? 깨달은 후에 ‘의(依)’ 자(字)를 ‘안(按)’ 자로 고쳤으니, 어찌 한결같이 구차스러운가? 이렇게 한 후에는 호랑이를 탄 것과 같아서 내리기가 어려운데, 대론(大論)이라고 일컬으며 매양 아뢰는가? 이는 한번 웃음거리가 됨을 깨닫지 못하고 먼저 이런 뜻을 유시하여 이목의 신하로 하여금 모두 듣고서 알도록 한 것이니, 이제 마땅히 건명문(建明門)에서 조참(朝參)하면서 그 거조를 보겠다. 나 역시 고집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건명문에 나아가니, 대사헌 원의손, 대사간 안겸제 등이 한필수·윤면승·김치인 등의 일을 정계(停啓)하였다. 임금이 뭇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내리는 비는 당심(黨心)을 씻어내는 비라고 말할 수 있겠다."

 

10월 16일 정축

이성규(李聖圭)를 대사헌으로, 김상정(金相定)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86세 된 사람과 79세 된 사람을 불러 들였다. 쌍적(雙笛)으로 그들의 출입을 인도하고 각기 표리(表裏)239)  와 미육(米肉)을 하사하면서 말하기를,
"특별히 한 고조(漢高祖)의 풍패(豊沛)와 광무제(光武帝)의 남돈(南頓)의 뜻240)  으로 너희들을 소견한 것이다."
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이 구저(舊邸)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주강하여 《대학》을 강하고, 또 척호장(陟岵章)을 강론하고는 추모하는 어제(御製)를 불러 쓰게 하였다. 승지 임희교(任希敎)를 공조 참판에 제수하고, 이동현(李東顯)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는데, 구상(具庠)의 일을 논척한 것 때문이었다.

 

역관(譯官) 무리들을 불러 들여 각기 몽청한학(蒙淸漢學)241)  의 강(講)을 암송하라고 명하였다.

 

10월 17일 무인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영의정 한익모가 전라 감사의 분등(分等) 장문(狀聞)한 것을 가지고 아뢰기를,
"재결(災結)을 더 청한 것이 7천 9백여 결에 이르니, 그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1만 결(結)에 준해서 주어야 한다."
하였다.

 

10월 18일 기묘

임금이 덕유당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고, 인하여 주강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임금이 경기의 농사가 가장 흉작이 되었기 때문에 한 도의 결전(結錢)을 금년에는 특별히 반을 감하고, 완경민(完慶民)의 결전은 특별히 감하고, 서북의 선무포(選武布) 역시 감하였다. 또한 제주의 생복(生鰒)을 내국(內局)에 봉진(封進)하는 것은 한겨울과 한여름에는 정봉(停捧)하고, 기사(耆社)242)  에 올리는 생선은 특별히 그 절반을 감하고, 동계(凍鷄) 역시 특별히 감하라 하였다.

 

영의정 한익모 등이 다시 수하(受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한다면 내가 마땅히 북한산(北漢山)으로 가겠다."
하였다. 우의정 이사관이 말하기를,
"율(律) 이외에 죄를 입은 자에 대해 일찍이 쟁집하여 아뢰라는 하교가 계셨습니다. 지금 이후에는 경외(京外)에 신칙하여 대소를 막론하고 반드시 법률에 따라서 처리하게 하십시오. 비록 한 때의 하교가 계시더라도 유사(有司)의 신하가 그때그때 따라서 쟁집해 아뢰는 것이 좋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가 참으로 옳으니, 신칙해야 한다."
하였다.

 

10월 20일 신사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명년을 생각하니, 내 마음이 배나 더하다."
하매, 영의정 한익모가 말하기를,
"다음 달이면 양(陽) 하나가 처음으로 생겨243)   신들의 마음 역시 배나 더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음 달이면 굳이 청하리라는 것은 알지만, 내가 받고자 한다면 이미 하였을 것이다."
하니, 우의정 이사관이 말하기를,
"송 효종(宋孝宗) 때 동짓달에 성수(聖壽)가 70세인 것으로써 경사를 치렀습니다."
하였다.

 

10월 21일 임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기로소(耆老所) 당상 한익모(韓翼謨) 등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대학연의(大學衍義)》와 《서경(書經)》의 요전(堯典) 두 대문(大文)을 외고, 기로소 아홉 사람으로 하여금 차례로 읽게 하였다. 읽기를 마치고는 음식을 내려 극진히 즐거워하였고, 임금이 어제(御製)를 내려 여러 신하로 하여금 화답하여 올리게 하니, 왕세손 역시 지어 올렸다. 판부사 이익정(李益炡)이 소매에서 차자를 꺼내 힘껏 칭경하고 진하(陳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요전(堯典)에 ‘진실로 공손하고 겸양하라.’ 하였기에 내가 마땅히 사양하고 받지 않으려는 것이다."
하였다. 기로 당상 조영진(趙榮進)이 말하기를,
"하천(下賤) 역시 말하기를, ‘위로 80세 군부(君父)를 모시면서 존호를 청하지 않는다.’라고 비난하여 배척하는 논의까지 왕왕 있습니다. 또 이미 계사년244)  에 이미 행하였는데 이제 또 계사년에 행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선대의 뜻과 사업을 계술(繼述)하는 것 가운데서도 가장 계술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은 간절하다. 신하로서 만약 청하지 않는다면 무신년·을해년의 무리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내 뜻은 굳게 정하여졌다."
하였다.

 

10월 22일 계미

이휘지(李徽之)를 대사헌으로, 이미(李瀰)를 부제학으로 삼았는데, 좌의정 이창의(李昌誼)는 허부(許副)245)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니, 예방 승지(禮房承旨)가 입시하였다. 삼공 구경(三公九卿)과 삼사(三司)의 제신을 모이라 명하니, 왕세손 역시 시좌하였다. 하교하기를,
"〈인조(仁祖)께서〉 해주(海州)에서 탄강(誕降)하시어 마침내 만년의 기업(基業)을 이루었고 성조(聖祖)께서 중간에서 계승하여 영원히 천억 년까지 드리워져 지금에 이르렀으니, 이것을 누가 내려 준 것인가? 만약 계술한다고 말한다면 숭릉(崇陵)246)  을 먼저 해야 하는데, 벌써 2대(代)가 지나 장차 조천(祧遷)247)  하게 되었다. 영릉(寧陵)248)  은 이미 휘호(徽號)를 올렸으니, 지금에 이렇게 하는 것 역시 계술하는 뜻이다. 제10실(室)에 휘호를 더 올려 인하여 세실(世室)로 받드는 것이 뭇 신하의 뜻에는 어떠한가? 옛날 하후 승(夏侯勝)이 한 무제(漢武帝)의 묘호(廟號)에 대해 이론을 제기하여 왈가 왈부(曰可曰否)하였으니,249)   각기 숨기지 말라."
하니, 뭇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제 하교를 듣고 비로소 성상의 뜻을 깨달았으니, 어찌 다른 의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도승지 심수(沈鏽)는 말하기를,
"이번의 성교는 너무 늦었다고 말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그렇다."
하고, 특별히 한 자급을 더하였다. 왕세손이 나와 꿇어앉아 말하기를,
"전하께서 숭릉에 존호를 올리시면 경사가 종팽(宗祊)에 넘치게 되니, 소신이 감히 전하께 존호를 올려 적은 정성이나마 펴고자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렇게 한 후에야 내가 마땅히 받겠다."
하매, 왕세손이 앞으로 나와 엎드려서 말하기를,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이처럼 호숭(呼嵩)합니다."
하고, 인하여 천세(千歲)를 부르니, 뭇 신하들이 모두 세 번 천세를 불렀다.

 

양사가 이인(李䄄)250)  에 대한 전계(前啓)를 정지하였다.

 

영의정 한익모를 파직하고, 김상복을 영의정에 제배하였다. 하교하기를,
"마땅히 창덕궁에 나아가 존호 올리는 것을 아뢰어야지 어찌 감히 부모를 속이겠는가?"
하매, 영의정 한익모가 말하기를,
"존호를 올리기 전에 반교(頒敎)하는 것은 전에 없던 예(例)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에 없던 막중한 경사에 어찌 전례를 말하는가? 지금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니, 특별히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라."
하고, 김상복을 영의정에 제배하였다.

 

임금이 창덕궁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니, 왕세손 역시 어가를 뒤따랐다. 임금이 배례를 행하고 엎드려서 아뢴 다음 뭇 신하에게 명하여 예문관(藝文館)에서 존호를 의논하여 들이게 하였다. 임금이 친히 받아서 개함(開函)하고 인하여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시 함에 넣어 휘호를 예조 문밖에서 배송(陪送)하고 예당(禮堂)에게 명하여 봉안하게 하였다. 인하여 육상궁에 나아가니, 시임·원임의 관각(館閣) 당상이 의논하여 대전(大殿)의 존호 및 중궁전의 존호를 올리니, 특별히 다시 의논하여 들이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환궁한 후에 경현당에 나아가니, 왕세손이 치사(致詞)로 행례하고, 백관이 치사로 행례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산호(山呼)하였다. 산호를 마치니, 임금이 한 구절의 시(詩)를 내려 백관으로 하여금 화답하여 올리게 하였다.

 

김상철을 좌의정에 제배하였다.

 

10월 23일 갑신

유성(流星)이 정성(井星)에서 나와 동방(東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적색이었다.

 

판부사 이창의(李昌誼)가 졸하였다. 이창의의 자(字)는 성방(聖方)으로, 완산인(完山人)이다. 그 할아버지 고 판서 이언강(李彦綱)이 선조(先朝) 때 특별한 지우(知遇)를 받았기 때문에 임금이 이로 인해서 탁용(擢用)하여 양도(兩道)의 감사와 병조·이조의 판서, 참찬(參贊)을 지내고 우상(右相)을 제배하였는데, 모두 중비(中批)251)  였다. 사람됨이 비루하고 잗달아서 인망(人望)이 없었으나, 마침 임금의 격노할 때를 당해서 갑자기 우상에 제배되자 사람들이 모두 의아하게 여겼는데, 병으로 졸하니 69세였다. 그의 아내 윤씨(尹氏)가 음식을 먹지 않고 자진(自盡)하여 한 무덤에 장사하였으니, 열부인(烈夫人)이라 할 수 있었다. 임금이 정문(旌門)을 명하고 제문(祭文)을 친히 지어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임금이 덕유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소학》을 강하고, 각사(各司)의 구임(久任) 낭청(郞廳)을 소견하였다. 좌의정 김상철이 말하기를,
"금년은 또 입학하신 해이니,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막중한 일은 역시 때가 있는 것이다. 경신년에도 이에 대해 겨를이 없었으니, 이 하례는 나의 사사로운 하례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를 받지만 세수(歲首)는 마땅히 받지 않겠다."
하였다. 김상철이 말하기를,
"어제 이후에는 성상께 불안한 마음이 없으실 것이며 하늘에 계신 영령께도 위안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은 각사에 남아 있는 모든 사람이 전보다 조금 나은 듯하다."
하였다.

 

10월 24일 을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소학》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숭릉(崇陵)께서 심양(瀋陽)에서 탄강하신 것이 어느 때였는가? 자성(慈聖)께서 항상 하교하시기를,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은 오직 너에게 달려 있다.’라고 하셨는데, 오늘날 계승한 것은 오직 숭릉께서 내려 주신 것이다. 이렇게 한 후에 더욱 슬프고 사모함을 깨닫겠다. 자성께서 계시면 어찌 기뻐하지 않으셨겠는가?"
하였다.

 

10월 25일 병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 밖에 나아가 향지영례를 행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인하여 주강을 행하여 척호장(陟岵章)을 강하였다. 대제학 이복원(李福源)이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상호(上號)에 따른 각실(各室)의 고유제문(告由祭文)을 지어 올리니, 임금이 칭찬하기를,
"말이 자세히 다 갖추어졌으니 바로 문형(文衡)의 직임에 합당하다."
하고, 특별히 호피(虎皮)를 하사하였다.

 

10월 27일 무자

임금이 덕유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연의》를 강하였다.

 

호조 낭청에게 명하여 절사(節使)의 방물(方物)을 가지고 들어오게 하여 친히 살피고 봉해 싸면서 말하기를,
"사대(事大)하는 정성을 이제 논할 것이 없으나 사대하는 예(禮)는 폐지해서는 안되니, 이 역시 존양(存羊)252)  의 뜻이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날의 여러 신하들은 모두 세록(世祿)의 신하이니, 마땅히 모두 탕척해야 한다. 봉조하(奉朝賀) 부자는 모두 진참(進參)하게 하라. 옛날 우리 자성(慈聖)께서 입궐하신 지 12년 만에 휘호를 받으셨는데, 이제 내전(內殿)이 주량(舟梁)한 지 14년 만에 휘호를 받으니 어찌 우연이겠는가? 더군다나 이미 사과(謝過)하였으니, 김귀주(金龜柱)에게 특별히 직첩(職牒)을 주어 서용해 군직(軍職)에 부쳐 진참하게 하라."
하였다.

 

10월 28일 기축

장령 신이복(愼爾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고(故) 군수(郡守) 신(臣) 신초(辛礎)·승지(承旨) 신 하계선(河繼先)·사인(士人) 조방(趙垹)은 위대한 공렬(功烈)이 실로 충익공(忠翼公) 신 곽재우(郭再祐)와 더불어 같은 공으로 같은 지위에 있어야 하는데도, 유독 증시(贈諡)·증직(贈職)의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신은 실로 서운하게 여깁니다. 신초는 김해(金海)가 포위되어 궤멸될 때에 왕산(旺山)에다 책(柵)을 설치하고 말에 뛰어 올라 도강(渡江)하여 계책을 세워 적을 포박했으니 비록 옛날 명장(名將)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했습니다. 당일의 사적(事蹟)이 방책(方冊)에 밝게 실려 있어 신이 감히 낱낱이 번거롭게 진달하지 못하나 대저 그 충분 의열(忠奮毅烈)은 아직도 교령(嶠嶺) 밖에 늠름하게 남아 있습니다. 영우(嶺右)가 그때에 보존된 것은 실로 이 사람의 공이니, 증휼(贈恤)하는 은전을 마땅히 곽재우와 더불어 고르게 대우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한 자급도 이 사람에게 미치지 않은 것을 누군들 애석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하계선은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의 증손(曾孫)으로 문장과 덕업(德業)이 한 세대에 추중(推重)된 자로서 마침 왜적(倭敵)이 창궐(猖獗)할 때를 당하여 김시민(金時敏)·장윤(張潤)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진양(晉陽)을 지켰는데, 성이 함락되기에 미쳐서 같은 때에 순국(殉國)하였습니다. 그 정충 대절(精忠大節)은 이미 조종조에서 정포(旌褒)하고 사당(祠黨)을 지어 제향(祭享)하기까지 하고 있으니, 증시와 증직에 있어서 마땅히 차등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김시민에게는 특별히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을, 장윤에게는 병조 판서를 추증하였으면서 하계선만이 유독 이 예에서 누락되었으니 실로 영남의 사민(士民)들이 지금까지 애석해 하는 바입니다. 조방 역시 왜적의 난을 당하여 곽재우와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고 적봉(賊鋒)을 저지하여 승리를 많이 거두었습니다. 난리가 끝난 후 향당(鄕黨)에서 그의 충의(忠義)에 감복해 장차 조정에 아뢰어 포상하려 했는데, 조방이 정서(呈書)를 빼앗아 중지시켰기 때문에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나 사적이 방책에 실려 있습니다. 인하여 죽었는데 포증(褒贈)하는 전례가 없으면 이 역시 크게 충(忠)을 권장함에 있어서 흠이 되는 한 부분입니다. 나주 목사(羅州牧使) 서유상(徐有常)은 일찍이 이천(利川)에 재직하면서 포흠(逋欠)의 숫자가 많아서 대언(臺言)이 준엄하게 일어나 도신(道臣)이 이미 견책을 받아 파직되었으면 서유상의 죄범(罪犯) 역시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니, 그의 스스로 처신하는 도리에 있어서 이미 큰 사면(赦免)을 겪었다고 하여 편안하게 부임할 수는 없습니다. 신은 서유상에게 파출(罷黜)하는 법을 결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답하기를,
"청한 바 세 사람은 세 갑자(甲子)가 돌아간 후에 어찌 경솔히 앞질러 포증(褒贈)할 수 있겠는가? 또 이러한 일은 일찍이 금령(禁令)이 있었다. 서유상의 일은 어찌 아끼겠는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옥책(玉冊)은 영중추부사 김양택(金陽澤)이 지어 올리고, 명성 왕비(明聖王妃)의 옥책은 봉조하 남유용(南有容)이 지어 올리고, 대전(大殿)의 옥책은 행 사직(行司直) 서명응(徐命膺)이 지어 올리고, 정성 왕비(貞聖王妃)의 옥책은 지중추(知中樞) 황경원(黃景源)이 지어 올리고, 중궁전(中宮殿) 옥책은 대제학 이복원(李福源)이 지어 올렸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글을 모두 잘 지었다."
하였다.

 

10월 29일 경인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을 강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상철(金尙喆)이 관동(關東)의 경공(京貢) 삼가(蔘價)를 대동(大同)의 원래 정한 값에 의거하여 귀할 때의 값에 따라 지급하라는 일을 앙주하니, 임금이 따랐다.

 

10월 30일 신묘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지영례를 행하였다.

 

정언 이복휘(李福徽)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길주 목사(吉州牧使) 신대겸(申大謙)은 함부로 임소(任所)를 떠나 멋대로 놀이를 해 법을 무시하고 교만 방종하였는데도 도신이 일찍이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신대겸은 나처(拿處)하고, 전후의 도신인 송문재(宋文載)와 송형중(宋瑩中)은 마땅히 견삭(譴削)하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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