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경신
임금이 경운궁(慶運宮)으로 나아갔다. 당초에 선조 대왕이 용만(龍灣)034) 에서 환궁하여 경운궁으로 나아갔는데 그 해가 계사년035) 이었고, 오늘이 또 목릉(穆陵)의 기신(忌辰)이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추모하기 위하여 왕세손(王世孫)과 더불어 경운궁에 나아가 즉조당(卽阼堂)에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에게 따라 들어오도록 명하여 예를 행하게 하였다. 환궁(還宮)한 뒤에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갔는데, 시임·원임 대신이 입시(入侍)하였다. 경희궁(慶熙宮)이 있는 이문(里門) 안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불러 모두에게 쌀을 내려주었다.
임금이 탕제(湯劑)를 들지 않았다. 이에 대신(大臣)과 승지가 관을 벗고 대명(待命)하니, 임금이 그를 위해 한 첩(貼)을 들었다.
2월 2일 신유
정창성(鄭昌聖)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약방 도제조 한익모(韓翼謨)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경운궁(慶運宮)으로 나아갈 때에 약원에서 탕제 들기를 청하니, 임금이 탕제를 땅에 엎질러 버리고 하교하기를,
"오늘날의 여러 신하들은 모두가 풍도(馮道)036) 이다. 무슨 마음으로 탕제를 권하느냐?"
하니, 한익모가 황공하여 물러나와 금오문(金吾門)에서 대명하니 임금이 대명하지 말라고 하였었다. 이날도 약원에서 문후(問候)하니 임금이 삼제조(三提調)가 비원(備員)이 된 뒤에 입시하라고 답하였다. 한익모가 어제의 하교는 신하로써 감히 들을 수 없는 바가 있다고 말하고 계속 대명하자, 하교하기를,
"오늘날 조선에는 양반이 이미 판연(判然)한데, 임금이 어떻게 임금 노릇을 하겠는가? 신하와 자식은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충효(忠孝)는 하나이다. 그런데 임금이 장차 고개를 숙이고 사과해야 하겠는가? 마땅히 이목(耳目)037) 에 맡겨서 군강(君綱)을 보존하도록 하겠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구저(舊邸)로 나가서 오늘은 감선(減膳)을 하겠다. 약원 제조의 수효를 모두 줄이고, 의관(醫官)도 축출(逐出)하라."
하였다. 승지와 대신·양사(兩司)·옥당(玉堂)이 합문(閤門)에 이르러 청대하자, 임금이 편전에서 이들을 소견하였는데, 삼사(三司)에서 아뢰기를,
"자신이 보호의 소임을 맡고 있어 상약(甞藥)의 의무가 매우 소중한데도 이런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다만 집요한 사견(私見)만 고수하여 격뇌(激惱)하신 일이 있게 하였으니, 분의(分義)로 헤아려보아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영의정 한익모를 삭탈 관작하여 성문 밖으로 내보내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에 감선(減膳)한다는 전교는 거두도록 명하였다.
승지 강유(姜游)가 아뢰기를,
"대신(臺臣)에게 내린 비답(批答)중에서 ‘한당 쇠군(漢唐衰君)’의 네 글자는 사관(史官)이 주독(奏讀)하면 성명(成命)이 되는 것이므로 빨리 거두어 들이심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막중한 하교를 읽지 못하게 하려 하니, 이 또한 방자하다."
하고, 영남(嶺南)으로 귀양보내라 명하였다.
다시 김상복(金相福)을 제배(除拜)하여 영의정으로 삼고, 조종현(趙宗鉉)을 승지로, 이중호(李重祜)를 대사성으로, 김귀주(金龜柱)를 우윤으로 삼았다.
2월 3일 임술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여러 종신(宗臣)을 소견(召見)하고 음식을 내렸으니, 대체로 모년(暮年)에 종친과 돈독히 하려는 뜻이었다.
경기 어사 임득호(林得浩)가 들어와서 진정(賑政)을 삼가지 않은 일로 통진 부사(通津府使) 강백능(姜百能)과 장단 부사(長湍府使) 구세온(具世溫)을 탄핵하여 아뢰었다. 그리고 포창(褒彰)하도록 아뢴 사람으로는 부평 부사(富平府使) 윤심위(尹心緯)가 첫째이고 남양 부사(南陽府使) 이방일(李邦一)이 그 다음이었다.
삼사(三司)에서 한익모(韓翼謨)에게 부처(付處)의 율로 시행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비록 따르지는 않았으나 그 명령에 순종하는 태도만은 가상하게 여겼다.
2월 4일 계해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호조 판서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관서(關西)의 세미(稅米)를 돈으로 환산한 원액(元額) 3만 냥(兩) 중에서 2만 3천 냥은 앞서 상납하였으나, 남은 돈 7천 냥은 끝내 챙겨서 바치지 아니하니 일을 맡은 계사(計士) 이영간(李英幹)에게는 일률(一律)038) 을 베풀어 국법을 알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세 차례 엄형을 가한 뒤에 흑산도(黑山島)에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채제공의 주달(奏達)로 인하여 관서의 세수미(稅收米) 1만 석 이외에 향고전(餉庫錢) 2만 냥과 쌀 2백 석을 호조에 떼어주도록 명하자, 우의정 원인손(元仁孫)이 진휼청(賑恤廳)의 세미 대전(稅米代錢) 3만 냥을 호조에 옮겨주고 호조에서 떼어받은 쌀 1만 석을 진휼청으로 하여금 구관(句管)하게 하여 해마다 모조(耗條)를 취하도록 하는 것이 편리하고 좋겠다고 말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월 6일 을축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고 입시한 한림(翰林)과 주서(注書)에게는 모두 승륙(陞六)을 명하였으니, 이는 대개 특별한 은혜에서 나온 일이며, 정후겸(鄭厚謙)의 형 정일겸(鄭日謙)도 들어와 참여하였다.
홍낙인(洪樂仁)을 도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귀주(金龜柱)·홍낙인(洪樂仁)이 모두 즉시 은명(恩命)에 숙사(肅謝)한 연후에야 대성 광운(大成廣運)의 칭호(稱號)에 내가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하고, 재촉하여 패초(牌招)하게 하였는데, 홍낙인은 어가(御駕) 앞에서 사은(謝恩)하였으나 김귀주는 대명(待命)한다고 핑계대고 들어와서 숙배하지 아니하니, 회가(回駕)할 때에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금부(禁府)에서 추문(推問)하는 예(例)로서 잡아들이고,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인상여(藺相如)와 염파(廉頗)039) 는 공(公)을 앞세우고 개인적인 원수[私讎]는 뒤로 돌렸다. 너는 그 일이 타결된 뒤에 지금도 대명(待命)하고 있으니, 어찌된 일이냐?"
하니, 김귀주가 말하기를,
"염파와 인상여는 사사로운 일일 뿐이지만, 신이 말한 홍봉한(洪鳳漢)의 일은 전하를 위해서이니, 공사(公私)가 아주 다릅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 공과 사가 〈판이(判異) 하다는〉 말을 불쾌하게 여겼으나 기어코 조정(調停)하고자 억지로 은명에 숙사하게 하였다.
한익모(韓翼謨)를 부처(付處)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삼사(三司)의 청에 따른 것이었으나 곧 도로 거두어 들였다.
2월 7일 병인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禮)를 행하였다.
신회(申晦)·이사관(李思觀)을 서용(敍用)하라고 명하고, 이은(李溵)을 석방하라고 명하였으며, 서명응(徐命膺)도 서용하였다.
임금이 판부사(判府事) 김양택(金陽澤)에게 말하기를,
"김귀주(金龜柱)가 황송하여 감히 숙사(肅謝)하지 못한다고 말하였다면, 어찌 좋지 않았겠느냐? 그런데 공과 사로써 대답한 것은 어찌된 일이냐? 두 사람은 모두 척신(戚臣)으로서 이와 같이 행동하니, 말단에는 장차 어느 지경에까지 이를런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2월 8일 정묘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고, 무덕문(武德門)에 나아가 사직단(社稷壇)을 바라보고 부복(俯伏)하였다가, 이어 광명전(光明殿)으로 나아갔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도승지 홍낙인(洪樂仁)을 체개(遞改)하라고 명하였으니 정형(情形)이 불안한 때문이었으며, 민홍렬(閔弘烈)로서 대신하게 하였다.
2월 9일 무진
도승지 민홍렬을 체개하고 김기대(金器大)로서 대신 하라고 명하였다.
유학(幼學) 정집(鄭㙫)이 다시 상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집에 대해 지난번에 조용(調用)하라고 한 하교는 시행하지 말고 기장현(機張縣)에 정배하되, 동참한 그 두 사람도 10년을 기한으로 정거(停擧)하라."
하고는 곧 성주(星州)로 옮겨 정배하도록 명하였다.
오재순(吳載純)을 승지로 삼았다.
2월 10일 기사
지평 이복휘(李福徽)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들으니, 수년 이래로 만부(灣府)040) 의 창고 저축이 남김없이 텅비었는데도 허위 기록이 거의 수만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신의 생각으로는 빨리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엄히 조사하여 장문(狀聞)하게 하고, 당시의 부윤(府尹)에게는 특별히 장오(贓汚)의 율로 시행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답하기를,
"용만(龍灣)041) 의 일은 이미 하교하였으니, 그 조사하여 오기를 기다려서 마땅히 엄하게 처분하겠다."
하였다.
헌납 이세석(李世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작년의 경과(慶科) 뒤에 시골 선비는 한 사람도 참방(參榜)하지 못하였다 하여 심지어 그 후 정시(庭試)를 설행하는 일까지 있었으니, 경외(京外)를 동등하게 보시는 성상의 뜻에 선비된 자라면 그 누가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정작 방목(榜目)이 나왔을 때에 입격한 자는 7인이었는데 그중에서 수석을 차지한 자만 단지 회시(會試)에 나가게 되고 꼴찌를 차지한 자는 되려 전시(殿試)에 나가게 되었으며, 7인 중에서 2인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원래부터 시골에 살던 사람인데 모두 빼버림을 당하여 온 세상이 억울한다고 일컫고 있습니다. 대신(大臣)이 이 일로 아뢰어 빼버리라는 하교를 물시(勿施)하라는 분부를 받기는 하였으나 한 사람만이 유독 누락되었습니다. 원래부터 시골에 살고 있었던 것도 같고 빼버림을 당한 것도 같은데, 대신의 주달(奏達)에서 혹은 거론되고 혹은 거론되지 않아 은명(恩命)이 내리는 것도 혹은 받게 되고 혹은 빠지게 되었으니, 나라의 형정(刑政)이 아마도 불공평하다는 원망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선조(先朝) 때와 전하 때에 이미 행해진 전례로만 말하더라도 고(故) 도사(都事) 신 최수경(崔守慶)과 고 판서 신 윤급(尹汲)이 모두 입격하였다가 빼버림을 당한 후에 대신(臺臣)이 진언하여 즉시 윤허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때에 과연 두 사람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는데 그 완급(緩急)하게 하였던 것은 그 의의가 또한 깊다 하겠다. 대저 과장(科場)이란 엄중한 것인데 대신(大臣)은 비록 청할 수 있다하더라도 법을 맡은 신하가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때에 윤급을 특별히 그대로 두었더니 대신(臺臣)이 오히려 간쟁(諫諍)하였다. 그 뒤에 비답으로 인하여 중신(重臣)이 아뢴 바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대신(臺臣)이 지난날의 대신(臺臣)만 못해서 그런단 말이냐? 이번의 과장(科場)에 엄칙하였을 때에 만일 하교가 없었더라면 설사 협잡한 자가 있었다 하더라도 아마 그를 두호(斗護)하였을 것이다. 이 글은 내주고 이세석에게 특별히 서용하지 않는 율(律)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시사(試射)하였는데, 육상궁(毓祥宮)·어의궁(於義宮)·저경궁(儲慶宮)·창의궁(彰義宮)의 궁임(宮任)의 수복(守僕)들과 황단(皇壇)의 수복에게도 한결같이 시사(試射)하였다.
2월 11일 경오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부수찬 이갑(李𡊠)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부제학 정상순(鄭尙淳)의 소본(疏本)을 보건대, 그의 말한 바가 또한 사실과 다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신이 아무리 바빠서 착오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가 이미 대신 권점(圈點)하면서 동그라미를 치고 또 치고 한 것이 어찌 신이 시켜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이제와서는 권점을 빠뜨린 실수나 두번 권점을 친 비난이 모두 신 한 사람에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대저 국외(局外)의 사람들이 들을 때 혹 오해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한 자리에 있었던 처지에서 애매 모호하게 말한 것은 또한 무슨 이유입니까? 신은 참으로 의아하게 여깁니다. 신은 이미 화려한 포장(褒奬)을 그릇되이 받았는데 남들이 또한 실속없는 사람을 혹 충실한 것으로 여긴다면, 신의 마음에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살펴보지도 않았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동월대(東月臺)에 나아가 공시 당상(貢市堂上)에게 명하여 공계원(貢契員)과 시전 상인(市廛商人)을 인솔하고 앞으로 나오게 하고서 임금이 폐막(弊瘼)에 대하여 하문하였다. 여러 대신(臺臣)이 대각(臺閣)에 나아가지 않은 까닭에 의금부에서 추문(推問)하는 예대로 건명문(建明門)에 대령하도록 명하고 임금이 직접 나아가 신문(訊問)하였다. 대사헌 정창성(鄭昌聖)과 대사간 정상인(鄭象仁)을 잡아들여 위엄을 베풀고 엄히 물으니 모두 병으로 공회(公會)에 나가지 못하였다고 공사(供辭)를 바쳤다. 이에 정창성은 경성부(鏡城府)에 정배하고 정상인은 차등이 있다 하여 고신(告身)을 빼앗는 율로 시행하였으며, 여타 대신(臺臣)도 잡아들여 임금이 모두에게 처분을 내렸으나 그러고도 오히려 마음이 풀리지 않아 탕제를 엎지르고 대내(大內)로 돌아왔는데, 대신과 승지, 약방과 옥당이 면대를 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2월 13일 임신
이중호(李重祜)를 이조 참판으로, 임희교(任希敎)를 대사헌으로, 박기채(朴起采)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니, 시임·원임 대신과 양사(兩司)가 입시하였다. 임금이 여러 대신에게 이르기를,
"오늘날의 조선은 곧 양반의 조선이다. 합사(合辭)라고 이름하고 단지 한 사람만 입참(入參)해도 되는 것이냐?"
하였다.
사헌부 【대사헌 임희교(任希敎) 등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합사가 바야흐로 한창이어서 날마다 대각에 나아가던 끝에 아무 까닭없이 나오지 않았고, 건명문(建明門)에 임하시어 직접 신문하실 때에도 그 우러러 청한 바가 지극히 모호하였으니, 정배에 그칠 일이 아닙니다. 또 장관(長官)도 마찬가지인데 대사헌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청컨대, 정창성(鄭昌聖)·정상인(鄭象仁)을 모두 외딴섬에 안치(安置)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로 말미암아 임금의 마음이 조금 풀렸다. 또 박기채가 외방에 있다고 칭하므로 멀리 귀양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월 14일 계유
조덕성(趙德成)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원의손(元義孫)을 전라 감사로 삼았다.
2월 15일 갑술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으로 나아갔다. 임금이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탄일(誕日)이라고 하여 효장묘(孝章廟)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는데 왕세손도 수가(隨駕)하였다.
임금이 의소묘(懿昭墓)042) 에 나아갔다.
왕세손이 상소하여 진연(進宴)을 청하였다. 연초부터 여러 대신이 진연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굳게 거절하였고, 또 화길 옹주(和吉翁主)의 장례(葬禮) 전이라서 상하가 서로 버티어 온 지 거의 두 달 가까이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왕세손이 직접 글을 지어 궁관(宮官)에게 쓰라고 명하였는데, 그 소(疏)에 이르기를,
"삼가 신은 구구하게 간절한 소청이 있어 매양 한번 아뢰려고 하였으나 지금까지 주저해 온 것은 감히 늑장을 부린 것이 아니고 때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날만 가니 신의 마음이 울적하여 끝내 스스로 억제할 수 없습니다. 이에 감히 번거롭고 외람됨을 무릅쓰고 저의 미충(微衷)을 말씀드리오니, 오직 성명(聖明)께서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상께서 보산(寶算)이 팔순(八旬)에 꽉 차시어 정월에 하의(賀儀)를 가졌는데, 전국의 모든 신민이 너나없이 뛰고 춤을 추니, 신의 마음의 즐겁고 송축스러움은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또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는 5기(五紀)를 재위하시면서 일심으로 근려(勤勵)하시어 치도를 이루고 제도를 정하여 교화가 두루 미쳤으니, 이는 실로 한(漢)·당(唐) 시대에도 없었던 바이고 삼대(三代) 때에도 듣기 어려운 일이었으며, 바로 요·순(堯舜)과도 짝이 될 만한 훌륭한 업적이었습니다. 거기에다 황천(皇天)과 조종(祖宗)께서 우리 성상을 애호하여 도와주고 음으로 화복을 내리시어 이렇듯 대덕(大德)은 반드시 수(壽)를 누리실 수 있게 되었으니, 한번의 정하(庭賀)로 어찌 조금이나마 작은 정성을 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나라의 경사는 천년에나 한번 얻을 수 있을까 말까 한 경사스러운 기회인 만큼 잔치를 베풀고 잔을 올리는 것이 온나라의 일치된 정원(情願)입니다. 그런데 성상께서는 지나치게 겸양하시므로 유사(有司)가 능히 진청(陳請)을 하지도 못하고 당연히 거행해야 할 전례(典禮)를 아직도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마음이 민망스럽고 답답함을 실로 말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삼가 상고하건대, 《시경(詩經)》의 행위장(行葦章)에 이르기를, ‘자리 펴고 좌석 베푸니, 혹은 노래하고 혹은 북을 친다.[肆筵設席 或歌或咢]’라고 하였고, 천보장(天保章)에는, ‘산과 같이 구릉과 같이, 만수 무강하소서.[如岡如陵 萬壽無彊]’라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연락(燕樂)하면서 송축한 말들입니다. 대개 경사가 있으면 반드시 잔치를 베풀었던 것은 현군(賢君)·명왕(明王)이 일찍이 행하여 온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성상께서는 삼대(三代)043) 보다도 나으신 덕을 가지시고 겸하여 팔순의 보주(寶籌)를 누리시어 태운(泰運)의 계제와 장수(長壽)의 경지를 형용할 수 없으니, 행위(行葦)의 잔치와 천보(天保)의 송축을 어떻게 헛되이 지연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신의 애일지성(愛日之誠)044) 을 생각하면 어느 해인들 그렇지 않았겠습니까마는 금년에 더욱 절실하고, 성상께 하례드리는 정성이 어느 때인들 간절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이때에 더욱 간절하니, 북두(北斗)에 술을 부어 남산(南山)같은 수(壽)를 비는 것은 인정과 천리(天理)로 헤아려 보아도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혹 성상께서 조금이라도 살피신 바가 계시다면, 생각건대 신의 말이 끝나기 전에 즉시 굽어 윤허하심이 계실 것입니다. 또 지금 큰 천서(天瑞)는 은연중 두루 미치고, 수성(壽星)은 골고루 비치어 위로는 조정에서부터 아래로는 여항(閭巷)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집집마다 황발(黃髮)045) 이요 태배(鮐背)046) 이니, 강구(康衢)에서 격양가(擊壤歌)를 부르는 백성들 또한 이토록 성(盛)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자(箕子)가 말한 구주(九疇)의 복을 누릴 수 있는 교화가 여기에서 더욱 분명하게 빛이 난다 하겠습니다. ‘내집 늙은이를 공경하여 남의 늙은이에게까지 미친다.[老吾老 以及人之老]’라는 훈계는 《맹자(孟子)》에 실려 있고, 노인을 잘 공양(供養)하는 정사는 주 문왕(周文王)이 행한 바이며, 양로연(養老宴)은 또한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주 문왕과 맹자의 뜻을 본받고 국조(國朝)의 전례(典禮)를 행하시어 법연(法宴) 후에 다시 날을 받아 이들 늙은이들의 잔치를 벌여 우리의 태평을 함께 누리게 함으로써 밝은 세대의 성대한 일로 꾸미소서. 신은 크게 바라고 간절하게 기원하는 마음이 그지없어 삼가 재배하고 상소하여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너의 글을 보니, 너의 마음씀이 가상하구나. 아! 네 할아비의 마음은 저 하늘에 두고 다짐할 수 있다. 지난 달에 하례를 받았는데, 다음 달에 진연(進宴)을 받는다면, 아! 팔순의 모년(暮年)에 어떻게 뜻을 지킨다고 하겠느냐? 그러나 네 정성을 거절하기는 어려워서 곧 소청을 윤허(允許)한다."
하였다. 이때에 소가 올라가니 임금이 그 성효(誠孝)를 가상히 여겨 대신과 예조 당상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일제히 앙청하자 임금이 특별히 소청에 따르겠다는 소비(疏批)를 내렸다. 이에 왕세손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배복(拜伏)하여 천세를 외쳤다.
임금이 잠룡지(潛龍池)에 행행(行幸)하였다. 잠룡지는 어물전(魚物廛)의 이문(里門) 안에 있는데 인조[仁廟]가 어렸을 때에 놀던 곳이기 때문에 이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임금이 잠룡지의 정자에 나아가 구윤명(具允明)에게 지난날의 유적(遺跡)에 대해 물으니, 구윤명이 효종의 어필(御筆)이 그의 집에 많이 있다고 말하자, 임금이 즉시 소여(小輿)를 타고 그의 집으로 가려 하였다. 도승지 이계(李溎)가 아뢰기를,
"사저(私邸)에 왕림(枉臨)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어필을 보고 싶다."
하고 이어 태화정(太華亭)에 나아가 어필을 봉람(奉覽)한 뒤에 집에 있는 여러 구씨(具氏) 모두를 불러 만나보고 상을 내리거나 혹은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2월 16일 을해
한익모(韓翼謨)를 서용하고, 김상익(金相翊)을 방면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기전(畿甸)의 진휼하는 정사가 바야흐로 한창이라 하여 보리 추수 후에 진연(進宴)을 행하려 하니, 왕세손(王世孫)이 또 진소하기를,
"삼가 신이 방금 내리신 전교를 본즉, 보리 추수 후에 진연의 택일을 하라신 명이 계셨으니, 신은 삼가 이에 놀랍고 당혹스러우며 억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전하께서는 임어(臨御)하신 지 5기(五紀)에 다스림은 대도(大道)와 합치하고 보산(寶算)은 팔순(八旬)이 되어 복기(福基)가 무강(無彊)하니 이는 참으로 삼대(三代) 이후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우리 신민은 너나없이 고무(鼓舞)·용동(聳動)하면서 손모아 우리 전하를 송축하고 있는데, 하물며 소자의 즐겁고 기쁜 정성은 더욱 마땅히 어떻다 하겠습니까? 엊그제 구저(舊邸)에 동가(動駕)하셨을 때에 신이 마침 글을 올리자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한 목소리로 뒤를 이어 아뢰어 비로소 윤허를 받자와 길일도 가려지고 의절(儀節)을 곧 거행하게 되었으니, 신은 손꼽아 기다리면서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곧 어찌 하시려고 이렇듯 물려 정하라는 하교를 내리십니까? 신이 비록 몽매하오나 그래도 우리 성상의 추모하는 효성이 백왕(百王) 보다 뛰어나 항상 쉴사이 없이 힘쓰시고도 미치지 못한 것처럼 하심을 알고 신은 참으로 한없이 흠앙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성인(聖人)이 윤월(閏月)을 둔 것은 다만 세공(歲功)을 고르게 하려고 한 것뿐이고, 예(禮)에서도 윤월은 계산하지 않는데, 전하께서 오늘날 인용하여 비유하려 하심은 어찌 과중(過中)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삼가 생각건대, 윤월은 아직도 4, 50일이 남았으니 신은 그것도 멀다고 여기는데, 더구나 맥추(麥秋)이겠습니까? 충정(衷情)이 갈수록 걱정이 되고 답답하여 직접 짧은 소를 써서 외람되이 자애로 감싸주시는 성상께 아뢰오니, 삼가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특별히 조금 전에 내리신 전교를 거두시어 소자의 지극한 정성에 부응하여 주시면 천만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신은 격절(激切)하고 우러러 바람이 그지 없어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네가 손수 쓴 글을 살펴보니, 그 정성이 몹시 가상하다. 대저 내가 마지못해 진연을 허락한 것은 마침 그때에 너의 글이 먼저 올라왔는데 대신과 예조 당상 및 여러 신하들이 그 뒤를 따라서 소리를 일제히 하여 청하는지라, 이는 너무 사양할 일이 아닌 것 같아 나의 굳은 마음을 돌려서 억지로 그 청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이미 허락한 바에 빠르고 늦음이 무슨 상관이기에 네가 이토록 하여 할아비의 답답한 마음을 더하게 한단 말이냐? 이번의 네 글은 마치 갑진년047) 에 내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에 자교(慈敎)에 의하여 우리 황형(皇兄)에게 진장(陳章)한 것과 같다 하겠다. 아! 50년 간에 전후가 서로 부합하는구나. 우리 황형은 자교를 받들어 억지로 나의 말에 따랐고, 지금 너의 할아비 또한 지난날 자성(慈聖)의 뜻을 본받아 눈물을 머금고 억지로 따르지만 스스로 그 마음을 돌아보면 나의 마음은 더욱 부끄러움이 간절하다. 이 계제에 너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부자(夫子)048) 도 말하기를, ‘예(禮)라 예(禮)라 말하나 옥백(玉帛)을 말하는 것이겠느냐? 악(樂)이라 악(樂)이라 말하나 종고(鍾鼓)를 말하는 것이겠느냐?’라고 하였는데, 이는 의문(儀文)은 말단이고 정성이 근본이라는 뜻이다. 아! 너의 할아비가 밤낮으로 간직하고 있는 한 마음은 추모(追慕)와 백성을 위하는 것이다. 네가 후일에 이 마음을 가지고 유념하여 힘쓴다면 어찌 오늘날 다섯 순배(巡盃)의 밀다(蜜茶)보다 낫지 않겠느냐? 너는 모름지기 힘쓸지어다."
하고, 임금이 특별히 윤3월 초1일로 날을 받으라고 허락하였다.
2월 19일 무인
오재순(吳載純)을 승지로 삼았다.
2월 21일 경진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였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증광 초시(增廣初試)에 입격(入格)한 거자(擧子)들을 소견(召見)하였다.
2월 23일 임오
임금이 봉조하 원경하(元景夏)의 문집을 가져다가 보고 직접 서문을 지어서 내렸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서울에 올라온 팔도의 시골 백성을 소견(召見)하여 농사의 풍흉을 묻고, 이어 억석와(憶昔窩)에서 재숙(齋宿)하였다.
2월 24일 계미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으로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재물을 지급하여 고(故) 판서 김진규(金鎭圭)의 문집 발간을 돕게 하고 친히 서문을 지었다.
2월 25일 갑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소학(小學)》을 강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2월 26일 을유
유성(流星)이 익성(翼星) 아래에서 나와 동쪽으로 들어갔는데, 색깔은 흰 색이었다.
조재득(趙載得)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으로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봉조하(奉朝賀) 홍봉한(洪鳳漢)을 소견(召見)하였다. 이때에 홍봉한이 강교(江郊)에 있었는데 양로연(養老宴)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임금이 위유(慰諭)하여 불러 온 것이다.
2월 27일 병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였다.
2월 28일 정해
이득종(李得宗)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시임·원임 대신을 소견(召見)하였다.
2월 29일 무자
증광 초시(增廣初試)의 문과 일소(一所)의 방(榜)이 나왔는데,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1등한 사람을 소견하였다.
응제(應製)에서 뽑힌 이경양(李敬養) 등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한익모(韓翼謨)를 특별히 방면(放免)하라고 명하였다.
전라 감사가 80세 이상인 사람 3천여 인(人)과, 1백 세 된 사람 20여 인을 장문(狀聞)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성수(聖壽) 80세가 되어 추은(推恩)하고자 제도(諸道)에 80세 이상인 사람을 초록(抄錄)하여 아뢰도록 명하였는데, 시골 백성 가운데 나이를 속이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제도에서 보고한 것이 대략 1천 명의 수효에 밑돌지는 않았고, 호남이 가장 많았다. 군신(群臣)이 수역(壽域)의 치화(治化)를 성대하게 칭송하니 임금이 기뻐하였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의 아버지가 누락되었다 하여 신문고(申聞鼓)를 치고 호소하니, 임금이 그 고을의 수재(守宰)에게 죄를 주고 다시 제도에 추계(追啓)하게 하였는데, 호서(湖西)의 도백 윤동절(尹東晳)과 북관(北關)의 도백 송형중(宋塋中)은 추계를 잘 살피지 못한 죄로 특별히 파직하였고 두 도(道)의 수령도 죄를 받은 자가 많았다.
2월 30일 기축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그때에 5일에 한번 소대(召對)하는 규례가 비록 폐지되지는 않았으나 묘당의 모유(謨猷)라는 것은 자질구레한 절차에 불과하였고 연석의 소대(召對)는 단지 한담일 뿐이었다.
문과 이소(二所)의 초시(初試) 방목이 나왔는데, 임금이 1등에 뽑힌 사람을 소견(召見)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120권, 영조 49년 1773년 윤3월 (0) | 2025.10.16 |
|---|---|
| 영조실록120권, 영조 49년 1773년 3월 (0) | 2025.10.16 |
| 영조실록120권, 영조 49년 1773년 1월 (0) | 2025.10.16 |
| 영조실록119권, 영조 48년 1772년 10월 (0) | 2025.10.16 |
| 영조실록118권, 영조 48년 1772년 6월 (0) | 2025.10.16 |